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439 호 [기사입력] 2015년 05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 [인권단어장]은 [인권문헌읽기]를 마치고 새로 시작하는 기획입니다. 인권에서 자주 쓰이는 말들의 의미를 대화를 통해 생각해보는 기획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게 시작하지만, 점차 나아지는 기획이 되도록 애쓰겠습니다. -글쓴이 류은숙-

- 에휴!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인간의 가치가 땅에 떨어졌어.
- 쯧쯧! 한숨이 하늘을 찌르겠다. 아무리 현실이 힘들어도 ‘인간 존엄성’이 어디 가겠어?
- 인간 존엄성? 그게 뭔데? 난 그 말을 들으면 오히려 무력하고 막연해서 화가 나.
- 인간 존엄성은 한마디로 정의될 수 없지.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니라 존엄성에 대한 상상력을 주고받는 사람들에게 많은 걸 연결해줘. 이를테면 모든 인권의 마중물이라 할까? 네가 지금 인간의 가치가 대접받지 못하는 걸 한탄하는 것도 존엄성에 대한 생각이 있어서이지 않을까?
- 뭐, 그렇긴 하지만…. 뭐 내세울 만한 지위나 자랑거리가 있어야 대접받지, 나같이 하찮은 ‘노바디(Nobody)’에게 무슨 존엄성이 있겠어?
- 그건 아주 과거로 후퇴하는 생각이야. 인류 역사에서 대부분 기간, 사람들은 존엄성에 대해 네가 말한 것처럼 생각했어. 높은 서열의 지위(신분)에 속하거나 뛰어난 덕을 지녀야만 존엄하다고 여겼어. 존엄성의 어원인 ‘dignitas’에는 그런 위계적 요소가 담겨있어. 존엄성은 원래 ‘공경을 요하는 가치’인데 우러름을 요구하는 가치란 게 평등하기보다는 차별적일 수밖에 없는 거야. 높은 집안에 잘 태어나거나 재산이 많거나 명예로운 자질을 갖거나 인데, 명예로운 자질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조건으로 하는 거였어. 그러니까 어차피 존엄성의 조건은 동어반복이야. ‘천한’ 다수와 구별되는 ‘귀하디귀한’ 소수를 위한 용어가 존엄성이었어. 요즘 말로 하면, 보통 사람이 아닌 위대한 사람의 특성인 거지.
- 그런 존엄성이 어떻게 인권의 마중물이라는 거야?
- 존엄성의 성격을 싹 바꿨기 때문에 가능한 거지.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저항으로 존엄성의 의미는 완전히 달라졌어. 즉, 특수한 게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내재적인 것으로, 위계적이고 차별적인 게 아니라 평등한 것으로 탈바꿈했어.
- 도대체 무슨 말인지….
- 현대의 인권에서 말하는 인간 존엄성은 ‘잘’ 태어나는 걸 조건으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으로 충분해. 특별한 소수의 존엄성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것이니 보편적인 거야. 존엄성을 지위‧재산‧덕과 명예 등 외적인 성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속에 내재된 가치로 본거야. 또 모든 사람이 일체의 특질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갖는 존엄성이니 평등한 거야. 어떤 사람의 존엄성도 다른 누구보다 덜하거나 더하지 않다는 거지.
- 어떻게 그런 큰 변화가 생겼지?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 근대인권혁명을 통해 존엄성의 위계적 요소를 떨어뜨리고 부숴왔어. 결정적으로 인간 존엄성의 의미를 확인한 것은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이야.
- 왜 하필 세계인권선언이 계기가 된 거지?
- 세계인권선언의 배경을 생각해봐.
- 두 차례의 세계대전, 홀로코스트, 핵폭탄…. 존엄성과 상반되는 엄청난 사건들이 있었지.
- 맞아. 결코 다시는 벌어져선 안 될 참상을 겪은 사람들에겐 근본적인 가치의 전환과 재확인이 절박했어. ‘다르게 살자’는 구호만으론 될 일이 없어. 구체적인 실천의 기준과 약속이 필요했지. 그게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이야.
- 그 이전 시대에도 인권선언은 많았잖아? 인간 존엄성이 세계인권선언에서 특별할 게 뭔데?
- 뭘 근거로 인간이 인권을 갖느냐, 왜 인간이 존엄하냐는 질문에 대한 접근방식도 답도 다르기 때문이야. 이전 시대의 인권선언은 절대자(신) 또는 신을 대신한 ‘자연’에 기대거나 인간의 ‘이성’을 근거로 인간 존엄성을 정당화했어.
- 세계인권선언의 존엄성은 뭐가 다른데?
- 신이나 자연의 권위를 빌려서가 아니라 존엄성을 ‘인간끼리의 약속’으로 강조한 점이 달라. ‘인간이 조물주의 형상대로 창조됐으니 존엄하다’거나 ‘만물의 영장’이니까, ‘이성을 가졌으니까’ 등등의 설명을 모두 제쳐두었어. 특정 종교나 사상을 뿌리로 하는 일체의 것들을 무시하자는 의미에서가 아니었어.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종교와 사상과 신념, 역사와 문화를 가진 다양한 사람과 민족과 국가들이 있어. 이들 중에 누구의 것을 선택하거나 배척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차이 속에서도 ‘중첩되는 합의점’을 찾을 수 있다고 봤어. 아무리 달라도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자는 데서는 겹치는 합의가 있다고 본거야.
- ‘중첩되는 합의점’이라 …. 그럼, 합의의 목적은 뭐야?
- 실천을 강조한 거지. 인간 존엄성이 이런저런 근거로 정당화된다고 왈가왈부하기보다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실천을 위한 초석으로 삼는 걸 중요시한 거야.
- 그럼,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인간 존엄성의 의미는 뭐야?
- 선언의 제정자들은 그 개념에 대해 콕 집어 정의하지 않았어. 인간 존엄성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부족한 게 아니라 너무 많다고 봤기 때문이야. 아주 다양한 개인과 집단들, 사상과 신념들 속에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강력한 지지가 있다고 봤어. 그리고 인간 존엄성이란 게 어떤 특질이나 본질을 근거로 한다는 시각을 거부했어. 섣부르게 본질을 규정하는 게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고 배척하는 구실이 돼온 역사가 있잖아. 그래서 세계인권선언에서 말하는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갖는 동등한 내재적 가치일 뿐 어떤 특별한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야. 내재적이란 건 기본 장착된 거니까 분리할 수도 없고 줬다 뺐었다 할 수 없다는 거야. 다른 말로 하면, 불가양성과 불가침성을 갖는다는 거야. 모든 인간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가치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거지. 이런 존엄성을 경제적‧정치적 이익이나 그 어떤 것과도 거래할 수 없는 비타협적인 가치로 삼자는 게 세계인권선언의 기본적 약속이야.
- 흉악 범죄를 저지르거나 파렴치한 사람의 존엄성도 그렇다는 거야?
- 물론이지. 존엄성은 성취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내재된 거니까,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치러야 하는 것은 그 죗값이지, 존엄성을 박탈당할 수는 없는 거야. 흔히 행실이나 업적을 따져서 ‘인간 자격이 있네 없네’ 따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에 걸맞은 평가와 처벌 또는 보상이지, 인간 존엄성을 어찌할 수 있는 건 아니야. 타인의 존엄성을 재단하고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흔들리는 건 바로 나의 존엄성의 뿌리야. 인간 존엄성은 상호적이고 관계적인 거니까.

실천을 위한 약속의 전제

-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인간 존엄성이란 게 너무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거 아니야?
- 나는 오히려 다른 예를 들고 싶은데. 인간 존엄성을 ‘너는 온 우주에 하나뿐인 존재’, ‘너는 뭐든지 될 가능성이 있는 존재’란 식으로 말로 치켜세울 뿐이거나 ‘사회가 너를 어찌 대하든 네 자신이 무시하면 괜찮다. 내면의 평화와 자존감을 키워라’는 식으로 주문하는 것이 오히려 존엄성을 낭만화하는 것 같아. 정작 존엄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같이 뭘 실천하자고 하면 내빼잖아? 그런 게 오히려 비현실적인 것 아닐까? 존엄성은 실천을 위한 약속의 전제란 걸 기억했으면 해.
- 지금 하는 말은 인간 존엄성과 인권의 관계의 문제를 가리키는 거야?
- 맞아. 인간 존엄성이 인권의 기초이긴 하지만 둘이 같은 건 아니야. 인권은 인간 존엄성을 현실로 구체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어. 존엄성을 실현하는 삶이 목적이라면, 인권은 그것을 위한 사회적 실천의 세트라고나 할까. 인간 존엄성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게, ‘적어도’ 이걸 지켜줘야 한다는 테두리를 만들도록 해. 인간답게 산다는 것에 대한 기준과 합의가 있어야 실천 여부를 따질 수도 있지.
- 그럼, 구체적인 권리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존엄성은 쓸모없는 거 아냐?
- 존엄성은 ‘쓸모’에 종속되지 않아. 설령 우리가 특정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또는 다수의 타인이나 국가가 우리의 권리를 인정하려 들려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적어도 우리 존엄성을 갖고 있고, 이 존엄성은 결코 앗아갈 수 없는 거야. 쓸모가 있고 없고를 따질 수 없는 가치가 인간 존엄성이니까. 흔히 인간 존엄성을 인권의 초석이라고 하는데, 기본 중의 기본 원칙이라는 말이야. 세상에는 쉽게 합의할 수 없고 서로 다투는 권리와 원칙들이 많아. 이것들이 다툴 때마다 보이지 않는 심판 역할을 하는 게 존엄성이야. 서로 간에 조정이 필요한 여타의 권리나 원칙들과 달리, 존엄성은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이기 때문에 모든 권리와 원칙들의 토대이고 초석이라 하는 거야.
- 결국 존엄성의 쓸모가 있다는 말 같은데.
- 하하. 쓸모란 수단을 강조하는 것 같으니 존엄성의 ‘힘’이라고 말하는 게 어떨까? 때론 무력하고 모호해 보여도, 존엄성은 인간다운 삶의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버티는 힘이 돼. 현실적으로 권리의 보장이 잘돼있는 상황이라면 굳이 존엄성을 호출하진 않을 거야. 존엄성은 눌리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고통과 모욕을 드러낼 수 있어. 존엄성에 호소함으로써 사람들은 부당한 처우를 문제 삼고 정의와 권리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 존엄성은 지금은 안 보이는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버팀목이야. 또 존엄성은 권리의 왜곡을 막을 수 있어. 흔히 재화나 서비스를 받으면 권리가 충족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재화나 서비스가 전달됐다고 해서 존엄성이 존중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어. 오히려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낙인을 찍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재화와 서비스가 이용될 수도 있어. 권리의 가면을 쓴, 존엄성을 위협하는 접근을 가려내는 것이 존엄성의 고유한 힘이야.
- 존엄성의 힘? 존엄성을 말하면 코웃음 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은데.
- 왜 우리가 인권을 받아들이고 인권을 실천하려 하는지, 환기가 필요할 때가 있어. 탁하게 고인 공기를 환기시키듯이 동료 인간에 대한 우리의 감정,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현실을 환기시키는 공기의 주입이 필요해.
- 그러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의 존엄성을 느낄 수가 없는 것 같아. 타인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존엄성에 찬물을 끼얹는 걸 거야. 아주 가끔이라도 존엄성이란 말에 스파크가 일었으면 좋겠어.
-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자동적인 게 아니야. 스파크를 일으키려면 뭔가 계속 자극하고 부딪쳐야지. 존중도 익히고 가꾸고 훈련하는 게 아닐까?
- 존엄성도 어렵지만 존중이란 말도 어려워. ‘존중’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존중받지 못하는 건 수치스럽고 우울하고 화나고, 감이 좀 오는데, 존중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 존엄성을 존중한다고 말하지, 평가한다고 말하진 않잖아. 왜 그런지, 존중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선 다음에 얘기 나눠보자.

 

인권오름 제 439 호 [기사입력] 2015년 05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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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오름 제 403 호 [기사입력] 2014년 08월 14일 14:34:4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고 싶다. 음악애호가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문외한이다.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는 손길 같은 그의 연주에서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앉은키가 첼로 크기와 같은 작달막한 그 연주가의 말을 새삼 크게 떠올리고 싶어서이다.

‘첼로의 성자’로 불리는 그는 훌륭한 예술인일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인류의 양심의 문제”라는 인간애의 소유자였다. 자기 조국에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저항의 표시로 10년간이나 연주를 하지 않았다. 또 독재정권을 돕는 어떤 나라에서도 연주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거리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후 무대에 올리기까지 12년간을 매일 밤 연습했다고 한다. 그의 연주가 그런 각고의 인내와 노력에서 나왔듯 인간 존엄성에 대한 헌신도 말이 아닌 삶으로 표현됐다. 그래서 인간 존엄성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면 나는 그의 말을 우선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우주의 새롭고 진귀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 순간은 전에도 없었고 다시 오지도 않을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나? 2+2는 4이고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라고 가르친다. 우린 언제야 그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가르칠 것인가? 우리는 아이들 한 명 한명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의 존재가 무엇인 줄 아니? 너의 존재는 놀라운 거야. 너는 유일한 존재야.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 너와 똑같은 아이는 없었단다. 그렇다. 너는 경이로움이다. 그러니 네가 자라서 다른 사람, 너처럼 경이로움인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겠니? 너도, 우리 모두도 이 세상이 아이들에게 값진 것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만 한다.”

요즘 감정을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우울, 슬픔, 분노, 무력감, 공포 등이 범벅이 돼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인지 느낄 수 없는 상태인 것 같다. 거리에서 굶을 뿐 아니라 모욕당하는 사람들, 그 고행에 동행하는 사람들이 눈시울을 자극한다. 그 고행을 모욕하고 해꼬지하려 달겨드는 사람들이 피를 거꾸로 돌게 한다. 군대에서 기업에서 학교에서 국경 너머에서 꼬리를 무는 인권침해의 사건들이 마냥 손을 비비게만 한다. 대통령부터 일선 경찰까지 무시와 통제에는 일사분란한데 거기에는 따져볼만한 목적도 가치도 없다. 그들의 영혼 없는 말과 표정에 지친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괴물’로 지목하고 한껏 비웃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으론 헛헛할 뿐이다. 이 비극을 이용해 선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다. 비평가와 선동가엔 물린지 오래고 우리에겐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감정’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으로 돌아가라’가 가장 무지막지한 선동이 아닌가 싶다. 우린 사람이고 싶다.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 삶의 근본을 확인하고 싶다. 막말과 괴물이 넘치는 혼돈 속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인간인가, 인간으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 인간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를 말이다.

지금 ‘아무개들’이 우리에게 인간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가 나눠야 할 말과 감정을 가르쳐주고 있다. 거리에 나와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고 있다. 말도 듣지 않고 문서도 읽으려 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지키려 하고 있다. ‘존엄성이 아니라 돈을 숭배하련다. 차별하고 싶다. 고문하고 싶다. 배척하고 싶다. 정치가 아니라 폭압을 하고 싶다.’ 이제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에 맞서 아무개들이 움직이고 있다. 아무개들 앞에서 누구의 말마따나 “초조해하는 것은 죄”이다.

“(씨랜드 사건)당시 한 신문은 우리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은 대형 참사 가운데 재발가능성이 가장 높은 참사 유형으로 ‘씨랜드 화재’를 꼽은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그 ‘예언’이 얼마나 과학적이었는가를 참담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99년 씨랜드 참사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나온 10여 년 전 인권단체의 논평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막내가 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러한 참사로 가족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안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막내가 되고 싶습니다.”
세월호 유족 대책위 대변인의 말이다. ‘예언’을 바꾸자고 희생자들이 이렇게 절절한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외면한다면, 예언을 실현하려는 고사 지내기가 될 것이다.

‘국가개조’니 ‘이순신이 되라’는 식의 주문 말고 구체적인 이들의 구체적인 호소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거리에서 아무개들이 외치는 호소가 그 구체적인 내용이라면 원칙의 틀을 보여주는 기준이 있다. 인권에서의 그것은 ‘세계인권선언’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역사는 대한민국 건국과 건군의 역사와 같다.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군대가 연륜이 같은 세계인권선언과 발맞춰 가고 있느냐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정 60주년을 맞은 지난 2008년, 세계의 인권전문가들이 위촉받아 <존엄성 지키기: 인권을 위한 의제>를 만들었다. 의장은 제1대 유엔인권최고대표를 지낸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이 맡았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들은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이라 알려지게 됐다. 이 존엄성 지키기 의제 만들기는 스위스 정부가 발의하고 노르웨이, 브라질, 카타르 등 여러 나라가 후원했다. 위원단이 만든 ‘인권 지키기 의제’에 기초하여 8개의 핵심 연구 프로젝트가 착수됐고 각 주제마다 두툼한 연구 보고서가 발간됐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것은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구였다(이 연구보고서의 내용은 다른 기회에 소개할 계획이다).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이 작성한 보고서는 현 시대 인권 과제에 대한 큰 줄기를 담은 것이다. “무력함, 모욕, 비인간화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의 핵심적 차원”이란 지적에서 한국 사회가 지금 겪는 고통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에 대해 “약속을 지키려는 정치적 의지의 결여가 핵심문제”라는 진단은 우리가 일찌감치 내린 진단이라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령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깊숙이 자리 잡은 열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발생하건 동료 인간으로부터 발생하건, 폭력의 명백한 원인들이 잘 통제되는 사회에서 살 때에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안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대신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의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방적으로 맞서는 것”이라며 “조기 행동 전략”을 제안하고 있다.

견실한 진단과 대책이 늘 선동과 모략보다 외면 받는 것이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의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은 지금 우리 눈앞에 아무개들로 꾸려져 있다.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감정을 나누는 속에서 우린 공동의 책임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의 보고서(Report of the Panel on Human Dignity, 2008)

1. 위기의 인권
우리는 뭐가 인권이며 뭐가 국가의 의무인지를 안다. 우리는 또한 인권이 체계적으로 침해되고 무시되며 이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 인권에 대한 높은 열망과 인권현장의 심각한 현실사이의 격차, 정부의 원대한 수사학과 그 약속을 지키려는 정치적 의지의 결여간의 격차가 핵심 문제이고, 이 격차를 메우는 것이 우리 시대의 도전이다. …

2. 인간 존엄성
… 인간 존엄성의 개념은 인간 존재의 특질로서 보편적인 개념이다. 정말로 존엄성 개념은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며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과 더불어 유엔의 핵심 조약과 주요 지역별 인권기구들은 인간 존엄성 개념위에 서있다.
인간 존엄성이 모든 인권에 도덕적‧철학적 정당성을 제공하긴 하지만, 오직 특정한 인권만이 인간존엄성의 개념과 직결된다. 인간존엄성을 위협하는 전형적인 사례는 빈곤과 기아, 제노사이드와 인종청소, 노예제, 인신매매, 고문, 강제 실종, 기타 형태의 자의적 구금, 인종주의와 유사한 형태의 차별, 식민주의와 외국의 점령과 지배이다. 무력함, 모욕, 비인간화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의 핵심적 차원이다. 현 인권의제는 인간존엄성과 직결된 인권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3. 공유하는 책임: 21세기의 접근
… 국제인권법에 따라 인권을 존중‧이행‧보호할 직접적인 국제적 의무를 갖는 것은 우선적으로 국가이다. … 이런 전통적인 인권법의 접근은 21세기 지구화된 세계에서의 인권에 대한 실제적 위협에 더 이상 부응하지 못한다. 비-국가 행위자들에 의한 인권침해가 늘어나는 많은 이유가 있다. 탈규제와 민영화의 정치가 정부의 힘을 침식하고 필수적인 정부 기능(교육, 건강 서비스, 물 관리, 사회보장, 안전과 치안, 감옥 행정 등)을 사기업에게 넘겨주고 있다.
… 따라서 국제법은 배타적인 국가 책임 모델로부터 공유하는 책임이란 21세기의 접근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공유하는 책임이란 무엇보다도 비-국가 행위자들도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제노동기준을 위반한 초국적기업은 직접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 또한 기업은 정부가 저지른 인권침해에 공모하지 말아야 한다. 책임에는 점진적 인권 이행을 목적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포함돼야 한다. 지역민이 굶주리고 극빈상태에서 살아가는 지역에서 기업이 사업을 한다면 그런 상황을 다뤄야할 책임이 있다. … 무엇보다도 극빈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지속적인 침해로 존엄성에 공격을 받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국제적 책임을 수립해야 할 때이다.

4.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 빈곤은 단지 운명인 것이 아니다. 빈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뿌리 뽑힐 수 있는 것이다. 빈곤은 지금껏 필수적인 인권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급격한 침해였다.
… 우리는 빈곤 퇴치의 목적을 단순히 자발적인 발전 목표가 아니라 부국과 빈국, 국제사회의 여타 행위자들 모두의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인권 의무로 바꿔야만 한다. 이런 의무는 헌법적 권리로건 보통 법률로건, 법원과 여타의 국가 기관이 국제기준을 적용하고 준수하도록 국가들의 국내법에도 마찬가지로 포함돼야만 한다.
이런 목적을 성취하는 한가지 방법은 발전과 빈곤 퇴치에 대해 인권에 기반한 접근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빈곤을 인권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이다. 즉 “적절한 영양을 취할 역량, 건강하게 살 역량, 의사결정과정과 사회적 및 문화적 삶에 참여할 역량 등 기본적 역량에 대한 인간의 권리에 대한 부정”으로서 빈곤을 보는 것이다. … 빈곤 정책 결정의 맥락 속에 권리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빈민의 역량강화가 발생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 빈곤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빈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또다른 방법은 법의 지배이다. … 법의 지배란 단지 형식적인 합법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 인격의 최고 가치에 대한 인정과 수용에 근거하고 인격의 최대 표현을 위한 구조를 제공하는 제도들로 보장되는 정의를 말한다. … 빈민은 잘 기능하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접근을 부인당하고 있다. 빈민의 재산권은 결여되고, 고용주들은 흔히 공식적인 시스템 바깥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빈민은 불안한 노동조건으로 고통 받는다. 빈민의 재산과 사업은 법적으로 무시되기 때문에 경제적 기회를 부 인당한다. 결과적으로 빈민은 신용, 투자, 지구적 또는 지역 시장에 접근할 수가 없다. … 민주주의 강화는 빈민의 법적 권한 강화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 빈곤의 실제적 상황을 다루기 위한 접근은 사회보장의 안전망을 만들고 예방 가능한 빈곤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방 가능한 빈곤이란 국가가 이미 쓸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피할 수 있는 빈곤을 말한다. … 국가는 모든 가용 자원을 사용하여 빈곤을 예방하고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철저히 조사하고 검토해야만 한다.

5. 공포로부터의 자유: 폭력 예방으로 인간 안전 강화하기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령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깊숙이 자리 잡은 열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발생하건 동료 인간으로부터 발생하건, 폭력의 명백한 원인들이 잘 통제되는 사회에서 살 때에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일부 집단은 타 집단보다 폭력에 훨씬 취약하다. 가령 여성과 아동은 남성보다 가정폭력의 훨씬 흔한 피해자이다. 노인이나 장애인은 폭력 범죄의 더 쉬운 표적이다. 외국인과 정치적‧인종적‧성적 소수자는 다른 시민보다 경찰 폭력에 더 자주 처하게 된다. 빈민과 홈리스는 자연과 환경 재해에 부자보다 더 취약하다.
… 그런 폭력의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방적으로 맞서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효과적인 조기 경고 시스템으로 다뤄야 하고 안전‧발전‧인권 의제의 일환으로 이용가능한 모든 범위의 장치들을 이용하는 조기 행동 전략으로 다루는 것이다. …

6. 기후 변화: 21세기 안전, 발전, 인권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지구적 도전
새로운 천년의 초입에 과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이 인간이 야기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여전히 논쟁 중이었다. 정치인들은 이런 의심을 아무 행동도 안 취하는 구실로 이용했다. 오늘날, 이런 논쟁은 물 건너갔다. 기후변화는 현실이고 인간이 야기한 것이라는데 압도적인 과학적 합의가 있다.
… 인류에 대한 이 중요한 도전은 천천히 인권담론에 들어오고 있다. 기후변화가 인권에 기반한 접근으로 다뤄져야 할 긴급한 필요라는데 몇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기후변화는 식량, 물, 주거, 재산, 건강과 생명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여 다양한 인권침해의 원인이 된다. 둘째, 기후변화는 평등과 지구적 사회정의에 관한 주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부유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인민들이 기후변화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반면에 그 결과로 가장 고통받는 것은 가난한 사회들이다. … 마지막으로 기후변화는 지구적 해결을 요구하는 지구적 문제이다.

7. 실현의 격차 다루기: 지구적 인권 문화를 향해
인권을 존중‧보호‧이행하겠다는 정부들과 국제 사회의 법적‧정치적 약속과 대조적인 현실 상황간의 실현 격차를 마감하는 것, 아니 적어도 상당히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긴급하다. … 우리는 기준 설정과 모니터링으로부터 진짜 실현으로 긴급하게 나아가야만 한다.
… 사법적‧비사법적 인권 이행 기구, 그리고 국가인권기구가 모든 국가에 설립돼야만 한다. 그리고 인권침해를 방지하고 맞서며 국제적 인권의무의 국내적 이행을 위하여 독립적이며 가능한 한 광범위한 수임사항을 가져야만 한다.
… 초국적 기업들은 인권을 존중하고 실현할 목적으로 명확한 표적과 기준점을 가진 행동 계획을 채택해야만 한다.
… 완전히 독립적인 세계인권법원(World Court of Human Rights)이 인권이사회의 관계기관으로서 모든 의무자에 대한 인권의 사법적 보호를 위임받아 창설돼야만 한다. 세계인권법원은 유엔의 보호하에 다자 조약에 의해 상설 법원으로 설립돼야 하며, 국가와 비-국가 행위자가 저지른 인권침해에 대한 제소에 똑같이 최종적인 구속력있는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가지며 인권피해자에게 적절한 배상을 제공해야 한다.

인권오름 제 403 호 [기사입력] 2014년 08월 14일 14:34:4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87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박경석 교장 선생님이 감옥에 있다. 그는 무슨 무슨 위원장 등 직함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 노들 장애인 야학을 열어 지금껏 책임져왔기에 ‘교장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노들’에서 그는 학령기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장애인들과 더불어 배우고 장애차별과 맞서 싸워왔다. 그가 나에게 ‘교장 선생님’인 것은 또 다른 의미다. 집회나 행사에서 얼굴을 볼라치면 그는 늘 무섭게 따져 물었다. “인권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인권 갖고 이것 좀 어떻게 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인권 갖고 우릴 좀 어떻게 해봐요.”로 이어지는 그의 고함은 학창시절 교장 선생님의 훈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노역 투쟁’이란 이름으로 감옥에 있다. 척수장애를 갖고 있는 중증 장애인인 그가 감옥에 스스로 들어 간 것은 쌓이고 쌓인 벌금 때문이다. 왜 벌금을 때려 맞았냐 하면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24시간 보장과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한 활동 때문이다. 그 죄목 중 하나에는 동료 활동가의 장례식도 포함되어 있다.

2012년 10월 26일 새벽, 서울의 어느 집에서 작은 불이 났다. 단 10분 만에 진압될 작은 불이었지만 사람이 죽었다. 현관까지 단 다섯 걸음밖에 되지 않았지만, 활동보조인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거기 있었다.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12시간만 제공됐기 때문에 홀로 있던 고 김주영 씨는 입으로 펜을 물어 전화기를 눌러 소방차를 불렀다. 하지만, 소방차가 도착하는 그 몇 분 간 홀로 숨이 막혀 죽었다.

장례식이 열린 광화문 광장은 화창했지만 바람이 쌀쌀했다. 추모글을 써온 동료들은 울먹거림으로 계속 멈춰야 했다. 동료를 잃은 슬픔과 비슷한 일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뒤범벅된 장례식은 처연했다. 단상위의 영정을 보는 것도 그 옆의 장애활동가들을 보는 것도 괴로운 날이었다. 우린 차가운 바닥에 앉아 슬픔을 나누고 있는데, 유족을 위해 마련했다는 몇 안 되는 의자에는 국회의원들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장애인은 죽어서야 정치인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복잡하고 심난한 맘으로 헌화를 한 후 나는 광장을 떠났다. 얼마 후 들려온 소식은 기가 찼다. 그 장례식과 보건복지부까지 벌인 추모와 항의 행진이 불법이라며 벌금 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고,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경고하고 지키는 것이 인권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대한 존중의 요구에 돈의 폭력으로 응대하겠다는 사회나 정치는 어디 내다 팔래야 사려고 나서는 데가 없을 것이다. 노동, 평화, 생태, 차별철폐 등 우리 삶에서 지켜야 할 가치를 놓고 벌이는 활동들이 ‘돈 없으면 인간존엄성을 포기하라’는 노골적이고 천박한 협박을 받은 지 오래다. 그런 윽박질에 시달리면서 사람들은 계속 싸우고, 벌금은 쌓이고, 벌금 마련 후원주점에서 가난한 주머니를 털고, 또 싸우기를 계속해왔다. 그런 끝에 우리의 교장 선생님은 자기 몸을 털기로 결심했다. 순순히 벌금 납부의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따위 윽박질에 포기할 나의 존엄성이 아니고, 협박에 멈출 나의 인권 투쟁이 아니란 걸 온 몸으로 가르쳐주겠단다. 손해배상 청구, 벌금 탄압,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온 몸으로 종을 치겠단다. 이제 그 종소리를 들을 때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 문헌은 마사 너스봄의 “핵심적 인간 역량”이다. 너스봄은 삶의 질을 측정하는 기초이자 정치적 계획의 목표로서 ‘역량’(capabilities)을 인권에 도입한 학자이다. 그녀의 목록을 통해 교장 선생님의 종소리를 번역해보려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백번 맞는 말이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흔히 추상적이란 비판을 받는다. 그럼 어떻게 인간다운 삶의 질이란 걸 잴 수 있을까? 너스봄은 기존의 척도들을 비판하면서 ‘역량’을 새로운 척도로 내놓았다.

‘총량이 얼마나 늘었는가?’, ‘평균이 얼마나 높아졌는가?’, ‘투입한 자원이 A라는 사람을 얼마나 만족시켰나?’가 기존의 척도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반면 너스봄이 던지는 질문은 ‘A가 실제로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너스봄의 문제제기는 이런 것이다. GNP의 증가는 실제 그 돈을 누가 가졌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평균은 개개인의 단독성과 고유성을 무시한다. ‘만족’이란 왜곡될 수 있다. 불평등한 가치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며 자신의 선호를 낮추거나 감춘다. 또 얼마나 많은 자원이 투입됐느냐가 실제로 충분히 인간다운 삶이 작동하는지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에 너스봄은 양으로 따질 수 없는 삶의 질,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역량’이란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사람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어떤 것 또는 어떤 목표가 있다. 그걸 역량이론에서는 ‘기능’이라 부른다. 가령 잘 먹고 쉬는 것에서부터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자존감을 가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목표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고 해서 그런 기능들이 실행 가능한 것은 아니다. ‘쉼’이란 기능은 야근과 야간 노동을 당연시하고 강요하는 데서는 실행이 어렵다. 단순히 ‘쉬고 싶다’가 아니라 실제로 야근과 야간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조건(역량) 속에서야 ‘쉼’을 택할 수 있다. 그런 역량을 보장하는 사회 속에서야 각 사람은 쉬는 것과 일중독 중 어느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원했을 소중한 기능을 사람들은 포기하거나 축소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신체적 등 여러 제한 요소로 인한 역량의 박탈 때문이다.

박경석 교장이 이동권 투쟁에서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다. “장애인도 이동할 수 있어야 사람도 만나고, 장애인도 이동할 수 있어야 학교에도 가고 연애도 하고 직장도 가질 것 아닙니까?” “장애인도 이동할 수 있어야”를 무한대로 붙일 수 있는 질문이었다. ‘사람과의 만남, 친밀감, 관계 맺기’란 기능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장애인 개개인의 신체적 제한 요소뿐만 아니라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제약과 방치, 장애인의 표현에 대한 무시, 정치적 억압 등의 역량 박탈로 인한 것이다. 대중교통에 투입된 자원의 총량이나 평균이 아니라 ‘장애인이 실제로 이동할 수 있고 이동을 통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장애인이 충분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를 묻자는 것이 역량 접근이다.

너스봄은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이고 공공정책의 계획과 선택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량의 목록을 만들었다. ‘권리’가 이미 있는데 굳이 ‘역량’이란 것이 필요하냐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너스봄은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 권리를 종이에 써두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가령 한국의 헌법은 기본권 보장으로 차 있다. 하지만 효과적인 국가 행위로 뒷받침되지 않기에 장애인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종이 위의 권리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이 평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애인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역량을 뒷받침 받지 못한 것이지, 장애인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주변 세상이 뭘 했든 안했든 간에, 장애인은 인간으로서 가져야만 하는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인권의 힘이다. 반면 역량의 용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구체적인 척도를 주고자 함이다. 특히 경제적 및 물질적 권리 분석에 역량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불평등한 양의 자원을 썼다는 근거, 또 사회경제적 약자를 완전한 역량으로 이전하기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들 근거를 삼기 위함이다. 왜 12시간이 아니라 24시간 활동지원이 필요한지, 장애인이 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는 기능과 역량을 보장하기 위해 왜 그것이 필수적인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너스봄은 초문화적인 연구들의 인간 공통의 경험에 대한 발견을 요약해서 이 목록을 추렸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기쁨과 고통을 겪고, 다른 사람들과 잘 관계하고 싶고, 의존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인간의 구체적 경험들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원적 필요를 찾았다. 인간 삶과 사회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도 좋은 삶을 추구하는데 필수적인 기초에 대해선 정치적으로 합의할 수 있다고 봤다. 사람마다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구체화의 자리를 마련해둬야 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느슨하고 모호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언제든지 논쟁될 수 있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열려 있는 목록이다.

너스봄은 어떤 역량 이하로는 인간이 진정으로 기능할 수 없는 역량의 하한선을 설정할 수 있다고 봤기에 이런 목록을 만들었다. 그런 역량의 하한선 이상을 시민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의 목표가 돼야 하고 국가는 그것을 보장할 적극적 의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시민에게는 자기 정부에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그녀 주장의 핵심이다.

역량의 하한선을 낮출 대로 낮추고 쥐어짜자는 것이 목표가 되고, 국가는 그것을 방관하거나 적극적으로 돕고, 역량의 보장을 요구하는 시민의 권리행사에 벌금을 때린다. 여기서 교장 선생님이 온 몸으로 울리는 종소리는 “자기 존중과 모욕하지 않는 사회적 토대”를 같이 갖자는 외침이 아닐 수 없다.

마사 너스봄(Martha Nussbaum)의 “핵심적 인간 역량”(The Central Human Capabilities)

1. 생명: 조기 사망 또는 소진되기 전에 죽지 않고 인간의 평균 수명까지 살 수 있을 것
2. 신체적 건강: 출산관련 건강상태를 포함하여 좋은 건강을 가질 수 있을 것, 충분한 영양 취하기, 적절한 거처 가지기
3. 신체적 통합(Bodily Integrity): 자유롭게 장소 이동할 수 있기,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포함하여 폭력적인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기, 성적 만족의 기회를 갖고 출산 문제에서 선택권 가지기
4. 감각, 상상력, 사상: 감각을 사용하고, 상상하고 생각하고 추론할 수 있기. “진정으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런 것들을 할 수 있기. 인간적인 방식이란 적절한 교육으로 길러지는 것이고 읽고 쓰는 능력이나 기본적인 수학적‧과학적 훈련을 포함하지만 단지 그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선택한, 종교적‧문학적‧음악적 및 기타의 것을 경험하고 생산하는 일과 사건과의 연결 속에서 상상과 사유할 수 있기. 정치적‧예술적인 표현 둘 다의 자유와 종교적 행사의 자유의 보장으로 보호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신을 사용할 수 있기. 즐거운 경험을 가질 수 있고 불필요한 고통을 피할 수 있기.
5. 감정: 우리들 외부의 사물과 사람들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기.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부재에 슬퍼하기, 일반적으로 사랑하고 슬퍼하고 그리움‧고마움‧정당한 분노를 경험하기, 공포와 분노에 의해 자신의 감정 발전을 망치지 않기. (이러한 역량을 지지한다는 것은 감정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인간적 결합의 형태를 지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6. 실천 이성: 선의 개념을 형성하고 자기 삶의 계획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기.(여기에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보호가 포함된다.)
7. 관계:
A. 타인과 더불어 타인을 향해서 살 수 있기, 타인을 인정하고 관심을 보이기,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기, 타인의 처지를 상상할 수 있기.(이런 역량을 보호한다는 것은 그런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제도들과 결사의 자유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보호한다는 의미다.)
B. 자기존중과 모욕하지 않는 사회적 토대 가지기,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가치로 존엄한 존재로 대우받을 수 있기. 여기에는 인종, 성, 성적 지향성, 종족, 신분, 종교, 민족에 근거한 비차별 규정이 포함된다.
8. 인간외의 종: 동물, 식물, 자연세계에 대한 관심과 관계 속에서 살 수 있기.
9. 놀이: 웃고, 놀고,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기.
10.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
A. 정치적: 자기 삶을 다스리는 정치적 결정들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정치적 참여의 권리와 자유로운 표현과 결사에 대한 보호 누리기.
B. 물질적: 재산을 소유할 수 있기(동산과 부동산), 타인과 동등한 토대위에서 재산권 갖기, 타인과 동등한 토대위에서 고용을 추구할 권리 갖기, 원치 않는 수색과 압수로부터의 자유롭기, 노동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일할 수 있고, 실천 이성을 행사하고, 다른 노동자와 상호 인정하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기.
(출처: Martha Nussbaum, Human Rights and Human Capabilities, Harvard Human Rights Journal Vol.20, 2007)

인권오름 제 387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75 호  [기사입력] 2014년 01월 0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새해가 왔다. 챙겨보진 않았지만, 늘 그랬듯이 각종 언론은 새해에 태어난 첫 아기의 울음소리를 섞어 새해가 돼서 달라질 것들, 좋아질 것들을 편집해 희망을 노래했을 것 같다. 하지만 연말부터 메아리쳤던 ‘안녕하십니까’란 물음에 꿈쩍도 않는 정치와 불통에 새해는 꽁꽁 얼어붙었다.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타살이라 할 죽음의 통곡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이제 좀 멈춰줬으면 좋겠는데 계속되는 송전탑 공사와 밀양주민 패대기치기,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질주, 청소년부터 청소노동자까지 입 다물 것을 강요받고 위협받는 상황…….

2013년 말, 인권단체들은 인권의 날(12월 10일)을 맞아 “인권의 그날들을 기억하는 우리, 불평등에 맞서는 연대로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다”란 기자회견을 했다. 해마다 갖는 행사였지만 그날따라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다”란 말이 참 사무쳤다. 밥상에 으레 오르는 줄 알았던 ‘김치’가 어느 날 ‘금치’가 되듯, 무감각하게 나열하던 ‘인간존엄성 존중’이란 말에 목이 메이는 시절이다. ‘이익이 걸려 있으니 안타깝지만 존엄성 훼손을 어쩔 수 없다’고 민망해하는 수준도 아니라 ‘이익을 위해선 존엄성 따윈 따질 거리가 못 된다는 뻔뻔함이 미세먼지처럼 자욱하다.

알다시피, 인권의 날은 세계인권선언의 제정(1948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1947년 1월, 유엔인권위원회가 그 첫 회기를 가졌고 그 목표는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와 철학적 차이가 너무 심해서 진행이 되질 않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갈등을 축으로 해서 개인이 먼저냐 사회가 먼저냐, 권리냐 의무냐, 자유냐 평등이냐 등의 논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네스코는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위원회’를 통해 문제 해결에 기여하려 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이 유네스코 위원회의 최종보고서이다.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보고서”란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읽어보면 밋밋하기만 할 뿐이다. 어떤 세련되고 유려한 철학이나 지식적 체계를 거의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밋밋하기만 한 문서에 담긴 보석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인정’이다.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대한 입장이나 형이상학적 논쟁에 갇혀 있어서는 인권선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 너무나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종합한다는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라 인류애의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에 합의하자는 것이 이 보고서의 목표였다. 이에 유네스코는 인권의 철학적 원칙들을 연구하는 위원회를 만들고 전 세계 약 150여명의 사상가들에게 질문지를 보내 답변을 받았다. 이 조사를 토대로 영국의 역사가 E.H.카를 의장으로 작성한 것이 이 보고서이다.

다양한 철학적 접근과 해석 하에서 가능한 합의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추린 것이 ‘존엄성’이었다. 이론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에 합의하자는 정신이었기에 ‘왜 존엄하냐?’는 존엄성의 근거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않았다. 즉 인간이 이런저런 본성을 가졌으니까 존엄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존엄성을 존중해야만할 이유에 대해서 합의한 것이고 인류 앞에 놓인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합의한 것이다.

인권의 토대를 ‘인간존엄성’으로 삼은 것은 이전 시대의 인권과 현대의 인권을 구분하는 표지석이다. 여기서 인간존엄성은 신 또는 자연이 부여한 것도 아니고 이성 또는 여타의 능력이나 자질로 인해 갖는 것도 아니다. ‘인간존엄성’은 인류간 대화를 통해 합의한 인권의 토대이다. 어떤 학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합의를 여타 합의의 정당성을 따지는 잣대로 봤다. 예를 들어 나치의 통치는 철저히 합의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런 합의를 민주사회에서의 합의가 아닌 것으로 배척할 이유는 나치의 합의에는 인간존엄성 존중이 결여됐다는 것이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받아들고 처음에는 냉대했다. 유네스코 위원회의 월권이라는 불편한 심기가 작동하기도 했고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싶은 태도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은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로서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에 합의하게 됐다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모든 국제인권법의 바탕에는 존엄성 존중이 깔려있다. 인권학자들은 이것을 인간존엄성의 ‘수립적 기능’이라고 말한다. 뒤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그 어떤 내용이 됐든 ‘인간존엄성’의 그물 안에 걸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가인권위원장 격인 영국의 ‘평등과 인권위원회’의 반 부에렌(Van Bueren) 위원장은 ‘내핍의 시대에서 존엄성, 평등, 인권의 의미’에 대해 연설한 바 있다. 그녀는 존엄성에 대한 법적 권리 말고, 즉 추상적인 개념 말고 우리의 감정과 가치에 호소하는 존엄성에 대해 말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게 엘레인 맥도날드란 여성이다. 엘레인은 발레리나였는데 뇌졸중으로 쓰려졌다. 그 후 장애를 얻어 한밤중에도 여러 번 화장실에 가야만 하고, 화장실에 가다가 자주 넘어지고 병원신세를 져야하는 일도 있었다. 엘레인은 야간 돌봄을 포함하여 상당한 돌봄 서비스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판단됐다. 그런데 그녀가 거주하는 지자체 당국은 재정긴축을 이유로 야간 돌봄을 철회했다. 엘레인이 기저귀를 차면되니까 야간 돌봄에 대한 청구가 필요치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엘레인은 그 결정을 당연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 결정의 의미는 다음날 아침 8시 30분에 그 다음 활동보조인이 올 때까지 하루에 12시간을 배설물 위에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하는 삶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부에렌 위원장은 질문한다. 엘레인의 경우에 그녀가 경험하는 존엄성 상실은 첫째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돌봄 서비스를 축소하는 결정에 대해 당사자인 그녀에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두 번째의 존엄성 상실은 그 결정으로 인해 엘레인이 겪게 된 모욕적인 상황이다. 배설물에 젖은 기저귀를 차고 하루의 절반을 보내야 되는 삶 말이다.

이 사례에서 부레엔 위원장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경기후퇴를 이유로 한 존엄성의 축소가 가능한 것이냐?”고 말이다. 바꿔 말하면, 존엄성의 훼손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5백여 일이 넘게 차가운 지하도에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해온 한국의 장애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경기가 좋을 때조차 우리의 존엄성을 존중해준 적 있는가?” 정리해고 되거나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노동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얼마나 우리의 존엄성을 짓밟아야 그놈의 경쟁력은 만땅이 되는 것이냐?” 개발이니 국책사업이니 몰아붙이기만 하는 공권력의 폭력에 짓밟힌 주민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누구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존엄성은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냐?”

존엄성은 누구나 가진 것이고 존중은 그것에 대한 인정이다. 즉 인간이 서로를 보는 관점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모든 인권의 밑바탕에는 존엄성 존중이 깔려있다. 물론 현실에선 경제적 합리성 또는 이익, 법적 강제 등이 더 큰 목소리를 낸다. 이런 것들을 논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 논의와 실행이 적어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기본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통의 정치가 합의를 강요하지만 그것은 사실 복종에 대한 강요이다. 존엄성에 대한 합의를 제외하고 합의할 수는 없다. 왜곡된 고용으로 노사관계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자본가나 화장실에서 밥 먹을 것을 강요하는 노동조건과 합의할 수 없다.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시도와 합의할 수 없다. 권력의 평안을 위해 입 다물라는 선도와 계도에 합의할 수 없다. 음주측정기나 대기오염측정기가 각각의 구실을 하듯이 우리의 측정기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다. 존엄성 존중이 빠진 원칙, 법, 합의 따윈 없다.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유네스코 위원회 보고서(1947년 7월 31일)

……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인간의 내재된 존엄성에 대한 신념에 기반해 있다. 인간 존엄성을 더욱 더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존엄성이 보다 완전하며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성취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취하지 않는다면, 유엔은 헌신하기로 약속한 위대한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문화가 다르고 서로 다른 제도들 위에 세워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구성원들은 확실한 위대한 원칙들을 공통으로 갖고 있다. 우리는 온 세상의 모든 남녀가 출몰하는 빈곤과 불안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졌다고 믿는다. 우리는 인류의 노력으로 고통스럽게 세워진 문명의 유산에 대해, 그 유산의 모든 양상과 차원에서, 전 인류가 보다 완전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남녀가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이 누리는 평화와 복지에 한결같이 헌신하기 위해 과학과 예술이 결합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국가들 간의 선의에 기초해, 그들 수중에 있는 권력이 이전 시대보다 훨씬 신속하게 인류의 복지 성취를 진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유네스코 위원회의 견해 속에 담긴 것은 바로 이러한 신념이다. …… 인간의 권리 개념을 옛 부터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 체계로 일부 인권을 보호하려는 장치의 오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권선언의 체계적인 선포는 최근의 일이다. 인권, 존엄성, 인류의 형제애, 위대한 사회속의 인간의 공통된 시민권의 역사는 오랜 것이다. ……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철학자들이 준비한 인간 행복을 위한 정식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및 정치적 제도 속에서의 이행이 요구됐다. …… 우리 시대의 철학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심화시키고 인류의 행복을 위한 정식을 확대했다. 하지만 철학들의 차이는 다양하고 심지어 대립되는 기본권에 대한 해석을 낳았고 철학들의 실천적인 수용이 보다 중요해졌다.

…… 유네스코 위원회는 권리,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들의 미묘함을 탐색하진 않았다. 이 용어들의 해석의 차이는 심화된 정의를 다각화할 수 있을 경향 속에서 훗날의 검토를 위해 남겨둘 것이나, 작동하고 있는 이 용어들의 정의에 대한 합의는 가능하다고 본다. ‘권리’라고 할 때 그것의 의미는 삶의 조건이다. 어떤 역사적 단계의 사회에서나 그것 없이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실현할 수단을 박탈당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 공동체의 능동적 구성원으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말한다.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제약이 없는 상태 그 이상을 의미한다. 자유란 인간이 그 안에서 사회의 능동적 구성원으로 최대한 참여할 수 있고, 그 사회의 물질적 발전이 허용하는 최고의 수준에서 공동체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및 경제적 조건의 적극적인 조직화를 의미한다. 이런 자유는 오직 민주적인 조건하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민주주의 안에서만 자유가 일부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기회를 만드는 평등의 맥락 속에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자유란 한 사람의 권리와 또 다른 사람의 권리 간에 연령 또는 성별, 인종 또는 언어 또는 신념에 의한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유네스코 위원회는 이렇게 작동하는 정의들이 아주 다양한 특별한 해석들의 영향을 받기 쉽고 따라서 아주 모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위원회는 인권선언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들은 어떤 주의(교리)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권리에 관한 합의를 성취하는 것이며, 또한 권리의 실현과 방어를 위한 행동에 관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합의는 아주 다양한 주의들을 근거로 해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인권의 전개와 그것의 성격과 상호관련성에 관한 이론적 차이에 대한 위원회의 논의는 그 차이들을 단일한 정식으로 축소시키는 지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본권에 관한 합의를 얻고 지적인 차이에서 나올 수 있는 인권 이행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 개별 인간, 국가, 국제기구들이 그것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고, 자신들의 모든 권위와 힘을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할 것을 고취시켜야만 하는 것이 인권이다. 인권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본질에 내포돼 있으며, 근본적인 살아갈 권리로부터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권오름 제 375 호  [기사입력] 2014년 01월 0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15 호  [기사입력] 2010년 08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사람이 제 동료인간을 천대하면서 그것으로 제가 높아진 듯이 아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설명이 필요 없는 책, <간디 자서전>이다. 이 책에는 귀한 얘기들이 아주 많지만, 이 글에서는 앞에 인용한 한 문장에 주목하려 한다.

이 문장이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발라순다람은 남아프리카에서 일하던 타밀 출신 계약 노동자였다. 그는 유럽인 중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던 자기 주인에게 이빨이 두 개 부러질 지경으로 몹시 얻어맞았다. 이에 발라순다람은 간디에게 법적인 도움을 구하게 됐고, 간디 자서전에 나오는 이 부분은 간디와 발라순다람이 만나는 장면에 관한 것이다. 당시 유럽인들을 만나는 인도인은 인도 터번을 벗으라는 요구를 받거나 그게 아니면 영국식 옷을 입고 시중드는 일을 하며 살았다. 발라순다람은 간디를 만날 때 유럽인 주인에게 하듯이 터번을 벗으려 했고, 이에 화들짝 놀란 간디는 그를 제지했다.

간디는 타밀 사람이 받는 굴욕을 같은 사람으로서 받는 굴욕으로 느꼈고, 즉각 그것을 중단시켰다. 변호사인 간디가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여기고 발라순다람이 간디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도 간디에게는 굴욕이었다. 이 두 번째 굴욕도 뒤집어버렸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쓴 것이다. 동료 인간을 얕보고 낮추는 것을 요구하는 관행 위에서 누리는 고결함은 가짜이고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간디의 이런 행동과 깨달음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감각과 실천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또한 우리는 지금 존엄성의 실현을 위한 싸움을 가까운데서 목격하고 있다.

열대야에 잠 못 이룬 머리는 지끈, 땀띠와 모기로 이곳저곳 근질거리는 몸은 불쾌 그 자체다. 제 몸 돌보기도 헉헉거리는 이런 때, 물도 없이 밥도 없이 혹은 전기도 없이, 정치와 돈과 언론에 철저히 무시당하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몇 사례만 언급하려 해도 숨이 차다.

도시속의 섬이 돼버린 철거반대 농성지인 홍대 앞 ‘두리반’, 칼국수와 보쌈을 팔던 식당이다. 세입자를 보상대책도 없이 내쫓고 개발이익을 보려는 건설사에 맞서 2백일이 넘게 버티고 있다. 20여일 전에 전기마저 끊겼다. 강을 흐르게 놔두라고 이포보와 함안보 크레인 위에 올라간 환경운동가들, 숨을 태우며 4대강 사업에 맞서고 있다. 돌아온 비리재단에 학교를 내주라는 명을 받게 된 상지대의 학생과 교직원들, 주인더러 강도에게 집을 비워주라고 명하는 그런 법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아스팔트 위에서 싸우고 있다.

나는 이들 싸움의 공통점을 ‘존엄성’의 실현이라 본다. ‘존엄성’은 인권과 늘 같이 다니는 말이지만, 참 설명하기 어려운 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헌법과 국제인권문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대한민국 헌법), “모든 사람은 내재된 존엄성을 가지며 그 존엄성을 존중받고 보호받을 권리를 갖는다.”(남아공 헌법), “모든 인류 구성원의 내재된 존엄성과 동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함이…”(세계인권선언 전문) 등과 같이 존엄성을 명시하고 있다.

이처럼 ‘존엄성’을 인권의 기초로 규정한 것은 과거와 다른 현대 인권의 으뜸가는 점이다. 과거에는 ‘존엄하다’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썼다. 일단 어원으로 따져볼 때 오늘날 쓰는 ‘존엄성’이란 말을 사용한 예가 드물다. 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철학, 유대교 경전과 기독교 성서, 중세 철학 등에서 존엄성과 비슷한 말을 찾아보았지만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고들 말한다. 또한 어쩌다 ‘존엄’이란 말을 썼다 할지라도 그것을 모든 인간의 것으로 여겨서 쓴 것이 아니었다. 사회 속에서 그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 또는 직위 때문에 ‘존엄하다’고 여기거나 어떤 사람이 가진 명성 또는 명예 때문에 ‘가치 있다’고 여겼다. 또는 어떤 사회가 중요하다고 선택한 속성 때문에 존엄하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이성’이라는 속성 때문에 인간이 존엄하다고 여기는 식이다. 심지어 인간의 가치는 다른 모든 것 중에서 그 사람에게 매겨진 가격이라고 말한 철학자도 있었다.

오늘날 인권의 기초가 되는 존엄성은 아주 다르다. 사회적 위계나 서열에서 높은 지위를 가졌기에 존엄하다는 생각은 현대의 인간 존엄성 사상에서 제일 먼저 걷어차인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 존엄성은 ‘평등’에 기초해있다. 모든 인간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존엄하다. 사회적 지위, 인종, 성, 국적, 다른 어떤 사회적 지위의 표시에 상관없이 사람은 존엄성을 갖는다. 존엄성을 갖는다는 것은 ‘존엄에 대한 감각’을 갖는다는 것이다. 즉 존엄성을 알고 느끼는 사람은 굴욕과 인간성 말살을 참을 수 없기에 거기에 맞서 싸운다.

그러나 반대로 존엄감이 없거나 부족해 동료 인간을 상대로 참을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우린 분노하고 존엄감의 결여를 탓한다. 하지만 인간 존엄성에 대한 감각이 부족함을 탓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에게서 존엄성을 빼앗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인권의 장에서는 늘 존엄성을 둘러싼 오해와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계속된다. 내가 높은 사람이니까 존엄하다고 여기는 사람,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복종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 복종 받지 못하면 질색을 하는 사람, 모욕과 굴욕을 받아도 그게 그런 건지 잘 모르는 사람, 높은 쪽을 떠받들고 복종하는 것이 지당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인권을 주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잘난 쪽은 잘나서 인권을 주창할 필요가 없고, 복종하는 쪽은 복종하기에 인권을 제기할 줄 모른다. 주인과 하인과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하인의 복종 없이 주인의 잘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상호의존성은 양쪽의 존엄성 상실을 보여준다.

반면 존엄에 대한 감각을 지닌 사람은 동료 인간을 위해 복무한다. 그런 실천은 영웅적 희생이나 용기와 겉모습은 비슷해 보여도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나와 다른 사람이 다 자유롭고 평등한 인간이라는 기초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인권의 요구가 정당해진다. 인권의 요구는 그것 없이는 존엄한 삶이 가능할 수 없는 조건을 내민다. 존엄하니까 인간은 착취나 굴욕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존엄한 인간은 정부나 그 누구의 개입 또는 강제 없이 내 삶을 내가 조각할 수 있어야 한다(자유). 누구에겐 조각칼을 쥐어주고 누구는 맨손으로 하라 할 수 없다. 삶의 자유로운 조각을 위한 기본 조건은 누구에게나 보장돼야 한다(평등). 그런 조건을 만들기 위한 정치․사회․경제적 및 국제질서 구성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연대).

한편 인간 존엄성에 대해 ‘인간은 만물의 영장’ 식으로 생각하는 것도 과거의 유물이다. 과거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식물이나 바위보다 더 많은 존엄성을 지녔다고 여기고 자연을 점령하고 복종시킬 대상으로 취급했다. 그 결과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이 지구상의 다른 종보다 특별대우를 받을 까닭이 뭐야?’가 현대 인권에 담긴 질문이다. 인간이 존엄하다 할 때 인간만이 중심이고 자연 속의 다른 종을 배제해도 된다는 의미일 수는 없다. 세상 만물은 다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인간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존엄성을 자연 만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깨닫고 실천할 수 있기에 존엄할 수 있다.

존엄성을 실현하려는 사람들은 존엄성 말살에 복종하지도, 굴종으로 협력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저들은 내가 높은 사람이니, 내가 결정했으니 복종하라 강요하고, 내게 돈과 힘이 있으니 떠받들라 하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존엄성에 가격을 매기고 포식성을 드러내고만 있으니 간디 말대로 “사람이 동료 인간을 천대하면서 그것으로 제가 높아진 듯이 아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간디 자서전> 중에서

나는 발라순다람이 손에 터번을 들고 내 사무실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이미 했다. 거기에는 우리가 당하는 모욕을 나타내는 특별한 아픈 사실이 있다. 나는 이미 터번을 벗으라는 요구를 받았었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계약 노동자나 낯선 인도인이 유럽 사람을 찾아갈 때는 그 앞에서 머리에 쓴 것, 그것이 캡이거나 터번이거나 간에, 또 그렇지 않고 머리에 두른 스카프거나 간에 그것을 벗어야 한다는 하나의 관례가 강요되고 있었다. 합장을 하고 절을 하는 것으로도 부족했다. 발라순다람은 내 앞에서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이런 일은 처음으로 당해 보았다. 나는 창피라도 당하는 것 같아 그더러 터번을 두르라고 했다. 그는 하라는 대로 하면서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나타난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나는 언제 생각해 보아도 사람이 제 동료 인간을 천대하면서 그것으로 제가 높아진 듯이 아는 것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인권오름 제 215 호  [기사입력] 2010년 08월 1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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