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0. 10. 3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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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할머니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 엄마 때문에 슬펐어. 울 엄마한테는 이제 엄마가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엄마 등을 바라보려니 괜히 눈물이 났어. 나한테는 엄마가 있는데, 엄마한테는 엄마가 없으니 얼마나 기댈 곳이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그런 애틋한 마음과 달리, 소문났듯이 엄마와 나는 그리 다정한 모녀는 아니야. 내가 하도 무뚝뚝해서 엄마는 항상 나한테 “너 같이 생긴 거면, 도대체 누가 딸을 갖고 싶겠니?”라고 하지. 그럴 때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 하는 줄 알아? “사돈 남 말 하시네. 무뚝뚝하기론 엄마도 금메달감일세.”


그런데 왜 뚱딴지 같이 엄마에게 편지를 쓰느냐고? 작년에 여럿이 아닌 내 이름만으로 낸 첫 책이 나왔잖아. 그런데 엄마의 반응 때문에 난 한참 고민했어. 보통 엄마는 그냥 좋아하고 말텐데, 엄마가 퉁명스럽게 그랬잖아. “야!, 읽어보려 해도 도무지 무슨 소린 줄 알 수가 없다.” 내가 쓴 건 인권에 관한 책이고, 인권이란 누구나 같이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엄마한테 읽힐 수 없는 글을 썼다는 게 날 무지 속상하게 했어. 무슨 학술서를 쓴 것도 논문을 쓴 것도 아닌데, 그럼 당연히 엄마가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썼어야지.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이 편지는 그런 반성과 아쉬움 속에 쓰기 시작했어. 내가 왜 인권운동을 하고 인권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는지를 이제부터 엄마한테 들려줄 거야.


먼저 엄마가 날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해. 얼마 전 한 대학생이 자퇴 선언을 하고 학교 그만뒀다는 뉴스 봤지? 고려대학교에서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붙이고, 교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한 여학생 있잖아? 그 일을 사람들은 ‘김예슬 선언’이라 하는데, 그 학생은 대학과 국가와 시장이 한통속이 돼서 진리도 정의도 젊은이들의 우정도 잡아먹고 있다면서, 자신은 거기에 저항하는 작은 돌멩이 하나 되겠다는 의미로 자퇴한다고 선언했어.


엄마가 그 뉴스 볼 때 혹시 내가 옆에 있었다면, 엄마한테 아마 난 타작을 면치 못했을 거야. 아마도 엄마는 “으휴, 너 같은 딸년 둔 부모가 또 있나보다”라고 했겠지? 나도 그 뉴스 보면서 스무 해도 더 지난, 내 스무 살 때가 아프게 떠올랐어. 그때 난 엄마 몰래 대학 1학년 때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그만뒀었지. 엄마는 무려 6개월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는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지. 내가 아무 말도 안했으니까.


김예슬처럼 1인 시위를 하거나 대자보를 붙이지는 않았지만, 그 때 내 심정도 마찬가지였어. 그땐 방법을 몰랐을 뿐이지. 온 세상에 대해 외치고 싶었어. 대학도 세상도 너무 이상하다고. 그냥 그런 세상과 둥글게 어울려 굴러갈 수 없다고.


‘공부해라! 그래야 잘 살 수 있다. 너 공부해서 남 주냐?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그런 채찍질에 나도 대학만 보고 달린 아이들 중의 하나였지. 20년 인생을. 물론 엄마도 함께 달렸어. 엄마가 달린 길이 더 힘들었을 거야. 보따리장수, 파출부, 가내수공업, 그러다 화장품 외판원 리어카를 10년 이상 끌어서야 엄마는 날 대학에 보낼 수 있었어. ‘가난을 벗어나자’, ‘대학가서 참고 참았던 것 다해보자’, 뭐 여러 가지가 목표였지만, 그 무엇보다도 대학 간판이 내게 소중했던 건, 고생한 엄마에게 달아주고픈 훈장이 대학간판이었기 때문이야.


결과는 내 맘에 썩 들진 않았지만, 엄마가 부끄럽지 않을 만한 간판의 대학 입학이었어.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20여년 기다리고 기다렸던 인생의 봄날은 오지 않았어. 캠퍼스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필수록 학생들의 옷차림이 경쾌하게 빛날수록 내 맘엔 겨울이 깊어졌어.


정문 앞엔 항상 경찰들이 도열해있고, 틈만 나면 가방을 뒤지던 시절이었어. 학교 안까지 경찰들이 뛰어 들어와 대자보와 현수막을 찢어발기고 학생대표들을 채가기도 했어. 난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적어도 대학 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상식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수업시간에 교수들은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입을 다무는 건 양반 수준이었고, 일부 교수는 그런 현실에 항의하는 학생들(운동권이라고 불렀지)을 소리 높여 비난했어. ‘철모르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저런다’고, ‘여러분은 그런 선배들 따라하지 말라’고. 난 어두침침한 얼굴의 소수 운동권 선배들한테 마음이 가지도 않았지만, 교수들의 그런 비판은 비방으로 들렸고, 겁쟁이들의 책임회피로 들렸어. 그리고 고등학교 때보다 더 많은 학생 수에, 교실 모양만 계단식 강의실로 달라진 콩나물시루 속에서 토론이란 없이 필기만 해대는 수업이 계속됐어. 도서관에 가면 죄다 토플 책을 펴놓고 앉아 있었어. ‘독서’를 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어. 주변 학생들(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었어. 당시 졸업정원제란 게 끝물이었지만 서로 노트도 빌려주지 않았거든)의 멋 내기와 소비수준을 보며, 나는 한없이 주눅이 들었어. 내로라하는 집안 아이들이 왜 이리 많은지. 같이 대학을 졸업해도 저 아이들과 나의 삶은 같을 수가 없다고, 나는 잘해봤자 월급쟁이가 되고 쳇바퀴 같은 삶을 굴리게 될 텐데,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뭔가 이미 다 이룬 것 같았어. 부럽기도 하고 화도 났어. 대학에서 ‘지식인’을 한 명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스무 살의 나는 너무 절망했어. 간판을 따러왔고, 간판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교문만 드나드는 내 모습이 나날이 싫어졌고. 그러던 어느 날부터 수업에 들어가지 않게 됐어.


그리고 내가 신입생 1년여 동안 매일 한 일은 지쳐서 뒤꿈치가 끌릴 정도로 서울 거리를 쏘다니는 거였어. 남산에 하루에 세 번 올라간 날도 있고, 한강 다리란 다린 죄다 걸어서 건넜어. 다리 한가운데서 한참 물속을 쳐다본 적도 있어. 그렇게 쏘다니는데 많은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더라. 서울에 웬 지하공장이 그리도 많은지, 환기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일할 사람 구한다는 벽보와 전단지는 빼놓지 않고 다 읽어봤어. ‘구인’이라지만 결코 ‘구인’되고 싶지 않은 그런 일들과 조건뿐이었어. 지금은 죄다 아파트로 바뀐 산동네 집들, 가내 수공업으로 밥상이자 작업대가 되는 상위에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여인들, 엄마의 모습을 꼭 빼 닳은 모습들…. 내가 꼴 보기 싫어 뒤로 하고 나온 대학 캠퍼스와는 상반되는 환경, 상반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그럴수록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움에 죽을 지경이었어.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상담한다는 전화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건 적도 있어. 상담원은 건조한 목소리로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사세요’라고 해서, 난 전화를 건 게 후회돼 빨리 끊어버렸어.


그리고 학기말이 됐어. 오랜 방황에 난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복잡한 세상에 대한 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하게 살자는 결론에 도달했어.


‘난 학문에 뜻이 없다, 대학은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다녀야 한다. 난 어차피 간판 딸 생각으로만 오갈 텐데, 이런 내 자신의 거짓부터 때려치우자. 뭔가 내게 맞을 다른 공간, 다른 일을 찾아보자. 뭔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살아보자.’ 또 다른 마음의 절반에선 이런 소리도 들렸어. ‘대학 졸업한 후에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대학 안 나오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는데.’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난 백 살 정도 늙어버릴 거야. 엄마가 얼마나 실망할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엄마 때문에’란 이유를 대는 건 비겁하게 여겨졌어. ‘엄마가 대학등록금 내느라 허리 휘어지는데 내가 허송세월하는 것보다는 관두는 게 나을 거야. 엄마도 결국 내가 행복한 것을 더 좋아하게 될 거야.’


드디어 12월 말 난 자퇴서를 냈어. 거기 들어가려고 글자를 배운 순간부터 외워 온 모든 걸 다 바쳤는데, 나오는 데는 1분밖에 걸리지 않더라구. 자퇴서에 이름 쓰고 학과장 확인도장 받아 제출하면 끝이었어. 캠퍼스를 걸어 나오는데, 너무 싱거워서 웃음이 났어.


그 후 엄마한테 자퇴를 발각당하기까지 반년 동안의 기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란거야. 정말 철저하게 난 사회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거든. 그전에는 사회 속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그때까지는 언제 어디서나 ‘학생이에요?’라고 누가 물으면 ‘학생 아닌 사람도 있나? 뭐 그런 걸 묻고 그래’하는 생각으로 살았지. 그런데 이제 내가 ‘저 학교 안다녀요’라고 답해야 했고, 그러면 재수생이냐는 물음이 되돌아왔어.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어. 대학생이나 재수생이나 다 대학이란 걸 우선 기준으로 정해놓고 사람을 구분하는 거잖아. 대학생도 재수생도 아닌 스무 살의 여자아이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어.


그때 문득 고 3때 같은 반 애들 생각이 났어. 일찌감치 취업을 결정하고 입시에서 빠진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애들은 정규수업 마치고 강제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고 부기학원 등 에 취업준비를 하러 갔어. 그때 담임은 가방을 챙기는 그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애들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꺼지라’고 했어. 그 아이들은 무슨 죄인인양 가방을 주섬주섬 들고 사라졌어. 그 아이들은 일찌감치 ‘아무것도 아닌’ 사람, 학교에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거야.


입시결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던 애들은 몇 명 안됐어. 학교에서 자랑스럽게 써 붙인 합격자 명단은 몇 명 되지 않았으니까. 그 명단에 들지 않은 아이들, 지방대나 2년제 전문대학에 간 아이들은 또 다른 의미의 ‘아무것도 아닌’ 사람 속에 들게 되었을 거야. 그런데 이제 내가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 들게 됐어. 나란 사람의 감정, 생각, 몸, 이런 것은 전혀 변한 게 없는 데, 대학이란 하나의 기준에 의해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돼버린 거지.


그때는 대학만 그렇다고 느꼈는데, 요즘은 그런 기준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대학’을 기준 삼는 것처럼, 어떤 기준을 세워놓고 ‘뭔가’인 사람과 그 ‘뭔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이분법 말이야. 그리고 그 ‘뭔가’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또다시 그 ‘뭔가’에 속하려고 대기 중인 사람과 전혀 ‘아무것도 아닌’ 사람 축으로 나뉘게 되지.


사람이 먼저 있고, 구체적으로 그 사람을 묘사하는 게 맞는 것 아닐까? ‘아무개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의 고유한 뭔가로 그 사람을 설명하는 거지. 그런 설명에는 정해진 뭔가가 아닌 사람 수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놓여 있는 거야. 그런데 세상은 반대로 하고 있어. 세상이 정해 놓은 ‘뭔가’가 먼저 있고, 거기에 맞춰서 사람들을 구분하거나 일렬로 줄 세우는 거야. 출신 대학, 사는 지역, 아파트 평수, 직업, 출신국가, 쓰는 말, 종교, 사상, 피부색, 결혼여부 등으로 사람을 끊임없이 구분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어, 꼭 사람감별기계가 요란스럽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자퇴 후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라도 시도해야 했어. 구인광고를 읽고 읽다가 어느 신발가게에 취직하러 갔어. 주인아저씨는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음날 주민등록등본 갖고 출근하라고 했어, 하지만 다음날 나는 가지 못했어. 무서웠거든. 그런 식으로 시도는 계속 실패했어.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사람 쪽에 머물러 있는 게 나은 것 같았어. ‘학생’이 아닌 나를 설명할 ‘뭔가’를 정해 버리는 게 무서웠어.


알바로 근근이 용돈벌이를 하며 거리를 쏘다니던 어느 날, 시위대와 부딪혔어. 한국 역사에 기록될 대규모 시민항쟁이 벌어진 해였거든.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찻길 한 가운데로 뛰어들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 순식간에 교통이 마비되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오던 때였어.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나는 깃발아래 갈 수가 없었어. 구경하다가 최루탄에 도망가는 보이지 않는 시민일 뿐이었어.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삶에 지쳐가고 있었어.


그때 쯤 엄마한테 자퇴 사실을 들켜버렸지. 엄마는 조용히 물었을 뿐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아무런 준비된 답도 없었는데,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 나왔어. ‘다시 공부할게.’ 1년 반 동안의 방황은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어. 그래서 난 횟수로는 ‘재수’, 묵은 햇수로 따지면 ‘삼수생’으로 구분되는 그 ‘무엇’이 됐고, 다시 입시를 치르고는 대학생이 됐어. 대학생이 되고나니 ‘너는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해방됐어. 이제 난 안전한 성안에 들어간 거니까.


하지만 내 맘엔 비겁함에 대한 수치심이 남았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과 삶에 대한 미안함도 버릴 수가 없었어. 내가 일부러 해치지는 않았을지라도, 무심코 읊어대고 편승하는 ‘기준’ 때문에 분류되고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계속 신경이 쓰였어. 어쩌면 그것 때문에 내가 졸업 무렵 대학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인권’이란 단어를 처음 듣고 충격 받았던 건지 몰라. ‘바로 이거다’하고 말이야.


세상의 많고 많은 기준에 의해 ‘무엇’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권리가 많아. 하지만, 그 ‘무엇’에 의해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없는 게 많아. 특히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은 불평이든 제안이든 독백이든 대화든 말할 자격에 끼일 수 없는 것 같고 그게 더욱 비참한 것 같아.


김예슬 선언의 경우를 보면, 엄마가 보는 TV 뉴스 말고, 인터넷 뉴스 같은데 이런 반응들이 있어. 그 여학생의 경우엔 소위 좋은 대학 좋은 과 출신이니까 뉴스가 됐지, 지방대 출신의 학생이 자퇴 선언을 했으면 뉴스가 되기나 했겠냐고. 그 ‘무엇’에 속했던 그 여학생의 말은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만, 그 ‘무엇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말조차 꺼낼 수 없고, 말을 해도 누가 듣겠느냐는 반응이었어. 그리고 대학에 가보지 못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미치도록 그 대학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어.


그런 말들에 귀 기울이고, 계속 말을 하라고 권하는 사회가 인권을 존중하는 거라고 생각해. 엄마! 내가 생각하는 인권은 ‘무엇’이란 기준보다는 ‘사람’이 먼저 존재한다는 거야. 그 어떤 잣대로도 잴 수 없고 계산해낼 수 없는 가치가 각 사람에겐 있다는 거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 속할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인권이야. 누구나 소중한 그 ‘무엇’이고,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어. 당연히 누구에게나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의무도 있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외면하는 외부의 기준에 의해 아무것도 아닌 삶으로 내쫓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은 똑같은 거야. 엄마 말처럼 인권에서 밥이 나오겠어, 떡이 나오겠어? 그러나 서로의 평등한 가치를 존중하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로 인해 밥도 나누고 떡도 나누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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