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31 호 [기사입력] 2015년 03월 26일 8:54:00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는 이번호가 마지막입니다. [문헌으로 인권읽기]란 제목으로 24회, [인권문헌읽기]로 100회를 썼습니다. 긴 시간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마음 가다듬고 새로운 기획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글쓴이(류은숙)
오래전 영화에서 주인공은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쳤고, 요즘 사람들은 “리셋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 같다. 뭔가 이대론 안 될 것 같고, 불의와 불평등으로 꽉 막힌 벽 앞에서 문을 찾는 맘으로 하는 말일게다. 한 치 앞을 가늠하고 계획할 수 없는 불안한 삶에서 시계만 안정적으로 똑딱거린다. 누군가 답을 줬으면 좋겠는데 정부나 정치인이나 번지수 잘못 찾은 답을 폭탄처럼 투하하고, 답이 없으니 나도 대꾸하지 않겠다는 주변의 침묵만 깊어간다.
보낸 신호에 대꾸가 없는 것처럼 답답한 것은 없다.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당장 응답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보낸 메시지에는 답을 미루거나 무시하거나 심지어 삭제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서로 그러다 보면 데면데면해지고 아예 접속을 않게 된다. 인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권에 대한 호소는 간절히 응답을 원한다. 하지만 누군가 응답할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인권의 이행이 지체되거나 무시되고 심지어 인권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억압받는다. 인권이 작동하려면 응답받을 권리와 응답할 책임이 짝을 이뤄야 한다.
응답받을 권리는 최근 새롭게 떠오른 인권 목록이 되었다. 가칭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란 이름으로다. 2005년 유엔인권이사회는 ‘인권과 국제연대에 관한 독립 전문가’를 특별절차 중의 하나로 신설했다. 독립 전문가의 수임사항 중 하나는 ‘국제연대에 관한 권리 선언’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독립 전문가 버지니아 비 단단(Virginia B. Dandan)은 2014년 6월, 이 선언의 초안을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했다. 공인된 국제인권기준으로 채택되기까지 더 많은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이 초안을 통해서 이 시대에 요구되는 연대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초안은 국제연대를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관심, 목표, 행동의 수렴”(제 1조)으로 정의한다. “공동의 목적”이란 ‘2015년 너머 유엔 발전 의제’로 고려되고 있는 목표들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가령, 모든 사람을 안고 가는 경제 성장,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생산적인 고용과 존엄한 노동, 도시와 인간 거주지를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안전하고 활기차고 지속가능한 곳으로 만들기, 생태를 보호하고 회복하며 지속가능성을 증진하기, 감당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기 등이다.
초안은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를 기본적 인권(제 5조 1항)이라고 명시했다. 그런데 이 권리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국제인권조약들에서 모아낸 것이고 특히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세계인권선언 위에 국제연대의 기둥이 세워져 있음을 확인”(전문)했다. ‘국제’ 연대임을 강조한 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영토 안에서나 밖에서나, 국경을 넘어 보장받아야 할 것이 인권이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 또한 국경과 무관하게 지구적으로 도전받고 있는 문제란 점에서다.
초안은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의 주체를 “민족들과 개인들”(peoples and individuals)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민족들”에는 원주민과 소수민족처럼 익숙한 패러다임만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 바깥의 사람들도 포함된다. 가령 “더 큰 시민사회와 조직들 속에서 대표될 수 없거나 불충분하게 대표되며 고립되어진 지역 및 풀뿌리 집단들, 초국적 및 이산하여 다른 나라에 사는 집단 등 국경을 초월하는 사회 영역의 집단들”이다. 또 “국내 및 국제적 활동 모두에 동시에 참여하는 사람들, 공유하는 가치와 담론으로 묶인 사람들, 정보와 서비스의 촘촘한 교환에 연루된 사람들을 포함하는 초국적인 인권옹호 네트워크,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인터넷과 디지털 매체를 통해 연결되고 더불어 유사한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개인들의 가상의 공동체들”(제 6조)도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의 주체라고 했다.
권리의 주체가 있으면 의무를 지는 쪽이 있어야 한다. 초안은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의 의무부담자는 우선적으로 정부”(제 8조)라고 규정했다. “정부의 의무와 유사하거나 보완적인” 의무를 지는 비-국가 행위자(제 8조)도 중요한 의무부담자인데, 특히 “국경 바깥에서의 활동을 포함하여, 자국의 관할권 내 사기업의 행위와 태만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제 2조)에 비춰볼 때 사기업의 “윤리적 책임과 행동규범 준수”의 의무도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의무는 정부가 비준한 국제인권조약에 따른 법적 의무이고 지역 및 국제적 차원에서 합의한 약속과 결정에 따른 의무이다. 정부, 그리고 강력한 힘을 가진 사기업 등에게 의무를 준수하도록 하려면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 그리고 권리의 주체인 사람들의 참여와 기여가 필수적이다. 초안은 인권의 실현을 위한 참여와 기여를 또한 “권리”(제 5조 2항)라고 표현했다. 연대에 대한 권리는 곧 연대할 책임과 한 쌍인 것이다. 같은 동전의 이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리셋이 개인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필요한 때이다. 초안 제 12조에는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이 담겨있다. 하나같이 내 정부가 이 땅에서 또 국경 밖에서 벌이고 있는 일들이다. 맞잡은 손으로 같이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공동의 미래를 꿈꾸기 어렵다. 방관과 묵인이 제일 쉽다. 아무것도 안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방관은 결국 반-인권 행위에 대한 동조와 같지만, 동조에 대한 양심의 각성도 결국 각성하는 사람의 몫이다. ‘지금 내 손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의심도 역시 각성하는 자의 몫이다. 나와 우리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데 정부나 기업이 정의를 실현할 리는 없다. 누군가 같이 버튼을 누르면 조금은 덜 무섭지 않을까? 조금은 더 세게 누를 수 있지 않을까? 소리쳐 부르고 호출에 응답하는 것이 시작이다. 호출과 응답이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권리이자 정치적 책임이다.
국제연대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안문(Proposed draft 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and individuals to international solidarity) …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평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인정하며,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함을 선언하며,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세계인권선언 위에 국제연대의 기둥이 세워져 있음을 확인하며, … |
인권오름 제 431 호 [기사입력] 2015년 03월 26일 8:54:00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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