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83 호 [기사입력] 2016년 05월 0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A: 밥 먹었니?
B: 응. 대충
A: 왜 대충 먹어? 잘 먹어야지.
B: 요즘 세상에 잘 먹기가 쉽니? 사 먹어도 해 먹어도 잘 먹기가 얼마나 힘든데.
A: 하긴 숱한 끼니를 때우고 살지만, 시간‧돈‧같이 먹는 사람, 하나하나 따져보면 잘 먹었다고 할 때가 찾기 힘드네.
B: 허접하게 먹더라도 안전한 음식이라도 먹었으면 좋겠는데, 불안 중에 식품에 대한 불안은 얼마나 큰데. ‘모르고 먹어야지, 알고선 못 먹는다’는 말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어.

A: 밥 한 끼에 온갖 시름이 담겨있구나.
B: 내 밥만이 아니라 밥 때문에 기운 빠질 때가 많아. 먼지 풀풀 날리는 거리에서 급식 받는 노인들을 볼 때 울컥해. 보편적인 학교급식을 둘러싸고 야박한 소리 오갈 때, 계단참이나 심지어 화장실에서 끼니를 때워야 한다는 노동자 기사를 볼 때, 식사시간도 없이 일한다며 쫓기는 친구들을 볼 때…….

A: 밥보다 시름을 더 자주 먹는 것 같다. 이런 문제와 관련된 인권은 없는 거야?
B: 왜 없어? 사회권이란 버젓한 인권이 있지.
A: 사회권? 그거 마이크 잡은 사람이 자기한테 집중하라고 소리 지를 때 하는 소리 아냐? 사회자를 존중해서 주목해 달라고.

결연한 사람들의 권리

B: 후후. 그런 것 아냐.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 보장을 받을 권리가 있다” 이런 말은 들어봤지? 세계인권선언 제22조에 나오는 말이야.
A: 사회보장‧사회복지, 그거야 흔한 말이지. 근데 사회권은 뭐 별다른 거야?

B: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란 말에 주목해 봐. 사회권은 ‘사회적 권리’ 또는 ‘경제적‧사회적 권리’의 줄임말이야. 여기서 ‘사회적’이란 말의 어원을 따져보면 ‘결연했다’는 뜻이래.
A: 결연? 인연을 맺었다?

B: 그래. 사회권을 풀이하면, 사회 속에서 결연한 모든 사람은 그 사회공동체의 이익을 공유할 수 있다는 뜻이야.
A: 그럼, 누구도 제외되거나 배제돼선 안 된다는 말이네.
B: 그렇지. ‘무엇’을 누리느냐의 문제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누리느냐가 중요해. 어떤 밥을 먹을 것이냐 만이 아니라 누구랑 ‘어떻게’ 먹느냐가 중요한 것처럼 말이야.

A: 무엇을 누구랑 어떻게? 이 셋을 다 고려하는 게 사회권이란 말이구나.
B: 이를테면, 콩 한쪽을 나눠먹어도 누구나 같이 밥상에 앉아 같이 먹을 자격이 있다는 것, 그건 시혜가 아니라 누구나의 권리라는 거야.
A: 그런 권리라면 그냥 앉아서 누가 떠먹여주는 것을 받아먹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밥상의 참여자가 되는 거잖아. 그럼 사회권은 밥에 대한 권리만이 아니라 밥상에서 목소리를 낼 권리라고도 할 수 있겠네.
B: 그렇지. 그러니까 사회권은 물질적 분배만이 아니라 누구를 구성원으로 대접하고 어떻게 밥을 지을 지를 결정하는 정치적 권리와 떼놓을 수 없어.

제공한다고 사회권인 건 아니다

A: 권리라면 당당하고 떳떳해야 하는 거 아냐?
B: 맞아. 권리란 그 상대방에게 존중할 의무가 발생하는 정당한 요구야. 우리에게 사회권이 있다는 건 국가가 그 권리를 존중하려는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는 거야.

A: 하지만 번듯한 사회보장제도는 안정된 직장을 가진 사람들이나 누리는 거지. 실직자나 가난한 사람들은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다루잖아. 난, 솔직히 복지라는 이름 붙은 게 권리로 안 다가올 때가 더 많던데.
B: 재화나 서비스를 제공해준다고 해서 모두 사회권인 건 아니지.

A: 나, 어렸을 때 생활보호대상자였는데. 매달 동사무소에서 밀가루 한 포대를 받았어. 매일 수제비만 끓여먹었지. 수제비에도 질렸지만, 그걸 받을 때마다 창피했어. 그래도 받아야만 했으니까. 뭔가 눈총 받는 느낌이었는데 그렇게 받는 게 권리일 수 있을까?
B: 우리 사회의 복지도 많이 달라지고 좋아졌다는 데 네가 말한 눈총 받는 느낌은 여전한 것 같아. 며칠 전 슈퍼에 갔더니 아저씨들이 이런 얘기를 하고 있더라. 장애인 차량 혜택이 문제라고 말이야. 장애인들이 어려우니 도와주기는 해야 하지만 자기들 같은 영세자영업자한테도 해줘야 되는 거 아니냐고. 자기들은 세금만 내고 억울하다고 하더라.

A: 나도 비슷한 말 들었어. 의료보호제도 이용하는 사람 중에 가난한 환자가 아니라 꾀병이 많다고, 거의 공짜라고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들어서 문제라는 얘기도 하던데. 자기들처럼 꼬박꼬박 건강보험료 내는 사람들만 손해라고.
B: 다들 살기 어려운데 누구만 특별대우 받는다는 눈총, 경제도 어려운데 저 사람들은 과분한 혜택을 받고 있다는 비난 같은 거 진짜 많아.
A: 무시하고 낙인찍는 거 그런 것 없이 나누면 안 되는 걸까? 네 말대로 재화나 서비스가 제공된다고 해서 다는 아닌 것 같아.

B: 사회권의 짝퉁은 많아. 가난한 사람들을 방치하면 사회불안 요소가 된다고 최소의 복지를 관리와 감시통제의 수단으로 삼는 것, 또는 경제발전을 위한 투자라는 식으로 수단시하는 것 등 말야. 사람의 삶이 목적이어야 하는데 말이야.
A: 기브앤드테이크(give and take)라고 기여한 만큼, 노력한 만큼, 낸 만큼 가져가라는 것도 그렇지 않나? 일을 가질 수 없어서 힘들고 그래서 소위 기여를 할 수 없는 건데, 기여 안했으니 자격 없다는 말은 들을 때마다 억울해.
B: 흔히 각 사람이 기여한대로 배분하고 나서 부족하거나 배제된 사람에게 재분배해준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데 사회권은 그런 대가와 보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하는 거야. 인간의 동등한 가치를 존중하기 때문에 그걸 경제사회적 분배와 재분배로 표현하는 거야. 그 존재 자체가 소중하기에, 사람이란 존재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게 사회권이야.

A: 내가 찜찜해하던 성격의 시혜나 혜택과는 구분이 되는 것 같다. 내가 이 사회의 일원이란 이유만으로 자격이 있다는 거잖아.
B: 그래. 사회권은 모든 사람이 동료로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적 배치를 바꾸는 거야. 분배 구조를 바로잡고 무시나 경멸 같은 몰인정을 존중으로 바꾸는 것, 둘 다를 말하는 거야.
A: 어디선가 ‘사회적 시민권’이란 말을 들어본 것 같아. 네 말대로 하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누구나 갖는 공통된 지위란 뜻이구나.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

A: 근데, 아무리 공통된 지위에서 권리로 보장받는 것이라 하더라도, 내가 받았던 밀가루 한 포대처럼 수준이 형편없으면 좀 그렇지 않나? 나, 그때 학교에 도시락을 싸갈 수 없었거든. 집에서 수제비를 끓여먹을 순 있지만, 그걸 도시락으로 싸갈 수는 없었으니까.
B: 사회권에는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이란 게 있어.
A: 최저선? 그거 인터넷에서 본 씁쓸한 농담 같은 데. 임금 중에 젤 초라한 임금은 최저임금이란 말처럼.
B: ‘최저’를 고만큼만 줘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과 최소한 이것만은 마지노선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은 달라. 당장의 긴급한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장과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를 합한 게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의 개념이야. 우린 단지 목숨을 연명하는 게 아니라 존엄성을 갖춘 생존을 추구하는 거잖아.

A: 하지만 ‘적절한 생활수준’을 무슨 무슨 선진국 수준으로 소비를 끌어올리는 그런 거로 생각하면 답이 없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려면 지구가 수십 개라도 모자랄 거야.
B: 맞아. ‘적절한’을 양의 문제로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아. 무엇보다도 모든 구성원을 우리 사회 안에 자리를 가진 존재로 대접하려는 게 중요한 것 같아.

A: 예를 들자면?
B: 가령 사회권 중에서 노동권을 생각해보자구.
A: 노동권이면 일단 수입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고 제대로 된 임금을 받는 거 아냐?
B: 그렇지. 근데 너부터 임금노동만 일로 생각하고 있잖아. 가사 노동이나 돌봄 노동 같은 노동을 돈을 받는 소위 ‘생산적’ 노동과 구분하는 원리부터 문제 삼을 수 있어.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는 임금 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것이 일차적이고 그 나머지에 대해선 별도의 혜택의 문제가 돼버리잖아. 이런 것부터 다시 생각하는 게 사회권에서 말하는 ‘적절한’이 아닐까?

A: 맞아. 그러네. 그리고 노동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를 인력이 아니라 인간으로, 노동관계를 다른 물건처럼 사고파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보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
B: 사회적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뿌리는 그대로 놔둔 채, 표면적으로 제공하는 재화와 서비스만 늘린다고 ‘적절’한 사회권 보장이 되는 건 아니야. ‘최저선’을 양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근본 틀의 문제로도 봐야할 것 같아.

사회권 침해를 인권 문제로

A: 근데 내 주변에 보면, 나처럼 사회권이란 말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야. 이런 상황에서 사회권의 침해를 인권침해 혹은 인권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B: 사회권이 억울한 것 중의 하나가 사람들이 인권문제로 잘 여기지 않는다는 거지.
A: 그저 경제 사정이 나빠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가난은 사회현상이 아니라 원래 있는 자연현상 같은 거다, 뭐 이런 체념과 수용, 묵인이 많은 것 같아.

B: 그보다 더 나쁜 건, 개인적 결함과 무능력으로 몰아 비난하는 거야. ‘그러게, 좀 더 노력하지 그랬어’란 말이 그렇지.
A: 나도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 그랬다고, 좀 더 열심히 살지 못해서 그렇다고 나를 늘 채근하는데.
B: 자기 성찰과 자기 학대는 다른 것 같아. 그런데 생활이 어려울수록 우린 비난의 화살을 자기에게 쏘거나 나보다 불우한 사람들에게 쏘는 것 같아.

A: 나는 사회권이란 말을 듣기 전에는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가해만 인권침해로 생각했어. 또 국가권력이 폭력적으로 행하는 일만 인권침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가만 보니 손 놓고 방임하는 것, 경제사회적 강자에게 유리하게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 게 근본적 인권침해 같아.
B: 사회권의 침해는 문제를 회피하고 부인하고 방임하는 시스템에서 발생하는 게 맞아. 우린 그 시스템 속에서 시스템의 작동을 돕고 있다고도 할 수 있어.

A: 사회권을 침해받으면서 내가 그 작동을 돕는다? 참 무섭다.
B: 나도 그래. 내가 누리는 소비의 몫을 늘리려는 데만 몰두하며 사는 게 싫으면서도 무력하고. 삶의 조건을 어떻게 바꿔나갈 수 있을까?
A: 네가 나에게 사회권이란 말을 알려줬잖아. 우린 당장 유토피아를 열려는 게 아니라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말에 맞춰 생각을 바꾸면서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거야. 그게 모든 인권이 걸어온 길이잖아. 노동, 교육, 건강, 주거 등을 다 내 돈 주고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같이 차리고 같이 먹는 밥상처럼 생각해야겠어.
B: 사회권을 권리의 문제로 인식하고, 사회권 침해를 인권에 대한 구조적 침해로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말이구나. 문제를 받아들였으니 풀려고 애써야겠네.

 

인권오름 제 483 호 [기사입력] 2016년 05월 0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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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415 호 [기사입력] 2014년 11월 13일 17:43: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줄지어 서있는 큰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그걸 볼 때 갖은 생각이 든다. 오지 않는 버스 등을 기다리는 줄이라면 모두가 경쟁자로만 보이고 귀찮기만 하다. 배고플 때 밥을 위해 늘어선 줄이면 화가 치솟기도 한다. 토론회나 공연 등에 간 것이라면 나와 통하는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 반갑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알아서 각자 사는 소위 ‘자율적’인 개인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때론 그 무리가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다. 뭔가 나를 겨냥하여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을 꾸미는 것 같다. 나를 향한 무리의 시선이 두렵고 신경 쓰인다.

아주 어쩌다 나와 같은 하늘아래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나의 생계, 일, 건강 등 삶의 중요한 문제들이 저들과의 관계에 있다. 밥이 되고 지붕이 되고 약이 되는 관계들, 내 삶의 불안을 함께 책임져야할 생각과 실천이 그 관계들로부터 나와야 한다. ‘한국 사회가 과연 사회인가’란 질문이 자주 나오는 걸 보면 후자의 생각은 허약하기 그지없다. 사회적 시선과 평가는 혹독하기만 한데 내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받아들이고 공통의 해결책을 구하는 시도는 궁색하기 때문이다.

인권에서 ‘사회적 권리’라 일컫는 것은 개인 단위로 대처하기 어려운 삶의 불안을 공통의 문제로 여기고 대처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회적 권리는 미끼이면서 낚시를 끝낸 후에는 입을 닦는 용도로 이용되는 일이 많다. 선거 때의 화려한 공약들은 사회적 권리를 동원한 그럴듯한 수사로 채워지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권리보장과는 정반대의 방법을 택하면서 어쩔 수 없는 경제적 선택으로 정당화한다.

필립 알스턴(Philip Alston) 교수는 사회적 권리의 대표적 연구자이면서 유엔의 인권 전문가로 활약해왔다. 올해 중순에는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유엔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을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은 기본 소득 보장과 필수적인 사회서비스에 대한 접근 보장을 목표로 한다. 이 보고서에서 특별보고관은 사회적 보호가 경시된 이유를 검토하고 이 개념의 전개를 추적한다. 또한 사회적 자원의 할당에 관한 의미 있는 토론에 인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들이나 북반구의 힘센 기구들이 인권의 언어를 회피하는 것은 보편적이 아니라 선별적인 제공, 권리의 보장이 아닌 완충제로서의 시혜에 치중하려는 시도라고 본다. 따라서 ‘사회적 보호는 인권이다’란 것을 정부 책임자 등에게 명백하게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인 조치라고 한다. 인권이 빠진 위기관리수준의 대응은 사람을 솎아내려는 복잡한 시스템을 낳고, 극히 낮은 수준의 보호에 머물고, 법적 보호가 아닌 변덕스런 정책 경향에 휘둘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이미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이 보고서에 담긴 내용을 토대로 알스턴은 10월에 세계은행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알스턴은 장밋빛 번영을 전망하는 세계은행 총재(한국인인 김용이다)의 연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재분배의 필요성도, 공정하고 공평한 과세 제도의 필요성도, 국제적 조세 회피를 차단할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말하는 대신에 경제 성장을 통해 개인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 했다. 그렇게 되면 “성평등, 음식, 주거, 깨끗한 물, 위생, 건강보호, 교육과 직장에 대한 저소득 사람들의 접근권이 향상될 것”이라 했는데 알스턴의 비판 요지는 ‘결론은 인권보장이면서 그걸 위한 방법은 하나도 얘기 안 한다’는 것이었다. 알스턴의 세계은행에 대한 비판을 한국 정부에 대한 것으로 바꿔 생각해도 별 문제 없을 것 같다.

바람이 매서워졌다. 사람들의 온기를 모으는 일이 절실한 때이다.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특별 보고관 보고서(2014년 8월, A/69/297)

3. 사회적 보호 최저선 이니셔티브(The Social Protection Floor Initiative)의 기원과 개념의 발전 경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꾸민, 헌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의 또다른 사례가 아니냐고 생각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보호 최저선은 새롭고 중요한 것이다. 첫째, 그것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와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인권의 구조 안에서 시들했던 이 두 권리를 잘 작동하게끔 종합했다. 둘째,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정부들에게 강요하기보다는 국제정책사회와 남반구에서 떠오른 실제적인 실천들의 반성적 학습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셋째, 인권규범과 경제적 현실간의 격차 또는 불친화성을 생각하기보다는, 개념으로서의 사회적 보호는 감당성을 고려하고 경제적 생산성 증진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위해 세심하게 설계됐다. 넷째, 다른 어떤 사회적 인권의 경우보다 훨씬 이것은 인권 영역 바깥에서 왔고, 실현 증진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훨씬 광범위한 행위자들의 연대를 기대한다.

20세기 사회적 보호의 소외

12. 20세기의 대부분, 일반적으로 사회적 보호와 특수하게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가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첫째,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인권 개념의 이분법적 구분이 있었다. 아주 다른 가정으로 두 개의 다른 범주의 권리로 나누고 경제사회적 권리에 이등급의 지위를 매겼다. 둘째, 흔히 두 범주의 권리간의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이 주장됐지만, 극빈상태의 개인들이 자신의 시민‧정치적 권리의 상당수를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셋째, 시민‧정치적 권리는 대개 비용이 안 들고 경제‧사회적 권리는 불가피하게 많은 비용이 든다는 잘못된 개념이 사회보장을 전형적으로 돈 드는 권리이고 따라서 부자 나라들에서만 적절하다는 가정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됐다. 넷째, 사회보장이 공식적으로 수용된 곳에서, 사회보장은 공적 부문과 공식 부문의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서 대개 개념화됐다. 따라서 공식‧비공식 구조와 과정 둘 다에서 모든 사람이 일종의 보장 장치에 포함되도록 하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을 만들려는 노력은 단지 최소한이었다. 다섯째, 이런 많은 문제들은 냉전이 인권의 구조에 끼친 영향 때문에 강화됐다. 여섯째, 유엔의 개별 기구들은 다양한 이슈들을 자기 소관으로 주장하고 독점적인 관할권의 형태를 추구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사회보장은 ILO에 “속했다.” 나머지 유엔 기구들은 사회보장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했고, 그것의 의미는 공식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인권 체계가 다수 전문 기구들과 밀접히 연결된 업무여야 하는 것들로부터 상대적 고립 속에 발전돼왔다는 것이다.

사회적 보호 최저선 개념의 출현

15. … 1990년대 후반 이래, 남반구의 다양한 나라들이 사회적 보호를 위한 개혁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것은 북반구에서 발전된 보다 전통적인 접근과는 아주 다르게 보였다.

17.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적 보호 정책들은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최근 연구는 몇 개의 공통된 정책 특질들을 찾아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불평등을 줄이고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실현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시장의 불균형 시정에 대한 정부 역할을 인정하기, 경제 위기에 대응하여 사회적 투자를 늘리고 유지할 필요성, 포괄적인 빈곤 감소 정책의 채택, 젠더‧나이‧민족성에 따른 격차에 유의하기

20. 아주 많은 사회적 보호 이니셔티브가 남반구에서 출현했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 보호 최저선이 남반구 나라들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상당수 나라들이 보인 초기 거부감-사회보장에 대한 서구식 접근을 무분별하고 부적절하게 치환한 것이라고 간주-에 비춰보면 훨씬 크다.

사회적 보호 정의하기

21. “사회적 보호”란 일반적 용어는 광범위한 과거와 현재의 정책 접근을 표현하는데 사용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안전망”이란 용어의 접근을 옹호하는 쪽과 “사회적 포함”을 추구하고 “사회적 시민권”을 인정하려는 쪽 사이에 주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의 긴축재정과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반발에 세계은행의 주요한 대응이 사회안전망 옹호였다. 사회적 위기관리라는 개념이 특히 두드러졌다. 가장 취약한 이들 또는 만성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기초생계를 보호할 수단으로서나 경제적 쇼크 등에 대한 보다 나은 위기관리로서나 그랬다. 그러나 안전망 접근은 구조적 빈곤과 불평등에 충분한 관심을 쏟지 않고 지원이 필요한 집단을 아주 좁게 겨냥하려 강조했기에 널리 비판받았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 증진됐다. 인권 영역에서뿐 아니라 광범위한 개발 학자와 기구들도 그랬다. 하지만 일반적인 논의는 합의와는 거리가 멀다. 사회적 보호에 대한 오늘날 상당수 접근들은 “더 개량적이고 변화는 덜한 편향”을 계속 보이고 있고 이 점이 “만연한 불의의 근본적인 원인”일 것 같다.

23. 국제적 차원에서, 정의를 둘러싼 문제는 계속 논쟁적이다. 특히 사회적 보호 최저선을 인권의 문제로 볼 것이냐 그것이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그렇다. 먼저 국제노동기구(ILO)의 제202호 권고를 참조하는 게 적절하다. 제 202호 권고는 사회적 보호 최저선의 계획, 이행, 평가에 대한 주요 기준이 됐다. 제202호 권고의 주 요소는 다음과 같다.

(a) 이 권고는 국제인권법의 강한 기초를 두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여러 조항을 구체적으로 참고하면서, 이 권고는 국가들에게 “사회보장을 보장함으로써 인민의 권리와 존엄성”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b) 사회적 보호 최저선은 참여적 방식으로, 비차별‧성 평등‧사회적 포함 등의 원칙을 존중하면서 국가의 우선순위를 반영하여 국가적으로 정의된다.

(c) 보호는 선별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어야 하고 “빈곤, 취약성, 사회적 배제를 방지하거나 경감”하는 것으로 목적으로 해야 한다.

(d) 사회적 보호 최저선은 적어도 건강 보호를 보장하고 아동‧노인‧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소득 보장, 특히 질병, 실업, 출산과 장애 시에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사회보장을 포함해야만 한다.

(e) 기본적인 보장은 법으로 수립돼야만 한다.

(f) 이행은 정규적으로 모니터하고 정기적으로 평가돼야만 한다.

(g) 사회적 보호 최저선은 국가 자원으로 재정이 처리돼야만 하고, 필요하다면 국제적 지원이 이용가능해야 한다.

26. ILO 사회적 보호 최저선 자문단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주목했다.
“사회적 안전망 접근에서, 사회 정책들은 경제 개발에 대해 잔여적인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 조치들의 이행은 구조 개혁 동안에 구조조정의 효과에 완충재를 대고 구조조정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촉진하려고 빈민과 취약자들에게 구제를 제공할 필요성 때문에 추진됐다. 그런 조치들은 대개 임시적이고, 파편적이며, 욕구에 기반한 틀에서 빈민과 취약자들을 겨냥했다.”

29. 세계은행의 입장은 “정치적”이 되지 않고도 인권 존중을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오랜 거부감에 끌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은행이 선호하는 처방은 인민의 역량강화보다는 경제학자와 행정가들이 감독한 것들이고, 인권 침해 방지를 위한 경고나 안전장치가 없는 가운데 보편적인 적용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들이고, 경제 정책 입안가들의 선택을 구속할 사회적 보호에 대한 권리의 법적 확립에 대한 반감이다.

30. 그런 접근방식의 결과는 엄청나다. 첫째, 보편적인 적용을 성취하려는 열망보단 선별성을 위한 복잡한 시스템이 우세할 것이다. 둘째, 보호의 수준이 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 것이다. 셋째, 사회안전망은 일반적으로 법으로 보호되지 않으며 따라서 극빈자들은 변덕스런 정책 경향에 아주 취약할 것이다. 넷째, 인권의 차원은 사실상 사라진다. 사회적 보호는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성과 생산성을 이유로 옹호되는 자선 사업에 머물 것이다. 따라서 역량강화의 차원은 사라지고 권리에 기반한 접근틀의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결국, 시간이 가면,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은 점차 주변화되고 그것의 힘은 파괴될 것이다. …

사회적 보호와 인권의 연결 보장

34. 국제인권법의 어느 것도 “사회적 보호에 대한 권리” 그 자체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에 이것을 기존의 인권으로 간주할지 아니면 새로운 권리로 간주할지의 문제가 생긴다. … 국제사회의 기준이 된 접근은 “사회적 보호는 다수의 국제법에 담긴 인권”이란 정식으로 가장 잘 요약된다. … 사회적 보호에 대한 권리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와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두 권리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두 권리간의 상승효과를 고양하고 공유하는 목표 성취를 위한 조치들의 일괄적인 발전을 쉽게 하기 때문이다.

결론

50.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에 대한 옹호는 과거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첫째, 현실은 많은 국가들에서 빈곤을 철폐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없다는 것이고, 우선순위에 있어서의 큰 변화가 없으면 상황은 기껏해야 양적으로만 나아질 것이다. 재정적 한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기는커녕, 극빈의 지속은 다른 목표를 우선시하기로 선택한 핵심 행위자들의 고의적이고 의식적인 결정의 결과이다. 각한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향력이 없고 그들의 경제적 지위는 정치적 소외를 반영한다. …

51. 둘째, 필수불가결한 조치는 사회적 보호에 대한 인권이 있다는 것을 핵심 행위자들이 명백하게 인정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

52. 셋째, 기술적인 해결책들은 얼마나 혁신적이고 통계에 따른 것이든 간에, 그것들이 돕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역량을 진정으로 강화하는 게 아니라면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 빈민에 대해 우리는 너무 자주 정치가들이 하는 말을 듣는다. 게으름, 무능력, 거짓이 됐건 뭐가 됐던 간에, 정치인 등은 대개 빈민을 비난한다. 그런 부당한 선입견은 빈민을 판단하고 어떻게 하면 최소로만 제공할 것인가를 고안하는 기술적 접근을 선호하는 또 다른 정당화의 구실이 된다. 케인스가 상기시키듯이, 결국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극빈상태의 사람들은 훨씬 빨리 죽을 것이고, 장기간의 해결책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기간의 역량강화와 존중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공통의 인간성, 공유하는 책임,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중심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인권오름 제 415 호 [기사입력] 2014년 11월 13일 17:43: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83 호  [기사입력] 2014년 03월 0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한동안 햇살이 푸근하게 위로해주는가 싶더니 어김없이 꽃샘추위가 왔다. 봄마다 입에 담는 말이지만 ‘꽃샘’이란 말은 참 예쁘고 희망적이다. 길고 음습하게 꽁꽁 얼릴 추위가 아니라 봄꽃을 시샘하는 추위니까 곧 물러갈 거라며 움추린 어깨를 안아주는 것 같다.

그런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겨울 속에서 떠난 이들의 소식이 무겁다. 이름과 장소만 바뀌며 계속 반복되는 사연, ‘생활고 비관 자살’이란 늘 같은 제목을 단 소식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언론의 윗머리에 잠깐 올랐다가 정치권의 소용돌이 소식으로 갈아치워졌다. 좀 더 길게, 좀 더 깊이 애도하고 곱씹었으면 하는 바람과 기대는 허무하게 배신당한다.

어느 깊은 밤이었다. 동생들은 모두 잠들었고 엄마는 맏인 나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당분간 ‘어디’에 맡길 테니 동생들 잘 보살피며 기다리면 엄마가 돈 벌어서 데리러 갈 거란 얘기였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그 ‘어디’가 고아원이란 걸 어린 나이였지만 알아들었다. 엄마가 결심을 결행할 그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불안한 나날이 계속됐다. 동생들이 말썽이라도 피울라치면 간이 오그라들었다. 엄마가 속상하면 그날이 더 빨리 올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일을 결행하지 못했다. 그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용기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의 눈치만 살피던 그 불안한 나날들, 너무 속상한 날이면 ‘다같이 죽자’고 울먹이던 밤들이 갔다. 참 길고 추웠다. 지금 이 순간, 그 불안의 나날과 밤이 누구네 머리위에서 펼쳐지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하지만 그게 상상이 아니라 나날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란 걸 누구나 알고 있다.

이번 세 모녀 자살 사건에 대해 제일 많이 쏟아진 말은 ‘복지 사각지대’란 말인 것 같다.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사각지대’란 ‘관심이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구역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복지의 사각지대란 말은 기존 복지 체계가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사각지대 운운하기에는 기존의 복지라 할 것 자체가 민망하다. 우산이 너무 작은데 우산 안에 들어오지 않아 비 맞은 것이라고 말하는 꼴이다. 요행히 우산 밑에 피해 있으면, ‘진짜 비오는 것 맞냐’며 의심하고 달려드니, 태풍을 만나지 않은 이상 그냥 비 맞으며 버텨야 하는데도 말이다.

우산을 파라솔로 천막으로 키우는 데는 시민들의 적극성이 필요하다. 소수 열악한 계층의 필요를 최소한으로 챙기는 정도로만 복지를 생각하면 결코 정치의 주 관심사가 될 수 없다. 복지를 그런 수준으로만 대하면 대다수 시민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자기 주머니 단속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런 사건이 날 때만 정부를 타박한다고 해서 그게 정치의 할 일이 되지는 못한다. 가짜 수급자 색출, 자기와 가족 책임, 개인적 노력과 의무를 설파하는 주장들에 무심코 끄덕일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 우리 사회 속에서 존엄하다고 이해되는 삶을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것을 챙겨서 생각해봐야 한다. 챙기고 곱씹어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자기 탓을 하거나 운명이라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무력감에서 나아갈 수가 없다.

바람직한 복지는 공익캠페인 광고나 선거 구호 속에 잘 담겨 있는 것 같다. 공익캠페인 광고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학비, 의료비, 노후, 육아 등을 걱정하는 사람들 맘을 콕 짚어 말해준다. 또 선거 구호는 그게 정치가 할 일이라는 것을 콕 짚어 알고 있는 것 같다. 속임수나 사기로 치면 고단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똑같은 속임수가 반복해서 먹히는 것은 속는 사람의 잘못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 캠페인과 구호를 실상과 대조하고 반박하고 저항하고 요구하는 활동이 절실하다. 그런 활동에 대해 그럴 시간과 자원이 있으면 자선이나 하라고 면박주거나 방해하는 것은 속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 같다.

속고 싶지 않을뿐더러 자선으로 죄책감을 떨치는 길을 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우산을 만들어 같이 써야 한다. 우산의 성격과 폭에 따라 복지, 생존권, 사회권이란 말을 가려 쓸 수 있다. 보편복지를 옹호하는 분들에게는 아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통념은 아주 열악한 계층에 대한 질 낮은 구제를 뜻한다. 생존권 또는 생계권은 ‘최소한의’ 생계를 뜻한다. 최소수준에 맞추니까 누리는 삶이라기보다는 부지‧연명하는 생명의 수준일 수밖에 없다. 반면 사회권은 존엄한 삶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권리이다. 물론 다급하고 먼저 충족시켜야 할 요구가 있다. 가장 힘든 사람들부터 구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두는 것과 애초부터 한계를 두는 것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우리가 만들고 키우려는 우산의 폭과 성격은 어떤 이름을 우리가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겉보기에는 똑같은 밥 한 그릇 일지라도 그것을 시혜로서 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로서 존중받는다는 것에 사회권의 의미가 있다. 복지를 국가의 선심성 혜택으로 보는 것과 시민이 응당 받아야 할 권리로 보는 것 사이의 차이이다. 권리란 그 상대방에게 존중의 의무가 발생하는 정당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것을 존엄한 삶에 필요한 목록에 올리느냐이다. 인권으로서의 사회권에 무엇을 어느 수준으로 넣을 것인가는 인권 분야의 오랜 고민이다. 최소기준을 주창하는 의견과 도달 가능한 최상의 수준을 주창하는 의견 사이에 지나친 최소화와 지나친 웅대함에 대한 염려가 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그 혼합이자 중간쯤에 해당하는 견해라 할 수 있다.

밴스 개념은 미국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정치인 사이러스 밴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1977년 조지아 대학에서 열린 법의 날 기념식 연설문의 내용에 주목한 것이다. 알다시피 미국은 사회권을 배제하는 자유권 중심 인권관을 피력해온 대표적인 국가이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정치인이 사회권을 인권의 내용에 넣은 발언을 했고, 그것도 최소한의 생계권을 주장하는 견해에 비해 한층 나아갔으니 주목받은 것이다. 기초생계 뿐 아니라 ‘건강보호와 교육’을 포함한 상대적으로 넓은 사회권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활적 필요의 실현에 대한 권리”라 일컬었다.

사회권을 아예 인권으로 돌아보지 않는 세력도 많지만, 밴스 개념을 소극적이라 보는 견해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견해는 사회권에 대한 역량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드는 사람,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기여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시민인 우리는 정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고 정부는 그것을 보장해줄 적극적 의무가 있다. 적극적 의무라 해서 단지 국가가 궁핍한 사람을 돕지 않은 의무만 따지는 것이 아니다. 궁핍은 돕지 않아서가 아니라 국가의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활동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가령 부자에게 이로운 세제나 법, 공공서비스의 축소나 민영화 등이 가난한 사람을 더 어렵게 한다. 우리는 국가의 행동을 바꾸고 다른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형식적 권리를 지니는 게 아니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런 역량의 발휘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기본적 자원이 필요하고 시민들이 그런 역량의 하한선 이상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의 목표이자 국가가 보장해야 할 의무이다.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를 떠나 어쨌건 밴스 개념에서 사용한 “사활적 필요”라는 말이 맘에 맺힌다. 말 그대로 죽고 사는 일에 관계된 필요란 것이다. 그것에 대한 요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춥지만 한겨울은 아니라고, 적어도 봄에 대한 희망을 품은 꽃샘추위니까 같이 견디자는 믿음을 주는 사회가 내가 사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사회권에 관한 밴스 개념(Vance Conception, 1977년 4월 30일, 조지아 대학 ‘법의 날’ 기념식 연설)

… 시민권 운동의 초반 시절에 많은 미국인들은 그 문제를 “남부” 문제로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고 지금도 문제입니다. 이제, 하나의 국가로서의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됩니다. 인권 보호는 단지 소수의 지역이 아니라 모든 지역들에 해당하는 도전입니다. …

“인권”이 뭘 의미하는지 정의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의 고결성에 대한 정부의 침해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침해에는 고문,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 자의적인 체포나 구금이 포함됩니다. 공정한 재판에 대한 부인, 가정생활에 대한 침해도 포함됩니다.

둘째, 음식, 주거, 건강보호, 교육과 같은 사활적 필요(vital needs)의 실현에 대한 권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권리의 실현이 부분적으론 국가의 경제 발전 단계에 달려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이 권리가 정부의 활동 또는 활동하지 않음으로 해서 침해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원을 엘리트에게로 돌리는 부패한 당국의 처리를 통해서나 가난한 사람의 곤경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서 말입니다.

셋째, 시민‧정치적 자유들 -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자국 내외 모두에서의 이동의 자유, 정부에 참여할 자유 - 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은 이 모든 권리를 증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세계인권선언에서 인정된 권리입니다. …

우선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가령, 어떤 종류의 침해나 박탈이 있습니까? 그것의 정도는 어떠합니까? 침해에 어떤 유형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경향은 인권에 대한 관심을 향한 것입니까 아니면 인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까? 정부가 관련된 통제와 책임의 수준은 어떠합니까? 정부는 기꺼이 독립적인, 외부의 조사를 받으려 합니까?

두 번째로 던져야 할 질문은 효과적인 활동을 위한 전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활동은 인권의 전반적인 목적을 증진하는데 유용할까요? 우리의 활동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특정 조건을 실제적으로 개선할까요? 아니, 그 대신에 더 악화시킬 것 같나요? …

인권오름 제 383 호  [기사입력] 2014년 03월 0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35 호  [기사입력] 2013년 02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살다 보면 “그림의 떡이야”란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보는 게 어디야. 보는 것만으로 좋은데”라고 위로하거나 자족하는 말도 으레 듣게 된다. ‘그림의 떡’에 대해 국어사전은 “탐스럽지만,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뜻으로, 바라는 모습이기는 하나 실제로 이용할 수 없거나 이루어지기 힘든 경우를 이르는 말”이라 한다. 인권에 대한 기준들을 들여다볼 때 드는 생각이 딱 이런 경우다.

내 정부가 돌아보지도 않는 인권 침해를 국제사회에 호소한다? 그것도 그냥 호소가 아니라 유엔의 전문기구에 정식으로 진정한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 국제사회는 그런 기준에 대한 도전을 또 하나 성취했다.

“선택의정서의 발효는 중요한 획기적 발전이다. 자신들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들이 정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 선택의정서는 국제적 차원에서 기댈 가능성이 전혀 없이 견뎌야만 했던 피해자들이 인권침해를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선택의정서는 고립되고 무력했을 개인들이 국제 사회에 자신들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길을 제공할 것이다. … 선택의정서의 발효로 마침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가 여타의 모든 인권과 동등한 기반 위에 서게 됐다.”

최근 나비 필레이(Navi Pillay) 유엔인권최고대표가 사회권 규약의 선택의정서 발효를 기뻐하며 한 말이다. 지난 2월 5일 사회권 규약 선택의정서에 대한 10번째 비준이 이뤄짐으로써 3개월 뒤면 정식 국제법으로 발효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말이다.

사회권 규약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줄임말로서 노동권, 사회보장권, 교육권 등을 규정한 대표적인 국제인권법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사회권 규약을 비준하여 당사국이 됐고, 현재 이 조약의 전체 당사국 수는 160개국이다. 선택의정서는 이 규약의 이행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별도의 조약을 말한다. 선택의정서는 해당국가에 의해 사회권 규약에 보장된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 또는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제삼자가 유엔 사회권위원회에 권리침해를 진정할 수 있는 방법과 절차를 담고 있다. 지난 200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후, 정식 국제법으로 발효되기 위해서는 10개국 이상의 비준이 필요했는데 그 10번째 비준을 지난 5일 우루과이 정부가 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20여 년 전 국제인권법이란 걸 처음 접했을 때였다. 한국 정부는 사회권 규약에 가입하고 난 후 당사국의 의무사항으로서 사회권을 얼마나 잘 보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1993년 처음으로 유엔사회권위원회에 제출했다. 정부는 물론 언론도 알려주지 않는 그 소식을 파악한 인권단체들이 쫓기듯 부랴부랴 모여 대안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유엔사회권위원회의 최종의견과 권고가 나온 것이 1995년이었다. 그때의 주요 지적 내용은 지금 들여다봐도 유효하다.

노동관계법을 사회권 규약에 합치되도록 즉각 개정할 것, 노조활동에 대한 과도한 제한을 해제할 것,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확대할 것 등이었다. 권고는 노동 관련 사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회권위원회는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지원확대, 무주택자의 보호와 주거권의 실효적 보장, 장애인의 처우 개선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사회권? 그게 뭔데요?”라며 시큰둥해하는 언론사 전화를 붙들고 ‘이건 중요한 문제니 꼭 보도해야 한다’고 설득했던, 아니 매달렸던 일은 그냥 지나간 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때도 노동권을 행사했다 하여 맞고 쫓겨나고 붙들려가던 노동자들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매 맞고 쫓겨나고 붙들려가고 있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가장 최근에 심사된 3차 보고서에 대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권고(2009년)에는 더 뼈아픈 지적이 있다. “노사관계 관련 노동자에 대한 빈번한 처벌 사례 및 파업 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물리력 사용 등에 대해 매우 우려한다. 노동조합권이 한국 내에서 적절히 보장되지 않음을 거듭 우려한다.”는 것이다.

선택의정서의 발효로 국가의 인권의무 이행에 관한 국제기준의 수준이 한층 높아진 이때에 하필이면 더 우울한 기록을 보게 된다. 선택의정서가 빛을 본 때와 같은 달 26일 재능노조는 1,895일의 비정규직 최장기 농성을 기록했고, 27일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철탑 농성 100일을 맞았다.

권리의 당사자들만 홀대받는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사회권 규약은 다른 국제조약에 비해 탄생부터 엄청 홀대를 받았다. 우선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당시에 포함되는 것 자체가 진통을 겪었다. 한 예로 노동조합의 결사권에 대해 선언 기초자들이 미적거리자, 세계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권리를 세계인권선언에 넣자고 촉구하는 운동을 강력히 펼쳐야 했다. 세계노동조합연맹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전후 노조의 곤경을 분석·보고한 장문의 비망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영향으로 경제사회이사회와 국제노동기구가 협력하여 세계인권선언에서 노동조합 결사권을 다루는 것이 타당하다고 제안했다. 결국, 선언의 기초자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노동조합의 정당한 요구가 음모로 간주되던 시기는 지나갔다. 노동자의 결사를 음모로 보는 것은 20세기가 아닌 19세기의 개념이다. 이 조항은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사수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가 선언기초자들의 합의였다.

세계인권선언 속에 사회권이 간신히 자리를 잡았더니, 이번엔 국제조약으로 만들면서 사회권을 불편해하고 떼놓고 가려는 움직임이 컸다. 결국, 한 개가 아니라 ‘자유권’과 ‘사회권’ 두 개로 쪼개진 규약이 만들어지게 됐다. 그다음에는 규약 이행을 심사할 기구도 문제였다. 자유권 규약에 대해서는 담당하는 위원회(Human Rights Committee)를 처음부터 두었는데, 사회권 규약에 대해서는 담당 기구를 두지 않고 경제사회이사회에 떠넘겼다. 그런 상태가 10여 년 이어지다가 1987년에 와서야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더 큰 차이는 개인 진정에 대한 ‘선택의정서’였다. 앞서 말했듯이 선택의정서란 해당 국제조약의 이행을 보완하기 위해 만드는 독립된 조약을 말한다. 현재 주요 국제인권조약은 대부분 개인 진정 절차에 관한 선택의정서를 두고 있다. 선택의정서가 발효되면 해당 국제조약이나 의정서를 비준한 국가를 대상으로 모든 사람이 진정을 제출할 수 있다. 국내의 모든 구제절차를 거친 후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나, 예외적으로 국내 구제 절차가 불합리하게 지연되거나 그 효과성이 없음이 명백하거나 당사자가 그런 절차를 이용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출할 수 있다. 자유권 규약은 개인 진정에 대한 선택의정서를 일찌감치 만들었다(1966년 채택, 1976년 발효). 반면 사회권 규약은 그보다 40여 년이나 늦은 2008년에 와서야 선택의정서를 채택했고, 그 발효를 위한 10개국을 채우는데 또 4년이 걸린 것이다. 늦은 감도 있고 미진한 감도 있겠지만 ‘사회권은 사법기구나 조약기구에 의해 적용될 수 없으며 개인 진정 절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오랜 반대주장을 해묵은 것으로 만든 진전이다.

한국 정부는 아직 이 선택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진정절차를 지금으로선 이용할 수 없다. 또 비준하여 이 절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국제 절차가 국내의 절차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진 국회도 있고 정부도 있고 법원도 있다. 국제기준과 유엔 사회권위원회 등의 역할은 당사국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입법, 정부의 결정과 집행, 법원의 판단 등 모든 분야에서의 의사결정과 특정 행위가 기본적 인권에 합치되는지에 대해 가능한 최대한의 감시와 협의의 길을 열어놓자는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면 새 정부에 바라는 대표적 인권 과제 같은 걸 국내외 인권 단체들은 의례적으로 발표하곤 했다. 이번에는 그런 형식 자체가 무의미해 보인다. 온몸으로 외치고 요구하는 몸의 언어가 전국에 넘치기 때문이다. 지하도, 철탑, 굴다리, 영하의 길거리에 제 몸을 묶은 이들이 넘쳐난 지 오래고 그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지를 새삼 물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살아갈 권리를 외치는 몸의 언어를 홀대하는 한, 제아무리 좋은 국제기준이든 장밋빛 공약이든 ‘그림의 떡’일 뿐이다.

사회권 규약 선택 의정서(The Optional Protocol of the 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전문
본 의정서의 당사국들은, … 공포와 빈곤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상은 오직 모든 이들이 시민 · 문화 · 경제 · 정치 · 사회적 권리를 누릴 때만이 성취 가능하다는 세계인권선언과 인권에 관한 국제규약의 주장을 상기하며, 모든 인간의 권리와 기초적 자유가 지닌 보편성, 불가분성, 상호의존성, 상호관련을 재확인하며 … 다음 사항에 동의한다.

2조. 통보
당사국의 관할권 하에 있으며, 해당 당사국이 사회권 규약에 규정된 권리를 침해하여 피해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개인 또는 집단이 진정을 제출할 수 있다. 제삼자가 대신 제출할 경우에 당사자의 동의는 없지만, 진정 작성자가 피해자의 편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사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한다.

3조. 허용기준
1. 사회권 위원회는 모든 이용가능한 국내의 구제책이 소진됐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진정을 검토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구제책의 적용이 비합리적으로 지연된 경우에는 이 규정이 해당되지 않는다.
2. 사회권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진정이 불가함을 선포해야 한다.
(a) 국내 구제책의 소진 이후 1년 안에 진정이 제출되지 않은 경우. 그러나 기간 안에 진정을 제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음을 작성자가 증명할 수 있는 경우는 예외.
(b) 진정의 주제가 되는 사실이 해당 당사국에서 선택의정서의 발효 이전에 발생한 경우. 단 발효 이후에도 해당 사실이 계속되고 있다면 가능.
(c) 동일한 사안이 사회권위원회 또는 여타의 국제적 조사나 해결 절차 하에서 검토됐거나 검토되고 있는 경우.
(d) 사회권 규약의 조항에 부적합한 경우.
(e) 명백하게 근거가 잘못된 경우. 충분하게 구체적이지 않거나 대중 매체가 유포한 보도에 전적으로 기초한 경우.
(f) 진정을 제출할 권리의 남용인 경우.
(g) 익명인 경우 또는 서면이 아닌 경우.

5조. 임시 조치
1. 진정을 접수한 후 그리고 진위의 결정 이전에 어느 때든지, 사회권위원회는 피해자 또는 추정 피해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 가능성을 피할 목적으로, 예외적인 상황에서 필수적인 임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긴급 의견을 해당 국가에 전달할 수 있다.
2. 사회권위원회가 5조 1항에 따라 재량을 행사한 경우에, 그것이 진정에 대한 인정 또는 진위 여부에 대한 결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0조. 국가 간 통보
1. 이 선택의정서의 당사국은 언제든지 이 조항에 따라 다음 사항을 선언할 수 있다. 규약의 한 당사국이 볼 때 다른 당사국이 사회권 규약하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효력을 갖는 통보를 접수하고 심사할 사회권위원회의 권한을 인정한다고 선언할 수 있다. 이 조항에 따른 통보는 오직 그런 내용의 선언을 한 당사국이 제출한 경우에만 접수하고 심사할 수 있다. 그런 내용의 선언을 하지 않은 당사국에 관한 것이라면 사회권위원회는 어떤 통보도 접수하지 않는다.

11조. 조사 절차
1. 현 선택의정서의 당사국은 어느 때든지 현 조항에 대한 사회권위원회의 권한을 인정한다고 선언할 수 있다.
2. 사회권위원회는 사회권 규약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에 대해서든, 당사국에 의한 대규모의 체계적인 인권침해를 나타내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입수하면, 해당 국가에 대해 정보 검토에 협력할 것과 관련 정보에 관한 의견을 제출할 것을 권할 수 있다.
3. 이와 관련된 이용가능한 여타의 신뢰할만한 정보 뿐 아니라 관련 국가가 제출한 의견을 검토하기 위하여, 사회권위원회는 한 명 이상의 위원을 임명하여 조사를 수행하고 긴급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할 수 있다. 해당 국가가 인정하거나 동의한 경우에는 조사 활동에 해당국 방문이 포함될 수 있다.
4. 이러한 조사는 비공개로 수행돼야 하며 모든 단계에서 당사국의 협력이 추구돼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335 호  [기사입력] 2013년 02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9 호  [기사입력] 2007년 01월 3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간답게 살 권리라 하는 ‘사회권’은 흔히들 정의되기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내기도 어렵고 권리로서 인정하기 곤란하다는 주장은 사회권을 쉼 없이 괴롭히고 조롱한다. 이에 맞서는 주장들은 국내법의 근거를 들기보다는 국제인권법에서 인정되고 있는 권리라는 것을 먼저 내세운다. 자유권과 비교할 때 사회권은 국제인권에서 먼저 확립되어 국내적 실천을 도모하는 식이라 할 수 있다. 이때 가장 기본으로 다루는 문서가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규약(사회권규약)’이다. 전반적인 생활의 위기 속에서 여기에 등장하고 있는 권리들을 하나씩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먼저 사회권규약 11조에 규정된 식량권의 의미를 살펴본다.

식량권은 어떻게 정의될 수 있을까?

농촌활동이란 것이 매년 있던 시절, 밥을 먹기 전에 하는 의식이 있었다. 숟가락, 젓가락으로 장단을 치며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서로 나누어 먹는 것”이라 노래한 후에 농민께 감사한다는 복창과 함께 밥을 먹었다

과연 밥은 ‘나누어 먹는 것’일까? 도시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먹을 것을 돈 주고 산다. 가게와 시장에 진열된 상품인 ‘먹을 것’은 가격이 오르고 내릴 뿐 항상 넘쳐나고 있다. 굶주리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들 대부분이 과연 제대로 먹고 있는 것인지 여기서는 알기 어렵다. “배가 부르면 우린 소화불량이 두렵다. 배가 텅 비면 우린 두렵다. 다시는 먹지 못할까봐 두렵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듯이 극단적 다이어트와 굶주림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아우르는 식량권에 대한 정의에는 여러 요소가 있다. 양으로나 질로나 적절하고 충분한 식량, 식량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문화 전통에 부응하는 방식의 식량, 신체적·정신적으로나 개인적·집단적으로나 존엄한 삶을 실현할 수 있는 식량, 지금까지 말한 의미의 식량에 대해 정기적이고 영구적으로 자유롭게 접근할 권리를 말한다.

이들 요소를 상세히 해설한 것이 유엔사회권위원회가 내놓은 일반논평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이다. 이 논평에는 식량의 ‘적절성’과 ‘지속가능성’의 의미가 담겨있다. 간단히 말해 식량의 ‘적절성’은 “개인의 먹을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양과 질을 갖추고 있고 해로운 물질이 없으며 해당 문화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식량이 이용가능한 상태”이다.

‘지속가능성’은 식량이 현재 및 미래 세대 모두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는 것으로, 먹을 것을 구하는 비용이 너무 높아 다른 기본적 필수품을 줄이거나 얻을 수 없다면 경제적 접근성이 없는 것이고, 자연재해나 무력 분쟁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장애인, 노인, 유아 등 신체적으로 취약하고 건강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 식량에 접근하지 못하는 것은 물리적 접근성이 없는 것이다. 또한 ‘지속가능성’에서 세계의 농민과 민간단체들이 들고 나온 개념이 ‘식량주권’의 개념이다. ‘식량주권’이란 먹을 것에 대한 권리와 먹을 것을 생산할 권리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식량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면, 그 식량을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하느냐는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식량 생산을 위한 자원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을 보존하며 초국적 기업농의 유전자 조작 식품과 단일품종, 종자약탈 등의 횡포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장 굶주리고 있다는 것은 어딜 봐도 정상이 아니라는데 식량주권 개념의 문제의식이 있다.

굶주림에서 해방될 권리

사회권 규약에는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기아로부터의 해방의 권리’라는 두 개의 용어가 있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은 양대 국제규약에서 “기본적인(fundamental)”이란 수식이 붙은 유일한 권리이다. 식량권을 기초하던 토론이 진행되던 1963년 당시 세계보건기구의 사무총장 센(Sen)은 세계기아문제의 엄청난 규모와 그것이 어떤 구체적 조치들로 인해 줄어들 수 있느냐를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5억의 인구가 기아상태이며 10억 이상이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그런 경향이 계속된다면 20세기 말까지 영양실조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30억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따라서 식량권을 미적지근하게 다뤄서는 안되며 긴급한 과제로 다뤄야 한다는 호소였다. 이에 식량권의 긴급성을 강조하여 식량권에 대해서는 ‘점진적 조치’라는 표현이 빠지게 됐다.
하지만 20세기 말인 1999년에 채택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일반논평에서의 상황 제시는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8억 4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적 기아 상태이며, 자연재해, 증가하는 내란과 전쟁, 정치적 무기로서의 식량 이용의 결과로 수백만 명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기아로부터의 해방의 권리’는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식량권의 실현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할 뿐이다. ‘적절성’의 양적인 의미의 개념은 기아로 인한 죽음을 방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최소한의 칼로리가 아니라 정상적이고 능동적인 생존을 촉진하기에 충분한 식량이다. 나아가 질적인 의미에서의 ‘적절성’은 하위규범인 기아로부터의 해방 이상의 것으로 식량의 문화적 적절성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식량권은 인권이 아니다?

일부 경제 선진국에서도 목격되는 영양실조 문제의 원인이 식량 부족이 아니라 빈곤으로 인한 식량에 대한 접근성 결여라는 지적 앞에서도 식량권을 인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완강함은 여전하다. 이런 견해에서는 도덕적 또는 인도주의적 고려만으로는 정부들이나 기타 관련된 행위자들을 움직일 수 없으므로 식량권의 주장이 시간 낭비라고 한다. 식량이란 연간 수십억 달러가 오가는 상품이며 따라서 식량이 인권으로서 갖는 지위는 부차적일 뿐이라는 입장인 것이다. 이론적으로야 도덕적 고려가 정책 결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고려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식량권이 이행되지 못하는 원인이나 문제의 해결책에 대한 보편적 합의가 없기 때문에 식량권 이행을 위한 효과적인 메커니즘을 수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식량권은 국제적 차원에서 이행가능하지 않고 개별국가 차원에서 매우 제한적인 계약의 한계 내에서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셋째로 사회권 일반에 대한 반대의견이다. 시민·정치적 권리가 우선적이며 일단 세계 민족들에게 자유가 확보된 이후에야 식량권 같은 경제·사회적 권리가 실현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엔인권위원회(현 인권이사회)에서는 이런 발언이 있었다. “세계의 상당수는 정말로 굶주리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선행되는 문제가 있다. 세계인구의 절반에 못 미치는 거의 1/3만이 자유롭다. 그 나머지 2/3 이상이 노예이다.…기아 또는 빈곤이란 인류에게 오랫동안 있었던 것이다. 이런 빈곤은 현세대나 현재의 경제 체제와 더불어 생긴 것이 아니다. 기아와 빈곤을 종식시키고 싶다면 먼저 부자유한 국가들의 속박을 깨뜨려야 한다.”

과연 그럴까? 유엔인권위원회 같은 데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한다.

“굶주림은 사람을 눕게 하지만 편히 쉴 수 없게 만든다. 굶주림은 사람을 눕게 하지만 일어설 수 없게 만든다”(나이지리아에서 구전되는 말) [류은숙] <2007년 01월 31일 인권오름 제39호>

유엔사회권위원회 일반논평 12: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

…국제사회가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완전한 존중의 중요성을 수차례 재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규약 11조에 제시된 기준과 세계 여러 지역의 실제상황 간에는 여전히 심각한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 대부분 개발도상국의 국민인 전 세계 8억4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만성적 기아를 겪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자연재해, 일부 지역에서 증가하는 내란과 전쟁의 발생, 그리고 정치적 무기로서의 식량 이용의 결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본 위원회는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가 대개 개발도상국에서 특히 심각하지만, 영양실조, 영양결핍 및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에 관련된 기타 문제가 일부 경제선진국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주목한다. 근본적으로 기아와 영양실조 문제의 근원은 식량의 부족이 아니라 세계 인구의 상당수가 특히 빈곤으로 인하여 잉여가능한 식량에 대한 접근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 위원회는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핵심 내용이 다음을 내포한다고 간주한다.

개인의 식이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양과 질을 갖추고 있고 해로운 물질이 없으며 해당 문화 내에서 용인될 수 있는 식량이 이용가능한 상태

이러한 식량이 지속가능하고 기타 인권이 향유를 방해하지 않는 방식으로 접근 가능한 상태

식이적 필요란 식사가 전체적으로 신체적 및 정신적 건강, 발전 및 유지, 그리고 생애 전 단계에서 성별과 직업에 따른 생리적 필요를 포함하여 신체적 활동을 위한 영양분의 혼합을 포함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이적 다양성, 그리고 모유 수유 등 적절한 섭식 및 급식 방식을 유지, 적응 또는 강화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이때 가해지는 식량가용성 및 접근성에 대한 최소한의 변화가 식이적 구성 및 섭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보장한다.

해로운 물질이 없을 것은 식량이 불순물 및 불량한 환경위생이나 여러 단계의 공급 과정 중의 부적절한 취급으로 인하여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량 안보 및 공적‧사적 수단을 통한 일련의 보호조치에 대한 요건을 정한다. 또한 자연발생적 독소를 검출하고 이를 예방하거나 박멸하기 위한 주의도 기울여야 한다.

문화적 수용성 또는 소비자 수용성은 음식 및 음식 소비에 부여되는 인지된 비영양적 가치, 그리고 접근가능한 식량의 성질에 대한 정보력 있는 소비자의 우려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고려하여야 할 필요를 내포한다.

가용성은 생산지나 기타 자연자원으로부터 직접 먹을 것을 구할 가능성 또는 수요에 따라 식량을 생산지로부터 그것이 필요한 곳으로 운반할 수 있는 원활한 유통, 가공 및 시장 시스템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접근성은 경제적 접근성과 물리적 접근성을 모두 포함한다.

경제적 접근성은 적절한 식사를 위한 음식물의 획득과 관련된 개인 또는 가정의 재정적 비용이 다른 기본적 필수품의 획득 및 충족을 위협하거나 제한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적 접근성은 사람들이 음식을 조달하는 획득 유형이나 조달할 자격에 적용되며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의 향유를 위해 충분한가에 대한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토지가 없는 사람들 및 기타, 특히 빈곤한 계층같이 사회적으로 취약한 집단은 특수 프로그램을 통한 관심을 필요로 할 수 있다.

물리적 접근성은 적절한 식량이 유아, 아동 등 신체적으로 취약한 사람, 노인, 신체장애인, 불치병 환자 및 정신질환자 등 지속적인 건강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이에게 접근가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재해 피해자, 재해 빈발지역 거주자 및 기타 특히 혜택받지 못한 집단들은 식량 접근성과 관련하여 특별한 관심, 그리고 때로는 우선적 고려를 필요로 할 수 있다. 조상 전래의 땅에 대한 접근권이 위협받고 있는 많은 선주민 집단도 특별히 취약한 경우에 해당한다.

각국은 기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그 관할권 내의 모든 사람에게 양이 충분하고, 영양이 알맞으며 안전한 최소한의 필수적인 식량에 대한 접근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인권오름 제 39 호  [기사입력] 2007년 01월 3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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