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5년 12월 8일 인권하루소식 제2954호> 

 

다가오는 12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다. 1948년 이날의 세계인권선언 채택을 기념하며 거기 담긴 약속의 실현을 온 인류가 다짐하는 날이다. 그러나 인권의 날을 눈앞에 둔 지금, 서울의 거리에는 스산한 바람만 몰아치고 있다. 서울 한복판에선 소위 '북한인권대회'라는 것이 열리고 있고 이라크파병재연장동의안의 국회통과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인권보장의 필수조건인 평화와 정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연일 죽어나가고 있고 매서운 바람이 가난한 이들의 신음소리를 할퀴고 있다. 이들을 위한 인권대회는 어디에 있고 언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참담한 물음 속에 우리보다 앞서 같은 일을 겪었던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임을 절감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이다. 킹 목사는 잘 알려진 대로 미국 흑인 민권운동의 지도자이며 노벨평화상 수상자였다. 그에 대한 지지를 아끼지 않으며 갈채를 보냈던 사람들이 그의 생애 말년에는 그를 외면한다. 그건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입장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 백인 자유주의자들, 유명 흑인 인사들의 압력으로 베트남전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던 그는 "자신의 양심이 다른 선택을 허락지 않기 때문에" 발언하기 시작한다.

1967년 4월 4일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에서의 "베트남 너머"라는 연설을 통해 그는 미국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며 미국이 자국내의 불공정을 외면하고 세계 평화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신의 저주와 분노가 떨어질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연설이 있은 지 꼭 1년 후인 1968년 4월 4일에 그는 암살당했다. 의문에 싸인 죽음이지만 그의 목소리를 두려워하고 싫어한 자들의 소행이라 여겨지고 있다.

양심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도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범죄의 증거가 속속 들어났는데도 파병연장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한반도 한복판에서 대북적대선동행위가 벌어지도록 좌시하는 일은 정신 나간 짓이다. 인권을 빙자하여 무고한 어린이들을 포함한 시민을 학살한 이라크 침략전쟁의 당사자가 북한을 상대로 한반도 한복판에 와서 소위 인권대회를 갖는 것은 위선이다.

북한과 이라크가 처한 상황은 다르지 않다. 둘 다 인권을 빌미로 한 미국의 전쟁책동의 희생물이고, 그에 동조하는 세력은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이러한 선동에 동원하고 있다. 북한인권대회와 이라크파병연장동의안이 출현하고 있는 이 현상을 눈앞에 보는 듯이 킹 목사는 말하고 있다. 왜 우리가 이 둘에 대해 반대하는지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

"베트남에서의 전쟁과 우리가 미국에서 전개해 오고 있는 시민권 투쟁 사이에는 아주 명백하면서도 알기 쉬운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의 시민권 투쟁은 빛나는 순간을 맞았습니다. 그때는 빈곤퇴치 프로그램을 통해서, 흑인과 백인을 불문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약속해 주는 듯했습니다. …그러다가 베트남에 군대가 파병되면서, 저는 이 빈곤퇴치 프로그램이 마치 전쟁에 미쳐버린 사회의 정치적 노리개마냥 무산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베트남 전쟁과 같은 모험들이 일종의 마력을 지닌 파괴적인 흡혈귀처럼 사람들과 기술과 돈을 계속적으로 빨아들이는 한, 미국은 가난한 사람들의 재활에 필요한 자금이나 에너지를 결코 투자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이 전쟁을 가난한 사람들의 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전쟁에 반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인구의 나머지 집단들과 비교해 볼 때, 전혀 비율이 맞지 않게 턱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아들들과 형제들과 남편들을 전쟁터로 보내서 싸우다 죽게 하는 행위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던 흑인 젊은이들을 8천 마일이나 떨어진 동남아시아로 보내, 그들에게 남서부 조지아나 동부 할렘 지역에서도 찾지 못했던 자유를 수호하라고 하고 있습니다.…저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토록 잔인하게 조종당하는 현실 앞에서 도저히 침묵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전쟁은 인권을 송두리째 날려버린다. 경제제재는 피를 흘리지 않지만 무고한 어린이와 여성과 노인과 시민들을 굶주리게 하고 에너지를 비롯한 필수자원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총성없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런 책동에 동원당하는 사람들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다.

북한인권대회를 위해 안락한 신라호텔에 머물고 있는 미국 시민들에게 자신들의 조국을 사랑했고 동시에 인권을 사랑했던 킹 목사의 말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대들이 북한적대정책을 선동하려고 쳐들이는 돈은 가난하고 일자리가 없는 미국 시민들을 위해 쓰여져야 할 돈이고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해 쓰여져야 할 돈이다. 그대들이 외치는 북인권을 진정 위한다면 미국 정부의 반평화 공세를 중단시키는 일이 먼저이다. 당신 정부의 정책 때문에 북한의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다. 그대들이 주입시키고 싶은 자유는 '주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결권 존중과 안전보장을 통해 확보될 수 있다. 이라크에 침략군을 계속 두면서 재건을 말하지 말고 차라리 그 비용을 이라크인들이 재건비용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저는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날의 세계에서 가장 큰 폭력의 행사자인 바로 우리 정부를 향해 분명히 말하지 않고서는, 흑인 거주 지역에서 억압받고 있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비판하는 저의 목소리를 결코 높일 수가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들을 위해서, 이 정부를 위해서, 우리의 폭력 아래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저는 침묵할 수가 없습니다.…전 세계인들의 가장 깊은 희망을 파멸시키는 한, 미국의 영혼은 구제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야흐로 미국이 되리라'라고 결심한 우리는 저항과 반대의 길을 감으로써, 이 나라의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힘없는 이들, 발언권이 없는 이들, 우리 나라에 의해 희생된 이들, 이 나라가 '적'이라고 부르는 이들, 인간이 기록한 어떠한 문서에도 우리의 형제가 아니라고 언급되어 있지 않은 이들을 위해서 말하고자 저는 이곳에 온 것입니다."

미국이 영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스스로 선언한 것은 '생명·자유·재산'의 권리도 '자결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었다. 식민지 예속 하에서 참된 인권은 없다는 것을 스스로의 역사가 증명했다. 그런데 베트남의 자결권을 부인했듯이 오늘날 이라크와 북한의 그것을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베트남)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내용을 자신들의 선언에 인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히려, 이전의 식민지를 다시 정복하려는 프랑스를 지지하고 나섰습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베트남인들이 독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꼈고, 그래서 우리는 그토록 오랜 세월 세계의 정서에 치명적인 독을 입혀왔던 서구의 오만함의 희생자로 또다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우리는 베트남인들에게 그들이 독립할 수 있는 권리를 부정했습니다.…재식민지화하려는 이러한 비극적 시도에 따르는 거의 모든 비용을 우리는 머지않아 치러야만 할 것입니다."

진실한 인권 기준은 상대방에게 적용하기에 앞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약자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자신을 '선'으로 주장하는 것은 지배와 다를 바 없다. 공동선의 관점에서 자신을 먼저 고치는 것이 진정한 인권의 주장이다. 상대방의 차이에 대해서 '존중' 수준까지는 못가더라도 적어도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이 인권대화와 인권증진노력의 출발점이다. 평화와 공존을 추구하지 않는 인권은 힘의 횡포요, 강자의 위선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비폭력적 공존이냐? 폭력적 공멸이냐? 우리는 과거의 우유부단함을 떨치고 행동으로 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베트남의 평화와 함께,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모든 개발도상국들에 있어서의 정의의 확립을 위해 새로운 방법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동정심이라고는 없는 힘, 도덕성이 결여된 힘, 통찰력을 갖추지 못한 힘을 소유한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길고 어둡고 수치스러운 시간의 복도를 따라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다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소란스러운 불협화음들을 형제애의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바꿔 연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정녕 올바른 선택을 한다면, 미국과 전 세계에서 정의가 홍수처럼 흐르고 공의가 힘찬 물살로 흐르는 그날을, 우리는 그날을 앞당길 수 있을 것입니다."

 

* ◎ 이 연설의 전문은 http://www.stanford.edu/group/King/publications/speeches/Beyond_Vietnam.pdf (영어)에서 볼 수 있다. 한국어판은 위드북스에서 출판된 『마틴 루터 킹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에 실려있다.

 

[류은숙] <2005년 12월 8일 인권하루소식 제2954호> 

인권오름 제 207 호  [기사입력] 2010년 06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1963년 6월 11일, 팃쾅둑(Thich Quang Duc)이란 불교 승려가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는 베트남 사이공의 번잡한 거리 한가운데서 가부좌를 한 채 자기 몸을 불살랐다. 몸이 타들어가는 동안 그는 깊은 명상에 잠긴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당시의 광경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의 기자는 이렇게 썼다.

“난 그 광경을 다시 보려했다. 하지만 한번으로 충분했다. 불꽃이 인간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그의 몸은 천천히 사그러 들었고, 쭈그러들었고, 그의 머리는 검어지고 있었다. 공기에서는 인간의 살을 태우는 냄새가 났다. 인간은 놀랍게도 빨리 탔다. 내 뒤에서는 이제 모여들고 있었던 베트남 사람들의 흐느낌 소리가 났다. 나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울 수도 없었고, 너무 혼란스러워서 메모를 하거나 질문을 할 수도 없었고, 너무 당황해서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 불에 타면서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기에, 그의 평정은 그 주변의 통곡하는 사람들과 극명하게 대조됐다.”

그를 이어 스물아홉 명에 이르는 비구와 비구니들(그중에는 세 명의 미국인도 포함됐다)이 팃쾅둑의 소신공양을 뒤따랐다. 왜 그랬을까?

왜 그들이 자기 몸을 불살랐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오늘 읽어볼 팃낙한 스님의 편지이다. 소신공양이 이어지던 와중에 팃낙한 스님은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공개편지를 쓴다. 편지를 쓴 목적은 또 있었다. 저명한 인권운동가요, 휴머니스트인 킹 목사에게 전쟁에 대해 침묵하지 말라고, 시민권 운동 밖으로 떨치고 나와서 전쟁반대의 목소리를 분명히 내라고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킹 목사는 고심 끝에 침묵을 끝냈다. 그는 <베트남 너머>라는 유명한 연설로 화답한다(이 연설문은 <인권문헌읽기>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침묵은 곧 배반을 의미하는 때가 온다.”는 표어에 완전히 공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킹 목사는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 미국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단호하게 낸다.

이 연설에서 킹 목사는 케네디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는데 “평화적 혁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사람들은 불가피하게 폭력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다. “하루빨리 시작해야 합니다. 재물 중심의 사회로부터 인간 중심의 사회로 변화하려는 노력을, 기계와 컴퓨터, 수익 동기와 재산권을 사람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다면, 인종차별주의와 극도의 물질주의, 군국주의라는 세쌍둥이 거인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이 연설을 한 후 정확히 1년 후에 킹 목사는 살해된다.

2010년 5월 31일 대한민국, 문수 스님이 낙동강 둑방에서 자기 몸을 불살랐다. 남긴 유서와 가사에는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포기하라”, “이명박 정권은 부정부패를 척결하라. 이명박 정권은 재벌과 부자가 아닌 서민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충격적인 일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분신했던 수많은 이들이 떠올랐다. 특히 단 시간 내에 많은 분신이 이어졌던 때가 91년이었다. 당시 모 대학의 선전부장이었던 난, 맡은 역할 때문에 누구보다도 제일 먼저 분신소식과 그들이 남긴 유서와 영정사진을 받아들게 되는 원치 않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그들의 장례식 영구차에 붙일 이름 석 자를 붓글씨로 써야 했던 것도 나의 일이었다. 추모제를 하고 있는 와중에 또 다른 죽음의 소식이 전달되는 날도 있었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듣게 된 분신, 소신공양이란 단어는 세월을 되돌리는 느낌을 줬다.

그들은 하나같이 원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즐거워하길, 더 공감하고 더 사랑하길, 민주주의와 인권의 적들에 대해 더 각성하고 깨어있기를, 생명을 만끽하길, 더 나은 생활을 누리길,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하되 되풀이하지 않기를….

사회적으론 어땠을까? 한편에선 끝없는 의도적 침묵이 이어졌고, 한편에선 흐느낌과 다짐이 이어졌다. 문수 스님 소신공양 이후 추모제와 선거가 있었고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 와중에 어디선가 수많은 이들이 ‘공개편지’를 썼다고 생각한다. 공개편지는 누구에게 수신됐을까, 답신은 누구에게서 어떻게 올까, 강변에서 연서를 기다리고 기다리던 연서를 뜯어보는 심정으로 우리 모두 기다리고 있다. 포클레인이 내려치는 강변에서 내가 이름도 모르는 뭍 생명들은 <4대강 너머>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

팃낙한 스님이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내는 편지(An Open Letter from Thich Nhat Hanh to Martin Luther King, Jr., 1965년 6월 1일)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양심으로 이해하기에는 어쩐지 좀 어렵습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은 항의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관심을 호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불태운다는 것은 자신이 말하려는 바가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불태우는 일보다 더 고통스런 일은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통을 겪는 와중에 뭔가 말하는 것은 최고의 용기, 솔직함, 결단, 진심을 갖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전통에서 수행된 것으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수계식 중에 비구의 250 계율을 준수하며, 승려의 삶을 살며, 깨달음을 얻어, 자신의 생을 모든 중생의 구제를 위해 바치겠다는 서약을 하면서 자기 몸의 작은 한 부분 이상을 태울 것을 요구받습니다. 물론 혹자는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서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승가 공동체 앞에 무릎을 꿇고 불타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이런 말들을 할 때는, 온 맘과 정신의 진정성을 표현하는 것이며 아주 큰 무게를 담는 것입니다.

베트남 승려는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베트남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 최대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다고 온 힘과 결단을 다해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왜 분신으로 죽어야만 하는 걸까요? 자신을 불태우는 것과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것 사이에는 단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본질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너무 많이 불사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명을 거둔다는 것이 아니라 불태운다는 것입니다. 소신공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목적하는 바는 의지와 결단의 표현이지, 죽음이 아닙니다. 불교의 신념 속에서 생은 60년 또는 80년 또는 100년의 기간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생은 영원한 것입니다. 생은 신체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생은 보편적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불태움으로써 의지를 표현하는 것은 파괴의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건설의 행위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즉, 인민을 위해 고통 받고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살이 아닙니다. 자살은 다음과 같은 원인들을 가진 자기 파괴의 행위입니다:
• 살아갈 용기와 어려움에 맞설 용기의 부족
• 생의 패배와 모든 희망의 상실
• 비존재(non-existence, abhava)에 대한 욕망

이런 자기 파괴는 불교에서 가장 심각한 죄 중의 하나로 간주됩니다. 자신을 불사르는 승려는 용기를 잃은 것도 희망을 잃은 것도 아닙니다. 비존재를 욕망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로, 그는 아주 용감하고 희망에 차 있으며 미래의 좋은 것을 열망합니다. 그는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 행위의 좋은 결과를 믿습니다. 부처님의 전생담인 자타카(Jataka)에서, 굶주려서 자기 새끼를 먹어 치우려하는 사자에게 자기 몸을 내준 부처님처럼, 소신공양하는 승려는 전 세계 인민의 관심을 요청하고 도움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최고의 자비를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신공양한 승려들이 압제자의 죽음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압제자들의 정책을 바꾸는 것을 목적했다고 나는 진심으로 믿습니다. 그들의 적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의 적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무관용, 광신, 독재, 탐욕, 증오와 차별입니다. 나는 또한 진심으로 믿습니다. 당신(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버밍햄, 앨라배마 등에서 주도한 평등과 자유를 위한 투쟁은 백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무관용, 증오, 차별을 겨냥한 것이란 걸 말입니다. 인간이 아니라 이것들이야말로 진짜 인간의 적입니다. 우리의 불운한 조국에서 우리는 절실하게 애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름으로도 인간을 죽이지 말라고요. 제발 도처에 있는 인간의 진짜 적들,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있는 진짜 적들을 죽이라고요.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열강의 대적 속에서, 수백 수천의 베트남 농민과 어린아이들이 매일 생명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의 땅은 이미 이십년이 된 전쟁으로 무자비하게 비극적으로 찢겨졌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당신은 평등과 인권을 위한 가장 고된 투쟁에 몰두해왔기 때문에, 당신은 베트남 인민의 형용 불가능한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세계의 위대한 휴머니스트들은 침묵에 머물지 않을 겁니다. 당신도 침묵을 유지할리 없습니다. 미국은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독트린이 정신적 요소들을 박탈하도록 놔두지 않을 강력한 종교적 기반과 영적 지도자들을 가졌다고들 말합니다. 당신은 이미 행동을 취해왔고, 칼 바르트(Karl Barth)의 표현대로, 당신속의 신께서도 또한 행위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침묵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생명 존중을 강조한 앨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사랑할 용기를 강조한 폴 틸리히(Paul Tillich), 그리고 매카이(Mackay), 니부어(Niebuhr), 플레처(Flethcher), 도널드 해링톤(Donald Harrington). 이 모든 종교적 휴머니스트들과 더 많은 이들은 한 인류가 베트남에서 감내해야만 하는 것 같은 수치의 존재를 옹호하지 않을 겁니다. 최근에, (1965년 4월 20일, 사이공에서) 팃 지악 탄(Thich ch Giac Thanh)이란 젊은 불교 승려가 소신공양을 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 이 불필요한 전쟁으로 야기된 고통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요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전쟁은 결코 필요치 않다는 것을 당신은 압니다. 또 다른 젊은 불교도, 휴 티엔(Hue Thien)이란 비구니가 같은 방식으로 같은 의도로 자신을 희생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제지했기에 성냥불을 켤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어느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은 무엇을 위한 겁니까? 그리고 누구의 전쟁입니까?

어제 수업시간에, 내 학생 중 한 명이 기도 했습니다: “부처님, 우리가 서로에게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가 각성하게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와 타인들의 무지의 피해자입니다. 타인들의 권력 의지와 지배에 대한 의지 때문에 우리가 상호학살에 더 빠지는 일을 벗어나게 도와주십시오.” 불교도로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면서, 나는 사랑에 대한 나의 신념, 교감에 대한 신념, 세계의 휴머니스트들에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세계의 휴머니스트들의 생각과 태도는 누가 인류의 진짜 적인가를 발견하는데 있어 모든 인류의 지침이 돼야만 합니다.

1965년 6월 1일
낙 한(Nhat Hanh)

인권오름 제 207 호  [기사입력] 2010년 06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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