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정치의 통치를 가로지르는 돌봄의 수행성:

돌봄이 이끄는 자리』(서보경 지음, 반비, 2025)

 

김영옥 (인권연구소 '창' 공동대표)

 

통치의 정당성 확보라는 정치적 목적이 보편적 건강 보장의 약속과 만날 때, 이 약속에 부여하는 의미와 실현의 방식은 나라마다 지역마다 다르다. 역사적 과정과 정치적 환경, 경제적 상황, 그리고 믿음과 가치 체계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태국 근대사에서 국민 건강이 사회적⬝정치적 목표로 고려되는 양상은 국가 권력의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여러 시도와 결부되어 있다. 의료 관리학이나 보건 경제학이 아닌 문화인류학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다스림이 어떻게 삶의 돌봄이 될 수 있는가. 공공의료에 관한 질문과 그것의 실질적인 구현 사이에서 정책적 접합이 쉽지 않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돌봄이 이끄는 자리>가 주는 시사점은 크다. 이 책은 태국의 지역 거점 병원의 사례를 통해 다스림과 돌봄의 통합이라는 보건의료(healthcare)의 당위성이 어떻게 현실이 되고 있는가를 다면적으로 관찰하고 있다.

이 책이 제공하는 보건의료의 면면 중에서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생명 윤리적으로 가장 감동적인 하나를 꼽으라면 서슴지 않고 ‘우리가 정부니까요’라는 의료진의 말을 꼽고 싶다. ‘어떻게?’에 대한 질문에 대한 이 답변은 너무나 간단명료하다. ‘할 수 있는 한 최고/최선의 돌봄 의료’를 출발점이요 목표로 삼는 이 말은 그러나 당연히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의 힘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책 제목이 ‘돌봄의 자리’나 ‘돌봄을 이끄는 자리’가 아니라 ‘돌봄이 이끄는 자리’임을 잘 되새김질해야 한다. 앞의 두 제목이 사람을 주체로 세우고 있다면 뒤의 제목은 돌봄을 주체로 세우고 있다. 돌봄이 어떻게, 무엇을 이끈단 말인가. 공공의료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환자, 의료진, 보호자, 간병인, 기계, 영(靈) 등등을 돌봄이 이끈다. 어떻게? 돌봄은, 이 주체들 ‘사이’에서, 끌고 밀고 당기며 서로를 제약하고 보완하고 지지하는 어떤 역학을 미세한 소용돌이로 불러일으킨다.

이 역학 내에서 명백한 경계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서로가 이끌고 이끌린다. 이끌고 이끌리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돌봄은 상호 의무의 관계성 속에서 공현존(co-presence)의 감각으로 협력하는 다양한 행위자들의 어셈블리지가 된다.

의료진은 정부의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정부로서’ 환자의 치료가 보험 증서나 국적 관련 등록증(이주민, 난민, 미등록 체류자, 무국적 아동으로 분류되는) 혹은 입원비 앞에서 멈추지 않도록 한다. 이민자 어머니들은 병원에서 받은 대기표나 영수증, 처방전 등 모든 서류를 소중하게 간직한다. 이 서류들은 자신들이 이 장소에 엄연히 존재해 왔음을 증명할 것이다. 이른 시간 대기실에 도착한 환자와 보호자들은 믿음을 갖고 기다린다.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의사와 간호사들이 아는 게 중요하다. 간호사들은 퇴원한 환자가 병원에서 말한 대로 잘 따르고 있는지 정기적으로 방문한다. 이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지역사회에 각인시키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영(靈)들도 자기 몫을 확실히 해야 한다. 이 모든 돌봄의 회로망에서 강력하게 표출되는 건, ‘빈곤하고 아프고 힘겨운 우리를 다스림의 대상이 되게 하라, 우리를 내치지 말고 돌보라’는 호소와 그 호소에 몸을 돌리는 지역 공공의 응답이다. 이끌고 이끌리는 상호 회로망이, 미약하지만 피할 수 없는 연결망이 만들어진다. 환자(patient)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사람이다. 이 기다림은 그저 무기력한 상황의 수용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일이 이루어지도록 허용하고 이끌어내는 일이다. 기대와 요구 사이에서의 행위성이자 수행성이다.

돌봄이 통치와 의료, 가정과 신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공통 원리로 작동하는 태국의 사례는, 특정한 주체의 고통과 죽음을 용인 내지 조장하는 생명 정치의 문제를 재사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즉 돌봄의 윤리와 실천이, 생명 정치라는 거시적 사회 차원이 만들어내는 불확실하고 모호한 조건 속에서 어떤 정치적 조정을 해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태국 사회에서 유효하게 작동하고 있는 생명과 삶의 형식에 대한 다원적 개념은 권력과 사회성 의무의 상호작용 또한 이끌어낸다. ‘이끌어내기’란 “타자로부터 반응을 유도하고, 그리하여 접촉과 연결, 수용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힘, 지금 여기 함께 있는 존재, 즉 구체적 현존이 발휘하는 생성적 능력”을 뜻함을 한 번 더 상기하자. 생명 정치를 가동하는 국가 권력의 속성도 가변적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쟁점은 어떻게 국가로부터 보살피는 힘을 이끌어내고 구체화할 것인가이다.

한국은 2024년 의료 대란을 겪었고, 이에 대한 후속 조치로 현재 지역의 보건의료진 확보를 위한 의대 교육정책을 모색 중이다. 2026년 3월부터 시행될 지역통합돌봄에서는 방문의료가 필수 내용으로 포함되어 있다. 변화와 전환의 시도에서 태국의 지역 공공병원 사례가 제시하는 비서구적 공공돌봄 체계가 좋은 참조점이 되길 희망한다. 정책이나 제도로만 전환을 이뤄낼 수 없다. 관료제적 합리성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서로를 ‘불쌍히 여기는’ 감각과 거기서 태동하는 책임과 의무의 관계가 ‘이끌어내는’ 힘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 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담론은 특정 계층의 사회적 감각이다. 현재 가장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위치에 처한 사람들의 삶을 함께 돌보고 지키기 위해서는 도덕적 의존과 자존⬝자율이 공생할 수 있는 이끌어내고 이끌리는 상호 수용성의 역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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