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151 호 [기사입력] 2009년 05월 0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오바마 미 대통령의 이름은 알아도 흑인 민권운동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나 흑인 민권운동을 알아도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는 꿈이 있습니다”는 명연설만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킹 목사의 명연설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무수한 이름 없는 시민들의 고민과 결단, 행동과 희생이 있었다. 오늘 만나볼 목소리는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의 중요한 국면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에 참여한 평범한 시민들의 것이다. 인용할만한 명문장도 아니고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왜 인간이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게 되는지를 담담하게 읽을 수 있다.
1955년 12월 1일, 왜 로자 파크가 버스에서 자리를 내주기를 거절했는지는 그녀의 담담한 회상에 드러나 있다. 로자 파크에게 그날 벌어진 일은 우연이 아니었고, 아주 오랫동안 계속돼온 차별 관행이었다. 로자 파크가 그날 자리를 내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누가 그러라고 한 것이 아닌 자발적인 행동이었지만, 그녀는 오랫동안 시민권 투쟁에 참여해왔다. 그녀는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의 회원이었고 지역의 활동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로자 파크 이전에도 같은 사건으로 여성들이 체포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로자 파크의 체포가 버스 보이콧의 기폭제가 된 데는 그녀의 석방을 헌신적으로 도운 지역 활동가들이 있었고, 그녀에게 그 사건을 흑백분리에 대한 도전으로 전환할 것을 요청한 배경이 있다. 로자 파크는 이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이 디 닉슨이 그런 활동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두 번째 글은 로자 파크의 체포 후에 닉슨이 그녀를 처음 만난 후 느낌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로자 파크 사건을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으로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당시 26살의 무명의 인물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보이콧 조직을 맡을 것을 요청한 사람이기도 했다.
여성정치위원회의 조안 깁슨 로빈슨은 1949년에 몽고메리에 일자리를 얻어 이주했다. 그녀 또한 몽고메리로 와서 얼마 후 버스에서 자리를 내놓을 것을 강요받았다. 분노한 로빈슨은 흑백분리법을 깨기 위해 뭐든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버스 회사와 시 위원들이 흑백분리를 불법화하거나 적어도 당시의 버스 규율을 고치도록 하기 위해 쉼 없이 활동했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버스 보이콧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고된 일이 요구됐는데 로빈슨과 여성정치위원회가 상당 몫의 일을 감당했다. 세 번째 글은 로빈슨의 버스 보이콧 첫날의 기억이다.
춥고 비도 올 것 같은데 버스를 안타는 투쟁이라니, 단 하루를 약속한 것이었지만 얼마나 떨리는 약속이었을까. 하지만 버스 보이콧은 하루가 아니라 381일 동안 이어지게 된다. 하루 보이콧은 어느 누구의 예상보다도 성공적이어서 계속해야겠다는 자신감을 고취시켰다. 사람들은 존엄함으로 사회가 자신들을 대해줄 것을 요구할 기회라는 걸 직접적으로 느꼈다.
며칠, 몇 주, 몇 달을 넘어 버스를 거부한 그들은 아침마다 일터나 학교로 가야할 사람들이었다. 에피소드 하나, 출근해야 할 사람들 중엔 수많은 흑인 가정부들이 있었다. 그녀들이 버스 보이콧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백인 여성들이 차로 데려다 주는 일을 했다. 몽고메리 시장은 흑인 가정부를 태우는 일을 중단하라는 포고를 냈다. 백인 여성들이 차 태워주는 일을 중단하거나 흑인 가정부를 해고한다면 보이콧을 깰 수 있다고 했다. 경찰은 흑인을 태운 백인 여성 운전자를 보면 신호위반을 빌미로 단속했다. 백인 여성들은 내 가정부가 버스를 타면 불량배가 있을까봐 안탈 뿐이라는 거짓말을 하고 흑인 가정부는 자신은 보이콧과 관계가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서로가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보이콧 기간 동안 거짓말은 계속됐다. 보이콧을 모른다고 잡아뗀 흑인 가정부들은 버스를 안탈 뿐 아니라 자신들이 받는 보잘것없는 임금으로 보이콧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카풀조직, 택시 요금 인하, 그도 아니면 자전거를 타거나 걷는 불편함 속에 협력과 연대의 싹을 키운 그들은 일 년이 지나 차별 없는 버스에 자유로운 시민으로 오를 수 있었다. 그들은 시민권을 부여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이다.
2008년 촛불시위를 기억하며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된 서리를 맞았다. 시민을 위해 어디든지 빠르게 달려오겠다는 경찰은 정말 모든 거리며 지하도에서 시민들을 빠르게 막고 쏜살같이 몰아서 경찰버스로 또 경찰서 유치장으로 날랐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천막도 부서졌다. 살아서도 철거당하고 죽어서 또 철거당했다. 시민 노릇하기 정말 힘드네, 우리에게 인권은 도대체 뭔가라는 탄식이 이어지는 요즘이다. 정치도 경제도 인간에 대한 예의도 그것의 기본이나 근본과는 거리가 먼 요즘, 우리는 열이 나있고 부루퉁하고 말해서 뭐해 하며 침묵과 무기력에 빠져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침묵을 깨고 누군가 노래 부르고, 누군가 촛불을 켜고, 누군가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누군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 누군가가 손을 잡고 모이는 일은 계속될 것이다. 오늘 소개한 문헌집의 다른 장에 등장하는 노랫말이 있다.
“자유는 영원한 투쟁, 자유는 영원한 투쟁, 자유는 영원한 투쟁이라 말하죠. 오! 주여, 우린 너무 오래 투쟁했어요. 우리는 자유여야만 해요. 우리는 자유여야만 해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의 증언들 로자 파크의 “회상; 내 영혼은 평안하다” |
인권오름 제 151 호 [기사입력] 2009년 05월 0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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