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국제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 집회 2024년 5월 17일 저녁 7시 보신각 연대발언문(인권연구소 '창' 류은숙)

안녕하세요. 국제성소수자혐오 반대의 날에 함께하게 돼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우리라고 부르려는 건, 동질성의 확인이 아니라 다름 때문에 맺어진 관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에 대한 선물로 모였습니다. 선물을 열어보듯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날입니다. 선물을 나누는 것이 공동체의 의미이며 우리의 복잡다기한 존재 자체가 공동체에 대한 기여입니다.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이유로 우리를 삭제하거나 위협하는 혐오세력의 언어는 너무 얕아서 우리의 엄청난 다양성과 역동성을 담지 못합니다. 우리는 혐오와 차별의 언동에 담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은 혐오와 차별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그릇을 깨고 넘쳐흐르는 개성과 풍부함입니다.

우리의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셉니다. 물론 혐오와 비하와 모욕은 쓰라리고 아픕니다. 우리 힘은 고통과 공포를 견디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원인이 우리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혐오세력은 극악한 악당이나 괴물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일상이자 시스템으로 존재합니다. 이성애중심주의, 비장애중심주의 등 각종 중심주의와 차별주의를 통해 이득을 챙기는 지배세력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힘은 반사적 적대와 악마화로 인해 강한 것이 아니라 지배에 맞서 인권이란 공통의 기반을 확인하고 다지는 데 있습니다.

인권이란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보다는 그 인권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가’, ‘어떤 효과를 내는가가 중요합니다. 혐오세력도 인간은 존엄하다고 말합니다. ‘그 존엄을 통해 그들이 하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종류의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까? 실상은 그 존엄의 기준으로 누군가를 골라내고 내쫓고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는 것입니다. 존재와 삶의 복잡성에 대한 논의를 종결시키려는 의도로 존엄성을 운운합니다.

우리에게 존엄성은 어떻게 작동합니까? 혐오와 배제 때문에 해를 입더라도 우리 자신의 가치와 권리가 중요하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엄성은 실천으로 고양됩니다. 우리는 억압과 착취에 대항하는 투쟁에 적극 참여합니다. 주요한 억압 체계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단편적인 이익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얼키고설킨 정치·경제·문화적 불평등에 반대합니다. 누구든 존엄한 일자리, 의식주, 교육, 보건의료 등에 보편적인 접근을 할 수 있기 위해, 모두의 존재가 괜찮은 것으로 느껴지고 초월적인 의지로 극복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삶을 위해, 저마다 경험한 폭력을 더 넓은 맥락에 놓고 해석할 수 있는 정치적 인식을 통해, 우리는 생을 펼치고 있습니다. 힘들고 숨찬 삶이지만 벅참 또한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가 펼쳐가는 세계는 어쩔 수 없음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로 인해 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스스로 결정하고 실현하는 정치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 존엄성이란 공통의 토대 위에서, 인간성을 위협하는 공통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서로를 보살피는 공통의 대안을 만들어가는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우리 존재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불복종을 선택하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세상을 둘로 쪼개놓고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는 명령에 불복종합니다. 여자거나 남자거나 이성애거나 아니거나 식의 이분법의 틀에 맞출 수 없는 우리는 아주 놀랍도록 다양하고 복잡한 존재입니다. 또 우리는 성적소수자를 위하는 듯 이용하는 교묘한 언어를 거부합니다. ‘힙하다며 무지개를 상품화하고 광고하면서 정치경제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걸 거부합니다. 스타성 있고 도시적이며 세련된 존재들로만 우리를 재현하는 걸 거부합니다. 일상에서의 인정과 존중을 외면하고, 법과 제도에 평등을 기입하지 않으면서 취하는 관용의 시늉을 거부합니다. 우리는 정상성이라는 불가능한 환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능한 이상, 즉 누구나의 삶이든 존중받으며 의미있는 삶을 살도록 보장하는 제도를 구축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데 앞장섭니다.

우리는 불의하고 반인권적인 구조에 더 심각한 영향을 받는 사람들로서 이 구조를 변화시킬 필요와 책임을 더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해 또는 가해의 자리에 머물지 않고 세계를 바꾸는 일에 더 열심을 낼 것입니다.

물론 현실의 구덩이는 깊습니다. 이 구덩이에서 혼자의 의지로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밧줄을 던집니다. 서로를 단단히 연결하고 잡아당깁니다. 그렇게 구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잡아당기고 매달리는 힘에 손이 갈려나갈 수도 있지만, 서로를 구덩이에서 빼내고 구축한 유대감은 구덩이를 메우고 새로운 집을 세울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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