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75 호 [기사입력] 2014년 01월 0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새해가 왔다. 챙겨보진 않았지만, 늘 그랬듯이 각종 언론은 새해에 태어난 첫 아기의 울음소리를 섞어 새해가 돼서 달라질 것들, 좋아질 것들을 편집해 희망을 노래했을 것 같다. 하지만 연말부터 메아리쳤던 ‘안녕하십니까’란 물음에 꿈쩍도 않는 정치와 불통에 새해는 꽁꽁 얼어붙었다.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타살이라 할 죽음의 통곡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이제 좀 멈춰줬으면 좋겠는데 계속되는 송전탑 공사와 밀양주민 패대기치기,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질주, 청소년부터 청소노동자까지 입 다물 것을 강요받고 위협받는 상황…….
2013년 말, 인권단체들은 인권의 날(12월 10일)을 맞아 “인권의 그날들을 기억하는 우리, 불평등에 맞서는 연대로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다”란 기자회견을 했다. 해마다 갖는 행사였지만 그날따라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다”란 말이 참 사무쳤다. 밥상에 으레 오르는 줄 알았던 ‘김치’가 어느 날 ‘금치’가 되듯, 무감각하게 나열하던 ‘인간존엄성 존중’이란 말에 목이 메이는 시절이다. ‘이익이 걸려 있으니 안타깝지만 존엄성 훼손을 어쩔 수 없다’고 민망해하는 수준도 아니라 ‘이익을 위해선 존엄성 따윈 따질 거리가 못 된다는 뻔뻔함이 미세먼지처럼 자욱하다.
알다시피, 인권의 날은 세계인권선언의 제정(1948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1947년 1월, 유엔인권위원회가 그 첫 회기를 가졌고 그 목표는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와 철학적 차이가 너무 심해서 진행이 되질 않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갈등을 축으로 해서 개인이 먼저냐 사회가 먼저냐, 권리냐 의무냐, 자유냐 평등이냐 등의 논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네스코는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위원회’를 통해 문제 해결에 기여하려 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이 유네스코 위원회의 최종보고서이다.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보고서”란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읽어보면 밋밋하기만 할 뿐이다. 어떤 세련되고 유려한 철학이나 지식적 체계를 거의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밋밋하기만 한 문서에 담긴 보석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인정’이다.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대한 입장이나 형이상학적 논쟁에 갇혀 있어서는 인권선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 너무나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종합한다는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라 인류애의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에 합의하자는 것이 이 보고서의 목표였다. 이에 유네스코는 인권의 철학적 원칙들을 연구하는 위원회를 만들고 전 세계 약 150여명의 사상가들에게 질문지를 보내 답변을 받았다. 이 조사를 토대로 영국의 역사가 E.H.카를 의장으로 작성한 것이 이 보고서이다.
다양한 철학적 접근과 해석 하에서 가능한 합의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추린 것이 ‘존엄성’이었다. 이론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에 합의하자는 정신이었기에 ‘왜 존엄하냐?’는 존엄성의 근거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않았다. 즉 인간이 이런저런 본성을 가졌으니까 존엄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존엄성을 존중해야만할 이유에 대해서 합의한 것이고 인류 앞에 놓인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합의한 것이다.
인권의 토대를 ‘인간존엄성’으로 삼은 것은 이전 시대의 인권과 현대의 인권을 구분하는 표지석이다. 여기서 인간존엄성은 신 또는 자연이 부여한 것도 아니고 이성 또는 여타의 능력이나 자질로 인해 갖는 것도 아니다. ‘인간존엄성’은 인류간 대화를 통해 합의한 인권의 토대이다. 어떤 학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합의를 여타 합의의 정당성을 따지는 잣대로 봤다. 예를 들어 나치의 통치는 철저히 합의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런 합의를 민주사회에서의 합의가 아닌 것으로 배척할 이유는 나치의 합의에는 인간존엄성 존중이 결여됐다는 것이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받아들고 처음에는 냉대했다. 유네스코 위원회의 월권이라는 불편한 심기가 작동하기도 했고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싶은 태도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은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로서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에 합의하게 됐다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모든 국제인권법의 바탕에는 존엄성 존중이 깔려있다. 인권학자들은 이것을 인간존엄성의 ‘수립적 기능’이라고 말한다. 뒤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그 어떤 내용이 됐든 ‘인간존엄성’의 그물 안에 걸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가인권위원장 격인 영국의 ‘평등과 인권위원회’의 반 부에렌(Van Bueren) 위원장은 ‘내핍의 시대에서 존엄성, 평등, 인권의 의미’에 대해 연설한 바 있다. 그녀는 존엄성에 대한 법적 권리 말고, 즉 추상적인 개념 말고 우리의 감정과 가치에 호소하는 존엄성에 대해 말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게 엘레인 맥도날드란 여성이다. 엘레인은 발레리나였는데 뇌졸중으로 쓰려졌다. 그 후 장애를 얻어 한밤중에도 여러 번 화장실에 가야만 하고, 화장실에 가다가 자주 넘어지고 병원신세를 져야하는 일도 있었다. 엘레인은 야간 돌봄을 포함하여 상당한 돌봄 서비스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판단됐다. 그런데 그녀가 거주하는 지자체 당국은 재정긴축을 이유로 야간 돌봄을 철회했다. 엘레인이 기저귀를 차면되니까 야간 돌봄에 대한 청구가 필요치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엘레인은 그 결정을 당연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 결정의 의미는 다음날 아침 8시 30분에 그 다음 활동보조인이 올 때까지 하루에 12시간을 배설물 위에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하는 삶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부에렌 위원장은 질문한다. 엘레인의 경우에 그녀가 경험하는 존엄성 상실은 첫째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돌봄 서비스를 축소하는 결정에 대해 당사자인 그녀에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두 번째의 존엄성 상실은 그 결정으로 인해 엘레인이 겪게 된 모욕적인 상황이다. 배설물에 젖은 기저귀를 차고 하루의 절반을 보내야 되는 삶 말이다.
이 사례에서 부레엔 위원장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경기후퇴를 이유로 한 존엄성의 축소가 가능한 것이냐?”고 말이다. 바꿔 말하면, 존엄성의 훼손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5백여 일이 넘게 차가운 지하도에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해온 한국의 장애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경기가 좋을 때조차 우리의 존엄성을 존중해준 적 있는가?” 정리해고 되거나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노동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얼마나 우리의 존엄성을 짓밟아야 그놈의 경쟁력은 만땅이 되는 것이냐?” 개발이니 국책사업이니 몰아붙이기만 하는 공권력의 폭력에 짓밟힌 주민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누구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존엄성은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냐?”
존엄성은 누구나 가진 것이고 존중은 그것에 대한 인정이다. 즉 인간이 서로를 보는 관점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모든 인권의 밑바탕에는 존엄성 존중이 깔려있다. 물론 현실에선 경제적 합리성 또는 이익, 법적 강제 등이 더 큰 목소리를 낸다. 이런 것들을 논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 논의와 실행이 적어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기본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통의 정치가 합의를 강요하지만 그것은 사실 복종에 대한 강요이다. 존엄성에 대한 합의를 제외하고 합의할 수는 없다. 왜곡된 고용으로 노사관계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자본가나 화장실에서 밥 먹을 것을 강요하는 노동조건과 합의할 수 없다.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시도와 합의할 수 없다. 권력의 평안을 위해 입 다물라는 선도와 계도에 합의할 수 없다. 음주측정기나 대기오염측정기가 각각의 구실을 하듯이 우리의 측정기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다. 존엄성 존중이 빠진 원칙, 법, 합의 따윈 없다.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유네스코 위원회 보고서(1947년 7월 31일) ……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인간의 내재된 존엄성에 대한 신념에 기반해 있다. 인간 존엄성을 더욱 더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존엄성이 보다 완전하며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성취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취하지 않는다면, 유엔은 헌신하기로 약속한 위대한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
인권오름 제 375 호 [기사입력] 2014년 01월 0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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