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511 호 [기사입력] 2016년 12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다르게 보는 안경이 필요한 사회

A: 나, 노안 때문에 요즘 안경 두 개 쓴다.
B: 두 개?
A: 응. 가까운 거 볼 때랑, 길거리에서 먼 데 볼 때랑 바꿔 써.
B: 불편하겠다.
A: 응. 젤 불편할 때는 사람들 얼굴 보며 얘기해야 하는 데 자료도 같이 봐야 할 때야. 자료를 보려고 이 안경을 끼면 사람들 얼굴이 흐릿해 보이고. 사람들 얼굴 자세히 보려고 딴 안경을 끼면 자료가 안 보이고.
B: 늘 두 개의 시야 사이를 오가네. 나도 요즘 시야가 흐릿한 데 곧 그렇게 되겠다.
A: 두 시야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조리개가 있었으면 좋겠어.
B: 우리들 시력에만 그런 게 필요한 건 아닌 것 같아. 갈수록 느끼는 건데 한국 사회에도 안경 같은 게 필요한 거 같아.
A: 무슨 안경?
B: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 말이야.
A: 어떤 안경을 끼느냐에 따라 사람과 사물이 엄청 달라 보이는 데, 사회에 요구되는 다르게 볼 수 있는 안경은 뭐로 만들지?
B: 인권교육 같은 걸로?

지긋지긋한 공부

A: 맨날 공부해야 할 게 허다한데 뭘 또 배워? 공부라면 지긋지긋하다.
B: 네가 지긋해하는 그런 공부 말고.
A: 그럼 무슨 공부?
B: 넌 왜 공부가 지긋지긋한데?
A: 음… 내가 지긋지긋해 하는 공부란… 하면 할수록 남과 비교해서 내가 초라해지는 공부, 갈수록 암기하고 익혀야 할 것만 늘어나는 공부야.
B: 또 하면 할수록 전문가들을 우러러보게 되는 그런 공부지. 그래서 주눅 들고. 공부하다 보면 빚도 엄청 쌓여. 돈이 좀 많이 들어야 말이지.
A: 그러니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기력해져. 인권교육은 그런 공부와 뭐가 다를까?
B: 네가 싫어하는 공부를 뒤집는다고 생각해봐.
A: 뒤집는다? 그럼 경쟁과 비교 말고, 암기 말고, 전문가나 가르치는 쪽의 우위 말고, 전문가의 일방적 전달 말고, 무기력 말고…. 뭐 이렇게 되네.
B: 반대말을 모아 보면 협력과 공유, 비판적 사고, 위계를 지우고 서로 배우기, 힘이 생기는 배움이 되네.
A: 그런 공부가 세상에 어딨어? 너무 이상적인 것 아냐. 우리가 생각해 온 공부는 학교에 다녀야만 하는 것, 위계에서 더 높은 학교로의 진학만을 목표로 삼는 거였는데.
B: 이상적이지. 근데 인권교육의 이상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배움이 할 수 있는 참다움이 아닐까? 암기와 기술만을 요구하는 교육에 이미 우린 너무 물렸잖아. 이제 그만이라 말하고 싶지 않아?

인권교육은 권리다

B: 무엇보다도 인권교육은 그저 하면 좋은 게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권리이기도 해.
A: 우리의 권리라고?
B: 그래. 권리! 자기 권리가 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권리를 지킬 수 있겠어? 또 권리를 모르면서 어떻게 타인의 권리를 존중할 수 있겠어?
A: 우리 주변을 보면, 인권이나 평등 관련 교육을 받아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걸.
B: 그렇게 권리를 모르는 채 내버려두는 것 자체가 인권침해 아닐까?
A: 권리 침해라는 생각까지는 못해봤는데… 내 경우엔 내가 받는 모욕과 무시를 ‘내가 못나서’라고 내 탓으로 여기게끔 길들여져 온 것 같아. 또 노동착취를 열정 또는 헌신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B: 우리 주변엔 차별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문제제기하는 쪽을 유난스러운 사람으로 내모는 사람이 많아. 나도 거기에 쉽게 동조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아.
A: 특히, 타인에 대한 혐오나 약자에 대한 무시를 자기의 자유로 착각하는 일도 많지.
B: 이상한 제목과 명칭을 씌워 피해자를 모욕스럽게 부각시키고 가해자의 존재는 지워주는 언론보도를 볼 때마다 인권감수성 결핍이란 생각도 자주 하게 돼.
A: 돌이켜보니 구석구석 인권교육이 필요한 데가 많구나.
B: 지금껏 못 배웠다면 지금부터라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해 알 수 있어야지. 그 앎을 통해 나의 존재를 인정받고 권리를 요구할 줄 아는 훈련을 받을 수 있어야 해.

인권교육센터 들에서 만든 인권교육길잡이 책<인권교육,날다>

 

인권교육을 옹호하는 근거들

A: 인권교육은 한편으론 의무이기도 한 것 아닐까? 인정받을 권리는 곧 타인을 인정할 의무이고 자유를 주창할 권리는 곧 타인을 자유로운 존재로 존중할 의무이니까.
B: 그래. 세계인권선언에 보면 “모든 개인과 사회의 각 기관은 교육을 통해 이러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전문)해야 한다고 돼 있어.
A: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완전한 발전과 인권 및 기본적 자유에 대한 강화”(제 26조)여야 한다고도 써있네.
B: 또 있어. 유엔에서는 ‘인권교육훈련선언’을 2011년에 채택했어. 그에 앞서 1994년에는 유엔인권교육을 위한 10개년 행동계획을 채택하기도 했어. 이런 행동계획의 요지는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대한 존중이 우리 삶을 위한 학습이란 거야.
A: 그럼, 한국에서도 그에 따른 노력이 있어야 할 것 아냐?
B: 물론이지. 많은 민간단체들이 인권교육에 노력해왔어. 무엇보다도 국가는 인권교육에 대한 의무가 있어. 유엔의 ‘인권교육훈련선언’에서는 국가가 입법이나 행정 정책과 절차를 적용해 인권교육훈련을 실행하고, 지원하고, 협력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제 7조)고 명시했어.
A: 그러니까 인권교육훈련에 기반이 되는 법 제정 등을 해야 한다는 거네.
B: 그렇지. 가령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교육훈련을 증진하고 공공기관과 민간 활동가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해야 해. 2014년에는 인권교육지원법안이 발의되기도 했어.
A: 그래서 인권교육법안이 생겼어?
B: 아니. 법안 철회로 끝났어.
A: 왜?
B: 일부 단체들이 ‘인권교육법은 동성애를 조장한다’ ‘동성애 옹호 등으로 국민의 안전할 권리를 침해한다’는 식의 반대활동을 벌여서 결국 법안이 철회됐어.
A: 반대의 이유 자체가 인권과 거리가 머네. 정말 다르게 보는 안경이 필요한 것 같은데.
B: 그러게. 인권교육의 원칙은 평등, 존엄, 화합, 반차별인데 말이야.
A: 인권교육을 받는 것 자체가 기본적인 인권이라 했는데, 자기 권리를 걷어찬 것과 마찬가지야.
B: 인권을 내세우면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자격조건을 다는 것, 그런 조건부 인권의 주장은 이미 ‘특권’이라 할 수 있어.

비판적 사고의 힘

A: 나는 말을 잘 듣고 지시에 복종하는 게 좋은 태도라고 배워왔는데… 비판적 사고를 가지라는 요구를 받을 때는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B: 나도 비판적 사고라는 말보다는 ‘삐딱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
A: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창조성’을 요구하곤 했지.
B: 비판적 사고든 창조성이든 ‘자유’를 필요로 하는데 우린 그런 자유를 방해받는 일이 더 많았지. 우리 자신의 언어가 아니라 엘리트의 언어나 표준화된 언어로만 말할 걸 요구받곤 했어.
A: 내겐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안경이 필요한 데, 그게 도대체 뭘까?
B: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란, 모호함을 떼어내는 훈련이 아닐까?
A: 모호함을 떼어낸다?
B: 가령 ‘성폭력’이라 명백히 지목할 일을 ‘어쩌다보니’, ‘몹쓸 손’, ‘스트레스로 인한 일탈’ 등으로 모호하게 말하는 일이 많잖아.
A: 그런 일을 ‘성폭력’이라 말할 수 있으면 불투명하게 그려졌던 현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거네.
B: 또 ‘노력이 부족해서’, ‘눈높이가 높아서’ 등으로 설명하는 언어들은 대규모의 실업과 열악한 노동현실을 가리는 모호한 언어야. 뿐만 아니라 나의 현실이 아닌 누군가의, 가령 지배엘리트의 시각으로 해석된 현실이야.
A: ‘변화란 불가능하다’, ‘현실은 바꿀 수 없는 거다’ 이런 것도 누군가, 변화를 원치 않는 세력의 시각일 뿐인데, 그걸 나의 시각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거. 이런 것도 비판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아.
B: 내 삶의 구체적 문제를 드러내고 뭔가 요구하고 싶은 데, 그걸 국가안전이니 애국이니 하는 추상적인 논의와 맞불을 붙일 때가 많아. 그래서 내 문제를 말하는 것 자체를 불순하게 몰거나 침묵시키지. 그런 것에 도전하는 것도 비판적 태도 아닐까?
A: 우리가 당연시 했던 해석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것, 또 불투명하게 그려졌던 현실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비판적 사고란 거네.
B: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기존에 당연시되던 권력의 작동에 문제를 제기할 수밖에 없고, 내가 원하는 변화를 찾아내야 해.
A: 그런 변화를 찾아내는 힘을 스스로 긍정하고 서로에게 격려할 수 있는 것에 비판적 사고의 힘이 있을 거야.

인권교육의 방법

A: 그런 힘을 기를 수 있는 인권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B: 일단 내용 자체가 내 삶의 내용, 내 삶과 관련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구체적인 권리의 내용, 내 삶의 터에 존재하는 인권규범, 주요한 인권침해에 대한 지식, 인권에 대한 책임을 진 기관과 제도에 대한 지식 같은 것들…
A: 또 배움의 방식이 날 존중하는 것이어야 할 것 같아. ‘꿇어’, ‘외워’ 식으로는 안 될 거 아냐. 검열이 아닌 성찰을 요구하고 서로의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는 대화를 통한 것이면 좋을 것 같아.
B: 공부할수록 날 무력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해. 인권을 옹호할 수 있는 구체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으면 해. 가령 ‘카더라’ 통신과 근거 있는 주장을 구별하는 능력, 맥락을 이해하는 능력, 쟁점을 이해하고 자신의 입장을 제시할 줄 아는 능력, 상호 연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능력….
A: 나는 그런 교육을 통해 멋진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어.
B: 다시 태어난다고?
A: 응. 우린 그냥 우연히 태어나 저절로 시민권이란 걸 가졌잖아. 그런 걸 누군가 “저절로 된 시민”이라고 말했어. 그런 시민이 다른 운을 갖고 태어난 동료 인간에게 거들먹거리고 배타적으로 군다면 시민성의 의미가 빛이 바래. ‘저절로 된 시민성’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가치를 알고 존중할 줄 아는 ‘민주주의적 시민성’으로 거듭나는 것, 멋지지 않아?
B: 그래. 좋은데! 아주 멋져!
A: 어느 장애인 학교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장애를 만드는 건 환경이고 느끼게 하는 건 사람입니다.”
B: 인권교육이 세상을 전부 바꿀 순 없을 거야. 하지만 적어도 사회와 그 구성원들이 어떤 환경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고, 나 또는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가를 성찰하는 힘을 기를 순 있을 거야.
A: 요즘 광장에서 우린 많은 것을 서로에게서 배우고 있어. 누군가를 배제하는 폭력이 뭔지도 느끼고 있어. 이런 배움이 비판적 성찰로 이어져 우리 삶을 꾸리는 동력이 됐으면 좋겠다.

 

인권오름 제 511 호 [기사입력] 2016년 12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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