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19조

모든 사람은 의견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간섭받지 않고 의견을 가질 자유와 모든 매체를 통하여 국경에 관계없이 정보와 사상을 추구하고, 접수하고, 전달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화씨 451’이란 미래 공상 소설이 있다. 이 소설 속 시대의 사람들 대다수는 자기들 집의 방마다에 있는 커다란 TV 화면으로 지루하고 시시한 드라마를 보면서 상당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처형당한다. 국가가 고용한 소방관의 임무는 모든 책을 추적해서 불태우는 것이다. 온도를 따질 때 섭씨와 화씨가 있는데, ‘화씨 451’이란 이 책의 제목은 바로 종이가 불타는 온도를 말한다. 책을 읽는 사람은 체포되어 투옥되고 처형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소방관인데 자기가 태워버려야 할 책을 읽으면서 운명이 바뀌게 된다. 결국 당국으로부터 도망칠 수밖에 없고, 시골에 숨어사는 지하 집단 속에서 피난처를 구하게 된다. 이 지하집단은 문학 유산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즉 세계 고전 문학의 일부 또는 전체를 각자 맡아서 외우는 임무를 나눠 갖고 있다. 간단한 줄거리지만, 역사상 실제 벌어졌던 표현의 자유 억압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소설이 쓰인 시기가 미국에서 매카시즘이 판친 1950년대였기에 더욱 그렇다.

책이 불타는 온도 화씨 451도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자유(freedom)의 상실이 자유(liberty)의 대가”라 했다. 각 시대는 그것만의 지배적인 세계관을 갖고 있고, 그 세계관이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정하곤 했다. 의견과 표현을 승인할 때는 ‘의견’이라 불렀지만, 지배적인 세계관이 그것을 싫어할 때는 ‘이교, 이단, 반역’ 등으로 불렀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의 역사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 목이 잘릴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쓴 자유 상실의 역사라 할 수 있다.

표현의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은 항상 소수자로 인식되고 소수자 지위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더 큰 목적을 성취하리라 생각되는 것을 위해 기꺼이 희생했다. 그렇기에 표현의 자유는 다른 자유들과 인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표가 됐다. 흔히 표현의 자유가 부정될 때는 ‘뭔가 더 큰 폭력과 독재의 위험이 닥치리라’는 전조인 것이다.

인권에서 중시하는 자유가 세상의 모든 자유를 다 긁어모은 것은 전혀 아니다. ‘뭐든지 내 맘대로’식의 자유도 아니다. 인권에서 옹호되는 자유는 모든 사람의 권리 존중과 어울릴 수 있는 자유이다. 그래서 많고 많은 자유들 중에서도 아주 특수한 자유들만이 인권의 목록에 올라있다. 각자의 자유를 일종의 선하고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 특정하여 구체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자유가 인권으로서의 자유이다. 의견과 표현의 자유가 바로 그런 자유이다.

세계인권선언은 표현의 자유가 전체주의의 첫 번째 표적이라는 역사적 교훈을 배경으로 시민들이 정부와 국가들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부정적인 측면만 생각한 것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단지 억압을 반대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좋은 거버넌스의 기초이며 전 사회의 문화적 풍요를 능동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권리라고 봤다. 그래서 19조는 ‘정보의 자유’로서의 표현의 자유 또한 강조하고 있다.

정보의 자유로서 표현의 자유

정보와 언론의 자유가 유엔헌장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그 중요성은 유엔창립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토론에서 분명히 드러났다. 유엔은 1946년 제1차 총회 결의안에서 정보의 자유를 기본적 인권으로 선포하고 유엔이 존중하는 기타 모든 자유의 초석이라 했다. 덧붙여 정보의 자유에 관한 유엔회의를 가질 것을 경제사회이사회에 요청했다.

정보의 자유에 관한 유엔회의는 1948년 3월과 4월 사이에 제네바에서 열렸으나 전후 냉전 속에서 회의의 분위기는 아주 정치적이었다. 한쪽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에 초점을 두고 다른 한쪽은 ‘균형 잡힌’ 정보의 흐름과 정보의 교환을 주장했다. 이후로도 국제사회는 의견과 표현, 정보의 자유 개념을 다듬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유엔 총회 의제에 정보의 자유에 관한 국제협약의 초고가 등장했지만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했다.

세계인권선언 19조에서 부딪친 문제는 표현의 자유 제한에 관한 것이었다. 소련 측은 “미국 언론과 유럽의 모방적인 언론이 침략정책을 옹호해왔으며 심리전을 수행해왔다. 이들 언론은 국내에서는 민주세력을 분쇄하고 다른 국가들을 위협한다”면서 ‘침략의 선전’을 위한 표현의 자유는 허용될 수 없다고 했다. 소련안은 부결됐다. 통제되는 언론을 만들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19조에는 어떠한 권리의 제한요소도 붙지 않았다.

선언 이후 만들어진 시민․정치적 권리규약에는 “전쟁을 위한 어떠한 선전”이나 “차별, 적의 또는 폭력의 선동이 될 민족적, 인종적 또는 종교적 증오의 고취”는 “법률에 의하여 금지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여기서 ‘전쟁’이란 단어의 의미를 정의하지는 않았지만, ‘침략전쟁’의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밖에도 규약에는 국가안보, 공공질서, 공중보건, 도덕 등의 제한 요소가 들어갔는데 하나같이 정의하기가 어렵고 권리침해에 오․남용될 소지가 큰 개념들이다. 이에 국제법률가 위원회는 이들 제한 규정을 해석하기 위한 회의를 갖고 1984년 ‘시라쿠사 원칙’(Siracusa-principles)을 채택했다. 또한 1995년에는 국제법 전문가들이 ‘국가안보와 표현의 자유 및 정보접근에 관한 요하네스버그 원칙’을 채택했다. 여기서 기본 원칙은 "누구도 자신의 의견이나 신념으로 인해 어떠한 강제, 불이익이나 제재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의 평화적인 행사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어서는 아니 되며, 어떠한 규제나 형벌도 과해져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흔히들 금기시 여기는 '정부를 바꾸자는 표현, 국가나 국기를 모욕하는 표현, 징병반대, 전쟁반대' 등의 표현도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아니하는 표현"이다. 이런 걸 다 제하고도 제약할 의사표현이 있다할 경우라도 정부가 지켜야 할 전제조건과 정부가 져야 할 입증책임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반대자에 침묵 강요는 안 돼

국제사회의 최근 논의와 관련하여 ‘의견과 표현의 자유 권리보호와 증진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Ambeyi Ligabo)이 올해 초 발표한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자.

보고관은 ‘명예훼손, 중상, 모욕’ 혐의가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현상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명예훼손, 중상과 모욕의 혐의가 공적 인물, 특히 국가 당국으로부터 기인할 때는 어떠한 형태의 사전 검열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명예훼손은 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국가정체성, 종교, 국가 상징, 기관, 국가의 수장’ 등 주관적 가치나 제도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했다. 명예보호를 명목으로 탐사 저널리즘을 억압하고 비판을 침묵시켜서는 안 된다.

특별보고관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제한에 대해 조건을 언급했다. 첫째 제한은 법으로만 수립되며, 둘째 그 법은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 목적을 추구해야 하며, 셋째 목적의 성취에 비례하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유형의 제한이건 사전 검열을 정당화해서는 안 되며, 비판을 제한하거나 반대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이용돼선 안 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예방 구금을 하고, 언론인의 소득에 부합되지 않는 과한 벌금을 부과하고, 언론자격의 유예, 미디어 송출의 유예 또는 폐쇄 등의 조치를 취하는 것은 비례의 원칙에 맞지 않는다. 형사법적 명예훼손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당한 제한이 아니다. 모든 형사법적 명예훼손은 철폐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특별보고관이 특히 촉구한 것은 인터넷에서의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조치의 확대이다. 특히 웹사이트 투고자와 블로거들에게 다른 유형의 미디어와 같은 수준의 보호가 제공돼야 한다고 했다.
특별보고관의 결론은 간단하다. “지속적인 사상의 대결은 민주사회의 디딤돌이다.”

표현의 자유는 상호교통의 권리이자 의무

(아래 내용은 전규찬 한국예술종합대 영상원 교수의 인권연구소 ‘창’ 강좌 내용 중 일부를 재구성했다. 전교수는 표현의 자유를 ‘교통(communication/intercourses)의 권리’라 표현했다.)

세계인권선언 18-20조는 떼어낼 수 없는 한 덩어리이다. 앞서 살펴본 18조는 생각의 자유(사상․양심의 자유)를, 19조는 표현의 자유를, 20조는 생각과 표현을 타인과 더불어 함으로써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집회와 결사의 자유)을 말한다. ‘생각+표현+행동’의 권리라 할 수 있다.

인간 간의 상호교통 없이 사회가 존속할 수는 없다. 그런 면에서 표현의 자유는 단순히 개인의 자유일 뿐 아니라 타자와 만나고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의무이기도 하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개인을 억압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회의 붕괴와 해체를 획책하는 야만이다.

말하거나 쓰는 표현은 막을 수 있어도 생각하는 자유는 빼앗을 수 없다고들 흔히 말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표현’을 통해 다른 사람과 상호교통하지 않는 생각이 잘될 리도 없고 정확할 리도 없다. 표현을 통해 자유롭고 공개적인 검토가 가능해야 진짜 자유로운 생각이라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롭고 공적인 표현의 자유를 박탈하는 권력은 생각할 자유 또한 박탈하는 것이다.

‘생각․표현․행동’의 자유를 합친 것이 언론의 자유다. 언론은 생각을 말로써 논한다는 것이며, 세계인권선언에서 이들 권리를 모든 사람의 권리로 얘기한 건 곧 인간 자체가 언론인이란 뜻이다. 그래서 언론하면 무슨 신문과 방송부터 떠올리는 것은 우리가 언론으로부터 소외됐다는 증거다.

소위 ‘찌라시’라고 불리는 신문들은 언론이 아니다. ‘매체’라고는 할 수 있다. 매체인 건 맞는데 논하는 것, 즉 토론을 방해하기 때문에 선전매체이지 언론이 아니다. 오직 우리가 대화를 할 때에야 선전은 멈춘다.

표현의 자유는 상호대화이고 교통이다. 권력자가 ‘소통의 부재’를 불평하는 것은 그가 말의 의미를 몰라서이다. 교통은 상호적으로 더불어 하는 것인데, 소통은 ‘네가 오해했다. 오해를 풀어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의사교통을 하는 사람들이 의견교환을 통해 공개적으로 잘못을 검증했고 비판을 했다. 공동행동에도 나섰고 대안도 제시했다.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구현한 것이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소통의 부재’를 탓하고, 의사교통을 방해하기 위해 언론 때려잡기에 나섰다.

언론의 자유는 진실을 향한 용기, 두려움 없는 발언이다.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진실에 기초해 권력을 솔직하게 비판할 의무를 수행한다. ‘PD수첩’이 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권력과 충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모두가 진실이라 우겨 말할 때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소”에 화답하는 것은 생각․표현․행동의 자유를 가진 인간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작성일자 : 2008. 11. 1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 18조

모든 사람은 사상, 양심 및 종교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권리는 자신의 종교 또는 신념을 바꿀 자유와 선교, 행사, 예배, 의식에 있어서 단독으로 또는 다른 사람과 공동으로, 공적으로 또는 사적으로 자신의 종교나 신념을 표명하는 자유를 포함한다.

사상․양심․종교의 자유의 의미

로댕의 유명한 조각 작품,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그런데 이런 광경은 어떤가? ‘생각하는 사람’에 철창을 두르는 것이다. 철창 안에 갇힌 생각하는 사람을 한국 사회는 ‘사상범’이라 불러왔다. 즉, 생각하는 사람이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인권단체에서는 ‘양심수’(prisoner of conscience)란 말을 써왔지만, 생각 때문에 갇혔다는 것에서는 마찬가지다.
사상․양심․종교의 자유는 생각하는 사람에게 철창을 두르는 일체의 간섭과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이 간섭과 억압은 국가권력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돈․광고․인사 등의 불이익을 갖고 협박하는 기업이나 재단으로부터 올 수도 있고 절대․유일의 진리임을 내세우는 종교로부터 올 수도 있다.
그럼, 외부로부터 억압과 강제만 없으면 자유로운 걸까? 그렇게만 생각하면 자유가 너무 작고 초라해 보이지 않는가? 자유는 개인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더 적극적인 의미도 가진다. 생각하는 자유, 옳고 그름을 따져보는 정신활동, 창조적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활동이 있어야 인간은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다. 나아가 그런 활동을 동료인간과 더불어 함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할 수 있다.

‘사상’, ‘양심’,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해 세계인권선언은 정의내리지 않았지만, 이에 대한 정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사상․양심․종교’란 ‘세계를 향해, 사회를 향해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태도’를 아우르는 말이다. 그것은 무슨 주의나 신념, 절대자에 대한 믿음 등 ‘자기 자신과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눈이고 힘’이다. 이것을 인권에서 목록으로 만든 것이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학문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교육의 자유’ 등이고 이들을 아우르는 제일 폭넓은 개념이 ‘사상의 자유’라 할 수 있다.

정신활동의 자유는 신체활동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인간생활에 필수적이다. <혹성탈출>이라는 1960년대 영화가 있다. 우주인들이 지구로 귀환해보니 원숭이들이 지배하고 있고, 인간은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우주인들은 자신들이 지구가 아닌 다른 혹성에 불시착한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곳은 지구가 맞았고, 인간들이 그런 운명을 맞은 것은 ‘생각하는 능력’이 제거됐기 때문이었다.
우리 현실에서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제거하려 드는 것은 검열과 통제, 위협과 폭력, 강요와 주입 등이다. ‘당신 생각이 불순해(삐딱해)!’라는 한마디가 얼마나 큰 파괴력을 지니며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가 얼마나 큰 무력감을 느끼게 하며, ‘그렇게 하면 재미없을 줄 알아!’가 얼마나 큰 공포를 느끼게 하는가.

공포를 느끼게 하는 한 마디

사상의 자유를 중히 여기는 사람들도 때론 영글지 못한 생각, 변변치 못한 생각, 도덕적으로 칭찬할 만한 게 못되는 생각은 허용해선 안 된다고 여길 때가 있다. 그런데 누가 그런 판단을 내릴 권한을 가질 수 있는가? 누구의 기준에서 변변치 못하고 부도덕하다는 것인지 잣대의 정당성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유가 꼭 필요한 것이다. 자유로운 표출과 충돌과 논증 속에서 생각은 변화․발전하는 것 아닌가. 모자라고 틀린 것으로 여겨졌던 생각이 진주로 드러난 사례는 역사 속에 넘쳐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사실상 무지였고, 옳다고 여긴 것이 오류였음을 깨닫게 하는 자극은 인간 사회에 유익한 것이었다. 토론과 논증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상․양심의 자유가 아니다.

사상․양심의 자유란 ‘거참 훌륭하네, 멋있네.’ 할 만한 양심만 갖는 자유는 아니다. ‘민주주의의 투사다, 사회주의자다’ 하는 식의 무슨 주의자만 갖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둘러싼 오해를 살펴보자. 살상무기를 들 의무를 이행할 수 없다는 이유로, 평화와 종교에 대한 신념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주로 얘기했기에 생긴 오해일 텐데, ‘군대에 가는 것은 비양심이고, 안 가는 건 양심이냐?’는 오해이다. ‘양심의 자유’에 따르면 굳이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재외동포가 애국심에서 일부러 자원입대하는 것도 양심이고, 살상무기를 들고 전쟁연습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군대를 거부하고 감옥을 택하는 것도 양심이다. 또는 ‘나는 군대 같은 조직생활이 너무 무섭다. 나의 몸과 마음으로는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것도 양심이다.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 내가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내 인격의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대한민국 헌법재판소)에 따라 그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양심의 자유다. 즉,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따라 그런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란 표현을 쓰는 것이지, 자신과 다른 의견의 양심은 비양심이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다양한 양심 중에서도 병역거부를 택한 양심은 ‘어떤 세계관, 주의, 신조’라 할 수 있는 것에 도달한 양심이라 할 것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란 용어는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널리 채택하고 있고, 1987년에 유엔은 의무복무제를 택하고 있는 국가들에게 양심의 자유를 존중하여 사회봉사 등 다양한 형태의 대체복무를 도입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양심의 자유에 대해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오해는 ‘그럼 뭐든지 내 맘대로, 내 식대로 하면 되겠네’이다. 자유가 중요하고 필수적이라는 말이 무조건의 절대적 권리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협하고 파괴할 자유는 인권에서 옹호하는 자유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자기식대로 생각하고 자기식의 생활방식을 선택할 자유를 갖지만 인권에서 ‘자유’라 할 때는 그런 각각의 인간의 자유를 일종의 선하고 바람직한 목적을 위해 특별히 사용하는 걸 말한다. 그래서 모든 자유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사상․양심․종교의 자유’가 특별히 인권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선하고 바람직한 목적’을 특정인(세력)이 정해놓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자유가 추구해야 할 ‘선하고 바람직한 목적’이 무엇이냐에 대한 토론과 논증은 항상 열려있어야 하기에 사상․양심의 자유가 요구되는 것이다. 옳고 그름을 찾아내고 실현하는 것을 ‘사상․양심의 자유’는 열어놓고 하지만, 그걸 독단적으로 결정하고 강요하는 것은 ‘자유의 폐지’인 것이다.

사상의 자유의 조건

제우스신과 한 시골 사람이 함께 걸어가면서 하늘과 땅을 주제로 자유롭고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우스가 이 사람을 납득시키려고 애쓰는 동안 시골 사람은 묵묵히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이 사람이 한 가지 의문을 내비쳤다. 그러자마자 제우스는 별안간 돌아서서 벼락으로 그 사람을 위협했다. 그러자 시골 사람이 말했다. “아! 제우스신이여, 이제 당신이 틀렸다는 걸 알겠어요. 당신이 벼락에 의지할 때 보면 당신은 언제나 틀립디다.”

사상의 자유는 ‘벼락’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즉 외부의 압력이나 강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만들어져야 내 생각이 된다. 불안하고 억압이 따르는 분위기에서 ‘예’라고 토해낸 것이 진정한 ‘예’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감옥에 가두는 식의 박해가 주종을 이뤘다면 요즘은 이윤의 논리를 강요한다. 과거 공안기관에서 전화를 걸어 ‘그런 식으로 글 쓰면 재미없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요즘 자본가가 전화를 걸어 ‘연구비는 기대하지 마쇼’라고 하는 것 사이에는 억압의 방식이 다르다는 차이밖에 없다.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올린 글로 수사를 받고, 그런 글을 게재한 사이트 운영자가 세무조사를 받는 것은 시대를 초월한 억압방식의 혼합으로 보인다.

또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힘센 권력기관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소위 ‘상식’으로 여겨지는 다수의 가치관이 소수자, 이른바 아웃사이더를 억압하기도 한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벌떼같이 몰려 들여 초죽음을 만드는 일이 정보통신의 발달과 함께 더욱 흔해졌다. 사상의 옳고 그름은 다수결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열정과 두려움 없는 헌신을 통해서 증명되는 것 아닐까? 사상의 자유는 뜻이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보단 “우리가 증오하는 사상을 위한 자유의 원칙”이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빈부의 차이는 사회에 해가 되지만 사상의 차이는 해가 되지 않는다. 사상은 다양할수록 오히려 자양분이 된다.

사상을 드러내지 않을 자유도

또한 사상을 드러낼 것이 자유라면 드러내지 않을 자유도 마찬가지로 자유다. 가령 적극적인 집필 활동으로 권력을 비판하는 작가도 있을 수 있고, 권력에 아첨하는 구린 글들이 판칠 때 거기에 끼어 삶을 도모하느니 조용히 펜을 꺾는 작가도 있을 수 있다.
내 생각을 편견 없이 들어줄 사람들 앞에서는 자유롭게 드러낼 사상이지만, 그 사상을 이유로 나를 괴롭히려는 공안기구의 수사관 앞에서는 꼭 그럴 이유가 없다. “너, 그런 생각 하는 것 맞지? 다 알고 있는데, 왜 비겁하게 네 사상을 숨기고 그래?”라고 내 속을 훤히 안다는 식으로 나와도, “네 사상이 떳떳하면 밝혀야 하는 거 아니야? 못 밝히는 건 뭐가 구린 거 아냐”라고 아무리 을러대도 거기에다 내 사상을 고해바칠 이유는 없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양심수들은 이런 협박을 많이 받았다. 그에 대해 한 양심수는 “내 마음속에 있는 것을 권력 앞에 게워낼 필요는 없다”고 했다. 강제로 사상을 따져 물을 권리는 없으며 대답할 의무도 없다.

사실, 자유롭게 생각할 권리, 내 마음 깊은 곳의 자유 자체가 그리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이불 속에서 나 혼자 야광시계를 들여다보는 것과 커다란 들판의 암흑 속에서 야광시계를 꺼내들고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일은 다르다. 진짜 어려움은 사상이 ‘표현’될 때, 사상이 ‘조직’될 때, 그리고 표현된 신념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할 권리를 주장할 때 생긴다. 여기서 사상의 자유는 다른 인권과 결합된다. 즉, 표현의 자유, 집회․결사의 자유, 정치 활동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등이다. 이들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분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고, 함께 있어야 실현될 수 있다.

종교의 자유

사상․양심․종교의 자유가 나란히 말해지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처지에 따라 생각이 다르다. 무신론인 사람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종교의 자유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고, 아주 종교적인 사람들은 사상과 양심이 종교에 부수적인 것으로 본다.
어쨌든 인권의 탄생과 논쟁의 무대는 서유럽의 근대였고, 여기서 종교의 자유를 둘러싼 대립은 인권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근대 유럽의 종교․과학․정치혁명은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살아가는 정당한 사회질서는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격렬하게 바꾸었다. 그런데 이들 사회에서는 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세례부터 장례까지 인간의 모든 활동을 교회가 이끌었고, 기독교는 영원절대의 보편적 진리를 내세운 종교였다.

그런데 사회전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교회권력이 순기능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신앙은 이단으로 색출됐고, 지옥불의 심판에 앞서 현실에서 고문과 화형 등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단 심문 법정과 종교 재판소는 공포 그 자체였고, 이교도란 이유로 유대인과 인디언에 대한 학살이 벌어졌고, 같은 기독교 내에서도 신앙의 방식을 둘러싸고 참혹한 전쟁이 벌어지고, 수십만 명이 종교 때문에 망명하고, 책이 불태워지는 일 등이 벌어졌다. 가령 1600년대에 ‘지구가 돈다’고 생각한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소에서 자신의 신념을 철회해야 했고, 그의 책은 오랫동안 금서목록에 올라 있다가 1988년에서야 로마교황청이 갈릴레오의 명예회복을 선언했다. 신교도를 억압하기 위한 법률은 심지어 자녀들에게 부모의 종교에 대해 당국에 고해바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의 전통교의에 도전하지 않고 종교의 자유를 외치지 않으면서 인간이 ‘내면의 자유’를 갖는다는 건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근대 서구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인간의 모든 정신활동의 자유의 선구자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감히 질문하지 못했던 진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보길 원했고, 알기 위해 대담해지려 했다. 근대 서구를 풍미했던 ‘계몽’이란 말은 ‘빛’의 은유법이다. 관습, 미신,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정신의 어두움을 타파할 수 있는 ‘빛’에 대해 갈구하는 사람은 정치로부터 종교까지 모든 것에 대한 대안을 생각할 수 있었다.

종교적 관용과 자유의 차이

그러나 종교에 대한 투쟁이 처음부터 개인의 종교의 자유를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 확립된 것은 ‘종교적 망명’의 권리였다. 이것의 전제는 ‘국가가 국교를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군주가 선택한 종교가 맘에 안 들면 떠나는 것은 봐주겠다. 하지만 떠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감수하고 살 각오를 하라’는 것이 종교적 관용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종교적 관용은 자유와는 분명 다른 것이다. 주는 사람 맘이기 때문이다. 관용해주는 권력은 관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관용이나 불관용이나 그게 그거인 것이다. 어떤 의견, 신앙 또는 종교적 행위는 승인해주고, 다른 것은 용인도 승인도 하지 않는 국가정책이 종교적 관용이었다. 관용은 특정 종파에게만 허락되거나, 설령 신앙 행위가 관용되었다 할지라도 특정 종파의 사람은 공직에 취임하거나 특정 직업을 가질 수 없었고 대학에서 학위를 받을 수도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박해가 오히려 조직화된 종교에 대한 회의를 크게 만들어갔다.
‘사람의 영혼이 구원받느냐 아니냐는 국가의 권한이 아니다. 진실한 신앙에 대해서는 신과 나 사이에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국가의 임무는 사람들의 사회적 이익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데 있는 것이지, 정부의 기능인 형벌의 부과라는 외면적인 힘으로 사람들의 내면적 확신을 없앨 수도 없고 생기게 할 수도 없다. 박해는 많이 해봤지만 무고한 피만 흘리지 않았는가?’
이런 회의는 조직된 교회를 멀리하는 대안 활동들로 옮겨졌고 사람들은 점점 더 종교를 공적이고 집단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으로 여기게 됐다.
이제 비로소 ‘종교적 관용’은 인권이라 할 수 있는 ‘종교적 자유’로 나아가게 된다. 이제 국가와 교회는 분리되고, 국가가 종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선택할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는 국가권력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개인의 내면적 자유가 된 것이다.

종교 갈등으로 서로 피를 흘릴 때 사상가들은 이렇게 호소했다.
“신의 이름으로 만행을 자행하지 말고 종교적 관용의 정신을 견지하라.”
“인류애와 종교 자유에 입각하여 폭력을 자제하라.”
“모든 인간은 종교와 상관없이 권세, 존엄, 권위, 위엄에 있어 모두 하나이고 동등하다!”
몇백 년 전의 이런 외침들은 종교 갈등이 세계 곳곳에서 화약고를 이루고 있는 오늘날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특정 종교 강요는 인권침해

그런데 근대 서구에서 확립된 개인의 종교적 자유란 어디까지나 ‘기독교’란 테두리 내에서, 개별 시민과 국가 권력 간의 관계에서 생각된 것이었지, 이교도나 무신자에 대해서까지 너그러웠던 건 아니었다. 따라서 다문화성을 증진시키려는 오늘날, 종교의 자유를 생각할 때는 예전보다 더 단계를 높일 필요가 있다.
가령 많은 비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기독교의 공격적인 선교활동과 개종 압력을 인권침해로 여긴다. 종교를 갖지 않을 권리도 있으며, ‘공공영역에서의 모든 개종 권유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의 종교의 자유의 의미다.

흔히 자기네 종교에서 개인이 벗어나려 하는 것은 억압하면서 타종교에 대해서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타종교 속에서 그 종교의 관행을 거스르거나 벗어나려는 개인의 선택을 향해서는 종교의 자유라고 옹호하면서, 타종교의 신도들이 집단적으로 자신들이 갖는 신앙의 의미를 드러내 보이면 ‘종교 근본주의’라고 비난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이 국제적인 종교충돌로 비화되곤 한다.

종교의 자유는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면에서는 개인의 권리이지만, 같은 종교로 결연한 사람들이 그 속에서 통합된 느낌을 가진다는 점에서 집단적 권리이기도 하다. 종교인은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자신들의 명예와 이미지를 언론, 공공당국, 타문화로부터 존중받을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국제인권기준에서는 ‘특정종교에 대해 종교적 증오를 고취시키는 것’은 종교나 신앙의 표명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다.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불의에 대한 저항 때문에 이어져왔다. 권력자들은 저항의 원천이 되는 자유로운 사상과 자신들의 본질을 파헤치는 논증의 힘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갖은 수단으로 사상의 자유를 못살게 굴었지만, 박해는 회의를 부르고, 회의는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철옹성을 무너뜨려왔다.
그런데 사상의 자유의 적은 박해라는 확실한 얼굴만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강제가 아닌 척, 조용하게 은밀히 다가오기도 한다. ‘사상은 싫어, 이데올로기는 싫어’, ‘너무 이데올로기적이잖아’ 식의 거부도,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자’는 식의 주장도 그 자체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사회공동체의 어떤 요구에 대해서도 ‘난 몰라, 난 싫어’를 외치며, 국가권력의 간섭만이 아니라 공적인 것을 위한 집단과 결사 일체를 거부하는 극단이 나타날 수도 있다. 획일성에 반발하는 것과 공적인 것을 위한 결연을 구분할 줄 모른다. 자유는 개성의 구현을 위한 필수품으로 여기면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집단과 결사 자체를 부당한 간섭이나 귀찮은 것으로 여긴다면 형식적으로는 자유이지만, 선택다운 선택을 할 수 없는 자유롭지 않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작성일자 : 2008. 11. 1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17조

1. 모든 사람은 단독으로는 물론 타인과 공동으로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아니한다.

재산권은 오해가 많을 수밖에 없는 권리이다. 세계인권선언 17조를 대하는 사람들은 처지에 따라 다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거봐, 재산권은 세계인권선언도 보증하는 당연한 인권이쟎아. 그런데 왜 우리보고 뭐라고 그러는 거야?”라고 소위 ‘강(남)부자’들이 뛸 듯이 좋아할 수 있다. 반대로 “뭐, 재산을 인권으로 인정한다고? 그럼 재산의 횡포에 시달리는 우린 어쩌란 말이야, 세계인권선언이라구? 뭐 이런 엉터리가 있어?”라고 펄쩍 뛸 수도 있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재산’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고, 저마다 ‘재산권’에 대해 뭔가 단단히 착각하거나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 소득과 불로 소득의 경쟁?

재산권은 ‘재산’과 ‘권’이라는 말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재산이 뭘까? 재산이 뭔지에 대해서 어떤 합의를 하느냐는 사회에 따라 다르다. 그 합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성원들이 넉넉한 삶을 이루기도 하고 ‘모 아니면 도, 네가 아니면 내가 죽는다’ 식의 삶이 펼쳐지기도 한다.
도대체 재산이 뭔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 예금 통장이나 적금 통장이나마 유지하는 사람, 주식·증권·배당금·신탁·채권·선물·옵션·스왑·펀드·주식 등을 이해하고 굴릴 수 있는 사람이 갖고 있는 ‘재산’이 같을 수 있나?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받는 사람이 가진 재산과 누군가의 생사를 갈랐다 붙였다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재산이 같을 수 있나? 토지소유를 중심으로 한 농경사회와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서의 재산이 같을 수 있나?

어쨌든 사람들이 흔히 받아들이기 쉬운 재산은 피땀 흘려 일군 결실일 것이다. 반대로 짜증스러운 재산은 부동산 투기 등으로 만든 불로소득일 것이다. 운동경기도 체급을 맞춰서 하는데, ‘노동 소득’과 ‘불로 소득’이 같이 경쟁한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고, 두 재산을 같은 기준으로 생각하는 건 좀 이상하다. 한편 재산권은 물(物)에 대한 권리라기보다는 사람간의 관계를 말한다. 인간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에 대한 타인의 접근을 차단하고 타인의 삶을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 재산권이다. 아무도 지배하거나 수탈하지 않는 재산권과 지배하는 재산권은 엄청나게 다르다. ‘재산권’을 말할 때 이런 성격을 구분하지 않고 한통속으로 취급하여 ‘인권’이라 할 수는 없다. 재산권을 인권이라 할 때는 ‘조건’이 필요하다.

재산권은 인권의 선배 중에서도 최고참에 해당하는 권리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그렇다거나 그래야만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기에 재산권이 인권의 초기 역사에서 주연 노릇을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재산권이 인권의 선두주자가 된 배경은 사람의 권리와 의무란 것이 누구의 침상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신분제 세상이었다. 악역은 제 영토의 모든 것은 제 것이라고 우기는 절대 권력이었다. 신분질서와 절대 권력에다가 유일절대의 진리로서의 종교가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나의 것’, ‘나의 생각’, ‘나의 행동’의 ‘자유’를 주창하는 것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었다.

인권의 최고참

절대 권력은 걸핏하면 돈을 걷고 거부하면 잡아들여 주리를 틀었다. 생필품 등의 거래를 총애하는 신하에게만 독점시키고 무역도 그렇게 했다. 새로 등장한 신진세력도 처음엔 권력의 비위를 맞추어 그 독점의 대열에 낄 수만 있으면 잘 나갈 수 있었고 그렇게 버티려고 했는데 도무지 앞날을 계획할 수가 없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그만큼 변덕도 심했기 때문이었다. 예측 가능한 정치와 경제구조가 절실했다. 불가침의 절대적 교리 앞에서 합리적 사고는 탄압 받았다. 이런 것이 다 자유롭게 재산을 추구하는데 방해거리였다.

재산에 대한 인정 요구는 인권 사상의 모태가 되고 다른 인권의 성장을 자극했다. 모든 인간은 국가 권력 이전에 생명, 자유, 재산을 가졌다고 외쳤다. 이건 사회나 국가가 준 권리가 아니라 자연적 권리고 인간에게 본래 고유한 것이라 했다. 현실속의 질서가 그렇지 않으니 옛날 말씀도 끌어들이고 종교상의 교의도 끌어들이고 그게 싫으면 과학적으로 논리를 세워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자유롭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유권이 없이는 이런 자율성을 꿈꿀 수 없다. 내 생명이 담긴 내 몸이 한 노동으로 재산을 일구었다. 그런 재산에 함부로 손대는 것은 곧 내 몸에 손대는 것과 같다. 내 몸과 내 소유, 어느 것도 함부로 손댈 수 없다. 내 몸과 소유에 대해 공격해오면 저항은 정당하다. 저항은 맨 입으로 하는 게 아니다. 자유로운 생각과 표현,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

종교적 자유를 모태로 한 사상의 자유는 독선적이고 전제적인 정치 체제에 맞서는 힘이 됐을 뿐더러 자신을 유일한 진리로 여기는 종교적 권위를 깨고 인간성의 해방과 과학기술의 발전을 도왔다. ‘생명, 자유, 재산’은 삼위일체가 되어 '인신의 자유, 사상·양심·종교의 자유, 소유의 자유'라는 인권으로 피어났다.
이런 이유로 신분제 사회에서 절대왕권과 특권층에 맞장 뜬 인권의 요구가 ‘재산을 존중하라’고 할 때 그 말은 ‘내 인격을 존중하라’는 말과 같았다. 재산권의 요구는 개인을 국가로부터 해방시켰다. ‘국가는 개인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하고, 자유로운 시장에 간섭하면 안된다’가 핵심 요구였다. 마찬가지로 ‘사상·언론·종교 등의 자유 시장에도 국가는 일체 끼어들거나 방해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은 점에서 근대의 인권을 ‘국가로부터의 자유’라 하는 것이다.

재산권의 변화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소유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고 노동의 성과이며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담고 있기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 재산권을 정당화한 논리였다. 하지만 근대시민혁명을 통해 불가침의 권리로 자리 잡은 재산권은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것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예전의 절대군주의 모습보다 더 무서운 게 자본가라고 느꼈고, 대다수 사람들의 처지는 자유와 평등으로부터 멀어졌다.

근대시민혁명의 이론가들은 노동의 결실로서 소유권을 옹호했지만, 사실상 진짜 밑천이 될 만한 재산은 엄청난 폭력을 통해서 모였다. 땅에서 농사짓던 농민을 유랑민으로 내몰았고, 가난한 이들을 가두고 부려먹거나, 3세계를 식민지로 수탈하는 등 부정의의 역사는 넘쳐났다. 가난한 이는 자립할 수 없는 인간이라며 투표권조차 주지 않았다. 식민종주국 백인들의 재산권은 자연적 권리라면서 3세계와 그 주민들을 공격·수탈하면서는 재산권 침해라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돌봄으로써 재산의 가치가 높아진 것이라 우겼다.

절대왕권에 맞서 개인의 인격과 존엄성을 주창할 때의 재산권이 제도화되자 재산없는 대다수 사람들의 ‘무’권리를 당연시하는 근거가 되어 버렸다. 재산이 법과 제도로 보호된다는 것은 곧 사회가 보호받을 재산의 범위와 한계를 정한다는 뜻인데, 재산을 여전히 사회와 국가이전의 ‘자연적’ 권리로 떠받드는 것은 이상하다. 타인의 인격과 자유를 해치고 대다수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요구를 압박하는 재산권이라면 인권의 범주를 벗어났다고 봐야 한다. 인간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존중이라는 재산권의 본래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고, 현실에서 재산의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폐해가 심각하다면 그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하다.

신성불가침성과 국가 이전의 자연권이라는 레테르는 이제 재산권에 어울리지 않는다. 생존권보장, 인권보장을 위해서 보호받아야 할 재산의 범위를 정하고 재산권자의 내맘대로의 영역에 제한을 가하는 것은 사회가 당연히 취해야 하는 조치이다.

재산권엔 친구가 필요하다

‘프랑켄슈타인’의 아주 옛날 흑백영화판을 보면 “친구가 필요해”라고 애절하게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인간과 생존과 존엄에 대한 고려 없는 재산권은 인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프랑켄슈타인이고, 친구를 필요로 하고 가질 때에만 인권의 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서 친구라 함은 ‘노동기본권, 주거권, 건강권, 교육권’ 등의 인권을 말한다.

선언 17조는 무엇이 재산이고 무엇이 재산에 대한 자의적 박탈인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데, 이걸 알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인권과의 관계 속에서 읽는 것이다. 선언은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거나 타인의 건강에 위험에 빠뜨리거나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적절한 휴식의 권리 보장,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을 보장하고 있다. 재산권은 이런 인권과의 관계 속에서 내재적 제약을 받는다.

재산권의 실현이 단지 재산을 획득할 유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하고, 그런 기득권을 보호하는 걸 의미한다면, 그것이 실정법으로 아무리 강력하게 보장돼 있다 할지라도 보편적 인권으로 정당화하긴 어렵다. 재산권은 사회적 권리를 포함하여 여타 권리의 효과적인 향유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이런 재산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말하는 것이고, 그 권리의 보장 자체만으로는 타인의 자유와 권리에 어떠한 피해자 부담도 주지 않는다는 모든 인권에 보편적인 속성을 가진 재산권이다.

선언 17조의 구상

선언 17조를 구성하고 있는 생각은 크게 세가지이다. 첫째, 재산의 소유는 인간 생활에 기본적인 것이다. 둘째, 재산은 단독으로뿐만 아니라 타인과 공동으로 가질 수 있다. 셋째, 재산을 자의적으로 박탈당하지 않는다.

선언을 만든 사람들의 재산에 대한 생각은 이러했다. 인권으로서 생각한 재산의 의미는 공익을 침해할 수 있는 ‘사적(private) 소유’가 아니라 ‘개인적(personal) 소유’였다. 즉 사는 집, 소지품, 가구, 프라이버시를 보장받는 통신 등에 대한 개인적 소유를 생각한 것이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소유자가 될 권리를 인권으로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선언 문구는 그렇지 않지만, 토론 중에 사용된 문구에는 “존엄한 삶과 인간 존엄성에 필수적인 물질적 재화에 대한 권리”, “모든 사람은 존엄한 삶에 필수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고, 개인과 가정의 존엄성 유지를 돕는 그런 재산을 가질 권리를 가지며”라는 것이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까지의 개인 소유가 기본적 권리인지, 개인 재산 말고 기업의 사적소유권을 왜 언급해서는 안되는지 등의 문제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다른 그 무엇이냐는 체제의 문제 속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언은 어떤 체제도 배제해서는 안되는 표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든 선언 기초자들이 ‘무제한적’인 재산소유권을 옹호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재산권에 대한 ‘제한 요건’을 충족시킨다는 조건 하에서 자본주의적 또는 사회주의적 경제 체제간에 중도를 유지하려 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국가들조차 순수자본주의 체제란 게 설령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권의 관점에서 수용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선언 기초자 중 누구도 시장의 자유로운 흐름이 인간존엄성에 요구되는 재화를 전달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이 선언 29조에 권리의 제한과 규제(“공동체에 대한 의무”, “민주사회에서의 도덕심, 공공질서, 일반의 복지를 위하여”)를 둔 이유이다. 29조에 덧붙여 더 중요한 제한 요건은 노동권 관련 조항이다. 재산을 만들어내는 노동자의 권리에 의해 기업의 재산권이 제한되어야 한다는 것을 선언 기초자들은 분명히 인식했다. 재산권이 자의적 박탈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합의 한편에는 재산권의 사회적 기능 때문에 그 범위가 규제돼야 한다는 합의도 있었던 것이다.

선언 이후 유엔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엔인권위원회는 재산권을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실현’이란 주제 속에서 다뤄왔고, 주된 논의는 재산권을 여타 인권과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엔인권위가 임명한 재산권에 관한 독립전문가는 그 보고서에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문제를 다룬 바 있다. 그는 재산의 다양한 형태와 그것이 갖는 사회적 중요성도 다양하기 때문에 ‘개인의 사적 소유’를 보편적인 인권으로 설정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 이유로는 “사적 소유의 이용은 소수의 손에 생산수단이 집중되는 것을 촉진해왔을 뿐 아니라 소수가 무제한적으로 부를 축적하게끔 했다. 이는 엄청난 부의 소유자와 아무것도 갖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간의 계급 분화의 근본원인이다. 집단적 재산이 이런 결점들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왔으며 재산의 사적 이용은 국가에 의해 규제되고 있다. 지금껏 알려진 어떤 경제체제에서도 절대적으로 사적인 생산수단의 소유현상은 결코 없으며, 공공의 이용, 안보, 건강 등의 필요성에서 법으로 제한이 부과돼왔다”고 말한다.

하지만 선언 기초 당시의 대립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재산권에 대해 가장 대조적이라 할 쿠바 정부와 미국 정부의 입장이 유엔회의에서 어떤 설전을 펼쳤는지를 예로 살펴보자.

쿠바와 미국의 대립

쿠바 정부는 재산권은 여타의 기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인권과 더불어 고려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자결권, 자연적 부와 자원에 대한 주권, 신 국제경제질서의 수립, 개발도상국들의 피폐화된 경제에 부과되는 과도한 외채 문제 등과의 관계 속에서 재산권을 검토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인권으로서 재산권 문제를 취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더욱이 모든 사람의 생명·노동·주거·교육·의료 등에 관계된 필수적인 사회서비스에 대한 권리, 경제운영에 참가할 권리에 반하는 의미를 가진 재산권에 대해서는 그것을 권리로 설정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빈곤퇴치, 실업, 인종적·사회적 차별, 기타 모든 형태의 불평등을 취급하지 않으면서 재산권을 고립적으로 선언하게 되면 대다수 인류와 국가들에게 재산권이란 공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반면 미국 정부의 입장 또한 단호하다. “재산권은 사회조직의 기본 장치이며, 시민·정치적 권리의 발전에 핵심적 역할을 해왔다. 시민의 자유는 재산권을 보장하는 사회에서라야 번성할 수 있다. 대부분의 인권논의에서 재산권이 홀대받아 온 것은 불만스런 일이다.”

이런 입장에 대해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의 의미는 뭐냐고 물어보게 된다. 다음과 같은 경우에 ‘재산권이 자유를 보장한다’는 의미를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미국의 어느 노동단체 사이트에서 본 사례이다. 노동조합결성과 활동을 이유로 해고당한 노동자가 있었다. 해고와 동시에 임금은 당연 끊겼고 조합주택에서도 쫓겨날 상태이다. 아이들은 굶주리고 있다. 이 사람은 이동식 식탁과 요리도구를 가지고 동네의 대형 수퍼마켓에 갔다. 그리고 고기가 가득차 있는 정육점 코너 옆에 이동 식탁을 차리고 거기서 고기를 꺼내 굽기 시작했다. 관리인이 달려왔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역방송 카메라도 달려왔다.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느냐는 질문에 그 노동자는 “아이들이 굶주리는 걸 내버려둘 수 없다. 나는 아이들을 먹여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분명 이 사람이 취한 행동은 재산에 대한 탈취라고 일반적으로 말할 것이고 그렇게 처벌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그 경제·사회 체제 내에서 생존을 추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자신의 생존을 위한 필수물을 제공받아야 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작성일자 : 2008. 11. 1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16조

1. 성년에 이른 남녀는 인종, 국적 또는 종교에 따른 어떠한 제한도 받지 않고 혼인하여 가정을 이룰 권리를 가진다. 이들은 혼인 기간 중 및 그 해소 시 혼인에 관하여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2. 결혼은 양 당사자의 자유롭고도 완전한 합의에 의하여만 성립된다.
3. 가정은 사회의 자연적이며 기초적인 구성단위이며,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요즘처럼 살기 힘든 때에는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이 도드라지는 한편 ‘가정의 위기’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도 높다. 둘 다 문제가 되는 생각이다.

‘가족밖에 믿을 수 없다’는 건 ‘사회’가 살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이고 가족외의 사회적 관계들을 이해타산으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와 국가가 맡아야 할 사회복지의 부담을 가족에게 떠맡기기 딱 좋은 생각이다.

‘가정의 위기’라고 할 때는 소위 ‘정상가정’의 해체를 운운하면서 다양한 가정의 형태와 그 구성원들을 ‘위기의 소산’으로 낙인찍는 수가 있다. 버젓이 구성원의 정서적 유대로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회에서 주류로 여기는 가정형태가 아니라는 이유로 ‘당신들의 가정은 가정의 위기 내지 해체의 증거’라고 손가락질 한다면 심각한 차별일 것이다. 또한 사회가 제공하는 가정생활과 관련된 권리로부터 그들 가정을 배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문제이다.

나아가 특정 사람들을 아예 가정을 구성할 수 없는 사람들로 낙인찍는 문제가 있다. 장애인의 이성교제와 결혼·출산을 바라보는 눈, 해외토픽감 식으로 다뤄온 동성애 혼인과 부모됨의 권리 문제 등이 적극 제기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혼인과 가정생활과 관련된 권리를 규정한 선언 16조는 빈 구석이 많은 조항이다. 만들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 많이 변화된 가족관과는 거리가 멀다. 먼저 어떤 생각으로 선언 기초자들이 16조를 만들었는지부터 살펴보자.

여성의 평등한 접근 등이 제외된 기초과정

선언 16조를 기초할 당시 “결혼과 무관하게 평등한 시민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제안은 누락됐다. 이 내용은 최근에 와서야 후속국제조약에서 강조되게 된다.
‘민법상 결혼은 선택의 자유, 아내의 존엄성, 일부일처, 결혼 해소에 대한 동등한 권리, 동등한 양육권, 자신의 국적을 유지할 권리, 계약을 맺을 권리, 재산을 가질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 선언을 기초할 당시 유엔여성소위원회의 제안이었고 ‘유급출산휴가, 교육에 대한 여성의 평등한 접근’ 등의 사회적 권고들도 있었다. 세계인권선언 16조에는 이 중 일부만이 반영돼 있다.

결혼과 관련하여 주로 논쟁이 된 문제는 타종교를 가진 사람과의 결혼이나 이혼에 관한 종교적 신념에 관한 것이었다. 타종교와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거나 종교적 이유로 이혼을 허용하지 않는 많은 나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소될 수 없는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정부들이 16조에 찬성표를 던진 배경은 이렇다.

종교와 국가는 분리된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인권 문제가 논의돼야 하고, 인권문제가 종교적 근거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혼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국가들에서 관련 입법이 대개 여성에게 불리하다는 점이 지적됐고 그런 여성의 불리함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결혼의 성립이나 해소 시에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1항에서 “성년”을 언급한 것은 아동혼을 방지하기 위한 구상이었다. 신체적 성숙이 됐다 할지라도 조혼은 권할만하지 않은 것이고, 혼인에서는 단지 출산 능력이 아닌 더 중요한 요인들을 고려할 필요성이 있다는 인식에서였다.
2항에서 ‘결혼에 대한 동의’를 언급한 것은 강요나 위협 하에서 계약된 결혼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3항에서 언급한 ‘사회와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의 구체적 내용은 끊임없이 논쟁되고 변화해왔다. ‘모성보호’를 예로 들어보자. 선두주자는 ILO이다. ILO는 1919년 창설하자마자 채택한 규범에서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규정을 만들었다. 1919년 모성보호조약(Maternity Protection Convention)과 야간노동(여성) 조약(Night Work(Women) Convention)이 그것이다. 이에 따라 여성 노동자는 모성휴가와 고용안전을 보장받을 권리를 갖는다. 이후로 오랫동안 모성보호는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여성을 어머니 또는 장차 어머니가 될 사람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여성노동자가 어머니일 수 있듯이 남성 노동자가 아버지일 수 있다는 관점을 ILO가 공식적으로 취하기까진 60여년이 걸렸다. 1981년 ‘가족부양책임이 있는 노동자에 관한 조약’과 ‘가족부양책임이 있는 노동자에 관한 권고’에 와서야 부모의 의무를 남성과 여성 모두가 행사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인정하게 됐다.

성차별 방지 노력이 처음에는 모성보호에만 초점을 두었다면, 50년대 이후에는 고용에 대한 평등한 접근, 고용에 있어서의 평등한 처우가 우선순위로 떠올랐다. 여성은 어머니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양해야할 사람이라는 것, 남성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자기 부양의 권리를 평등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족부양이 ‘가장’으로 간주돼온 남성의 의무(동시에 권리)인 것이 이전에는 당연시 돼왔다면 한 가정의 부양을 남녀가 공유해야 하는 문제로 다루기까지 또 수십 년이 걸린 것이다.

가정생활과 관련된 차별
유엔은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한 특별보고관’을 두고 있는데, 그 보고서에서 ‘가정생활과 관련된 차별 문제’를 다룬 바 있다. 보고관은 크게 세가지 유형의 차별을 지적했다.

· 결혼에 근거한 차별
기혼 여성은 여성으로서 차별받을 뿐 아니라 기혼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을 수 있다. 혼인에 근거한 차별은 기혼여성이 남편에게 재정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많은 국가들에서 기혼여성은 가정의 부양자로서의 권리를 청구하기 전에 자신이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걸 먼저 증명해야 한다. 그 결과 기혼여성은 사회보장제도에서 공개적으로 차별받을 수 있다. 많은 경우에 기혼여성은 남편이 확보할 수 없었던 권리라는 걸 증명해야만 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고, 취업을 하게 되면 피부양자로서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

이에 대해 유엔시민·정치적권리위원회는 비차별에 관한 일반논평 18에서 “혼인 기간 중 및 혼인 해소 시에 혼인에 대한 배우자간의 권리 및 책임의 평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당사국의 의무로 확인했다. 또한 동 위원회에 통보된 사건에 대한 결정에서는 기혼여성이 실업급여를 받을 자격에서 배제되는 법률은 규약 위반이라고 결정했다. 이 사건을 통보한 여성은 기혼여성이라고 해서 자신이 “생계책임자"였다는 걸 증명해야만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차별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조건은 기혼남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해당 정부는 결혼과 사회속에서의 남녀역할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통념을 따른 법률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통념에 따르면 기혼 남성은 언제나 생계책임자이고 반면에 기혼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 모성에 근거한 차별
앞서 말한 것처럼 모성보호는 인권기준이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ILO에 의해 규정됐다. 문제는 모성보호가 성평등에 반작용을 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보호의 목표가 아동이지 여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성보호’로부터 ‘부모보호’로의 개념 진전은 상대적으로 최근의 현상이다. ILO의 관련 조약에 따르면 정부는 “남녀노동자에 대하여 기회 및 처우의 실질적인 균등을 창출하기 위하여, 현재 고용되어 있거나 또는 취업하고자 하는 가족부양책임이 있는 사람이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또한 가능한 한 그들의 고용과 가족부양책임 사이의 갈등 없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국가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임신한 여성, 어린 아이를 둔 여성, 나아가 자녀를 양육할 연령의 모든 여성을 노동시장이 차별하는 것에 비하여 그에 대한 사회적 보상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어머니가 되는 것, 부모가 되는 것이 불리한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모성 휴가(양육휴가)에 충분히 보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인권의 관점에서 여성은 어머니가 된다는 이유로 사회적 인정이나 보호를 획득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모든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여성의 동등한 권리에서 모성보호가 의미하는 것은 여성이 자녀를 낳고 남성은 그렇지 않다는 생물학적 차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모성에 대한 사회적·법적 보호는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보상과 보호를 부여하는 데 있다. 출산과 양육은 사회적 기능이므로, 단지 여성이라는 사실로 여성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이 보상을 얻는 것이다.

· 부모됨에 근거한 차별
제도적 혼인은 많이 변했다. 서유럽과 북미에서는 결혼과 가정간의 연계가 없어졌다. 결혼과 가정간의 직접 연계를 상정했던 국제인권기준도 그런 변화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결혼과 부모됨이 직접 연계되지 않게 되면서 출산의 권리는 부부나 한 쌍의 권리라기보다는 개인의 권리로 요구되고 있다. 불임치료술, 대리임신 등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문제들도 제기되고, 출산과 관련된 권리에 대한 요구가 생겼다. 여기서도 인권의 원칙은 부모됨이 성별에 근거한 것이 아닌 남성과 여성 둘 다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다만 임신을 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기 때문에 임신했거나 임신가능성이 있는 ‘노동자’를 배제하는 것은 남성이 아닌 여성에 대한 차별이 된다. 따라서 국제규약은 임신과 양육을 이유로 한 차별을 성차별의 형태로서 금지하고 있다. 여성차별철폐조약 11조(2)(a)에 따르면 “임신 또는 출산휴가를 이유로 한 해고 및 혼인 여부를 근거로 한 해고에 있어서의 차별을 금지하고 위반시 제재를 가하도록 하는 것”을 결혼 또는 모성을 이유로 한 여성에 대한 차별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임신과 출산휴가를 이유로 한 차별만을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고용에 대한 접근의 어려움이나 직업상실의 위협으로 인해 여성이 고용이냐 모성이냐간에 선택을 강요당하는 현실은 여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부모됨에 관련된 인권기준은 어머니가 될 가능성만이 아니라 부모가 될 가능성을 다뤄야 한다.
또한 가족계획과 출생률에 대한 선택에서 대부분 여성이 남편의 의사에 반하거나 변화시킬 힘이 없다는 점이 고려돼야 한다. 여성의 낙태권과 가족계획과 관련된 선택권에 관련된 논쟁은 모든 곳에서 여전히 뜨거운 이슈이다.

혼인과 가족관계에서의 평등

1979년 유엔에서 채택된 여성차별철폐협약은 성역할과 가정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문화와 관습에 초점을 맞춘 유일한 국제인권조약이다. 이 협약에 기초하여 설치된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논평과 권고를 통해 협약의 내용과 그에 따른 국가의 의무에 대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가정생활과 관련된 내용에는 1994년 ‘혼인과 가족관계에서의 평등’, 1992년 ‘여성에 대한 폭력’에 관한 일반논평이 있다. 이에 따라 국가가 취해야 할 의무적 조치의 주요내용은 다음 표와 같다.

문제영역 유엔여성차별철폐위원회 논평과 권고
국적 국적은 완전한 사회참여를 위해서 결정적인 것으로 국적은 성인여성에 의하여 변경 가능하여야 하고 혼인이나 혼인 해소 혹은 아버지나 남편의 국적 변경을 이유로 하여 임의적으로 변동되어서는 안된다. 
법 앞의 평등 법률로써 또는 개인이나 기구를 통해 여성의 법적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남녀평등의 권리에 대한 부정이자 여성이 자신과 피부양인을 부양할 능력을 제한하는 것이다.
·국적과 유사한 개념으로서 주소는 여성의 혼인 여부와 상관없이 성인 여성의 의지에 따라서 변경이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타국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일하는 이주 여성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배우자, 파트너, 자녀를 동반할 수 있는 동일한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혼인과 가족관계 · 가족의 형태와 개념은 국가마다, 심지어 한 국가내의 지역 간에도 다양할 수 있다.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든, 국가의 법적 체계, 지역, 관습 혹은 전통이 무엇이든 간에 가족내에서 여성에 대한 대우는 법적으로든 사적으로든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과 정의의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어야 한다.
· 일부다처혼은 중지되고 금지되어야 한다.
· 관습, 종교적 믿음, 특정 인종집단의 민족적 기원등에 근거한 강제결혼, 강제재혼, 금전의 지급이나 신분상승을 위한 여성 혼인, 재정적 안정을 위하여 외국인과 결혼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여성의 권리에 위배된다.
여성의 혼인 시점, 혼인 여부, 혼인 상대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법으로 보호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 사실혼 관계에 놓인 여성은 가정 생활 및 수입과 자산을 공유함에 있어서 법적으로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가져야 한다. 피부양자녀와 가족 구성원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일에 남성과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
· 자녀를 양육하고 보호, 부양하는데 있어서 부모는 공동의 책임을 진다. 부모가 혼인하지 않은 경우나 어머니가 이혼하거나 별거중인 경우 많은 아버지가 그 자녀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혼인의 지위 및 자녀와의 동거여부에 상관없이, 양쪽 부모 모두가 자녀에 대하여 동등한 권리와 책임을 지도록 국내법으로 보장하여야 한다.
· 여성은 자녀들의 수와 터울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은 안전하고 믿을만한 피임 수단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이를 결정할 수 있도록 피임수단과 그 용법, 성교육에 대한 접근 보장, 가족계획 서비스에 대한 정보를 제공받아야 한다.
· 재산을 소유, 관리, 향유하고 처분할 수 있는 권리는 여성이 재정적 독립을 향유하도록 하는 여성 권리의 핵심이다. 여성의 재산권은 여성의 혼인여부와 상관없이 보장되어야 한다.
· 부부간 평등, 혼인 최소 연령, 중혼과 일부다처혼의 금지 및 아동의 권리 보호수립을 위한 모든 혼인의 등록을 요구해야 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 · 공적이든 사적이든간에 모든 형태의 성에 근거한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적절하고 효과적인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여기에는 공무원에 대한 성인지성 훈련, 폭력의 범위·원인·영향과 폭력을 방지하고 취급하는 조치들의 실효성에 대한 통계와 조사의 편찬, 여성에 대한 존중을 위한 매체들의 효과적 조치, 인신매매와 성적 착취를 근절하기 위한 예방 및 징벌 조치, 효과적인 청원절차와 배상을 포함하는 구제방안 마련, 성희롱 및 기타의 직장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성에 근거한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위한 피난처 제공, 숙련된 보건 인력, 재활 및 상담을 포함하는 서비스의 수립과 지원, 여성할례 등의 관행을 근절하기 위한 조치, 출산과 생식에 관한 강제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들, 시골 여성 및 격리된 공동체에 대한 특별 서비스, 가정 내 폭력을 근절하기 위한 조치들.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그 관계의 의미를 찾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것이다. 가정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것은 그중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자기식대로’의 가정만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다른 가족을 평가절하하거나 다른 가족과 갈등한다면, 누구에겐 세상에서 제일 편한 곳이라는데 누구에겐 지옥 같은 곳이 가정이라면, 사회적 유대와 연대와는 담쌓은 가족 사랑이라면 인권으로서의 ‘가정생활에 대한 권리’가 작동할 수 있을까? 누구를 가족이라 할 것이며, 가족과 사회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언제나 만들고 보듬어야 하는 문제이다.

‘떠오르는 인권에 대한 바르셀로나 헌장’이라는 것에서는 선언 16조에 해당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바꿔 쓰고 있다.

“모든 사람은 개인적 유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 선택한 사람과 정서적으로 결합(결혼한 권리를 포함하여)할 개인의 권리를 인정한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모든 유형의 자유롭게 동의한 개인적 유대는 어떠한 장애도 없이 동등한 보호를 받는다.

모든 가족 공동체는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모든 사람은 가족의 형태와 무관하게 교육과 자녀 양육과 관련하여 공공당국으로부터 가족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작성일자 : 2008. 11. 1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제15조

1. 모든 사람은 국적을 가질 권리를 가진다.
2. 어느 누구도 자의적으로 자신의 국적을 박탈당하거나 그의 국적을 바꿀 권리를 부인당하지 아니한다.

무국적이라는 것

“나의 조국은 세계이다”, “세상을 무국적자처럼 떠돌고 싶다”는 등의 말을 하거나 들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때는 자신의 국적에 집착하지 않고 다른 민족, 다른 인종의 사람 누구와나 함께할 자세가 되어 있을 때일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조국으로 인류를 가족으로 여기는 그런 사람에게도 엄연히 국적과 시민권이 있을 것이다.

좁아진 세계와 타국에서의 취업, 국제결혼 등의 증가로 이중국적을 인정해야 한다는 등의 논의를 심심찮게 접할 수 있는 요즘 세상에서 ‘무국적’의 문제는 주목받지 못하는 인권문제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훨씬 더 지구화된 요즘 세상에서 무국적자가 여행하는 것은 1930년대보다 훨씬 더 어렵다. 무국적으로 태어나는 아동은 평생 무국적이기 쉽다. 무국적 상태에서는 학교에 가거나 합법적으로 일하거나 재산을 소유하거나 결혼하거나 여행을 할 수 없다.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도 고소를 할 수 없다. 법적으로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수사를 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내가 저지른 유일한 범죄는 내가 어떤 국가의 시민도 아니라는 거예요.”
“인간으로서 우리는 우리의 고향을 만들 자격이 없는 겁니까?”
“내가 사는 나라에서도 ‘안된다’고 하고, 내가 태어났던 나라에서도 ‘안된다’고 하고, 내 부모의 출신 국가에서도 ‘안된다’고 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낀다. 왜 사는지 모르겠다. 무국적이라는 것은 무가치하다는 감정에 언제나 휩싸여 사는 것이다.”
무국적 문제를 다루는 한 인권단체와의 인터뷰에서 무국적자들은 이렇게 호소한다.

아인슈타인도 무국적자였다

무국적자란 어떤 국가의 국내 법률에 의해서건 국민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람(1954년 무국적자의 지위에 관한 협약 1조)이다. 각국의 법률에서 국적과 시민권은 반드시 동의어는 아니다. 하지만 둘 다가 의미하는 바는 한 국가와 개인을 한데 묶는 끈으로서 양자 간의 정치·경제·사회적 권리 뿐 아니라 책임을 포괄한다.

무국적의 원인은 다양하지만 서로 중첩되기도 한다. 정치적 급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표적 삼은 차별과 배제, 국가들간의 국적법의 차이로 인해 생기는 틈, 영토 변경과 관련된 혼란, 결혼과 출생신고와 관련된 법이 간과한 문제, 다른 국적을 얻기 전에 국적을 포기한 경우, 부계혈통만으로 시민권을 인정하는 경우 등으로 인해 무국적이 발생한다. 여기에 기후변화와 사막화로 인한 물과 자원 분쟁이 평화롭게 공존하던 지역에서 마찰과 추방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다 알만한 유명한 무국적자의 경우를 보자. 한국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이 닮기 원하는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무국적자였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났으나 1896년 국적을 포기했고 그 후 5년간 무국적자였다. 1901년에 스위스 시민이 됐고, 프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이 된 1914년에 독일 시민권을 다시 얻었으나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된 후 아인슈타인은 아카데미를 사임하고 두 번째로 독일 국적을 포기했다. 이번에는 난민이 됐다. 스위스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국적자는 아니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40년에 미국시민이 됐다. 평생에 걸쳐 이런 난관을 겪으면서 그는 말했다. “민족주의는 소아기적 질병이다. 민족주의는 인류의 홍역이다.”

무너지는 베를린 장벽 앞에서 연주한 것으로 유명한 세계적인 첼로연주자 로스트로포비치도 무국적자였다. 1978년 그는 프랑스 TV 뉴스를 보다가 자신과 아내가 “소련의 위신에 해로운 행위”로 인해 소련국적을 박탈당했다는 걸 알게 됐다. 훗날 그는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우리는 제거됐다.…‘가치 없는 시민’이 된다는 게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 당신들은 모른다. 그들은 우리를 몰아냈다.”고 말했다. 1990년에야 그의 소련 시민권은 회복됐다.

유명 영화감독, 마가렛 본 트로타도 무국적자였다. 그녀는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1942년 당시 그녀의 어머니는 독일인이 되고 싶지 않아 무국적이었고, 비혼의 무국적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그녀도 자동으로 무국적이었다. 공부를 하러 파리로 갈 때 그녀에게는 비자와 신분증명서가 없었다. 한밤중에 기차에서 끌려 내려진 그녀는 국경 가운데서 오도갈 수 없었다. 훗날 결혼으로 국적을 취득한 그녀는 “나는 국적을 갖고 싶었다. 그게 프랑스던 독일이던 상관없었다. 난 단지 여행의 어려움에서 해방되고 싶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무국적자가 되어 타향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작가는 자서전에서 ‘무국적’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 자신이 내 자아에 정말로 속한다는 느낌이 멈췄다. 내 타고난 정체성의 일부가 내 원래의 본질적인 자아와 더불어 영원히 파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국적의 고통은 유명인들의 ‘과거’가 아니라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현재’로 계속되고 있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새로운 국가가 세워지면서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민족들, 상당수가 난민이면서 무국적이기도 한 수백만의 팔레스타인들은 현재 무국적의 대표적 사례이다. 이주여성과 그 자녀의 문제는 특히 취약한 무국적 사례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사례는 한국과 관련해서도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팔레스타인, 그리고 조선적

한 베트남 여성이 고령의 대만인과 국제결혼을 했다. 그러나 남편은 예상보다 경제사정이 열악했고 사업의 실패와 더불어 이 여성이 아들이 아닌 딸을 낳자 아내와 아이를 같이 버렸다. 이 여성은 국적취득과정에 있었다. 새 국적을 얻으려면 원래의 국적을 포기하는 절차가 선행돼야 했다. 남편과 상의하여 베트남 국적을 포기했으나 아직 새 국적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버림받은 그녀는 고향에 돌아와서야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자신이 무국적자이며 따라서 아무런 권리가 없음을 깨닫게 됐다. 아이는 베트남인에게 허용된 무상교육을 받을 수 없고 의료 혜택도 없으며, 자신은 일자리를 얻을 수 없었다. 국적회복을 위한 절차를 알아보자니 변호사는 5천 달러의 수임료를 요구했다. 자신에게는 꿈도 꿀 수 없는 돈이었다.

일본 패망 후 귀환하지 못하고 어떤 국적도 취득하지 않은 채 귀환을 그리며 무국적자로 버틴 동포들, 북한 국적도 남한 국적도 취득하지 않고 사실상 무국적자인 ‘조선적’을 고집한 동포들, 남북한 각각이 국제사회에서 각각의 국가이고 국적법이 있는 상황에서의 북한 출신 이주자의 문제, 국제결혼을 통한 이주여성과 이주노동자와 그 자녀의 국적 문제 등 ‘무국적’은 한국 사회와도 결코 먼 문제가 아니다.

난민 뿐 아니라 무국적자도 수임사항으로 다루고 있는 국제기구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이다. UNHCR은 2006년 말 현재, 공식적으로 49개국에 걸쳐 5백 8십만 정도의 무국적자가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무국적자에 대해 믿을만한 통계를 내는 국가는 거의 없기 때문에 UNHCR은 실제 수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1천 5백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무국적 문제를 다루는 UNHCR의 인력과 재원은 형편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차 대전 간 초기의 국제적 합의들은 난민과 무국적 문제를 한데 다루었고, 무국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목표를 두기 보다는 당장 닥친 실질적인 문제 해결에 국한됐다. 가령 무국적자들로 하여금 당장에 필요하니까 여행서류로 소위 ‘난센여권’을 사용하게 하는 식이었다.

2차 대전 이후 무국적자의 법적 지위를 규율하고 무국적 사례를 줄일 필요성에서 채택된 기준이 세계인권선언 15조이다. 선언은 개인의 인권으로서 국적을 가질 권리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국적을 주거나 말거나 빼앗거나 하는 문제는 국가의 권리이다. 각 국가는 자국의 법에 따라 국적법을 제정할 수 있고, 이 법이 국제법과 타국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다른 국가들은 대개 이를 승인한다. 선언 15조는 국적에 대한 권리를 말했지만, 어떤 국가가 어떤 상황에서 국적을 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무국적을 방지할 국가들의 의무, 아동을 출생 시에 등록하고 무국적이 될 상황이면 국적을 제공할 의무 등이 명시된 것은 훨씬 나중에 만들어진 국제조약에서다.

가령 1954년 무국적자의 지위에 관한 협약은 무국적자에 대해 난민에 대한 처우와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고, 1961년 무국적자의 감소에 관한 협약은 달리 국적이 없으면서 가입국의 영토에서 출생한 자에게 그 국가의 국적을 인정함으로써 주로 출생 시 무국적을 피할 목적을 가진다. 국가들에게 권고되는 바는 최소한 무국적자에 관한 두 개 협약을 존중하라는 것인데, 양 협약 모두 가입국 수가 아주 적다. 그밖에 1966년의 시민·정치적 권리 규약과 1989년의 아동권리협약 7조는 아동이 출생 시 즉시 등록될 것과 출생 시부터 성명권과 국적 취득권을 가질 것을 규정하고 있다. 적어도 당사국에서 태어나는 아동이 무국적이 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가입국에 촉구하고 있다.

너무도 미약한 국제사회의 대응

무국적과 관련된 활동 단체들이 유엔과 정부들에게 촉구하는 바는 민망할 정도의 기본적 수준이다. 무국적과 관련하여 수임사항을 명확히 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정하는 것, 가용할 수 있는 기존 인권 메커니즘을 모두 활용할 뿐 아니라 무국적 문제에 집중하는 단위를 만드는 것, 식량과 의료 등 긴급한 필요에 지원하는 것, 무국적과 관련된 정보의 공유, 무국적과 관련된 국제기준의 당사국이 될 것 등이다.

여러 국가들에서 시민권은 새로운 권리를 추구함으로써 이전의 특권을 권리로 변형시키고, 권리의 주체를 확장해왔다. 새로운 권리는 이전 권리의 이용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들고 이전에 법률로나 관습으로 분리됐던 집단들간의 장벽을 제거해왔다. 그런데 무국적자에게는 그런 시민권이 없기에 권리의 변화와 생성도 없다. 어느 국가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국제적으로는 미약한 협약과 기구가 있을 뿐이다. ‘시민권과 인권이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이고, 시민권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인권이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까’는 인권의 생명과 뗄 수 없는 문제이다.

작성일자 : 2008. 9. 2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14조

1. 모든 사람은 박해를 피하여 타국에서 피난처를 구하고 비호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2. 이 권리는 비정치적인 범죄 또는 국제연합의 목적과 원칙에 반하는 행위만으로 인하여 제기된 소추의 경우에는 활용될 수 없다.

맨 손으로 서 있는 사람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이 오래전 발행한 포스터가 있었다. 이 포스터에는 연장을 들고 서있는 사람, 땅을 파는 사람, 트럭을 모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림 밑에는 “누가 난민일까요?”라는 질문이 담겨 있다. 그림 속의 수많은 사람들을 훑어보면 답이 드러난다. 저마다 뭔가 쓸 만한 도구를 갖고 있는데 맨 손으로 서있는 사람이 있다. 아무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 난민이다. 아무것도 없이 살던 곳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난민이라고 포스터는 설명해준다.

세계인권선언은 “박해를 피하여”란 표현으로 난민을 설명하고 있다. 1951년 채택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은 “인종, 종교, 국적,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근거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사람,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공포 때문에 국적국의 보호를 원치 않는 사람, 국적국 또는 상주국으로 돌아갈 수 없거나 돌아가길 원치 않는 사람을 난민이라 한다.

그런데 이 협약은 1951년 이전에 발생한 사건의 결과로 인한 난민에게만 적용되었고, 유럽에서 발생한 사건에 집중했다. 이미 발생한 난민문제에만 초점을 맞추고 예상할 수 없는 미래의 난민문제에 대해서는 책임지려 하지 않았기에 이런 제한을 둔 것이었다. 이런 시간적·지리적 제한은 곧 문제가 됐다. 1950-60년대 특히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난민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1951년 협약의 시간적·지리적 제한을 제거한 것이 1967년의 난민의 지위에 관한 의정서이다. 또한 난민 상황의 변화를 반영하여 1951년 협약에 담긴 정의를 기본으로 하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됐다.

1969년 아프리카통일기구협약(OAU협약)은 “출신국 또는 국적국의 일부 또는 전부에서의, 외부침략, 점령, 외국의 지배나 공공질서를 심각하게 해치는 사건을 이유로 강제로 자신의 나라를 떠나야만 했던 사람”을 1951년 난민협약의 정의에 덧붙였다.

1984년 미주기구 난민선언(카타헤나선언(Cartagena Declaration))은 “보편화된 폭력, 외부침략, 국내소요, 대량의 인권침해 또는 공공질서를 심각하게 해치는 기타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의 생명, 안전이나 자유가 위협받음으로 인하여” 자국을 탈출한 사람을 추가했다.

변화하는 상황

난민에 대한 정의의 변화가 보여주듯이 난민의 발생요인과 결과, 난민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태도와 대응양식은 급격한 변화를 겪어왔다. 이런 속에서 세계인권선언 14조는 20세기 난민 정책의 전환점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선언을 전후한 국면의 특징이라 하면, 난민 문제를 ‘일시적’이고 ‘특별한’ 상황으로 봤고 어쩔 수 없이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가졌다는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정권을 피해 떠나온 사람들을 비호하지 못한 실패가 역력했던 경험을 안고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졌다. 더 이상의 협상이나 조약 없이 개별 사례별로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대응방식을 취했고, 본국 귀환이 이상적 해결책이며 유엔이 더 이상 난민 문제에 관여하지 않기를 원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설립하면서도 3년 시한의 임시기구로 생각했을 뿐이다. 또한 냉전의 시작과 더불어 정치적으로는 공산정부의 박해로부터 피해온 난민들에게 이익을 부여한다는 의도가 있었다. 옛날 영화 속에 흔히 등장하듯이 자유의 다리를 건너 자유세계로 넘어오는 정치적 망명자의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난민은 양차 대전과 그 결과에만 한정된 현상이 아님이 곧 드러났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은 현재까지 임기가 연장되고 있고 난민 문제가 일시적일 뿐이라는 생각은 바람에 그쳤다. 또한 그 규모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정확한 수를 추정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으나 60년대 2백만 명 수준에서 현재는 2천만 명 수준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난민에 대한 태도는 ‘냉정’으로 변화했다. 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결로 난민의 정치적 근거가 상당부분 상실된 면도 있고, 9·11 이후에는 미국의 난민수용 급감과 유럽 국가들의 입국허가규범 강화로 나타났다.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분의 정부 폭력이 곳곳에서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난민을 내쫓는 나라들

분쟁의 성격이 ‘내전’이 되면서 상황은 더 나쁘게 됐다. 국내실향민수가 난민의 두 배에 달하고 이들의 처지가 난민보다 더 나쁜 경우도 많다. 무력분쟁의 결과로 실향민이 발생할 뿐 아니라 살던 곳에서 대량의 인구를 쫓아내는 것이 교전 당사자들의 분명한 목적이기도 하다. 내전과 인종청소, 대량의 인권침해, 경제적 불평등과 극빈, 여기에다 기후변화로 인한 환경재앙까지 가세했다. 가난한 나라들이 수천수만의 난민을 수용하고 있는 반면 부자 나라들은 자신의 영토에 난민이 접근하는 것을 제한하는 것은 지구적 불평등의 또 하나의 얼굴이다.

이렇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난민과 다른 유형의 이주자(가령 경제적 이유의)를 구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가 논란이 된다. 하지만 많은 정부들은 난민과 경제적 이주자를 구분하려 들고, ‘문’(door)으로 들어온 난민이 아니라 ‘창문’(window)으로 몰래 들어온 경제적 이주자라 비난하면서 난민 신청을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내쫓는다.

난민에 대한 국제적 보호에서 핵심 원칙은 강제송환금지(non-refoulement) 원칙이다. 어느 누구도 박해의 위험이 있는 곳으로 되돌려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민 지위를 구하러 들어오는 것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상황은 핵심원칙을 써먹을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이다. ‘인권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 난민에 대한 대응이다. 인권에는 냉혹한 국경이 있다.

체약국은 난민을 어떠한 방법으로도 인종, 종교, 특정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그 생명 또는 자유가 위협받을 우려가 있는 영역의 국경으로 추방하거나 송환하여서는 아니된다.(난민협약 제33조)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 정부는 난민협약에 1992년 가입한 이후 2000년까지 단 한명의 난민도 인정하지 않다가 2001년에야 처음으로 1명을 난민으로 인정했다. 이후 조금씩 난민인정 자체에 있어서는 개선을 보여 왔다고 하지만, 한국의 난민 신청자가 1천 명을 넘어선 현실에 비해 난민정책은 빈곤하다고 할 수 있다. 전문공무원이 너무 부족하고, 난민정책을 생산하고 실무를 지도할 정책단위 없이 출입국관리법과 출입국관리국이 관리하며, 이의신청제도가 유명무실하다는 등의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국내외 인권단체들은 난민문제를 국가 안보 혹은 치안유지적 시각으로 접근하지 말고 인권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요구를 해왔다. 유엔의 인권조약 관련 위원회들은 난민정책을 재고할 것을 한국 정부에 권고해왔다.

한국에서 최초로 난민 인정을 받았던 데구(Degu)씨는 한 토론회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정치적, 종교적, 그리고 인종적 박해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던 땅을 떠나 다른 나라로 간다는 것은 결코 한 인간이 추구하는 삶이나 꿈이 아닙니다.”
“저는 한국정부와 민간단체가 보다 평화로운 미래를 위해 논의하고 이들에 대한 국제적 보호에 기여하기를 기원합니다.”

난민=인권의 종말?

세계 곳곳에서 난민이 처한 상황은 그야말로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것이다. 가령 바다에서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는 것은 인류 역사에서 불문법이다. 해상에서의 인명 구조는 전시의 적에게도 해당하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난민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항해를 견딜 수 없는 보잘것없는 보트에 몸을 싣고 음식도 물도 없는 상황에서 애타게 도움을 청해도 버리고 가버리거나 오히려 해안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민간어선들이 구조해서 데려오면 받아주지 않거나 오히려 구조한 사람들에게 불법밀입국을 도운 혐의로 처벌하는 사례도 보고되고 있다. 탈출을 위해 브로커들에게 전 재산을 넘겨주고 길을 나선 이들을 영하의 산속이나 벗어날 수 없는 사막 가운데 버려두는 일 등이 난민에 관한 보고서들에는 넘쳐난다.

난민의 국제적 보호를 천명한 원칙들은 다음의 경우를 인권침해라 한다.

· 선박으로 도착하는 난민을 해변으로부터 내쫓아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는 경우
· 어느 곳에서도 비호를 구할 가능성이 없는데도 국경선 지역에서 입국이 거절되는 경우
· 박해를 받을 공포가 있는 국적국 혹은 기타 국가로 강제송환되는 경우

앞서의 사례들을 보면 ‘사문화’된 기준이란 힐책을 받아도 대꾸할 말이 없다. ‘난민의 세기’라는 불명예스런 이름을 가진 20세기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로 인해 “인권의 종말”까지 거론되는 결과를 낳았다.

세계인권선언은 무엇보다도 ‘국가’를 중심으로 한 인권개념에 기초해 있다. 즉 자유권은 국가에 의한 권리침해로부터의 자유에 중점을 두었고, 사회권은 국가에 의한 복리의 보장과 증진을 강조했고, 국제인권법의 의무당사자는 국가이다. 난민에 대한 국제적 보호에 관해서도 비호국이나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이 제공하는 보호가 자국 정부로부터 받아야 할 보호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난민은 이 의무당사자와 관계가 없다. 어느 국가도 내 사람이라 하지 않는 사람, 내 사람이라 하는 국가로부터는 보호는커녕 공포와 박해밖에 기대할 수 없는 사람이 난민이기 때문이다. 난민의 존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인권의 주체가 된다는 인권의 기본 설정을 비웃는다. 난민은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난민은 인권의 주체로서 권리를 보호받는 것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처분 대상이고, 정치조직이 아니라 인도주의 기관들의 수중에 있다. 기존의 ‘국가-국민-영토’의 구조 속에서 사고되는 인권 틀로는 난민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없으며, 기존의 인권틀 내에서의 ‘비호 받을 권리’는 잘못된 접근이라는 지적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느냐는 현재 인권의 큰 과제이다.

작성일자 : 2008. 9. 2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13조

1. 모든 사람은 각국의 영역 내에서 이전과 거주의 자유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2. 모든 사람은 자국을 포함한 어떤 나라로부터도 출국할 권리가 있으며, 또한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가진다.

당연한 자유?

80년대 민주화 요구 시위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시위에 반대하는 한 아저씨가 시위대를 향해 소리쳤다. “난 이전과 거주의 자유가 있다구. 그러면 민주주의고 자유지, 이전과 거주의 자유 말고 뭔 놈의 민주주의와 자유가 더 필요해?”라고 목청을 높이시던 게 아직도 생생하다. 그 분의 말처럼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민주사회의 필수적인 권리로 여겨진다. 물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다.

자유로운 이동의 권리가 없으면 다른 권리들이 위협받는다. 직업이나 교육의 기회가 막힐 수 있고, 정치적·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피난처를 구할 수 없으며, 스스로 선택한 종교를 신봉하지 못하거나 여타의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할 수도 있다.

“이동을 할 수 있어야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이동을 할 수 있어야 직장도 구할 수 있으며, 이동을 할 수 있어야 사람도 만나고 결혼도 하고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이동을 할 수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지 않습니까?”라는 장애인 이동권의 외침이 공감을 얻은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이동에 담긴 근본적이고 필수적인 성격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인권으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오늘날 심각한 인권문제를 유발하는 주요소 중의 하나는 바로 ‘이전과 거주의 자유’의 제약성이다. 선언 13조는 이어지는 14조(망명의 권리), 15조(국적을 가질 권리)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13-15조를 연결하는 요소가 무엇인가하면 소위 ‘비시민’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이전과 거주의 자유’가 거대한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13조의 침묵

그런데 13조를 들여다보면 ‘비시민’들이 간절히 원하는 이전과 거주의 자유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먼저 1항에서는 “각국의 영역 내”에서의 이동을 말하고 있다. 2항에서는 ‘자국민’이 “자국”으로 돌아올 권리를 말할 뿐이다. 즉,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한 국가 영역 내에서의 권리이며, 자국민은 떠났다가 돌아올 수 있으나, 다른 사람은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권문제로 중요시되는 문제, 즉 누구든지 어떤 나라에든지 들어갈 권리(immigration)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들어가는 것이 봉쇄돼 있기 때문에 설령 들어갔다 할지라도 그 국가 영역 내에서의 자유로운 이전과 거주는 실현되기 어렵다.

선언 기초자들이 생각한 13조에서의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자국 정부와 개인 시민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현대 세계에서는 옛날에 땅에 속박됐던 농노처럼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는 일이 있을 수 없고, 이전과 거주에 대해 당국의 허가를 강제하는 일은 독재정권이나 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이런 정도로 이동의 자유를 바라봤기에 13조의 내용은 선언기초자들에게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떠날 자유는 약간 논란이 됐다. 당시에 베를린 장벽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편의 논거가 됐다. 그러나 대다수 나라에서 떠날 자유는 당연시 됐기에 통과됐다. 떠날 경우에는 여권을 요구하지도 않는 나라들도 있다. 돌아올 자유는 폐위된 왕족, 이전 정부의 수반이나 그들의 측근, 추방됐거나 정치적 이유로 쫓겨난 사람, 외국에서 태어난 국민이 대규모로 돌아오는 것 등이 문제시됐다. 어쨌든 결론은 자국민이 떠나고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해당 정부가 이유를 묻지 않고 제약도 가하지 않겠다는 것이 13조의 원칙이다.

누구에게나 ‘떠날 자유’가 있다면, 그리고 그 자유가 의미가 있으려면 ‘떠나서 어디에나 갈 자유’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에선 어디에나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각 국가는 국경을 통제할 권리를 갖고 있다. 결국 현실에서 갈 곳을 마련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떠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내몰림이고 재난이 될 수 있다. 선언은 앞서 말한대로 자국민이 아닌 사람의 입국의 권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고, 선언 이후 13조와 관련된 국제기준은 대개 난민과 무국적자에 대한 것이다. 여전히 입국의 권리를 말하는 국제기준은 전혀 없지만, 가장 밀접한 것은 강제송환금지(non-refoulement) 원칙이다. 어느 누구도 박해의 위험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14조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끝없는 수난

이전과 거주의 자유 제약으로 인한 인간 수난을 보기 위해 멀리 타국의 난민촌을 봐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바로 지금 한국 사회에서 숱한 예를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시내 곳곳에 둘러쳐지는 재개발과 뉴타운의 깃발은 거주의 자유를 보장하는가? 더욱 더 나쁜 거주지로 옮겨갈 자유가 자유라면 그런 자유는 넘쳐나고 있다. 단속에 쫓기던 이주노동자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사경을 헤매고, 짐 챙기고 작별 인사를 할 기회도 주지 않을뿐더러 국가인권위의 권고도 무시하고 강제 출국시키는 일이 매일의 뉴스다.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이유로 수많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 권리를 박탈당하고 반강제적으로 수용생활을 해야 한다. HIV/AIDS 감염인이라는 이유로 앞뒤 따지지 않고 출입국을 봉쇄한다. 『파리의 택시운전사』로 유명한 홍세화씨가 정치적 탄압 때문에 20여년을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나, 37년 만에 고국에 돌아온 송두율 교수가 ‘해방 이후 최대간첩’으로 매도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은 것도 최근의 일이다. 외국에 있는 동안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과거 숱한 조작사건의 관련자라는 이유로, 소위 반정부 활동(지금은 민주화운동이라 부른다)을 이유로 자국에 돌아올 권리를 박탈당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조선적이란 이유로 자유롭게 한국을 방문할 수 없는 재일동포들이 부지기수고, 북한출신 이주자나 중국에서 온 조선족들의 국내에서의 처지는 13조에 담긴 소극적인 수준의 권리조차 아까워하는 냉대에 가깝다.

인권으로서의 이전과 거주의 자유

‘시민권’속에서 이전과 거주의 자유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권’으로서의 이전과 거주의 자유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둘의 외관은 비슷하지만, 핵심적인 차이가 있다. 시민권은 특정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권리를 주는 것이고, 인권은 구성원 자격과 권리를 떼어내는 것이다. 즉 특정 사회(국가)에서 갖는 지위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니까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대접을 하는 것이다.

시민권이나 인권 모두 더 많은 사람들에게로 확장돼온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민권은 특권이다. 특정 국가의 구성원만 써먹을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고정돼 있는 게 아니다. 누가 국민이고 외국인인가를 정하는 조건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국민 중에서도 누구를 권리로 대접하고 누구를 무권리로 팽개치는 지도 달랐다. 그리고 이건 앞으로도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과거 생계를 잃고 시골을 떠나 도시로 이주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상황이나 오늘날 가난한 나라에서 산업국가로의 이주는 비슷한 상황이다. 맨몸 맨주먹으로 도시로 상경했던 사람들은 소유한 것이 없었기에 시민 대접을 받지 못했다. 지금도 재산은 시민권의 주요한 근거이다. 이들이 시민 대접을 받기 위해 어떤 수난과 싸움을 겪었는지를 기억해 보자.

앞서 살펴본 ‘수난’의 예에서처럼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자국민과 외국민을 구분하지만 자국민 내에서도 끊임없이 구분을 한다. 정치적·영토적·경제적·문화적 배타성에 근거한 시민권으로서의 이전과 거주의 자유는 도대체 누구에게 득이 되는 것일까를 생각해보자. ‘구성원이 될 자격을 꼭 지금 같은 구분선속에서 그어야 할까’ ‘상품과 서비스는 자유롭게 왔다갔다해야한다고 하면서 왜 사람은 안된다고 하는가’는 현재 인권 논의의 주요한 쟁점이다. 자본과 기업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자유로운 이동과 거주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 사회보장제도 등에 있어서 차별을 없애는 것, 내외국인 노동자가 같은 지위를 누리는 그런 모습을 그려볼 수는 없는가, ‘이전과 거주의 자유가 민주사회의 기본’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기본은 아닐까.

작성일자 : 2008. 9. 2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세계인권선언 12조

어느 누구도 자신의 프라이버시, 가정, 주거 또는 통신에 대하여 자의적인 간섭을 받지 않으며, 자신의 명예와 신용에 대하여 공격을 받지 아니한다. 모든 사람은 그러한 간섭과 공격에 대하여 법률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12조; 침해방지와 소극적 의무를 표현

선언에서 명시한 다른 권리들과 달리 12조에서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표현이 사용됐다. 선언이 대개 “모든 사람은 ∼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는 표현을 택하고 있는데 12조는 “어느 누구도 ∼를 받지 아니 한다”는 식의 표현을 하고 있다.

프라이버시권이 보호하는 이익을 크게 두 가지로 말하면, 침해에 대한 통제와 자신의 개인정보에 대한 통제를 들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와 타인이 개인을 홀로 내버려두면 되는 소극적 의무와 사람이 자기 생활의 모든 측면에 대해 선택할 권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모하는 적극적 의무 둘 다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선언이 표현한 프라이버시권은 침해방지와 소극적 의무에 쏠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원래 “불가침”이란 단어가 사용됐으나 최종 토론에서 빠지게 됐다. 대표적으로 ‘표현의 자유’ 등과 같은 다른 자유들과 경합하는 경우 프라이버시권만을 절대적인 권리로 취급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명예와 신용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는 다수 대표자들이 걱정을 했다. 명예와 평판의 과보호가 언론의 자유에 재갈을 물릴 우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명예’를 빼야한다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명예에 대한 보호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보호가 보호하는 이익은 다르다는 시각이 있고, 여러 국가법에서도 이 둘에 대해 접근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또한 보통 개인과 공인의 명예와 신용을 같은 정도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12조에서 사용된 “프라이버시”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12조에 언급된 다양한 권리들, 즉 가정, 주거, 통신 등에 대한 보호를 다 담고 있는 말이다. 선언의 시대적 한계상 ‘정보 프라이버시’를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정보 프라이버시에 대해 명시적이지 않다 하더라도 12조의 취지를 바탕으로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다는 시각이 대다수이다.

프라이버시권 정의의 어려움

‘프라이버시’라는 단어는 ‘타인들과 사회로부터 물러나 있을 것’,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한다’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국제 인권 규범에 담긴 권리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정의하기 어려운 권리중의 하나가 프라이버시권일 것이다. “모든 인권은 프라이버시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다른 많은 권리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프라이버시를 정의한다는 것은 국가와 사회가 개인사에 얼마나 개입할 수 있느냐에 선을 긋는 문제이고, 그 선은 맥락과 환경에 따라 다르다. 노출시키지 말아야 할 것은 문화와 사람에 따라 다르고 동일한 내용이라도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노출과 공유의 정도를 달리한다.
이에 대해 『사생활의 역사』의 한 필자는 “사생활은 태초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마다 각기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내는 역사적 현실이다. 영원히 확정된 경계를 갖는 ‘사생활’이란 있을 수 없다.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경계선은 끊임없이 변한다. 사생활은 공적 생활과 관련해서만 의미를 갖는다…사생활과 공적 생활이 구분이 모든 사회계층에게 동일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고 했다.

프라이버시는 정말로 포괄적인 용어다.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하나로 묶기 어려운 다양한 이해의 느슨한 혼합물이다. 홀로 있을 권리(방해받지 않고 살아갈 권리), 다른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만들고 발전시킬 권리, 익명성을 즐길 권리, 자신에 대하여 얼마만큼을 어느 때에 공표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 정확하게 기록될 권리, 개인의 비밀을 지킬 권리, 개인의 자율성, 광의의 개인적 자유권 모두를 포함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여행자유의 제한, 국기에 대한 경례나 선서를 강요하는 것,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강의의 자유, 동의 없는 사진 촬영, 도청, 의료 기록, 신체보전을 침해하는 체벌 문제, 성적정체성과 성생활, 결혼․이혼․출산․피임․교육․자녀양육 등에서의 선택의 자유 등 온갖 문제가 프라이버시의 이름으로 다뤄진다.

프라이버시를 느슨하게나마 영역별로 묶어서 다음과 같이 분류하기도 한다.

* 정보 프라이버시; 신용정보, 의료기록, 정부 기록 등 개인 정보의 수집과 취급을 다스리는 규범의 수립과 관련하여 자신과 관련된 개인정보의 생산․유통․활용․보존․공표 등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을 가질 권리
* 신체 프라이버시; 사람들의 신체적 자아를 유전자 검사, 약물 검사, 신체 수색 등 침해적인 절차로부터 보호
* 의사소통의 프라이버시; 감시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통해 자신의 사상과 견해를 형성해 나갈 수 있는 권리. 다른 자유의 기본전제가 되는 ‘권리를 위한 권리’. 우편, 전화, 이메일, 기타 형태의 통신의 안전과 프라이버시 포괄
* 영역 프라이버시; 가정, 작업장 또는 공공장소 등 기타 환경에 대한 침입을 제한하는 것

프라이버시권과 관련한 주요 발언*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오두막에서는 왕의 모든 지배력을 거부할 수 있다. 그 오두막은 빈약하고, 지붕이 흔들리고, 바람이 치고, 폭풍이 들이칠 수는 있어도 잉글랜드의 왕은 들어갈 수 없다. 왕의 모든 힘은 몰락한 집의 문지방이라도 그것을 감히 넘을 수 없다.”(영국의 캄덴경, 1765년)

* “인간을 위해 정부가 있지 그 반대는 아니다…자연권은 인간, 인간의 개성, 양심 등을 정부의 직접적, 간접적 개입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시민으로서의 인간은 기억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계속된 억압적인 법을 알아왔고 그것에 반항하여 존재해왔다…자유는 생활의 방식이어야 했다. 그것은 불가양의 것이고 정부의 침해로부터 자유로운 것이어야 했다…프라이버시는 자유의 근본이다.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자유의 대부분은 프라이버시의 권리에서 유래한다. 나의 집은 내게 있어서 나의 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프라이버시의 권리는 인간의 가옥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신념, 양심을 통하여 방해받지 않는 권리에까지 미친다.”(미국의 W.더글라스 대법관)

* 개인 정보는
공정하고 적법하게 획득돼야 한다.
원래 특정한 목적에만 사용돼야 한다.
목적에 적합하고 연관되며 목적을 초과해서는 안 된다.
정확하고 최신이어야 한다.
정보 주체에게 접근 가능해야 한다.
안전을 유지해야 한다.
목적이 완수된 이후에는 폐기돼야 한다.
(OECD 프라이버시 보호와 개인정보의 국제적 유통에 관한 지침)

* 프라이버시권은 국가당국에 의한 것이건 자연인 또는 법인에 의한 것이건 모든 간섭 및 비난으로부터 보장되어야 한다. 컴퓨터, 데이터뱅크 및 기타 장치를 통해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것은 공공기관 또는 개인, 사설단체를 불문하고 반드시 법률로써 규제되어야 한다. 모든 개인은 자신의 정보 저장 및 관리에 대해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러한 파일이 부정확한 개인 자료를 포함하거나 법률에 위반하여 수집․처리되었을 경우 모든 개인에게 수정 및 삭제를 요청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유엔자유권위원회 일반논평)



사적영역에서 프라이버시의 문제

근대민족국가의 형성은 인권의 형성과 궤를 같이 한다. 국가 권력은 사회가입의 목적이었던 자기보존이라는 근본적이고 신성한 법칙에 의해 구속되어 큰 한계를 갖는 것이며, 그 한계 너머에는 국가권력이 관여할 수 없는 인간의 ‘사적 자유’가 존재한다는 논리에서 프라이버시가 옹호됐다.

그러나 개인의 자율성의 실현과 평등이라는 자유주의 원리하의 프라이버시권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국민은 국가의 모든 행위를 감시하고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했지만 실상 근대국가는 국민에 대한 지식과 정보에 기초한 국가였고 다른 말로 하면 감시사회이며 정보사회에 터잡은 국가였다.

또한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분 속에서 프라이버시권의 수혜자는 ‘개인’이 아닌 ‘가정 또는 가족’이었다. 여기서 가정은 사적인 영역이고 공적인 노동의 영역과 대립된 은신처였다. 가정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과 함께 은신처로서의 그 의미를 강화해나갔고, 국가의 간섭으로부터 철저히 자유로워야 되는 영역으로 여겨졌다. 경쟁이나 계약, 냉엄성을 피할 수 있는 곳, 긴밀한 인간관계와 애정을 토대로 성립하는 것이 사적영역의 대명사인 가정이었다. 그러나 그 은신처는 남성의 은신처였고, 여성에게는 은신처라기보다는 노동의 장소였다. 은신처로서의 사적 가정은 성 구분을 전제한 개념이었다.

이에 특정한 이분법(이성과 감성의 구분, 남성과 여성의 구분 등)에 의한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간의 통상적 구분을 부정하는 비판이 일었다. “공론화되기에 타당한 주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어떠한 사회적 제도나 관습(가령 가정폭력, 성폭행, 가사노동의 성적 구분 등)도 공적인 토론에서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 “어떠한 개인, 어떠한 행동, 혹은 개인의 어떠한 생활의 측면도 프라이버시로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었다.

현대의 프라이버시의 문제

오늘날 우리가 미증유의 대중감시체제하에 살고 있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정보는 제한된 물리적 공간에서 뿐 아니라 무한 확장된다, 설명책임 없이 부적절하게 비밀리에 남용될 기회가 너무 많다, 국가만이 아니라 기업과 개인에 의해서도 감시와 침해가 광범하게 이뤄진다, 완벽한 복사가 가능하고 시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등등 정보화로 인한 프라이버시 침해에 대한 진단은 암울하기 그지없다.

그렇다고 정보화로 인해 프라이버시가 많이 침해되고 있고 침해될 수 있다는 어두운 진단에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기에 보다 적극적인 프라이버시권의 규정이 요구되고 있다. ‘정보 프라이버시’와 ‘역감시의 권리’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정보 프라이버시는 타인으로부터 감시당하지 않을 권리와 함께 감시당하지 않음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가나 제3자의 자신에 대한 정보수집활동과 그 이용을 감시할 권리이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통제의 권리로서 ‘역감시의 권리’는 단체나 집단 또는 개인의 식별 여부를 불문하고 생각과 활동에 대한 통제가 가해지는 모든 행위․계획․제도를 감시행위로 보고, 감시계획의 수립단계부터 참여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리보장을 추구한다.

생각해볼 문제들

#1. 프라이버시는 부자 또는 권력자의 문제, 배부른 소리?
1890년대 미국에서 ‘홀로 있을 권리(the right to be alone)’가 제기됐을 때부터 프라이버시권은 문제였다. 한편에선 황색 언론의 횡포에 대항하는 개인권으로서의 프라이버시를 역설했고 한편에선 돈 많은 상류층 인사의 대중매체에 대한 불만을 권리화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프라이버시권이란 이름으로 초상권, 명예훼손 등 부자들의 문제를 들먹거리는데 그게 특권이지 무슨 인권이냐?’는 비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프라이버시를 경제적 자산으로 보고 논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프라이버시권은 자신의 재산에 대한 권리행사의 관점에서 자신의 개인 정보에 대한 배타적인 통제권을 가질 의미가 돼버린다. 명성 있는 이름과 초상의 상업적 가치 같은 걸 인권의 이름으로 보호하는 꼴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만하다.

개인정보를 재산으로 바라보면 그 경제적 가치와 인권적 가치를 놓고 균형을 겨루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다. 흔히 사적자본과의 상업 거래에서 소비자는 개인정보를 일종의 거래비용으로 요구받고, 상품과 서비스를 얻기 위해 제공되는 소위 ‘자발적’인 것으로 오인 내지 용인될 수 있다. 사실상 자발적 동의란 없는데도 말이다.

정보소유가 권력의 차이를 극심하게 보여주는 사회 속에서 소위 재산적 관점에서 개인정보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프라이버시의 침해는 흔히 상대적으로 크고 강력한 세력에 의해 사회의 가장 작고 약한 요소, 가령 가난하고 교육수준이 낮고 소수집단의 구성원인 사람에게 가해지는 위해이다. 사회적 낙인이 은밀하게 찍히고 영구화되는 일, 어린이 등 취약자를 이용한 정보수집의 문제 등을 생각해보자.

#2. 프라이버시란 혼자 틀어박혀 있으면 되는 것?
프라이버시는 물론 외부와 단절된 개인 영역에서 간섭받지 않을 권리를 포함하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고 발전시킬 권리도 포함한다. 혼자 틀어박힐 권리는 본인의 희망사항과 달리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적인 상황은 공적인 상황 속에서 존재하며 사적인 영역을 관장하는 규범 역시 공적인 것이다”, “주권자로서의 사적 시민은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항상 유지해야 한다. 프라이버시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주권자들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저항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권력은 곧 감시의 시선 방향과도 일치한다. 시민의 감시의 시선이 국가권력을 향해야지 거꾸로 국가권력의 감시의 시선이 시민을 향해서는 안 된다.”

#3. 기술발전과 법 제정이 문제를 해결해줄 것?
프라이버시권 보호를 위해 각국은 포괄적 또는 영역별 법률을 제정하거나 기업의 자율규제를 유도하고 프라이버시 보호기술을 개발하는 등의 시도를 해왔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이런 조치들이 단지 ‘정보 보호’에 대한 환상만 만들어냈다는 비판이 넘친다.

앞서도 말했지만 솟아날 구멍으로 제기된 것은 프라이버시권이 국가권력에 대한 사회적 역감시(counter-surveillance)를 실행시킬 수 있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권리로서 재구성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정보는 ‘자기와 관련된 정보’로 확장돼야 하고, 개인정보의 ‘흐름과 유통’에 대한 통제를 넘어 정보 ‘수집과 생산’ 자체에 대한 통제로 나아가는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4. 난 숨길 것 없다. 잘못한 것이 없으면 숨길 것도 없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 할지라도 ‘정보의 훼손, 침해, 도용’ 등의 문제가 엄연히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또한 개인정보에는 고정된 정보만이 아니라 가변적인 정보도 있다. 나아가 나의 정보만이 아니라 타인의 정보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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