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0. 4. 7

작성자 : 엄기호

이 글은 르몽드 디쁠로마띠끄의 부탁을 받고 쓴 글입니다. 지난달에 실렸습니다.

 

어떻게 20대는 투표하지 않게 되었는가?

 

세대는 계급을 대체하였는가? 요즘 사회과학에서 유행하고 있는 담론을 찾아본다면 확실히 세대는 계급을 대체한 듯이 보인다. ‘88만원 세대라는 담론은 고용없는 성장의 시대에 비정규직이나 실업이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한 세대 전체의 운명을 적나라하게 상징하고 있다. 마치 한 세대 전체 혹은 절대 다수가 잉여인간이라는 동일한 운명 공동체가 되어버린듯한 강렬한 인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현실 투쟁에서도 계급을 대체하는듯한 세대 담론이 가진 물리적인 힘은 세계 곳곳에서 검증되고 있다. 2006년 프랑스 청년들의 대규모 노동법개악 반대 시위에서부터 2008년의 그리스에서의 반정부 시위는 명백하게 청년층들이 주도하였으며 시위의 주제 또한 청년실업과 직결된 문제였다. 서구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이 징후는 나타나고 있다. 얼마 전 홍콩에서 있었던 중국 본토와의 초고속열차를 새롭게 건립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쫓겨나는 사람들과의 강력한 연대를 주장하며 갑자기 거리에 나타나 비타협적인 시위를 주도한 것도 소위 ‘80년후세대라고 불리던 청년들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적대의 전선이 분명히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세대의 문제로 전이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흔히 불러일으키는 오해처럼 경제적 영역에서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 영역에서 노동 없는 가치 창출혹은 노동의 일회성화라는 자본의 축적 방식의 변화에 따라 한 세대 전체가 졸지에 노동의 영역 바깥으로 추방될 위기에 봉착함으로써 적대의 전선이 자본과 조직화될 수도 없는 잠재적 노동으로서의 청년세대 사이의 문제로 전환한 것이다. 문제는 이 경제적 적대의 문제가 바로 정치적 투쟁으로 직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급이 자동적으로 투표하지 않는 것처럼 세대도 저절로 투표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가 한국의 20대들이다. 지난 촛불 시위에서도 고등학생까지 거리에 뛰쳐나오는데 왜 20대와 대학생들은 보이지 않느냐는 말이 많았다. 이 때문에 20들에 대한 고전적인 탈정치화론에서부터 보수화론까지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20대들은 자신들이 언제든 잉여인간의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프랑스나 그리스, 혹은 홍콩에서처럼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88만원 세대론이 보수주의 언론에 의해서 왜곡되어 쓰이는 것처럼 자본과 세대간의 적대가 세대의 대립으로 전환되어 나타날 수 있다. 이때 작용하는 것이 문화이다. 경제는 문화를 관통할 때만 정치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들여다보아야 하는 것은 ‘88만원 세대들이 처한 삶의 조건이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감각이다. 세대가 계급을 대체한 것이 아니라 세대가 계급을 사유하고/사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감각이 만들어진 것이다. 스펙터클의 사회와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지금의 20대들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은 속물이다. 그리고 이 속물들이 도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취하는 세상에 대한 태도는 냉소주의인 것이다. 인간 모두가 속물인 사회에서 무한경쟁은 인간의 숙명이 되어버린다. 만약 무한경쟁이 인간의 본성이며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소위 가치라고 하는 것은 냉소의 대상이 될 뿐이다.

대학생들이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지난 학기에 강의를 하던 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본 <브이 포 벤데타>라는 영화에 대한 토론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국가는 미디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진실을 왜곡하며 국민을 바보로 만들어 통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통치는 언제나 완벽할 수 없으며 진실은 누군가를 통해서 밝혀지며 우매한 것처럼 보이는 대중들은 진실에 감응되고 행동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의외로 이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학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한 학생이 만든 엔딩 크레딧 이후의 시나리오였다. 독재의 붕괴이후 민주정부가 곧 들어서지만 정책적 무능에 의해 사회는 큰 혼란에 빠진다. 때맞추어 미디어에서는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브이라는 영웅의 사생활을 캐고 온갖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한다. 혼란을 틈타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였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세력을 규합하고 대중들 사이에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다. 결국 사회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 학생의 주장에서 만나게 된 것은 탈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에 대한 지나친 계몽이다. 이 세대는 정치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정치에 대해 냉소적인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정치에 대해 아무런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변화라는 것이 어떤 실체적인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것에 대해 냉소하였다. 진보니 보수니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대단히 큰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며, 어느 놈이 되더라도 내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통찰이었다. 독일의 문제적 철학자 슬로터다이크의 논법을 따르자면 이들이 정치적으로 미각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정치에 대해 계몽된 존재들인 셈이다. 이들은 정치를 너무 잘 알아서 정치에 대해 무감각해져버렸고 모든 가치에 대해 냉소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냉소주의만이 현실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본장비(1)가 되는 셈이다. 냉소적 주체들은 절대적 가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새로운 가치들이 단명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로 도덕의 냉소주의가 만들어내는 속물의 정치이다. 가치의 종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속물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이명박이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이명박을 지지한 20대 대부분은 그가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였기 때문에 지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가치를 이야기하면 오히려 비웃고 냉소한다.

실로 우리는 속물들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금 미디어에서 성공하고 있는 모든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들은 대부분 다 우리가 얼마나 속물인가를 과장적으로 까발리는 내용들이다. 얼마 전까지 선풍적 인기를 끌어 모았던 tvN<재밌는 TV 롤러코스터>를 생각해보자. 남성의 전형으로 나오는 정형돈은 쉽게 말하면 찌질이 혹은 진상이다. 머리에 든 것이라고는 예쁜 여자와 축구뿐이며 나머지에 대해서는 귀찮아하기만 할 뿐이고 제대로 일처리를 하는 것 하나 없다. 이에 반해 여성의 전형으로 제시된 정가은은 생각하는 것이라곤 오로지 멍청한 남자친구를 여우 짓을 통해 후려 처먹는 것이나 남에게 과시하기 위한 명품백밖에 없는 된장녀이다. <개그콘서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남보원-남성인권보장위원회나 리얼리티 쇼를 표방하는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들은 이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속물주의의 이면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20대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생존노력이다. 역설적으로 속물이 되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이다. 우리는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를 음흉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꿀벅지라고 불렀을 때 자신의 존엄이 침해되었다고 항의할 권리가 없다. 오히려 이런 호명은 자신이 이 사회에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야한다. 상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 자신은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 쓰레기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꿀벅지에 이어 말벅지가 등장하였다. 송일국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말벅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라고 내심 아쉬워했다. 내가 내 스스로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드러내고 스펙터클로 치장하여야 한다. 스펙터클의 바깥은 없다. 심지어 이번 중학생들의 졸업식 알몸사건처럼 내가 남을 때리는 것조차도 인터넷에 올려 자랑을 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나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는 속물인 것이 아니라 속물이 되어야하는 것이다.

한국 좌파가 가장 패착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곳이다. 한국의 좌파들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보수주의자들에게 지고 있다. 이 문화전쟁에서 실패한다면 그 결과가 어떠할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영국의 사례이다. 1972115일 영국 버밍햄의 빈민가 핸즈워스에서 3명의 유색인종 청소년이 백인 노동자 한 명을 구타하고 돈을 빼앗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언론에 의해 강도사건으로 대서특필이 되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 영국이 도덕적 위기에 빠져있으며 법과 질서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질서의 적은 바로 이주노동자들이었으며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옷차림과 언어를 지껄여대는 청소년들이었다. 위기를 관리하지 못하는 노동당의 무능이 고발되었다. 한편 미조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다수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상층 간부들의 손에 장악되어 있던 노동당에 등을 돌렸다. 대신 그들은 국가를 도덕적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대처주의의 언어에 동의하였다. 이것이 영국에서 전후의 합의에 바탕을 둔 조합주의적 정치가 강압적인 법과 질서 중심의 대처주의로 넘어가는 배경이었다. 노동당은 투표에서 대처에게 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상식의 싸움에서 대처에게 진 것이다.

현재 한국의 상황은 이때의 영국과 별반 달라 보이는 것이 없다. 지금 좌파들이 구사하는 대다수의 언어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진리를 알아버린 20대들에게는 냉소주의만을 더 강화하는 진부한 성명서 언어만을 반복하는 패착에 빠져 있다. 한국 좌파의 언어에는 정치에 대해 지나치게 계몽된 지금의 20대들의 냉소적 앎을 압도할 수 있는 탁월함이 없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진보정당이나 노동조합, 시민단체의 모임이나 뒷풀이는 여전히 80년대의 계보학과 깔대기 이론으로 사람을 넉다운시키고 있다. 탁월함. 이것이 속물과 냉소주의 를 뛰어넘을 수 있는 핵심어이다. 희망은 이 20대들이 여전히 탁월함에 대해서 감동받고 영감을 얻는다는 사실이다. 김연아와 같은 스펙타클을 능가하는 스펙타클로서의 탁월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과 삶의 가치에 대한 탁월함은 사이버 공간의 웹툰이나 아고라와 같이 고전적 좌파들이 거의 돌아보지 않는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20대들이 계급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고전적 좌파의 언어가 20대와 단절된 것이다. 속물주의와 냉소주의에 맞서는 좌파의 탁월한 언어가 필요하다. 좌파끼리 만나는 성명성의 언어가 아니라 좌파와 대중, 특히 20들대과 만나는 좌파의 상식에 대한 언어, 그것이 우리의 로두스이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작성일 : 2009. 8. 4

작성자 : 엄기호

 

지난 학기 한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70여명의 학생 중에서 머뭇거리면서 손을 든 학생들은 열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었지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한 학생은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쁘지만 않으면 그 정도로도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딱 십 년 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 IMF 경제위기가 막 터지고 난 다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다수의 학생들이 당연히 내일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10년전의 한국처럼 미래가 현재보다 좋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 대학생들은 동아시아에 중국밖에는 없다. 약 한 달 전 홍콩에서 열린 교육포럼에서 중국에서 온 50여명의 사범대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한 후 한국의 학생들은 비관적으로 생각한다고 말을 하자 중국학생들은 심지어 화까지 내었다. 한국 학생들은 왜 그리 패기도 용기도 없냐고.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중국 학생들과 같은 경우에나 길을 떠나는 것은 내일을 위한 도전이 된다. 이미 경제위기 속에서 삶의 총체적인 파탄을 경험한 한국의 학생들은 길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도 잃어버리는 위험스러운 도박이다. 젊은이들의 삶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불안은 예측가능하고 계획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의 학생들은 심지어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삶을 피곤한 삶이라고 규정한다. 90년 한 때 ‘탈주의 감행’을 이야기하며 찬미되었던 유목민의 삶은 ‘피난민’의 삶으로 판명이 났다. 화려한 문화적 언사로 포장되었던 포스트모던의 실체는 신자유주의적 파탄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러한 삶의 파탄에서 학생들이 꿈꾸는 것은 소박한 삶이다. 한국에서 결혼해서 자식 낳고 알콩달콩 ‘농경민’으로 소박하게 사는 것이 학생들의 꿈이다.

이런 결과로 아이들도 오히려 요즘은 집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떠나봤자 부모가 정착 자금을 대어주지 못하는 중산층 이하의 아이들이 그렇다. 10년전만 하더라도 학생들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기회가 닿으면 어서 빨리 독립하여 ‘자유’로운 삶을 찾는 것이 꿈이었다. 가족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하면 ‘지겨움’, ‘압박’, ‘숨막힘’과 같은 단어들이 거의 대다수의 학생들의 리포트를 메웠다.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랑하는 삶, 그것이 그 시대의 구호였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해외지사의 기회가 주어져 있는 회사를 선망하였다. 자유와 글로벌에 대한 욕망이 안정적인 삶에 대한 욕망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득 찬 지금 집을 나서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개고생’에 가깝다. 10년 전과 달리 지금은 학생들이 자기 가족에 대한 애정과 사랑, 그리고 미안함을 주저없이 표출한다. 가족하면 숨막히지 않느냐는 말에 대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돌봐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가 왜 숨막히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광고에 공감하며 키득키득 웃는다. 정말로 집 나가면 개고생인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나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해외에 나가는 ‘개고생’을 선택한 것은 미래의 향한 꿈이거나 한국으로부터의 탈주가 아니라 어서 빨리 돈을 모아 한국으로 귀환하기 위함이다. 가까이 지내던 한 후배는 돈을 좀 더 준다는 말에 두말없이 바레인으로 떠나 3년을 보내고 있다. 경제위기로 바레인에서의 승진이 좌절되자 그 녀석은 얼마 전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회사에 신청했다고 한다. 한국도 지금 엉망인데 좀 더 있으면서 자유를 만끽하지 그러냐는 말에 녀석은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는 한국’을 두고 자기가 미쳤다고 거기 더 있냐고 반문하였다. 70년대 중동 건설 붐에 힘입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났던 아버지 세대의 이주노동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처럼 지금의 젊은 세대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성공’이 목적이던 시대에서 ‘생존’이 목적인 시대로 우리는 후퇴하였다.

물론 집을 박차고 나와 떠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가족과 같은 친밀성의 공간이 파탄이 난 저소득층의 아이들일수록 떠나고 싶어 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 밖을 떠도는 여자아이들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자기 몸이 더 잘 팔린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아무짝에도 도움읻 되지 않는 지긋지긋한 집과 학교를 떠나서 자신의 핸드폰속에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언니들’의 네트워크를 따라 전국을 떠돌아다닌다.(그러나 그나마 남자아이들은 이렇게 떠돌아다니지도 못한다. 군대 때문이다. 몇 년간이라도 떠돌아다니기 위해서는 대학을 가야한다. 그렇지 않고 이들이 유목민이 될 수 있는 길은 밀항과 같이 범죄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실제로 하자센터에서 나와 같이 공부를 했던 한 아이는 일본에 가서 마술을 배우며 이나라 저나라를 떠돌아다니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갈 재주와 돈이 없는 처지였고, 밀항이니 뭐니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결국 얼마전 군대에 간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년이 돈없고 공부도 못하는데다 못생기기까지 한 년들이예요’. 그러나 조건만남이라는 원조교제를 하며, 때로는 몸매관리를 위해 한 달씩 단식원에 머물면서 이 아이들이 꾸는 꿈도 ‘정착’이다. 좋은 남자 만나 알콩달콩 사는 것, 그것이 이 떠돌이들의 꿈이다.

그러나 이들이 꿈꾸는 그런 알콩달콩한 삶이 그대로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불확실한 삶precarious life. 이보다 더 이 시대를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시공간은 안정적인 것이 아니라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이리저리 유동하는 불안정한precarious 것이 되었다. 삶은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것이 되었고, 인간의 관계는 너무도 깨지기 쉬운 것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직업만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precarious 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친밀성 모두가 다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믿을 수 없는precarious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있는 것이며, 아직 망하거나 잘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필연이 아니라 운이 너무 좋아서 요행수로 벌어진 것이다. 삶이 불확실해진 시대, 이 모든 것의 결과는 감당할 수 없는 상처이다. 삶이 아니라 상처가 인간의 운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생존이 지상명령이 된 시대에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친밀성의 파괴가 만들어내는 ‘상처’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열정적일 수가 없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그것은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손해와 상처로 귀결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랑에 온 마음을 다 빼앗길 것 같으면 그런 사랑은 아예 안 하거나 애초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장 우선적으로 관리되어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감정이다. 성공과 실패 모두가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진 시대에 감정에 대한 관리능력이 있어야지만 그나마 쿨하게 상처를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 강의를 들었던 학생 중의 하나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전화를 했다. 남자친구가 갑자기 한 달 전에 사라져서 무슨 일인가 애타게 기다렸는데 말도 안하고 군대를 간 것이었단다. 훈련소를 나와서 처음으로 전화를 해서 한 말이 자기를 사랑하지만 자기와 연애를 하는 것이 계속 불안해서 시간이 필요했단다. 사랑의 파경이 가져올 상처에 대한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군대로 도망친 것이다.

상처를 받지 않는 성장이란 없다. 집을 나오지 않는 성장이라는 것도 없다. 모든 영웅들의 신화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집을 떠나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를 받으며 성장을 하고 어른이 되어 집으로 귀환한다. 집을 나와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나고, 그 존경할 만한 사람을 따라 자신의 삶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되고, 그 신념을 엄격하게 실천하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주변의 사람에 대해 책임지고 위로하며 사는 삶, 이것이 바로 근대가 꿈꾼 어른이 되는 성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집을 떠나는 것은 개고생이고 상처는 감당할 수 없는 나락이 되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기대할 수 없는 불행한 삶을 산다. 위로가 되어야 할 가족은 짐이 되었으며, 위로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학교와 지역사회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글이 돼버렸다. 단적으로 이런 시대에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자유’의 이름으로 성장을 도둑맞은 이들은 유목민이기는커녕 생존을 위해서는 ‘피난민’으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자’의 신세로 내몰리고 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