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67 호  [기사입력] 2013년 10월 3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잔인한 사월이 잔인한 시월에게 자리를 넘겨준 것 같다. 밀양 송전탑 건설 재개로 시작된 시월은 전교조 법외 노조 통보로 방점을 찍더니 국정원의 셀프 개편 안을 기다리기만 하던 침묵 대통령의 야구 시구에 가슴이 뻥 뚫렸다.

번갈아 하루씩이라도 밀양에 다녀온 인권활동가들은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산다. 저마다 듣고 본 주민들의 말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욕과 폭력을 주저하지 않는 공권력 앞에서 “공무원들에겐 마음이 없어”라고 한탄했다는 할머니, 마음 없는 그들을 향해 “니 먹고 살려고 이런 짓 하나 본데 다 때려치고 나랑 농사짓자”고 울부짖는 광경을 두고 서울로 오는 발이 안 떨어졌다는 활동가, 나 또한 산속의 서늘한 새벽에 저들이 언제 쳐들어오나 허공을 주시하던 할머니가 “인생 한번 살다 가는 거 정의롭게 살다 가고 싶어.”라고 읊조리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 할머니들의 움막 앞에 꽂혀있던 선명한 태극기. ‘왜 저걸 꽂아놓으셨나’ 했더니 ‘우리도 국민이란 걸 말하고 싶어서’라고 하셨다.

이달 중순 왕복 열 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인권교육을 다녀왔다. 처음엔 당연히(?) 안 가려고 했다. 그런데 요청하시는 분이 먼 거리 때문에 몰염치한 부탁이라도 하는 듯 여기시는 것이 맘에 걸렸다. ‘제가 서울 사는 것이 특권인데 특권티를 내면 안 되고 지역 사시는 것이 죄가 아닌데 강의 요청하시면서 너무 죄스러워하시는 것 자체가 인권문제 아니겠습니까?’라고 수락 메일을 보냈다. 그 대가와 교훈은 컸다. 고속열차를 이용할 수 없는 구간이기에 통일호를 탔다. 아침인지 새벽인지 헷갈리는 시간에 기차에 올랐다. 그 열차에는 판매승무원도 식당 칸도 없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물도 커피도 준비 못한 내게는 악몽이었다. 역에 내려서 뭔가 요기를 할 수 있겠지 희망하며 다섯 시간을 견뎠다. 근데 웬걸, 기차역은 물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갑 속의 현금이 내 배고픔을 해결해줄 순 없었다.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기차역 간이매점에는 그 흔한 삼각 김밥조차 없었다.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아예 갖다놓지 않는 것 같았다. 마른 빵 한 조각을 사서 씹으며 배고픔과 싸웠다.

돌아오는 길은 깜깜했다. 차창 밖으론 인기척 없는 논밭과 송전탑이 보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해졌다. 수도권에 가까워진 것이다. 물론 서울에 가까워지자 대낮처럼 환해졌다. 밀양 생각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세계적으로 사양산업이자 재앙덩어리인 원전을 수출하겠다고 밀어붙이는 핵발전소 건설이요 그 탓에 우격다짐인 송전탑 건설이다. 그것도 부품 결함으로 불안 덩어리 공사임에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송전탑은 밀어붙인다. 사람 없는 농촌, 인구의 겨우 6%도 못되는 사람들만 농사를 짓는 나라, 세계적 먹을거리 위기 속에서 식량 자급률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나라에서 ‘돈만 벌면 된다’는 가치만 판친다. 돈만으론 먹고 살 수 없는 위기가 닥쳐온다고, 아니 그게 이미 현실이라고 외치면 ‘몽상가’ 취급을 받는다. 그 돈으로 누구를 희생해서 누가 벌어 챙기는지 문제 삼자고 하면 ‘종북세력’이라 한다. 아무리 부가 넘쳐나도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실을 파헤쳐보자, 어떻게 하면 같이 먹고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자고 하면 ‘이념교육’이라 한다.

교사들에게 인권교육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애용하던 문구가 있었다. 저명한 교육심리학자인 하임 기노트(Haim Ginott)가 <교사와 학생 사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국의 한 교장선생님이 새 학기마다 교사들에게 보냈다는 편지이다.

“저는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입니다. 누구도 증인이 될 수 없던 일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가스실을 지은 것은 잘 배운 기술자였고, 아이들을 독살한 것은 교육받은 의사였으며, 아기들을 살해한 것은 훈련받은 간호사였으며, 여성과 아이들을 총으로 쏜 것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교육에 회의적입니다. 제 요청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학생들이 사람이 되게끔 도우십시오. 당신의 노고가 학식 있는 괴물이나 기술자인 사이코패스나 교육받은 아이히만(집단학살의 책임자인 나치 장교의 이름)을 길러내선 절대 안 됩니다.
읽기, 쓰기, 셈하기는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인간다워지는데 도움이 돼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인권유린 현장에선 너무 많이 배운 사람들을 너무 자주 맞닥뜨린다. 너무 많이 배운 전문가와 공무원, 잘 훈련받은 공권력 집행자들 말이다. 허나 하나같이 ‘마음’이 없다. ‘어쩌면 좋나! 무엇부터 해야 하나?’ 한탄할 때마다 누구나 인간다운 교육을 끄집어내곤 한다. 그럼 ‘어디서 누구와 그런 교육을 도모하나?’란 질문이 이어진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나는 교사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했다. 교사들은 아동과 학생 인권에 대해 일부는 적대감을 대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학생과 교사의 인권은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학생인권을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사들의 권리, 그중에서도 기본적인 단결권을 옹호한다고 말했다. 내가 참관했던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일을 사례로 얘기해주곤 했다. 한국정부의 1차 보고서 심사 때(1996년 1월)는 전교조가 합법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한 위원이 한국 정부 대표에게 질문했다. “나는 당신들이 공산주의라고 비난하는 나라 출신입니다. 그런 내 나라에서도 교원노조는 당연시되는데 당신들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면서 교원노조가 인정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위원이 교원노조에 관한 질문을 한 이유는 아동 곁에서 밀접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동의 인권도 위태롭다는 인식에서였을 것이다. 교원노조인정에 대해서는 아동권위원회 뿐만 아니라 유엔사회권 및 자유권 위원회 등 국제인권사회의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 때의 질문을 현 정부는 국내외로부터 다시 받고 있다. 뒷걸음질도 이정도면 너무 심하다. 그리고 냄새가 너무 난다. 때려잡아야 할 정보기관의 전횡에는 침묵과 회피로 대처하면서 전교조 카드를 뽑아들었다. 그것도 해직된 동료들을 지키겠다는 당연한 일이 이유라니 참 빈약하다. 이념대립의 판을 깔고 전교조를 윷판의 말처럼 공안판의 말로 써먹겠다는 노골적인 신호이다.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부가 공안판을 펼칠 때마다 필요한 희생자는 문제제기를 던지는 사람들, 온 몸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밀양의 농민이요, 전교조 교사요, 쫓겨나고 내몰리는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국정원은 각종 불법공작으로 희생양을 지목하고 필요하면 만들어 왔다. 경찰은 찍힌 이들을 폭력으로 제압한다. 언론은 본질적 질문은 묻어둔 채 말초적 감정과 대립만 자극한다. 장사 안 되고 일자리 없고 사는 게 재미가 없는 사람들은 정치에 질문 던지기를 포기하고 냉소의 독방으로 기어들어간다. 정부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쳐버리길 원한다. 정부는 ‘국정원 같은 게 지금 먹고 사는 문제랑 무슨 관계가 있냐’고 사람들이 나가떨어지길 기대하며 버티고 있다. 심지어 이번의 혐의는 국정원 등의 말도 안되는 선거유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가기관들에 의한 선거유린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은 헌법도 국제인권법도 없는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권력을 용인한 적이 없다. 위기 모면을 위해 이념대립 공안판을 펼치려 하고 또 무슨 ‘주의’가 필요하다면 우린 기꺼이 헌법주의자요 인권주의자가 될 것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유엔의 ‘반테러리즘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유엔인권이사회의 요청으로 작성한 보고서이다. 분량상 35개의 요소를 전부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절반만 읽어봐도 꼭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을 들여다보고 맞춤형으로 만든 것 같다. 아래 문구에 ‘국정원’을 집어넣어 읽으면 이렇다. 국정원은 헌법과 국제인권법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만 권한을 사용하고 활동해야 한다. 그렇지 못했을 때는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정부는 국정원의 헌법과 인권유린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법과 인권을 유린하는 명령은 아무리 국정원 요원이라도 거부해야 한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킨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제 집에 편히 머물러도 온갖 지병과 계절병에 취약한 노인들이 산속의 추위 속에서 점령군처럼 몰려온 경찰폭력에 맞서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이 되는 것인지 가르쳐야 할 교사들이 사냥감이 된 가운데 또 수능은 다가온다. 정보기관의 대선부정은 수능부정에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지 정부는 답해야 한다.

정보기관 감시통제 모범실천지침(2010, 유엔인권이사회)

이 보고서는 유엔인권이사회의 요청으로 ‘반테러리즘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작성한 것이다. 모범 실천(good practice)의 35개 요소는 세계 각국에 현존하거나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실천들에서 뽑은 것이고 또한 국제조약, 국제조직의 결의안, 지역 법원들의 판결들에서 나온 것이다.

“모범 실천”의 개념은 정보기관의 활동에서 인권 증진과 법의 지배에 대한 존중을 위한 법적‧제도적 틀을 말한다. 모범 실천은 인권법을 포함하여 국제법이 요구하는 내용 뿐 아니라 법적 구속력 있는 의무를 넘어선 의무를 포괄한다.

<법적 기초>

요소 1. 정보기관은 국가안보와 법의 지배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보기관의 주 목적은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데 있어서 정책입안자들과 여타의 공공기관을 보조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 분석, 유포하는데 있다. 이 목적에는 거주민과 그들의 인권 보호가 포함된다.

요소 2. 정보기관의 수임사항은 공개적으로 이용 가능한 법률로 좁고 명확하게 규정돼야 한다. 수임사항은 공개적으로 가용한 법률 또는 국가안보정책들에 규정된 바에 따라 정당한 국가안보를 보호하는데 엄격하게 한정돼야하며 정보기관이 다룰 수 있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테러리즘이 그런 위협에 포함된다면, 그것은 제한된 명확한 용어로 정의돼야 한다.

요소 3. 정보기관의 권한은 명확하게 속속들이 국가 법률로 규정돼야 한다. 정보기관은 수임 받은 목적을 위해서만 권한을 사용할 것을 요구받는다. 특히 반-테러리즘의 목적을 위해 정보기관에 부여된 어떠한 권한도 반드시 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돼야만 한다.

요소 4. 모든 정보기관은 헌법과 국제인권법을 준수하는 공개적으로 가용한 법률을 통해서 구성되고 그런 법률 하에서 작동해야 한다. 정보기관은 국가 법률에 의해 규정되고 그 법률에 따른 활동만을 취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도록 지도받아야 한다. 공개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보조 규정들은 엄격하게 한정돼야 하며 그런 규정들은 공개적으로 가용한 법률에 의해 승인되고 그 한계 내에 머물러야만 한다. 공개되지 않은 규정들은 인권을 제한하는 어떠한 활동의 근거로도 이용될 수 없다.

요소 5. 정보기관이 헌법 또는 국제인권법을 위반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은 명백하게 금지된다. 이런 금지는 정보기관의 국내 영토에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활동에도 미친다.

<감시 기관>

요소 6. 그 수임사항과 권한이 공개적으로 가용한 법률에 근거를 둔 국내의 행정‧의회‧사법 및 전문적 감시통제 기관들의 결합에 의해 정보기관은 감시받아야 한다. 정보기관 감시의 효과적인 시스템은 정보기관과 행정부 둘 다로부터 독립적인 적어도 한 개의 시민 기구를 포함해야 한다. 감시 기관들의 연합된 검토과제는 정보기관의 법 준수 여부, 활동의 효과성과 효율, 재정, 행정적 활동을 포함하여 정보기관 활동의 모든 측면을 포괄한다.

요소 7. 감시 기관들은 그 수임사항 수행에 필수적인 정보‧공무원‧시설에 대한 완전하고 방해받지 않는 접근 뿐 아니라 직권조사를 개시하고 수행할 권한‧자원‧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감시 기관들은 문서와 기타 증거들을 획득하고 증인 심문을 하는데 있어 정보기관과 법집행당국의 완벽한 협력을 받아야 한다.

요소 8. 감시 기관들은 활동 과정에서 접근한 기밀 정보와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필수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감시 기관의 구성원이 이런 요건을 위반했을 경우에는 처벌이 주어져야 한다.

<항의 제기와 효과적인 구제>

요소 9. 정보기관에 의해 자신의 권리가 침해받았다고 여기는 모든 개인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거나 옴부즈만‧인권위원‧국가인권기구 등의 감시 기관에 진정을 제출할 수 있다. 정보기관의 정보활동에 영향 받은 개인들은 고통 받은 위해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포함하여 효과적인 구제를 제공받을 수 있는 기관에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요소 10. 정보기관의 활동으로 야기된 고소와 항의를 다룰 책임 있는 기관들은 정보기관과 행정부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정보기관 감시 기관들은 조사를 수행함에 있어 모든 관련 정보에 대한 방해 없는 접근, 필수적인 자원과 전문가, 그리고 구속력 있는 명령을 발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져야 한다.

요소 11. 정보기관은 국가 관할권하의 모든 개인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증진하고 보호하는데 기여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정보기관은 성,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국적 또는 사회적 출신 또는 기타의 지위를 이유로 개인이나 집단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요소 12. 국가의 법률은 정보기관이 어떠한 정치적 활동에 복무하거나 또는 특정 정치적‧종교적‧언어적‧인종적‧사회적 또는 경제적 집단의 이익을 증진 또는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지 않도록 금지해야만 한다.

요소 13. 적법한 정치 활동 또는 결사의 자유, 평화적 집회와 표현의 자유의 권리의 적법한 표현을 표적삼아 정보기관이 자신들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금지돼야 한다.

<정보기관에 대한 정부 책임>

요소 14. 정부는 정보기관의 활동이 어디에서 벌어졌건 간에, 국제적으로 잘못된 행위의 피해자가 누구이건 간에, 자국의 정보기관과 요원들 그리고 그들과 연루된 사적인 계약자들의 활동에 대해 국제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행정부는 자국의 정보기관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를 보장하고 행사하며 책임지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개인적 책임과 책무성>

요소 15. 정보기관의 요원들에게는 여타의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헌법, 제정법, 국제형사법이 적용된다. 정보요원에게 규칙에 따라서 국내법을 위반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예외는 법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며 명확하게 규정돼야 한다. 이런 예외는 국제법의 확정적 규범들과 국가의 인권 의무에 대한 위반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요소 16. 국내법 또는 국제인권법을 침해 또는 침해하는 명령을 발표한 정보기관의 요원 또는 정보기관의 편에서 활동한 개인에 대해서는 국내법이 민‧형사적 및 기타의 처벌을 가해야 한다.

요소 17. 정보기관의 요원은 국내법 또는 국제인권법을 침해하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할 법적 의무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명령을 거부한 요원에게는 적절한 보호가 제공돼야 한다.

요소 18. 정보기관의 요원이 범죄를 보고할 내적 절차가 있어야 한다. 내적 절차가 부적절하다는 것이 증명됐을 때는 범죄를 다루기에 충분한 조사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과 필수적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독립 기구로 보완돼야만 한다. 정직한 행위로서 범죄를 보고한 정보기관 요원은 어떠한 형태의 보복으로부터도 법적으로 보호돼야 한다. 이런 보호는 미디어 또는 광범위한 대중에 대한 폭로(그것이 최후의 수단으로서 행사됐고 중대한 공적 사안의 문제에 해당된다면)에도 해당된다.

인권오름 제 367 호  [기사입력] 2013년 10월 3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112 호  [기사입력] 2008년 07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책을 불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을 불태운다”고 시인 하이네는 읊었다. 인권의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인권이 대규모로 침해될 때 그 전령사가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것이다. 인권을 침해하는 권력이 하는 짓은 맘에 안 드는 표현을 불태워 없애버리거나 혹은 그전에 불태울만할 표현을 할 사람들부터 때려잡는 것이다. 창작물이 나오기도 전에 싹을 없애버리는 것이니 효율적이기 그지없다. 누구 말마따나 그야말로 ‘실용적’이다. 

표현의 자유의 역사에서 ‘치욕’으로 기록돼 있는 것이 1950년대 미국의 매카시즘이다. 매카시라는 상원의원이 내 손에 공산주의자 명단이 있다고 떠들어댔고, 근거도 없는 그런 주장에 사회가 발칵 뒤집어져 빨갱이 색출에 나섰다. 영화인 등 수많은 표현의 생산자들이 애국심을 심사받는 청문회에 서서 양심을 까뒤집어 보이거나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W. 더그러스는 1939년부터 1975년까지 무려 36년간 미국의 연방대법원 판사를 지낸 사람이다. 그가 유명한 것은 그렇게 오래 그 자리에 있어서가 아니라 미국사회의 지배계급에게 눈에 가시 같은 소수의견을 일관되게 냈다는 데 있다. 그의 별칭은 ‘길들여지지 않는 더그라스’, ‘위대한 반대자’, ‘고귀한 소수 의견자’였다. 오늘 읽어볼 ‘민중의 인권’은 다름 아닌 매카시즘이 판치던 때에 쓰인 글이다.

인권의 역사에서 표현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일찍이 프랑스 인권선언은 “사상과 의견의 자유로운 소통은 인간의 가장 고귀한 권리들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시민은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인쇄할 수 있다”고 했고, 올해로 60주년을 맞은 세계인권선언도 시민들이 사상·양심·표현의 자유를 행사함으로써 정부와 국가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자유주의자 밀은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을 허용해야 할 근거로 다음의 네 가지를 제시했다. 첫째, 묵살되고 있는 어떤 의견은 진실일 수 있다. 둘째, 만약 그 의견에 다소 거짓이 있더라도 일말의 진실을 담을 수 있다. 지배적인 의견 하나가 전체의 진실을 담을 수는 없기에 반대의견과의 충돌은 남아있는 진실이 공급될 기회를 보장한다. 셋째, 지배적인 의견이 총체적 진실이라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지배적인 의견이 치열하게 논쟁되지 않는다면, 그 의견은 합리적 근거에 대한 이해나 느낌보다 편견에 의해 받아들여질 것이므로 가치가 떨어진다. 넷째, 독트린 자체로는 의미를 잃거나 사람들의 행위에 미치는 영향을 빼앗길 것이다.

나치즘이 책을 불태우고 결국에는 사람까지 불태운 야만을 저지른 후에 한 철학자는 “열린 사회는 사상의 개방과 기타 기본적 자유를 막으려는 세력들에 대해 영구적인 감시를 유지할 필요성이 있다”며 “자유의 대가는 영원한 경계”라 부르짖었다.

이런 표현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공통되는 주장은 자유로운 표현의 파괴는 언제나 독재자와 전체주의 국가의 첫 번째 행위라는 것이다. 글쓰기와 인권의 관계는 불가분적이다. 표현의 자유는 잠재적인 인권침해의 지표일 뿐 아니라 올바른 거버넌스의 기초이기도 하다.

어느 나라 어느 시기에 ‘함량미달’, ‘용량부족’이란 별칭을 단 통치자가 있었다. 이 자는 수시로 사고를 치면서도 무대책일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비판을 끔찍이 싫어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엄중 대처하라’, ‘단호하게 대처하라’를 반복했다. 그래서 유권자 인민 사이에는 ‘무대책이 엄중대처’요, ‘난 아무것도 할 줄 몰라’가 ‘단호한 대처’라는 말이 떠돌았고, 그걸 참지 못한 통치자의 언론통제로 ‘엄중’하고 ‘단호한’이란 단어를 쓴 사람들이 표현의 세계에서 추방당했다. 가택수색, 출국금지, 구속 등 표현의 세계에 들이닥친 통치자의 어처구니없는 행태에 모두들 놀랐고, 인권침해의 전조를 느꼈으니 근본대책을 마련하자며 똘똘 뭉치게 됐다. 이후 이야기의 결론은 잘 모르겠지만 해피엔딩이길 바란다.

W. 더그러스 ‘민중의 인권’ 중 표현의 자유(출처: 도서출판 물레, 박홍규 역 『민중의 인권』, 1987)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페리클레스(고대 아테네 정치가)는 행복의 비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용기는 자유이고 자유는 행복이나, 자유는 용감한 마음을 갖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토론과 토의는 때때로 전투 그 자체보다도 더욱 훌륭한 용감함의 증거이다.”

완전한 언론자유는 체제도전을 포함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존하는 정권이 서있는 기본 전제 그 자체에 도전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한, 완전한 의미에서의 언론의 자유는 없다는 것이다. 미국헌법 수정 제1조(“연방의회는… 언론·출판의 자유를 빼앗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는 미국 정치체제의 기초 그 자체를 공격하는 논의나 주장조차도 허용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미국 헌법 수정 제1조는 참으로 대담한 실험이었다. 그것은 모든 일을 민중의 무제한한 토론에 거는 것이다. 그것은 서로 부닥치는 가치 속에서 얘기하고 주장하고 이끄는 자유를 다른 것에 우월하는 권리로 선택했다. 그것은 그 결과 무엇이 생기는가를 묻지 않고, 결과야 어찌되든 간에 자유로운 토론과 여론에 편드는 입장에 국민을 둔 것이다.

제퍼슨은 …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신문을 갖지 않은 정부와 정부를 갖지 않은 신문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전혀 주저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독재는 언론·출판을 철저히 탄압한다. 메이(영국의 헌법학자)가 『영국헌법사』에서 쓴 바와 같이 “어떤 나라에서도 권력을 갖는 자는, 토론을 자신의 주권과 대립되는 것으로 여겨 벌컥 화를 내는 태도를 취해왔다.”

표현의 자유라는 것은 민중이 완전히 주권을 장악했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 절대로 필요한 정치적 권리이다. 민중이 주권행사의 엄숙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적절히 정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보장이다.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공적 쟁점의 몇 가지만이 논의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없다면 민중은 획일주의에 억눌려져 그 결과 세계와 세계의 정세에 대한 관심을 전적으로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

의견의 자유에는 더욱 깊은 의의가 있다. 그것은 개혁의 기회를 보증하는 것이다. 만일 살아남고자 한다면 언제나 변화하여야 한다는 것이야말로 정치의 법칙인 것이다. 버크(영국의 정치가)가 말했듯이 “어떤 변화의 수단도 갖지 않는 국가는 스스로를 보전하기 위한 수단도 갖지 않는 국가이다.”

마지막 한사람에게도 언론자유는 주어져야 한다. 이 권리가 만일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더욱 하층의 더욱 수가 적은 더욱 비천한 소수파에게까지 주어져야 한다.

민중이 현명한 주권자이기 위해서는 문화적, 학문적, 예술적, 지적인 생활에 대한 제약 내지 제한이 있어서는 안된다.

우리들의 사회에서는 지식의 탐구가 자유롭고 아무런 제약도 받지 않는 것이어야만 한다. “나치스 독일의 경우와 같이 대학은 정치권력을 흔드는 사람들을 위한 확성기가 되어버려서는 안된다.” 교사는 사상을 추구하고 어떤 영역에도 나아가도록 허용되어야만 한다. 토의에 관해서는 종점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 “교육은 끝없는 대화의 일종이고 대화하는 것은 그 성질상 견해의 대립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나의 필생의 목표이고 모든 미국인의 삶의 대상이기도 하다고 내가 믿는 문명이라는 것은 대화의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여러분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 대신에 여러분과 함께 사물의 이치를 논의한다는 것이다.

획일주의는 정신적 영양실조를 초래한다. … 획일주의 국가에 있어서의 시민의 시계(視界) 범위는 지극히 한정되기 때문에 자기 주위의 세계에 대하여 현명한 반응을 보일수가 없다. 그들은 정부가 조작하는 선전기관의 희생자로 될 뿐이다.

공정한 평론의 특권이라는 것은 공공이익에 관계되는 사실 예컨대 정부의 행동이나 공직 후보자의 적합성과 같은 사실에 대한 평론에 관한 한, 그것이 진실인가 허위인가에 관계없이 비방에 관한 법의 엄격한 적용을 배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다.

단지 비방하는 것이 때로는 치안을 침해한다든가 그러한 경향을 갖는다든가 하는 것뿐의 이유로 어떤 특정한 문서에 의한 비방을 유죄로 인정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고 이 특정의 비방이 가솔린의 증발연기가 충만한 장소에서 성냥을 켜는 것과 비슷한 경우에만 유죄로 되어야 한다.

적정절차는 무엇인가? 적정절차는 입법기관이 합리성을 갖지 않고 자의적으로 행동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준은 수정 제1조와는 무관한 것이다. 수정 제1조는 본래 표현이 어떤 경우에 ‘합리적으로’ 억압될 수 있는가를 결정하는 권한 그 자체를 정부로부터 뺏으려는 의도 하에서 제정자가 입법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상은 범죄로 될 수 없다.… “사상범이라고 하는 범죄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행동의 범죄뿐이다.”

… 

인권오름 제 112 호  [기사입력] 2008년 07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8. 9. 2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12조

어느 누구도 자신의 프라이버시, 가정, 주거 또는 통신에 대하여 자의적인 간섭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명예와 신용에 대하여 공격을 받지 아니한다. 모든 사람은 그러한 간섭과 공격에 대하여 법률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12조; 침해방지와 소극적 의무를 표현

선언에서 명시한 다른 권리들과 달리 12조에서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표현이 사용됐다. 선언이 대개 “모든 사람은 ∼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표현을 택하고 있는데 12조는 “어느 누구도 ∼를 받지 아니 한다”는 식의 표현을 하고 있다.

프라이버시권이 보호하는 이익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하면, 침해에 대한 통제와 자신의 개인정보에 대한 통제를 들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와 타인이 개인을 홀로 내버려두면 되는 소극적 의무와 사람이 자기 생활의 모든 측면에 대해 선택할 권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모하는 적극적 의무 둘 다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선언이 표현한 프라이버시권은 침해방지와 소극적 의무에 쏠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원래 “불가침”이란 단어가 사용됐으나 최종 토론에서 빠지게 됐다. 대표적으로 ‘표현의 자유’ 등과 같은 다른 자유들과 경합하는 경우 프라이버시권만을 절대적인 권리로 취급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명예와 신용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 다수 대표자들이 걱정을 했다. 명예와 평판의 과보호가 언론의 자유에 재갈을 물릴 우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명예’를 빼야한다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명예에 대한 보호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보호가 보호하는 이익은 다르다는 시각이 있고, 여러 국가법에서도 이 둘에 대해 접근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또한 보통 개인과 공인의 명예와 신용을 같은 정도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12조에서 사용된 “프라이버시”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12조에 언급된 다양한 권리들, 즉 가정, 주거, 통신 등에 대한 보호를 다 담고 있는 말이다. 선언의 시대적 한계상 ‘정보 프라이버시’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보 프라이버시에 대해 명시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12조의 취지를 바탕으로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다는 시각이 대다수이다.

프라이버시권 정의의 어려움

‘프라이버시’라는 단어는 ‘타인들과 사회로부터 물러나 있을 것’,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한다’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국제 인권 규범에 담긴 권리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권리중의 하나가 프라이버시권일 것이다. “모든 인권은 프라이버시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많은 권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를 정의한다는 것은 국가와 사회가 개인사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느냐에 선을 긋는 문제이고, 그 선은 맥락과 환경에 따라 다르다. 노출시키지 말아야 할 것은 문화와 사람에 따라 다르고 동일한 내용이라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노출과 공유의 정도를 달리한다.
이에 대해 『사생활의 역사』의 한 필자는 “사생활은 태초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내는 역사적 현실이다. 영원히 확정된 경계를 갖는 ‘사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선은 끊임없이 변한다. 사생활은 공적 생활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는다…사생활과 공적 생활이 구분이 모든 사회계층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고 했다.

프라이버시는 정말로 포괄적인 용어다.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로 묶기 어려운 다양한 이해의 느슨한 혼합물이다. 홀로 있을 권리(방해받지 않고 살아갈 권리), 다른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킬 권리, 익명성을 즐길 권리, 자신에 대하여 얼마만큼을 어느 때에 공표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 정확하게 기록될 권리, 개인의 비밀을 지킬 권리, 개인의 자율성, 광의의 개인적 자유권 모두를 포함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여행자유의 제한, 국기에 대한 경례나 선서를 강요하는 것,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강의의 자유, 동의 없는 사진 촬영, 도청, 의료 기록, 신체보전을 침해하는 체벌 문제, 성적정체성과 성생활, 결혼․이혼․출산․피임․교육․자녀양육 등에서의 선택의 자유 등 온갖 문제가 프라이버시의 이름으로 다뤄진다.

프라이버시를 느슨하게나마 영역별로 묶어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기도 한다.

* 정보 프라이버시; 신용정보, 의료기록, 정부 기록 등 개인 정보의 수집과 취급을 다스리는 규범의 수립과 관련하여 자신과 관련된 개인정보의 생산․유통․활용․보존․공표 등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을 가질 권리
* 신체 프라이버시; 사람들의 신체적 자아를 유전자 검사, 약물 검사, 신체 수색 등 침해적인 절차로부터 보호
* 의사소통의 프라이버시; 감시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권리. 다른 자유의 기본전제가 되는 ‘권리를 위한 권리’. 우편, 전화, 이메일, 기타 형태의 통신의 안전과 프라이버시 포괄
* 영역 프라이버시; 가정, 작업장 또는 공공장소 등 기타 환경에 대한 침입을 제한하는 것

프라이버시권과 관련한 주요 발언*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오두막에서는 왕의 모든 지배력을 거부할 수 있다. 그 오두막은 빈약하고, 지붕이 흔들리고, 바람이 치고, 폭풍이 들이칠 수는 있어도 잉글랜드의 왕은 들어갈 수 없다. 왕의 모든 힘은 몰락한 집의 문지방이라도 그것을 감히 넘을 수 없다.”(영국의 캄덴경, 1765년)

* “인간을 위해 정부가 있지 그 반대는 아니다…자연권은 인간, 인간의 개성, 양심 등을 정부의 직접적, 간접적 개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시민으로서의 인간은 기억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계속된 억압적인 법을 알아왔고 그것에 반항하여 존재해왔다…자유는 생활의 방식이어야 했다. 그것은 불가양의 것이고 정부의 침해로부터 자유로운 것이어야 했다…프라이버시는 자유의 근본이다.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자유의 대부분은 프라이버시의 권리에서 유래한다. 나의 집은 내게 있어서 나의 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라이버시의 권리는 인간의 가옥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신념, 양심을 통하여 방해받지 않는 권리에까지 미친다.”(미국의 W.더글라스 대법관)

* 개인 정보는
공정하고 적법하게 획득돼야 한다.
원래 특정한 목적에만 사용돼야 한다.
목적에 적합하고 연관되며 목적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고 최신이어야 한다.
정보 주체에게 접근 가능해야 한다.
안전을 유지해야 한다.
목적이 완수된 이후에는 폐기돼야 한다.
(OECD 프라이버시 보호와 개인정보의 국제적 유통에 관한 지침)

* 프라이버시권은 국가당국에 의한 것이건 자연인 또는 법인에 의한 것이건 모든 간섭 및 비난으로부터 보장되어야 한다. 컴퓨터, 데이터뱅크 및 기타 장치를 통해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것은 공공기관 또는 개인, 사설단체를 불문하고 반드시 법률로써 규제되어야 한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정보 저장 및 관리에 대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러한 파일이 부정확한 개인 자료를 포함하거나 법률에 위반하여 수집․처리되었을 경우 모든 개인에게 수정 및 삭제를 요청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유엔자유권위원회 일반논평)



사적영역에서 프라이버시의 문제

근대민족국가의 형성은 인권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한다. 국가 권력은 사회가입의 목적이었던 자기보존이라는 근본적이고 신성한 법칙에 의해 구속되어 큰 한계를 갖는 것이며, 그 한계 너머에는 국가권력이 관여할 수 없는 인간의 ‘사적 자유’가 존재한다는 논리에서 프라이버시가 옹호됐다.

그러나 개인의 자율성의 실현과 평등이라는 자유주의 원리하의 프라이버시권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국민은 국가의 모든 행위를 감시하고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했지만 실상 근대국가는 국민에 대한 지식과 정보에 기초한 국가였고 다른 말로 하면 감시사회이며 정보사회에 터잡은 국가였다.

또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속에서 프라이버시권의 수혜자는 ‘개인’이 아닌 ‘가정 또는 가족’이었다. 여기서 가정은 사적인 영역이고 공적인 노동의 영역과 대립된 은신처였다. 가정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과 함께 은신처로서의 그 의미를 강화해나갔고,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야 되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경쟁이나 계약, 냉엄성을 피할 수 있는 곳, 긴밀한 인간관계와 애정을 토대로 성립하는 것이 사적영역의 대명사인 가정이었다. 그러나 그 은신처는 남성의 은신처였고, 여성에게는 은신처라기보다는 노동의 장소였다. 은신처로서의 사적 가정은 성 구분을 전제한 개념이었다.

이에 특정한 이분법(이성과 감성의 구분, 남성과 여성의 구분 등)에 의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간의 통상적 구분을 부정하는 비판이 일었다. “공론화되기에 타당한 주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떠한 사회적 제도나 관습(가령 가정폭력, 성폭행, 가사노동의 성적 구분 등)도 공적인 토론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개인, 어떠한 행동, 혹은 개인의 어떠한 생활의 측면도 프라이버시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었다.

현대의 프라이버시의 문제

오늘날 우리가 미증유의 대중감시체제하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정보는 제한된 물리적 공간에서 뿐 아니라 무한 확장된다, 설명책임 없이 부적절하게 비밀리에 남용될 기회가 너무 많다, 국가만이 아니라 기업과 개인에 의해서도 감시와 침해가 광범하게 이뤄진다, 완벽한 복사가 가능하고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등등 정보화로 인한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진단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정보화로 인해 프라이버시가 많이 침해되고 있고 침해될 수 있다는 어두운 진단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기에 보다 적극적인 프라이버시권의 규정이 요구되고 있다. ‘정보 프라이버시’와 ‘역감시의 권리’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정보 프라이버시는 타인으로부터 감시당하지 않을 권리와 함께 감시당하지 않음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나 제3자의 자신에 대한 정보수집활동과 그 이용을 감시할 권리이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권리로서 ‘역감시의 권리’는 단체나 집단 또는 개인의 식별 여부를 불문하고 생각과 활동에 대한 통제가 가해지는 모든 행위․계획․제도를 감시행위로 보고, 감시계획의 수립단계부터 참여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보장을 추구한다.

생각해볼 문제들

#1. 프라이버시는 부자 또는 권력자의 문제, 배부른 소리?
1890년대 미국에서 ‘홀로 있을 권리(the right to be alone)’가 제기됐을 때부터 프라이버시권은 문제였다. 한편에선 황색 언론의 횡포에 대항하는 개인권으로서의 프라이버시를 역설했고 한편에선 돈 많은 상류층 인사의 대중매체에 대한 불만을 권리화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프라이버시권이란 이름으로 초상권, 명예훼손 등 부자들의 문제를 들먹거리는데 그게 특권이지 무슨 인권이냐?’는 비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프라이버시를 경제적 자산으로 보고 논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프라이버시권은 자신의 재산에 대한 권리행사의 관점에서 자신의 개인 정보에 대한 배타적인 통제권을 가질 의미가 돼버린다. 명성 있는 이름과 초상의 상업적 가치 같은 걸 인권의 이름으로 보호하는 꼴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만하다.

개인정보를 재산으로 바라보면 그 경제적 가치와 인권적 가치를 놓고 균형을 겨루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흔히 사적자본과의 상업 거래에서 소비자는 개인정보를 일종의 거래비용으로 요구받고, 상품과 서비스를 얻기 위해 제공되는 소위 ‘자발적’인 것으로 오인 내지 용인될 수 있다. 사실상 자발적 동의란 없는데도 말이다.

정보소유가 권력의 차이를 극심하게 보여주는 사회 속에서 소위 재산적 관점에서 개인정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프라이버시의 침해는 흔히 상대적으로 크고 강력한 세력에 의해 사회의 가장 작고 약한 요소, 가령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고 소수집단의 구성원인 사람에게 가해지는 위해이다. 사회적 낙인이 은밀하게 찍히고 영구화되는 일, 어린이 등 취약자를 이용한 정보수집의 문제 등을 생각해보자.

#2. 프라이버시란 혼자 틀어박혀 있으면 되는 것?
프라이버시는 물론 외부와 단절된 개인 영역에서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고 발전시킬 권리도 포함한다. 혼자 틀어박힐 권리는 본인의 희망사항과 달리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적인 상황은 공적인 상황 속에서 존재하며 사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규범 역시 공적인 것이다”, “주권자로서의 사적 시민은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주권자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저항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권력은 곧 감시의 시선 방향과도 일치한다. 시민의 감시의 시선이 국가권력을 향해야지 거꾸로 국가권력의 감시의 시선이 시민을 향해서는 안 된다.”

#3. 기술발전과 법 제정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
프라이버시권 보호를 위해 각국은 포괄적 또는 영역별 법률을 제정하거나 기업의 자율규제를 유도하고 프라이버시 보호기술을 개발하는 등의 시도를 해왔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이런 조치들이 단지 ‘정보 보호’에 대한 환상만 만들어냈다는 비판이 넘친다.

앞서도 말했지만 솟아날 구멍으로 제기된 것은 프라이버시권이 국가권력에 대한 사회적 역감시(counter-surveillance)를 실행시킬 수 있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권리로서 재구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정보는 ‘자기와 관련된 정보’로 확장돼야 하고, 개인정보의 ‘흐름과 유통’에 대한 통제를 넘어 정보 ‘수집과 생산’ 자체에 대한 통제로 나아가는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4. 난 숨길 것 없다. 잘못한 것이 없으면 숨길 것도 없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 할지라도 ‘정보의 훼손, 침해, 도용’ 등의 문제가 엄연히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또한 개인정보에는 고정된 정보만이 아니라 가변적인 정보도 있다. 나아가 나의 정보만이 아니라 타인의 정보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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