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23 호 [기사입력] 2015년 01월 22일 17:46:0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두 명의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굴뚝에 오른 지 40일이 넘었다. 스타케미컬 노동자의 굴뚝 생활은 무려 240일이 넘었다. 다행히 쌍용차에선 교섭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또 다른 굴뚝들이 도처에 있다. 연일 터지는 노동자에 대한 모욕과 멸시의 사건들, 추락하고 깔리고 폭발하는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실업의 우울과 불안, 다가올 실업의 공포가 도처의 굴뚝들이다.

이전에도 노동자들은 송전탑이며 광고탑이며, 극한 곳으로 수시로 올라갔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이전엔 지나가면서 송전탑을 의식한 일이 없어. 근데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아 올려다보게 돼.” 그렇다. 사람이 둥지 틀 수 없는 곳으로 사람이 내몰리고 있다. 날이 궂거나 바람이 불면 가슴이 답답하고 조마조마하다. 영어의 ‘염려, 고통, 분노’는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데 그게 협심증의 어원이란 말이 실감난다.

가슴이 죄이는 듯 하는 것은 송전탑이나 굴뚝같은 극단적인 곳을 볼 때만이 아니다. 예외가 아닌 일상이 문제다. ‘수퍼갑질’이 아니곤 문제시조차 되지 않는 일상 속의 존엄성 유린은 자각증세가 없는 만성질병 같다. 특히 일상적으로 노동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일이 어느 때부턴가 공공연한 일이 되었다.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정당한 자존감과 자부심 대신에 비뚤어진 우월감과 열등감을 경합시킨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인데, ‘존중? 그건 어디서 파는 거에요? 얼마에 살 수 있어요?’ 식의 엉뚱한 접근이 퍼져있다.

현대 인권의 초석은 ‘인간 존엄성’이다. 초석이란 타협 불가능한 원칙이란 의미다. 인간 존엄성은 개인의 업적이나 성취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 존엄성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누구나 갖는 것이다. 이 존엄성은 인간의 ‘평등성’에 기반한 것으로 자연적‧세습적인 위계와 귀족주의‧엘리트주의 이데올로기라 할 것을 일체 거부한다. 모든 인간의 존엄한 가치는 비교하여 따지거나 경쟁으로 획득하는 상대적 가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절대적 가치이다. 인권의 핵심 가치인 ‘자유, 평등, 우애(연대)’는 이런 인간 존엄성에서 도출한 것이다. 자유란 ‘소비의 자유’가 아니라 위계적 제도가 양산해 낸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정신’을 말하고, 우애(연대)는 공동체적 삶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회적 관계의 질을 말한다. 평등은 이런 자유와 연대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 사회의 제반 활동에서 인간 존엄성을 척도로 삼는 것이다. 가령 인간을 한낱 자원이나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다룰 때 그것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원칙은 국제인권법과 헌법 등 법질서 전체에 적용될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행하는 제도나 정책 등 모든 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간 존엄성’을 정초한 대표 문서로 흔히 ‘세계인권선언’을 꼽는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1948)보다 한 발 앞선 존엄성의 전령이 있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목적을 담은 필라델피아 선언(1944)이다.

ILO는 일찍이 1919년의 창립 헌장에서 “항구적인 평화는 사회적 정의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류는 그런 정의를 추구하는데 실패했고 또 한 번의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인간을 사물처럼 취급하고 경제성장의 수단으로만 대하는 질서가 계속되는 한 전쟁은 언제나 일어난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완전히 증명되었다”. ILO는 전후의 삶과 국제질서를 이끌어 갈 원칙을 재확인해야 했다. 그 재다짐의 내용은 인간 존엄성을 모든 것의 정초원리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의 실현은 시장의 횡포를 사회 정의에 무릎 꿇도록 만드는 제반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재확인‧재천명한 원칙을 담은 것이 ‘ILO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이다. 필라델피아에 모여 만들었기에 그 도시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그 도시의 이름이 ‘우애’를 뜻한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반가운 것이다. 우리가 형제애와 자매애, 즉 우애의 정신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란 것을 이름 자체가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필라델피아 선언의 으뜸 원칙이다. 인간을 존엄하게 대한다는 게 한마디로 뭐겠는가? 사람을 사물 취급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를 ‘인력’이 아니라 ‘인간’으로, 노동력의 거래를 다른 물건처럼 ‘사고 파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는 ‘인력’으로서 ‘경제적 보상’만 받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다.

물질적 존중은 그때그때 일한 만큼의 대가가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의 안정과 지속을 위한 생활의 보장으로 실현돼야 한다. 정신적 존중은 구성원으로서의 자존감, 소속감, 연대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의 보장이다. 자신의 일에서 통제력과 재량을 발휘할 수 있고, 동료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노동자 개인과 조직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더 넓은 사회와의 연대감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물건과 달리 인간은 말을 하고 저항한다. 노동자의 물질적‧정신적 권리의 충족은 결과적으로 ‘그냥 주어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참여 속에서 추구할 권리이다. 단순한 혜택과 권리로서의 보장은 다르다. 권리로서 향유하기 위해선 노동자의 개인적 및 집단적 자유가 중요한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이런 내용들을 ‘사회 정의’의 구체적 내용으로 규정했다. 이런 사회정의의 추구가 목적이라면 경제는 그것의 실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선언을 유념한다면, 목적과 수단의 뒤집힘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것이 실천과제이다.

오늘도 우리는 도처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의 저항과 고난을 본다. 우리의 눈은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 착시현상을 일으켜선 안된다. 사회정의를 굴뚝 삼아야 한다. 시장 우위의 폭력성과 인간 존엄성 유린의 연기를 빼내야 한다. 그 연기에 눈물콧물 쏟고 있는 노동자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왜 극한투쟁을 하느냐? 그것밖에 방법이 없느냐?’는 말은 안 듣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무릎 꿇려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폭력적인 구조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왜 말로 하지 않고 극한투쟁을 하냐’는 공격을 자주 받았다. 킹 목사는“협상이야말로 우리의 행동이 원하는 궁극 목표”라고 답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위기와 긴장감을 조장시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를 곤경에 빠뜨리고 더 이상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즉 사회의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직접행동의 추구하는 바이다”

6년여가 되어서야 가능해진 쌍용차의 노사 협상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서럽다. 숱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이 만든 결과여서 기쁘지만, 노동자는 ‘말’에 낄 수 없는 존재, 대화와 협상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 사회의 잔인함에 입은 상처들 때문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의 말이 말로서 존중돼야 하며 정책과 조치들의 잣대가 돼야 한다. 오늘도 숱한 노동자들이 온 몸으로 말을 걸고 있다. 나는 처분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나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 당신과의 관계라고 말이다.

국제노동기구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ILO Declaration of Philadelpia, Declaration concerning the aims and purposes of ILO, 1944)

국제노동기구(ILO, 아래 ILO) 총회는 필라델피아의 제 26차 회기에서, 1944년 5월 10일, ILO의 목적에 관한 이 선언과 회원국의 정책 기조가 되어야 할 원칙들을 채택한다.

I
총회는 ILO가 근거하고 있는 기본 원칙들, 특히 다음 원칙들을 재천명한다.

a)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b)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c)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
d) 결핍과의 투쟁은 각국에서 불굴의 의지로, 그리고 노동자 대표와 고용주 대표가 정부 대표와 동등한 지위에서 공동선의 증진을 위한 자유로운 토론과 민주적인 결정에 참여하는 지속적이고도 협조적인 국제적 노력으로 수행돼야 한다.

II
총회는, 항구적 평화는 사회 정의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다는 ILO헌장속의 선언의 정당성이 경험적으로 완전히 증명되었다고 확신하며, 다음을 확언한다.

a) 모든 인간은 인종, 종교 또는 성별과 상관없이 자유와 존엄, 경제적 안전 속에서 그리고 평등한 기회 속에서 자신의 물질적 복지와 정신적 발전 둘 다를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
b) 이를 가능케 할 조건의 실현은 모든 국내 및 국제 정책의 핵심 목적이 돼야만 한다.
c) 모든 국내 및 국제적 정책과 조치들, 특히 경제‧금융 영역에서의 그것들은 이런 관점에서 판단돼야만 하며, 이 근본 목적을 달성하는데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만 채택돼야 한다.
d) 이 근본 목적의 견지에서 모든 국제적인 경제‧금융 정책과 조치들을 검토하고 심의하는 것은 ILO의 책무이다.
e) ILO는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관련된 경제‧금융 요소 일체를 고려한 후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규정들을 결정과 권고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III
총회는 다음 사항들을 실현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전 세계의 국가들에서 촉진되도록 하는 것이 ILO의 엄숙한 의무임을 인정한다.

a) 완전 고용과 생활수준의 향상
b) 노동자들이 최대한의 기술과 조예를 발휘하고 공동선에 최대한 기여할 수 있는 만족을 가질 수 있는 일자리에 고용되도록 할 것
c) 이 목적의 성취를 모든 관련자들에 대한 적절한 보장을 통해 달성하기 위하여, 고용과 거주를 위한 이주를 포함하여, 직업 훈련과 노동자의 이동을 원조하기 위한 시설들의 제공
d) 임금과 소득, 노동시간과 기타의 노동조건과 관련하여, 모두가 진보의 과실을 정당하게 공유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모든 고용 노동자와 그런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최저 생활 임금을 보장하는 정책
e) 단체교섭권의 실질적인 인정, 생산 효율성의 지속적인 향상에서의 관리자와 노동자의 협동, 그리고 사회적 및 정치적 조치들의 마련과 적용에서의 노사협력
f) 사회적 보호와 충분한 의료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 소득을 제공하기 위한 사회보장 조치들의 확대
g) 모든 직업에서 노동자의 삶과 건강을 위한 적절한 보호
h) 아동복지와 모성 보호의 제공
i) 적절한 영양, 주거, 여가와 문화 시설의 제공
j) 교육과 직업 기회의 평등성 보장

(IV, V 생략)

인권오름 제 423 호 [기사입력] 2015년 01월 22일 17:46:0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15 호  [기사입력] 2012년 09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드라마에서 자주 변주되는 소재 중의 하나가 ‘키다리 아저씨’이다. 어렸을 적 나의 애독서 중 하나였기에, 불우하지만 씩씩한 여주인공과 그녀를 은밀하게 돕는 부자 남성의 관계로만 그 내용이 소비되는 게 탐탁치가 않다. 제목은 ‘키다리 아저씨’이지만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라 고아원 출신 소녀 ‘주디’이다. 주디는 결코 후견인의 일방적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감정에 솔직하고 충실할뿐더러 사회의 편견과 배제를 날카롭게 뚫어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다.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원의 후원자로서 글재주가 있는 소녀 주디를 대학에 보내준다. 주디는 대학생활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편지에 담는다. 그 편지로 채워진 것이 소설 ‘키다리 아저씨’이다.

아주 어려서 읽었지만, 요즘 나는 사회보장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 이 소설 속 주디의 말을 인용하곤 한다. 가령 대학 예배에서 설교를 들은 주디는 분노한다. “가난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자비심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말하자면 유용한 가축이라는 식이더군요.” 덧붙여 주디는 어린 시절 학교에 구호품 옷을 입고 갔는데 그 옷의 기증자가 옆자리에 앉은 급우였던 일을 회상하면서 “저는 동정심을 갖고 다가와서 위로의 말을 하는 그 애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미워했어요. 특히 동정심이 있는 체하는 아이들은 더 미워했습니다.” 자선과 시혜 또는 구제라는 것들이 주는 자의 입장에서의 표현이지 받는 자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걸 주디는 지적한다.

주디는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즐기며 상상력이 풍부하다. 하지만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에 대해 토로하는 대목이 있다. 고아원이 아닌 ‘보통’의 ‘집’으로 들어가는 공상을 하는데, 그 공상이 집의 문 앞에 이르면 희미해진다고 슬퍼한다. “보통집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려는 집의 현관 안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통집”이라 말한 것을 나는 제법 살아야 맛볼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라 생각해본다. 직장이 안정되고 좋을수록 덩달아 든든한 사회보장이 있고, 불안정하고 권리가 취약한 일자리일수록 사회보장을 꿈꿀 수가 없다. 흔히 복지경험이 부족해서 복지에 대한 안정된 지지와 기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데, 우리는 문 앞에 서서 집안을 도저히 상상해볼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밝은 성격의 주디가 우울해하는 것은 사회적 배제를 절감할 때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주디는 다른 학생들이 읽은 것, 먹어본 것, 보고 즐긴 것을 직접 겪어본 일이 없다. 18년 동안 고아원에서 최저수준의 생존의 권리만을 보장받아온 삶이었기에 그런 삶에는 필요 없다고 여겨진 것들의 필요가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었다. 그래서 외계인 취급을 받게 된 주디는 학과 공부 대신에 타인과 어울리기 위한 남몰래 교양 쌓기 학습에 몰두한다. 그럴 때 쓰는 편지의 내용은 “아저씨, 대학생활에서 어려운 것은 공부가 아니더군요. 노는 것이 힘들어요. 저는 다른 학생들이 말하는 것 중의 반은 무슨 얘긴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들의 농담은 저만 빼고 누구나 알고 있는 과거의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세계에서 생소한 외국인이에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참 비참한 느낌이 들어요.”

‘최저선’이라는 것이 사회적 배제를 줄이고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리의 벽을 두껍게 하는 것이라면, 그 최저선으로 보장되는 생계에 대한 권리란 인권이 아닌 굴욕에 대한 적응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나의 주디는 당당하게 덧붙인다. “제가 딴 애들과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사회보장이 보장해야 하는 것은 주디의 말처럼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는 인간의 존엄성이며 최소한의 생계 보장은 그 수단인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보인다.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평등과 포함의 것으로 바꿔나가면서 주디는 “내가 묵인을 받아 이 세상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진실로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주디는 자기 발로 서게 되며 적극적으로 타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저는 누구에게 있어서나 가장 필요한 건 상상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만 있으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처해볼 수도 있어요. 상상력이 사람을 상냥하고 공감하고 이해심이 많게 하지요.”라고 말하는 주디의 상상력의 힘은 공상이 아닌 사회적 포함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난 6월 14일, 국제노동기구(ILO)는 사회보장 최저선에 대한 새로운 권고를 발표했다. 이 권고는 사회보장 최저선을 조속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며 특히 공식 경제 부문에 고용된 사람들뿐 아니라 비공식 부문에 고용된 사람들 또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ILO가 사회보장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권고를 발표하는 기자회견문에서도 밝혔듯이 50억이 넘는 인류, 사실상 대부분의 인간에게 적절한 사회보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ILO가 만들어온 사회보장 관련 기준의 초석으로 작용하는 일명 ‘필라델피아 선언’(1944년)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는 기본원칙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노동이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라면 인간의 생존 또한 상품을 팔았느냐 말았느냐에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사회보장을 임금보조 장치로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회’라는 말이 ‘경제’에 먹힌 지 오래됐지만, 진짜 사회보장을 추구하려면 경제회복이나 발전이 아니라 사회를 복원해야 한다는 말로도 읽힌다. ‘사회’가 빠진 생존 보장이란 것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사회가 빠진 생존 보장이란 흔히 ‘있는 쪽에서 베푸는 시혜’로 여겨진다. 호의를 베푸는 것이니 적당히 상대방의 자존심이나 자율성을 침해해도 된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생존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구차하게라도 살아야 할 굴레가 돼버린다. 그래서 사회보장을 임금 보조로서가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를 구성하는 것, 서로에게 보장하고 북돋아 주기로 한 약속이자 의무로 생각한다. 그 구체적인 실현의 예는 모든 사람에 대해 차별 없고 배제 없는 기본소득과 의료의 보장이다.

선거를 앞두고 사회보장에 대한 논란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 그럴 때마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과 실천에 관계없이 숱한 삶들이 도마 위에 올려진다. 받는 사람 내지 받아야 할 사람과 상관없이, 주지도 않고 생색내는 쪽의 관점에서 누군가의 삶이 비늘 벗겨지고 잘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설 속의 주디를 떠올린다. 사회보장을 ‘범국민특별안전기간 선포’로 바꿔치기하려는 시도나 ‘기업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며 갑옷부터 챙겨 입으려는 시도를 볼 때 주디라면 뭐라고 맞받아칠까 궁금해진다.

사회보장 최저선에 관한 권고문은 딱딱하고 원칙적인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 이런 문구에 구체적인 사람의 얼굴을 입혀본다. 그것은 소설 속 주디의 얼굴이 아니라 매일 부딪히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한 골목에서 폐지를 줍는 십여 명의 노인들, 같은 골목에서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한잔 술에 빠진 고단한 장년들, 고시원에서 슬리퍼 차림으로 나와 배회하는 청년들, 껌과 초콜릿을 파는 장애인, 간판이 자주 바뀌는 고만고만한 점포의 주인들, 그런 우리가 모여 사는 골목에서 ‘사회’의 ‘보장’을 경험할 수 있는 상상력이 발휘됐으면 한다.

사회보장 최저선에 관한 ILO 권고(2012년 6월 14일)

ILO 총회는 사회 보장에 대한 권리가 인권임을 재확인하며,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고용 증진과 더불어 발전과 진보를 위해 경제‧사회적으로 필수임을 확인하며, 사회보장은 빈곤과 불평등‧사회적 배제‧사회 불안을 줄이고 예방하며, 평등한 기회와 성‧인종의 평등을 증진시키며, 비공식 고용에서 공식 고용으로의 전환을 지원하는 중요한 도구임을 인정하며 … 이 권고를 채택한다.

I. 목적, 범위, 원칙

1. 이 권고는 회원국들에게 지침을 제공한다.
(a) 적용 가능한 것으로서 사회보장 최저선을 자국의 사회보장체제의 기본요소로 수립하고 유지할 것.
(b) ILO 사회보장기준에 따라,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더 높은 사회보장 수준을 점진적으로 보장하는 사회보장 확장 전략 내에서 사회보장 최저선을 이행할 것.

2. 이 권고의 목적상, 사회보장 최저선이란 빈곤‧취약성‧사회적 배제를 방지하거나 경감하기 위한 목적의 보호를 보장하는 것으로서 국가적으로 정의된 일련의 기본적 사회보장을 보장하는 것이다.

3. 이 권고가 효과를 발하는 데 있어서 당사국의 전반적이고 우선적인 책임성을 인식하며 회원국들은 다음의 원칙을 적용해야만 한다.
(a) 사회적 연대에 기반한 보호의 보편성
(b) 국가 법률로 명시된 급부에 대한 권리
(c) 급부의 적절성과 예측가능성
(d) 비차별, 성평등, 특별한 요구에 대한 반응
(e) 비공식 경제에 속한 사람들을 포함하는 사회적 포함
(f) 사회보장이 포괄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존중
(g) 목표설정과 시간표를 포함하는 점진적 실현
(h) 사회보장체계의 자금을 내는 이와 혜택을 보는 이들 간에 책임성과 이익간의 최적의 균형성취를 추구하는 동시에 복지재정에서의 연대
(i) 재정 마련과 전달 체계를 포함하여 방법과 접근의 다양성에 대한 고려
(j) 투명하며 책임성 있고 건전한 재정 운영과 행정
(k) 사회 정의와 평등을 정당하게 고려하는 재정적‧경제적 지속가능성
(l) 사회‧경제 및 고용정책과의 일관성
(m) 사회적 보호 전달을 책임지는 기관들을 관통하는 일관성
(n) 사회보장체제 전달을 강화하는 양질의 공공 서비스
(o) 불만과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의 효율성과 접근성
(p) 이행에 대한 정기적인 모니터링, 정기적인 평가
(q) 모든 노동자의 단체 협상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존중
(r) 여타 관련인들의 대표조직과의 협의뿐 아니라 고용주와 노동자의 대표 조직의 삼자 참여

II. 국가 사회보장 최저선

4. 회원국들은 국가 상황에 따라서, 기본적인 사회보장을 실현하는 자국의 사회보장 최저선을 가능한 빨리 수립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그 보장은 전 생애를 포괄하며, 국가 차원에서 필수적이라 정의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효과적인 접근 보장과 더불어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건강 보호와 기본적인 소득 안전에 대한 접근을 최소한 보장해야만 한다.

5. 앞서 언급한 사회보장 최저선은 다음의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보장을 적어도 포함해야만 한다.
(a) 국가적으로 정의된 일련의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 이것은 가용성, 접근성, 수용성 및 질이라는 범주를 충족시키는, 모성 보호를 포함한 필수적인 건강 보호를 구성하는 재화와 서비스이다.
(b) 아동에 대한 기본 소득의 보장. 적어도 국가적으로 정의된 최소 수준에서 영양, 교육, 돌봄 및 기타의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c) 적어도 국가적으로 정의된 최소 수준에서, 충분한 소득을 벌 수 없는 경제활동 연령의 사람에 대한 기본 소득의 보장. 특히 질병, 실업, 출산, 장애의 경우.
(d) 적어도 국가적으로 정의된 최소 수준에서, 노인에 대한 기본 소득의 보장.

6. 회원국들은 기존의 국제적 의무에 따라 이 권고에서 언급된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보장을 국가법과 규정에 정해진 대로 적어도 모든 거주자와 아동에게 제공해야만 한다.

7. 기본적인 사회 보장의 보장은 법률로 수립돼야만 한다. 국가법과 규정은 사회보장의 효력을 낳은 급부의 범위, 질적 조건과 수준을 명시해야만 한다. 또한, 공평하고 투명하며 효과적이며 간단 신속하고 접근성 있으며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불만과 이의 제기 절차가 명시돼야만 한다. 항의 절차에 대한 접근은 신청자에게 무료여야 한다. 국내법의 틀에 부응하는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

8.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보장을 정의할 때 회원국들은 다음 사항을 정당하게 고려해야 한다.
(a) 건강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필수적인 건강 보호에 접근한 금전적인 결과로 인해 곤궁해지거나 더 가난해져서는 안 된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무상의 출산 전후 의료 보호가 고려돼야만 한다.
(b) 기본 소득 보장은 존엄한 삶을 허용해야만 한다. 국가적으로 정의된 소득 최소 수준은 일련의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통화 가치와 빈곤선, 사회적 지원을 받기 위한 소득 기준점 또는 그에 필적하는 여타의 국내법이나 관행으로 수립된 기준점들에 부응해야 하며 지역적 차이를 고려할 수 있다.
(c) 기본 소득 보장의 수준은 국내법과 규정 또는 관행으로 수립된 투명한 절차를 통해 정기적으로 재검토돼야만 한다.
(d) 사회보장 수준의 수립과 재검토에 관하여 노사 및 관련자 대표조직의 삼자 참여가 보장돼야만 한다.


16. 사회보장 확대 전략은 취약 집단과 특별한 요구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보장해야만 한다.


20. 당사국은 진전을 평가하고 사회보장의 수평‧수직적 확산을 위한 정책을 토론하기 위한 국가적 협의를 정기적으로 해야만 한다.

23. 당사국은 사회보장 데이터 시스템에 담긴 사적인 개인의 정보를 보호하는 법률 구조를 수립해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315 호  [기사입력] 2012년 09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3 호  [기사입력] 2007년 02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물가는 뛰고 벌이는 신통치 않거나 아예 없다. 이럴 때 절실한 것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일텐데, ‘그림의 떡’으로 여겨지거나 먹어도 배고픔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것이 권리일 수 있을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우리 사회는 많이 갈구하는 듯하면서도 그만큼의 관심과 애정을 기울이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사회보장에 대한 2001년 국제노동기구(ILO)의 결의안이다. 문서의 제목은 ‘사회보장: 새로운 합의’라고 되어있다.

국제인권준칙 중에서 대표적으로 세계인권선언 22조는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했고, 25조에서는 사회보장의 여러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를 이어받은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규약 9조는 “모든 사람이 사회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대표적인 이 문서들에는 사회보장에 대한 정의가 없고 사회보장의 구체적 내용은 몇 가지 예시에 머물러 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가 사회보장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는 국제노동기구(ILO)의 사회보장 관련 원칙들을 보는 것이다. 여러 국제 전문기구들 가운데서도 국제노동기구는 1919년 창설 이래로 사회보장을 그 핵심 수임사항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을 통해 국제노동기구는 적절한 수준의 사회적 보호를 제공할 필요성을 천명했고, 사회보장에 대한 일련의 조약과 권고들(2006년 현재까지 31개 조약과 23개 권고)을 발전시켰다.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규약을 담당하는 유엔사회권위원회는 사회보장권의 구체적 내용을 국제노동기구 관련 규정에서 찾고 있다. 그런데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 규정은 일반적으로 고용과 연관된 사회보장이다. 즉, 노동자의 소득과 상황에 기반한 것으로 필수적인 사회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권리 또는 적절한 자원이 없는 사람 누구나가 ‘필요’에 기반하여 사회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권리보다는 좁은 의미이다. 물론 필라델피아 선언이나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 관련 결의안에서는 “사회보장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본소득과 포괄적인 의료보호를 제공할 것”을 거듭 원칙으로 선언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안점은 고용과 연관된 사회보장이다.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 관련 기준을 볼 때는 이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국제노동기구보다 광의의 개념의 사회보장을 규정하고 있는 유럽사회헌장에 따른 국가의 의무는 사회보장 제도를 설립하고 유지할 의무(12조 1항)이다. 유럽사회권위원회에 따르면 사회보장체제에 상당한 격차가 있거나 급여수준이 낮다면 12조 1항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 된다. 즉 사회보장제도가 실질적으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으려면 적어도 최소한의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뜻이다.

유엔 또는 국제노동기구의 회원국들은 국제노동기구 헌장과 세계인권선언, 그리고 여타의 국제인권조약을 수용함으로써 일정 수준의 사회보장을 자국의 모든 시민에게 제공할 의무를 갖는다. 그렇지만 이런 국제기준들은 회원국이 추구해야 할 실제적인 보장의 수준이나 우선순위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회원국들에 재량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오늘 읽어볼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에 대한 결의안에서도 마찬가지로 회원국들에 재량의 여지를 남긴 속에서 다음과 같은 사회보장에 관한 지도원칙들을 제시하고 있다.

- 적용범위는 보편적이어야 하고, 급부(benefits)는 충분해야 한다.
- 국가는 급부가 제때 정당한 권리로서 제공될 것을 보증하고 충실한 거버넌스 구조를 보 장해야 할 궁극적이고 일반적인 책임을 진다.
- 사회보장은 사회적 연대에 기초하여 조직돼야 한다. 특히 남성과 여성간의 연대, 다양한 세대 간의 연대, 취업자와 실직자 간의 연대, 부자와 빈민 간의 연대에 기초해야 한다.
- 사회보장 체제는 지속가능해야 한다.
- 일국 및 국제적 수준 모두에서 법의 지배가 보편화돼야 한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의 의미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라고 할 때 그것은 이전 시대의 구빈이나 자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빈 차원의 사회부조에서는 수급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베풀어준다는 은혜성과 그에 따른 굴욕적 조건을 달았다면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은 다르다. 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세계인권선언 22조에서의 표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생활 곤궁이나 불능 상태를 전제로 사회보장의 권리가 인권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권리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에 수급자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국가의 공적 부담에 의해 이뤄지는 게 그 성질상 당연하다. 그리고 권리이기 때문에 구빈의 차원을 벗어나 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고, 사회는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인간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시혜를 이유로 여타 인권에 대한 국가 개입을 마음대로 강화하게 한다든가, 자유와 교환하자는 식으로 여겨져선 안된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이행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의의 원칙에 부합돼야 하며, 국가의 적극적 활동이 여타의 기본권 침해를 합리화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사회보장의 이행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국가 개입의 강화가 여타 인권의 침해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는 방패막이는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자유의 강화이다.

인간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서로 연대해야 한다. ‘사회권’에서 ‘사회적’(social)의 어원인 ‘socialis’는 ‘결연’했다는 뜻으로 사회 속의 모든 시민이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연대라 할 때 ‘연대’의 어원인 ‘in solidum’은 채무자의 연대책임을 말하는 것으로 ‘전체로부터 부분을 분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채무자 각자가 전체로서 빚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이 훗날 공동체 관계, 상호의존과 부조, 구제와 지원이라는 개념을 표현하게 됐다.

인간은 사회 속에 존재하므로, 인간의 상호의존성과 연대는 인간의 동의에 선행하며 인간의 의사에 우선하는 자연적 사실이다. 인간이 이러한 인간의 결사로부터 물질적으로도 도의적으로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사실’로서의 연대라 말할 수 있다.

이로부터 생각할 수 있는 점은,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에 대해서 채무자라는 것이다. 각자의 능력과 활동의 자유로운 발전은 동시대의 다른 인간들의 능력 및 활동의 협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실의 발전단계는 과거 인간의 능력과 활동의 축적된 노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사회에 대해 지는 채무로부터 ‘의무’로서의 연대 개념을 도출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이나 교육을 통해 과거의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향유하면서 사회에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이 있는 한편 상속재산도 교육도 자본도 없어서 더 적게 받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사회적 ‘정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와 정의를 권리로 표현한 것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연대를 이해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상부상조의 미덕을 강조하는 해석에서부터 국가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까지 다양한 입장들 사이의 충돌이 존재하고 있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한 사회보장은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우선적으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류은숙] <2007년 02월 28일 인권오름 제43호>

사회보장: 새로운 합의(ILO. Social Security: A New consensus, 2001)

2. 사회보장은 노동자와 그 가족, 전체 사회의 복지에 매우 중요하다. 사회보장은 기본적 인권이며 사회평화와 사회적 통합을 보장하도록 도움으로써 사회적 결집을 이루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사회보장은 정부 사회정책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빈곤을 예방하고 경감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사회보장은 국민적 연대와 공정한 부담 공유를 통해 인간존엄성과 평등, 사회정의에 기여할 수 있다. 사회보장은 또한 정치적 통합, 권한 강화,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하다.

3. 적절하게 운영되는 사회보장은 건강보호, 소득 안전,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생산성을 강화한다. 사회보장은 성장하는 경제와 능동적인 노동시장정책과 함께 지속가능한 사회경제적 발전의 도구이다. 주목해야 할 점은 사회보장이 기업에게 비용인 동시에 사람에 대한 투자이며 지원이라는 것이다. 지구화와 구조조정정책으로 인해 사회보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4. 사회보장에 유일하게 옳은 모델이란 건 없다. 사회보장은 시간이 감에 따라 성장하고 변화 발전한다. 사회보장에는 사회부조, 보편적 계획, 사회보험, 공적 및 사적 설계가 있다. 각 사회는 소득안전과 건강보호에 대한 접근을 어떻게 해야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들 선택에는 각 사회의 사회문화적 가치, 역사, 제도, 경제 발전의 수준이 반영된다. 국가는 사회보장의 촉진, 증진, 적용범위의 확대에 있어 우선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모든 사회보장 체계는 일정한 기본적 원칙을 따라야 한다. 특히 급부는 안전하고 비차별적이어야 한다. 사회보장계획은 건전하고 투명한 방식으로 운영돼야 한다.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그 성취를 가늠하는 주요인이다. 신뢰가 존재하기 위해선 충실한 거버넌스가 필수적이다.

5. 정책의 최고 우선순위는 기존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회보장을 적용하는 것이다. 많은 국가들에서 사회보장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소규모 사업장 고용인, 자영업자, 이주 노동자, 비공식부문 경제활동 종사자(상당수가 여성)이다. … 특정 집단의 욕구는 다르며 일부 집단의 기여 능력은 매우 낮다. 사회보장의 적용범위를 확대할 때 이런 차이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 적용범위를 확대하려는 정책과 계획은 통합적인 국가 사회보장 전략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

6. 비공식 경제가 던지는 근본적인 도전은 어떻게 공식 경제에 통합하느냐이다. 이는 형평과 사회적 연대의 문제이다. 정책은 비공식 경제에서 이동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전체 사회 또한 비공식 경제의 취약 집단에 대한 지원에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7. 노동연령의 사람들에게 소득을 보장하는 최상의 방법은 존엄성 있는 일자리(decent work)이다. 실업자에 대한 현금 급여의 제공은 일자리를 구하는데 필요한 훈련과 재훈련 및 기타의 지원과 밀접하게 조응해야 한다. 장차 경제 성장에서는 노동력의 교육과 기술이 더욱더 중요해질 것이다. 적절한 생활 기술, 읽고 쓰고 셈하는 능력을 성취하고 인격 성장과 노동력 진입이 용이할 수 있도록 모든 아동이 교육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생애 전반에 걸친 교육이 오늘날 경제에서의 고용능력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다. 실업 급여는 의존성을 심화하거나 고용 장벽이 되지 않도록 설계돼야 한다.

8. 사회보장은 ‘성평등’의 원칙에 기반하고 이를 증진해야 한다. 이것의 의미는 똑같은 또는 유사한 상황에서 남성과 여성을 평등하게 처우해야 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여성에게 평등한 결과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들도 포함하는 것이다. 사회는 여성에게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돌봄노동으로부터 큰 혜택을 취하고 있다. 특히 아동, 부모, 허약한 가족 성원에 대한 여성의 돌봄이 그러하다. 여성들은 자신들의 노동 연한 동안에 이런 돌봄의 기여를 했다는 이유로 인생의 후반기에 체제적인 불이익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

9. 여성의 노동력 참여가 크게 늘어났고 남녀의 역할 변화도 그러하다. 따라서 남성을 생계책임자로 상정한 원래의 사회보장체계는 많은 사회들의 욕구에 더욱더 부응하고 있지 못하다. 사회보장과 사회서비스는 남녀평등에 근거하여 계획돼야 한다.

10. 많은 사회들에서 남녀 간의 지속적인 소득불평등이 여성의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에 영향을 끼친다. 지속적인 임금차별 철폐 노력, (제도가 없는 곳에서는) 최저임금제 도입을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모 중 어느 한 편이 자녀 양육을 하는 경우에 아동양육에 대한 사회보장급부는 돌보는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11. 고령화 현상에 당면하여 생산적 고용율을 높일 수 있는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12. …HIV/AIDS 확산으로 인한 폐해적 결과가 크다. 긴급하게 대응할 것이 요구된다.

13. … 법정 연금 제도는 적절한 급부 수준을 보장하고 국민적 연대감을 보장해야 한다. 기타 보충적 제도들에 대한 지원은 저소득층 또는 중간소득층을 겨냥해야 한다.

14. 지속가능하고 재정적으로 실행가능한 연금 체계가 장기간 보장돼야 한다.…

인권오름 제 43 호  [기사입력] 2007년 02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163 호 2009년 07월 29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역자 주>
2009년 7월 대한민국에서는 생존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물도 밥도 변소도 의약품도 의사도 협상도 막혔다. 뚫린 것이란 최루액과 테이저 건, 비처럼 쏟아 붇는 공포이다. ‘노동자의 인권’이란 단어가 통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 스스로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는 건 아닐까? 노동권을 인권으로서 고찰한 연구 보고서를 요약, 소개한다. 이 보고서의 원문은 http://www.du.edu/gsis/hrhw/working/2006/36-adams-2006.pdf 에서 볼 수 있다.

노동자의 인권: 핵심 노동권의 인권으로서의 성격과 구조에 대한 고찰

Labor's Human Rights: A Reveiw of the Nature and Status of Core Labor Rights as Human Rights(Roy J.Adams, McMaster University, 2006)

도입
인권은 모든 사람이 단지 인간임으로서 해서 갖는 권리이고 본질상 보편적이다. 설령 인권이 억압되거나 방임될 수 있을지라도 국가 또는 비국가 행위자가 법적으로 인권을 부여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빼앗아갈 수도 없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표현에 따르면 인권은 모두가 모두에게 진 의무이다.

권리의 종류로서 노동권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두 개의 의미를 지닌다. 넓은 의미에서 노동권은 국제인권장전에 포괄된 노동자의 권리를 포함한다. 좁은 의미에서는 흔히 노동조합의 권리로 언급되며, 이것은 노동조건의 수립에서 집단적 목소리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에 집중한다.

집단적으로 조직하고 협상할 권리로서의 결사의 자유와 고용 영역에서의 결사의 자유의 명시는 현대의 세계적인 인권 체제의 수립보다 앞선 일이다. 지구적 관심사의 초점인 인권의 유산은 1948년의 세계인권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면 결사의 자유는 1944년 국제노동기구(ILO)의 필라델피아 선언에서 보편적 권리로 분명하게 인정돼 있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훗날의 세계인권선언에 영감과 지침을 제공한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일부 국가에서 결사의 권리와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가 인권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고 정치 체제의 변화에 따라 확대되거나 줄어들 수 있는 제정법적 권리로 취급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고용 영역에 결사의 자유로 명시된 단체 협상의 인권적 성격

결사의 권리와 자신의 고용조건을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가 왜 인권으로 선포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의 정치경제적 제도의 발전을 고찰해야 한다.

노동권은 재산권과 밀접하게 얽혀있다. 18, 19세기 산업혁명 동안 자본을 공급하고 기업을 시작한 자본가 기업가가 생산과정의 최종 산물을 소유한다는 관례가 일반적으로 수립됐다. 이속에서 개별 노동자는 임금에 대한 대가로 자신의 노동력을 팔거나 자본가에게 고용되는 노동계약 시스템이 존재하게 됐다. 관례적으로 기업가가 최종 산물을 “소유”한다 할지라도 1800년경까지 일반적으로 인정된 바는 원자재를 보다 가치 있는 산물로 변형시키는 일차적 요소는 노동이라는 점이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누군가가 나무로 시작하여 의자로 마쳤다면 나무의 가치가 증가된 것은 무엇보다도 최종 산물에 녹아든 노동 때문이다.

산업혁명 과정에 농민들의 땅에 머물 권리와 거기서 먹고 입으며 살만한 양의 산물을 받을 수 있는 봉건 규범은 깨졌다. 자유노동이란 스스로 하는 것이며, 그것의 유일한 의무란 임금 계약을 이행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개별 노동자의 협상력은 자본가의 그것에 비해 아주 열악하기 때문에 임금 협상은 흔히 빈곤과 불안의 상태로 귀결됐다.

이런 조건에서 터져 나온 것이 ‘노동운동’이었다. 노동운동은 19세기의 공통되고 점증하는 현상이었다. 이 운동의 지배적인 흐름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 개의 주요 목적을 가졌다. 정치 영역에서의 민주주의는 피지배자에게 선출되는 정부와 피지배자에게 책임지는 정부를 의미하게 됐다. 사회주의는 사회의 생산역량을 자본가를 위한 이윤 생산의 장치가 아니라 인민의 이름으로 국가가 소유하고 만인의 이익이 되도록 운영하는 것이었다.

서유럽에서는 노동과 자본 간의 국가적 타협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작동했다. 이런 타협의 가장 공통된 형태는 노동측이 자본 측의 생산을 조직하고 주도할 권리, 소유권과 이윤을 취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반면 자본 측은 노동자의 결사의 권리, 노동자 스스로가 선택한 대표자를 통해 계약 사항을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경제적 및 사회적 정책에 대해 자본과 국가와 함께 결정할 권리의 인정이었다. 노동과 자본은 사회적 동반자가 될 것이라 말하게 됐다.

ILO의 지도를 통해 유사한 지구적 타협이 발생했다. 노동, 기업, 정부 대표자들이 ILO 연례 노동 회의에서 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상 협약에 합의하게 됐다. 그 후로 이들 협약에 담긴 원칙은 거의 모든 국가에 의해 인준됐고 ILO는 적극적으로 이를 증진했다. ILO 기준에 따르면 노동은 조직할 권리, 노동의 조건을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 경제사회정책의 결정과 운영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이들 기준이 완전히 존중된다 할지라도 노동자에게 인권을 제공하는지는 여전히 문제이다. 적어도 두 개의 문제가 발생한다. 첫째, 조직하고 집단적으로 협상할 권리는 조직과 단체협상을 안 할 권리도 포함하는 것으로 흔히 해석되고 따라서 집합적 대표성의 부재를 정당화하기도 한다. 둘째, 생산을 조직하고 지도하며 생산과정의 결과를 소유할 자본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협약은 노동자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한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노동자의 권리가 완전히 존중되려면 단체협상을 넘어서 경제적 기업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로 나아가는 것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첫 번째 부류의 해석은 잘못됐다고 본다. 단체 협상은 노동조합주의와 긴밀하게 결합돼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권리가 단체 협상을 안 할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결론짓기 쉽다. 하지만 인권의 관점에서 문제를 보면 두 권리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다수의 유럽 국가들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단체협약에 의해 포괄되는 상황이지만 큰 비율의 사람들이 노동조합원이 아니다. 공통적으로 협상권을 부여받은 노동조합들은 관련 협상 상황에서 ‘가장 대표성’있는 것으로 지명된 노조들이다. 결사에 참여할 권리 또는 하지 않을 권리는 자유를 강화하는 반면에, 단체협약을 자제할 권리는 자유, 민주주의, 인간 존엄성을 훼손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작업장에서의 노동자 대표성이 없는 기업에서는 고용주는 명령하고 노동자는 해고의 고통 때문에 그것들을 실행해야 한다. 복종을 위해 고용된다는 바로 그 사실이 노동자에게서 일종의 자율성 또는 책임성을 빼앗는다.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복종할 것이 요구되는 고용주의 도구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자의 상황은 자유의 심각한 축소로 나타난다. 요약하면 고용주는 자율성, 책임, 자유 없이 지내겠다는 약속을 노동자에게 받아내는 것이고, 이런 자질 없이 존엄성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의 유지를 옹호하는 이들의 공통된 반응은 노동조건이 단지 강요된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고용주가 개별적으로 협상한 것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전형적인 노동자의 협상력이 고용주의 그것에 비해 아주 열악하다는 점이다. 여기서 결과는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의 양자택일’일 뿐이다. 또한 어떤 규모의 기업에서든지 임금지불시스템 등 광범위한 노동조건은 집단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지 개별 협상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혹자는 이런 힘의 불균형에도 불구하고 자유의 가치란 노동자가 그런 제안을 수락하는데 있어 자유롭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인권에 대한 존중이 외관상의 자유가 축소되는 걸 필요로 한다. 가령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발적으로’ 노예로 팔수는 없다. 왜냐하면 노예의 조건은 인간의 기본적인 인간성을 부인하기 때문이다. 자본가의 고용과 자발적인 노예간의 유사성은 강력하다. 두 시스템 모두에서 인격의 존엄성에 대한 인권에 상반되는 조건에서 사람이 자기 자신을 타인의 통제 하에 둔다. 결과적으로 19세기의 노동권 옹호자들은 일방적인 고용주 통제하의 고용을 일컬어 ‘임금 노예제’라 했고, 그런 지위에 강제로 들어가든 자발적으로 들어가든 간에 노예제에 대한 반대처럼 윤리적으로 반대할 수 있는 지위로 봤다. 노예는 그럴 수 없는 반면에 고용 상태에서는 개인이 계약을 자유롭게 철회할 수 있지 않느냐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안적인 고용기회라는 것이 자신을 또 다른 자본가의 일방적 통제 하에 두는 것밖에 없는 경제 체제에서 둘 사이의 차이성은 구조적으로 사라진다. 계약이 자유이고 자발적이냐와 무관하게 ‘X가 Y의 도구가 될 것에 동의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틀렸다’.

국제체제에서 ILO는 결사의 권리와 단체협상의 권리의 구체적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구로서 지명돼왔다. 특히 ILO 결사의 자유 위원회는 다음을 포괄하는 권리를 수립했다.

1. 노동자의 조직을 결성하거나 가입할 권리
2. 스스로 선택한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
3. 노동자 조직이 스스로의 프로그램을 개발할 권리
4. 노동자 조직을 통하여 고용주에게 집단적 항의를 할 권리
5.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조직을 인정하고 단체협약에 도달할 목적으로 선의로 협상할 고용주의 의무
6. 교착상태의 경우 노동자의 파업권

ILO 원칙과 규범에 따르면 국가는 가능한 최대수의 노동자가 이런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표를 갖고 이런 개념의 단체협상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한 적극적인 책임을 진다. 또한 국가는 상호관심사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목적으로 경제사회정책에 관해 노동자 조직 및 고용주 조직과 협의할 적극적인 책임을 진다.

국제인권규범에 대한 준수 이끌기

국제인권장전에 규정된 권리 중에 노동자의 권리로 간주될 수 있는 권리의 범주는 아주 넓다. ILO의 1998년 ‘인권으로서의 노동에서의 기본원칙과 권리선언’에 규정된 다섯 개의 ‘핵심적인 노동권’은 인권장전에서 언급된 것들이다. 다섯 개의 핵심 권리란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아동노동․노예제․기타 형태의 강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소극적 권리)와 결사의 자유의 권리, 조직할 권리, 단체협상을 할 권리(적극적 권리)이다. 국제인권장전에 규정된 추가적 권리는 공정한 임금과 존엄한 생활을 제공하는 임금에 대한 권리, 안전하고 건강한 노동조건에 대한 권리, 유급휴가의 권리, 합리적인 노동시간에 대한 권리,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임산부 유급휴가의 권리, 파업권이다.

적절한 상황에서 노동권으로 간주될 수 있는 또 다른 권리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로부터의 자유, 계약상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투옥되지 않을 자유이다. 이들 권리는 강제노동이나 아동노동과 결합돼 흔히 위반된다. 평화적 집회의 권리는 파업권과 긴밀히 연관된다.

앞서 말했듯이 국제노동기준의 준수를 증진하는 주요기관은 ILO다. 핵심 노동권에 대한 1998년 ILO의 선언은 1995년 유엔사회개발정상회의의 결과이다. 정상회의는 핵심노동권의 인권적 성격을 선포하고 그에 대한 준수를 촉진할 것을 ILO에 촉구했다. 1996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생겼고 노동권 옹호자들은 회원 자격으로서 국제노동기준의 준수를 포함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조항’을 포함할 것을 촉구했다. WTO는 핵심 노동권에 대한 지지를 발표하기는 했지만 이 문제를 ILO에 위탁했다. 골칫거리는 기업을 규제하는 문제이다. 글로벌 컴팩트(Global Compact) 등 여러 지침은 ‘자발성’을 요구할 뿐이다. 최근 몇 년간 보다 강제적인 규제를 향한 움직임이 있으면서 상당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World Bank)은 아동노동, 강제노동, 고용 평등을 서둘러 기구의 결정에 포함시켰지만 노동조합의 권리를 수용하는 데는 느리게 움직였다. 한편 민간단체들은 기업들의 ‘자발적’ 선언에 만족하지 않고 외부의 조사자들이 기업의 관행을 조사할 수 있도록 관련 자료를 공개할 것을 요구해왔다. 그 결과 국제노동기준에 기반한 규범 형성을 과제로 삼거나 기업행위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토록 하거나 투자 결정에 국제노동기준의 준수를 반영토록 하는 등의 일을 과제로 삼는 독립 기구들이 급성장했다. 이런 실험들이 지난 이십 여 년 간 상당히 있었지만 이런 노력의 영향을 평가하는 기술은 아직 개발 단계이다.

국제적 차원에서 노동과 인권문제 전문가들은 핵심 노동권이 기본적 인권이란 것에 대한 강력한 합의에 도달했다. 또한 핵심 노동권의 인권적 성격은 철학적으로나 종교이론에서나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다. 국가만이 아니라 개인과 기업, 사회의 여타 단위는 이들 권리를 준수하기 위해 도덕적 및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

 

<인권오름 제 163 호 2009년 07월 29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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