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이스라엘 규탄행동의 의의(2024년 2월 17일 팔레스타인 연대집회 발언문)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저에게는 4살 난 조카손자가 있습니다. 저는 이모할머니입니다. 제 조카손자는 코로나19 팬데믹에 태어났기 때문에 저는 그 아이를 거의 만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사진을 통해 볼 뿐입니다. 직접 만나지 않아도 아주 사랑스럽습니다. 사랑스러울수록 가슴 한편이 쓰라립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빠질수록, 즉 기후위기, 전쟁과 재난, 노동자·여성·아동·퀴어·장애인·노년·이주민 등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을 대할 때마다 조카손자에게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얼굴을 사진에서 봅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붕대를 감고 있거나 눈에는 공포가 가득합니다. 그 아이들 중 상당수는 이미 세상을 떠난 존재입니다. 네.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말하는 겁니다.
제 조카손자와 팔레스타인 아이들을 비교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와 다른 어떤 존재를 떠올릴 때, 자기와 가까운 존재부터 떠올리는 것은 익숙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공통적인 것입니다. 취약하고 애틋한 존재를 향한 마음 씀(care), 그 존재를 향해 몸과 마음을 기울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 삼아야 되는 것은 고통에도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이 있고,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있다는 식의 위계와 서열을 매기는 것입니다. 왜 어떤 고통은 모두와 관계된 공통된 문제로서 공적인 장에서 논의되고, 왜 어떤 고통은 공론장에서 배제되는 걸까요? 왜 누구의 고통은 문제 삼는 것이 당연시되고, 누구의 고통은 불운이거나 어쩔 수 없는 걸로 얘기될까요?
우리가 여기 모여 팔레스타인 사람의 고통을 얘기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저울질하고 순위를 매기는 행태,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관심과 책임을 차별적으로 분배하는 체제에 대해 항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요청받은 발언의 주제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팔레스타인 문제를 얘기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입니다. 질문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에 답을 하려니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당연하고 마땅한 것을 설명하려니 어렵습니다. 여기 모이는 분들은 저마다의 답을 이미 갖고 계실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저 개인의 답을 간단히 나누려 합니다.
첫째,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입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마다, 춥다고 난방 온도를 높일 때마다, 의견을 발표하고 논쟁하는 자리에 있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런 매순간마다 학살이 자행되고 있고 누군가 쓰러져 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책감은 어떤 도덕 기준을 준수하려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수치심은 개인적으로 얼굴과 가슴이 화끈거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수치심을 통해 서로의 연결된 관계성을 느끼게 합니다. 나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당신도 화끈거리는구나, 얼굴이 화끈거리는 수치심과 가슴을 옥죄는 죄책감으로 우리가 서로 연결돼 있구나, 이어져 있구나를 확인하려 여기 모였습니다. 이 연결됨의 감각에서 우리는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을 만들려 합니다.
둘째,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은 우리가 이 감정을 공론화하고 집합적으로 대응하는 힘을 모을 때 열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수치심과 죄책감을 개인적으로 해소할 방법은 없습니다. 이 감정은 절대 해소될 수 없고 변화를 요구할 뿐입니다. 집합적으로 책임지는 행동으로의 변화를 말합니다. 학살을 묵인하고 동조하는 우리 정부와 기업과 여론을 붙잡고 늘어지고 추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목격자가 돼야 합니다. 제가 본 어떤 영화에서 학살자의 대사가 이랬습니다. ‘쥐 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마’, 그리고 그 대사의 영어 자막은 ‘노 위트니스’(No Witness!)였습니다. 가해자의 의도와 달리 역사적인 학살 현장에는 언제나 늘 목격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목격자가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방향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목격자는 목격한 바를 왜곡할 수도 있고 부인할 수도 있고 침묵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목격자가 돼야 할까요? 우리는 정확하게 증언하고 집합적으로 항의하는 목격자가 되려 여기 모였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팔레스타인과 우리를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서로를 지키려는 목격자로 모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셋째, 팔레스타인 사람이 겪는 불의와 고통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간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침해는 서로 연결된 공통토대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존엄성, 인권, 민주주의, 공동체, 인류,... 이런 말들이 거짓부렁이가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토대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동조세력은 인류라는 것의 공통토대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절대적으로 강하고 상황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절대악,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또한 학살을 자행하는 행위 속에서 변형되고 무너져내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적극적 목격자로서 우리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주장하고 누릴 수 있는 인간성, 존엄성, 인권, 이런 것들은 개별적으로 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공통토대에 근거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의 존엄성과 인권이 짓밟힐 때, 우리의 발밑에서 그 공통토대가 무너져내리고 있습니다. 당장 불의와 폭력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에 마음을 쓰고 대응하려 하지 않을 때, 고통에 대응하지 않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삶을 우리는 과연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우리 삶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질문이 계속되는 한 우리의 연결과 이어짐도 계속되고, 고립되는 것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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