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8. 7. 1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 8조

모든 사람은 헌법 또는 법률이 부여하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하여 담당 국가법원에 의하여 효과적인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세계인권선언을 다룬 애니메이션을 본 일이 있다. 8조를 묘사한 장면은 이러했다. 한 사람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정말 억울한 일을 겪었다는 게 그 눈물에 흠뻑 녹아있다. 법정과 판사에게로 다가가 눈물로 뭔가를 호소한다. 잠시 후 두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다.

두말 할 것 없이 권리 침해를 받았을 때 구제를 받을 권리는 아주 중요하다. 8조는 선언을 완성하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제안된 조항이다. 선언 기초자 중의 한사람은 “효과적으로 이행되지 않는 인권은 실체 없는 그림자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구제를 받을 권리’를 넣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이 많았다. 반대자들은 다른 조항들은 ‘보장’받아야 할 권리들을 얘기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다 권리를 침해당했을 경우를 집어넣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도 선언의 목적 자체가 이행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선언은 무엇을 목표로 삼을 것인가를 얘기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이행의무를 부과하면 많은 국가들의 동의를 얻어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에서 ‘국제조약’이 아닌 ‘선언’의 형태를 취하기로 일찌감치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어찌됐든 미약한 수준에서나마 선언에 구제 조항이 들어간 것은 다행이다. 선언 이후 다른 국제조약들은 구제 조항의 범위를 더 넓히고 구체화했다.

8조는 국가법원에 의한 구제, 즉 사법적 구제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권침해와 관련된 구제조치가 사법적 조치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궁극적이고 바람직한 구제 형태가 사법적 구제이고 그 가능성을 확대시켜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사법적 접근이 적절치 못할 때도 있다. ‘신속하고 효과적이고 비용이 덜 드는 구제절차’가 절실할 때가 있다. 선언 이후 다른 국제조약들은 사법 구제 말고도 ‘행정 또는 입법당국, 기타 권한 있는 당국’에 의한 조치를 말하고 있다. 인권침해를 부르지 않고 예방할 수 있는 또는 잘못된 입법행위를 뜯어고칠 수 있는 입법조치, 그리고 행정구제, 옴부즈만이나 국가인권위 등의 활동이 여기 해당한다.

8조는 “담당 국가법원에 의하여”라고 말한다. 즉 국내의 구제에만 머무르는 것인데, 자국 정부와 법률로부터 인권을 침해당한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하지 않는다. 선언 이후 국제인권보장체계의 발전 속에서 국내의 구제절차를 통해 구제받지 못한 경우 유엔이나 지역인권기구에 청원할 수 있는 제도 등이 마련됐다.

8조가 보장하는 권리 범위는 “헌법 또는 법률이 부여하는 기본권”으로 되어있다. 대개 다른 국제조약들은 ‘그 조약에서 인정된 권리들’에 대한 구제를 말하고 있다. 이와 비교할 때 선언은 선언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뿐만 아니라 국내헌법과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들과도 관련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대조적인 해석이 있다. 하나는 선언에 열거된 권리들보다 (적어도 문서상으로는) 국내법에 열거된 권리범위가 훨씬 넓기 때문에 8조가 포괄하는 권리범위는 어떤 조항보다도 넓다고 볼 수 있다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기본적 인권과 관련해서는 국제인권법의 기준들이 각국 헌법이 규정한 기본권보다 더 넓다고 보는 입장이다.

사법적인 권리구제에 대해서는 크게 3가지 요소를 말할 수 있다. 첫째, 누구나 권리침해를 당했을 때는 법원에 다가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 둘째, 법원에서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 공정한 재판의 권리가 여기서 도출된다. 셋째, 구제조치가 결정됐다면, ‘집행’이 보장돼야 한다.

누구에 의한 침해인가도 문제가 된다. 다른 국제인권조약들은 ‘그 침해가 공무집행 중인 자에 의하여 자행된 것이라 할지라도’ 실효적인 구제조치를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즉, 국가에 의한 행위는 당연히 구제조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기업에 의한 침해이다. 가령 FTA의 ‘투자자 국가 제소권’ 같은 경우 정작 권리침해를 받은 사람들이나 그들이 속한 나라의 법과는 관계없는 데서 심판이 이뤄진다. 이는 선언 8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구제가 있으려면 적어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고 청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설명 또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처벌부터 하고 쫓아내고 외면하는 사건이 많이 벌어진다. 학생의 소명권 같은 건 없이 징계부터 한다든가 자기 인권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고 단속‧추방해버리는 이주노동자 정책 등을 떠올려보자.

■덧붙이는 글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http://khrrc.org) 연구활동가입니다.

 

작성일자 : 2008. 7. 1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 7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고, 어떠한 차별도 없이 법의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이 선언을 위반하는 어떠한 차별에 대하여도, 또한 어떠한 차별의 선동에 대하여도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호한 기초과정

차별을 금지하는 일반조항은 2조이다.(아래 관련기사 참고) 7조는 ‘법 앞에 평등’, ‘법의 평등한 보호’, ‘차별로부터의 보호’를 특화해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이들 원칙들이 뭘 의미하는가는 결코 만만치 않은 문제이다. 7조를 기초할 당시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선언을 만들던 사람들도 갸우뚱거렸던 문제는 ‘법 앞에 평등’이 선언에 있기는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법률 조항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아야 한다는 것일까, 아니면 법률의 적용이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일까? 법의 내용과 상관없이 적용만 평등하면 된다는 뜻일까? 법의 내용 자체가 평등해야 한다는 것일까? 가령 남성이든 여성이든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법 조항이 ‘똑같아야’ 한다는 건가, ‘모성급여’를 남성에게도 똑같이 주어야 한다고 규정해야 한다는 건가, 법이 인종차별을 조장한다면 그 법대로 해야 한다는 건가, 법의 내용 자체가 인종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건가?

이런 혼란 속에서 선언의 기초자들은 7조의 문장을 이리 바꾸고 저리 바꾸다가 지금의 문장을 남겨 놓았다. 7조는 ‘개인들 사이 그리고 집단 사이의 정당한 구분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법적 처우의 평등을 보장할 의도를 갖는다’는 게 대체적 합의였다. 선언 7조와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유엔 시민‧정치적 권리규약 26조를 만들면서도 비슷한 논란과 고민이 있었다. 우리는 26조에 대한 유엔자유권위원회의 논평(일반논평 18)을 통해 앞의 질문들에 대한 몇 가지 답을 구해볼 수 있다.

△ ‘법 앞에 평등’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의 동일한 취급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18세 미만자에 대한 사형선고 금지, 미성년 범죄자의 성인과의 격리 등을 떠올리면 된다.
△ 실질적인 차별을 바로 잡기 위해 특정 인구에 대한 구체적 사안에 있어 그 외의 나머지 인구와 비교하여 특정 기간 동안 우대조치를 부여하는 것 등은 정당한 차등조치에 해당한다. 차등조치에 대한 기준이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며 그 목적이 본 조약에 따라 정당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모든 차등조치가 차별을 구성하는 것은 아니다.
△ 인종‧성 등 관련한 차별에 대하여 동등하고 효과적인 보호를 보장한다. 재판에 있어서 평등하고, 모든 시민이 공직생활에 평등하게 참여할 권리를 보장한다.
△ 법률을 채택할 때, 그 법률의 내용이 차별적이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차별을 선동하는 것이 될 수 있는 민족적‧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를 법률로서 금지할 의무가 있다.

마지막 부분의 ‘차별의 선동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에 대해서는 논란이 큰데 일부 국가들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차별선동금지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법 앞에 평등’의 접근법

유엔 등이 금지하는 대표적인 차별유형에는 ‘직접차별’, ‘간접차별’, ‘폭력’이 있다. 직접차별은 말 그대로 ‘직접적이고 가시적이고 의도적으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불리하게 대우하는 경우다. 그런데 법률이 직접차별을 규제하는 것만으로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 통념, 관습 등의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이를 수정할 수 있는 새로운 차별개념과 판단기준이 요구되기에 간접차별의 개념이 등장한다.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혹은 ‘중립적’인 기준을 적용하였으나 특정 소수자 집단에게 불이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간접차별이다. 개인의 의사에 반하여 정신적‧신체적 폭력(harassment)을 가하는 것도 차별이다. 여기에는 조롱, 비웃음, 경멸, 농담 등을 포함한 언어적‧시각적인 행위를 통한 괴롭힘이 포함된다. 행위자의 의도성 여부와 관계없이 그러한 행위로 인해 피해자가 공포나 모멸감, 모욕, 불쾌감, 수치심을 경험하였다면 폭력으로 간주한다.

그럼 이들 차별유형에 대해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법 앞에 평등을 추구하는 접근법은 다양하다. 법적 차별의 개념은 불확정적이고, 해석과 판례에 따라 구체적 의미가 규정된다.

제일 간단해 보이는 접근법은 ‘아주 똑같이 대하는 것’이다. 개인의 장점이나 결점을 보면 되는 것이지, 성‧인종‧종교 등의 특성과 개인을 결부시키는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본다. 법률은 그런 특성들을 보지 않고 모든 개인을 똑같이 대하면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식의 접근은 간단하고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단점이 있다. ‘똑같이 대한다’고 했는데 누구랑 똑같이 대한다는 것일까? 사실상 그것은 사회의 지배적인 집단을 기준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가령 임신하지 않는 남성, 정규직 노동자, 비장애인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똑같이 대한다’고 했을 때 문제가 없을까? 이것은 차별을 불러일으킨 지배집단의 기준을 그냥 받아들이라는 것이고, 사회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집단 속에서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을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는 제쳐놓을 수 있다. 그리고 이 접근법에 따르면 국가는 외관적인 법률로 명백한 차별을 삼가기만 할 뿐 차별시정을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아주 똑같이’가 너무하다고 여긴다면, 약간의 수정을 가할 수 있다. ‘아주 똑같이’를 대원칙으로 삼은 가운데 몇 가지 차이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를 가미하는 것이다. 가령 ‘의지로 어쩔 수 없는 불변의 차이’ 몇 가지만 선택해서 예외로 다루는 것이다. 이런 예외에 속할 수 있는 차이에는 임신‧출산, 장애, 교육에서의 소수자 언어 등이 있다.

문제는 특별한 처우를 정당화할 수 있는 차이를 어떻게 고르느냐에 있다. 생물학적 차이만 다룰 것인가, 어떤 차이든지 다룰 수 있는 것인가의 문제가 있다. 또한 선택된 차이에 대한 특별한 처우가 ‘누구랑 같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앞서 지적한 문제가 반복된다. 즉, 지배적인 집단의 기준에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차이’로 선택된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고정되고 진부한 시각을 유발하고 계속되게 할 우려가 있다.

앞의 두 가지 접근법에 대해 ‘문제는 차이가 아니야’, ‘문제는 차이를 바라보는 시각과 구조야’라고 찌르는 접근법이 있다. 개인의 존재나 특성의 차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다. X라는 존재나 특성은 그 본질에 의해 결정된 것도 불가피한 것도 아니다. X는 사회적 사건, 세력, 역사 때문에 존재하거나 형성된 것이고, 이 모든 것들은 달라질 수 있다. 차별의 근거가 되는 어떤 특질은 ‘자연적’이거나 ‘불변’인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사회적 구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배적인 집단의 기준에 근거해 키 맞추기를 하지 말고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구조적으로 왜 불리한지를 따져서 처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골치 아픈 문제들을 남긴다. 이런 주장을 들고 법원에서 ‘법 앞에 평등’을 추구했을 때 과연 얻을 게 있을 것인가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거니와 ‘구조적 불리함을 따져서 처우한다’는 것이 참 많이 모호하다.

현실에서는 이런 접근법이 무 자르듯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섞여있기 마련이다. 어찌됐든 법적 평등의 추구는 ‘강제적’ 영역에서 이뤄지는 접근법이다. 법제도 영역에 들어설 만큼 드러난 차별의 문제(가령 인종차별, 성차별)만 건드릴 수 있고, 드러나지 않은 문제들, 가령 고통스러운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그걸 묘사하는 언어조차 없어서 차별로 여겨지지 않는 문제들(가령 ‘성희롱’ 개념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들)은 건드리기 어렵다. 따라서 ‘법 앞에 평등’을 열심히 추구하는 동시에 우리는 사회적으로 불리하고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편견과 무지를 고치는 노력에도 힘써야 할 것이다.

‘법 앞에 평등’의 한계와 의미

‘법 앞에 평등’은 다른 말로 하면 출발에서의 기회균등, 자유경쟁의 원리다. 기회의 균등이 법률의 얼굴을 가지게 된 것은 근대시민혁명에 연유한다. 혈통과 신분의 특권을 뻐겨대고 버티는 귀족 계급에 대항하여 타고난 혈통과 신분이 아닌 자기 노력과 능력에 따른 평등을 내세운 것은 혁명을 정당화하는 데 아주 효과적인 논리였다.

근대시민혁명은 잘 알다시피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주창했다. 그런데 부르주아계급이 불평등이라 여긴 것은 능력이 있음에도 자신이 속하는 신분 때문에 능력 없는 자보다 열악하게 취급되는 것이고, 부자유란 능력이 있음에도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즉, 능력이 있는 자를 능력 있는 자로, 무능한 자를 무능한 자로 취급하는 것이 평등이며 자유였다.

이 원칙이 방해받지 않고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것을 꿈꾸면서 작성한 권리 구조는 이러했다. 사람들이 평등한 것은 ‘자연적’ 권리에서이고 국가는 이 자연적 권리에 근거해 모든 국민을 국민주권에 대한 평등한 참가자라고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개인의 재능과 장점, 특질 등에 따른 현실에서의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건 내버려둬야 하는 문제이다. 자유로운 경쟁이란 게 재능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향연이 되고, 경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될 가치마저도 경쟁으로 몰아붙이며, 아무리 사회적 불평등의 골을 깊게 판다해도 평등원칙에 위반되는 것은 아니라고 봤다.

이처럼 능력 본위의 평등논리를 법으로 못 박은 것이 근대시민혁명이다. 따라서 근대시민혁명이 내세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은 물질적 평등의 의미가 아니라 ‘모든 시민의 법률에 대한 평등’, ‘시민의 법에 의한 지배’를 의미했다. 자유는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적 소유 및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서의 자유인 반면 평등은 국가에 대한 참여의 평등한 권리, 곧 법 앞의 평등을 의미했다. 이로 인한 폐해에 대해 어떤 이는 “법은 정의롭다. 그것은 빵을 훔친 죄로 부자와 가난뱅이를 평등하게 처벌한다”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그럼 법 앞의 평등은 부인돼야 하는가? 그냥 조소의 대상인가? 그건 아니라는 걸 인권의 역사는 보여준다. 예를 들어 신분차별의 폐지는 재산가와 재산 없는 사람들을 더 확연하게 갈랐다 할지라도 분명 평등의 역사에 새 장을 열었다. 인종차별의 법적 폐지는 분명 개인들이 가진 인종적 증오와 편견을 해소하지 않았고 그에 기인하는 사실상의 차별을 중단시킨 것도 아니었지만, 인종적으로 차별받고 있는 피억압자가 그 차별의 철폐를 스스로 주체적으로 쟁취해 나가기 위한 중요한 전제와 수단을 제공했다. 종교에 따른 차별, 여성에 대한 법적 차별의 폐지도 마찬가지다. 법적으로 차별받고 자유를 빼앗기고 무권리 상태로 짓눌려 있는 상황과 부족하나마 법적으로 자유(특히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부여받고 있는 상황은 보다 완전한 자유·평등의 획득을 위한 투쟁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한 철학자의 말을 빌려 달리 표현하자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법 앞에 평등’은 과거 정치적 주체들의 투쟁의 산물이며, 그러한 투쟁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이전에 일어났던 정치적 투쟁의 사건, 민주주의의 사건은 언제나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인권의 역사에서 평등의 맛을 기억하며 더 깊은 맛을 추구할 것이며 맛보지 못한 사람들을 계속 초대할 것이다.

작성일자 : 2008. 6. 18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6조

모든 사람은 어디에서나 법 앞에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권리를 가진다.

6조는 선언의 전체 30개 조항 중에서 그다지 눈길을 끄는 조항이 아니고, 인용되는 일도 드물다. 그 이유는 너무 당연하다고 여겨서이거나 혹은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럽인권협약에는 6조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6조의 기본 목적은 법의 눈으로 볼 때 인간으로서 다뤄질 모든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 즉 법적 권리와 의무의 잠재적 담지자로 인정될 모든 사람의 권리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것을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은 가령 ‘노예’의 경우처럼 어떤 인간에 대해 법 앞에 인간의 지위를 부인하는 일을 오늘날에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또한 시민권 상실(civil death)의 형벌을 내리는 일, 일체의 법률상의 보호를 박탈하여 추방하는 일은 먼 과거의 일이고 더 이상 어느 국가도 자국민을 상대로 사용하는 형벌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세계인권선언이 2차 대전에서의 반인간적 행위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6조는 더욱 당연하게 여겨진다. 나치는 유대인, 장애인, 동성애자 등 특정 인간을 ‘비인간(비인격)’ 또는 ‘하급인간’으로 낙인찍어서 불평등하게 취급했다. 그리고 그런 취급은 ‘법적으로’ ‘체계적으로’ 이뤄졌다.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부인하는 인간 격하와 침해를 돌아보며 선언의 기초자들은 “법 앞에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권리”를 당연하게 여겼던 것이다.

6조를 별 의미가 없다고 보는 시각에선 “법 앞에 인간으로서 인정”받는 것의 의미가 구체적이지 않기에 6조가 가지는 가치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답해야 하고, ‘인간 존중의 의미가 무엇인가’도 확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선언의 다른 구체적 조항들과 비교할 때 건너뛰는 조항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문제가 많다. 먼저 “법 앞에 인간으로서 인정”받는 것이 과연 ‘당연’하기에 문제될 수 없는가이다. 오늘날 주요한 인권문제는 법 앞에서 권리능력을 가지고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법주체들의 문제가 아니라 ‘법에 따라 법으로부터 추방된 사람들’ 속에서 벌어진다.

사냥 당하듯이 잡혀서 추방되는 이주노동자들은 ‘법의 바깥’에 놓인 사람들이다. 지금의 촛불정국에서 확인돼 듯 집권자는 선택권을 갖는데 주권자들은 선택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탈법자 취급을 받고 있다. 선택의 기회는 갖지 못하면서 발생할 위험부담은 고스란히 떠맡아야 한다. 주권국가 바깥에 놓인 난민 수용소의 사람들, 관타나모 기지에 갇힌 사람들, 분리장벽에 갇힌 팔레스타인 사람들, 세계 곳곳의 ‘불법’ 체류자라 불리는 사람들 등 ‘비인간’으로서 ‘법의 바깥’에 놓인 사람들이 그리도 많은데 6조가 내세운 원칙이 너무 당연하다고 선언하며 잊어버리는 것은 너무한 일일 것이다.

두 번째 입장의 문제도 이와 연관돼 있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놓인 사람들, 법의 안과 바깥의 경계에 놓인 문제들에 인권은 주목해야 한다. 경계는 불확정적이기에 거기에 인권투쟁의 가능성이 있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확정된 구체적 권리에만 인권이 집중한다면 인권은 법 앞에 완전한 인간으로 인정된 사람들만의 명시적으로 쓰인 권리에 머물 것이다. 그런 인권은 사실상 ‘인’권이 아닌 일부 사람들의 권리, 법 안의 사람들의 권리, 좁은 의미의 시민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선언의 여타 확정된 권리들이 ‘어디에서나’ ‘모든 사람’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려면 우리는 잊혀진 6조를 계속 불러내 생각하고 경계를 확장하려는 실천을 해야 할 것이다.

작성일자 : 2008. 6. 3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4조

어느 누구도 노예나 예속상태에 놓이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 및 노예 매매는 금지된다.

‘노예근성’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자유롭고 평등한 동료 인간을 ‘노예’로 삼은 자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노예근성’을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탓을 하는데 엉뚱한 쪽에 대고 하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노예나 예속상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은 일찌감치 국제법의 주제가 됐다. 즉 국제연맹이나 국제연합(유엔)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국제규범으로 노예제를 금지했다. 하지만 ‘금지’에도 불구하고, 또한 ‘요새 노예가 어디 있어?’라는 반응이 부끄럽게도 노예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지던 60년 전에도 노예제는 살아있었고 오늘날에도 살아남아 있다.

오늘날 노예제 형태로 분류되는 현상에는 채무노동, 트래피킹, 가사노동과 이주노동에 대한 착취, 강제노동, 노예혼 등이 있다.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인종분리차별정책)와 식민주의의 발현도 노예제와 비슷한 관행으로 분류돼왔다.

제4조의 배경

‘노예무역의 보편적 폐지에 관한 비엔나 회의 선언과 최종 협약(1815년)’, ‘베로나(Verona) 선언(1822년)’ 등이 일찌감치 원칙을 정했다. 즉 노예무역은 정의와 인간성에 모순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근거로 국가들에게 노예무역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즉각적인 노예제의 금지’를 요구하기는 했지만, 이들 규정의 힘은 약했다. 구체적인 시한과 강행수단이 없기도 했거니와 노예와 식민지를 거느린 국가의 시민들이 가진 자기 이익, 습관, 편견 등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유럽 및 미국 등지에서 최초로 식민지의 노예제를 폐지한 영국의 노예제폐지법(1833년)을 선두로 프랑스 (1848년), 포르투갈(1858년), 네덜란드(1863년), 미국 (1865년) 등이 꼬리를 물었지만 아프리카의 노예시장은 여전히 열려있었다.

1926년 국제연맹은 ‘노예제 조약’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노예제에 대한 국제적 정의를 담았다. 조약에 따르면, ‘노예’란 소유권 행사에 부속되는 권한의 일부 또는 전부의 지배를 받는 사람의 지위 또는 상황이다. ‘노예무역’이란 강제로 노예로 만들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포획·취득·처분하는 것과 관련된 모든 행위로서 일반적으로 노예를 거래하거나 운송하는 모든 행위를 포함한다.

1930년 ILO 강제노동협약(제 29호)은 ‘강제노동’에 대하여 ‘처벌의 협박 하에 사람에게서 뽑아내는 그리고 그 사람이 스스로 자발적으로 제공하지 않은 모든 노동 또는 서비스’라 했다.

1948년 세계인권선언 제 4조는 긴 세월에 걸친 노예제 반대의 원칙을 선언에서 재차 확인해야 한다는 의견의 일치였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강제 노동’을 노예나 예속상태의 새롭게 떠오르는 형태로 여겼다. 따라서 분명한 명시적 언급이 없어도 ‘강제노동’과 관련된 제도와 관행들은 4조에 의해 금지된다고 볼 수 있다.

노예제의 폐해

노예제의 폐해는 두말할 것 없이 심각한 인권침해에 있다. 대표적인 사례인 아메리카의 흑인 노예제를 생각해보자. 노예로 이익을 보려던 자들은 노예 포획을 쉽게 하려고 아프리카인끼리 전쟁을 부추겼다. 외국으로 보내진 노예의 3/4이 전쟁으로 인한 포로였다고 한다. “인간이 아프리카의 동전”이라는 유행어가 생길 정도로 서로를 팔도록 부추겼다. 노예무역으로 인한 수입품은 아프리카의 산업을 약화시켰고, 지배계급은 노예 공급을 통해 부와 권력을 얻고, 연안의 지배자들은 내륙을 약탈했다.

이를 통해 약 1천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출신 흑인이 아메리카의 플랜테이션(식민지의 이주노동에 기초한 대농장)으로 강제 이동됐다. 끔찍한 항해 도중 10명 중 1명 이상이 죽었고, 플랜테이션에서의 사망자 수는 그보다 더했다. 죽도록 일을 시키다가 죽으면 대체 인력을 새로 사는 것을 수지맞는 일로 여겼다고 한다. 노예 농장주에게는 이상적인 노예 훈련법 5단계란 것이 있었다. ‘엄격한 체벌, 열등성에 대한 감각, 주인이 가진 우월한 권력에 대한 믿음, 주인의 기준을 받아들이기, 자신의 무력함과 의존성을 뼛속깊이 느끼기’가 그것이었다.

흑인노예는 니그로법에 의해 다스려졌는데, 법의 눈으로 볼 때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가축이었다. 모계를 통한 노예 신분 승계, 인종 간 성관계 금지, 배심원 없는 특별법정의 재판, 끔찍한 처벌(낙인, 교수형, 팔다리 절단, 거세 등) 등이 그 내용이었으며 주인의 형벌에 의한 노예 사망은 살인이 성립되지 않는다고까지 했다.

이런 끔찍한 일을 정당화 하는 데는 시기별로 성서, 그리스·로마의 전통, 과학으로 위장한 인종주의 이론 등이 동원됐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혹독한 조건에 놓인 자유노동자보다 주인이 보살펴주는 노예의 형편이 더 낫지 않느냐는 주장도 있었다. 어떤 정당화 이론(?)이든지 그 속내는 노예를 ‘인간’으로 보지 않음으로써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속편해지자는 것이었다.

공감과 연대의 훼손

서로를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이 어느 한편에게만 일방적으로 피해이고 이익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디에서나 노예노동은 자유민 노동력의 가난을 의미한다. 옛 노예 주인에게나 현대의 산업자본가에게나 노예제의 골격이 되는 인종차별은 노동자간의 단결과 연대를 막는 중요한 무기다. 지배하고 착취하는 권력은 서로의 고통과 처지를 공감하고 같이 저항해야 할 사람들을 갈라놓으려 한다. 그래서 노예 또는 노예처럼 치부되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불신하고 꺼림칙하게 여기도록 하는 방법이 개발됐다. 이것이 인종·성차별 등 ‘무슨무슨 차별주의’라는 이름 붙은 것들의 역할이다.

처음에는 백인계약 노동자들과 아프리카 노예들이 저항 투쟁도 같이 했고, 빈민들도 노예들의 고통을 자신들의 고통과 동일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인종장벽이 강화되면서 점차 열등하다고 색칠된 쪽을 ‘내 일자리 빼앗는 놈들’, ‘파업의 파괴자’, ‘더럽고 무지한 놈들’이라 괴롭히면서 울분을 토해내는 배출구로 삼았다. 노예제의 폐해는 무엇보다도 동료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 저항해야 할 상대를 잘못 보는 것, 그로 인한 공감과 연대의 훼손일 것이다.

선언 이후

국제사회는 세계인권선언 이후 노예제와 예속상태를 반대하는 원칙을 계속 새겨왔다. 대표적인 것들이 아래의 목록이다.

인신매매 금지 및 타인의 성매매 행위에 의한 착취금지에 관한 협약(1949년)
노예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성매매 착취와 인신매매가 노예제의 형태를 구성할 수 있다는 견해를 취했다. 이 협약은 “(그 사람의 동의가 있다 할지라도) 성매매를 목적으로 다른 사람을 획득하거나, 꾀거나, 유인하여 데리고 가는 자, 타인의 성매매를 착취하는 자”를 처벌하기로 했다.

노예제·노예무역·유사노예 제도와 관행 폐지에 관한 보충 협약(1956년)
1926년 노예제 조약이 포괄하지 못한 유사노예 제도와 관행에 초점을 두었다. 가령 채무 노예, 노예형태의 혼인, 아동과 청소년 착취를 다루고 있다.

ILO 강제노동폐지협약 제105호(1957년)
강제노동은 경제발전을 목적으로 또는 정치교육, 차별, 노동기강, 파업에 참가한 것에 대한 처벌을 목적으로 결코 사용될 수 없다고 규정했다.

유엔 시민·정치적 권리 규약 제8조(1966년)
노예상태와 예속상태를 구분했다. 규약 기초자들은 이 둘을 다른 개념으로 보고 두 개의 분리된 항(1항과 2항)으로 다뤘다. ‘노예제’는 상대적으로 제한적인 개념으로서 피해자의 사법적 인격의 파괴를 의미했고, ‘예속상태’는 보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한 사람의 타인에 대한 모든 가능한 형태의 지배를 포괄한다고 봤다.

경제사회이사회 결의안 1232(XLII) (1967년)
“아파르트헤이트와 식민주의의 인종주의 정책은 유사노예 관행을 구성한다.”

ILO 최저연령협약 제138호(1973년)
아동노동에 대한 국제적 기본기준이 됐다.

ILO 최악 형태의 아동노동협약 제182호(1999년)
노예제, 성매매, 포르노그라피, 불법 행위, 위해한 노동과 관련된 아동에 우선순위를 뒀다.

트래피킹, 특히 여성과 아동에 대한 트래피킹 방지, 억제 및 처벌에 대한 의정서(2000년)
트래피킹에 대한 정의를 확장하여 조직적 범죄 집단에게 착취 받을 때, 특히 강요의 요소와 관련되고 초국적 성격(국경을 넘는 인간의 이동)이 있을 때를 포함했다. “트래피킹이란 위협 또는 무력의 사용 또는 기타 형태의 강제, 유괴, 사기, 기만, 힘의 남용 또는 취약한 지위의 남용, 또는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 자의 동의를 획득하기 위해 지불 또는 혜택을 주고받거나 함으로써 착취를 목적으로 사람을 징발, 운송, 이전, 은닉 또는 수령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하는 착취에는 성적 착취의 형태, 강제 노동 또는 서비스, 노예제 또는 유사한 관행, 농노 또는 장기의 제거가 포함된다. 여기서 말한 어떠한 착취적인 수단이든지 이용됐다면 그에 대한 피해자의 동의와는 무관하게 트래피킹으로 보고 처벌해야 한다.

현대판 노예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논의들

많은 사람들에게 ‘노예제’의 이미지는 지금까지 말한 18세기와 19세기의 노예무역이고 흑인노예이다. 노예제를 과거의 일로 여기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인간을 노예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드물다. 현대의 노예제는 아동노동, 채무노동, 농노, 노예혼, 트래피킹(특히 여성과 아동에 대한), 가사노동과 이주노동에 대한 착취를 포괄한다. 현대판 노예제의 은밀한 성격 때문에 정확한 숫자와 자료를 만드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유사 노예제 관행이 거대하고 광범위하다는 증거는 늘어가고 있다.

동산 노예제(Chattel Slavery)

동산 노예제는 현대판 노예제 형태에서 가장 드물다. 법적으로 거의 모든 나라에서 노예제가 철폐됐음에도 특정 지역에서는 동산 노예가 노동, 성, 양육을 위해 이용되며 낙타, 트럭, 총, 돈으로 교환된다. 동산노예의 자녀는 그들 주인의 재산으로 남아있다. 자유 노예 중에서조차 흔히 이전 주인에게 공물을 지불하며, 이전 주인은 자유 노예의 재산에 대해 상속권을 유지하는 관행이 남아있다. 내전 지역에서는 무장 세력이 마을을 습격하여 남자들을 죽이고 개인 재산으로서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삼거나 경매와 판매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채무노예(Bonded labor or debt bondage)

가장 현저한 것은 남아시아로 알려져 있다. 물론 법률은 노예제를 금지하고 있지만, 채무노동은 카스트 제도나 유사한 형태의 사회계층화 속에서 지역에 뿌리박혀있다. 채무 노동은 또한 선진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채무 노동자는 얼마나 일을 해야 언제쯤 빚이 청산되는지도 모른 채 노예처럼 일한다. 보통 채무 노동자의 자녀는 부모의 채무를 물려받아 일하게 된다.

‘현대판 노예제에 대한 유엔 워킹그룹’은 약 2천만의 사람들이 여전히 채무 노동에 묶여 있다고 본다. 하지만 실제 숫자에 대해서는 계속 논란이다. 해당 정부의 추정치는 턱없이 적고, 인권단체들의 추정치와 10배 혹은 20배 차이가 나곤 한다.

아동노동

국제사회는 약 2억이 넘는 5~14세 아동이 노동하고 있다고 본다. 지역적으로 아시아-태평양의 아동 노동자 수가 가장 크지만 발생률은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에서 제일 높다. 5~14세의 노동은 아프리카 모든 아동의 거의 30%에 육박한다.

아동노동에 대한 요구는 엄청나다. 쌀 뿐만 아니라 성인보다 다루기가 더 쉽기 때문이고 겁먹어서 항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동의 작고 빠른 손가락은 특정 종류의 노동에 더 적합하다는 이유로 동원되고 있다.

가사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

이주노동자는 자신이 국민이 아닌 국가에서 임금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현 세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나라가 아닌 곳에서 살려고 이동하고 있다. 일부는 더 나은 삶의 기회, 교육, 직업을 찾아가는 자발적인 이동이지만, 더 많은 경우에 이주는 강요된다. 사람들은 가난과 내전과 전쟁을 피해서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살던 곳을 벗어나야만 한다.

ILO는 “방법이 무엇이건, 임금기간이 무엇이건 간에 사적 가정에서 임금을 버는 노동, 이 일로부터 금전상의 이익을 전혀 얻지 않은 한 명 또는 몇 명의 고용주에게 고용될 수 있다”고 가사 노동자를 정의한다. 가사 노동은 대개 가정부, 유모, 요리사, 운전사, 정원사 및 기타 개인적 하인으로 종사한다. 일부 가사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는 유사노예의 조건에서 일한다.

지난 10여년, 외국인 이주 가사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증가가 ‘선진국’ 또는 ‘1세계’에서 현대판 노예제로 조명 받게 됐다. 외국인 가사 노동자들은 가장 침해받고 취약한 이주 노동자다. 노예로 산 것은 아닐지라도, 이주자의 기본적 인권은 쉽게 침해되거나 무시된다. 착취는 임금과 시간에 대한 침해로부터 신체적 및 성적 침해에까지 뻗친다. 문서화된 많은 사례들에서 고용주들은 이주 노동자의 법적 문서를 보관함으로써 이들의 이동을 제한한다. ‘노동자’로 간주되지 않기에 가사 노동자들은 노동보호입법으로 포괄되지 않으며, 착취의 손쉬운 대상이 되며, 언어와 여타 문화적 장벽 때문에 취약한 조건이다.

노예 혼인

어린 소녀나 여성이 혼인관계에 들어갈 것을 거부할 권리가 전혀 없을 때의 혼인은 ‘노예 혼인’으로 추정될 수 있다. 이런 결혼의 성사에서 어린 여성은 흔히 돈이나 다른 것으로 지불받으며 교환된다. 때로는 그 남편이 죽으면 다른 사람이 상속하거나 다른 누군가에게 팔린다. 일부 경우에는 어린 소녀와 여성이 부자인 나이든 남성과 결혼할 것을 강요받아 성적 노예 및 가사 노예가 된다. 노예혼은 유엔 협약에서 “노예제와 유사한 관행”에 포함돼 있고, 노예제 보충협약 1조는 이를 금지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노예혼이란 “(i) 거부할 권리가 없는 여성이 돈이나 어떤 종류의 지불에 근거한 혼인을 약속받는 것, (ii) 어떤 여성의 남편, 그의 가족, 또는 친척이 보상을 받고 그녀를 양도할 권리를 갖는 것, (iii) 남편의 사망시에 다른 사람에게 여성이 상속될 수 있는 것”이다.

트래피킹(Trafficking in Persons)
‘트래피킹’은 다양한 국제기관이 사용하는 용어로서 성매매를 포함한 착취적 목적을 위해 폭력의 위협 하에서 이뤄지는 사람의 이동(자발적인 것에서부터 강제적인 것까지 포괄된)을 말한다. ‘인신매매’라고 번역할 수도 있으나 트래피킹의 본래 의미를 다 담을 수는 없다고 보고 그냥 트래피킹이라 쓰고 있다.

1980년대부터 여성에 대한 트래피킹이 주목받았다. 유엔의 추정에 따르면 연간 7십만 명에서 2백만 명의 사람이 국경을 넘어 트래피킹되며 이들은 대개 여성이다. 2000년 유엔 트래피킹 의정서에 따르면 트래피킹이란 ‘위협 또는 폭력의 사용 또는 기타 형태의 강제, 유괴, 사기 또는 속임수의 수단으로 “착취를 목적으로” 사람을 모집, 운송, 이전, 은신 또는 수령하는 것’을 일컫는다. 여기서 착취에는 최소한으로 “타인의 성매매 또는 기타 형태의 성착취, 강제노동 또는 서비스, 노예제와 유사관행, 노역 또는 장기 제거”가 포함된다.

성적 착취를 위한 트래피킹 문제를 현대판 노예제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냐는 문제는 국제인권 무대에서 열띤 논쟁을 낳았다. 한편에서는 모든 형태의 성매매가 본질적으로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격하시키며 착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성 노동을 여성이 자유롭게 선택하는 정당한 직업으로 방어하며 자기결정권의 중요성을 옹호한다. 논쟁의 핵심은 성인의 성매매가 자발적이고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닐 때 정당한 노동형태로 수용돼야 하느냐는 것이다. 논쟁은 2000년 유엔이 트래피킹에 대한 의정서를 만들 때 극에 달했다.

트래피킹을 둘러싼 논쟁

반 트래피킹 운동 진영은 성매매를 위한 모든 형태의 징발과 이송을 동의여부와 상관없이 트래피킹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의 ‘선택’이란 말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선택’이란 사회경제적·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며, 이 맥락 속에서 여성의 권리와 지위에 대한 구조적 불평등을 봐야 한다는 것. 이런 구조 속에서 여성에게 선택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국가 정책과 실천은 여성의 가치와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더 나은 교육과 고용 기회를 제공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여성에게 더 많은 선택의 여지를 줘야 한다.

반 트래피킹 운동 진영은 성산업을 인정하게 되면 성 불평등이 깊어질 것이며, 여성의 지위를 불명예스럽게 할 것이라 우려한다. 성매매에서 여성이 노동자로 여겨지면 포주는 사업가로 변신하며 구매자는 소비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부는 여성이 이용할 수 있는 존엄하고 지속가능한 고용을 만들 책임을 빠져나갈 것이다. 성매매 여성을 범죄자 처벌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여성과 아동을 사는 남성과 성적 착취를 도모하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반면 성노동 옹호 진영은 성매매가 노동이며 트래피킹의 정의에서 ‘폭력적 강제’가 중요하다고 본다. 성산업의 대다수를 형성하는 것은 강요받은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아니라 성 노동자라는 것이 조사결과이다. 여성은 상업적 성행위에 종사하는 것에 대해 고지에 입각한 스스로의 선택을 할 수 있다. 성노동 옹호 진영은 여성을 구제 또는 구조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 자기결정권, 자기표현의 권리, 노동권을 가진 주체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매매 철폐주의자들이 여성의 성매매에 동의할 능력을 부인하며, ‘강요된’ 성매매를 비난하는 데 몰두하느라 정작 자발적인 성노동자의 권리에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결국 성 노동자의 노동조건에 대한 어떤 기준도, 위생이나 공중보건, 안전에 관한 조항도 없고, 공식적으로 직업이 없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억압적이고 강제적인 트래피킹의 전설을 지우고 성 산업에 노동권과 여성권의 요소를 주입할 새로운 틀을 짤 사람은 바로 성 노동자들 자신이며, 이 새로운 틀은 억압받는 여성과 억압하는 남성이라는 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 성노동 옹호 진영의 주장이다.

이처럼 트래피킹에 대한 최상의 전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일부 조치들에 대해서는 합의가 있다. 트래피킹 피해자 또는 성노동자(입장에 따라 뭐라 칭하건)에 대한 주거·재정 및 법적 원조, 트래피킹된 사람을 수용한 국가의 사회적 서비스와 주거에 대한 권리 보장, 트래피킹 범죄자를 다루는 형사절차 과정에서의 여성 보호, 성을 파는 사람과 트래피킹 당한 사람을 범죄처벌대상에서 제외하기, 이들의 조직화 권리를 인정하기 등이다.

강제 노동(Forced Labor)

흔히 강제노동에 대한 오해가 있다. ‘히틀러의 강제수용소’처럼 전체주의 체제의 노동관행으로만 여기는 것이다. 반면에 다소 느슨하게 개념을 사용하여 저임금을 포함한 빈곤하고 건강에 좋지 못한 노동조건을 일컫는 경우도 있다. 일부 국가 입법에서는 임금의 체불, 법정최저임금 아래의 보수를 강제노동상황의 한 요소로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강제노동은 저임금 또는 열악한 노동조건과 단순히 동일시될 수 없다.

강제노동상황은 한 사람과 고용주 간의 ‘관계의 성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수행되는 활동유형(아무리 혹독하고 노동조건이 위험할지라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수행되는 노동이 불법이냐 적법이냐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강제로’ 성매매를 하게 된 여성이 강제노동상황에 있는 것은 그 일의 비자발적 성격과 그녀가 위협 하에서 일한다는 것이지 성매매가 적법이냐 불법이냐와는 무관하다. 또한 그 활동이 잠재적으로 ‘강제노동’의 범위 내에 올 때는 공식적으로 ‘경제적 활동’으로 인정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 강제 하의 아동이나 성인의 구걸 행위는 강제노동으로 간주될 것이다.

ILO의 강제노동에 대한 정의는 두 가지 기본요소로 구성된다. 첫째, 동의 없이 비자발적으로 수행되는 활동이며, 둘째, 불응하면 벌을 가하겠다는 협박 하에서 강요된 노동이나 서비스이다. 예를 들어 물리적 납치, 빚을 지도록 유도하는 행위(통장 위조, 과장된 물가, 노동을 통해 생산된 재화나 서비스의 저가치평가, 과도한 이자 부과 등), 노동의 유형과 기간에 대한 사기 또는 거짓 약속, 임금의 보류 및 미지불, 신분 서류 또는 기타 가치 있는 개인의 소지품 압류, 성폭력, 노동자 자신 또는 가족, 가까운 사람에 대한 신체적 가해, 당국(경찰, 이주당국 등)에 대한 고발과 추방, 더 열악한 노동조건으로의 이전, 식량·주거 및 기타 필수물의 박탈 등의 위협이다.

강제노동은 또한 아동노동의 최악의 형태 중 하나이다. 1999년 ILO의 ‘최악 형태의 아동노동조약(제182호 조약)’은 권리를 가진 개인으로서의 아동이 제3자에 의해 벌 받을 위협 하에서 노동을 강요받을 때, 또는 가족 전체가 제공해야 하는 강제노동 내에 아동노동이 포함될 때 아동노동을 강제노동에 해당된다고 본다.

ILO는 현대판 강제노동의 현저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꼽고 있다. △국가가 직접 하기보다는 사적 에이전트가 수행한다. △빚을 지게 되는 것이 강제의 핵심요소이고, 폭력의 위협이나 노동자와 그 가족에 대한 제재로 뒷받침 된다. △‘미등록’ 또는 ‘불법’이라는 이주자의 불확실한 법적 지위로 인해 강제에 취약하게 만든다. 이들은 아주 착취적인 노동조건을 수락하느냐 추방의 위험을 무릅쓰느냐의 어려운 선택에 직면한다. △강제노동의 피해자들이 타국으로 트래피킹 되기 때문에 법의 사각지대에 있고, 감춰지고 은밀한 형태의 강제를 추적하기가 어렵다.

강제노동을 범죄로 처벌해야 하지만 강제노동이 상세히 규정되지 않아서 법집행기관이 위반자를 찾아내고 기소하기 어렵다. 따라서 강제노동을 단순히 법적으로 금지하고 범죄화하는 것 말고 국가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강제노동의 덫에 빠질 위험을 줄이는 방식으로 노동시장정책 또는 이주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강제노동의 뿌리인 차별, 박탈, 빈곤을 파고들어야 한다는 지적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작성일자 : 2008. 4. 24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3조

모든 사람은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을 누릴 권리가 있다.

3조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선언 기초자 중의 한 사람은 선언 전체의 개념 구조가 18세기 인권철학의 세 가지 주요 사상을 반영한다고 봤다. 1조는 우애의 사상, 2조는 평등의 사상, 3조는 자유의 사상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3조는 선언 4~11조로 이어지는 조항들을 규정하는 기본원칙으로 이들 조항들에서 자유의 사상은 점진적으로 확대된다고 봤다.

이에 대해 3조의 ‘자유’의 의미를 더 확대 해석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즉 18세기 이후로 자유의 사상은 훨씬 넓어졌기에, 사회권에 대한 보장을 포함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에 자유의 의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인격을 완전히 발전시킬 권리이며, 이 발전에 필수적인 모든 요소들에 대한 권리를 의미한다고 봐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3조의 ‘생명, 자유, 안전’에 대한 존중은 국가에 의한 자의적 박탈로부터 개인을 보호한다는 전통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 보장과 증진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의무를 요구한다는 지적이었다.

신체의 자유와 관련해서는 관련 조항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명권과 안전을 중심으로 생각해본다.

현대 인권체계에서의 ‘생명권’

근대 인권체계에서는 국가권력에 의한 자의적인 생명의 박탈만을 생명권의 문제로 봤다. 생명의 향유를 개인의 ‘타고난’ 권리로 봤고, 국가권력은 이를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물리적 힘에 의해 생명을 위협당할 뿐 아니라 ‘결핍’에 의해서도 생명을 박탈당한다. 근대 인권체계는 ‘개인이 생명을 가진다’는 것과 그에 대한 국가의 불개입을 얘기했을 뿐 인간다운 생존을 영위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와 비교해 현대 인권체계는 ‘인간다운 생존’을 적극적으로 고려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리고 생존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따라서 사회보장을 비롯한 광범위한 사회정책을 취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가 되었다.

‘생명권’의 진보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결핍’뿐 아니라 ‘공포’로부터 벗어나 평화 속에 생존할 권리가 중요해졌다. 이를 위해서는 침략전쟁을 부정하고, 군비경쟁이나 군사동맹에 참여하지 않는 외교정책을 지향하는 것 등이 생명권에 부응하는 국가의 책무가 됐다. 평화적 생존권과 더불어 ‘환경권’도 생명권의 현대적 얼굴이다. 환경은 생존과 관련된 문제로 떠올랐다.

사형제는 여전히 진행형

선언 기초 과정에서 사형제 폐지를 생명권에 포함시키자는 제안은 채택되지 못했다. 많은 대표자들이 사형제 폐지가 생명권의 확장이라는 점을 대놓고 반대하지 못했지만 국내의 정치적 이유로 대놓고 지지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선언에선 사형제 금지를 언급하지 못했다. 1989년에 와서야 ‘사형폐지를 위한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2선택의정서’가 만들어진다.

현재 법률상 또는 사실상 사형폐지국(지난 10년 또는 그 이상 기간 동안 사형집행이 이뤄지지 않은 경우)은 133개국이며, 2007년 12월 유엔총회는 사형제에 대한 모라토리엄 결의안을 채택했다. 하지만 이 결의안에 대해 ‘사형은 인권문제가 아니라 사법정의의 문제고, 국가는 자국의 범죄자를 어떻게 다룰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며 공공연한 반대 의견을 밝히는 국가들이 여전히 있다. 또한 사실상의 사형폐지국으로 분류됐던 한국에서 다시 존치론이 등장하는 걸 볼 때 사형제는 여전히 진행형 문제이다.

기술발달과 생명권

선언 기초 과정에서 생명권의 시작점과 종결점에 대한 논의 역시 결론을 맺지 못했다. 인공유산의 문제, 안락사 이용 문제 등 삶과 죽음을 다루는 문제들은 쉽게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에 선언은 이에 대해 침묵했다. 그러나 선언이 침묵했다고 해서 이들 문제를 인권이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술발달로 인한 생명권의 위협요소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배아실험, 인공수정, 태아 성감별법, 장기 판매와 매입, 이종 간 장기이식, 감시 장치, 사생활 침해의 데이터뱅크화, 현대기술로 인한 환경의 파괴, 유전자 조작 농작물 등이 모두 생명권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드는 문제들이다.

과학기술을 그저 낙관하거나 전문가에 맡겨둘 것이 아니라 문제를 공론화하고 연구결과에 함축되어 있는 도덕적 의미를 분석하며 그것을 강제할 국내외적 감시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기술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삶을 영위할 권리, 과학기술의 발전방향이나 우선순위, 속도 등을 정하는 기술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할 권리, 과학정보에 대할 알 권리 등이 새로운 인권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1999년 세계과학회의는 ‘과학과 과학적 지식의 이용에 관한 선언’을 채택하고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 과학 연구와 과학지식의 이용은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해야만” 하며 “모든 과학자들은 높은 윤리적 기준을 설정해야 하며, 국제인권문서들에 명시된 관련규범들에 근거한 윤리 규약이 과학 전문직에 확립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다소 막막할지라도 기본 방향성에 대해서는 논점이 모아지고 있다. ‘인간의 존엄성은 유전적·생물학적 존재 이상의 전인격적 존재로 취급되어야 한다’, ‘이미 자행된 인권침해 사례의 경험에 대한 반응을 넘어서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걸 예방하기 위한 관점에서 논의한다’, ‘정치권력뿐만 아니라 기술을 상업화하려는 민간 기업이나 기술 적용을 원하는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인권에 대한 주요한 도전이 도발된다는 점을 주목한다’, ‘유전자로 인한 차별가능성에 주목한다’, ‘기술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불평등 심화에 주목한다’는 등이 그것이다.

자유와 안전은 목적과 수단

‘안전(security of the person)'은 국가에 의한 자의적인 자유 박탈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의미이다. 여기서 자유와 안전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이다. 즉 안전(또는 안보)정책은 자유권에 대해 복무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 자유냐 안전이냐의 이분법적 접근이나 자유와 안전이 동질의 가치를 갖는 것처럼 슬쩍 바꿔치기 하는 문제가 나타난다. 전통적인 ‘국가안보 대 자유’의 대립 주장이 그러하고, 9·11 이후 소위 ‘테러와의 전쟁’에서 사용되는 논리도 그러하다. 이는 자유와 안전을 거래할 수 있다고 보는 점에서 위험하다. 목적과 수단을 맞바꾸자는 건 말이 안 된다.

국가는 원래 개인의 생명, 자유로운 의사표현, 결사의 자유에 관한 권리 등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 2004년 8월 국제법률가위원회(ICJ)는 베를린선언을 통해 이런 국가의 의무가 권리를 해치지 않으며 안전을 보호할 책임과 갈등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국가가 대테러조치의 명분으로 취할 수 있는 조치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으며, 현재의 인권법과 인도주의법이 국가가 인권에 따른 법적 의무를 다치게 하지 않고도 대테러조치를 취할 충분한 유연성을 허용하고 있으므로 법의 지배와 인권이 후퇴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메리 로빈슨 전 유엔인권고등판무관도 소위 ‘테러와의 전쟁’을 비난했다. 9·11은 “반인류적 범죄”의 관할 하에 있는데 ‘테러와의 전쟁’이란 용어의 사용은 사악한 의도를 가졌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언어를 택하면서 질서와 안보가 다른 모든 고려사항보다 으뜸이라는 강조점의 변화를 가져왔고, 이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축소와 관련되기에 위험하다고 봤다. 계속된 지적은 다음과 같다.

“9·11은 이미 폭력, 질병, 극빈에서 오는 일상적 위험에 시달리고 있는 수백만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들의 불안전은 어디서 다음 먹을 것 구하나, 어떻게 죽어가는 아이의 약을 구할까, 총을 가진 범죄자를 어떻게 피할까, 열 살짜리 에이즈 고아로서 어떻게 생계를 꾸려 가나 하는 것이다.

지난 6년간 대략 2만5천여 명이 테러리스트의 공격으로 전 세계에서 사망했다. 같은 기간 기아, 말라리아, 그리고 기타 예방 가능한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의 수와 비교해보라. 그 수는 하루 2만5천여 명에 가깝다. 발전을 위한 지원은 연간 6백억 달러, 군사지출은 9천억 달러다. 밀레니엄발전목표(MDG) 실천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연간 500~600억 달러가 더 필요하다.

진정으로 안전한 세상을 위하여 우리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채택해야 한다. 즉, 인간안보의 성취이다. 이것은 인권과 인간발전에 대한 새로운 헌신을 요구한다. 국가안보를 넘어선 안전에 대한 광의의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서 말한 인간안보란 빈곤과 절망으로 극단에 내몰리는 사람들이 없어야 하고, 이로 인해 공포와 강압적 안전을 거래하는 일이 없는 사회를 설계하는 것이다. 공포 때문에 정상적인 인간 활동을 줄인다거나 공포 때문에 모든 사람을 감시한다거나 공포 때문에 총과 무기에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은 자유가 아니다. 불행히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일들이 이렇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은 인간안보의 핵심을 ‘보호’와 ‘자력화’라 했다. 보호는 빈곤을 경감시키고 포괄적인 발전을 성취할 국가의 책임(때로는 국제사회의 책임)을 말하는 것이고, 자력화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타인을 위해 행동하는 인민의 능력이다. 자력화된 인민은 자신의 존엄성이 침해받을 때 그에 대한 존중을 요구할 수 있다. 지역적인 많은 문제를 다루고 일할 새로운 기회를 창조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타인의 안전을 위해 결집할 수 있다.

‘공포로부터의 자유’와 ‘결핍으로부터의 자유’가 안전의 목적이다. 선언 3조의 ‘생명,

작성일자 : 2008. 4. 24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2조

모든 사람은 인종, 피부색, 성,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구별도 없이, 이 선언에 제시된 모든 권리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나아가 개인이 속한 나라나 영역이 독립국이든 신탁통치지역이든, 비자치지역이든 또는 그 밖의 다른 주권상의 제한을 받고 있는 지역이든, 그 나라나 영역의 정치적, 사법적, 국제적 지위를 근거로 차별이 행하여져서는 안 된다.

인권의 사랑니, ‘차별’

‘차별’은 인권을 존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싫어하는 말이고 바꾸고 싶은 현실이다. 그런데 차별을 잘 들여다보면 오히려 ‘인권 때문에 차별이 있는 게 아닌가’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권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말한다. ‘모든 사람’이기에 그 어떤 이유로든 어떤 사람을 제외하거나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세상사를 내 뜻대로 하고 싶어 하는 지배자 쪽에서 보면,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서 항의하거나 저항하는 게 싫고 두렵다. 이걸 어떻게 갈라놓을까 궁리해보니 서로를 싫어하고 깔보게 만드는 것만큼 손쉬운 방법이 없다.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체제라고 큰소리쳤지만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할 필요성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사람 또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무서워하고 싫어하고 꺼림직 하게 만들면 된다. 그래서 아무 죄도 없는 ‘차이’들 중에 특정한 것을 골라내서 어떤 것은 특별대우하고 어떤 것은 찬밥취급을 하는 것이 ‘차별’이다.

‘차별’은 움직이는 것

차별의 심각성을 잘 알기에 인권기준 또는 인권규범이라 하는 건 죄다 차별을 금지하는 조항을 앞머리에 달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2조는 그 원조 격에 해당하는 것이다.

선언 제2조에서 열거된 차별 금지 목록을 보면 오늘날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 중에 빠진 것이 많다. 대표적으로 ‘장애’가 빠져있다. 당시 장애를 인권문제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후 수많은 장애인들에 대한 후생사업과 원조에 관심이 있었을 뿐이고, 그 후에는 사회복지의 관점에서 접근이 시도되다가 70년대에 가서야 인권의 접근(예를 들어, 75년 장애인권리선언)이 시작된다. ‘장애’처럼 선언 제정 당시에는 인권문제로 보지 않은 영역이 많았던 것이다.

잠시 한국의 국가인권위법을 들여다보자. 제정 시 진정대상이 되는 차별사유를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지역, 출신국가, 출신민족,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상황,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성적 지향, 병력(病歷)’ 18가지로 명시했다. 이후 개정을 통해 ‘학력’을 추가하고 열거된 목록에 ‘등’을 부가했다. 여기에 열거되지 않았더라도 차별금지기준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다. 국가인권위법은 국제인권기준과 국내인권운동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세계인권선언 이후 변화·발전된 차별에 대한 인식을 볼 수 있다.

차별 조항이 필요한가

선언을 만들면서 차별 조항을 적극 제기하고 지켜낸 것은 당시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권 국가였다. 미소냉전 속에서 소련은 미국의 인종주의와 서구열강의 식민주의를 비난했다. 반면 서구측은 수용소와 정치적 의견에 대한 탄압 등을 들며 소련을 공격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차별 조항에 대해 크게 두 개 입장이 대립했다. 하나는 포괄적인 차별을 다룬 일반조항이 필요하며, 차별금지사유를 상세히 담은 목록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한편은 선언의 다른 조항에서 ‘법 앞에 평등’을 다루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며, 유엔헌장에 열거된 차별금지사유(인종, 성, 언어, 종교)말고 다른 것을 고려할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차별 조항을 원하는 쪽에서는 ‘차별은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국제적 정치 행위로 간주돼야 한다.’, ‘유엔의 임무 중 하나는 차별철폐여야 한다.’, ‘차별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 채택되지 않는다면 미국에서의 흑인 린치 등의 관행이 계속될 것이다.’, ‘차별행위는 범죄를 구성하며 국가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선언이 규정해야 한다.’ 등 강도 높은 의견들을 이어갔다. 그 결과 ‘법 앞의 평등’(선언 제7조) 조항과 별도로 차별을 금지하는 일반원칙인 제2조가 만들어지게 됐다.

구별 또는 차별? 자의적 차별?

‘구별’이냐 ‘차별’이냐는 단어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구별’과 ‘차별’을 같은 내용의 단어로 본 입장에서는 모든 구별이나 차별이 해롭거나 부당한 것은 아니며 유용하고 칭찬할 만한 것도 있으니, 그중에서 ‘자의적’인 것만을 금지하자고 했다.

반면 ‘구별’과 ‘차별’은 그 내용이 다른 단어이기에 ‘차별’이란 단어를 반드시 써야 한다는 입장은 이런 논리였다. ‘차별’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경멸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인간을 해롭게 하는 차별은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한 구별과는 아주 다르다. ‘차별’을 ‘구별’로 대체하는 것은 내용 자체를 바꾸는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

또한 ‘자의적’이란 단어를 쓰게 되면 소위 ‘비자의적’인 차별, 예를 들어 법에 근거한 차별(미국의 흑인법처럼)을 용서하고 정당화할 위험성이 있다. 차별이란 단어가 해로운 구별을 의미하고 있기에 ‘자의적’이란 수식이 없어도 된다.

토론의 결과 ‘차별’이란 단어를 쓰고 ‘자의적’은 빼기로 했다.

식민지 인민의 문제

원래는 식민지 인민의 문제를 별도의 차별조항으로 다루자는 제안으로 논의가 시작됐으나 제안자인 유고와 그를 지지하던 사회주의권이 티토와 스탈린의 관계 청산으로 인해 삐걱거리자 막판까지 이 제안을 밀어붙이지는 못했다. 소련은 식민지 모국이 관할 하의 비자치지역에 대해 가지는 책임을 언급한 유엔 헌장을 인용하며, 비자치지역과 식민지에서의 선거를 압박했다. 식민 권력들은 당연히 식민지 문제를 제기하길 원치 않았고, 양 진영 간에 설전이 이어졌다.

소련도 식민열강 쪽도 아닌 대표들이 식민지 인민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들은 “인류의 양심은 식민지 인민들에 대한 억압이 관용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까지 진보했다.”라며, 일반적인 차별을 반대하는 표현으로 충분하다는 의견에 대해서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식민지 영토에 적용됐던 건 아니었다.”라고 대응했다. 또한 “전문에 담긴 막연한 한 두 줄로는 충분치 않다. 이 조항에 반대하는 대표들은 식민지체제 아래 사는 사람들의 분노와 절망의 감정을 전혀 알지 못한다.”라고 지적했다.

결과적으로 식민지를 특화한 별도의 조항은 채택되지 않았다. 또한 너무 센 언어를 사용하지 말고 좀 막연하고 일반적인 용어가 좋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서 식민지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문구가 제2조 두 번째 문단에 첨부된다.

인종·피부색·민족적 출신·언어

선언에 언급된 ‘인종, 피부색, 민족적 출신, 언어’는 일종의 세트이다. 즉 인종적·문화적·언어적 소수집단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인종과 피부색에 대한 차별 금지는 이미 결론이 내려진 문제였다. 인종은 유엔헌장의 몇 개 안되는 차별목록 중에 맨 앞에 있다. 선언의 대부분 조항이 히틀러의 인종주의 정책에 대한 직접대응이었고 연합국이 전후에 한 첫 번째 일은 히틀러의 인종주의적 법적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45년 포츠담 회담에서 천명된 네 번째 정치원칙은 “모든 나치의 법률-히틀러 체제에 기초하거나 인종, 신념 또는 정치적 의견에 기반을 둔 차별은 철폐돼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추축국 간의 평화 조약 또한 모든 인종주의적 법률과 차별관행의 철폐에 대한 규정을 포함했다. 따라서 선언이 ‘인종’과 ‘피부색’에 따른 차별금지를 하지 않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인종만이 아니라 ‘피부색’이 들어간 이유는 인종에 대한 어떤 과학적인 정의도 없기에 인종이란 단어를 더욱 자세히 하기 위함이었다. 피부색은 가장 명백하고 가장 흔히 사용되는 신체적 특성의 하나로 인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언어’, ‘민족적 출신’도 그런 이유에서 포함됐다.

제2조의 ‘민족적 출신’은 한 정부 아래 다양한 민족 출신의 사람들이 함께 사는 국가들이 있다는 이해 속에서 인종적·민족적·문화적 소수집단을 보호하려는 취지로 포함됐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여기서 말하는 ‘민족적 출신’이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민족적 특질’이라는 의미로 해석돼야 한다는 주석을 붙였다.

소수집단의 ‘언어에 대한 권리’와 긴밀한 문제는 교육권(소수자 집단이 자신들의 학교를 설립하고 자신들이 선택한 언어로 교육받을 권리)과 종교와 법정에서의 언어권 등이다.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정치적 의견’을 언급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다소 의외였다. 당시 대부분의 헌법은 ‘정치적 신념’을 헌법 조항의 비차별 조항에 열거하지 않고 있었다.

‘정치적’을 넣자는 의견은 이렇다. 정치는 인간의 근본적인 활동 중 하나이다. 차별과 처형의 위험 없이 정치적 신념을 자유롭게 보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데는 어떤 해도 없다. 또한 정치적 소수자가 중요해지고 있다. 그것은 더 이상 왕이나 귀족집단에 의한 억압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강력한 국가들은 사상의 반대 집단을 억누르고 있다. 종교적 신념에 대한 조항에서 보장되는 보호가 정치적 의견으로 확대돼야 한다. 사라져가는 경향이 있는 전통적 종교적 소수자보다 정치적 소수자가 더욱 미래에 보호를 필요로 할 것이다. ‘정치적’을 빼고 그냥 ‘의견’으로 하자는 입장에 대한 반론은 ‘명백하게 보장되지 않는 자유는 언제나 부정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권의 반대의견이 셌다. ‘인종적 또는 민족적 증오를 옹호하거나 그로부터 추동된 행위를 옹호하는 정치적 의견은 관용될 수 없다. 나치와 파시스트 집단도 정치적 의견의 자유 같은 목록에 기대서 공공생활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항목을 제거하는 것이 안전하다’는 이유였다.

결론은 “정치적 또는 그 밖의 견해”로 내려졌고, 이는 정치적 의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여타의 의견에도 적용될 수 있다.

재산, 출생, 기타의 지위

‘재산 지위’에 대해서는 논평이 없었다. ‘기타의 지위’에 다 포함되니 재산을 빼자는 의견(미국, 영국 대표) 정도가 있었다. ‘빈민이나 부자나 똑같은 권리를 갖는다는 게 중요하니까 넣자’고 결론이 났다.

‘출생’을 넣은 이유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봉건적 특권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일부 잔여물이 있어서 언급하자는 것이었다. 물려받은 법적, 사회적, 경제적 차이에 기초한 차별금지를 말한다. 즉 상속받은 특권은 없어야 한다는 취지다.

여성의 권리

원래 선언의 대부분의 기초문서는 “모든 사람(all men)”으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여성소위는 역사적으로 “모든”이란 말이 여성을 포함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많은 대표자들도 “모든 사람(all men)”에서의 ‘사람(men)’이 남성을 지칭해왔다는 이유로 불만스러워했다. 이 표현은 역사적인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를 반영한다고 하면서 더욱 분명하게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표현으로 바꿀 것을 희망했다.

여성소위는 남성의 뜻이 다분한 ‘men’이 아니라 성차별적 요소를 배제한 ‘human beings’라는 표현을 ‘모든 사람’에 대한 영어 표현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기 곤란하다든가 이미 여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의미를 갖게 된 단어를 굳이 바꿀 필요가 있느냐는 태도 때문에 채택되지 않았다. 선언 제1조 이외의 모든 조항에서는 “모든 사람(everyone)”으로 표현되고 제1조에서만 “모든 사람(all human beings)”이 사용됐다. 선언에 여전히 남아있는 성차별적 단어와 권리 규정에 대해서는 해당조항에서 자세히 살펴본다.

작성일자 : 2008. 3. 20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편집자 주>

올해로 세계인권선언은 제정 60주년을 맞았다. [인권연구_창]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의 전문과 30개 조항을 현재적 시각에서 분석해본다

이제 세계인권선언(아래부터 선언) 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자. 선언 전문과 1조를 읽어보면 18세기의 근대인권선언과 세계인권선언의 언어는 유사하다고 느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고유한 존엄성”,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 “태어날 때부터” 등의 표현이다. 1조의 첫 문장은 1789년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모델로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이 들게 된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계몽주의 철학에 근거한 것인가? 선언에는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기초가 깔린 것인가?

세계인권선언의 철학적 기초

선언의 기초자들은 논쟁 끝에 ‘신’과 ‘자연’에 대한 언급을 삭제했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인간 이성과 양심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쟁을 피하고 어떤 가치도 절대자나 위에서부터 내려온 것으로 보지 않는 세속적인 문서를 만들려 했다.

권리 목록(내용)에 대한 합의가 시급한 과제였기에 선언 자체에 인권에 대한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기초가 명시될 수 없었다. ‘하나’의 공통된 철학적 기초가 없다는 것이지, 아예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 자유주의적 자연권 사상, 사회주의 사상 등이 선언에는 담겨있다. 선언에 대한 합의가 가능했던 것은 “공통된 관념적 사유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공통의 실천적 인식에 근거해서였고, 이 세계에 대한 하나의 동일한 개념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행위를 인도할 수 있는 하나의 신념체계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선언에 담긴 여러 색깔의 철학 중에서 전문과 1조에서는 계몽주의 사고방식이 유별나게 드러난다. 인권을, 단지 인간임으로서 해서 다른 어떤 이유(가령 사회계약, 정부의 행위, 의회나 법원의 결정 등)도 없이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인간 본성의 원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나, 인권이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지 국가행위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어떤 사람이나 정치적·사회적 기관이 준 것이 아니기에 우리로부터 빼앗아갈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사회주의권 대표들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신과 자연”은 삭제됐지만 1조에서 “이성과 양심”이란 용어는 사용됐다. 이때 “이성과 양심”이 오독될 위험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 의견은 ‘이성과 양심’을 인간 존재를 규정하는 성격 또는 인간의 소유로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억압적인 체제가 사람들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는 걸 봉쇄할 위험성이 있다. 그들이 이성을 적절하게 갖고 있지 않거나 그들의 양심이 ‘그래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말이다.

선언의 기초자들은 이런 문제점을 파악하기는 했지만, “이성과 양심”을 유지하기로 했다. “이성과 양심”이 비판자들이 여기는 것처럼 인권 소유의 존재론적 기초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이성과 양심”을 사람이 인권을 가진다는 걸 알게 될 수 있는 인식장치, 인간의 능력으로 봤다.

또한 이 표현은 전문 두 번째 문단에 있는 “인류의 양심”과 연결된다. 전쟁과 홀로코스트는 인류의 양심에 반하는 것이고, 세계인권선언은 인류 양심의 표현이라고 봤다. 제 1조에서 인권에 대한 천명과 함께 인간의 의무를 포함하는 것이 균형을 이룬다고 봤다. 즉 “이성과 양심”은 “서로를 형제애의 정신으로 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하는 장치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1조에서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했다. 이에 어떤 태어남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즉 ‘신체적 출생’이냐 ‘권리와 의무를 가진 인류 가족 속으로의 도덕적 출생’이냐 ‘법적인 평등’을 말하는 것이냐이다.

‘태어날 때부터’를 신체적 출생으로 본 입장에선 인간 생명의 출발점(가령 태아)을 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표현을 반대했다. 출생의 ‘법적’ 성격을 강조한 입장에선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과연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한가? 법 앞의 권리의 평등은 출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적 평등을 보장하는 법을 국가가 공표해야 가능하지 않는가?

이에 대해 선언이 ‘태어날 때부터’를 채택하면서 취한 입장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불평등한 환경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선언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난다”는 것은 결코 도처에 존재해온 엄청난 불평등을 부인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내재된 고유한 권리를 강조해야 하는 것이다. 선언에서 “태어난다”의 의미는 신체적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평등, 인권을 평등하게 누리는 것, 그에 동반된 의무를 염두에 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선언 전문과 1조에서 말하는 “태어나다(born)”, “고유한(inherent)”, “양도할 수 없는(inalienable)”은 서로 연관된다. 모든 인간 구성원은 ‘타고난 존엄성’을 가지며, 이것은 우리가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나 기관이 준 것이 아니기에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도 없다는 논리구성이다.

혁명적 항거의 권리(the right to rebellion)

원래 저항권을 하나의 독립된 권리조항으로 명시하자는 의견과 그럴 수 없다는 의견이 팽팽히 대립했다. 저항권에 반대한 입장은 ‘저항권을 인정하게 되면 정부에 반대하는 봉기를 장려하는 꼴이 된다’, ‘남용될 수 있다’고 걱정했다. ‘압제에 저항할 권리는 오직 기본적 인권과 자유가 체계적으로 박탈될 때인데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나는가를 결정하는 건 불가능하다’며 결과적으로 ‘저항권을 규범 속에 둘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저항권을 옹호한 입장은 "그 누구도 저항권이 불안정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불합리가 너무 커서 대다수가 그것을 느낄 때까지는, 또한 그것이 수정돼야 할 필요성을 발견할 때까지는 작동하지 않는다"며 저항권에 대한 우려를 반박했다. 나아가 "저항권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정당한 권리를 표현한 것이다. 전제와 폭압에 맞선 저항의 권리를 언급하지 않고서 인권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바로 최근의 역사(나치로 인한 고통)가 저항의 필요성을 말해주지 않느냐, 파시즘에 대한 반대로서 정부에 반대할 권리가 규정돼야 한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다.

적극적 반대의견을 개진한 미국과 영국의 기권 속에 ‘혁명적 저항의 권리’는 결과적으로 별도 조항이 아닌 전문 속에 언급되게 됐다.

세계인권선언과 한반도

1945년 유엔이 창설되고 이후 3년여 선언이 기초되었다. 같은 시기 식민지 조선은 독립을 했다. 그러나 국제적 냉전과 국내의 좌·우익 대립 속에서 분단과 함께 맞은 독립이었다. 선언이 기초되던 3년여 기간 동안 한반도는 소련군과 미군의 군정 아래 놓였고, 선언이 선포된 48년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 각각 정부가 수립됐다. 각각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 주장하며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한 가운데 1950년부터 3년여 동안 이어진 끔찍한 살육의 전쟁으로 치달았다.

분단과 대립 속의 남과 북에서 국가안보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사회적으로나 인권탄압을 정당화하는 구호였고, 경제성장도 마찬가지 구호로 악용돼왔다. 선언의 제정은 1948년 12월 10일인데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같은 해 12월 1일 제정돼 역시 60년을 맞았다.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와 저항을 여전히 틀어막으려 한다. 북한인권 문제는 오늘날 국제인권의 장에서나 국내정치에서나 뜨겁게 다뤄지고 있다.

선언에 담긴 평화와 인권에 대한 열망, 자유권과 사회권의 긴장이 담긴 권리 목록, 인권의 정치화를 둘러싼 논쟁 등 어느 하나도 우리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는 것들이다. 앞으로 30개 조항분석을 통해 이들 문제를 하나씩 생각해보자.

작성일자 : 2008. 3. 20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편집자 주>올해로 세계인권선언이 제정 60주년을 맞았다. [인권연구_창]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의 전문과 30개 조항을 현재적 시각에서 분석해본다.

세계인권선언이 시작된 자리

모든 사람에겐 누가 어떤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고유한 인권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고유한 인권’에는 도대체 무엇이 속하는 걸까?

세계인권선언(아래부터 선언)은 이 질문에 대답함과 동시에 실천을 약속한 선두적인 국제적 문서이다. 선언은 다른 이유 볼 것 없이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 모든 인간에게 권리가 보장돼야 한다는 생각에 터를 잡았다. 선언을 만들고 합의함으로써 ‘국내법으로 못 박아 있어야만 권리가 될 수 있다’거나 ‘자국민의 인권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는 그 국가의 맘’이라는 주장은 한물간 것이 돼버렸고, 인권에 대한 존중이 만인과 모든 국가가 지켜야 할 국제규범이 됐다. 2차 대전이라는 참상의 극한을 경험한 인류는 인권을 증진해야만 세계평화가 수립될 수 있다는 교훈을 선언에 새겨 넣었다.

세계인권선언의 구성

선언은 전문과 30조로 구성돼 있다. 맨 앞의 2개 조항은 선언의 대전제가 된다. 모든 인간이 보편적인 평등을 공유한다는 점, 이러한 평등은 인간의 존엄성에 기반을 둔다는 점, 따라서 인권은 어떤 이유로도 누구에게도 부정돼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3조부터 21조까지는 생명권, 공정한 재판, 언론의 자유, 프라이버시 등 시민·정치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22조부터 27조까지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노동권 등 인간 생활 유지에 필수불가결한 측면을 다룬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28조에서 30조까지는 선언에서 열거된 권리의 향유를 위한 사회적 및 국제적 구조, 인권에 부합되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언급한다.

세계인권선언의 한계

한국에서는 ‘세계’인권선언이라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 ‘보편(universal)'인권선언이다. 세계 공통의 보편적인 가치가 있을 수 있느냐는 문제는 선언을 만들기 전에도, 만드는 과정에서도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 있는 논쟁이다.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갖는 정치적·사회경제적·문화적 다양성이 충분히 고려될 수 없었던 한계 때문이다. 나치즘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선언을 기초하는 데 두드러진 역할을 한 국가들은 자신들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선언을 기초하고 채택할 당시 유엔회원국의 수는 58개국에 불과했고, 식민지 상태를 갓 벗어나거나 여전히 식민지로 매여 있었던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대다수 인민은 선언에 의견을 내지 못했다.

또한 선언은 분명 시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봐야 한다. 선언은 2차 대전 후의 사회경제적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다. 노동조합의 권리, 교육권, 사회보장권 등 ‘새로운’ 권리를 반영하면서는 ‘급진’적으로 해석되지 않도록 극히 신중을 기했고, 여성의 권리나 가족생활에 관련된 내용에서는 보수적 사회기조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오늘날 떠오르고 있는 인권의 문제들에서 보면 빠진 부분이 많은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오늘날 선언을 볼 때는 선언 이후의 변화와 함께 읽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인권선언에 대한 반응

선언에 대한 반응은 대조적이다. 선언의 의의를 깎아 내리거나 실용적인 입장에서 평가하는 시각이 있는 반면 국제인권규범의 정립이라는 면에서 그 의의를 평가하고 발전시키려는 입장이 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대별해보면 아래와 같다.

<회의적 입장>
· 기껏해야 정부들에 대한 훈계 내지 권고에 지나지 않는다.
·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와 집단적 사회주의를 끼워 맞춘 이질적인 소망의 목록이다.
· ‘짖기만 하지 물지 않는’ 종이호랑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기에, 즉 ‘이행과 실천’의 문제를 무시했기에 동의된 문서일 뿐이다.
· 인권을 외교정책의 도구 또는 새로운 지배와 개입의 도구로 써먹으려는 의도 아닌가.
· 국제관계에서 인권은 장식용이거나 눈속임 장치고, 국제관계는 냉정한 계산이다. 인권에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국가내의 내부 투쟁과 개혁의 결과이지, 선언 등 국제규범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 인권침해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적에 대해 어디까지나 주권의 고유한 문제일 뿐이라는 주장은 여전히 강력하다.

<긍정적·희망적 입장>
· 인권 규범이 정교해졌다. 선언 이후 꾸준한 국제인권규범 만들기가 진행됐고, 규범 만들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이행으로 나아가게 됐다. 이런 국제인권규범은 정부, 국제기구, 시민사회 ‘공통’의 대화기준이 됐다.
· 유엔 속에서 인권의 역할이 강화됐다. 인권기준의 발전 속에서 유엔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됐고, 93년 세계인권대회,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의 창설 등은 그 대표적 사례다.
· 자발적인 시민 결사, 지구적인 NGOs의 출현, 지구적인 매체의 등장 등은 국가행위에 초점을 두었던 선언 기초자들이 계산하지 못했던 바다.
· (장식용이든 정의로운 목적의 추구에서든) 인권은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 인권사상에는 힘이 있다.
· 반식민지투쟁, 민주화투쟁, 반아파르트헤이트 투쟁 등 억압에 맞선 역사적 투쟁이 인권을 통해 상징화됐다.
· 인도주의법과 반인류 범죄에 대한 것으로 인권의 영역이 확대됐다.
· 국가가 자국민을 다루는 방식이 정당한 국제적 관심사일 뿐 아니라 국제기준에 속한다는 새로운 시각을 규범화한 것이 선언이다.
· 국제관계에 ‘인권’을 대입함으로써 지구적 관점 말고는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국제사회와 관계의 건설에 이바지해왔다.
·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인권에서 유일한 영역이었던 시민·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사회·경제·문화적 권리도 포섭했다.
· 인권의 개인주의적 속성이 공동체적 속성을 통해 완화·축소됐다. 특히 29조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만 자신의 인격을 자유롭고 완전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공동체에 대하여 의무를 부담한다”가 그 예이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국제인권현실의 전개

선언 이후 60년의 세월 동안 국제인권은 쉼 없이 달려왔다. 그 전개 상황을 다소 숨차게 쫓아가보자.

· 50년대 냉전
선언 기초과정에서부터 드러난 냉전이 심화됐다. 선언은 보편적 인권의 개념과 목록을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선언’에 머무른 것이었기에, 인권의 국제적 보호를 위한 법적 구속력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조약’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러나 사회권과 자유권이라는 두 범주의 권리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해 심각한 입장차이가 있었다. 규약 제정의 초기에는 하나의 조약을 목표로 작업을 벌였으나, 특히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의 요구로 두 개의 다른 조약을 추진하게 됐다. 선언은 하나인데 그에 근거한 국제규약은 두 개(‘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다. 양 규약의 채택과정은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60년대
새로 독립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국가들의 등장으로 유엔인권활동에 새로운 물결이 일었다. 이들은 식민주의의 토대가 된 인종차별주의에 몰두했다. 65년 인종차별철폐협약이 채택됐고, 자기결정권과 반아파르트헤이트 관련 활동(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에 반대하는 대대적 국제캠페인)이 강화된 것이 대표적 사례다.

·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까지
논란 끝에 66년 양대 규약이 채택됐으나 그 후 국제인권의 전개는 슬럼프를 맞게 된다. 기준설정에는 동의가 이뤄졌으나 이행으로 강조점이 넘어가는 것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다. 국가주의, 주권존중 논리의 완강함 속에 인권은 국제적 토론에는 적합하지만 구체적인 국제행동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가 확인되는 시기였다.

· 70년대 중반에서 80년대까지
73년 칠레 아옌데 정권이 무력으로 전복됐다. 그 후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인권침해에 대한 혐오감으로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됐다. 대규모 인권침해자를 다루는 유엔워킹그룹이 창설됐고, 칠레의 선례에 기초해 특정 국가의 인권상황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대표와 특별보고관이 임명됐다. 75년 헬싱키 협약에서 인권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76년 유엔시민·정치적 권리규약에 관한 자유권위원회의 새로운 모니터링 제도가 등장했다. 77년 지미카터의 등장으로 ‘인권외교정책’이 화두가 됐다. 여성차별철폐협약, 고문방지협약, 아동권리협약 등 주요국제인권법이 속속 제정됐다. 특정 유형의 인권침해를 지구적으로 다루기 위한 시도가 시작됐다. 80년 강요된 실종에 관한 워킹그룹 창설, 82년 자의적 처형에 관한 특별보고관 임명, 85년 고문에 관한 특별보고관 임명 등이 그것이다. 이시기 NGOs의 국제인권활동이 급증했으며 77년 국제앰네스티의 노벨상 수상은 그 상징적 사례다.

· 90년대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국제사회가 관용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됐다. 91년과 94년에 구 유고와 르완다에 대한 특별법정이 열렸고, 95년 유엔총회는 국제형사법정을 창설할 것을 결정했다. 포스트 냉전시대를 맞아 냉전 이후 국제질서를 어떻게 짤 것인가를 논의하는 일련의 국제대회가 꼬리를 물었다. 93년의 비엔나세계인권대회, 94년의 북경여성대회 등이 그것이다. 94년 UNDP의 인간발전보고서는 ‘인간안보’의 구체적 내용을 드러냈다.

· 2000년대
반세계화운동이 주목받게 됐다. 물에 대한 권리, 기후 변화 등 생태와 인권 문제를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강화됐다. 9·11 이후 테러리즘과 인권 문제가 위기를 불렀고, 93년 이라크침공에 맞선 국제평화운동이 전개됐다. 평화·안보·인도주의적 위기에 대한 인권의 침투와는 달리 경제나 금융기구에 대해서는 인권규범이 침투 못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인권의 도전을 기다리고 있다.

■덧붙이는 글

류은숙 님은 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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