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5년 9월 16일 인권하루소식 제2897호>

국가안보가 인권보장과 항시 충돌하면서 사실상 '정부보안', '기득권세력의 자기보호 카드'로 활용될 때마다 되레 인권운동가들은 '당신들이 안전을 책임질 것이냐'는 추궁을 받아왔다. 진짜 안전은 국민의 존엄성과 인권이 효과적으로 보호되는 것이라는 주장은 더 많고 더 성능 좋고 더 비싼 무기와 감시체제가 보장하는 안전이야말로 진짜 안전이라는 공격 앞에서 눈총 받아왔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인간안보'(human security)라는 말이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국가안보'라는 말만 들어왔고, 국가안보에 다른 소중한 가치들을 무릎 꿇리고 도둑맞아왔던지라 많은 사람들이 '인간안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이미 넘쳐나는 '말잔치'에 또 하나의 단어를 추가하는 것이라는 반응도 있고, 빈곤 등의 중요한 문제들을 '안보'라는 개념으로 다룬다는데 반감이 있기도 하다. 위협으로부터의 안전을 말하는데 그 위협이란 게 정당한 위협인지 아닌지가 모호한 것은 국가안보주의가 갖고 있던 문제와 마찬가지라는 지적도 있다. 가장 많은 비판은 '인간안보'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인간생활에 '위협'이라 인식되는 요소가 자의적으로 선택될 수 있고, 그런 모호성과 자의성 때문에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는데 별 도움 될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인간안보의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이견은 있다. 그 의미를 좁게 또는 넓게 정하자는 주장간의 대립이다. 좁게 정하자는 것은 인간사에 있을 수 있는 문제란 문제를 다 포괄하다 보면 그 개념이 모호해지고 그 문제의 취사선택이 자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폭력'같은 것에만 개념을 한정하자는 것이다. 반면에 '안전'이란 폭력의 위협으로부터의 안전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빈곤, 질병, 환경 재해 같은 문제들이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 넓게 정하자는 주장이다. 어느 쪽이건 '안전'의 개념이 국가에 대한 위협, 영토에 대한 위협, 군사적 차원의 안보 개념을 넘어서야 한다고 본다.
인간안보라는 단어는 더 일찍부터 사용됐다고 하나, 그 개념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94년 유엔개발계획(UNDP)의 '인간발전보고서'를 통해서이다. 이 보고서가 정의하고 있는 인간안보의 개념은 앞에서 말한 '넓은' 정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정의된 인간안보는 소위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둘 다를 포괄하는 것이고 둘 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보고서는 인간안보의 본질로서 '보편성, 상호의존성, 사후개입이 아닌 사전 예방, 인민 중심'을 들고 있다. 또한 인간안보에 대한 위협을 '경제적 안전, 식량안전, 건강 안전, 환경 안전, 개인의 안전, 지역사회의 안전, 정치적 안전'이라는 7가지 범주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듯 인간안보의 핵심은 안보의 '중심'을 국가로부터 '인민'으로 옮겨서 생각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안보의 관념은 냉전에 의해 크게 형성됐고, 주로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는 국가의 능력에 관한 것이었다. 국가는 그 시민을 보호할 권리와 수단을 독점했다. 그러나 국가안보에 대한 이해와 위협의 유형은 확장되고 변화됐다. 국경, 국민, 특정 체제의 가치와 제도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환경오염, 광대한 인구 이동, 에이즈와 같은 전염성 질병 같은 요소들을 인식하게 됐다. 너무나 많은 위험들이 아주 빨리 오늘날의 상호연관된 세계로 퍼진다. 이에 국제사회도 새로운 안보의 틀을 요구하게 됐다. 국가는 여전히 안보의 기본적인 조달자이자만 때때로 그 안보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고 오히려 자국민에 대한 위협의 원천이 된다. 이런 이유로 국가 중심의 안보로부터 인민 중심의 인간안보로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변화는 자기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개인과 집단, 인민의 역할을 중시하게 됐다는 점이다.
인간안보의 주요한 관심은 국가보다는 개인과 집단이다. 인간안보에 대한 위협요소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됐던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행위자의 범주가 국가만이 아니라 그보다 확대된다. 인간안보를 성취하는 것은 인민을 보호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낼 인민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다. 인민의 권한 강화에는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의 강화가 당연히 포함된다.
이처럼 인권과 인간안보는 그 동기나 관심 영역에서나 긴밀히 연결돼 있다. 또한 둘다 빈곤과 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는 인권과 인간안보 둘 다의 공통된 목표이다. 국제인권의 초기 역사에서 냉전으로 인해 자유권과 사회권은 인위적으로 분리됐다. 그것에 저항하여 인권운동은 모든 인권의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파편화된 인권이 총체적으로 보장될 수 있는 구조와 질서를 모색하면서 평화권, 환경권, 발전권이 속속 등장했다. 인간안보의 출현은 이러한 인권의 총체성과 불가분성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안보의 개념을 지지하건 안 하건 간에 또는 수용하건 안 하건 간에, 지배계급 혹은 권력을 쥐고 있는 정부의 보안과 인간안보, 이 두 가지를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된다. 인간안보란 빈곤과 절망으로 극단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없어야 하고, 이로 인해 공포와 강압적 안전을 거래하는 일이 없는 사회를 설계하는 것이다. 공포 때문에 정상적 인간 활동을 줄인다거나 공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감시한다거나 공포 때문에 총과 무기에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불행히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후자이다. '안보'란 그런 속임수를 쓸 여지가 다분한 개념이기에 조심, 또 조심하고 경계하고 또 경계할 일이다.
거짓말쟁이 소년의 이야기를 어른들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교훈으로 사용한다. 이를 '거짓말에 속지 말라'는 얘기로 바꿔보자. 두 번이나 속은 마을 사람들은 늑대에 대한 경보를 신뢰할 수 있는 장치의 마련을 왜 하지 않았을까. 양떼와 소년의 목숨을 잃은 것은 거짓말쟁이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모두의 피해이지 않은가. 더구나 잃은 것은 귀중한 생명이요, 신뢰와 같은 사회의 버팀목이 되는 가치이다. 안보, 대테러를 명분으로 한 가짜 경보에 대피하면서 기본적 인권을 팽개치고 뛰어가 버리면 정작 안전을 위협하는 진짜 경보를 듣지 못할 수 있다.
1994 인간발전보고서-새로운 차원의 인간안보(일부 발췌) 50년 전,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핵 에너지의 발견에 대해 "모든 것이 변했다."고 간결하게 요약했다. 아인슈타인은 계속해서 예견했다.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아주 새로운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핵폭발이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철저히 파괴했지만, 인류는 세계적인 핵참화를 방지하려는 최초의 결정적인 시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50년이 지났고, 우리에게는 핵안보로부터 인간안보라는 새로운 사고의 심오한 전환이 요구된다. |
[류은숙] <2005년 9월 16일 인권하루소식 제28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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