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4월 “얼굴색이 다르고 언어와 종교가 다를지라도 우리는 한국 노동자들과 똑같은 노동자들”이라며 이주노동자노동조합(아래 이주노조)이 창립됐다. 그 후 채 한 달이 못돼 이주노조의 아노와르 위원장은 표적 연행되어 11개월이 넘도록 구금돼 있어야 했고 노조설립신고서는 반려됐다. 그러나 단속과 추방, 뿌리 깊은 인권유린에 맞선 이주노동자들의 싸움은 계속됐다. 그 속에서 위원장 직무대행을 맡아 가쁘게 달려왔던 샤킬 이주노조 (전) 수석 부위원장을 만나보았다. 지난 6월 11일 총회에서 새로 집행부가 구성되었기에 한동안은 아픈 몸을 추스르겠다는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바빠 보였다. >


이주노동자가 보는 이주노동자

이주노동자가 인간으로서나 노동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따라서 인권을 보호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큰 문제는 단속이 워낙 심한 것입니다. 단속과정에서 연행되고 강제 추방되고 그 과정에서 단속에 반대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잃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2월과 4월에도 2층, 3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잃었고…. 건강한 몸으로 돈 벌러 왔지만 단속을 피하다가 단속반원에게 맞아 장애를 안거나 시신으로 돌아가거나…. 단속으로 모든 문제들이 벌어집니다.

일주일 정도 일을 하면서 인간이니까 휴식도 필요하고 가족이나 친구들이 필요하고, 토요일 일요일 외출 나가서 이들도 봐야하고 그런데, 토.일요일도 단속이 심해서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것도 인권침해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몸이 아플 수 있고 병원도 가야 하는데 또 단속 때문에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작은 병들도 키우다가 돌아가신 이주노동자들도 많습니다.
일을 하면서 사람을, 사람인데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쉬면서 자기 몸에 맞게 일을 해야 하는데 정부의 단속정책 때문에 업주들도 그걸 이용하면서 열 몇 시간 일을 시키면서 이주노동자들 피로가 많이 쌓이면서 과로로 돌아가신 경우도 많습니다.


남의 문제 아니잖아요?

저는 한국 와서 처음에 프레스 했어요. 공중전화 만드는 프레스…. 사실 저는 14년 됐지만 14년 전하고 지금하고 인식이 조금씩 많이 나아지는 편이고 젊은 세대들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40대나 50대나 아직까지는 이주노동자에 대해 좋은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우리 이주노동자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88올림픽 치른 다음부터 조금씩 한국에 들어오고 오랫동안 살았잖아요? 이 사람 들어오면 저 사람 나가고 이런 식으로….

앞으로도 내가 느끼는 건 이주노동자들이 계속 이걸 할 것 같아요. 인력이 부족하니까. 이주노동자 문제는 사실상 남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사회에서 살고 노동시장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이주노동자 문제는 남의 문제라고 생각 안했으면 좋겠고, 사람들이 ‘이 문제는 우리 문제다’라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한 집에서 이방에는 한국분들 살고 앞방에는 이주노동자 살고, 같은 공장들에서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도 일하고 한국분도 일하고 식사 같은 것도 같은 식당에 가서 같이 식사를 하고, 그거 남의 문제 아니잖아요? 인권문제나 노동문제나 자기 동네에서 이주노동자 살면 동네문제이기 때문에 함께 고민하고 함께 풀어나갔으면…. 이주노동자도 많은 도움이 되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이란 나라의 이미지가 나아지고 좋아지고. 아쉬운 것은 시민분들은 아직까지는 그런 생각 안하는 것 같고 오히려 정부에서 선전하는 그런 것 믿어가면서 한국인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뺏기고 있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 아직까지는 많아요.


고단했던 걸음걸음

저도 사실은 오자마자 운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노동운동 하러 오는 이주노동자는 거의 없을 것 같아요. 자기 나라에서 뭘 해야 하는데 할 곳이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일을 하고 재정문제도 해결하고…. 저도 마찬가지로 그런 목표로 한국에 오게 됐고, 처음에는 일을 하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함께 하는 한국인들도 이주노동자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어요. 언어소통도 안되고 음식도 안 맞고 문화도 다르고 여러 문제들 때문에 쉽게 이해를 하지 않았고, 업주도 마찬가지로 어떻게 돼든 간에 저임금에 장시간 일을 시키는 목표로 일을 시키는데…. 저도 처음에 들어와서 8시부터 9시까지 일을 했고 연장 일을 하게 되면 연장수당을 받아야 하는데 연장수당도 없고 다른 수당도 없고 일을 하면서 많은 억압이나 무시당하고 그런 부분이 많았어요. 지금 있으면서 이주노동자들에게 많은 연락을 받았어요. 다치고 치료도 못 받고 보상도 안 해주고, 치료도 간단히 하고 출국시키고, 임금도 달라고 해도 떼이고 이런 모습이 너무 힘들었어요.

94년도에 산업연수생 제도 시작하면서 연수생으로 들어왔잖아요. 연수로 들어와서 노동일 하니까 노동자잖아요. 산업재해를 당해도 산재로 인정을 안 해주니까 농성 시작하고…. 또 한 번 96년도에 ‘우리도 인간이다’, ‘우리를 때리지 말라’ 한 적 있어요. 거기에도 가고 외국인노동자대책협의회 꾸려가면서 난생처음…. 그땐 모든 걸 걸어놓고 활동한 건 아니고 집회나 거리선전에나 결합하면서 98년인가 99년엔가 인식 시작되고 활동하고…. 노동조합은 그때는 없었어요. 2001년도에 가서 평등노조 이주지부가 생기고, 2003년도에 명동성당에서 단속 때문에 농성 시작되고, 그 이후부터 2005년 4월 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이 생기고 창립총회를 하면서 수석부위원장 맡아서 하게 되고….


기본을 찾자는 운동인데…

국내노동자들도 노동운동하면 빨갱이다 그런 얘기하는데, 이주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남의 나라에 돈 벌러 왔는데 무슨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그런 생각 갖고 있을 수 있지만 한국노동자들의 운동하고 이주노동자 운동하고 다른 점 있어요. 원래 있어야 하는 부분을 우리가 받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노동일을 하기 때문에 노동자로 인정해 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어요. 그동안 단속을 계속해 왔잖아요? 그런데 성과가 없잖아요? 미등록 노동자로 계속 남아있고, 단속으로 이주노동자 없어지지 않았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합법화 해 달라, 노동일을 하니까 노동자로 인정해 달라, 우리가 일을 하니까 임금도 달라, 우리가 산업재해를 당할 때는 산재로 인정해 달라, 노동자니까 노동3권을 보장해 달라, 원래 이것은 기본으로 있어야 하는 부분인데 해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노동운동을 하고 있지만 한국노동자하고 이주노동자 운동 차이점 이런 부분 있고…. 그런데 시민들이 아직 몰라요. 우리가 왜 투쟁하고 노동운동하는지 모르는 분 많아요. 그래서 오해를 받을 수 있지만 많이 알려지면 많은 관심을 가지리라 믿어요. 이주노동자 운동에 대해서.

이주노동자 운동하고 국내 다른 운동들하고 자주 결합이 되죠. 예를 들어서 비정규직 운동. 이주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비정규직 중에서 또 비정규직 노동자죠. 비정규직 운동에도 이주노동자들이 결합하고…. 현장에 있는 많은 투쟁일정에 그런 사업장도 많아요. 임금도 안주고 부당해고 하고 그런 부분, 한국노동자들도 많아서 그런 문제에 연대투쟁하고 국제연대도 하고….


가지도 못 하고 오지도 못 하고…

아노와르 위원장은 347일 만에 (구금됐다가) 나왔죠, 347일 만에…. 한 달 넘게 신경정신과 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고 지금은 통원치료 받고 있고, 정신과와 정형외과…. 어깨도 다치고 해서 치료하면서 나머지 시간 이주노동자를 위해 활동하고 있어요. 6월 11일 총회하면서 다시 위원장 역할 맡고 있어요. 건강이 많이 안 좋죠.

기쁜 일은 없어요. 거의 없어요. 계속 투쟁하면서 사실 단속을 중단하라, 산업연수생 제도는 사실 노예 제도잖아요. 이름만 산업연수생이지, 사업장 이동 자유 없고 해지를 해달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런 부분 얘기 안 되고…. 그래도 아노와르 위원장은 연행되고 347일 만에 나오고…. 사실 노동자는 하나지만 정부가 이주노동자를 여러 갈래로 갈라놨어요. 정부 차원에서 중국 동포나 다른 국가들 구분하고…. 한 가지는 이주노동자들이 4만 명 정도 결혼을 하면서 아이들이 나왔잖아요. 그 아이들이 아직까지 학교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부분 많아요. 부모들이 미등록이라 불안감도 있고…. 94년도에는 산업재해를 당해도 산재인정 못 받았는데 투쟁하면서 그 부분 많이 알려지고 산재를 인정해주고 있지만 그래도 한계가 남아있어요. 일부는 받을 수 있는데, 미등록 산재를 당하면 업주가 산재를 신청하면 벌금 같은 것 물어야 해요. 그래서 업주들이 벌금 있으니까 산재치료 안 해 줄려고 하게 되고, 이주노동자들도 산재를 똑같이 당하면서 치료를 끝내도 하던 일이 장애가 있으니까 그 이후에는 하지 못하잖아요. 직업을 바꿔야 하잖아요. 직업훈련 받아 나머지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 직업훈련 노동부에서 훈련 좀 해 주는데 이주노동자들은 안돼요. 나머지 인생 살아야 하는데…. 아쉬운 점이 되게 많아요. 

신분 때문에 고향에 잘 못 가잖아요. 신분불안 때문에 14년 동안 한 번도 못 갔어요. 가족들하고 전화연락하고 처음에는 편지를 쓰면서 주고받고 많이 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집에서도 많이 부담이 되고, 너무 맘이 안됐으니까…. 보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 재작년에 엄마 돌아가시고…. 가지고 못하고 오지도 못하고…. 엄마도 전화할 때면 ‘어서 와라, 보고 싶다. 빨리 와라’. 그래도 가지도 못하고, 갔다가 오지 못하면 불안하니까.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도 지금 상태 아주 안 좋아요. 가야 하는데 갔다가 다시 오기가 참…. 보고 싶은 사람 못 보고 가족들이 돌아가시고…. 저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대부분이 그런 문제 갖고 있고 합법화를 해주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가고 싶을 때 가고 가족이랑 부모님 보고 인사하고 와서 일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아쉽죠.

한국 사람도 일하러 다른 나라로 떠나잖아요.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한테는 인정하지 못 하잖아요. 누구나 필요에 따라 이주를 할 수 있고 이주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리 와서 뭐를 하고 있는지 왜 떠나는지 왜 남아있는지, 정부에서 그렇게 선전하기 때문에 시민들도 인식이 박혀있어요. 한마디만 하고 싶은데, 사실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공장들 있잖아요? 사실 월급이나 임금을 1.5배, 두 배를 줘도 한국노동자들이 그런 일들 거의 안 해요. 이주노동자들이 일을 하는 공장에는 거의 내국인 노동자 없고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이주노동자들이 더 나가게 되면 작은 공장들이 운영하기 힘들어져요. 사실 작은 공장, 중소기업공장 대기업이 연결이 돼있어요. 제품들이나 물건들이 납품하면서 대기업으로 가거든요.

또 하나는 한쪽에서 시민들의 의식을 그렇게 만들어가면서, 떠나야 하는데 남아있는 것으로 그렇게 선전하면서 또 한쪽에서 이주노동자 새롭게 계속 투입을 하고 있어요. 올해도 10만 5천명? 새로 투입하고 있고 이미 시행하고 들여오고 있어요. 왜? 인력이 필요하니까. 인력이 필요하면서 인력 필요 없다. 다 나가야 한다. 그러면 이주노동자들이 나가야 하는데 한쪽에서 기술 있고 언어, 의사소통되는 이주노동자 추방시키면서 또 한쪽에서는 기술 없거나 언어 소통 안 되는 이주노동자들을 투입하면서 일을 시키잖아요. 이유는 뭐예요? 아예 모든 것 모르고 있는 과정에서 그 사람한테 뭐든지 시킬 수 있어요. 임금도 적게 주고 야근도 시키고 뭐든지 일을 시킬 수 있어요.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 선전하면서….

한 가지 더 이야기 하면 고용허가제 시행되고 나서 합동단속이 시작됐잖아요. 2003년하고 2004년, 그때 고용허가제 시행 전에 이주노동자 평균임금, 시행 이후에는 오히려 낮아졌어요. 어떤 제도가 시행되고 나면 제도에 따라서 사람들 삶이 나아져야 하는데 안 좋아졌잖아요? 한국시민들도 유럽이나 미국이나 가까운 일본에 가서 일을 많이 하고 있잖아요. 누구나 필요하니까 나라를 떠나서 일을 하거나, 그런 문제가 있으니까 떠나게 되고 남의 나라 가서 일하게 되는 건,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 정도가 자기 나라를 떠나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문제예요. 시야를 넓혀가면서 폭넓게 생각했으면….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되고, 욕 듣고 반말 듣고

일상적으로 불리한 문제들 되게 많아서 너무 많아서…. 사실은 요즘은 조금 좋아졌지만 전세나 월세나 방 한 칸 얻을려면 집주인들이 거의 다 안 해 줄라고 해요. 생활하면서 큰 문제죠. 사람이 방이 있어야 생활을 하는데…. 나라는 언어나 문화가 다르잖아요. 음식, 밥 다르죠. 냄새도 다르죠. 아직까지 되게 많아요. 먹지 못하는 음식이 있는 걸 보면 이해도 못하고….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앞집에서 살면서 한국분들 음식 해먹잖아요. 이주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음식을 해먹는데 냄새가 나면 뭐라고 말을 많이 하거든요. 무시를 하고…. 음식 같은 건 할 때도 창문 닫으면서 되게 조심스럽게 해먹게 되고….

누구나 아플 수 있잖아요. 이주노동자 대다수가 의료보험이 없어요. 일반치료, 비용이 만만치 않잖아요. 되게 고달프고 부담되죠. 치료를 안 받게 되고…. 또 공장에서 노동하잖아요. 똑같이 일을 하는데 누구는 퇴근하고 누구는 계속 일하고 누구는 휴가가고 누구는 계속 일시키고, 한국인 노동자들이 퇴근하고 우리는 일을 하고, 한국노동자들이 휴가가고 일 시키고…. 그런 회사 있어요. 2-3달에 한번 그 회사 가는데, 물어봤어요. 그 사람들 365일에 쉬는 시간이 사흘밖에 없대요.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거리 다니거나 어딜 가거나 이야기를 할 때는 한국분들이 처음 얘기하는 거, 처음 만날 때는 나이를 떠나서 존댓말 해야 하는데 이주노동자 보면 무조건 반말하고…. 되게 많아요.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예전엔 지하철 탈 때 밤이 되면 무서워서 지하철 못 탔어요. 술 마시면 이상한 행동하고…. 우리가 피부색이 검잖아요, 동남아시아에서 오기 때문에. 버스나 지하철 타면 앞에 자리 비어있고 그런 일 많아요. 공장에서도 반말, 심한 욕 많이 하거든요. 마찬가지로 단속을 하면서 연행할 때도 직원들이 가스총이나 전기봉, 무기들 있잖아요? 그런 것 사용하고 우리가 범죄자가 아닌데…. 잘못한 건 미등록밖에 없잖아요? 단속을 하면서 수갑을 채우고 20대? 나이도 얼마 안 된 사람들이 반말하고, 존댓말 해도 되지만 반말하고 욕하고 때리고…. 이주노동자들은 들어올 때도 반말 듣고, 일하면서도 반말 듣고 욕 듣고, 나갈 때도 출입국직원들한테 반말 얻어먹고 욕 얻어먹고…. 들어온 날부터 나가는 날까지 계속 그런 고통을 받고 나가는 거죠. 사실 고통스런 일들이 많아요. 얘기하게 되면 너무 많고….


…좋겠고, …좋겠고, …좋겠고

앞으로도 이주노동자 동지들이 (문제를)어느 정도 해결할 때까지 인권보호를 받을 때까지, 한 시민으로 한 사람으로서 똑같은 사람이면서 함께 웃으면서 살아갈 때까지, 좋은 일 있을 때 같이 웃고 안 좋은 일 있을 때 같이 함께 울면서, 그런 날 올 때까지 계속 같이 해야죠.

마지막으로 제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어요. 치료 못 받거나 단속 피하다가 자살하거나…. 이제라도 없어졌으면 좋겠고, 이제 와서 ‘이주노동자 문제가 뭐’ 그렇게 생각 안 하셨으면 좋겠고, ‘한국 노동시장의 문제다’, ‘사회문제다’, ‘이주노동자들도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이고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보호를 해줘야 한다’는 그런 의식을 한국 시민들이 많이 갖게 됐으면 좋겠고, 한국 시민들도 우리 문제라는 인식을 가졌으면…. 빨리 이런 문제들이 없어졌으면 좋겠고, 정부 차원에서도 제대로 정책을 마련하면서 이주노동자 억압받고 있는 것 그런 부분들 개선해나갔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요.

<편집자주> [외침]은 한국사회의 인권현장, 바로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공 없이 그대로 담는 기획이다. 지식인이나 활동가 등은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 얘기를 남기지만 인권현장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고스란히 삶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외침’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

 

[정리/류은숙] <2006년 7월 4일 인권오름 제11호>

< KTX 여승무원들의 투쟁이 8일로 100일째를 맞는다. 7일에는 KTX 승무원 해고 철회와 직접고용을 촉구하는 이들의 동조단식과 선언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철도공사는 꿈쩍도 않고 있다. 서울역에서 농성중인 조합원 이도경 씨를 만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쌓인 이야기를 들어봤다. >



2년 전에 KTX 개통과 함께 저희가 뽑혔을 때 정말 주위의 모든 부러움을 받았어요. 처음 시작되는 KTX 사업이었고, 정부나 (철도)공사에서나 크게 언론에 홍보하면서 저희 KTX 승무원들을 뽑았고, 뽑는 과정도 다 뉴스에 나오고, 교육받고 하는 과정들도 다 나오고, 저희들이 정말 공사소속인양 공사에서는 저희들을 앞에 내세워서…. 지금 생각할 때는 저희들을 상품화해서, 여성들을 앞에 내세워서 지상의 스튜어디스처럼 이 사람들을 키우고 KTX만 타면 이 사람들이 정말 열심히 서비스하고 친절하게 대해줄 거란 그런 광고를 계속 해대면서 저희들을 실컷 부려먹었다고 생각돼요.


온갖 부러움 속에 입사했지만…

제가 응시했을 때, 주변에서는 ‘어떻게 들어갔냐, 정말 대단하다, 나도 좀 가르쳐주지’ 그런 소리를 많이 들었고,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 저희 집에서는 아버지가 정말 저를 업고 덩실덩실 춤을 추셨어요. 그 정도로 정말 “아, 우리 딸이 철도청에 준공무원 대우를 받으면서 들어가는구나. 1년 후에는 정말 철도공사에 정규직이 되는구나. 우리 딸은 정말 열심히 잘하니까 1년 후에 정규직 정말 될 것이다. 열심히 해라.” 부둥켜안고 정말 많이 감격했었구요. 주변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정말 축하한다, 잘됐다, 월급도 많이 받겠고 준공무원 대우도 받겠고 사회보장 제도도 다 잘 됐겠고 4대 보험도 다 받겠고 정말 잘됐다….

실상은 그게 아니었지만, 이렇게 공개되기 전에는 저희들의 자존심 문제였기 때문에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보건휴가도 제대로 못써가면서 근무교번이 제대로 운영되지 못한 부분이 많았어도 그런 말들을 못했어요. 정말 주위에서 부러움과 시기와 그런 눈총을 다 받았기 때문에 정말 좋은 직업이고 좋은 직장이고 그렇게 보이기만을 바랐던 것 같아요. 제 자신도….

고정급을 받거든요 전원이 다. …200시간을 승무했든 180시간, 160시간을 승무했든 똑같은 고정급으로 받았구요.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저희들이 대무를 뛰어가며 쉬는 날을 반납해 가면서까지 그렇게 일했거든요. 보건휴가도 저희는 제비뽑기 했어요. 인원이 모자라 대무까지 뛰어야 하는데, 정말 여성이라면 써야하는, 법으로 정해져있는 보건휴가조차도 보장받지 못했을 때, 그리고 인력충원을 해달라고 요구할 때, 그리고 급여가 이상하다고 물을 때, 급여체계를 개선해달라고 얘기할 때, 항상 유통 소속이기 때문에 먼저 말하면 유통에서는 자신들은 인력충원에 대해서 월급에 대해서 권한이 없다, 다 도급받아서 하고 공사 측에 다 권한이 있기 때문에 공사에서 인력충원도 한다고 해야지만 뽑을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은 권한이 없으니 공사에 말하라고…. 그럼 정작 저희는 소속인 유통에 말해도 소용이 없어서 공사에 가면 공사에서는 너네들하고 우리하고는 소속 자체가 다르고 너네들이 우리한테 와서 얘기할 게 아니다, 너네들은 유통에 가서 얘기를 하는 게 맞다….

월평균이 170(만원) 된다고 사회에 알려졌지만, 솔직히 실상은 120, 130 그 정도였거든요. 저희들을 외주 주면서 직접고용의 비정규직.정규직과는 정말 차이가 나더라구요. 똑같은 KTX 내에서 일하지만 제대로 된 보장과 임금을 못 받는 게 정말 불합리하게 느껴졌어요. 저희는 정말 무임권 하나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외주 파견, 또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저희들은 못준다는 그런 부분, 정말 그런 차별들이 크게 와 닿는 거예요. 사소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저희들을 소속감 없게 만들었고…. 직접고용과 간접고용의 극심한 차별을 겪으면서 정말 120, 130만어치만 일하자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저는 1기지만 2기, 3기, 4기들은 정말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거든요. 저희 1기 월급이 올라가야 하고 2기, 3기, 4기들은 저희가 받았던 임금을 받아야 하는데…. 호봉을 따지자면 올라가야 하는 게 맞는데 오히려 더 깎이고, 새로 들어오는 직원들은 더 낮아지는 그런 부분들…. 정말 우리나라 사회가 그런 것 같아요. 여성들은 근무하고 경력이 쌓이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여성들은 오히려 더 낮아지고 결혼하고 임신하고 애기를 낳고 돌아오면 더 낮아진 임금에 아니면 아예 잘리거나 다른 회사로 옮겨가야 하는 문제, 다른 회사로 옮겨가면 결혼했다는 이유로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게 되는, 남성들은 점점 더 경력이 쌓여서 계속 올라가고 직위도 올라가고 승진도 하고 임금도 올라가는데 여성들은…. 다 그런 것 같아요. 우리들 KTX 승무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여성에 대한 우리사회의 인식과 사용자 측에서 여성들을 그렇게 낮게 대우하고 그렇게 해도 된다라는 인식 때문에 저희들도 그런 사회의식 속에서 저희들이 그런 희생당하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들어요.

맘에 안 들면 딴 직장을 찾으라는 말 많이 들었는데, 저희는 KTX 승무원이 되고 싶어서 왔거든요. 정말 KTX 발전과 함께 저희가 그렇게 많은 고객님들을 웃으면서 내리실 수 있게 하게끔, 정말 다시 KTX를 타시게끔 만들고 그렇게 노력해왔던 사람들이고…. 정말 사회초년생으로서 첫 직장을 가진 그런 승무원들이 많은데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싶었고…. 저희들은 정말 KTX 승무원이 되고 싶어서 들어왔어요.


우리 존재를 계속 변질시켜 가요

고객님들에게 최선을 다할 만큼 제반 조건이 마련이 안 되니까, 저희만 노력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데…. 조건들이 갖춰져야 저희도 일할 맛이 나고 힘이 나고 한사람이라도 더 웃고 싶고 더 서비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거잖아요. 사람이 다 그렇잖아요. 이런 부분 이렇게 고쳤으면 좋겠다는 고객 건의를 받아서 저희가 공사측이라든지 미팅자리에서 항상 얘기하고 그러니까, 우리들도 KTX에서 일하는 2년동안 똑같이 일을 한 거잖아요. 많은 고객님 마주치면서 일을 하고 많은 것들을 배우면서 느끼면서 의견도 전달하면서 그렇게 지낸 승무원이고 그렇기 때문에 저희 존재가 크다는 걸, 상시 업무라는 것들을 인정해줘야 하는데, 그냥 저희들이 승무원이라는 것을 계속 변질시켜 나가려고 하거든요. 사측이나 레저측은.

처음에는 안전과 서비스를 담당하는 승무원이라 해서 뽑았는데, 지금은 점차 그 수도 줄이려고 하고 내년에는 판매권까지 관광레저(또 다른 자회사)에서 넘겨받거든요. 빠르면 하반기부터 판매 승무원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거예요. …공사 측에서는 승무원들을 제대로 관리하고 제대로 뽑아서 정말 열차 내에서 같이 유기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열차를 승격시켜야 하는데, 저희를 계속 떨어뜨리려 하고 있고, 그러니까 우리 정부기관과 정부가 정말 욕을 들어먹는 것 같아요. 계속해서 싸게 싸게, 더 작게 줄이려고 하고…. 그렇게 됐을 때 공사가 발전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저 사람들은 모르는 건지, 알기는 알지만 그냥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돈 많이 벌고 일 대충대충하고 퇴직금 받고 연금 많이 받아서 나가면 땡인 건지…. 정말 KTX와 철도의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인지 의문이 갈 정도로 그러니까…. 내부 직원들, 직원들이 열심히 해줘야지만 철도공사가 살고 철도가 사는 거잖아요. 그러게 정말 내부고객이라 하잖아요? 직원들을, 그런 내부고객들을 어떻게 잘 다루느냐에 따라서 공사의 발전과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하고 있어서 정말 안타까워요.


열심히 일한 우리들을 내치고…

열심히 열차에서는 일을 하지만 항상 집에 오며는 우울하고, 그렇게 그 사람들과 일을 해야 하는데도 우리는 딴 소속이고 돈도 제대로 못 받고 차별받고…. 그런 현실들이 일을 열심히 다하고 와서 정말 버스에 타는 순간 정말 이렇게 과연 살아야 하는가 그런 마음이 많이 들었어요. 그냥 지금까지 일해왔던 것이 다 생각이 나네요, 이렇게 인터뷰 하면서(울먹이며)….

정말 열심히 일한 우리들을 정말 내치고…. 이제 5월 19일자로 잘렸기 때문에 이제는 소속도 없고, 철도공사는 유통과도 레저와도 정말 끝이라고 하고 있는데, 정말 이 많은 280여 승무원들을 이렇게 한 번에 단칼에 해고할 수 있는 것인지…. 이철 사장, 노무현 대통령은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하고 마음이 편한지, 본인들도 자식이 다 있을 거잖아요. 우리나라 딸들이 이렇게 간접고용 비정규직으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그래도 그 급여라도 받으면서 일해야 하는 조건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잖아요.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서 정규직 대기업 들어가면 되잖아’ 하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 정말 우리나라 비정규직 문제 없애고, 한 번에 없애는 게 힘들다면 점차적으로 바꿔나가는 게 맞잖아요. 저희 전에도 비정규직을 타파하기 위해서 싸우셨지만 저희들도 이 시대의 비정규직, 특히나 여성들에게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저희들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노동자로서 보이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점차로 비정규직을 없애나간다고 한다면 정말 저희들을 시발로 해서 공사측에서는 먼저 저희들을 해결함으로써 다른 부분에서도 점점 더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서 비정규직을 없애나가기 위해서 노력을 해나가야 하는 부분이고….

저희들이 일어나면 다른 철도내의 3천여명 비정규직 다 해줘야 하고 전국에 비정규직 다 정규직으로 해줘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면서 끝까지 저희들을 해결 못해 준다고 하는데, 다 해줘야죠. 언젠가는 다 해줘야 할 사람들이고, 우리나라 비정규직 다 없애야 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고.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노무현이랑 뭐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국무총리라든지 그런 사람들, 그 밑에 정책을 담당하는 국회의원들이나 이 사람들은 정말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고 없애려고 노력해야 하는데 말만, 말뿐이라는 거죠. 행동으로 옮기지도 않고. 공부 잘해서 정규직 되라고 하는데 그 정규직 분들도 언제 어떻게 내쳐질지 몰라요. 정규직 그분들도 힘들 거라구요. 사람이 먼저잖아요? 그러니까 정말 사용자측은 노동자를 써먹고 자기 사업 이익 불리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정말 자기가 부리는 사람들, 자기 내부고객들을 어떻게 이끌어서 정말 보장 다해 주면서 하고, 사람 죽을 만큼 일을 시켜서는 안 되는데….


안 가본 곳이 없어요

집에도 한 달 이상 못 갔어요. 집에 가면 부모님도 힘들고 저 보는 것도 힘들고 집에서 나오는 것도 힘들 것 같아서 저는 안 가는데(울먹)…. 그냥 저희들, 정의는 승리한다고 배워왔는데….

국회, 강금실.오세훈 선거본부, 노동부, 여성가족부, 정부청사, 헌정기념관, 국가인권위,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안 가본 곳이 없어요. 그런데 저희들이 가는 곳곳마다 경찰이 가로막고, 다 묵묵부답이고 관심없고, 그냥 다 유통에 가라 레저에 가라 그럼 되겠네라고 생각하는 윗분들이 너무 많고…. 과연 이 나라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태도가 있는지 정말,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모순적인 사람, 집단, 기관들이고 그런 것에 정말 대한민국을 떠나고 싶을 정도로 많은 비참함과 억울함을 느꼈어요. 정말 우리나라는 극한 상황에 치닫지 않으면 해결해줄려고 하지 않는구나, 사람이 하나 죽어야 하나, 자살을 하거나 기차에 치어 죽어야 하나 하는 생각도 정말 많이…. 정말, 아휴, 그렇게 목숨을 바쳐도 안 해줄 거잖아요. 저희는 소중하기 때문에 그렇게는 못하겠구요.

저는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 했고, 자라면서도 그냥 부유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가난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부모님 밑에서 오빠, 여동생 5식구가 오순도순 단란하게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행복이라 생각했어요. 정말 인간의 권리 그런 것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저는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에요.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 생각했고, KTX 승무원이 돼서 행복했고, 승무원으로서 예쁘게 유니폼을 입고 고객을 맞이하고 하는 것이 너무 행복했고 재밌고 즐거웠어요. 그런데 인간이란, 국민이란 것을 우롱하고 있는 이런 정부 공공기관의 행태에 맞서서 이제는 가만히 못 있겠다…. 정말 사회에 나와 봐야 큰다는 말처럼 사회에 나오니까 그런 부분들이 정말 다른 분들이 애기하셨던 부분들이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저희들이 들고 일어나서 인간의 존엄성과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그런 권리들을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는 정말 정부와 윗대가리들을 깡그리 바꾸고 싶고…. 그게 힘드니까 점차적으로라도 바꿔나가는 것이 저희의 몫이라고 생각되고 그래서 저희가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후배들, 다른 비정규직에게 힘이 되었으면…

나가서 그냥 쪼그만 회사에 100만원이라도 받으면서 일하자, 그런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안 들고 어떻게 해서든 이 싸움을 이겨서 지금 저희 밑의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들이 사회에 나올 때는 제대로 된 직장․직업 틀 속에서 일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 지금 나이 드신 분들, 선배들이 일했던 노동현실이 이렇게 힘들었구나라는 것을 이제 알겠고, 정말 KTX의 꽃인 줄 알고 의기양양 했었는데 저희도 한낱 여성노동자에 불과했다는 것…. 비정규직, 다른 사회적으로 고통 받는 분들이 저희들이 이겨서 힘을 얻으시고 그분들이 조직을 만들고 우리가 연대해서 힘이 돼줬으면 좋겠다는 것, 그게 지금은 행복을 찾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저희보다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런 분들도 힘차게 일하고 투쟁하고 계신데 저희가 뭘 못하겠어요. 더 열심히 해야죠. 어리다고 못한다고 생각하면 이제 안 될 것 같아요. 정말 여자면 약하고 어리고 안된다는 생각, 저희들 자체가 이제는 버려야 될 것 같고, 서로서로 그것을 깨어나가고 의식을 바꿔나가고 정말 남성 여성 동등한 입장에서 모든 게 다 이뤄지길 정말 바라고 여성도 정말 당당하게 살려면…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언제 바뀔까요?

[편집자주] 외침은 한국사회의 인권현장, 바로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공 없이 그대로 담는 기획이다. 지식인이나 활동가 등은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 얘기를 남기지만 인권현장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고스란히 삶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외침’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

[정리/류은숙] <2006년 6월 8일 인권오름 제7호> 

지난 4월 22일 새만금 방조제 마지막 구간에 대한 물막이 공사가 끝났다. 5월 2일 계화 갯벌은 공사가 끝난 지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축구장으로 써도 될 만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3살 때 계화도로 이사와 41년을 살아왔다는 고은식 씨는 새만금 사업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아뿔싸, 미래를 도둑맞았구나

우리가 크게 사기 당했구나, 그전에도 느끼긴 좀 느꼈지만…. 처음 공사 시작할 때는 피해란 게 없다가 서서히 피해들이 나타나고 피해가 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주면서 사기당한 보상금 때문에 말도 못하고 있다가, 우리가 정말 미래를 도둑맞았구나 생각이 들고 자연스럽게 반대를 시작하게 됐어요.

91년도에 보상을 받았죠. 보상이 석달치 바다에서 벌어들이는 수입 정도도 안돼요. 정부에서는 3년 치 기준으로 줬다고 하는데…. (그때) 도장을 찍어준 건 새만금 10년만 기다리면 더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우리는 (그런 환상에) 넘어가서 도장 찍고 보상 같은 건 하늘에서 떨어지는 돈인 양 받았고 결국 우리들이 농림부도 방문해보고 국무조정실도 가보고 하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 정부가 심어준 미래는 거기에 없었어요. 여기에 공항까지 들어서고, 하여간 첨단산업단지에 온갖 것들…. 바다에서 살다 보니까 바다를 버려도 저렇게 바뀐 사회에서 더 잘 살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던 거죠.

처음 생각은 바다가 중요하다, 산업단지가 중요하다가 아니라 우리한테는 계획한 대로 되면 거기서 사는 게 중요했어요. 바다가 지금은 참 소중하지만 그때는 바다라는 게…. 사람은 현실에 만족을 못하잖아요. 바다가 위험하고 죽을 때도 있고 우리도 우리지만 어른들은 위험한 바다보다는 월급쟁이를 하더라도 취직을 하는 게 낫고 안정적이지 않느냐, 그래서 그런 선택을 했던 거죠. 그런데 그것도 아닌데 바다를 뺏겨 버리고 이도 저도 아닌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반대를 시작했죠.


기대한 만큼의 깊은 수렁

이제는 선거도 안하고 아무것도 안해요. 정부는 다 도둑놈이라 하면서. 대통령만 해도 해양수산부장관 때 문제있는 사업이다, 서해의 어자원에 큰 영향을 준다고 얘기했던 사람이 대통령 되더니 새만금 막아야 한다…. 전북에 정치하는 사람들, 새만금 팔아가지고 실현 불가능한 것들을 해가지고 표로 연결시키고 권력의 도구로 계속 써먹는걸 보니까 울화통만 터져요. 정치인, 관료들, 그리고 답답해서 어디 가면 우린 찬밥신세, 우리에게 시원한 얘기를 해주는 것도 아니고 뱅뱅 돌리는 얘기만 하고, 울화통만 터지죠.

그런 게 좌절로 왔어요. 질의를 해도 집회를 해도 하고 싶은 걸 표현하러 가면 아무것도 안되고 역으로 언론에선 역으로 나오니까 ‘이게 더 좋은 거다’라고 하니까 집회를 하고 오면 힘을 받는 게 아니라 더 좌절돼요. 우리가 기대한 만큼의 깊은 수렁에 빠져버려요. 집회한번 하고 나면 몇 개월간 일어설 수가 없어요. 뭐 하러 서울까지 가고 테레비도 안 나오고 역으로 더 새만금 막아야 한다고 보도 내버리고, 더 힘들어져 버려 사람들이. 참 그러면서 7년을 했네.

우리들이 생각하는 미래? 그런 것 없어요. 구체적으로 이렇게 되면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이렇게 하겠다가 없어요. 닥치면 힘들면 떠나가고 가지 못할 형편이 못되면 남아서 살아요. 계획이 어디 있겠어요?


바다가 죽어가면서도 베풀고 있구나

새만금 이걸 반대하는 일을 하면서 느낀 게, 바다가 너무 소중했다, 그리고 소중한 것이 뭐냐? 바다가 끝까지 자기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우리에게 계속 베풀어주고 있구나.

새만금…. 처음에는 제 생존권 때문에 했었는데, 하다가 바다의 그것을 느꼈어요. 힘들다고 해서 내가 여길 떠나면 결국 바다가 나한테 준 것이 별로 의미가 없지 않느냐. 바다가 죽으니 나도 떠난다, 이런 것보다는 바다가 준 것이 그게 있으니 힘들더라도 여기 살면서 다른 어떤 바다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들을 해야지, 힘들어도 여기서 힘들게 사는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살아야지 싶다. 그런 삶을 살아야죠 뭐.

가장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은 바다에서 백합 잡아서 먹고사는 분들, 뭐 재산이나 이런 게 있어서 힘들면 다른 데로 떠날 수 있는데 떠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여기 있으면서도 바다가 더 이상 내어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에 여기에 있어도 참 막막하고 이런 분들이 남을 거예요. 나이 많고 여자분들이고….

처음에 새만금 접하면서는 거기에는 다른 생각은 없고 내 사는 것만 있고, 내 사는 위기로 그렇게 했는데, 계속 반대를 하다가 언뜻 느끼는 게 결국 새만금을 막는 게 정부나 자본이나 그런 게 아니라 내 마음이 저것을 막고 있구나. 내 마음에 있는 방조제부터 걷어내야지, 그게 안돼서 저게 막힌 것인 줄 모른다. 너무 내 생존에만 매여 있어서 바다라든지 거기 사서 많은 생물이라든지, 이 친구들도 나와 같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나만 있으니까 좀만 영향만 많아도 모든 게 흔들리는 거다.

새만금 공사는 중단하라고 하면서 우리 삶의 행태는 바다에 쓰레기 다 버려버리고 생합 같은 것 작은 것들은 잡지 말아야 하는데 다 잡아버리고…. 왜 잡냐 하면 이걸 놔주면 커서 나한테 잡히냐, 놔주면 나만 손해다. 결국 이런 것이 바뀌지 않으면 새만금을 막지 말라는 것이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격밖에 되지 않느냐, 우리가 자꾸 좌절하는 것이 그런 게 안돼서 그런 줄도 모른다, 하다 보니 새만금 열심히 반대했던 사람들 맘에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스며들더라구요. 내 안에 바다가 아니라 바다 안에 내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많진 않지만 생겨나더라구요.

국민의 80 몇 %가 새만금 공사 반대를 하는데 전북만 광적으로 찬성해요. 어딜 가도 새만금 찬성하는 지역은 없더라구요. 전북 안에서만 광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하는데, ‘한’이라고 표현하던데…. 소외되고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소외되고 그 한을 새만금에다 푸는 게 참 야속하기도 하더라구요. 같이 살면서 새만금의 근본적일 것 보려하지 않고 자기 한, 자기 욕심이나 뭐 그런 걸로 새만금을 바라보고, 새만금이 돼야 내가 잘 살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지금도 전북 뉴스나 이런 걸 보면 새만금이 들어서면 서울보다 여기가 더 커지겠더라구. 사실 아무것도 없는데, 참 안타까워요. 한으로 풀어내려 하는 것들이….

지금 우리가 결정한 그게, 큰애가 고등학생, 작은애가 중2인데 걔네들 사는데도 크게 영향을 주고 있어요. 어쨌든 경제적인 게 잘 안되니까 용돈도 못주고, 작게는 그런 것들, 부모가 해줘야 할 것들을 못해주고 있고, 내가 결정한 것 땜에 애들이 피해보는 한 부분일 것 같고. 또 하나는 IMF 있었을 때 여기 계화도에 굉장히 인구가 늘었어요. 도시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다시 왔어요. 도시에선 실패했어도 논농사는 돈 없으면 못하지만 갯벌에 나가 조개잡는 것은 도구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기서 회복하고 또 나가고 하는 사람들 많이 봤는데, 내 자식 역시도 갯벌이 있으면…. 어디 나가서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잖아요? 자식이 어디 가 있어도, 뭘 해도, 갯벌이나 바다가 있으면 참 든든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미래세대 소송이나 뭐 깊은 건 잘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들이 있었으니까…

2001년인가 순차개발을 하면서 공사재개 딱 떨어지니까 환경단체가 뭐고 넉아웃됐어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 <새만금을 반대하는 부안사람들> 사무실 문을 아예 몇 달간 닫아놨어요. 문을 닫아놓고 있는데 동네 아줌마들이 절 만나면 “왜 사무실 문을 닫아 논대?” 라고 하더라구요. 굉장히 염려되는 얘기로….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으니 문만 열어놓자라고 했지. 그렇게 하자 해서 샤터를 올려놓으니 사람들이 찾아와요. 좌절했지만 뭔가 할려는 사람들이 사무실을 찾아와요. 그해 가을에 바닷길 걷기를 했고, 힘을 얻어서 그 동력이…. 그것이 참…. 전부 다들 놔두고 있는데 어머니들이 “왜 저 사무실 문을 닫아 논대?” 이 한마디가 큰 힘…. 보이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런 마음들이 있으니까 지금까지 해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 분들은 방조제 공사를 끝까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남자들이 다 배려놔서….


이미 막은 걸 어떡하냐고?

물막이 공사 끝나고 심정은 담담하더라요. 끝났다는 얘기 듣고 그때부터 술 먹기 시작했어요. 담담하대요. 막혔다니까. 생각이고 뭐고 없고. 얼마나 많이 먹었는가. 헐 일이 없어진 후에는 술로 살았어요.

이제 제일 먼저는 침수 피해가 올 것 같고 수질오염이 따라올 것이고 염분 피해 같은 것도 있을 거고…. 비가 좀 오면 침수되고 난리일 거 같아요. 그것이 새만금 공사가 가져다준 영향이란 걸 알려내는 일을 해야 할 거고, 사회적으로 알려낼 필요가 있죠.

이미 막은 걸 어떡하냐면…. 자동으로 해결될 것 같아요. 막히기 전까지는 외로운 싸움이었고 연합을 만들려도 애를 써도 잘 안됐는데, 문제가 생기면 가만히 있겠어요? 그런 문제가 있으면, 정치하는 놈들도 새만금 공사 찬성하면 표가 안 되니까 또 반대할 거 아니에요? 막히고 난후에 더 쉬울 것 같아요. 분명히 문제가 나타날 거니까. 간척을 했으니 계획대로 된다면야 오염되고 뭣하고 하는데 계획했던 일이 될 수 있겠어요? 우리가 반대하면서 그렇게 얘기했던 게 농사지을래도 20년, 30년 기다려야 하고 그런 거였는데, 그런 얘길 한 번도 안했던 농림부가 막히고 나니까 바로 그런 얘길 하대요. 공장 들어설라면 100년이 넘게 걸릴 텐데, 100년 후에 어떤 세상이 될지 모르는데 좋은 갯벌을 다 죽여야 한다는 게 말이 돼요? ‘새만금이 세계 최대다’. ‘하여간 규모도 세계 최대고 환경재앙도 세계 최대도 결국에 방조제 트는 것도 세계 최대로 최단기로 틀 거다’라고 그런 얘기들 해요.


정부가 이웃이랑 원수를 만들더라구요

정부에 반대되는 일 이거 전에 한 번도 해본 적 없어요. 지금은 정부가 하라는 대로 하면 안 되고 결국 우리 속에서 뭐가 나와야 하지 않느냐. 지역자치라는 게 있어야지, 정부가 의도하는 대로 가면 내 이웃하고 원수가 돼버려. 정부는 내 이웃이랑 원수를 만들어 놓더라구요. 정부가 주는 정책자금이랄까 경쟁을 시켜요, 더불어 살기가 아니라. 자랑 나랑 경쟁을 해서 돈을 주니까 대치가 되고, 옛날에는 잘 살다가도 보이지 않는 갈등들이 있는 거고…. 정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는 지역 공동체가 더 중요해요. 모든 법에 우선되는 게 우리 지역에서 정해지는 법이 있어서 그 법안에 국가의 헌법도 들어가 있어야지 제대로 되는 거지.

새만금 하면서 대표적으로 배운 것은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안 보인다는 것.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 소중한 것에 대한 생각을 삶에서,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걸 우리가 못하더라. 그걸 사람들이 찾는 일을 해야 하지 않나. 저도 바다가 이렇게 소중한지 몰랐어요. 바다에 그냥 가면 되고 잡아오면 되고, 진작 소중했던 걸 왜 몰랐던가. 일찍 알았다면 이런 일 안 했을 텐데…. 사람들마다 다 그런 것 같아. 정말 소중한 것은 소중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

바다를 생각하면 죄인이 뭐 할 말이 있나요. 미안하고…. 소중하다는 걸 느꼈잖아요, 이제. 하여간 변치 않고 내 삶이라든지 주변사람들과의 삶이라든지,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죠. 죄인이 더 할 말이 있나요.

[편집자주] 외침은 한국사회의 인권현장, 바로 그곳에 있었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가공 없이 그대로 담는 기획이다. 지식인이나 활동가 등은 글쓰기 등을 통해 자기 얘기를 남기지만 인권현장에서 그 원인과 결과를 고스란히 삶으로 받아내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외침’은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려 한다.

* 관련사이트 http://www.nongbalge.or.kr/

 

[정리/류은숙] <2006년 5월 10일 인권오름 제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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