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2005년 9월 2일 인권하루소식 제2887호>

광주항쟁, 부안반핵투쟁에 '광주꼬뮌', '부안꼬뮌'이라는 말을 붙이곤 한다. 꼬뮌이 상징하는 바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상징되는 꼬뮌은 1871년 3월 18일부터 그해 5월 28일에 최후의 총성이 멎을 때까지 불과 70여 일 동안 프랑스 빠리에 존재했던 민중권력을 말한다. 빠리꼬뮌은 전 세계에서 처음으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한 민중운동이 부르주아운동을 제쳐놓고 스스로의 권력을 주장한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이전 권력 그대로에다 등장인물만 바꿔치기 한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것이었다. 빠리꼬뮌은 '권력의 보편화'를 기치로 입법, 행정, 사법 등 모든 분야의 공직자를 선출하고 그들을 소환,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기본적 권리로 선언했다.
그 권력의 주인공들은 하루 11시간 이상 노동하면서도 극빈 상태에 가까운 빈곤으로 고통 받는 생산자들이었고, 권력의 위기를 타개하려 대외 전쟁을 벌여놓고 나자빠진 권력자들을 대신하여 스스로를 지켜낸 전사들이었다. 외국의 군대보다 무장한 노동계급을 더 두려워한 권력자들은 '적'인 프러시아와 협상하여 진압군을 조직했고 무자비하게 꼬뮌을 진압했다. 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꼬뮌은 위험스런 도발에 불과한 사건이었고 잘 진압되었다. 3만여 명을 총살하고 학살에서 살아남은 4만여 명 이상을 가두거나 추방시키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 일을 잘 치러낸 머혼(MacMahon)은 훗날 프랑스의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빠리꼬뮌은 광주꼬뮌으로 부안꼬뮌으로 세계 어디서나 민중의 항쟁이 있는 곳이라면 기억되고 되살아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빠리꼬뮌은 '헌법'이라든지 '인권선언'이라는 명칭을 가진 문서들을 내놓지 않았다. 권력자들이 안팎으로 꼬뮌을 옥죄어오는 엄중한 상황이었기에 체계적으로 그런 것들을 만들고 있을 형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근대시민혁명의 인권선언과는 질적으로 다른 구상을 하고 있었음을 행동 그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빠리 민중은 대대적인 환호 속에서 사형집행수단으로 유명한 '길로틴(단두대)'을 불태웠다. 빠리꼬뮌 지지자들을 총살하는 정부 정책에 맞서 "눈에는 눈"이라는 정책 성명이 발표됐지만 실제로 빠리 노동자들은 그 누구도 처형하지 않았다. 꼬뮌의 생명존중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또한 노동민중에게 절실한 조치들이 속속 취해졌다. 노동에 대한 사적착취라는 이유로 전당포가 폐쇄됐고, 프러시아군이 빠리를 포위한 기간에 발생한 채무의 회수를 중지했고, 임대료를 체불한 세입자에 대한 강제퇴거를 금지했다. 빵집 노동자의 야간작업을 금지했고, 경찰이 지명한 사람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발부했던 노동자 등록카드를 폐지했다. 소유주들이 문을 닫은 작업장이나 공장을 노동자들의 협동조합에 넘겨주었다. 꼬뮌은 또한 국제주의를 표방했다. 나폴레옹의 승전을 기념하여 빠리에 세워졌던 기념물을 맹목적 애국주의와 민족적 증오를 선동하는 상징이라 하여 끌어내렸다. "꼬뮌의 깃발은 세계 공화국의 깃발"이라는 이유로 외국인이 꼬뮌의 공직에 선출되기도 했다.
정식으로 만들어진 인권선언은 아니지만, 꼬뮌이 채택한 문서들 가운데 하나인 1871년 4월 19일의 '프랑스 인민에 대한 선언'을 중심으로 그 인권보장의 구상을 살펴보자.
선언은 "모든 프랑스인에게 인간으로서, 시민으로서"에 덧붙여 "그리고 노동자로서 자신의 소질과 능력의 완전한 행사의 보장"을 말한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비롯하여 근대인권선언에서 선언된 '모든 인간'은 현실속의 구체적 인간간의 관계를 결코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토지나 생산수단을 소유한 사람과 노동력밖에는 가진 것 없는 사람을 똑같이 대하려 한 구상이었다. 여러 자유와 권리를 내세웠지만 그 중핵은 사적소유권이었기에 사적소유권을 누릴 수 있는 '일부 사람'이 '모든 인간'을 대표하는 듯이 가장한 것이었다. 그런 그들은 민중의 정치참가가 경제의 민주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민중의 의사표현을 억압하고 자유방임적인 경제정책을 사수하는데 온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사적소유라는 인권은 자기 자신에게 한정되어 있는 개인의 권리이다. 왜냐하면 타인과의 관계는 일체 단절한 가운데 사회와도 무관하게 자신이 재산을 마음대로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 즉 자기만의 이용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권리와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 전체사회가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자본가의 재산 소유권은 노동자에게 미치는 모든 파괴적인 대가를 무릅쓰고라도 보호돼야만 한다는 자유의 원칙이 옹호되었다.
꼬뮌은 구체적인 인간인 "노동자"의 권리를 선언하며 생산수단의 사유와 그것에 봉사하는 정치원리를 부정하고 나섰다. 이는 "권력과 소유권을 보편화하는 데 적합한 제도의 수립"을 꼬뮌의 과제로 내세우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예속"을 "조국에는 불행과 파탄"을 가져온 "군사주의, 관료주의, 착취, 투기, 독점, 특권의 종말"을 말하는 데서 드러난다. 그래서 꼬뮌에서 말하는 사회권의 내용은 사회복지에 대한 권리 등 사후적 조치의 것이 아니라 "교육·생산·교환·금융을 진작시키고 보급하는데 적합한 제도의 설립"이라는 근본적인 체제 변혁을 통해 도모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꼬뮌에서 강조하고 있는 자유는 경제활동의 자유를 중핵으로 했던 근대의 인권관과는 다르다. 자유의 이름 하에 자유로부터 가장 단절됐던 사람들의 자유에 대한 열망은 "개인적 자유, 양심의 자유, 노동의 자유에 대한 절대적 보장",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 "꼬뮌 업무에 대한 시민들의 항구적인 개입"을 위한 "집회와 선전의 권리", "꼬뮌의 자치를 위한 행동의 자유"로 표현되고 있다.
이를 위한 유일한 수단은 민중 자신에 의한 정치였다. 앞서 말한 표현, 집회, 선전의 자유는 민중에 의한 정치의 일상적인 통제를 가능케 한다. 또한 "책임 있는 모든 방면·서열의 행정관 및 사법관의 선거나 경쟁을 통한 선출, 그리고 그들을 소환하고 통제할 수 있는 항구적인 권리"에서 드러나듯 민중은 모든 공무원을 선임하고 언제든지 통제·파면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러한 공무원은 출세의 목표가 도구가 아니기에 그 임금을 평균 노동자 임금을 넘지 못하게 했다. 권력기구의 핵심인 군대와 경찰도 다를 수밖에 없다. 꼬뮌은 상비군이 인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위험하다고 보고 그것을 폐지했다. 그 대신에 "자신의 지휘자를 선출하고 국민방위군과 도시 방위대를 조직"하는 것이 민중의 권리였다.
'꼬뮌의 유언'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문서는 체계적이지 않지만 근대인권의 그림자 속에서 싹틔운 민중의 인권구상을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마찬가지의 투쟁을 벌이는 사람들이 계속 단련시켜야 할 과제와 목표를 가득 안고 있는 것이다.
빠리꼬뮌의 "프랑스 인민에 대한 선언"(1871) 아직도 빠리에 포위공격과 포격의 공포를 주고, 프랑스인의 피를 흐르게 하고, 우리의 형제들·여성들·아이들을 포탄과 총탄 속에서 으깨어져 사라지게 하는 고통스럽고 끔찍한 분쟁 속에서, 여론은 나뉘어져서는 안되며, 국가적 의식도 혼란에 빠져서는 안 된다. |
[류은숙] <2005년 9월 2일 인권하루소식 제288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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