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의 밤-수치와 고통의 규범을 넘어, 자립과 연결로 나아가기

구마가야 신이치로 지음, 조승미 옮김 / 동녘, 2025

서로 줍는관계가 만든 자립을 보며 세계와 연결되는 돌봄을 기대한다(랑희, 인권운동공간 활 상임활동가)

10년 뒤 또는 20년이 흐른 뒤 나의 몸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몸의 기능을 하나둘 잃게 되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움직임도 하나둘씩 사라지면 나의 세계도 점점 작아지게 되지는 않을까? 내가 돌봄에 의존해 살아가게 된다면 나의 자유도 축소될까? 그런 막연한 두려움은 오히려 쇠퇴한 몸의 움직임으로 살아가는 삶을 구체적으로, 어떤 가능성으로 상상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재활의 밤을 읽고 깨달았다.

재활의 밤은 뇌성마비 장애인인 저자가 소아과 의사로 일하고 현재는 도쿄대 첨단과학기술연구센터에서 당사자 연구자로 살아가는 장애 극복 성공담이 아니라 반복하는 패배와 마주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실패의 경험은 비장애인의 몸을 규범으로 삼은 세계는 장애를 가진 몸을 고립시킬 뿐이라는 것을 일깨웠고, 의존과 돌봄이 취약한 몸을 세계와 연결하고 협응 구조를 만들어 자립과 자유로 이끌었다. 실패에서 세계와 연결되는 여정은 그만의 독특하고 독창적인 언어와 표현으로 기록되었다. 장애인 당사자로 자신의 몸과 감각의 경험을 해석하고 의미화하는 표현은 의사이자 연구자로서 덧붙이는 다양한 학문적 해설의 동행을 통해 더 잘 이해된다. 또한 중간중간 만나게 되는 일러스트는 저자의 상태와 수행, 감정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구마가야의 나만의 운동을 만드는 여정은 비장애인의 움직임이라는 목표를 향한 재활의 시간에서 시작한다. ‘재활(rehabilitation)’habilitate(적합하게 하다=fit)re(다시)의 접두어가 붙어서 생겨난 말이다. 규범적인 몸의 작동방식을 습득해 정상성을 획득하는 훈련이다. 이 재활은 실패했다. 구마가야가 정상 규범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탈규범적인 운동을 결함으로 지적해 세계와 연결될 수 없게 만드는 재활의 목표가 오류였기 때문이다. 재활 캠프에서 지시를 따를 것을 강요하는 트레이너와의 응시하고/응시당하는 관계에서 구마가야의 몸은 얼음처럼 동결되어 결국 부서진다. ‘융화하는 시선이 아닌 감시의 시선아래 홀로 부서진 몸에 가해/피해의 관계의 신체 개입이 이어진다. 지시를 이행하지 못한 몸을 교정한다는 트레이너의 물리적 신체 개입은 학대의 경험으로 이어지고, 처벌과 같은 폭력만 남길 뿐이었다.

자립생활운동을 알게 된 구마가야는 응시하고/응시당하는 관계에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생활 만들기로 돌입한다. 자립생활은 사물/환경과 타자와 교섭하며 튜닝을 거듭하는 과정이었다. 이를 서로 줍는 관계라고 설명한다. 규범과 상관없이 몸과 움직임을 받아주는 타자와 환경이 있을 때, 세상과 연결이 되고 운동에 의미가 생기는 것을 줍고 주워진다라는 관계와 역동으로 표현했다. 이 탁월한 표현은 나를 둘러싼 사물과 환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했다.

대체 사람이 주워진다라는 것은 무슨 상황인가? 구마가야가 자립생활을 하면서 겪는 일들을 따라가면 이해할 수 있다. 혼자 살게 된 집에는 비장애인의 몸과 움직임에 맞춰진 화장실뿐이었고 변의가 들이닥쳤을 때 결국 변기에 앉기를 실패했다. 이 화장실은 구마가야의 몸과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을 거부한 화장실을 자신의 몸과 움직임에 맞춰 개조하자 화장실이 이제 구마가야의 움직임을 줍기 위해 손을 내밀었고, 그의 몸은 긴장이 풀리며 열리듯 움직였다. 화장실과 연결되는 방식으로 이후에는 샤워실과 침대와 현관과도 연결되었다.

의사 수련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일종의 신체적 체득이 필요한데 비장애인 의사의 움직임을 그대로 모방할 수 없었다. 환자의 팔과 의사의 손과 주사기 그리고 그 외 도구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채혈을 하기 위해 구마가야는 움직임을 도울 자신만의 도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채혈은 잘되지 않았고 레지던트 1년 차를 패배감으로 마쳤다. 2년 차가 되어 동료들과 팀워크가 시작되면서 자신의 움직임을 보조하는 동료와 채혈의 움직임을 재구성해 입으로 주사기에 음압을 거는 방식으로 채혈을 할 수 있게 됐다. 구마가야가 자신의 고유한 생활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나의 몸과 움직임을 받고 연결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 즉 서로 주워주는 것, 서로 줍기 위해 교섭하는 과정이었다.

구마가야는 사물과 사람, 자기 신체를 포함한 타자의 존재를 가볍게 취급했기 때문에 재활의 오류가 발생했다고 보았다. 탈규범적인 동작이 세상에 굴러떨어질 때, 외부의 사물과 환경이 이를 주워주는 관계속에서 비로소 인간의 삶과 행동이 성립한다. 움직임은 홀로 이루어내는 고독한 성취가 아니라 세상과의 끊임없는 협응인 셈이다. 몸은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각각의 움직임으로 구조화되어 협응하는 관계라는 것, 그리고 이런 과정은 나의 몸과 타인의 몸 사이에서도, 나의 몸과 외부환경과 사물 사이에서도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저자의 철학을 따라가다 보면 이는 장애인의 몸에 대한 것으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몸을 가진 모두의 이야기, 타자와 세계와 관계 맺는 삶의 방식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외부와의 연결의 중요성에도 틈이 없는 연결의 견고함을 경계했다. 동결과 해방이 반복됨으로써 협응구조를 다시 짜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 낸다. 서로 줍는 관계가 풀면서 서로 줍는 관계로 나아간다. 돌보는 이와의 관계에서 이 사라지면 내 몸의 일부로 여기게 되어 의존성이 강해져 혼자 있을 때 불안과 무기력이 커진다는 것이다.

서른두 살이 된 구마가야가 쇠퇴의 시간을 말한다. 뇌성마비의 몸이기에 쇠퇴를 향해가는 변화에 민감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존재는 쇠퇴를 향한 삶을 산다. 구마가야는 쇠퇴는 혼자 일어서는 자신을 잃는 패배이지만 동시에 혼자 일어설 수 없는 내가 세계와 다시 서로 줍는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 연결의 회복이라고 말한다. 세계를 향해 열리고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허용의 시간은 관능을 동반한 경험이 될 수 있다는 문장 앞에서 역시 쇠퇴를 향해 가는 나도 관능을 동반한 경험을 채우고 싶어졌다. 아직은 패배의 두려움이 더 큰 내가 쇠퇴하는 시간 속에 마주할 돌봄과 함께 의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개방과 유대로 나아가는 관능을 느낄 수 있을까?

서로 줍는 관계돌봄, 동기화, 자유(무라세 다카오 지음, 김영현 올김, 다다서재 2024)에서 돌봄을 동기화로 설명한 것과 연결이 되었다. 인지증(치매)를 가진 고령자의 행동은 장애를 가진 몸의 운동처럼 규범과 충돌하고 어긋난다. 저자는 이 어긋남을 교정하거나 통제하려는 효율적인 돌봄이 아닌 노쇠한 모습을 새로운 삶의 방식, ‘약동으로 의미화하며 돌봄의 관계를 만든다. 이런 관계에서 비로소 인지저하증의 증상만 보았던 돌봄을 넘어서 돌봄받는 당사자를 보는 돌봄이 생성된다. 저자는 이를 동기화라 하는데, 이것은 돌봄 받는 이와 돌보는 이가 한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의 가 되고, 나아가 우리가 나타나게 된다고 한다. 돌봄을 받는 이의 몸의 신호를 돌보는 이가 알아차리고 하나의 행위를 둘이서 함께해 나가기 위해 동기화하려는 노력을 하면서도, 동기화가 자유를 빼앗지 않기 위해 놀이/틈이 필요하다는 돌봄의 태도가 서로 줍는 관계로 읽혔다. 그리고 동기화가 어긋날 때마다 동기화를 다시 거듭하면서 새로이 합의하는 과정은 구마가야의 교섭의 과정과 겹쳤다. 구마가야의 자립생활처럼 돌봄을 받는 이가 타자와 환경과 연결되는 협응구조가 만들어진다면 돌봄이 고립이 아닌 주고 받는 돌봄, 세계와 연결되어 자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책장을 넘기며 만나는 놀이’, ‘관능’, ‘줍기의 표현에 잠시 멈추어 그의 몸과 감각을 상상했다. 자기 몸-장애의 반응을, 타인과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변화를 탐구하는 그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느라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느려진다. 딱딱하게 긴장하는 몸과 타인의 시선과 신체의 부딪힘, 비장애인 중심으로 설계된 환경 속에서 부단하게 저항하고 연결되기를 시도하고 패배와 교섭/타협을 오가며 마침내 나만의 운동’(나의 움직임)을 만들어가는 여정을 따라가니 나 역시 쾌감을 얻었다. 그리고 부모님 집 현관에 주워지길기다리는 아빠의 스틱(지팡이)이 생각났다.

아빠는 2년 전 심장 수술을 하고 운동 능력에 큰 변화가 생겼다. 장시간 수술과 중환자실에서 회복을 거쳐 일반 병실로 온 아빠는 24시간 돌봄이 필요했다. 혼자서 움직이는 것은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열흘 정도 지나서는 스탠드에 의지해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있었고 걷기도 가능했다. 여전히 움직임은 예전 같지 않고 불안감을 동반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려니 했다.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의 주요 관심사는 아빠의 걸음이 나아졌는지, 오늘도 거르지 않고 산책을 다녀왔는지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와 나는 아빠의 걸음을 주시하고 응시했는데 사실은 감시였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어느 날 아빠는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 걷는 속도는 현저히 느려졌다. 걸음의 중심은 흔들려 외부 자극에 재빠른 대응이 가능한 신체 협응은 어려운 것 같다. 우리 모두 아빠에게 제발 지팡이를 사용해 달라는 요청을 때로는 감정이 실린 잔소리를 해댔다. 지팡이를 완강히 거부하는 아빠는 내심 과거 자신의 정상적 보행의 기억으로 끊임없이 올바른 움직임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수행을 반복하는 중이었을 것 같다. 지팡이는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몸을 인정하고 패배를 선언하는 상징과 같은 것이리라. 1년 정도 아빠와 교섭의 결과 스틱을 집 안에 들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스틱과의 동행은 아주 드문 일이어서 스틱은 아직 아빠와 줍는 관계로 나아가지 못한 듯 하다. 아직 아빠는 스틱에 주워지려는 준비는 되지 않은 것 같다. 스틱은 아빠의 걸음을 주울그날을 기다리며 현관에 대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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