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인권의 날을 맞이하는 애도의 마음(류은숙, 인권연구소 연구활동가)

지금부터 74년 전인 오늘, 19481210, 인류는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습니다.

오늘 이 선언을 애도의 선언으로 부르려 합니다.

애도란 무엇입니까?

애도는 우리가 과연 무엇을 잃었는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상실했습니까? 존엄을 무시하는 돈과 권력입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하고 비교불가능한 존엄성의 상실입니까?

애도는 떠나보낸 이와 남아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중한 존재들을 상실함으로써 남아있는 우리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빨리 쉽사리 접고 잊으며 그냥 하던대로 살아가려 합니까? 아니면, 어처구니없는 상실을 낳은 불의한 관계를 바로잡으려 합니까?

애도는 또 같은 상실이 반복되지 않도록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찾아내고 실현하려는 지속적인 행동입니다. 잊지 않겠다는 마음다짐이 아니라 계속되는 실천 속에서 가능합니다.

세계인권선언은 전쟁과 압제와 결핍으로 인해 스러져간 사람들에 대한 애도입니다. 지난 역사에서 인류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며, ‘다시는 결코 다시는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하여, 살아남은 이들이 무엇을 바꾸고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진정한 애도인지를 확인하려는 약속입니다.

세계인권선언의 맨 앞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인류 전체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정의·평화의 기초이며,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은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야만적 행위를 낳았으며” “사람들이 폭정과 억압에 대항하는 마지막 수단으로서 반란에 호소하도록 강요받지 않으려면 반드시 인권이 법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선언은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부가 폭정과 억압에 빠지지 않도록 감시하고 비판할 자유를 행사해야 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비롯한 각종 자유가 지시하는 바는 인권을 존중하는 정치를 구현함에 있습니다.

존중받으며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애도가 가능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시민이 공포와 궁핍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지원할 책임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를 절망과 궁핍에 시달리게 방치한다면, 폭력과 혐오의 선동정치를 일삼는 세력에게 비판 의식없이 휘말릴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로 인해 사회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이 역사적 교훈입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민주주의뿐 아니라 경제사회문화적 민주주의를 함께 해야 합니다. 이에 선언은 자유의 방파제로서 기본적인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교육·건강·주거 등에 대한 권리를 차별없이 누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에 쓰인 권리들은 액자에 넣어두는 용도가 아닙니다. 우리들 일상에서의 실천을 통해 현실을 활보하길 바랍니다. 인권은 구체적인 법과 제도, 사회문화적 인식과 태도의 변화 등을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인권을 현실화하고 제도화하는 과정에서 나이, 성별, 국적, 출신, 장애, 성적지향 등 인간을 구별하는 각종 표지들은 인간 간 위계와 차별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의 존엄을 더 세심하고 각별하게 살피기 위한 것으로 다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인권의 날이라는, 달력의 어느 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세계인권선언을 박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지금 이곳의 삶에서 재확인하고 재구성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여기서 손과 가슴을 모읍니다.

우리에게 이 날은 어떤 의미입니까? 화력발전소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이 홀로 일하다 죽어간 날입니다. 지금도 매일 어디선가 또다른 노동자들이 퇴근하지 못하고 각종 재해에 쓰러져 갑니다. 교통, 교육, 의료, 주거 등 사회적 인프라와 사회적 돌봄의 부재로 장애인을 비롯하여 노년, 아동, 여성, 이주민 등이 사회 속 시민의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일상은 누가 죽고 나서야 표면에 떠오르곤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1029, 여기서 가까운 이태원에서 숱한 생명이 쓰러져 갔습니다. 대통령이 있고, 구청장이 있고, 경찰과 소방대, 병원이 코 앞에 있으며 15천억원을 들였다는 최첨단 통신시스템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벌어진 일입니다. 전쟁도 기아도 아닌, 평시에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로에서 벌어진 참사는 재난 대응을 총괄하고 지휘할 컨트롤타워가 불분명한 가운데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참사 희생자들을 존엄하게 애도하기 위하여 세계인권선언에 쓰여진 모든 권리를 정의롭게 행사할 것입니다.

선언 제28조에 따르면, 우리 모두는 인권이 존중되고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질서 속에서 살아갈 권리를 가집니다. 선언에 규정된 권리를 타인의 권리를 파괴할 목적의 행위를 할 권리를 갖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다고 선언의 제30조는 못박고 있습니다. 소중한 인권을 혐오와 2차 가해에 쓰고, 공직자의 책임 회피에 동원하고, 시민의 정치활동의 자유를 감시하고, 유가족과 사회적 취약자에 대한 지원을 칼질하는데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애도를 통해 존엄한 삶과 애도를 가능케하는 사회라야 지속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참사의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 염치가 없습니다. 우리의 계속되는 애도 행위가 사회적·정치적 염치를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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