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6년 2월 9일 인권하루소식 제2988호>

우스갯소리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원정을 위해 산을 넘자며 힘들게 산꼭대기로 사람들을 이끌고 간 나폴레옹이 "이 산이 아닌가벼", "저 산이여" 라는 말을 반복하여 허탈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무리 중의 한 명이 "저이는 나폴레옹이 아닌가벼"라고 하는 것이 이 우스갯소리의 절정이다. 글로 쓰니 별로 우습지도 않은 이런 얘기를 늘어 놓은 이유는 만약 "이 산이 아닌가벼", "저이는 나폴레옹이 아닌가벼"라는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목적지에 아예 갈 수 없거나 목적지가 아닌 곳을 그 목적지로 착각하거나 그런 것으로 속을 것이다.
일정한 결과를 미리 정해 놓고 그것을 탐구하라 하는 건 자유일 수 없다. 목적지가 '자유'라면 거기에 가는 길도 수도 없이 끝도 없이 '아닌가봐'를 생각하고 내뱉을 수 있는 자유여야 한다. '아닌가봐'라는 생각을 감히 꿈이라도 꾸거나 입도 벙긋해서는 안된다고 하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행동해야 한다면 인간의 존엄성 같은 건 포기해야 한다. 이런 이유로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갖고 그것을 외적으로 표현할 자유를 갖는다는 것은 인권 중의 인권이요, 인권의 초석이다.
이런 인권과 가장 흔하고 강력한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국가안보이다. 정부들이란 내외적으로 욕먹는 걸 싫어하고 자신만의 행동과 그에 대한 정보를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법을 잘 지키는 시민들의 안전과 복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싶어한다. 악질적인 인권침해 행위의 상당수가 이런 명분으로 저질러져 왔다. 하지만 인권이 무조건 국가안보와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국가안보란 오히려 자유를 통해 지켜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정당한 국가안보를 추진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정부에 대한 감시를 제대로 하려면 사상·양심·표현의 자유가 필수적이다. 가짜 국가안보에 맞서 진짜 국가안보를 보장하는 것 자체가 여타의 인권을 누릴 수 있는 기초가 된다. 국가안보의 외피를 입은 쪽이 '불순'하다고 두들겨대는 생각과 행동에 '정수'가 있을 가능성을 봉쇄한 사회는 스스로 안전판을 부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안보는 그 단어를 꺼내드는 것으로 만사형통인 카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만져보고 두드려봐야 할 탐구 대상이다. 그리고 아무 때나 꺼내들 수 있는 카드가 아니라 엄밀한 원칙과 기준에 따라서 신중하게 꺼내들어야 할 카드라야 한다.
요하네스버그 원칙은 이런 생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1995년 10월 1일, '19조'(Article 19; 표현의 자유를 명시한 세계인권선언 19조를 말함)라는 국제단체가 요하네스버그 인근의 위트와터라란드(Witwaterarand) 법학연구센터의 협조로 마련한 자리에 유엔, 유럽연합, 미주 및 아프리카 연합기구 등의 국가안보와 인권에 관한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국제인권법, 지역법, 각국의 법원의 판결에 반영된 기준, 국제사회에서 승인된 일반원칙들에 기초하여 이 원칙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조건에 관한한 최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절한' 규정을 담았다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기준이다. '이상'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많은 국가들에서 '현실'의 법적 원칙으로 자리 잡은 기준이다.
여기서 기본 원칙은 "누구도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으로 인해 어떠한 강제, 불이익이나 제재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 평화적인 행사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되며, 어떠한 규제나 형벌도 과해져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금기시 여기는 '정부를 바꾸자는 표현, 국가나 국기를 모욕하는 표현, 징병반대, 전쟁반대' 등의 표현(원칙 7)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아니하는 표현"이다. 이런 걸 다 제하고도 제약할 의사표현이 있다할 경우라도 정부가 지켜야 할 전제조건과 정부가 져야 할 입증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원칙 10에 따르면 제3자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할 국가의 의무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국가안보론을 주축으로 주류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권력과 돈이 단합하여 국가안보를 사상·양심·표현의 자유의 탄압에 이용한다고 하자. 아무리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지위라 할지라도 교수 연구자는 타인이 설치한 연구 교육기관에 급여를 받고 고용된 사람이다. 연구자의 사상·견해 등이 고용주인 대학이사회나 관리기관의 맘에 들지 않는다고 쉽게 해고된다면 진리 탐구에 종사할 수 없다. 연구가 나홀로 공부가 아니라 엄청난 자원이 요구되는 오늘날 환경에서는 치명적인 일이다. 권력과 재력에 의해 압박을 받아 대학에서의 진리탐구가 답답한 상태에 빠지면, 사회에서의 일반 시민이 갖는 비판의 자유, 기성관념에 도전할 자유 또한 치명적 타격을 입고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 대학은 특권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일반시민의 자유의 존립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기본적 인권과 자유를 위해 투쟁할 의무를 져야 하는 곳이다. 대학은 이미 권력과 부로 가는 길이고, 많이 가진 사람들이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곳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걸 개선하려는 노력이 절실한 지금, 오히려 구시대적인 통제를 스스로 받아들이고 행사한다면 인류의 소중한 인권옹호라는 대의에서 대학이 수행할 의무를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좋아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일반적인 정서에 기초하여 국가안보는 현실에서 힘센 쪽을 정의로 둔갑시킨다. 싫어할 자유조차 사상·양심·표현의 자유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왜 모르는 것일까? 내가 싫어하는 생각과 표현을 억압하기 위해 국가안보가 설쳐대는 것을 방치할 때 내가 좋아하는 그것도 동시에 억압받는다는 것을 알기까지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만들어져야 하는 걸까?
국가안보와 표현의 자유 및 정보접근에 관한 요하네스버그 원칙 (THE JOHANNESBURG PRINCIPLES ON NATIONAL SECURITY FREEDOM OF EXPRESSION AND ACCESS TO INFORMATION) (전략) |
[류은숙] <2006년 2월 9일 인권하루소식 제29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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