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5년 8월 11일 인권하루소식 제2873호>
인권의 역사를 설명할 때 흔히 쓰이는 '3세대론'이 있다. 근대시민혁명과 국가의 불간섭을 요구하는 자유권 중심의 인권보장체계를 1세대로,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고자 하는 사회권 중심의 인권체계를 2세대로, 3세계와 중심부 국가들 간의 빈부격차, 국제무기경쟁과 핵전쟁의 위협, 생태 위기 등의 국제문제에 대한 각성으로부터 나온 자결권, 평화에 대한 권리, 발전권, 환경권 등을 3세대 인권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대론을 앞 세대 이후에 후 세대가, 앞의 권리 대신에 뒤의 권리가 나타났다는 식으로 파악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인권 개념의 출현 시기부터 주류의 인권구상과는 구별되는 민중의 인권구상이 독자적으로 존재했다는 점을 자칫 놓칠 수 있다.
근대화 곧 자본주의화를 목표로 한 부르주아지가 계약의 자유, 경제활동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인권을 열어젖히는 데 힘이 되어준 것은 다수의 민중이었다. 이들 없이는 구체제와 특권층의 권력을 결코 타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귀족 등 구 특권층에게 수탈당했던 민중은 새롭게 등장한 자본주의적 관계에서도 부르주아지에게 수탈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들은 구체제의 반대편에 서서 부르주아지에게 지지를 보낼 수 있었지만, 부르주아지의 승리로 민중에게 돌아온 성과는 거의 없었다. '재산에 의한 제한 선거제'로 정치생활로부터 소외되고 '굶주릴 자유'에 내팽겨쳐진 이들은 스스로의 인권구상에 나서게 된다. 그런 인권구상이 체계적으로 표현된 것 중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 읽어볼 바를레의 '엄숙선언'이다.
바를레는 프랑스혁명 과정에서 상퀼로트 운동이 고양됐던 시기(1792-1793)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이다. 상퀼로트란 프랑스어로 '반바지를 입지 않은', 즉 상류층이 걸친 반바지를 입지 않은 계층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주축은 수공업자, 소상점주인, 소상인 등 도시 민중이었다. 바를레의 엄숙선언은 1793년 5월 발표돼 6월 7일 국민공회에서 낭독된 것으로 '상퀼로트'의 입장에서 민중의 헌법구상, 인권구상을 체계화 한 것이다.
근대인권은 권력의 부당한 간섭과 억압으로부터의 불간섭을 요구하는 자유권 중심의 인권체계였는데, 여기서 자유라 함은 재산권의 자유를 으뜸으로 여겼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시정하려는 노력이 자유의 이름으로 봉쇄되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엄숙선언'에서 보이는 인권구상의 차이는 재산권에 대한 제약과 실질적 평등의 추구라는 점에 있다.
재산권의 제한
1789년 프랑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는 "소유권은 불가침의 신성한 권리"(17조)라고 선포하고 있다. '엄숙선언'에서도 재산권을 인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제약이 따른다. '재산의 향유는 점유할 권리로서 시민의 자기보존의 필요성에 종속'(16조)된다고 봤고, '재산상의 불평등을 정당한 수단에 의해 타파'(17조)하는 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절도, 투기, 독점, 매점 등 공공의 희생 위에 축전된 재산'은 '국유화'(20조)된다고 했다. '엄숙선언'이 "제1의 가장 신성한 재산"(18조)으로 승인한 것은 '모든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수단을 충분히 보장하는 것들'이며 "제2의 재산"은 "노인, 병약자, 노동을 할 수 없는 자"의 "휴식"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재산권은 사실상 '생존권, 노동권, 휴식권'의 보장의 의미를 가져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민주권의 원리
근대시민혁명은 재산권의 보전이 '모든 정치적 결사의 목적'이라 했기에 재산권의 절대적 자유를 위해 국가권력의 틀을 짰다. 그래서 민중의 정치참여는 경제의 민주화를 요구할 것이 필연이기 때문에 그를 막기 위한 '국민대표'와 '국민주권'을 권력의 형태로 삼았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며 국민이 주권의 소유자임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주권의 행사는 '국민대표'에게 위임돼 있다. 그리고 '국민대표'는 제한선거 등으로 의회를 장악한 부르주아지가 차지하는 것이다.
'엄숙선언'에서는 이러한 '국민주권'과는 다른 '인민주권'을 강조하고 있다. "주권의 행사는 모든 나라의 인민에 귀속"되며, "결코 대표될 수 없다"(8조)고 했다. 이에 인민은 '직접 모든 공직을 선출할 권리', '사회의 이익을 토론할 권리', '법률제정에 참가할 권리', '의원 소환 및 처벌권', '조세결정권', '공적 사무에 대한 보고 요구권', '법률안 검토 및 거부 혹은 재가권', '헌법 수정권'(10조) 등을 주권 행사의 당연한 권리로 갖는다.
이는 인민 스스로 권력을 행사하고 권력 담당자를 통제하지 않으면 인권을 보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권 구상의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엄숙선언에 붙어 있는 '주권자 인민인 85현의 프랑스인에게'라는 제목의 호소문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우리들에게는 하나의 명증된 진리가 있다. 인간은 본래 교만하게 창조되었고 고위직에 앉으면 필연적으로 전제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오늘날 창설된 여러 기관을 억제·구속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기관들은 모두 압제의 형태를 띠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다. …인민 자신 이외의 억제력은 모두 잘못이다. 주권자는 끊임없이 사회를 통제해야 한다. 주권자는 대표가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시민의 권리행사를 위한 기본 전제이기에 교육의 권리가 중시·강조되고 있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성이다. "모든 시민에 대한 국가의 신성한 책무인 덕육, 지육 그리고 공중도덕의 보급만이 시민의 권리 향유를 실현가능한 것으로 만든다."(5조) 프랑스 인권선언에는 이러한 규정이 없다.
저항권의 구체적 규정
프랑스 인권선언은 "압제에 대한 저항"(2조)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 규정이 없으며 "법에 저항하는 자는 유죄"(7조)라는 단서를 달고 있다. 이와 달리 '엄숙선언'에서는 저항권의 행사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주권이 찬탈된 경우', '군대나 무력이 국가 안에서 우월할 경우', '공적기관이 헌법적 한계를 일탈할 경우', '국가가 공금을 유용하고 빈곤을 극대화 할 경우'에는 "봉기야말로 독립을 보장하는 것, 권리 중 가장 정당한 것, 의무 중 가장 신성한 것"(22조)이라며 "압제에의 저항은 귀중한 봉기의 권리"라고 드높여 외치고 있다.
인류애와 평화주의
프랑스 인권선언에서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보장은 공공의 무력을 필요로 한다"(12조)고 말한다. '엄숙선언'은 이와 달리 "여러 나라 인민은 하나의 가족을 형성"(2조)하며, "여러 나라 인민 사이의 전쟁은 국왕, 전제군주, 야심가, 지배적인 음모가들이 범하는 인류에 대한 범죄"(3조)라고 규정하며 인류애와 평화주의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위와 같은 민중의 인권구상은 "사회계약은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는 일에 특별히 전념하지 않으면 안된다"(28조)는 한마디에 모아진다. 이러한 인권구상은 한 때 크게 부상하여 일정한 개혁조치를 낳았지만 혁명의 약화와 반동으로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고난 속에 싹튼 민중의 인권구상은 부르주아지의 인권구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바뵈프의 '평등주의자들의 음모', 꼬뮌 전사들의 인권구상,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지는 행진 속에서 근대 인권보장체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행진은 계속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상태에 있어서의 인간권리에 관한 엄숙한 선언(1793) (Varlet: Declaration solennelle des droits de I'homme dans l'etat social -1793.6) 전문 |
[류은숙] <2005년 8월 11일 인권하루소식 제28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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