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던 곳’은 어떤 곳입니까?
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공동대표)
올해 통합돌봄 예산은 914억, 인건비 제외하고 실제 서비스 확충에 쓸 수 있는 돈은 620억, 이를 전국 229개 시군구로 나누면 평균 2억 7천만원에 불과, 우선 지원 대상자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노인, 중증장애인 등 약 2만 명···.
2026년 3월 27일, 지역사회 통합돌봄 제도가 전국적으로 시행된다. 관련된 보도와 논평이 쏟아지고 있으나, 여기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예산 관련 수치들은 제도의 앞길이 평탄치 않음을 보여준다. ‘지역사회’, ‘통합’, ‘돌봄’,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도전들의 압축점이다. 당국에서는 관련 조례 제정, 전담조직과 인력배치, 지자체별 사업 계획 제출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나 그걸 담보할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나마도 건강보험, 일반회계, 지자체 예산 등으로 분절돼 있어 지자체가 지역에 맞는 돌봄을 운용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게 비판과 염려의 목소리이다. 지역간 인프라 격차, 돈과 인력의 턱없는 부족, 지자체의 경험차, 지원 대상의 협소함, 공공이 거의 보이지 않는 공급체계의 높은 민간 의존도, 칸막이를 허문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연계의 가능성이 희박한 점 등이 꼬리를 문다. 관련법이 통과되고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당국의 로드맵이 발표되던 내내 반복됐던 얘기다. 그럼에도 의료, 요양, 돌봄 등의 통합 서비스를 통해 병원이나 시설이 아닌 ‘살던 곳에서의 존엄한 삶과 죽음’을 보장하자는 목적과 지향에 대해서는 대체로 지지하는 것 같다.
나는 서울이란 대도시에 살지만 한 동네에 오래 머물러서인지 낯익은 얼굴들이 적지 않다. 허리가 기역자로 구부러진 할머니는 날씨의 궂음과 상관없이 담배꽁초 등을 줍고 돌아다니신다. ‘남은 여생 움직일 수 있는 한 보탬되는 일을 하고 싶다’며 혼자 결행하는 일이라고 슈퍼에 온 아주머니들이 얘기하는 걸 들었다. 뒷축없는 신발을 질질 끌던 땅달보 할아버지와 정신장애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와 인지저하가 분명해 보이는 꺽다리 할아버지 삼인조가 길모퉁이에서 종일 시간을 같이 보내더니 어느날부터 한 사람씩 사라지고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양지바른 곳에 철에 안맞는 옷을 입고 앉아서 지나가던 이에게 뭐라뭐라 하시던 아주머니도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눈에 익었던 ‘이웃’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다른 ‘이웃’들로 바뀌곤 한다. 나와 그분들은 ‘이웃’ 아닌 ‘이웃’이다. 아는 데 모르는 관계, 그런데 어쨌든 같은 시공간을 살아가는 관계다.
어느 날 문득 빈자리를 느낄 때면, ‘돌아가셨나’, ‘어디에서 돌아가셨을까’, ‘말년의 돌봄은 누구에게 어떻게 받았을까’, 혼자 궁금해하다 한숨짓곤 한다. 그분들의 마지막 궤적을 ‘괜찮게’ 그려볼 만한 그림은 잘 나오지 않는다. 나의 상상력의 부족이기도 하겠지만 그분들의 삶에 동행할 사회적이고 제도적인 관계망을 떠올릴 경험의 부재 때문이기도 하다. 나의 부모 돌봄과 지인들의 갖은 돌봄 경험을 다 긁어모아도, 집 아니면 시설이란 두 개 축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집이란 것도 거주 안정성, 위해요소, 드나드는 관계 등에 따라 저마다 다른 의미의 집이고, 병원, 요양병원, 요양원, 호스피스 등 시설도 나름의 경험이 천차만별이다. 어쨌든 기존의 두 개 축을 벗어나 제3의 다른 관계와 장소, 다른 연결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다.
때론 ‘혁명적’이란 수식어까지 붙는 ‘지역사회 통합돌봄’은 내 ‘이웃 아닌 이웃들’을 우선적인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시도이다. 방향성과는 달리 돌봄이 놓여있는 기존의 형편은 어렵기 그지없다. 부모의 고령화로 인한 중증장애인 ‘돌봄절벽’, ‘간병살인’, 대자본의 요양사업 진출, 돌봄노동자 결핍과 고령화, ‘탈시설’이란 용어 사용조차도 문전박대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이웃으로 같이 살아가기와는 동떨어진 얼어붙은 땅을 파야 한다.
어쩌면 첫삽뜨기와 같은 게 지역사회 통합돌봄 제도이다. 시행을 둘러싼 많은 기대와 염려와 질책을 가로지르는 핵심어를 꼽자면 ‘돌봄 생태계’의 구축이다. 살던 곳에서의 존엄한 삶이란 단지 제공되는 사회서비스를 늘리는 차원이 아니다. 그 사람을 중심으로 어떤 사회적 관계의 연계망을 구축하느냐의 문제이다. 인프라 구축은 물질적이고 제도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서적 관계를 포함하여 사람들 ‘사이에 있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말로는 지역사회 거주인데 고립된 섬 같다면, 들고나는 서비스 제공 말고는 다른 관계를 기대할 수 없는 곳이라면, 세입자 지위 등으로 인해 편의시설을 갖추지도 임종할 장소로 맘 편히 택하지도 못할 곳이라면, 말로는 ‘살던 곳’이라지만 물리적 주거환경에 그칠 뿐이다. 단지 공간이 아닌 관계가 있는 장소를 만들려는 야심찬 도전이 필요하다. 일상돌봄에서 임종돌봄까지 삶의 고유하고 다양한 굴곡마다에서 변주되고 교차될 수 있는 돌봄의 생태계를 함께 상상하는 사회적 역량이 요구된다. 특정 기관이나 거기에 관계된 종사자만이 아니라 넝쿨처럼 얽히고설킨 모든 삶의 현장과 거기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돌봄을 중심으로 어떤 시공간을 만들어가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국가와 공공의 책임성은 돌봄을 ‘대신’해준다는 의미가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을 돌봄 생태계에 어울리게끔 변화시키는 문제를 공통의 의제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구성원 모두는 직간접적으로 그러한 구축과 어떤 식으로 연루될지를 자기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살던 곳에서’의 의미는 단지 개인에게 오래된 물리적 장소, 살아왔던 공간만의 문제를 넘어선다.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 기본적인 인프라에 접근하며 살아가느냐의 문제다. 생애 끝까지 살아갈 만하고 살고픈 그런 곳, 넝쿨 같은 관계망 속에 엮여 들어가는 그런 ‘살던 곳’이 누구에게나 깃들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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