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507 호 [기사입력] 2016년 11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단어장] 국민 주권

A: 난리다. 난리. 세상에 이런 난리가 없다.
B: 검은 돈으로 주고받는 이권의 정치, 권력의 사유화……. 넌 요즘 심정이 어때?
A: 어릴 적 꼬리잡기 놀이할 때 같아.
B: 꼬리잡기?
A: 머리에 선 대장은 팔짱끼고 버티는데 꼬리에 붙은 애들은 서로 잡고 잡히지 않으려고 이리 저리 뛰고 몸부림치던 놀이 있잖아.
B: 넌 머리였어, 꼬리였어?
A: 말해서 뭣하냐. 늘 꼬리였지.

정당성의 근거로만 이용

A: 내가 유권자이고 주권자인 것 맞냐? 나를 대리하거나 대표한다는 자들에게 아무런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배신당하기만 하는데.
B: 애초에 저들은 ‘국민’과 ‘주권’을 우리와 다르게 생각해. 같은 단어를 쓴다고 해서 같은 생각을 담고 있는 건 아니거든.
A: 어떻게 다른데?
B: 일단 저들은 국민주권을 통치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근거로만 생각하지.
A: 우리가 몇 년에 한 번씩 투표로 뽑아주기만 하면 ‘나는 국민을 통해 선출된 정당한 권력’이라고 써먹기만 하는 거?
B: 그런 써먹기에서 ‘국민’은 그저 같은 국적을 갖는 사람들의 덩어리에 불과해.
A: 정치의 무대에 등장해 활동하는 게 아니라 의사결정과 집행능력을 갖지 않은 관념적인 존재에 불과한 거지.
B: 추상적인 덩어리로서의 국민은 명목상 주권자이지만 스스로 주권을 행사할 수 없잖아. 그래서 개발된 논리가 헌법상의 권력에 위임한다는 거지.
A: 주권자의 의사라는 명목으로, 그러니까 ‘국민의 뜻’이란 모호한 이름으로 대표자로 나선 권력자의 자유가 표명되기 십상이지.
B: 물론 헌법이 정하는 조건 아래에서 행사된다고 하지만.
A: 우리를 매개로 했으니 정당하다? 그럼 국민주권이란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인증서로 끝나는 거야?
B: 정당성의 근거만 제공하고 납작 엎드려 있다가 또 몇 년 만에 돌아오는 선거에 착실히 투표하러 가는 거…….
A: 에효. 대통령이 빈껍데기 허수아비였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우리 주권자들이 허수아비인거네.

권리로서의 국민 주권

B: 국민주권 개념 자체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거야.
A: 정치적이란 건 다양한 정치 세력 간의 대항 관계 속에서 형성됐다는 말일 거고
B: 역사적이란 건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 속에서 등장하고 구성됐다는 거지.

A: 지금처럼 허무하게 느껴지는 국민주권론 말고 분명 딴 게 있지 않을까? 정치적, 역사적으로 말이야.
B: 있지. 주권을 우리들 권리의 측면에서 생각하고 구성하려는 주권론도 분명히 있어.
A: 권리의 측면에서 접근한다?
B: 그러니까 주권을 권력의 정당성의 근거가 아니라 권력이 진짜 누구에게 있는가를 중심으로 파악하는 거야.
A: 우리가 주권자라는 건 우리가 권력의 주인이라는 거잖아. 그런데 이 권력을 어떻게 쓰지? 써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B: 우리가 주권자란 걸 관철시키려면 적극적 정치 참여의 권리, 권리 투쟁의 과정으로 주권행사를 생각해야 해.
A: 참정권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같은 대표를 선출할 때만 등장하잖아. 그게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의사를 확인하고 제대로 표시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정치적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권리여야지 우리가 주권자라는 게 말이 되지.
B: 권리로서의 주권론과 권력을 옹호하는 주권론의 경합이 오랫동안 있어왔어. 우린 지금 그 경합의 한복판에 서있는 거야.

국민 주권 vs 인민 주권

A: 무슨 역사적 사례 같은 걸로 얘기해 보자.
B: 근대적 의미의 헌법과 공화국을 만든 프랑스에서 그런 경합의 사례를 볼 수 있어.
A: 맞아. 의회 안의 정치세력과 의회 밖의 정치세력의 경합이 치열했지.
B: 구체제의 특권세력과 특권을 몰아내는 데는 힘을 뭉쳤지만, 중상층 계급은 자신들의 정치 장악력을 빈농, 소농, 노동자, 소상인 등 민중에게 뺏길 것을 두려워했지.
A: 당연히 두려웠겠지. 민중들은 아주 배가 고팠고 자신들의 단결과 직접행동을 통해 배를 곯게 만드는 정치체제를 바꾸려고 했으니까.
B: 그래서 민중들은 정치적 참여만이 아니라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장받고자 했어.

A: 그걸 표현한 것이 ‘국민 주권’과는 다른 주권론이었겠네.
B: 맞아. 둘을 구분 짓기 위해 ‘인민 주권’이란 말을 쓰기도 해. 한국에선 북한이 ‘인민’이란 말을 쓴다고 이 단어를 꺼리지만. ‘국민 주권’의 ‘국민’과 구분 짓기 위해 ‘인민’(people)이라 해보자.
A: 주권론에서 국민과 인민의 차이가 뭘까?
B: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국적보유자의 덩어리가 ‘국민’이라 했잖아. 반면에 ‘인민’은 직접 주권을 행사하고 국가 의사를 결정하고 이를 집행할 수 있는 유권자, 즉 주권행사에 참가한 시민의 집합이야. 이런 인민은 덩어리로서의 국민이 아니라 개별 유권자가 주권에 대해 동일한 몫을 부여받은 존재야.
A: 개별 유권자가 주권에 대해 동일한 몫을 부여받았다면, 유권자의 의사는 유권자 전체의 1/n씩 모여 표현되는 거네.

B: 그런 표현이니까 대의 제도는 최선이 아니라 차선일 뿐이야. 이런 유권자는 추상적 국민과 달리 의사결정 능력과 집행 능력을 갖는 존재야. 이런 인민은 주권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직접 행사하는 존재야.
A: 대의 제도 말고 달리 주권을 행사할 방법이 있을까?
B: ‘인민 주권’의 주창자들은 다양하고 구체적인 구상을 했어. 가령 의회가 법률안을 작성하면 개별 유권자들은 각 지구별로 주권자 집회를 열어 찬반을 결정할 수 있어. 그 결과가 의회에 전달되면 이를 집계하여 법률의 성립 여부가 결정되는 거야. 법률안을 작성하는 의원은 유권자가 직접 선출하고, 유권자는 선출된 대리인(의원)에 대하여 책임 추궁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져. 책임 추궁은 소환과 형벌로 이뤄지지. 또 의원에 대하여 ‘보고를 요구할 권리’를 가지는 것도 구상했어.
A: 상층 계급이 그런 구상에 동조할 리가 없잖아.
B: 그렇지. 그들은 구시대의 특권층을 내모는 데는 민중들과 힘을 합쳤지만, 이런 급진적인 민중들의 주권론을 받아들일 순 없었어. 자기들 이익을 반영하는 주권론으로 물타기를 해야 했어.
A: 그래서 등장한 것이 ‘국민 주권’이란 거네.

B: 맞아. 헌법에 ‘주권은 국민에 속한다’고 규정했지만 그 국민은 ‘대표자를 통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덧댄 거지. 그러니까 선거 제도가 당연 필요한데, 의회를 장악한 세력은 돈 없는 사람은 참여할 수 없는 제한 선거를 내세웠어.
A: 이런 상황에서 국민은 법률 등의 제정에 직접 참가할 수도 없고, 선거에 나설 수도 없는 거네.
B: 선출된 대표자에 대한 책임추궁, 소환과 형벌 등은 꿈도 못 꿀 명목상의 주권자가 된 거지. 지배세력은 국민 주권론만 헌법에 새겨 넣는 데 그친 게 아냐.
A: 또 뭘 했는데? 제한선거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데.
B: 아주 촘촘한 사슬을 갖췄지.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인권에 대한 제한조치가 가능하도록 하는 법,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법, 또 반선동법을 만들어서 민중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지.
A: ‘국민 주권’론으로 정당성만 챙기고 사실상 국민의 표현과 행동의 자유를 철저히 제한하는 거였구나.
B: 정치적 의사표현의 집회의 자유 보장, 압제에 대한 봉기권을 말한 인민 주권론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간 거지.

주권자는 쉬지 않는다

A: 우리가 겪어온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네.
B: 주권자에 대한 탄압도 다르지 않지만 저항도 다르지 않지.
A: 우리의 가까운 역사만 봐도 ‘국민 주권’에 갇힌 명목상 주권자가 아니라 실질상 주권자가 되려는 저항은 쉰 적이 없는 것 같아.
B: 오늘날 ‘국민 주권’은 그런 저항 속에서 변화된 거라고 봐야 해. 간판은 ‘국민 주권’이지만 ‘인민 주권’의 이상이 많이 침투한 국민 주권을 오늘날 우리는 구상하고 구성하려고 하고 있어.
A: 그치. 제한 선거 제도는 보통선거 제도로 바뀌었고, 건드릴 수 없던 대표에 대해서도 유권자가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쪽으로 역사는 진전해왔어.
B: 위헌 법률 심사나 정당의 민주화, 많은 국가들에서 채택하고 있는 국민투표, 국민발의, 소환제도 같은 것도 있잖아.
A: 도처에서 주권자들은 쉬지 않았구나.
B: 우리도 쉴 수가 없잖아.
A: 신정정치니 어쩌니 하면서 추문에 대한 꼬리잡기 놀이로 빠지지 않아야겠어. 똑바로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국정 통제권을 발휘하는 거야.
B: ‘정치고 경제고 힘 있는 자들은 원래 다 그래. 어쩔 수가 없어……’ 이런 식으로 체념하고 관심을 접을 때 그들은 계속 이익을 얻을 거야. 권력도 공공 재산도 맘껏 사유화하면서 말이야.
A: 나에게 딱히 지금 길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공적 과제들을 다루는 장에서 절대 나가지는 말아야겠어. 레이더를 계속 켜두겠어.
B: 그리고 서로를 더 많이 초대했으면 해.
A: 무슨 초대?
B: 우리 삶은 갖은 고통으로 점철돼 있고 우린 그 고통으로 서로 연결돼 있어. ‘왜 지금 시국에 그 얘기를 하느냐?’ ‘‘하야’얘기에 물타지 마라.’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배척하지 말고 다양한 문제를 들고 공론의 장에 들어서려는 사람들을 서로 환영했으면 해.
A: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말이 참, 겨울 바람에 스치운다.
B: 헌법 제1조 2항이잖아? 우린, 개별 유권자들은 따로 또 같이, 집합적으로 이 헌법대로 할 권리가 있어.

 

인권오름 제 507 호 [기사입력] 2016년 11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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