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71 호  [기사입력] 2013년 11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날이 춥다. 겨울이 되면 제일 두려운 뉴스가 있다. 전기가 끊긴 방에서 촛불 켜고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가난한 이들의 반복 생산되는 사건, 이 겨울에 수도도 전기도 끊겼다는 에너지 빈곤층의 사연이다. 엄청난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풍요의 한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묻게 된다. 모자라지 않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혹여 모자란다면 도대체 누구의 소비 때문에 모자란 것인가? 배분이 불평등한 에너지는 생산과정에서도 혹독한 차별을 한다. 

서울 대한문 앞에서 밀양송전탑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765kv 송전탑을 상징하는 765배의 절을 하는 행사가 여러 번 있었다. 얼마 전 점심 무렵 밀양에서 올라오신 할머니 세 분과 같이 절을 하고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시끄럽다’고 ‘나랏일 반대하는 것들’이라고 욕을 하고 지나갔다. 잠시 후 잘 차려입은 중년 여성들이 왁자지껄 지나갔다. “왜 멈춰? 짓던 건 지어야지. 왜 중단하라는 거야?” 할머니들에게 삿대질 하듯 외쳤다. 거의 악을 쓰는 수준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분에 차서 달려가셨다. “니들 지금 뭐라캤노?” 경찰이 할머니를 뜯어말리는 사이 그 여성들은 유유히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속상해서 못살겠다’는 할머니의 맘속에 꽉 찬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랏일에 버려질 수 있는 시민이 시민일 수 있는가?’ ‘당신들이 돈만 주면 살 수 있다고 여기는 그것을 나는 결코 팔 맘이 없다.’ ‘이건 거래가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며칠 전 추우니 집에 그냥 계시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기어코 김치통을 들고 왔다. 택시라도 타고 오시라 했건만 늘 버스를 타고 오신다.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 나가니 양쪽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힘겹게 주저앉아 있다. 칠순을 넘긴 엄마가 그날따라 참 늙어 보였다. 횡단보도에서 엄마를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밀양의 ‘할매’라고 불리는 분들이나 울 엄마의 나이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던 것이다. 엄마가 지금 산속에서 송전탑 공사에 맞서 싸우는 상상을 해보니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자식을 위해 기어코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는 엄마나 산자락에 매달려 ‘이런 환경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외치는 그분들이나 다를 바 없는 마음일 것이다.

엄마는 평생 에너지 빈곤층이었다. 아이 넷을 키워야 했던 알량한 단칸방은 구들장이 불량이었다. 어느 밤 연탄가스에 모두 비명횡사할 뻔 했다. 동생의 신음소리에 눈을 떴다는 엄마는 잠과 가스에 취한 우리들을 찬바람 부는 길로 내쫓아 정신 들게 한 후 동치미 국물을 퍼먹였다. 구들장 고칠 엄두가 안나 아예 연탄을 때지 않기로 했다. 일하고 돌아온 엄마는 뜨뜻한 방에 실컷 지져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난 그때 ‘지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엄마의 갈라터진 발을 씻을 더운 물은 꿈꾸기 어려웠다. 비싼 석유곤로에 물을 데워 쓰는 것은 사치였다. 가스보일러로 난방과 온수를 해결할 수 있는 삶은 엄마의 생애 아주 후반부에야 왔다. 마찬가지로 밀양의 할머니들은 평생 얼마나 에너지를 써봤을까? 싸고 깨끗한 에너지와는 얼마나 먼 거리의 삶을 살아왔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끼고 참고 견뎠을 삶일 것이다.

우리 주변은 많이 커지고 화려해진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엄마와 같은 에너지 빈곤층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빈곤층까진 아니더라도 생활의 주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오른다’는 전기 등 각종 에너지 요금 걱정에 핵발전소와 송전탑을 빨리 세워야 더 싸게 쓸 수 있다는 선전이 솔깃할지 모른다. 생활의 아쉬움과 각박함에 ‘왜 공사를 방해하냐’고 원망할지도 모르고, 해준 것 없어도 나랏일 방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스스로 가꿔온 도덕심에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끼리, 같은 시민끼리 ‘누구는 국민입네 누구는 국민 아닙네’로 나뉘어 싸우는 갈등만 커져간다. 이 갈등의 에너지를 전환한다면 아주 고 에너지가 발생할 것 같다.

기업이 잘되고 기업이 돈 많이 벌면 노동자도 잘살게 된다는 말, 나랏돈이 많아지면 가난한 이에게도 혜택이 온다는 말, 이제 그런 말들에 의심을 보여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형편이다. 마찬가지로 핵발전소 많이 세워야 값싸게 전기를 쓸 수 있다는 말, 그 전기를 쓰려면 송전탑이 필요하다는 말, 경제성장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란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의심을 품고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질문을 던질 때가 지나도 한참 늦은 것 같다. 이번 주말로 계획된 밀양희망버스는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시동을 거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 엄마 같은 분들이 고통 받는 게 그저 안쓰럽고 죄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의로운 삶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의지에 감동하게 됐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분들이 고통을 자처하고 감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분들이 대신 싸워주고 대신 대안을 만들어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건 우리의 미래이고 우리가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대안에너지의 선구자로 알려진 헤르만 셰어의 글과 셰어의 노력으로 일궈진 ‘세계재생에너지회의’의 성명이다. 새삼스러운 내용은 아니다. 밀양과 관련해 대안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들었던 내용들이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건 이런 것이다. 셰어는 연방의원을 여러 차례 지낸 정치인이자 학자이다. 그와 독일 시민들이 재생에너지를 주장하고 실행하면서 고착당하고 채증당하고 다치고 끌려갔다는 얘기는 없다. 공권력에 모욕당하고 나랏일에 반대하는 건 국민도 아니라고 ‘버림받았다’는 얘기도 없다.

2010년 세상을 떠난 셰어는 평생을 바쳐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인권을 ‘자연의 수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부적 인권’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이 화석에너지의 고갈이나 위험성 때문에 그저 피치 못해 나온 요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권적이란 주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셰어가 강조하는 전환의 절박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올 겨울은 여러모로 많이 춥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절박하다.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달라져야 나눠 갖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밀양의 고통에 맞닥뜨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게 된 것이다. 서울을 위해 지방을 희생하는 방식을 버려야 하고 위험한 핵발전 대신 하루빨리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 에너지의 생산도 혜택도 같이 나누는 길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인지 밀양희망버스는 질문을 던지려 한다.

“재생 에너지에 대한 인권”(2005년 11월 26-30,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재생에너지회의에서 채택한 최종 성명)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의 첫 문장은 기본적인 인류의 약속을 명시하고 있다. 이 약속을 존중할 때에만 평화로운 인류의 삶이 튼튼하게 보장될 수 있다.

에너지는 모든 삶에 기본적인 필수 조건이다. 에너지 가용성은 기본적이고 불가분적인 인권이다.

20세기에 우리가 얻은 경험은 기존의 에너지 공급 시스템(주로 화석 에너지와 일부 원자력 에너지에 의존하는)이 모든 사람에게 에너지 인권을 보장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에너지 인권은 10억 배 이상에게 침해됐다. 전통적인 에너지원의 임박한 고갈과 그것들이 환경과 기후에 미친 엄청난 영향 때문에, 에너지 권리는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적게 보장될 수 있다. 에너지 인권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재생에너지의 동원을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다. 지금까지, 국제적 노력은 필수적인 요구와 주어진 기회를 따라잡지 못하고 꾸물거렸다. 다수의 유엔 회의는 지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약속을 했다. 매 단계에서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유엔 기구들과 다국적 개발 은행들은 그들의 우선순위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려하지 않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했다. 교토의정서는 그것에 요구된 바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교토의정서의 주요 문제는 재생가능에너지를 향한 근본적 전환으로 배출을 방지하는 대신에 거래와 매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강조한데 있다. 원자력의 증진은 국제법속에 정해져있지만 재생에너지는 그렇지 않다. 화석과 핵에너지 시스템은 여전히 매년 미화 5천억 달러의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이것은 재생에너지에 쓰여지는 것의 50배이다.

정부간 국제 기구들은 그 시스템에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차별을 반영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핵기술의 확산을 조장하고,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화석에너지산업의 위성으로 작동하고 있다. 두 기구 모두 핵과 화석 에너지의 위험성을 낮추고 재생에너지의 잠재성을 부정함으로써 정부들과 대중을 오랫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왔다.

이 기구들은 미래에 눈감은 에너지 정책으로 정부들을 이끌어왔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더 이상 침묵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책임자의 이름을 거명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책임질 뿐 아니라 행동하지 않음에도 책임져야 한다. … 인류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오늘과 미래에 재생에너지의 비용은 지속가능하고 싸며 모든 사람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더 이상의 지연은 무책임한 것이다. 경제적, 생태적 이유와 평화 정책이 재생가능 에너지를 웅변하고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하건데, 재생에너지를 위한 기본적인 윤리적 결단이 결론이다. …


국제재생에너지기구 설립회의 연설(2009년 1월 26일, 독일 본, 헤르만 셰어)

… 유명한 세계적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태양은 결코 그늘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문명은 무수한 실존의 에너지 위기들로 그늘 지워져 있고, 동시에 그 위기는 쌓여가고만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핵심어들을 알고 있습니다. 줄어드는 매장량, 늘어가는 에너지 요구, 그에 따라 늘어나는 소진, 가격 상승, 경제적 제약, 사회 내부의 긴장과 국가 간의 국제긴장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 말고도 기후 변화, 공기와 물 오염, 죽어가는 숲과 사막화가 있습니다.

인민과 그 정부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시한폭탄의 째깍거리는 소리 듣기를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해결책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광범위한 해결책은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입니다.

세계문명은 다양한 에너지 위기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하여 시간과 경주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그 전환의 때입니다. 오랜 아프리카의 교훈처럼,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려라. 그러면 그늘은 네 뒤에 생길 것이다.”

… 제가 보기에 재생에너지 정책에 대한 4가지 일반적 지침이 있습니다.

1. 빠른 행동이 필수불가결합니다. 재생에너지에 대해 입 발린 말을 늘어놓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구적으로 말하고, 국가적으로 미루는” 게임을 끝낼 때가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
2. 재생에너지는 공공재입니다. 바람과 태양열을 사유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에너지 형태를 사용하면 세계 경제에 더 큰 평등이 올 겁니다.
3. 재생에너지는 거시-경제적 혜택을 다면화했습니다. 정치적 목표와 기술은 거시경제적 혜택을 투자자와 소비자를 위한 미시경제적 동기들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4. 재생에너지는 연료비와 환경 비용을 피하는 새로운 경제적 계산을 가능케 합니다.

… 여러분에게 목표가 있다면, 많은 저항들로 인해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일이 틀에 박힌 방식으로 되지 않을 때는 틀을 벗어난 경로를 취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야기한 방법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부담 대신에 혜택을 공유하자 - 국제재생에너지기구 설립의 정치, 경제, 생태적 이유(2008년 4월 10일, 독일 베를린, 헤르만 셰어)

… 우리는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로 경제와 사회에 대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해있다.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기후 변화만이 아니다. 과거 화석 자원의 과도한 사용으로 야기된 지구 온난화의 점증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구의 에너지 시스템은 온전했을 리가 없다. 다양한 환경 문제와 함께 에너지 자원의 계속 커가는 결핍 문제가 남아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통적인 에너지 공급 시스템의 간접적인 외부적 비용이다. 현재의 에너지 가격은 이런 비용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불해야만 하는 비용이다. 재생에너지로서만 우리는 그런 비용을 피할 수 있고 사회들을 그런 비용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이런 도전에 대한 답들은 대부분에게 경제적 부담으로 여겨진다. 경제적 부담에 대한 가정이 지금의 에너지 토론에 큰 자국을 남기고 있다. 나에게 이런 가정은 아주 근시안적으로 보인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의미심장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및 생태적 혜택을 이끌 것이다. 미시경제적 차원만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에너지 투자에 대한 아주 고립적인 비용비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런 혜택들이 간과될 경향이 있다. 거시경제적이고 총체적인 전망을 사용하면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핵에너지는 박물관에 있어야(2008년 8월 독일타임스, 헤르만 셰어)

우리는 모든 우리의 전기 필요를 재생에너지로 충족시킬 수 있다.

핵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싸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대안에너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고 핵에너지에 한때 그랬던 것처럼 대안에너지의 증진에 힘을 쏟아야 할 때이다. 세계적으로 핵에너지의 르네상스를 선포하는 선전이 더 많다. 세계에너지기구는 심지어 2050년까지 1,200개의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기후변화에 대한 해답이며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연료 가격을 안정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핵에너지의 많은 심각한 위험들 뿐 아니라 핵에너지의 진짜 비용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재생에너지의 엄청난 잠재성을 부인하고 있다. …

우리의 핵폐기물은 10만년 남을 유산이다. 어떤 정치적, 경제적 질서가 그런 기간을 버티고 남아있을 수 있을까? 원자력으로 돌아가선 안되는 더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 엄청난 물을 필요로 하는 핵 원자로는 늘어만 가는 지구적 물 위기와 충돌하며 세계 인구의 필요와도 경쟁한다. 핵발전소가 만들어낸 잉여 열은 생산적으로 이용하기 어렵다. 이것이 핵발전이 근본적으로 비효율적인 이유이다. 이윤을 내기 위해선 비싼 핵발전소가 최대생산능력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이건 정부가 전기 시장 자유화를 뒤집고 핵산업에 몫을 보장해줘야만 가능한 일이다. 원자력 경제는 언제나 국가 산업이었다. 이것은 공공연히 인정되기도 하지만 때론 은폐된다. …

지난 12년 동안, 독일의 재생에너지법으로 3만 메가와트의 전력이 만들어졌다. 2007년 한해에만, 새로운 용량이 급격히 늘어서 재생에너지가 150억 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했다. 이것은 두 개의 핵발전소의 연간생산과 맞먹는다. 이런 초기 비율이 25년만 계속돼도 독일의 전기는 재생에너지로 완벽하게 공급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약 35만 평방킬로미터에 8천1백만 명의 인구를 가졌다. 독일에서 될 수 있는 일은 어디에서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우선순위에서, 기존의 중앙집중식 설비에서 재생 에너지를 확장하는 것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고도로 집중화된 전통적인 발전소는 다수의 더 작은 중간 크기의 발전소로 대체될 수 있다. 태양 또는 풍력 발전기는 단기간에 설치될 수 있는 반면에 핵발소는 짓는데 평균 10년이 걸린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선 핵에너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

핵에너지의 비용은 멈출 수 없이 치솟는 반면 재생에너지의 비용은 순차적 생산과 기술의 세련으로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근시안적인 비관주의 뿐 아니라 핵에너지를 둘러싼 근거 없는 기술적 낙관주의를 극복해야만 한다. … 장차 핵에너지가 있을 곳은 기술 박물관이다.

인권오름 제 371 호  [기사입력] 2013년 11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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