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26조

1.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최소한 초등 기초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고등교육도 능력(merit)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accessible) 한다.

2.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연합의 활동을 촉진시켜야 한다.

3.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

 

자명한 권리
26조의 대전제는 교육 그 자체가 보편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어떤 국가도 반대를 표명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자명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토론이 없었고, 모든 대표자들의 동의를 받았다.

예를 들어 브라질 대표는 “모든 사람의 교육에 대한 권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라며 “인류의 유산을 공유할 권리는 우리 문명의 기초를 형성했고 그 누구에게도 부인될 수 없었다. 교육 없이는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수 없었고, 이 인격은 인간 생활의 목적이자 가장 견고한 사회의 기초”라 했고, 파나마 대표는 “교육에 대한 권리 같은 기초적인 인권이 세계인권선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지지를 보였다. 현실적으로도 당시 40여 개 국의 헌법이 무상의무교육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었기에 교육권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무엇에 대한 교육인지에 대한 합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각 국은 자신만의 고유 브랜드를 가진 교육을 선호했는데, 그것은 “도덕적 시민의 훈련”, “국가 윤리의 발전”, “조국애, 조국의 민주제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투쟁한 이들에 대한 사랑” 등으로 표현됐다. 이중 어떤 것이 보편적인 시민 교육의 상이라고 정할 수도 없거니와 국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무엇이든지 국민에게 주입할 수 있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교육을 지배하는 핵심원칙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대략이라도 써야할 필요성이 제안됐다. 그 결과가 2항에 담긴 교육의 정신이다.

교육의 목적
26조 2항에 담긴 교육의 목적은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이다. 여기에도 반대의 여지는 없었다. 세계인권선언 자체가 그러하지만 교육권 조항은 전쟁 경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교육권 조항에서 전쟁 경험이라 함은 히틀러 체제하에서 독일 청소년에게 저질러진 세뇌(brainwashing)를 떠올린 것이다. 교육을 아주 강조하고 놀라울 정도로 잘 조직했지만, 그 체제하의 교육은 히틀러의 표현대로 “인종적 정서와 인종적 감정을 청소년의 본능과 지능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고분고분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었고 그 결과 파국을 맞았다고 생각했기에 ‘인권존중의 정신을 강화’하는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다.

히틀러 체제에 대한 반감은 2항에서만이 아니라 3항의 부모의 선택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3항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는 것은 나치체제가 국가 통제로 오염된 학교에 모든 아동을 등록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권리를 강탈했다고 봤기 때문에 삽입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부모의 선택권을 더 비싸고 더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자유로 해석하는 것은 또다른 인권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 여기서는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반대한 것이지, 교육권의 공공성과 공적의무를 방기할 의도는 없었다.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라고 해서 이 한마디로 문제가 다 풀리는 것은 아니다.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정부들은 인권의 수사를 입맛대로 조작할 수도 있고, 다양한 인권개념간의 긴장과 모순, 다양한 권리의 갈등을 무시할 수도 있다는 점을 항상 의식해야 할 것이다.

2항에 담긴 또다른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이다. 원래는 “인격의 신체적, 지적, 도덕적, 정신적 발전”으로 제안되었으나 몇 개의 수식어로 교육의 모든 목적을 요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완전한 발전”으로 고쳐졌다.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의 증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연합(유엔)의 활동을 촉진”시킨다는 목적은 ‘국제적 친선의 증진’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특히 유엔의 임무가 언급된 것은 ‘평화유지’라는 유엔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교육받은 대중여론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비차별 원칙

인종, 성별, 언어, 종교, 계급, 재산 등에 따른 차별 금지를 26조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는 않다. 이미 세계인권선언 2조에 그런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열거는 없더라도 교육에 있어 차별을 금지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나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하고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는 구절에서도 반복되는 점은 교육상의 차별금지이다.

교육에 대한 접근에서 정당화할 수 없는 요건을 금지하고 있는 것인데, 유일한 기준으로 언급된 것은 고등교육에서의 ‘능력(merit)’이다. 정부의 공식번역본에서 ‘능력’이라 쓰고 있지만, ‘장점’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 여기서의 능력 내지 장점이란 교육에 열중할 수 있는 능력인 것이지 과도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나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또한 “평등하게 개방되어야(accessible)”한다는 표현에서 나타난 ‘접근성(accessibility)'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1998년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임명한 교육권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접근성을 이렇게 해석한다:

접근성은 무엇보다도 이용가능한 공립학교에 대한 접근성이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비차별이다. 비차별은 즉각적으로 완전 보장돼야 하는 원칙이다.…장애아동의 경우 (법규정이 어떻다 할지라도) 학교 건물이나 교실이 그들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실제적으로는 배제되는 것이다…초등교육은 상품으로 취급돼선 안되며 시장이 실패하면 국가가 개입한다는 식으로 접근돼선 안된다.

무상-의무교육
의무교육의 전제는 ‘무상’이다. 무상교육이 아니라면 의무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선언에서는 “최소한” 초등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이는 다른 단계의 교육에도 미치는 것이다. 한 정부 대표는 초등교육만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무상이 아니라면 재능에 기초하여 평등한 접근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상이라는 전제에서 초등교육이 “의무”로 규정돼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 의무라 함은 국가가 무상교육을 보장할 의무와 그런 조건에서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의무를 방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무상’에 대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해석은 수업료 등 직접적인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안되고, 간접적인 부과(예를 들어 의무적인 기부금, 상대적으로 비싼 교복 착용 등)도 안된다는 것이다.

남아있는 문제들
교육은 ‘과정’이다. 이 과정 속에는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지는 사람 등 다양하며 때론 서로 갈등·대립하는 권리의 소유자와 의무자가 포함돼 있다. 교육권의 역사는 이들 다양한 행위자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공정한 균형을 취하기 위한 시도로 이뤄져 왔다. 세계인권선언에서 교육권에 대한 의사결정은 국가와 부모 사이에 이뤄지는 것으로 아동이 교육권의 주체라는 개념은 훨씬 나중에야 등장한다.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을 생각한다면 이들 관계 속에서 가장 약자의 처지에 있는 아동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이 요구된다.

또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자유권과 사회권의 도식적 구분이다. 흔히들 26조에 있는 교육권을 사회권으로 분류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전반부를 자유권으로, 22조부터의 후반부를 사회권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정신적 자유권의 하나이다. 교육권은 정신적 자유권을 바탕으로 하면서 사회권적 요소를 지닌다. 사회권으로서의 교육권은 국가가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무상의 비종교적 공교육을 조직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교육권과 현대적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이 구별되는 이유가 이러한 사회권의 요소이다. 교육은 돈이 있는 자가 자기 돈을 내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이라고 이해되던 시대에는 교육의 ‘자유’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권은 국가에 대해 의무교육의 실시나 교육시설의 정비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돈이 없는 사람도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국가가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하는 것까지 당연히 그 권리 속에 포함한다. 이런 국가 활동 없이는 현대의 공교육이 성립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불간섭과 적극적인 국가 행동 둘 다를 요구하는 주장의 결합이 세계인권선언의 26조에 나타난다. 정신적 자유권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권은 자유의 실질적 보장을 위한 측면에서 국가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지, 정신활동에 대한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유권 또는 사회권 어느 한편으로 교육권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교육권은 흔히 인권 중의 인권으로 얘기된다. “교육은 여타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에 교육권을 넣을 때는 ‘자명’한 것으로 합의했지만, 실천에서는 자명하지 않은 교육권의 열쇠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조항

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을 통하여 그리고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25조 ① 모든 사람은 식량, 의복, 주택,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실업, 질병, 장애, 배우자와의 사별, 노령, 그 밖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다른 생계 결핍의 경우 사회보장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② 모자는 특별한 보살핌과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어린이는 부모의 혼인 여부에 관계없이 동등한 사회적 보호를 향유한다.

 

인권이 밥 먹여주냐? 혹은 자유가 밥 먹여주냐? 이런 물음은 인권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스스로 묻게 되거나 혹은 자주 듣는 질문 내지 원망이다.

“인권은 아침밥과 함께 시작된다”라는 말로 인권을 옹호한 사람이 있었는데, 여기서 “아침밥”으로 표현되는 인권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돈 주고 사고팔아야 하는 상품으로 여기는 세상살이 속에서 그런 상품을 살 돈이 없어서 그걸 누릴 수 없다면, 즉 ‘아침밥’에 대한 권리를 얘기하는 것이 인권일 수 없다면, 우리는 ‘인권은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 자유는 밥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른바 아침밥에 대한 권리, 경제사회적 인권을 기본적 인권으로 주장한 어느 학자는 홈리스(the homeless)를 예로 들어 이렇게 말했다. “여러 날 먹을 것 구경을 못하고, 입을 옷이 없어 쓰레기봉투를 엮어 옷을 대신하고, 당뇨병이 진행되고 있는데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누릴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너무나 ‘기본적’이기 때문에 의․식․주와 의료는 모든 사람이 나머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합당한 요구이다.”

그럼 세계인권선언에서는 뭐라 말하는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대한 권리, ‘적합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인권이라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 아플 때 치료받을 것 등이 인권으로 포함돼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인권은 ‘밥’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인간생활에 ‘기본적’인 것을 누릴 수 있는 권리라는 얘기다.

사회보장을 권리로 보장하기까지

선언의 다른 조항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조항의 직접 배경이 된 것은 나치즘의 경험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1919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과 대공황의 여파로 체제에 위협을 느낀 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에서부터 사회보장의 중요성은 점차 강조되는 과정에 놓여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1940년 여름 정책적으로 “노인, 정신질환자, 불치병자,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이들’은 특별기관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죽었다”(전쟁범죄에 관한 유엔 보고서 중에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 싸울 기력이 더 이상 없다면 이 투쟁의 세계에서 생존할 권리는 끝난다“(히틀러의 『나의 투쟁』중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 특히 경제사회적 권리의 보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전후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치즘과 같은 악몽이 언제든지 재발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인권의 존중, 대규모 실업과 빈곤으로부터 인간생활을 지켜내는 것(루즈벨트 미 대통령의 이른바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에 해당한다)이 ‘나치즘과의 전쟁’ 수행과 전후 재건을 위한 이념으로 등장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생각한다면, 인간을 존중한다면, 기본적인 생존권을 인권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각광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생존권을 구체화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에 동의를 표시한 국가 대표들의 생각이 한결 같았던 것은 아니다. 선언을 기초할 당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 대부분이 헌법에 주거권과 의료권을 보장하고 있었다면, 북대서양 국가들 중 어디도 이들 권리를 헌법에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 국가들은 전통적 인권과는 분명히 다른 이들 ‘새로운’ 권리들을 인권으로 채택하는 데 주저했다. 국가가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획득할 기회’를 보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사회보장의 필요성은 인정했지만 그것에 대해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거나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길 두려워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이들 권리를 요구한 측에서는 경제사회적 권리는 19, 20세기에 인류가 성취한 사회진보의 결과이며 보편적인 생각이 되었다고 강조했다.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야 할 근본적 권리이기 때문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정의의 이념과 합치된다고 했다.

결국 선언에는 ‘사회보장’의 의미가 무엇인지 누가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얘기는 없다. 선언을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의 문제는 언급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또한 ‘사회보장’이라는 단어는 그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거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사회보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타내는 구체적 목록과 함께 있어야 그 의미가 규정된다. 선언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의식주,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뿐이다.


최소화, 간략화가 낳은 결과

선언 내에서도 22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과 25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의 의미가 다르다. 22조의 사회보장은 막연하지만 넓은 의미의 권리(“인간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를 말한다면, 25조의 사회보장은 실업, 질병, 장애, 노령 등의 특정 상황에서 인간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걸 고려할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최소한의 예시’일 뿐이다. “인간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회경제적 권리가 무엇이며, 그걸 보장할 수 있는 경제사회체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집행할 수 있는지는 각국의 재량 사항에 남겨진 것이다. 이 부분을 조금이라도 구체화하려는 제안들은 ‘“거짓된 희망”을 불러일으키지 말자’거나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다’는 제지를 받았다.

이에 선언 22조에는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라는 표현이 있다. 이 표현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제공받을 수 있는 곳에 대해 상대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권리를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나 국가에서 제공할 수 있는 것에 국한한다면 다른 곳에선 먹을 것이 넘쳐나고 있는 한편에서 식량에 대한 인권 없이 굶어죽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국제협력”을 언급한 것은 사회권이 국제적 권리라는 의미이다.

‘막연한’ 용어 대 ‘구체적’ 용어의 대결은 결국 ‘막연한’ 용어의 승리로 끝났다. “싸고 접근 가능한”, “특히 빈곤층 또는 노동자에게 적절한”,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는” 식으로 조항을 만들자는 주장은 지금 선언에 쓰인 용어대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면 충분하다는 주장에 용해됐다. 또한 주거권, 의료권 등 구체적인 각각의 권리에 대한 조항으로 하자는 주장은 간략하게 ‘합치자’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런 간략화와 합치기의 폐해는 크다. 인간생활에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권리들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로 수렴되는 듯한 인상을 줄 뿐 아니라 사회복지․의료 등에 대한 권리들이 공적(公的) 부조를 중심으로 한 좁은 의미의 사회보장으로 축소돼버린 것이다. 예를 들자면 주거에 대한 권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간다운 주거를 누릴 권리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그렇지 못할 경우 자선이나 구제 수준의 도움을 받을 정도의 권리가 돼버린 것이다. 인간다운 집에 대한 권리를 가지는 것인가, 집이 없을 경우 쉼터 등에 수용되거나 약간의 보조비를 받을 권리를 가지는 것인가의 차이는 크다. 사회보장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달린 것이지 이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취급될 수는 없다.


사회보장권과 구빈과의 근본적 차이

이처럼 선언에서 아무리 소극적인 의미를 띤다 할지라도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이전 시대의 구빈이나 자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빈차원의 사회부조에서는 수급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베풀어준다는 은혜성과 그에 따른 굴욕적 조건을 달았다면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은 다르다. 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세계인권선언에서의 표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생활 곤궁이나 불능 상태를 전제로 사회보장의 권리가 인권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권리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에 수급자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전적으로 국가의 공적 부담에 의해 이뤄지는 게 그 성질상 당연하다. 그리고 권리이기 때문에 구빈의 차원을 벗어나 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고, 사회는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인간 존엄성’과 ‘인간의 자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시혜를 이유로 여타 인권에 대한 국가 개입을 맘대로 강화하게 한다든가, 자유와 교환하자는 식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이행하기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활동할 의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의 어디까지나 정의의 원칙에 부합돼야 하며, 국가의 적극적 활동이 여타의 기본권 침해를 합리화할 근거는 될 수 없다. ‘자유가 밥 먹여주냐’가 아니라 ‘자유가 밥 먹여준다’가 맞는 말일 것이다. 사회보장의 이행에서 충분히 예상 가능한 국가 개입의 강화가 여타 인권의 침해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는 방패막이는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 자유의 강화이다.

인간은 서로 의존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서로 연대해야 한다. 이러한 사회적 연대를 권리로 표현한 것이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사회적 연대를 이해하는 방식을 둘러싸고도 상부상조의 미덕을 강조하는 소극적 해석에서부터 국가의 의무를 강조하는 것까지 다양한 입장들 사이의 충돌이 존재하고 있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17조

1. 모든 사람은 단독으로는 물론 타인과 공동으로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세계인권선언 17조, ‘재산권’ 조항은 읽는 이들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재산을 인권으로 인정한다고? 그러면 재산 많은 사람에게 눌리는 다른 인권은 어떡하란 말이야?” 혹은 “재산권은 세계인권선언도 보증하는 당연한 인권인데 왜 인권 운운하는 사람들은 재산을 가지고 그리도 못마땅해 하는 거야?”, 이렇게 서로 다른 식의 이해 또는 오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계인권선언 17조는 불친절하다. ‘재산’이 ‘무엇’인지를 얘기하지 않고 ‘재산권’을 얘기하고 있고, 재산을 ‘단독’으로 가져도 ‘공동’으로 가져도 괜찮다고 하니 안 해도 그만, 해도 그만인 말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선언을 기초한 사람들의 생각은 과연 어땠을까? 17조를 구성하고 있는 생각을 크게 세 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재산의 소유는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둘째, 재산은 단독으로뿐만 아니라 타인과 공동으로 가질 수 있다. 셋째,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않는다. 이 세 요소를 차례로 살펴보자.

재산의 의미

재산의 소유를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것으로 여겼지만, 선언은 재산이 무엇인지를 말하지 않는다. 선언을 만든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생각은 논쟁 중에 계속 변했다. 처음에 인권으로서 생각한 재산의 의미는 공익을 침해할 수 있는 ‘사적(private) 소유’가 아니라 ‘개인적 (personal) 소유’였다. 즉 사는 집, 소지품, 가구, 프라이버시를 보장받는 통신 등에 대한 개인의 소유를 생각한 것이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소유자가 될 권리를 인권으로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선언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처음 논의를 시작할 때 다뤄진 문구는 ‘존엄한 삶과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에 대한 권리’를 재산권으로 봤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최소한의 개인 재산을 가질 권리를 갖는다고 본 것이다. 그 결과 지금의 조항 이전에 중간 채택했던 조항의 문구는 “모든 사람은 존엄한 삶에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개인과 가정의 존엄성 유지를 돕는 그러한 재산을 가질 권리를 가지며, 이를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곧 흔들리게 된다.

여러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개인적 재산의 개념이 나라마다 다른데,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필요나 최소한의 재산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의 개인 소유를 기본적 권리로 봐야 하느냐? 이런 문제 앞에서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를 재산으로 보는 것은 너무 막연한 표현이라 비판받았다. 인간의 존엄한 삶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재산권을 정당화하는 것이 막연한 반면에 개인 재산 외의 다른 종류의 재산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선언 기초자들은 물질적 재화를 생산해내는 경제체제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냐를 생각하게 되자, 의견이 대립되는 건 당연했다. 재산권을 앞서 말한 개인의 소유에 국한하는 것은 협소하다는 지적과 함께 이윤창출 기업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등의 여타의 재산권도 포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 소유와 사적 소유 둘 다를 재산권으로 인정하는 걸 반대했다. 개인의 소유가 생산방식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일부 사람은 엄청나게 소유하는 반면 다수를 착취하고 굶주리게 하는 일은 나쁜 것이고, 광산․운송서비스․은행 등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 일이니 개인의 소유와 사적 소유는 다르다고 했다. 더 나아가 국가 경제 전체의 부에 대한 동등한 몫을 요구할 권리, 기업의 이윤에 대한 몫을 요구할 노동자의 권리를 재산권이라 주장했다.

이런 대립 속에서 선언 기초자들은 경쟁하는 경제체제에 대해 뭔가 말해야 하는 곤란에 부딪쳤다. 당연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인권선언이 어떤 체제도 배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서로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단독’으로나 ‘타인과 공동으로’

그래서 선언은 “단독으로는 물론 타인과 공동으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라고 말한다. 어느 하나가 아닌 둘 다를 허용하는 혼합 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단독”이라는 말은 개인 소유와 사적 소유 둘 다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당시 소련은 우려를 표했다. 그래서 “그 재산이 위치한 국가의 법률에 따라서”를 덧붙이자고 주장했다. ‘단독’이냐 ‘공동’이냐의 소유형태의 선택을 국가가 할 수 있어야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가능성을 불허할 수 있고, 그래야만 사회주의 체제가 세계인권선언에 의해 배제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단독으로”란 말은 개인적 재산에 대한 권리뿐만 아니라 기업에 대한 사적 소유도 포함하기 때문에 사회주의식 경제 방식을 배제한다고 봤다. 선언의 취지를 따져보면 ‘단독’의 소유가 사적 소유만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지만 그것을 포함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이에 영국과 미국은 국가가 자본주의를 불법화하고 사적기업소유를 금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소련안을 반대했다. 개인소유냐 공동소유냐를 결정하는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이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소련의 제안대로 하면 선언과 같은 보편적 문서에서의 재산권이 무의미해진다고 했다. 다른 여러 국가들도 국가 법률을 언급하면 선언의 도덕적 탁월성이 손상되고,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기존의 재산관련 법률을 승인하게 된다는 이유 등으로 반대했다. 결론적으로 “그 재산이 위치한 국가의 법률에 따라서”란 소련안은 거부되었다.

사유형태든 공유형태든 둘의 혼합이든 어느 쪽을 선호하든지 선언 기초자들이 ‘무제한적’인 재산 소유권을 옹호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재산권에 대한 ‘제한 요건’을 충족시킨다는 조건 하에서 자본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 간에 중도를 유지하려 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들조차 순수자본주의 체제란 게 설령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의 관점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언 기초자 중 그 누구도 시장의 자유로운 흐름이 인간 존엄성에 요구되는 재화를 전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선언 29조에 권리의 제한과 규제를 둔 이유이다.

한때 제한 요건을 17조 자체에 두느냐, 딴 조항에 별도로 두느냐도 또 하나의 논쟁거리였다. 결론은 별도의 조항인 29조에 “공동체에 대한 의무”,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란 제한에 모아졌다. 선언 29조에 있는 제한 요건이 재산권 조항만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재산권 조항이 그것의 구속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29조에 덧붙여 더 중요한 제한 요건은 노동권 관련 조항이다. 재산을 만들어내는 노동자의 권리에 의해 기업의 재산권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 기초자들은 분명히 인식했다.

재산을 무엇으로 보고, 어떤 재산에 대해 얼마만큼 제한을 두어야 하느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논쟁이다. 한 예로, 세계인권선언을 모태로 한 양대 국제인권규약(약칭 자유권 규약, 사회권 규약)에는 재산권 조항이 없다. 그 이유는 재산권은 인권이 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 아니라 재산권을 어느 정도 어떻게 제한해야 하는가에 대해 국가들이 합의할 수 있는 기준을 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의적 박탈 금지

재산권에는 재산을 획득할 권리와 재산을 획득한 후에 그것을 이용하고 향유할 권리가 포함된다. ‘자의적 박탈 금지’는 획득한 재산에 대한 사후 보호를 말하는 내용이다. 여기서 논쟁의 핵심은 ‘자의적’이란 단어의 의미이다. ‘불법적’이란 단어를 더 선호하는 의견이 있었지만 거부됐다. 선언 기초자들은 ‘자의적’이라는 것이 곧 ‘불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국가는 법률로써 얼마든지 자의적일 수 있기 때문에, 법률로 행해진 일이라 할지라도 모두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재산의 박탈은 자의적인 박탈과 법률에 의한 박탈 둘 다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며, 자의적이란 말은 불법이 아닌 오히려 불의하고 정당하지 못하다는 의미로 이해됐다.


모아 읽기

선언에서 재산권 조항만 따로 떼어서 읽는 것은 안 될 일이다. 다른 권리들과 마찬가지로 재산권 조항은 홀로 있는 ‘섬’이 아니라 다른 여러 권리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권리이고, 그것이 위치한 더 큰 맥락 속에서 살펴봐야 할 권리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권 등 경제사회적 권리의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재산권 조항은 선언에서 자유권과 사회권으로 구분되는 권리군의 중간에 놓여있다. 어떤 국가는 재산권을 자유권으로 읽고, 어떤 국가는 모든 사람의 생명, 노동, 주거, 교육, 의료 등에 관계된 권리와 같이 고려하지 않으면 재산권을 권리로 고려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 그래서 국가의 자의적 개입이나 간섭을 배제하기만 하면 보장될 수 있는 권리로 재산권을 바라보는 국가가 있는 반면에,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의무가 요구되는 사회권으로 취급하는 국가가 있다.

유엔은 어떤 식이냐 하면, 재산권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이란 주제 속에서 다뤄왔다. 그 속에서 주된 논의는 재산권을 여타 인권과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재산권에 대한 논의를 돕기 위해 90년대에 독립전문가(Mr. Uis Valencia Rodriguez)를 임명한 일이 있다. 그는 유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개인의 사적 소유를 보편적 인권으로 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는 “사적 소유의 이용은 소수의 손에 생산수단의 집중을 촉진해왔을 뿐 아니라 소수가 무제한으로 부를 축적하게끔 했다. 이는 엄청난 부의 소유자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 간의 계급 분화의 근본원인이다. 집단적 재산이 이런 결점들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 왔으며 재산의 사적 이용은 국가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지금껏 알려진 어떤 경제체제에서도 절대적으로 사적인 생산수단의 소유 현상은 결코 없으며, 공공의 이용․안보․건강보호 등의 필요성에 법으로 제한돼왔다”고 말한다.

이처럼 선언의 기초과정에서 불거졌던 문제들은 여전한 논쟁거리이다. 눈에 보이는 명시적 문구는 없지만, 인간의 존엄성 실현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를 누릴 권리로서의 재산권이 17조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7. 3. 7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글 싣는 차례

1) 탄생의 배경과 한계, 2) 논쟁조항 살펴보기-재산권 조항, 3) 논쟁조항 살펴보기-사회보장권 조항, 4) 논쟁조항 살펴보기-교육권 조항, 5) 논쟁조항 살펴보기-노동권 조항, 6) 그 밖의 문제들

달력을 틈틈이 살펴보는 것은 보통 사람들의 흔한 습관이다. 올해는 휴일이 며칠이나 되는가를 헤아리기 위해, 또는 오늘은 무슨 특별한 날인가 알아보려는 등의 이유로 말이다. 그렇게 달력을 훑다보면 12월 10일에 ‘세계인권선언 기념일’ 또는 ‘인권의 날’이라 적혀있다. 한국 사회에선 오랫동안 이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인권대통령이니 인권경찰이니 국정지표니 하는 것들에 ‘인권’이 바쁘게 등장하면서 약간은 주목받는 날로 변한 것 같다. ‘유엔에서 세계인권선언이란 걸 만든 날이어서 인권의 날로 기념한다’는 요지의 기사와 인권특집이 해마다 등장하기 때문일 것이고, 각종 기관과 단체들의 ‘인권’자 붙은 포상과 기획행사들이 많이 열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세계인권선언’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인권을 존중하고 실천하는 일에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지식이 전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인권을 헤쳐 나가는 길에서 세계인권선언을 맞닥뜨리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것은 현대 사회의 인권 논의에서 가장 기초적인 문서이기 때문이다. 가보지도 못한 곳의 지명을 듣고 ‘아, 거지 좋지’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꼭 집어서 무엇이 좋은데요?’라고 물으면 얼버무리듯이 ‘세계인권선언’이 전 인류가 소중히 여겨야할 공통의 기준이라고 떠받드는 사람에게 ‘왜 무엇이 그런데요?’라고 물으면 어떤 대답을 얻을 수 있을까? 세계인권선언에 대해 그간 우리에게 친숙한 것은 그것에 대한 찬사와 반복적 인용이지 비판적 분석은 아니다. [세계인권선언 뜯어보기]를 통해 우리 시대 인권의 허술하고 빈약한 부분을 찾아내고 생략된 부분을 복원하고 암시된 부분을 명확히 해보는 건 어떨까?


살육과 야만의 경험, 선언의 기초

인류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전쟁으로 알려진 2차 대전의 살육과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권침해가 인권선언 기초의 주인공이었다. 전후 국제질서의 판을 짜는 열강의 입장에서 인권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이용하려 했든 간에, 선언을 기초할 당시의 국제 분위기는 인권을 소리 높여 강조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손에 피를 묻혔지만 유독 나치의 인권침해에 대한 비난은 강도 높았기에 ‘나치가 이런 짓을 했으니 그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뭔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대세였다. 인권의 인정이야말로 나치즘의 복귀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전쟁수행과 전후 재건을 위한 이념으로 등장했다. 그 일환으로서 새로 만드는 국제기구인 유엔이 강한 이빨을 가지기를 바랐다. 인권을 말로만이 아닌 이행과 실현의 장치와 결합된 것으로 요구했다. 그래서 국제권리장전을 유엔헌장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국제적 요구가 거셌다. 이런 장치가 조금만 더 일찍 있었더라면, 파시즘과 나치즘이 아직 미약했을 때 전쟁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야만적 행위의 재발을 막기 위한 장치로서 인권을 높이 치켜세웠다. 여기에는 인권을 부인하는 정부들에 대해 인권의 이름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시각이 깊이 배어 있었다.


왜소해진 선언, 의외의 결과 낳아

하지만 계산된 명분과 실천은 다른 것이다. 선언을 만드는 과정 초반의 대부분은 ‘조약’을 만드느냐, ‘선언’을 만드느냐는 논쟁으로 시간을 보냈다. 대부분의 대표자들은 국제권리장전이 ‘조약’이어야 한다고 느꼈고, 당시 유엔 회원국 중 소국들은 단순한 권고나 결의안이 아닌 큰 국가나 작은 국가를 똑같이 구속하는 조약을 원했다. 하지만 두 강대국, 미국과 당시 소련은 이행장치 없는 선언 또는 원칙들을 담은 성명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반대의 이유는 서로 달랐다. 미국이 권리를 갖는 것과 그것을 이행하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라고 하면서 ‘선언 먼저, 조약은 나중에’를 주장했다면, 소련은 ‘몇 개 국가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언기초위원회가 국제권리장전의 이행문제까지 고려할 권위를 가질 수는 없다’는 점에서 반대했다.

또한 조약을 제쳐두고 선언부터 만들게 되자 차 떼고 포 떼고 추상적 원칙만을 나열하려는 시도가 거셌다. 애초에 국제 ‘조약’이 아닌 ‘선언’이라는 형태 자체가 이행장치는 떼어놓고 논의를 시작한 것인데, 자기에게 껄끄러운 문제는 최대한 간략화하거나 독자적인 조항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려는 실랑이가 미소냉전의 분위기 속에서 이어졌다. 그 결과물은 아름다운 합의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선언에는 8개의 기권표가 있는데 그 주요 이유는 선언이 너무 앞서 나갔기 때문이 아니라 충분히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성과가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1948년 12월 10일, 이행장치를 제쳐둔 선언의 채택은 결과적으로는 선언의 장점이 됐다. 부담 없이 채택된 선언은 이후 2백여 개가 되는 국제인권선언, 국제조약, 선택의정서, 헌장 등의 탄생을 자극했고 많은 나라의 헌법에 인용됐다. 이행의 부담을 떨쳐놓고 만들었기에 어찌 보면 만들 수 있었던 선언이 불러온 결과이다. 하지만 국가들 편에서 겹겹의 안전장치를 갖춘 것이 국제인권조약들의 전형적인 양상인 점을 극복하는 것, 효과적인 인권의 이행장치를 만드는 것은 선언 이후에 계속돼온 과제이다.


인권에 관한 ‘보편’ 선언이었나?

한국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이라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상은 ‘보편(universal)' 인권선언이다. 세계 공통의 보편적인 가치가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선언을 만들기 전에도, 만드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논쟁이다.

하지만 분명히 지적할 수 있는 한계점은 있다. 나치즘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선언을 기초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한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1914년 레닌의 거친 계산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식민지에 살고 있고, 이를 합하면 세계 영토의 3/4에 해당’했다. 이 계산은 1940년대 말까지도 대략 들어맞았다. 선언을 기초하고 채택할 당시 유엔회원국의 수는 58개국이었고, 유엔인권위에 속한 국가는 18개국, 선언기초위원회는 처음 3개국에서 나중에 8개국이었다. 회원국 58개국 중에서 아메리카의 21개국이 전체의 36%, 16개국의 유럽이 27%, 14개국의 아시아가 24%, 4개국뿐인 아프리카는 겨우 6%를 차지했을 뿐이고, 3개국의 남태평양 제도가 5%였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이 아주 불충분하게 대표됐음을 보여준다. 

선언 기초 과정에서 식민지 민중의 인권에 대한 언급이 빠졌다는 주장은 식민지 종주국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식민 체제하에 사는 민족들 속에 생겨난 분노와 절망의 감정을 전혀 모른다”는 비난과 그에 대한 반발 끝에 선언에는 ‘식민지’라는 표현이 아닌 ‘비자치지역, 그 밖의 다른 주권상의 제한을 받고 있는 지역’이라는 에둘린 표현이 등장할 뿐이다. 이런 이유로 일부 학자들은 “인권이 보편적인 위치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적 실재와 모순된다”고 비판한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 유엔이 창설한 회의는 서구에 의해 지배됐고, 세계인권선언은 대부분의 3세계 국가들이 여전히 식민통치하에 있을 때 채택”됐으니 선언은 “제한된 적용성”만을 가질 뿐이라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채택 50주년이 되던 해에 유엔회원국 수는 채택 당시보다 3배가 늘어났다. 이들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인권 요구를 실질적으로 고려하느냐 아니냐가 오늘날 선언의 적용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것이다.

또한 선언을 기초할 당시의 58개국에만 국한한다 할지라도 그들 간의 차이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37개국이 기독교전통을 배경으로 했고 11개국이 이슬람, 6개국이 사회주의, 4개국이 불교를 배경으로 했다. 서로 다른 문화․종교․경제․정치 체제 속에서 수용될 만한 답을 찾는 일은 ‘막연하지 않게, 하지만 모든 체제를 포괄할 정도로 유연하게’란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다. 이 조건은 오늘날 우리가 선언을 읽을 때 써야 하는 안경일지도 모른다.


진보적 선언은 거짓 희망을 불어넣는다?

세계인권선언은 분명 시대의 산물이다. 전후의 사회경제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권리, 교육권, 사회보장권 등 ‘새로운’ 권리를 반영하면서는 ‘급진’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극히 신중을 기했고, 여성이나 가족생활에 관련된 내용에서는 보수적 사회기조를 반영하고 있다. 조약기초과정을 보면 조금 ‘센’ 의견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불러일으키지 말자’며 제지하는 의견이 강력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수정돼야 할 점이 많고 실제로 이후의 국제조약에서는 변화된 내용들이 많다.

예를 들어 성차별적 언어가 있다. 1조에는 ‘형제애의 정신으로’라는 표현이 나오고 노동자와 가족생활에 대해서는 노동자를 남성형으로만 지칭하고 있다. 이 구절은 한 가족의 임금을 남성가장이 버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유엔 여성지위위원회’의 지적으로 성차별적 언어를 제거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애초 “모든 사람”(all men)으로 시작하는 초안에 대해 여기서의 사람(men)은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에 관한 역사적 반영이기 때문에 고치자는 제안조차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뜸을 들여서야 “모든 사람”(human beings)이 되었다. 또한 사형제 폐지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인정 등의 새로운 제안들은 깊이 논의되지 않았다.


인권은 액자 밖으로 뛰쳐나온다

사람들은 간직하고 싶은 좋은 것은 좋은 액자에 넣어두는 습관이 있다. 그럼 인권은 어떨까? 좋은 액자에 넣어 두고 우러러볼 수 있는 그런 것일까? 물론 세계인권선언처럼 일종의 액자에 담긴 인권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인권은 그 속에 얌전히 있지 않고 뛰쳐나오는 경우가 많다. 현재의 규범이 무시하고 있는 부자유하고 불평등한 면이 언제나 그 규범을 돌파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권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기에 생명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세계인권선언에서 주요논쟁이 벌어진 조항을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03 호 [기사입력] 2014년 08월 14일 14:34:4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고 싶다. 음악애호가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문외한이다.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는 손길 같은 그의 연주에서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앉은키가 첼로 크기와 같은 작달막한 그 연주가의 말을 새삼 크게 떠올리고 싶어서이다.

‘첼로의 성자’로 불리는 그는 훌륭한 예술인일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인류의 양심의 문제”라는 인간애의 소유자였다. 자기 조국에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저항의 표시로 10년간이나 연주를 하지 않았다. 또 독재정권을 돕는 어떤 나라에서도 연주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거리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후 무대에 올리기까지 12년간을 매일 밤 연습했다고 한다. 그의 연주가 그런 각고의 인내와 노력에서 나왔듯 인간 존엄성에 대한 헌신도 말이 아닌 삶으로 표현됐다. 그래서 인간 존엄성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면 나는 그의 말을 우선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우주의 새롭고 진귀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 순간은 전에도 없었고 다시 오지도 않을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나? 2+2는 4이고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라고 가르친다. 우린 언제야 그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가르칠 것인가? 우리는 아이들 한 명 한명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의 존재가 무엇인 줄 아니? 너의 존재는 놀라운 거야. 너는 유일한 존재야.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 너와 똑같은 아이는 없었단다. 그렇다. 너는 경이로움이다. 그러니 네가 자라서 다른 사람, 너처럼 경이로움인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겠니? 너도, 우리 모두도 이 세상이 아이들에게 값진 것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만 한다.”

요즘 감정을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우울, 슬픔, 분노, 무력감, 공포 등이 범벅이 돼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인지 느낄 수 없는 상태인 것 같다. 거리에서 굶을 뿐 아니라 모욕당하는 사람들, 그 고행에 동행하는 사람들이 눈시울을 자극한다. 그 고행을 모욕하고 해꼬지하려 달겨드는 사람들이 피를 거꾸로 돌게 한다. 군대에서 기업에서 학교에서 국경 너머에서 꼬리를 무는 인권침해의 사건들이 마냥 손을 비비게만 한다. 대통령부터 일선 경찰까지 무시와 통제에는 일사분란한데 거기에는 따져볼만한 목적도 가치도 없다. 그들의 영혼 없는 말과 표정에 지친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괴물’로 지목하고 한껏 비웃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으론 헛헛할 뿐이다. 이 비극을 이용해 선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다. 비평가와 선동가엔 물린지 오래고 우리에겐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감정’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으로 돌아가라’가 가장 무지막지한 선동이 아닌가 싶다. 우린 사람이고 싶다.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 삶의 근본을 확인하고 싶다. 막말과 괴물이 넘치는 혼돈 속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인간인가, 인간으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 인간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를 말이다.

지금 ‘아무개들’이 우리에게 인간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가 나눠야 할 말과 감정을 가르쳐주고 있다. 거리에 나와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고 있다. 말도 듣지 않고 문서도 읽으려 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지키려 하고 있다. ‘존엄성이 아니라 돈을 숭배하련다. 차별하고 싶다. 고문하고 싶다. 배척하고 싶다. 정치가 아니라 폭압을 하고 싶다.’ 이제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에 맞서 아무개들이 움직이고 있다. 아무개들 앞에서 누구의 말마따나 “초조해하는 것은 죄”이다.

“(씨랜드 사건)당시 한 신문은 우리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은 대형 참사 가운데 재발가능성이 가장 높은 참사 유형으로 ‘씨랜드 화재’를 꼽은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그 ‘예언’이 얼마나 과학적이었는가를 참담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99년 씨랜드 참사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나온 10여 년 전 인권단체의 논평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막내가 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러한 참사로 가족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안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막내가 되고 싶습니다.”
세월호 유족 대책위 대변인의 말이다. ‘예언’을 바꾸자고 희생자들이 이렇게 절절한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외면한다면, 예언을 실현하려는 고사 지내기가 될 것이다.

‘국가개조’니 ‘이순신이 되라’는 식의 주문 말고 구체적인 이들의 구체적인 호소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거리에서 아무개들이 외치는 호소가 그 구체적인 내용이라면 원칙의 틀을 보여주는 기준이 있다. 인권에서의 그것은 ‘세계인권선언’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역사는 대한민국 건국과 건군의 역사와 같다.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군대가 연륜이 같은 세계인권선언과 발맞춰 가고 있느냐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정 60주년을 맞은 지난 2008년, 세계의 인권전문가들이 위촉받아 <존엄성 지키기: 인권을 위한 의제>를 만들었다. 의장은 제1대 유엔인권최고대표를 지낸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이 맡았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들은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이라 알려지게 됐다. 이 존엄성 지키기 의제 만들기는 스위스 정부가 발의하고 노르웨이, 브라질, 카타르 등 여러 나라가 후원했다. 위원단이 만든 ‘인권 지키기 의제’에 기초하여 8개의 핵심 연구 프로젝트가 착수됐고 각 주제마다 두툼한 연구 보고서가 발간됐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것은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구였다(이 연구보고서의 내용은 다른 기회에 소개할 계획이다).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이 작성한 보고서는 현 시대 인권 과제에 대한 큰 줄기를 담은 것이다. “무력함, 모욕, 비인간화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의 핵심적 차원”이란 지적에서 한국 사회가 지금 겪는 고통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에 대해 “약속을 지키려는 정치적 의지의 결여가 핵심문제”라는 진단은 우리가 일찌감치 내린 진단이라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령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깊숙이 자리 잡은 열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발생하건 동료 인간으로부터 발생하건, 폭력의 명백한 원인들이 잘 통제되는 사회에서 살 때에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안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대신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의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방적으로 맞서는 것”이라며 “조기 행동 전략”을 제안하고 있다.

견실한 진단과 대책이 늘 선동과 모략보다 외면 받는 것이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의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은 지금 우리 눈앞에 아무개들로 꾸려져 있다.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감정을 나누는 속에서 우린 공동의 책임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의 보고서(Report of the Panel on Human Dignity, 2008)

1. 위기의 인권
우리는 뭐가 인권이며 뭐가 국가의 의무인지를 안다. 우리는 또한 인권이 체계적으로 침해되고 무시되며 이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 인권에 대한 높은 열망과 인권현장의 심각한 현실사이의 격차, 정부의 원대한 수사학과 그 약속을 지키려는 정치적 의지의 결여간의 격차가 핵심 문제이고, 이 격차를 메우는 것이 우리 시대의 도전이다. …

2. 인간 존엄성
… 인간 존엄성의 개념은 인간 존재의 특질로서 보편적인 개념이다. 정말로 존엄성 개념은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며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과 더불어 유엔의 핵심 조약과 주요 지역별 인권기구들은 인간 존엄성 개념위에 서있다.
인간 존엄성이 모든 인권에 도덕적‧철학적 정당성을 제공하긴 하지만, 오직 특정한 인권만이 인간존엄성의 개념과 직결된다. 인간존엄성을 위협하는 전형적인 사례는 빈곤과 기아, 제노사이드와 인종청소, 노예제, 인신매매, 고문, 강제 실종, 기타 형태의 자의적 구금, 인종주의와 유사한 형태의 차별, 식민주의와 외국의 점령과 지배이다. 무력함, 모욕, 비인간화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의 핵심적 차원이다. 현 인권의제는 인간존엄성과 직결된 인권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3. 공유하는 책임: 21세기의 접근
… 국제인권법에 따라 인권을 존중‧이행‧보호할 직접적인 국제적 의무를 갖는 것은 우선적으로 국가이다. … 이런 전통적인 인권법의 접근은 21세기 지구화된 세계에서의 인권에 대한 실제적 위협에 더 이상 부응하지 못한다. 비-국가 행위자들에 의한 인권침해가 늘어나는 많은 이유가 있다. 탈규제와 민영화의 정치가 정부의 힘을 침식하고 필수적인 정부 기능(교육, 건강 서비스, 물 관리, 사회보장, 안전과 치안, 감옥 행정 등)을 사기업에게 넘겨주고 있다.
… 따라서 국제법은 배타적인 국가 책임 모델로부터 공유하는 책임이란 21세기의 접근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공유하는 책임이란 무엇보다도 비-국가 행위자들도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제노동기준을 위반한 초국적기업은 직접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 또한 기업은 정부가 저지른 인권침해에 공모하지 말아야 한다. 책임에는 점진적 인권 이행을 목적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포함돼야 한다. 지역민이 굶주리고 극빈상태에서 살아가는 지역에서 기업이 사업을 한다면 그런 상황을 다뤄야할 책임이 있다. … 무엇보다도 극빈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지속적인 침해로 존엄성에 공격을 받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국제적 책임을 수립해야 할 때이다.

4.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 빈곤은 단지 운명인 것이 아니다. 빈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뿌리 뽑힐 수 있는 것이다. 빈곤은 지금껏 필수적인 인권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급격한 침해였다.
… 우리는 빈곤 퇴치의 목적을 단순히 자발적인 발전 목표가 아니라 부국과 빈국, 국제사회의 여타 행위자들 모두의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인권 의무로 바꿔야만 한다. 이런 의무는 헌법적 권리로건 보통 법률로건, 법원과 여타의 국가 기관이 국제기준을 적용하고 준수하도록 국가들의 국내법에도 마찬가지로 포함돼야만 한다.
이런 목적을 성취하는 한가지 방법은 발전과 빈곤 퇴치에 대해 인권에 기반한 접근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빈곤을 인권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이다. 즉 “적절한 영양을 취할 역량, 건강하게 살 역량, 의사결정과정과 사회적 및 문화적 삶에 참여할 역량 등 기본적 역량에 대한 인간의 권리에 대한 부정”으로서 빈곤을 보는 것이다. … 빈곤 정책 결정의 맥락 속에 권리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빈민의 역량강화가 발생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 빈곤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빈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또다른 방법은 법의 지배이다. … 법의 지배란 단지 형식적인 합법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 인격의 최고 가치에 대한 인정과 수용에 근거하고 인격의 최대 표현을 위한 구조를 제공하는 제도들로 보장되는 정의를 말한다. … 빈민은 잘 기능하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접근을 부인당하고 있다. 빈민의 재산권은 결여되고, 고용주들은 흔히 공식적인 시스템 바깥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빈민은 불안한 노동조건으로 고통 받는다. 빈민의 재산과 사업은 법적으로 무시되기 때문에 경제적 기회를 부 인당한다. 결과적으로 빈민은 신용, 투자, 지구적 또는 지역 시장에 접근할 수가 없다. … 민주주의 강화는 빈민의 법적 권한 강화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 빈곤의 실제적 상황을 다루기 위한 접근은 사회보장의 안전망을 만들고 예방 가능한 빈곤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방 가능한 빈곤이란 국가가 이미 쓸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피할 수 있는 빈곤을 말한다. … 국가는 모든 가용 자원을 사용하여 빈곤을 예방하고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철저히 조사하고 검토해야만 한다.

5. 공포로부터의 자유: 폭력 예방으로 인간 안전 강화하기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령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깊숙이 자리 잡은 열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발생하건 동료 인간으로부터 발생하건, 폭력의 명백한 원인들이 잘 통제되는 사회에서 살 때에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일부 집단은 타 집단보다 폭력에 훨씬 취약하다. 가령 여성과 아동은 남성보다 가정폭력의 훨씬 흔한 피해자이다. 노인이나 장애인은 폭력 범죄의 더 쉬운 표적이다. 외국인과 정치적‧인종적‧성적 소수자는 다른 시민보다 경찰 폭력에 더 자주 처하게 된다. 빈민과 홈리스는 자연과 환경 재해에 부자보다 더 취약하다.
… 그런 폭력의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방적으로 맞서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효과적인 조기 경고 시스템으로 다뤄야 하고 안전‧발전‧인권 의제의 일환으로 이용가능한 모든 범위의 장치들을 이용하는 조기 행동 전략으로 다루는 것이다. …

6. 기후 변화: 21세기 안전, 발전, 인권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지구적 도전
새로운 천년의 초입에 과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이 인간이 야기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여전히 논쟁 중이었다. 정치인들은 이런 의심을 아무 행동도 안 취하는 구실로 이용했다. 오늘날, 이런 논쟁은 물 건너갔다. 기후변화는 현실이고 인간이 야기한 것이라는데 압도적인 과학적 합의가 있다.
… 인류에 대한 이 중요한 도전은 천천히 인권담론에 들어오고 있다. 기후변화가 인권에 기반한 접근으로 다뤄져야 할 긴급한 필요라는데 몇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기후변화는 식량, 물, 주거, 재산, 건강과 생명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여 다양한 인권침해의 원인이 된다. 둘째, 기후변화는 평등과 지구적 사회정의에 관한 주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부유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인민들이 기후변화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반면에 그 결과로 가장 고통받는 것은 가난한 사회들이다. … 마지막으로 기후변화는 지구적 해결을 요구하는 지구적 문제이다.

7. 실현의 격차 다루기: 지구적 인권 문화를 향해
인권을 존중‧보호‧이행하겠다는 정부들과 국제 사회의 법적‧정치적 약속과 대조적인 현실 상황간의 실현 격차를 마감하는 것, 아니 적어도 상당히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긴급하다. … 우리는 기준 설정과 모니터링으로부터 진짜 실현으로 긴급하게 나아가야만 한다.
… 사법적‧비사법적 인권 이행 기구, 그리고 국가인권기구가 모든 국가에 설립돼야만 한다. 그리고 인권침해를 방지하고 맞서며 국제적 인권의무의 국내적 이행을 위하여 독립적이며 가능한 한 광범위한 수임사항을 가져야만 한다.
… 초국적 기업들은 인권을 존중하고 실현할 목적으로 명확한 표적과 기준점을 가진 행동 계획을 채택해야만 한다.
… 완전히 독립적인 세계인권법원(World Court of Human Rights)이 인권이사회의 관계기관으로서 모든 의무자에 대한 인권의 사법적 보호를 위임받아 창설돼야만 한다. 세계인권법원은 유엔의 보호하에 다자 조약에 의해 상설 법원으로 설립돼야 하며, 국가와 비-국가 행위자가 저지른 인권침해에 대한 제소에 똑같이 최종적인 구속력있는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가지며 인권피해자에게 적절한 배상을 제공해야 한다.

인권오름 제 403 호 [기사입력] 2014년 08월 14일 14:34:4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8. 12. 25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30조

이 선언의 그 어떠한 조항도 특정 국가, 집단 또는 개인이 이 선언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인권이란 말을 우리 사회가 흔히 사용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인권이 자주 거론될수록 인권을 해치는 권리의 주장도 커졌다. 오히려 그런 판이 더 커졌다고도 볼 수 있는 위험한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인권의 주장에 힘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인권을 차용하여 사익을 주창하거나 정치적 이익을 정당화하는데 써먹는 일이 그것이다. 시장중심적이고 시장우호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질서의 틀 속에서 기업 등이 권리의 주체임을 자임하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가 기업가의 권리와 대등하게 다뤄지는 것, 자유와 안전이 거래 가능한 것처럼 다뤄지는 것, 기업의 이익 주창이 권리 언어로 포장되는 것 등은 권리 주체를 혼동한 대표적 사례이다.

아무 권리나 인권의 목록에 오르지 않는다. 어떤 부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뭉쳐져 온갖 희생을 치른 과정을 통해서 인권은 만들어져왔다. ‘권’자를 갖다 붙임으로써 그런 과정과 정당성이 생략된 이익의 주장을 인권과 대등한 위치에 놓을 수는 없다. 가령 노동권은 그 자체가 기업가의 재산권이 무한정한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제약을 받아야만 한다는 필요성과 정당성 속에서 인정된 인권이다. 이런 노동권에 대응하여 기업가의 재산권의 일부의 행사에 불과한 경영권이니 하는 것이 인권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다. 노동권의 핵심요소인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에 맞서 기업주의 대항권을 얘기하는 것은 ‘권’을 막도장 새기듯이 위조하는 행위이다. 장애인의 교육권에 맞서 내세우는 재산권은 사실 ‘집값유지권’이란 건데 교육권이란 인권에 ‘집값유지권’이란 인권이 대응한다는 논리는 어디에서도 주장되거나 인정된 바가 없다. 기업의 제약 없는 기술 실험의 권리를 사상과 언론의 자유 논리로써 설파한다거나 기업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명예와 신망에 대한 프라이버시권’으로 방어한다든가, 제약과 의료산업의 연구권리가 건강권이란 인권을 위한 것이라는 둥 사회적 감시와 비판을 ‘인권’을 가장하여 벗어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인권과 물적 권리를 혼돈하고 인권의 주체를 사회경제적 권력자로 혼돈하는 일이야말로 인권에 대한 모욕이자 침해이다. 인권의 주체는 사라지고 인권을 도구삼은 자의 것이 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초국적 기업 등이 이런 식의 권리포장을 애용한다면 정치적 패권세력도 마찬가지다. 침략전쟁에 ‘인권을 위한 전쟁’이란 수식을 붙이고, 뭔가 고귀한 목적을 위한 것인 양 자국민과 세계인의 눈을 속이려 한다. ‘인권을 위한 전쟁’은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모순이다. ‘인권을 위한 식량지원반대’, ‘인권을 위한 의약품 봉쇄’ 같은 건 또 어떤가. 이런 일들을 우려하여 선언 30조가 있는 것이다.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특정국가, 집단 또는 개인”에게 없다고 했다.

선언에 보장된 모든 인권은 다른 인권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야지, ‘권’이라는 글자만 쏙 빼서 읽어서는 안된다. 선언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타인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일 시킬 때 적절한 휴식의 권리 보장, 굶주림에서 해방될 권리에 대한 의무를 자국정부만이 아닌 국제사회의 의무로 말하고 있다. 모든 인권, 특히 재산권은 이런 인권간의 관계 속에서 내재적 제약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인권을 해치는 인권은 인권의 주체들로부터 주체자격을 강탈하는 양식이다. 인권하면 흔히 혹독한 시련에 처한 피해자를 떠올린다. 피해자 또는 희생자는 구제 또는 구원받아야 한다. 메시아처럼 누군가가 인권을 주창하여 희생자를 구원하는 논리다. 이런 과정에서 인권의 주체는 주체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되고, ‘인도주의적’이란 수식이 붙은 온갖 간섭과 시혜의 대상이 된다. 어떤 철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안 입는 헌옷을 싸서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보내진 인권은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온다.’ 인권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보낸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인권은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발신자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돌아온 인권은 발신자가 입맛대로 주무르는 것이 된다. 인권의 주체들이 스스로 권리 찾기를 하려는 데는 신경 쓰지 않고, 희생자의 구원자 노릇을 하려는 데 쓰이는 인권은 권리를 침해하는 권리일 수 있다.

작성일자 : 2008. 12. 25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9조

1.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한다.
2.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존중을 보장하고,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 정당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에서만 법률에 규정된 제한을 받는다.
3. 이러한 권리와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반하여 행사될 수 없다.

29조는 선언에서 의무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조항이다. 인권에 대해 흔히들 하는 비판은 ‘권리만 말하지 의무는 말하지 않는다’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하는가를 잘 따져봐야 한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그냥 의무라고 할 때는 인권에 상응하는 의무가 아닌 엉뚱한 번지수의 초인종을 누르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가령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가 자기 의무를 말하지 말고 시민에게 법부터 지키라고 요구한다. 어린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면서 연장자에게 존대부터 하라고 요구한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처지의 사람에게 어떤 착취가 있는지를 얘기하지 않으면서 피해 당사자에게 네 처신부터 똑바로 하라고 요구한다. 이럴 때 의무를 말한다면 그건 음모가 있는 의무론이다. 의무의 번지수를 잘못 찾아서 청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진짜 의무자가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의무,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야

권리는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금지하고 규제할 수 있는 힘이다. 가령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국가편에 무상으로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할 의무를 수립한다.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국가기구와 관련 공무원이 고문이나 비인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를 하지 않도록 할 의무를 수립한다. 인권이 권리라고 할 때 권리에서 나오는 의무는 이런 성격의 것이다. 교육권의 주체가 인간존엄에 반하는 학교규율을 지킬 의무, 인신의 자유의 주체가 부당한 공권력에 복종할 의무 같은 건 의무란 말이 잘못 쓰인 것이다.

또한 권리에 따른 의무는 자유재량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제력 있는 의무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가 있다면 요구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특정 사람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정인이나 기구가 의무자로 지정돼야 의무가 성립된다. 사회보장의 권리에 따른 의무는 지자체나 정부가 져야 인권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상조회를 만들고, 아프거나 가난한 이웃을 방문하고 위로하고 원조하는 것은 자유재량이다. 이 경우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수행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복지권 주체의 권리에 대응하는 의무는 아니다. 반면 국가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자유재량이 아니라 의무이다.

권리는 소유하거나 주어지거나 상실되는 물건이 아니다. 국가가 교육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권리가 상실되는 게 아니고, 독재 권력이 고문을 애용한다 하여 고문 받지 않을 내 권리가 상실되는 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흔히들 비판하듯 인권을 보장하고 보호해야 할 국가가 인권침해를 저지를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권리의 주체가 바뀌는 게 아니고, 아무리 밥 먹듯 인권을 침해한다 해도 그것으로 국가의 의무가 면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리 주체가 지는 의무란 것이 착취에 대한 복종이고 악법에 대한 복종이겠는가. 권리주체의 의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빼앗기거나 왜곡된 자기 권리를 찾는 의무가 진짜 의무이다. 인권은 권리 중에서도 특별한 종류의 권리이다. 법적 권리 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도 갖는다. 실정법으로 보장될 뿐 아니라 실정법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이 인권이다. 따라서 법적 명령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실정법과는 다른 도덕적 명령도 내릴 수 있다. 인권의 주체는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인권에 따른 의무주체에게는 복종을 요구하지만 인권의 주인인 자기 자신에겐 인권침해에 대한 저항을 명한다.

의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돼야

앞서도 말했지만 세계인권선언의 기초자들 중 상당수는 국가의 의무를 선언에 명시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해서 의무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선언에 쓰인 구체적 권리들은 권리만을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국가의 의무를 겹쳐 입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선언 이후 의무의 구체적 내용들은 국제법전문가들에 의해 발전돼 왔다. 앞서 사회보장권과 관련된 조항에서 살펴본 최소핵심의무, 존중·보호·실현의 의무 같은 것이 그 사례이다.

의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될 필요성이 있다. 가령 국가의 보호 의무를 통해 간접적으로 기업의 의무를 물을 것인지, 기업 등을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제도를 만들 것인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에 필수적인 것을 무슨 권리로 주장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반면에 그런 권리에 대해 국가가 또는 다른 사회경제적 강자가 어떤 의무를 가져야 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가령 깨끗한 물에 대한 권리 주장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이 생존과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이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에 물에 대한 권리를 민영화하려는 정부에 맞서서 그리고 수익사업으로 여기는 물 회사에 맞서 그들의 의무를 정당화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무를 구체화하는 것이 인권에 대한 연구요 실천활동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럼 29조에서 말한 ‘모든 사람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뭘 말하는 걸까. 29조는 사회와는 단절된 이기적 개인의 권리라는 굴레에서 인권을 해방시켜 준 조항이다. 여기서 비판하는 개인주의는 ‘어떤 사람도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세상이 모두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개인주의하고는 거리가 멀다. 자기 이익의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 유능할 뿐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가치 같은 건 고려하지 않는 개인주의를 말한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면서 사람들은 소중한 개인의 가치가 이런 식의 이기주의로 오해되는 걸 우려했다.

공동체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국가에 대한 의무’로 오독해서는 안된다. 선언 기초자들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침해로부터의 보호를 염두에 뒀다. 한 대표자의 말처럼 “인간은 국가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가 기본에 깔렸다. 공동체와 국가를 동일시할 위험성 때문에 ‘민주국가’라는 표현도 쓰지 않고 ‘민주사회’라는 표현을 택했다. 따라서 공공질서, 일방의 복지 등 29조에 따른 권리제한의 조건규정들도 이런 전제조건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국가가 공공질서의 이름으로 자행한 범죄가 많았다는 것을 우려하면서 국가가 이런 문구를 이용해서 자의적 조치에 사로잡힐 것을 선언 기초자들은 우려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29조를 봐야 한다.

선언의 목적은 이기적인 개인의 성취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진보를 증대하기 위한 것이다.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라 한 것은 개인은 인격을 사회구조 속에서만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선언에 규정된 경제사회적 권리가 구체화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연대와 상호의존성은 모든 인권의 성격이다. 모든 사람은 상호적이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서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동시에 자신의 권리를 모든 타인에게 존중받는다. 인권이 갖는 상호성을 인정함으로써 사회는 공동체를 이룬다. 이런 공동체 속에서만 개인은 자기 인격을 발전시키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국가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동료인간에 대한 의무이다.

동료인간에 대한 의무를 현대적 화법으로는 ‘연대’라 할 수 있다. 연대의 화법은 어떤 것일까? ‘나는 000가 아니지만 당신이 탄압받는다면 그에 반대 하겠다’는 식의 화법이 소극적 관용의 수준이라면, 연대의 화법은 ‘내가 000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 운동을 지지한다’가 아니라 ‘내가 바로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인간의 존엄에 반한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연대와 상호의존성

공동체에 대한 의무로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뺄셈의식’일 것이다. 누군 이래서 안되고 누군 저래서 안되는 식으로 인권에서의 배제를 용인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뺄셈의식을 버리고 가져야 할 것은 차별과 착취에 대한 분노를 느끼는 공통감각이고 그 문제를 나의 것으로 느끼는 연대의식일 것이다. 적대의 대상은 나와 다른 인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반인권의식과 조치일 것이다. 적대의 대상을 명확히 하여 가지는 그런 연대의식이야말로 진짜 우리편 의식이다. 우리편 의식을 설파한 연설문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 신념이다.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지만, 나의 종교를 논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다. 당신의 종교를 바꾸라고 여기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의 차이점에 대해 논쟁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차이점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같은 문제, 공통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 당신이 불교도이건, 감리교도이건, 무슬림이건, 민족주의자이건 간에 당신을 지옥에 빠뜨린 문제를 우선 보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교육받았건 일자무식이건, 큰 길가에 살건 뒷골목에 살건, 여러분은 나처럼 지옥에 빠질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모두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강등으로 고통받아왔다. 우리는 착취에 반대하고 강등에 반대하고 억압에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그 차이는 벽장 속에 내버려두자.”(흑인 해방 운동가 말콤 X의 연설문 중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사냥개에게 쫓기는 약한 동물들처럼 인간사냥 당하는데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게 뭔가. ‘재들은 우리 시민이 아니잖아. 우리가 낸 세금으로 같이 살아갈 수는 없잖아. 피부색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뭔가 다른게 존재하는 건 불안해.’ 한국은 동질적인 사회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서는 인권이 숨 쉴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사회에서는 시민권이 없다. 시민권은 나누고 분리하는 개념이다. 세금을 낸 시민이 정부 주식회사에서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시민권이라면 그리고 뺄셈을 잘하는 것이 시민권이라면, 인권은 포괄하고 더하는 개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에서나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처럼 확실하게 비시민인 사람들, 겉으로는 시민이지만 사실상 시민대접을 받지 못하는 차별받는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설계해야 하는 게 인권의 개념이다. 시민권 개념 안에서 인권을 바라보면 창문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창문(window)의 어원은 ‘바람의 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다. 이 뜻을 따르면 창문은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을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바람의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게 된다. 시민권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들여다 보는 것, 즉 인권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인권을 가진 모든 사람의 공동체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

작성일자 : 2008. 12. 25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담은 28조는 세계인권선언 1조가 열어젖힌 문의 미닫이라고 할 수 있다. 선언 1조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므로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가 많다. 갈등과 분쟁이 온 세상에 퍼져있고 때로는 아주 잔인하게 인간성을 유린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 인간의 행위를 이끄는 이데올로기나 특질이 선언 1조에서 규정한 인간됨을 해칠 때가 많다.

이에 28조는 그 반대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인류는 2차 대전의 온갖 만행을 겪으면서 인간 개인들에게 폭력과 불의에 저항할 용기를 갖지 못한 것을 저주하기 전에, 폭력과 불의를 저지르게 하는 사회적 조건의 되풀이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구체적 권리의 대상, 밥에 대한 떡에 대한 권리도 없는 28조 같은 조항을 만든 이유가 그것이다. 인권이 말에서 현실로 바뀔 수 있는 조건을 한 사회 내에서나 국제적으로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밥에 대한, 떡에 대한 권리도 없지만

28조가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선언이 권리를 말할 뿐 이 권리를 실천할 국가의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는 점이다.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서방국가들이 국가의 의무를 선언에 명시하는 걸 아주 꺼려했다. 그래서 국가의 의무 없는 권리는 추상적인 목록에 그칠 것임을 우려한 쪽에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안이다. 특히 선언을 만들 때 기초위원회에서 아주 소수에 불과했던 3세계 국가들에서 내놓은 제안이 28조의 토대가 됐다. 인권의 향유는 사회적 및 국제적 관계의 질에 달려있다는 일반원칙을 담은 것이 28조이고, 여기서 개인시민과 국가관계에 치중한 기존 인권 구조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와 관계가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8조의 배경이 된 당시 사건들을 우선 참고할 수 있다. 1941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4가지 자유’를 선언했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이다. 특히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의 선언은 제2의 권리장전이라 일컬어졌다. 그 내용은 유익하고 유리한 직업을 가질 권리, 적절한 식량과 의복과 여가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소득에 대한 권리, 건강권, 좋은 교육에 관한 권리 등이었다.

1945년 설립된 유엔은 이러한 자유가 성취될 수 있는 국제질서를 만들기 위한 기구가 될 것을 약속했다. 유엔헌장에서 밝힌 그 목적은 “경제·사회·문화적 또는 인도적 성격의 국제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인종·성별·언어 또는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의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을 촉진하고 장려함에 있어 국제적 협력을 달성한다”(유엔헌장 1조 3항)이다. 또한 그 조건이 되는 것은 “보다 높은 생활수준, 완전고용 그리고 경제적 및 사회적 진보와 발전의 조건, 경제·사회·보건 및 관련국제문제의 해결 그리고 문화 및 교육상의 국제협력, 인종·성별·언어 또는 종교에 관한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보편적 존중과 준수”(유엔 헌장 55조)이다.

같은 시기 ILO도 필라델피아 선언(1944)을 통해 그 목적을 재확인한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며, 표현 및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며,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영구적인 평화는 사회정의를 기초로 하여서만 확립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와 존엄성, 경제적 안정 및 기회균등이 보장되는 조건하에서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발전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조건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국가적이며 국제적인 정책의 기본목표이어야 한다. 특히 경제적 및 재정적 성격의 국가적.국제적인 모든 정책과 조치는 이러한 견지에서 적용되는 것이어야 하고, 이러한 근본목적의 확보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를 저해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필라델피아 선언 I, II)

발전에 대한 권리로

28조가 태어난 배경이 이랬다면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28조를 계속 상기한다. 1966년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규약은 “세계인권선언에 따라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자유 인간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시민적·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경우에만 성취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11조 2항은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다루는데, 이를 위한 국내적 및 국제적 질서의 사례로서 특히 토지 개혁을(국내적 사회질서의 개혁), 필요에 따라 세계식량공급의 공평한 분배를 확보할 것(국제질서)을 언급하고 있다.

3세계가 인권무대에 대거 등장하면서는 개인이 무슨 권리를 갖는다고 열거하기 보다는 인권의 실현을 방해하는 주요 장벽이 무엇인가가 많이 다뤄지게 됐다. 그 목록으로 제시된 것이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분리정책), 무력 분쟁, 외국의 점령, 빈국과 부국의 불평등 격차였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는 양극화됐다. 지배적인 서구 자유주의의 인권 접근은 시민·정치적 권리에 집중하는 것이었고, 3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경제·사회적 조건을 강조했다. 이런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명목상으로나마 합치된 것이 인권을 위한 구조 변화를 다룬 ‘발전에 대한 권리’이다.

1969년 사회진보와 발전에 관한 선언은 “정당한 사회질서 속에서만 인간은 그 열망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군비와 갈등을 위한 자원을 평화적 활동과 사회진보를 위한 것으로 바꿀 필요성을 언급했다. 모든 형태의 차별·불평등·인종차별주의 등의 철폐, 토지소유제도 및 임차제도를 사회정의에 최대한 적합하도록 하는 토지개혁의 이행, 모든 사람의 노동의 권리 보장, 국부 및 국민소득의 공정하고 공평한 분배, 적절한 주거의 보장, 무상 의료서비스의 달성, 환경보호, 전면적이고 완전한 군축의 달성 등이 이 선언의 주 내용이다

1986년 유엔총회는 발전에 대한 권리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 전문은 세계인권선언 28조를 재차 상기하며, 발전을 정의하고 있다. “발전은 포괄적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과정으로서, 발전과 그로부터 산출되는 이익의 공정한 분배에 있어서의 자유롭고 적극적이며 의미 있는 참여의 기초 위에서 전 인구와 모든 개인들의 복지의 부단한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 내용에는 “인민들이 자유롭게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결정하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데서 그들의 자결의 권리”, “그들의 천연자원과 부에 관한 완전하고 충분한 주권을 발휘할 인민들의 권리”를 언급한다.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아파르트헤이트,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와 인종적 차별, 국가의 주권·국가적 통합·영토보전에 대한 외부의 지배·점유·침략·위협, 그리고 전쟁의 위협 등의 결과들로 인한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민들과 개인들의 인권에 대한 대규모의 극악한 범죄들의 제거가 인류 대다수의 발전에 합당한 환경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것을 고려하면서, 그 해결방법으로 “군비축소와 발전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군비축소 영역의 진보는 발전의 영역의 진보를 적지 않게 증진하게 되고, 군비축소 수단을 통해 확보되는 자원들은 모든 인민들, 그리고 특히 개발도상국들의 인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복지에 바쳐져야 한다”는 점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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