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47 호 [기사입력] 2015년 07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A: 엘리베이터에서 맨 끝에 탈 때마다 조마조마하지 않니?
B: 너도 나 뚱뚱하다고 놀리는 거야?
A: 내가 널 놀릴 형편이냐? 피차 마찬가진데. 그냥 내가 조마조마하단 소리야. 저번에도 ‘삐’ 소리가 나서 얼마나 무안했는지.
B: 그건 사람이 많이 타서였겠지. 네가 우연히 마지막에 탄 거고. 날씬한 사람만 엘리베이터 타란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왜 우린 이렇게 몸무게에 민감한 걸까? 이게 무슨 천형이냐?
A: 그러게 말이야. ‘삐’ 소리에 얼른 내리는 데 뒤통수에 비웃는 화살이 꽂히는 것 같았어. 쓸데없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괜한 열등감을 느끼게 되고 그러고 나면 힘이 쫙 빠져.
B: 몸무게를 달 저울은 있어도 내 삶의 무게를 잴 저울은 없어. 왜 외모를 가지고 내 삶을 잴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A: 외모뿐만이야? 그냥 다른 걸 다르게 냅두지 않아. 굳이 위아래, 앞뒤,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려는 게 한둘이어야지.
B: 그러게. 구실도 다양하셔라! 학벌, 성, 외모, 장애, 출신, 결혼 유무, 피부색, 나이, 재산 ….
A: 차별은 그런 구실들을 가지고 타인의 삶을 잴 수 있다고 뻐기는 저울이나 줄자 같은 게 아닐까? 그런데 그런 저울이나 줄자는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드는 걸까?

차별의 구축 과정

B: 거다 러너라는 유명한 역사학자 말로는 그게 과정이 있더라구.
첫 단계, 일단 무수한 다름 중에서 일단 자기네가 원하는 걸 골라잡아. 골라 잡히면 표적이 되는 거야.
A: 하긴, 모든 차이가 차별이 되는 건 아니지. 겉으로는 다양성을 떠들지만, 차이들이 나란히 다양한 게 아니라 차이들 속에 분명히 위계와 서열이 있거든.
B: 맞아. 특정 표적을 골라잡는 이유는 권력이 많거나 센 쪽이 그 권력관계를 유지하고 이익을 보기 위해서거든. 그런 동기를 은폐하기 위해서 두 번째 단계가 필요해. 골라잡은 표적에게 그럴만하다고 여겨질 부정적인 색칠을 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색깔이 표적의 원래 색깔인 양 뒤집어씌워. 이유를 만들어놓고 거기다 표적을 꿰어 맞추는 거야.
A: 편견, 고정관념 같은 걸 만드는 거구나.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부당하다고 안 받아들이면 되잖아?
B: 그게 간단치가 않은 게, 그 색깔을 이유로 체계적이고 제도적인 차별이 이뤄지거든. 사회적 기회나 자원에 동등하게 접근할 권리, 자기 삶과 사회에 미치는 힘을 행사할 권리를 묵살하는 거야. 그렇게 실제적으로 상당 기간 박탈이 계속되면 어찌 될까? 물론 부정의하다고 느끼고 저항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겠지. 슬프게도 차별의 표적이 된 사람은 좌절과 열등감으로 자기에게 씌워진 색깔대로 살게 될 수 있어. 주입된 열등감이 지배세력에게 연료를 공급하는 거지. 그런 과정에서 대개 사람들은 주입된 부정성에 동의하고 그걸 통념으로 갖게 돼.
A: 경쟁 때문일까? 부족한 기회나 자원을 두고 벌이는 경쟁에서 누군가를 떨꿔낼 수 있으니까 그런 과정에 협조하는 게 아닐까?
B: 그러게. 차별로 이득을 보는 쪽에서 그런 경쟁과 분열을 노리는 거겠지. 그러니까 문제는 차이에 있는 게 아니라 특별하게 만들어낸 차이를 구실로 박탈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있는 거야.

‘나머지’가 아닌 ‘다른’ 사람들

A: 우리 학교 다닐 때 ‘나머지 반’ 얘기를 하는 것 같다.
B: 나머지 반?
A: 왜 성적도 별로, 특기도 별로, 집안도 별로인 얘들끼리 묶어서 ‘나머지 반’이라 하고, 아주 소수정예만 뽑아서 ‘특별 반’이라 했잖아.
B: 맞아. 그 때 ‘나머지’라서 겪었던 설움이 장난 아니었지.
A: 우린 ‘나머지’가 아니라 그냥 ‘다른’ 사람일 뿐인데, 왜 다른 사람으로 봐주지 않고 나머지로 취급했을까?
B: 특별반이 학교생활에서 정상이고 표준이었으니까 그렇지.
A: 우리가 그 정상의 기준에 대들었다면 우리 삶이 달라지진 않았을까? 우린 ‘나머지’가 아니라고 좀 세게 나갔으면 말이야.
B: 그러게. 하지만 우린 오히려 특별 반에 들기 위해 더 노력했지. 나머지 반을 떠나 특별 반으로 옮기는 애를 아주 부러워하고, 나머지 반과 그 속의 아이들을 창피해 했어.
A: 나는 남고 너는 잠깐 특별 반에 간 적 있잖아? 그때 그랬던 거지?
B: 창피하지만, 옛날 얘기니까 고백하자면 그랬어. 나머지 반 애들 갖고 킥킥거리고 얕잡아보는데 더 열심히 꼈지. 처음부터 특별 반이었던 게 아니라 나머지 반 출신이란 거 지적할까봐.
A: 아, 세월이 가도 남는 건 상처구나. 그때 나를 멀리하고 무시한 게 특별 반 애들이랑 잘 어울리기 위한 거였구나.
B: 옛날 얘기라니까! 부당한 구별에 올라타서 잘난 척 했던 게 쑥스러워. 그때 기억이 나한테도 상처로 남아있어. 결국, 지금 우리는 ‘나머지’란 말이 얼마나 부당한지를 공유하고 있잖아.
A: 그래. 그때의 구별이 우리 삶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으니까. 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를 보면, 살아서만 아니라 죽어서도 차별하잖아. ‘나머지’가 사라지거나 줄어들기는커녕 왜 우리 삶에 더 들러붙는 걸까?
B: 눈에 보이는 공식적·제도적 차별도 문제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게 토양이라서 그럴 거야. 그런 토양에선 형식적으론 차별이 금지돼도 실제론 모욕과 무시와 차별이 비온 날 풀처럼 거침없이 자랄 거야.
A: ‘요새 세상 좋아졌다’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들이 솔직히 대놓고 사람 무시하지. 자기가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차별이 없다는 걸 다른 사람도 당연하게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친구야, 제도화된 차별이 문제란 건 잘 알고 그것 땜에 화도 많이 나지만, 우리 그걸 방패로 숨지 말자. 우리의 일상에 침투한 은근한 신호들을 무시하지 말자구.
B: 문득 최근 들은 말이 생각난다. <차별론>을 쓴 사토 유이란 학자가 이런 말을 했대. “차별에는 최소 세 명이 필요하다”고.
A: 왜 세 명일까? 차별받는 표적이 된 한 사람, 그 표적을 대상으로 서로 짬짜미해서 한통속이 되는 두 사람을 말하는 거야?
B: 하하, 너 말이 적나라하다. 다른 학자의 표현에 따르면, “차별이란 어떤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이와 동일화하는 행위”라네.
A: 네가 특별 반에서 했던 것처럼?
B: 그 얘긴 그만하라니까!
A: 알았어, 알았다구. 그만큼 차별은 위험하다는 거야.

차별의 해악

B: 차별의 해악이야 잘 알려져 있지. 희생양 만들기, 제거하기, 식민 지배, 아파르트헤이트, 제노사이드 등 역사적 증거들이 넘치잖아. 인권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히틀러의 나치정권이나 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치인 아파르트헤이트는 비난하잖아.
A: 차별 정책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았던 체제가 자국민의 인권뿐 아니라 인류의 인권과 평화를 침해했다는 증거가 넘칠뿐더러, 멀고 남 얘기 같으니까 동조하는 걸 거야. 하지만 가까운 내 얘기에서는 얼마든지 태도를 뒤집잖아. 이로울 때는 글로벌스탠다드를 부르짖다가도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할 때는 세계적인 추세를 거스르지.
B: 굳이 역사적 증거들로 차별의 해악을 설명하지 않더라도, 인간 이하나 비-인간으로 대하는 모욕과 배제가 주는 고통이 인권침해란 걸 부인할 수는 없어. 까놓고 말해 무시나 모욕을 받으면 당장 잠도 안 오고 우울해. 어쩔 땐 심장이 조이고 속을 칼로 긁는 느낌이 들 때도 있어. 난 평소 둔하다는 소릴 자주 듣는데, 무시당하고 주눅 드는 상황에선 그게 말짱 거짓말이더라.
A: 한편에선 인권감수성이 높아졌다고 말하던데, 한편에선 차별에서 파생되는 인권침해가 날로 드세지는 것 같아. 이건 뭔 조화지?
B: 대놓고 차별하는 쪽의 문제야 지적하자면 끝도 없지. 그런데 나는 가끔 차별을 반대하는 목소리에서도 불편함을 느껴.
A: 무슨 소리야? 우리끼리 목청껏 차별을 반대해도 모자랄 판에.

고정된 선 지우기

B: 음, 정확하게 말하긴 어려운데, 가끔은 불평등해지기 위해 평등을 요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어. 더 많은 기회와 자원을 놓고 시합을 벌이면서, 그 시합의 규칙에 국한해서만 차별반대를 외치는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해서 더 많이 갖게 되면 평등이 성취되고 차별은 사라지는 걸까?
A: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방식이잖아. ‘정당함’과 ‘부당함’을 구별하는 방식이 경쟁의 공정함과 능력에 따른 대우인 거고. 너 무슨 유토피아를 꿈꾸냐?
B: 재능과 장점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 걸 아예 부인하자는 게 아냐. 난 그저 그런 분배만이 유일하게 정당한 것인지 의문이 든다는 거지. 정당한 것과 유일하게 정당한 건 다르잖아. 나는 정당한 분배에 앞서 사람으로서 같이 누리는 기본값이 커졌으면 좋겠어. 특성과 조건을 따지기 전에 사람이라면 당연히 받는 기본적인 대접이 동등했으면 좋겠고, 그 동등함의 범위가 넓고 깊어졌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반차별과 평등의 관심이 기회의 균등이나 공정한 분배에 너무 눈을 돌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A: 네 말 듣고 보니 나도 찜찜한 게 있었어. 내가 차별을 반대하지만, 내가 피해자라는 점을 너무 의식하고 강조하는 건 아닌지, 피해자임을 강조하다 보니 피해에 늪처럼 빠져드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 난 늘 약자니까 특별하게 고려돼야 한다고 사정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 사정하는 게 아니라 난 당당하고 싶거든. 사정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와 사람으로서의 대접을 원하는 건데, 왜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낙인 찍혀야 하지? 왜 자주 되풀이해서 피해를 말해야 하지?
B: 말하고 또 말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 말이 내 입에 안 맞을 때가 많아. 무슨 무슨 차별의 피해자라고 누군가 날 묘사할 때면 성질이 날 때가 있어. 왜 자기 말로 나를 묘사할까 싶어서.
A: 그런데 내가 나와 다른 범주의 차별 피해자를 묘사할 때는 늘 내 말로, 내 방식으로 설명틀을 만들어내지?
B: 아까 왜 특정 차이가 차별로 만들어지는지 얘기했잖아. 차별을 엮어내는 고리 자체를 바꾸는 걸 목표로 삼을 순 없을까?
A: 위아래, 앞뒤,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는 선 긋기 자체를 바꾸는 것? 우리, 몇 해 전에 회 먹으러 갔던 해변 기억나?
B: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대단했지. 저 멀리 있던 바다가 순식간에 코앞에 해안선을 그려서 깜짝 놀랐잖아.
A: 그치. 모래사장과 바다의 경계가 순식간에 허물어졌지. 간밤에 보았던 해안선과 아침에 보았던 해안선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어.
B: 그뿐이야? 파도는 늘 넘실거리면서 우리가 그리거나 새긴 것들을 지웠잖아. 우린 또 다시 그리고 또 지워지고.
A: 차별을 만들어내는 범주와 경계에 고정되지 말고 우리도 넘실거렸으면 좋겠다.
B: 날은 덥고 바다는 생각나고, 비·회·술·벗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우리 ‘나머지 반’끼리 번개 해볼까?
A: ‘나머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정정하면, 생각해볼게.

 

인권오름 제 447 호 [기사입력] 2015년 07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6] 자유  (0) 2019.06.10
[인권단어장 5] 모욕  (0) 2019.06.10
[인권단어장 4] 연대  (0) 2019.06.10
[인권단어장 2] 존중  (0) 2019.06.10
[인권 단어장 1] 인간 존엄성  (0) 2019.06.10

인권오름 제 443 호 [기사입력] 2015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나홀로 존중?

A: 너,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다. 왜 사람들과 통 어울리질 않아? 전엔 안 그랬잖아?
B: 창피하고 힘들어서
A: 뭐가 창피해?
B: 내가 내세울 것도 없으면서 있는 척했던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이 날 그냥 끼어주는 척 했던 걸 날 진짜 받아들인 걸로 착각한 것 같고, 뭐 여러 가지로…. 한마디로 주제파악을 못했던 것 같아.
A: 그래서 혼자 뭐 하는데?
B: 응, 자존감을 좀 키워 보려구
A: 자존감? 그걸 혼자서 어떻게 키우려고?
B: 뭐, 열심히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면서 나부터 돌봐야지. 돈 쓰는 습관도 바꾸고. 목표를 세워 하나씩 성취 해내야지. 내 주제를 모르고 오지랖을 떨었던 것 같으니까, 날 책임질 줄도 모르면서 남 걱정 하는 것 그만둘래.

A: 에효, 네가 내 거울 같았는데 난 어쩌라구.
B: 거울?
A: 그래.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가다듬듯이, 난 네 눈과 생각에 비친 나를 통해 나를 봐왔거든. 네가 날 칭찬해주면 난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 뿌듯해하고, 네가 지적하는 내 언행을 곰곰이 씹어보고. 무엇보다도 내가 무시당했다고 여길 때마다 네가 날 응원해줬잖아.
B: 그게 뭐 대단한 거라구.
A: 나한텐 대단하거야. 네가 보여주는 그런 반응들 때문에 난 적어도 의미 있는 존재다, 나는 존중받고 있다, 그런 느낌을 가졌거든.
B: 나 말고도 너한테 반응을 보여줄 사람들은 많잖아?
A: 맞아. 너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내게 어떤 반응을 해주기 때문에 내가 무시 또는 존중을 체험할 수 있는 거지. 너 또한 그랬잖아. 그래서 네가 혼자 자존감 키우겠다는 그게 걱정돼.
B: 왜?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날 좀 자랑스럽게 만들어보겠다는 데.
A: 존중은 날 존중해줄 타인 또는 타인들을 필요로 해. 그런데 너는 존중보다는 평가를 의식하는 것 같아. 골방에서 기술을 연마하는 것처럼, 실적을 달성하는 것처럼 존중감을 만들어보겠다는 것인데, 사실 네가 키우고자 하는 것은 위신, 실력, 뭐 그런 거 아닐가? 또 네가 받고자 하는 것은 네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위신과 실력 같은 것에 대한 평가와 인정이 아닐까? 그런 업적이나 실력 같은 건, 남을 의식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남에게 무관심할수록 잘 키울 수 있을지 몰라. 반면에 존중은 사람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거잖아. 너 홀로 수련하겠다는 건, 상호존중을 표현할 줄 아는 존엄성과는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
B: 그럼, 나한테 어쩌라구. 여러 관계에서 계속 주눅 들기만 하는데.

존중의 상호성

A: 딱히 해줄게 없어서 나도 속상해. 나도 날 평가할 때마다, 타인에 대한 알량한 관심보단, 보란 듯이 성공해서 베푸는 게 더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가끔 해.
B: 나 때문에 너까지 주눅 드는 것 같아 미안하네. 우린 존중에 왜 이리 인색한 걸까? 존중이란 게 맘껏 표현한다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에 대한 존중이 깍이는 것도 아닌데
A: 맞아. 내가 아이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른으로서 내 가치가 높아지는 게 아니고, 내가 비-한국인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한국인으로서 내 가치가 높아지는 게 아닌데, 왜 타인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면서 자기 존중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걸까?
B: 비교와 평가와 배분이 너무 지배적이어서 아닐까?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이겨야지’란 생각에 집착하게 돼. 이겨야만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인정받을 수 있고 몫이 커진다고 생각하게 돼. 남과 비교해서 우수한 평가를 받아야만 대접받을 만한 것이라 여겨져.

A: 존중의 핵심은 상호성인데, 상호적이지 않고 뺏고 빼앗는 경쟁을 통해 쟁취하는 ‘몫’으로 생각해서일거야. 몫에 대한 평가에 익숙해지다 보니 지위나 위신을 챙기는 것과 존중을 혼동하게 된 것 같아. 목표달성과 상호존중은 다른 거야. 상호존중은 너와 내가 지금껏 해왔던 방식으로 서로 표현하고 반응하는데서 만들어지는 거야.
B: 네 말에 동의하면서도, 나도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인정받고 싶고 우러름 받고 싶은 것과 존중이 왜 다를까?
A: 인간은 여러 모로 불평등하지. 대표적으로 능력이 불평등하다고들 말해. 몫의 배분을 위한 평가에선 능력을 기준으로 삼는 게 공정하다고들 해. 그게 왜 얼마나 공정한지 따져 봐야할 게 많아. 설령 능력을 공정한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할지라도, 평가를 위해 늘 계산을 하고 비교를 하는 게 왜 일부 특수한 관계가 아니라 일반적인 관계 전반에 적용돼야 할까? 왜 다양한 능력 중에서도 특정 능력에 대해서만 몰아주기가 지나칠까? 그런 비교와 평가와 배분은 이미 지나치게 많은 관계와 제도를 장악하고 있어. 우리가 그런 기준을 죄다 무시해버릴 수는 없겠지만, 그런 불평등조차도 사람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바탕으로 구성됐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어.

존엄성은 존중을 통해 드러난다

A: 저 뉴스 저거 뭐야? 또 손님이 종업원의 무릎을 강제로 꿇렸다고 하네.
B: 짜증나. 무릎 꿇리는 게 무슨 유행인가 봐. 그렇게 하면 자기 위신이 높아지는 줄 아는 걸까?
A: 아무리 실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해도 사람들은 원칙상 평등한 거니까 그런 식으로 타인의 인격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일은 금지돼야 하는 거 아냐?
B: 그러게. 그럴 때마다 나오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이 난 정말 싫어. 일하러 갈 때마다 자존감을 항아리에 두고 나간다는 무슨 드라마 대사도 있었어.
A: 살려고 하는 일인데, 살려는 게 존엄성을 포기해야 하는 거라니. 살기 위해 죽으라는 말처럼 들려.
B: 아이구, 답답해. 존엄성을 끄집어내 보여줄 수도 없고. 우화속의 토끼 간처럼 꺼내 쓸 수 있는 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A: 사실 우린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거야.
B: 무슨 말이야?
A: 우리가 모든 사람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하다고 할 때, 그 존엄성을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된 가치로 본거라고 했잖아.
B: 그랬지. 사회적 지위나 위계로 인한 명예는 그럴만한 특별한 사람에게만 주어진 것이지만, 존엄성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것이니 평등하다 했지.
A: 그런 평등한 존엄성은 인간의 어떤 속성을 본질로 한 게 아니야. 그러니까 존엄성의 증거 같은 건 없는 거야. 우린 서로를 존엄한 ‘셈 치는’ 거야.

B: ‘척’을 하고 ‘셈 치는’ 거라면, 우리가 존엄성에 대해 서로 뭔가 짜고 있다는 거야?
A: 평등한 존엄성에 대한 인정은 서로를 존엄한 사람으로 대하기 위한 실천의 약속이라고 했잖아. 네가 ‘착한’ 속성을 가졌기에 존엄하다고 한 게 아니라, 네가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하다 합의한 거야. 이제 너와 내가 할 일은 서로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그걸 인정하고 표현하는 거야.
B: 표현하지 않는 감각은 감각이 아니라던 광고 문구 같네. 존엄성을 어떻게 드러내지?
A: ‘존중’을 통해 드러내는 거야. 존중이란 한마디로 누군가를 사람으로 여기고 사람으로 대하는 거야. 우리 서로가 사람대접을 하고 받음으로써 사람다워지는 거지. 이건 사회적 상호관계의 모든 순간에 늘 요구되는 거야. 끊임없이 표현돼야 하는 거지.
B: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 솔직히, 누가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부터가 문제네.
A: 그렇지.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해서 누구나 사람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는 게 아픈 현실이지. 사회마다 자기네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방식에서 존중을 표현하지 않고 정반대의 표현을 고집할 때가 많아. 가령 특정 사람(들)이 자신을 사람으로 드러내는 방식을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아. 그런 사람들은 성원으로서 인정과 불인정의 경계 위에서 숨죽이며 눈치를 봐야 돼.
B: 능력 격차를 따져서만이 아니라 단지 주류와 다르다는 것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잖아?
A: 존중은 타인에 대해 내가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 있고, 나 또한 타인으로부터 그런 영역이 있다는 걸 인정받는 거야. 비교해선 안되고 비교를 통해 우열을 나눌 수 없는 그런 게 있다는 걸 서로 인정해줘야 해.

존중의 표지판

B: 솔직히, 모든 인간은 존엄하니까 존중해라! 그렇게만 명령한다고 누가 듣나? 표지판 없이 안전운전하란 말과 같아. 사람이 존엄을 유지하려면 말로만이 아니라 존엄을 지킬 수단이 보장돼야 하는데, 그런 수단에는 신경 안 쓰고 각자 알아서 ‘나는 존엄하다’고 주문을 외우라고 시키는 것 같아.
A: 그렇지. 차선도 긋고 신호체계가 있어야지.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이 뭔지를 확인시켜주는 표지가 필요해.
B: 어려운 것 말고, 우리가 늘 걷는 거리, 부딪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걸로 생각해보자. 음, 가령 사람들 사이에 주고받는 신호, 표지판 같은 걸로 말이야.
A: 사람들 사이에선 서로의 얼굴을 존중해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 사람이 여기 있는 걸 인정하고, 그 사람이 있는 듯이 행동해야지. 가령 인사를 한다든가, ‘고맙습니다’ 또는 ‘실례합니다’ 등의 말을 주고받는다든가.
B: 음, 그렇다면 ‘투명인간’ 취급은 정반대의 표지겠네. 특정 사람(들)에 대해 그들이 여기 없는 듯 행동하고, 있어도 ‘감정’ 등 인간성의 중요한 요소를 빼놓고 ‘기능’만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것 말야.
A:사람들 관계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제도적·구조적으로 없는 사람 취급하는 일도 많아. 그런 제도 속에서 사람들의 상호작용만으로 ‘같이 여기에 있는’ 사람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지.

B: ‘투명인간’ 취급 말고도 사람이 아닌 듯 대하는 건, 존중하지 않는 거겠지? 가령 사람을 물건 또는 기계처럼 다룬다든가, 의존이나 미성숙을 이유로 온전한 사람대접을 안 한다든가, 사람 이하로 취급 하는 거.
A: 물건 버리듯이 하루아침에 문자로 해고 통보를 날리는 거?
B: 복지 수급을 받는다고 해서 사람 구실을 못한다고 무시하는 거?
A: 또 있어. 사회적 약자라고 하면 보살핌을 받기만 해야지 자기 삶의 조종 장치를 쥘 생각을 갖지 말 것, 주는 쪽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 것, 뭐 이런 요구들
B: 우리가 언급한 경우에서마다 그게 만약 나였다면, 이 사회에서 없는 존재나 군식구 취급을 받는 느낌일거야. 그럴 때, 존중의 표현을 받지 못했다고 따질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냐? 말로는 존엄성을 설교하면서 무시나 경멸을 없는 듯 연기하는 사람들한테 들이 밀 레드카드 같은 게 있어야지.
A: 그런 표지가 인권이잖아. 인권은 최소한의 사람대접을 설명해주는 합의된 기준이야. 한 사회의 구성원이 사람다움을 유지하려면 사회가 무엇을 보장해야 하는지를 지시한 거지.
B: 존중은 개인적·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표현돼야 존엄성을 드러낼 수 있는 거겠지. 나와 너 같은 관계에서의 상호존중 만이 아니라 여러 관계들의 상호존중을 북돋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해.
A: 그런 환경을 만드는데 자신을 출현시키는 것, 참여하는 것 또한 존엄성의 표현, 즉 존중이야. 너 인제, 골방에서 홀로 존엄성을 쌓겠다는 말은 하지 않겠지?

 

인권오름 제 443 호 [기사입력] 2015년 06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6] 자유  (0) 2019.06.10
[인권단어장 5] 모욕  (0) 2019.06.10
[인권단어장 4] 연대  (0) 2019.06.10
[인권단어장 3] 차별  (0) 2019.06.10
[인권 단어장 1] 인간 존엄성  (0) 2019.06.10

인권오름 제 439 호 [기사입력] 2015년 05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 [인권단어장]은 [인권문헌읽기]를 마치고 새로 시작하는 기획입니다. 인권에서 자주 쓰이는 말들의 의미를 대화를 통해 생각해보는 기획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게 시작하지만, 점차 나아지는 기획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글쓴이 류은숙-

- 에휴!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어.
- 쯧쯧! 한숨이 하늘을 찌르겠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인간 존엄성’이 어디 가겠어?
- 인간 존엄성? 그게 뭔데? 난 그 말을 들으면 오히려 무력하고 막연해서 화가 나.
- 인간 존엄성은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지.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라 존엄성에 대한 상상력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많은 걸 연결해줘. 이를테면 모든 인권의 마중물이라 할까? 네가 지금 인간의 가치가 대접받지 못하는 걸 한탄하는 것도 존엄성에 대한 생각이 있어서이지 않을까?
- 뭐, 그렇긴 하지만…. 뭐 내세울 만한 지위나 자랑거리가 있어야 대접받지, 나같이 하찮은 ‘노바디(Nobody)’에게 무슨 존엄성이 있겠어?
- 그건 아주 과거로 후퇴하는 생각이야.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 기간, 사람들은 존엄성에 대해 네가 말한 것처럼 생각했어. 높은 서열의 지위(신분)에 속하거나 뛰어난 덕을 지녀야만 존엄하다고 여겼어. 존엄성의 어원인 ‘dignitas’에는 그런 위계적 요소가 담겨있어. 존엄성은 원래 ‘공경을 요하는 가치’인데 우러름을 요구하는 가치란 게 평등하기보다는 차별적일 수밖에 없는 거야. 높은 집안에 잘 태어나거나 재산이 많거나 명예로운 자질을 갖거나 인데, 명예로운 자질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조건으로 하는 거였어. 그러니까 어차피 존엄성의 조건은 동어반복이야. ‘천한’ 다수와 구별되는 ‘귀하디귀한’ 소수를 위한 용어가 존엄성이었어. 요즘 말로 하면, 보통 사람이 아닌 위대한 사람의 특성인 거지.
- 그런 존엄성이 어떻게 인권의 마중물이라는 거야?
- 존엄성의 성격을 싹 바꿨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저항으로 존엄성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어. 즉, 특수한 게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으로,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게 아니라 평등한 것으로 탈바꿈했어.
- 도대체 무슨 말인지….
- 현대의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 존엄성은 ‘잘’ 태어나는 걸 조건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으로 충분해. 특별한 소수의 존엄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것이니 보편적인 거야. 존엄성을 지위‧재산‧덕과 명예 등 외적인 성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된 가치로 본거야. 또 모든 사람이 일체의 특질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갖는 존엄성이니 평등한 거야. 어떤 사람의 존엄성도 다른 누구보다 덜하거나 더하지 않다는 거지.
- 어떻게 그런 큰 변화가 생겼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 근대인권혁명을 통해 존엄성의 위계적 요소를 떨어뜨리고 부숴왔어. 결정적으로 인간 존엄성의 의미를 확인한 것은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이야.
- 왜 하필 세계인권선언이 계기가 된 거지?
- 세계인권선언의 배경을 생각해봐.
- 두 차례의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핵폭탄…. 존엄성과 상반되는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지.
- 맞아. 결코 다시는 벌어져선 안 될 참상을 겪은 사람들에겐 근본적인 가치의 전환과 재확인이 절박했어. ‘다르게 살자’는 구호만으론 될 일이 없어. 구체적인 실천의 기준과 약속이 필요했지. 그게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이야.
- 그 이전 시대에도 인권선언은 많았잖아? 인간 존엄성이 세계인권선언에서 특별할 게 뭔데?
- 뭘 근거로 인간이 인권을 갖느냐, 왜 인간이 존엄하냐는 질문에 대한 접근방식도 답도 다르기 때문이야. 이전 시대의 인권선언은 절대자(신) 또는 신을 대신한 ‘자연’에 기대거나 인간의 ‘이성’을 근거로 인간 존엄성을 정당화했어.
- 세계인권선언의 존엄성은 뭐가 다른데?
- 신이나 자연의 권위를 빌려서가 아니라 존엄성을 ‘인간끼리의 약속’으로 강조한 점이 달라. ‘인간이 조물주의 형상대로 창조됐으니 존엄하다’거나 ‘만물의 영장’이니까, ‘이성을 가졌으니까’ 등등의 설명을 모두 제쳐두었어. 특정 종교나 사상을 뿌리로 하는 일체의 것들을 무시하자는 의미에서가 아니었어.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종교와 사상과 신념, 역사와 문화를 가진 다양한 사람과 민족과 국가들이 있어. 이들 중에 누구의 것을 선택하거나 배척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차이 속에서도 ‘중첩되는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고 봤어. 아무리 달라도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자는 데서는 겹치는 합의가 있다고 본거야.
- ‘중첩되는 합의점’이라 …. 그럼, 합의의 목적은 뭐야?
- 실천을 강조한 거지. 인간 존엄성이 이런저런 근거로 정당화된다고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실천을 위한 초석으로 삼는 걸 중요시한 거야.
- 그럼,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인간 존엄성의 의미는 뭐야?
- 선언의 제정자들은 그 개념에 대해 콕 집어 정의하지 않았어. 인간 존엄성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부족한 게 아니라 너무 많다고 봤기 때문이야. 아주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 사상과 신념들 속에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강력한 지지가 있다고 봤어. 그리고 인간 존엄성이란 게 어떤 특질이나 본질을 근거로 한다는 시각을 거부했어. 섣부르게 본질을 규정하는 게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고 배척하는 구실이 돼온 역사가 있잖아. 그래서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동등한 내재적 가치일 뿐 어떤 특별한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야. 내재적이란 건 기본 장착된 거니까 분리할 수도 없고 줬다 뺐었다 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말로 하면, 불가양성과 불가침성을 갖는다는 거야. 모든 인간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거지. 이런 존엄성을 경제적‧정치적 이익이나 그 어떤 것과도 거래할 수 없는 비타협적인 가치로 삼자는 게 세계인권선언의 기본적 약속이야.
- 흉악 범죄를 저지르거나 파렴치한 사람의 존엄성도 그렇다는 거야?
- 물론이지. 존엄성은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거니까,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치러야 하는 것은 그 죗값이지, 존엄성을 박탈당할 수는 없는 거야. 흔히 행실이나 업적을 따져서 ‘인간 자격이 있네 없네’ 따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에 걸맞은 평가와 처벌 또는 보상이지, 인간 존엄성을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야. 타인의 존엄성을 재단하고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흔들리는 건 바로 나의 존엄성의 뿌리야. 인간 존엄성은 상호적이고 관계적인 거니까.

실천을 위한 약속의 전제

-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간 존엄성이란 게 너무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거 아니야?
- 나는 오히려 다른 예를 들고 싶은데. 인간 존엄성을 ‘너는 온 우주에 하나뿐인 존재’, ‘너는 뭐든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란 식으로 말로 치켜세울 뿐이거나 ‘사회가 너를 어찌 대하든 네 자신이 무시하면 괜찮다. 내면의 평화와 자존감을 키워라’는 식으로 주문하는 것이 오히려 존엄성을 낭만화하는 것 같아. 정작 존엄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같이 뭘 실천하자고 하면 내빼잖아? 그런 게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 아닐까? 존엄성은 실천을 위한 약속의 전제란 걸 기억했으면 해.
- 지금 하는 말은 인간 존엄성과 인권의 관계의 문제를 가리키는 거야?
- 맞아. 인간 존엄성이 인권의 기초이긴 하지만 둘이 같은 건 아니야. 인권은 인간 존엄성을 현실로 구체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어. 존엄성을 실현하는 삶이 목적이라면, 인권은 그것을 위한 사회적 실천의 세트라고나 할까.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게, ‘적어도’ 이걸 지켜줘야 한다는 테두리를 만들도록 해.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기준과 합의가 있어야 실천 여부를 따질 수도 있지.
- 그럼, 구체적인 권리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존엄성은 쓸모없는 거 아냐?
- 존엄성은 ‘쓸모’에 종속되지 않아. 설령 우리가 특정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또는 다수의 타인이나 국가가 우리의 권리를 인정하려 들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우리 존엄성을 갖고 있고, 이 존엄성은 결코 앗아갈 수 없는 거야. 쓸모가 있고 없고를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인간 존엄성이니까. 흔히 인간 존엄성을 인권의 초석이라고 하는데, 기본 중의 기본 원칙이라는 말이야. 세상에는 쉽게 합의할 수 없고 서로 다투는 권리와 원칙들이 많아. 이것들이 다툴 때마다 보이지 않는 심판 역할을 하는 게 존엄성이야. 서로 간에 조정이 필요한 여타의 권리나 원칙들과 달리, 존엄성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기 때문에 모든 권리와 원칙들의 토대이고 초석이라 하는 거야.
- 결국 존엄성의 쓸모가 있다는 말 같은데.
- 하하. 쓸모란 수단을 강조하는 것 같으니 존엄성의 ‘힘’이라고 말하는 게 어떨까? 때론 무력하고 모호해 보여도, 존엄성은 인간다운 삶의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버티는 힘이 돼. 현실적으로 권리의 보장이 잘돼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존엄성을 호출하진 않을 거야. 존엄성은 눌리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과 모욕을 드러낼 수 있어. 존엄성에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은 부당한 처우를 문제 삼고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 존엄성은 지금은 안 보이는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버팀목이야. 또 존엄성은 권리의 왜곡을 막을 수 있어. 흔히 재화나 서비스를 받으면 권리가 충족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재화나 서비스가 전달됐다고 해서 존엄성이 존중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 오히려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낙인을 찍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재화와 서비스가 이용될 수도 있어. 권리의 가면을 쓴, 존엄성을 위협하는 접근을 가려내는 것이 존엄성의 고유한 힘이야.
- 존엄성의 힘? 존엄성을 말하면 코웃음 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은데.
- 왜 우리가 인권을 받아들이고 인권을 실천하려 하는지, 환기가 필요할 때가 있어. 탁하게 고인 공기를 환기시키듯이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감정,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현실을 환기시키는 공기의 주입이 필요해.
- 그러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의 존엄성을 느낄 수가 없는 것 같아. 타인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존엄성에 찬물을 끼얹는 걸 거야. 아주 가끔이라도 존엄성이란 말에 스파크가 일었으면 좋겠어.
-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자동적인 게 아니야. 스파크를 일으키려면 뭔가 계속 자극하고 부딪쳐야지. 존중도 익히고 가꾸고 훈련하는 게 아닐까?
- 존엄성도 어렵지만 존중이란 말도 어려워. ‘존중’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존중받지 못하는 건 수치스럽고 우울하고 화나고, 감이 좀 오는데, 존중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 존엄성을 존중한다고 말하지, 평가한다고 말하진 않잖아. 왜 그런지, 존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다음에 얘기 나눠보자.

 

인권오름 제 439 호 [기사입력] 2015년 05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권단어장 6] 자유  (0) 2019.06.10
[인권단어장 5] 모욕  (0) 2019.06.10
[인권단어장 4] 연대  (0) 2019.06.10
[인권단어장 3] 차별  (0) 2019.06.10
[인권단어장 2] 존중  (0) 2019.06.1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