인권오름 제 275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 학교는 죽었다 -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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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은숙

지난 11월 10일은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한 하루였다. 첫 조카가 수능을 치른 날이었고 김진숙 씨가 309일 만에 크레인에서 내려온 날이었다. 내가 인권운동이란 걸 시작하던 무렵 갓난애였던 조카가 다 큰 어른이 되는 동안 세상은 얼마만큼 좋아졌나, 그 세월 동안 난 뭘 하고 살았나,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서 추위와 더위를 보내고 또 추위를 맞은 300여일 동안 또 난 무엇을 했나, 나는 하루 종일 시험 치는 기분이 들었다.

학창시절 시험을 치를 때 문제지를 받아드는 순간은 긴장감의 절정이었다. 책상에 채 다 펼치지도 못할 만큼 큰 시험지를 받아들고 볼펜을 깨물던 느낌이 생생하다. 하지만 내가 이날 받아든 시험문제는 숱하게 치러왔던 그런 종류의 시험이 아니었다.

첫 번째 시험지에서 김진숙 씨는 ‘연대란 무엇인가’는 굵직한 물음을 던졌다. 오랫동안 연대가 뭐냐고 물어오면 대답할 줄 몰라 우물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SKY(서울대, 고대, 연대)에 속하는 대학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 다반사이거나 ‘연대기를 말하는 건가요?’라는 물음을 되돌려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오답자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김진숙의 309일은 연대란 어떤 사람들 사이에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고 답할 수 있는 공동학습의 기간이었다. 연대가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하지 않아도 ‘아하 그거’라고 가슴 한편을 스치는 무엇을 느꼈다. 계속 연대를 공부하고 실천할 동기를 갖게 된 이들이 적지 않으리란 것이 난생 처음 시험을 치르면서 든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날의 또 다른 시험지는 ‘대학입시거부선언’이었다. 수능시험이 치러지던 같은 시간에 18명의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이 “남의 꿈을 밟고 올라가는 전쟁”과 “우리의 삶에 가격을 매기는 상품화의 과정”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루저”나 “낙오자”라 손가락질 할 사회에 대해 “오늘의 불행을 저축해도 내일의 행복이 오진 않을 것 같고 불안과 경쟁만이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이런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강요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그저 대학을 안가겠다는 선택이 아니”라 “지금의 입시가, 대학이, 교육이, 그리고 사회가 잘못되었음을,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라 했고, “일단 그래도 대학은 가고 보라는 유예의 주문에 맞서, 지금 여기서 바꾸자”고 말했다. “더 이상 교육에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혀만 차지 말고, 지금부터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며 자신들의 행동을 “손을 내미는 몸짓”이라 표현했다. “학력과 학벌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에 갇혀있기에는 우리들의 배움이 너무 소중하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선언한다. 여기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노라고.” 그리고 “자유로운 배움을 위해 … 행동하겠다, 살아가겠다”가 선언의 마침표였다.

학벌사회를 거부한다고 기껏해야 경력을 쓸 때 출신학교를 쓰지 않는 정도밖에 못하던 나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걱정도 됐다. 이 험한 학벌 세상을 계속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학교를 너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 원치 않는 이유로 학교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과 입시거부를 선언한 사람들은 뭐가 같고 다른 거지? 이런저런 이유로 ‘탈학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청소년과 입시를 거부할 배짱을 가진 청소년은 뭐가 다르지? 아무리 정규교육에 문제가 많아도 배울 게 있는 것인데 배움의 시기에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지인들과 이런 문제들로 장시간 토론도 벌어졌다.

김진숙 씨의 책 <소금꽃나무>에는 ‘학번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한 김진숙 씨에게는 학번이 없다. 가출하면서 반드시 이루리라 다짐했던 대학생이 돼보자는 꿈을 갓 입사한 한진중공업에서 밝히며 ‘공부 땜에 잔업을 못하겠다’고 했다가 비웃음 섞인 벼락을 맞은 얘기였다. 그 글을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린 건 김진숙 씨의 트위터 아이디 ‘JINSUK_85’를 봤을 때 85호 크레인이 아니라 85학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습관 때문이었다. 85학번이 아닌 85호 크레인에서 버텨낸 그녀의 힘은 “학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빛나는 자리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훨씬 많고 “그리고 그 학번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는 믿음이었다. “학번 없는 사람들이 자랑스러워지고부터였을 게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생기고부터” 그녀는 대학에 못간 잔인했던 청춘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글의 끝에 “세상을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투쟁. 그 투쟁에서 당신들은 나의 소중한 동지들이다”라고 그녀는 사랑을 고백한다. 이 고백에서의 ‘당신’은 학번이 없는 사람 있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호명이다.

85호 크레인을 둘러싼 연대, 희망버스나 날라리 외부세력 등에 대한 얘기가 넘쳤던 한 해였다. 그 얘기들 중에 기억에 남는 건 연대란 ‘우리들’이란 틀을 해체하는 것,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는 거였다. ‘왜 외부세력이 와서 간섭하냐’는 물음을 던지는 ‘우리들’에 대하여 ‘저희는 날라리 외부세력인데요’란 이름으로 화답하는 경쾌함이 이미 ‘우리’의 틀 안과 밖의 구분을 해체했다는 것이었다. 연대란 비슷한 사람들끼리, ‘우리’ 문제로 뭉친 ‘우리들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은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같이 할 수 있는 거란 지적이었다.

조카의 수능, 김진숙 씨의 크레인과 연대, 대학입시거부선언이 얽히고설킨 날, 던져진 시험문제에 참고하고 싶어서 나는 책장에서 오래 묵은 책을 꺼내 들었다. 지금은 절판되었고 누렇게 뜨다 못해 제본까지 너덜너덜해진 책이다. <학교는 죽었다>라는 과격한 제목의 책 내용은 김진숙 씨나 입시거부선언자들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아마 던지는 질문이 같아서일 것이다. 저자인 에버레트 라이머는 미국의 교육학자인데, 저명한 철학자인 이반 일리히와 15년간 나눈 토론과 대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토론에 기초해 이반 일리히도 책을 썼는데 그건 <학교 없는 사회>다.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은 “교육을 원한다”고 말한다. 자신들을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보는 “사회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던진 질문을 공유한다면 학교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학번이 있든 없든, 같은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동료일 수 있다는 것을 묵은 책을 다시 보며 생각했다. 학교든 대학이든 정규교육이든 그 무엇이든 어디에 걸쳐 있든 간에 우리 삶 자체가 교육이고 배움인 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동료라는 걸 말이다.

학교는 죽었다 (에버레트 라이머, 김석원 옮김, 한마당, 1979)학교를 왜 거부하는가

… 전 세계 어린이들의 대부분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 … 그렇지만 아이들은 누구나 반드시 무엇인가를 학교로부터 배우게 된다. 학교에 입학조차 못해본 아이들은 인생의 좋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교를 일찍이 중퇴해버린 아이들은 그들 자신이 인생의 좋은 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학교를 좀 더 다니다가 중퇴한 아이들은 이 체제가 타도될 수는 있으나 그들의 힘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들 모두가 다 학교란 한 세상 편히 살기 위한 첩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식들만은 그들보다 더 높은 교육을 시켜 잘 살게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들의 자식들은 자기들보다 학교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 소망은 결국 현 세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좌절감만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 너무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 … 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 및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지만 실제로 교육받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보잘 것 없는 것이고, 실제로 취업관계에서 그리고 실수입면에서도 형편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교육비용이 학생 수나 국민소득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 소비수준에 한계가 없고, 학위가 사람의 지위를 결정해 주는 이 세상에서는 학교교육의 끝이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 진학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닥친다. … 학교는 소년, 소녀들을 매우 철저한 과정을 거쳐서 길들이는 -즉, 사회적으로 거세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학교에 다니려면 학교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즉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규범에 순종하여 따르게 만든다. … 학생들이 학교에서 우수하다고 평가되려면 부모의 재산과 권력 외에도, 규정을 어기고서라도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학교에서 순종을 가르치면서 또 규정위반을 가르치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규정위반이 일종의 순종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선생 개개인은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도 하지만, 학교 조직은 학생들이 얻는 점수만을 문제로 삼는다. 따라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강요하는 규정은 순종해야 하고, 별로 강요하지 않는 것은 어겨도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 규정에 잘 순종하는 학생들은 그 사회에서 생산 및 소비 생활을 요구받는 대로 수행하게 된다. 학교 규정을 어기며 성공하는 것을 배운 학생들은 이 사회를 요리조리 이용해먹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 학교는, 기술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계에서 권력을 갖는 사람이 이 지배관계를 통하여 이득을 얻게 보장해주며, 더구나 그들이 이 지배관계를 거부할 줄 모르도록 무능력화시켜 버린다. 결국 학교 운영 과정에서, 상부의 운영자에서부터 하부의 추종자까지 모두가 끝없는 경쟁 -처음에는 규정에 따르다가 결국에는 규정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데까지 이르는 경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 규정이 옳고 그르고 혹은 그 경쟁이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닌가는 제쳐두고 말이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기술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종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서, 그 사상을 전파하고 구체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유도하고,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를 부여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테크놀로지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테크놀로지에 적응하고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에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테크놀로지의 노예 혹은 테크놀로지라는 이름에 의하여 다른 것들의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유인을 만들기 위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노예로 전락하기는 쉽지만 자유인 혹은 주인이 되는 것은 어렵다. 테크놀로지는 환경의 오염에 의하여, 현대전쟁을 통하여, 혹은 인구폭발 등에 의하여 인류를 죽여버릴 수 있다. 그리고 끝없는 소비경쟁을 통하여, 경찰국가에 의하여 혹은 결국에는 무너지고야 말 생산양식을 통하여 인류를 노예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틀림없이 빠져나갈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은 없다. … 교육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기회(life chance; 사회계층적 이동, 즉 하층에서 상층으로의 상향이동의 수단으로서의 학교교육을 의미한다)에 있어서 학교 교육의 일률적인 독점을 배격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학교는 무엇을 하는가

… 학교의 선별기능에 의해 승자가 탄생하지만 그와 동시에 패자도 또한 생겨나며 학교의 선별은 인생의 선별로 연장되어 인생의 패배자를 만들어 내게 된다. … 학문 자체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기보다는 경쟁에 이기는 것 자체를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일부분은 항상 그 대열에서 탈락하기 마련이다. … 더 큰 해악은 학생들을 선별해서 카스트 제도와도 같은 특권적 위계질서의 틀 속에 끼워 넣는다는 점에 있다. … 오늘날 학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은 그 사회구조와 부합되는 실력뿐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특징은 기술문명의 생산물의 경쟁적 소비에 있다고 하겠으며, 이것은 다시 제도에 의하여 통제된다. 한편 제도는 현재의 지배적인 특권적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현재의 특권층이 새로운 ‘실력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특권적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한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생산물을 통제한다.

학교란 무엇인가

… 여기서 학교를 <일정한 연령의 집단이, 단계적인 교육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가 감독하는 교실에 출석할 것이 요구되는 제도>라고 정의하자. … 선생들도 학교가 생기면서 그 전과는 반대의 위치에 서도록 바뀌었다. 선생의 진정한 역할은, 질문을 받고서 보다 깊은 질문을 다시 던져올 수 있도록 대답해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이러한 역할이 반대로 되었다. 즉 선생이 질문해야 하고, 탐구욕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정설을 제시해야 한다. … 학교가 직업을 알선하고 정치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역할을 갖게 해주는 독점적인 제도로서 성장한 것은 표준화된 단계적 교육과정에 의해서 가능했다. … 학교는 사람과 지식을 조작 가능한 대상물을 다루듯이 취급한다 -마치 현대기술문명 세계 모든 것을 취급하듯이. 물론 모든 것이 조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작과정에서 대상물의 다른 측면을 짓밟고, 바라지 않았던 부산물이 생기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인간을 조작대상으로 삼을 때 그 희생은 특히 크다. 그리고 인간은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에 있어서 조작되지 않고 보존되어야 할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교육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들은 벌써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험은 그 방법이 성공할 것이라는 고집에 있다. 교육과정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조작 처리되어 배출되는 인간은 운명을 지배하는 능력 -인간을 다른 나머지 물질로부터 구분시켜주는 고유한 특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교육의 혁명적 역할

사회의 전반적인 변혁 없이는 학교 교육을 대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대안이 마련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의 변화로 교육에서의 변혁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도 소용없는 짓이다. … 교육적인 변화는 그 변화과정에서 다른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다. 진정한 교육은 사회의 근본적인 힘이 된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는, 비록 소수만을 교육시킨다 하더라도, 교육받은 사람에 의해서 붕괴되고야 말 것이다. 여기서는 학교 교육 이상의 다른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사회를 받아들이도록 학교에서 교육되지만, 그들이 배우는 것은 사회를 창조하거나 혹은 다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도움이 없다면 영웅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정의로운 세계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 모두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세계에서 존재해야 할 삶을 지금부터 살기 시작하는 일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이전에도 어디에서 들은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모든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나마 그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의 진실성이나 정당성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 의로운 사회는 일단 획득되고 그 다음에 향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새롭게 획득되어져야 하며, 따라서 획득되어지고 있는 동안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권오름 제 275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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