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1. 8. 30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9-10월호에 실렸습니다.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9] 고향에 대한 권리
엄마, 이 글을 쓰기 30분전 쯤 내가 존경하는 신부님의 핸드폰 소식이 끊겼어. 경찰 유치장에 들어간다는 게 마지막 소식이었어. 엄마 아빠보다 두 살이 많으신 칠순을 넘긴 신부님이야. 내가 태어나던 무렵 신부가 되셨고 40여 년 이상을 복무하다 몇해 전 은퇴를 하셨지. 은퇴한 사제가 왜 유치장에 가게 됐으며 그곳에서 지인들에게 보낸 메시지가 “마음이 편안하다. 있을 곳에 있다”였을까? 그건 한마디로 고향을 간직하고픈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야.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 같은 사람들에게,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난 후 돌아가지 않은 엄마 같은 사람들에게 ‘고향’이란 먼 산 같은 말이야. 그런데 그런 나한테도 고향에 대한 추억이 있다는 건 몰랐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향수라고 하잖아. 그런 향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담은 책과 영화가 아주 많아. 이십대 때 내가 아주 힘들었던 어느 날, 나는 책속의 주인공들을 흉내 내어 고향에 가보기로 맘먹었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는데 고속버스터미널에 가서 표를 끊고 엄마 아빠의 고향이자 내 본적지인 그곳으로 향했지. 할머니 할아버지도 일찌감치 서울로 오셔서 생활하시다 돌아가셨기에 그곳에는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어. 하지만 힘들고 지친 내게 한 번쯤 가보고 싶다는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떠오르는 추억이 아주 많았어. 동생은 태어나자마자 몇 년 간 중병을 앓아서 엄마 아빠는 나를 한동안 고향 할머니 댁에 맡겼잖아. 그래서 나는 도시 아이지만 시골생활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갖게 됐고 고향에 대한 향수란 걸 갖게 된 거야.
시골에서는 어린 아이도 할 일이 아주 많았어. 저녁나절 할아버지께서 독한 모기약을 뿜어 놓고 방문을 꼭꼭 닫아두시면 한 시간 쯤 후에 들어가 파리모기를 쓸고 닦는 일, 끼니때마다 남은 잔반을 모아 돼지 여물통에 갖다 넣는 일이 내 일이었어. 코를 처박고 먹어대는 돼지를 구경하는 일은 내게 질리지 않는 놀이였어. 졸려 죽겠는데 독실한 신자인 할머니는 저녁예배에 날 꼭 데려가셨고 예배당에서 방석을 베고 자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나온 언덕위로 별빛이 비처럼 쏟아지곤 했어. 그 예배당은 엄마 아빠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했어. 뒷마당에는 키 큰 감나무가 있었는데 할머니가 떫다고 따주지 않으셔서 종일 운 적이 있었어. 결국 지친 할머니가 장대로 따주셨는데 정말 떫어서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감을 따는 계절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됐고. 동네에서 유일하게 TV가 있던 할머니 댁에는 저녁마다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마루위에 TV를 얹어놓고 평상에 앉아 연속극을 봤어. 나는 주인집 손녀 행세한다고 평상 가운데에서 이불을 두르고 위세를 떨곤 했지. 가을 벼가 익을 무렵 내 키가 벼보다 작았던지 바람 불 때마다 황금물결이 내 머리 위에서 출렁거렸던 기억도 나. 버스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내 기억의 사슬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어. 하지만 도착하니 이미 어두워질 무렵이었고, 시골 터미널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표를 사긴 했는데 아는 이 없는 시골마을에 그 밤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어. 게다가 그 차가 막차였기에 나는 10여 분 정도 남은 추억들을 되새김질 한 후 ‘다음에 다시 오자’며 서울행 표를 끊을 수밖에 없었지. 그 후로 다시 가보진 못했지만, 그날 떠올린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내 굳은 머리와 맘을 따뜻하게 녹여줬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어린 몇 해의 기억이 평생 그렇게 푸근한 것인데 가족 대대로 살아왔고 앞으로 자녀들도 살아갈 것이라 믿는 곳에서 쫓겨나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그 마음이 어떨까? 그들에게 고향의 의미는 따질 수 없고 잴 수 없는 것이겠지. 앞서 말한 신부님이 유치장에 끌려가신 이유가 그런 고향 때문이야.
그 신부님은 고향을 간직하는 게 평화라고 믿고 평생을 실천해온 분이야. 그 분의 말씀에 따르면 고향과 평화란 이런 것이야. 태어난 고향을 떠나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사는 곳은 제2의 고향이 되지. 그래서 일자리에서 노동자가 함부로 쫓겨나지 않는 것, 또 쫓겨난 노동자가 일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평화라고 하셨어. 고향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두꺼비, 맹꽁이, 도롱뇽 등 온갖 생물이 저마다의 색깔과 소리를 내며 같이 살아가는 것이니까 그런 생명들이 서식처를 잃지 않도록 생명들의 고향을 보전해야 한다고도 했어. 농부가 땅을 또 어부가 바다를 빼앗기지 않는 것이 평화라고, 여성이라고 장애인이라고 이주노동자라고 무시하지 않고 품고 사는 것이 진짜 고향이고 평화라고 말이야.
내 생각도 신부님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신부님이 쓰신 평화란 말을 인권으로 바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 인권이란 사람들이 자기 일에만 코 박고 있으면 지켜지지 않는 거야. 모르는 사람의 일이라 할지라도 사람들 사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고통에 대해 같이 아파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인권이야. 고통을 같이 겪는 것을 공감이라 하고, 그런 공감에 대해 책임지는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 인권이야. 그런데 안면도 없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책임이 그냥 생기는 건 아니잖아. 만지고 볼 수 있는 생명들을 만나고, 직접 사람들과 만나서 교감을 느낀 경험 없이 저절로 생길 수는 없는 것이지. 그래서 친밀한 사람들과 함께 기억과 경험을 만들 수 있는 삶의 공간은 인간의 삶에서 필수적인 것이야.
어린 날 고향에 대한 추억, 어린 나를 귀찮아하지 않고 놀아줬던 동네 언니 오빠들, 엄마가 그리워 울던 나를 업어주던 할머니의 등, 힘들어 하는 나에게 귀 기울여줬던 친구들, 이런 것들이 없다면 나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살아가기 힘들 거야. 그런 것을 통틀어 나는 고향에 대한 권리라고 말하고 싶어.
인권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권리들은 모두 ‘고향’을 핵심어로 해서 생각해볼 수 있어. 예를 들어 사생활에 대한 권리, 집에 대한 권리, 교육에 대한 권리 등은 다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할 권리를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 그래서 사회적 약자들이란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인 경우가 많아. 탐욕에 의해 고향이 파괴당하거나 고향을 빼앗긴 사람들, 가난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온갖 고생을 감내하며 일해야 하는 사람들, 고향을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없는 사람들, 일자리를 얻고 가정을 꾸린 제2의 고향에서 해고되어 출퇴근길과 아이의 통학 길, 그리고 이웃들, 이런 것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문제가 정치경제 또는 이주, 환경, 인권의 문제로 얘기되지만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고향에 대한 권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
유치장에 들어간 신부님이 40여 년 이상 찾아다닌 것은 그런 고향을 잃거나 잃을 위험에 빠진 사람들이었어. 그리고 신부님이 이번에 찾은 것은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생명들이었어.
이번 여름에 내가 제주도에 다녀왔다고 했잖아. 강정마을에 다녀왔던 거야. 엄마도 나랑 몇 해 전에 가봐서 알겠지만 제주도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잖아. 섬 전체가 자연의 예술품의 전시장이라면 강정마을은 그중에서도 빛나는 작품들이 전시된 곳이야. 마을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구럼비 바위는 한국에 하나밖에 없다는 용암너럭바위야. 맨발로 뛰어 놀아도 좋은 안전하고 넉넉한 바위이고 온갖 희귀생물이 그 바위틈에서 숨 쉬고 있어. 맑은 샘물이 그 바위 곳곳에서 솟아나서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목을 축이고 씻는다고 해. 그 이름도 정겨운 ‘할망물’이라고 불려. 마을로 들어가는 올레 길은 제주도의 올레길 중에서도 빼어난 경치를 뽐내는 곳이야. 그런데 정부에서는 그곳에 해군기지를 만들겠다고 선포했어. 이미 마을 주변에는 흉물스런 컨테이너 담장을 빼곡하게 둘러놨어. 구럼비 바위에 콘크리트를 부어 그 많은 생명들을 죽이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고향을 빼앗겠다는 계획이야. 한국의 최남단에 세우는 해군기지가 북한과 관련이 클 것 같지는 않고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는데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의 기 싸움에 소용되는 기지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어. 평화의 섬이라 일컫는 곳에 그런 국제적 긴장과 갈등의 애물 덩어리를 만들면 평화의 섬이란 이름값을 하기는 어려워. 또 정부에서는 해군기지로 주민들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라고 선전하는데 엄마도 나랑 가봐서 알겠지만 우리처럼 제주도를 찾는 사람들은 제주도의 자연과 거기에 어우러진 삶을 보러가는 것이지 군사시설을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잖아. 군사시설이 아름답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리 다양한 게 취향이라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취향이야. 강정마을 사람들에게는 지금껏 살아온 그대로 농부와 어부로 살아가는 삶이 가장 자연스럽고 풍요로운 삶이야. 그래서 해군기지 건설이란 철퇴를 맞은 후 마을 사람들은 4년이 넘도록 그것을 막기 위해 싸우고 있어.
내가 동료들과 그 마을에 갔던 날, 마을은 뒤숭숭했어. 그날 새벽에 경찰이 마을회장님을 비롯해서 몇 분을 잡아갔던 거야. 마을회관에서 밤중에 형사소송법 강의와 토론이 있어서 가봤어. 해군기지를 막기 위해 시위도 하고 농성도 하고 경찰과 해군에 맞서 온갖 실랑이를 해야 하니 매 맞고 끌려가고 벌금이 떨어지고 소환장 날아오는 일이 마을의 일상이 됐어. 농사짓고 물질하는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범죄자가 된 거야. 고향을 지키겠다는 게 그 죄명이지. 그런 일에 어떻게 대응할지를 같이 고민하는 자리였어. 변호사의 법 강의가 끝나고 질문이 이어졌는데 난 한숨과 감탄을 번갈아해야 했어. 고향을 고향 그대로 지키고 농부와 어부로서의 삶을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범죄가 되고 처벌받고 있다는 데 한숨이 났어. 한편 감탄한 것은 그런 상황에서 보여준 마을 분들의 태도였어. 나는 그런 성숙한 토론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어. 서로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하거나 잘난 척하거나 괜한 트집을 잡으려는 모습이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토론회일수록 더 심하거든. 그런데 마을 분들은 앞서 말한 사람과 겹치는 얘기는 피해하면서 4년간 싸우면서 쌓아온 공동지식과 체험을 근거로 해군기지가 왜 안 되는 지를 조목조목 제시하셨어.
또 인상 깊었던 건 나처럼 처음 보는 이방인이 마을회관에 나타났어도 아무도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 거야. 너무나 자연스런 일원으로 대해주셨어. 정부의 주장대로라면 외부의 불순세력이 주민들 일에 참견하러 나타난 것일 텐데, 그럼 경계와 의심이 우선 아니겠어? 그런데 마을 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어. 그저 이웃으로 대해주셨어.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다녀갔고 또 오는 것이 당연하다는 분위기였어.
그런데 토론을 하면 할수록 막막했던 건 그 어떤 법도 그분들의 편이 아니란 것이었어. 그분들 편을 들 수 있는 현행법이 있다고 해도 그건 권력자들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고 있었어. 얘기가 이어질수록 법이 그분들에게 힘이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분들을 할퀴고 겁줄 수 있을까에 소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뿐이었어.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지. 법 전문가가 아닌 인권활동가로선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 “인권활동가들은 악법을 어김으로써 악법을 이깁니다. 혼자서 어기면 불법으로 처벌받겠지만 떼거지로 어기면 정의가 악법을 이깁니다.”라는 답변이 있었어. 그제야 마을 분들이 크게 웃으며 박수를 치셨어. 자정이 가까울 무렵까지 토론은 이어졌고, 그 밤중에서야 풀려난 마을회장님이 인사말을 하셨어(이분은 신부님 이 잡히던 날에 다시 연행되셨지). 하루 종일 자신 때문에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
“저는 평화, 그게 뭔지 잘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은 선조들이 살아왔고, 우리가 더불어 살아온 이곳을 잘 지켜서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도리를 다하고 살면 그게 평화 아니겠습니까?”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강정마을 지키자! 지키자! 지키자!”는 구호를 끝으로 모임이 마무리 됐어. ‘지키자’는 한마디 한마디에 고향에 대한 애틋함과 설움이 젖어 있었어.
정부가 해군기지를 밀어붙이는 두 가지 논리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야. 그런데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이 뭐가 문제이기에 강정마을을 괴롭히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유엔이 내놓은 비판과 설명에서 찾아볼 수 있어. 유엔은 전 세계 국가들이 회원국인 기구이고 물론 한국도 회원국이야. 이 유엔은 2차 대전 이후 평화와 인권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져서 60여 년 이상 인권에 대한 국제기준을 만드는 일을 많이 해왔어. 유엔도 분명 국가들의 기구이면서 왜 국가들이 내세우는 국가안보와 경제발전의 논리를 반박했을까? 뭔가 타당한 근거가 있으니까 그랬을 것이고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거야. 유엔의 주장은 강정마을 분들의 주장과 다르지 않아.
유엔의 이야기 중에 ‘인간안보’와 ‘발전에 대한 인권’이란 게 있어. 먼저 ‘인간안보’란 말은 ‘국가안보’를 반박하기 위해 만든 말이야. ‘인간 안보’에 따르면 지금껏 국가에서 주장해온 안보 개념은 너무 편협하다는 거야. 왜 편협하냐 하면 인간에게 필요한 안전이 아니라 정부에게 필요한 안전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안전을 지키는 것은 시민들 자신의 권리이자 의무인데 정부가 독점하는 일로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이야. 국가들은 흔히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영토를 지킨다는 이유로, 모호한 국익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국가안보’를 사용해. 그리고 국가 권력자에 대한 약한 신뢰 때문에 초조해서 ‘이건 나랏일’이라면서 시민들의 참여와 권리행사를 막기 위해서 ‘국가안보’라는 걸 도깨비방망이처럼 휘둘러왔다는 거야. 그런데 그런 국가안보의 주장은 사람들이 진짜 안전하고 싶은 영역에 대한 관심사를 쉽게 무시한다는 것이지. 가령 사람들에게 필요한 진짜 안전은 질병, 굶주림, 실업, 범죄, 정치적 억압, 빈부격차의 첨예화, 정치적 억압, 환경위협 등과 관련된 것이야. 그래서 안보에 대해 진짜 관심을 가진 정부라면 “나와 가족들이 충분히 먹을 수 있을까?” “직업을 잃지 않을까? 직업을 구할 수 있을까?” “돈 걱정 없이 학교나 병원에 갈 수 있을까?” “정부로부터 감시나 무분별한 연행과 수사를 당하지 않을까?” “성별 때문에 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을까?” “종교, 인종 등의 차이 때문에 모욕이나 괴롭힘의 표적이 되지는 않을까?” 등의 질문에 답해야 할 거야. 그런데 ‘국가안보’는 외부의 적을 운운하면서 내부에서 나오는 반대나 저항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국가가 맘대로 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억누르기 때문에 국가안보를 강조하는 국가가 오히려 자국민에 대해선 제일 위협적인 위험이 되었다는 거야.
그래서 유엔이 내놓은 ‘인간안보’는 안보의 중심을 국가가 아니라 ‘사람’에게로 옮기자는 것이지. 사람에게로 중심 추를 옮겨서 저울질을 해야 진짜 문제들의 무게를 재서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거야. 인간안보는 첫째 기아, 질병, 억압 등의 만성적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사는 것이고 둘째, 집‧직장‧동네 등 일상생활 속에서의 갑작스러운 어려움과 해로움, 생활의 붕괴로부터 보호받는 것을 뜻한다고 했어. 그런 인간안보가 바로 서야 진짜 국가안보가 튼튼해지는 것이라는 말이지.
또 유엔에서 말하는 ‘발전’은 숫치가 높아지고 막대그래프가 올라가는 경제발전이 아니야. 경제는 성장했는데 일자리는 늘지 않는다거나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가 달라지지 않으면 그건 발전이 아니라 악발전이라고 해. 인권에서 말하는 발전에 대한 인권은 ‘저발전, 미발전, 미개한 곳’이라고 함부로 낙인찍히지 않고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유지할 권리야. 개발업자는 골프장과 호텔 짓는 것을 발전으로 여기지만 농사짓고 물질하던 농부와 어부의 삶이 그런 골프장과 호텔에서 청소하고 쓰레기 치우는 삶으로 바뀌는 게 발전이 아니라는 것, 당국자는 군사기지 주변에 만들어질 시설과 거기에서의 소비증가를 발전으로 여기지만 그건 발전이 아니라 조상과 후손에게 죄짓는 일이라 여기는 것, 무기경쟁과 기지건설로 만드는 긴장과 대립이 아니라 있던 무기와 기지도 없애고 줄이는 것을 진짜 발전으로 여기는 것이 ‘발전에 대한 인권’이야. 이런 점에서 강정마을 분들의 고향을 간직하려는 마음과 실천은 지구사회가 공통문제라고 느끼는 것들과 연결돼 있다고 할 수 있어.
결론적으로 인간안보와 발전이란 ‘일자리가 줄지 않는 것,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는 것, 사회양극화가 폭력적으로 분출되지 않는 것, 반대의견을 가진 사람이 침묵당하지 않는 것’이라 했어. 인간안보는 무기와 군사기지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존엄성에 대한 관심에서 지켜진다고도 했지. 유치장에 들어간 신부님이 바라는 것은 강정마을 사람들이 고향에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고, 강정마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도 그것 하나야. 어느 날 몸과 마음이 힘들 때 그곳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 푸근한 고향에 대한 권리가 참 사무치는 오늘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