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8. 12. 25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30조

이 선언의 그 어떠한 조항도 특정 국가, 집단 또는 개인이 이 선언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는 것으로 해석되지 아니한다.

인권이란 말을 우리 사회가 흔히 사용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인권이 자주 거론될수록 인권을 해치는 권리의 주장도 커졌다. 오히려 그런 판이 더 커졌다고도 볼 수 있는 위험한 현상이 목격되고 있다. 인권의 주장에 힘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인권을 차용하여 사익을 주창하거나 정치적 이익을 정당화하는데 써먹는 일이 그것이다. 시장중심적이고 시장우호적인 국내적 및 국제적 질서의 틀 속에서 기업 등이 권리의 주체임을 자임하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가 기업가의 권리와 대등하게 다뤄지는 것, 자유와 안전이 거래 가능한 것처럼 다뤄지는 것, 기업의 이익 주창이 권리 언어로 포장되는 것 등은 권리 주체를 혼동한 대표적 사례이다.

아무 권리나 인권의 목록에 오르지 않는다. 어떤 부당한 것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뭉쳐져 온갖 희생을 치른 과정을 통해서 인권은 만들어져왔다. ‘권’자를 갖다 붙임으로써 그런 과정과 정당성이 생략된 이익의 주장을 인권과 대등한 위치에 놓을 수는 없다. 가령 노동권은 그 자체가 기업가의 재산권이 무한정한 권리가 아니라 사회적 제약을 받아야만 한다는 필요성과 정당성 속에서 인정된 인권이다. 이런 노동권에 대응하여 기업가의 재산권의 일부의 행사에 불과한 경영권이니 하는 것이 인권의 반열에 오를 수는 없다. 노동권의 핵심요소인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에 맞서 기업주의 대항권을 얘기하는 것은 ‘권’을 막도장 새기듯이 위조하는 행위이다. 장애인의 교육권에 맞서 내세우는 재산권은 사실 ‘집값유지권’이란 건데 교육권이란 인권에 ‘집값유지권’이란 인권이 대응한다는 논리는 어디에서도 주장되거나 인정된 바가 없다. 기업의 제약 없는 기술 실험의 권리를 사상과 언론의 자유 논리로써 설파한다거나 기업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명예와 신망에 대한 프라이버시권’으로 방어한다든가, 제약과 의료산업의 연구권리가 건강권이란 인권을 위한 것이라는 둥 사회적 감시와 비판을 ‘인권’을 가장하여 벗어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인권과 물적 권리를 혼돈하고 인권의 주체를 사회경제적 권력자로 혼돈하는 일이야말로 인권에 대한 모욕이자 침해이다. 인권의 주체는 사라지고 인권을 도구삼은 자의 것이 되도록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초국적 기업 등이 이런 식의 권리포장을 애용한다면 정치적 패권세력도 마찬가지다. 침략전쟁에 ‘인권을 위한 전쟁’이란 수식을 붙이고, 뭔가 고귀한 목적을 위한 것인 양 자국민과 세계인의 눈을 속이려 한다. ‘인권을 위한 전쟁’은 그 자체가 있을 수 없는 모순이다. ‘인권을 위한 식량지원반대’, ‘인권을 위한 의약품 봉쇄’ 같은 건 또 어떤가. 이런 일들을 우려하여 선언 30조가 있는 것이다.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목적의 활동에 종사하거나, 또는 그와 같은 행위를 행할 어떠한 권리”도 “특정국가, 집단 또는 개인”에게 없다고 했다.

선언에 보장된 모든 인권은 다른 인권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야지, ‘권’이라는 글자만 쏙 빼서 읽어서는 안된다. 선언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타인의 건강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일 시킬 때 적절한 휴식의 권리 보장, 굶주림에서 해방될 권리에 대한 의무를 자국정부만이 아닌 국제사회의 의무로 말하고 있다. 모든 인권, 특히 재산권은 이런 인권간의 관계 속에서 내재적 제약을 받는다.

마지막으로 인권을 해치는 인권은 인권의 주체들로부터 주체자격을 강탈하는 양식이다. 인권하면 흔히 혹독한 시련에 처한 피해자를 떠올린다. 피해자 또는 희생자는 구제 또는 구원받아야 한다. 메시아처럼 누군가가 인권을 주창하여 희생자를 구원하는 논리다. 이런 과정에서 인권의 주체는 주체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 되고, ‘인도주의적’이란 수식이 붙은 온갖 간섭과 시혜의 대상이 된다. 어떤 철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안 입는 헌옷을 싸서 보내는 것처럼 그렇게 보내진 인권은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온다.’ 인권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보낸 것이기 때문에 그런 인권은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발신자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돌아온 인권은 발신자가 입맛대로 주무르는 것이 된다. 인권의 주체들이 스스로 권리 찾기를 하려는 데는 신경 쓰지 않고, 희생자의 구원자 노릇을 하려는 데 쓰이는 인권은 권리를 침해하는 권리일 수 있다.

작성일자 : 2008. 12. 25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9조

1.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한다.
2. 모든 사람은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행사함에 있어서, 타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적절한 인정과 존중을 보장하고,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 정당한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목적에서만 법률에 규정된 제한을 받는다.
3. 이러한 권리와 자유는 어떤 경우에도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반하여 행사될 수 없다.

29조는 선언에서 의무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조항이다. 인권에 대해 흔히들 하는 비판은 ‘권리만 말하지 의무는 말하지 않는다’이다. 그런데 이런 말을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하는가를 잘 따져봐야 한다. 조건을 따지지 않고 그냥 의무라고 할 때는 인권에 상응하는 의무가 아닌 엉뚱한 번지수의 초인종을 누르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가령 권리를 보장해야 할 국가가 자기 의무를 말하지 말고 시민에게 법부터 지키라고 요구한다. 어린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면서 연장자에게 존대부터 하라고 요구한다. 사회경제적으로 취약한 처지의 사람에게 어떤 착취가 있는지를 얘기하지 않으면서 피해 당사자에게 네 처신부터 똑바로 하라고 요구한다. 이럴 때 의무를 말한다면 그건 음모가 있는 의무론이다. 의무의 번지수를 잘못 찾아서 청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진짜 의무자가 도망갈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의무, 번지수를 제대로 찾아야

권리는 관계 속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금지하고 규제할 수 있는 힘이다. 가령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국가편에 무상으로 교육에 접근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할 의무를 수립한다. 고문을 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국가기구와 관련 공무원이 고문이나 비인도적이고 굴욕적인 처우를 하지 않도록 할 의무를 수립한다. 인권이 권리라고 할 때 권리에서 나오는 의무는 이런 성격의 것이다. 교육권의 주체가 인간존엄에 반하는 학교규율을 지킬 의무, 인신의 자유의 주체가 부당한 공권력에 복종할 의무 같은 건 의무란 말이 잘못 쓰인 것이다.

또한 권리에 따른 의무는 자유재량이 아니라 그야말로 강제력 있는 의무이다. 모든 사람에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가 있다면 요구되는 재화와 서비스를 특정 사람에게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에게 그것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정인이나 기구가 의무자로 지정돼야 의무가 성립된다. 사회보장의 권리에 따른 의무는 지자체나 정부가 져야 인권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 상조회를 만들고, 아프거나 가난한 이웃을 방문하고 위로하고 원조하는 것은 자유재량이다. 이 경우 인간으로서의 도덕적 의무를 수행했다고 할 수는 있지만 복지권 주체의 권리에 대응하는 의무는 아니다. 반면 국가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에 따른 의무를 수행하는 것은 자유재량이 아니라 의무이다.

권리는 소유하거나 주어지거나 상실되는 물건이 아니다. 국가가 교육권을 제대로 보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 권리가 상실되는 게 아니고, 독재 권력이 고문을 애용한다 하여 고문 받지 않을 내 권리가 상실되는 게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명확히 해야 한다. 흔히들 비판하듯 인권을 보장하고 보호해야 할 국가가 인권침해를 저지를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권리의 주체가 바뀌는 게 아니고, 아무리 밥 먹듯 인권을 침해한다 해도 그것으로 국가의 의무가 면제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리 주체가 지는 의무란 것이 착취에 대한 복종이고 악법에 대한 복종이겠는가. 권리주체의 의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빼앗기거나 왜곡된 자기 권리를 찾는 의무가 진짜 의무이다. 인권은 권리 중에서도 특별한 종류의 권리이다. 법적 권리 뿐 아니라 도덕적 권리도 갖는다. 실정법으로 보장될 뿐 아니라 실정법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하는 것이 인권이다. 따라서 법적 명령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실정법과는 다른 도덕적 명령도 내릴 수 있다. 인권의 주체는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인권에 따른 의무주체에게는 복종을 요구하지만 인권의 주인인 자기 자신에겐 인권침해에 대한 저항을 명한다.

의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돼야

앞서도 말했지만 세계인권선언의 기초자들 중 상당수는 국가의 의무를 선언에 명시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해서 의무가 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선언에 쓰인 구체적 권리들은 권리만을 걸치고 있는 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국가의 의무를 겹쳐 입고 있다고 봐야 한다. 또한 선언 이후 의무의 구체적 내용들은 국제법전문가들에 의해 발전돼 왔다. 앞서 사회보장권과 관련된 조항에서 살펴본 최소핵심의무, 존중·보호·실현의 의무 같은 것이 그 사례이다.

의무에 대한 연구는 더욱 발전될 필요성이 있다. 가령 국가의 보호 의무를 통해 간접적으로 기업의 의무를 물을 것인지, 기업 등을 직접적으로 규제하는 제도를 만들 것인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인간의 존엄에 필수적인 것을 무슨 권리로 주장하기는 상대적으로 쉽다. 반면에 그런 권리에 대해 국가가 또는 다른 사회경제적 강자가 어떤 의무를 가져야 하는지를 밝혀내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가령 깨끗한 물에 대한 권리 주장은 깨끗한 물을 마시는 것이 생존과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이면 정당화될 수 있다. 반면에 물에 대한 권리를 민영화하려는 정부에 맞서서 그리고 수익사업으로 여기는 물 회사에 맞서 그들의 의무를 정당화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무를 구체화하는 것이 인권에 대한 연구요 실천활동의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럼 29조에서 말한 ‘모든 사람의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뭘 말하는 걸까. 29조는 사회와는 단절된 이기적 개인의 권리라는 굴레에서 인권을 해방시켜 준 조항이다. 여기서 비판하는 개인주의는 ‘어떤 사람도 수단으로 여겨져서는 안된다’, ‘세상이 모두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의 가치’를 존중하는 개인주의하고는 거리가 멀다. 자기 이익의 계산기를 두드리는 데 유능할 뿐 다른 사람과 공동체의 가치 같은 건 고려하지 않는 개인주의를 말한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면서 사람들은 소중한 개인의 가치가 이런 식의 이기주의로 오해되는 걸 우려했다.

공동체와 국가를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국가에 대한 의무’로 오독해서는 안된다. 선언 기초자들은 개인에 대한 국가의 침해로부터의 보호를 염두에 뒀다. 한 대표자의 말처럼 “인간은 국가를 위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가 기본에 깔렸다. 공동체와 국가를 동일시할 위험성 때문에 ‘민주국가’라는 표현도 쓰지 않고 ‘민주사회’라는 표현을 택했다. 따라서 공공질서, 일방의 복지 등 29조에 따른 권리제한의 조건규정들도 이런 전제조건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국가가 공공질서의 이름으로 자행한 범죄가 많았다는 것을 우려하면서 국가가 이런 문구를 이용해서 자의적 조치에 사로잡힐 것을 선언 기초자들은 우려했다. 이점을 염두에 두고 29조를 봐야 한다.

선언의 목적은 이기적인 개인의 성취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진보를 증대하기 위한 것이다.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라 한 것은 개인은 인격을 사회구조 속에서만 발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선언에 규정된 경제사회적 권리가 구체화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연대와 상호의존성은 모든 인권의 성격이다. 모든 사람은 상호적이고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서로 타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동시에 자신의 권리를 모든 타인에게 존중받는다. 인권이 갖는 상호성을 인정함으로써 사회는 공동체를 이룬다. 이런 공동체 속에서만 개인은 자기 인격을 발전시키고 권리를 누릴 수 있다. 공동체에 대한 의무는 국가에 대한 의무가 아니라 동료인간에 대한 의무이다.

동료인간에 대한 의무를 현대적 화법으로는 ‘연대’라 할 수 있다. 연대의 화법은 어떤 것일까? ‘나는 000가 아니지만 당신이 탄압받는다면 그에 반대 하겠다’는 식의 화법이 소극적 관용의 수준이라면, 연대의 화법은 ‘내가 000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나는 정규직이지만 비정규직 운동을 지지한다’가 아니라 ‘내가 바로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은 인간의 존엄에 반한다’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연대와 상호의존성

공동체에 대한 의무로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뺄셈의식’일 것이다. 누군 이래서 안되고 누군 저래서 안되는 식으로 인권에서의 배제를 용인하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뺄셈의식을 버리고 가져야 할 것은 차별과 착취에 대한 분노를 느끼는 공통감각이고 그 문제를 나의 것으로 느끼는 연대의식일 것이다. 적대의 대상은 나와 다른 인간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개인적이고 구조적인 반인권의식과 조치일 것이다. 적대의 대상을 명확히 하여 가지는 그런 연대의식이야말로 진짜 우리편 의식이다. 우리편 의식을 설파한 연설문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다. 그것이 나의 개인적 신념이다. 나는 여전히 무슬림이지만, 나의 종교를 논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다. 당신의 종교를 바꾸라고 여기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우리의 차이점에 대해 논쟁하기 위해 온 게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차이점을 가라앉히고 우리가 같은 문제, 공통의 문제를 갖고 있다는 것, 당신이 불교도이건, 감리교도이건, 무슬림이건, 민족주의자이건 간에 당신을 지옥에 빠뜨린 문제를 우선 보는 것이 최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교육받았건 일자무식이건, 큰 길가에 살건 뒷골목에 살건, 여러분은 나처럼 지옥에 빠질 것이다. 고통 받고 있는 우리 모두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와 사회적 강등으로 고통받아왔다. 우리는 착취에 반대하고 강등에 반대하고 억압에 반대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차이점이 있다면 그 차이는 벽장 속에 내버려두자.”(흑인 해방 운동가 말콤 X의 연설문 중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사냥개에게 쫓기는 약한 동물들처럼 인간사냥 당하는데서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게 뭔가. ‘재들은 우리 시민이 아니잖아. 우리가 낸 세금으로 같이 살아갈 수는 없잖아. 피부색도 다르고 먹는 것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뭔가 다른게 존재하는 건 불안해.’ 한국은 동질적인 사회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서는 인권이 숨 쉴 수 없다. 이주노동자들은 이 사회에서는 시민권이 없다. 시민권은 나누고 분리하는 개념이다. 세금을 낸 시민이 정부 주식회사에서 주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시민권이라면 그리고 뺄셈을 잘하는 것이 시민권이라면, 인권은 포괄하고 더하는 개념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디에서나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주노동자처럼 확실하게 비시민인 사람들, 겉으로는 시민이지만 사실상 시민대접을 받지 못하는 차별받는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설계해야 하는 게 인권의 개념이다. 시민권 개념 안에서 인권을 바라보면 창문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창문(window)의 어원은 ‘바람의 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다. 이 뜻을 따르면 창문은 안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온 세상을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는 바람의 눈으로 안을 들여다보는 게 된다. 시민권 안에서가 아니라 밖에서 들여다 보는 것, 즉 인권의 눈으로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는 것, 그것이 인권을 가진 모든 사람의 공동체의 의무가 아닐까 한다.

작성일자 : 2008. 12. 25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8조

모든 사람은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 선언에 제시된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를 담은 28조는 세계인권선언 1조가 열어젖힌 문의 미닫이라고 할 수 있다. 선언 1조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므로 ‘서로에게 형제의 정신으로 대하여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서로에게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을 때가 많다. 갈등과 분쟁이 온 세상에 퍼져있고 때로는 아주 잔인하게 인간성을 유린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 인간의 행위를 이끄는 이데올로기나 특질이 선언 1조에서 규정한 인간됨을 해칠 때가 많다.

이에 28조는 그 반대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인류는 2차 대전의 온갖 만행을 겪으면서 인간 개인들에게 폭력과 불의에 저항할 용기를 갖지 못한 것을 저주하기 전에, 폭력과 불의를 저지르게 하는 사회적 조건의 되풀이를 막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구체적 권리의 대상, 밥에 대한 떡에 대한 권리도 없는 28조 같은 조항을 만든 이유가 그것이다. 인권이 말에서 현실로 바뀔 수 있는 조건을 한 사회 내에서나 국제적으로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밥에 대한, 떡에 대한 권리도 없지만

28조가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선언이 권리를 말할 뿐 이 권리를 실천할 국가의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다는 점이다.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서방국가들이 국가의 의무를 선언에 명시하는 걸 아주 꺼려했다. 그래서 국가의 의무 없는 권리는 추상적인 목록에 그칠 것임을 우려한 쪽에서 궁여지책으로 내놓은 안이다. 특히 선언을 만들 때 기초위원회에서 아주 소수에 불과했던 3세계 국가들에서 내놓은 제안이 28조의 토대가 됐다. 인권의 향유는 사회적 및 국제적 관계의 질에 달려있다는 일반원칙을 담은 것이 28조이고, 여기서 개인시민과 국가관계에 치중한 기존 인권 구조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와 관계가 무엇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28조의 배경이 된 당시 사건들을 우선 참고할 수 있다. 1941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4가지 자유’를 선언했다.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언론과 의사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이다. 특히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의 선언은 제2의 권리장전이라 일컬어졌다. 그 내용은 유익하고 유리한 직업을 가질 권리, 적절한 식량과 의복과 여가를 제공하기에 충분한 소득에 대한 권리, 건강권, 좋은 교육에 관한 권리 등이었다.

1945년 설립된 유엔은 이러한 자유가 성취될 수 있는 국제질서를 만들기 위한 기구가 될 것을 약속했다. 유엔헌장에서 밝힌 그 목적은 “경제·사회·문화적 또는 인도적 성격의 국제문제를 해결하고 또한 인종·성별·언어 또는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의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을 촉진하고 장려함에 있어 국제적 협력을 달성한다”(유엔헌장 1조 3항)이다. 또한 그 조건이 되는 것은 “보다 높은 생활수준, 완전고용 그리고 경제적 및 사회적 진보와 발전의 조건, 경제·사회·보건 및 관련국제문제의 해결 그리고 문화 및 교육상의 국제협력, 인종·성별·언어 또는 종교에 관한 차별이 없는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보편적 존중과 준수”(유엔 헌장 55조)이다.

같은 시기 ILO도 필라델피아 선언(1944)을 통해 그 목적을 재확인한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며, 표현 및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를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며,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리고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영구적인 평화는 사회정의를 기초로 하여서만 확립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와 존엄성, 경제적 안정 및 기회균등이 보장되는 조건하에서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발전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조건을 확보하려는 노력은 국가적이며 국제적인 정책의 기본목표이어야 한다. 특히 경제적 및 재정적 성격의 국가적.국제적인 모든 정책과 조치는 이러한 견지에서 적용되는 것이어야 하고, 이러한 근본목적의 확보를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하며, 이를 저해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필라델피아 선언 I, II)

발전에 대한 권리로

28조가 태어난 배경이 이랬다면 이후에도 국제사회는 28조를 계속 상기한다. 1966년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규약은 “세계인권선언에 따라 공포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향유하는 자유 인간의 이상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시민적·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경우에만 성취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11조 2항은 기아로부터의 해방을 다루는데, 이를 위한 국내적 및 국제적 질서의 사례로서 특히 토지 개혁을(국내적 사회질서의 개혁), 필요에 따라 세계식량공급의 공평한 분배를 확보할 것(국제질서)을 언급하고 있다.

3세계가 인권무대에 대거 등장하면서는 개인이 무슨 권리를 갖는다고 열거하기 보다는 인권의 실현을 방해하는 주요 장벽이 무엇인가가 많이 다뤄지게 됐다. 그 목록으로 제시된 것이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분리정책), 무력 분쟁, 외국의 점령, 빈국과 부국의 불평등 격차였다. 이를 두고 국제사회는 양극화됐다. 지배적인 서구 자유주의의 인권 접근은 시민·정치적 권리에 집중하는 것이었고, 3세계 대부분의 국가들은 경제·사회적 조건을 강조했다. 이런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명목상으로나마 합치된 것이 인권을 위한 구조 변화를 다룬 ‘발전에 대한 권리’이다.

1969년 사회진보와 발전에 관한 선언은 “정당한 사회질서 속에서만 인간은 그 열망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다. 군비와 갈등을 위한 자원을 평화적 활동과 사회진보를 위한 것으로 바꿀 필요성을 언급했다. 모든 형태의 차별·불평등·인종차별주의 등의 철폐, 토지소유제도 및 임차제도를 사회정의에 최대한 적합하도록 하는 토지개혁의 이행, 모든 사람의 노동의 권리 보장, 국부 및 국민소득의 공정하고 공평한 분배, 적절한 주거의 보장, 무상 의료서비스의 달성, 환경보호, 전면적이고 완전한 군축의 달성 등이 이 선언의 주 내용이다

1986년 유엔총회는 발전에 대한 권리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 전문은 세계인권선언 28조를 재차 상기하며, 발전을 정의하고 있다. “발전은 포괄적인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과정으로서, 발전과 그로부터 산출되는 이익의 공정한 분배에 있어서의 자유롭고 적극적이며 의미 있는 참여의 기초 위에서 전 인구와 모든 개인들의 복지의 부단한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 내용에는 “인민들이 자유롭게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결정하고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발전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데서 그들의 자결의 권리”, “그들의 천연자원과 부에 관한 완전하고 충분한 주권을 발휘할 인민들의 권리”를 언급한다.
“식민주의, 신식민주의, 아파르트헤이트, 모든 형태의 인종주의와 인종적 차별, 국가의 주권·국가적 통합·영토보전에 대한 외부의 지배·점유·침략·위협, 그리고 전쟁의 위협 등의 결과들로 인한 상황에 의해 영향을 받는, 인민들과 개인들의 인권에 대한 대규모의 극악한 범죄들의 제거가 인류 대다수의 발전에 합당한 환경을 형성하는 데에 기여한다”는 것을 고려하면서, 그 해결방법으로 “군비축소와 발전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군비축소 영역의 진보는 발전의 영역의 진보를 적지 않게 증진하게 되고, 군비축소 수단을 통해 확보되는 자원들은 모든 인민들, 그리고 특히 개발도상국들의 인민들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과 복지에 바쳐져야 한다”는 점을 제시했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6조

1.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교육은 최소한 초등기초단계에서는 무상이어야 한다. 초등교육은 의무적이어야 한다.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은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고등교육도 능력에 따라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한다.
2. 교육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를 목표로 하여야 한다. 교육은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을 증진시키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엔의 활동을 촉진시켜야 한다.
3.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

자명한 권리, 지키지 않는 약속

26조의 대전제는 교육 그 자체가 보편적인 권리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것에 대해 어떤 국가도 반대를 표명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자명한 것이었기에 별다른 토론이 없었고, 모든 대표자들의 동의를 받았다.
예를 들어 브라질 대표는 “모든 사람의 교육에 대한 권리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것”이라며 “인류의 유산을 공유할 권리는 우리 문명의 기초를 형성했고 그 누구에게도 부인될 수 없었다. 교육 없이는 개인이 자신의 인격을 발전시킬 수 없었고, 이 인격은 인간 생활의 목적이자 가장 견고한 사회의 기초”라 했다. 파나마 대표는 “교육에 대한 권리 같은 기초적인 인권이 세계인권선언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지지를 보였다. 현실적으로도 당시 40여개 국의 헌법이 무상의무교육의 원칙을 규정하고 있었기에 교육권이 보편적 인권이라는 것에 의심이 없었다.

고용최저연령에 도달하지 않은 아동에 대한 교육은 무상이고 의무여야 한다는 규범에 대한 국제적 합의는 선언 보다 훨씬 이전인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에는 14세 미만 아동 노동 철폐를 얘기했다면 오늘날의 기준은 18세 미만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오래되고 확고한 약속인 교육권은 날로 위태로워지고 있다. 말로만 보편적 인권으로서의 교육을 외칠 뿐 정부와 국제사회가 실제로는 교육권 보장을 위한 의무를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대학에 갈 수 없는 것도 화가 나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초등교육조차 위태로운 아이들이 늘어가는 일이 참을 수 없을 만큼 목격되고 있다. 자국에서 교육권을 잘 보장하고 있는 국가들이라고 해서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다. 교육제도와 서비스를 소위 ‘수출’하고 있는 국가 정부들은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을 인권으로 보장하는 데 반대한다. 인권으로서 공교육이 강화되면 자신들이 팔아먹을 상품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돈을 빌려주는 은행 구실에 충실한 국제기구들도 마찬가지다. 국제무역의 규범에 충실한 상품으로서 교육을 다루고 싶어 하지, 보편적 인권으로서 교육을 고려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대외 원조나 부채 구제에 대한 결정에서 잘 드러난다. 한 예로 세계은행이 교육에 대한 컨설팅을 해준답시고 500일간 쓴 비용이 그 나라에서 5천명의 교사를 고용하는 것과 같은 비용이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런데 그런 컨설팅을 통해 나온 조언이란 게 공적 서비스로서의 교육을 지지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공교육을 강화하려면 교사의 확충이 중요한데 세계은행은 공공부문의 임금이 늘어나게 될 테니 그걸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육을 빈곤을 줄이기 위한 도구라고 강조한다. 교육을 이런 식으로 도구화하는 것도 문제지만, 빈곤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교육의 양과 질을 국제금융기구와 은행에게 결정하게 한다. 그런 교육의 양과 질은 싼 노동력을 빠른 시간에 대량으로 만들어내는데 치중한다. 이런 식으로 교육이 시장의 상품, 경제의 규모와 효율성에 따라 조절되는 것, 싼 노동력을 빨리 만들어내는 것으로 치부된다면 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을 수가 없다.

인권의 존중 강화가 교육의 목적

교육권이 필수적인 인권이란 데 반대의견이 없다 했지만, 문제는 무엇을 위한 무엇에 대한 교육인지에 대한 합의가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각 국은 자신만의 고유 브랜드를 가진 교육을 선호했는데, 그것은 “도덕적 시민의 훈련”, “국가 윤리의 발전”, “조국애, 조국의 민주제도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투쟁한 이들에 대한 사랑” 등으로 표현됐다. 이중 어떤 것이 보편적인 시민 교육의 상이라고 정할 수도 없거니와 국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무엇이든지 국민에게 주입하도록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교육을 지배하는 핵심원칙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대략이라도 써야할 필요성이 제안됐다. 그 결과가 2항에 담긴 교육의 정신이다.
26조 2항에 담긴 교육의 목적은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의 강화”이다. 여기에도 반대의 여지는 없었다. 세계인권선언 자체가 그러하지만 교육권 조항은 전쟁 경험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교육권 조항에서 전쟁 경험이라 함은 히틀러 체제하에서 독일 청소년에게 저질러진 세뇌(brainwashing)를 떠올린 것이다. 나치는 교육을 아주 강조하고 놀라울 정도로 잘 조직했지만, 그 체제하의 교육은 히틀러의 표현대로 “인종적 정서와 인종적 감정을 청소년의 본능과 지능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고분고분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전쟁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기능이었고 그 결과 파국을 맞았다. 따라서 ‘인권존중의 정신을 강화’하는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했다.
히틀러 체제에 대한 반감은 2항에서만이 아니라 3항의 부모의 선택권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3항에서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함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진다’고 한 것은 나치체제가 국가 통제로 오염된 학교에 모든 아동을 등록하게 함으로써 부모의 권리를 강탈했다고 봤기 때문에 삽입한 것이다. 이런 배경에 대한 이해 없이 부모의 선택권을 더 비싸고 더 대학가기 좋은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자유로 해석하는 것은 큰 오해이다. 여기서는 국가 권력의 남용을 반대한 것이지, 교육권의 공공성과 공적의무를 방기할 의도는 없었다.

교육은 ‘과정’이다. 이 과정 속에는 교육을 제공하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 교육을 받는 사람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지는 사람 등 다양하며 때론 서로 갈등·대립하는 교육 주체들이 포함돼 있다. 교육권의 역사는 이들 다양한 교육주체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공정한 균형을 취하기 위한 시도로 이뤄져 왔다. 세계인권선언에서 교육권에 대한 의사결정은 국가와 부모 사이에 이뤄지는 것으로 돼있는데 이것은 아동이 교육권의 주체라는 개념이 자리 잡은 지금에는 구시대적인 것이다.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을 생각한다면 이들 관계 속에서 가장 약자의 처지에 있는 아동의 입장에서 생각할 것이 요구된다.

인권교육의 이상 담은 교육권

2항에 담긴 또다른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이다. 원래는 “인격의 신체적, 지적, 도덕적, 정신적 발전”으로 제안되었으나 몇 개의 수식어로 교육의 모든 목적을 요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완전한 발전”으로 고쳐졌다. “모든 국가들과 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 간에 있어서 이해, 관용 및 친선의 증진”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유엔의 활동을 촉진”시킨다는 목적은 ‘국제적 친선의 증진’이라는 단순한 표현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특히 유엔의 임무가 언급된 것은 ‘평화유지’라는 유엔의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교육받은 대중여론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의 교육의 목적을 정리하면 그것은 곧 인권교육의 이상이라 할 수 있다. 유엔은 인권교육에 대하여 “지식을 제공하는 것 이상이며, 모든 발달 단계에 속하는 사람과 모든 사회 계급의 사람들이 타인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배울 수 있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존중을 보장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포괄적인 전 생애 과정”이라 했다. 교육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는 국가는 이러한 교육의 목적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질과 내용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인권교육을 흔히 ‘역량강화교육’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비되는 것은 ‘은행저축식 교육’이다. 은행저축식 교육개념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서 스스로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는 것이다. 즉 학생은 무지하고 교사는 안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은 학생들이 스스로 배우며 학생들이 또한 교사를 교육하기도 한다는 측면을 무시한다. 또한 탐구 과정으로서의 교육과 지식을 무효로 한다.

반면 역량강화 교육은 ‘스스로 배우고 더불어 배운다’고 한다. 교육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증대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지식은 억압적인 사회, 정치, 경제 조직의 유형을 이해하고 의문시할 수 있는 것이고, 비판적 의식을 획득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비판적 의식을 통해 역량강화된 사람들은 억압적인 관계를 변화시킨다. 억압적이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존엄성을 보호하고 증진할 수 있는 조직과 활동양식을 계획하고 발전시키는 능력을 추구한다.

역량강화 교육이 되어야

인종, 성별, 언어, 종교, 계급, 재산 등에 따른 차별 금지를 26조에서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지는 않다. 이미 세계인권선언 2조에 그런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열거는 없더라도 교육에 있어 차별을 금지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라는 표현이나 “일반적으로 이용할 수 있어야”하고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는 구절에서도 반복되는 점은 교육상의 차별금지이다.
교육에 대한 접근에서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요건이란 없다. 유일한 기준으로 언급된 것은 고등교육에서의 ‘능력(merit)’이다. 정부의 공식번역본에서 ‘능력’이라 쓰고 있지만, ‘장점’이라는 표현이 더 나을 듯하다. 여기서의 능력 내지 장점이란 특정 부문의 교육에 열중할 수 있는 관심이나 소질을 말하는 것이지 과도한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나 천재 소리를 들을 만한 능력을 말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한국에서는 요원한 무상 교육

의무교육의 전제조건은 ‘무상’이다. 무상교육이 아니라면 의무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무상이라는 전제에서 초등교육이 ‘의무’로 규정돼 있는 것이기에, 여기서 의무라 함은 국가가 무상교육을 보장할 의무를 말하는 것이고, 돈 걱정 없이 자녀를 학교에 보낼 수 있는 조건이 충족된 상태여야만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의무를 방임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무상’에 대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해석은 수업료 등 직접적인 비용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이고, 간접적인 부과, 예를 들어 의무적인 기부금, 상대적으로 비싼 교복 착용 등도 안된다는 것이다.

“최소한” 초등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선언의 규정은 다른 단계의 교육에도 확장되는 원칙이다. 선언을 만들 때 초등교육만이 아니라 고등교육을 포함한 모든 교육이 무상이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근거는 무상이 아니라면 재능에 기초하여 교육에 평등한 접근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각 국의 경제사정을 고려해야 했기에 최소로 합의한 것이 초등의무무상교육이었다.
세계 10위권이라는 경제력을 갖춘 한국 같은 나라에서 초등무상교육을 하는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소득수준은 사교육비 지출과 비례하고 또한 학업성적과 비례하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고치기 위한 교육이 불평등 유전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이다. 교육의 불평등을 염려하는 교육단체나 언론 은 한국이 대학교육까지 무상교육을 실현하는 일은 결코 불가능이 아니라고 얘기해왔다. 가령 GDP 대비 6%의 교육재정만 확보해도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교육비를 충당하고도 수조원이 남으며, 이것을 대학에 투자하면 무상교육의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한국이 중학교까지 달성했다는 무상교육도 진짜 의미의 무상 공교육이라 볼 수 없다. 법적으론 무상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너무 많은 돈을 요구한다. 당사자가 사적으로 지불해야만 하는 교육비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사교육비 지출이 천문학적 수준이라는 것을 누구나 안다. 대학만이 아니라 무상교육단계에서부터 그렇다.

유엔 교육특별보고관은 이것을 “공교육의 민영화”(privatization of public education)라 비판했다. 거죽은 공교육일지 모르지만 속은 사교육비로 채워져 있기에 이런 교육을 공교육이라 부를 수는 없다고 했다. 사교육비를 지출하지 않는 학부모와 학생이 ‘맘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가 물어봤을 때, 그게 아니라면 교육은 권리가 아니라 돈 주고 사는 상품인 것이다.

교육의 자유

또하나 경계해야 할 것은 자유권과 사회권의 도식적 구분이다. 흔히들 26조에 있는 교육권을 사회권으로 분류한다. 세계인권선언의 전반부를 자유권으로, 22조부터의 후반부를 사회권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육은 고도의 정신적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기본적인 정신적 자유권의 하나이다. 교육권은 정신적 자유권을 바탕으로 하면서 사회권적 요소를 지닌다. 사회권으로서의 교육권은 국가가 교육의 모든 단계에서 무상의 비종교적 공교육을 조직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근대 자유주의의 교육권과 현대적 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이 구별되는 이유가 이러한 사회권의 요소이다. 교육은 돈이 있는 자가 자기 돈을 내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일이라고 이해되던 시대에는 교육의 ‘자유’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현대의 교육권은 국가에 대해 의무교육의 실시나 교육시설의 정비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돈이 없는 사람도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국가가 그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점을 당연히 그 권리 속에 포함한다. 이런 국가 활동 없이는 현대의 공교육이 성립될 수 없다.
자유에 대한 불간섭과 적극적인 국가 행동 둘 다를 요구하는 주장의 결합이 세계인권선언의 26조에 나타난다. 정신적 자유권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권은 자유의 실질적 보장을 위한 측면에서 국가 활동을 요구하는 것이지, 정신활동에 대한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유권 또는 사회권 어느 한편으로 교육권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국가의무의 4요소; 가용성, 접근성, 수용성, 적응성

유엔 교육특별보고관은 교육권 보장을 위한 국가의 의무로서 4가지 요소를 지적한 바 있다.
첫째, 가용성(availability)이다. 모든 학령기 아동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모든 아동이 공립학교에만 다니는 것은 아니므로, 공립학교를 포함한 모든 교육기관은 아동의 교육권 보장을 위해 최소한의 일치된 성격을 보장해야 한다. 뭐가 일치돼야 하느냐면 국내외적으로 금지된 차별이 없어야 하며, 초등무상교육의 원칙이 보장돼야 한다. 정부는 모든 교육기관이 최소 기준을 충족시키도록 보장해야 하며 차별과 배제 없는 통합교육을 보장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감독하고 재정 지원하는 것은 국제인권법에 부응해야 한다. 모든 교육기관에서 교사들의 지위는 노동조합의 권리를 포함하여 국제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누려야 한다.

둘째, 접근성(accessibility)이다. 선언에서는 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한다고 표현했다. 접근성과 밀접한 문제는 교육비이다. 직·간접적인 교육비용, 통학비용 등의 장벽이 제거돼야 한다. 의무교육 이후의 교육에서도 비차별적이고 감당할만한 수준의 교육접근성이 보장돼야 한다. 교육은 결코 상품으로 취급돼선 안되며 시장이 실패하면 국가가 개입한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도 안된다.
비차별은 즉각적으로 완전 보장돼야 하는 원칙이다. 가령 장애아동의 경우 학교 건물이나 교실이 그들의 접근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면 실질적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셋째, 수용성(acceptability)이다. 교육은 교육 참여자들이 용납하고 수용할만한 것으로 확인된 최소한의 기준을 보장해야 한다. 최소한의 기준에는 교육의 질, 안전, 건강한 환경이 포함돼야 한다. 학교 규율과 교수방법은 인권을 존중하는 것이어야 한다. 가령 교육 참여자의 평등권, 프라이버시, 인격의 발전을 침해하는 처벌과 규제는 안된다.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란 아동은 억압에 제대로 맞설 수가 없다. 억압과 비교될 수 있는 대안적인 시스템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억압이 사라져도 언제든지 억압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민주주의와 인권은 교육과정에서 습득하고 실현해보는 가치여야 한다. 배우는 과정은 또한 물리적 장벽의 제거를 요구한다. 가령 교육을 방해하는 빈곤, 교육에서 채택한 주류언어로 인한 차별, 장애로 인한 교육 장벽이 제거돼야 한다.

교육권 위협하는 상품으로서 교육

넷째, 적응성(adaptability)이다. 아동 최선의 이익을 위해 교육내용과 과정은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개념에서 특히 주목한 점은 일하는 아동을 위한 교육이 무엇인가이다. 극단적 형태의 아동노동, 아동노동에 대한 착취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그래서 기초교육을 마치는 나이와 고용, 결혼, 징병, 형사책임을 묻는 나이를 일치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일하는 아동에게 교육이 제공돼야 한다는 적극적 측면의 고려도 있어야 한다. 많은 지역과 가정의 현실은 아동이 일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학령기 아동은 무조건 일을 하지 않고 학교에 있어야 한다는 방식의 접근으로는 아동의 교육도 노동도 보호될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 교육이 적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하고 배운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주경야독’의 접근법이 요구된다. 한 예로 고용된 아동의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 정도로 제한하여 적어도 2시간 이상의 교육과 병행하도록 하고, 그 비용을 고용주에게 지불하도록 한 국가도 있다. 빈곤한 가정이 아동을 학교에 보내는 동안에는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해주는 시도도 있다. 교육이 적응성을 갖는다는 것은 학교 밖의 교육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다. 자유를 상실한 아동, 난민아동, 국내실향민, 일하는 아동 등 교육기관에 접근할 수 없는 범주를 위한 교육이 적극 고려돼야 한다.

또한 공식 교과과정이라는 것이 아동의 실제 삶과는 상관없이 다음단계의 상급교육과정(사실상 많은 아동이 갈 수 없는)으로 진학하기 위한 내용으로만 채워져 있는 것도 문제이다. 직업교육을 진학교육보다 열등한 것으로 보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교육 내용의 적응성은 교육을 통한 인권보장을 염두에 둔다. 다른 세계와 문화, 역사, 성역할 등에 대한 공정한 정보를 제공하고 불평등·편견·차별의식과 싸울 수 있는 교육이 요구된다.

교육권은 흔히 인권 중의 인권으로 얘기된다. 유엔교육특별보고관은 “교육은 여타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라고 했다. 세계인권선언에 교육권을 넣을 때는 ‘자명’한 것으로 합의했지만, 실천에서는 그 열쇠가 제대로 맞지 않을 때가 많다. 교사 100명당 적어도 150명 정도의 군인이 있는 것이 현세계이다. 거래하고 소비하는 상품으로서의 교육이 교육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인권을 풀어내는 열쇠를 그런 식으로 소진해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작성일자 : 2008. 12. 22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5조

1. 모든 사람은 식량, 의복, 주택,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실업, 질병, 장애, 배우자와의 사별, 노령, 그 밖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다른 생계결핍의 경우 사회보장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2. 모자는 특별한 보살핌과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어린이는 부모의 혼인여부에 관계없이 동등한 사회적 보호를 향유한다.

‘적절한 생활수준’이란 언뜻 보기에 알 듯 말 듯 한 기준이다. 사법부나 정책입안자들은 ‘적절한 생활수준’의 개념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정의하기 어려우니 권리로 보기 힘들다는 말부터 꺼내려 든다. 하지만 부모의 눈에는 자녀에게 적절한 먹을 것이 어떤 것인지가 구체적으로 떠오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병치레를 해보거나 병원을 이용해본 사람에게는 적절한 의료가, 학교를 다녀본 사람에겐 적절한 교육이, 지하주거와 전세난과 셋방살이를 겪어본 사람에겐 적절한 주거가 무엇인지가 구체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의 중요한 단계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있다. 가능한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으려면, 수치심이나 불합리한 장벽 없이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으려면, 구걸·성매매·강제노동이나 채무노동 같은 방법에 의존하지 않고 삶의 기본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으려면 인간생활에 갖춰야 할 근본적인 ‘무엇’이 있다. 이 ‘무엇’은 물질적인 재화와 서비스만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정신활동에 관련된 것을 포함한다. 이 ‘무엇’을 국제인권법에서는 ‘적절한 생활수준을 누릴 권리’로 표현했다. 세계인권선언 25조는 “식량, 의복, 주택,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포함하여 자신과 가족의 건강과 안녕에 적합한”이고, 유엔경제·사회·문화적 권리협약 11조에서는 “식량, 의복 및 주택을 포함하여 적절한”이다. 아동권리협약에서는 “아동의 신체적·지적·정신적·도덕적 및 사회적 발달에 적합한 생활수준”이라 했다.

적절성의 의미

‘적절성’을 양적인 지표로 나타낸 예는 많다. ‘하루 몇 칼로리의 영양소가 어린이와 성인에게 요구된다’, ‘1인당 몇 평의 주거공간이 있어야 한다’, ‘기본적인 생활을 위해 얼마 이상의 소득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양적지표에는 담기지 못하는 것이 많다. 어떤 사람들이 특히 취약하고 차별받고 있는지, 문화적으로 환경적으로 적절한 의식주는 무엇인지, 권리 당사자의 참여가 보장되고 있는지 등을 다루기는 어렵다. 하루 1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살아가는 인구가 세계인구의 20%에 달한다는 식의 통계는 빈곤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말해줄 뿐 왜 그 사람들이 가난하게 되었는지, 그 사람들의 존엄한 삶에 필수적인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국제사회에서는 양적지표만이 아니라 적절한 생활수준의 질적인 측면을 구체화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 결과 주거, 식량, 물에 대한 권리 등 각각에 대하여 ‘적절성’에 대한 상세한 개념 정의가 많이 진전됐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에서 ‘적절성’의 의미는 ‘경제적·물리적·정보적 접근성, 지속가능성, 차별금지, 안정성, 가용성, 문화적 수용성, 국가의 책임성’ 등이다.

적절성의 대표적 요소는 감당할 만한 비용으로 필수적인 생활요소에 접근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주거는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고 비용도 꽤 많이 차지한다. 그러나 사람은 주거만으로는 살 수 없다. 밥도 먹어야 하고 옷도 낡으면 새로 사 입어야 하며 아프면 치료를 받아야 하고 아이들은 기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한다. 집에 너무 많은 돈을 쓰게 되면 다른 곳에 꼭 써야 할 돈을 쓰지 못하게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 따라서 주거비용은 개인의 기본적 욕구가 위협당하지 않을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식비, 의료비, 교육비도 마찬가지다. 아랫돌 빼서 윗돌 막고 윗돌 빼서 아랫돌 막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중 어느 하나에 관련된 비용이 다른 기본적 필수품의 획득 및 충족을 위협하거나 제한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어야 한다.

비용이 경제적 측면의 접근성을 얘기하는 거라면, 다른 차원의 접근성도 고려해야 한다. 누구나 고용기회, 의료, 교육 등 필수적인 서비스와 편의시설 등에 접근 가능한 곳에서 살 수 있어야 한다. 차별 없는 접근성도 중요하다. 독립생활을 하는 장애인들은 하나같이 집구하는 것의 어려움을 얘기한다. 비용도 문제고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의 경우 편의시설 접근성도 문제지만 집주인들이 장애인이라고 하면 임대를 거절한다는 것이다. 장애인이 혼자 살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책임질 수 없다거나 편의시설을 집에 갖추기 위해 약간의 개량을 하는 것조차 꺼려하기 때문이란다. 물리적 접근성 뿐 아니라 차별 없는 접근성은 적절성이 갖춰야 할 대표적 요소이다.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어야 적절성에 부합

적절성은 당장의 편리만을 생각해선 안 된다. 여기서 나온 개념이 ‘지속가능성’이다. 가령 식량권에서 지속가능성을 생각해보자. 현 세대 만이 아니라 미래 세대에게도 식량권은 중요하다. 당장의 먹을거리를 증산하기 위하여 화학비료를 남발하고, 자유무역과 단일품종, 유전자조작식품 등에 의존하는 체제는 식량권의 지속가능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세계의 농민들이 들고 나온 개념이 ‘식량주권’이다. ‘식량주권’이란 먹을 것에 대한 권리와 먹을 것을 생산할 권리 둘 다를 포함하는 것이다. 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식량권이 기본적 인권이라면, 그 식량을 어떻게 얼마만큼 생산하느냐는 정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식량 생산을 위한 자원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를 통해 문화적 다양성과 환경을 보존하며 초국적 기업농의 유전자 조작 식품과 단일품종, 종자약탈 등의 횡포로부터 벗어나자는 것이다.

적절성의 또 다른 요소는 안정성 또는 안전성이다. 가령 주거권의 경우에 집달리라는 것이 있다. 빚을 못 갚거나 한 사람을 살던 곳에서 내모는 일을 집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새벽에 들이닥쳐서 잠에 취한 사람을 엉겁결에 내쫓거나 사람이 일 나가서 없을 때 집을 때려 부수기도 한다. 어떤 조건에서건 갑자기 쫓겨나거나 철거되거나, 그 집에 살 수 없도록 강한 협박과 폭력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 갑작스럽게 거주공간을 빼앗기거나 퇴거의 위협을 받는 경우 국가는 피해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식량권의 경우에는 안전성이라 하면 일단 해로운 물질이 없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식량이 불순물 및 불량한 환경위생이나 여러 단계의 공급과정 중의 부적절한 취급으로 인하여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식량안보 및 일련의 보호조치를 취해야 한다. 뻔히 위험한 줄 알면서 무역보복 등을 이유로 특정식품의 소비를 강제하는 일 같은 건 있어선 안 된다. 당장의 해로운 물질 뿐 아니라 장기적인 식품 안정성도 고려해야 한다. 앞서 말한 지속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적절한 식량권을 보장받기 어렵다.

가용성은 충분한 양으로 확보해 이용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강권의 경우에는 보건의료자원뿐 아니라 안전한 식수, 적절한 위생시설, 작업시간 사이에 적절한 휴식시간의 보장, 쾌적하게 쉴 수 있는 주거환경 등 건강결정요인이 가용성에 다 포함된다. 주거권의 경우에는 주거 공간이 생활을 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생활에 필요한 필수 시설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집에는 안전하게 마실 물과, 요리와 난방, 조명을 위한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또 위생을 유지하기 위한 욕실과 세탁 시설, 쓰레기와 하수를 처리할 수 있는 시설, 소방시설 등 비상서비스에 대한 접근성도 있어야 한다.

온 세상 사람들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를 누려야 하지만 똑같은 것을 먹고 입고 똑같은 집에서 잔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루미와 여우 이야기가 있다. 서로를 식사에 초대하는데 여우는 넓적한 접시에 음식을 내놓는다. 두루미의 긴 부리로는 접시에 담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반대로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했을 때는 긴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 내놓는다. 두루미는 부리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지만 여우는 주둥이를 호리병에 넣을 수가 없어 먹을 수가 없었다. 문화적 수용성은 이런 것이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문화의 사람에게 삼겹살을 주면서 먹으라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생활에 필수적인 요소의 문화적 적절성과 다양성의 보존도 적절성의 중요 요소다. 가령 ‘아파트 숲’은 서울 등 대다수 도시의 당연한 풍경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주거형태에 있어 다양성이 이처럼 무섭게 소멸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그나마 남은 미개발 구역조차 언제 개발논리에 의해 쓰러질지 모를 일이다. ‘한양주택’ 같은 예쁜 마을이 그린벨트 해제와 뉴타운사업계획으로 무차별 개발된 것이 대표적 침해사례라 할 수 있다.

국가의 책임성과 의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가 의미를 가지려면 국가가 각 권리의 구성요소를 입법적으로 인정하고 정책으로 드러내는 일련의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국제사회는 이런 국가의 의무를 측정하고 평가하기 위해 ‘최소한의 핵심의무’와 ‘존중·보호·실현의 의무’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최소핵심의무는 국가의 가용자원의 양 혹은 다른 어떤 요소와 어려움에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의무이다. 여기에는 필수적인 식량, 기초의료, 기본적인 주거와 초등교육 등이 해당한다. 가령 물에 대한 권리의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도 물 공급을 끊어버려서는 안된다는 것, 주거권의 경우에는 강제철거로부터의 보호 등이 최소핵심의무의 예이다.

가령 단전단수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돈을 못낸다고 해서 전기와 수도를 끊어버린다. 그래서 한겨울에 난방도 못하고 촛불을 켜고 살다가 화재를 당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있고, 세수와 세탁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린다. 끊어버리는 것 말고 분명 다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이 한국의 경제수준에서 과연 불가능한 것이고 자원이 그정도로 부족한 것일까. 독일에서 몇 년을 난민으로 산 친구가 있다. 난민으로서 받는 최저생계비와 간단한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가던 그 친구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다. 어른은 그럭저럭 겨울 추위를 버텨냈지만, 어린 아기는 계속 감기에 시달렸다. 부부는 아기 때문에 어쩔 수없이 전기스토브를 켰다. 전기비가 생활수준에 비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나왔다. 당국에 설명을 했다. 우리 소득 수준은 이렇지만 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자 당국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걸 이해하고 전기요금을 감면해줬다.

한국과 독일보다 경제사정이 열악한 국가들의 상황에서는 어떨까. 이런 국가들의 최소핵심의무에는 이런 사례가 있다. 모든 아동은 무국적을 방지하고 사회속의 신분을 획득할 수 있도록 출생과 동시에 이름과 국적을 가질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출생신고가 돼야 한다. 그런데 행정망이 발달하지 않은 가난한 국가들은 이런 등록의 의무를 방치한다. 가령 당장에 동네마다 동사무소 같은 걸 만들 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식이다.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도 없는 존재인 이들 아동은 인신매매의 표적이 되거나 착취적인 노동에 시달리거나 교육에 접근할 수 없는 등의 인권침해 위험성이 크다. 이에 대해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최소핵심의무를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이렇다. 당장의 자원의 부족 때문에 이름과 국적을 가질 아동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당장 동사무소를 지을 돈은 없을지라도 지금의 경제형편에서라도 트럭 몇 대는 갖출 수 있지 않은가. 자력으로 안되면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을 수도 있다. 트럭에 이동사무소를 설치하여 방방곡곡을 돌면서 아동의 신분등록을 받으면 인신매매나 아동노동 등 이차적인 아동에 대한 인권침해를 막을 수 있다고 했다. 최소핵심의무란 건 이런 것이다.

국가에 지워진 인권의 존중·보호·실현의 의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더 구체화한 기준이 존중·보호·실현의 의무다. 존중의 의무란 국가가 직접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되고 인권을 누리는 데 방해요소를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가령 비정규직의 확대를 꾀하는 법을 만들고 통과시키는 일은 노동권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침해하며 고의적으로 인권을 후퇴시키는 조치에 해당한다. 보호의 의무란 국가가 인권을 존중할 뿐 아니라 제3자(가령 기업)에 의해서도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의무이다. 가령 가정에서 벌어지는 아동학대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일, 고리대금업자가 폭력과 위협을 행사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 기업이 산업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하게 내버려 두는 일 등은 보호의 의무위반에 해당한다. 실현의 의무란 국가가 인권의 충분한 실현과 향상을 위한 목표를 설정해야 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합리적으로 계획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법률·행정·예산·사법조치가 모두 포함된다. 그리고 그 성취의 결과에 대해서도 따져봐야 한다. 의무가 이행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경우인지를 국가가 증명할 책임도 있다. 예를 들어 태풍 때문에 교육기관이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면 국가의 통제를 벗어난 경우인 반면, 적절한 대책 없이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의료보호체계를 축소했다면 의무 이행의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거권을 사례로 존중·보호·실현의 의무를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강제퇴거와 철거는 존중의 의무 위반

방글라데시의 한 도시에서는 사전 예고 없이 비공식 거주민들이 쫓겨났고, 그들의 집은 불도저로 철거됐다. 이에 대해 인권단체와 주민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비공식 거주민들은 불운과 자연재해의 피해자이며 고용기회·식량·주거가 빈곤한 농촌지역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또한 빈민지역 거주자들이 국가 경제에 상당히 기여했음을 인정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령했다.
“정부는 빈민지역 거주민들의 재정착을 위한 정책 지침을 개발해야 한다.
철거는 대안적 주거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그런 능력이 갖춰진 단계에서 허용되도록 해야 한다.
철거 전에 합리적인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안전상의 이유로 철로변과 도로변의 빈민촌이 정화돼야 한다할지라도, 거주민들은 정책지침에 따라 다른 곳에 재정착할 수 있어야 한다.”

적절한 주거권에 대한 존중의 의무는 국가와 그 기관이 단독으로나 제3자와 결합하여, 주거·서비스·관련된 물질과 자원에 대한 권리를 침해하거나 접근을 가로막는 여하한 관행, 정책, 법적 조치를 수행하거나 지원 또는 관용하는 일을 삼가는 것이다. 평등하고 비차별적인 원칙에 기반하는 주거권에 대한 존중의 의무는 국가가 불리한 상황에서 살아가는 집단을 특별히 고려하여 그들에게 정당한 우선순위를 두는 것을 포함한다. 이같은 존중의 의무에서 가장 분명한 침해에 해당하는 사례는 강제 퇴거와 철거이다.

보호; 인권침해를 방지할 국가의 의무

아프리카 인간과 인민의 권리 위원회(the African Commission on Human and Peoples' Rights)는 오고니족(나이지리아의 소수민족)의 땅에서 다국적 석유회사와 나이지리아 국영기업이 석유채취와 관련하여 저지른 각종 인권침해에 대한 인권단체의 제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석유채취 활동을 모니터하지 않았고, 의사결정에 지역사회를 참여시키지 않음으로 인해 착취(외국의 경제 착취를 포함하여)로부터 거주민을 보호할 국가의 의무를 위반했다. 또한 부와 천연 자원의 박탈로부터 보호할 의무를 위반했고, 석유착취에 대해 지역민에게 물질적 혜택을 제공하지 않은 것 또한 침해이다. 주거권과 강제철거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주거파괴와 주민에 대한 괴롭힘으로 침해됐다. 이에 위원회는 오고니족에 대한 공격을 중단할 것, 책임자를 조사하고 기소할 것,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제공할 것, 장차 환경영향평가 및 사회적 영향 평가를 분비할 것, 건강과 환경적 위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것을 나이지리아 정부에 명령한다.”

적절한 주거권에 대한 보호의 의무는 국가 자신, 개인들, 사적인 주체, 여타의 비국가 행위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주거권 침해를 국가와 그 기관이 방지하는 것이다. 주거권 침해에 대해서는 조사가 이뤄져야 하고, 침해자들을 기소하고, 법적 및 기타의 구제가 피해자들에게 제공돼야 한다.

실현; '제공'과 '촉진'의 의무

남아공 헌법재판소는 국가의 주거권 실현의무에 대해 이런 결정을 내린바 있다.
“국가는 입법적 및 기타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 입법 조치 그 자체만으로는 헌법의 준수라 할 수 없다. 단순한 입법만으론 충분치 않다. 국가는 의도된 결과를 성취하기 위해 행동할 의무가 있고, 행정부는 적절하고 잘 짜여진 정책과 프로그램으로 당연히 입법조치를 지원해야 한다. 이런 정책과 프로그램은 개념으로나 이행으로나 합리적이어야 한다. 프로그램의 형성은 국가의 의무 실현의 첫단계일 뿐이다. 프로그램은 합리적으로 이행돼야 한다.
일련의 조치들이 합리적인가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사회적·경제적·역사적 맥락에서 주거문제를 고려하고, 프로그램 이행에 책임을 지는 기관의 능력을 고려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프로그램은 균형 있고 유연한 것이어야 하며, 주거 위기와 단기 및 중장기적 기간의 필요에 유념하여 적합한 제공을 해야 한다. 사회의 상당 계층을 배제하는 프로그램은 합리적이라 할 수 없다. 조건은 정적인 채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기에 프로그램은 지속적인 검토를 필요로 한다.”

실현의 의무는 ‘제공’의 의무와 ‘촉진’의 의무로 생각할 수 있다.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그들이 통제할 수 없는 이유로 인해 자신들이 가진 수단으로는 적절한 주거권을 향유할 수 없을 때에 정부는 주거권을 직접적으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의 주거정책과 프로그램에서 주거취약계층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또한 국가는 적절한 주거권을 보장하기 위한 자원과 수단에 대한 접근과 이용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전 대책을 강구하여 의도적인 활동을 기울여야 한다.

인권에 기반을 둔 접근이란?

어렸을 즉 읽은 얘기다. 한 백인 중산층 소녀가 빈민가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갔다. 자기가 사는 곳과는 너무 다른 환경에 소녀는 충격을 받았다. 그 집은 거의 동물우리같은 수준이었고 친구의 아픈 엄마는 치료도 못받고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소녀는 제 딴에 최선을 다해 생각해낸 것이 “사회보장 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제가 부모님께 말씀드려 신청해 볼게요”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친구의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다. “싫어요. 우리 형편이 어렵기는 하지만 그런 걸 받아야 할 만큼 비참하지는 않아요.”였다.
난 이해가 안됐다. 사회보장 급여를 받는 게 왜 싫다는 거지? 그런데 곧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됐다. 온갖 낙인을 감수하면서 쥐꼬리만한 도움을 받느니 자존감을 지키고 싶다는 심정 말이다. 내가 6학년 때의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걷는다. 보통은 그렇게 걷은 돈을 양로원 등에 보내곤 했는데 그 해에는 우리 반에서 제일 형편이 어려운 아이를 남녀 한명씩 골라 성금을 처리한다고 했다. 제일 형편이 어려운 친구는 반 아이들이 추천했다. 모두가 있는 교실에서 ‘쟤요, 쟤요’라고 지목하는 식으로 하는 추천이었다. 여학생 중에 추천된 건 나였다. 그래서 반 아이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불려나가 공책과 연필, 뭐 그런 것들을 ‘친구들의 마음의 선물’이란 말과 함께 담임선생님께 받았다. 그런데 하나도 고맙지가 않았다. 그날 이후 하교길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이 나를 멀리했다. 나도 같이 가는데 달갑지 않고 혼자인 게 맘 편했다. 난 가난하니까 구제받아야 할 아이로 완전히 찍힌 거였다.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는 물질만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공책 몇 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배제를 느끼지 않고 학교에 다닐 수 있는 환경이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에게 요구되는 것이었다. 자선이 아닌 권리라는 데 핵심이 있다. 권리의 핵심은 존엄성을 해치지 않고 존엄성을 발전시킬 기본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것들이 발휘되지 못한다면 도대체가 인간의 삶이라고 할 수 없을 그런 최소한의 기본적 역량의 발휘는 무조건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권리이다. 이걸 목록으로 표현한 것이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이다.
적절한 생활수준에 들어가는 목록은 역사적으로 변해왔다. 옛날에 ‘빵과 자유를 달라’ 했을 때는 정말 빵만을 생각했다면, 주거, 의료, 교육 식으로 적절한 생활의 요소는 강화되어 왔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물에 대한 권리, 공공운송, 문화적 시설 등이 떠오르고 있다. 문제는 이런 것들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느냐이다. 한국 같은 곳에서는 자력구제의 성격이 강하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을 할 때 그걸 그냥 ‘임금’으로만 봐서는 안된다. 사회적으로 적절한 생활수준의 권리를 뒷받침해주는 것이 부족하기에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적절한 생활수준을 해결봐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임금으로 적절성을 해결 보는 것은 대다수 노동자에게 어림없는 일일뿐더러 사회보장의 의미도 퇴색된다.

사회보장에 대한 시각과 그걸 보장하는 방법은 사회에 따라 아주 다르다. 어떤 사회에서는 자력으로 생존에 실패한 사람들이 구차하게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사회에서는 그 사회에 거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편적으로 누릴 수 있는 공기 같은 것이다. 적절한 생활수준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인권수준이 드러난다. 되는 사람은 임금을 통해 해결하고 노동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잔여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냐, 사회적 연대의 정신에서 필수적인 것을 같이 해결하느냐는 그 철학과 접근 방식이 아주 다를 수밖에 없다.

‘인권에 기반한 접근’이란 이런 문제의식에서 나온 개념이다. 기존의 경제발전구조에 덤으로 사회적 지출을 덧붙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발전계획 자체에 인권을 중심요소로 앉히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발전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적극적인 경제·사회·정치정책이 있지 않으면 권리는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발전의 핵심 목적은 가장 소외되고 취약한 사회구성원의 역량강화이다.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을 강조한다. 인권을 발전에 추가요소로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정책의 발판으로 여기는 것이다.

인민이 권력과 역량을 가져야

핵심은 자선에 반대하고 인민이 권력과 역량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설문조사식의 형식적 참여가 아니라 능동적이고 자유롭고 의미있는 참여가 가능해야 한다. 의미있는 참여란 결정과정에 참여하고 그 결정의 결과에 같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가령 거주지에서 밀려나 이주비 보조를 받는 수준이 아니라 부동산정책과 개발계획에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인권영향평가가 모든 발전계획, 정책, 예산, 프로그램에 적용될 것을 요구해야 하고, 경제지표만이 아니라 불평등지표, 빈곤지표, 성평등관련지표 등이 측정과 평가항목이 돼야 한다.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잉여의 재화를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재화라도 그것을 정의롭게 분배하는 차원과 관련된 문제이다. 그리고 기본권의 실현은 평등하게 권리를 가진 사람들의 자율성을 활성화하는 것과 병행되는 과정이다.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에 대한 흔한 오해 중의 하나는 복지예산을 늘리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투입의 양을 늘리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고려하지 않을 때는 복지반대론자들이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거지근성이다, 밑빠진 독에 물붓기다’식의 문제만 눈에 띄게 될 것이다. 인권에 기반한 접근은 ‘단지 더 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얻으면 된다, 단순히 사회보장, 교육, 의료에 들어가는 지출을 늘리면 된다’는 식의 해결방식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지출만 늘린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 권리의 당사자가 얼마나 참여하여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발전활동이 자동적으로 인권존중을 증진시키지 않고, 단지 건강, 교육 등의 지출로 인해 증진되지 않는다. 인권에 기반을 두지 않는 경제발전정책은 힘들게 생산한 부가 편중·낭비되고, 특정집단이 오히려 차별받는 것으로 잘못 수행될 수 있다. 불평등은 지구적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차별정책)라 불린다. 국내에서도 불평등의 심화는 ‘신인종분리정책’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기준에 비추어 빈곤을 다시 생각해보자. 얼마 전까지도 해도 빈곤은 최소한의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하기에 불충분한 소득으로 정의됐다. 오늘날에는 존엄하게 살 수 있는 기본적 역량(capabilities)의 결여로 이해된다. 빈곤은 굶주림, 빈약한 교육, 차별, 취약성, 사회적 배제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등의 시각으로 볼 때 빈곤은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뿐 아니라 여타의 인권을 누리는 데 필수적인 자원, 능력, 선택, 안전 및 권력을 지속적이거나 만성적으로 박탈당한 인간 상황으로 정의될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소득만 늘리거나 소비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만 늘리는 방식의 접근이 아니라 비차별과 평등 원칙의 강화, 빈민 당사자의 참여, 국가책임성의 구체화 같은 것이 고려돼야 한다

작성일자 : 2008. 12. 22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2조

모든 사람은 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권리를 가지며, 국가적 노력과 국제적 협력을 통하여 그리고 각국의 조직과 자원에 따라 자신의 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불가결한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의 실현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사람의 삶은 불안의 연속이다. 소득이 끊긴다는 것은 전기와 수도 등 기초적인 필수물의 공급중단, 학업 중단, 주거 불안, 건강 불안 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끊어놓는다. 가족관계를 포함하여 많은 사회적 관계들이 거센 파도에 따라 출렁거리게 된다. 지금의 경제위기 속에서도 그렇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몇 번씩의 큰 고비를 넘어야 했을 것이다. 살던 집이 넘어가고 모든 저축과 보험을 해약해야 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고비 말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을 외면하는 것이 인권이라 할 수 있을까?

해체해야 할 인권의 범주

인권은 이런 저런 이름과 범주로 나뉜다. 어떤 식으로 나누는지부터 알아보고 그 문제점을 생각해보자. 흔한 구분은 자유권과 사회권식으로 나누는 이분법이다.
먼저 자유권은 권력에 대항하여 발전한 고전적 인권으로서 주로 국가의 불법적이고 부당한 행위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다. 자유권은 다시 시민적 권리와 정치적 권리로 구분된다. 시민적 권리는 국가권력이나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침해돼서는 안 되는 개인의 삶의 특정 부문을 보호하기 위한 권리이다. 신체적 보전에 대한 권리,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 정당한 절차와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 등이 포함된다. 이런 시민적 권리가 가만히 앉아서 보장될 수는 없다. 권력이라는 건 잠시만 틈을 줘도 인권보장이라는 제 본분을 망각하고 오만한 것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민적 권리가 보장되려면 사회 구성원들이 쉴 틈 없이 국가권력을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비판해야만 하고, 주권을 행사하는데 참여해야만 한다. 이런 것에 관계된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정치적 권리라 한다. 시민적 권리는 정치적 권리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인권선언 21조까지의 권리가 자유권 또는 시민‧정치적 권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사회권은 인간의 기본적 생존을 보장하고 분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적극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권리이다. 경제적 불평등이 지배하는 사회 현실을 외면한 채 시민‧정치적 권리만을 인권이라 했을 때 그 폐해는 컸다. 인권이란 일부 가진 자만이 누리는 권리에 지나지 않았다. 인권의 역사에서 참정권은 재산에 따라 엄격히 제한됐고, 표현의 자유는 시장거리와 선술집에서 논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의사당 안의 의원들과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다. 인신의 자유는 절차를 따지고 현란한 변호를 펼칠 수 있는 소수에게는 의미 있을지 모르나, 배고파서 빵을 훔친 이에게는 딴 나라 얘기였다. 사회권은 이런 식의 인권에 대한 비판과 반성에서 발전했다. 모든 사람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사회는 그 권리의 실현을 위한 생활여건과 자원을 제공할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 사회권을 다시 세분화하면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가 일을 해서 살아간다. 즉 누군가에게 일과 서비스를 제공한 대가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런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 무지막지한 조건에서 강요돼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하고,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노동시간은 합리적으로 제한돼야 하고 휴가도 있어야 한다. 이런 권리들을 고용주가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일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행동하고 고용주에게 다짐을 받아둘 권리가 있다. 이런 권리들을 경제적 권리라 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일을 해서 생계를 도모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경제적 권리만으론 충분치 않다. 우리 모두가 원하지는 않지만 아플 때가 있고 선천적 후천적 장애를 가질 수도 있고 일자리를 잃거나 나이 들게 된다. 자기 의지로 어쩔 수 없는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인간사회의 일원으로서 사회에 대해 부양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것을 사회적 권리라 한다. 건강권, 주거권, 식량권,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교육권 등이 여기에 속한다. 지금까지 말한 경제사회적 권리를 우리는 특정 공동체 속에서 누린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우리는 그 문화생활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예술을 감상하며 그 진보의 혜택을 같이 나눌 권리가 있다. 이것을 문화적 권리라 한다.

인권의 불가분성․상호의존성

뉴딜정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와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간결한 말로 인권을 표현했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 된 인권은 가능하지도 않거니와 온전한 인권일 수가 없다. 정치적 독재는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불평등한 체제에 대한 불만을 억압하기 위해 자유는 억압될 수밖에 없다. 배고프고 몸 누일 곳 없고 일자리 없는 사람이 자유를 누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인권의 성격을 인권의 ‘불가분성’ 또는 ‘상호의존성’이라 한다. ‘자유 없이 평등 없고, 평등 없이 자유 없다’는 말, ‘평등할수록 더 자유롭다’는 말, ‘자유 없는 평등은 노예의 평등’이라는 말이 다 이런 인권의 성격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권의 성격은 자주 무시돼왔다. 인권을 나눠서 편을 가르고, 한편은 인권으로 치고 다른 한편은 인권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냥 바라는 것, 욕망하는 것쯤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고질적인 인권의 이분법이다. 어떻게 편 가르기를 하는가 하면 인권의 한편을 ‘자유권’(시민․정치적 권리), 다른 한편을 ‘사회권’(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이라는 범주로 나누는 것이다.

이분 씨와 총체 씨; 누가 진짜 인권인가

자유권과 사회권, 인권을 이 둘로 나누고 자유권은 진정한 인권인데 사회권은 인권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은 오랫동안 인권을 괴롭혀왔다. 어떤 이유 때문에 나누기를 고집하거나 또는 총체적인 접근을 주장하는지 생각해보자. 두 입장을 편의상 이분 씨와 총체 씨로 구분하고 얘기를 들어보자.

이분 씨: 사회권이라 말하는 권리들의 내용은 인간의 열망 또는 기대일 수는 있어도 권리의 자격을 가질 수는 없다. 사회권에 해당하는 내용들은 사회정책에 의해 그 수위가 결정되고 점차 달성돼야 할 사회적 목표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을 권리라고 말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게 되면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약속된 진짜 인권에 물 타기를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권에 위험하다.

총체 씨: 먼저 인권의 가치를 생각해보자. 인권이란 건 존엄한 인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권리다. 무직, 배고픔, 질병, 무주택, 문맹, 빈곤에 시달리는 인간이 존엄성을 존중받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회권은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다. 이런 필수적인 것들이 없는 인간은 이분 씨가 ‘진짜’ 권리라고 가정하는 다른 어떤 권리도 충분히 누릴 수가 없다. 인간의 존엄성은 고문과 검열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경제적 한계상황에서도 침해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권은 단지 ‘인간의 열망’이나 ‘기대’가 아니라 기본적인 권리다. 너무나 기본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머지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합당한 요구이다.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 가령 굶거나 아픈 사람에게 ‘치료받고 싶어요? 밥 먹고 싶어요? 그런데 당신이 치료받고 싶고 밥 먹고 싶은 것은 인권으로 인정받을 현실적 전망이 없어요.’라고 하는 것은 심한 모욕이다.

이분 씨: 불평등한 것이 현실의 삶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실에서 보장 가능한 평등은 법 앞의 권리의 평등이요, 기회의 평등일 뿐이다. 노동이 불가능하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을 자선이나 기타 구제를 통해 도와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권리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빈곤은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누가 누구의 자유를 침해한 결과는 아니다. 그런데 국가가 사회권을 보장한다는 명목으로 개인의 삶에 간섭하는 것, 재분배를 실현하겠다고 시장의 자율에 간섭하는 것은 자유를 억압할 뿐이다. 사회권을 실현하려면 국가가 재정을 제공해야만 하고 그 결과 국가기구의 비대화를 가져온다. 이것은 자유에 위험스럽기 짝이 없다.

총체 씨: 사회권 보장을 위해 국가가 재분배다 뭐다 해서 나서는 것이 자유의 침해라고 하는 주장은 자유에 대한 단단한 오해이다. 시장의 자유를 염두에 두고 이런 소릴 하는 것 같은데, ‘통제와 규율 없는 순수한 시장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절한 규율이 있기에 시장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경제학자가 아니어도 아는 상식이다. 시장의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요구되는 것이지 시장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인간이 살기 위해 무역을 하는 것이지 무역을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권의 주인공은 인간의 자유이지 시장의 자유가 아니다. 인간의 자기존중은 자기 신체와 정신에 대한 자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유는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기본재이다. 그런데 이 자유의 향유자가 생존 불가능하다면 자유는 비현실적이 된다. 자유가 현실화되려면 그것을 위한 사회적 조건이 필요하고, 의식주와 아플 때 치료 등 그 조건을 규정한 것이 사회권의 내용이다. 자유를 누리는 것을 현실적으로 가능케 하는 생존의 기본재를 사회에서 분배받는 것 자체가 자유의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사회권은 자유보장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보장이다.

이분 씨: 사회권에는 자원, 즉 돈이 많이 든다. 자유를 보장하는 일에는 국가가 간섭을 자제하는 것 말고는 특별히 돈 들일이 없으니까 즉각 보장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권 보장에는 경제적 자원과 국가의 적극적 조치가 필요한데, 이것은 쓸 수 있는 자원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노력하여 점차 좋아지도록 하겠다고는 할 수 있지만 즉각적으로 보장할 의무를 지는 권리일 수는 없다. 모자라는 자원 때로는 없는 자원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는 없다.

이분 씨와 총체 씨; 사법심사가능성의 문제

총체 씨: 이분 씨가 자유권이다 사회권이다 구분하는 권리가 그런 식으로 똑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령 노동권은 자유권이면서 사회권이다. 개별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위해 자유의사로 뭉칠 권리가 노동권의 자유권적 속성인데 왜 툭하면 정부가 개입하여 결사를 방해하는가. 교육권은 어떤가. 교육권에는 교육비, 학교시설, 교사고용 등도 중요하지만 교육의 내용을 정부 입맛대로 좌지우지해서는 안 되는 정신적 자유의 의미도 크다.
자유가 국가의 불간섭만으로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이분 씨가 중요시하는 자유가 보호되려면 국가가 보다 강하고 공격적인 주체들로부터 이분 씨를 보호해줘야 한다. 가령 생명권을 생각해보자. 국가가 나서서 이분 씨에게 해코지를 해서도 안 되겠지만 제3자의 폭력과 학대로부터 이분 씨를 보호해줘야 한다. 건강에 유해하거나 위험한 상품의 거래와 판매로부터도 보호해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건강보험제도 같은 것으로 기본적인 의료접근권을 보장해줘야 한다. 어디까지가 자유에 대한 간섭이고 어디까지가 자유에 대한 보호인가? 이분 씨는 그렇게 명확하게 선을 그을 수 있는가?
없는 자원, 모자라는 자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도 모순 된다. 사회권이 더 많은 자원을 필요로 한다는 건 사실일지 모르나 자원이 들지 않는 권리란 없다. 안전권을 위한 경찰력의 유지가 맨손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공정한 재판권을 위한 사법공무원도 돈 주지 않고 쓰는 것이 아니다. 사회권에만 돈이 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권리에는 돈이 든다. 반대로 큰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당장 실현할 수 있는 사회권의 항목도 있다. 가령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참가할 권리를 보장할 의무는 자원과 상관없이 즉각 효력을 가져야 할 권리이다.

이분 씨: 진짜 인권은 자유권의 내용처럼 재판을 통해 청구하고 구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회권이란 인권은 모호하여 재판의 심사대상으로 삼기 어렵다. 사회권에 해당하는 내용은 입법과 행정부의 정책결정 권한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사법부가 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사회권은 어떤 정책의 불가피한 영향이나 개인의 행운과 불운, 개인의 선택에 따른 결과 등 재판으로 따질 수 없는 성격의 내용을 담고 있다.

총체 씨: 사법심사가능성과 불가능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불가능성이 사회권의 특성인 것도 아니다. 모호함은 사회권의 특성인 것이 아니라 일부 정교화된 권리와의 정도 차이일 뿐이다. 자유권 중에서도 모든 권리가 정교화된 것이 아니라 법리는 계속 형성되고 있다. 인권은 어떤 권리를 꿈꾸고, 그것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명문화하고, 실현하는 과정을 밟아왔다. 오늘날 명백한 것으로 보이는 재판구제 사안도 그것이 시작될 때는 청구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 구체적 사건과 도전에서 시작됐다. 사회권의 사법심사가능성도 권리 내용에 따라 편차가 있고 국내외적으로 일정정도 현실이 된 내용도 많다. 따라서 자유권은 재판 가능하고 사회권은 그렇지 않다는 이분법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에 대해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경제․사회적 권리가 법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엄격하게 분류․채택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고, 두 종류의 인권이 나뉠 수 없고 상호의존한다는 원칙에 위배”될뿐더러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원의 권한을 현저히 축소시킬 것”이라 했다.
또한 현실에서 오히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사법심사가능성이 아니라 사법제도 자체의 불평등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권리에 대한 판단과 구제를 사법심사에 의한 것으로 제한하여 생각하는 것은 인권에 위험하다. 가령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범죄형량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에 대해서는 박하게 해석하고 기업주의 재산권 위주로 유리한 판결을 해주는 것, 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제약을 솜방망이처럼 다루는 것도 ‘유전무죄 무전유죄’이다.
권리에 대한 구제를 재판에 의한 것으로 한정하는 것과 인권회복수단으로서 사법적 구제절차를 강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권리에 대한 구제는 사법절차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각도로 모색돼야 한다. 가령 재산권이란 건 그 내용이 법률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권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토지’ 같은 재산의 내용과 한계를 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재판가능성 만이 아니라 어떤 법률을 만드느냐, 어떤 권리를 우위에 두는 사회적 합의를 만드느냐를 같이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주거권의 보장을 위해서는 법원명령이 없는 강제퇴거의 금지나 이에 따른 구제조치 뿐 아니라 주거현황에 대한 실태조가, 최저주거기준이나 주거기본법 등의 마련, 주거권에 대한 인식 향상과 교육 등 다각도의 노력이 요구된다.

이분 씨: 권리라 할 때는 법적으로 그 권리를 보호하고 보장하고 실현할 의무 주체가 있어야 한다. 의무 주체가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 인권침해라 한다. 하지만 사회권의 경우에는 의무주체가 모호하다. 뿐만 아니라 사회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 다양한 부문의 자발적인 원조, 동의와 협력이 절실한 데 거기다 대고 인권침해라고 지적하는 것은 찬물을 끼얹는 것이고 적절치 않다.

총체 씨: 가난이 불가피하다고 말하는 것과 가난은 인권침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흔히 사람들은 누군가가 고문당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면 무의식적으로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굶주리거나 도시빈민이 살던 곳에서 내쫓길 때 세상은 누군가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이름 없는 경제개발의 힘 또는 나라님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가난의 불가피성을 탓한다. 더 심하게는 그런 암울한 운명을 자초한 것은 피해자들 자신의 탓이라고 한다. 대부분 자유의 박탈에 대해서는 끔찍하게 여기면서 식량, 의료보호, 살 곳 같은 삶의 기본적인 필요가 (예방할 수 있음에도) 박탈당함으로 인한 인간의 고통이나 죽음에 대해서는 상당한 관용을 보인다. 사회권을 인권으로 규정하고 그 침해를 인권침해로 규정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 아니라 마땅히 받을 것을 받지 못한 권리 주체로 바라보는 것은 크게 다르며,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이 방임되고 침해됐다고 봐야 진짜 문제에 접근할 수 있다.

물론 인권침해를 규정하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다. 침해라는 용어를 신중하게 사용할 필요도 있다. 모든 안 좋고 불쾌한 상황에 죄다 인권침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침해라는 용어의 심각함을 훼손하게 될 것이다. 침해라는 용어는 그에 상응하는 의무와의 관계 속에서 가려서 사용돼야 한다. 많은 국가들과 국제사회는 사회권에 대한 국가 및 주요행위자들의 의무를 분석하기 위한 방법을 개발해왔다. 가령 유엔사회권위원회는 국가가 해선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작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부작위)을 사회권에 따른 의무 위반으로 본다. 가령 작위의 의무 위반은 이미 향유하고 있는 권리를 고의적으로 철회하거나 후퇴시키는 행위, 보호적 법률을 개악하고 특정 집단을 향한 차별을 강화하는 행위, 사회권에 해로운 정책 강요 등이 있다. 부작위의 예로는 사회권과 관련된 지표를 만들지 않고 모니터도 안하는 것, 즉각적 성격을 갖는 의무(법률상의 차별 제거 등)를 불이행 하는 것, 정당한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고 규정된 법적 의무를 따르지 않는 것 등이 있다.

경직화된 범주를 깨는 일의 중요성

흔히 사회권에 따른 국가의 의무라 하면 국가가 직접 나서서 자원을 제공하는 것만을 떠올린다. 물론 그런 국가의 직접 지원이 필요하기도 하다. 직접 제공하는 것 말고는 생활의 필수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권리가 실현될 다른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다. 노인이나 장애인처럼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하게 된 사람들, 위기나 재난, 갑작스런 실업 상태 등이 그렇다. 하지만 국가의 의무는 직접 제공자로서의 의무에만 있는 게 아니다. 국가는 일차적으로 개인들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해 개인적으로나 타인과 결사하여 생존을 추구할 방법을 보장해야 한다. 가령 토지 이용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람들에게 토지의 보호는 직접 다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무보다 훨씬 중요하다. 토지는 오직 경작하는 농부만이 소유할 수 있도록 한다거나 무분별한 개발과 투기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의무가 파산한 농부에게 생계보조금을 주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노동자의 집단적 결사와 행동권을 보장하는 것은 부당 해고된 노동자에게 쌀 한말을 주는 것보다 중요하다.

또한 국가는 직접 제공자로서가 아니라 보호자로서의 의무를 진다. 이것은 자유권에 있어서 보호자로서의 국가의 역할과 기능적으로 유사하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보다 강하고 공격적인 주체들로부터 개인의 행동의 자유와 자원의 이용을 보호하는 것이다. 보다 강력한 경제적 이해로부터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생존재의 보호, 무역과 계약 관계에서 각종 비윤리적인 위협으로부터의 보호, 유해하거나 위험한 상품의 거래와 투매로부터의 보호 등이 요구된다. 이런 경우에는 사법심사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회권은 자원이 필요하고 자유권은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직접 제공자로서 국가가 나서는 단계에만 초점을 두고 다른 의무들을 고려치 않는 과도한 단순화이다.

인권의 상호의존성은 권리개념을 설명하고 분석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개념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잘못된 이분법의 구속을 받기보다는 무엇보다 중요한 목적이자 근본가치인 인권존중이라는 견지에서 추구돼야 한다. 잘못된 이분법은 인권을 형식적인 것으로 몰아갈 수 있다. 어떤 권리가 어떤 범주와 법률에 속하느냐가 아니라 인권의 기초인 인간애에 일관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경직된 범주화를 깨뜨리는 것 자체도 중요한 인권투쟁이다. 효과적인 인권보장이란 불리하고 취약한 집단의 구성원에 특히 유념하여, 권리를 진정으로 모든 사람의 것으로 만들기에 뭐가 필요한가를 총체적으로 해석해서 나오는 결과여야 한다. 범주는 임시로 만들어진 것이고, 전체의 부분에 불과하며, 관계 속에서만 이해된다. 가령 자유권에 있는 생명권은 사회권에 있는 건강권과 관계 속에서 보면 아주 달라 보인다. 부당해고 당하여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노동자의 일할 권리와 결사의 권리는 노동자가 부양하는 아동의 권리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사회보장권의 의미

선언의 다른 조항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보장의 직접 배경이 된 것은 나치즘의 경험이었다. 물론 그에 앞서 1919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 그리고 대공황의 여파로 체제에 위협을 느낀 자본주의 국가들 내부에서부터 사회보장의 중요성은 점차 강조되는 과정에 놓여있었다.

1940년 여름 정책적으로 “노인, 정신질환자, 불치병자, ‘쓸데없이 밥만 축내는 이들’은 특별기관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죽었다”(전쟁범죄에 관한 유엔 보고서 중에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 싸울 기력이 더 이상 없다면 이 투쟁의 세계에서 생존할 권리는 끝난다”(히틀러의 나의 투쟁 중에서)

대규모 실업과 빈곤으로부터 인간생활을 지켜내지 않으면 나치즘과 같은 악몽이 언제든지 재발해 사회를 지배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 기본적인 생존을 인권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생존권을 구체화하기 위한 기본적인 권리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했지만, 누가 얼마만큼 의무를 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어떤 국가들은 주거권과 의료권을 헌법에 보장하지만 어떤 국가들은 사회보장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국가가 비용을 지불하거나 의무를 져야 하는 것으로 해석되길 꺼려했다. 결국 선언에는 사회보장의 의미가 무엇이며 누가 얼마만큼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얘기는 없다. 사회보장이라는 단어는 그것 자체가 의미를 가지거나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사회보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나타내는 구체적 목록과 함께 있어야 그 의미가 규정된다. 선언에서 우리는 간접적으로 ‘의식주, 의료, 필수적인 사회서비스’를 통해 그 의미를 짐작할 뿐이다.
선언 내에서도 22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과 25조에서 말하는 사회보장의 의미는 다르다. 22조의 사회보장은 막연하지만 넓은 의미의 권리, 즉 ‘인간존엄성과 인격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권리를 말한다면, 25조의 사회보장은 ‘최소한의 예시목록’으로서 실업, 질병, 장애, 노령 등의 특정상황에서 인간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걸 고려할 수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이다.

“자선이 사회적 제도로서 완전히 무력하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는 때에 자선의 방법에 의하지 않고 질병, 불충분한 임금, 실업 등으로 말미암아 대다수 선의의 노동자들을 빠져나올 수 없는 밑바닥에 가두는 것과 같은 부당한 비참을 없애야 하는데도 그를 위한 대책이 마련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피부조자가 아닌 평등한 자가 되기를 원하며, 시혜를 배척하고 정의를 바라는 것이다…”(프랑스 노동자 60인 선언, 1864)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란 예전 시대의 구빈이나 자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구빈차원의 사회부조에서는 수급자의 권리를 부인하고, 베풀어준다는 은혜성과 그에 따른 굴욕적 조건을 달았다면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은 다르다. 개인의 잘잘못이 아니라 이 체제 속에서는 ‘어쩔 수 없는’(세계인권선언에서의 표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생활 곤궁이나 불능상태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구조적 문제를 인정한 속에서 사회보장의 권리가 인권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이 권리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이기 때문에 수급자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고 공적 부담으로 이뤄지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권리이기 때문에 구빈의 차원을 벗어나 법적 권리로 인정하는 단계로 발전한 것이고, 사회는 자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위험으로부터 구성원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권의 구체적 내용은 선언 23-27조에 들어있다.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19조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간섭받지 않고 의견을 가질 자유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고,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화씨 451’이란 미래 공상 소설이 있다. 이 소설 속 시대의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들 집의 방마다에 있는 커다란 TV 화면으로 지루하고 시시한 드라마를 보면서 상당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처형당한다. 국가가 고용한 소방관의 임무는 모든 책을 추적해서 불태우는 것이다. 온도를 따질 때 섭씨와 화씨가 있는데, ‘화씨 451’이란 이 책의 제목은 바로 종이가 불타는 온도를 말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체포되어 투옥되고 처형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방관인데 자기가 태워버려야 할 책을 읽으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다. 결국 당국으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고, 시골에 숨어사는 지하 집단 속에서 피난처를 구하게 된다. 이 지하집단은 문학 유산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즉 세계 고전 문학의 일부 또는 전체를 각자 맡아서 외우는 임무를 나눠 갖고 있다. 간단한 줄거리지만, 역사상 실제 벌어졌던 표현의 자유 억압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설이 쓰인 시기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판친 1950년대였기에 더욱 그렇다.

책이 불타는 온도 화씨 451도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자유(freedom)의 상실이 자유(liberty)의 대가”라 했다. 각 시대는 그것만의 지배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그 세계관이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정하곤 했다. 의견과 표현을 승인할 때는 ‘의견’이라 불렀지만, 지배적인 세계관이 그것을 싫어할 때는 ‘이교, 이단, 반역’ 등으로 불렀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의 역사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목이 잘릴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쓴 자유 상실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항상 소수자로 인식되고 소수자 지위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더 큰 목적을 성취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는 다른 자유들과 인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표가 됐다. 흔히 표현의 자유가 부정될 때는 ‘뭔가 더 큰 폭력과 독재의 위험이 닥치리라’는 전조인 것이다.

인권에서 중시하는 자유가 세상의 모든 자유를 다 긁어모은 것은 전혀 아니다. ‘뭐든지 내 맘대로’식의 자유도 아니다. 인권에서 옹호되는 자유는 모든 사람의 권리 존중과 어울릴 수 있는 자유이다. 그래서 많고 많은 자유들 중에서도 아주 특수한 자유들만이 인권의 목록에 올라있다. 각자의 자유를 일종의 선하고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 특정하여 구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인권으로서의 자유이다. 의견과 표현의 자유가 바로 그런 자유이다.

세계인권선언은 표현의 자유가 전체주의의 첫 번째 표적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배경으로 시민들이 정부와 국가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만 생각한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단지 억압을 반대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좋은 거버넌스의 기초이며 전 사회의 문화적 풍요를 능동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권리라고 봤다. 그래서 19조는 ‘정보의 자유’로서의 표현의 자유 또한 강조하고 있다.

정보의 자유로서 표현의 자유

정보와 언론의 자유가 유엔헌장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유엔창립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토론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유엔은 1946년 제1차 총회 결의안에서 정보의 자유를 기본적 인권으로 선포하고 유엔이 존중하는 기타 모든 자유의 초석이라 했다. 덧붙여 정보의 자유에 관한 유엔회의를 가질 것을 경제사회이사회에 요청했다.

정보의 자유에 관한 유엔회의는 1948년 3월과 4월 사이에 제네바에서 열렸으나 전후 냉전 속에서 회의의 분위기는 아주 정치적이었다. 한쪽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에 초점을 두고 다른 한쪽은 ‘균형 잡힌’ 정보의 흐름과 정보의 교환을 주장했다. 이후로도 국제사회는 의견과 표현, 정보의 자유 개념을 다듬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유엔 총회 의제에 정보의 자유에 관한 국제협약의 초고가 등장했지만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세계인권선언 19조에서 부딪친 문제는 표현의 자유 제한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 측은 “미국 언론과 유럽의 모방적인 언론이 침략정책을 옹호해왔으며 심리전을 수행해왔다. 이들 언론은 국내에서는 민주세력을 분쇄하고 다른 국가들을 위협한다”면서 ‘침략의 선전’을 위한 표현의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 소련안은 부결됐다. 통제되는 언론을 만들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조에는 어떠한 권리의 제한요소도 붙지 않았다.

선언 이후 만들어진 시민․정치적 권리규약에는 “전쟁을 위한 어떠한 선전”이나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는 “법률에 의하여 금지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여기서 ‘전쟁’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침략전쟁’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밖에도 규약에는 국가안보, 공공질서, 공중보건, 도덕 등의 제한 요소가 들어갔는데 하나같이 정의하기가 어렵고 권리침해에 오․남용될 소지가 큰 개념들이다. 이에 국제법률가 위원회는 이들 제한 규정을 해석하기 위한 회의를 갖고 1984년 ‘시라쿠사 원칙’(Siracusa-principles)을 채택했다. 또한 1995년에는 국제법 전문가들이 ‘국가안보와 표현의 자유 및 정보접근에 관한 요하네스버그 원칙’을 채택했다. 여기서 기본 원칙은 "누구도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으로 인해 어떠한 강제, 불이익이나 제재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 평화적인 행사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 되며, 어떠한 규제나 형벌도 과해져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금기시 여기는 '정부를 바꾸자는 표현, 국가나 국기를 모욕하는 표현, 징병반대, 전쟁반대' 등의 표현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아니하는 표현"이다. 이런 걸 다 제하고도 제약할 의사표현이 있다할 경우라도 정부가 지켜야 할 전제조건과 정부가 져야 할 입증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반대자에 침묵 강요는 안 돼

국제사회의 최근 논의와 관련하여 ‘의견과 표현의 자유 권리보호와 증진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Ambeyi Ligabo)이 올해 초 발표한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자.

보고관은 ‘명예훼손, 중상, 모욕’ 혐의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현상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명예훼손, 중상과 모욕의 혐의가 공적 인물, 특히 국가 당국으로부터 기인할 때는 어떠한 형태의 사전 검열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명예훼손은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국가정체성, 종교, 국가 상징, 기관, 국가의 수장’ 등 주관적 가치나 제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했다. 명예보호를 명목으로 탐사 저널리즘을 억압하고 비판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

특별보고관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제한에 대해 조건을 언급했다. 첫째 제한은 법으로만 수립되며, 둘째 그 법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 목적을 추구해야 하며, 셋째 목적의 성취에 비례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유형의 제한이건 사전 검열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며, 비판을 제한하거나 반대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이용돼선 안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예방 구금을 하고, 언론인의 소득에 부합되지 않는 과한 벌금을 부과하고, 언론자격의 유예, 미디어 송출의 유예 또는 폐쇄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비례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 형사법적 명예훼손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당한 제한이 아니다. 모든 형사법적 명예훼손은 철폐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별보고관이 특히 촉구한 것은 인터넷에서의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조치의 확대이다. 특히 웹사이트 투고자와 블로거들에게 다른 유형의 미디어와 같은 수준의 보호가 제공돼야 한다고 했다.
특별보고관의 결론은 간단하다. “지속적인 사상의 대결은 민주사회의 디딤돌이다.”

표현의 자유는 상호교통의 권리이자 의무

(아래 내용은 전규찬 한국예술종합대 영상원 교수의 인권연구소 ‘창’ 강좌 내용 중 일부를 재구성했다. 전교수는 표현의 자유를 ‘교통(communication/intercourses)의 권리’라 표현했다.)

세계인권선언 18-20조는 떼어낼 수 없는 한 덩어리이다. 앞서 살펴본 18조는 생각의 자유(사상․양심의 자유)를, 19조는 표현의 자유를, 20조는 생각과 표현을 타인과 더불어 함으로써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집회와 결사의 자유)을 말한다. ‘생각+표현+행동’의 권리라 할 수 있다.

인간 간의 상호교통 없이 사회가 존속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개인의 자유일 뿐 아니라 타자와 만나고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의무이기도 하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개인을 억압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회의 붕괴와 해체를 획책하는 야만이다.

말하거나 쓰는 표현은 막을 수 있어도 생각하는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표현’을 통해 다른 사람과 상호교통하지 않는 생각이 잘될 리도 없고 정확할 리도 없다. 표현을 통해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가 가능해야 진짜 자유로운 생각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롭고 공적인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는 권력은 생각할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다.

‘생각․표현․행동’의 자유를 합친 것이 언론의 자유다. 언론은 생각을 말로써 논한다는 것이며, 세계인권선언에서 이들 권리를 모든 사람의 권리로 얘기한 건 곧 인간 자체가 언론인이란 뜻이다. 그래서 언론하면 무슨 신문과 방송부터 떠올리는 것은 우리가 언론으로부터 소외됐다는 증거다.

소위 ‘찌라시’라고 불리는 신문들은 언론이 아니다. ‘매체’라고는 할 수 있다. 매체인 건 맞는데 논하는 것, 즉 토론을 방해하기 때문에 선전매체이지 언론이 아니다. 오직 우리가 대화를 할 때에야 선전은 멈춘다.

표현의 자유는 상호대화이고 교통이다. 권력자가 ‘소통의 부재’를 불평하는 것은 그가 말의 의미를 몰라서이다. 교통은 상호적으로 더불어 하는 것인데, 소통은 ‘네가 오해했다. 오해를 풀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의사교통을 하는 사람들이 의견교환을 통해 공개적으로 잘못을 검증했고 비판을 했다. 공동행동에도 나섰고 대안도 제시했다.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구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소통의 부재’를 탓하고, 의사교통을 방해하기 위해 언론 때려잡기에 나섰다.

언론의 자유는 진실을 향한 용기, 두려움 없는 발언이다.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진실에 기초해 권력을 솔직하게 비판할 의무를 수행한다. ‘PD수첩’이 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권력과 충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모두가 진실이라 우겨 말할 때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에 화답하는 것은 생각․표현․행동의 자유를 가진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작성일자 : 2008. 11. 1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17조

1. 모든 사람은 단독으로는 물론 타인과 공동으로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재산권은 오해가 많을 수밖에 없는 권리이다. 세계인권선언 17조를 대하는 사람들은 처지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거봐, 재산권은 세계인권선언도 보증하는 당연한 인권이쟎아. 그런데 왜 우리보고 뭐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소위 ‘강(남)부자’들이 뛸 듯이 좋아할 수 있다. 반대로 “뭐, 재산을 인권으로 인정한다고? 그럼 재산의 횡포에 시달리는 우린 어쩌란 말이야, 세계인권선언이라구? 뭐 이런 엉터리가 있어?”라고 펄쩍 뛸 수도 있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재산’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고, 저마다 ‘재산권’에 대해 뭔가 단단히 착각하거나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 소득과 불로 소득의 경쟁?

재산권은 ‘재산’과 ‘권’이라는 말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재산이 뭘까? 재산이 뭔지에 대해서 어떤 합의를 하느냐는 사회에 따라 다르다. 그 합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성원들이 넉넉한 삶을 이루기도 하고 ‘모 아니면 도, 네가 아니면 내가 죽는다’ 식의 삶이 펼쳐지기도 한다.
도대체 재산이 뭔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 예금 통장이나 적금 통장이나마 유지하는 사람, 주식·증권·배당금·신탁·채권·선물·옵션·스왑·펀드·주식 등을 이해하고 굴릴 수 있는 사람이 갖고 있는 ‘재산’이 같을 수 있나?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받는 사람이 가진 재산과 누군가의 생사를 갈랐다 붙였다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재산이 같을 수 있나? 토지소유를 중심으로 한 농경사회와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서의 재산이 같을 수 있나?

어쨌든 사람들이 흔히 받아들이기 쉬운 재산은 피땀 흘려 일군 결실일 것이다. 반대로 짜증스러운 재산은 부동산 투기 등으로 만든 불로소득일 것이다. 운동경기도 체급을 맞춰서 하는데, ‘노동 소득’과 ‘불로 소득’이 같이 경쟁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고, 두 재산을 같은 기준으로 생각하는 건 좀 이상하다. 한편 재산권은 물(物)에 대한 권리라기보다는 사람간의 관계를 말한다. 인간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에 대한 타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타인의 삶을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재산권이다. 아무도 지배하거나 수탈하지 않는 재산권과 지배하는 재산권은 엄청나게 다르다. ‘재산권’을 말할 때 이런 성격을 구분하지 않고 한통속으로 취급하여 ‘인권’이라 할 수는 없다. 재산권을 인권이라 할 때는 ‘조건’이 필요하다.

재산권은 인권의 선배 중에서도 최고참에 해당하는 권리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그렇다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기에 재산권이 인권의 초기 역사에서 주연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재산권이 인권의 선두주자가 된 배경은 사람의 권리와 의무란 것이 누구의 침상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신분제 세상이었다. 악역은 제 영토의 모든 것은 제 것이라고 우기는 절대 권력이었다. 신분질서와 절대 권력에다가 유일절대의 진리로서의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나의 것’,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의 ‘자유’를 주창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었다.

인권의 최고참

절대 권력은 걸핏하면 돈을 걷고 거부하면 잡아들여 주리를 틀었다. 생필품 등의 거래를 총애하는 신하에게만 독점시키고 무역도 그렇게 했다. 새로 등장한 신진세력도 처음엔 권력의 비위를 맞추어 그 독점의 대열에 낄 수만 있으면 잘 나갈 수 있었고 그렇게 버티려고 했는데 도무지 앞날을 계획할 수가 없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그만큼 변덕도 심했기 때문이었다. 예측 가능한 정치와 경제구조가 절실했다. 불가침의 절대적 교리 앞에서 합리적 사고는 탄압 받았다. 이런 것이 다 자유롭게 재산을 추구하는데 방해거리였다.

재산에 대한 인정 요구는 인권 사상의 모태가 되고 다른 인권의 성장을 자극했다. 모든 인간은 국가 권력 이전에 생명, 자유, 재산을 가졌다고 외쳤다. 이건 사회나 국가가 준 권리가 아니라 자연적 권리고 인간에게 본래 고유한 것이라 했다. 현실속의 질서가 그렇지 않으니 옛날 말씀도 끌어들이고 종교상의 교의도 끌어들이고 그게 싫으면 과학적으로 논리를 세워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자유롭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유권이 없이는 이런 자율성을 꿈꿀 수 없다. 내 생명이 담긴 내 몸이 한 노동으로 재산을 일구었다. 그런 재산에 함부로 손대는 것은 곧 내 몸에 손대는 것과 같다. 내 몸과 내 소유, 어느 것도 함부로 손댈 수 없다. 내 몸과 소유에 대해 공격해오면 저항은 정당하다. 저항은 맨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

종교적 자유를 모태로 한 사상의 자유는 독선적이고 전제적인 정치 체제에 맞서는 힘이 됐을 뿐더러 자신을 유일한 진리로 여기는 종교적 권위를 깨고 인간성의 해방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왔다. ‘생명, 자유, 재산’은 삼위일체가 되어 '인신의 자유,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소유의 자유'라는 인권으로 피어났다.
이런 이유로 신분제 사회에서 절대왕권과 특권층에 맞장 뜬 인권의 요구가 ‘재산을 존중하라’고 할 때 그 말은 ‘내 인격을 존중하라’는 말과 같았다. 재산권의 요구는 개인을 국가로부터 해방시켰다. ‘국가는 개인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하고, 자유로운 시장에 간섭하면 안된다’가 핵심 요구였다. 마찬가지로 ‘사상·언론·종교 등의 자유 시장에도 국가는 일체 끼어들거나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은 점에서 근대의 인권을 ‘국가로부터의 자유’라 하는 것이다.

재산권의 변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소유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고 노동의 성과이며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담고 있기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재산권을 정당화한 논리였다. 하지만 근대시민혁명을 통해 불가침의 권리로 자리 잡은 재산권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예전의 절대군주의 모습보다 더 무서운 게 자본가라고 느꼈고, 대다수 사람들의 처지는 자유와 평등으로부터 멀어졌다.

근대시민혁명의 이론가들은 노동의 결실로서 소유권을 옹호했지만, 사실상 진짜 밑천이 될 만한 재산은 엄청난 폭력을 통해서 모였다. 땅에서 농사짓던 농민을 유랑민으로 내몰았고, 가난한 이들을 가두고 부려먹거나, 3세계를 식민지로 수탈하는 등 부정의의 역사는 넘쳐났다. 가난한 이는 자립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투표권조차 주지 않았다. 식민종주국 백인들의 재산권은 자연적 권리라면서 3세계와 그 주민들을 공격·수탈하면서는 재산권 침해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돌봄으로써 재산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라 우겼다.

절대왕권에 맞서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을 주창할 때의 재산권이 제도화되자 재산없는 대다수 사람들의 ‘무’권리를 당연시하는 근거가 되어 버렸다. 재산이 법과 제도로 보호된다는 것은 곧 사회가 보호받을 재산의 범위와 한계를 정한다는 뜻인데, 재산을 여전히 사회와 국가이전의 ‘자연적’ 권리로 떠받드는 것은 이상하다. 타인의 인격과 자유를 해치고 대다수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요구를 압박하는 재산권이라면 인권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봐야 한다. 인간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재산권의 본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고, 현실에서 재산의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폐해가 심각하다면 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신성불가침성과 국가 이전의 자연권이라는 레테르는 이제 재산권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존권보장, 인권보장을 위해서 보호받아야 할 재산의 범위를 정하고 재산권자의 내맘대로의 영역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사회가 당연히 취해야 하는 조치이다.

재산권엔 친구가 필요하다

‘프랑켄슈타인’의 아주 옛날 흑백영화판을 보면 “친구가 필요해”라고 애절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인간과 생존과 존엄에 대한 고려 없는 재산권은 인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프랑켄슈타인이고, 친구를 필요로 하고 가질 때에만 인권의 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서 친구라 함은 ‘노동기본권, 주거권, 건강권, 교육권’ 등의 인권을 말한다.

선언 17조는 무엇이 재산이고 무엇이 재산에 대한 자의적 박탈인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데, 이걸 알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인권과의 관계 속에서 읽는 것이다. 선언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타인의 건강에 위험에 빠뜨리거나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적절한 휴식의 권리 보장,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을 보장하고 있다. 재산권은 이런 인권과의 관계 속에서 내재적 제약을 받는다.

재산권의 실현이 단지 재산을 획득할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그런 기득권을 보호하는 걸 의미한다면, 그것이 실정법으로 아무리 강력하게 보장돼 있다 할지라도 보편적 인권으로 정당화하긴 어렵다. 재산권은 사회적 권리를 포함하여 여타 권리의 효과적인 향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런 재산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고, 그 권리의 보장 자체만으로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에 어떠한 피해자 부담도 주지 않는다는 모든 인권에 보편적인 속성을 가진 재산권이다.

선언 17조의 구상

선언 17조를 구성하고 있는 생각은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재산의 소유는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것이다. 둘째, 재산은 단독으로뿐만 아니라 타인과 공동으로 가질 수 있다. 셋째,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않는다.

선언을 만든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다. 인권으로서 생각한 재산의 의미는 공익을 침해할 수 있는 ‘사적(private) 소유’가 아니라 ‘개인적(personal) 소유’였다. 즉 사는 집, 소지품, 가구, 프라이버시를 보장받는 통신 등에 대한 개인적 소유를 생각한 것이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소유자가 될 권리를 인권으로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선언 문구는 그렇지 않지만, 토론 중에 사용된 문구에는 “존엄한 삶과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에 대한 권리”, “모든 사람은 존엄한 삶에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개인과 가정의 존엄성 유지를 돕는 그런 재산을 가질 권리를 가지며”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까지의 개인 소유가 기본적 권리인지, 개인 재산 말고 기업의 사적소유권을 왜 언급해서는 안되는지 등의 문제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다른 그 무엇이냐는 체제의 문제 속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언은 어떤 체제도 배제해서는 안되는 표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든 선언 기초자들이 ‘무제한적’인 재산소유권을 옹호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재산권에 대한 ‘제한 요건’을 충족시킨다는 조건 하에서 자본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간에 중도를 유지하려 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들조차 순수자본주의 체제란 게 설령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의 관점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언 기초자 중 누구도 시장의 자유로운 흐름이 인간존엄성에 요구되는 재화를 전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선언 29조에 권리의 제한과 규제(“공동체에 대한 의무”,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를 둔 이유이다. 29조에 덧붙여 더 중요한 제한 요건은 노동권 관련 조항이다. 재산을 만들어내는 노동자의 권리에 의해 기업의 재산권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 기초자들은 분명히 인식했다. 재산권이 자의적 박탈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합의 한편에는 재산권의 사회적 기능 때문에 그 범위가 규제돼야 한다는 합의도 있었던 것이다.

선언 이후 유엔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재산권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이란 주제 속에서 다뤄왔고, 주된 논의는 재산권을 여타 인권과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엔인권위가 임명한 재산권에 관한 독립전문가는 그 보고서에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문제를 다룬 바 있다. 그는 재산의 다양한 형태와 그것이 갖는 사회적 중요성도 다양하기 때문에 ‘개인의 사적 소유’를 보편적인 인권으로 설정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로는 “사적 소유의 이용은 소수의 손에 생산수단이 집중되는 것을 촉진해왔을 뿐 아니라 소수가 무제한적으로 부를 축적하게끔 했다. 이는 엄청난 부의 소유자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간의 계급 분화의 근본원인이다. 집단적 재산이 이런 결점들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왔으며 재산의 사적 이용은 국가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지금껏 알려진 어떤 경제체제에서도 절대적으로 사적인 생산수단의 소유현상은 결코 없으며, 공공의 이용, 안보, 건강 등의 필요성에서 법으로 제한이 부과돼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언 기초 당시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재산권에 대해 가장 대조적이라 할 쿠바 정부와 미국 정부의 입장이 유엔회의에서 어떤 설전을 펼쳤는지를 예로 살펴보자.

쿠바와 미국의 대립

쿠바 정부는 재산권은 여타의 기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인권과 더불어 고려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결권, 자연적 부와 자원에 대한 주권, 신 국제경제질서의 수립, 개발도상국들의 피폐화된 경제에 부과되는 과도한 외채 문제 등과의 관계 속에서 재산권을 검토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인권으로서 재산권 문제를 취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모든 사람의 생명·노동·주거·교육·의료 등에 관계된 필수적인 사회서비스에 대한 권리, 경제운영에 참가할 권리에 반하는 의미를 가진 재산권에 대해서는 그것을 권리로 설정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빈곤퇴치, 실업, 인종적·사회적 차별, 기타 모든 형태의 불평등을 취급하지 않으면서 재산권을 고립적으로 선언하게 되면 대다수 인류와 국가들에게 재산권이란 공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반면 미국 정부의 입장 또한 단호하다. “재산권은 사회조직의 기본 장치이며, 시민·정치적 권리의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시민의 자유는 재산권을 보장하는 사회에서라야 번성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권논의에서 재산권이 홀대받아 온 것은 불만스런 일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의 의미는 뭐냐고 물어보게 된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 ‘재산권이 자유를 보장한다’는 의미를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의 어느 노동단체 사이트에서 본 사례이다. 노동조합결성과 활동을 이유로 해고당한 노동자가 있었다. 해고와 동시에 임금은 당연 끊겼고 조합주택에서도 쫓겨날 상태이다. 아이들은 굶주리고 있다. 이 사람은 이동식 식탁과 요리도구를 가지고 동네의 대형 수퍼마켓에 갔다. 그리고 고기가 가득차 있는 정육점 코너 옆에 이동 식탁을 차리고 거기서 고기를 꺼내 굽기 시작했다. 관리인이 달려왔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역방송 카메라도 달려왔다.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 노동자는 “아이들이 굶주리는 걸 내버려둘 수 없다. 나는 아이들을 먹여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분명 이 사람이 취한 행동은 재산에 대한 탈취라고 일반적으로 말할 것이고 그렇게 처벌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 경제·사회 체제 내에서 생존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자신의 생존을 위한 필수물을 제공받아야 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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