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23 호 [기사입력] 2015년 01월 22일 17:46:0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두 명의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굴뚝에 오른 지 40일이 넘었다. 스타케미컬 노동자의 굴뚝 생활은 무려 240일이 넘었다. 다행히 쌍용차에선 교섭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또 다른 굴뚝들이 도처에 있다. 연일 터지는 노동자에 대한 모욕과 멸시의 사건들, 추락하고 깔리고 폭발하는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실업의 우울과 불안, 다가올 실업의 공포가 도처의 굴뚝들이다.

이전에도 노동자들은 송전탑이며 광고탑이며, 극한 곳으로 수시로 올라갔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이전엔 지나가면서 송전탑을 의식한 일이 없어. 근데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아 올려다보게 돼.” 그렇다. 사람이 둥지 틀 수 없는 곳으로 사람이 내몰리고 있다. 날이 궂거나 바람이 불면 가슴이 답답하고 조마조마하다. 영어의 ‘염려, 고통, 분노’는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데 그게 협심증의 어원이란 말이 실감난다.

가슴이 죄이는 듯 하는 것은 송전탑이나 굴뚝같은 극단적인 곳을 볼 때만이 아니다. 예외가 아닌 일상이 문제다. ‘수퍼갑질’이 아니곤 문제시조차 되지 않는 일상 속의 존엄성 유린은 자각증세가 없는 만성질병 같다. 특히 일상적으로 노동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일이 어느 때부턴가 공공연한 일이 되었다.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정당한 자존감과 자부심 대신에 비뚤어진 우월감과 열등감을 경합시킨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인데, ‘존중? 그건 어디서 파는 거에요? 얼마에 살 수 있어요?’ 식의 엉뚱한 접근이 퍼져있다.

현대 인권의 초석은 ‘인간 존엄성’이다. 초석이란 타협 불가능한 원칙이란 의미다. 인간 존엄성은 개인의 업적이나 성취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 존엄성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누구나 갖는 것이다. 이 존엄성은 인간의 ‘평등성’에 기반한 것으로 자연적‧세습적인 위계와 귀족주의‧엘리트주의 이데올로기라 할 것을 일체 거부한다. 모든 인간의 존엄한 가치는 비교하여 따지거나 경쟁으로 획득하는 상대적 가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절대적 가치이다. 인권의 핵심 가치인 ‘자유, 평등, 우애(연대)’는 이런 인간 존엄성에서 도출한 것이다. 자유란 ‘소비의 자유’가 아니라 위계적 제도가 양산해 낸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정신’을 말하고, 우애(연대)는 공동체적 삶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회적 관계의 질을 말한다. 평등은 이런 자유와 연대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 사회의 제반 활동에서 인간 존엄성을 척도로 삼는 것이다. 가령 인간을 한낱 자원이나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다룰 때 그것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원칙은 국제인권법과 헌법 등 법질서 전체에 적용될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행하는 제도나 정책 등 모든 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간 존엄성’을 정초한 대표 문서로 흔히 ‘세계인권선언’을 꼽는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1948)보다 한 발 앞선 존엄성의 전령이 있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목적을 담은 필라델피아 선언(1944)이다.

ILO는 일찍이 1919년의 창립 헌장에서 “항구적인 평화는 사회적 정의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류는 그런 정의를 추구하는데 실패했고 또 한 번의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인간을 사물처럼 취급하고 경제성장의 수단으로만 대하는 질서가 계속되는 한 전쟁은 언제나 일어난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완전히 증명되었다”. ILO는 전후의 삶과 국제질서를 이끌어 갈 원칙을 재확인해야 했다. 그 재다짐의 내용은 인간 존엄성을 모든 것의 정초원리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의 실현은 시장의 횡포를 사회 정의에 무릎 꿇도록 만드는 제반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재확인‧재천명한 원칙을 담은 것이 ‘ILO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이다. 필라델피아에 모여 만들었기에 그 도시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그 도시의 이름이 ‘우애’를 뜻한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반가운 것이다. 우리가 형제애와 자매애, 즉 우애의 정신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란 것을 이름 자체가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필라델피아 선언의 으뜸 원칙이다. 인간을 존엄하게 대한다는 게 한마디로 뭐겠는가? 사람을 사물 취급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를 ‘인력’이 아니라 ‘인간’으로, 노동력의 거래를 다른 물건처럼 ‘사고 파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는 ‘인력’으로서 ‘경제적 보상’만 받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다.

물질적 존중은 그때그때 일한 만큼의 대가가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의 안정과 지속을 위한 생활의 보장으로 실현돼야 한다. 정신적 존중은 구성원으로서의 자존감, 소속감, 연대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의 보장이다. 자신의 일에서 통제력과 재량을 발휘할 수 있고, 동료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노동자 개인과 조직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더 넓은 사회와의 연대감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물건과 달리 인간은 말을 하고 저항한다. 노동자의 물질적‧정신적 권리의 충족은 결과적으로 ‘그냥 주어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참여 속에서 추구할 권리이다. 단순한 혜택과 권리로서의 보장은 다르다. 권리로서 향유하기 위해선 노동자의 개인적 및 집단적 자유가 중요한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이런 내용들을 ‘사회 정의’의 구체적 내용으로 규정했다. 이런 사회정의의 추구가 목적이라면 경제는 그것의 실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선언을 유념한다면, 목적과 수단의 뒤집힘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것이 실천과제이다.

오늘도 우리는 도처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의 저항과 고난을 본다. 우리의 눈은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 착시현상을 일으켜선 안된다. 사회정의를 굴뚝 삼아야 한다. 시장 우위의 폭력성과 인간 존엄성 유린의 연기를 빼내야 한다. 그 연기에 눈물콧물 쏟고 있는 노동자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왜 극한투쟁을 하느냐? 그것밖에 방법이 없느냐?’는 말은 안 듣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무릎 꿇려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폭력적인 구조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왜 말로 하지 않고 극한투쟁을 하냐’는 공격을 자주 받았다. 킹 목사는“협상이야말로 우리의 행동이 원하는 궁극 목표”라고 답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위기와 긴장감을 조장시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를 곤경에 빠뜨리고 더 이상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즉 사회의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직접행동의 추구하는 바이다”

6년여가 되어서야 가능해진 쌍용차의 노사 협상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서럽다. 숱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이 만든 결과여서 기쁘지만, 노동자는 ‘말’에 낄 수 없는 존재, 대화와 협상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 사회의 잔인함에 입은 상처들 때문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의 말이 말로서 존중돼야 하며 정책과 조치들의 잣대가 돼야 한다. 오늘도 숱한 노동자들이 온 몸으로 말을 걸고 있다. 나는 처분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나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 당신과의 관계라고 말이다.

국제노동기구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ILO Declaration of Philadelpia, Declaration concerning the aims and purposes of ILO, 1944)

국제노동기구(ILO, 아래 ILO) 총회는 필라델피아의 제 26차 회기에서, 1944년 5월 10일, ILO의 목적에 관한 이 선언과 회원국의 정책 기조가 되어야 할 원칙들을 채택한다.

I
총회는 ILO가 근거하고 있는 기본 원칙들, 특히 다음 원칙들을 재천명한다.

a)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b)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c)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
d) 결핍과의 투쟁은 각국에서 불굴의 의지로, 그리고 노동자 대표와 고용주 대표가 정부 대표와 동등한 지위에서 공동선의 증진을 위한 자유로운 토론과 민주적인 결정에 참여하는 지속적이고도 협조적인 국제적 노력으로 수행돼야 한다.

II
총회는, 항구적 평화는 사회 정의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다는 ILO헌장속의 선언의 정당성이 경험적으로 완전히 증명되었다고 확신하며, 다음을 확언한다.

a) 모든 인간은 인종, 종교 또는 성별과 상관없이 자유와 존엄, 경제적 안전 속에서 그리고 평등한 기회 속에서 자신의 물질적 복지와 정신적 발전 둘 다를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
b) 이를 가능케 할 조건의 실현은 모든 국내 및 국제 정책의 핵심 목적이 돼야만 한다.
c) 모든 국내 및 국제적 정책과 조치들, 특히 경제‧금융 영역에서의 그것들은 이런 관점에서 판단돼야만 하며, 이 근본 목적을 달성하는데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만 채택돼야 한다.
d) 이 근본 목적의 견지에서 모든 국제적인 경제‧금융 정책과 조치들을 검토하고 심의하는 것은 ILO의 책무이다.
e) ILO는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관련된 경제‧금융 요소 일체를 고려한 후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규정들을 결정과 권고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III
총회는 다음 사항들을 실현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전 세계의 국가들에서 촉진되도록 하는 것이 ILO의 엄숙한 의무임을 인정한다.

a) 완전 고용과 생활수준의 향상
b) 노동자들이 최대한의 기술과 조예를 발휘하고 공동선에 최대한 기여할 수 있는 만족을 가질 수 있는 일자리에 고용되도록 할 것
c) 이 목적의 성취를 모든 관련자들에 대한 적절한 보장을 통해 달성하기 위하여, 고용과 거주를 위한 이주를 포함하여, 직업 훈련과 노동자의 이동을 원조하기 위한 시설들의 제공
d) 임금과 소득, 노동시간과 기타의 노동조건과 관련하여, 모두가 진보의 과실을 정당하게 공유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모든 고용 노동자와 그런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최저 생활 임금을 보장하는 정책
e) 단체교섭권의 실질적인 인정, 생산 효율성의 지속적인 향상에서의 관리자와 노동자의 협동, 그리고 사회적 및 정치적 조치들의 마련과 적용에서의 노사협력
f) 사회적 보호와 충분한 의료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 소득을 제공하기 위한 사회보장 조치들의 확대
g) 모든 직업에서 노동자의 삶과 건강을 위한 적절한 보호
h) 아동복지와 모성 보호의 제공
i) 적절한 영양, 주거, 여가와 문화 시설의 제공
j) 교육과 직업 기회의 평등성 보장

(IV, V 생략)

인권오름 제 423 호 [기사입력] 2015년 01월 22일 17:46:0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15 호  [기사입력] 2012년 09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드라마에서 자주 변주되는 소재 중의 하나가 ‘키다리 아저씨’이다. 어렸을 적 나의 애독서 중 하나였기에, 불우하지만 씩씩한 여주인공과 그녀를 은밀하게 돕는 부자 남성의 관계로만 그 내용이 소비되는 게 탐탁치가 않다. 제목은 ‘키다리 아저씨’이지만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라 고아원 출신 소녀 ‘주디’이다. 주디는 결코 후견인의 일방적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감정에 솔직하고 충실할뿐더러 사회의 편견과 배제를 날카롭게 뚫어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다.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원의 후원자로서 글재주가 있는 소녀 주디를 대학에 보내준다. 주디는 대학생활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편지에 담는다. 그 편지로 채워진 것이 소설 ‘키다리 아저씨’이다.

아주 어려서 읽었지만, 요즘 나는 사회보장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 이 소설 속 주디의 말을 인용하곤 한다. 가령 대학 예배에서 설교를 들은 주디는 분노한다. “가난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자비심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말하자면 유용한 가축이라는 식이더군요.” 덧붙여 주디는 어린 시절 학교에 구호품 옷을 입고 갔는데 그 옷의 기증자가 옆자리에 앉은 급우였던 일을 회상하면서 “저는 동정심을 갖고 다가와서 위로의 말을 하는 그 애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미워했어요. 특히 동정심이 있는 체하는 아이들은 더 미워했습니다.” 자선과 시혜 또는 구제라는 것들이 주는 자의 입장에서의 표현이지 받는 자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걸 주디는 지적한다.

주디는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즐기며 상상력이 풍부하다. 하지만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에 대해 토로하는 대목이 있다. 고아원이 아닌 ‘보통’의 ‘집’으로 들어가는 공상을 하는데, 그 공상이 집의 문 앞에 이르면 희미해진다고 슬퍼한다. “보통집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려는 집의 현관 안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통집”이라 말한 것을 나는 제법 살아야 맛볼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라 생각해본다. 직장이 안정되고 좋을수록 덩달아 든든한 사회보장이 있고, 불안정하고 권리가 취약한 일자리일수록 사회보장을 꿈꿀 수가 없다. 흔히 복지경험이 부족해서 복지에 대한 안정된 지지와 기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데, 우리는 문 앞에 서서 집안을 도저히 상상해볼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밝은 성격의 주디가 우울해하는 것은 사회적 배제를 절감할 때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주디는 다른 학생들이 읽은 것, 먹어본 것, 보고 즐긴 것을 직접 겪어본 일이 없다. 18년 동안 고아원에서 최저수준의 생존의 권리만을 보장받아온 삶이었기에 그런 삶에는 필요 없다고 여겨진 것들의 필요가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었다. 그래서 외계인 취급을 받게 된 주디는 학과 공부 대신에 타인과 어울리기 위한 남몰래 교양 쌓기 학습에 몰두한다. 그럴 때 쓰는 편지의 내용은 “아저씨, 대학생활에서 어려운 것은 공부가 아니더군요. 노는 것이 힘들어요. 저는 다른 학생들이 말하는 것 중의 반은 무슨 얘긴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들의 농담은 저만 빼고 누구나 알고 있는 과거의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세계에서 생소한 외국인이에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참 비참한 느낌이 들어요.”

‘최저선’이라는 것이 사회적 배제를 줄이고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리의 벽을 두껍게 하는 것이라면, 그 최저선으로 보장되는 생계에 대한 권리란 인권이 아닌 굴욕에 대한 적응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나의 주디는 당당하게 덧붙인다. “제가 딴 애들과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사회보장이 보장해야 하는 것은 주디의 말처럼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는 인간의 존엄성이며 최소한의 생계 보장은 그 수단인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보인다.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평등과 포함의 것으로 바꿔나가면서 주디는 “내가 묵인을 받아 이 세상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진실로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주디는 자기 발로 서게 되며 적극적으로 타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저는 누구에게 있어서나 가장 필요한 건 상상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만 있으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처해볼 수도 있어요. 상상력이 사람을 상냥하고 공감하고 이해심이 많게 하지요.”라고 말하는 주디의 상상력의 힘은 공상이 아닌 사회적 포함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난 6월 14일, 국제노동기구(ILO)는 사회보장 최저선에 대한 새로운 권고를 발표했다. 이 권고는 사회보장 최저선을 조속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며 특히 공식 경제 부문에 고용된 사람들뿐 아니라 비공식 부문에 고용된 사람들 또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ILO가 사회보장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권고를 발표하는 기자회견문에서도 밝혔듯이 50억이 넘는 인류, 사실상 대부분의 인간에게 적절한 사회보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ILO가 만들어온 사회보장 관련 기준의 초석으로 작용하는 일명 ‘필라델피아 선언’(1944년)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는 기본원칙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노동이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라면 인간의 생존 또한 상품을 팔았느냐 말았느냐에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사회보장을 임금보조 장치로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회’라는 말이 ‘경제’에 먹힌 지 오래됐지만, 진짜 사회보장을 추구하려면 경제회복이나 발전이 아니라 사회를 복원해야 한다는 말로도 읽힌다. ‘사회’가 빠진 생존 보장이란 것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사회가 빠진 생존 보장이란 흔히 ‘있는 쪽에서 베푸는 시혜’로 여겨진다. 호의를 베푸는 것이니 적당히 상대방의 자존심이나 자율성을 침해해도 된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생존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구차하게라도 살아야 할 굴레가 돼버린다. 그래서 사회보장을 임금 보조로서가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를 구성하는 것, 서로에게 보장하고 북돋아 주기로 한 약속이자 의무로 생각한다. 그 구체적인 실현의 예는 모든 사람에 대해 차별 없고 배제 없는 기본소득과 의료의 보장이다.

선거를 앞두고 사회보장에 대한 논란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 그럴 때마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과 실천에 관계없이 숱한 삶들이 도마 위에 올려진다. 받는 사람 내지 받아야 할 사람과 상관없이, 주지도 않고 생색내는 쪽의 관점에서 누군가의 삶이 비늘 벗겨지고 잘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설 속의 주디를 떠올린다. 사회보장을 ‘범국민특별안전기간 선포’로 바꿔치기하려는 시도나 ‘기업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며 갑옷부터 챙겨 입으려는 시도를 볼 때 주디라면 뭐라고 맞받아칠까 궁금해진다.

사회보장 최저선에 관한 권고문은 딱딱하고 원칙적인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 이런 문구에 구체적인 사람의 얼굴을 입혀본다. 그것은 소설 속 주디의 얼굴이 아니라 매일 부딪히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한 골목에서 폐지를 줍는 십여 명의 노인들, 같은 골목에서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한잔 술에 빠진 고단한 장년들, 고시원에서 슬리퍼 차림으로 나와 배회하는 청년들, 껌과 초콜릿을 파는 장애인, 간판이 자주 바뀌는 고만고만한 점포의 주인들, 그런 우리가 모여 사는 골목에서 ‘사회’의 ‘보장’을 경험할 수 있는 상상력이 발휘됐으면 한다.

사회보장 최저선에 관한 ILO 권고(2012년 6월 14일)

ILO 총회는 사회 보장에 대한 권리가 인권임을 재확인하며,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고용 증진과 더불어 발전과 진보를 위해 경제‧사회적으로 필수임을 확인하며, 사회보장은 빈곤과 불평등‧사회적 배제‧사회 불안을 줄이고 예방하며, 평등한 기회와 성‧인종의 평등을 증진시키며, 비공식 고용에서 공식 고용으로의 전환을 지원하는 중요한 도구임을 인정하며 … 이 권고를 채택한다.

I. 목적, 범위, 원칙

1. 이 권고는 회원국들에게 지침을 제공한다.
(a) 적용 가능한 것으로서 사회보장 최저선을 자국의 사회보장체제의 기본요소로 수립하고 유지할 것.
(b) ILO 사회보장기준에 따라,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더 높은 사회보장 수준을 점진적으로 보장하는 사회보장 확장 전략 내에서 사회보장 최저선을 이행할 것.

2. 이 권고의 목적상, 사회보장 최저선이란 빈곤‧취약성‧사회적 배제를 방지하거나 경감하기 위한 목적의 보호를 보장하는 것으로서 국가적으로 정의된 일련의 기본적 사회보장을 보장하는 것이다.

3. 이 권고가 효과를 발하는 데 있어서 당사국의 전반적이고 우선적인 책임성을 인식하며 회원국들은 다음의 원칙을 적용해야만 한다.
(a) 사회적 연대에 기반한 보호의 보편성
(b) 국가 법률로 명시된 급부에 대한 권리
(c) 급부의 적절성과 예측가능성
(d) 비차별, 성평등, 특별한 요구에 대한 반응
(e) 비공식 경제에 속한 사람들을 포함하는 사회적 포함
(f) 사회보장이 포괄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존중
(g) 목표설정과 시간표를 포함하는 점진적 실현
(h) 사회보장체계의 자금을 내는 이와 혜택을 보는 이들 간에 책임성과 이익간의 최적의 균형성취를 추구하는 동시에 복지재정에서의 연대
(i) 재정 마련과 전달 체계를 포함하여 방법과 접근의 다양성에 대한 고려
(j) 투명하며 책임성 있고 건전한 재정 운영과 행정
(k) 사회 정의와 평등을 정당하게 고려하는 재정적‧경제적 지속가능성
(l) 사회‧경제 및 고용정책과의 일관성
(m) 사회적 보호 전달을 책임지는 기관들을 관통하는 일관성
(n) 사회보장체제 전달을 강화하는 양질의 공공 서비스
(o) 불만과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의 효율성과 접근성
(p) 이행에 대한 정기적인 모니터링, 정기적인 평가
(q) 모든 노동자의 단체 협상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존중
(r) 여타 관련인들의 대표조직과의 협의뿐 아니라 고용주와 노동자의 대표 조직의 삼자 참여

II. 국가 사회보장 최저선

4. 회원국들은 국가 상황에 따라서, 기본적인 사회보장을 실현하는 자국의 사회보장 최저선을 가능한 빨리 수립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그 보장은 전 생애를 포괄하며, 국가 차원에서 필수적이라 정의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효과적인 접근 보장과 더불어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건강 보호와 기본적인 소득 안전에 대한 접근을 최소한 보장해야만 한다.

5. 앞서 언급한 사회보장 최저선은 다음의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보장을 적어도 포함해야만 한다.
(a) 국가적으로 정의된 일련의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 이것은 가용성, 접근성, 수용성 및 질이라는 범주를 충족시키는, 모성 보호를 포함한 필수적인 건강 보호를 구성하는 재화와 서비스이다.
(b) 아동에 대한 기본 소득의 보장. 적어도 국가적으로 정의된 최소 수준에서 영양, 교육, 돌봄 및 기타의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c) 적어도 국가적으로 정의된 최소 수준에서, 충분한 소득을 벌 수 없는 경제활동 연령의 사람에 대한 기본 소득의 보장. 특히 질병, 실업, 출산, 장애의 경우.
(d) 적어도 국가적으로 정의된 최소 수준에서, 노인에 대한 기본 소득의 보장.

6. 회원국들은 기존의 국제적 의무에 따라 이 권고에서 언급된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보장을 국가법과 규정에 정해진 대로 적어도 모든 거주자와 아동에게 제공해야만 한다.

7. 기본적인 사회 보장의 보장은 법률로 수립돼야만 한다. 국가법과 규정은 사회보장의 효력을 낳은 급부의 범위, 질적 조건과 수준을 명시해야만 한다. 또한, 공평하고 투명하며 효과적이며 간단 신속하고 접근성 있으며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불만과 이의 제기 절차가 명시돼야만 한다. 항의 절차에 대한 접근은 신청자에게 무료여야 한다. 국내법의 틀에 부응하는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

8.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보장을 정의할 때 회원국들은 다음 사항을 정당하게 고려해야 한다.
(a) 건강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필수적인 건강 보호에 접근한 금전적인 결과로 인해 곤궁해지거나 더 가난해져서는 안 된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무상의 출산 전후 의료 보호가 고려돼야만 한다.
(b) 기본 소득 보장은 존엄한 삶을 허용해야만 한다. 국가적으로 정의된 소득 최소 수준은 일련의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통화 가치와 빈곤선, 사회적 지원을 받기 위한 소득 기준점 또는 그에 필적하는 여타의 국내법이나 관행으로 수립된 기준점들에 부응해야 하며 지역적 차이를 고려할 수 있다.
(c) 기본 소득 보장의 수준은 국내법과 규정 또는 관행으로 수립된 투명한 절차를 통해 정기적으로 재검토돼야만 한다.
(d) 사회보장 수준의 수립과 재검토에 관하여 노사 및 관련자 대표조직의 삼자 참여가 보장돼야만 한다.


16. 사회보장 확대 전략은 취약 집단과 특별한 요구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보장해야만 한다.


20. 당사국은 진전을 평가하고 사회보장의 수평‧수직적 확산을 위한 정책을 토론하기 위한 국가적 협의를 정기적으로 해야만 한다.

23. 당사국은 사회보장 데이터 시스템에 담긴 사적인 개인의 정보를 보호하는 법률 구조를 수립해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315 호  [기사입력] 2012년 09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