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8. 4. 24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나아가 개인이 속한 나라나 영역이 독립국이든 신탁통치지역이든, 비자치지역이든 또는 그 밖의 다른 주권상의 제한을 받고 있는 지역이든, 그 나라나 영역의 정치적, 사법적, 국제적 지위를 근거로 차별이 행하여져서는 안 된다.

인권의 사랑니, ‘차별’

‘차별’은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싫어하는 말이고 바꾸고 싶은 현실이다. 그런데 차별을 잘 들여다보면 오히려 ‘인권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권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기에 그 어떤 이유로든 어떤 사람을 제외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세상사를 내 뜻대로 하고 싶어 하는 지배자 쪽에서 보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항의하거나 저항하는 게 싫고 두렵다. 이걸 어떻게 갈라놓을까 궁리해보니 서로를 싫어하고 깔보게 만드는 것만큼 손쉬운 방법이 없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체제라고 큰소리쳤지만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할 필요성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 또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무서워하고 싫어하고 꺼림직 하게 만들면 된다. 그래서 아무 죄도 없는 ‘차이’들 중에 특정한 것을 골라내서 어떤 것은 특별대우하고 어떤 것은 찬밥취급을 하는 것이 ‘차별’이다.

‘차별’은 움직이는 것

차별의 심각성을 잘 알기에 인권기준 또는 인권규범이라 하는 건 죄다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을 앞머리에 달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조는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것이다.

선언 제2조에서 열거된 차별 금지 목록을 보면 오늘날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 중에 빠진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장애’가 빠져있다. 당시 장애를 인권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후 수많은 장애인들에 대한 후생사업과 원조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고, 그 후에는 사회복지의 관점에서 접근이 시도되다가 70년대에 가서야 인권의 접근(예를 들어, 75년 장애인권리선언)이 시작된다. ‘장애’처럼 선언 제정 당시에는 인권문제로 보지 않은 영역이 많았던 것이다.

잠시 한국의 국가인권위법을 들여다보자. 제정 시 진정대상이 되는 차별사유를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병력(病歷)’ 18가지로 명시했다. 이후 개정을 통해 ‘학력’을 추가하고 열거된 목록에 ‘등’을 부가했다. 여기에 열거되지 않았더라도 차별금지기준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국가인권위법은 국제인권기준과 국내인권운동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세계인권선언 이후 변화·발전된 차별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다.

차별 조항이 필요한가

선언을 만들면서 차별 조항을 적극 제기하고 지켜낸 것은 당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권 국가였다. 미소냉전 속에서 소련은 미국의 인종주의와 서구열강의 식민주의를 비난했다. 반면 서구측은 수용소와 정치적 의견에 대한 탄압 등을 들며 소련을 공격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차별 조항에 대해 크게 두 개 입장이 대립했다. 하나는 포괄적인 차별을 다룬 일반조항이 필요하며, 차별금지사유를 상세히 담은 목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은 선언의 다른 조항에서 ‘법 앞에 평등’을 다루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며, 유엔헌장에 열거된 차별금지사유(인종, 성, 언어, 종교)말고 다른 것을 고려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차별 조항을 원하는 쪽에서는 ‘차별은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국제적 정치 행위로 간주돼야 한다.’, ‘유엔의 임무 중 하나는 차별철폐여야 한다.’, ‘차별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 채택되지 않는다면 미국에서의 흑인 린치 등의 관행이 계속될 것이다.’, ‘차별행위는 범죄를 구성하며 국가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이 규정해야 한다.’ 등 강도 높은 의견들을 이어갔다. 그 결과 ‘법 앞의 평등’(선언 제7조) 조항과 별도로 차별을 금지하는 일반원칙인 제2조가 만들어지게 됐다.

구별 또는 차별? 자의적 차별?

‘구별’이냐 ‘차별’이냐는 단어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구별’과 ‘차별’을 같은 내용의 단어로 본 입장에서는 모든 구별이나 차별이 해롭거나 부당한 것은 아니며 유용하고 칭찬할 만한 것도 있으니, 그중에서 ‘자의적’인 것만을 금지하자고 했다.

반면 ‘구별’과 ‘차별’은 그 내용이 다른 단어이기에 ‘차별’이란 단어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입장은 이런 논리였다. ‘차별’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인간을 해롭게 하는 차별은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구별과는 아주 다르다. ‘차별’을 ‘구별’로 대체하는 것은 내용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자의적’이란 단어를 쓰게 되면 소위 ‘비자의적’인 차별, 예를 들어 법에 근거한 차별(미국의 흑인법처럼)을 용서하고 정당화할 위험성이 있다. 차별이란 단어가 해로운 구별을 의미하고 있기에 ‘자의적’이란 수식이 없어도 된다.

토론의 결과 ‘차별’이란 단어를 쓰고 ‘자의적’은 빼기로 했다.

식민지 인민의 문제

원래는 식민지 인민의 문제를 별도의 차별조항으로 다루자는 제안으로 논의가 시작됐으나 제안자인 유고와 그를 지지하던 사회주의권이 티토와 스탈린의 관계 청산으로 인해 삐걱거리자 막판까지 이 제안을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소련은 식민지 모국이 관할 하의 비자치지역에 대해 가지는 책임을 언급한 유엔 헌장을 인용하며, 비자치지역과 식민지에서의 선거를 압박했다. 식민 권력들은 당연히 식민지 문제를 제기하길 원치 않았고, 양 진영 간에 설전이 이어졌다.

소련도 식민열강 쪽도 아닌 대표들이 식민지 인민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인류의 양심은 식민지 인민들에 대한 억압이 관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 진보했다.”라며, 일반적인 차별을 반대하는 표현으로 충분하다는 의견에 대해서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식민지 영토에 적용됐던 건 아니었다.”라고 대응했다. 또한 “전문에 담긴 막연한 한 두 줄로는 충분치 않다. 이 조항에 반대하는 대표들은 식민지체제 아래 사는 사람들의 분노와 절망의 감정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식민지를 특화한 별도의 조항은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너무 센 언어를 사용하지 말고 좀 막연하고 일반적인 용어가 좋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서 식민지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문구가 제2조 두 번째 문단에 첨부된다.

인종·피부색·민족적 출신·언어

선언에 언급된 ‘인종, 피부색, 민족적 출신, 언어’는 일종의 세트이다. 즉 인종적·문화적·언어적 소수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차별 금지는 이미 결론이 내려진 문제였다. 인종은 유엔헌장의 몇 개 안되는 차별목록 중에 맨 앞에 있다. 선언의 대부분 조항이 히틀러의 인종주의 정책에 대한 직접대응이었고 연합국이 전후에 한 첫 번째 일은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법적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45년 포츠담 회담에서 천명된 네 번째 정치원칙은 “모든 나치의 법률-히틀러 체제에 기초하거나 인종, 신념 또는 정치적 의견에 기반을 둔 차별은 철폐돼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추축국 간의 평화 조약 또한 모든 인종주의적 법률과 차별관행의 철폐에 대한 규정을 포함했다. 따라서 선언이 ‘인종’과 ‘피부색’에 따른 차별금지를 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인종만이 아니라 ‘피부색’이 들어간 이유는 인종에 대한 어떤 과학적인 정의도 없기에 인종이란 단어를 더욱 자세히 하기 위함이었다. 피부색은 가장 명백하고 가장 흔히 사용되는 신체적 특성의 하나로 인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언어’, ‘민족적 출신’도 그런 이유에서 포함됐다.

제2조의 ‘민족적 출신’은 한 정부 아래 다양한 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함께 사는 국가들이 있다는 이해 속에서 인종적·민족적·문화적 소수집단을 보호하려는 취지로 포함됐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여기서 말하는 ‘민족적 출신’이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민족적 특질’이라는 의미로 해석돼야 한다는 주석을 붙였다.

소수집단의 ‘언어에 대한 권리’와 긴밀한 문제는 교육권(소수자 집단이 자신들의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언어로 교육받을 권리)과 종교와 법정에서의 언어권 등이다.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정치적 의견’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당시 대부분의 헌법은 ‘정치적 신념’을 헌법 조항의 비차별 조항에 열거하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을 넣자는 의견은 이렇다. 정치는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 중 하나이다. 차별과 처형의 위험 없이 정치적 신념을 자유롭게 보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는 어떤 해도 없다. 또한 정치적 소수자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왕이나 귀족집단에 의한 억압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강력한 국가들은 사상의 반대 집단을 억누르고 있다.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조항에서 보장되는 보호가 정치적 의견으로 확대돼야 한다. 사라져가는 경향이 있는 전통적 종교적 소수자보다 정치적 소수자가 더욱 미래에 보호를 필요로 할 것이다. ‘정치적’을 빼고 그냥 ‘의견’으로 하자는 입장에 대한 반론은 ‘명백하게 보장되지 않는 자유는 언제나 부정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권의 반대의견이 셌다. ‘인종적 또는 민족적 증오를 옹호하거나 그로부터 추동된 행위를 옹호하는 정치적 의견은 관용될 수 없다. 나치와 파시스트 집단도 정치적 의견의 자유 같은 목록에 기대서 공공생활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항목을 제거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이유였다.

결론은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로 내려졌고, 이는 정치적 의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여타의 의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재산 지위’에 대해서는 논평이 없었다. ‘기타의 지위’에 다 포함되니 재산을 빼자는 의견(미국, 영국 대표) 정도가 있었다. ‘빈민이나 부자나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는 게 중요하니까 넣자’고 결론이 났다.

‘출생’을 넣은 이유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봉건적 특권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일부 잔여물이 있어서 언급하자는 것이었다. 물려받은 법적, 사회적, 경제적 차이에 기초한 차별금지를 말한다. 즉 상속받은 특권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다.

여성의 권리

원래 선언의 대부분의 기초문서는 “모든 사람(all men)”으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여성소위는 역사적으로 “모든”이란 말이 여성을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많은 대표자들도 “모든 사람(all men)”에서의 ‘사람(men)’이 남성을 지칭해왔다는 이유로 불만스러워했다. 이 표현은 역사적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바꿀 것을 희망했다.

여성소위는 남성의 뜻이 다분한 ‘men’이 아니라 성차별적 요소를 배제한 ‘human beings’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에 대한 영어 표현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곤란하다든가 이미 여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의미를 갖게 된 단어를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태도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 선언 제1조 이외의 모든 조항에서는 “모든 사람(everyone)”으로 표현되고 제1조에서만 “모든 사람(all human beings)”이 사용됐다. 선언에 여전히 남아있는 성차별적 단어와 권리 규정에 대해서는 해당조항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작성일자 : 2008. 3. 20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편집자 주>

올해로 세계인권선언은 제정 60주년을 맞았다. [인권연구_창]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의 전문과 30개 조항을 현재적 시각에서 분석해본다

이제 세계인권선언(아래부터 선언) 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선언 전문과 1조를 읽어보면 18세기의 근대인권선언과 세계인권선언의 언어는 유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고유한 존엄성”,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 “태어날 때부터” 등의 표현이다. 1조의 첫 문장은 1789년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게 된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계몽주의 철학에 근거한 것인가? 선언에는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기초가 깔린 것인가?

세계인권선언의 철학적 기초

선언의 기초자들은 논쟁 끝에 ‘신’과 ‘자연’에 대한 언급을 삭제했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인간 이성과 양심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쟁을 피하고 어떤 가치도 절대자나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으로 보지 않는 세속적인 문서를 만들려 했다.

권리 목록(내용)에 대한 합의가 시급한 과제였기에 선언 자체에 인권에 대한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기초가 명시될 수 없었다.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기초가 없다는 것이지, 아예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 자유주의적 자연권 사상, 사회주의 사상 등이 선언에는 담겨있다. 선언에 대한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공통된 관념적 사유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공통의 실천적 인식에 근거해서였고, 이 세계에 대한 하나의 동일한 개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행위를 인도할 수 있는 하나의 신념체계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선언에 담긴 여러 색깔의 철학 중에서 전문과 1조에서는 계몽주의 사고방식이 유별나게 드러난다. 인권을, 단지 인간임으로서 해서 다른 어떤 이유(가령 사회계약, 정부의 행위, 의회나 법원의 결정 등)도 없이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인간 본성의 원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나, 인권이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국가행위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어떤 사람이나 정치적·사회적 기관이 준 것이 아니기에 우리로부터 빼앗아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주의권 대표들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신과 자연”은 삭제됐지만 1조에서 “이성과 양심”이란 용어는 사용됐다. 이때 “이성과 양심”이 오독될 위험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 의견은 ‘이성과 양심’을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성격 또는 인간의 소유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억압적인 체제가 사람들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걸 봉쇄할 위험성이 있다. 그들이 이성을 적절하게 갖고 있지 않거나 그들의 양심이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기는 했지만, “이성과 양심”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성과 양심”이 비판자들이 여기는 것처럼 인권 소유의 존재론적 기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이성과 양심”을 사람이 인권을 가진다는 걸 알게 될 수 있는 인식장치, 인간의 능력으로 봤다.

또한 이 표현은 전문 두 번째 문단에 있는 “인류의 양심”과 연결된다. 전쟁과 홀로코스트는 인류의 양심에 반하는 것이고, 세계인권선언은 인류 양심의 표현이라고 봤다. 제 1조에서 인권에 대한 천명과 함께 인간의 의무를 포함하는 것이 균형을 이룬다고 봤다. 즉 “이성과 양심”은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장치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1조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했다. 이에 어떤 태어남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즉 ‘신체적 출생’이냐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인류 가족 속으로의 도덕적 출생’이냐 ‘법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이냐이다.

‘태어날 때부터’를 신체적 출생으로 본 입장에선 인간 생명의 출발점(가령 태아)을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표현을 반대했다. 출생의 ‘법적’ 성격을 강조한 입장에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과연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한가? 법 앞의 권리의 평등은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 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국가가 공표해야 가능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선언이 ‘태어날 때부터’를 채택하면서 취한 입장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불평등한 환경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선언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결코 도처에 존재해온 엄청난 불평등을 부인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내재된 고유한 권리를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선언에서 “태어난다”의 의미는 신체적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평등, 인권을 평등하게 누리는 것, 그에 동반된 의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언 전문과 1조에서 말하는 “태어나다(born)”, “고유한(inherent)”, “양도할 수 없는(inalienable)”은 서로 연관된다. 모든 인간 구성원은 ‘타고난 존엄성’을 가지며, 이것은 우리가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나 기관이 준 것이 아니기에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도 없다는 논리구성이다.

혁명적 항거의 권리(the right to rebellion)

원래 저항권을 하나의 독립된 권리조항으로 명시하자는 의견과 그럴 수 없다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저항권에 반대한 입장은 ‘저항권을 인정하게 되면 정부에 반대하는 봉기를 장려하는 꼴이 된다’, ‘남용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압제에 저항할 권리는 오직 기본적 인권과 자유가 체계적으로 박탈될 때인데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를 결정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결과적으로 ‘저항권을 규범 속에 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저항권을 옹호한 입장은 "그 누구도 저항권이 불안정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불합리가 너무 커서 대다수가 그것을 느낄 때까지는, 또한 그것이 수정돼야 할 필요성을 발견할 때까지는 작동하지 않는다"며 저항권에 대한 우려를 반박했다. 나아가 "저항권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표현한 것이다. 전제와 폭압에 맞선 저항의 권리를 언급하지 않고서 인권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바로 최근의 역사(나치로 인한 고통)가 저항의 필요성을 말해주지 않느냐, 파시즘에 대한 반대로서 정부에 반대할 권리가 규정돼야 한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적극적 반대의견을 개진한 미국과 영국의 기권 속에 ‘혁명적 저항의 권리’는 결과적으로 별도 조항이 아닌 전문 속에 언급되게 됐다.

세계인권선언과 한반도

1945년 유엔이 창설되고 이후 3년여 선언이 기초되었다. 같은 시기 식민지 조선은 독립을 했다. 그러나 국제적 냉전과 국내의 좌·우익 대립 속에서 분단과 함께 맞은 독립이었다. 선언이 기초되던 3년여 기간 동안 한반도는 소련군과 미군의 군정 아래 놓였고, 선언이 선포된 48년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정부가 수립됐다. 각각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 주장하며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한 가운데 1950년부터 3년여 동안 이어진 끔찍한 살육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분단과 대립 속의 남과 북에서 국가안보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사회적으로나 인권탄압을 정당화하는 구호였고, 경제성장도 마찬가지 구호로 악용돼왔다. 선언의 제정은 1948년 12월 10일인데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같은 해 12월 1일 제정돼 역시 60년을 맞았다.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여전히 틀어막으려 한다. 북한인권 문제는 오늘날 국제인권의 장에서나 국내정치에서나 뜨겁게 다뤄지고 있다.

선언에 담긴 평화와 인권에 대한 열망, 자유권과 사회권의 긴장이 담긴 권리 목록, 인권의 정치화를 둘러싼 논쟁 등 어느 하나도 우리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는 것들이다. 앞으로 30개 조항분석을 통해 이들 문제를 하나씩 생각해보자.

작성일자 : 2008. 3. 20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편집자 주>올해로 세계인권선언이 제정 60주년을 맞았다. [인권연구_창]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의 전문과 30개 조항을 현재적 시각에서 분석해본다.

세계인권선언이 시작된 자리

모든 사람에겐 누가 어떤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고유한 인권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유한 인권’에는 도대체 무엇이 속하는 걸까?

세계인권선언(아래부터 선언)은 이 질문에 대답함과 동시에 실천을 약속한 선두적인 국제적 문서이다. 선언은 다른 이유 볼 것 없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인간에게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생각에 터를 잡았다. 선언을 만들고 합의함으로써 ‘국내법으로 못 박아 있어야만 권리가 될 수 있다’거나 ‘자국민의 인권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는 그 국가의 맘’이라는 주장은 한물간 것이 돼버렸고, 인권에 대한 존중이 만인과 모든 국가가 지켜야 할 국제규범이 됐다. 2차 대전이라는 참상의 극한을 경험한 인류는 인권을 증진해야만 세계평화가 수립될 수 있다는 교훈을 선언에 새겨 넣었다.

세계인권선언의 구성

선언은 전문과 30조로 구성돼 있다. 맨 앞의 2개 조항은 선언의 대전제가 된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평등을 공유한다는 점, 이러한 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다는 점, 따라서 인권은 어떤 이유로도 누구에게도 부정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3조부터 21조까지는 생명권, 공정한 재판, 언론의 자유, 프라이버시 등 시민·정치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22조부터 27조까지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노동권 등 인간 생활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측면을 다룬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28조에서 30조까지는 선언에서 열거된 권리의 향유를 위한 사회적 및 국제적 구조, 인권에 부합되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언급한다.

세계인권선언의 한계

한국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이라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 ‘보편(universal)'인권선언이다. 세계 공통의 보편적인 가치가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선언을 만들기 전에도, 만드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논쟁이다.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갖는 정치적·사회경제적·문화적 다양성이 충분히 고려될 수 없었던 한계 때문이다. 나치즘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선언을 기초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한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선언을 기초하고 채택할 당시 유엔회원국의 수는 58개국에 불과했고, 식민지 상태를 갓 벗어나거나 여전히 식민지로 매여 있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다수 인민은 선언에 의견을 내지 못했다.

또한 선언은 분명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선언은 2차 대전 후의 사회경제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권리, 교육권, 사회보장권 등 ‘새로운’ 권리를 반영하면서는 ‘급진’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극히 신중을 기했고, 여성의 권리나 가족생활에 관련된 내용에서는 보수적 사회기조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떠오르고 있는 인권의 문제들에서 보면 빠진 부분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오늘날 선언을 볼 때는 선언 이후의 변화와 함께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반응

선언에 대한 반응은 대조적이다. 선언의 의의를 깎아 내리거나 실용적인 입장에서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국제인권규범의 정립이라는 면에서 그 의의를 평가하고 발전시키려는 입장이 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대별해보면 아래와 같다.

<회의적 입장>
· 기껏해야 정부들에 대한 훈계 내지 권고에 지나지 않는다.
·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집단적 사회주의를 끼워 맞춘 이질적인 소망의 목록이다.
· ‘짖기만 하지 물지 않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즉 ‘이행과 실천’의 문제를 무시했기에 동의된 문서일 뿐이다.
· 인권을 외교정책의 도구 또는 새로운 지배와 개입의 도구로 써먹으려는 의도 아닌가.
· 국제관계에서 인권은 장식용이거나 눈속임 장치고, 국제관계는 냉정한 계산이다. 인권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국가내의 내부 투쟁과 개혁의 결과이지, 선언 등 국제규범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 인권침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적에 대해 어디까지나 주권의 고유한 문제일 뿐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강력하다.

<긍정적·희망적 입장>
· 인권 규범이 정교해졌다. 선언 이후 꾸준한 국제인권규범 만들기가 진행됐고, 규범 만들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행으로 나아가게 됐다. 이런 국제인권규범은 정부, 국제기구, 시민사회 ‘공통’의 대화기준이 됐다.
· 유엔 속에서 인권의 역할이 강화됐다. 인권기준의 발전 속에서 유엔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고, 93년 세계인권대회,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창설 등은 그 대표적 사례다.
· 자발적인 시민 결사, 지구적인 NGOs의 출현, 지구적인 매체의 등장 등은 국가행위에 초점을 두었던 선언 기초자들이 계산하지 못했던 바다.
· (장식용이든 정의로운 목적의 추구에서든) 인권은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인권사상에는 힘이 있다.
· 반식민지투쟁, 민주화투쟁,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등 억압에 맞선 역사적 투쟁이 인권을 통해 상징화됐다.
· 인도주의법과 반인류 범죄에 대한 것으로 인권의 영역이 확대됐다.
· 국가가 자국민을 다루는 방식이 정당한 국제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국제기준에 속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규범화한 것이 선언이다.
· 국제관계에 ‘인권’을 대입함으로써 지구적 관점 말고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사회와 관계의 건설에 이바지해왔다.
·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인권에서 유일한 영역이었던 시민·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적 권리도 포섭했다.
· 인권의 개인주의적 속성이 공동체적 속성을 통해 완화·축소됐다. 특히 29조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한다”가 그 예이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국제인권현실의 전개

선언 이후 60년의 세월 동안 국제인권은 쉼 없이 달려왔다. 그 전개 상황을 다소 숨차게 쫓아가보자.

· 50년대 냉전
선언 기초과정에서부터 드러난 냉전이 심화됐다. 선언은 보편적 인권의 개념과 목록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선언’에 머무른 것이었기에, 인권의 국제적 보호를 위한 법적 구속력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조약’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러나 사회권과 자유권이라는 두 범주의 권리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심각한 입장차이가 있었다. 규약 제정의 초기에는 하나의 조약을 목표로 작업을 벌였으나, 특히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의 요구로 두 개의 다른 조약을 추진하게 됐다. 선언은 하나인데 그에 근거한 국제규약은 두 개(‘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다. 양 규약의 채택과정은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60년대
새로 독립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의 등장으로 유엔인권활동에 새로운 물결이 일었다. 이들은 식민주의의 토대가 된 인종차별주의에 몰두했다. 65년 인종차별철폐협약이 채택됐고, 자기결정권과 반아파르트헤이트 관련 활동(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대대적 국제캠페인)이 강화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논란 끝에 66년 양대 규약이 채택됐으나 그 후 국제인권의 전개는 슬럼프를 맞게 된다. 기준설정에는 동의가 이뤄졌으나 이행으로 강조점이 넘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다. 국가주의, 주권존중 논리의 완강함 속에 인권은 국제적 토론에는 적합하지만 구체적인 국제행동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확인되는 시기였다.

·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까지
73년 칠레 아옌데 정권이 무력으로 전복됐다. 그 후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인권침해에 대한 혐오감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됐다. 대규모 인권침해자를 다루는 유엔워킹그룹이 창설됐고, 칠레의 선례에 기초해 특정 국가의 인권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대표와 특별보고관이 임명됐다. 75년 헬싱키 협약에서 인권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76년 유엔시민·정치적 권리규약에 관한 자유권위원회의 새로운 모니터링 제도가 등장했다. 77년 지미카터의 등장으로 ‘인권외교정책’이 화두가 됐다. 여성차별철폐협약, 고문방지협약, 아동권리협약 등 주요국제인권법이 속속 제정됐다. 특정 유형의 인권침해를 지구적으로 다루기 위한 시도가 시작됐다. 80년 강요된 실종에 관한 워킹그룹 창설, 82년 자의적 처형에 관한 특별보고관 임명, 85년 고문에 관한 특별보고관 임명 등이 그것이다. 이시기 NGOs의 국제인권활동이 급증했으며 77년 국제앰네스티의 노벨상 수상은 그 상징적 사례다.

· 90년대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국제사회가 관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됐다. 91년과 94년에 구 유고와 르완다에 대한 특별법정이 열렸고, 95년 유엔총회는 국제형사법정을 창설할 것을 결정했다. 포스트 냉전시대를 맞아 냉전 이후 국제질서를 어떻게 짤 것인가를 논의하는 일련의 국제대회가 꼬리를 물었다. 93년의 비엔나세계인권대회, 94년의 북경여성대회 등이 그것이다. 94년 UNDP의 인간발전보고서는 ‘인간안보’의 구체적 내용을 드러냈다.

· 2000년대
반세계화운동이 주목받게 됐다. 물에 대한 권리, 기후 변화 등 생태와 인권 문제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강화됐다. 9·11 이후 테러리즘과 인권 문제가 위기를 불렀고, 93년 이라크침공에 맞선 국제평화운동이 전개됐다. 평화·안보·인도주의적 위기에 대한 인권의 침투와는 달리 경제나 금융기구에 대해서는 인권규범이 침투 못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인권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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