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09. 10. 20

작성자 : 엄기호

 

돼지가 있던 교실은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에 바탕을 두고 만든 영화이다. 졸업을 앞둔 6학년의 한 학급에서 담임교사가 아이들에게 우리들의 먹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돼지를 같이 키워볼 것을 제안한다. 난감해하는 학교측과 불편해하는 학부모들을 앞에 두고 아이들은 일단 시작해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돼지에게 P짱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정성껏 보살핀다. P짱은 곧 아이들의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학급의 모든 일과 아이들의 관심사가 되어 버린다. 지나치게 아이들이 P짱에게 밀착되어 버리자 학부모들의 항의가 시작된다. 아이들의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오면 온통 P짱 이야기밖에는 안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장선생은 담임과 자신을 믿어달라고 이야기하며 담임에게 이 프로젝트를 끝까지 밀고 가 보라고 격려한다.

시간이 지난 후 아이들의 졸업이 다가오자 P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아이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진다. 졸업을 해야하니 더 이상 P짱을 보살펴줄 수 없기 때문이다. P짱에게 정이 든 아이들은 이미 P짱은 돼지고기가 아니라며 절대 먹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반대하는 아이들은 애초에 데리고 온 이유가 먹기 위해서였고 우리가 먹는 것도 P짱을 기억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으니 죽여야한다고 주장한다. 의견이 팽팽한 가운데 다른 저학년 후배들에게 물려주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학년들이 P짱을 다루는 것이 신통찮아서 좋은 대안이 되지 못한다. 동물원이나 농장에 보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것도 찾기가 쉽지 않다. 다시 학급회의가 소집되고 격론이 벌어졌지만 결과는 동수가 된다. 결국 학급의 캐스팅보드를 쥐고 있는 담임교사는 P짱을 식육센터로 보내는 것을 결론을 내린다. 영화는 아이들의 졸업식과 함께 막을 내린다.

 

거침없이 토론하는 아이들이 부럽다

 

이 영화를 보고 학생들이 대다수가 이야기한 것은 한국 교육 현실의 한심함과 이런 체험형 교육에 대한 부러움이다. 가장 먼저 돼지를 키우자고 제안하는 담임교사의 실험정신이나 열린 자세를 꼽을 수 있다. 한 학생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서 한국의 교실에서는 교사의 의견과 결정이 ‘수업시간뿐 아니라, 그 외의 관계에서도 진리로 여겨졌고, 모든 생각과 행위의 기준’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아이들이 ‘자신과 어떤 문제를 같이 상의하고 해결해나가는‘ 파트너는 아니었다. 이에 반해 이 영화의 교사는 돼지를 키우자는 것도 아이들의 동의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또한 P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강요하지 않고, 돼지를 키운 주체인 학생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처럼 학생을 의견의 당사자로 존중해주는 교사에 대한 기억은 한국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처음 이 젊은 담임의 결정에 우려를 표하지만 막상 학부모들의 걱정이 시작되고 항의가 이어지자 담임에게 끝까지 한번 프로젝트를 수행해보라고 하면서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교장 역시 대단히 인상적이다. 한국의 교장들이 교사들이 저지르는 일에 책임을 지기는커녕 교사들의 그 어떤 창의적인 제안도 말썽이 일어나면 책임을 지겠냐고 도로 윽박지르른 모습과는 완전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학부모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이해관계를 따지지도 않으며 학생들을 위해, 부모들을 학생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해준 교장선생님의 태도가 상당히 인상적이면서 충격적’이었다고까지 이야기한다. 지난번 일제교사에 대한 반대에 대해 교사의 자율권을 존중해주다가 장수중학교의 교장이 징계를 당하는 것을 보면 이 충격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아이들의 토론 역시 수준급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다른 동료들과 교사에게 전달하는데 있어 거리낌이 없다. 초등학생밖에 되지 않지만 ‘자신이 가진 생각과 느낌을 자연스레 표현’한다. 한 학생은 대학생이 된 지금도 자신이 여전히 무엇에 대해 발표할 때 엄청나게 긴장한다고 고객한다. 누가 자신의 발표에 대해서 토를 달지는 않을까, 자기가 발표하는 내용이 ‘교수가 원하는 방향과는 맞지 않는 것은 아닌지’ 등을 걱정한다. 자신의 현재 전공의 특성상 ‘보다 실험적이고 획기적’이어야하지만 여전히 고등학교때 까지의 습관을 답습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한국의 교육은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단지 한국의 교육이 가르쳐준 것은 ‘언제나 완성된 형태로 '잘' 말해야 하는것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잘' 말하는 법을 모르는 아이들은 자신이 혹시 실수라도 해서 반 친구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혹시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늘 시달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영화에서는 ‘교사의 권위를 바탕으로 한 일방적인 교육을 지양하고, 학생들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고,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교육을 실천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라는 것이 상당수 학생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성장, 관계의 단절에서 오는 세계의 붕괴와 해방

 

영화 내부적인 것에서 아이들이 P짱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가지고 토론하는 것에 대해서 학생들이 가장 많이 떠올린 것은 ‘당연하게도’ 김춘수의 ‘꽃’이다. 몇 번이나 이 연재에서 이야기를 한 것처럼 교과서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이리도 크다. 자신들이 무슨 주장을 해야할 때면 정당성의 근거로 제시되는 ‘참고문헌’은 교과서인 것이다. 참고문헌의 힘은 단지 주장의 근거를 제시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주장의 내용과 방향까지 결정한다는 것에 있다. 김춘수의 ‘꽃’이 등장하는 순간 학생들이 어떤 내용을 주장하게 되고 그것의 결론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요컨대 P짱과 아이들 사이에 친밀성이 형성됨으로써 P짱은 더 이상 돼지고기일 수가 없다는 점이다. 관계의 형성은 P짱을 식육동물에서 애완동물로 격상시킨다. 이름을 붙인다는 것 자체가 인격적 관계의 형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한 학생은 꽃을 패러디하여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주기 전에는 돼지는 그저 고기용 돼지일 뿐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이름을 붙여주자 돼지는 귀여운 ‘P짱’이 되었고 의미가 되었다. 돼지가 ‘P짱’이 되자,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돼지고기 만드는 돼지란 점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동체가 형성이 된다. 요컨대 ‘나 없이는 ’P짱'도 있을 수 없으며, 내가 하는 경험 또한 ’P짱'이 있음으로서 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결속이 생기는 것이다.

사실 P짱과 아이들의 관계와 같은 공동체는 환상이다. 한 학생은 ‘애완동물에서부터 혈연․지연․학연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이런 환상 속에 살면서 환상이라는 것을 어쩌면 암묵적으로 아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환상을 깨뜨려 현실을 바라보기’가 너무 두렵기 때문에 외면한다는 것이다. 이 환상이 깨어지는 것, 즉 P짱을 잃는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창조한 한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의미한다.

관계의 단절이 세계의 붕괴이며, 이 세계의 붕괴를 반복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인간은 성장을 해 나간다. 실패와 종말을 감당하며 이 세계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가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에서 거세라고 부르는 이별과 분리는 인간의 숙명이다. 젖을 떼고 어머니로부터 분리되어야만 이 세계의 질서로 들어올 수 있는 것처럼 P짱과의 분리는 성장에 필수적인 과정이다. 정신분석학적 개념으로 하면 모든 것이 충만한 상상계에서 모든 것이 매개되는 질서로서의 상징계로의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성장,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라면 아마 이 영화는 등장한 아이들에게 ‘먹는 것의 의미’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이별과 분리의 잔혹한 과정을 통하여 아이들을 상징적으로 거세하는 훌륭한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자신들이 이렇게 상상적으로 하나 혹은 공동체라고 느꼈던 생명과의 단절을 통하여 죽음의 필연성을 받아들였던 과정을 드러냈다. 학교앞 문방구에서 파는 병아리와의 이별에서부터 시골 출신인 한 학생이 자신과 같이 성장한 ‘뽀삐’라고 불렀던 한 송아지의 사라짐에 이르기까지. 물론 이 이별과 헤어짐이 다가오는 의미와 강도는 사람들마다 다르다. 어떤 학생들은 자신의 병아리가 아버지에게 잡아먹혔다는 충격 때문에 평생 닭고기를 못 먹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자기가 키운 닭이 농장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녁 식탁에 올라온 닭은 자기가 키운 닭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맛있게 먹기도 한다. 또 어떤 친구는 자신의 닭이 사라졌을 때 사실 그 닭 뒤치다꺼리를 하는 동안 사실상 자신은 피곤하였기에 솔직히 잘 사라졌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고 말한다. 책임을 진다는 것의 다른 말이 곧 부담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관계의 단절은 세계의 붕괴이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해방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 P짱은 애완동물이었을까?

 

아이들이 P짱을 P짱으로 부르는 순간 생명은 위계화된다. 학생들이 간파해낸 것은 이런 ‘특별한’ 인격적 관계의 형성은 반드시 생명의 위계화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토론과정에서도 아이들은 P짱은 다른 돼지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한 학생은 ‘똑같은 생명이라도 자신과의 추억이 있는 동물과 그렇지 못한 같은 종은 다르다’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환기시켰다. 이 학생은 ‘그다면 인간도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은 덜 소중하단 말’이 되는 것이냐고 되묻는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돼지를 통해서 생명의 소중함을 보여주려는 것’이었겠지만 오히려 ‘이 대사에서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독재자의 대사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관계의 특별함을 통하여 생명을 구분하고 차별화하고 위계화하는 것에서는 이 학생의 말처럼 나치와 인종주의의 냄새가 난다. 우리는 특별한 관계이니 당연히 그것은 특별한 대접을 해주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최근의 인종주의는 나치처럼 자신들의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자신들의 생각이 보편화되어야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특수주의를 내세운다는 점에서 이 학생의 통찰은 더욱 의미가 있다. 국민과 비국민이 갈리고 이주노동자도 등록이주노동자와 미등록이주노동자가 갈린다. 그리고 이 분류는 인간들이 누구에게 더 공감하고 누구에게는 덜 공감해야하는지를 갈라 놓으며 그 공감의 차이를 정당화한다. 즉 공감의 정도가 강한 부류에 대한 차별은 격심한 비판을 받지만 그 반대 급부로 공감의 정도가 덜한 인간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더라도 정당화되는 것이다.

인간뿐만이 아니다. 동물들도 이미 인간들의 편의에 의해서 위계화되어 있다. 같은 돼지라고 하더라도 이 돼지가 농장에 있으면 식용동물이며,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있으면 야생동물이고, 집에 있으면 야생동물이며 실험실에 있으면 실험용 동물이다. 한 생명이 어디에 배치되고 어떻게 분류되는가에 따라 그의 운명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익숙한 구분법의 정당성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고 내가 특별하고 특수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더 대접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게 된다.

한 걸음 더 나가보자. 더욱이 이 위계화는 위계화되는 동물의 특성과는 거의 무관하다. 한 학생은 자신이 식당에서 시킨 삼계탕을 비유로 들어 설명한다. 먹기 불편할 정도로 엽기적으로 생긴 것은 오히려 찢겨져서 이미 형체가 없어진 상태로 나오는 개고기가 아니라 목만 잘린 채 뱃속에 온갖 가지 이물질을 담고 나오는 삼계탕이 아닌가? 그런데 왜 자신은 자기가 시킨 ‘탕’이 개고기라는 것을 알자마자 미련없이 삼계탕으로 바꾼 후에 아무런 느낌없이 맛있게 먹을 수 있었는가를 되묻는다. 요컨대 이 위계화는 대단히 정밀하게 동물의 속성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이 만든 분류표에 따라 배치된 것 뿐이다. 여기에 다른 생명에 대한 고려, 혹은 생명을 나누는 분류/배치표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이 담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생명의 소중함을 다룬다는 교육이 오히려 생명을 위계화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P짱과 아이들의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이다. 한 학생의 말처럼 ‘아이들이 토론에서 P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라는 토론의 전제는 'P짱의 미래는 우리가 결정한다'’는 것이 된다. ‘동료’라고 부르지만 한쪽만 말을 가진 관계가 어떻게 동료가 될 수 있겠는가? 생명은 고귀하지만 스스로 삶을 선택할 수 없는 돼지는 처량하다. 이 때문에 한 학생은 ‘돼지여,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라’고 이야기한다. 애초에 P짱과의 결속 자체가 아이들 쪽의 일방적인 환상인 셈이다. 그래서 이 환상의 단절은 ‘토론’이라는 이상한 이성적 과정을 밟게 된다. 애초부터 P짱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자신의 몫을 주장할 목소리가 없는 ‘벌거벗은 삶’이었던 셈이다.

 

교육의 잔혹함, 교사의 무책임

 

이런 점을 간파한 몇몇 학생들은 이 영화에서 말하는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 학생은 만일 담임선생이 ‘학생들에게 생명의 존엄성을 가르치기 위해 돼지를 키우자고 했다고 가정하고 말을 하자면, 애초에 잘못 접근’이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친다고 ‘생명을 가둬두고,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며 이것을 먹을까 말까를 고민’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음식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고 다른 한 학생이 이야기한다. 애초부터 생명의 의미와 음식의 소중함은 전혀 다른 주제이다. 그런데 이 교사는 이 두 가지를 섞어 버린 것이다. 결국 음식은 죽음 생명이 되는 것이고 음식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이상야릇한 이해할 수 없는 과정이 되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열린 교육에는 음식의 소중함도 생명의 소중함도 없다. 다만 아이들의 추억만이 달랑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P짱은 과연 무엇이었는가? 그는 결국 식용동물도, 애완동물도 아닌 교육용 실험동물이었던 셈이다. 아니, 애완동물의 다른 이름이 실험동물이다. 아이들에게 음식의 소중함, 혹은 생명의 소중함을 가르쳐준다는 이름으로 어찌 보면 호사를 누렸지만 어찌 보면 가장 잔혹하게 다루어진 실험용 동물인 것이다. 이미 이것은 담임선생이 P짱을 교실에 데리고 오는 순간부터 운명 지어져 있었다. 한 학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담임교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들에게 모든 결정권한을 맡긴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아이들의 머릿속을 두 편으로 나누고 ‘한 쪽에 동그라미’를 이미 그려놓은 그런 토론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이런 정황에서 ‘합리적 의사소통’이라는 것은 가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혀 가능하지 않은 감정적 정황을 만들어 놓고 아이들이 진지하게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고 그것이 성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엽기적이지 않은가? 혹 이것이 소위 말하는 ‘열린 교육’이 만들 수 있는 P짱과 같은 실험체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가장 처참하고 잔인한 덫인 것은 아닌가? 한 학생의 신랄한 평가에 따르면 ‘교실 속 아이들은 곧 어른이고, 교실속 어른이 마치 그 어른들의 논쟁을 불구경하듯 앉아있는 우유부단한 아이’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결국 이런 교육에서 가장 무책임했던, 혹은 가장 무책임할 수 있는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것은 담임선생이었다. 그래서 한 학생은 다음과 같이 이 ‘자유분방’하고 ‘아이들을 믿으며’, ‘민주주의적’이며, ‘열린 교육’을 지향하는 교사에게 아래와 같이 묻는다.

 

당신이 행한 수업방식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살아있는 교육을 행하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난 참 그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졸업 3일 전에 아이들에게 ‘잔인한’ 투표를 시킬 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맨 처음 반 아이들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돼지를 달랑 들고 온 그대가 아이들에게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한다며 식육센터로 보낼지, 3학년 아이들에게 보낼 것인가를 아이들에게 그냥 넘기다니, 교육자로서 당신의 책임에 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더라 이겁니다!

그래요, 교과서에 ‘글자’형식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오감(五感)을 통해 경험하게 해주고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는 것, 그것만큼 제대로 된 교육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그렇게 실천적인 선생 또한 없죠. 처음에 당신이 돼지를 가져 온 이유는 돼지를 길러서 나중에 같이 잡어 먹고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자 하기 위함이었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P짱’이라는 돼지에게 의미를 부여하도록 나뒀어요. 아이들이 ‘P짱’의 집을 아름답게 꾸미도록 놔뒀어요. 아이들이 ‘P짱’을 먹이기 위해 필요이상으로 음식을 가져온 것을 놔뒀습니다. 더 잔인한 것은 아이들의 그림을 교실 뒤에 붙여놓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돼지를 새로운 친구로 만들게 놔뒀어요. 왜 그랬어요?

 

교사는 ‘이것이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때 가장 무책임해질 수 있다. 그리고 교육은 ‘이것은 교육을 위해서’라고 말을 할 때 가장 잔인해질 수 있다. 아이들의 주체성을 믿고 체험을 통한 교육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교육은 참 복잡한 것이다.

작성일 : 2009. 9. 20

작성자 : 엄기호

 

누구에게 이 영화를 금해야하는가?

 

한국의 현재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2040년의 영국에 한 ‘영웅’이 나타난다. 사회는 국가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있으며 모든 시민들의 일거수 일투족은 정부에 의해 감시당한다. 언론은 권력의 통제를 받으며 계속해서 왜곡된 뉴스만을 쏟아내고 있고 시민들은 거짓을 진실로 믿으면서 완전히 세뇌되었으며, 정부에 반대하거나 피부색, 성적 취향 등이 다른 사람들은 소리소문 없이 ‘정신집중캠프’로 끌려간다. 이 캠프에서 행하여진 생체 실험의 결과인지 뭔지는 알 수 없는 초인적인 힘과 의지를 가진 한 인물이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500년전 가톨릭을 탄압하는 영국정부에 맞서 국회의사당을 폭파시키려다 체포되어 처형된 ‘가이 포크스’의 사면을 쓰고 정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권력자들을 처단한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비는 브이에 의해서 구출되지만 브이의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식에 동의하지 않지만 점차 진실을 알아가며 브이에 동참하게 된다. 이 영화의 백미는 정부에 의해 완전히 세뇌가 되어 아무런 정치적 의사가 없는 것처럼 보이던 시민들이 브이에 의해 진실을 알게 된 후 ‘모두가 브이의 가면을 쓰고 복장을 한 후’ 거리를 점령하여 정권을 전복시키는 장면이다. 이비의 말처럼 브이는 자신들의 아버지이며 친구이며, 아니 우리 모두가 브이라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에 찬성한다

 

브이 포 벤데타는 상당히 과격한 영화이다. 세상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은 이 영화를 보면서 환호하겠지만 어찌되었건 폭력에 반대하는 ‘소크라테스’와 ‘간디’의 후예들에게는 대단히 불편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후 언론법 개악이나 인터넷 여론에 대한 탄압 등 이 영화의 내용과 맞물린 한국의 현실 때문에 영화 자체가 주는 메시지보다는 현재 우리의 상황과 오버랩이 되어 ‘정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읽고 토론을 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학생들 대다수 역시 이 영화를 한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해하였다. 이 영화는 작년 광우병 사태와 촛불을 즉각적으로 떠올리며 몇 개의 단어로 집약되었다. 민주주의, 독재, 참여, 비판, 언론 등이 그것이다. 먼저 학생들은 정권에 의한 일방적인 감시와 탄압을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하였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중의 하나인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한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정부가 국민들에게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해서는 비판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하는데 ‘현 정부는 억압과 통제를 하며 의견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비판한다.

또한 학생들은 이 영화를 통해 참여하지 않으면서 쟁취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말을 한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브이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대국민들 방송을 통하여 거울을 보여주며 ‘그 속에 비친 자신들이 지금의 우울한 오늘을 만들었다’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독재자의 달콤한 약속 뒤에는 자신의 영혼과 같은 자유를 팔아먹은 대중’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를 통해 다수의 학생들은 ‘왜곡된 사실을 앎에도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중의 무지는 독재자의 행위만큼이나 비판당해 마땅’하며 ‘부조리한 사회를 보고서도 그것을 묵인한 대중의 수동적 태도는 반성의 대상’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모름지기 민주주의 시민의 가장 큰 의무중의 하나는 그 민주주의를 참여와 비판을 통해 지키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자신들의 현실과 처지를 돌아보고 비판하며 각성을 촉구하는 글도 많이 눈에 뜨인다. 대표적인 것이 투표하지 않는 20대에 대한 비판이다. ‘10명중의 2명도 제대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비판하며 스스로들에게 ‘언제나 자지 말고 깨어야’한다고 촉구한다. 사회가 잘못되었다면 ‘개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개선하기위해 스스로가 행동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갖추어야 할 민주시민의 자세’인 것이다. 따라서 ‘선거 날을 휴가로 알며, 정부에서 시행하는 정책보다는 스포츠나 연예에 더 관심’을 가지는 현실을 비판하며 ‘방송매체에서 하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중이 많아’진다면 ‘그 순간이 우리 사회가 죽어버리는 날’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 ‘2012년에 일어나서 행동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학생들의 글을 보면서 작년 광우병 파동 때 촛불시위가 한국의 국민들에게 끼친 영향을 확실히 실감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 떠드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았다. 인터넷의 댓글에서도 보면 ‘데모만 많이 하면 어떻게 하나. 투표소로 가야지’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적 발언이 정치적으로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투표밖에 없다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교과서는 힘이 세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러한 독재에 대한 비판과 민주주의에 대한 촉구는 교과서의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난 호에서도 이야기를 하였지만 학생들의 글을 읽으면서 학교와 교과서가 만들어내는 ‘규범의 힘’을 절감할 때가 많다. 즉 정치적으로 무엇이 옳은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가장 손쉬운 답은 교과서에 나와 있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독재에 대한 비판과 민주시민의 의무를 강조한 학생들이 하나같이 다들 지적한 것이 브이의 복수가 가진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다. 브이의 행동은 ‘단지 살인이라는 비윤리적 행동을 통해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중의 하나이다. 심지어 한 학생은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찝찝하고, 불쾌’했다고 까지 이야기한다. 우리는 내내 ‘결과보다는 과정’이라고 배웠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 학생은 ‘그 사회에 대항하는 행동의 동기가 좀 더 순수성’을 가지고 있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독재는 반대하고 민주주의는 쟁취되어야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비폭력과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이런 규범적인 언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이고 그 효과는 무엇일까? 한 학생은 이것을 아주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자신은 ‘사회적 이슈에 생각을 많이 해보지 않았을 뿐더러 스스로의 정치적 견해를 정립하려고 해본 적’이 없어 ‘현재 사회의 문제점과 상황을 판단한다는 것은 어렵다’면서 굳이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 ‘중/고등학교 때 배운 얕은 지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겠다고 말한다. 이 학생의 말에서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우리는 무엇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가를 어디에서 배웠는가하는 점이다. 바로 교과서와 학교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발언을 해야 할 때 무엇에 의지해서 말을 풀어내는가이다. 역시 학교와 교과서에 의지하여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이고 교과서와 학교가 힘을 발휘하는 장소이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의 언어에 의지하여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이 정말로 그 교과서의 정치를 믿는가, 아닌가하는 점이 아니다. 공적인 공간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해야 할 때 우리가 의존하고 동원할 수 있는 언어가 ‘학교와 교과서’의 언어라는 것이 보다 더 결정적이다. 슬라보예 지젝이 예리하게 간파한 것처럼 이데올로기는 ‘믿는 것’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에서 작동한다. 즉 교과서의 언어를 실제로 믿건 안 믿건, 그 언어에 기대서 공적인 공간에서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한 교과서의 이데올로기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교과서의 규범이 우리들의 ‘믿음’의 차원이 아니라 ‘행동’의 차원에서 작동한다는 것은 대중들의 말과 주장을 받아들일 때 평면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2PM의 재범이 한국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토론이 대표적인 예이다.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쫓겨난 것을 한국 사회의 못 말리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광풍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맞는 말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내면을 들여다보자. 정말로 그에게 애국주의/민족주의적 언어로 철퇴를 가하고 있는 사람들이 애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믿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들은 그들이 ‘분노’를 풀어낼 수 있는 ‘정치적으로 정당한 언어’가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밖에 없는 사람들인가? 만약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고 한다면 그들은 ‘애국주의’의 언어로 그들의 분노를 표현한 것이지 결코 애국주의‘자’이거나 민족주의‘자’가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비판은 좀 더 복잡해져야한다. 그들을 광신적인 애국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과녁을 빗나간 비판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믿건 믿지 않건 간에’ 그들의 언어는 어디서 만들어져서 어떻게 그들의 언어 목록에 들어갔는가이다. 또한 그들 역시 그 언어로 자신들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전략적으로 힘이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파악하고 있다면 우리 사회에서 왜 애국주의나 민족주의의 언어가 가장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정당한 언어로 먹히며, 그것을 지지하는 제도와 장치는 무엇인가를 판단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것이 학교와 교과서이고 언론이다. 우리는 그들의 (존재하지도 않는) 이데올로기가 틀렸다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분노를 다르게 표현하는 다른 정치적 언어가 그들의 언어목록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영웅인가?

 

폭력에 대한 규범적 비판을 넘어서 이 영화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읽히는가를 본 학생들이 있다. 이 학생들은 이 영화의 뼈대를 이루는 ‘독재-거짓, 민주주의-진실’이라는 이분법에 대해 비판하며 그 신화 자체의 효과를 의문에 삼는다. 이 영화에서 브이는 자신이 거짓에 맞서고 진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 ‘거짓’만 세뇌이고 ‘진실’은 세뇌가 아닌 것인가? 거짓도 정치적 주장이며, 진실도 정치적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독재 및 파시즘은 나쁜 것이고 자유민주주의가 최고의 정책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이 거짓을 폭로한다고 하여 그 자체로 힘을 가지는 것처럼 말을 하는 것은 기만이다. 진실이 거짓을 이기려면 거짓을 능가하는 힘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진실을 밝혀내는 브이가 ‘영웅’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이처럼 독재에 대한 반대도 민주주의도, 그리고 위기에 처한 개개인을 구원하는 것도 죄다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영웅이 하는 것이라면 영웅이 사라지고 난 다음 그 구원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 학생은 이에 대해서 냉소적인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영화의 결말 이후를 그려서 구원에 대한 영웅주의 서사가 가진 맹점을 예리하게 짚어내었다. 이 학생에 따르면 이 엔딩 자막이 올라간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다소 긴 글이지만 그대로 인용해 보자.

 

1. 11월 5일 오전, 혁명의 완성으로 시민들은 환호한다. 뒤 이어 정부의 항복, 대법관의 죽음등이 알려진다. 세상은 축제.

2. 그러나 에비라는 여자가 TV방송국에 출연해 V와 자신의 로멘스, V의 정체 V의 계획, 그리고 V의 죽음등을 알리며 정말 그리운 V 잊지못할 거예요~ 하며 눈물을 쏟는다.

3. 세상은 슬픔에 휩싸이고 V의 시신을 찾기 위해 의사당 수색이 시작된다. V의 시신을 찾 든 말 든, V의 장례위원회가 설치되고 ‘국장’이나 ‘세계장’이 치러진다.

4. 한 편, 혁명 후 몇 일, 몇 주가 지나면서 독재정부 이후의 세상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세상은 어느때보다 시끄럽다. 하지만 독재정부를 대체할 정부조직이나 권력을 준비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독재정부가 지녔던 행정조직과 경찰력, 군대는 질서유지를 명목으로 근간이 보존되어 과도정부를 수립한다. 물론, 과도정부는 ‘민정이양’을 약속.

5. 이제 장난감 상점에가도 V가면이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TV에서는 V를 소재로 한 영화, 만화, 다큐멘터리, 드라마, 뉴스가 연일 계속된다. 한 급진주의자는 V를 신성화하며 ‘V교’를 만들어 신도모집에 나서고, V의 이념을 정치적으로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정당, 시민단체가 우후죽순 생겨나 에비 영입에 공을 들인다. 에비라는 여자는 자의든 타의든 어쩔 수 없이 정치계에 데뷔한다.

6. 국민들의 극심한 시위와 요구로 정국은 계속 혼란스럽고, 과도정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이전 시대의 분노를 경찰과, 군대, 정부를 향해 폭발시킨다. 정부관료, 경찰, 군인들에 대한 린치와 감금, 폭행, 구타가 일상적으로 일어난다.

7. 에비를 위시한 V파는 시민들에게 자제를 촉구하고, 개헌과 선거를 즉각 실시하라고 과도정부에 요구한다. 아무 힘 없는 과도정부는 이를 수용하고, 직접민주적 요소를 강화한 헌법이 국민투표로 통과되고, 새롭게 실시된 총선에서 V파가 전체의석의 90%이상을 차지해 정부를 구성한다. 신임총리로는 에비가 선출된다.

8. 신정부는 국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로 출발하지만 아마추어적인 정국운영으로 국내혼란을 잠식시키지 못한다. 신정부는 출범 몇 달만에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지고, 혁명 이후 숨죽여 있던 ‘구 독재파’ 출신 사람들은 V와 에비, 신정부가 나라를 망쳐놓았다며 이전 ‘절대적인 질서’ 아래의 시대가 그립다고 세력을 규합해 신정부를 규탄한다.

 

이야기를 더 쓸 수 있지만 ‘머리가 아파서’ 그만둔다면서 이 학생은 4.19 이후에 박정희가 나오고 6.29 이후에 노태우가 나온 것을 제작자가 안다면 결코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게다가 이렇게 영웅이 등장하는 영화는 그 전개방식에서 재미조차도 반감되는 경우가 많다. 영웅적 서사에서 경찰은 늘 나사가 빠진 것처럼 ‘뒷북이나 치고’ 있으며 V는 천하무적이다. 다른 한 학생은 브이가 영화에서처럼 승리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어마어마한 자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브이는 ‘그 엄청난 자본을 어디서 끌어왔을까?’라며 영웅의 이야기에 흥미진진하게 빠져든 사람들을 현실로 확 끌어낸다. 위의 시나리오를 쓴 학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천하무적 브이가 생체실험을 통해 그런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된 것이라면 ‘이런 젠장, 나도 그런 생체실험’을 당하고 싶다고 말을 한다. 힘에 의한 통치를 비판하지만 그 반대도 역시 ‘힘에 대한 예찬’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 힘은 언제나 ‘일반인 이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손가락 빨면서 ‘빰빰빠~’하고 ‘영웅이 우리를 구원해주기만’을 기다려야하기 때문이다. 이 영웅서사는 언제나 늘 식상하고 엔딩 이후를 가리면서 서둘러 끝날 수밖에 없다. 사실은 그 엔딩 이후야말로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야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영웅주의 서사가 가진 피할 수 없는 치명적인 약점은 대중은 무지몽매한 존재, 따라하고 세뇌되기만 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시민들이 나중에 각성을 해서 민주주의를 위해 항거를 하지만 까놓고 알아보면 브이가 전부이다. 시나리오를 쓴 학생은 ‘대법관도 V가 죽였고 모든 계획도 V가 꾸미고 실행’했으며 ‘국민들이 일어서게 만든 것도 V’라면서 일이 이 지경이 되면 ‘V는 이미 오남용 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V가 죽든 죽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린다고 지적한다. 브이가 모든 것이 되어버리는 흐름에서 보통사람들의 각성은 각성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만일 현실의 대중들도 이처럼 우매한 존재라면 사태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 학생에 이에 대해 상당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내놓았다. 작년 광우병 파동 때 일군의 젊은이들이 브이 포 벤데타를 패러디하여 가면을 쓰고 물총을 쏘면서 시위를 벌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 영화는 전염력이 상당히 강한 정치적 선동이라는 점이다. 이 선동에 가장 손쉽게 놀아나고 있는 ‘대중’은 누구인가? 그것은 18세 이상 성인들이다. 따라서 이 영화가 15세 이상 관람가의 판정을 받았는데 그것은 정부 당국이 대단히 잘못 판단한 것이다. 이 영화는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라는 원칙에 의해서 레벨을 정할 것 같으면 당연히 ‘18세 이상 관람불가’ 영화가 되어야한다고 이 학생은 주장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을 비틀어보자. 혹 대중이 우매한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각성을 촉구하는 이런 영화적 재현이 대중은 우매하다는 신화를 확정짓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에 대한 영화이고 독재에 반대한다는 것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는 그 순간 사실 우리는 더 심원한 지배 이데올로기, 즉 대중은 우매하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승인하고 믿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보고 ‘민주주의 만세!’를 외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우매한 사람이 되어 ‘지배자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이 아닐까? 해방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다.

 

브이, 민중들이 만든 낭만적 서사

 

그렇다면 이 영화를 대중을 우매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영웅서사로도 그 영웅서사에 대한 비판에서 나오는 냉소주의로도 빠지지 않고 읽는 방법은 없는가? 하나의 탈출구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이 영화를 대중들의 자기 해방에 대한 낭만적 서사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의 정감록이나 미륵신앙과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것을 대중들의 낭만적 서사로 바라보게 되면 무엇보다 이 영화의 화자가 바뀐다. 그 화자는 브이를 꿈꾸는 사람들 즉 대중들 자신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약하고 힘없는 대중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구세주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여기서 입증되는 것은 대중들의 ‘꿈꾸는 능력’이다. 대중들에게 자신들의 미래를 꿈꾸고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낭만적 서사가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그 낭만적 서사의 가장 강한 힘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다.그래서 아무리 억압이 거세고 통제가 극심하다고 하더라도 대중들은 다른 세계를 상상하고 꿈꿀 수 있다. 게다가 자신들의 그 능력을 우매함으로 감출 줄 아는 지적 능력도 있다. 이 꿈꾸는 능력은 낭만적 서사를 거짓으로 폭로하며 현실이라는 냉소주의에 무력하게 빠지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대중들에게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렇게 본다면 브이의 출현은 대중들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자신의 구세주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낭만적 서사의 반복을 통하여 구세주를 준비한 셈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성서에 예수가 ‘늘 깨어 준비하라’고 한 말의 뜻도 예수가 도둑처럼 갑자기 재림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 아니라 재림은 대중들에 의해서 준비되어야한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 되는 셈이다. 대중들의 영웅서사, 그 자체의 주어가 대중이 되면서 영웅이 대중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대중이 영웅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정확하게 역전된다. 브이가 대중을 선동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브이를 선동한 셈이다.

그렇다면 대중들은 어디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영웅을 준비하는가? 한 학생은 이것을 브이가 왜 가면을 쓰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에서 찾는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왜 하필이면 11월 5일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로소 출발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이다. 한 무모한 사람의 억압에 대한 도전이 역사에서 사라진 듯이 보였으나 그것이 기억되고 그것에 사람들이 감응하면서 이것이 기억의 정치를 통하여 역사를 가로질러 너와 내가 같은 공동의 운명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만든다. 기억하는 한, 그것은 누군가에게 감응되고, 감응이 되는 한 그것은 공감이 되면서 역사와 공간을 초월하여 공동의 운명에 대한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다.

기억의 정치를 통해 상상의 공동체를 만드는 가장 걸작으로는 인도의 소설가이자 사회활동가인 아롱다티 로이가 ‘9월이여 오라’를 꼽을 수 있다. 그녀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는 것을 애도하면서 그 날에 죽은 다른 이들을 불러낸다. 9월 11일은 미국에 의해서 칠레의 아얀테 정권이 붕괴한 날이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1922년에는 영국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신탁통치를 발표하여 현재 중동의 비극의 씨앗을 뿌린 날이다. 또한 1990년 9월 11일에는 부시의 아버지 부시 1세가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하기로 양원 합동회의에서 천명하기도 하였다.

아롱다티 로이의 이런 작업이야말로 영화에서 브이가 말하는 ‘아이디어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대사가 의미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따라서 브이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을 통해 이것은 ‘브이’라는 한 개인의 영웅 이야기가 아니라 500년 전의 ‘브이’를 찾아내서 불러일으키고 2040년의 ‘브이’를 준비하고 만들어낸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수많은 ‘브이’의 가면을 쓴 대중들의 이야기로 역전되는 것이다. 이것을 한 학생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두려움과 방관 등이 겉모습일지라도 우리에겐 V가 잠재되어있고 또 잠재된 것 안에 잠재된 것을 또 불러일으키면 V보다 더 멋진 V가 될 것이다. V가 증오를 넘었던 것처럼 또다시 새로운 우리를 만날 것이 기대된다. 우리 모두다 잠재되어 있는 V이다. 브이 포 빅토리”

 

중요한 것은 냉소주의에 따른 낭만적 서사의 파괴가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꿈꾸며 새로운 이야기를 할 힘이 있는가이다. 이야기를 할 힘이 있는 한 이야기가 우리를 밀어간다. 역사의 주체는 영웅도, 대중도 아니라 이야기, 그 자체이다.

 

작성일 : 2009. 9. 7

작성자 : 엄기호

 

8월 29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글에 따르면 지방의 한 국립의과대학에서 전공의들이 지도교수의 성매매 비용을 댄다고 허리가 휠 지경이라고 한다. 이 교수는 수술이 있고 난 다음이면 당연히 단란주점에 전공의들과 함께 나서 놀고 난 다음 혼자서 2차(성매매)를 가면서도 그 비용을 모두 제자들에게 전가하였다고 한다. 지방에 출장을 가서도 성매매를 하면서 그 비용을 전공의들에게 전가하였으며, 20만원에 불과한 주사제를 환자들에게 기백만원을 받고 강매하였으며 그 비용을 걷는 것도 역시 제자들에게 시켰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교수는 자신이 그 분야의 가장 좋은 실력자이기 때문에 결코 잘릴 염려가 없으며 잘려봤자 다른데서 모셔갈 것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고 오히려 큰소리라고 한다.

이 사람의 사례와 말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 혹은 신보수주의가 가진 결정적인 도착성을 발견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가족의 가치를 대단히 중요시한다. 이들이 동성애나 낙태, 여성운동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혐오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다. 역시 8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미국의 한 목사가 오바마 대통령이 죽어서 지옥에 가기를 기도한다고 말하여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오바마가 낙태를 지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하느님도 오바마를 미워한다고 확신하였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위 의과대학 교수의 경우에도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혐오와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이명박 대통령이 물의를 일으켰던 발언이라던가 성폭력을 저지른 교사들에 대한 낮은 징계, 국회의원들의 잦은 성희롱성 발언에도 둔감하기 짝이 없는 현실등은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미국이나 영국 등에서 가정을 지키는 것을 가장 신성시하면서 성장해 온 ‘사회적 보수주의’ 혹은 ‘도덕적 신자유주의’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한국의 신자유주의는 반도덕적 보수주의에 더 가까운 편이다. 돈이 되고 장사가 되는 한 그 개인의 윤리적 문제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뻔뻔하게 주장하고 그것을 용인하는 것이 한국의 신자유주의 혹은 사회적 보수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보수주의에서 윤리와 도덕을 빼고 나면 그들의 정당성의 근거에는 무엇이 남는 것인가?

원래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국가의 개입을 혐오하는 극단적인 자유주의 사상이었다. 총기는 말할 것도 없고 포르노 등에 대한 규제에도 적극적으로 반대하며 국가가 개인의 사생활에 개입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반대한다. 그런데 이 신자유주의자들이 국가의 개입이 철회되는 것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이 몇 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동성애와 낙태의 문제이다. 얼핏 생각하면 성정체성이나 낙태 역시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서 자유주의자라고 하면 너그러워야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이유가 있지만 간략하게 말하면 미국에서 신자유주의가 성장하는 동안 가장 강력하게 결합한 것이 바로 극우 개신교 근본주의였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사상의 결합에서 접착제 구실을 하게 된 것이 가족이다. 국가의 개입에는 반대하지만 개인의 ‘도덕적 타락’에 반대하기 위해서 이들이 내세우게 된 근거가 ‘가족’이며 이 ‘가족’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다하는 개인의 도덕적 책무를 강조하는 것이 앵글로 색슨식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이 클린턴 스캔들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국가의 개입을 저지하고 가부장의 주권을 강력하게 하며 가족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절대화하여 결국은 모든 사회적 책무를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동성애와 여성운동에 대한 비판과 공격의 가장 큰 무기였다. 특히 미국에서 신보수주의가 등장할 무렵 ‘우연하게도’ HIV/AIDS의 확산이 시작되었다. 애초에 에이즈가 게이돌림병으로 불리우게 된 것도 그것이 그들의 무분별한 성적 방종에 의해서 확산되었기 때문에 하늘의 천벌이라는 의식이 강하였다. 동성애와 여성운동에 대한 이런 공격에 대해 동성애 커뮤니티와 여성운동 내부에서도 반동적 성찰의 흐름이 나타났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뉴욕타임즈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한 앤드류 슐리반과 같은 경우이다.

그는 자신이 HIV 양성반응자임을 고백하면서 에이즈의 확산이 동성애자 커뮤니티가 성장할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쉽게 말해서 이전까지 동성애자 커뮤니티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을 질줄 아는 그런 성숙한 인간이 되지 못하고 그저 즐기기나하는 어린애에 불과하였다고 질책하며 동성애자 내부 커뮤니티를 향하여 ‘성장하라’고 거듭 촉구한다. 그러면서 그는 에이즈 약값이 너무 비싸다는 항의에 대해서도 유아적인 발상이라고 치부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 에이즈와 관련된 70%이상의 연구는 기업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곧 성장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언제까지 어린이들처럼 칭얼거리기만 할 것이냐고 타박을 놓으며 그가 내놓은 해답은 바로 ‘성장하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박은 더글라스 클림프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역시 오랫동안 에이즈와 관련된 활동을 해 온 동성애 활동가로서 슐리반의 ‘성장하라’는 구호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 중의 하나는 미국에서 에이즈가 확산되는 것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하고 그것을 전국가적인 이슈로 만든 것이 다름 아닌 동성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즉 이성애자들이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안이하게 대응하고 있을 때 HIV/AIDS가 동성애자들의 문제만이 아니라 모든 이의 문제라는 사실을 알리고 그것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교육을 담당하였던 것은 ‘성장하지 못한’ 이성애자들이 아니라 ‘성장한’ 동성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또한 다른 한편에서 같이 생활을 영위하던 동성애자들이 사망해갈 때 그들을 돌보고 협력적으로 대처하며 공동체를 이룬 것도 역시 동성애자들이다. 사람을 위로하고 돌보는 것, 이것보다 더 성숙하고 공동체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반문이다.

이 둘의 논쟁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진보적인 성정치 운동에 대한 도덕적/윤리적 비난에 대한 대처법이 지나치게 방어적이다. 예를 들면 동성애자들의 방종한 성생활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우리가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지.’라는 반동적 수용이거나 아니면 ‘우리에게 그것말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는가?’라는 식의 옹색한 반박이다. 그들의 도덕 패러다임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 안에서는 승산이 없다. 오히려 이 안에서 우리는 계속 찌질되면서 방어적으로 항변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위의 논쟁에서 클림프로부터 우리가 배워야하는 것은 ‘도덕’과 ‘윤리’의 의미를 누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하는 점이야말로 진정한 전투의 영역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말하는 도덕과 반도덕, 윤리와 반윤리, 성숙과 미성숙의 대립전선에서 고군분투할 것이 아니라 그 도덕과 반도덕, 성숙과 비성숙의 대립전선을 우리가 그어야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가 드러내야하는 것은 도덕의 폐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도덕의 패륜성이다. 이것은 이미 신자유주의 국가 전반적으로 드러난 사실이다. 예를 들어 부시 행정부에서 에이즈 원조와 관련된 정책 전반을 맡고 있었던 토바이어스는 ‘절제, 믿음, 안되면 콘돔’이라는 유명한 정책을 펼친 인간이다. 즉 될 수 있는 한 섹스를 하지 말고, 하더라도 성실하게 한 사람하고만 할 것이며, 그래도 정 안되면 콘돔을 사용하라는 것이 이 정책의 핵심이다. 이 정책을 펼치는 과정에서 토바이어스는 몇몇 특정한 교회단체나 보수적 단체들에게만 지원을 약속하고 해당 국가에도 이 원칙을 적용할 것을 강요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토바이어스가 몇 년 전 워싱턴을 뒤흔들었던 고급매매춘의 포주의 고객 장부에 이름을 올라가 있어 결국 사임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이명박의 발언이라던가, 여배우들에 대한 성접대 강요 등등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자들’에 의해 끊이지 않는 추문들도 사실은 이런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도덕을 이야기하는 신자유주의는 사실상 패륜이다. 마치 이것은 공산당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족을 폐지하려고 한다는 공격에 시달리고 있다면서 ‘맞다. 우리가 폐지하려고 하는 것은 가족이다. 단 부르주아적적 가족’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 문장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가족을 반대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적적 가족 자체가 이미 반가족적이라는 점을 꼬집은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즉 부르주아적적 가족 내부에는 가족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성립할 수 없으며, 그 안에는 온갖 기만과 거짓, 그리고 착취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도덕적 신자유주의의 폐륜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찬가지의 지적을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도덕 안에는 도덕이 없다. 그 안에는 폐륜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성정치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적 도덕은 폐륜으로서 거부되어야하는 것이지 결코 우리가 수용해야하는 성찰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같은 선상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하는 것은 성정치적 의제들의 신자유주의화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지적하였듯이 모든 것은 선택의 문제이자 소비의 문제로 돌려버린 신자유주의적 삶의 양식은 이미 동성애자들-특히 남성동성애자들-에게는 너무 익숙하다. 해방은 시공간적으로 게토화되어 그 안에서 마음껏 즐기면서 서로서로를 소비한다. 이런 점을 이미 간파한 싱가폴은 나라가 앞장서서 ‘국가수립일’에 게이파티를 열어주고 있다. 우스운 것은 이 나라에는 아직까지 소도미법이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사회적 주체로는 인정해줄 수 없지만 시장적/소비적 주체로서의 동성애자-특히 돈 많고 자손이 없어서 돈을 물려줄 필요도 없으며, 시장에서 언제든 자신이 원하는 친밀성과 ‘스타일’을 살 수 있는-들을 대환영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많은 동성애들이 저항적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들은 싱가폴의 이런 정책을 환영하며 즐기고 있다. 이런 점에서 슐리반의 ‘성장하라’는 요구는 동성애자들의 무분별한 반도덕적 행위들에 붙여야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무엇으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정치적으로 ‘각성하라’는 구호로 전환되어야할 것이다.

여성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에 대해서 가장 잘 꼬집은 논문이 두 편이 있다. 하나는 성매매하는 십대여성들의 삶을 다룬 민가영의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주부주체들의 신자유주의화에 대해 다룬 박혜경의 논문이다. 아래는 내 책에서도 소개한 이 두 논문의 요지에 대한 간력한 설명이다. 지금까지 가사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은 여성운동의 가장 중심적인 정치적 요구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체제가 도입되면서 주부는 더 이상 ‘솥뚜껑 운전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전문적 직업인’으로 적극적으로 사회적 평가를 받게 되었다. 운동을 통해 정치적 요구가 달성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의해 체제내로 포섭이 되어버린 셈이다.

신자유주의에서 주부는 가정의 경영자로 적극적으로 평가된다. 주부는 남편의 감정치료사이며, 자녀들의 생애 기획을 맡은 매니저이며, 가족의 금융을 굴리는 금융관리사이다. 이에 따라 가족 자체가 경영의 대상이 되며 하나의 작은 기업처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고 최대화하는 단위이다. 이런 작은 기업의 CEO가 바로 가정 주부인 셈이다. 이러면서 벌어진 가장 아이러니한 일은 중산층 가정에서는 전통적으로 주부가 하던 일이던 가사노동 중에서 여성이 하기 싫은 청소나 식사 준비와 같은 것은 파출부들에게 맡겨졌다는 점이다. 대신 주부들은 보다 더 ‘전문적인 일’인 자녀 교육 지원과 재테크, 재산 증식에 몰두한다. 여기에 본문에서 등장하는 아이의 사회적 관계를 책임지고 관리하고 학업 전반을 책임지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주부는 이제 가사노동을 수행하지 않는 신자유주의화한 ‘전업주부’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전일제로 일을 하며 가사노동까지 떠맡아야하는 ‘여성노동자’만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신자유주의에 의해 재편된 ‘전업 주부’는 과거에 여성운동이 해방을 부르짖던 그 ‘전업 주부’와는 완전히 성격을 달리하며 여성운동의 위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한편 신자유주의 시대에 하층의 아이들이 어떻게 미래에 대한 꿈을 포기하고 현재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유일하게 상품가치가 있는 몸을 팔며 살아가는가를 잘 그린 글은 민가영의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논문인 ‘신자유주의 시대 신빈곤층 십대 여성의 주체에 대한 연구’이다. 아쉽게도 이 논문 역시 아직 책으로 출판되어 않았다. 이 논문에서 민가영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상실한 아이들이 어떻게 비유예의 문화에 빠져들게 되는지를 그림처럼 잘 그리고 있다.

중산층들이 학력자본을 쌓는 학교는 기본적으로 미래를 위해 현재를 유보하는 훈육과 규율의 공간이다. 그러나 저소득층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아무리 자기들이 개겨봤자 자신들에게 돌아올 자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미 한국의 교육은 계층이동가능성을 상실하였다. 아이들은 학교라는 공간을 거부한다. 가족 역시 마찬가지이다. 저소득층의 가족들은 보살핌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오히려 그 공간에서는 양부나 주변사람들에 의한 성폭력이 빈번한 위험한 공간이다. 학교와 가정이라는 위험하고 따분해진 공간 대신에 아이들은 자기의 눈앞에서 그 결과가 즉각적으로 펼쳐지는 삶을 선호하게 된다.

학교와 가족을 떠난 아이들에게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은 친구와 언니들로 엮여진 관계망이다.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는 끊임없이 연결되는 관계망이 이들의 세계이다. 아이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이 사방에 널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이것이 ‘기존의 제도와 질서를 무시할 수 있는 잠정적 힘’으로 작동한다. 따라서 이 관계망을 통한 이들의 이동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고 확장가능하다. 이 망속에서 누구를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이들의 다음 행보는 달라진다. 삶의 다음 다음 순간은 전적으로 우연에 열려있지만 이 아이들의 적응력 역시 대단히 높다.

이 이탈과 적응의 과정에서 다수의 아이들은 자신의 몸이 즉각적인 자본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돈으로 바꾸며 살아간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더 몸을 팔아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이들은 스스로를 소비적 주체로 형성한다. 이 과정을 통해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에 의해 학교와 가정 밖으로 내쳐진 아이들이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학습하고 신자유주의적 개인으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몸도 팔릴만한 몸과 팔리지 않는 몸으로 나뉘며 팔릴 수 없는 못난 몸을 가진 아이들이 겪는 고통과 차별, 그리고 배제는 그 개인의 탓이 되어버린다. 다시 한번 신자유주의는 자신이 버린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마저도 승리를 구가하게 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걱정해야하는 것은 사회적 보수주의와 결합한 신자유주의에 의해 공격받는 성정치가 아니라 그 신자유주의화하고 있는 성정치이다.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어떻게 억압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해방하고 있는가를 문제삼아야한다. 한편에서는 우리를 정상가족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부도덕적 존재로 몰아붙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생활양식 전부를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몰아넣고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가 성을 기반으로하여 사람들에게 겨루고 있는 양날의 칼이다. 우리를 특정한 생활양식으로 몰아넣은 넣고는 그 방식을 도덕적으로 질타하고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해방하고 있는 방식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적 생활양식과 도덕(혹은 폐륜), 그 양쪽 모두로부터 탈출하여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우리는 그 이중의 덫에 걸려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작성일 : 2009. 8. 16

작성자 : 엄기호

 

악마도 능력이 있어야 프라다를 입는다

 

지난달 교육관련 세미나에 참석차 홍콩을 다녀올 때의 일이다. 금요일에 출발하는 비행기라서 명품 쇼핑 관광을 떠나는 많은 젊은 여성들이 눈에 띠었다. 내 뒤에서 체크인을 기다리던 두 명의 아가씨들도 이번에 홍콩에 가서 무엇을 살 것인가에 대해서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어디에 가면 무엇을 어떻게 살 수 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자신들의 진정한 경쟁자는 한국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들이 타고 갈 비행기보다 30분 먼저 도착하는 일본 사람들이기 때문에 짐을 찾자마자 쇼핑몰로 날아가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홍콩을 서른 번도 넘게 갔다 왔지만 한 번도 그들이 이야기하는 곳에 가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세미나가 시작하기 전에 그들이 말하는 루트를 한 번 따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홍콩에 도착한 다음 인터넷으로 검색을 하였더니 놀랍게도 명품 쇼핑을 위한 카페가 따로 있었다. 그곳에서 세일에 대한 정보와 물건 고르는 법, 그리고 그렇게 고른 물건을 디카로 찍어 올리는 등 대단히 활발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들이 추천하는 곳을 중심으로 해서 하루 정도 명품 쇼핑 순례를 해 보았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하나의 쇼핑센터이고 일 년 내내 세일이 끊이지 않는 곳이 홍콩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쇼핑에는 대단한 체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과 쉴 때도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쇼핑센터에서는 쉴 때도 어디 주저앉을 수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 들어가 뭔가를 마시면서 쉬어야했다.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이번에 산 물건으로 자신이 얼마를 절약하였고 얼마나 현명한 선택이었는지, 그리고 다음 목적지가 어디인지 전략을 짠다고 바빴다. 보통 에너지와 체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생들과 소비자본주의와 그 속에서의 자신들의 스타일 만들기라는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대체한 소비자본주의 시대에 학생들은 어떻게 소비의 덫에 빠져있고, 또 어떻게 빠져나오고 있는지, 또한 스타일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정체성을 드러내는 정치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려는 목적이었다. 학생들에게 ‘섹스 앤 더 시티’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고 자신들의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의 스타일 전략을 살펴보게 하였다.

 

삶에서 겉도는 도덕적 언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이 명품에 얽힌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명품과 관련된 잡지사에서 일하며 명품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치열한 과정의 뒤편에서 일어나는 권력과 암투를 목격한다. ‘섹스 앤 더 시티’는 자유와 스타일의 도시라고 하는 뉴욕에서 살고 있는 4명의 여성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네 명의 주인공들은 모두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성들로 섹스와 쇼핑 등 뉴욕의 화려하고 일회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숨김없이 욕망하고 즐기며 그 안에서 각자의 사랑을 펼쳐나간다. 두 영화 모두에서 ‘헐리우드 영화’식의 순박하고 인간적인 것을 찬양하는 듯 하는 결론만 제외하면 이 영화는 소비가 얼마나 매혹적이고 힘이 강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30대 주부가 시어머니와 대판 싸우고 나서 화가 나 있을 때 남편이 명품 백을 사주자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신문기사도 있다. 명품은 이처럼 사람의 마음도 살 수 있으며 이 영화들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수업이라는 공간에서는 ‘당연하게도’ 다수의 학생들은 명품 소비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나는 대학이건 대안학교이건 어디에서나 수업을 할 때마다 대단히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도덕적 비판’의 문제였다. 학생들은 무엇에 대해서나 일단 ‘도덕적 비판’을 먼저 하는 것이 무의식적으로 습관이 되어 있는 듯하였다. 늘 사고보다는 정답을 강요받은 결과인지 습관적으로 상투적인 ‘도덕적 비판’에 머물러 버리곤 하였다.

명품소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명품을 소비하는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등한시하고 껍데기만 중요시하는 소비자본주의의 산물이며, 자기 주체성이 결여된 것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은 명품을 걸치건 보세 상품을 거치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창출하고 그것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소비에서도 자기 주체성을 가져할 것이고 소비자본주의의 상술에 놀아나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다수의 학생들은 이런 주체성을 갖기 위해서 자신은 지금 어떤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설명해내지 못하였다. 자신들이 비판하고 있는 소비자본주의에 이미 자신들이 살면서 끊임없이 타협하고 협상하고 있음을, 그리하여 한 학생의 표현대로 하면 ‘정신분열증적인 상황’에 처해 있음을 성찰해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학생은 매일 거울 앞에 서 있는 자신의 고통을 서술하였다. ‘진정한 가치는 내면에 있는 것’이라고 속삭이면서도 거울 앞에서는 ‘이 옷은 이미 유행이 지난 옷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한다. 그래서 이 학생은 거리를 지나다닐 때 ‘진열대에 걸린 스키니 진이 "어이 이봐, 나를 사야만 친구들과 이야기 할 수 있어" 라고 말하는 거 같다’고 고백한다. 군대에서는 양말 7개, 속옷 7개, 전투복 3벌로 2년을 버텼는데 ‘학교를 복학하고 나서는 내일은 뭘 입어야 할지가 걱정이고, 새 옷과 신발을 사고 싶은 욕구에 늘 시달’리면서 계절이 바뀌면 옷장이 넘쳐나게 옷을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자신은 명품을 바라는 것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준은 갖추어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 이유는 비싼 옷이 탐나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같은 감각을 소유하고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유행은 살아있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기 때문에 대세에 적응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도태이다. 스타일은 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내가 너와 다르지 않다는 것, 곧 같은 무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과 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 얼핏 보면 이율배반적인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드러내야하는 것이 소비이다. 이 양자 사이에서 갇혀 오고가도 못하며 내면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대세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럽다고 이 학생은 고백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학생이 이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절감하였다는 고백이다. 몇 번이고 이 이야기를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상투적이고 도덕적인 언어 속에서는 자신을 ‘숨길 수’가 있었는데 수업이 반복이 되면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너무 무모하고 아픈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차라리 몰랐다면 속 편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속물됨이라던가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이 ‘그것을 부정하는 얕은 지식의 조합으로 쓰는 글들’보다는 더 예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학생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이 소비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이 상투적인 언어이다. 이런 도덕적 언어들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는데 한참을 못 미치는 언어들이다. 삶에서 겉돌고 성찰에서 헛도는 언어들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언어들이 학생들의 사고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다. 학생들에게 사유를 촉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상투적 언어들의 가진 힘을 떨치고 나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 학생의 말처럼 아픈 고백이 될 수는 있겠지만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가리지 않고 돌아볼 수 있는 힘이 된다.

 

버리기 위해 소비한다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적 비판을 좀 더 밀고 나가보기로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도덕적 수준이기는 하지만 명품 소비를 통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창출하는 것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이미 학생들도 잘 알고 있다. 끊임없는 소비의 순환 고리에 빠져서 주체성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스타일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명품과 스타일이 자신을 먹어버린다는 점이다. 또한 누구나 다 명품을 따라하게 되면서 ‘구별짓기’의 가치가 사라지게 되고 또다른 명품을 찾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명품의 역설’현상이 왜 일어나는가를 꼼꼼하게 살펴본 한 학생에게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고 다른 학생들과 토론을 붙여보았다.

이 학생에 따르면 우리는 소비를 통해서 ‘다른 존재’임을 부각시키려고 하지만 동시에 ‘너와 같은 트랜드’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이 학생은 ‘다른 사람과 달라 보이기 위해서 소비하는 명품’이 어떻게 ‘남들과 아무런 차별성이 없는 대중’으로 회귀해 버리는가를 날카롭게 지적하였다. 이 학생의 말에 따르면 ‘명품의 획일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진짜이건, 짝퉁이건’ 길거리에 다니면 거의 모두가 ‘프라다’,‘구찌’를 들고 다닌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갖고 있음으로 “명품 아닌 명품”이 되어버린 셈이다. 따라서 명품이 자신의 특별함을 강조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과의 어울리기 위해, 소외되지 않기 위해 ‘MUST HAVE 아이템’이 되어 버렸다고 비판한다. 모두가 똑같은 ‘버섯머리에, 뿔테안경에, 스키니 진’을 입고 있다. 게다가 브랜드가 없으면 자신감도 없어지는 것이며, 이 때문에 명품이 똑같아지는 순간 자본주의는 새로운 명품을 탄생시키며 사람들을 영원히 그 굴레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하였다.

다른 한 학생은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는 쓰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것’이라며 자신의 언니의 사례를 이야기하였다. 자신의 언니는 지독한 쇼퍼홀릭인데 한정판 가방을 사기 위해 자신을 깨워서 새벽 6시에 매장 앞에 줄을 세우기도 하였다고 한다. 언니는 ‘사람들에게 있어 보이기 위해’ 명품을 소비하는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즉 쓰기 위해서 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소비를 하기 때문에 늘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야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버리기 위해서 소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놀랍게도 이 학생은 명품은 일회용품이라고 단언하였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티슈나 한 번 쓰고 옷장으로 직행하는 명품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 년을 입어도 십 년 같고, 십 년을 입어도 일 년 같은’ 그럼 오래도록 품위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명품은 사기라는 것이 이 학생의 놀라운 결론이었다.

이런 이야기에서 우리가 소비 자본주의의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시선’ 때문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소비하는 패턴을 유지하는 한 이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없다. 게다가 자신을 남과 다르게 드러내기 위해서 소비를 한다고 하지만 사실 명품 소비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과 내가 같은 경향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 학생은 이것을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이름 붙였다.

명품이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하더라도 그렇다. 이 학생에 따르면 우리는 텔레비전을 볼때조차 어떤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즐기는 것이 아니라 소비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내용을 알지 못하면 친구들 간의 대화에 끼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방송을 보지 않았다면 ‘공감대가 전혀 쌓이지 않고 그 어떠한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에 ‘웃어야 할 때 함께 웃지도 못하면서’ 사회에서 탈락하게 된다. 따라서 ‘그 방송프로그램을 시청하는데 시간을 소비하지 않으면’ 상호인정이라는 이 ‘소리 없는 전쟁’에서 피해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 학생의 이야기는 소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확장시켜주었다. 우리는 상품에 대한 소비에서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제는 그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기 위해서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소비해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타인의 시선을 소비한다는 것에는 쉽게 수긍하였지만 우리가 소비를 위해 시간과 공간에도 대단히 많은 품을 들이고 소비해야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이었다. 눈에 보이는 소비는 빙산의 일각이며 그 밑에는 거대한 삶에 대한 소비가 있는 것이다.

 

내가 소비하는 것은 나 자신

 

우리가 물건 하나를 소비하기 위해서 어떻게 삶을 소비하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스타벅스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셋방살이를 하고 깁밥 한 줄을 먹어가면서도 반드시 커피는 스타벅스에서 마신다고 하는 신문기사를 가지고 토론하였다. 스타벅스에서 우리는 무엇을 소비하는가? 다른 커피와는 다른 향을 가진 질 좋은 커피. 그 곳을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과의 공감대. 이 공감대에는 전문직에 종사하고 세련되었다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스타벅스 매장의 분위기와 공간을 소비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편하기는 푹신한 소파가 있는 옛날식 다방이 편하지만 이런 곳을 이용한다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미지, 즉 타인의 시선을 소비하기 위해 스타벅스를 이용한다. 결국 종착점은 이미지이다. 소비자본주의가 팔아먹고 있는 것은 이미지이며, 우리는 모두가 다 이 이미지의 소비자들인 셈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기로 하였다. 우리는 왜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가? 그 이미지를 통해서 나는 내 자신에 대해서 어떤 만족을 얻는가?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는 누구의 이미지인가? 한국의 보통 주부들이 가진 낭만 중의 하나가 주말에 남편이 모는 차를 끌고 대형마트에 가서 아이들을 카트에 태우고 쇼핑하는 것이다. 이들 주부는 무엇을 소비하는가? 바로 단란한 가족의 운영자로서의 주부라고 하는,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이미지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 즉 자기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다. 우리는 스타벅스건 대현마트건 소비의 현장에서 두 가지의 자아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물건을 소비하며 흡족해하는 자기 자신과 그 흡족해 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는 자기 자신. 이 나르시시즘에 젖어 있는 자기가 소비하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합리성이다. 정체성은 내가 같은 것을 소비하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정체성이다. 합리성을 소비한다는 것은 이런 나의 소비가 낭비나 궁상맞은 것은 아니라 대단히 합리적인 행위라는 스스로의 합리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며 소비하는 ‘나’가 두 명이라는 점은 학생들에게 좋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학생들은 경험적으로 자신들이 나르시시즘적 소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였으며 타인의 시선만큼이나 자기 자신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특히 우리가 소비의 합리성을 소비한다는 점과 그 합리성이 정체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크게 공감하였다. 예를 들어 태국과 같은 곳에 여행을 가서 수천 바트(십여만원에 해당하는 돈)를 하는 5성급 호텔에 머물면서도 길거리에서 물건을 살 때는 10바트를 깍기 위해 악착같이 구는 모습이 바로 소비가 합리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라는 한 예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명품 쇼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위에서 말한 홍콩 명품 쇼핑 카페에 가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합리적 전략’을 이야기하고 서로의 구매 상품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 칭찬의 내용은 대부분 비슷한 것이다. 어떻게 이 가격에 이런 상품을 살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즉 구매한 사람의 합리성에 대한 경탄이다.

한 학생은 이런 합리성을 여성들이 싣는 힐에서 찾아내었다. 그녀는 ‘힐을 신은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고개도 당당해지고 허리도 꼿꼿하게 세워지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을 통해 묘한 희열감’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남자들이 보기에는 ‘안쓰러워 보이지만’ 이런 화려함과 황홀함이란 스타일을 고수하기 위해 발의 통증정도는 고사할 수 있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통증을 느끼는 나 이외에 그 통증을 고사할 정도로 스타일을 고수하고 즐기는 ‘나’가 있으며, 그 ‘또 다른 나’의 합리성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자여. 7,8,9 센티의 아찔한 기둥을 달고 달아오른 거리를 걸어라.” 이 학생이 좋아하는 블로거가 쇼윈도에 디스플레이 된 화려한 힐 사진과 함께 적어둔 멘트라고 한다.

 

그러나 명품만 있고 스타일은 없다

 

이를 통해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소비는 도덕적 비판이 상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비합리적인 행위가 아니라 소비자본주의 안에서 그만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고 합리적 주체가 탄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적 비판이 소비자본주의의 주체성에 대한 비판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비합리적인 행위라고 비판하지만 행위의 당사자는 이미 자신이 충분히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초점이 어긋나게 된다. 이야기의 말미쯤 한 학생이 말을 한다. “근데요 선생님. 악마도 능력이 있어야 프라다를 입습니다.” 정답이다.

기실 이 합리성의 정체는 능력이 있는 자에게만 허용된다는 점이다. 뉴욕에 다녀온 한 학생은 섹스 앤 더 시티의 현실을 이렇게 말한다. 다음 요구사항이 충족되어야만 영화처럼 살수 있다. 무엇보다 높은 수입이 보장되는 직업. 샬롯을 제외하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간들은 다 중상류계층이다. 그리고 슬림한 몸매. 뉴욕인간들이 미친 듯이 사수하는 것이 ‘슬림한 몸매’란다. 그리고 맨하탄에 있는 아파트 주소. 그렇지 않다면 뉴욕은 ‘열심히 눈으로만 봐야하는 도시’라고 한다. 위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에게 소비자본주의는 ‘그 비싼 관세 내가며 5번가에서 쇼핑할 이유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그날 저녁 먹을 베이글 값도 달랑달랑’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학생에게 중요한 것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고 지친 날 위로해줄 스타벅스의 2달러짜리 아메리카노와 역시 2달러 짜리 베이글’이었다. 이것은 슬픔이 아니라 궁핍함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생은 그래도 뉴욕은 자유로왔다고 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그녀가 깨달은 것은 우리 사회가 소비자본주의의 미덕도 제대로 못 갖췄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옷장 문을 열고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었다. 뉴욕에서는 미니 청치마를 입고 물찬제비처럼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닐 수 있었다. 비록 명품은 아니더라도 두루두루 벼룩시장, 싼 중저가 브랜드를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었고, 또 추수감사절이후의 폭격세일기간(Thanksgiving day sale)엔 관광객마냥 비싼 명품 숍도 들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에 돌아온 후 그녀의 옷장은 두 개가 되었다고 한다. 하나는 뉴욕에서 입던 옷들. 그리고 다른 옷장에는 한국에서 입는 옷들. 당연히 미니 청치마는 뉴욕 옷장에서 썩고 있다고 한다. 그녀는 한국에서 ‘청치마를 입으면 10m 멀리서부터 남자며 여자며 아래를 쳐다보며, ‘우아.. 용감하다..’는 무언의 말이 ‘응원의 눈길과 함께’ 날아온다고 한다. 엄청난 간섭이 한국에는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스타일이, 스타일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오로지 학교 유니폼처럼 판에 박힌 듯이 맞춰 입고 나온 명품만이 허용될 뿐이다. 이게 대학만 들어가면 아이들이 모두 다 맞춰 입는다고 하는 학교 점퍼와 뭐가 다른가? 명품만 허용되고 스타일은 허용되지 않는 사회. 이것이 한국이다.

작성일 : 2009. 8. 4

작성자 : 엄기호

 

지난 학기 한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70여명의 학생 중에서 머뭇거리면서 손을 든 학생들은 열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내일이 오늘보다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었지 실제로 믿는 것은 아니었다. 한 학생은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쁘지만 않으면 그 정도로도 다행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딱 십 년 전에도 같은 질문을 했었다. IMF 경제위기가 막 터지고 난 다음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다수의 학생들이 당연히 내일이 더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10년전의 한국처럼 미래가 현재보다 좋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 대학생들은 동아시아에 중국밖에는 없다. 약 한 달 전 홍콩에서 열린 교육포럼에서 중국에서 온 50여명의 사범대학생들에게 이 질문을 한 후 한국의 학생들은 비관적으로 생각한다고 말을 하자 중국학생들은 심지어 화까지 내었다. 한국 학생들은 왜 그리 패기도 용기도 없냐고.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중국 학생들과 같은 경우에나 길을 떠나는 것은 내일을 위한 도전이 된다. 이미 경제위기 속에서 삶의 총체적인 파탄을 경험한 한국의 학생들은 길을 떠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나마 가지고 있는 것도 잃어버리는 위험스러운 도박이다. 젊은이들의 삶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불안은 예측가능하고 계획가능한 삶이라는 것을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래서 다수의 학생들은 심지어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삶을 피곤한 삶이라고 규정한다. 90년 한 때 ‘탈주의 감행’을 이야기하며 찬미되었던 유목민의 삶은 ‘피난민’의 삶으로 판명이 났다. 화려한 문화적 언사로 포장되었던 포스트모던의 실체는 신자유주의적 파탄으로 결론지어졌다. 이러한 삶의 파탄에서 학생들이 꿈꾸는 것은 소박한 삶이다. 한국에서 결혼해서 자식 낳고 알콩달콩 ‘농경민’으로 소박하게 사는 것이 학생들의 꿈이다.

이런 결과로 아이들도 오히려 요즘은 집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특히 떠나봤자 부모가 정착 자금을 대어주지 못하는 중산층 이하의 아이들이 그렇다. 10년전만 하더라도 학생들은 계층을 가리지 않고 기회가 닿으면 어서 빨리 독립하여 ‘자유’로운 삶을 찾는 것이 꿈이었다. 가족에 대해 글을 써보라고 하면 ‘지겨움’, ‘압박’, ‘숨막힘’과 같은 단어들이 거의 대다수의 학생들의 리포트를 메웠다.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랑하는 삶, 그것이 그 시대의 구호였다. 대다수의 학생들은 해외지사의 기회가 주어져 있는 회사를 선망하였다. 자유와 글로벌에 대한 욕망이 안정적인 삶에 대한 욕망을 압도하였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득 찬 지금 집을 나서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개고생’에 가깝다. 10년 전과 달리 지금은 학생들이 자기 가족에 대한 애정과 사랑, 그리고 미안함을 주저없이 표출한다. 가족하면 숨막히지 않느냐는 말에 대해 몇 명을 제외하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돌봐주는 사람들이 있는데 여기가 왜 숨막히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학생들은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광고에 공감하며 키득키득 웃는다. 정말로 집 나가면 개고생인 것을 이들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이나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해외에 나가는 ‘개고생’을 선택한 것은 미래의 향한 꿈이거나 한국으로부터의 탈주가 아니라 어서 빨리 돈을 모아 한국으로 귀환하기 위함이다. 가까이 지내던 한 후배는 돈을 좀 더 준다는 말에 두말없이 바레인으로 떠나 3년을 보내고 있다. 경제위기로 바레인에서의 승진이 좌절되자 그 녀석은 얼마 전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을 회사에 신청했다고 한다. 한국도 지금 엉망인데 좀 더 있으면서 자유를 만끽하지 그러냐는 말에 녀석은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는 한국’을 두고 자기가 미쳤다고 거기 더 있냐고 반문하였다. 70년대 중동 건설 붐에 힘입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떠났던 아버지 세대의 이주노동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처럼 지금의 젊은 세대는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성공’이 목적이던 시대에서 ‘생존’이 목적인 시대로 우리는 후퇴하였다.

물론 집을 박차고 나와 떠돌아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가족과 같은 친밀성의 공간이 파탄이 난 저소득층의 아이들일수록 떠나고 싶어 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 밖을 떠도는 여자아이들은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자기 몸이 더 잘 팔린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이 아이들은 자신들의 생존에 아무짝에도 도움읻 되지 않는 지긋지긋한 집과 학교를 떠나서 자신의 핸드폰속에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언니들’의 네트워크를 따라 전국을 떠돌아다닌다.(그러나 그나마 남자아이들은 이렇게 떠돌아다니지도 못한다. 군대 때문이다. 몇 년간이라도 떠돌아다니기 위해서는 대학을 가야한다. 그렇지 않고 이들이 유목민이 될 수 있는 길은 밀항과 같이 범죄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실제로 하자센터에서 나와 같이 공부를 했던 한 아이는 일본에 가서 마술을 배우며 이나라 저나라를 떠돌아다니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대학을 갈 재주와 돈이 없는 처지였고, 밀항이니 뭐니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결국 얼마전 군대에 간다고 문자를 보내왔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년이 돈없고 공부도 못하는데다 못생기기까지 한 년들이예요’. 그러나 조건만남이라는 원조교제를 하며, 때로는 몸매관리를 위해 한 달씩 단식원에 머물면서 이 아이들이 꾸는 꿈도 ‘정착’이다. 좋은 남자 만나 알콩달콩 사는 것, 그것이 이 떠돌이들의 꿈이다.

그러나 이들이 꿈꾸는 그런 알콩달콩한 삶이 그대로 존재할 것 같지는 않다. 불확실한 삶precarious life. 이보다 더 이 시대를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시공간은 안정적인 것이 아니라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이리저리 유동하는 불안정한precarious 것이 되었다. 삶은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어떤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것이 되었고, 인간의 관계는 너무도 깨지기 쉬운 것이 되어버렸다. 단순히 직업만 그날 벌어 그날 먹고 사는precarious 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과 친밀성 모두가 다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믿을 수 없는precarious 것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연히 살아있는 것이며, 아직 망하거나 잘리지 않았다면 그것은 필연이 아니라 운이 너무 좋아서 요행수로 벌어진 것이다. 삶이 불확실해진 시대, 이 모든 것의 결과는 감당할 수 없는 상처이다. 삶이 아니라 상처가 인간의 운명이 된 것이다.

그래서 생존이 지상명령이 된 시대에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친밀성의 파괴가 만들어내는 ‘상처’이다. 그래서 이들의 사랑은 열정적일 수가 없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전적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그것은 결국에는 감당할 수 없는 손해와 상처로 귀결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랑에 온 마음을 다 빼앗길 것 같으면 그런 사랑은 아예 안 하거나 애초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장 우선적으로 관리되어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감정이다. 성공과 실패 모두가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진 시대에 감정에 대한 관리능력이 있어야지만 그나마 쿨하게 상처를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학기 강의를 들었던 학생 중의 하나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전화를 했다. 남자친구가 갑자기 한 달 전에 사라져서 무슨 일인가 애타게 기다렸는데 말도 안하고 군대를 간 것이었단다. 훈련소를 나와서 처음으로 전화를 해서 한 말이 자기를 사랑하지만 자기와 연애를 하는 것이 계속 불안해서 시간이 필요했단다. 사랑의 파경이 가져올 상처에 대한 부담을 감당하지 못하고 군대로 도망친 것이다.

상처를 받지 않는 성장이란 없다. 집을 나오지 않는 성장이라는 것도 없다. 모든 영웅들의 신화가 보여주듯이 우리는 집을 떠나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를 받으며 성장을 하고 어른이 되어 집으로 귀환한다. 집을 나와 존경할 만한 사람을 만나고, 그 존경할 만한 사람을 따라 자신의 삶에 대한 신념을 가지게 되고, 그 신념을 엄격하게 실천하며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주변의 사람에 대해 책임지고 위로하며 사는 삶, 이것이 바로 근대가 꿈꾼 어른이 되는 성장이 아니던가? 그러나 집을 떠나는 것은 개고생이고 상처는 감당할 수 없는 나락이 되었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기대할 수 없는 불행한 삶을 산다. 위로가 되어야 할 가족은 짐이 되었으며, 위로하는 법을 배워야 할 학교와 지역사회는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글이 돼버렸다. 단적으로 이런 시대에 성장은 가능하지 않다. ‘자유’의 이름으로 성장을 도둑맞은 이들은 유목민이기는커녕 생존을 위해서는 ‘피난민’으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도망자’의 신세로 내몰리고 있다.

작성일 : 2009. 7. 24

작성자 : 엄기호

 

긴급 기자회견을 하는 동안 유도요노 대통령은 감정이 북받치는 듯 몇 차례 말을 잇지 못하였다. 60%에 달하는 지지로 그의 대통령 재선이 확실시 되는 시점이었다. 한쪽에서는 98년 독재자 수하르토를 몰아내고 혼미를 거듭하던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가 안정적인 제도화의 길로 들어섰다고 환호하던 중이었다. 전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도 비교적 큰 충격 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시점에서 터진 2009년 7월 17일 아침에 자카르타 시내에 울려 퍼진 두 차례의 폭탄 소리는 온 국민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기에 충분하였다.

“폭탄 테러가 터진 두 호텔은 자카르타에서 가장 보안검색이 엄격한 호텔입니다. 이 호텔이 타겟이 되었다는 것이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폭탄 테러가 터진 메리엇트 호텔과 리츠칼튼 호텔은 인도네시아에 대한 외국 자본과 문화 침입의 상징이다. 따라서 과거에도 몇 차례 폭탄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 테러가 터진 동안에 인도네시아 방문 경기가 예정되어 있던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이곳에서 머물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의 경기는 이번 테러에 따라 취소되었다. 이런 이력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번 테러의 배후에 알 카에다 혹은 그의 동남아시아 연결망으로 알려진 자마 이슬라미아의 소행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겠지요. 그들은 인도네시아의 안정을 바라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다른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항간에는 선거에 불만을 품은 메가와티 지지자들이 그런 것이라는 말과 반대로 그런 소문을 퍼트리려고 지금의 대통령이 벌인 자작극이라는 말도 퍼지고 있습니다.” 진보적인 연구단체에서 일을 하는 베로니카는 형식적 민주주의가 안착화 되고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는 그 시점에 아무 일이든지 아무개에 의해서 벌어질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퍼지고 있는 것에 주목할 것을 주문하였다.

“이런 이야기의 진원지가 다름 아님 정치권 자체임을 유심히 살펴보아야합니다.” 메가와티쪽을 의심하는 메시지를 던진 것은 다름 아닌 유도유노 대통령 자신이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의 배후에 대선 결과에 불만을 품은 자기 반대 세력이 정국을 혼란시키기 위해 개입하였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이 말은 대통령 선거의 라이벌이었던 메가와티 전대통령과 그녀의 또 다른 대선 주자였던 유습칼라 부통령측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정치권 자체가 만들어내는 음모들 자체가 인도네시아에서는 누구에 의해서든 모든 일이 다 가능한 것처럼 만들어서 정치는 다시 예측불가능한 음모 비슷한 것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그 결과 이번 인도네시아 대선은 항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형식적 민주주의가 안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금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현직 부통령인 유스칼라 후보 역시 K뉴스에 따르면 “결과적이긴 하지만 지금 와서 보니까 경찰과 정보사가 정작 자신들이 수행해야할 이번 폭탄테러와 같은 테러 방지대책 임무는 뒤로 제쳐두고 총선과 대선에 지나치게 개입한 결과가 아닌가 의심된다.”고 일격을 가했다.

사회적 현실과는 유리된 정치적 이번에 정착된 민주주의에 대해서 시들해하는 목소리는 작지만 곳곳에 있다. “저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는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지지하는 후보도 없었지만 저들만의 잔치를 정치라고 부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립을 둘러싼 갈등으로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인도네시아령 파푸아에서 중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하리안또는 이건 정치가 아니란다. 정치란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시민들의 이해관계를 다투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들의 정치에서 완전히 빠진 것이 시민들의 이해관계라는 시각이다.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 이후에 시민들이 정치에서 구경꾼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민주주의 이후에 시민들이 정치의 구경꾼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는 것에 대한 자성은 정치권에서도 나오고 있다. 메가와티 정당의 국회의원의 법률자문을 역임한 현직 변호사인 니콜라스도 하리안또에 수긍한다.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근간은 국민주의Nationalism입니다. 네델란드의 식미지였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수천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특징때문에 독립과 함께 국가Nation을 형성하고 수립하는 것이 인도네시아 정치의 가장 큰 목적이자 과정이었다. “그런데 지금 의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다수의 정치 정당들은 사실 제가 몸담고 있는 메가와티의 정당을 포함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리 큰 차이가 없습니다.” 국가nation를 위협하는 실제적인 것도 없는 상황에서 별로 차이도 없는 정당들끼리 마치 차이가 있는 것처럼 경쟁을 하면서 다른 정치적 견해가 정치권이 진입하는 것을 아예 원천 봉쇄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치가 정치적 견해의 차이에 따라 국민들을 조직하는 과정이 아니라 ‘미인 대회’ 비슷한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고 니콜라스는 고백한다.

여기에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가 당면한 또 다른 문제는 정치의 시장화다. 니콜라스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정당에서도 부정선거에 대한 여러 가지의 문제를 제기하였지만 대세를 돌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내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이제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에서 돈이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선거에 나갈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다.”고 토로한다. 부자가 지도자가 되었고 가난한 사람들은 구경꾼으로 전락해버린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정치가 가난한 사람들과 국민주의를 제외한 다른 정치적 견해를 정치의 영역에서 밀어내는 동안 그들을 삼키고 있는 것은 이슬람 근본주의이다. 인도네시아는 전세계에서 무슬림들의 숫자가 가장 많은 국가이지만 중동의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는 달리 세속국가를 표방하고 있다. 이슬람의 엄격한 규율을 따르기보다는 보다 더 자유롭고 근대적인 생활양식을 유지하고 있다. 길거리를 난폭하게 운전하는 운전자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드는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들을 낯설지 않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인도네시아에 지금 가장 많이 생기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기숙사형 이슬람 학교이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는 농촌지역에서 온 아이들이다. 이런 아이들을 작게는 수십 명에서 크게는 수백 명에 이르기까지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모아놓고 교육을 제공한다. 물론 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코란을 암기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교육도시인 족자카르타에 있는 한 기숙학교의 교장은 “아이들이 이곳에서는 24시간 코란을 암기하고 배우며 이슬람으로 커나간다”는 것이 가장 큰 자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베로니카는 이런 기숙학교가 잠재적으로 이슬람 근본주의를 양성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슬람 기숙학교에 중동에서 엄청난 규모의 돈이 흘러들어오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한 투자인 셈이죠.” 이슬람 기숙학교의 급속한 성장에 대해 국제단체에서 일을 하는 부디는 경제적인 측면을 바라볼 것을 주문한다. 이슬람 근본주의를 양성하기 위한 것뿐만이 아니라 충실한 이슬람으로 성장한 후 이들이 평생의 소원으로 떠나는 성지순례에서 중동이 얻게 되는 경제적 정치적 이익은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 영향으로 이 지역 모스크의 건축양식도 바뀌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족자카르타의 이슬람 사원은 중동의 돔 형식이 아니라 자바의 전통 가옥 형식을 따라왔다. 그런데 중동 자금의 유입 이후로 양철 돔 지붕을 올린 중동 양식의 모스크가 급속히 늘고 있다.

“사회가 배제된 정치가 정치 스스로의 밑바닥을 어떻게 갉아먹고 있는지를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로니카의 단언처럼 민주주의의 안착화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정치가 그들만의 잔치가 되면서 벌어지게 되는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내가 마지막으로 기대를 가지는 것은 젊은 세대들입니다. 이들은 형식이 되어버린 인도네시아의 국민주의를 넘어서 이미 몸으로 인도네시아 안팎에서 트랜스-국민주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들에 의해서 정치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이슈를 포괄하는 새로운 보편적 패러다임를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도 엄청난 후폭풍을 맞을 것입니다.” 노회한 정치가의 희미한 희망은 인도네시아뿐만 아니라 위기를 겪고 있는 대다수 아시아 국가들이 풀어야하는 과제이기도하다.

작성일 : 2009. 7. 1

작성자 : 류은숙

 

4시간 | 티모시 페리스 | 부키

티모시 페리스는 작은 회사를 만들었다. 제품의 생산이나 주문발주는 모두 외주회사에 맡겼다. 자녀를 위한 유치원 알아보기 같은 개인적인 일도 모두 외주 비서에서 맡겼다. 그 돈을 주고도 충분한 돈을 남겨먹는 그는 자신의 회사를 성장시킬 생각도, 그곳에 상주하며 모든 의사결정에 관여할 생각도 없이 자신이 ‘일주일에 4시간만 일해도 굴러가는’ 자신의 cashcow 왕국을 완성했다.
그리고 말했다. “따라해 보세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 별건가요!”

그의 책 [4시간]이 전세계적으로 잘 팔린 이유를 알겠다. 더 비즈니스 잘하는 법(화폐경제 안에서의 노동)이나 더 윤리적으로 사는 법(화폐경제 밖에서의)이 아닌 “노동하지 않는 법”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드문 책이기 때문이다. 윤리적인 소비가 대개 많은 비급여 노동을 수반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불만은 치워두고라도 (이건 기회가 되면 [그림자 노동] 편에서 이야기), 그가 자유를 얻는 지극히 이기적인 방식에 대해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지주이다.

근무여건에 대한 협상이 가능한 프리랜서에 가까운 직장인으로 시작하라고 권하지만, 그가 도달한 목적지는 자신의 회사를 갖고 있는 경영자이다. 그의 텃밭에선 매년 꾸준한 양의 소작료가 발생한다. 그는 정치와 사교와 문화 향유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었던 산업사회 이전의 지주가 아닐까? 자신을 대신해 일해줄 누군가를 충분히 구할 수 있을 때 누릴 수 있는 자유라면 그의 삶을 새로운 게 아닌 셈이다.

그는 제국주의적이다.

그는 선진국에서 돈을 벌고, 인도 등의 개도국에 아웃소싱을 주며, 후진국에 있는 휴양지에서 많을 시간을 보내며 즐겁게 산다. 그것으로부터 얻는 것은 물가 차이로 인한 “지리적 차익”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물가 비싼 곳에서 높은 소득을 얻거나, 물가 싼 곳에서 낮은 소득을 얻으며 항상 빠듯하게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그가 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일터로부터의 물리적인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넘나드는 그의 생활은, 마치 한 사람의 삶 속으로 축약된 다국적 기업의 무역 같다.

그럼에도 그의 삶이 존경스러운 것은, 현재의 사회 속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어떤 패턴을 구현해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인류의 오래된 숙제를 자신만의 해답으로 풀었고, 모두 함께 해방시키려다 아무도 못나가는 대신 자기 혼자만이라도 먼저 뛰쳐나갔다. 그리고 세계화와 아웃소싱 같은 가장 첨예한 이슈들을 자신의 삶 속에서 미니어처처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의 삶은 확산을 꿈꾸는 1인 사회적 기업 같기도 하다. 하나의 민들레 홀씨처럼 자기 삶에서의 실천을 통해 모두에게 노동시간을 줄이는 (일주일에 4시간 수준으로) 영향을 주겠다는 그의 선한 의지를 누가 막을 수 있으랴. 그렇다면 그의 삶이 다수에게로 확대 가능한지가 질문이 될 것이다.

모두가 지주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규칙적이고 재미없는 일을 하고, 규칙적으로 적당한 수준의 급여를 받는 생활을 지주의 삶을 개척해나가야 하는 것보다 좋아한다. 이런 식이라면 “경영자는 수많은 직원에게 일자리를 주는 고마운 사람” 이상의 결론을 얻기 어렵다. 모두가 지주가 되기 위해서는 길거리에 늘어서있는 고만고만한 구멍가게들의 집합으로 가야 한다. 그 주인들은 대개 월급쟁이보다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라면 저작권에서 꼬박꼬박 수입이 들어오는 창작자나 발명가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한 명이 저작권으로 먹고 살려면 적어도 아홉 명 정도는 그 창작물을 향유하는 계층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지리적 차익을 누릴 수 있을까? 모든 나라가 똑같이 잘 산다면 누구도 지리적 차익을 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왕 물가에 차이가 난다면, 싼 곳에 가서 돈을 많이 쓴다는 게 무슨 나쁜 점이 있겠나. 많은 공장을 짓고, 많은 사람들을 아웃소싱 콜센터 같은 곳에 고용하고, 휴양지에서 돈을 펑펑 써댄다면 그 돈이 흘러 들어가 차츰 선진국처럼 잘살게 되지 않겠나. 자유무역의 예찬론자 같은 결론이 난다. (이에 대한 논의는 역시 기회가 된다면 [NO LOGO] 편에서 이야기)

모두가 부재지주로서 지리적 차익을 누릴 수 있을까? 아니요. 나는 (근거 없는 수치로) 인구의 최대 1/10 정도까지만 가능하리라고 본다. 피라미드 사업에서 아무리 열심히 영업해도 전세계 인구에 한계가 있고 누군가는 자신의 트리 밑에 둘 절대적인 인구가 부족하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의미가 없냐면 그렇지도 않다. 어떤 것들을 일부분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영향력이 있다.

그렇다면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늘어날 때 사회에 해를 끼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미룬다는 점에서 이기적이긴 하지만, 솔직히 사장이 하루 16시간 일하는 회사가 하루 8시간 일하는 회사보다 더 인간적이고 여유로운 것을 봤나? 일은 할수록 늘어나지, 우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노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쉼 없이 일한다고 세상이 더 좋아지진 않는다.

그래서 내 말은, 티모시 페리스는 좀 경박한 말투를 가지긴 했지만 존경할만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

작성일 : 2009. 6. 22

작성자 : 엄기호

 

이슬람 여성들은 차도르를 벗어야 할 것인가?

영화 <페르세폴리스>는 이란의 한 중산층 엘리트 여성이 이슬람 혁명의 와중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다룬 프랑스의 애니메이션이다. 주인공 마르잔은 테레란에서 열렬하게 혁명을 지지하던 중산층 엘리트 부모를 둔 펑크락에 심취된 소녀이다. 이슬람 혁명 이후 이들 가족은 왕정타파를 위해서 자신들이 지지했던 혁명과 실제 그 혁명의 보수적 결과에 당혹하게 된다. 마르잔이 테헤란에서 위험에 처할 것을 걱정한 부모는 그녀를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보낸다. 서구에 온 마르잔은 곧 자신이 이 사회에서도 이방인임을 깨닫게 된다. 섹스와 마약, 그리고 방황을 거듭하던 끝에 그녀는 다시 테헤란으로 돌아오지만 이란은 이미 이슬람 근본주의에 의해 다스려지는 신정국가가 된다. 이슬람의 젊은이들에게 허용된 자유란 밤에 몰래 불법적인 ‘클럽’에 모여 서구의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것뿐이다. 그마저도 항상 감시의 눈빛 속에서 언제 도망을 다니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차도르만큼이나 끔찍한 학교를 떠올리다

 

이 영화를 통해 학생들과 인권의 보편성과 문화의 특수성 사이에 끼인 존재로서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한편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머리 수건인 차도르를 여성에 대한 인권 억압의 상징이라고 이야기한다. 미국의 부시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내건 대의중의 하나도 탈레반에 의해서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자유를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 즈음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 많은 고발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반대편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쓰는 차도르는 개인의 신앙을 고백하는 문화적 장치로서 존중되어야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차도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문화적 특수성을 존중하지 않으며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서구의 윤리를 전세계에 강요하는 제국주의라는 거센 비판과 반발이 이어졌다.

이 복잡한 문제에 대해 다수의 학생들은 ‘당연히’ 보편과 인권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상당수의 학생들은 무조건적으로 벗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차도르는 강제적”이며, 그것은 “국가의 권력으로 국민의 의식을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은 역사로만 남되 전통으로 남아서는 안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 학생은 차도르가 “여성의 자유를 (지나치리만큼) 제한하는, 남성과 여성을 분명하게 차별하는 그릇된 문화”라고 단언하며 여성은 “차도르를 벗음으로써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써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아야”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다수의 학생들은 ‘전통’과 ‘인습’을 구분하며 ‘전통’은 계승되어야하는 것이지만 ‘인습’은 타파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학교에서 배운 언어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친 말은 이처럼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남아 사회와 자신을 설명하는 언어가 된다.

반면 학생들 중에서 일부는 <페르세폴리스>를 보고 이슬람의 억압적 문화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억압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돌아본다. 학생들의 이런 경험은 대부분 자신들의 몸에 새겨진 것에서부터 나온다. 대표적인 것이 중고등학교에서의 ‘교복과 두발, 애국가와 아침조례, 그리고 특정 종교의 강요’이다. 이들에게 한국은 차도르를 강요하는 이란만큼이나 끔찍하게 자유가 박탈된 사회이다. 다른 사회의 억압을 보면서도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며 거의 자동적으로 바로 떠올릴 정도로 끔찍했던 기억으로 남는 곳이 학교이다. 누구의 말처럼 한국인에게 학교와 군대는 억압의 원형적 체험으로 남아있다.

한 학생은 아침조회와 애국가를 떠올렸다. 10살도 채 되지 않은 아이들을 모아놓고 초등학교에서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상관없이 매주 월요일마다 아침조례가 열리고 아이들은 “차렷과 열중쉬어를 반복”하며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를 부른다. 모두가 차도를 다 걸치는 것처럼 모두가 다 하는 것이라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 학생은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들었다면 한 마디 정도는 기억날 만도 한데, 정말이지 단 한마디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회상한다. “귀찮고 싫지만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며 이것이 차도르랑 무엇이 다른지를 되묻는다. 다른 한 학생은 강요되는 종교로서의 채플을 떠올리며 우리의 일상생활도 “이처럼 전적인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우리가 질문해야하는 것은 왜 우리의 경우는 마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면서 이슬람의 차도르만 문제를 삼는 것인가에 대한 것이라고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동일선상의 어떤 문제는 문제로 취급하지 않는다.

같은 선상에서 교복과 두발의 문제가 가장 많이 학생들이 떠올리는 주제였다. 한 학생은 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에게 치마를 강요하던 일을 떠올렸다. 자기의 동급생 중에서 한 학생이 자신은 치마를 입는 것이 불편하다며 학교에 항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 학생에 따르면 문제를 제기한 그 친구는 '치마를 입으면 자전거를 타기 힘들다.' '겨울에는 종아리가 얼어붙을 것 같이 춥다.' '몇몇 아이들은 다리가 굵기 때문에 함부로 치마를 입지 않으려 하는데 학교 측에서 하반신 노출을 강요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그 의견에 동조하였고, ‘여자용 교복바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막상 이 여자용 교복바지가 만들어지자 그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은 애초에 문제를 제기한 그 학생뿐이고 다른 여학생들은 ‘민망하다’는 이유에서 그다지 선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한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그 자유를 행사하기에는 사회의 시선이라고 하는 또 다른 장애가 존재한 것이다. “스스로 투쟁해서 얻어낸 교복바지”를 주변 시선 때문에 활용할 수 없게 되면서 자유의 다른 측면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자유는 보이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시선이 무심해지는 것이다.

차도르가 감추는 우리사회의 진실

 

이런 점 때문에 한 학생은 오히려 차도르가 이슬람 여성들에게 역설적으로 자유를 줬다고 말을 한다. 차도로를 쓰지 않는 ‘자유’가 있는 우리세상이야말로 여성들에게 전혀 자유롭지 않은 사회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언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신을 꾸며야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이 부자연스럽고 우리가 자유스러운 것 같지만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오는 억압이라는 점에서는 우리가 훨씬 더 부산스럽고 부자유스럽다.

오히려 이 학생은 차도르를 쓴, 한 이슬람 여성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무한가지의 자유를 느꼈다고 한다. “누가 알겠는가. 차도르로 머리와 몸을 가리고 레이스로 얼굴을 가리고서 조숙하게 걷고 있는 그녀가, 빨간 레게 헤어스타일에 핫팬츠를 입고 배꼽에 3-4개의 바나나바벨 피어싱을 하고 있을지.”라고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이 학생은 이슬람 여성이 “차도르를 씀으로써 ‘자신에 대한 타인의 의식’과 ‘타인에 대한 자신의 의식’이라는 구속에서 해방 되는 실로 엄청난 자유”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그녀가 온 몸을 돌돌 감아버림으로써 “그녀가 얼굴이 예쁜지 못생겼는지, 부유한지 가난한지, 백인인지 흑인인지 혹은 황인인지, 어느 누구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며 심지어 그녀는 ‘그’일 수도 있다고 유쾌한 상상을 한다.

이런 점 때문에 예리하게 우리 사회의 패러디로 차도르의 문제를 포착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 학생은 차도르가 여성의 무엇을 가리며 무엇을 드러내는가를 질문한다. 다른 학생들이 차도르를 그 자체로 모든 것을 가리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과는 달리 이 학생은 가린다는 것은 드러내는 것이며, 드러내는 것은 가린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이 질문을 통해 도달한 결론은 차도르는 ‘얼굴을 가리고’ ‘몸뚱이를 드러낸다’는 진실이다. 이를 통해 이슬람 여성들은 “이슬람문화권 여성들은 몸뚱이만 존재할 뿐, 얼굴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며, “얼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여성의 인권도 자아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슬람의 여성들이 몸을 가리는 것은 남성들의 성욕이라는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얻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남성의 순수한 성욕의 대상인 몸뚱이만 남게 되는 것이다. 가리는 것에 우리 모두가 집중하는 사실의 문제라면 드러내는 것은 진실의 문제이다. 학생들은 이 점을 잘 간파해내었다. 결국 차도르의 진실은 한편에서는 이슬람의 남성들에게 여성이 성욕의 대상이자 도구인 몸뚱이로만 드러내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서 나는 학생들과 사실과 진실 사이의 차이의 문제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슬람의 여성들이 차도르를 쓰는 것은 사실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억압을 강요당하고 차별을 당한다는 것 역시 아마 사실의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감추어지는 것은 무엇인가? 학생들은 서구의 논리에서 드러나고 감추어지는 진실의 문제도 잘 포착하였다. 먼저 우리 사회가 감추는 진실은 바지 교복을 이야기한 학생이 말하는 것처럼 서구화/근대화된 우리 사회 역시 특정한 방식으로 여성과 소수자들이 억압되고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투쟁을 통해 교복바지를 입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 바지를 다수의 여학생들이 입기를 꺼려하는 것은 우리사회에서 ‘주어진 자유’가 처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진실의 문제이다. 사실이 드러난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진실은 드러내는 것을 통하여 감추어지는 것이 무엇이며 그 양자를 가르는 권력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한 한생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의 히잡 논쟁에서 감추어진 서구의 진실을 예리하게 폭로하였다. 히잡 논쟁이 드러내는 것은 이슬람이 후진적이라는 사실이고 감추는 진실은 서구사회가 억압적이고 차별적이라는 사실이다. “평등과 자유의 정신에 입각해 받아들인 이민자들이 프랑스 사회의 큰 골칫덩어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민자들에게 불평등한 조치를 취한다면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인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역으로 들고나온 것이 히잡이다.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불평등을 가리고”, 그들의 불평등을 드러냄으로써 실질적으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것이 바로 히잡 논쟁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여성, 문화전쟁의 상징에 갇히다

 

아이들의 쪽글과 토론에 힘입어 우리는 왜 하필이면 여성과 차도르가 문화 전쟁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는지에 대해 토론하였다. 이 토론에서 우리는 차도르(히잡)에 대한 논쟁 자체가 여성을 행위자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징으로만 바라보며 그 상징을 쟁취하며 자신들의 억압적 진실을 감추려는 서구와 이슬람 남성간의 추악한 문화전쟁이라는 점을 발견하였다. 서구 사람들은 이슬람의 상징이라고 하면 즉각적으로 차도르를 떠올린다. 사실 이슬람을 상징할 만한 것은 무수히 많다. 그리고 차도를 제외한다면 대다수는 남성들의 것이다. 터번이라던가 이슬람 남성들이 매일 기도하기 위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양탄자라고 하던가, 남성들이 길게 누워 빨고 있는 물담배 등 이슬람의 상징으로는 남성적인 것이 여성적인 것보다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차도르가 그 상징이 되었을까? 그것은 서구의 입장에서 본다면 차도르가 이슬람의 후진성과 억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슬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서구의 문화가 이슬람을 오염시키고 위협하는 가장 중요한 타깃이 여성이고 그 상징이 차도르이다.

여기에서 우선 살펴보아야하는 것이 바로 이슬람 남성들의 위치이다. 서구의 침입이 있기 전까지 이슬람 남성들은 중심으로서의 자신들의 위치를 충분히 누려왔다. 그러다 이들은 서구의 침입으로 졸지에 주변인의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으며, 자신들이 통제하던 것을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들의 통제권에 대한 상징, 그것이 바로 여성과 다른 소수자들이며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을 통하여 이들은 상처받은 자신들의 자존심과 주도권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보편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인권과 특수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문화적 차이 사이의 갈등에는 이처럼 그 이전에 보편의 위치를 차지하던 기득권들이 특수의 위치로 내쫓기면서 다시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를 차지하려고 하는 헤게모니 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서구의 입장은 차도르를 문제삼음으로써 위의 학생이 지적한 것처럼 자신들의 위선을 교묘히 감출 수 있으며, 동시에 이슬람 남성들을 제압할 수 있는 대의를 가지게 된다. 이들 모두에서 여성은 단지 그들 주장의 정당성을 비호하기 위한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행위자로서의 여성은 오로지 차도르를 씀으로써 전통을 수호하는 상징이건, 혹은 차도를 벗음으로써 해방을 실천하는 상징이거나, 결국 둘 모두에서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히잡이 논쟁 자체가 되는 것이 여성을 행위자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의 상징으로 삼아 그 상징을 누가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서구와 이슬람 남성들 간의 다툼이며, 이 다툼에서 이슬람 여성들은 배제되어 있다는 것이 우선적으로 비판되어야한다는 것이다.

 

배교자인 여성, 소비자로 구원받다

 

그렇다면 상징이 아닌 행위자로서의 여성의 위치는 어떠한가? 놀랍게도 우리가 발견한 것은 행위자로서의 여성은 서구에서도 이슬람에서도 영원한 배교자 혹은 난민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페리세폴리스>에서 마르잔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서구에서도, 이란에서도 영원한 난민이다. 이들에게 조국은 없다. 이들은 보편적 인권을 주장하는 서구로부터도, 전통과 순수성을 강조하는 이슬람으로부터도 영원한 ‘배교자-이방인’들이다. 서구는 이들이 외부로부터 와서 서구의 이념인 인권과 보편을 위협한다고 이들을 배교자 취급을 하며, 이슬람은 이들이 이슬람의 순수한 신앙을 위협한다고 하여 배교자로 취급한다.

그래서 행위자로서는 배교자의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여성은 이처럼 양쪽 모두에서 위협적이며 불온한 존재이다. 아무 쪽에도 소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위협적인 존재를 가장 불온하지 않게 해방시켜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 대답을 우리는 한 학생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이 학생은 이 논쟁을 보며 꿈꾸었다고 한다. “차도르도 하나의 좋은 패션 아이템이 된 미래의 아침, 오늘은 무슨 차도르를 쓰고 나갈지 곰곰이 고민하는” 자신을. 여성은 히잡이 정치적 상징이 아니라 문화적 소비의 대상이 될 때 비로소 해방될 것이다. 서구와 이슬람, 모두를 무력화시키고, 동시에 이들 모두를 만족시키며 이런 논쟁 자체를 우스개로 만드는 것이 바로 전지구적 소비자본주의임을 이 학생은 경험적으로 간파하고 있다. 참고로 입생로랑이나 기타 프랑스의 유명 속옷 브랜드가 가장 날개 돋친 듯이 가장 많이 팔려나가는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중동이다. 이 학생의 불온한 상상은 이미 미래가 아니라 전지구적 소비자본주의와 함께 우리 모두의 현실이다. 속옷에서 타협을 본 서구의 인권과 이슬람 남성의 성욕은 곧 여성이 아닌 차도르를 해방하리라. 자본주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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