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71 호  [기사입력] 2013년 11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날이 춥다. 겨울이 되면 제일 두려운 뉴스가 있다. 전기가 끊긴 방에서 촛불 켜고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가난한 이들의 반복 생산되는 사건, 이 겨울에 수도도 전기도 끊겼다는 에너지 빈곤층의 사연이다. 엄청난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풍요의 한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묻게 된다. 모자라지 않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혹여 모자란다면 도대체 누구의 소비 때문에 모자란 것인가? 배분이 불평등한 에너지는 생산과정에서도 혹독한 차별을 한다. 

서울 대한문 앞에서 밀양송전탑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765kv 송전탑을 상징하는 765배의 절을 하는 행사가 여러 번 있었다. 얼마 전 점심 무렵 밀양에서 올라오신 할머니 세 분과 같이 절을 하고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시끄럽다’고 ‘나랏일 반대하는 것들’이라고 욕을 하고 지나갔다. 잠시 후 잘 차려입은 중년 여성들이 왁자지껄 지나갔다. “왜 멈춰? 짓던 건 지어야지. 왜 중단하라는 거야?” 할머니들에게 삿대질 하듯 외쳤다. 거의 악을 쓰는 수준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분에 차서 달려가셨다. “니들 지금 뭐라캤노?” 경찰이 할머니를 뜯어말리는 사이 그 여성들은 유유히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속상해서 못살겠다’는 할머니의 맘속에 꽉 찬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랏일에 버려질 수 있는 시민이 시민일 수 있는가?’ ‘당신들이 돈만 주면 살 수 있다고 여기는 그것을 나는 결코 팔 맘이 없다.’ ‘이건 거래가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며칠 전 추우니 집에 그냥 계시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기어코 김치통을 들고 왔다. 택시라도 타고 오시라 했건만 늘 버스를 타고 오신다.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 나가니 양쪽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힘겹게 주저앉아 있다. 칠순을 넘긴 엄마가 그날따라 참 늙어 보였다. 횡단보도에서 엄마를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밀양의 ‘할매’라고 불리는 분들이나 울 엄마의 나이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던 것이다. 엄마가 지금 산속에서 송전탑 공사에 맞서 싸우는 상상을 해보니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자식을 위해 기어코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는 엄마나 산자락에 매달려 ‘이런 환경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외치는 그분들이나 다를 바 없는 마음일 것이다.

엄마는 평생 에너지 빈곤층이었다. 아이 넷을 키워야 했던 알량한 단칸방은 구들장이 불량이었다. 어느 밤 연탄가스에 모두 비명횡사할 뻔 했다. 동생의 신음소리에 눈을 떴다는 엄마는 잠과 가스에 취한 우리들을 찬바람 부는 길로 내쫓아 정신 들게 한 후 동치미 국물을 퍼먹였다. 구들장 고칠 엄두가 안나 아예 연탄을 때지 않기로 했다. 일하고 돌아온 엄마는 뜨뜻한 방에 실컷 지져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난 그때 ‘지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엄마의 갈라터진 발을 씻을 더운 물은 꿈꾸기 어려웠다. 비싼 석유곤로에 물을 데워 쓰는 것은 사치였다. 가스보일러로 난방과 온수를 해결할 수 있는 삶은 엄마의 생애 아주 후반부에야 왔다. 마찬가지로 밀양의 할머니들은 평생 얼마나 에너지를 써봤을까? 싸고 깨끗한 에너지와는 얼마나 먼 거리의 삶을 살아왔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끼고 참고 견뎠을 삶일 것이다.

우리 주변은 많이 커지고 화려해진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엄마와 같은 에너지 빈곤층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빈곤층까진 아니더라도 생활의 주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오른다’는 전기 등 각종 에너지 요금 걱정에 핵발전소와 송전탑을 빨리 세워야 더 싸게 쓸 수 있다는 선전이 솔깃할지 모른다. 생활의 아쉬움과 각박함에 ‘왜 공사를 방해하냐’고 원망할지도 모르고, 해준 것 없어도 나랏일 방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스스로 가꿔온 도덕심에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끼리, 같은 시민끼리 ‘누구는 국민입네 누구는 국민 아닙네’로 나뉘어 싸우는 갈등만 커져간다. 이 갈등의 에너지를 전환한다면 아주 고 에너지가 발생할 것 같다.

기업이 잘되고 기업이 돈 많이 벌면 노동자도 잘살게 된다는 말, 나랏돈이 많아지면 가난한 이에게도 혜택이 온다는 말, 이제 그런 말들에 의심을 보여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형편이다. 마찬가지로 핵발전소 많이 세워야 값싸게 전기를 쓸 수 있다는 말, 그 전기를 쓰려면 송전탑이 필요하다는 말, 경제성장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란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의심을 품고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질문을 던질 때가 지나도 한참 늦은 것 같다. 이번 주말로 계획된 밀양희망버스는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시동을 거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 엄마 같은 분들이 고통 받는 게 그저 안쓰럽고 죄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의로운 삶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의지에 감동하게 됐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분들이 고통을 자처하고 감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분들이 대신 싸워주고 대신 대안을 만들어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건 우리의 미래이고 우리가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대안에너지의 선구자로 알려진 헤르만 셰어의 글과 셰어의 노력으로 일궈진 ‘세계재생에너지회의’의 성명이다. 새삼스러운 내용은 아니다. 밀양과 관련해 대안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들었던 내용들이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건 이런 것이다. 셰어는 연방의원을 여러 차례 지낸 정치인이자 학자이다. 그와 독일 시민들이 재생에너지를 주장하고 실행하면서 고착당하고 채증당하고 다치고 끌려갔다는 얘기는 없다. 공권력에 모욕당하고 나랏일에 반대하는 건 국민도 아니라고 ‘버림받았다’는 얘기도 없다.

2010년 세상을 떠난 셰어는 평생을 바쳐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인권을 ‘자연의 수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부적 인권’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이 화석에너지의 고갈이나 위험성 때문에 그저 피치 못해 나온 요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권적이란 주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셰어가 강조하는 전환의 절박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올 겨울은 여러모로 많이 춥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절박하다.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달라져야 나눠 갖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밀양의 고통에 맞닥뜨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게 된 것이다. 서울을 위해 지방을 희생하는 방식을 버려야 하고 위험한 핵발전 대신 하루빨리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 에너지의 생산도 혜택도 같이 나누는 길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인지 밀양희망버스는 질문을 던지려 한다.

“재생 에너지에 대한 인권”(2005년 11월 26-30,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재생에너지회의에서 채택한 최종 성명)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의 첫 문장은 기본적인 인류의 약속을 명시하고 있다. 이 약속을 존중할 때에만 평화로운 인류의 삶이 튼튼하게 보장될 수 있다.

에너지는 모든 삶에 기본적인 필수 조건이다. 에너지 가용성은 기본적이고 불가분적인 인권이다.

20세기에 우리가 얻은 경험은 기존의 에너지 공급 시스템(주로 화석 에너지와 일부 원자력 에너지에 의존하는)이 모든 사람에게 에너지 인권을 보장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에너지 인권은 10억 배 이상에게 침해됐다. 전통적인 에너지원의 임박한 고갈과 그것들이 환경과 기후에 미친 엄청난 영향 때문에, 에너지 권리는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적게 보장될 수 있다. 에너지 인권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재생에너지의 동원을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다. 지금까지, 국제적 노력은 필수적인 요구와 주어진 기회를 따라잡지 못하고 꾸물거렸다. 다수의 유엔 회의는 지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약속을 했다. 매 단계에서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유엔 기구들과 다국적 개발 은행들은 그들의 우선순위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려하지 않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했다. 교토의정서는 그것에 요구된 바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교토의정서의 주요 문제는 재생가능에너지를 향한 근본적 전환으로 배출을 방지하는 대신에 거래와 매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강조한데 있다. 원자력의 증진은 국제법속에 정해져있지만 재생에너지는 그렇지 않다. 화석과 핵에너지 시스템은 여전히 매년 미화 5천억 달러의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이것은 재생에너지에 쓰여지는 것의 50배이다.

정부간 국제 기구들은 그 시스템에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차별을 반영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핵기술의 확산을 조장하고,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화석에너지산업의 위성으로 작동하고 있다. 두 기구 모두 핵과 화석 에너지의 위험성을 낮추고 재생에너지의 잠재성을 부정함으로써 정부들과 대중을 오랫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왔다.

이 기구들은 미래에 눈감은 에너지 정책으로 정부들을 이끌어왔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더 이상 침묵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책임자의 이름을 거명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책임질 뿐 아니라 행동하지 않음에도 책임져야 한다. … 인류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오늘과 미래에 재생에너지의 비용은 지속가능하고 싸며 모든 사람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더 이상의 지연은 무책임한 것이다. 경제적, 생태적 이유와 평화 정책이 재생가능 에너지를 웅변하고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하건데, 재생에너지를 위한 기본적인 윤리적 결단이 결론이다. …


국제재생에너지기구 설립회의 연설(2009년 1월 26일, 독일 본, 헤르만 셰어)

… 유명한 세계적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태양은 결코 그늘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문명은 무수한 실존의 에너지 위기들로 그늘 지워져 있고, 동시에 그 위기는 쌓여가고만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핵심어들을 알고 있습니다. 줄어드는 매장량, 늘어가는 에너지 요구, 그에 따라 늘어나는 소진, 가격 상승, 경제적 제약, 사회 내부의 긴장과 국가 간의 국제긴장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 말고도 기후 변화, 공기와 물 오염, 죽어가는 숲과 사막화가 있습니다.

인민과 그 정부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시한폭탄의 째깍거리는 소리 듣기를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해결책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광범위한 해결책은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입니다.

세계문명은 다양한 에너지 위기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하여 시간과 경주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그 전환의 때입니다. 오랜 아프리카의 교훈처럼,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려라. 그러면 그늘은 네 뒤에 생길 것이다.”

… 제가 보기에 재생에너지 정책에 대한 4가지 일반적 지침이 있습니다.

1. 빠른 행동이 필수불가결합니다. 재생에너지에 대해 입 발린 말을 늘어놓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구적으로 말하고, 국가적으로 미루는” 게임을 끝낼 때가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
2. 재생에너지는 공공재입니다. 바람과 태양열을 사유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에너지 형태를 사용하면 세계 경제에 더 큰 평등이 올 겁니다.
3. 재생에너지는 거시-경제적 혜택을 다면화했습니다. 정치적 목표와 기술은 거시경제적 혜택을 투자자와 소비자를 위한 미시경제적 동기들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4. 재생에너지는 연료비와 환경 비용을 피하는 새로운 경제적 계산을 가능케 합니다.

… 여러분에게 목표가 있다면, 많은 저항들로 인해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일이 틀에 박힌 방식으로 되지 않을 때는 틀을 벗어난 경로를 취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야기한 방법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부담 대신에 혜택을 공유하자 - 국제재생에너지기구 설립의 정치, 경제, 생태적 이유(2008년 4월 10일, 독일 베를린, 헤르만 셰어)

… 우리는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로 경제와 사회에 대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해있다.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기후 변화만이 아니다. 과거 화석 자원의 과도한 사용으로 야기된 지구 온난화의 점증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구의 에너지 시스템은 온전했을 리가 없다. 다양한 환경 문제와 함께 에너지 자원의 계속 커가는 결핍 문제가 남아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통적인 에너지 공급 시스템의 간접적인 외부적 비용이다. 현재의 에너지 가격은 이런 비용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불해야만 하는 비용이다. 재생에너지로서만 우리는 그런 비용을 피할 수 있고 사회들을 그런 비용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이런 도전에 대한 답들은 대부분에게 경제적 부담으로 여겨진다. 경제적 부담에 대한 가정이 지금의 에너지 토론에 큰 자국을 남기고 있다. 나에게 이런 가정은 아주 근시안적으로 보인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의미심장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및 생태적 혜택을 이끌 것이다. 미시경제적 차원만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에너지 투자에 대한 아주 고립적인 비용비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런 혜택들이 간과될 경향이 있다. 거시경제적이고 총체적인 전망을 사용하면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핵에너지는 박물관에 있어야(2008년 8월 독일타임스, 헤르만 셰어)

우리는 모든 우리의 전기 필요를 재생에너지로 충족시킬 수 있다.

핵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싸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대안에너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고 핵에너지에 한때 그랬던 것처럼 대안에너지의 증진에 힘을 쏟아야 할 때이다. 세계적으로 핵에너지의 르네상스를 선포하는 선전이 더 많다. 세계에너지기구는 심지어 2050년까지 1,200개의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기후변화에 대한 해답이며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연료 가격을 안정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핵에너지의 많은 심각한 위험들 뿐 아니라 핵에너지의 진짜 비용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재생에너지의 엄청난 잠재성을 부인하고 있다. …

우리의 핵폐기물은 10만년 남을 유산이다. 어떤 정치적, 경제적 질서가 그런 기간을 버티고 남아있을 수 있을까? 원자력으로 돌아가선 안되는 더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 엄청난 물을 필요로 하는 핵 원자로는 늘어만 가는 지구적 물 위기와 충돌하며 세계 인구의 필요와도 경쟁한다. 핵발전소가 만들어낸 잉여 열은 생산적으로 이용하기 어렵다. 이것이 핵발전이 근본적으로 비효율적인 이유이다. 이윤을 내기 위해선 비싼 핵발전소가 최대생산능력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이건 정부가 전기 시장 자유화를 뒤집고 핵산업에 몫을 보장해줘야만 가능한 일이다. 원자력 경제는 언제나 국가 산업이었다. 이것은 공공연히 인정되기도 하지만 때론 은폐된다. …

지난 12년 동안, 독일의 재생에너지법으로 3만 메가와트의 전력이 만들어졌다. 2007년 한해에만, 새로운 용량이 급격히 늘어서 재생에너지가 150억 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했다. 이것은 두 개의 핵발전소의 연간생산과 맞먹는다. 이런 초기 비율이 25년만 계속돼도 독일의 전기는 재생에너지로 완벽하게 공급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약 35만 평방킬로미터에 8천1백만 명의 인구를 가졌다. 독일에서 될 수 있는 일은 어디에서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우선순위에서, 기존의 중앙집중식 설비에서 재생 에너지를 확장하는 것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고도로 집중화된 전통적인 발전소는 다수의 더 작은 중간 크기의 발전소로 대체될 수 있다. 태양 또는 풍력 발전기는 단기간에 설치될 수 있는 반면에 핵발소는 짓는데 평균 10년이 걸린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선 핵에너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

핵에너지의 비용은 멈출 수 없이 치솟는 반면 재생에너지의 비용은 순차적 생산과 기술의 세련으로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근시안적인 비관주의 뿐 아니라 핵에너지를 둘러싼 근거 없는 기술적 낙관주의를 극복해야만 한다. … 장차 핵에너지가 있을 곳은 기술 박물관이다.

인권오름 제 371 호  [기사입력] 2013년 11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203 호  [기사입력] 2010년 05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오랜만에 명동성당에 다녀왔다. 4대강 사업을 멈추기 위한 천주교 사제들의 단식농성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첫날 비가 심하게 퍼부었다. 처마 밑에 침낭을 깔고 누운 늙고 젊은 사제들에 아랑곳없이 비는 밤새 퍼부었다.

사무실을 찾은 대학생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지금 인권이 얼마나 후퇴됐다고 보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정말 많이 후퇴했다’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그 증거로 사제단 농성을 들었다. 우리에겐 수많은 인권의 원칙과 그 원칙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한 제도와 논의의 장이 있다. 그런데 그것들이 도무지 작동하지 않는다. 작동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인권침해를 위해 동원되고 왜곡되고 있다. 언론, 국회, 법집행기구, 국가인권위 등이 제 역할 대로 작동하지 않기에 사제단, 승려, 목사들까지 거리에 나서고 있다. 이것만큼 위기의 신호가 더 클 수가 있을까?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앞둔 지금, 인권과 환경에 너무도 중요한 핵심쟁점에 대해 입도 벙긋 못하게 하니, 밥을 굶으며 거리의 정치에 나서게 된 것 아닌가?

‘인권은 환경, 평화와 상호의존적이고 불가분적’이라는 말이 백번 맞다는 생각이 든다. 표현의 자유가 억눌리고, 악법들이 무정차 통과되고, 비판과 저항에는 법집행이 남발되고, 전쟁선동에 부끄럼을 잃은 인간의 현실과 포클레인에 유린되는 뭍 생명들의 위기가 동시 진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애도는 사람간의 관계에서 너무나 귀하고 근본적인 감정이자 의무이다. 5.18 영령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애도조차도 제대로 할 수없는 지금, 강들에 대한 애도, 강과 함께 죽어가는 뭍 생명들에 대한 애도도 허용되지 않는다. 인권과 환경의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을 처절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환경운동을 하다 초국적기업과 군부정권의 음모로 사형당한 나이지리아의 활동가 켄 사로 위와는 “환경은 인류의 첫 번째 권리다”란 말을 남겼다. 이 첫 번째 권리에 대한 의무는 당연히 “환경을 보호하고 보존할 의무”이다. 이런 당연함을 정리한 것이 1994년 유엔의 ‘인권과 환경에 관한 원칙’이다.

1994년 유엔 인권위원회의 특별보고관 Fatma Ksentini가 유엔인권최고대표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생태계의 보존과 유지가 인권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주장하여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Ksentini는 보고서 끝에 ‘인권과 환경에 관한 원칙 초안’을 제시했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이 원칙은 Ksentini 원칙이라고도 불린다. ‘초안’이라는 말에서 보여 지듯 정식규약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이 초안은 환경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유엔 최초의 문서이다. 이 초안 이후 기존의 인권 항목들을 환경과 연관 지어 구체적,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이어져왔다.

‘환경권’은 오늘날 낯설지 않은 말이 됐다. 하지만 환경권의 내용이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구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이 원칙에서는 개인적으로나 타인들과 결사해서나 환경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나서는 것을 권리이자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 개인의 웰빙만을 강조할 뿐, 생태계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지 않는 환경권 같은 건 말장난이지 절대 성립할 수가 없다. 또한 환경을 얘기할 때 인간을 위한 인간의 대상으로만 말하면, 그것은 온전한 환경일 수가 없다. 환경은 인간을 포함하여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를 아우를 때 환경일 수 있다. 이 원칙에서는 사람만이 아니라 공기, 토양, 물, 빙하, 식물군, 동물군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강의 이름을 절절히 부를 때, 거기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담겨 있는 것이다. 강을 얘기하는 것은 곧 인간을 얘기하는 것이고, 인간의 표현의 권리를 말하는 것은 곧 생태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의무도 함께 말하는 것이다.

인권과 환경에 관한 원칙 초안(Draft Principles on Human Rights and the Environment - The Ksentini Principles, 1994년 유엔인권위원회)전문(생략)

I

1. 인권, 생태적으로 건강한 환경, 지속가능한 발전, 그리고 평화는 상호의존적이고 불가분적이다.

2. 모든 사람은 안전하고, 건강하고, 생태적으로 건강한 환경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 권리와 시민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 및 사회적 권리를 포함한 여타 인권은 보편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며 불가분적이다.

3. 모든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와 결정에 관하여 어떤 형태의 차별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한다.

4. 모든 사람은 현세대의 필요를 평등하게 충족시키기에 적절하고, 미래 세대의 필요를 평등하게 충족시키기 위해 미래 세대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 적절한 환경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II

5. 모든 사람은 국경 내에서나 밖에서나 오염, 환경 파괴, 그리고 환경에 나쁜 영향을 끼치며 생명, 건강, 생계, 복지 또는 지속적인 발전을 위협하는 활동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갖는다.

6. 모든 사람은 공기, 토양, 물, 빙하, 식물군과 동물군, 그리고 생물다양성과 생태계 유지에 필수적인 과정과 영역을 보호하고 보존할 권리를 갖는다.

7. 모든 사람은 환경침해로부터 자유로운, 도달 가능한 최상의 건강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8.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안녕에 적합한 안전하고 건강한 식량과 물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9. 모든 사람은 안전하고 건강하게 작동하는 환경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10. 모든 사람은 안전하고 건강하며 생태적으로 건강한 환경에서 적절한 주거, 토지보유, 생활 조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11. (a) 모든 사람은 비상시, 또는 전체로서의 사회에 이로운 목적을 수행하고 다른 수단에 의해서는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결정 또는 행위의 목적을 위해서나 그 결과에 의해서나, 자신의 집 또는 토지에서 퇴거당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b) 모든 사람은 퇴거에 관하여, 그리고 만약 퇴거된다면 시기적절한 배상, 보상, 적절하고 충분한 거처 또는 토지에 대한 권리에 관하여 효과적으로 결정에 참여하고 협의할 권리를 갖는다.

12. 모든 사람은 자연 재해 또는 기술적 재해 또는 기타 인간이 야기한 재해의 경우에 시기적절한 원조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13. 모든 사람은 문화적, 생태적, 교육적 목적, 건강, 생계, 여가, 정신적 및 기타 목적을 위하여, 자연과 자연자원을 보존하고 지속가능하게 이용하여 평등하게 혜택을 받을 권리를 갖는다. 여기에는 생태적으로 건전한 자연에 대한 접근이 포함된다.

모든 사람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 또는 집단들의 기본적인 권리와 일치되는 유일무이한 장소를 보존할 권리를 갖는다.

14. 원주민족들은 자신들의 토지, 지역, 자연자원을 통제할 권리, 전통적 생활양식을 유지할 권리를 갖는다. 여기에는 생존수단의 향유에서 안전할 권리가 포함된다.

원주민족들은 땅, 공기, 물, 빙하, 야생생물 또는 기타 자원을 포함하여 그들의 지역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어떠한 행위 또는 행동과정으로부터도 보호받을 권리를 갖는다.

III

15. 모든 사람은 환경에 관한 정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여기에는 어떤 식으로 수집돼든간에 환경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 또는 행위과정에 대한 정보, 환경에 관한 의사결정에 효과적인 대중의 참여를 용이하게 하는데 필수적인 정보가 포함된다. 정보는 시기적절하고, 분명하며, 이해가능하고, 정보 청구자에게 부당한 재정적 부담 없이 이용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16. 모든 사람은 환경에 관하여 의견을 갖고 표현하며 사상과 정보를 배포할 권리를 갖는다.

17. 모든 사람은 환경과 인권 교육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18. 모든 사람은 환경과 발전에 영향을 끼치는 계획과 의사결정활동과 과정에 능동적이며 자유롭고 의미 있는 참여를 할 권리를 갖는다. 여기에는 제안된 계획의 환경적, 발전적, 인권적 결과를 사전에 평가할 권리가 포함된다.

19. 모든 사람은 환경 보호 또는 환경 파괴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목적으로 타인들과 자유롭고 평화적으로 결사할 권리를 갖는다.

20. 모든 사람은 환경 피해 또는 그러한 피해의 위협에 대하여 행정 및 사법 절차에서 효과적인 구제와 보상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IV

21. 모든 사람은 개인적으로든 타인들과 결사해서든 환경을 보호하고 보존할 의무를 갖는다.

22. 모든 국가는 안전하고, 건강하며 생태적으로 건전한 환경에 대한 권리를 존중하고 보장해야만 한다. 따라서 모든 국가들은 이 선언의 권리들을 효과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필수적인 행정적, 입법적 및 기타의 조치들을 채택해야만 한다.
(이하 생략)

인권오름 제 203 호  [기사입력] 2010년 05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작성일자 : 2007. 4. 2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소위 3세대 인권 또는 연대권이라 불리는 권리에는 ‘환경권’이 속한다.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직면하여 환경에 대한 관심과 불안이 커가는 지금, ‘환경권’은 당연한 인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환경권’에 대한 선호와 열망은 당연할지 모르나 ‘환경권’에 대한 정의나 기준은 당연하다고 할 수 없다.

인권과 환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의 접근을 다룬 시각들을 살펴본다.(출처 Alan Boyle 외, Human Rights Approaches to Environmental Protection, 1997, Oxford)

인권과 환경간의 긴장

환경운동과 인권운동 간에는 긴장이 있다. 환경운동은 다른 종이나 생태계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다는 이유로 인권에 대한 불신을 가질 수 있다. 만약에 기존에 인권으로 인정된 권리들, 가령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이 ‘절제’된 수준이 아닌 ‘부’를 추구하는 속에서 세계인구의 다수에게 실현된다면 그 결과는 자연자원의 급속한 고갈일 것이다. 따라서 늘어나는 인구를 위해 인권을 실현하는 것과 한정된 환경자원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것 간에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인권운동은 생태계, 유한한 자연자원, 미래 세대의 기본적 필요를 보호하려는 환경운동의 추구가 때로는 긴급하고 절실한 인간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다. 흔히 인권과 환경의 상호의존성, 불가분성을 원칙으로 내세우지만, 이런 원칙의 주장은 현실에서 직면하는 어려운 문제를 일시적으로 가리려는 도덕적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환경문제를 인권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성과 장점이 있는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환경권을 운운하는 것인가?

환경에 대한 인권은 필요한가?

먼저 검토돼야 할 전제가 있다. 첫째, 뭔가를 선호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즉 깨끗한 환경을 원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도덕적 또는 법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둘째, 권리로 말하는 것을 도덕과 동의어로 취급하는 것도 문제다. 권리 언어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어떤 행동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은 가능하다. 깨끗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다 할지라도 그러한 추구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일 수 있다. 즉 깨끗한 환경, 건강한 환경 내지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권’의 접근방식을 취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 대한 입장이 대립될 때, 우리가 선호하는 것이 권리로서 인정받는다면 그 균형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상호 선호하는 것이 대립할 때, 어느 한쪽도 힘으로 바라는 바를 강요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서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반면에 어떤 선호가 권리와 대립할 때, 그 권리의 소유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카드를 쥐게 된다.

권리와 도덕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리는 도덕의 전체는 아니지만 그 일부이다. 우리가 깨끗한 환경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고 하면 환경정책의 도덕적 성격에 관한 어떤 논의에서도 우리의 그 권리는 고려돼야만 한다. 이 권리는 기타의 선호되는 것들이나 비도덕적 고려들보다 먼저 고려돼야 한다. 도덕적 권리로 유력한 것은 법적 권리가 되기에도 아주 유력하다. 따라서 헌법이나 국제인권법에 규정된 환경권을 갖는다는 것이 이 권리와 관련된 모든 논쟁에서 권리소유자가 승리할 것을 보장하지는 않더라도 확실히 그 권리가 고려될 뿐 아니라 그 권리를 부인하기 위해서 상당한 이유가 요구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권리는 도덕적 및 법적 주장에서 다른 개념을 이용해서는 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를 갖는다.

기존의 인권을 동원

인권개념이 환경보호에 유효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 중 하나는 기존에 확립된 인권을 동원하는 접근이다. 기존의 국제인권법이나 국가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인권규범이 실현된다면 충분하다는 시각이다. 새로운 환경권을 만드는 것은 잘해봤자 과잉이고, 잘못하면 비생산적이라는 입장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데 힘을 들이기보다는 기존 인권기준의 효과적인 이행을 위한 운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존의 인권에는 우선 시민·정치적 권리가 있다.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데 이 권리의 중요성이 있다. 생명권, 결사권, 표현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권리, 평등,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등의 실현은 환경파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가능하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 심각한 환경 파괴에는 인권 및 환경 옹호자들에 대한 억압과 정보접근권에 대한 거부가 동반된다. 억압과 공포에 의한 재갈 물리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정치적 권리는 참여의 보장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인간 복지의 기준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건강권,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은 직접적으로 환경에 관한 조건을 담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건강권은 해로운 환경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조치를 취할 의무를 요구한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구상된 정책은 또한 그 결과로서 여타의 식물군, 동물군 및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다. 방사성물질에 대한 노출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비인간 종을 더불어 보호하는 것이 그 예다. 또 다른 예로 교육권은 환경인식의 향상이나 취약집단이 생태적 파괴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정치 투쟁에 필요한 기술무장에 기여한다. 또한 문화권의 침해가 환경파괴를 동반할 수 있다. 문화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적절하게 보호된다면 그런 문화가 기반하고 있는 물리적 환경도 보호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존의 권리체계는 다소 협소하게 환경권을 구성하며, 환경문제에 단지 간접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기존 인권을 재해석

기존권리를 단순 동원하는 것으로는 환경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기존의 인권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환경문제가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권리를 상상력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등권은 환경에 대한 동등한 접근과 보호의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 환경파괴에 대한 노출의 불평등성은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결과이다. 부와 빈곤은 상이한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때로 ‘부’의 문제만이 국가정책에서 다뤄진다. 평등권은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는 환경피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낼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명권은 건강한 환경, 오염 없는 환경, 생태적 균형이 국가에 의해 보장되는 환경에서 살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재해석돼야 한다.

환경보호에 대한 새로운 인권이 필요

그러나 기존의 인권기준은 긴급한 환경적 과제에는 모호하고 불편한 도구이기 때문에 환경과 직접 연관되는 포괄적인 규범이 요구된다는 입장도 있다. 이런 접근에는 두 가지 입장이 갈린다. 새로운 환경권이 바람직하다 할지라도 주로 절차적 성격에 초점을 두느냐, 실체적 권리의 내용에 초점을 두느냐이다.

절차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절차가 수천개의 비현실적인 원칙의 선언보다 가치가 있다고 본다. 환경권과 관련 있는 절차적 권리의 범주에는 환경 위험에 대해 사전에 알 권리를 포함하는 정보에 대한 권리, 환경문제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권리,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공익소송을 용이하게 하는 제소권의 확대 등이 포함된다.

절차적 또는 참여적 접근은 환경보호를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정보에 입각한 논쟁을 통해 보장하자는 것이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이끈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 근거는 환경에 대한 의사결정자와 그 결정의 대가를 지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일치한다면 환경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환경의 질은 법률 용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가치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에 실체적 권리 규정보다는 사람들이 개방적이고 철저한 논쟁을 할 수 있는 절차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절차적 권리에 대해 회의적이다. 절차적 권리가 완전히 실현된다 할지라도, 그에 부응하는 정치조직은 장기간의 환경보호보다는 단기간의 부를 추구하기 쉽다.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환경파괴를 할 수도 있고 구조적으로 자유로운 소비를 하기 쉽다. 북반구의 자유주의적 권리에 기반한 체제는 환경파괴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절차만으로는 환경보호를 보장할 수 없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는 환경문제에 대한 지지를 정의하고 동원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것은 아니다. 환경권을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련된 기존의 헌법과 법률에 대한 조사에서는 ‘깨끗한’, “건강한”, “존엄한”, “생존가능한”, “만족할만한”, “생태적으로 균형잡힌”, “지속가능한”, “오염이 없는”, “인간의 발전에 적합한” 등 다양한 형용사가 환경에 덧붙여 있다. 환경보호가 인간의 건강과 생존을 보호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태계의 모든 종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 지속가능성을 보호하는가, 좋은 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등 쉽사리 법적 용어로 옮겨질 수 없는 차원의 문제들이 정의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혼란에서 벗어나오는 한 가지 방법은 특정 맥락 속에서 무엇이 정확하게 권리의 침해를 구성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사법상의 의무와 관련되는 것으로 사회적 행위자들이 정확한 의무를 예상할 수 있도록 하는 한에서는 상세한 문맥상의 정의가 도움이 된다. 여기에는 오염자 지불 원칙, 예방 원칙, 환경영향평가, 토지개발의 용도와 명백히 관련된 환경권 등이 포함된다.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문제

어떤 인권이든 본질적으로 지구 생태계의 여타의 종을 배제하고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아무리 환경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크게 품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기본은 ‘인’권이며, 인간이 아닌 종 또는 자연자원에 부여된 권리와는 매우 다르다. 인간의 복지를 보존하고 배양하는데 필수적인 환경보호의 요소들을 포함하기 위해 생명권을 확대한다고 할 때, 자연환경의 구성요소들은 분명히 인간의 목적을 위해 도구적 수단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본질적으로 도구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환경인식을 강화하는 것이 인간의 복지에 초점을 둘 수는 있지만 또한 비인간 종에 대한 관심과 더 깊은 생태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따라서 타 생물종의 본질적인 가치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비도구적 방식으로 환경권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중심적인 권리의 성격을 없앨 수는 없다 할지라도 줄일 수는 있다. 인권의 인간중심주의는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문제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복지에 기초한 권리 제안보다는 ‘생태적 균형’(ecological balance)을 위한 권리 제안이 덜 인간중심적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권체계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일 수밖에 없다. 동물권, 나아가 식물의 권리, 생태과정에까지 권리를 부여한다고 할 때 결정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인간이 권리를 동물이나 산에게 부여한다고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런 권리 인정의 행위는 여전히 인간이 인식하고 집행하는 것이고, 권리는 오직 인간에 의해 이행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법률 시스템에 불가피하게 동반되는 구조적인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대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주로 이론의 영역에서만 작동한다. 정책적 고려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모든 종을 위해 지구적 환경보호를 강화해야할 실제적 문제를 견뎌낼 수 있을까? 권리를 자연세계에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 모든 생물체의 본질적 가치를 실제적으로 보호하는 데 적절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인권을 해석하고 행사하는데 있어서 생태계의 본질적 가치를 고려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부터 인간이 아닌 모든 생물과 생태계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기초할 때 인권적 접근은 인간중심주의적 접근법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인권적 접근의 손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적 접근의 유용성을 앞서 살펴봤다면 이에 대한 우려와 반론도 다양하다. 몇가지 주장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권리 용어와 체계는 환경문제의 바탕이 되는 정치경제적 문제와 관계를 다룰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여기에는 기술적 선택, 생산양식, 사회적 생산물의 배분양식 등이 포함되는데 현재의 권리라는 것은 단지 이것들의 증상을 겨냥하는 권리일 뿐으로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실 물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설사약을 처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환경권의 주창이 단지 상징적인 몸짓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또는 단지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을 심어주는 완화제 수준이라면 환경파괴는 크게 줄지 않으면서 사실상 환경파괴의 구조적 원인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만들 수 있다. 환경파괴를 야기하는 사회경제적 힘에 직접적으로 맞닥뜨리지 않으면서 환경피해에 반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거의 효력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단순한 권리 용어로서 복잡하고 기술적인 환경운영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있다. 환경보호에는 의사결정과정에서나 그 이행에서나 고도로 기술적인 설명과 평가가 요구되는데 이런 문제를 단순한 권리의 언어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인권법보다는 환경법들이 더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권리의 오용 가능성도 크다. 권리, 특히 절차적 권리는 부유한 집단이나 겉치레 환경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적인 생활의 질을 보호하기 위해 이용하기 쉽다. 이로 인해 미래의 환경비용을 현재 불리하고 취약한 집단에 떠넘길 수 있고, 이런 취약한 집단과 공동체가 오히려 빈곤이나 제도적 장치의 부족으로 절차적 권리에 접근하기 어렵다.

유엔의 인권과 환경에 대한 소위원회에서는 1994년 인권과 환경간의 관계를 탐색하면서 인권과 환경에 관한 원칙의 채택을 제안했다. 그 제일 원칙은 인권, 생태적으로 건전한 환경, 지속가능한 발전과 평화는 상호의존하며 불가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인권과 환경의 관계는 여타의 고려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으뜸이라고 주장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을 어떻게 정의하며 실천해 가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류은숙] <2007년 4월 25일 인권오름 제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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