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07 호 [기사입력] 2014년 09월 18일 21:58: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요즘 사람들의 표정에 꽉 찬 물음이다. 이 질문은 성찰일 수도 있고 초조함과 답답함을 뱉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이 되는 질문일 수도 있고 ‘길은 없다’는 탄식일 수도 있다. 꽉 막힌 골목으로 내몰려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낯빛들이 초췌해져간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이들은 ‘힘이 없다’는 엄살과 ‘너 때문’이란 회피로만 달아나고, 애써 방향을 잡으려는 이들에겐 무시와 모욕이 일상이다.

이런 때일수록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가능성과 응원을 담은 질문이 있고 빗장을 건 질문이 있다. 후자의 질문은 질문의 형식을 취한 명령문일 때가 많다. 불행히도 한국의 권력층은 후자의 화법만을 구사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회의 큰 분기점이 있을 때마다 응당 던지는 질문이다. 97년 IMF 구제금융의 폭탄을 맞으면서 87년 민주화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돈이 최고이고 돈 자랑이 수치가 아니다’란 노골성에 대해, ‘공공성이고 사회적 연대고 필요 없다. 알아서 각자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교리’에 대해 질문했다.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인가?’란 질문은 모욕 받았고 ‘더 많은 돈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고 인권이고 사치’라는 ‘교리’가 강화됐다.

그리고 질문이 봉쇄된 바다 위에서 ‘세월호’가 터졌다. 한국 사회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사회’로 뭔가 달라져야만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돈에 대한 숭상의 교리가 우리 삶에 추상적인 위기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기를 언제든지 낳을 수 있다는 걸, 우리 눈으로 실시간 학습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질문 앞에 정치색과 입장을 떠나 모두가 몰두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질문은 곧 오염됐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은 강자에 대한 저항을 무질서 또는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무시했다. 약자에 대한 폭력과 모욕을 자유나 권리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부추겼다. 심지어 약자의 고통과 존엄성에 대한 침해를 묘사하는 ‘모욕’이란 단어마저 제 것으로 뺏어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반세기 전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던졌다. 이 질문은 그가 암살당하기 몇 달 전에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연례총회’에서 한 연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때 그는 시민권 운동의 2막을 열겠다면서 경제 정의를 위한 빈민의 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앞서 펼쳤던 시민권 운동보다 빈곤에 대한 공격이 훨씬 어렵다는 걸 그는 예감했다. 앞서의 투쟁은 백인과 흑인이 어느 식당에나 들어가 햄버거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종분리를 강제하는 법을 깨뜨렸다. 그런데 흑인에게는 식당에 들어가 햄버거를 사먹을 돈이 없었다. 돈 없는 흑인은 여전히 백인과 나란히 식사할 수 없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가난에 내팽개쳐있는 한 결코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고 킹은 선언했다. 이제 시작하려는 투쟁은 경제적 평등을 위한 것이었다. 킹 목사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사람들은 이제 그를 빨갱이라 욕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것을 빌미로 킹 목사와 동료들을 사찰했고 죽음의 위협이 가해졌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킹은 아랑곳없이 나아갔다. 정부가 가난한 이들을 적대시하며 인색하기 그지없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거와 생활임금의 보장, 특히 기본소득의 보장이라 할 것을 ‘경제적 권리장전’의 내용으로 요구했다. 그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들이 담긴 것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연설이다. 가령 연설은 ‘빵바구니 운동’을 강조한다. 이 운동의 핵심은 기업이 지역사회에서 벌어들인 돈을 지역사회를 위해 쓰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킹 목사는 “나의 돈을 존중한다면, 나의 인격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즉 지역사회에 일자리를 창출하지도 하고 지역신문에 광고를 싣지도 않고 흑인금융기관에 자금을 예치하지도 않는 기업에겐 우리도 돈을 쓰지 않겠다는 거였다. 표적이 된 주요 낙농회사들은 지역 상점의 판매대에 자기 상품을 놓지도 않고 사지도 않는 것에 하나 둘씩 굴복했다. 운동의 대표자들과 기업이 마주앉아 계약서를 작성하게 됐다. 기업들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의 저축은행과 대출협회에 돈을 예치하고 흑인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게 됐다. 그것은 “채워지지는 않고 끊임없이 고갈되기만 하는 국내에 있는 식민지”를 벗어나 “우리에게서 벌어들인 돈을 우리가 사는 곳에 환원하라”는 당연한 요구였다. 이 요구에 포함된 정책 계획들은 다양했다. 가령 세입자연합을 조직하여 낡은 건물의 재개발을 건설 이익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추진하는 것, 세금을 이미 충분히 낸 사람들로서 정부 사업과 정부 관련 계약들을 대기업만이 아니라 소수집단의 작은 사업체들도 따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진보적인 정책을 기획해야 한다.”면서 제시한 것이 기본소득의 보장이었다. “경제적 지위를 개인의 능력과 재능의 척도”로 여기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릇되고 차별적인 시장경제의 운영”을 빈곤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열등하고 무능하다고 낙인찍음으로써,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해고시키는 일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며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개인의 위엄이 번성할 것”이라 주창했다.

그런 구상에 담긴 것은 찔끔 보조금을 늘리고 생색용 개발사업을 유치하자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감옥에 안전하게 감금시켜 놓은 채 음식의 질만 조금 높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킹 목사는 “정당한 자긍심”의 토대 위에서 경제적 권리가 추구돼야 함을 강조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이 “우리의 존엄과 가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 존엄성의 힘 위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체제에 대해 끝까지 버티고 싸워야 한다.”고 했다.

‘빈민의 운동’은 수도 워싱턴으로의 행진을 계획했다. 정부 수도의 일상 기능을 흔들어 놓는 게 계획이었다. 백악관과 의회가 빈민의 사안을 진지하게 다룰 때까지 그 앞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빈민의 행진에 대한 참여를 촉구하는 것이 킹의 마지막 과업이었다. 워싱턴의 한 성당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 있었다. 그 연설에서 그는 “인종주의, 빈곤, 그리고 전쟁”을 미국 사회의 3대 악이라고 불렀다. “빈곤에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지만 빈곤을 제거할 기술과 자원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새로운 것”이라 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에게 그럴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 연설을 한 닷새 후 그는 살해당했다.

하지만 빈민의 행진은 취소되지 않았다. 3천여 명 이상이 전국에서 워싱턴으로 모였다. 흑인만의 운동이 아니라 존엄성의 가치에 동의하는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이 모였다. 농성촌을 짓고 “부활의 도시”라 이름 지었다. 무자비한 비가 내리고 농성촌은 진창이 됐다. 언론과 정부는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절망과 혼란의 6주가 지나고 운동은 정리됐다. 빈민의 운동은 1968년 6월 19일 농성촌을 접었다. 누구는 철저한 ‘실패’라 평가했다. 또 누구는 ‘처음으로 다인종이 조직화된 경험을 맛봤다’고 했다. ‘우리들 자신의 해방 운동을 헤쳐 갈 만남을 경험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농성촌은 사라졌어도 참가자들은 영감을 받아 워싱턴을 떠났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에겐 몇 달이건, 몇 주건, 단지 하루건 그건 중요치 않다’고 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다. 오늘 읽어 볼 인권문헌, ‘빈민 권리장전’은 2003년에 ‘빈민의 운동’을 재건한 사람들이 작성한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의 한 축은 ‘존엄과 안전 위원회’이다. ‘존엄’과 ‘안전’이 같이 가야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작명이다. ‘존엄 없는 안전’은 많다. 형사법과 공권력의 강화, ‘무전유죄 유전 무죄’의 차별적 사법체계 운영, 부자감세와 경제정책 등이 그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자기 돈 주고 사설경비 쓰고 폐쇄회로에 둘러싸인 특권지대에 사는 것도 물론 안전하다. 가난한 우리에게 안전이란 존엄과 같이 고려돼야 진짜 안전이 된다. 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야 안전하고, ‘경제적 권리장전’의 내용을 담은 것이어야 진짜 안전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면, 혹은 가난해지면 당장 맞닥뜨리는 건 사회적 지원이 아니라 경찰이다. 해고되거나 공장이 폐쇄되거나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나거나 만성적 고용불안과 생계비 상승에 시달리거나 차별과 성폭력에 노출되거나 가난한 처지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빌미를 제공했고 너의 책임이란’ 힐난을, 항의와 저항에는 ‘손 좀 봐주라’는 공권력의 폭력을 대면해야 한다. 우리의 안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존엄과 안전 위원회’가 존엄과 안전의 권리선언을 기획한다고 한다. 선언을 만드는 것은 그냥 말을 짓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실천을 종합하는 것이다. 킹 목사의 말대로 “신조의 고혈압과 행동의 빈혈”에 걸리지 않도록 우린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게 아무리 오래 걸린다고 해도 말이다.

‘빈민의 운동’의 ‘빈민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 for the Poor, Poor People's Campaign)

1. 모든 형태의 인간 억압은 제거돼야만 한다. 모든 사람, 특히 빈민에게는 제도적 장벽 없이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빈민이 빈곤을 벗어나려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장애인에 대한 차별, 계급주의, 제국주의가 다뤄져야만 하고 제거돼야만 한다.

2. 빈민에게는 비인간적인 상태에 투입되는 공공 정책 의제에 대한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방임되고 경제적 분리와 배제가 있어왔던 곳에 ‘기회의 공동체’를 창설할 것을 요구한다. 중앙과 지역의 자원들은 지역사회에서 경제적 기회를 만드는 지역사회 집단들과 시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없는 지역’에서 기회의 문을 열고 투자를 한 기업과 지역사회 집단 간 협력이 장려되고 보상받아야 한다. 기업의 탐욕스런 이익보다는 궁핍한 사람들의 이익을 우위에 두는 전국적이며 지역적인 차원에서의 포괄적인 경제정책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기업을 규제해야만 하고 일자리의 해외이전을 끝내야 한다. 공공의 의견 청취 없이 공장과 기업 본부를 폐쇄하는 일을 금지하며 일자리 상실로 고통 겪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과 재훈련, 대체 직업을 보장하는 법률이 통과돼야만 한다.

3. 미국에서 6명의 아동 중 1명은 빈곤의 피해자이다. 비-백인 아동 3명 중 1명은 가난 속에서 자란다. 모든 아동은 양질의 건강 보호, 교육, 주거에 접근하고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4. 모든 사람은 ‘법 앞에 동등한 보호’를 받아야 하며 빈민은 사법 체계의 부정의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한다. 빈민은 흔히 이 나라의 감옥 산업 단지 창고에 처박혀진다. 이것은 노예제의 21세기 버전이 됐다. 빈민은 적절한 변호와 평등한 사법을 보장받아야 한다. 빈민은 민사와 형사 법정에서 정의를 보장받아야 한다.

5. 빈민은 경찰 폭력의 형태로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리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빈민은 학대받고 착취 받는 것과는 반대로 보호받고 대접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역에 대한 분명한 민간의 통제, 그리고 경찰의 남용과 비행을 다스릴 힘을 가진 시민의 심사위원회를 요구한다. 빈곤 지역에서 경찰과 지역사회에 근거한 집단들 간에 범죄와 폭력 철폐를 위한 지역사회 협력이 수립돼야 한다.

6. 빈민은 완전 고용, 그리고 빈곤선을 넘어서도록 하는 보장 소득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만들어낼 지역사회에 기반한 협동조합의 제휴에 대한 정부 투자를 요구한다. 실업이 집중된 지역이 있는 곳마다 일자리와 기회를 일으키는 집중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7. 빈민은 기회의 불평등에 희생돼서는 안된다. 여성과 비-백인에게 동등하게 지불하라. 여성은 직장에서의 성적 괴롭힘과 폭력, 또한 가정폭력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돼야만 한다.

8. 우리는 전 세계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과 힘을 믿는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장했듯이 “어느 곳에든 불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우리는 미국의 외교 정책이 정의와 자유로 규정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신념에 뿌리를 둔 도덕적 권리 장전이다. 이 권리 장전의 이행은 “신 앞에,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가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나라”로 우리를 더 가깝게 데려갈 것이다.

인권오름 제 407 호 [기사입력] 2014년 09월 18일 21:58: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79 호  [기사입력] 2014년 02월 0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입춘이 지났어도 얼어붙은 날씨다. 매서운 날씨야 곧 지나가겠지만 꽁꽁 얼어붙은 삶들에 언제쯤에야 햇볕이 들지는 기약이 없다.

어렸을 적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내일’이었다. 내일이면 돈이 생긴다는 말, 그래서 내일이면 밀린 학비를 주겠다는 말, 내일이면 찢어진 운동화나 가방을 바꿔주겠다는 말…. 하지만 그 내일은 그 다음날이면 또다시 내일이 되기만 했다. 요즘도 ‘언젠가는 또는 조만간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약속이 참 싫다. 그 막연함에는 지나간 약속조차 무시하는 뻔뻔함과 정치를 놓아버린 정치인들의 무책임이 담겨 있다. ‘미래지향적’이란 말은 자본의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자르고, 미리 입을 막고, 미리 공공재를 넘겨주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래서 정리해고는 늘 정당하고 청소노동자는 대자보도 붙여선 안되고 민영화에 반대하는 행동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설 직전 대한문에서 집회가 있었다. ‘기륭전자, 약속을 지켜라’는 집회였다. 기륭전자는 6년이 넘는 긴 투쟁 끝에 노사합의를 얻어냈다. 대 사회적 약속으로서 그 합의 내용을 선포하고 사진도 찍어댔다. 국회에서 조인식까지 했다. 그런데 정규직화와 복직을 약속받은 노동자들은 일 한번 못해보고 또 버림받았다. 지난 연말, 회사가 노동자들 몰래 이사를 해버리고 사장은 사라졌다. 집회에서 노래를 한 ‘꽃다지’는 “다시 기륭 집회에서 노래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며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냐?”고 했다. 기륭만이 아니다. ‘희망버스’란 사건을 낳은 한진중공업에서도 사회적 합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엄청난 손해배상청구가 노동자들의 뒷덜미를 잡았을 뿐이다. 정의를 앞장서 부르짖어도 모자랄 판에 대자보 한 장에 1백만 원을 배상하라는 발상을 내놓은 것이 대학이다. 이런 사안은 나라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살인적 노동조건과 열악한 처우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다루는 방식은 국내에서 하던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람이 없다. 한국기업이 수출하는 최루탄이 민주주의와 삶의 동반 궁핍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쓰러뜨리는 일은 또 어떤가. 하루하루 살아가기 버거운 시민들의 관심이 되기 어려운 가운데 한반도 주변의 심상치 않은 조짐들은 악화되고 있다.

이처럼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문제의 사슬은 연결돼 있고 궁핍을 악화시키고 있다. 이걸 해결할 길은 더 두터운 민주주의와 더 강한 인권과 더 깊은 평화일 뿐이란 말은 굶주린 배속에선 의미 없는 소리를 내는 단어일 뿐이다. 우린 참 허기지고 고단하다. 한 동료는 주변에서 잦아지는 삶의 몰락 때문에 정말 우울하고 두렵다 한다. 우린 삶을 누리는 게 아니라 삶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이 정부는 빈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 이 말은 지난 연말 총파업 집회에서 나온 발언 중 많은 호응을 받은 것이었다. 이 말을 바꿔보면, 우리가 바라는 진짜 전쟁은 빈곤과의 전쟁이다. 이 말 그대로 국제시민사회에는 ‘빈곤과의 전쟁(War on Want)’이란 이름을 가진 조직이 있다. 2011년 창립 60주년을 맞은 저명한 단체로 ‘빈곤은 정치적이다’란 선언을 내걸고 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1951년에 창립됐는데, 그 발단은 한 통의 편지였다.

영국의 출판인인 빅토 골란즈는 가디언 신문에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당시 한국전을 계기로 고조되는 전쟁과 군비강화의 기류에 반대하며 두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는 전쟁종식을 위한 즉각적인 협상을 하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경쟁과 표적이 다른 전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 편지의 끝부분에서 골란즈는 자기의 제안에 동의하는 시민들에게 “좋습니다(yes)”란 한마디를 적은 엽서를 보내달라고 한다. 한 달 안에 만 통이 넘는 엽서가 왔고 그 힘으로 ‘빈곤과의 전쟁’이 태어났다. ‘빈곤과의 전쟁’은 그 다음해에 ‘세계발전을 위한 계획’이란 보고서를 내놓는다. 그 보고서는 빈곤과의 전쟁이 부자로부터 빈자로의 생색내는 자선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운동이어야만 한다고 밝혔다. 이것은 한 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부국으로부터 빈국으로의 이전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빈곤의 증상이 아니라 빈곤의 원인과 싸운다는 것이 이 전쟁의 원칙이었다.

‘빈곤과의 전쟁’의 60주년을 평가하는 자료들에선 다른 많은 국제원조활동과의 차별성을 지적하고 있다. 국내에선 진보적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표방하며 국제적으론 현지의 저항운동단체들과 제휴한 연대활동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간 해온 활동 중에 스스로 꼽는 것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74년 분유 기업들의 잘못을 폭로하여 세계보건기구로 하여금 분유마케팅의 국제규범을 채택하게 했다. 가난한 나라의 부채청산을 요구하거나 금융기업과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부여하는 소위 ‘로빈후드세’를 주창했다. 2005년에는 영국정부로 하여금 해외 원조시에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를 조건으로 내건 정책을 폐기하도록 했다.

‘빈곤과의 전쟁’의 자기 소개문을 읽어본다. 그냥 어느 단체의 소개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싸움의 다짐으로 바꿔서 읽어본다. “빈곤은 정치적이다. 부자들 편에선 정치인의 결정이 빈자에겐 삶과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에겐 정의롭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지구적 지형을 바꿔놓을 힘이 있다. 우리는 농촌사회, 노동착취공장, 분쟁지역, 사회의 소외된 주변부에서 진정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막연한 내일의 행복을 반복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 누군가가 보내온 제안의 편지에 함께 하겠다는 엽서를 쓰는 것, 설이 지난 진짜 새해에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삶과의 전쟁이 아니라 누리는 삶을 위해서.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평화를 위한 노력을

… 우리는 재무장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너무 막대해서 그것에 대한 몰두는 평화 성취에 필수적인 정신적 참신함과 에너지를 우리에게서 더욱더 많이 빼앗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 우리가 전쟁을 막기 위해 새롭고 보다 적극적인 종류의 거의 초인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지금 아주 불가피한 것입니다. … 저는 제안합니다. …

우리는 월터 로이터(Walter Reuther, 미국 자동차노조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가 이미 제안한 계획의 다양한 변형을 위해 즉각적인 토론을 제안하는 일을 주도해야만 합니다. 즉, 긴급한 생사의 문제로서, 굶주리고 가난하고 절망에 빠진 수많은 동료 인간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국제 기금을 창설해야만 합니다. 나는 내 나라가 제시하는 기여의 크기로서 새로운 종류의 경쟁으로 세계에 도전하는 걸 보고 싶습니다. 그 도전이란 평화를 위한 노력에서의 경쟁입니다. 그래서 국제적 토론이 무익한 주제 대신에 보람 있는 주제를 발견하는 국제적 정부를 초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국제적 이익에 반하여 자국의 이익에 집중하는데서 초래된 전쟁을 향한 경향이 역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칼이 쟁기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이 편지에 동의하는 분은 누구나 단지 “좋습니다.”라고 한마디를 쓴 엽서를 제게 보내주십시오. 어떤 종류의 행동을 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큰 반응이 있다면 뭔가 가능한 것이 나올 것입니다.

1951년 2월 7일 빅토 골랑즈(Victor Gollacz) 드림

인권오름 제 379 호  [기사입력] 2014년 02월 0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31 호  [기사입력] 2013년 01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지난 연말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젊디젊은 노동자가 자살했다. 가슴이 꽉 막혀와 혼자서 조문을 갔다. 부산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인데 체증에 갇혀 택시미터기 요금만 하염없이 올라갔다. ‘휴일인데 왜 이리 막히는 것이냐’는 내 물음에 운전사는 ‘대기업 백화점과 문화센터가 들어선 이후 사람들이 죄다 그리로 몰려들어 그런다’고 했다. 그곳을 벗어나자 ‘골목상권 다 죽는다’는 초라한 현수막들이 인적 없는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죽은 이의 아내는 젊다 못해 앳된 얼굴이었고, 두 아이를 챙기고 헤쳐가야 할 삶을 담아내야 해서인지 그녀의 소복 자락은 너무 넓었다. 슬픔의 두터운 장막이 덮인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다시 부산역으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 앞에 궁색한 차림의 모녀가 섰다. 여인은 한파임에도 겨울 외투조차 입지 못했다. 그나마 아이에게는 모자 달린 외투를 입혔지만 어디서 얻은 것인지 아주 낡아 보였다. 에스컬레이터가 끝나갈 무렵 여인이 갑자기 아이 손을 놓았다. 제 몸 가눌만한 나이가 아닌 어린아이는 위태롭게 균형을 잃고 빙빙 돌았다. 깜짝 놀라 나를 비롯해 몇몇 사람들이 ‘어! 어!’하고 소리를 냈다. 그때 뒤를 돌아본 여인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성난 눈이었다. “내 새끼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들은 신경 꺼!”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내 뒤를 향해 계속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이 나한테 뭐 해준 게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여인의 분노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듯 말 듯한 가운데도 아이에게 그러는 건 원망스러웠다. 내가 그녀를 바라본 눈길이 그녀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을까 하는 생각은 잠깐이었다. 어른들의 소동과 상관없이 방글거리기만 하던 아이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해 기차에 오르면서 중얼거렸다. 온 천지가 레미제라블이구나!

유엔의 특별인권절차 중에 특별보고관이란 게 있고, 그중에서도 ‘극빈과 인권’을 전담하는 특별보고관이 있다. ‘극빈과 인권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빈곤의 형벌화>에 관한 보고서(<인권오름> 제271호 참조) 등을 통해 빈민을 처벌하고 분리하고 통제하는 조치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그간 노력의 결실이 2012년 9월에 인권이사회에서 채택된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원칙>이다. 2001년부터 십 년 이상의 협의를 통해 채택된 이 원칙은 국제인권법에 따른 당사국의 의무를 각국의 정책 수립자들이 빈곤 정책에 반영토록 할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특별보고관은 이 원칙이 빈민의 인권에 초점을 둔 빈곤정책을 다룬 “최초의 지구적 기준”이라고 그 의의를 밝혔다.

“극빈자의 고유한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모든 공공정책을 통해 알려져야만 한다”는 것이 원칙 중의 원칙이기에 “낙인화와 편견을 피해야” 하고 국가는 “빈민의 권리에 적대적으로 편향된 법과 규제를 폐지하거나 고쳐야 한다”고 했다. 이런 대원칙에 근거해서 국제인권법에 규정된 구체적 권리들을 빈민의 입장에서 상술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국가의 책무만이 아니라 기업의 책임을 콕 짚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기업의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외면하고 사회적으로 한 약속에 대한 무시를 일삼는 기업에 “인권에 상당히 유의해야” 하며 “기업 활동이 인권에 끼치는 악영향을 방지하고 완화해야 한다”는 이 원칙이 어떻게 스며들 수 있을까 난망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런 원칙의 존재 의의는 최선의 인권을 향해 나아갈 방향탐지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원칙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늘 반복적으로 재연되던 현상이지만 대선을 전후로 ‘안전’과 ‘복지’가 특히 강조됐다. ‘안전’은 불안과 걱정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제는 누구의 입장에서 무엇을 불안과 걱정으로 정하느냐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안’에 속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밖’으로부터의 안전을 추구하면 문을 닫아걸게 된다. 상대적으로 ‘밖’에 속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꼭꼭 닫힌 문이 생계의 불안뿐 아니라 불신과 무시와 편견으로 뭉친 차별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더 나아지리란 삶의 전망을 가질 수 없게 되고 될 대로 되란 식이 되어도 탓할 수가 없다.

불안의 원인이 차별적으로 선택되고,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일부의 자유가 우선적으로 선호되는 안전의 선택이 이뤄진다. 그런 선택 속에서 누구에게는 이동이 자유롭고 누구에게는 이동이 가로막힌다. 누구는 생활보장을 말하지만, 누구에게는 생계보장도 감지덕지다. 선택에 따른 이해당사자의 구분은 심해지고 사회 공동체의 연대감은 희박해진다. 그런 사회일수록 불안의 근본원인은 커져가고 걸어 잠가야 할 문의 자물쇠만 늘어간다. 그럴 때 ‘안전’은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치안’으로 후퇴해버린다. 타자,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권리를 침해당한 타자로부터 내 수준의 소유와 생활을 지키려는 치안은 결사의 자유나 근본적인 사회보장 같은 것을 촉진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복지’도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더 이상의 추락을 방지한다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다. 이 둘의 결합이 ‘치안복지’라는 간판이 되어 동네방네 경찰서와 관공서에 내걸리고 있는 게 두렵다.

‘치안복지’의 눈으로 부산역에서 만난 여인을 투시해본다. 한겨울에 외투도 갖추지 못한 여인, 상처 입은 짐승처럼 신음하는 그 여인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능력은커녕 의욕도 없어 보이는 인간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녀는 감시와 치안 관리의 대상이 돼야 마땅해 보인다. 가난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 당선자가 4대악으로 규정한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 불량식품’의 피해자이거나 가해자인 동시에 그것의 온상으로 보여진다. 그녀의 가난은 반사회성과 범죄 가능성이기 때문에 앞으로 그게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니 미리 조치를 취한다는 측면에서 관리될 것이다. 그녀의 행색으로는 공공역사 출입이 어렵게 될 수도 있고 대규모 상업시설 같은 데서는 경비한테 걸러질 수도 있다.

그런 그녀가 눈에 안 띄면 안 띌수록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입장에서는 ‘치안이 곧 복지다’는 말이 당연하게 들릴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이 된다면 ‘치안이 복지’란 말은 나한테 해준 것도 없으면서 날 비난하고 공공영역에서 아예 쫓아내겠다는 말로 들릴 것이다.

어릴 적 동생들 중 하나가 도벽이 심했다. 도벽이 발각 날 때마다 나는 하루 종일 일 나간 엄마 대신에 맏이라는 이유로 이웃에게 불려 갔다. 나를 부른 이웃들이 내게 안긴 것은 서슬 퍼런 추궁이 아니었다. “네 엄마 걱정하실 테니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으마. 네가 맏이니까 동생 잘 돌봐줘라. 어릴 때 잠시 그럴 수 있다.”고 다독여주셨다. 한번은 호떡 파는 아주머니가 길 가던 나를 부르더니 호떡을 공짜로 잔뜩 안겨주셨다. “언제든지 공짜로 줄 테니 네 동생 갖다 주고 동생 건사 잘하라.”고 하셨다. 동생의 도벽은 외제 상표가 박힌 잠바를 몰래 숨겨두고 입은 것으로 결국 엄마에게 발각이 났고, 한밤중에 혼이 난 동생은 컴컴한 개천에 뛰어들어 죽겠다고 했다. 그런 동생을 찾아 개천가를 헤매던 밤은 참 추웠다. 참 아픈 기억이지만 ‘한때 그러는 것이니 잘 돌봐주라’던 이웃들의 인정이 함께 떠오르기에 나쁘지만은 않다. ‘잠시 한때’일 뿐이고 ‘관심으로 돌보면 괜찮아진다’던 이웃들의 인정과 믿음이 내가 받은 최고의 복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나와 내 가족에 대한 존중이었다.

이 원칙을 기초한 특별보고관은 빈민의 권리에 초점을 둔 빈곤 정책을 강조했다. 빈곤정책이라 이름 붙였다고 해서 죄다 빈곤정책이 될 수는 없으며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그 안에 담겨야 한다고 했다. “빈곤을 범죄시하는 정책은 빈곤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그들이 고통받고 있는 광범위한 차별과 그로 인해 상호 재강화되는 불이익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다.”던 특별보고관의 말을 곱씹어보게 된다.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원칙(Guiding principles on extreme poverty and human rights, 2012년 9월 27일 유엔인권이사회 채택)

I. 전문

1. 경제 발전, 기술 수단, 재정 자원이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른 세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극빈 상태로 사는 것은 도덕적 폭거이다. 이 원칙은 극빈 퇴치가 도덕적 의무일 뿐 아니라 현존하는 국제인권법에 따른 법적 의무라는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인권법의 규범과 원칙들은 빈곤을 저지하고 빈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모든 공공정책을 지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2. 빈곤은 단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소득’과 ‘존엄하게 살 기본 역량’ 둘 다의 결여를 둘러싼 다차원적인 현상이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는 2001년 빈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빈곤은 적합한 생활 기준과 여타의 시민적‧문화적‧경제적‧정치적 및 사회적 권리의 향유에 필수적인 자원, 역량, 선택, 안전과 힘의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박탈로 인한 인간 조건이다.”(E/C.12/2001/10, para.8) 또 빈곤은 “소득 빈곤, 인간 발전의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조합”(A/HRC/7/15, para13)으로서, 기본적인 보장의 지속적인 결여는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기회 또는 예견할만한 장래에 권리를 재획득할 기회를 혹독하게 망치면서, 사람들의 삶의 다양한 측면에 일제히 영향을 끼치는 것(E/CN.4/Sub.2/1996/13)으로 정의돼왔다.

3. 빈곤은 그 자체로 긴급한 인권의 문제이다. 빈곤은 인권침해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여타 침해를 낳는 조건이다. 극빈은 시민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대한 침해를 복합적으로 강화할 뿐 아니라 극빈 상태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존엄성과 평등에 대한 정례적인 부인을 경험한다.

4. 극빈자는 자신들의 권리와 권한에 접근함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신체적, 경제적, 문화적 및 사회적) 장벽에 직면한다. 결과적으로, 극빈자는 상호연관되고 상호강화하는 많은 박탈을 경험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위험한 노동 조건, 위험한 주거, 영양가 있는 음식의 부족, 불평등한 사법접근, 정치적 힘의 결여, 제한된 건강보호접근 등이며 이로 인해 극빈자는 권리 실현을 방해받고 계속 가난하다. 극빈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무력함, 낙인화, 차별, 배제, 물질적 결핍 등 모두 서로를 상호 강화하는 것들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간다.

5. 극빈은 불가피한 게 아니다. 극빈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국가 및 여타 경제 행위자들의 행위와 방임에 의해 만들어졌고, 가능했고, 지속된 것이다. 과거에 공공정책은 흔히 극빈자에게 도달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세대를 통해 빈곤이 전달됐다.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및 문화적) 불평등은 흔히 다뤄지지 않은 채로 남아 빈곤을 더욱 견고히 한다. 국내와 국제적 차원에서 정책 일관성의 결여는 흔히 빈곤 퇴치에 대한 약속을 해치거나 약속과는 모순된다.

6. 극빈이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는 것의 의미는 극빈을 퇴치할 도구가 손에 미칠 만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인권적 접근은 극빈자를 권리의 보유자이자 변화의 주체로서의 인정에 기초한 장기적 극빈 퇴치의 틀을 제공한다.

7. 인권적 접근은 극빈자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며, 공공정책 구상을 포함하여 공공의 삶에 의미 있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책임성 있는 의무 담지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한다. 국제인권법에 규정된 규범들은 빈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수립하고 이행할 때 자국의 국제적 인권 의무를 고려할 것을 당사국들에 요구하고 있다.

II. 목적

11. 이 원칙의 목적은 빈곤과의 싸움에 대한 노력에 인권 기준을 적용할 방법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다. ……

12. 이 원칙은 빈민의 역량 강화란 빈민의 권리를 실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관계적이고 다차원적인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

III. 기초 원칙들

15. 인간 존엄성은 인권의 기초 중의 기초다. 인간 존엄성은 평등과 비차별의 원칙과 밀접하게 연결돼있다. 극빈자의 고유한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모든 공공정책을 통해 알려져야만 한다. 국가 기관과 사적 개인들은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고, 낙인화와 편견을 피해야 하고, 빈민이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취하는 노력을 인정하고 지원해야만 한다. ……

17. 빈곤을 극복하려는 공공 정책은 빈민의 모든 인권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보호하고, 실현하는데 기반해야만 한다. 어떤 영역에서든 어떤 정책이든지 빈곤을 악화시키거나 빈민에게 불균형한 부정적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

19. 국가는 빈민의 권리, 이익 및 생계에 대해 적대적으로 편향된 법과 규제를 폐지하거나 고쳐야 한다. 경제적 상황 또는 여타의 빈곤과 결합된 이유에 근거한 직간접적인 모든 형태의 입법적‧행정적 차별은 규명되고 철폐돼야 한다. ……

32. 극빈자의 대부분은 아동이며 유년기의 빈곤은 성인기 빈곤의 근본 원인이기에 아동의 권리에 우선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아주 짧은 기간의 박탈과 배제조차도 아동의 생존과 발전의 권리에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수 있다. 빈곤퇴치를 위해 국가는 유년기 빈곤과 맞설 즉각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 ……

35. 국가는 아동의 삶과 관련된 의사결정과정에서 아동의 의견이 청취될 수 있는 권리를 증진해야만 한다. ……

45. 극빈자는 흔히 정부 부조 또는 자선의 수동적인 수혜자로 비춰진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정책수립자와 여타의 공무원들이 그들에게 설명책임을 져야 할 권한을 가진 권리 보유자들이다. ……

V. 구체적 권리들

63. 경제적 독립성이 거의 없는 극빈자는 안전과 보호를 구할 가능성이 훨씬 더 적다. 법집행기관은 흔히 극빈자를 분류하고 고의적으로 표적으로 삼는다. 빈민 여성과 소녀는 특히 성에 근거한 폭력에 영향 받는다. ……

64. (a) 국가는 극빈자의 생명권과 신체적 존엄성이 동등하게 존중‧보호‧실현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특별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법집행공무원에 대한 훈련, 치안 방법에 대한 재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한 명확한 책무성 체계의 수립 등이 포함된다.
(b) 국가는 가정 폭력의 피해 여성을 위한 쉼터 제공을 포함하여 빈민을 대상으로 자행되는 성폭력에 제동을 걸 구체적 전략과 체계를 개발해야 한다. ……

65. 차별을 포함하여 다양한 구조적 및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빈민은 불균등하게 높은 빈도로 형사 사법 체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빈민은 또한 형사 사법 체제를 벗어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결과적으로 불균등하게 많은 수의 극빈자와 가장 배제된 사람들이 체포, 구금, 투옥된다. 상당수가 보석 또는 심사에 대한 의미 있는 수단 없이 장기간의 공판 전 구금에 처한다. 흔히 적합한 법적 대리인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빈민은 유죄선고를 받기 쉽다. 구금된 동안 빈민은 위험하거나 비위생적인 조건, 학대나 늘어지는 지연 등 권리 침해에 항의할만한 수단을 갖지 못한다. 극빈자에게 부과되는 벌금은 그들에게 불균등한 영향을 끼치고 상황을 악화시키며 빈곤의 악순환을 지속시킨다. 특히 홈리스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자주 받으며 공공장소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범죄자로 간주된다.

66. (a) 국가는 빈민에게 불균등한 영향을 끼치는 형사적 제재와 투옥 절차를 평가하고 다뤄야 한다. ……
(c) 공공장소에서의 생존 활동, 가령 잠자기, 구걸, 먹기, 개인적인 위생 활동의 수행 등을 범죄화하는 법을 철폐 또는 개혁해야만 한다.
(d) 극빈자, 특히 구걸, 공공장소 이용, 복지 사기 등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불균등한 벌금 납부를 요구하는 제재 절차를 재고해야 하고, 벌금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벌금 불이행에 대한 구금형을 폐지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

84. (a) 국가는 존엄한 노동 조건에 대한 권리의 향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엄격한 노동 규제를 채택해야 하고, 적합한 역량과 자원을 가진 노동감시관을 통해 그것의 이행을 보장해야만 한다.
(b) 국가는 자신과 가족의 적절한 생활 수준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기에 충분한 임금이 모든 노동자에게 지급될 것을 보장해야 한다.
(c) 국가는 공정하고 우호적인 노동조건에 관한 법적 기준이 비공식 부문 경제에도 확대되고 존중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며 비공식 노동 부문을 평가할 수 있는 산재된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
(h) 국가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정체성과 목소리와 대표성이 노동 개혁에 대한 사회적 및 정치적 대화 속에서 강화될 수 있도록 결사의 자유를 존중하고 증진하고 실현해야 한다. ……

VII. 기업을 포함한 비-국가 행위자의 역할

100. 기업을 포함한 비-국가 행위자에게는 최소한 인권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존중의 의무란 기업의 활동, 생산 또는 서비스를 통해 반인권적인 영향을 야기하거나 그런 영향에 기여하는 일을 피해야 하고, 반인권적 영향이 발생하면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01. 기업은 빈민의 인권을 포함하여 인권 존중에 대한 명확한 정책 약속을 채택해야만 한다. 기업은 기업 자신의 활동과 사업 파트너들에 의해 야기된 인권에 대한 실제적‧잠재적 영향을 규명하고 평가하기 위하여 인권에 상당히 유의하는 과정을 취해야만 한다. 기업은 기업의 활동이 빈민의 권리에 끼치는 악영향을 방지하고 완화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그런 악영향에 직면하는 개인 또는 지역사회를 위한 경영차원의 고충처리장치 수립 또는 참여가 포함된다.
102. 제삼자에 의한 인권침해로부터 보호할 국가의 의무는 효과적인 정책, 입법, 규제 및 판결을 통해 인권침해를 방지, 조사, 처벌, 보상할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는 기업과 관련된 침해로 영향받은 사람들에게 신속하고 접근가능하며 효과적인 구제를 보장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사법적 구제, 비사법적 책무성, 고충처리장치 등이 포함된다.

인권오름 제 331 호  [기사입력] 2013년 01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9 호  [기사입력] 2007년 01월 3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간답게 살 권리라 하는 ‘사회권’은 흔히들 정의되기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내기도 어렵고 권리로서 인정하기 곤란하다는 주장은 사회권을 쉼 없이 괴롭히고 조롱한다. 이에 맞서는 주장들은 국내법의 근거를 들기보다는 국제인권법에서 인정되고 있는 권리라는 것을 먼저 내세운다. 자유권과 비교할 때 사회권은 국제인권에서 먼저 확립되어 국내적 실천을 도모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가장 기본으로 다루는 문서가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사회권규약)’이다. 전반적인 생활의 위기 속에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권리들을 하나씩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먼저 사회권규약 11조에 규정된 식량권의 의미를 살펴본다.

식량권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농촌활동이란 것이 매년 있던 시절, 밥을 먹기 전에 하는 의식이 있었다. 숟가락, 젓가락으로 장단을 치며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이라 노래한 후에 농민께 감사한다는 복창과 함께 밥을 먹었다

과연 밥은 ‘나누어 먹는 것’일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먹을 것을 돈 주고 산다. 가게와 시장에 진열된 상품인 ‘먹을 것’은 가격이 오르고 내릴 뿐 항상 넘쳐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들 대부분이 과연 제대로 먹고 있는 것인지 여기서는 알기 어렵다. “배가 부르면 우린 소화불량이 두렵다. 배가 텅 비면 우린 두렵다. 다시는 먹지 못할까봐 두렵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듯이 극단적 다이어트와 굶주림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아우르는 식량권에 대한 정의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 양으로나 질로나 적절하고 충분한 식량, 식량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문화 전통에 부응하는 방식의 식량, 신체적·정신적으로나 개인적·집단적으로나 존엄한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식량, 지금까지 말한 의미의 식량에 대해 정기적이고 영구적으로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를 말한다.

이들 요소를 상세히 해설한 것이 유엔사회권위원회가 내놓은 일반논평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이다. 이 논평에는 식량의 ‘적절성’과 ‘지속가능성’의 의미가 담겨있다. 간단히 말해 식량의 ‘적절성’은 “개인의 먹을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양과 질을 갖추고 있고 해로운 물질이 없으며 해당 문화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식량이 이용가능한 상태”이다.

‘지속가능성’은 식량이 현재 및 미래 세대 모두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는 것으로, 먹을 것을 구하는 비용이 너무 높아 다른 기본적 필수품을 줄이거나 얻을 수 없다면 경제적 접근성이 없는 것이고, 자연재해나 무력 분쟁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장애인, 노인, 유아 등 신체적으로 취약하고 건강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식량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물리적 접근성이 없는 것이다. 또한 ‘지속가능성’에서 세계의 농민과 민간단체들이 들고 나온 개념이 ‘식량주권’의 개념이다. ‘식량주권’이란 먹을 것에 대한 권리와 먹을 것을 생산할 권리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식량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면, 그 식량을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하느냐는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식량 생산을 위한 자원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을 보존하며 초국적 기업농의 유전자 조작 식품과 단일품종, 종자약탈 등의 횡포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장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데 식량주권 개념의 문제의식이 있다.

굶주림에서 해방될 권리

사회권 규약에는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기아로부터의 해방의 권리’라는 두 개의 용어가 있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은 양대 국제규약에서 “기본적인(fundamental)”이란 수식이 붙은 유일한 권리이다. 식량권을 기초하던 토론이 진행되던 1963년 당시 세계보건기구의 사무총장 센(Sen)은 세계기아문제의 엄청난 규모와 그것이 어떤 구체적 조치들로 인해 줄어들 수 있느냐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5억의 인구가 기아상태이며 10억 이상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그런 경향이 계속된다면 20세기 말까지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30억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따라서 식량권을 미적지근하게 다뤄서는 안되며 긴급한 과제로 다뤄야 한다는 호소였다. 이에 식량권의 긴급성을 강조하여 식량권에 대해서는 ‘점진적 조치’라는 표현이 빠지게 됐다.
하지만 20세기 말인 1999년에 채택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에서의 상황 제시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8억 4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적 기아 상태이며, 자연재해, 증가하는 내란과 전쟁, 정치적 무기로서의 식량 이용의 결과로 수백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의 권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식량권의 실현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할 뿐이다. ‘적절성’의 양적인 의미의 개념은 기아로 인한 죽음을 방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최소한의 칼로리가 아니라 정상적이고 능동적인 생존을 촉진하기에 충분한 식량이다. 나아가 질적인 의미에서의 ‘적절성’은 하위규범인 기아로부터의 해방 이상의 것으로 식량의 문화적 적절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식량권은 인권이 아니다?

일부 경제 선진국에서도 목격되는 영양실조 문제의 원인이 식량 부족이 아니라 빈곤으로 인한 식량에 대한 접근성 결여라는 지적 앞에서도 식량권을 인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강함은 여전하다. 이런 견해에서는 도덕적 또는 인도주의적 고려만으로는 정부들이나 기타 관련된 행위자들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식량권의 주장이 시간 낭비라고 한다. 식량이란 연간 수십억 달러가 오가는 상품이며 따라서 식량이 인권으로서 갖는 지위는 부차적일 뿐이라는 입장인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도덕적 고려가 정책 결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고려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식량권이 이행되지 못하는 원인이나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보편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식량권 이행을 위한 효과적인 메커니즘을 수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식량권은 국제적 차원에서 이행가능하지 않고 개별국가 차원에서 매우 제한적인 계약의 한계 내에서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셋째로 사회권 일반에 대한 반대의견이다. 시민·정치적 권리가 우선적이며 일단 세계 민족들에게 자유가 확보된 이후에야 식량권 같은 경제·사회적 권리가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현 인권이사회)에서는 이런 발언이 있었다. “세계의 상당수는 정말로 굶주리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선행되는 문제가 있다. 세계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거의 1/3만이 자유롭다. 그 나머지 2/3 이상이 노예이다.…기아 또는 빈곤이란 인류에게 오랫동안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빈곤은 현세대나 현재의 경제 체제와 더불어 생긴 것이 아니다. 기아와 빈곤을 종식시키고 싶다면 먼저 부자유한 국가들의 속박을 깨뜨려야 한다.”

과연 그럴까? 유엔인권위원회 같은 데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굶주림은 사람을 눕게 하지만 편히 쉴 수 없게 만든다. 굶주림은 사람을 눕게 하지만 일어설 수 없게 만든다”(나이지리아에서 구전되는 말) [류은숙] <2007년 01월 31일 인권오름 제39호>

유엔사회권위원회 일반논평 12: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

…국제사회가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완전한 존중의 중요성을 수차례 재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규약 11조에 제시된 기준과 세계 여러 지역의 실제상황 간에는 여전히 심각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 개발도상국의 국민인 전 세계 8억4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적 기아를 겪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연재해, 일부 지역에서 증가하는 내란과 전쟁의 발생, 그리고 정치적 무기로서의 식량 이용의 결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본 위원회는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가 대개 개발도상국에서 특히 심각하지만, 영양실조, 영양결핍 및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에 관련된 기타 문제가 일부 경제선진국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근본적으로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의 근원은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특히 빈곤으로 인하여 잉여가능한 식량에 대한 접근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위원회는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핵심 내용이 다음을 내포한다고 간주한다.

개인의 식이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양과 질을 갖추고 있고 해로운 물질이 없으며 해당 문화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식량이 이용가능한 상태

이러한 식량이 지속가능하고 기타 인권이 향유를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 상태

식이적 필요란 식사가 전체적으로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 발전 및 유지, 그리고 생애 전 단계에서 성별과 직업에 따른 생리적 필요를 포함하여 신체적 활동을 위한 영양분의 혼합을 포함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이적 다양성, 그리고 모유 수유 등 적절한 섭식 및 급식 방식을 유지, 적응 또는 강화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이때 가해지는 식량가용성 및 접근성에 대한 최소한의 변화가 식이적 구성 및 섭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보장한다.

해로운 물질이 없을 것은 식량이 불순물 및 불량한 환경위생이나 여러 단계의 공급 과정 중의 부적절한 취급으로 인하여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량 안보 및 공적‧사적 수단을 통한 일련의 보호조치에 대한 요건을 정한다. 또한 자연발생적 독소를 검출하고 이를 예방하거나 박멸하기 위한 주의도 기울여야 한다.

문화적 수용성 또는 소비자 수용성은 음식 및 음식 소비에 부여되는 인지된 비영양적 가치, 그리고 접근가능한 식량의 성질에 대한 정보력 있는 소비자의 우려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고려하여야 할 필요를 내포한다.

가용성은 생산지나 기타 자연자원으로부터 직접 먹을 것을 구할 가능성 또는 수요에 따라 식량을 생산지로부터 그것이 필요한 곳으로 운반할 수 있는 원활한 유통, 가공 및 시장 시스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접근성은 경제적 접근성과 물리적 접근성을 모두 포함한다.

경제적 접근성은 적절한 식사를 위한 음식물의 획득과 관련된 개인 또는 가정의 재정적 비용이 다른 기본적 필수품의 획득 및 충족을 위협하거나 제한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접근성은 사람들이 음식을 조달하는 획득 유형이나 조달할 자격에 적용되며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향유를 위해 충분한가에 대한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토지가 없는 사람들 및 기타, 특히 빈곤한 계층같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집단은 특수 프로그램을 통한 관심을 필요로 할 수 있다.

물리적 접근성은 적절한 식량이 유아, 아동 등 신체적으로 취약한 사람, 노인, 신체장애인, 불치병 환자 및 정신질환자 등 지속적인 건강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재해 피해자, 재해 빈발지역 거주자 및 기타 특히 혜택받지 못한 집단들은 식량 접근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관심, 그리고 때로는 우선적 고려를 필요로 할 수 있다. 조상 전래의 땅에 대한 접근권이 위협받고 있는 많은 선주민 집단도 특별히 취약한 경우에 해당한다.

각국은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 관할권 내의 모든 사람에게 양이 충분하고, 영양이 알맞으며 안전한 최소한의 필수적인 식량에 대한 접근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인권오름 제 39 호  [기사입력] 2007년 01월 3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71 호 2011년 10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역자 주]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이 올해 8월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발췌 소개한다. 이 보고서에서 특별보고관은 빈민을 처벌하고 분리하고 통제하는 법과 규제와 관행들을 분석한다. 이런 조치들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증가해왔고 경제 위기 때문에 최근 몇 년간 강화되고 있다. 빈민을 범죄시하고 처벌하는 국가와 사회세력의 방식은 상호연결된 다차원적인 것이다. 특별보고관은 이런 방식을 크게 네 가지로 분석한다. a) 빈민이 공적 공간에서 생계유지행위를 하는 걸 부당하게 제한하는 법과 규제와 관행, b) 공적 공간의 고급주택화와 민영화와 관련된 도시계획 규제와 조치들, c) 빈민의 자율성, 프라이버시 및 가족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공적 서비스와 사회복지급부에 접근할 수 있는 자격조건의 강화, d) 빈민의 자유와 개인적 안전을 위협하는 구금과 투옥을 과도하고 자의적으로 이용. 보고서의 원문은
http://www.ohchr.org/Documents/Issues/Poverty/A.66.265.pdf
에서 볼 수 있다.

I. 도입

이 보고서에서 “형벌화 조치”란 빈민을 처벌하고 분리하고 통제하며 빈민의 자율성을 해치는 정책, 법 및 행정 규제를 언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다.

II. 빈곤의 현실: 낙인찍기, 차별, 형벌, 배제

형벌화 정책은 빈곤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그들이 고통 받고 있는 광범위한 차별과 그로 인해 상호 재강화되는 불이익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다.

형벌화 조치는 빈민이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자녀들의 건강과 교육에 무관심하며 부정직하고 가치 없으며 심지어 범죄자라는 차별적인 편견에 따른 것이다. 빈민은 스스로의 불운을 자초한 이들로 그려지며 단지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상황을 치유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편견과 선입견은 편향되고 선정주의적인 언론 보도를 통해 강화된다. 그런 언론들은 홀어머니, 인종적 소수자, 이주자 등 복합적인 차별형태의 피해자들을 특히 표적으로 삼는다. 이런 태도들은 아주 뿌리 깊어서 정책입안가들로 하여금 빈민이 빈곤상황을 극복할 수 없도록 저해하는 구조적 요인들을 다루지 않게 한다.

차별과 낙인의 결과로 빈민은 공공당국에 대한 공포와 심지어 적개심을 갖게 되며 빈민을 원조해야 하는 제도들에 대해 거의 신뢰를 가질 수가 없다. 흔히 정책입안가, 공무원, 사회복지사, 법집행공무원, 교사와 보건 종사자들은 빈민을 불신하거나 생색내는 태도로 다루며 빈민 스스로의 생활증진 노력을 무시하고 지원하지 않는다.

낙인과 편견적 태도는 수치감을 양산하고 빈민으로 하여금 공무원에게 접촉하는 걸 꺼리게 만들고 필요로 하는 지원을 구하지 않도록 만든다. 사회가 낙인을 찍은 서비스에 접근하여 더 큰 사회적 차별에 노출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빈민은 식권, 보조금, 공공주택, 무상보건 등에 대한 청구를 삼가게 되고 그로 인해 분리는 더 강화되고, 빈곤이 세대를 통해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강화하게 된다.

III. 국제인권의 틀

국제인권체계의 핵심 요소는 비차별과 평등이다. 이들 원칙은 동등한 환경의 사람들을 법과 관행에서 동등하게 처우할 것을 요구한다. 인권법 하에서 처우에 있어서의 모든 구분이나 차이가 차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구별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정당성이 있을 때는 평등 원칙과 양립가능하다. 정당한 구별은 정당한 목적을 추구해야만 하고 채택한 수단과 추구된 목표사이에 균형적인 합리적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빈민에 대한 차별적 처우(구별, 배제, 제한 또는 선호)는 인권법 하에서 정당화될 수 있도록 앞서 언급한 기준을 따라야만 한다.

이 보고서에서 검토한 형벌화 조치를 묶는 공통 요소는 그것들이 앞서 언급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형벌화 조치들은 빈민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향유와 행사를 무효화하거나 손상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빈민을 차별하고 있다.

IV. 인권의 향유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형벌화 조치들

A. 공적 공간에서의 빈민의 행위를 제한하는 법, 규제, 관행

이들 조치들의 공통분모는 공적 공간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폐가 된다”고 간주되는 행위들을 형벌화하는 것이다. 국가는 위험하고, 공공의 안전이나 질서와 갈등하며, 그 공간이 의도한 정상적 활동들을 방해한다는 등의 이유로 형벌화 조치를 정당화한다.

노숙인과 구걸을 불법화하고 있다. 이런 법들은 야간 구걸을 금지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로 구걸하는 걸 금지하거나 더 나아가 공연이나 춤, 상처나 기형적인 신체를 보이는 것 등을 금지하는 것으로 확대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구걸의 현저한 수단을 전혀 보이지 않았더라도 단지 공공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법이 되기도 한다. 구걸과 배회의 금지는 평등과 비차별의 원칙에 대한 심각한 차별을 대표한다. 이런 조치들은 법집행공무원들에게 폭넓은 재량권을 줌으로써 모욕과 폭력에 대한 빈민의 취약성을 증대시킨다. 이들 조치들은 극빈의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향한 차별적인 사회적 태도의 확산에 기여할 뿐이다.

국가는 또한 공공장소에서의 취침, 앉아있기, 누워있기, 쓰레기 버리기, 소유물 보관하기, 노상 음주, 노상 배뇨, 무단횡단 등 거리 생활과 결합된 행위들을 형벌화하고 있다. 이런 조치들이 빈민만을 향한 것은 아니지만, 빈민에게 불균형하게 영향을 끼친다. 집이 없기 때문에 빈민은 일상 활동을 공공장소에 과도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거리에서 사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들이 형벌로 제재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비록 이런 유형의 조치들이 외관적으론 중립적이지만, 연구조사들이 보여주는 바는 당국이 가난한 사람들, 특히 노숙인을 표적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노점상으로 생계를 도모하는 사람들을 형벌화하는 조치가 우려된다. 많은 국가들에서 거리행상은 심각하게 제한되거나 불법이며 거리행상에게서 물건을 사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연구에 따르면 노점상은 다른 수입원이 없고, 교육수준이 낮고, 구직 기회가 없기 때문에 행상을 하게 된다. 노점상은 생계를 도모하기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생계수단이다. 국가가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면 극빈자의 생존권을 심각하게 해치게 된다. 또한 노점 시간과 구획 등을 정하는데 관계 공무원의 재량권이 크기 때문에 노점상들은 법집행공무원, 조직폭력배 등의 위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B. 도시 계획 규제와 조치들

고급주택화 정책, 사회주택의 민영화, 재개발과 토지이용제한법 등의 채택을 통한 도시 변형은 빈민을 도심지역으로부터 더 멀리 이전하게 함으로써 주거권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권리를 위협하고 있다.

도시를 더 “안전”하게 만들고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겠다며 국가들은 빈민을 배제하는 토지 사용, 가령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마을, 호화 고가 주택, 대규모 스포츠 시설 등에 우선권을 주는 토지이용제한법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개발”, “역사문화유산의 보존” 등의 목적으로 마을 전체를 철거하고 거주자들을 퇴거시키고 개발프로젝트의 여지를 만든다. 그 결과로 이런 지역은 원주민이 되돌아와 살기에는 너무 비싼 곳이 되어버리고 더 싸고 더 불편하며 더 외딴 지역으로 주거를 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많은 경우 빈민들은 사전 고지 없이 강제 퇴거되며, 폭력과 소유물의 손상과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정책들은 도시의 포괄성과 다양성을 심각하게 손상할 뿐 아니라 빈민에 대한 분리와 사회적 배제를 증가시킨다. 또한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 뿐 아니라 일할 권리,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문화생활에 참여할 권리 등에 심각한 장벽을 대표한다. 공적 공간으로부터의 빈민 배제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의 대규모 행사와 연관된 프로젝트로 인해 더 배가된다. 가령 서울에서는 2002년 월드컵 준비에 도시의 특정 장소들에서 노숙인 금지가 포함됐다. 88년 올림픽 동안에는 노숙인이 도시 외곽의 시설에 구금됐다. 이런 조치들의 실제적 효과는 빈민과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그들이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접근할 수 없는 호텔, 스포츠시설, 사무실 빌딩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C. 공적 서비스와 사회복지급부에 대한 조건 강화

국가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공적 서비스와 사회복지 급부에 대한 조건을 강화하고 있다. 공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거나, 대상의 정확성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 의존성을 피하도록 하고 일하지 않으려는 동기를 해소해 시스템 남용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이유들에 유효한 우려가 있을지 모르나 그 영향은 흔히 추구하는 목적에 완벽하게 비례하지는 않는다. 과도한 자격요건과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국가는 빈민을 처벌하고 수치감을 주며 빈민이 당면한 상황을 악화시킨다. 더욱이 공적서비스와 사회복지급부의 수혜자들은 미래에 대해 불확실한 상태이며 장기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이런 조치들은 그 효과성과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증거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차별적인 낙인과 편견에 의존하고 있다. 자격요건과 조건은 흔히 강력한 가부장제적 태도로 지지되고 있다. 정책입안가들은 자신들이 빈민들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으며 빈민들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조치들은 수혜자의 자율성을 해칠 뿐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을 막는다. 수혜자를 감시하는 정책은 수혜자를 범죄자처럼 취급하며 죄책감과 분노와 수치를 느끼도록 만든다. 사회복지 급부를 운영하는데 국가들이 채택한 광범위한 통제와 감시 메커니즘은 사회복지급여 속여타기에 분명히 비례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가 드러났다. 수혜자의 사기에 의한 것보다는 국가의 행정적 실수에 의한 것이 더 흔한 것으로 드러났다. 설령 수혜자가 더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대개 사기라기보다는 실수이며 사기라 해봤자 적은 돈의 생계비일 뿐이다. 하지만 정책입안가들은 복지급부사기를 만연한 문제처럼 여기며 그것과 싸우기 위해 상당한 자원을 쓴다. 세금 사기보다는 복지급부 사기를 더 강조하는 정치적 수사가 불공정하게 압도적이며, 이런 일의 비용이 국가에 더 큰 부담이 된다.

D. 과도하고 자의적인 구금과 투옥의 이용

법집행공무원들이 “빈곤”, “홈리스” 또는 “취약함”을 범죄성의 지표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빈민은 불공정하게 높은 빈도로 형사법체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빈민은 형사법체계 속에서 버텨내기에 상당한 장벽을 겪는다. 그 결과 불공정하게 많은 수의 빈민과 배제된 사람들이 체포, 구금, 투옥된다.

V. 결론과 권고

빈곤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상황이며, 직간접적으로 빈민을 처벌, 분리, 통제하거나 해치는 조치들로서는 빈곤이 악화되고 만연될 뿐이다. 이런 조치들은 광범위한 인권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빈민의 능력을 크게 해치며 빈곤과 배제의 악순환을 심화하고 지속시킨다.

빈민이 처한 상황들로 인해 그들을 형벌화하기 보다는 국가는 빈민이 식량, 주거, 고용, 교육 및 보건 서비스에 접근하는데 당면한 법적, 경제적, 사회적 및 행정적 장벽을 제거하는 적극적인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희소한 자원을 비용이 많이 드는 형벌화 조치에 바치는 대신에, 국가들은 최대한의 가용자원을 빈민이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시민적 및 문화적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방향으로 돌려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271 호 2011년 10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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