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55 호 [기사입력] 2013년 07월 2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요즘 늘 그렇듯이, 그날도 후덥지근하다 못해 숨이 턱턱 막혔다. 울산으로 ‘희망버스’가 가는 날이었다. ‘오래도 참 많은 사람을 불법으로 써왔으니 이제 고만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대법원 판결 좀 이행하라고, 이제 그만 좀 괴롭히라고, 그렇게 단순 정당한 요구를 하려고 철탑위에 사람이 올랐다. 그들의 목이 조이고 있었다. 회장은 나 몰라라 하고, 동료 노동자는 자살하고, 날씨는 겨울에서 한여름으로 바뀌고, 언론은 침묵이고 인정은 차가운 듯하니, 그 노동자들의 숨이 얼마나 죄어들까? 그런 염려에 전국에서 주말을 반납하고 무더위에 시달릴 걸 각오하고 버스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주말에는 꼼짝없이 식당 알바를 해야 하는 나는 틈틈이 인터넷으로 소식을 확인하면서 숨을 골라야 했다. 찜통 같은 주방 안에서 이렇게 땀 흘리다간 탈진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들려온 소식은 공포였다. 소화기와 최루액이 뿜어지고 암흑 속에서 사람들이 다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있어도 숨이 막힐 공기 속에 그런 걸 뿜어댄다니, 이것저것 쏘고 던져 댄다니, 구급차가 몇 번이나 등장했다니,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속의 열이 탈진을 부를 지경이었다.
세상 일이란 게 철탑위에까지 오른 사람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돌아봤다면 벌어질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랬다면 철탑 위에 올라갈 일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철탑 위 사람들이 제발 살아 내려왔으면 하는 심정으로 달려간 사람들을 죽창과 쇠파이프를 든 폭도란다. 굳게 닫힌 회사 문을 열려고 시도한 일, 회사가 동원한 직원과 용역깡패, 관망과 방조적 폭력과 적극적 폭력을 배합해 구사한 경찰과 맞장을 뜬 일이 ‘폭력’이라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그 난리의 주범은 언제나 그렇듯이 주류 언론의 입이다.
희망버스 일부 참가자의 행동이 거슬렸다고 치자. 사실대로 보도해라. 하지만 같은 자리에 있었던 자들(현대차 직원, 용역, 경찰)의 행위, 그들을 동원하고 사주한 기업 책임자의 행위, 그 모든 일을 있게 한 배경도 같이 보도해라. 적어도 사실 보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혼자서 과장 억측 소설 쓰고, 인쇄하고 방송해서 유통시키고, 판결하고 사법적 처단까지 하는 재주를 부리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니라면 말이다.
노동자들을 자살로 철탑으로 몰아댄 것은 그들 언론의 침묵이었다. 해야 될 보도를 안 하는 행태를 보면, 꼭 휴일이나 명절 다음날 시험날짜를 잡아놓던 학교가 떠오른다. 학생은 휴일이나 가족과 함께 해야 할 명절에도 공부만 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날짜를 잡았다고 훈계하던 교사가 떠오른다. 탐사보도까지는 못하더라도 억울하다고 부당하다고 공공연히 외치는 목소리마저 제거해버리는 행태가 그런 심보가 아닐 수 없다. 기본적 인권이니 하는 것 찾을 생각 말고 부당하다 여기지 말고 입 다물고 일만 하라는 훈계가 언론의 침묵에 담겨 있다.
강요하고 조장한 침묵 속에서도 막지 못한 사건이 터져 나오면 언론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과장, 왜곡, 날조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바꿔치기 한다.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고통 속에서 찾고 헤매던 법의 정신과 공정함을 언론이 갑자기 들먹거린다. 그런데 표적이 다르다. 권리의 회복을 위해 찾아 헤매던 법이 저쪽 손에 들려져 있다. 법의 힘은 강제력이다. 약한 자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제력을 동원할 수 있는 힘 있는 자의 편에서 동원된 법이 달려온다. 채증하라! 체포하라! 벌금 물려라! 손배가압류 해라….
반면 힘 있는 자들과 그 기관에 대해서는 엄호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다. 유엔의 표현의 자유특별보고관이 방한했을 때 미행하다가 걸렸던 그 기관, 심지어 시민의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참정권을 유린한 국정원에 대해서 싸고돈다. 그런 권력의 범죄를 보도하려고 애쓴 동료 언론인들을 내모는 데 앞장선다. 촛불집회나 시국선언 얘기는 그야말로 ‘풍문으로 들었소’ 시늉을 한다. 최고 권력자에 대한 비판과 질문은커녕 찬양고무에 여념이 없다. 이쯤 되면, 주류 언론의 행태는 단순히 권력의 충견이나 공범 수준이 아니라 주범의 수준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빈트후크 선언>이다. 앞서 지적한 주류 언론의 추태를 ‘언론 자유’의 이름으로 고발하고 싶어 골랐다. 이 선언이 보호하고자 하는 언론의 책임과 그 때문에 겪게 되는 수난이 그들 주류언론의 것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독립적’이고 ‘다원적’인 언론을 위해 노력한 일이 있는지 압력에 ‘저항’한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이 선언이 보호하고 칭송하는 것은 그들 주류언론이 솎아내고 쫓아낸 언론인들의 몫이다. YTN의 노종면, MBC의 최승호 피디 등이 쫓겨날 때, 그들이 무엇을 침묵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는지 알면서 당신들 주류 언론은 무엇을 했는가? 그 해직 언론인들이 이 더위에 3주 동안 전국을 걸어서 당신들이 외면한 현장을 찾아 취재한 것을 아는지, 당신들이 취재증 차고도 첨단 장비로 무장하고도 못하고 안하던 취재와 보도를 문전박대와 내쫓김을 당하면서도 해내고 있는 뉴스타파를 곁눈질이라도 하는지, 쌍용과 현대차 노동자들,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 등 해직 언론인들이 만난 현장과 사람들을 당신들은 한번이라도 들여다볼 생각을 했는지, 그러고도 펜을 놀리고 마이크를 잡는 게 괜찮은지 정말 묻고 싶다. 그리고 ‘밥은 먹고 다니는지’ 묻고 싶다.
빈트후크 선언은 1991년에 아프리카의 언론인들이 나미비아의 빈트후크에 모여 확인한 언론의 자유 원칙이다. 언론인에 대한 위협을 염려하며 언론의 독립성과 다원성을 증진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세미나를 열었고, 그 결과로 채택한 것이다. 이 선언이 채택된 5월 3일을 기념하여 유엔은 ‘세계 언론 자유의 날’(World Press Freedom Day)로 선포했다. 왜냐면 이 문서는 그와 같은 조류의 문서 중 첫 번째의 것으로, 중앙아시아의 알마아타선언, 중동의 사나나 선언, 라틴아메리카의 산티아고 선언 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험한 항해에는 언론이 늘 동반한다. 빈트후크 선언 채택 10주년을 맞았을 때, 유엔은 정치적 폭력과 권위주의를 맞아 언론의 자유가 위태롭다는 성명을 냈다. 2011년에는 20주년을 맞아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란 주제 하에 언론인들이 또 한 번 빈트후크 선언을 실천하기 위한 요구사항들을 발표했다. 또한 같은 해, 나비 필레이(Navi Pillay) 유엔인권최고대표는 ‘세계 언론 자유의 날’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아랍의 봄’을 비롯하여 정치적 봉기에서 미디어는 중대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무거운 대가를 치른다. ……
인민의 권리가 실현되지 않고 인민의 목소리가 침묵될 때, 어떤 지점에 이르면 인민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떨쳐 일어설 수밖에 없다. 인권은 국가에 의해 박해‧처벌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며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그러하다.
…… 언론은 사건들을 알리기 위해 지속적이고 용기 있는 노력 속에서 살해, 고문, 폭력, 모욕, 구금, 실종, 추방, 위협, 취재와 보도 방해 등의 대가를 치러왔다. 그런 언론인들의 용기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결단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 일을 함으로써 언론인들은 나머지 우리들이 인권의 실현을 감시하고 지킬 수 있도록 해준다.
…… 빈트후크 선언이 지적한 문제는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도처의 문제이다. … 표현의 자유는 미디어를 위해서는 열린 공간이 아니라 전체 사회를 위한 것이다.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은 인민들이 공적 영역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역량을 강화한다. 정부에게 불리한 정보를 억압하고 배포를 방해하더라도 용감한 사람들은 늘 길을 찾아왔다.”
해직언론인들은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대가를 치르며 싸워왔다. 희망버스에 대한 왜곡보도 앞에서 새삼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물대포의 조준사격을 받으면서도 카메라가 망가지는데도 현장에서 취재를 멈추지 않은 독립 언론인들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 당신들이야말로 길을 만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든 희망버스 승객들에게 머리를 조아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남에 대한 걱정은 집어치우고 네 살길만 찾으라는 권력과 사이비 언론의 훈계와 보복에 아랑곳 않고 동행해준 당신들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계속 인권을 말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빈트후크 선언 빈트후크 선언(1991) |
인권오름 제 355 호 [기사입력] 2013년 07월 2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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