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7. 10. 2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먼저 유럽인권협약의 차별금지 조항을 살펴보면, 1950년 제정된 협약 제14조와 2000년 제정, 2005년 4월 발효된 제12의정서 제1조가 있다.

유럽인권협약 제14조(차별의 금지) 성,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소수민족에의 소속,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 등에 의한 어떠한 차별도 없이 이 협약에 규정된 권리와 자유의 향유가 확보되어야 한다.

제12의정서 제1조(차별의 일반적 금지)
1. 법이 규정한 어떠한 권리의 향유도 성,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소수민족에의 소속,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신분 등에 의한 차별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2. 어느 누구도 1항에서 언급된 것 등의 어떠한 이유로도 공공당국에 의해 차별받아서는 안된다.

필자는 차별조항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법을 살펴보고, 그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전통적 접근법은 상설유럽인권재판소(아래 재판소)의 판례를 설명하는데 효과적이지 않을뿐더러 새롭게 떠오르는 차별 유형에 대한 보호를 다루는데도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차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소개하고 있다.

비차별 조항의 ‘구조’

비차별 조항에는 두가지 구별되는 구조가 있다. ‘열린’ 모델(예시열거)과 ‘닫힌’ 모델(제한열거)이다. 열린 모델은 잠재적 차별요인의 범주를 제한하지 않는다. 또한 무엇이 차별을 구성하는지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정의내리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닫힌 모델은 있을 수 있는 차별의 근거를 제한적으로 예시하며 어떤 상황이 객관적으로 차별로 정당화될 수 있는지를 정교하게 정의하려 한다.

협약의 14조는 ‘열린 모델’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고, 제12의정서 1조도 그렇다. 이같은 모델에서 쟁점이 되는 사항은
첫째, 비차별 조항 그 자체에는 불법적 차별과 정당화할 수 있는 구별간에 구분선이 없고,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한하지도 못한다. 목적 정당성과 합리적 정당성이라는 전제하에 갖은 유형의 정당화가 발전될 수 있다.

둘째, 차별의 요인, 다른 말로 하면 구별의 표시가 되는 목록에 대한 것이다. ‘열린 모델’은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을 금지함으로써 차별의 요인을 남김없이 포괄하는 목록을 규정하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조항에서 언급된 차별 요인들은 예시에 불과하다. 협약 14조와 제12의정서 1조가 열거한 차별의 근거는 ‘성,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소수민족에의 소속,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지위’이다.

‘장애, 성적 지향성, 연령’ 등의 새로운 차별 근거들이 협약 14조가 제정된 후에 더 중요하게 떠올랐지만 최근 만들어진 제12의정서 1조는 “목록에 더 추가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며 이를 추가하지 않았다. 그 근거는 목록은 완전한 것이 아니며 재판소는 이미 목록에 명시적으로 열거되지 않은 차별의 근거에도 14조의 규정을 적용해왔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차별 요인을 추가하는 것은 “조항에 포함되지 않은 요인에 근거한 차별을 부당하게 해석할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14조에 대한 심사의 강도는 차별의 요인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다. 목록에 예시된 경우의 차별에 대해서는 더 엄격한 심사가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다양한 차별 요인에 따른 보호를 발전시킬 과제는 재판소에 남겨졌다. 재판소는 명시적으로 목록에 포함되지 않은 차별 요인을 강조할 수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의 재판소의 판단으로 볼 때 ‘성적지향성’은 예시된 목록에 없지만 엄격 심사를 받는 비차별의 지위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차별 조항의 적용 분야

차별금지조항은 의미에서는 자율적이지만 적용범위에서는 종속적으로 해석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차별금지조항 그 자체로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다른 권리와 자유와 연결되어야만 효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종속성 때문에 14조는 여타 협약의 조항과 결합되어 심사된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관계성이 좀더 느슨해졌고, 다른 조항과 결합시키지 않고 독립적으로 14조를 다루는 판단이 최근 잦아졌다. 그렇지만 14조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협약의 실체적 권리와 차별 문제간에 관계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법 분야와 사회적 관계는 차별로부터의 보호와 관계돼 있음에도, 특히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향유에 있어서 차별로부터의 보호가 결여돼 있다는 것이 뚜렷하다. 비차별조항의 종속성은 협약의 결점으로 흔히 비판받는다. 14조의 제한적인 종속성은 두 가지 주요한 결과를 낳는다.
첫째, 국제법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된 것으로 주장되는 평등과 비차별의 일반원칙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는데 부족하다. 둘째, 협약에서 열거된 권리에 한정되지 않고 적용할 수 있는 독립적인 ‘평등권’ 또는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인정하는데 부족하다.

이같은 이유로 해서 평등권을 ‘독립적’인 권리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 결실이 제12 의정서 1조이다. 제12의정서를 만든 것은 평등조항을 강화하고, 기존 협약 14조의 적용분야를 보편적으로 확대하려는 의도였다.
제12의정서 1조에 대한 주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분야로 차별금지의 확대를 의도했다.

i 국내법에서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부여된 권리 향유의 차별
ii. 국내법에 따라 공공당국의 분명한 의무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권리 향유의 차별, 즉 공공당국이 국내법의 의무에 따라 특정한 태도로 행동할 의무
iii. 공공당국의 재량권 행사(예를 들어 보조금의 부여)에 의한 차별
iv. 공공당국의 어떠한 작위 또는 부작위(예를 들어, 시위를 통제할 때 법집행공무원의 행동)에 의한 차별

분명히 협약 14조와 마찬가지로 의정서와 그에 대한 주석의 초점은 공적영역에서의 인권문제이지 사적 당사자간의 관계에 대한 것은 아니다. 제12의정서의 적용분야는 “공공당국”의 행위에 한정된다. 주석에 따르면, 공공당국이란 용어는 행정당국, 법원, 입법 기구를 말한다.

그렇지만 제12의정서는 협약 14조를 계승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광범위한 차별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하려 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적극적 의무와 간접차별에 의한 효과도 건드리려 한다. 의정서와 관련된 논쟁이 정점에 달한 2000년에 나온 재판소의 한 결정은 적극적이고 진보적인 방향으로 비차별조항을 해석하려는 지향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반역죄로 유죄를 선고받은 자와 마찬가지로 공인회계사 임명을 거부한 것에 대한 판단이다. 이 판단이 있기 전까지는 ‘같은 것을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평등 명제에서 뒷부분은 별로 고려되지 않았다. 이 판단의 의미는 상황이 중대하게 다른 사람을 다르게 취급하지 않은 것도 평등권 침해이고, 그러한 차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것이다.

전통적 접근법의 문제

차별받았다는 주장이 있을 때 작동되는 가치 선택에는 기본적으로 세가지 변수가 있다. 먼저 특정 유형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있고, 그런 차별이 특정한 구별의 표식에 근거해야 하고, 특정한 이익에 대한 침해가 있을 것이다. 이 세가지 요건이 충족된 시점에서 입증책임은 해당국가로 이전된다.

먼저 특정 유형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처우의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청구인이 입증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처우가 어떤 ‘차이’에 근거한 것이며 비교대상이 되는 연관된 유사 상황이 있음을 밝혀야 한다. 이에 대해 해당국가는 문제되는 조치가 ‘정당한 목적’을 추구(목적정당성)했고, ‘채택된 수단과 추구한 목적간에 합리적인 균형’(비례성)이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간단해 보이지만,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직접적이고 분명한 차별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청구인은 위 세가지 요소를 충족시키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문제는 차별의 표식이 뚜렷하지 않고 은밀하며, 간접적으로 은밀한 처우가 이뤄진 경우이다. 이 경우에 청구자는 그런 행위가 ‘고의적’이며 ‘차별의 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또한 ‘중립적’인 기준인 것으로 보이지만 문제삼는 처우가 명백한 차별의 표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관련 집단에게 불균형한 효과를 끼쳤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경우에 입증책임이 해당국가로 이전되지 않고 청구인에게 있다면 차별의 의도성과 간접차별을 증명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필자는 이에 대해 차별처우가 있었다는 입증과 그러한 처우의 목적 정당성의 입증을 두 개로 구분하는 전통적 접근법이 인위적이라고 비판한다. 목적의 정당성을 추론하는데 취해지는 원칙과 가치는 우선적으로 같은 취급 또는 다른 취급이 있었느냐를 언급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둘에 대한 입증책임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이며, 문제는 누가(청구인이냐 해당국가냐) 그 책임을 지느냐이다. 입증책임을 누구에게 할당하느냐는 차별로부터의 보호의 효과성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 이에 대한 재판소의 그간 판례는 혼란스럽다. 당사국의 재량의 폭을 얼마나 인정하느냐에 따라 청구인 또는 해당국가 어느 한편의 입증책임을 강조하느냐가 달랐다. 즉, 국가의 재량의 폭을 넓게 인정하면 입증책임을 청구인쪽에 묻고, 재량의 폭을 좁게 인정하면 해당국가에 입증책임을 묻는 경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제기된 문제에 대해 얼마나 엄격한 심사를 하느냐 관대한 심사를 하느냐와 연결된다.

목적 정당성, 즉 문제삼는 조치가 ‘정당한 목적’을 추구했느냐도 쟁점이다. 사실상 어떤 조치에 대해서든 결과적으로는 정당한 목적을 추구했다고 주장될 수 있다. 정부들은 항상 좋은 의도와 고상한 목적을 주장할 수 있고, 실제로도 지금껏 재판소에서 다뤄진 사건 중에 목적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은 정부의 경우는 단 2개 사건 뿐이었다. 국가들이 거의 언제나 정당한 의도였다고 합리화할 때 청구인이 차별적인 의도를 입증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목적 정당성’만으로는 차별과 싸우는데 무력하다. 그런데 또다른 고민은 각국이 민주적 과정을 통해 결정하고, 재량의 폭을 가진 정책의 정당성을 재판소가 판단하려 들 때 재판소의 역할과 당사국의 자유가 충돌된다는 것이다. 그간 재판소의 판단은 목적 정당성으로부터 문제삼는 조치의 효력과 목적간의 관계를 고려하는 것(비례성)으로 주된 초점이 옮겨져왔다.

다음에는 차별 심사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 비차별 조항의 기본가치와 재판소의 적용이 같아질 수 있는 접근법에 대한 고민을 살펴본다. [류은숙] <2007년 10월 17일 인권오름 제75호>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세계인권선언 제2조)모든 국제인권법이나 헌법에는 ‘평등과 비차별’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평등이고 차별인지를 친절히 얘기해주지는 않는다. 인권에 관심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차별반대와 평등의 진전을 얘기하지만, 그 구체적 범위와 기준과 내용을 정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문제이다.이에 하나의 사례로서 유럽인권협약에서는 평등과 비차별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보려 한다. 1950년 채택된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보호에 관한 유럽 협약’(아래 유럽인권협약)은 지역인권기준 중에서 일찍이 자리 잡았고 상설유럽인권재판소를 설치하고 있기에 실효성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출처: Oddny Mjoll Arnardottir, Equality and Non-Discrimination under the 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Martinus Nijhoff Publishers, 2003)

작성일자 : 2007. 9. 17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세계인권선언 제2조)

모든 국제인권법이나 헌법에는 ‘평등과 비차별’을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평등이고 차별인지를 친절히 얘기해주지는 않는다. 인권에 관심 갖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차별반대와 평등의 진전을 얘기하지만, 그 구체적 범위와 기준과 내용을 정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문제이다.

이에 하나의 사례로서 유럽인권협약에서는 평등과 비차별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보려 한다. 1950년 채택된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보호에 관한 유럽 협약’(아래 유럽인권협약)은 지역인권기준 중에서 일찍이 자리 잡았고 상설유럽인권재판소를 설치하고 있기에 실효성으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출처: Oddný Mjöll Arnardóttir, Equality and Non-Discrimination under the European Convention on Human Rights, Martinus Nijhoff Publishers, 2003)

법에서 평등을 논할 때 오랫동안 ‘형식적’ 평등과 ‘실질적’ 평등의 차이에 주목해왔다. 전통적으로 이 둘 간의 차이는 ‘법의 내용에 상관없이 법의 적용만을 문제 삼느냐’ 아니면 ‘혜택과 부담의 정당한 분배 내지 일종의 사회정의의 요구 속에서 법의 내용을 문제 삼느냐’이다.

이런 기본적인 구분에 기초해서 ‘실질적’ 평등에는 또 다른 두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차이에 따른 다른 처우에 대한 인정이다. 여기에는 평등을 증진하고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한 집단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한 목적의 적극적인 조치들이 포함될 수 있다. ‘실질적’ 평등은 차이에 따른 다른 처우를 허용하는 것으로 이것은 차별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둘째, ‘적극적 의무’를 실질적 평등의 개념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는 차별을 방지하거나 차별로부터 보호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받을 수 있다.

평등에 관한 법률규정의 정교화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의 차별은 지속적이다. 형식적 평등이건 실질적 평등이건 평등에 관한 법률규정이 법적 절차를 밟을 때는 형식적 요소만 남게 되어 버린다. 이에 대한 비판들은 더 많은 실질적 평등을 주문하지만 평등이라는 용어 자체가 불확정적이기 때문에 인권법에서 평등 문제에 대한 아주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크게 3가지 접근 이론에 기초해서 평등의 문제를 살펴보자.

형식적 접근

첫번째로 형식적 접근법이 있다. 이는 “엄격하게 똑같은 처우”, 대칭적 접근 또는 동일성의 접근이라고도 말한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한다는 격언에 기초한 것으로 성‧인종‧종교 등 특정한 구분을 아주 무의미한 것으로 본다. 성‧인종 등의 특성이 아주 무의미한 것이므로 다른 처우로 귀결될 수 있는 ‘차이’를 구성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접근법은 동일한 처우에서 파생될 수 있는 불평등한 결과에 상관없이 동일한 처우를 강조한다. 이 접근법이 ‘대칭적’이란 의미는 불리한 집단에게 혜택을 주려는 다른 처우를 이미 특권층인 집단을 이롭게 하려는 다른 처우와 마찬가지로 유해하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런 형식적 접근법은 자유주의에 해당하는 것으로, ‘동일한 처우’에 대한 강조는 개인주의에 대한 강조와 직접 연결된다. 차별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장점이나 결점이지, 어떤 집단의 구성원이기 때문에 지속되는 구조적 불리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등에 대한 형식적 접근법으로는 평등을 증진시키기 위해 계획되는 적극적 조치(차별수정조치)를 정당화할 수 없다. 이런 점은 국가의 수동적인 역할에 대한 강조와 연결되기 때문에 국가에 요구되는 것은 적극적인 의무가 아니라 외적으로 명백한 차별을 삼가기만 하면 되는 소극적 의무이다.

이 접근법의 강점은 아주 ‘간단’하고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한다니 간단명료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 이 접근법의 단점이 있다. 누가 똑같고 다른지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또한 처우의 내용에 대해서도 얘기하지 않는다. 또한 ‘누구와 비교되는가’라는 문제점이 있다. 평등의 문제가 다뤄지기도 전에 이미 비교대상이 결정돼있고 분명한 비교대상이 없는 문제 같은 건 아예 제쳐 놓는다. 예를 들어 임신, 파트타임 노동, 장애 같은 문제 영역은 무엇과 비교되는가를 생각해보자.

이런 한계 속에서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불리한 집단의 구성원이 요구할 수 있는 동일한 처우의 내용은 특권 집단이 이미 누리고 있는 처우나 특권집단이 누릴 수 있는 수준에 국한될 뿐이다. 불리한 집단의 요구는 그 내용 자체가 아주 다른 것일 수 있는데 그 점이 고려되지 않는다. 따라서 비교대상자(예를 들어 임신하지 않는 남성, 정규직 노동, 비장애인)와 ‘동일성’을 보임으로써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려는 접근은 차이로 인한 배제를 일으키게 된다.

마지막으로 형식적 접근법의 문제점은 지배적인 사회정치적 구조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사회에서 지배적인 집단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된다. 기존의 사회 구조가 특권과 박탈에 어떻게 침투해 있으며 지배적인 집단의 기준이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지배하는 가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실질적 “차이”의 접근

두 번째 접근법은 ‘동일한 처우’와 특별한 처우를 결합시키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차이 모델, 실질적 및 비대칭적 접근이라고도 한다. 형식적 접근법에 기초하고는 있지만 다른 점은 실질적 평등을 성취할 목적으로 어떤 차이들은 인정돼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차이모델에서 문제되는 차이는 ‘불변의 바꿀 수 없는’ 차이로서 예를 들어 임신, 출산휴가, 교육에서의 소수자 언어, 장애 등이다.

이 접근법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는 격언에 규범적 요소를 도입한 것으로 ‘결과의 평등’에 근접할 수 있는 처우를 요구한다. ‘결과의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간접차별에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간접차별이란 의도와 무관하게 집단 간에 다른 결과를 낳게 되는 것으로서 차이 모델은 이에 대한 객관적인 정당화를 요구한다. 차이 모델의 중요한 특징은 차이를 받아들이는 상황을 ‘동일한 처우’의 ‘예외’로서 다룬다는 점이다. 형식적 평등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의 효과에 대응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개인주의적 이상을 거부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개인이 누릴 기회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특정 집단의 성원이라는 지위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본다. 따라서 차이 모델은 형식적 접근법의 엄격한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평등을 증진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허용한다.

차이 모델의 강점은 형식적 접근법에서 나타난 규범적 불확정성, 비교대상의 선점, 이미 비교대상에게 인정된 처우만으로 요구를 국한시키는 등의 문제점을 벗어났다는 점이다. 차이 모델의 특질은 특별한 적극적 조치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점을 허용했다는데 있다. 따라서 직접적인 차별을 금지하는 입법적 보호 뿐 아니라 평등을 증진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를 규정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의 적극적 의무를 실질적 평등의 개념과 연결시켰다. 적극적 조치는 비차별적일 뿐 아니라 특별한 상황에서는 국가가 적극적 조치를 규정하거나 적용할 것이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차이 모델은 차이에 대한 적극적 수용을 요구한다는 의미에서 다양성을 인정하고 있다.

차이 모델의 약점은 ‘어떤 차이가 정당화될 수 있고 특별한 처우를 요구하는가’의 문제에 대한 규범적 답이 여전히 불확정적이라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오직 생물학적이거나 불변의 차이만을 다루느냐 아니면 어떤 차이든지 다룰 수 있느냐의 문제가 발생한다. 차이에 따른 다른 처우를 규범적으로 인정한다고 했지만 그 처우의 내용은 여전히 모호하다. 어떤 점에서는 ‘유리한 특별한 처우’를 위한 근거가 될 수 있는 차이가 또 다른 측면에서는 ‘불리한 특별한 처우’의 구실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형식적 접근법에서와 마찬가지로 차이 모델에서도 사회속의 지배적인 집단이 ‘기준’이 된다. 따라서 가장 단순한 형태로 보면 조건부의 내용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비판은 특별한 처우란 것이 그런 처우를 받는 집단에게 낙인을 부여하는 기능을 할 수 있고, 불평등한 상황속의 현상유지를 영속시키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연관된 문제로 차이 모델은 ‘다르다’고 하는 집단을 바라보는 판에 박힌 진부한 시각을 영속시킬 잠재성이 있다.

실질적 “불리함”의 접근

세 번째 접근법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최근에 등장한 것이다.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권력, 지배, 불리함의 비대칭적 구조’를 강조하는 ‘맥락에 따른 접근법’이다.

이 접근법은 따져봐야 할 조치가 취약집단의 불리함을 늘리기 위해 작동하는가 아니면 불리함을 줄이기 위해 작동하는가를 분석한다. 불리함을 늘리는 관행과 정책을 없앨 것을 요구하고 사회정치적 구조를 바꿀 것을 요구함으로써 결과의 평등을 지향한다. 구조적 불리함에 도전하는 일에 간접차별이 아주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간접 차별을 불법화하는 것이 이 접근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접근법은 앞서 살펴본 두 접근법에서 나타난 동일성과 차이의 접근의 약점에 대응하여 만들어졌다. 본질적인 동일성이나 차이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거나 체제적인 결과로 강조점을 옮기는 것이다. “X라는 존재나 특성은 사물의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다. X는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X는 사회적 사건, 세력, 역사에 의해 존재하거나 형성됐다. 이 모든 것들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라는 입장이다. 평등이라는 맥락에서 'X'는 특정 집단에게 부여된 특질일 수도 있고 차별이나 불리함이라는 사회적 사실일 수도 있다. 이런 접근에서는 어떤 특질이 ‘자연적’이거나 ‘불변’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며, 그런 특질들에 대해 ‘사회적 구조’이며 사회에서의 권력‧지배‧불리함의 체계적인 유형으로서 관심을 가진다.

무엇보다도 이 접근법은 개인주의와 자유방임국가에 대한 강조를 분명히 거부한다. 이점에 있어 두 번째의 ‘차이 모델’의 접근법과 같지만 ‘불리함의 접근’은 그런 거부를 최대한 밀어붙인다. 특별한 처우를 ‘동일한 처우’의 예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차별적인 사회정치적 구조를 철폐하기위해 단지 때때로 요구되는 것으로 본다.

‘불리함의 접근’의 강점은 앞의 두가지 접근법과 비교할 때 규범적 내용을 좀 더 분명히 한다. 예를 들어 ‘불리한 조건을 경감하고, 위계와 지배의 관계를 없앰으로써’ 결과의 평등을 지향한다는 식으로 정당한 처우에 관해 얘기한다. 또한 기존의 비교대상에 초점을 두고 그들과의 동일성과 차이를 얘기하는 문제점을 벗어났다. 동일성과 차이라는 용어로 분류하는 것은 ‘불리함의 접근’법이 요구하는 분석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 접근법은 기존의 사회구조적 구조의 현상에 비판적이기 때문에 ‘구조적 불리함’에 대해 보다 비판적이다. 결과적으로 구조적 불리함과 연관된 모든 종류의 문제가 평등 문제로 다뤄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접근법에서도 규범적 불확정성의 문제는 여전하다. 불리하다고 하는 집단과 그들에 대한 처우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냐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불리한 집단’으로 분류하는 문제는 ‘다른 집단, 차이를 가진 집단’으로 분류하는 것과 비슷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어떤 집단이 불리하냐를 결정하는 것과 관련된 법원의 능력이다. 이 접근법에서 요구되는 맥락에 따른 분석은 법원이 전통적으로 다뤄왔던 것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다. 문제되는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그런 사회에서의 개인의 지위,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법률의 정치적 및 사회적 영향에 해당되는 얘기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법원의 분석은 관련 당사자의 분석과 아주 다를 것이다. 또한 법원은 그 자체가 사회구조로서 사회정치적 구조 변화를 위한 효과적 장치라기보다는 ‘모든 것의 척도’로 간주되는 사회에서의 지배집단의 견해를 유지하기 쉽다.

마지막으로 골치 아픈 문제는 이 접근법에서 보면 평등으로 인정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점이다. 평등원칙을 고수하지만 실제로는 평등으로부터 얻을게 아무것도 없어 보인다.

평등에 대한 법적 접근

지금까지 살펴본 평등에 대한 세가지 접근법이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장 형식적인 접근법에서 보다 실질적인 접근으로 미끄럼을 탄다고 할 때 어느 지점에서 순간 포착을 했느냐에 따라 이들 관점이 보일 것이다. 가장 형식적인 접근에서의 평등에 대한 법적 보호는 완전히 무익하며, 가장 비판적인 접근에서 볼 때는 사회 혁명 말고는 충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평등에 대한 접근법에는 일정 정도의 규범적 불확정성 내지 모호성이 있다. 이 문제는 하나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공식으로 결코 표현될 수 없는 가치의 판단 문제이다. 실질적 평등에 대한 법적 접근은 궁극적으로 이런 가치 판단에 달려있다.

다른 국제인권조약과 마찬가지로 유럽인권협약의 평등 규정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가치 판단의 문제와 규범적 의미는 법원의 절차를 통해 발생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형식적 또는 실질적 접근이 작동하고 있느냐가 드러난다. 이글은 유럽인권재판소에서 차별문제를 어떻게 검토해왔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류은숙] <2007년 9월 11일 인권오름 제71호>

작성일자 : 2007. 8. 1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앞에서 유럽 정치에서의 몇 가지 연대 사상을 살펴봤다. 연대 사상은 맑스주의, 수정 사회주의,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 및 국가와 인종에 대한 국수주의 사상(파시즘) 등 다양한 역사적·이데올로기적 전통에서 나왔다. 이들 중 수정 사회주의와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이 유럽 정치에 특히 영향을 미쳤다. 사민당과 기민당은 연대개념을 당의 핵심가치와 정치 언어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정치에서 연대 개념이 성공적으로 구사됐다는 점은 그 대가를 지불하기도 했는데 연대는 그 분명한 의미를 잃어버렸다. 연대 개념의 핵심을 규명하기도 어렵거니와 정당의 다른 핵심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연대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정당정치에서 사용된 연대 개념의 유동성과 느슨함은 지적 불만을 야기했다. 이에 현대 사회학은 연대의 개념을 다시 파고들었다. 개념의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연대는 동질성이 아닌 차이의 수용에 기반하며, 정치적 이타주의와 공감에 기초한 개념으로 확장돼왔다. 이런 종류의 연대 개념이 직면한 현재의 도전들은 무엇인가?

연대의 계급적 기초

노동운동의 연대사상은 노동계급의 파편화를 극복하는데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재산이 없는 남성 임금 노동자를 모델로 한 연대개념은 적어도 1970년대부터 그 중요성을 상실했다. 계급구조는 변해왔다. 산업 노동자의 수는 감소하고 있고 사적 및 공적 서비스 종사자가 늘어나고 있다. 서유럽 사회에 사는 사람들 중 아주 소수만이 자신이 노동계급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노동은 더욱 파편화되고 다원화됐다.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가 늘었고 저임금 노동과 공적 부문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주자는 노동시장에서 다른 부문을 차지하며, 이들은 노동시장과 사회를 더 이질적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질성과 다양성의 증대는 계급 구조를 더욱 불분명하게 만들었다. 노동자가 부문과 집단으로 분화되면서 각자의 경제적 이익을 다른 노동자들과 상관없이 추구하게 됐다. 정치의식으로서의 연대는 소비자 사회의 개인주의와 사적이고 개인적인 만족의 추구에 굴복하게 됐다.

하지만 이와 같은 계급 연대의 소멸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계급은 여전히 사회 정체성의 가장 공통적인 원천이며 복지국가에 대한 태도 유형을 가장 잘 설명하는 유일한 근거라는 주장이 있다.

사회구조와 관련된 또 다른 핵심 문제는 중산층의 중요성의 증대이다. 연대사상이 노동운동에서 발전할 때 노동계급이 이질적이었듯이 중산층도 아주 이질적이다. 어떤 중산층은 노동계급에 가깝고 어떤 중산층은 고도의 자율성과 고용주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또한 계급은 생산과 경제, 착취에만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자본(교육), 사회적 자본(사회관계), 상징 자본(위신)과도 관련된다. 이런 고도의 차별성이 섞여서 오늘날 연대 현상의 사회적 기초를 구성할 수 있을까? 계급의 개념을 아무리 확장한다 할지라도 연대사상의 발전에 복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개인주의

개인주의의 증대도 연대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19세기의 어떤 학자는 ‘개인이 일종의 종교가 됐다’며 개인주의의 증대가 사회통합과 연대에 끼치는 악영향을 우려했다. 현대의 개인주의 분석자들의 생각은 약간 다르다.

시장은 개인의 권리와 책임성을 강조했다는 의미에서 그 출발부터 개인주의를 증진시켰다. 근대성은 자아 설계를 열어젖혔지만 상품 자본주의의 획일화 효과에 더 강력한 영향을 받는 조건하에서 그랬다. 자아설계는 욕망하는 재화의 소유와 인위적으로 구성된 삶의 추구로 변환돼간다. 자아실현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보편적인 도덕 기준은 그 중요성을 잃게 되고 타인에 대한 관계는 단지 친밀한 관계영역에서만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주의의 증대는 개인들로 하여금 공동선을 위해 집단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싶어 하지 아니하게 하고, 현대사회의 집단적 연대의 기초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 현대 사회에서 연대는 더 이상 전통이나 물려받은 충성심 또는 계급 정체성에 기초하지 않는다.

하지만 또한 강조돼야 할 점은 개인주의가 반드시 이기주의의 증대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주의의 또 다른 측면은 ‘내가 유일한 존재이며 궁극적으로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싶다면, 다른 개인들도 마찬가지로 유일하며 대체할 수 없는 존재로 봐야만 한다는 것’이다. 서유럽에서 인간 존엄성과 인권의 보편성의 수용은 개인주의와 근대성과 강력하게 결합돼있다. 보편주의와 개인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다. 사민주의와 기독민주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인간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강조를 연대와 결합시켰다. 증대하는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연대를 부식시킨다는 생각은 개인주의와 보편적 인간 존엄성에 대한 사상이 한데 얽혀있다는 점에 대한 이해로 대체돼야 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연대와 개인의 자율성 및 자아실현이 새롭게 혼합돼 있다. 이들 가치간의 균형과 목적은 사회계급 속에서, 개인들 속에서, 그리고 다양한 맥락과 시대에 따라 다르다. 현대의 개인들은 연대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가질 수도 있고 안가질 수도 있고, 자신의 개인적 삶의 설계에 연대를 통합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다.

소비주의

개인주의의 발전의 뿌리는 르네상스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최근 수십 년간 증대된 개인주의는 중산층의 성장과 분명 결합돼있다. 중산층과 개인주의의 성장에 부가된 것은 소비주의의 증대이고, 이 셋의 결합이 이 시대 연대에 대한 가장 중대한 위협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계급 연대는 빈곤과 불안에 대한 공통된 경험에서 성장했다. 상호성실과 서비스의 교환, 협력으로 빈곤과 불안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에서 엄청난 경제 성장은 대량 빈곤을 퇴치했고 복지국가의 확장과 사적 소비의 엄청난 증가를 가능하게 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삶의 위험성은 매우 축소됐고, 물질적 재화의 소비와 생활양식의 선택에서의 개인적 선택의 기회가 크게 성장했다. 개인의 자율성 증대의 기반이 마련됐고 집단적 연대의 필요성은 대다수에게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정체성은 소비자로서의 정체성과 크게 결합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시간을 덜 보내고 비용이 드는 여가시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생산의 역할과 소비의 역할간의 균형이 무너져왔다. 소득과 구매력의 증가는 시장에서 상품과 서비스를 선택할 가능성을 증대시켰고 개인은 더 강력한 자기 충족감을 발전시킨다. 모든 개인이 타인에게 의존한다는 인식은 줄어들고 집단적 조정에 대한 지지는 부식될 수 있다.

소비자로서의 태도는 공공복지 정책에 대해서도 또한 발전됐다. 집단적인 공공복지는 소비자의 개인적 선호에 맞춰야 하는 소비자 서비스로 보이지 않는다. 개인들은 공공 서비스가 자신의 요구와 선호를 충족시키지 않을 때마다 사적 시장에서 사회적 서비스와 의료 서비스를 구매하는 것을 권리로서 요구하는 경향성을 더 갖게 됐다. 이런 식으로 소비주의는 새로운 의미의 개인적 자유를 자극했다. 이런 자유는 사적 서비스에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해나 사회의 집단적 이해를 고려하지 않고 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느냐를 선택할 자유를 주장하게 됐다. 집단적 연대와 개인의 자유간의 딜레마가 지속적으로 현저해지고 있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는 공공 서비스의 지도자들이 선전하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가 돼왔다. 이들은 경제적 효율성을 강조하고 소비자를 위한 서비스의 생산을 지향한다. 이런 경향성의 문제는 보건과 복지 서비스의 민영화, 시장 원칙과 경쟁의 수용이다. 그로 인해 이전에 연대에 기반을 두었던 공적 제도가 개인의 구매력에 기반을 둔 것으로 대체되고 있다.

복지국가는 연대를 해치는가?

연대와 복지국가의 관계는 무엇인가? 오늘날 복지국가는 제도화된 연대의 표현으로 간주되고, 많은 이론가들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가 연대를 부식시킬 것을 염려한다. 하지만 현재 상당한 증거들을 볼 때 후퇴와 축소에도 불구하고 복지국가는 살아남았고, 복지국가의 위기는 더 이상 유행하는 연구 주제가 아닌 것 같다. 사회조사 결과들은 복지국가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여전히 확고하며 많은 국가의 시민들의 태도가 복지국가의 정당성을 증명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개인주의의 증대가 제도화된 연대를 부식시킬 것이라는 우려를 불식시키기에 충분치는 못하다.

1970년대 이후 복지국가의 일반적 경향성은 보편성과 평등, 시민권이라는 점에서 약화되고 있다. 선별성, 사적 전달, 개인의 책임성과 노동 참여가 강화돼왔다. 게다가 복지에 대한 여론은 흔히 모순적이며 평등은 지배적인 가치가 아니다.

근본적인 질문은 복지국가가 어느 정도로 연대를 배양하느냐 아니면 연대를 해치느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대조적인 답변이 있다. 한 가지 답변은 잘 발전된 보편적인 복지국가가 공동체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다른 답변은 공동체와 연대의 전제조건인 공통의 책임성을 복지국가가 저해한다는 것이다. 경제적 재분배와 사회적 서비스의 제공에 대한 공적 책임성이 공동체의 궁핍한 구성원을 돌볼 도덕적 책임성을 시민사회로부터 제거한다는 것이다. 즉 원래는 연대에 기반을 두어야 할 제도가 오히려 그런 제도의 기반이 되는 도덕적 기초를 해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도덕적인 타인과의 관계맺기와 연대에 기초해야할 행위가 제도화된 유사 연대가 돼버리면서, 타인의 상황에 대한 개인의 관계가 그 도덕적 성격을 잃어버리고 세금을 지불하는 관료적인 행위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런 논쟁은 연대와 복지국가의 관계가 복잡한 것임을 보여준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위험과 자원을 공유하려는 시민의 준비됨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민들은 복지국가를 대규모 보험회사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주의와 소비주의가 증대되고 개인 저축의 가능성이 강화된다고 해서 반드시 복지국가를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견해가 우세할수록, 복지에서의 보편주의, 재분배, 연대가 손상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노동계급과 중산층의 동맹이 복지국가의 연대를 방어할 수 있을지라도 그런 방어가 3세계와 이주자, 억압받고 차별받는 집단에 대한 연대를 방어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모호한 현상의 지구화

오늘날 연대에 대한 주요 도전에서 지구화의 이중적 성격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대전의 발발은 국제적 노동자 연대의 사상의 패배를 보여줬다. 1차 대전 후에 ‘민족’은 연대를 말하는 틀이 됐고, 2차 대전 후에는 민족적 복지 국가가 수립되고 연대의 언어로 정당화됐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연대 담론은 민족국가가 국가 장치와 의사결정을 통해 자기 영토를 통제하고 일종의 재분배와 고용정책을 가진 경제정책을 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초했다. 오늘날 중심적인 문제는 어느 정도로 이런 생각들이 지구화시대에도 유효할 수 있느냐이다.

연대 사상은 언제나 시장의 확장과 동반된 사회적 유대의 해체에 대한 대응으로서 시장의 팽창에 대한 우려를 표시해왔다. 지구화는 국경의 제거 내지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국제적인 자본과 투자, 재화와 서비스의 자유로운 유통을 허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화는 시장의 더 큰 확장을 의미하며 연대 사상에 대한 위협이 된다. 초국적 기업은 일국 정부와 국제기구들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핵심 행위자가 됐다. 노동조합과 피고용인의 전략적 입지는 약화됐고, 자본소유자와 투자가들의 입지는 강화됐다. 각 서유럽 국가에서 민주적으로 선출된 대표자들은 이런 새로운 경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높은 임금을 받는 국가의 노동자들은 저임금 국가들의 노동자들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게 되고 국경을 초월한 연대는 더욱 어렵게 됐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구화가 연대의 전통적 형태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구화는 경제적 측면만이 아니다. 또한 사회문제가 지구화된다. 기구온난화와 대기 오염은 국경을 존중하지 않는다. 전쟁과 자연재해는 타국의 안전, 노동시장, 문화와 정체성에 영향을 미친다. 테러는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다. 유전자 조작된 식품은 세계 어느 곳에나 쉽게 확산될 수 있다. 여행의 증가는 전염병과 질병을 쉽게 확산시킨다. 민족국가의 힘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지구화의 영향은 민족국가가 자국 시민의 안전과 복지를 자기 힘만으로는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셋째, 지구화는 국제적 및 초국적 조직과 네트워크의 성장이다. 1976년부터 1995년까지 1천 6백여 개의 국제 조약이 비준됐고, 이중 백여 개가 새로운 국제기구를 탄생시켰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4천개가 넘는 국제회의가 매년 열리고 있다. 이러한 국제조직과 회의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대다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국제조직은 부유한 국가들이 지배한다. 이들 기구가 국제 연대를 대표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국제기구들은 정치투쟁과 공적담론의 장이며 새로운 동맹의 발전을 위한 가능성을 창조한다.

넷째, 지구화는 국제법과 규제의 증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제법과 조약은 무역, 운송, 통신을 규제하고 보편적 인권에 대한 인정을 요구한다. 민족국가는 더 이상 입법의 주역이 아니다. 국제조직의 수립, 협상, 조약, 지역 및 국제 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법이 발전된다. 이런 국제법의 주요 특성은 새롭고 긍정적인 국제 질서를 대표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의 헤게모니의 표현에 복무한다는 시각이 있다.

다섯째, 지구화의 또 다른 측면은 국제적 자원조직, 네트워크, 협력의 강화이다. 이들의 연대 개념은 시장과 산업 자본주의의 성장에 동반된 문제들에 대한 답을 추구한다. 이들 운동은 기존의 정당이 충족시키지 못했던 도전들에 대한 대응을 발전시켰다.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핵무장 해제, 환경에 대한 위협에 맞서기, 성적 차별과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여기서 던져야 하는 중요한 질문은 어느 정도로 사회운동에서 연대가 정착할 수 있느냐이다. 사회운동의 제1의 물결(노동운동과 교회운동), 제2의 물결(60년대와 70년대의 다양한 운동), 그리고 제3의 물결(지구화에 대한 우려와 미국 헤게모니에 대한)에서 연대는 무엇인가?

노동운동은 지구화가 매우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노동운동은 국제적 및 지역적 차원에서 공동의 대응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아직은 사회대중운동의 성격을 갖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형태의 국제연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다양한 정체성 운동은 노동운동보다는 다소 일관된 공통의 이데올로기가 부족하다. 전체 사회의 보편적 이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지구화 시대의 지구적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운동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전통적인 노동운동의 국제연대와는 다른 형태의 국경을 초월하는 새로운 연대는 가능한가? 기존 정당과 조직에 대한 활동가들의 회의적 태도가 일관성 있고 광범위한 정치 동맹 수립을 어렵게 하지는 않는가?

지구적 시민자격 - 지구적 윤리?

복잡다기한 현 세계에서 연대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연대가 타인에 대한 태도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모두가 공유하는 권리와 의무로 제도화돼야 한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논쟁하고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공적인 장의 형성이 동반돼야 국제법의 성장이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런 공적인 장의 형성은 지구적 연대의 필수적 구성요소라 할 수 있다. 지금으로선 공적인 논쟁과 의사결정권한이 연결되지 않은 것이 국제영역이다.

연대의 지구화는 지구적 시민자격이라는 맥락에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의 완전한 발전을 포함해야 한다. 지구적 시민으로 자신을 간주하는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 선호를 분명히 해야 한다. 지구적 윤리의 핵심은 지구적 공동체에 대한 책임성을 갖는 것이고, 그런 책임성은 모든 인간이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신념에 기초해야 한다. 지구적 시민은 자신의 국민국가에 대한 애착과 지구적 공동체에 대한 애착 사이에 의식적이고 세심한 균형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 연대는 민주적 참여와 법의 지배에 기초한 국제질서를 건설하려는 목표를 포함해야 한다. 이런 체계를 혹자는 세계적 민주주의의 수립이라 했다. 세계적 민주주의란 국제적 차원에서의 공평한 법의 집행, 더 큰 투명성과 책임성, 지구적 거버넌스의 민주성, 지방·일국적·지역적 및 국제적 차원 모두에서의 보다 강력하고 유능한 거버넌스를 의미한다. 이런 체계는 세계적인 가치나 윤리에 기반을 두어야 하는데 여기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은 지구적 사회정의, 민주주의, 보편적 인권, 법의 지배, 인간안보 및 초국적 연대이다.

혹자는 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과연 지구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윤리만으로 될까, 모든 인간의 동등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런 원칙과 가치에 기반을 둔 국제관계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될까?

물론 문제는 있다. 윤리만으로는 지구적 연대의 굳건한 기초를 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국제법 체계는 서구의 경제력과 협상력의 결과이다. 의사소통의 수단은 불균등하게 분배돼있고 세계의 다수가 배제돼 있다. 경제, 법률, 정치의 지구화는 서유럽 정부들이 자국의 목적을 추구할 의지나 능력을 상실할 지점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개인주의와 이방인에 대한 공포는 이 책에서 연구된 유럽 국가들의 성격이다. 이런 점들은 연대가 당장 발전할 것이라는 낙관을 어렵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의 종말에 와있지 않고, 역사는 놀라움으로 가득 차 있다. 현재에 근거한 미래 예측은 거의 언제나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는 점을 기억하자. [류은숙] <2007년 8월 15일 인권오름 제67호>

작성일자 : 2007. 7. 18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필자는 북·서유럽의 8개 사민주의 계열 정당의 강령을 중심으로 연대 사상의 변화를 분석한다.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및 영국의 정당들이다. 필자는 영국 노동당을 ‘연대’에 관한 한 유럽 사민주의의 예외로 다루고 있다. 자유주의 전통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연대 개념이 자리할 구석이 없었다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7개 정당들은 초기에는 노동자 계급 중심의 연대 사상을 취했다. 이것은 다양한 계기를 통해 타 계급을 포괄할 뿐 아니라 제3세계의 인민, 미래세대, 이주자와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대로 확장‧전환되었다. 그리고 ‘연대’는 연설문에서나 가끔 수사어구로 쓰이던 수준에서 당 강령의 핵심적인 사상과 기본 원칙으로 고양되게 된다. 이 과정은 국가에 따라 20년에서 50년의 세월이 걸렸다. 연대 사상을 가장 먼저 반영하고 발전시킨 것은 스칸디나비아의 사민당이었고 가장 늦은 곳은 남유럽이었다.

전개 과정

1차 세계대전이 있기까지, 대부분의 사민당들은 전통적인 노동계급의 연대 개념을 고수했다. 즉, 연대는 노동자들의 공통된 이해에 기반해 다른 노동자와의 동일시와 일체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가오는 전쟁의 그림자는 국제적 노동계급의 단결을 불확실하게 했다. 한 국가의 노동자들이 타국의 노동자들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전쟁의 위협이 커질수록 연대의 호소도 늘어갔다. 사민당들은 군비와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과 ‘타국의 노동자와 연대할 의무’를 외쳤지만 노동자가 자국 정부 편에 서서 전쟁에 나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로 인해 서로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내부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2차 세계대전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어느 정도 이전의 정치적 및 사회적 갈등을 누그러뜨렸다.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기독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저항(레지스탕스)운동에 함께 결합했기 때문이다. 전후 재건과 경제 성장의 필요성 앞에서 계급투쟁은 대부분의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전쟁 전에 작동했던 탈급진화 과정을 강화했다. 빠른 재건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한 협력이 긴요했다. 계급투쟁과 계급연대 같은 개념은 이전보다 어색하고 부적절하게 여겨졌다. 이 점이 당 강령에 반영되면서 ‘연대’는 이제 획득돼야 할 의미가 됐다.

이와 동시에 사민주의 정당은 선거에서의 지지를 확대했다. 정권을 잡은 사민주의 정당이 당면한 도전은 국가경제 성장과 국가의 재건이었다. 반면 야당에 머무른 사민당들에게 도전은 정치적 고립을 뚫고 선거에서의 지지를 늘리는 것이었다.

사민당들이 1951년 독일에서의 신 인터내셔널 회의에서 만나서 채택한 최종 결의안은 이 두 과제를 아우른 것이었다. 모든 임금 노동자의 연대에 호소했고 파시스트 독재하의 모든 민족들의 연대를 선언했다. 연대는 불명료하기는 하지만 뭔가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됐다. 결의안은 경제성장을 자극하기에 중요한 물질적 인센티브를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 함께 일할 때 생길 수 있는 공동체 정서와 연대, 노동 노력에 대한 개인의 만족을 언급했다. 그러나 제3세계의 피억압 민족들과의 연대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영국과 프랑스가 거대한 식민 권력이라는 사실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신 인터내셔널 강령은 당시 사민주의 정당들의 이데올로기적 분위기를 반영했다.

이러한 전개는 이 시기의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했고, 실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인구의 대다수에게 생활수준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리라는 전망을 안겨주었다. 케인즈주의 경제 이론은 사민주의 정당에 경제적 변동을 조정할 도구를 제공했다. 많은 국가들에서 고용주와 노동조직 간의 암묵적 또는 명시적 합의는 임금 요구가 이윤과 투자를 잠식하지 않는 한도 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세수의 증대는 사회개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정권에 관심을 가진 사민주의 정당들은 뛰어난 경제적 전망을 위태롭게 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의회의 다수를 모으기 위해 새로운 선거 동맹을 취해야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구조개혁을 포기했고 그 대신 생활수준의 향상과 생활의 위협에 대한 더 많은 예측가능성과 보장을 만드는 사회개혁을 받아들였다.

여당에게 있어서, 이러한 진전과 합의의 분위기에는 계급투쟁과 결합되고 노동계급에만 집중한 연대사상의 여지가 없었다. 정권에 대한 야망을 가진 당들은 산업 노동계급보다 더 큰 부문의 인구를 포용해야 했다. 이전에는 농민이 중요한 잠재적 동맹이었다면, 이제 정치적 이해는 공사 부문의 새로운 화이트칼라 집단으로 전환돼야 했다. 노동계급이 어떻게 정의되느냐와 무관하게, 사회주의 지도자들에게 점차 다급해진 것은 노동계급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회적 범주에 대한 당의 호소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사민주의의 목적은 선거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므로, 연대의 정의는 ‘계급’이 아닌 ‘인민’을 다뤄야 한다”, “노동자 연대는 사회적 연대로 확대돼야 한다”는 발언들이 대표적인 지도자들에게서 나왔다.

1945년부터 1968년의 학생봉기까지 사민주의 강령에서 연대의 개념은 더욱 포괄적이 됐다. 연대는 이제 억압받고 권리가 없거나 차별받는 것으로 여겨지는 모든 사람들과의 동일시를 의미하게 됐다. 제제3세계 국가의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제3세계 민족들이 연대 개념에 포함됐다. 여성, 장애인, 인종적 및 성적 소수자가 대안의 더 나은 사회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의 연대에 포함돼야 했다. 다른 한편 학생봉기는 ‘일치성’에 저항하는 투쟁과 부모세대로부터 독립된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킬 권리 투쟁을 표현했다. 따라서 학생운동의 가치는 한편으론 집단적 연대를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론 개인의 자유, 자아실현, 개인의 정체성의 발전을 강조하는 일면 모순돼 보이는 요소를 조합했다. 많은 사민주의 지도자들에게 이것은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1968년의 문화적 변화에다가 석유파동이라는 경제적 위기가 부가됐다. 2차 대전 이후 오랜 호황은 끝났다. 실업이 늘어나고 복지삭감이 논의되고 실행됐다. 1980년대에는 위기가 심화됐다. 시장 이데올로기와 개인주의가 지배적이었고 사민당은 정권에서 물러나야 했다. 1989년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불확실성을 심화시켰다.

이 속에서 새롭고 급진적인 언어의 필요성에 부응하여 복지의 보존과 개혁 둘 다에 이용될 수 있는 언어, 사민당의 정치력 확대를 위한 구호로서 ‘연대’가 재발견된다. 예전처럼 연설문에나 가끔 쓰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 당 강령의 기본원칙으로 ‘연대’가 천명된다.

제3세계와의 연대

필자에 따르면, 사민주의 정당에서 연대의 채택과 확대는 상당 부분 선거 전략이었다. 그런데 선거 전략에 별로 유효할 것 같지 않은 내용도 있다. 제3세계와의 연대가 그런 부분이다.

고전 맑스주의 연대 개념은 국제적이었고 국경을 초월하는 노동자 연대를 언급했다. 초기국면부터 사회주의 정당은 국제 문제에 몰두했고 국제협력, 국제적 계급의식, 지도원칙으로서 외국 문제에서의 반군사주의에 대한 신념을 일찍이 채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독일사민당은 1905년 서남아프리카에서의 봉기를 상대로 한 독일의 전쟁을 지지하길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까지 제2 인터내셔널은 식민지 착취를 염려하지 않았고,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일부 예외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식민 정책을 비난하지 않았고 심지어 1914년까지 그것을 지지했다.

식민지도 또한 민족 자결권을 누려야 한다는 레닌의 견해는 식민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을 열었다. 공산당과 제3 인터내셔널은 식민주의에 맞선 투쟁에 일찍이 참여했고 제3세계 국가들의 자치를 지지했다. 이것이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충성의 표현이었는가 아니면 연대의 표현인가가 논쟁 지점이다. 사민주의 진영이 된 사회주의 정당들은 식민 체제를 지지했고 제3세계 민족들의 독립에 저항했다. 비록 그들이 자주 식민지 인민의 생활 조건에 대한 공감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이런 점에도 불구하고, 당 강령은 그 문제를 연대 사상과 결부지어 언급하지 않았다. 제3세계와의 연대 사상은 그 개념이 사민주의 개념으로 변형된 때인 20세기 후반부까지 사민주의 정당들의 강령에 제도화되지 않았다. 이때가 돼서야 연대 개념은 노동계급만이 아닌 계급과 집단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됐고 연대의 기초는 이해(interest)로부터 보편적 연민으로 재표현됐다. 이런 상황에서 제제3세계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민을 포함하려는 조치는 당연했다.

사민주의 정당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사회연대주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실천이 이런 점에서 동떨어지게 됐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사민주의 정당들은 식민지에 국가 자치가 부여돼야 한다는 것을 마지못해 수용했다. 영국 노동당은 2차 대전 이전에는 반식민지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지만 전후 정권을 잡게 됐을 때는 덜 급진적이었다. 노동당 정부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독립을 부여했지만 아프리카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은 주저했다. 프랑스 사회당(SFIO)은 인도차이나 전쟁에 일정한 책임이 있고, 알제리 독립에 맞서 싸웠고 1956년 이집트 침공을 지지했다. 다른 사민주의 정당들은 알제리 전쟁에서 프랑스를 지원했고 또한 베트남 전쟁의 처음 몇 년간 미국을 지원했다. 반면 제3세계 인민들을 연민의 눈으로 흔히 바라봤고 생활조건 향상의 필요성이 당 강령에서 강조됐다.

노르웨이 노동당(DNA)은 빈국과의 관계에 대해 연대의 언어를 사용한 선두주자였다. 1951년, 인도 남부에서 개발 프로그램에 착수했을 때, 이것은 세계의 결핍과 빈곤에 대한 진정한 관심의 표현이었다. 동시에 당 지도부는 이것을 재무장에 대한 지출의 증가로부터 ‘인민에게 긍정적인 것을 주는’ 것으로 관심을 돌릴 기회라고 봤다. 1953년 강령은 국가간 경제적 격차를 메울 필요성을 선언했고 유엔이 ‘진정한 국제연대의 중심’이 되길 원했다. 독일에서 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 강령은 독일과 ‘미발전’ 국가간의 관계에서 연대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이어진 기간 동안, 스웨덴과 덴마크의 사민주의 정당들은 강령에 유사한 표현들을 도입했다. 하지만 남유럽의 사회당과 공산당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까지 이같은 일을 하지 않았다. 1960년 무렵부터 1980년대 초까지 제3세계와의 연대 개념은 당 강령에서 현대 사민주의 연대 이데올로기의 일부가 됐다.

선거의 고려가 이런 발전에 이바지한 것은 거의 없다. 이 측면의 연대의 포함은 자기 이해에 관한 생각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빈곤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곤궁에 대한 이타적 연민에 기반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논의할 수 있는 점은 이런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실천 간의 간극이다. 부국으로부터 제3세계 국가로의 지원은 GDP의 1%에도 미치지 않았고, 교역 조건은 제3세계의 이익을 위해 어느 정도라도 바뀌지 않았다.

다음 세대, 자연 및 인종적 소수자

1970년대 초, MIT 보고서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가 산업과 경제 성장이 생태와 지구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쟁을 야기했다. 1980년대, 녹색당이 일부 국가에서 설립되거나 녹색 사상이 기존 정당에서 영향력을 얻었다. 1986년 유엔 환경발전위원회(the Brundtland Commission)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핵심 구호로 해서 경제성장과 그것이 환경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고려를 결합시킨 발전의 필요성을 규명하기에 착수했다. 환경문제는 사민주의 정당의 강령에서 점차 더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지구 온난화와 재생불가능한 자원의 이용이 미래 세대와의 연대를 요구한다는 사상이 점차 당 강령에 반영됐다.

같은 기간, 실업이 또다시 중요한 문제가 됐다. 1973년 석유 위기 이후, 실업은 치솟았다. 1970년대, 스칸디나비아 사민당들은 ‘연대주의 임금 정책’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연대주의 임금 정책’이란 안정된 고용의 고용자들이 임금 요구를 억제함으로써 실업자와 연대를 표현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실업, 늘어가는 난민, 조금 후에는 발칸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인종적 다수자와 소수자간의 관계가 뜨거운 이슈가 됐다. 이런 변화들이 사민주의 정당의 강령에 점차 반영됐고 어느 정도는 연대의 개념에서도 그랬다.

사민주의 정당들이 이런 집단과 양상(미래 세대, 자연, 이주자, 난민 등)을 연대 개념에 포함하기 시작하자 제대로 갖춰진 포괄적인 연대 개념이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당 강령의 연대 개념이 이들 집단 또는 양상을 포함하기 위해 확대된 것은 20세기 막바지 수십년 동안이었다.

덴마크의 사민당이 최초로 환경 문제가 연대의 문제에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1977년 강령에서 강조됐다. 다른 정당들도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 이를 따랐다. 하지만, 사민주의 정당들은 일반적으로는 주저하거나 신중했다. 일반적으로 생태에 관한 것과 미래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할 필요성을 강령에 포함하는 반면, 이것을 경제성장의 필요성과 늘어나는 실업과 조심스럽게 균형을 맞추려 했고, 아주 가끔씩 환경 문제를 연대의 문제로 강조했다.

당 강령에서 연대에 포함된 마지막 집단은 인종적 소수자, 난민, 이주자로 보인다. 사민주의 정당들은 이주자와 난민의 상황을 강령의 이슈로 삼았지만 1990년대까지는 이것이 연대의 문제로 표현되지 않았다. 덴마크와 스페인의 사민주의자들이 처음으로 1990년대 초 강령에서 그렇게 했고 대부분의 다른 사민당들은 몇 년 내에 선례를 따랐다.

선거의 고려가 아마도 계급으로부터 인민 또는 국가로의 확장을 설명할 수 있다. 연대와 복지국가 개념간의 연결을 마찬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지만 제3세계와 이주자와의 연대 주장을 선거의 이점으로 보기는 어렵다. 이들 문제는 당 유권자간에 매우 논쟁적이어서 유권자간에 잠재적 득실을 평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집단과 이슈를 포함한 것은 두가지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모든 억압받고 차별받고 또는 결핍된 집단과의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보편적 휴머니즘과 이타적인 연대개념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또하나는 타협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다. 한편으론, 좌파의 비판가들을 좀더 만족시키면서 당 강령에서 연대를 선언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론 그런 연대를 실제로는 아주 제한된 정도로 하는 정책을 이행하는 것이다. 제3세계에 대한 원조를 낮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이민을 제한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이런 방식은 우파의 비판을 야기하지 않는다.

현대 사민주의 연대 개념

사민주의 정당들이 자신들의 연대 개념을 지속적으로 보다 포괄적인 것으로 만들어왔다는 것을 살펴봤다. 고전적 연대 개념과 구별되는 현대 사민주의 연대개념을 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첫째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연대 개념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여타 집단, 그리고 다양한 문제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돼왔다. 연대의 기초는 ‘(자신 또는 자기 집단의)이해’가 아닌 ‘윤리, 휴머니즘, 공감과 연민’으로 보인다. 연대의 목적은 사회주의의 실현에서 공동체 정서의 창조, 사회통합, 위험의 공유로 변했다.

둘째, 연대는 ‘동질성’에 기반한 것으로부터 ‘차이’의 수용에 기반한 것으로 변했다. 연대는 상이한 계급, 상이한 성, 다양한 연령 집단과 세대와 인종을 포함해야 한다. 사민주의 연대가 노동계급과 중산층만이 아니라 상위 계급을 포함해야 하는가의 정도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상위 계급이 특권을 덜 가진 사람들과 연대를 행사할 것이 기대된다는 것이다. 현대 사민주의 개념은 계급 이해보다는 윤리와 도덕에 기반해 있다.

셋째, 현대의 연대 개념은 ‘상호의존성’을 강조한다. 생산과 경제에서의 협력의 필요성이 고용주와 피고용인 간의 상호의존성을 창조한다는 주장이다. 양쪽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결과는 경제 성장의 축소와 봉급의 더 적은 증가와 복지 국가를 유지 또는 발전시킬 자원이 더 적어지는 것이다. 여기서는 고전 사회학자 뒤르케임의 유산이 분명하며 일부 사민주의 이론가들은 분명히 뒤르케임과 유사하다.

넷째, ‘이해’의 개념이 재정의됐다. 연대는 ‘자기이해’와 ‘통찰'에 기반한다. 이기적인 자기 이해가 아니라 계몽된 자기 이해를 말한다. 이러한 이해와 통찰은 아프고, 실업이고, 장애이거나 노령일 때 모든 사람에게 공통의 준비된 것을 제공하는 것이 모두에게 최상이라는 것을 알고 지지한다. 또한 자기 이해는 사회적 약자와 빈곤한 이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 자원을 공유하고 개인의 추구를 제한하려는 의지와 자기 구속 등을 만들어낸다. 전체로서의 사회와의 동일시와 자기 구속은 개인들이 사회통합을 해치는 방식으로 자기 이해를 추구하지 못하도록 한다. 최종적으로, 공동체와 집단적 합의가 사민주의 연대의 핵심 요소이다. 연대는 공통의 프로젝트를 통해 힘을 갖는 ‘함께함’과 ‘협력’을 의미한다. 개인의 행위로는 충분치 않기 때문에 집단적 프로젝트는 필수적이다.

다섯째, 연대의 목적이 재정의됐다. 고전적 개념의 연대의 목적은 투쟁을 강화하고 개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투쟁의 무기로서의 전통적 연대 사상은 일반적으로 20세기 후반부에 사민주의 강령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여전히 일부 당의 강령에서 되풀이되고 있다. 오늘날 이것은 현대적 개념의 성격으로 희미해졌다. 대신해서 보편적인 공동체 정서를 발전시킬 필요성과 사회통합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여섯째, 일부 차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현대 사민주의 연대 개념은 고전 개념보다 포괄적이다. 일반적으로 연대의 한계는 표현되지 않는다. 오늘날 연대 개념은 인구의 대다수, 사회적 약자, 주변부화되거나 가난한 사람들(자국에서나 제3세계 빈국에서나)을 포함한다. 강령 작성자들이 남성이 여성과의 연대를 행사해야 한다는 요구를 피하는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성(gender) 문제는 이제 연대라는 용어로 흔히 표현된다. 연대는 또한 세대간 관계와 환경 문제를 포함해야 한다. 최근에 일부 강령에서는 인종적 다수자와 소수자간의 관계를 또한 연대에 포함시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고전적 및 현대적 연대 개념에서 집단 지향성은 둘 다 약화됐다. 20세기 후반부에, 집단과 개인 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당 강령에서 출현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들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에서의 집단적 연대 간의 딜레마를 수용한다.

따라서 사민주의 연대의 개념은 더 이상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대한 투쟁, 부의 급진적 재분배 또는 사회 상위 부문의 특권에 대한 위협과 결합되지 않는다. 사민주의 연대 개념의 핵심적 구성요소를 꼽아본다면, ‘사회문제에 대한 집단적 해결을 추구하는 것’, ‘사회복지에 대해 국가에 책임을 주는 것’, ‘가장 결핍되고 차별받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해 공감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정치에서 의미하는 바는 아주 명확하지 않다. 다음에는 사민주의 연대 개념과 경쟁하는 또다른 연대 개념과 현대 사회에서의 연대의 ‘위기’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류은숙] <2007년 7월 18일 인권오름 제63호>

<편집인 주>


‘연대’는 인권운동의 주요한 실천양식이자 권리로서 주창되고 있다. 누구나 ‘연대’가 중요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연대는 무엇을 목적으로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이며 어떤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되는 것인가는 모호하다. 자유, 평등, 연대는 어떻게 조화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의 증대, 연대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의 결여 속에서 심화되는 경제의 지구화, 빈부의 극심한 격차 등으로 연대에 대한 숙고와 실천이 더욱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숙고와 실천에 참고가 될까 하여 유럽에서의 연대사상의 역사를 다룬 책의 내용을 3차례에 걸쳐 요약 소개한다. 필자는 연대의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어디까지를 연대의 대상으로 포괄하며, 개인의 자유와 연대와의 충돌을 어느 정도 고려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연대 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출처: Steinar Stjernø, Solidarity in Europe: The History of an Idea, Cambridge, 2004)


< 글 싣는 차례>

(1) '연대'의 세 가지 전통

(2)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3) '연대'의 현재의 위기

작성일자 : 2007. 6. 20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연대’는 인권운동의 주요한 실천양식이자 권리로서 주창되고 있다. 누구나 ‘연대’가 중요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연대는 무엇을 목적으로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이며 어떤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되는 것인가는 모호하다. 자유, 평등, 연대는 어떻게 조화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의 증대, 연대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의 결여 속에서 심화되는 경제의 지구화, 빈부의 극심한 격차 등으로 연대에 대한 숙고와 실천이 더욱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숙고와 실천에 참고가 될까 하여 유럽에서의 연대사상의 역사를 다룬 책의 내용을 3차례에 걸쳐 요약 소개한다. 필자는 연대의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어디까지를 연대의 대상으로 포괄하며, 개인의 자유와 연대와의 충돌을 어느 정도 고려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연대 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출처: Steinar Stjernø, Solidarity in Europe: The History of an Idea, Cambridge, 2004)


< 글 싣는 차례>


(1) '연대'의 세 가지 전통

(2)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3) '연대'의 현재의 위기

‘연대’를 연구하는 이유

19세기 초의 사회학자들은 ‘일체감’과 ‘사회적 유대’라는 전통적 감정이 근대사회를 낳는 과정에서 찢어졌다는 점을 목격하고 사회적 결집과 통합의 수단으로 연대를 생각했다. 국제노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사회적·정치적 적들에 대한 슬로건이자 무기로 만들었다. 복지국가 지지자들은 연대를 위한 투쟁의 결과이자 연대의 제도적 표현으로 복지를 바라봤다.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과 프로테스탄트 사회윤리에서는 자선보다 점차 연대가 더 중요하게 됐다. 이처럼 연대는 사회이론과 근대정치 담론의 핵심개념이며 사회정책연구에서도 중요하다.

문제는 연대의 개념이 사회이론과 정책 둘 다에서 상이한 의미를 갖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연대란 투쟁하거나 결핍상태에 있는 이들에 대한 기여로서, 또는 국가가 조직하는 세금과 재분배를 통해 타인과 자원을 공유하려는 각오로서, 또는 권리의 수립을 통해 집단적 행동을 제도화하려는 의지와 행위에 동참할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많은 가능한 정의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연대는 때때로 전혀 정의될 수 없는 불명료한 개념으로서 사용된다. ‘연대’의 사용은 현실 세계에서 연대의 현상이 사라지거나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위장될 수 있다. 사회이론과 정치 담론에서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다양한 견해, 정의, 함의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주의의 시대에, 연대의 사상은 위협받고 있고 방어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와 시장, 시장 이데올로기의 확산은 집단적 조정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사상들을 보다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서유럽의 점증하는 윤리적 다원성, 외국인 혐오의 증가, 빈부의 극심한 격차는 연대를 뜨거운 지구적 이슈로 만든다. 특히 세상에서 자신 만의 방식을 선택하고 주조할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연대의 전통적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 경제의 지구화는 일종의 연대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적 및 법적 제도의 결여로 우리의 관심을 쏠리게 한다. 현대 사회에서 연대의 실천에 대한 이러한 도전들은 그 자체가 연대의 개념을 더 면밀한 검토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이유이다.

‘연대’의 세가지 전통

사람들이 서로 우호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것은 일상의 관행이었고, ‘내가 너를 도우면, 도움이 필요할 때 네가 나를 도울 것’이란 생각의 실천이었다. 이처럼 상호적으로 서로를 지원할 의무는 산업화이전 사회에 존재했고, 이것은 공통된 정체성과 일부사람들과의 동질감, 타인에 대한 이질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연대의 현상은 그 사상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했고 사상은 용어가 퍼지기 전에 존재했다. ‘연대’라는 용어는 그것의 근대적 의미가 발전되기 전에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기독교의 우애(또는 형제애, fraternity) 사상은 기독교의 초기 시대에 발전됐고, 기독교도들의 공동체의 발전을 가족의 밀접한 관계와 동일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우애 또는 형제애(fraternity or brotherhood)라는 정치사상은 프랑스 혁명 동안 발전했다. 형제애의 감정은 혁명가들 간에 평등을 깨닫는 수단이었고, 정치 공동체가 공동으로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연대라는 용어의 탄생지였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사회철학자들은 혁명의 요동 속에서 사회정치적 불안에 대해 반추했다. 동시에 그들은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과 증가하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목격했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프랑스 사회 철학자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사회적 융합과 결합할 방법을 찾게 됐다. 여기서, 연대의 개념은 하나의 해결책으로 보였다.

연대의 개념은 넓고 포용적인 것이었고, 상실한 사회적 통합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했다. 맑시즘이 노동운동에 일찍이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독일에서는, 연대의 개념이 나중에 발전했고,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에서의 결집과 단결의 필요성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뒀다. 여기서의 연대 사상은 오직 노동자를 언급했다는 점에서는 보다 제한적인 것이었고, 국경을 넘어선 만국의 노동자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는 보다 포괄적인 것이었다. 이 연대사상은 통합이 목적이 아니라 갈등을 내포한 것이었고 단결뿐만 아니라 불화(계급 갈등)를 내포한 것이었다. 19세기 하반기에,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연대의 제3의 전통을 불러일으켰다. 프로테스탄티즘 내에서는 연대의 사상 발전이 2차 대전 후에야 발생했다. 이처럼 고전 사회학, 사회주의 이론, 기독교 사회윤리에서 유럽의 연대 사상의 세 가지 전통이 엿보인다.

고전 사회학 이론에서의 ‘연대’

푸리에, 르루, 꽁트, 뒤르케임, 베버 등 사회학자들의 다양한 이론이 소개된다. 이 글에서 각각의 이론을 상세히 살펴볼 수는 없기에, ‘연대’ 사상에 대한 필자의 분석만을 간략히 소개한다.

다양한 사상가들간에 나타나는 연대 개념의 차이의 핵심은 사회통합과 조화에 기여하는 규범으로서 연대를 이해하느냐 아니면 특수한 집단 구성원간의 관계로서 연대를 이해하느냐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의 다양한 부분을 한데 묶는 규범과 가치가 존재하는 결과가 연대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일단의 사람들을 한데 묶는 대인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경우에 연대는 한편으론 포함하고 한편으론 배제하는 힘이다. 따라서 연대는 ‘우리’를 통합하기도 하지만 ‘우리’에 속하는 사람과 ‘그들’에 속하는 사람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을 한데 묶는 접착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개념이 구분될 수도 있다. 이런 접착제는 자기 이익의 합리적인 추구, ‘하나’라는 정서적 감정, 윤리적 의무의 감정 또는 이들 요소의 일부 또는 전부의 혼합일 수 있다.

고전 사회이론에서의 연대 사상은 사회에서의 조화와 사회통합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연대 사상을 이해한 측면이 강했다. 자본주의의 출현과 그와 결합된 문제점들에 맞닥뜨린 이들 사상가들은 또다른 사회 폭동이나 대격변을 야기함이 없는 개량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이들의 연대 개념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요소들을 갖고 있었던 과거 사회에 대한 향수가 짙은 반면, 노동운동에서 연대의 개념을 특화시키려는 강력한 미래 지향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우려한 점은 집단, 조직, 공동체와 사회가 부과하는 집단적 연대의 요구가 개인의 자유와의 관계에서 일으키는 딜레마이다. 개인을 집단에 통합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유대가 개인주의와 충돌하리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개인의 자유가 포기돼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학자에 따라 “도덕적 개인주의”나 “인류애의 종교”라는 식으로 개인을 사회와 결속시키는 다양한 방법을 추구했지만 그것이 이기주의를 억제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정치이론에서의 ‘연대’

필자는 사회주의 이론에서 3가지로 갈라진 연대개념이 있다고 보고, 이를 고전 맑스주의, 레닌주의, 고전 사회민주주의 연대개념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사회주의 연대사상은 고전 사회학과는 달리 강력한 유대의 지역 공동체가 있었던 전근대 사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연대 개념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자와 투사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연대의 중요성은 당면한 긴급성이다. 적에 의한 패배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함께 결합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고, 바람직한 미래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연대는 중요한 도구이다. 이들 개념은 연대의 기초가 무엇이냐, 연대에서의 윤리의 역할, 개인의 자유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르다. 따라서 사회주의 연대개념을 고려할 때는 이들 개념이 출현하는 분명한 담론에 한정해서 고려하는 것이 적합하다.

고전 맑스주의의 연대 개념은 노동계급의 공통된 이해에 기반해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유대와 관계를 파괴하는 것과 동시에 노동자를 서로에게 더 밀접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조건을 창조했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생산과정 그 자체의 메커니즘에 의해 훈련되고 통일되고 조직화된다. 노동자들은 미래에 대한 똑같은 전망에 직면하고, 이 전망은 개인적 탈출의 희망을 주지 않는다. 근대의 통신수단은 노동자간의 더 많은 접촉과 국경을 넘는 노동자 조직의 설립과 선동을 쉽게 만든다. 이런 모든 것들이 노동계급 연대의 전제조건을 창조했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그들의 바람은 노동자의 생활조건과 이해를 더욱더 평등하게 만든다. 상이한 유형의 노동간의 차이는 제거되고 임금은 똑같이 낮은 수준으로 줄어든다. 연대는 이처럼 높은 수준의 동질성을 가진 사회구조로부터 발생한다.

맑스는 갈등하는 계급 이해를 벗어난 정서적 순화라는 이유로 형제애의 개념을 조롱한다. 그는 연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공동체, 결사, 단결’ 등을 주로 사용한다. 1848년의 공산당 선언에서는 형제애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그 유명하고 간결한 구호가 등장한다.

맑스는 두 개의 상이한 연대사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계급의 연대로 알려진 것이다. 이를 주로 ‘단결’의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동체는 진짜일 수가 없으며, 노동계급의 일상의 투쟁 그 자체로는 진정한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집단의 타 집단에 의한 착취가 특징인 사회에선 사회적 연대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고, 연대는 구체적인 경제적 및 사회적 구조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연대인데, 이것은 ‘이상적 연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개인들의 진정한 공동체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철폐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개인들로서 자유롭게 한 데 결합할 때에만 진정한 개인들의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다.

레닌주의 연대 개념의 기초는 고전 맑스주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집단에 대한 강조는 매우 강력하며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개인의 자유는 아주 경멸적인 이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의 자유는 사유재산을 구체화하기 위해 고립된 개인주의자가 가지는 자유이고, 타인에게 적대적인 자유이기에, 자본주의에서 연대사상과 상호의존성은 쓸데없는 ‘규범적 사상’이 된다. 진정한 연대와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

고전 사민주의 연대 개념의 대표적인 것은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의 연대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경제위기와 후퇴를 견뎌냈고 자본주의의 일촉즉발의 붕괴 전망은 전혀 없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사망을 더 기다릴 수 없으며 구체적인 개혁정책을 개발해야 하고, 의회에서 새로운 다수를 수립하기 위해 여타 계급 및 집단과 동맹을 추구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장기간의 목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레닌주의가 주장한 것처럼 일시적으로 희생될 수는 없다.

사민주의 윤리는 평등의 사상, 공동체의 사상 또는 연대, 자유 또는 자율성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며 이들은 서로에 대해 균형을 이뤄야만 한다. 동료노동자와 단결함으로써 노동조합에 노동자의 힘을 모음으로써 노동자들이 고용주에 대한 의존성을 자발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때, 연대는 발전된다. 이런 자발적 행동이 윤리적 헌신의 표현이다. 한 데 속한다는 감정은 강화되고 잘 발전된 연대에 대한 이해로 성장한다. 이런 연대는 노동운동 내에서 가장 강력한 지적 요인이 된다. 연대의 감정은 다른 어떤 집단에서보다 노동운동에서 더 강력하며, 노동운동에서 연대의 실천을 필요로 하는 식견보다 더 응집력 있는 원칙이나 사상이란 없다. 사회법의 어떤 규범이나 원칙도 연대 사상의 구속력에 비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연대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달리 노동계급만이 아닌 여타 계급과 집단의 이해를 포함한다. 이들 계급과 집단간의 차이를 수용하며 포함된 사람들 간에 공동체의 감정을 창조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높이 평가되기 때문에 집단에 대한 강조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종교에서의 '연대‘

종교는 국민이나 계급이 존재하기 훨씬 전에 사람들간의 유대였다. 계급 연대의 사상이 발전되자, 이 발전은 기존의 종교에 대한 충성심과 갈등하게 됐다. 가톨릭의 연대 개념은 두 개의 상이한 관심에서 나왔다. 산업사회에서의 사회통합에 대한 염려, 그리고 1950년대에 시작하여 1961년에 교황 회칙에 개념이 도입된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이다. 루터주의와 일반적인 프로테스탄트는 연대의 사상을 3세계의 상황에 대한 우려와 연관시켰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사회윤리에서의 연대 사상은 다른 곳에서의 발전보다 뒤쳐졌다. 그 이유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은 연대의 개념이 노동운동과 밀접하고 계급투쟁 사상과 결합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온정주의적인 종교의 태도는 계급 갈등이나 계급투쟁이 아닌 사회적 자선이나 협력,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강조했다. 다른 한편으론 3세계에서의 교회의 급진화에 제동을 걸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종교가 연대 개념을 최종적으로 채택할 때는 서유럽의 크고 영향력 있는 정당 대부분에서 그 개념이 더 광의의 보다 이타적인 개념으로 변형됐을 때라고 본다.

오늘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연대 사상의 차이는 여전히 몇 가지 구분되기는 하지만 별반 크지 않다. 연대 사상의 기초는 같다. 인간은 신의 이미지로 창조됐고, 모든 인간은 신의 눈으로 볼 때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웃사랑에 대한 요구와 타인에 대한 기독교인의 섬김의 의무는 연대를 표현하는 공통된 기초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다른 인간에 대한 섬김을 기독교인의 의무로 자주 언급한다. 가톨릭의 개념은 사회통합과 조화에 더 중요성을 부과한다. 가톨릭의 개념은 계급의 경계, 부자와 빈민, 부국과 빈국간을 초월한 연대의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회통합의 강조로부터 가톨릭의 연대 사상은 논리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종류의 것이 된다. 계급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 모든 사회적 및 경제적 경계와 구분을 초월하는 모든 계급의 인민을 포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주와 피고용인, 노동자와 중산층, 여성과 남성을 협력과 상호이해가 지배하는 공동체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톨릭의 연대는 맑스주의와 사민주의 개념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집단적 지향성은 맑스주의와 사민주의 개념보다 약하다. 집단적 성격은 개인에 대한 강조와 세심하게 균형을 이룬다. 가톨릭의 인격주의(personalism)는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사람이 된다는 생각으로, 개인과 사회간의 관계를 논점으로 만들며, 연대의 집단적 성격을 줄인다. 또한 국가에는 필수적이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요구하며 자원조직의 활동을 강조한다. 국가가 직접 나서지 말고 자원조직의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연대에 관한 모든 개념은 두가지 필수적인 가치를 지적하고 있다. 개인은 어느 정도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해야하고, 개인과 (적어도 일부의) 타인 간에는 공동체의 감정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시의 힘과 포괄성의 정도는 매우 다르며, 사상의 기초, 추구하는 목적, 집단적 지향성의 정도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제 서유럽의 다양한 정치 정당에서의 연대 개념의 발전을 연구하기 위해 정치의 세계로 들어갈 차례다. 어떻게, 언제, 왜 이들 연대 사상이 사민당과 기독교 민주당의 제도화된 이데올로기에 반영되었나? [류은숙] <2007년 6월 20일 인권오름 제59호>

이어질 내용: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연대’의 현재의 위기

작성일자 : 2007. 5. 23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국제인권무대에서 널리 활약한 프랑스 법학자 카렐 바삭은 1977년 세계인권선언 30주년 기념연설에서 국제인권의 발전을 요약하며 3세대 인권을 언급했다. 즉, 1세대 인권은 자유의 가치를, 2세대 인권은 평등을 강조한다면 3세대 인권은 우애에 초점을 두며, ‘연대에 대한 권리’라는 특유한 표현을 쓸 수 있다. 카렐 바삭은 3세대 인권으로 발전권, 평화권, 환경권, 인류의 공동유산에 대한 소유권, 커뮤니케이션의 권리를 언급했다. 혹자는 여기에 인도주의적 원조와 재난 구조를 받을 권리, 민족 자결권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연대권은 구체적 의미가 없고 구체적 의무도 없다’, ‘따라서 평화권 같은 건 없다’, ‘1·2세대 인권과 달리 3세대 인권은 어떤 법적 조약으로도 공식화된 바 없다’, ‘평화권은 오직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며 인권실현의 수단이나 과정을 권리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반론이 거세다.

오늘 살펴볼 『평화에 대한 인권』(출처: Douglas Roche, The Human Right to Peace, 2003, Novalis)은 이런 비판에 대한 답으로 평화권을 “인류의 신성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수세기 동안 국제법과 국제관계의 주요 목적으로 일컬어진 것이 평화임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국제무력분쟁과 그로 인한 엄청난 규모의 사망, 파괴, 고통은 현세기에 발생한 것만으로도 정당한 평화를 성취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목표와 현실간의 엄청난 격차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 격차 때문에 국제사회는 평화에 대한 인권이 존재한다고 엄숙하게 선언해왔다. 평화권은 2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건설적인 평화 관련 노력의 구현이 이론적 용어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권을 위한 국제적 노력

필자는 평화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 기본 규정: 유엔헌장 전문 및 1조, 55조, 세계인권선언 28조
‧ 1978년 유엔총회: 평화로운 삶을 위한 사회 준비에 관한 선언 - 국내 및 국제 정책이 평화로운 삶의 성취를 지향할 것. 특히 젊은 세대에 관하여 그리할 것을 강조.
‧ 1981년 아프리카 인간과 인민의 권리에 관한 헌장 - 모든 인류는 국가적 및 국제적 평화와 안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 1984년 유엔총회: 평화에 대한 인류의 권리선언 - 우리 지구상의 인류에게 평화에 대한 신성한 권리가 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평화권의 행사는 전쟁위협의 제거를 요구한다. 평화권은 여타 인권의 전제조건이다. 인권‧발전‧평화는 서로 고립해서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이다. 평화 없는 인권은 환상이다.
‧ 1997년 유네스코 사무총장: 평화에 대한 인권 선언 - 갈등의 근본원인, 즉 구조적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조기단계에서 진화에 나설 때 분쟁을 피할 수 있다. 전쟁의 문화로부터 평화의 문화로의 변화가 우선 필요하다. 국제사회는 전쟁비용과 평화 비용 두 개에 동시적으로 몰두할 수는 없다. 이 선언과 기존 선언의 차이점은 평화권을 인권의 전제조건으로 확인했을 뿐 아니라 성취를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선언이 요구하는 두 개의 전략은 1) 빈곤, 환경파괴, 국제정의 등과 같은 긴급한 문제에 대해 즉각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2) 평화와 정의의 가치를 이해하고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배양하기 위한 대대적인 교육 운동이다.
‧ 1997년 오슬로 기초 선언 - 평화권을 세 개의 연관된 요소로 나누었다.
1) 인권으로서의 평화: 모든 인간은 인간성에 내재된 평화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어떤 종류의 전쟁과 폭력도 평화에 대한 인권과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2) 의무로서의 평화: 모든 지구의 행위자들은 평화의 유지와 건설에 기여할 의무, 무력분쟁 방지와 폭력 예방의 의무를 갖는다.
3) 평화의 문화: 평화권이 성취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평화의 문화, 교육, 대화, 윤리적 및 민주적 이상을 통해 인류의 마음에 평화의 뿌리를 추구하는 전략
‧ 2003년 유엔총회: 무력분쟁 방지에 대한 결의안 채택

실천의 장애물

위에서 열거된 국제사회의 노력에는 큰 장애물이 있다. 필자는 주요 강대국들의 지지 부족과 저지를 지적한다. 그런 사례는 아주 많다.

1984년 유엔의 ‘평화에 대한 인류의 권리선언’은 핵전쟁의 위협 제거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서구 국가들이 다수 기권(34표 기권)하여 빛을 잃었다. 1997년의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평화권 제안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이 월권을 했다고 비난하며 평화권에 대한 공격과 기권표시로 대응했다. 이에 대해 남반구 국가들은 무기 산업을 보호하길 원하는 북반구 국가들을 비판했다. 결국 합의 도달에 실패했고 평화권에 대한 회의주의는 계속됐다. 1999년 ‘평화의 문화를 위한 행동 프로그램’에 관한 비공식 유엔 토론에서 미국 대표는 “평화는 인권의 범주로 고양돼선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 발언했다. 2002년 평화권의 증진을 요구하는 결의안은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과 나토(NATO)의 동유럽 신규 가입국들의 압도적인 반대표(50표)로 작동할 수 없었다. 평화권을 인권 무대가 아닌 국제관계의 다른 영역에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인도의 전 대법관(P.N.Bhagwati)은 평화권의 주요기능을 “평화적 분쟁해결을 통해, 국제관계에서의 폭력 사용 또는 위협의 금지를 통해, 핵무기의 제조·사용·배치의 금지를 통해, 그리고 전면적 군축을 통해 생명권을 증진하고 보장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에 담긴 하나하나의 요소, 즉 군축, 핵무기의 금지 등이 거센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문화

오늘날 98개국의 1천여 기업이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6억3천9백만여 소형무기를 생산하고 있다. 불법 무기 교역은 이 숫자를 넘는다. 최대 무기 거래상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즉 세계의 강대국들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필자는 군산복합체의 탐욕 등 여러 배경 요인들 중에서 ‘전쟁의 문화’의 지배를 우선으로 꼽는다.

필자는 군국주의의 동의어로 ‘전쟁의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갈등 해결에서 군사적 가치가 고양되는 것이다. 그 결과 공격적인 군비태세와 군부의 지배적인 정치적 지위가 초래된다. 전쟁과 대량 폭력은 고의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의 결과이며, 전쟁은 적을 필요로 한다. 또한 전쟁은 군비와 군인, 정보의 통제를 요구한다. 이것은 환경파괴, 빈곤, 민주주의와 인권의 파괴를 야기한다.

전쟁의 문화의 심연에 자리한 생각은 폭력의 뿌리가 인간 본성의 타고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언제나 전쟁을 해야 하고, 기껏 잘해봤자 최악의 폭력 발산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 논리를 부정하며 인간은 유전적으로 전쟁을 위해 프로그램화되어 있지도 않고, 인간의 본성에 폭력을 양산하는 타고난 생물학적 요소 같은 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결국 전쟁을 만들어낸 종(인류)은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평화의 문화

평화의 문화란 “생명, 자유, 정의, 연대, 관용, 인권, 그리고 남녀의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들에 기반한 문화”를 말한다. 이 목록을 더 풀어서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 생명, 존엄성, 인권에 대한 존중
· 폭력의 거부
·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
· 민주주의, 자유, 정의, 연대, 관용의 원칙을 지지하고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
· 인종·종교·문화·사회 집단과 국가들 간의 상호소통과 이해

전쟁의 문화와 평화의 문화는 다음과 같이 대조된다.

전쟁의 문화 ;
· 적의 이미지
· 군비증강과 군대
· 권위주의적 지배
· 비밀주의와 선전
· (구조적·물리적) 폭력
· 남성의 지배
· 전쟁을 위한 교육
· 약자착취, 환경착취

평화의 문화 ;
· 이해, 관용, 연대
· 군축
· 보편적이고 완전한 민주적 참여
· 정보와 지식의 자유로운 흐름
· 모든 인권에 대한 존중
· 여성과 남성간의 평등
· 평화의 문화를 위한 교육
· 지속가능한 경제·사회적 발전

평화의 문화는 전쟁과 폭력을 향한 문화적 경향을 대화, 존중, 공정함이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평화의 문화는 이러한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배양하기 위하여 교육을 필수적인 도구로 사용한다. 그 교육의 내용을 이루는 대표적인 예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2000년에 기초한 평화의 문화 건설을 위한 실천행동에 관한 선언이다.

‧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 차별이나 편견 없이 각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을 존중
‧ 폭력의 거부: 적극적인 비폭력 실천,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거부, 특히 가장 착취당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향한 폭력, 아동과 청소년을 향한 폭력을 포함하여 신체적·성적·심리적·경제적·사회적 폭력 및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거부
‧ 타인과의 공유: 배제, 불의, 정치·경제적 억압을 끝내기 위하여 아낌없는 정신으로 내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공유하기
‧ 이해하기 위해 귀 기울이기: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의 사수, 언제나 대화를 우선시하고 광신, 비방, 타인에 대한 배제에 빠지지 않고 귀 기울이기
‧ 지구의 보존: 책임성 있는 소비자의 태도 증진, 모든 형태의 생명을 존중하고 지구상의 자연 균형을 보존하는 발전의 실천
‧ 연대를 재발견하기: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함께 창조하기 위하여 여성의 완전한 참여와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기

이러한 평화의 문화 실현은 매일 매일의 헌신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런 책임성을 움켜쥘 때, 평화에 대한 인권은 보장될 것이다. [류은숙] <2007년 5월 23일 인권오름 제55호>

작성일자 : 2007. 4. 2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소위 3세대 인권 또는 연대권이라 불리는 권리에는 ‘환경권’이 속한다.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직면하여 환경에 대한 관심과 불안이 커가는 지금, ‘환경권’은 당연한 인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환경권’에 대한 선호와 열망은 당연할지 모르나 ‘환경권’에 대한 정의나 기준은 당연하다고 할 수 없다.

인권과 환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의 접근을 다룬 시각들을 살펴본다.(출처 Alan Boyle 외, Human Rights Approaches to Environmental Protection, 1997, Oxford)

인권과 환경간의 긴장

환경운동과 인권운동 간에는 긴장이 있다. 환경운동은 다른 종이나 생태계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다는 이유로 인권에 대한 불신을 가질 수 있다. 만약에 기존에 인권으로 인정된 권리들, 가령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이 ‘절제’된 수준이 아닌 ‘부’를 추구하는 속에서 세계인구의 다수에게 실현된다면 그 결과는 자연자원의 급속한 고갈일 것이다. 따라서 늘어나는 인구를 위해 인권을 실현하는 것과 한정된 환경자원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것 간에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인권운동은 생태계, 유한한 자연자원, 미래 세대의 기본적 필요를 보호하려는 환경운동의 추구가 때로는 긴급하고 절실한 인간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다. 흔히 인권과 환경의 상호의존성, 불가분성을 원칙으로 내세우지만, 이런 원칙의 주장은 현실에서 직면하는 어려운 문제를 일시적으로 가리려는 도덕적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환경문제를 인권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성과 장점이 있는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환경권을 운운하는 것인가?

환경에 대한 인권은 필요한가?

먼저 검토돼야 할 전제가 있다. 첫째, 뭔가를 선호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즉 깨끗한 환경을 원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도덕적 또는 법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둘째, 권리로 말하는 것을 도덕과 동의어로 취급하는 것도 문제다. 권리 언어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어떤 행동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은 가능하다. 깨끗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다 할지라도 그러한 추구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일 수 있다. 즉 깨끗한 환경, 건강한 환경 내지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권’의 접근방식을 취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 대한 입장이 대립될 때, 우리가 선호하는 것이 권리로서 인정받는다면 그 균형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상호 선호하는 것이 대립할 때, 어느 한쪽도 힘으로 바라는 바를 강요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서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반면에 어떤 선호가 권리와 대립할 때, 그 권리의 소유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카드를 쥐게 된다.

권리와 도덕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리는 도덕의 전체는 아니지만 그 일부이다. 우리가 깨끗한 환경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고 하면 환경정책의 도덕적 성격에 관한 어떤 논의에서도 우리의 그 권리는 고려돼야만 한다. 이 권리는 기타의 선호되는 것들이나 비도덕적 고려들보다 먼저 고려돼야 한다. 도덕적 권리로 유력한 것은 법적 권리가 되기에도 아주 유력하다. 따라서 헌법이나 국제인권법에 규정된 환경권을 갖는다는 것이 이 권리와 관련된 모든 논쟁에서 권리소유자가 승리할 것을 보장하지는 않더라도 확실히 그 권리가 고려될 뿐 아니라 그 권리를 부인하기 위해서 상당한 이유가 요구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권리는 도덕적 및 법적 주장에서 다른 개념을 이용해서는 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를 갖는다.

기존의 인권을 동원

인권개념이 환경보호에 유효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 중 하나는 기존에 확립된 인권을 동원하는 접근이다. 기존의 국제인권법이나 국가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인권규범이 실현된다면 충분하다는 시각이다. 새로운 환경권을 만드는 것은 잘해봤자 과잉이고, 잘못하면 비생산적이라는 입장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데 힘을 들이기보다는 기존 인권기준의 효과적인 이행을 위한 운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존의 인권에는 우선 시민·정치적 권리가 있다.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데 이 권리의 중요성이 있다. 생명권, 결사권, 표현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권리, 평등,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등의 실현은 환경파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가능하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 심각한 환경 파괴에는 인권 및 환경 옹호자들에 대한 억압과 정보접근권에 대한 거부가 동반된다. 억압과 공포에 의한 재갈 물리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정치적 권리는 참여의 보장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인간 복지의 기준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건강권,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은 직접적으로 환경에 관한 조건을 담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건강권은 해로운 환경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조치를 취할 의무를 요구한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구상된 정책은 또한 그 결과로서 여타의 식물군, 동물군 및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다. 방사성물질에 대한 노출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비인간 종을 더불어 보호하는 것이 그 예다. 또 다른 예로 교육권은 환경인식의 향상이나 취약집단이 생태적 파괴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정치 투쟁에 필요한 기술무장에 기여한다. 또한 문화권의 침해가 환경파괴를 동반할 수 있다. 문화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적절하게 보호된다면 그런 문화가 기반하고 있는 물리적 환경도 보호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존의 권리체계는 다소 협소하게 환경권을 구성하며, 환경문제에 단지 간접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기존 인권을 재해석

기존권리를 단순 동원하는 것으로는 환경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기존의 인권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환경문제가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권리를 상상력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등권은 환경에 대한 동등한 접근과 보호의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 환경파괴에 대한 노출의 불평등성은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결과이다. 부와 빈곤은 상이한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때로 ‘부’의 문제만이 국가정책에서 다뤄진다. 평등권은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는 환경피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낼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명권은 건강한 환경, 오염 없는 환경, 생태적 균형이 국가에 의해 보장되는 환경에서 살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재해석돼야 한다.

환경보호에 대한 새로운 인권이 필요

그러나 기존의 인권기준은 긴급한 환경적 과제에는 모호하고 불편한 도구이기 때문에 환경과 직접 연관되는 포괄적인 규범이 요구된다는 입장도 있다. 이런 접근에는 두 가지 입장이 갈린다. 새로운 환경권이 바람직하다 할지라도 주로 절차적 성격에 초점을 두느냐, 실체적 권리의 내용에 초점을 두느냐이다.

절차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절차가 수천개의 비현실적인 원칙의 선언보다 가치가 있다고 본다. 환경권과 관련 있는 절차적 권리의 범주에는 환경 위험에 대해 사전에 알 권리를 포함하는 정보에 대한 권리, 환경문제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권리,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공익소송을 용이하게 하는 제소권의 확대 등이 포함된다.

절차적 또는 참여적 접근은 환경보호를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정보에 입각한 논쟁을 통해 보장하자는 것이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이끈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 근거는 환경에 대한 의사결정자와 그 결정의 대가를 지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일치한다면 환경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환경의 질은 법률 용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가치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에 실체적 권리 규정보다는 사람들이 개방적이고 철저한 논쟁을 할 수 있는 절차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절차적 권리에 대해 회의적이다. 절차적 권리가 완전히 실현된다 할지라도, 그에 부응하는 정치조직은 장기간의 환경보호보다는 단기간의 부를 추구하기 쉽다.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환경파괴를 할 수도 있고 구조적으로 자유로운 소비를 하기 쉽다. 북반구의 자유주의적 권리에 기반한 체제는 환경파괴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절차만으로는 환경보호를 보장할 수 없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는 환경문제에 대한 지지를 정의하고 동원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것은 아니다. 환경권을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련된 기존의 헌법과 법률에 대한 조사에서는 ‘깨끗한’, “건강한”, “존엄한”, “생존가능한”, “만족할만한”, “생태적으로 균형잡힌”, “지속가능한”, “오염이 없는”, “인간의 발전에 적합한” 등 다양한 형용사가 환경에 덧붙여 있다. 환경보호가 인간의 건강과 생존을 보호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태계의 모든 종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 지속가능성을 보호하는가, 좋은 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등 쉽사리 법적 용어로 옮겨질 수 없는 차원의 문제들이 정의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혼란에서 벗어나오는 한 가지 방법은 특정 맥락 속에서 무엇이 정확하게 권리의 침해를 구성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사법상의 의무와 관련되는 것으로 사회적 행위자들이 정확한 의무를 예상할 수 있도록 하는 한에서는 상세한 문맥상의 정의가 도움이 된다. 여기에는 오염자 지불 원칙, 예방 원칙, 환경영향평가, 토지개발의 용도와 명백히 관련된 환경권 등이 포함된다.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문제

어떤 인권이든 본질적으로 지구 생태계의 여타의 종을 배제하고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아무리 환경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크게 품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기본은 ‘인’권이며, 인간이 아닌 종 또는 자연자원에 부여된 권리와는 매우 다르다. 인간의 복지를 보존하고 배양하는데 필수적인 환경보호의 요소들을 포함하기 위해 생명권을 확대한다고 할 때, 자연환경의 구성요소들은 분명히 인간의 목적을 위해 도구적 수단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본질적으로 도구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환경인식을 강화하는 것이 인간의 복지에 초점을 둘 수는 있지만 또한 비인간 종에 대한 관심과 더 깊은 생태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따라서 타 생물종의 본질적인 가치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비도구적 방식으로 환경권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중심적인 권리의 성격을 없앨 수는 없다 할지라도 줄일 수는 있다. 인권의 인간중심주의는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문제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복지에 기초한 권리 제안보다는 ‘생태적 균형’(ecological balance)을 위한 권리 제안이 덜 인간중심적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권체계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일 수밖에 없다. 동물권, 나아가 식물의 권리, 생태과정에까지 권리를 부여한다고 할 때 결정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인간이 권리를 동물이나 산에게 부여한다고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런 권리 인정의 행위는 여전히 인간이 인식하고 집행하는 것이고, 권리는 오직 인간에 의해 이행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법률 시스템에 불가피하게 동반되는 구조적인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대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주로 이론의 영역에서만 작동한다. 정책적 고려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모든 종을 위해 지구적 환경보호를 강화해야할 실제적 문제를 견뎌낼 수 있을까? 권리를 자연세계에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 모든 생물체의 본질적 가치를 실제적으로 보호하는 데 적절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인권을 해석하고 행사하는데 있어서 생태계의 본질적 가치를 고려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부터 인간이 아닌 모든 생물과 생태계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기초할 때 인권적 접근은 인간중심주의적 접근법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인권적 접근의 손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적 접근의 유용성을 앞서 살펴봤다면 이에 대한 우려와 반론도 다양하다. 몇가지 주장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권리 용어와 체계는 환경문제의 바탕이 되는 정치경제적 문제와 관계를 다룰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여기에는 기술적 선택, 생산양식, 사회적 생산물의 배분양식 등이 포함되는데 현재의 권리라는 것은 단지 이것들의 증상을 겨냥하는 권리일 뿐으로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실 물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설사약을 처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환경권의 주창이 단지 상징적인 몸짓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또는 단지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을 심어주는 완화제 수준이라면 환경파괴는 크게 줄지 않으면서 사실상 환경파괴의 구조적 원인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만들 수 있다. 환경파괴를 야기하는 사회경제적 힘에 직접적으로 맞닥뜨리지 않으면서 환경피해에 반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거의 효력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단순한 권리 용어로서 복잡하고 기술적인 환경운영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있다. 환경보호에는 의사결정과정에서나 그 이행에서나 고도로 기술적인 설명과 평가가 요구되는데 이런 문제를 단순한 권리의 언어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인권법보다는 환경법들이 더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권리의 오용 가능성도 크다. 권리, 특히 절차적 권리는 부유한 집단이나 겉치레 환경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적인 생활의 질을 보호하기 위해 이용하기 쉽다. 이로 인해 미래의 환경비용을 현재 불리하고 취약한 집단에 떠넘길 수 있고, 이런 취약한 집단과 공동체가 오히려 빈곤이나 제도적 장치의 부족으로 절차적 권리에 접근하기 어렵다.

유엔의 인권과 환경에 대한 소위원회에서는 1994년 인권과 환경간의 관계를 탐색하면서 인권과 환경에 관한 원칙의 채택을 제안했다. 그 제일 원칙은 인권, 생태적으로 건전한 환경, 지속가능한 발전과 평화는 상호의존하며 불가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인권과 환경의 관계는 여타의 고려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으뜸이라고 주장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을 어떻게 정의하며 실천해 가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류은숙] <2007년 4월 25일 인권오름 제51호>

작성일자 : 2007. 3. 30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경제·사회적 권리는 국내법보다 국제인권법에서 더 강력하게 주창돼왔다. 하지만 이들 권리의 구체적인 이행이 이뤄져야 할 곳은 국내이고 국내법으로 보장돼야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논문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다양한 국가 사례를 통해 국내법 체계에서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출처: A.Eide et al.(eds.),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55-84, Kluwer Law International, 2001) [류은숙] <2007년 3월 28일 인권오름 제47호>

1. 헌법 조항을 통한 보호

한 국가의 헌법은 일반적으로 최고 법으로 간주된다. 헌법에 권리장전이나 기본적 권리에 관한 장을 두는 것은 인권 보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재판 가능한 권리로서 일련의 인권이 헌법에 보장되는 것은 중요하다.

1) 직접보호

개인이나 집단이 경제·사회적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헌법조항을 원용하여 재판을 할 수 있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헌법연구에서 여전히 새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개념에서 헌법의 권리장전은 국가 권력의 자의적이고 과도한 적용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경제·사회적 권리는 국가의 사회경제적 자원과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을 보장하기 위한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국가 행위를 요구한다. 그래서 경제·사회적 권리를 헌법의 권리장전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이 많다. 그 이유로는 사회정책이나 예산할당과 관련된 행정부 고유의 권한에 사법부가 개입하게 됨으로써 권력분립 원칙을 저해한다는 것, 복잡한 사회적 선택과 관련된 사회경제정책이나 예산할당에 관하여 사법부가 판단할 능력은 없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권력분립에 대한 경직되고 형식적인 개념을 보여줄 뿐이다. 예를 들어 참정권,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에 대한 권리 같은 시민·정치적 권리들도 사회정책이나 예산할당과 관련된다. 1996년 남아공 헌법재판소는 ‘권리장전에 사회·경제적 권리가 포함되는 것이 권력분립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바 있고, 유엔사회권위원회는 일반논평 9에서 “경제·사회적 권리가 법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엄격하게 분류, 채택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고, 두 종류의 인권이 나뉠 수 없고 상호의존한다는 원칙에 위배”될 뿐더러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원의 권한을 현저히 축소시키게 될 것”이라 했다.

입법·행정·사법부 간에는 ‘헌법에 대한 대화’가 지속적으로 있어야 하며,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상황에서 각각의 역할과 권한을 재정의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권력분립의 원래의 목적은 권력집중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런 맥락에서 사법부는 경제·사회적 권리의 이행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법원은 권리증진을 위해 가장 적합한 방법을 선택하려는 입법부의 선택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런 입법을 자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법원은 경제·사회적 권리에 대한 헌법적 보장의 견지에서 입법부와 행정부에게 정책 선택의 합리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부담을 지우는 한편,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할 경우 헌법적으로 수용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 확인하는 선언적 판결을 할 수 있다. 경제·사회적 권리가 시민·정치적 권리에 비해 규범적 내용이 덜 발전됐다는 사실은 권리의 원래 성격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법원의 판결절차에서 배제돼온 역사 때문이다. 오랜 세월 권리의 내용은 구체적인 사건의 맥락 속에서 지속적인 사법적 해석을 통해 발전돼왔다. 경제·사회적 권리 내용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발전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예산 관련 함의를 갖는 상당히 넓은 분야들에 이미 법원이 관련을 맺어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남아공 헌법을 비롯하여 많은 헌법은 적어도 한두 개의 사법심사가능한 경제·사회적 권리를 기본적 권리에 관한 장에 포함시키고 있다. 가장 공통된 예는 교육의 권리이다. 남아공 헌법에 대해 좀더 상세히 살펴보면 경제·사회적 권리가 세 가지 유형으로 헌법에 포함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자원의 제약에 상관없이 보장해야 하는 권리들로 아동의 사회·경제적 권리, 기초 교육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 구금자의 권리이다. 두 번째 유형은 가용자원의 한계 내에서 점진적으로 성취해야 할 권리로서 적절한 주거, 건강보호, 식량, 물, 사회보장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이다. 세 번째 유형은 국가뿐만 아니라 사인에게도 해당되는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규정이다. 여기에는 ‘모든 관련 상황을 검토한 후에 법원이 내린 명령이 없이’ 이뤄지는 강제퇴거, 긴급 의료 조치에 대한 거부가 포함된다.

이에 따르면 모든 경제·사회적 권리에 내재된 ‘금지된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 법원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자의적인 강제퇴거와 부당한 사회복지 급여의 종결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기본적’ 권리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 의무를 강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아공 헌법재판소는 기초교육에 대한 권리는 ‘그러한 교육권을 추구하는 속에서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는 단지 소극적인 권리가 아니라 기초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돼야 한다는 적극적 권리를 창조’한다고 확인했다. 또 다른 예로 남아공 고등법원은 교정당국에 HIV 양성반응자에게 규정된 백신바이러스를 투약하도록 지시하면서 국가 비용으로 ‘적절한 의료적 치료’를 제공받을 수인의 권리를 이행할 것을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가용자원의 한계 내에서 점진적 실현의 의무도 사법적 통제의 범위에 속할 수 있다. 역행하는 조치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정당성을 정부로 하여금 증명하도록 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 헌법재판소는 보건부 설립과 관련된 법률의 개폐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헌법에 보장된 건강권 조항에 반한다는 것이었다.

2) 간접보호

시민·정치적 권리 조항의 적용이나 해석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평등’과 ‘공정한 절차’에 대한 규정을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캐나다 헌법은 경제·사회적 권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차별 없이 법 앞에 평등한 보호를 받을 규정’을 적용하여 사회복지급여에 대해 다룰 수 있었다.

또한 ‘생명권’이나 ‘개인의 안전’ 같은 특정한 시민·정치적 권리의 의미를 확대해석함으로써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도의 대법원은 ‘생명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인도헌법 21조)에 적절한 영양, 의복, 주거 등 생활의 기본적 필수품을 담은 ‘생계에 대한 권리’가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이런 해석이 국가가 적극적으로 생계수단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법으로 수립된 정당하고 공정한 절차 없이 사회·경제적 급부를 상실하거나 생계를 위협받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기초가 된다.

3) 객관적 법률 규범으로서의 경제·사회적 권리

지도 원칙 또는 입법 명령의 형태로 경제·사회적 권리는 헌법적으로 보호될 수 있다. 이런 객관적 규범이 법원에서 직접 시행될 수 있는 주관적 권리를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해석 지침’으로서 간접적으로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일 헌법에서 법원은 사회국가 원칙에 의지해왔다. 가격규제를 목적으로 한 입법이 자유로운 계약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사회국가가 과대한 식비, 의료 및 주거비용과 싸울 의무 하에 있다는 원칙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국가 원칙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정의의 증진 사이에서 법원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법원은 지도 원칙을 따르지 못한 법률에 대해 ‘위헌’이라는 선언적 판결을 내리거나 강제 명령을 통해 헌법적 의무 수행을 요구할 수 있다.

4) 국제법상 경제·사회적 권리의 헌법적 지위

국제법이 국내 재판에 당연히 원용될 수 있도록 하거나 헌법과 유사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해석하는 헌법이 있는 반면 별도의 입법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국제조약이 다른 법령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시행되는 ‘자동발효 성격’을 갖는 권리가 사회권규약에 다수 포함돼 있다고 본다. 여기에 해당되는 조항은 ‘남녀평등,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노동조합에 대한 권리,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보호, 초등의무무상교육’ 등이다. 차별하지 않을 의무는 일반적으로 법률에 기대지 않고도 즉각 법원이나 행정부가 시행할 수 있는 의무이다.

2. 법률을 통한 이행

유엔 사회권규약 2조 1항은 입법조치의 채택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입법은 경제·사회적 권리의 맥락에서 다음의 목적에 복무해야 한다.
- 국제조약과 국내헌법에 규정된 권리의 범주와 내용에 대해 더 상세한 정의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사회권규약 11조의 ‘적절한 주거’ 개념을 정교화하기 위한 입법이 필요하다.
- 권리의 전달을 위한 자금조달에 관한 조정을 명문화해야 한다.
- 전국 및 지역의 상이한 정부 영역의 정확한 책임과 기능을 규정해야 한다.
- 권리의 전달을 위해 일관되고 공동작동될 수 있는 제도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 공무원과 사인(지주, 고용주, 기업, 은행 등) 둘 다에 의한 권리침해를 예방하고 금지해야 한다.
- 권리의 침해에 대해 구체적인 구제를 제공해야 한다.

3. 기타 국내 기관의 역할

법원 외에 여타 기관도 경제·사회적 권리의 국내적 이행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옴부즈맨, 공익 집단 및 인권 옹호자들이 포함된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이들 기관이 경제·사회적 권리 분야에서 할 수 있는 활동유형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 교육 및 정보 프로그램의 증진
- 기존 법률, 행정 조치, 법률안 및 기타 제안들이 경제·사회적 권리에 부합되도록 감시
- 기술적 지원의 제공 또는 표본조사 수행
- 사회권규약에 따른 의무 실현을 측정할 수 있는 국내 차원의 기준
- 경제·사회적 권리가 실현되고 있는 정도를 확인할 목적으로 구상된 연구조사 수행
- 사회권규약에서 인정된 구체적 권리를 준수하고 있는지 감시, 공적 기관과 시민사회에 그에 대한 보고서 제공
- 경제·사회적 권리 침해를 주장하는 제소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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