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5년 10월 27일 인권하루소식 제2924호> 

 

1883년에 영국에서 발표된 이 팜플렛은 세상을 경악케 하고 빈곤을 '발견'케한 문서로 알려져 있다. 빈곤은 엄연한 현실이었을 텐데 왜 '발견'되어야만 했을까?

사회권이란 인권이 인식되기 이전에 빈곤은 죄악이었다. 승승장구하는 경제적 성장과 번영으로 인해 눈에 띄는 곤란은 감소된 것으로 여겨졌고, 보다 숙련된 노동자들은 생활수준의 향상을 보게 됐다. 많은 중산층들은 빈곤이 성공적으로 퇴치되었다고 여겼다. 이 번영의 시기에 가난한 자가 있다면 그건 인간말짜인 것으로 게으르고, 나쁜 습관을 못 고치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탓이라 여겼다. 따라서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는 가치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인간말짜를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거지근성 등 빈민의 성격결함과 행동을 고치는 것이 빈곤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이었다. 그렇게 빈곤문제를 바라본 세력에게 빈곤은 보이지 않는 문제였고 따라서 '발견'돼야 했다. 원래 있었고 사람이 살고 있던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낙관에도 불구하고 빈민은 사라지지도 감소하지도 않았다. 전례 없는 국부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박탈과 불행이 일반화돼 있다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찰스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도 런던 동부의 실상을 고발한 작품이다. 일련의 사회활동가와 저널리스트들이 빈민들의 실상을 고발했고 빈곤문제에 대한 논쟁을 펼치게 됐다. 그런데 이런 빈민에 대한 묘사는 이방의 세계, 딴 세계를 그리는 듯한 것이었고, 그것의 실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인정하려 들지 않는 내용, 연애소설을 들고 있는 독자들이 읽을 수 없는 참혹한 내용의 것들이었다. '런던 부랑인의 절규'라는 선정적인 제목이 말해주듯 말이다. 그러나 거기에 담긴 내용들은 소설이 아닌 사실이었고, 선정적이라 할지라도 빈곤이라는 최악의 사회문제를 드러내는데 기여했다.

많은 노동자들이 계절노동이나 아주 불안정한 경제 부문에 임시 고용될 뿐이고, 15시간에서 17시간에 이르는 착취노동을 하면서도 최저임금을 받고 있었다. 일자리 말고도 아주 과밀한 주거, 부적절한 위생, 높은 아동사망률, 성매매의 만연, 폭력적 범죄와 질병 등에 둘러싸여 있었다. 런던동부에서 빈곤율은 40%에 육박했다. 사적자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만큼 빈민의 수가 많다는 것, 빈곤의 원인이 성격결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자유로운 시장에 내버려 두면 되고, 국부가 증진되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몰았던 논리들은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것이 보장돼야 한다는 사회권의 도전을 받게 됐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빈곤 문제를 발견하기 위해 '서울 부랑인의 절규'같은 고발이 더 이상 필요할까? 700만, 800만에 이른다는 빈곤층의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빈곤을 개인의 모자람으로 취급하고 여전히 가치 있는 빈민과 그렇지 않은 빈민을 구별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논리를 고집하고 있다면 발견될 것은 빈곤이 아니고 치유될 것은 빈민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양심이고 구조일 것이다.

런던 부랑인의 절규(The Bitter Cry of Outcast London): 비참한 빈민의 상황에 대한 조사(Andrew Mearns, 1883)

(일부발췌)

…최근까지 기독교회는 빈민구제를 일부 외곽조직으로 만족해왔거나 더 나쁘게는 개인의 문제로 돌리거나 조직도 없는 소수의 기독교인에게 맡겨왔다. 나머지들은 피상적이고 부적절한 지역 방문과 다소 무차별적인 물질적 자선의 배포와 극빈자들이 모이는 몇 개의 방을 여기저기에 개설하는 것에 만족해왔고 그런 일들로는 소수가 구제 받았다. 이 모든 것은 그 방식에서 선하며 선한 일을 해온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으로는 가난과 비참함, 더러움과 부도덕으로 아주 음울한 지역의 가장자리만을 건드렸을 뿐이다.
…우리는 사실을 직면해야만 한다. 사실을 통해 끔찍한 죄악과 비참함의 홍수가 우리를 덮치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다. 그 수위는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이 문건은 극빈자의 실제 상태와 가장 효과적인 대책을 찾기 위한 오랫동안의 끈기 있고 진실한 조사의 결과이다.

…두 가지 주의사항을 염두에 두는 게 중요하다. 첫째, 여기서 주어진 정보는 선별한 사례가 아니다. 집집마다, 골목마다, 거리마다에서 보이는 상태를 단지 드러낸 것이다. 둘째, 절대로 과장하지 않았다. 명백한 사실을 꾸밈없이 서술한 것이다. …


빈민이 사는 곳의 조건

그들의 '집'(home)의 조건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들짐승이 사는 굴과 비교할 때 동물이 사는 굴이 더 안락하고 건강한 곳으로 여겨질 그런 곳을 어떻게 집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 글을 읽는 이들 중에는 이들 치명적인 인간의 빈민굴이 무엇이며, 노예선의 복도에서 듣는 것을 연상시키는 공포에 둘러싸여 수만 명이 어디에서 한데 우굴 거리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려면, 사방에서 던져지고 당신 발밑을 흐르는 오수와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오르는 유독한 고약한 냄새로 쩔은 골목에 들어가야 한다. 그 골목들 상당수에는 햇볕이 전혀 들지 않고, 신선한 공기가 전혀 들어오지 않으며, 한 방울 청소물의 효능을 알지 못한다.

썩은 계단을 올라야 한다. 매 계단마다 빠질 위험이 있고, 일부는 이미 무너져 내려, 방심하면 팔다리나 생명을 잃을 구멍을 남기고 있다. 해충이 기어오르는 어둡고 더러운 복도를 더듬어가야 한다. 그리고 난 후, 당신이 참을 수 없는 악취로 물러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에게 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대속한 인종에 속하는 수천 명의 존재들이 무리져 있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 철로 문 아래나 짐수레나 큰 통속에서, 또는 야외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잠자리에서건 잠을 자고 있는 가련한 피조물을 동정한 적이 있는가? 이곳에서 잠자리를 구하고 있는 이들의 운명과 비교할 때 거리의 그들을 더 부러울 정도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평방 8 피트가 이 많은 방들의 평균 크기다. 벽과 천장은 오랜 세월 방치돼온 때가 뭉쳐 검은색이다. 머리 위 판자의 깨친 틈 사이로 오물이 스며 나오고, 벽을 따라 떨어지고 있고 어디에나 있다. 창문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람과 비를 막기 위해 절반이 넝마나 판자로 막혀있다. 나머지 부분도 아주 더럽고 희미해서 빛이 거의 들어올 수 없거나 밖이 내다보이지 않는다. 열려있거나 깨진 창틈으로 신선한 공기가 그래도 좀 들어올 것이라 기대하고 다락에 올라간다면 낮은 집들의 지붕과 선반을 보게 되고, 방안으로 들어오는 메스꺼운 공기가 죽은 고양이나 새들의 시체 더미나 그보다 더 혐오스러운 것들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썩고 악취나는 주택의 각 방에는 한 가족 때론 두가족이 살고 있다. 한 위생감독관은 한 지하실에서 아버지, 어머니, 세 명의 아이, 그리고 4마리의 돼지를 발견했다. 또다른 방에서 한 선교사는 천연두를 앓고 있는 남자와 8번째 해산을 하고 막 몸을 추스르고 있는 그의 아내와 반은 벌거벗은 채 먼지로 뒤덮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봤다. 한 개의 지하 부엌에는 7명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같은 방안에 죽은 어린아이가 누워있다. 또다른 곳에는 가난한 과부와 3명의 아이, 그리고 죽은 지 13일이 된 아이가 있다. 그녀의 남편은 마부였는데 얼마 전에 자살했다. …초저녁에 아이들을 거리로 내모는 어머니가 있다.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간까지 부도덕한 목적으로 방을 세놨기 때문이다. 이 가련한 어린 아이들은 다른 곳에서 잘 곳을 찾지 못하면 그 시간이 돼서야 슬금슬금 기어들어온다. 침대가 있는 곳은 단지 더러운 넝마와 대팻밥이나 짚단 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 불쌍한 아이들이 휴식할 수 있는 부분은 더러운 판자 위일 뿐이다. 이 방의 소유자인 과부는 침대만을 차지하고 바닥은 결혼한 부부에게 임대했다. …


빈곤

…우리가 의미하는 빈곤은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의 빈곤이다.…트위드 바지를 만드는 한 여성에게 물었다. 하루에 얼마를 버냐고 했더니 1실링이라 한다. 그런데 하루가 이 가련한 영혼에게 뭘 의미하는가? 17시간이다!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 그녀는 일한다. 식사할 짬도 없다. 일하면서 빵껍질을 먹고 약간의 차를 마신다.…이들은 가족 소득의 절반을 이런 끔찍한 동네의 임대료로 지불하고 있고, 일용할 음식과 옷과 연료를 위해 남겨지는 돈은 4다임에서 6다임에 지나지 않는다. 빈민의 고통스런 얼굴은 노예제와 악명 높은 억압의 땅에 비할 바 없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이러한 빈곤과 타락의 심연에까지 교육법이 미치고 있다. 그 목적이 아무리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교육법으로 인해 우리가 설명한 이 계급은 잔인한 짐을 걸머져야 한다. 이들에게 서넛의 아이 각각에 대한 일주일에 2펜스나 1페니의 수업료는 그만큼의 먹을 것의 부족을 의미한다.

이러한 빈곤과 지저분함 속에서 사람이 지속적으로 가슴 찢어지는 고통의 광경을 대면해야 하는 일은 불가피하다.…


해야 할 일

…우리는 국가의 개입 없이는 어떤 효과적인 것도 대규모로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이다. 이 가련한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일거리가 있는 중심가 근처에서 살아야만 한다. 그들은 기차나 전차로 교외로 나갈 여유가 없다. 어떻게 그들의 야위고 굶주린 몸으로 1실링 또는 그 이하를 벌기 위해 12시간 이상을 노동하는 것도 모자라 편도 3∼4마일을 걸을 것을 기대한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노동자 주거법(the Artizans' Dwellings Act)은 빈민의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으로 악명이 높다. 기준에 맞는 주거를 건설한다고 대규모 구역에서 빈민들을 몰아냈지만, 이들 주거의 임대료는 극빈자들의 수입을 훨씬 넘는 것이었다. 빈민들은 그들에게 남겨진 거의 없다시피한 숨막힐 듯한 곳에 더욱 밀집해 살도록 내몰렸다. 빈민은 비록 그것이 살아있는 무덤 같은 주거라 할지라도 어딘가에 주거를 가져야만 하기 때문에 부자는 거주하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판정된 부동산을 사들여 그것을 금광으로 바꿔놓으면서 그렇게 빈민의 고통으로부터 더 풍요로운 수확을 거둔다.
국가는 이런 사악한 매매를 빨리 없애야만 하고, 극빈자에게 시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열병의 소굴보다는 더 나은 곳에 살 권리, 가장 지저분한 야수보다는 더 나은 존재로서 살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 …

 

[류은숙] <2005년 10월 27일 인권하루소식 제2924호> 

인권오름 제 407 호 [기사입력] 2014년 09월 18일 21:58: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요즘 사람들의 표정에 꽉 찬 물음이다. 이 질문은 성찰일 수도 있고 초조함과 답답함을 뱉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이 되는 질문일 수도 있고 ‘길은 없다’는 탄식일 수도 있다. 꽉 막힌 골목으로 내몰려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낯빛들이 초췌해져간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이들은 ‘힘이 없다’는 엄살과 ‘너 때문’이란 회피로만 달아나고, 애써 방향을 잡으려는 이들에겐 무시와 모욕이 일상이다.

이런 때일수록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가능성과 응원을 담은 질문이 있고 빗장을 건 질문이 있다. 후자의 질문은 질문의 형식을 취한 명령문일 때가 많다. 불행히도 한국의 권력층은 후자의 화법만을 구사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회의 큰 분기점이 있을 때마다 응당 던지는 질문이다. 97년 IMF 구제금융의 폭탄을 맞으면서 87년 민주화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돈이 최고이고 돈 자랑이 수치가 아니다’란 노골성에 대해, ‘공공성이고 사회적 연대고 필요 없다. 알아서 각자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교리’에 대해 질문했다.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인가?’란 질문은 모욕 받았고 ‘더 많은 돈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고 인권이고 사치’라는 ‘교리’가 강화됐다.

그리고 질문이 봉쇄된 바다 위에서 ‘세월호’가 터졌다. 한국 사회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사회’로 뭔가 달라져야만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돈에 대한 숭상의 교리가 우리 삶에 추상적인 위기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기를 언제든지 낳을 수 있다는 걸, 우리 눈으로 실시간 학습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질문 앞에 정치색과 입장을 떠나 모두가 몰두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질문은 곧 오염됐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은 강자에 대한 저항을 무질서 또는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무시했다. 약자에 대한 폭력과 모욕을 자유나 권리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부추겼다. 심지어 약자의 고통과 존엄성에 대한 침해를 묘사하는 ‘모욕’이란 단어마저 제 것으로 뺏어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반세기 전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던졌다. 이 질문은 그가 암살당하기 몇 달 전에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연례총회’에서 한 연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때 그는 시민권 운동의 2막을 열겠다면서 경제 정의를 위한 빈민의 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앞서 펼쳤던 시민권 운동보다 빈곤에 대한 공격이 훨씬 어렵다는 걸 그는 예감했다. 앞서의 투쟁은 백인과 흑인이 어느 식당에나 들어가 햄버거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종분리를 강제하는 법을 깨뜨렸다. 그런데 흑인에게는 식당에 들어가 햄버거를 사먹을 돈이 없었다. 돈 없는 흑인은 여전히 백인과 나란히 식사할 수 없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가난에 내팽개쳐있는 한 결코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고 킹은 선언했다. 이제 시작하려는 투쟁은 경제적 평등을 위한 것이었다. 킹 목사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사람들은 이제 그를 빨갱이라 욕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것을 빌미로 킹 목사와 동료들을 사찰했고 죽음의 위협이 가해졌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킹은 아랑곳없이 나아갔다. 정부가 가난한 이들을 적대시하며 인색하기 그지없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거와 생활임금의 보장, 특히 기본소득의 보장이라 할 것을 ‘경제적 권리장전’의 내용으로 요구했다. 그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들이 담긴 것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연설이다. 가령 연설은 ‘빵바구니 운동’을 강조한다. 이 운동의 핵심은 기업이 지역사회에서 벌어들인 돈을 지역사회를 위해 쓰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킹 목사는 “나의 돈을 존중한다면, 나의 인격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즉 지역사회에 일자리를 창출하지도 하고 지역신문에 광고를 싣지도 않고 흑인금융기관에 자금을 예치하지도 않는 기업에겐 우리도 돈을 쓰지 않겠다는 거였다. 표적이 된 주요 낙농회사들은 지역 상점의 판매대에 자기 상품을 놓지도 않고 사지도 않는 것에 하나 둘씩 굴복했다. 운동의 대표자들과 기업이 마주앉아 계약서를 작성하게 됐다. 기업들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의 저축은행과 대출협회에 돈을 예치하고 흑인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게 됐다. 그것은 “채워지지는 않고 끊임없이 고갈되기만 하는 국내에 있는 식민지”를 벗어나 “우리에게서 벌어들인 돈을 우리가 사는 곳에 환원하라”는 당연한 요구였다. 이 요구에 포함된 정책 계획들은 다양했다. 가령 세입자연합을 조직하여 낡은 건물의 재개발을 건설 이익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추진하는 것, 세금을 이미 충분히 낸 사람들로서 정부 사업과 정부 관련 계약들을 대기업만이 아니라 소수집단의 작은 사업체들도 따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진보적인 정책을 기획해야 한다.”면서 제시한 것이 기본소득의 보장이었다. “경제적 지위를 개인의 능력과 재능의 척도”로 여기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릇되고 차별적인 시장경제의 운영”을 빈곤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열등하고 무능하다고 낙인찍음으로써,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해고시키는 일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며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개인의 위엄이 번성할 것”이라 주창했다.

그런 구상에 담긴 것은 찔끔 보조금을 늘리고 생색용 개발사업을 유치하자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감옥에 안전하게 감금시켜 놓은 채 음식의 질만 조금 높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킹 목사는 “정당한 자긍심”의 토대 위에서 경제적 권리가 추구돼야 함을 강조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이 “우리의 존엄과 가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 존엄성의 힘 위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체제에 대해 끝까지 버티고 싸워야 한다.”고 했다.

‘빈민의 운동’은 수도 워싱턴으로의 행진을 계획했다. 정부 수도의 일상 기능을 흔들어 놓는 게 계획이었다. 백악관과 의회가 빈민의 사안을 진지하게 다룰 때까지 그 앞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빈민의 행진에 대한 참여를 촉구하는 것이 킹의 마지막 과업이었다. 워싱턴의 한 성당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 있었다. 그 연설에서 그는 “인종주의, 빈곤, 그리고 전쟁”을 미국 사회의 3대 악이라고 불렀다. “빈곤에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지만 빈곤을 제거할 기술과 자원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새로운 것”이라 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에게 그럴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 연설을 한 닷새 후 그는 살해당했다.

하지만 빈민의 행진은 취소되지 않았다. 3천여 명 이상이 전국에서 워싱턴으로 모였다. 흑인만의 운동이 아니라 존엄성의 가치에 동의하는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이 모였다. 농성촌을 짓고 “부활의 도시”라 이름 지었다. 무자비한 비가 내리고 농성촌은 진창이 됐다. 언론과 정부는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절망과 혼란의 6주가 지나고 운동은 정리됐다. 빈민의 운동은 1968년 6월 19일 농성촌을 접었다. 누구는 철저한 ‘실패’라 평가했다. 또 누구는 ‘처음으로 다인종이 조직화된 경험을 맛봤다’고 했다. ‘우리들 자신의 해방 운동을 헤쳐 갈 만남을 경험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농성촌은 사라졌어도 참가자들은 영감을 받아 워싱턴을 떠났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에겐 몇 달이건, 몇 주건, 단지 하루건 그건 중요치 않다’고 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다. 오늘 읽어 볼 인권문헌, ‘빈민 권리장전’은 2003년에 ‘빈민의 운동’을 재건한 사람들이 작성한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의 한 축은 ‘존엄과 안전 위원회’이다. ‘존엄’과 ‘안전’이 같이 가야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작명이다. ‘존엄 없는 안전’은 많다. 형사법과 공권력의 강화, ‘무전유죄 유전 무죄’의 차별적 사법체계 운영, 부자감세와 경제정책 등이 그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자기 돈 주고 사설경비 쓰고 폐쇄회로에 둘러싸인 특권지대에 사는 것도 물론 안전하다. 가난한 우리에게 안전이란 존엄과 같이 고려돼야 진짜 안전이 된다. 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야 안전하고, ‘경제적 권리장전’의 내용을 담은 것이어야 진짜 안전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면, 혹은 가난해지면 당장 맞닥뜨리는 건 사회적 지원이 아니라 경찰이다. 해고되거나 공장이 폐쇄되거나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나거나 만성적 고용불안과 생계비 상승에 시달리거나 차별과 성폭력에 노출되거나 가난한 처지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빌미를 제공했고 너의 책임이란’ 힐난을, 항의와 저항에는 ‘손 좀 봐주라’는 공권력의 폭력을 대면해야 한다. 우리의 안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존엄과 안전 위원회’가 존엄과 안전의 권리선언을 기획한다고 한다. 선언을 만드는 것은 그냥 말을 짓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실천을 종합하는 것이다. 킹 목사의 말대로 “신조의 고혈압과 행동의 빈혈”에 걸리지 않도록 우린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게 아무리 오래 걸린다고 해도 말이다.

‘빈민의 운동’의 ‘빈민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 for the Poor, Poor People's Campaign)

1. 모든 형태의 인간 억압은 제거돼야만 한다. 모든 사람, 특히 빈민에게는 제도적 장벽 없이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빈민이 빈곤을 벗어나려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장애인에 대한 차별, 계급주의, 제국주의가 다뤄져야만 하고 제거돼야만 한다.

2. 빈민에게는 비인간적인 상태에 투입되는 공공 정책 의제에 대한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방임되고 경제적 분리와 배제가 있어왔던 곳에 ‘기회의 공동체’를 창설할 것을 요구한다. 중앙과 지역의 자원들은 지역사회에서 경제적 기회를 만드는 지역사회 집단들과 시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없는 지역’에서 기회의 문을 열고 투자를 한 기업과 지역사회 집단 간 협력이 장려되고 보상받아야 한다. 기업의 탐욕스런 이익보다는 궁핍한 사람들의 이익을 우위에 두는 전국적이며 지역적인 차원에서의 포괄적인 경제정책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기업을 규제해야만 하고 일자리의 해외이전을 끝내야 한다. 공공의 의견 청취 없이 공장과 기업 본부를 폐쇄하는 일을 금지하며 일자리 상실로 고통 겪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과 재훈련, 대체 직업을 보장하는 법률이 통과돼야만 한다.

3. 미국에서 6명의 아동 중 1명은 빈곤의 피해자이다. 비-백인 아동 3명 중 1명은 가난 속에서 자란다. 모든 아동은 양질의 건강 보호, 교육, 주거에 접근하고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4. 모든 사람은 ‘법 앞에 동등한 보호’를 받아야 하며 빈민은 사법 체계의 부정의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한다. 빈민은 흔히 이 나라의 감옥 산업 단지 창고에 처박혀진다. 이것은 노예제의 21세기 버전이 됐다. 빈민은 적절한 변호와 평등한 사법을 보장받아야 한다. 빈민은 민사와 형사 법정에서 정의를 보장받아야 한다.

5. 빈민은 경찰 폭력의 형태로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리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빈민은 학대받고 착취 받는 것과는 반대로 보호받고 대접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역에 대한 분명한 민간의 통제, 그리고 경찰의 남용과 비행을 다스릴 힘을 가진 시민의 심사위원회를 요구한다. 빈곤 지역에서 경찰과 지역사회에 근거한 집단들 간에 범죄와 폭력 철폐를 위한 지역사회 협력이 수립돼야 한다.

6. 빈민은 완전 고용, 그리고 빈곤선을 넘어서도록 하는 보장 소득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만들어낼 지역사회에 기반한 협동조합의 제휴에 대한 정부 투자를 요구한다. 실업이 집중된 지역이 있는 곳마다 일자리와 기회를 일으키는 집중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7. 빈민은 기회의 불평등에 희생돼서는 안된다. 여성과 비-백인에게 동등하게 지불하라. 여성은 직장에서의 성적 괴롭힘과 폭력, 또한 가정폭력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돼야만 한다.

8. 우리는 전 세계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과 힘을 믿는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장했듯이 “어느 곳에든 불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우리는 미국의 외교 정책이 정의와 자유로 규정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신념에 뿌리를 둔 도덕적 권리 장전이다. 이 권리 장전의 이행은 “신 앞에,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가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나라”로 우리를 더 가깝게 데려갈 것이다.

인권오름 제 407 호 [기사입력] 2014년 09월 18일 21:58: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71 호 2011년 10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역자 주]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이 올해 8월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한 보고서를 발췌 소개한다. 이 보고서에서 특별보고관은 빈민을 처벌하고 분리하고 통제하는 법과 규제와 관행들을 분석한다. 이런 조치들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증가해왔고 경제 위기 때문에 최근 몇 년간 강화되고 있다. 빈민을 범죄시하고 처벌하는 국가와 사회세력의 방식은 상호연결된 다차원적인 것이다. 특별보고관은 이런 방식을 크게 네 가지로 분석한다. a) 빈민이 공적 공간에서 생계유지행위를 하는 걸 부당하게 제한하는 법과 규제와 관행, b) 공적 공간의 고급주택화와 민영화와 관련된 도시계획 규제와 조치들, c) 빈민의 자율성, 프라이버시 및 가족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공적 서비스와 사회복지급부에 접근할 수 있는 자격조건의 강화, d) 빈민의 자유와 개인적 안전을 위협하는 구금과 투옥을 과도하고 자의적으로 이용. 보고서의 원문은
http://www.ohchr.org/Documents/Issues/Poverty/A.66.265.pdf
에서 볼 수 있다.

I. 도입

이 보고서에서 “형벌화 조치”란 빈민을 처벌하고 분리하고 통제하며 빈민의 자율성을 해치는 정책, 법 및 행정 규제를 언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다.

II. 빈곤의 현실: 낙인찍기, 차별, 형벌, 배제

형벌화 정책은 빈곤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그들이 고통 받고 있는 광범위한 차별과 그로 인해 상호 재강화되는 불이익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다.

형벌화 조치는 빈민이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자녀들의 건강과 교육에 무관심하며 부정직하고 가치 없으며 심지어 범죄자라는 차별적인 편견에 따른 것이다. 빈민은 스스로의 불운을 자초한 이들로 그려지며 단지 “열심히 노력”함으로써 상황을 치유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편견과 선입견은 편향되고 선정주의적인 언론 보도를 통해 강화된다. 그런 언론들은 홀어머니, 인종적 소수자, 이주자 등 복합적인 차별형태의 피해자들을 특히 표적으로 삼는다. 이런 태도들은 아주 뿌리 깊어서 정책입안가들로 하여금 빈민이 빈곤상황을 극복할 수 없도록 저해하는 구조적 요인들을 다루지 않게 한다.

차별과 낙인의 결과로 빈민은 공공당국에 대한 공포와 심지어 적개심을 갖게 되며 빈민을 원조해야 하는 제도들에 대해 거의 신뢰를 가질 수가 없다. 흔히 정책입안가, 공무원, 사회복지사, 법집행공무원, 교사와 보건 종사자들은 빈민을 불신하거나 생색내는 태도로 다루며 빈민 스스로의 생활증진 노력을 무시하고 지원하지 않는다.

낙인과 편견적 태도는 수치감을 양산하고 빈민으로 하여금 공무원에게 접촉하는 걸 꺼리게 만들고 필요로 하는 지원을 구하지 않도록 만든다. 사회가 낙인을 찍은 서비스에 접근하여 더 큰 사회적 차별에 노출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빈민은 식권, 보조금, 공공주택, 무상보건 등에 대한 청구를 삼가게 되고 그로 인해 분리는 더 강화되고, 빈곤이 세대를 통해 재생산되는 악순환을 강화하게 된다.

III. 국제인권의 틀

국제인권체계의 핵심 요소는 비차별과 평등이다. 이들 원칙은 동등한 환경의 사람들을 법과 관행에서 동등하게 처우할 것을 요구한다. 인권법 하에서 처우에 있어서의 모든 구분이나 차이가 차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구별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정당성이 있을 때는 평등 원칙과 양립가능하다. 정당한 구별은 정당한 목적을 추구해야만 하고 채택한 수단과 추구된 목표사이에 균형적인 합리적 관계가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빈민에 대한 차별적 처우(구별, 배제, 제한 또는 선호)는 인권법 하에서 정당화될 수 있도록 앞서 언급한 기준을 따라야만 한다.

이 보고서에서 검토한 형벌화 조치를 묶는 공통 요소는 그것들이 앞서 언급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형벌화 조치들은 빈민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향유와 행사를 무효화하거나 손상함으로써 직간접적으로 빈민을 차별하고 있다.

IV. 인권의 향유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형벌화 조치들

A. 공적 공간에서의 빈민의 행위를 제한하는 법, 규제, 관행

이들 조치들의 공통분모는 공적 공간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거나 “폐가 된다”고 간주되는 행위들을 형벌화하는 것이다. 국가는 위험하고, 공공의 안전이나 질서와 갈등하며, 그 공간이 의도한 정상적 활동들을 방해한다는 등의 이유로 형벌화 조치를 정당화한다.

노숙인과 구걸을 불법화하고 있다. 이런 법들은 야간 구걸을 금지하거나 “공격적인 태도”로 구걸하는 걸 금지하거나 더 나아가 공연이나 춤, 상처나 기형적인 신체를 보이는 것 등을 금지하는 것으로 확대되고 있다. 일부 국가에서는 구걸의 현저한 수단을 전혀 보이지 않았더라도 단지 공공장소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법이 되기도 한다. 구걸과 배회의 금지는 평등과 비차별의 원칙에 대한 심각한 차별을 대표한다. 이런 조치들은 법집행공무원들에게 폭넓은 재량권을 줌으로써 모욕과 폭력에 대한 빈민의 취약성을 증대시킨다. 이들 조치들은 극빈의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향한 차별적인 사회적 태도의 확산에 기여할 뿐이다.

국가는 또한 공공장소에서의 취침, 앉아있기, 누워있기, 쓰레기 버리기, 소유물 보관하기, 노상 음주, 노상 배뇨, 무단횡단 등 거리 생활과 결합된 행위들을 형벌화하고 있다. 이런 조치들이 빈민만을 향한 것은 아니지만, 빈민에게 불균형하게 영향을 끼친다. 집이 없기 때문에 빈민은 일상 활동을 공공장소에 과도하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거리에서 사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한 활동들이 형벌로 제재될 위험에 놓이게 된다. 비록 이런 유형의 조치들이 외관적으론 중립적이지만, 연구조사들이 보여주는 바는 당국이 가난한 사람들, 특히 노숙인을 표적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노점상으로 생계를 도모하는 사람들을 형벌화하는 조치가 우려된다. 많은 국가들에서 거리행상은 심각하게 제한되거나 불법이며 거리행상에게서 물건을 사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연구에 따르면 노점상은 다른 수입원이 없고, 교육수준이 낮고, 구직 기회가 없기 때문에 행상을 하게 된다. 노점상은 생계를 도모하기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생계수단이다. 국가가 이를 엄격하게 금지하면 극빈자의 생존권을 심각하게 해치게 된다. 또한 노점 시간과 구획 등을 정하는데 관계 공무원의 재량권이 크기 때문에 노점상들은 법집행공무원, 조직폭력배 등의 위협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B. 도시 계획 규제와 조치들

고급주택화 정책, 사회주택의 민영화, 재개발과 토지이용제한법 등의 채택을 통한 도시 변형은 빈민을 도심지역으로부터 더 멀리 이전하게 함으로써 주거권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권리를 위협하고 있다.

도시를 더 “안전”하게 만들고 투자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겠다며 국가들은 빈민을 배제하는 토지 사용, 가령 외부인의 출입이 통제된 마을, 호화 고가 주택, 대규모 스포츠 시설 등에 우선권을 주는 토지이용제한법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재개발”, “역사문화유산의 보존” 등의 목적으로 마을 전체를 철거하고 거주자들을 퇴거시키고 개발프로젝트의 여지를 만든다. 그 결과로 이런 지역은 원주민이 되돌아와 살기에는 너무 비싼 곳이 되어버리고 더 싸고 더 불편하며 더 외딴 지역으로 주거를 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많은 경우 빈민들은 사전 고지 없이 강제 퇴거되며, 폭력과 소유물의 손상과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정책들은 도시의 포괄성과 다양성을 심각하게 손상할 뿐 아니라 빈민에 대한 분리와 사회적 배제를 증가시킨다. 또한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 뿐 아니라 일할 권리,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문화생활에 참여할 권리 등에 심각한 장벽을 대표한다. 공적 공간으로부터의 빈민 배제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의 대규모 행사와 연관된 프로젝트로 인해 더 배가된다. 가령 서울에서는 2002년 월드컵 준비에 도시의 특정 장소들에서 노숙인 금지가 포함됐다. 88년 올림픽 동안에는 노숙인이 도시 외곽의 시설에 구금됐다. 이런 조치들의 실제적 효과는 빈민과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그들이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접근할 수 없는 호텔, 스포츠시설, 사무실 빌딩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C. 공적 서비스와 사회복지급부에 대한 조건 강화

국가는 여러 가지 이유로 공적 서비스와 사회복지 급부에 대한 조건을 강화하고 있다. 공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거나, 대상의 정확성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 의존성을 피하도록 하고 일하지 않으려는 동기를 해소해 시스템 남용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 등이 그것이다. 이런 이유들에 유효한 우려가 있을지 모르나 그 영향은 흔히 추구하는 목적에 완벽하게 비례하지는 않는다. 과도한 자격요건과 조건을 부과함으로써 국가는 빈민을 처벌하고 수치감을 주며 빈민이 당면한 상황을 악화시킨다. 더욱이 공적서비스와 사회복지급부의 수혜자들은 미래에 대해 불확실한 상태이며 장기 계획을 세울 수가 없다. 이런 조치들은 그 효과성과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증거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 차별적인 낙인과 편견에 의존하고 있다. 자격요건과 조건은 흔히 강력한 가부장제적 태도로 지지되고 있다. 정책입안가들은 자신들이 빈민들의 최상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으며 빈민들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조치들은 수혜자의 자율성을 해칠 뿐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을 막는다. 수혜자를 감시하는 정책은 수혜자를 범죄자처럼 취급하며 죄책감과 분노와 수치를 느끼도록 만든다. 사회복지 급부를 운영하는데 국가들이 채택한 광범위한 통제와 감시 메커니즘은 사회복지급여 속여타기에 분명히 비례하지 않는 것으로 증거가 드러났다. 수혜자의 사기에 의한 것보다는 국가의 행정적 실수에 의한 것이 더 흔한 것으로 드러났다. 설령 수혜자가 더 많이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대개 사기라기보다는 실수이며 사기라 해봤자 적은 돈의 생계비일 뿐이다. 하지만 정책입안가들은 복지급부사기를 만연한 문제처럼 여기며 그것과 싸우기 위해 상당한 자원을 쓴다. 세금 사기보다는 복지급부 사기를 더 강조하는 정치적 수사가 불공정하게 압도적이며, 이런 일의 비용이 국가에 더 큰 부담이 된다.

D. 과도하고 자의적인 구금과 투옥의 이용

법집행공무원들이 “빈곤”, “홈리스” 또는 “취약함”을 범죄성의 지표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빈민은 불공정하게 높은 빈도로 형사법체계와 맞닥뜨리게 된다. 빈민은 형사법체계 속에서 버텨내기에 상당한 장벽을 겪는다. 그 결과 불공정하게 많은 수의 빈민과 배제된 사람들이 체포, 구금, 투옥된다.

V. 결론과 권고

빈곤은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상황이며, 직간접적으로 빈민을 처벌, 분리, 통제하거나 해치는 조치들로서는 빈곤이 악화되고 만연될 뿐이다. 이런 조치들은 광범위한 인권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빈민의 능력을 크게 해치며 빈곤과 배제의 악순환을 심화하고 지속시킨다.

빈민이 처한 상황들로 인해 그들을 형벌화하기 보다는 국가는 빈민이 식량, 주거, 고용, 교육 및 보건 서비스에 접근하는데 당면한 법적, 경제적, 사회적 및 행정적 장벽을 제거하는 적극적인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희소한 자원을 비용이 많이 드는 형벌화 조치에 바치는 대신에, 국가들은 최대한의 가용자원을 빈민이 모든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시민적 및 문화적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방향으로 돌려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271 호 2011년 10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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