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43호 2011년 03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이라크 전쟁 8년을 돌아보며-사담을 무너뜨리고 인민을 해방시키기 위해 미국이 이라크에 간지 8년, 상황은 이전보다 더 악화됐다>는 미국의 평화를 위한 여성들(CODEPINK)의 공동설립자인 메디아 벤자민이 또다른 프리랜서 언론인 찰스 데이비스와 함께 쓴 글이다. 출처는 알자지라 영문판 2011년 3월 21일자이다.[역자주]

대량학살무기도 없었고 9․11에 관련되지도 않았던 나라인 이라크를 침공한지 8주년이다. 이라크 침공은 우리 국가를 사수하고 이라크 인민을 해방시킨다고 미국 대중에게 선전됐다. 폴 울포위츠 미 국방차관은 우리 군인들이 해방자로 환영받을 것이며 이라크의 석유로 벌어들이는 돈이 재건비용을 치룰 것이라 말했다. 딕 체니 부통령은 군사 작전이 “몇 달이 아닌 몇 주”일 것이라 했고, 켄 아델만 국방차관보는 “이라크를 해방시키는 것은 스탭댄스처럼 쉬운 일이 될 것”이라 예견했다. 8년이 지났고, 그 “스탭댄스”를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4,400명의 미군을 잃다

4,400명 이상의 미국인이 이라크 침공과 점령의 결과로 죽었다. 이 숫자는 9․11로 죽은 3천 명 이상이다. 32,000명 이상의 미군이 심각하게 다쳐서 대다수가 현대 의학의 기적 탓으로 연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숫자는 진실의 절반조차 말하고 있지 못하다. 스탠포드 대학과 해군대학원 연구자들은 뒤늦게 나타나는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대해 검토했고 그 결과 2023년까지 이라크 참전 군인 중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 35%나 치솟을 것이라 했다. 그리고 2010년에는 전투로 죽은 군인보다 더 많은 군인이 자살했다. 살인을 요구받는 것, 그리고 친구가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는 것에 대한 예견가능한 인간의 대응이자 비극이 자살이다.

국가의 파산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 스티글리츠와 하버드 대학의 린다 빌머스는 이라크 전쟁 비용을 3조 달러로 계산했다. 이것은 부시 행정부가 처음 침공을 말했을 때 비용의 60배이다. 망연자실케 하는 수치임에도 스티글리츠와 빌머스는 지금은 자신들의 추정이 “너무 낮았다”고 말한다. 지난 가을에 워싱턴포스트에 실린 최신정보에서, 그들은 전쟁이 연방 부채를 부채질했을 뿐 아니라 세계 경제의 추락에 기여한 석유가격의 폭동을 부채질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국가우선순위프로젝트(NPP)에 따르면, 미국 정부가 이라크를 파괴하는 데 쓴 돈은 1천2백5십만 명의 교사에게 연간 봉급을 주거나 1억6천7백만 미국인에게 연간건강보장비용으로 쓸 수 있는 돈이다. 선출된 공무원들이 우리 국가가 파산했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전쟁에 쓴 우리돈을 국내로 가져오라고 말해야만 한다.

수십만 이라크인의 사망

이라크의 “스탭댄스”로 가장 고통받은 사람들은 다름아닌 이라크 시민들이다. 해방행위이자 제프리 골드버그같은 선전관이 “심오한 도덕성”이라 선전한 침공에 대해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해방되고 있던 사람들의 엄청난 수를 살해하는 것으로 확실히 처리했다. 이라크바디카운트(희생자들의 사망수를 헤아리는 이라크 민간단체)에 따르면 적어도 99,900건의 폭력으로 인한 민간인 사망이 미국이 주도한 침공의 직접적인 결과로 발생했다. 하지만 이 수치는 침공으로 인한 대규모 사망 수를 축소하는 경향의 서구 언론에 보도된 사망에 크게 의존한 극히 보수적인 추정이다. 위키리스크가 지난 10월에 폭로했듯이, 미국 정부는 15,000명 이상의 이라크 시민에 대한 폭력적 살해를 덮었다. 이것은 그 당시 이라크바디카운트의 공식 집계의 20%에 해당하며 어떤 서구 언론도 보도하지 않았던 살해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라크 사망자수는 이라크바디카운트의 통계보다 훨씬 더 많을 것 같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2006년 연구에 따르면 지난 3년 동안 “전쟁의 결과로서 654,965명의 과도한 이라크인의 죽음”이 있었다. 이라크인의 사망률은 발포에 의한 것의 두 배 이상으로 의약품과 깨끗한 물의 부족 때문이다. 2008년 영국의 여론조사기관의 분석에서는 “백만 명 이상의 이라크 시민들이 2003년 시작된 분쟁의 결과로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전기는 여전히 들어오지 않는다

13년의 폭격과 경제제재는 한때 부유한 국가였던 이라크의 사회기반시설과 기본 서비스를 망가뜨렸다. 그리고 나서 2003년의 침공이 있었고, 침공은 전기발전소, 하수 시설, 수도시설, 병원 등을 파괴했다. 8년이 지난 후 이라크인의 생활 조건은 사담 후세인 때보다 악화됐다. 이라크는 계속되는 전기, 물, 의료, 안전의 결핍으로 고통 받고 있다. 이라크인들은 묻는다. 왜 세계 최강국이 침공을 하고 수십억 달러를 재건에 썼다고 하는데도 자신들이 암흑 속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

유엔난민기구에 따르면, 2003년 이후 “4백7십만 이상의 이라크인이 고향에서 도망쳐야 했고, 인도주의적 보호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이것은 “해방된” 국가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삶이다. 대략 1백5십만 명이 이라크의 다른 지역으로 피신했고, 많은 이라크인이 이란과 요르단, 시리아로 피난했다. 하지만 유엔에 따르면 “이들 피난민들은 곤경에서 벗어날 어떤 해결책도 찾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수백만 명이 결코 귀환할 수 없을 것이다.

성매매로 내몰리다

특히 이라크의 여성은 침공과 점령의 충격을 받았다. 이라크 정부는 오늘날 이라크에 3백만에 이르는 과부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명예 살인, 강간과 납치 등) 여성에 대한 폭력은 늘어나서, 많은 여성들은 집안에 머물 것을 강요당하고 고용과 교육 기회를 제한당하고 있다(프리덤 하우스 보고서). 이 보고서는 “불의와 무력함의 깊은 감정으로 인해 여성들은 유일한 탈출이 자살이라 생각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웃 국가들로 피난한 많은 이라크 여성들은 아이들을 먹여 살릴 수가 없다. 간신히 연명하기 위해 13세 미만의 소녀들을 포함하여 수만 명의 여성들이 성매매로 내몰려왔고 특히 시리아에서 그렇다. 한 난민은 뉴욕 타임스에 말하길 “내가 보건대, 시리아 수도 다마스커스의 성산업에 종사하는 소녀들의 70~80%는 이라크인”이며 “그 소녀들이 이라크로 돌아간다면 살육당할 것이다. 이 일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 했다.

이라크 사회의 오염

미군은 열화우라늄, 핵연료에서 만들어지는 방사능 폐기물이 담긴 수천 개의 폭탄을 이라크 전역에 투하했다. 충격에 의한 점화능력과 밀도로 인해 군부가 높이 평가하는 열화우라늄탄은 투하된 이후에도 수년간 살해를 계속한다. 이라크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 폭격을 맞은 팔루자에서 영국의 연구자들은 유아사망률과 암 발생률의 엄청난 증가를 밝혀냈다. 인디펜던트의 보도에 따르면 암 비율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됐던 원자폭탄의 생존자들에게서 보고된 것”을 초과한다. 암 유행에 직면한 것은 팔루자만이 아니다. 알자지라의 보도에 따르면 이라크 중앙의 바빌에서는 암이 2004년 5백 건에서 2008년 7천 건으로 늘어났다. 미국의 공중보건저널에서 작년에 발행한 연구에 따르면, 바스라에서는 지난 15년간 아동백혈병이 두배 이상이 됐다.

한명의 실력자를 다른 이로 교환하다

사담후세인은 악인이었다. 1980년 이란 침공을 포함한 그의 최악의 범죄들은 미국 정부가 그를 뒷받침하고 있을 때 저질러졌다. 미국 정부는 후세인이 이란인을 살육할 때와 마찬가지로 후세인의 고문과 비사법살인 성향을 잘 알고 있었고 묵인했다. 이제 미국이 후원하는 후세인의 계승자, 누리 알 말리키 수상은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고문하고 살해하고 있다. 그가 하지 않은 것은 또다른, 아직 해방되지 않은 “악의 축”의 구성원을 공격하지 않은 것뿐이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미국이 후견하는 실력자들을 무너뜨린 대중 행동에 고무받아, 수천의 이라크인이 알 말리키 정부에 저항하기 위해 거리로 나왔으나 실탄으로 환영받았을 뿐이었다. 2월 27일, 14살 소년을 포함해 29명 이상의 시위자들이 말리키가 운영하는 보안대에게 총을 맞아 쓰러졌다. 바그다드의 4명의 언론인들은 자신들이 수백 명의 시위자들과 함께 불충분하게 친정부적이란 이유로 “눈이 가려지고, 수갑이 채워지고, 맞고, 처형의 위협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말리키가 정치적 반대자들을 고문하고 살해하기 위해 정부의 힘과 시아파 암살대를 이용해왔다는 증거를 위키리스크는 더 폭로했다.

새로운 이라크에서의 삶은 사담 후세인 치하의 삶과 전혀 크게 다르지 않다. 북 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쓴 저항에 비춰볼 때, 개혁을 증진하는 데 있어서 침공과 외국 군대의 점령은 비폭력 저항만큼 효과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알카에다 모집 광고

이라크 전쟁이 인도주의적 사명으로 완벽하게 선전되지 않자, 부시 행정부는 가짜 탄저균 물병과 이라크와 알카에다의 연계에 대한 꾸며낸 이야기로 미국 대중을 겁주면서 이라크 전쟁을 9․11 테러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미 정보국은 침공 이후 한 당국자의 말에서 “이라크 전쟁은 전반적으로 테러리즘 문제를 악화시켰다”고 인정했다. 정말로, 부시 행정부와 이라크 사회를 파괴한 외국군대를 제공한 동맹국들의 이미지보다 더 테러리스트를 모집하기에 좋은 광고는 없을 것이다. 확신에 찬 헌신적인 적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누군가의 가족을 죽이는 것, 또는 아부 그라이브의 사례에서처럼 무고한 사랑하는 이를 모욕하고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만든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전쟁 범죄자들에 대한 보상

과거의 모든 합리화를 일단 당신이 받아들이면 이라크 침공은 다른 어떤 전쟁과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젊은 남녀들에게 살인이 도덕적으로 수용할만하다고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걸 필요로 했다. 그리고 하디타에서의 이십여 명 이라크 시민에 대한 학살로 인해 촉발된 2007년 군대의 조사는 마찬가지의 말을 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이 조사를 위한 인터뷰 중에 지휘계통이 전체적으로 취한 말은 이라크 시민의 생명이 미국인의 생명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것, 이라크인의 죽음은 단지 사업비용이며,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해병대는 ‘임무를 완수’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사람은 대체로 다른 인간을 살해하길 원치 않는다. 적을 비인간화하고 살해가 괜찮을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생각할 조건이 돼야만 한다. 기본 훈련은 국익을 위해(아니 오히려 그 지배자들을 위해) “타인”과 공감하는 한 사람의 능력을 파괴하는 것과 관련된다. 하지만 공감 능력은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갑자기 재출현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귀환한 군인들이 저지르는 가정폭력이 놀랍게 벌어지는 것이 그 증거이다.

이라크 침공과 점령은 귀환한 군인들이 경찰 공무원으로 남편으로 작업감독으로 아버지로서 살아가는 삶에 계속 영향을 미친다. 폭력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용납할 만한 수단이라는 교훈은 쉽게 잊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폭력은 부대에서만 정당화되고 있는 게 아니다. 이 나라를 불법적인 침략전쟁으로 몰고 간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오바마 행정부에 의해서도 정당화되고 있다. 조지 부시, 딕 체니, 도날드 럼스펠드, 곤돌레자 라이스, 칼 로브 등 전쟁 범죄자들은 모두 성공적인 책 출판 투어와 굉장한 강연료를 즐기고 있는 반면 전쟁 범죄를 폭로한 혐의로 브래들리 매닝(미군으로 위키리스크에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에 관련된 정보를 넘긴 혐의로 체포)은 고문 받으며 투옥돼있다.

여기에는 우리의 정부 시스템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 교훈이 있다. 이 교훈이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정치 체제가 미래에도 선택된 전쟁으로 우리를 계속 끌고 갈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싸우지 않거나 또는 전투결과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 부끄러운 이라크 8주년 기념일에, 오바마 대통령이 이라크 철군을 약속했음에도 미군이 여전히 거기 있음을 잊지 말자. 영구 주둔을 그리 민감한 것으로 암시하지 않는 장군들과 더불어 5만 군대와 수천의 사설 용병과 수십 개의 군사기지가 여전히 거기 있다.

우리는 군사기지를 닫고 군대를 철수할 것을 대통령에게 요구해야만 한다. 우리는 군대를 보낸 책임 있는 자들을 기소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 정부가 만든 불행에 대해 이라크 인민에게 사죄해야만 한다. 전쟁의 피해는 저질러졌다. 하지만 미국은 떠남으로써 이라크에 대한 보상을 시작해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243호 2011년 03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39호 2011년 02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지구 저쪽 편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봉기의 소식, 그리고 유혈진압의 소식이 날아들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향한 싸움의 의미를 아는 사람에겐 국경과 상관없이 남의 일이 아니다. 저명한 국제인권법 학자이자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인권문제 특별보고관으로 2008년부터 활동해온 리처드 포크 교수가 최근 이집트 혁명에 대한 분석글을 썼기에 소개한다.

(출처: 알자지라 영어판

http://english.aljazeera.net/indepth/opinion/2011/02/201121711284402313.html#)
[역자주]

무바라크 이후 혁명적 기회: 이집트의 혁명은 군부로부터 그리고 군부체제에 민주주의의 허울을 씌우고 있는 서구로부터 사수돼야(리처드 포크, 2011년 2월 21일 알자지라)

이집트 혁명은 극적이고 강력한 18일만의 저항으로 이미 엄청난 결과를 성취했다. 혁명은 30년 이상 이 나라를 지배해온 무바라크의 잔인한 독재와 역겨운 부패 정권을 갑작스럽게 종결짓게 했다. 또한 이집트 군부 지도자들로부터는 6개월의 과도기 기간(독립적인 정당과 자유선거의 수립, 일정 수준의 경제적 회복을 위해 요구되는 최소 기간) 이상은 국가를 통치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과도기가 우선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표현이 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전조로서 복무할 것으로 희망된다. 일부 정통한 관찰자들은(특히 모하메드 엘바라데이-Mohamed ELBAradei, 국제 원자력 기구 사무총장을 지낸 이집트의 법학자이자 외교관) 이 기간이 너무 짧다고 걱정한다. 억압적인 힘을 시민사회를 약화시키는데 사용해온 권위주의 체제의 붕괴 이후 이집트에 존재하는 정치적 공백상태를 메우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아서,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갖고 기능하는 정부 기구(특히 의회와 사법부)를 허용치 않을 것이라 우려한다. 권위주의란 명목상 헌법주의일 뿐이라는 이면은 흔히 간과된다.

대조적으로 타흐리르 광장(Tahrir Square)에서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은 활동가 지도자들은 6개월조차 너무 길다고 걱정한다. 이 기간이면 군부와 외부 세력들이 이집트인의 대다수를 만족시키려고 새로운 인상을 주면서도 구질서의 핵심을 회복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될 것이라 걱정한다.

이런 우울한 전망은 미국이 긴급 경제 지원을 제공할 것이라는 보도로 강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경제지원은 명백히 시위자들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구상된 것으로, 정상으로 빨리 돌아가야 이 가난한 사람들(40%가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고, 식량가격 폭등과 높은 청년 실업에 처해있는)에게 물질적 보상이 제공될 것이라는 대중적 믿음을 고무시키려는 것이다.

신선한 출발

이집트 혁명 운동의 용감성, 규율과 창조성은 정치적 기적에 다름 아니다. 현대 세계에서 7개의 정치적 경이 중의 하나로 간주될 만하다. 연속된 피에 물든 도발에도 불구하고 폭력 없이, 그리고 우상적인 지도자도 없이, 혁명으로 뭘 얻을 거라 분명히 밝혀주는 혁명선언조차 없이 이런 결과를 성취했다는 것은 2011년 이집트 혁명의 독창성과 위대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성취들은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이집트 인민으로부터 절대 빼앗아갈 수 없는 최고 수준의 영광으로 언제나 남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영광된 순간들은 타흐리르 광장과 카이로의 다른 저항 장소에 모였던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언론으로부터 무시된 모든 사람들, 주요도시에서 전국적으로 매일매일 생명 또는 자신의 육체적 안락을 희생하며 저항한 모든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발적인 전국적 동원의 거대함과 강렬함은 정말 놀랍다. 촉발된 저항의 불길에 부채질을 한 것은(아직 다소 모호하기는 하지만) 소셜 네트워킹의 혁신적 이용이었고, 깊은 불만을 품은 이집트 젊은이들은 그 불을 지폈고, 계급과 교육적 배경이 다르지만 거리로 뛰쳐나온 모든 사람들은 그 불을 계속 타오르게 했다.

이집트와 지역(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다른 곳에서 이어 벌어진 모든 일에 영감을 촉발한 것은 튀니지 혁명이 제공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튀니지에서 벌어진 일은 이집트의 놀라운 사건과 동등한 평가로 놀라운 일이었다. 튀니지는 전율을 촉발했을 뿐 아니라 무자비하게 억압적인 정권에 비폭력적인 전투성으로 아주 효과적으로 대적하여 난공불락으로 여겨진 독재자, 벤 알리(Ben Ali)가 재빨리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하게끔 만들었다.

튀니지의 전개와 진전의 중요성은 앞으로도 소홀히 여겨져서는 안 된다. 튀니지 인민의 불티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아마도 이집트의 불꽃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다음 단계?

널리 이해되는 것처럼, 타흐리르 광장에서의 혁명가들이 불꽃놀이를 하고 파편과 쓰레기 더미를 인상적으로 청소(그 자체가 그들의 주요한 혁명 메시지에 대한 대단히 창조적인 각주)한 후에 아주 어려운 과제가 남아있다. 인권과 이집트 인민의 의지에 기반을 둔 새로운 통치 절차, 그리고 혁명에 놀라고 혁명을 불쾌히 여기는 영악한 외부 행위자들의 틀림없는 음모, 즉 혁명의 결과를 되돌리고 무바라크 없는 무바라크주의를 어떤 식으로든 복귀시키려는 음모에 맞서 주권을 사수하기 위한 단단한 결의에 기반을 둔 새로운 통치절차를 무(無)에서 만들어야 할 과제가 남아있다.

이집트 빈민의 곤경은 새로운 정치 의제의 최우선에 놓여야 한다. 이 의제는 식량과 연료 가격 통제를 요구할 뿐 아니라 GNP 총량에 쏟는 관심만큼 성장의 몫을 분배하는데 관심을 쏟는 공평한 경제 건설을 요구한다.

인민이 혜택을 얻지 못한다면, 이집트든지 외국이든지간에, 경제 성장은 부자들을 위한 보조금이다.

파국적 상상을 제쳐 놓고라도(그런 일들이 실제 벌어질 것을 예방할 수 있는 경고라고 해석한다면), 당장의 우려들이 있다. 과도기를 감독하는 중대한 임무를 띤 이집트 군부의 지위를 받아들이는 것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군부가 혁명의 희망과 열망의 진정한 후견인인가? 군 지도부는 무바라크 정권의 부패와 잔인성에 깊이 연루돼 있고, 억압적 통치에 기꺼이 공모하고 부패한 금품의 주요 수혜자로서 수십 년 동안 자리를 지켜왔다.

대량 빈곤에 괴로워하는 사회에서 착취적인 통치를 끝내고자 하는 대중의 요구를 존중하고 경의를 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런 특권을 얼마나 군 엘리트가 자발적으로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서구의 영향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이집트의 장교단이 주로 미국에서 훈련받았다는 것, 그리고 최고위급 수준에서의 미국 군사 지휘관들과 그에 상응하는 이집트 군부간의 협력은 이미 당연(특히 이스라엘과의 “차가운 평화(the cold peace)”를 목적으로 한 협력)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사악한 연결은 왜 무바라크가 그렇게 오랫동안 워싱턴(미국의 수도), 텔아비브(이스라엘의 수도), 리야드(사우디아라비아의 수도)의 충성스런 동맹이자 친구로 보였는지에 대한 설명을 돕는다. 또한 이들 정부들의 내부 자문가들이 왜 이 지역의 해방적 정치의 폭발에 대해 공포감을 숨긴 채 대응하는지를 설명해준다.

나는 이집트 민주주의의 과도기가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이들 구 세력관계들에 대해 비상사태의 열의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의 혁명적 봉기를 불러일으킨 가치들을 반영하는 검토와 변화로부터 더 크게 논쟁적인 중동지역 이슈들을 어떻게든 제외시키려 하고 있다.

중동에 대한 영향

이들 가치들은 중동을 관통하는 운동의 연대를 제시한다. 이 운동은 전제적 통치를 끝내고, 미국의 개입과 미군 주둔에 반대하고, 국제법에 따라(땅에 대한 근거가 아니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해결하고, 이스라엘을 포함하여 중동 지역을 핵무기 없는 지대로 만들고, 국제조약이 세운 평화적 관계와 상호 안보의 절차들로 강화된 지역으로 만들려는 운동이다.

이집트와 튀니지에서 우세했던 혁명적 관점에 부응하도록 이런 변화들을 실현하는데 전문가가 요구되지는 않는다. 이들 변화는 중동지역의 전제적 지도자들의 등뼈를 오싹하도록 만들고, 이스라엘과 미국의 대전략을 심각하게 위협할 뿐 아니라, 그보다는 약하겠지만, 유럽연합(하드파워의 군부와 준군사 조직에 의존하여 중동지역에서 정치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고 결심한)을 떨게 할 변화이다.

혁명적 전개가 계속된다면, 위태로워지는 것은 서구의 무기매매에 유리한 시장의 상실일 뿐 아니라 걸프의 석유에 대한 서구의 접근이다.

또한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의 국가를 계속 거부하는 한, 위태로워지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보이다. 국제사회가 오랫동안 선호한 것은 두 개의 국가 해결책에 따라 1967년 국경 내에서 팔레스타인이 독립적이고 생존가능한 국가를 갖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은 이를 계속 반대했다.

1967년 전쟁 이래 이스라엘이 점령해온 모든 영토에서 팔레스타인 국가가 완전한 주권을 갖고 존재한다는 것은 가자 지구 봉쇄를 즉각 해체하는 것이고, 웨스트 뱅크에서 이스라엘 점령군이 철수하는 것이고, 동 예루살렘에 있는 것을 포함해 이스라엘 정착지를 해체하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권 행사를 허용하는 것이고, 예루살렘의 공동 행정 또는 동 예루살렘을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삼는 것에 합의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런 평화안은 이미 1967년에 만장일치로 채택된 유엔안보리 결의안 242에 함축된 것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 평화안은 2002년에 또다시 아랍 정부들이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대한 측면 제의로서 제기했다. 그리고 이미 1988년에 팔레스타인 국민의회가 수락한 것이었고 장기간의 평화적 공존의 기반으로서 하마스가 몇 년 전에 재확인한 것이었다.

이해해야만 할 것은 이러한 팔레스타인 국가의 요구는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으로 회상되는 것의 단지 22%일 뿐(거의 44년간 계속된 점령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 정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1947년 유엔 분할 계획은 팔레스타인에 45%를 주었고 당시에도 그것은 부당하게 보였다. 우리는 또한 이해해야만 한다. 팔레스타인 축출은 1948년 대참사[팔레스타인인은 이를 nakba(나크바)라 한다]로부터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에게 부당하게 길어진 난민 상태를 낳았음을 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장 최근에 팔레스타인 신문들에서 증명된 것처럼, 팔레스타인의 자결권에 대한 최소한의 인정을 이스라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증거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당국이 동 예루살렘을 포함한 대부분의 정착지 보유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나친 요구에 동의하고, 팔레스타인 난민의 귀환을 위한 어떤 제공도 포기하기로 했음에도, 이스라엘은 관심을 보이지 않고 나가 버렸다.

이제 문제는 이집트의 결실로 야기된 혁명적 도전이 텔아비브에서 새로운 현실주의를 초래할 것이냐 마찬가지일 것이냐이다. 대동소이하다는 것은 이집트 인민의 혁명적 소산을 반격하려는 시도가 최대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혁명적 가치의 지역적 제정을 담기 위해 가능한 일은 무엇이든지 적어도 하자.

풀뿌리 아마추어들

보기에 아마추어(이 단어의 최상의 의미에서)인 이집트에서의 운동이 혁명적 기대를 실현할 과도기 과정을 보장할 수 있는 지속적인 에너지와 역사적 지식, 정치적인 지적 소양을 가졌는가? 약속이 지나쳤던 너무 많은 과거의 혁명들은 명백한 승리의 순간에 정확히 약해졌다.

이집트 군부의 정치적 및 도덕적 상상이 재난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예외적인 경계에 요구되는 것들을 실현할 충분한 에너지와 인내와 비전을 보유할 것인가? 한 가지 의미에서, 이들 혁명은 튀니지와 이집트를 넘어 퍼져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국가들은 적대적인 정치적 이웃들에 둘러싸여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일부 사람들은 터키의 국내 모델을 이집트와 튀니지의 민주화상을 제공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말해 왔다. 하지만 AKP(터키의 지배정당) 하에서 터키의 외교정책은 마찬가지로 혁명과 혁명의 여파에 가치 있는(그리고 “2차 해방”을 최종적으로 성취할 탈식민지 시대의 중동에 필수적인) 외교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1차 해방은 식민 지배를 끝내는 것이었다. 2차 해방은 첫 국면에서 이란 혁명으로 시작된 것으로 지정학적 헤게모니의 종식을 추구하며, 이 투쟁은 간신히 시작됐다.

탈식민지 지배의 기초 흔들기

공공연하게는 아니더라도 대중의 인식 표면의 물밑에서 조종하는 형태로의 개입은 얼마나 위험스러운가? 이들 정부들과 그 동맹인 기업과 금융세력들의 외교 정책의 이익은 분명히 심각한 위기이다. 이집트의 혁명 과정이 앞으로 몇 달 동안 성공적으로 전개된다면, 심대한 지역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 영향은 탈식민시대의 지역적 구도의 옛 기초를 흔들 것이다. 반드시 도처에서의 혁명을 양산하지는 않더라도 외부자들의 역할을 감소시키고 인민들의 복지를 강화하는 식으로 균형을 변화시킬 것이다.

이런 영향들은 불리한 영향을 받은 구 엘리트들로 예견가능하다. 이들 구 엘리트들은, 필사적이지는 않더라도, 많은 다양한 반-혁명적 의사방해에 의존함으로써 이집트 혁명을 탈선시키려는 외적인 자극의 강력한 배치를 만들고 있다. 주류 언론에 있는 많은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들 엘리트들이 이미 거짓말들을 유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거짓말들이란 예상되는 극단주의와 무슬림 형제단의 야망에 관한 것으로, 반테러리즘으로 솔직하게 “정당화”하지는 않더라도 극단주의와의 전투라는 이름을 취하면서 대중의 관심을 산란케 하고 혁명을 불신하게 하고 미래의 개입적인 움직임의 기초를 만들려는 것으로 보인다.

혁명들이 극단주의자들에게 인계됨으로써 궤도에서 이탈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확하다. 이런 일은 다른 방식으로 프랑스와 러시아 혁명 둘 다에서 일어났고 최근에는 이란 혁명에서 그랬다. 극단주의는 인민의 민주적 열망을 실망시키고, 구 엘리트의 복귀 또는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억압과 착취를 초래함으로써 승리했다.

왜 그런가? 각 상황은 독특하고 근원적이지만 되풀이되는 유형이 있다. 혁명적 투쟁 동안에 구(舊)체제에 대한 반대는 기만적으로 단결시키고, 숨겨진 진짜 갈등을 모호하게 하지만, 이 갈등은 나중에 등장하여 연대의 정신과 본질을 파탄낸다. 구체제 질서가 붕괴 또는 부분적으로 붕괴된 후 곧(혹은 이집트에서처럼), 단결의 정신은 점차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신뢰할 수 없는 과도기의 운영자들로 인해 혁명의 목표가 배신될 걸 두려워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혁명 계급 내부로부터 나온 반동적이고 사악한 요소들이 민주화 과정을 지배하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내외적인 반혁명의 음모(진짜건 가상이건)들에 대한 전면적 투쟁에 즉각 착수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잃을 것이라 두려워한다.

그리고 흔히,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혁명의 여파 중에 이런 우려들의 일부 또는 전부는 사실상 근거를 갖는다.

혁명은 그것의 진짜 적들을 상대로 방어될 필요가 있다. 진짜 적이란 분명하게 존재한다. 이것은 또한 혁명 과정의 비극적 내파를 낳는 가상의 적을 피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운동의 순수성이 위태롭게 되는 것은 혁명의 결실을 공고히 하려는 바로 그 분위기 속에서이고, 운동의 순수성은 거리에서 대규모 인민이 폭력적인 탄압에 맞설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검증돼야 한다.

이집트에서의 위험은 저항을 동원해 낸 고무적인 비폭력이 폭력적인 정신으로 대체되거나 또는 너무 수동적이 되어 내외적 압력에 굴복하거나 또는 오도된 약속을 지나치게 믿어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혁명 후의 간격(구체제의 붕괴와 새로운 체제의 공고화 사이의)은 익명성의 그늘에서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는 젊은 지도자들이 이끈 이 신나는 운동에 대한 최대의 도전을 노정하고 있다.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은 지금껏 획득한 모든 것을 지키려는 그들의 노력을 축복해야만 하고, 그들의 사회와 지역, 세계를 위한 지속적으로 인간적이고 정당한 미래를 향한 연대로 나아가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239호 2011년 02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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