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6년 1월 20일 인권하루소식 제2976호>

 

이 원칙은 일명 '파리 원칙'(Paris principles)으로 알려져 있는데 1991년 파리에서 열린 제1차 국가인권기구 국제 워크숍에서 제정되고 1993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원칙이다. 유엔이 국가인권기구라는 제도를 얘기한 것은 일찌감치 1946년의 일이었다. '국가인권기구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지침' 등이 기본적인 문서 역할을 하다가, 여러 나라 국가인권기구들의 경험 축적을 기반으로 다시 집대성한 것이 이 원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11월에야 국가인권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설치 과정에서 국가인권위를 일부 국가기관의 부속물로 만들거나 그 권한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계속됐고 인권단체들은 4년여 동안 이에 맞서면서 두 차례의 폭염과 혹한 속에서의 단식농성으로 국가인권위의 제대로 된 설치를 요구했다. 국제기준에 턱없이 모자란다는 아쉬움 속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이 비빌 언덕이 되라는 기대를 갖고 국가인권위의 출범을 환영했다. 그리고 국가기관을 감시·견제하는 국가인권위의 활동을 감시·견제해온 것이 인권단체들의 활동이었다.

그런데 국가인권위가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이란 걸 내놓은 요즘 비난의 폭죽놀이가 벌어지고 있다. 세금을 축낸다느니, 무국적 기관이라느니, 헌정질서를 무시한다느니, 산업현장에 갈등과 혼란을 부추긴다느니 하는 것들이다. 행동이 아니라 단지 입을 열었다는 것만으로도 일부 언론과 정치인, 재계의 면박을 받기 일쑤인 것이 국가인권위원회의 처지이다. 더 적극적인 국가인권위의 행동에 목말라하는 인권피해자들의 편에서 보면 국가인권위의 존재, 아니 인권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한때 유행하던 우스갯소리로 약국에 가서 당근을 달라고 하는 토끼 이야기가 있다. 국가인권위에 대한 공격에 핏대를 올리는 이들을 보면 그 토끼가 떠오른다. 국가인권위가 뭔지도 모르면서 함부로 역할을 바꾸고 호통을 치고 있다. 핏대를 올리는 자신들을 지켜보기 위한 감시견으로서 국가인권위가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감시견이 자기 바지자락을 물었다고 항의하는 꼴이다.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에 따라 하나씩 살펴보자.

국가인권위는 국가 내부의 '반성문' 쓰는 장치이다. 인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기관이 실제로는 인권의 주요 가해자인 일이 다반사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의 국가기관을 잘 살펴보고 반성문 쓰게 하고 대안을 만들라고 하는 장치이다. 민간 인권단체들이 분명 그런 역할을 하고 있지만, 국가인권기구를 설치하는 것은 인권보장이 국가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민간이 할 역할은 역할이고, 국가 자신의 임무인 인권보장의 일을 똑바로 하라고 국가기구를 만들 것을 국제사회가 합의한 것이다. 자기 내부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일이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국가인권위를 국가기구로 만들더라도 다른 어떤 국가기구로부터도 영향 받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기구여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예산을 깎겠다느니 없애버려야 한다느니 하는 말은 국가인권위의 독립성을 정면으로 훼손하는 짓이다.

국내의 헌법이나 법률에 의해 설치될지라도 국가인권위는 국제적으로 승인된 인권규범을 자국에 적용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국내법만이 아니라 국제인권규범을 활동의 틀로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 인권위에게 국내법을 무시한다고 질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권에는 실정법이 아우르기 힘든 회색영역이 존재한다. 기존 질서에 부합되는 법규정만으로는 진전될 수 없는 인권상황이 존재한다. 사법기관의 판단과 다를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존재한다. 그런 국가인권위에 법질서 훼손을 운운하는 것도 무지의 소산이다.

진보단체 쪽의 의견만 반영해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이 문제라 하는데, 그럼 국가인권위가 대기업이나 정부 관계자들과 친해야 할까? 인권피해자들이나 그들을 옹호하는 인권단체와 가까워야 할까? 민간 인권단체와의 협력은 국가인권위가 지켜가야 할 기본적인 행동양식이다. 인권단체와의 협력을 하지 말라는 것은 국가인권위의 타락을 방치하는 꼴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국가인권위는 국가기구를 내부에서 감시·견제하는 장치이고, 인권단체들은 여타 국가기구들과 국가인권위를 감시·견제한다. 인권단체들이야말로 국가인권위를 향해 항상 따가운 회초리를 준비하고 있는 당사자들이다.

입만 열면 '선진국' 수준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인권을 빼놓고 달리겠다 하니 그 차에 승차할 수는 없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부었을 기업이미지 광고의 화려한 영상이 악몽으로 보이고, 화려한 정부 정책의 청사진이 누렇게 보이는 것은 새로 떠오르는 인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이미 오래전에 인정되고 확인·재확인돼온 기본적인 인권조차 무시하기 때문이다. 인권의 주인들은 인권 감시견을 인권가해자가 걷어차는 현실을 가만 두고 보지 않을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에 관한 원칙(Principles relating to the status of national institutions, 유엔총회 결의안 48/134, 주요내용 요약)

[권한]
-국가인권기구는 인권을 보장하고 향상시키는 필요한 광범위한 권한을 확보해야 하며, 이러한 권한은 헌법이나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인권의 보호 및 향상을 위한 자문, 인권을 위한 교육과 홍보, 국제협력,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 및 구제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권한에 속하는 모든 사안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독립성]
-국가인권기구가 국가권력의 남용을 견제할 수 있으려면, 헌법이나 법률을 통해 모든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지위와 권한의 독립성
-국가인권기구가 정부나 여타 공공기관, 사적 단체로부터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권한과 법적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가인권기구는 입법·사법·행정 등 모든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설치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업무의 독립성
-국가인권기구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절차규칙에 따라 일상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정보제공 요청 등 다른 기관, 특히 정부기관의 협조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

□재정적 독립성
-국가인권기구는 활동의 물적 기반이 되는 재정을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안정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가 자체적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직접 국회에 제출, 승인을 요구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며 어떤 형식으로든 다른 정부부처의 예산에 연계되어서는 안된다.

[운영방식]
-국가인권기구는 권한에 관한 모든 사안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회의체계의 구성이나 소집 등 운영방식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의견이나 권고사항을 직접 또는 언론기관을 통하여 널리 알리고 여론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국가인권기구는 특히 취약집단이나 특정 지역의 인권을 보호하고 향상시키는 데 헌신하고 있는 민간단체와 협력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준사법적 권한]
-국가인권기구는 개별적인 인권침해에 관한 진정을 접수받아 신속하고 저렴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구제할 권한을 가질 수 있다.
-실정법상 명백한 범죄행위로 보기 힘든 이른바 '회색영역'의 인권침해문제를 조사하고 구제할 수 있다.
-국가인권기구가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와 구제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을 보장받아야 한다. 조사에 필요하다면 누구든지 청문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모든 정보나 문서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조사결과 인권침해가 확인되었을 때에는 피해자에게 적절한 구제조치를 제공할 수 있는 결정의 효력을 보장받아야 한다.

 

[류은숙] <2006년 1월 20일 인권하루소식 제2976호> 

<인권오름 제 151호 2009년 05월 06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역자 주>

최근 국가공권력의 인권침해가 일상화되고 인권보호와 증진을 위한 제도적 장치들의 노골적인 후퇴가 많은 사람들의 걱정과 분노를 자아내고 있다. 한 사례가 국가인권위원회의 기구 축소, 권한과 지위에 대한 위협, 인권 의제와 국가인권위 인사의 보수화 시도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한 정부의 무지에 찬 공격이 얼마나 국제인권의 역사와 국제사회의 조류에 역행하는 것인가를 이 보고서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지난 10년 새로운 인권 행위자가 국제무대에 등장했는데, 즉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이다. 이 기구들은 국제적으로 승인된 기준, 소위 파리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파리 원칙은 특별한 유형의 국가 기구의 창설을 구상하고 있는데 즉 인권의 보호자이자 자문가이며 인권 교육자인 국가 기구를 구상하고 있다. 국가인권기구의 설립, 임명 및 재정은 각국 정부에 달려있지만 정부는 이 일을 외부의 간섭 없이 공명정대하게 수행해야 하며 국내에서나 국제적으로나 여타 인권행위자들과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십여 년 전에는 아주 소수의 국가인권기구들이 있던 반면, 오늘날에는 적어도 60개국에 있으며 많은 국제 행위자들이 국가인권기구의 창설과 강화를 지지하고 있다. 하나의 제도적 모델이 국제적 인권 의제에서나 국가의 국내 구조에서 이렇게 두드러지게 된 것은 아주 예외적인 일이다.

이 연구보고서는 국가인권기구의 현재 개념과 지위가 50여년 이전에 시작된 오랜 과정의 결과이며, 국제인권체제의 점진적 강화와 긴밀히 연결돼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국가인권기구의 발전은 크게 세 개의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구상의 도입과 발전(1946-1978), 개념의 보급(1978-1990), 국가인권기구의 확산(1990년부터 계속) 단계이다. 이런 구분은 일반적 경향을 보여줄 뿐이며 실제적으로 이 세 단계는 서로 겹친다. 그럼에도 연대기적 범주화가 도움이 되는 것은 국가인권기구현상의 배경이 되는 기원과 역동성을 탐색할 때이다. 세 개의 전개 양상에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데, 개념의 구체화, 구가인권기구에 대한 정부들의 태도 변화, 냉전 종식이 각 단계의 발전에 분깃점이 됐다.

개념의 구체화

국가인권기구에 대한 구상은 1946년에 처음 소개됐다. 이때 유엔인권위원회의 장래 과제를 준비하고 있던 국제전문가집단이 제안한 것으로 국가들이 인권을 준수하는가에 대한 정보를 유엔인권위원회에 제공할 ‘국가 위원회’ 또는 ‘정보 그룹’을 정부가 설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엔경제사회이사회는 좀 더 완화된 형태로 이 구상을 승인했다. 국가기구는 장차 유엔인권위원회의 작업을 증진하는 가운데 정부들과 협력할 수 있다고 했다. 즉, 가장 초기에 구상된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은 국내에서 인권의 보호와 증진이라기보다는 정부들의 국제인권포럼 참여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어진 30년 동안 이런 개념은 ‘국가인권기구’의 현재 개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정표가 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첫째는 1962년 유엔인권위원회 결의안이다. 이 결의안은 그보다 2년 전에 위원회의 전 의장이 제안한 것이었다. 이 결의안은 ‘인권을 위한 국가자문위원회’ 또는 유사한 기구(예를 들어 인권문제를 연구하고, 국내 차원에서 인권상황을 검토하고, 정부에 자문을 제공하며, 대중적 인권인식창출을 도울 수 있는 기구)의 창설을 촉진할 것을 정부들에게 요청했다. 국가인권기구의 지위, 구조, 권한과 관련된 민감한 문제들을 회피하기는 했지만, 이 결의안은 국가인권기구의 기본 기능(모니터링, 자문, 교육)에 대한 최초의 청사진을 만들었다.

두 번째 이정표는 1978년 유엔인권위원회 요청으로 유엔이 조직한 국제세미나였다. 이 세미나의 목적은 국가인권기구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지침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50개의 권고안이 작성됐고 이후 유엔총회와 유엔인권위원회가 승인했다. 이 지침은 국가인권기구의 통일된 개념을 만들려는 최초의 노력이었다. 이전과 달리 더 이상 ‘기능’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인권기구의 ‘지위’와 ‘구성’을 정의했다. 또한 이 지침은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을 상당히 확장했다. 단지 정부에 자문하는 역할만이 아니라 인권 옹호를 지향하는 “공적 서비스 기구”를 구상했는데, 즉 무료법률지원, 진정에 대한 조사, 개인의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구제책을 적용할 수 있는 기구의 구상이었다. 그렇지만 1978년 지침은 현대의 국가인권기구 개념을 충분히 담지는 못했다. 첫째, ‘한 개’의 핵심 기구 창설을 권고한 것이 아니라 몇 개의 국가 기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지침의 의미였다. 더구나 지침에서 국가인권기구에 광범위한 역할이 주어졌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정부의 주도에 달려있었다.

20년 이후, 유엔인권위원회는 국가기구문제를 재검토할 목적으로 국제 워크샵을 조직할 것을 유엔사무총장에게 요청했다. 1991년 열린 이 워크샵은 국가인권기구에 대해 토론할 뿐만 아니라 그 기구들이 토론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한 최초의 국제회의였다. 일련의 실천가들의 권고에 따라 이 회의는 새로운 국제 지침을 채택했다. 이것이 일명 ‘파리 원칙’이다. 파리원칙은 국가기구의 성격, 기능 및 구조를 구체화했다. 가장 중요한 점은 ‘핵심’(key) 국가 기구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즉 인권분야에서 총괄적인 권한을 가지며 국내에서나 국제적으로나 여타 관련 행위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만드는 핵심 기구이다. 파리원칙은 또한 국가기구의 역할을 강화했다. 국가인권기구의 ‘독립성’의 요건을 개발했고 그 구성에서 다원성을 존중할 것에 대한 규정을 꼼꼼하게 만들었다. 파리원칙이 제시한 새로운 개념을 1992년 유엔인권위원회가 1993년 세계인권대회와 유엔총회에서 승인했다.

이후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 구상은 다수의 여타 정부 간 기구와 국제인권단체들과 전문가 집단의 지지를 얻었다. 파리원칙을 승인한 이후 10년간 50개 이상의 정부가 국제적 요건을 따르는 국내인권기구를 창설했다. 국가인권기구의 역할은 국내외적으로 강화돼왔다.

정부들의 태도 변화

이런 발전은 충분한 정치적 지지 없이는 가능할 수 없었다. 국내 기구의 문제는 국가의 국내주권에 속하는 문제로서 유엔인권위가 다룰 권한이 없다고 일부 정부들이 수십 년 동안 주장해오긴 했지만, 국가인권기구의 창설은 명백한 반대에 부딪친 일이 없다. 그렇지만 정부들은 국제 지침을 받아들이는 걸 주저했다. 1970년 말 이전에는 기구의 구체적 모델이나 해야 할 역할을 개발하는 것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 즉, 대다수 정부가 원칙적으로는 국가인권기구의 구상에 찬성했지만, 설립할지 말지를 결정하거나 어떤 식으로 구성하느냐를 결정할 권리는 정부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주로 동유럽과 비동맹 국가들의 입장은 각국의 법적․정치적 전통과 국가주권의 원칙을 존중할 필요성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반면 서방 정부들의 주장은 인권보호를 위한 충분한 구조가 이미 있으니까 추가로 또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1960년대 초반 이래로 국가인권기구에 대해 유엔 정책 기구들이 택한 모든 결의안의 궁극적인 결정이란 언제나 국가 정부들에게 남겨져 있다는 것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완됐다.

그러나 국제적 인권 모니터링이 강화되면서 정부들은 국가기구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1970년대 말, 이런 특수한 유형의 국가기구와 관련된 주요한 문제는 개념의 선명성이 부족하다는 거였다. 기구의 형태와 기능에 대한 간결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 소수의 서유럽 정부들은 이미 유엔이 국가기구의 보다 분명한 역할을 채택하고 기능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진전시켰다. 하지만 1970년대 말까지는 이런 생각이 충분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1970년대 말 이때는 많은 비동맹 국가들이 국가주권원칙을 손상하지 않고도 인권문제를 다룰 수 있는 수단으로서 국가인권기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정부들은 국가인권기구가 국가 구조에서 바람직한 부분인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토론하지 않았다. 유엔정책기구들은 거의 매년 국가인권기구의 창설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일부 남아있던 회의적인 국가들(주로 동유럽 국가들)조차 80년대 말에는 국가인권기구를 지지했다. 국가인권기구를 발전시키기 위해 유엔이 좀 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도 근거를 얻기 시작했다. 인권기준 설정으로부터 이행으로의 전환, 유엔의 기술지원 활동에 대한 재평가 속에서 유엔총회는 사무총장에게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을 지원할 권한을 줬다. 유엔정책기구들은 자신들이 최초로 인정한 1978년 지침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걸 피하면서 그 대신에 ‘효과적’이고 ‘독립적’인 국가인권기구의 창설, 그러한 기구에 대한 정보와 설립에 관한 정보교환을 촉진했다. 그 결과 1980년대에는 변화된 역할과 권한을 가진 아주 다른 종류의 국가인권기구의 출현을 목격하게 됐다.

1991년 파리 원칙을 채택함에 따라 1990년대 초반이 돼서야 모든 국가인권기구는 최소 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정부들이 받아들이게 됐다. 최종적으로 획기적인 약진은 1993년 세계인권대회에서 일어났다. 세계인권대회는 파리원칙에 따른 국가인권기구의 설립을 승인했다. 이때부터 파리 원칙에 대한 언급은 유엔 결의안의 고유한 부분이 됐다. 더욱이 1994년부터는 정부들이 국가인권기구를 설립하고 강화하길 원하는 정부들의 지원 요청에 “높은 우선순위”를 둘 것을 유엔사무총장에게 되풀이해서 요청했다.

국가인권기구 현상

국가인권기구가 유엔의 전반적인 인권활동에서 차지한 핵심적인 위치는 2002년 유엔사무총장의 보고서에 반영돼 있다. “국내 차원에서 강력한 국가인권기구를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권을 한결같은 태도로 보호하고 증진하는 걸 보장하는 것이다. 각 나라에서 국가적 인권 보호 체제의 설치와 강화는 따라서 유엔의 주요 목적이 돼야 마땅하다.”

국가인권기구의 역할로 구상된 것은 국내에서의 인권 증진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지난 십년이 보여주듯 국가인권기구는 국제적 인권 행위자로서의 역할, 즉 정부 및 민간 조직과 더불어 국제인권조직의 활동에 협력하고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발전시켰다. 최근 몇 년 동안 국가인권기구들은 국제인권의 장 뿐 아니라 국제정책결정 기구와 전문가 조직의 활동에 참여의 수준을 높여왔다. 국가인권기구들이 얻은 높은 국제적 이목의 결과 이제 국가인권기구의 창설은 정부들의 “규범”으로 간주되며, 국제적 인권 규범에 따르겠다는 약속에 부응하여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려는 정부의 의지를 보여주는 징표로 해석되고 있다.

<참조> 파리 원칙의 주요 내용[권한]

- 국가인권기구는 인권을 보장하고 향상시키는 필요한 광범위한 권한을 확보해야 하며, 이러한 권한은 헌법이나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야 한다.

- 국가인권기구는 인권의 보호 및 향상을 위한 자문, 인권을 위한 교육과 홍보, 국제협력,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 및 구제 등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

- 국가인권기구는 권한에 속하는 모든 사안을 독자적인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심사할 수 있어야 한다.

[독립성]

- 국가인권기구가 국가권력의 남용을 견제할 수 있으려면, 헌법이나 법률을 통해 모든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활동할 수 있는 제도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지위와 권한의 독립성

- 국가인권기구가 정부나 여타 공공기관, 사적 단체로부터 간섭이나 방해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권한과 법적 지위를 보장해야 한다.

- 무엇보다도 국가인권기구는 입법·사법·행정 등 모든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설치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업무의 독립성

- 국가인권기구가 자체적으로 마련한 절차규칙에 따라 일상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 정보제공 요청 등 다른 기관, 특히 정부기관의 협조를 강제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

□재정적 독립성

- 국가인권기구는 활동의 물적 기반이 되는 재정을 다른 국가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안정적으로 그리고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 국가인권기구가 자체적으로 예산을 편성하고 직접 국회에 제출, 승인을 요구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며 어떤 형식으로든 다른 정부부처의 예산에 연계되어서는 안된다.

[운영방식]

- 국가인권기구는 권한에 관한 모든 사안을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회의체계의 구성이나 소집 등 운영방식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 국가인권기구는 의견이나 권고사항을 직접 또는 언론기관을 통하여 널리 알리고 여론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 국가인권기구는 특히 취약집단이나 특정 지역의 인권을 보호하고 향상시키는 데 헌신하고 있는 민간단체와 협력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준사법적 권한]

- 국가인권기구는 개별적인 인권침해에 관한 진정을 접수받아 신속하고 저렴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구제할 권한을 가질 수 있다.

- 실정법상 명백한 범죄행위로 보기 힘든 이른바 '회색영역'의 인권침해문제를 조사하고 구제할 수 있다.

- 국가인권기구가 인권침해에 대한 조사와 구제기능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진실을 규명할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을 보장받아야 한다. 조사에 필요하다면 누구든지 청문할 수 있어야 하며, 필요한 모든 정보나 문서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 조사결과 인권침해가 확인되었을 때에는 피해자에게 적절한 구제조치를 제공할 수 있는 결정의 효력을 보장받아야 한다.

 

<인권오름 제 151호 2009년 05월 06일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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