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07. 6. 20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연대’는 인권운동의 주요한 실천양식이자 권리로서 주창되고 있다. 누구나 ‘연대’가 중요하다고 부르짖는다. 그런데 그 연대는 무엇을 목적으로 누구와 함께 하는 것이며 어떤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되는 것인가는 모호하다. 자유, 평등, 연대는 어떻게 조화되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의 증대, 연대를 보장할 수 있는 제도의 결여 속에서 심화되는 경제의 지구화, 빈부의 극심한 격차 등으로 연대에 대한 숙고와 실천이 더욱 요구되는 때이다.

이런 숙고와 실천에 참고가 될까 하여 유럽에서의 연대사상의 역사를 다룬 책의 내용을 3차례에 걸쳐 요약 소개한다. 필자는 연대의 기초가 되는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어디까지를 연대의 대상으로 포괄하며, 개인의 자유와 연대와의 충돌을 어느 정도 고려하는지에 따라 다양한 연대 사상을 분석하고 있다.

(출처: Steinar Stjernø, Solidarity in Europe: The History of an Idea, Cambridge, 2004)


< 글 싣는 차례>


(1) '연대'의 세 가지 전통

(2)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3) '연대'의 현재의 위기

‘연대’를 연구하는 이유

19세기 초의 사회학자들은 ‘일체감’과 ‘사회적 유대’라는 전통적 감정이 근대사회를 낳는 과정에서 찢어졌다는 점을 목격하고 사회적 결집과 통합의 수단으로 연대를 생각했다. 국제노동운동은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사회적·정치적 적들에 대한 슬로건이자 무기로 만들었다. 복지국가 지지자들은 연대를 위한 투쟁의 결과이자 연대의 제도적 표현으로 복지를 바라봤다.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과 프로테스탄트 사회윤리에서는 자선보다 점차 연대가 더 중요하게 됐다. 이처럼 연대는 사회이론과 근대정치 담론의 핵심개념이며 사회정책연구에서도 중요하다.

문제는 연대의 개념이 사회이론과 정책 둘 다에서 상이한 의미를 갖고 적용된다는 것이다. 연대란 투쟁하거나 결핍상태에 있는 이들에 대한 기여로서, 또는 국가가 조직하는 세금과 재분배를 통해 타인과 자원을 공유하려는 각오로서, 또는 권리의 수립을 통해 집단적 행동을 제도화하려는 의지와 행위에 동참할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많은 가능한 정의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연대는 때때로 전혀 정의될 수 없는 불명료한 개념으로서 사용된다. ‘연대’의 사용은 현실 세계에서 연대의 현상이 사라지거나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한 정치적 수사로 위장될 수 있다. 사회이론과 정치 담론에서의 이러한 경향 때문에 다양한 견해, 정의, 함의를 해명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주의의 시대에, 연대의 사상은 위협받고 있고 방어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와 시장, 시장 이데올로기의 확산은 집단적 조정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사상들을 보다 불확실한 것으로 만든다. 서유럽의 점증하는 윤리적 다원성, 외국인 혐오의 증가, 빈부의 극심한 격차는 연대를 뜨거운 지구적 이슈로 만든다. 특히 세상에서 자신 만의 방식을 선택하고 주조할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는 연대의 전통적 가치에 도전하고 있다. 경제의 지구화는 일종의 연대를 보장할 수 있는 정치적 및 법적 제도의 결여로 우리의 관심을 쏠리게 한다. 현대 사회에서 연대의 실천에 대한 이러한 도전들은 그 자체가 연대의 개념을 더 면밀한 검토의 대상으로 삼을만한 이유이다.

‘연대’의 세가지 전통

사람들이 서로 우호와 서비스를 교환하는 것은 일상의 관행이었고, ‘내가 너를 도우면, 도움이 필요할 때 네가 나를 도울 것’이란 생각의 실천이었다. 이처럼 상호적으로 서로를 지원할 의무는 산업화이전 사회에 존재했고, 이것은 공통된 정체성과 일부사람들과의 동질감, 타인에 대한 이질감에 기초한 것이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연대의 현상은 그 사상이 형성되기 전에 존재했고 사상은 용어가 퍼지기 전에 존재했다. ‘연대’라는 용어는 그것의 근대적 의미가 발전되기 전에 일반적으로 사용됐다.

기독교의 우애(또는 형제애, fraternity) 사상은 기독교의 초기 시대에 발전됐고, 기독교도들의 공동체의 발전을 가족의 밀접한 관계와 동일시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었다. 우애 또는 형제애(fraternity or brotherhood)라는 정치사상은 프랑스 혁명 동안 발전했다. 형제애의 감정은 혁명가들 간에 평등을 깨닫는 수단이었고, 정치 공동체가 공동으로 가져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또한 프랑스는 연대라는 용어의 탄생지였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사회철학자들은 혁명의 요동 속에서 사회정치적 불안에 대해 반추했다. 동시에 그들은 자본주의의 초기 발전과 증가하는 자유주의의 영향을 목격했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프랑스 사회 철학자들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사회적 융합과 결합할 방법을 찾게 됐다. 여기서, 연대의 개념은 하나의 해결책으로 보였다.

연대의 개념은 넓고 포용적인 것이었고, 상실한 사회적 통합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했다. 맑시즘이 노동운동에 일찍이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독일에서는, 연대의 개념이 나중에 발전했고,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에서의 결집과 단결의 필요성을 표현하는데 초점을 뒀다. 여기서의 연대 사상은 오직 노동자를 언급했다는 점에서는 보다 제한적인 것이었고, 국경을 넘어선 만국의 노동자들이 포함되었다는 점에서는 보다 포괄적인 것이었다. 이 연대사상은 통합이 목적이 아니라 갈등을 내포한 것이었고 단결뿐만 아니라 불화(계급 갈등)를 내포한 것이었다. 19세기 하반기에, 가톨릭의 사회적 가르침은 연대의 제3의 전통을 불러일으켰다. 프로테스탄티즘 내에서는 연대의 사상 발전이 2차 대전 후에야 발생했다. 이처럼 고전 사회학, 사회주의 이론, 기독교 사회윤리에서 유럽의 연대 사상의 세 가지 전통이 엿보인다.

고전 사회학 이론에서의 ‘연대’

푸리에, 르루, 꽁트, 뒤르케임, 베버 등 사회학자들의 다양한 이론이 소개된다. 이 글에서 각각의 이론을 상세히 살펴볼 수는 없기에, ‘연대’ 사상에 대한 필자의 분석만을 간략히 소개한다.

다양한 사상가들간에 나타나는 연대 개념의 차이의 핵심은 사회통합과 조화에 기여하는 규범으로서 연대를 이해하느냐 아니면 특수한 집단 구성원간의 관계로서 연대를 이해하느냐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의 다양한 부분을 한데 묶는 규범과 가치가 존재하는 결과가 연대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일단의 사람들을 한데 묶는 대인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경우에 연대는 한편으론 포함하고 한편으론 배제하는 힘이다. 따라서 연대는 ‘우리’를 통합하기도 하지만 ‘우리’에 속하는 사람과 ‘그들’에 속하는 사람으로 나누기도 한다. 이때 사람들을 한데 묶는 접착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개념이 구분될 수도 있다. 이런 접착제는 자기 이익의 합리적인 추구, ‘하나’라는 정서적 감정, 윤리적 의무의 감정 또는 이들 요소의 일부 또는 전부의 혼합일 수 있다.

고전 사회이론에서의 연대 사상은 사회에서의 조화와 사회통합을 회복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연대 사상을 이해한 측면이 강했다. 자본주의의 출현과 그와 결합된 문제점들에 맞닥뜨린 이들 사상가들은 또다른 사회 폭동이나 대격변을 야기함이 없는 개량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했다. 그래서 이들의 연대 개념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요소들을 갖고 있었던 과거 사회에 대한 향수가 짙은 반면, 노동운동에서 연대의 개념을 특화시키려는 강력한 미래 지향성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우려한 점은 집단, 조직, 공동체와 사회가 부과하는 집단적 연대의 요구가 개인의 자유와의 관계에서 일으키는 딜레마이다. 개인을 집단에 통합시키는 강력한 사회적 유대가 개인주의와 충돌하리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개인의 자유가 포기돼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학자에 따라 “도덕적 개인주의”나 “인류애의 종교”라는 식으로 개인을 사회와 결속시키는 다양한 방법을 추구했지만 그것이 이기주의를 억제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는 못했다.

사회주의 정치이론에서의 ‘연대’

필자는 사회주의 이론에서 3가지로 갈라진 연대개념이 있다고 보고, 이를 고전 맑스주의, 레닌주의, 고전 사회민주주의 연대개념이라 이름 붙이고 있다.

사회주의 연대사상은 고전 사회학과는 달리 강력한 유대의 지역 공동체가 있었던 전근대 사회를 언급하지 않는다. 사회주의 연대 개념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자와 투사들의 경험을 반영한다. 연대의 중요성은 당면한 긴급성이다. 적에 의한 패배를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함께 결합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고, 바람직한 미래를 성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연대는 중요한 도구이다. 이들 개념은 연대의 기초가 무엇이냐, 연대에서의 윤리의 역할, 개인의 자유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르다. 따라서 사회주의 연대개념을 고려할 때는 이들 개념이 출현하는 분명한 담론에 한정해서 고려하는 것이 적합하다.

고전 맑스주의의 연대 개념은 노동계급의 공통된 이해에 기반해 있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유대와 관계를 파괴하는 것과 동시에 노동자를 서로에게 더 밀접하게 하는 새로운 사회조건을 창조했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 생산과정 그 자체의 메커니즘에 의해 훈련되고 통일되고 조직화된다. 노동자들은 미래에 대한 똑같은 전망에 직면하고, 이 전망은 개인적 탈출의 희망을 주지 않는다. 근대의 통신수단은 노동자간의 더 많은 접촉과 국경을 넘는 노동자 조직의 설립과 선동을 쉽게 만든다. 이런 모든 것들이 노동계급 연대의 전제조건을 창조했다. 자본가들의 경쟁과 이윤을 최대화하려는 그들의 바람은 노동자의 생활조건과 이해를 더욱더 평등하게 만든다. 상이한 유형의 노동간의 차이는 제거되고 임금은 똑같이 낮은 수준으로 줄어든다. 연대는 이처럼 높은 수준의 동질성을 가진 사회구조로부터 발생한다.

맑스는 갈등하는 계급 이해를 벗어난 정서적 순화라는 이유로 형제애의 개념을 조롱한다. 그는 연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며 ‘공동체, 결사, 단결’ 등을 주로 사용한다. 1848년의 공산당 선언에서는 형제애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그 유명하고 간결한 구호가 등장한다.

맑스는 두 개의 상이한 연대사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계급의 연대로 알려진 것이다. 이를 주로 ‘단결’의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공동체는 진짜일 수가 없으며, 노동계급의 일상의 투쟁 그 자체로는 진정한 공동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집단의 타 집단에 의한 착취가 특징인 사회에선 사회적 연대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고, 연대는 구체적인 경제적 및 사회적 구조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자본주의를 넘어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연대인데, 이것은 ‘이상적 연대’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개인들의 진정한 공동체는 생산수단의 사적소유가 철폐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개인들로서 자유롭게 한 데 결합할 때에만 진정한 개인들의 공동체가 출현할 수 있다.

레닌주의 연대 개념의 기초는 고전 맑스주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집단에 대한 강조는 매우 강력하며 부르주아 사회에서의 개인의 자유는 아주 경멸적인 이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개인의 자유는 사유재산을 구체화하기 위해 고립된 개인주의자가 가지는 자유이고, 타인에게 적대적인 자유이기에, 자본주의에서 연대사상과 상호의존성은 쓸데없는 ‘규범적 사상’이 된다. 진정한 연대와 진정한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

고전 사민주의 연대 개념의 대표적인 것은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의 연대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경제위기와 후퇴를 견뎌냈고 자본주의의 일촉즉발의 붕괴 전망은 전혀 없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사망을 더 기다릴 수 없으며 구체적인 개혁정책을 개발해야 하고, 의회에서 새로운 다수를 수립하기 위해 여타 계급 및 집단과 동맹을 추구해야 한다. 사회주의는 장기간의 목적이기 때문에, 개인의 자유는 레닌주의가 주장한 것처럼 일시적으로 희생될 수는 없다.

사민주의 윤리는 평등의 사상, 공동체의 사상 또는 연대, 자유 또는 자율성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며 이들은 서로에 대해 균형을 이뤄야만 한다. 동료노동자와 단결함으로써 노동조합에 노동자의 힘을 모음으로써 노동자들이 고용주에 대한 의존성을 자발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할 때, 연대는 발전된다. 이런 자발적 행동이 윤리적 헌신의 표현이다. 한 데 속한다는 감정은 강화되고 잘 발전된 연대에 대한 이해로 성장한다. 이런 연대는 노동운동 내에서 가장 강력한 지적 요인이 된다. 연대의 감정은 다른 어떤 집단에서보다 노동운동에서 더 강력하며, 노동운동에서 연대의 실천을 필요로 하는 식견보다 더 응집력 있는 원칙이나 사상이란 없다. 사회법의 어떤 규범이나 원칙도 연대 사상의 구속력에 비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연대는 고전적 맑스주의와 달리 노동계급만이 아닌 여타 계급과 집단의 이해를 포함한다. 이들 계급과 집단간의 차이를 수용하며 포함된 사람들 간에 공동체의 감정을 창조해야 한다. 개인의 자유가 높이 평가되기 때문에 집단에 대한 강조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종교에서의 '연대‘

종교는 국민이나 계급이 존재하기 훨씬 전에 사람들간의 유대였다. 계급 연대의 사상이 발전되자, 이 발전은 기존의 종교에 대한 충성심과 갈등하게 됐다. 가톨릭의 연대 개념은 두 개의 상이한 관심에서 나왔다. 산업사회에서의 사회통합에 대한 염려, 그리고 1950년대에 시작하여 1961년에 교황 회칙에 개념이 도입된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이다. 루터주의와 일반적인 프로테스탄트는 연대의 사상을 3세계의 상황에 대한 우려와 연관시켰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사회윤리에서의 연대 사상은 다른 곳에서의 발전보다 뒤쳐졌다. 그 이유에 대한 한 가지 가설은 연대의 개념이 노동운동과 밀접하고 계급투쟁 사상과 결합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온정주의적인 종교의 태도는 계급 갈등이나 계급투쟁이 아닌 사회적 자선이나 협력,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강조했다. 다른 한편으론 3세계에서의 교회의 급진화에 제동을 걸려고 노력했다. 따라서 종교가 연대 개념을 최종적으로 채택할 때는 서유럽의 크고 영향력 있는 정당 대부분에서 그 개념이 더 광의의 보다 이타적인 개념으로 변형됐을 때라고 본다.

오늘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연대 사상의 차이는 여전히 몇 가지 구분되기는 하지만 별반 크지 않다. 연대 사상의 기초는 같다. 인간은 신의 이미지로 창조됐고, 모든 인간은 신의 눈으로 볼 때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웃사랑에 대한 요구와 타인에 대한 기독교인의 섬김의 의무는 연대를 표현하는 공통된 기초이다. 프로테스탄트는 다른 인간에 대한 섬김을 기독교인의 의무로 자주 언급한다. 가톨릭의 개념은 사회통합과 조화에 더 중요성을 부과한다. 가톨릭의 개념은 계급의 경계, 부자와 빈민, 부국과 빈국간을 초월한 연대의 표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회통합의 강조로부터 가톨릭의 연대 사상은 논리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종류의 것이 된다. 계급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 모든 사회적 및 경제적 경계와 구분을 초월하는 모든 계급의 인민을 포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주와 피고용인, 노동자와 중산층, 여성과 남성을 협력과 상호이해가 지배하는 공동체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가톨릭의 연대는 맑스주의와 사민주의 개념과는 분명히 구분된다.

집단적 지향성은 맑스주의와 사민주의 개념보다 약하다. 집단적 성격은 개인에 대한 강조와 세심하게 균형을 이룬다. 가톨릭의 인격주의(personalism)는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사람이 된다는 생각으로, 개인과 사회간의 관계를 논점으로 만들며, 연대의 집단적 성격을 줄인다. 또한 국가에는 필수적이지만 ‘보조적’인 역할을 요구하며 자원조직의 활동을 강조한다. 국가가 직접 나서지 말고 자원조직의 활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연대에 관한 모든 개념은 두가지 필수적인 가치를 지적하고 있다. 개인은 어느 정도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해야하고, 개인과 (적어도 일부의) 타인 간에는 공동체의 감정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시의 힘과 포괄성의 정도는 매우 다르며, 사상의 기초, 추구하는 목적, 집단적 지향성의 정도에서도 차이가 있다.

이제 서유럽의 다양한 정치 정당에서의 연대 개념의 발전을 연구하기 위해 정치의 세계로 들어갈 차례다. 어떻게, 언제, 왜 이들 연대 사상이 사민당과 기독교 민주당의 제도화된 이데올로기에 반영되었나? [류은숙] <2007년 6월 20일 인권오름 제59호>

이어질 내용:
서유럽 정치에서의 연대 사상

‘연대’의 현재의 위기

작성일자 : 2007. 5. 23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국제인권무대에서 널리 활약한 프랑스 법학자 카렐 바삭은 1977년 세계인권선언 30주년 기념연설에서 국제인권의 발전을 요약하며 3세대 인권을 언급했다. 즉, 1세대 인권은 자유의 가치를, 2세대 인권은 평등을 강조한다면 3세대 인권은 우애에 초점을 두며, ‘연대에 대한 권리’라는 특유한 표현을 쓸 수 있다. 카렐 바삭은 3세대 인권으로 발전권, 평화권, 환경권, 인류의 공동유산에 대한 소유권, 커뮤니케이션의 권리를 언급했다. 혹자는 여기에 인도주의적 원조와 재난 구조를 받을 권리, 민족 자결권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이에 대해 ‘연대권은 구체적 의미가 없고 구체적 의무도 없다’, ‘따라서 평화권 같은 건 없다’, ‘1·2세대 인권과 달리 3세대 인권은 어떤 법적 조약으로도 공식화된 바 없다’, ‘평화권은 오직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며 인권실현의 수단이나 과정을 권리 자체와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반론이 거세다.

오늘 살펴볼 『평화에 대한 인권』(출처: Douglas Roche, The Human Right to Peace, 2003, Novalis)은 이런 비판에 대한 답으로 평화권을 “인류의 신성한 권리”라고 주장한다. 필자는 수세기 동안 국제법과 국제관계의 주요 목적으로 일컬어진 것이 평화임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국제무력분쟁과 그로 인한 엄청난 규모의 사망, 파괴, 고통은 현세기에 발생한 것만으로도 정당한 평화를 성취하고 유지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음을 증명한다. 하지만 목표와 현실간의 엄청난 격차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 격차 때문에 국제사회는 평화에 대한 인권이 존재한다고 엄숙하게 선언해왔다. 평화권은 2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건설적인 평화 관련 노력의 구현이 이론적 용어로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권을 위한 국제적 노력

필자는 평화권에 대한 국제사회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

‧ 기본 규정: 유엔헌장 전문 및 1조, 55조, 세계인권선언 28조
‧ 1978년 유엔총회: 평화로운 삶을 위한 사회 준비에 관한 선언 - 국내 및 국제 정책이 평화로운 삶의 성취를 지향할 것. 특히 젊은 세대에 관하여 그리할 것을 강조.
‧ 1981년 아프리카 인간과 인민의 권리에 관한 헌장 - 모든 인류는 국가적 및 국제적 평화와 안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 1984년 유엔총회: 평화에 대한 인류의 권리선언 - 우리 지구상의 인류에게 평화에 대한 신성한 권리가 있음을 엄숙히 선언한다. 평화권의 행사는 전쟁위협의 제거를 요구한다. 평화권은 여타 인권의 전제조건이다. 인권‧발전‧평화는 서로 고립해서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이다. 평화 없는 인권은 환상이다.
‧ 1997년 유네스코 사무총장: 평화에 대한 인권 선언 - 갈등의 근본원인, 즉 구조적 원인에 초점을 맞추고 조기단계에서 진화에 나설 때 분쟁을 피할 수 있다. 전쟁의 문화로부터 평화의 문화로의 변화가 우선 필요하다. 국제사회는 전쟁비용과 평화 비용 두 개에 동시적으로 몰두할 수는 없다. 이 선언과 기존 선언의 차이점은 평화권을 인권의 전제조건으로 확인했을 뿐 아니라 성취를 위한 전략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선언이 요구하는 두 개의 전략은 1) 빈곤, 환경파괴, 국제정의 등과 같은 긴급한 문제에 대해 즉각적인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2) 평화와 정의의 가치를 이해하고 타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배양하기 위한 대대적인 교육 운동이다.
‧ 1997년 오슬로 기초 선언 - 평화권을 세 개의 연관된 요소로 나누었다.
1) 인권으로서의 평화: 모든 인간은 인간성에 내재된 평화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어떤 종류의 전쟁과 폭력도 평화에 대한 인권과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2) 의무로서의 평화: 모든 지구의 행위자들은 평화의 유지와 건설에 기여할 의무, 무력분쟁 방지와 폭력 예방의 의무를 갖는다.
3) 평화의 문화: 평화권이 성취될 수 있는 수단으로서 평화의 문화, 교육, 대화, 윤리적 및 민주적 이상을 통해 인류의 마음에 평화의 뿌리를 추구하는 전략
‧ 2003년 유엔총회: 무력분쟁 방지에 대한 결의안 채택

실천의 장애물

위에서 열거된 국제사회의 노력에는 큰 장애물이 있다. 필자는 주요 강대국들의 지지 부족과 저지를 지적한다. 그런 사례는 아주 많다.

1984년 유엔의 ‘평화에 대한 인류의 권리선언’은 핵전쟁의 위협 제거를 언급했다는 이유로 서구 국가들이 다수 기권(34표 기권)하여 빛을 잃었다. 1997년의 유네스코 사무총장의 평화권 제안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이 월권을 했다고 비난하며 평화권에 대한 공격과 기권표시로 대응했다. 이에 대해 남반구 국가들은 무기 산업을 보호하길 원하는 북반구 국가들을 비판했다. 결국 합의 도달에 실패했고 평화권에 대한 회의주의는 계속됐다. 1999년 ‘평화의 문화를 위한 행동 프로그램’에 관한 비공식 유엔 토론에서 미국 대표는 “평화는 인권의 범주로 고양돼선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시작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 발언했다. 2002년 평화권의 증진을 요구하는 결의안은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과 나토(NATO)의 동유럽 신규 가입국들의 압도적인 반대표(50표)로 작동할 수 없었다. 평화권을 인권 무대가 아닌 국제관계의 다른 영역에서 다뤄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인도의 전 대법관(P.N.Bhagwati)은 평화권의 주요기능을 “평화적 분쟁해결을 통해, 국제관계에서의 폭력 사용 또는 위협의 금지를 통해, 핵무기의 제조·사용·배치의 금지를 통해, 그리고 전면적 군축을 통해 생명권을 증진하고 보장하는 것”이라 했다. 이 말에 담긴 하나하나의 요소, 즉 군축, 핵무기의 금지 등이 거센 반발을 사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문화

오늘날 98개국의 1천여 기업이 전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6억3천9백만여 소형무기를 생산하고 있다. 불법 무기 교역은 이 숫자를 넘는다. 최대 무기 거래상은 미국, 러시아,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즉 세계의 강대국들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필자는 군산복합체의 탐욕 등 여러 배경 요인들 중에서 ‘전쟁의 문화’의 지배를 우선으로 꼽는다.

필자는 군국주의의 동의어로 ‘전쟁의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갈등 해결에서 군사적 가치가 고양되는 것이다. 그 결과 공격적인 군비태세와 군부의 지배적인 정치적 지위가 초래된다. 전쟁과 대량 폭력은 고의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의 결과이며, 전쟁은 적을 필요로 한다. 또한 전쟁은 군비와 군인, 정보의 통제를 요구한다. 이것은 환경파괴, 빈곤, 민주주의와 인권의 파괴를 야기한다.

전쟁의 문화의 심연에 자리한 생각은 폭력의 뿌리가 인간 본성의 타고난 부분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인간은 언제나 전쟁을 해야 하고, 기껏 잘해봤자 최악의 폭력 발산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이 논리를 부정하며 인간은 유전적으로 전쟁을 위해 프로그램화되어 있지도 않고, 인간의 본성에 폭력을 양산하는 타고난 생물학적 요소 같은 건 전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결국 전쟁을 만들어낸 종(인류)은 평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역설한다.

평화의 문화

평화의 문화란 “생명, 자유, 정의, 연대, 관용, 인권, 그리고 남녀의 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들에 기반한 문화”를 말한다. 이 목록을 더 풀어서 얘기하면 다음과 같다.

· 생명, 존엄성, 인권에 대한 존중
· 폭력의 거부
· 남녀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
· 민주주의, 자유, 정의, 연대, 관용의 원칙을 지지하고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
· 인종·종교·문화·사회 집단과 국가들 간의 상호소통과 이해

전쟁의 문화와 평화의 문화는 다음과 같이 대조된다.

전쟁의 문화 ;
· 적의 이미지
· 군비증강과 군대
· 권위주의적 지배
· 비밀주의와 선전
· (구조적·물리적) 폭력
· 남성의 지배
· 전쟁을 위한 교육
· 약자착취, 환경착취

평화의 문화 ;
· 이해, 관용, 연대
· 군축
· 보편적이고 완전한 민주적 참여
· 정보와 지식의 자유로운 흐름
· 모든 인권에 대한 존중
· 여성과 남성간의 평등
· 평화의 문화를 위한 교육
· 지속가능한 경제·사회적 발전

평화의 문화는 전쟁과 폭력을 향한 문화적 경향을 대화, 존중, 공정함이 지배하는 사회적 관계로 바꾸는 것이다. 평화의 문화는 이러한 삶의 태도와 방식을 배양하기 위하여 교육을 필수적인 도구로 사용한다. 그 교육의 내용을 이루는 대표적인 예는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2000년에 기초한 평화의 문화 건설을 위한 실천행동에 관한 선언이다.

‧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 차별이나 편견 없이 각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을 존중
‧ 폭력의 거부: 적극적인 비폭력 실천,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거부, 특히 가장 착취당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향한 폭력, 아동과 청소년을 향한 폭력을 포함하여 신체적·성적·심리적·경제적·사회적 폭력 및 모든 형태의 폭력에 대한 거부
‧ 타인과의 공유: 배제, 불의, 정치·경제적 억압을 끝내기 위하여 아낌없는 정신으로 내 시간과 물적 자원을 공유하기
‧ 이해하기 위해 귀 기울이기: 표현의 자유와 문화적 다양성의 사수, 언제나 대화를 우선시하고 광신, 비방, 타인에 대한 배제에 빠지지 않고 귀 기울이기
‧ 지구의 보존: 책임성 있는 소비자의 태도 증진, 모든 형태의 생명을 존중하고 지구상의 자연 균형을 보존하는 발전의 실천
‧ 연대를 재발견하기: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함께 창조하기 위하여 여성의 완전한 참여와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존중과 더불어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하기

이러한 평화의 문화 실현은 매일 매일의 헌신을 요구한다. 우리가 이런 책임성을 움켜쥘 때, 평화에 대한 인권은 보장될 것이다. [류은숙] <2007년 5월 23일 인권오름 제55호>

작성일자 : 2007. 4. 26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소위 3세대 인권 또는 연대권이라 불리는 권리에는 ‘환경권’이 속한다.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직면하여 환경에 대한 관심과 불안이 커가는 지금, ‘환경권’은 당연한 인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환경권’에 대한 선호와 열망은 당연할지 모르나 ‘환경권’에 대한 정의나 기준은 당연하다고 할 수 없다.

인권과 환경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 위해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의 접근을 다룬 시각들을 살펴본다.(출처 Alan Boyle 외, Human Rights Approaches to Environmental Protection, 1997, Oxford)

인권과 환경간의 긴장

환경운동과 인권운동 간에는 긴장이 있다. 환경운동은 다른 종이나 생태계보다 인간을 우위에 놓는다는 이유로 인권에 대한 불신을 가질 수 있다. 만약에 기존에 인권으로 인정된 권리들, 가령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이 ‘절제’된 수준이 아닌 ‘부’를 추구하는 속에서 세계인구의 다수에게 실현된다면 그 결과는 자연자원의 급속한 고갈일 것이다. 따라서 늘어나는 인구를 위해 인권을 실현하는 것과 한정된 환경자원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것 간에는 구조적인 모순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인권운동은 생태계, 유한한 자연자원, 미래 세대의 기본적 필요를 보호하려는 환경운동의 추구가 때로는 긴급하고 절실한 인간의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다. 흔히 인권과 환경의 상호의존성, 불가분성을 원칙으로 내세우지만, 이런 원칙의 주장은 현실에서 직면하는 어려운 문제를 일시적으로 가리려는 도덕적 위안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환경문제를 인권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성과 장점이 있는가? 아니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 환경권을 운운하는 것인가?

환경에 대한 인권은 필요한가?

먼저 검토돼야 할 전제가 있다. 첫째, 뭔가를 선호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즉 깨끗한 환경을 원하는 것과 그것에 대한 도덕적 또는 법적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둘째, 권리로 말하는 것을 도덕과 동의어로 취급하는 것도 문제다. 권리 언어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어떤 행동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은 가능하다. 깨끗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단지 우리가 원하는 것이고, 그것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다 할지라도 그러한 추구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일 수 있다. 즉 깨끗한 환경, 건강한 환경 내지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추구가 ‘권’의 접근방식을 취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 대한 입장이 대립될 때, 우리가 선호하는 것이 권리로서 인정받는다면 그 균형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상호 선호하는 것이 대립할 때, 어느 한쪽도 힘으로 바라는 바를 강요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서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반면에 어떤 선호가 권리와 대립할 때, 그 권리의 소유자는 결정적으로 중요한 카드를 쥐게 된다.

권리와 도덕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권리는 도덕의 전체는 아니지만 그 일부이다. 우리가 깨끗한 환경에 대한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고 하면 환경정책의 도덕적 성격에 관한 어떤 논의에서도 우리의 그 권리는 고려돼야만 한다. 이 권리는 기타의 선호되는 것들이나 비도덕적 고려들보다 먼저 고려돼야 한다. 도덕적 권리로 유력한 것은 법적 권리가 되기에도 아주 유력하다. 따라서 헌법이나 국제인권법에 규정된 환경권을 갖는다는 것이 이 권리와 관련된 모든 논쟁에서 권리소유자가 승리할 것을 보장하지는 않더라도 확실히 그 권리가 고려될 뿐 아니라 그 권리를 부인하기 위해서 상당한 이유가 요구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권리는 도덕적 및 법적 주장에서 다른 개념을 이용해서는 할 수 없는 특별한 자리를 갖는다.

기존의 인권을 동원

인권개념이 환경보호에 유효하다고 할지라도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대한 논의는 분분하다.

그 중 하나는 기존에 확립된 인권을 동원하는 접근이다. 기존의 국제인권법이나 국가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인권규범이 실현된다면 충분하다는 시각이다. 새로운 환경권을 만드는 것은 잘해봤자 과잉이고, 잘못하면 비생산적이라는 입장으로, 새로운 기준을 만드는데 힘을 들이기보다는 기존 인권기준의 효과적인 이행을 위한 운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존의 인권에는 우선 시민·정치적 권리가 있다.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데 이 권리의 중요성이 있다. 생명권, 결사권, 표현의 자유, 정치적 참여의 권리, 평등,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등의 실현은 환경파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가능하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 심각한 환경 파괴에는 인권 및 환경 옹호자들에 대한 억압과 정보접근권에 대한 거부가 동반된다. 억압과 공포에 의한 재갈 물리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민·정치적 권리는 참여의 보장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인간 복지의 기준을 통해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다. 건강권, 존엄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등은 직접적으로 환경에 관한 조건을 담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건강권은 해로운 환경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가에 조치를 취할 의무를 요구한다.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구상된 정책은 또한 그 결과로서 여타의 식물군, 동물군 및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다. 방사성물질에 대한 노출로부터 인간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비인간 종을 더불어 보호하는 것이 그 예다. 또 다른 예로 교육권은 환경인식의 향상이나 취약집단이 생태적 파괴와 싸우기 위해 필요한 정치 투쟁에 필요한 기술무장에 기여한다. 또한 문화권의 침해가 환경파괴를 동반할 수 있다. 문화 활동에 참여할 권리가 적절하게 보호된다면 그런 문화가 기반하고 있는 물리적 환경도 보호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존의 권리체계는 다소 협소하게 환경권을 구성하며, 환경문제에 단지 간접적으로만 접근하고 있다.

기존 인권을 재해석

기존권리를 단순 동원하는 것으로는 환경적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입장도 있다. 기존의 인권이 처음 만들어지던 시기에는 환경문제가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권리를 상상력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등권은 환경에 대한 동등한 접근과 보호의 권리를 포함해야 한다. 환경파괴에 대한 노출의 불평등성은 정치경제적 불평등의 결과이다. 부와 빈곤은 상이한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때로 ‘부’의 문제만이 국가정책에서 다뤄진다. 평등권은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표현의 자유는 환경피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낼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명권은 건강한 환경, 오염 없는 환경, 생태적 균형이 국가에 의해 보장되는 환경에서 살 권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재해석돼야 한다.

환경보호에 대한 새로운 인권이 필요

그러나 기존의 인권기준은 긴급한 환경적 과제에는 모호하고 불편한 도구이기 때문에 환경과 직접 연관되는 포괄적인 규범이 요구된다는 입장도 있다. 이런 접근에는 두 가지 입장이 갈린다. 새로운 환경권이 바람직하다 할지라도 주로 절차적 성격에 초점을 두느냐, 실체적 권리의 내용에 초점을 두느냐이다.

절차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실질적인 절차가 수천개의 비현실적인 원칙의 선언보다 가치가 있다고 본다. 환경권과 관련 있는 절차적 권리의 범주에는 환경 위험에 대해 사전에 알 권리를 포함하는 정보에 대한 권리, 환경문제에 관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리, 환경영향평가에 대한 권리, 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 공익소송을 용이하게 하는 제소권의 확대 등이 포함된다.

절차적 또는 참여적 접근은 환경보호를 본질적으로 민주주의와 정보에 입각한 논쟁을 통해 보장하자는 것이다. 민주적 의사결정이 환경적으로 우호적인 정책을 이끈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 근거는 환경에 대한 의사결정자와 그 결정의 대가를 지불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일치한다면 환경보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바람직한 환경의 질은 법률 용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가치 판단이 요구되기 때문에 실체적 권리 규정보다는 사람들이 개방적이고 철저한 논쟁을 할 수 있는 절차적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본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를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절차적 권리에 대해 회의적이다. 절차적 권리가 완전히 실현된다 할지라도, 그에 부응하는 정치조직은 장기간의 환경보호보다는 단기간의 부를 추구하기 쉽다. 민주주의는 전적으로 환경파괴를 할 수도 있고 구조적으로 자유로운 소비를 하기 쉽다. 북반구의 자유주의적 권리에 기반한 체제는 환경파괴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절차만으로는 환경보호를 보장할 수 없다. 반면에 실체적 권리는 환경문제에 대한 지지를 정의하고 동원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또한 쉬운 것은 아니다. 환경권을 정의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환경과 관련된 기존의 헌법과 법률에 대한 조사에서는 ‘깨끗한’, “건강한”, “존엄한”, “생존가능한”, “만족할만한”, “생태적으로 균형잡힌”, “지속가능한”, “오염이 없는”, “인간의 발전에 적합한” 등 다양한 형용사가 환경에 덧붙여 있다. 환경보호가 인간의 건강과 생존을 보호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태계의 모든 종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고 그 지속가능성을 보호하는가, 좋은 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등 쉽사리 법적 용어로 옮겨질 수 없는 차원의 문제들이 정의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혼란에서 벗어나오는 한 가지 방법은 특정 맥락 속에서 무엇이 정확하게 권리의 침해를 구성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사법상의 의무와 관련되는 것으로 사회적 행위자들이 정확한 의무를 예상할 수 있도록 하는 한에서는 상세한 문맥상의 정의가 도움이 된다. 여기에는 오염자 지불 원칙, 예방 원칙, 환경영향평가, 토지개발의 용도와 명백히 관련된 환경권 등이 포함된다.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의 문제

어떤 인권이든 본질적으로 지구 생태계의 여타의 종을 배제하고 인간에 초점을 맞춘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아무리 환경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크게 품고 있다 할지라도, 여전히 기본은 ‘인’권이며, 인간이 아닌 종 또는 자연자원에 부여된 권리와는 매우 다르다. 인간의 복지를 보존하고 배양하는데 필수적인 환경보호의 요소들을 포함하기 위해 생명권을 확대한다고 할 때, 자연환경의 구성요소들은 분명히 인간의 목적을 위해 도구적 수단으로 다뤄지고 있다.

그러나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이 본질적으로 도구적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환경인식을 강화하는 것이 인간의 복지에 초점을 둘 수는 있지만 또한 비인간 종에 대한 관심과 더 깊은 생태계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될 수도 있다. 따라서 타 생물종의 본질적인 가치를 보호할 목적으로 인권을 행사하는 것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비도구적 방식으로 환경권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인간중심적인 권리의 성격을 없앨 수는 없다 할지라도 줄일 수는 있다. 인권의 인간중심주의는 이분법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degree)의 문제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의 복지에 기초한 권리 제안보다는 ‘생태적 균형’(ecological balance)을 위한 권리 제안이 덜 인간중심적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인간중심주의는 인권체계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일 수밖에 없다. 동물권, 나아가 식물의 권리, 생태과정에까지 권리를 부여한다고 할 때 결정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인간이 권리를 동물이나 산에게 부여한다고 동의한다 할지라도, 그런 권리 인정의 행위는 여전히 인간이 인식하고 집행하는 것이고, 권리는 오직 인간에 의해 이행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법률 시스템에 불가피하게 동반되는 구조적인 인간중심주의가 있다.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대는 중요하기는 하지만 주로 이론의 영역에서만 작동한다. 정책적 고려에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모든 종을 위해 지구적 환경보호를 강화해야할 실제적 문제를 견뎌낼 수 있을까? 권리를 자연세계에까지 확대하자는 주장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 모든 생물체의 본질적 가치를 실제적으로 보호하는 데 적절한지는 명확하지 않다. 인권을 해석하고 행사하는데 있어서 생태계의 본질적 가치를 고려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로부터 인간이 아닌 모든 생물과 생태계의 고유한 가치에 대한 인식의 전환에 기초할 때 인권적 접근은 인간중심주의적 접근법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인권적 접근의 손실

환경보호에 대한 인권적 접근의 유용성을 앞서 살펴봤다면 이에 대한 우려와 반론도 다양하다. 몇가지 주장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현재의 권리 용어와 체계는 환경문제의 바탕이 되는 정치경제적 문제와 관계를 다룰 수 없다는 지적이 있다. 여기에는 기술적 선택, 생산양식, 사회적 생산물의 배분양식 등이 포함되는데 현재의 권리라는 것은 단지 이것들의 증상을 겨냥하는 권리일 뿐으로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깨끗한 마실 물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설사약을 처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환경권의 주창이 단지 상징적인 몸짓 이상의 것이 아니라면, 또는 단지 환경에 대한 책임의식을 심어주는 완화제 수준이라면 환경파괴는 크게 줄지 않으면서 사실상 환경파괴의 구조적 원인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게 만들 수 있다. 환경파괴를 야기하는 사회경제적 힘에 직접적으로 맞닥뜨리지 않으면서 환경피해에 반대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거의 효력이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단순한 권리 용어로서 복잡하고 기술적인 환경운영의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있다. 환경보호에는 의사결정과정에서나 그 이행에서나 고도로 기술적인 설명과 평가가 요구되는데 이런 문제를 단순한 권리의 언어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국제인권법보다는 환경법들이 더 적절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권리의 오용 가능성도 크다. 권리, 특히 절차적 권리는 부유한 집단이나 겉치레 환경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특권적인 생활의 질을 보호하기 위해 이용하기 쉽다. 이로 인해 미래의 환경비용을 현재 불리하고 취약한 집단에 떠넘길 수 있고, 이런 취약한 집단과 공동체가 오히려 빈곤이나 제도적 장치의 부족으로 절차적 권리에 접근하기 어렵다.

유엔의 인권과 환경에 대한 소위원회에서는 1994년 인권과 환경간의 관계를 탐색하면서 인권과 환경에 관한 원칙의 채택을 제안했다. 그 제일 원칙은 인권, 생태적으로 건전한 환경, 지속가능한 발전과 평화는 상호의존하며 불가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인권과 환경의 관계는 여타의 고려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으뜸이라고 주장해서 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을 어떻게 정의하며 실천해 가느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류은숙] <2007년 4월 25일 인권오름 제51호>

작성일자 : 2007. 3. 30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경제·사회적 권리는 국내법보다 국제인권법에서 더 강력하게 주창돼왔다. 하지만 이들 권리의 구체적인 이행이 이뤄져야 할 곳은 국내이고 국내법으로 보장돼야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다. 이 논문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다양한 국가 사례를 통해 국내법 체계에서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호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출처: A.Eide et al.(eds.),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55-84, Kluwer Law International, 2001) [류은숙] <2007년 3월 28일 인권오름 제47호>

1. 헌법 조항을 통한 보호

한 국가의 헌법은 일반적으로 최고 법으로 간주된다. 헌법에 권리장전이나 기본적 권리에 관한 장을 두는 것은 인권 보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따라서 재판 가능한 권리로서 일련의 인권이 헌법에 보장되는 것은 중요하다.

1) 직접보호

개인이나 집단이 경제·사회적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헌법조항을 원용하여 재판을 할 수 있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는 헌법연구에서 여전히 새로운 것으로 간주된다. 전통적인 자유주의적 개념에서 헌법의 권리장전은 국가 권력의 자의적이고 과도한 적용으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에 경제·사회적 권리는 국가의 사회경제적 자원과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을 보장하기 위한 광범위하고 적극적인 국가 행위를 요구한다. 그래서 경제·사회적 권리를 헌법의 권리장전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반대의견이 많다. 그 이유로는 사회정책이나 예산할당과 관련된 행정부 고유의 권한에 사법부가 개입하게 됨으로써 권력분립 원칙을 저해한다는 것, 복잡한 사회적 선택과 관련된 사회경제정책이나 예산할당에 관하여 사법부가 판단할 능력은 없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권력분립에 대한 경직되고 형식적인 개념을 보여줄 뿐이다. 예를 들어 참정권, 표현의 자유, 공정한 재판에 대한 권리 같은 시민·정치적 권리들도 사회정책이나 예산할당과 관련된다. 1996년 남아공 헌법재판소는 ‘권리장전에 사회·경제적 권리가 포함되는 것이 권력분립으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바 있고, 유엔사회권위원회는 일반논평 9에서 “경제·사회적 권리가 법원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엄격하게 분류, 채택하는 것은 자의적인 것이고, 두 종류의 인권이 나뉠 수 없고 상호의존한다는 원칙에 위배”될 뿐더러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소외된 집단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원의 권한을 현저히 축소시키게 될 것”이라 했다.

입법·행정·사법부 간에는 ‘헌법에 대한 대화’가 지속적으로 있어야 하며, 이런 상호작용을 통해 다양한 상황에서 각각의 역할과 권한을 재정의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권력분립의 원래의 목적은 권력집중을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런 맥락에서 사법부는 경제·사회적 권리의 이행을 위한 역할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법원은 권리증진을 위해 가장 적합한 방법을 선택하려는 입법부의 선택을 존중하는 동시에 그런 입법을 자극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법원은 경제·사회적 권리에 대한 헌법적 보장의 견지에서 입법부와 행정부에게 정책 선택의 합리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부담을 지우는 한편, 정당성을 증명하지 못할 경우 헌법적으로 수용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 확인하는 선언적 판결을 할 수 있다. 경제·사회적 권리가 시민·정치적 권리에 비해 규범적 내용이 덜 발전됐다는 사실은 권리의 원래 성격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법원의 판결절차에서 배제돼온 역사 때문이다. 오랜 세월 권리의 내용은 구체적인 사건의 맥락 속에서 지속적인 사법적 해석을 통해 발전돼왔다. 경제·사회적 권리 내용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발전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예산 관련 함의를 갖는 상당히 넓은 분야들에 이미 법원이 관련을 맺어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남아공 헌법을 비롯하여 많은 헌법은 적어도 한두 개의 사법심사가능한 경제·사회적 권리를 기본적 권리에 관한 장에 포함시키고 있다. 가장 공통된 예는 교육의 권리이다. 남아공 헌법에 대해 좀더 상세히 살펴보면 경제·사회적 권리가 세 가지 유형으로 헌법에 포함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자원의 제약에 상관없이 보장해야 하는 권리들로 아동의 사회·경제적 권리, 기초 교육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 구금자의 권리이다. 두 번째 유형은 가용자원의 한계 내에서 점진적으로 성취해야 할 권리로서 적절한 주거, 건강보호, 식량, 물, 사회보장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이다. 세 번째 유형은 국가뿐만 아니라 사인에게도 해당되는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규정이다. 여기에는 ‘모든 관련 상황을 검토한 후에 법원이 내린 명령이 없이’ 이뤄지는 강제퇴거, 긴급 의료 조치에 대한 거부가 포함된다.

이에 따르면 모든 경제·사회적 권리에 내재된 ‘금지된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 법원이 시행할 수 있는 것이다. 자의적인 강제퇴거와 부당한 사회복지 급여의 종결이 이에 해당된다. 또한 ‘기본적’ 권리의 범주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적극적 의무를 강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아공 헌법재판소는 기초교육에 대한 권리는 ‘그러한 교육권을 추구하는 속에서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는 단지 소극적인 권리가 아니라 기초교육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돼야 한다는 적극적 권리를 창조’한다고 확인했다. 또 다른 예로 남아공 고등법원은 교정당국에 HIV 양성반응자에게 규정된 백신바이러스를 투약하도록 지시하면서 국가 비용으로 ‘적절한 의료적 치료’를 제공받을 수인의 권리를 이행할 것을 명령했다. 마지막으로 가용자원의 한계 내에서 점진적 실현의 의무도 사법적 통제의 범위에 속할 수 있다. 역행하는 조치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정당성을 정부로 하여금 증명하도록 하는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포르투갈 헌법재판소는 보건부 설립과 관련된 법률의 개폐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헌법에 보장된 건강권 조항에 반한다는 것이었다.

2) 간접보호

시민·정치적 권리 조항의 적용이나 해석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평등’과 ‘공정한 절차’에 대한 규정을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캐나다 헌법은 경제·사회적 권리를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차별 없이 법 앞에 평등한 보호를 받을 규정’을 적용하여 사회복지급여에 대해 다룰 수 있었다.

또한 ‘생명권’이나 ‘개인의 안전’ 같은 특정한 시민·정치적 권리의 의미를 확대해석함으로써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도의 대법원은 ‘생명을 빼앗기지 않을 권리’(인도헌법 21조)에 적절한 영양, 의복, 주거 등 생활의 기본적 필수품을 담은 ‘생계에 대한 권리’가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이런 해석이 국가가 적극적으로 생계수단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법으로 수립된 정당하고 공정한 절차 없이 사회·경제적 급부를 상실하거나 생계를 위협받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기초가 된다.

3) 객관적 법률 규범으로서의 경제·사회적 권리

지도 원칙 또는 입법 명령의 형태로 경제·사회적 권리는 헌법적으로 보호될 수 있다. 이런 객관적 규범이 법원에서 직접 시행될 수 있는 주관적 권리를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해석 지침’으로서 간접적으로 경제·사회적 권리를 보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독일 헌법에서 법원은 사회국가 원칙에 의지해왔다. 가격규제를 목적으로 한 입법이 자유로운 계약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사회국가가 과대한 식비, 의료 및 주거비용과 싸울 의무 하에 있다는 원칙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국가 원칙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정의의 증진 사이에서 법원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법원은 지도 원칙을 따르지 못한 법률에 대해 ‘위헌’이라는 선언적 판결을 내리거나 강제 명령을 통해 헌법적 의무 수행을 요구할 수 있다.

4) 국제법상 경제·사회적 권리의 헌법적 지위

국제법이 국내 재판에 당연히 원용될 수 있도록 하거나 헌법과 유사한 지위를 갖는 것으로 해석하는 헌법이 있는 반면 별도의 입법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국제조약이 다른 법령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시행되는 ‘자동발효 성격’을 갖는 권리가 사회권규약에 다수 포함돼 있다고 본다. 여기에 해당되는 조항은 ‘남녀평등, 동일노동에 대한 동일임금, 노동조합에 대한 권리, 어린이·청소년에 대한 보호, 초등의무무상교육’ 등이다. 차별하지 않을 의무는 일반적으로 법률에 기대지 않고도 즉각 법원이나 행정부가 시행할 수 있는 의무이다.

2. 법률을 통한 이행

유엔 사회권규약 2조 1항은 입법조치의 채택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입법은 경제·사회적 권리의 맥락에서 다음의 목적에 복무해야 한다.
- 국제조약과 국내헌법에 규정된 권리의 범주와 내용에 대해 더 상세한 정의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사회권규약 11조의 ‘적절한 주거’ 개념을 정교화하기 위한 입법이 필요하다.
- 권리의 전달을 위한 자금조달에 관한 조정을 명문화해야 한다.
- 전국 및 지역의 상이한 정부 영역의 정확한 책임과 기능을 규정해야 한다.
- 권리의 전달을 위해 일관되고 공동작동될 수 있는 제도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 공무원과 사인(지주, 고용주, 기업, 은행 등) 둘 다에 의한 권리침해를 예방하고 금지해야 한다.
- 권리의 침해에 대해 구체적인 구제를 제공해야 한다.

3. 기타 국내 기관의 역할

법원 외에 여타 기관도 경제·사회적 권리의 국내적 이행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국가인권위원회, 옴부즈맨, 공익 집단 및 인권 옹호자들이 포함된다. 유엔 사회권위원회는 이들 기관이 경제·사회적 권리 분야에서 할 수 있는 활동유형을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 교육 및 정보 프로그램의 증진
- 기존 법률, 행정 조치, 법률안 및 기타 제안들이 경제·사회적 권리에 부합되도록 감시
- 기술적 지원의 제공 또는 표본조사 수행
- 사회권규약에 따른 의무 실현을 측정할 수 있는 국내 차원의 기준
- 경제·사회적 권리가 실현되고 있는 정도를 확인할 목적으로 구상된 연구조사 수행
- 사회권규약에서 인정된 구체적 권리를 준수하고 있는지 감시, 공적 기관과 시민사회에 그에 대한 보고서 제공
- 경제·사회적 권리 침해를 주장하는 제소 검토

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지금까지 세 차례에 걸쳐 ‘발전권의 이론과 실천’에 관한 유엔독립전문가의 논문을 살펴봤다. 20세기의 마지막 국면에 인권의 장에 등장한 발전권은 논쟁적이며, 모호하며, 미완이라는 수식에 싸여있다. 유엔독립전문가의 논문에서도 발전권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얻을 수 없는 한계는 여전하다. 오늘은 이 논문에 대한 다양한 비평들을 살펴본다.


< 글 싣는 차례>

(1) 발전권의 이론

(2) 발전권을 둘러싼 논쟁들

(3) 발전권의 실천

(4) 이 논문에 대한 비평들

“‘발전’ 자체가 문제다”

먼저 발전권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의견을 들 수 있다.

첫째, 개인을 강조하고 국가의 개입으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인권의 관점에서의 비판이다. 권리의 주체도, 권리의 대상도, 의무의 주체도 모호한 권리를 내세우는 것은 인권의 보편성과 신성한 권위에 흠집을 낼 뿐이라는 것이다.

집단을 권리의 주체로 내세울 때 모호한 집단의 확대는 3세계나 남반구 전체로까지 확대돼 결국 ‘국가’들이 권리의 주인이 되는 모순이 발생하게 된다. 이로 인해 독재정부가 발전을 명분으로 개인의 인권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할 위험성이 크다고 비판한다. 특히 유엔독립전문가의 주장처럼 발전권은 ‘과정’에 대한 권리라는 식의 주장은 권리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말할 성질의 것을 권리의 목적이자 대상으로 만드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반응이다. 국제사회의 의무, 초국적 기업의 의무, 다양한 비국가행위자의 의무 등 의무 주체를 무한 확대하는 것 또한 권리와 의무의 소재를 흐릴 뿐이라고 본다.

둘째, ‘권’이라는 이름을 붙인다고 해서 ‘발전’의 본래 개념이 바뀔 수 없다는 시각이 있다. 인권도 경제도 잘돼가고 있는 곳은 발전돼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은 ‘발전도상국’이니 ‘미발전국 또는 저발전국’이라 말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본다. ‘발전한 나라’나 ‘발전도상국’ 모두가 사실상 ‘발전’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발전이라 부르는 것은 사실상 경제발전이고 그것은 지구 위의 모든 인간과 자연을 산업경제 시스템 속으로 집어넣는 일이다. 경제발전은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원인이다. 모두가 부자가 될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되면 지구가 다섯 개 아니 그 이상이 있더라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빈곤 등 인권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이다.

유엔독립전문가의 글에서도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경제성장 자체를 강조하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경제성장을 수단일 뿐 아니라 목적으로 보는 부분도 나타난다. 이에 대해서는 입장이 나뉜다. 경제성장이 발전권을 실현하는 프로그램에 포함되는 부분이라 할지라도 성장에 대한 강조나 성장 자체를 목적으로 내세우는 것에 우려를 표하는 입장이 있는 반면, 세계은행 등의 논평가들은 이런 시각을 환영한다. 경제성장을 인권침해의 주온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인권의 장에 너무 팽배해 있다는 불평이다. 따라서 유엔독립전문가가 경제성장을 강조한 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입장이다.

“가치체계의 문제다”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기존의 가치체계는 경쟁, 개인주의적 경향, 공동의 사회적 목표에 대한 무관심이다. 그래서 경제적 가치는 ‘통합적’인 것이 아니라 ‘배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발전권을 주창하면서 기존의 가치체계에 단지 인권의 차원을 덧붙이는 것으로는 될 수 있는 일이 없다.

경제체제를 인간화하고 부를 창출하는 전체과정에 발전권을 통합시키는 것은 가치체계의 변화가 요구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발전권은 특수한 가치주장을 내재한 권리가 된다. 그리고 그에 기반한 모든 개혁은 사회의 특수한 생산체제와 직접 연관된다. 인권의 보편성은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는데 특정 가치체계를 미리 정해놓고 그것에 대한 권리를 외칠 수 있을까? 그렇게 되면 그 결과는 서로 다른 가치들의 갈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또한 발전에 대한 청사진이 단일하거나 통일적으로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발전권에 기초한 가치체계의 변화를 옹호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모순이 된다. 사회의 다양한 행위자들은 새로운 사회구조와 합의를 만들기 위한 틀거리를 제공받기 전까지는 발전권을 옹호하기도 반대하기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발전권에 포함된 많은 요소들, 취약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참여와 권한강화, 좋은 거버넌스(공치)와 파트너쉽, 투명성, 책임성 등을 도덕적, 윤리적으로 부르짖거나 권리 실현의 도구로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나 권리 체계 자체에 넣는 일은 어렵다는 비판이 주로 제기된다.

“발전권 실현은 어렵다”

발전권에 대해 옹호하건 반대하건 간에 한목소리를 내는 것은 발전권의 ‘실현’이 어렵다는 것이다. 추상적인 발전권을 구체적이고 특수한 정책과 프로그램에 가져다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많은 정부들이 발전권을 국익 개념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이다. 실천을 위한 대화보다는 뻔한 정치적 입장을 나열하는 대화가 발전권의 등장 시기부터 문제가 됐다. 부당한 국제 경제질서에 대한 변화와 보상을 기대하며 무역조건의 증진, 부채 해소 등 선진국의 원조 의무를 강경하게 주장하는 3세계의 도전이 있었다. 이에 대해 선진국들은 원조는 기부국들이 주권으로 결정할 문제이지 발전권 증진의 명목 하에 구속력있는 국제적 의무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독립전문가의 논문에서는 이런 초기의 대립과 거기서 사용된 언어가 오늘날에는 적절성을 상당히 잃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독립전문가의 논문에서 실천방법으로 제시된 ‘개발원조’와 ‘발전계약’에는 상당 부분 그런 대립의 요소가 내재돼 있다.

둘째, 발전권 하면 ‘모호하다’는 말이 나오듯이 발전권의 이론적·경험적 지식은 취약하다.
발전권이 추상적 개념을 실천 단계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발전과정에 무슨 일이 벌어졌고, 어떻게 결정이 이뤄졌으며, 어떤 압력이 우선순위 설정에 영향을 주며, 어떤 참여가 이뤄졌는지를 심도 깊게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인권영향평가를 포함하여 분명한 지침, 평가기준, 모니터링 등이 있어야 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유엔 차원에서 지침과 점검목록을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들은 아직 시도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추상적인 발전권을 현실화하는데 있어 초점을 맞출 것은 구체적인 ‘빈곤퇴치전략’이라는 의견들이 자주 제출된다.

셋째, 이론적 취약성과 맞물린 실천의 부재이다. 듣기 좋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전권에 근거해 정책과 프로그램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자원을 할당하는 예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개별국가도 물론이지만 국제인권의 장에서 빠짐없이 발전권을 선언문에서 언급하기는 하지만 행동계획에서는 무시되고 있다.

일례로 유엔밀레니엄발전목표를 채택하면서 “발전권을 모든 사람에게 현실로 만들고 전체 인류를 결핍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고 했지만 지금 세계는 성장과 번영, 보다 개방적인 시장, 기업과 기업가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실제 정책목표로 취하고 있지, 가난한 사람들의 발전권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발전권 실현을 위한 실천은 그 성격상 장기적일 수밖에 없는데 흔히 목격되는 대응은 즉각적인 도전과 요구에 대한 대응이다.

“발전의 중심은 사람이다”

독립전문가가 논문에서 주장한 바와는 달리 발전권에 대한 회의와 반대, 적극적인 옹호간의 차이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일치점을 찾는다면 ‘발전’의 중심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도덕적 호소에 대한 동의일 것이다.
발전의 관심은 모든 사람의 존엄성, 모든 인간의 상호의존성, 그리고 모든 생명의 보전에 있다. 따라서 그것이 ‘권리’이건 아니건 간에 발전은 인간 능력의 실현에 관한 것이다. 내가 완전히 사람일 수 있기에 필요한 것, 사람이 자신의 인격을 충분히 실현하기에 필요한 것이 발전이고, 그것에 대한 실현방법은 무력감을 느끼고 도움과 보조에 의한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가 자신의 발전에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전에 대한 접근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적되는 점은 인권에 대한 포괄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이다. 기존의 인권 규범의 개인적이고 나열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종합적·구조적으로 인권을 규정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발전권의 존재 이유이다. 그것은 시민·정치적 권리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단순히 합산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의 상호의존성을 고려하는 속에서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발전에 대한 접근은 경제적인 것에만 머물 수가 없다. 제도, 참여, 재정, 경제, 법, 사회적 통합 등을 포괄하는 모든 요소를 총체적으로 다뤄야 한다.

어디로 가느냐와 어떻게 가느냐는 둘 다 중요한 문제이다. 발전권 선언에서 말한대로 “모든 인권과 기본적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상태로 가기 위해 “사람은 발전의 적극적인 참여자와 수익자”가 되어야 하고 그를 위해 “적극적이고 자유롭고 의미있는 참여의 기초”위에서 가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류은숙]

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3) 발전권의 실천

A. 국제협력

발전권은 1970년대 신국제경제질서(NIEO) 수립을 둘러싼 남반구와 북반구 국가들 간의 대립과 결합되어, 3세계 국가들이 주창한 것이었다. 따라서 모든 국제관계에서의 동등한 처우, 주로는 자원의 이전과 무역과 금융에서의 유리한 대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당시에 3세계 국가들이 사용했던 언어의 상당수는 오늘날 적절성을 상당히 잃었다. 그렇지만 발전수준의 차이에서 생기는 문제와 국제 협력에 대한 의존성의 본질적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부채 문제 해결, 생필품 가격과 수출 소득의 불안정성 감소, 국제 금융 체제의 부적절성 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해 국제협력은 다양한 형태를 취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 국가들에서, 발전권과 관련된 목적들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추가 자원의 유입보다는 기존 자원의 효과적 이용이 보다 중요하다. 투명성, 책임성, 형평과 권한강화의 증대로 이어지는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 외국 원조의 더 많은 투입 요구를 줄일 수 있다. 국제협력이 바람직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발전권을 이행해야 할 3세계 국가들 자신의 책임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인권적 접근에서 국가의 책임은 절대적이다. 국가는 입법을 하고, 적절한 조치를 채택하고, 공공활동을 하고, 풀뿌리 차원의 권한강화를 위한 계획을 공식화해야 한다.

발전권 이행을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 의무 또한 절대적이다. 국제협력에는 두 차원이 있다. 하나는 다변적 과정으로 모든 개도국들이 접근할 수 있는 편의를 선진국, 다국적 기구, 국제 제도가 참여하여 제공하는 것이다. 하나는 특수 상황에 적합한 조치를 요구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쌍무적 편의 또는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한 조정을 통하는 것이다. 인권의 구조 속에서 이러한 국제협력은 의사결정과 이익의 공유 둘 다에서 투명성과 비차별성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평등하며 참여적이어야 한다.

1. 개발 원조

국제 경제 협력의 방법 중의 하나는 공적 개발 원조(ODA) 또는 대외 원조라는 것이었다. 공적 개발 원조는 시장 보상에 이끌리지 않고, 공공당국의 재량에 따라 주어지고 이용될 수 있다. 많은 개도국들은 사회적 보상이 높다 할지라도, 시장 보상을 산출할 수 없기 때문에 사적 자본을 유인할 수가 없다. 공적 개발 원조는 교육, 건강, 영양 등 사회발전의 지표에서 매우 높은 사회적 보상을 갖는 활동들을 재정지원 할 수 있다. 공적 개발 원조는 또한 위험을 공유하고 합작 또는 보조금을 통한 프로젝트를 통해 사적 자본의 유입을 증가시키는데 이용될 수도 있다.

선진국들의 공적 개발 원조는 목표치인 국민총생산(GNP)의 0.7%에 도달한 적은 결코 없지만, 미국을 제외한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 전체 국가들의 지원 수준은 국민총생산의 0.32~0.33% 정도에 이른다. 미국의 공적 개발 원조는 냉전의 종결과 함께 급격하게 줄었다. 공적 개발 원조는 국제협력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 남아 있으며 양이 늘어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단지 도덕적 구속력을 가질 뿐이지만, 국내총생산(GDP)의 0.7%를 대외원조로 제공하기로 한 선진국들의 약속을 이행할 것을 촉구해야 할 것이다.

2. 발전 계약(Development Compacts)

원조국들은 자신들이 제공한 자원이 효과적으로 쓰이는지에 당연히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받는 쪽의 자발적 동의 없이 조건이 부과된다면 발전에 대한 인권적 접근의 정신에 반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조건이 프로그램 이행에 대한 상호 약속에 기반하는 것이라면 발전권 실현을 위한 효과적 도구가 될 수 있다.

“계약”이라는 생각을 처음 제안한 것은 1980년대 말 노르웨이의 외무부 장관 T.스톨텐베르그(T.Stoltenberg)였고, 다른 발전 경제학자들과 인간발전보고서를 통해 다듬어졌다. 발전 계약은 연속된 정책 구상을 따라 개도국들이 수행하기로 되어 있는 프로그램 지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원조국은 원조수령국가의 노력에 부합되는 재정지원과 여타의 정책들로 그 프로그램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것을 분명히 약속한다.

발전 계약에서 명시돼야하는 상호 의무는 세심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세계은행과 IMF의 연구들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우에 재정지원 프로그램에 부과된 조건이 작동하지 않은 것은 그 조건이 외부에서 부과된 것이지, 당사국 자신들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조건 제한이건 의무건 간에 당사국들이 자신들의 관심사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스스로 대부분을 모니터할 수 있어야 한다. 권리에 기반한 접근에서는 처우의 형평성을 보장하기 위해 이 점이 특히 중요하다. 발전 계약에서, 개도국들은 인권을 보호하고 실현할 의무를 져야 한다. 이 의무이행을 모니터할 수 있는 가장 타당한 방법은 각 국가에 인권침해를 조사하고 판단하는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일 수 있다.

발전 계약에는 국제사회의 의무도 또한 설정돼야 한다. 원조국들과 국제기구들은 무역과 금융 접근에 대한 모든 차별적 정책과 장애물 제거를 보장해야 하고 발전권 이행을 위한 추가 비용을 적절히 공유해야 한다.

계약 사상은 국제 협력 중에 한 가지 모델에 지나지 않으며, 계약 사상의 실행가능성과 다른 대안들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B. 발전권 이행 프로그램의 요소들

발전권 실현을 위한 어떤 프로그램이든지 가져야 할 기본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a) 발전권의 이행은 발전의 ‘총체적인’ 계획 내지 프로그램으로 봐야 한다. 여기서 일부 또는 대부분의 권리가 실현되는 동시에 어떤 권리도 침해돼서는 안된다. 발전권 실현을 위한 자원 제공을 증가시키고, 발전권 실현을 촉진하는 생산과 분배 구조의 증진이 있는 지속된 경제성장이 있어야 한다.

(b) 어떤 권리의 이행도 고립적으로 행사될 수는 없으며, 타 권리들의 이행을 위한 계획은 시간과 부문간 일관성을 고려하여 구상돼야 한다.

(c) 전체 계획의 이행과 개인의 권리 실현은 인권기준에 따라 수행돼야 한다. 즉, 투명성, 책임성을 가지며 비차별적이고 참여적인 태도로 형평과 정의로 수행돼야 한다. 실제적으로 발전계획은 풀뿌리차원에서 당사자들이 의사결정과 이행에 참여할 뿐 아니라 혜택을 평등하게 공유하는 것으로 형성되고 이행돼야 한다. 즉, 발전계획은 당사자들의 권한을 강화하는 계획을 포함해야 한다.

(d) 발전권의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의존성은 경제적·정치적·사회적·법적 제도와 규범, 그것이 작동하는 절차로 결정되며, 인간발전과 형평과 정의 속의 기회의 확대는 이들 제도와 규범의 근본적인 변화를 흔히 요구한다. 발전권의 실현은 이러한 제도적 구조의 변화를 포함하며 국가 제도를 뛰어넘어 국제적 제도의 변화를 포함하기도 한다.

(e) 1986년 유엔 발전권 선언에 명시된 것처럼 발전권의 보유자는 개도국 인민들과 개인들인 반면에 의무 수행자는 일차적으로 국가들, 그리고 국제사회, 시민사회의 여타 구성원들이다. 따라서 이들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정책들을 상술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초국적 기업, 원조국 및 기타 정부들, 국제기구로 구성된 국제사회와 당사국들은 이들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

인권준칙 속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으로 분명히 확인된 바는 아닐지라도, 발전에 대한 인권적 접근의 동기는 가장 불우하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빈곤은 가장 심각한 인권침해의 형태이며 따라서 형평과 정의에 기초한 인권실현 프로그램이라면 당연히 빈곤을 표적으로 삼게 된다. 빈곤 퇴치를 위한 국제협력에 대한 합의가 더 커진다면, 발전권 실현에 유익할 것이다. 인구 중에 가장 가난한 30-40%의 몫이 증진된다면, 그보다 부유한 인구 부분에 무슨 일이 생기든 적어도 발전의 첫 번째 국면에서는 문제될게 없다. 빈곤퇴치 프로그램이 아닌 시장의 힘에 기반한 경제 정책이 그 나머지들의 복지를 증진할 것이다. 유념해야 할 유일한 문제는 시장의 힘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빈곤의 성격에 악영향을 끼치거나 빈민의 수를 늘리는 경제 및 금융위기의 조건을 만들어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빈곤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소득 빈곤으로, 한 국가 국민의 몇 %가 최저 소득(또는 소비) 수준 이하에 속하느냐와 관련된다. 두 번째는 건강, 교육, 주거, 영양 등에 접근성이 증대됨으로써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빈민의 능력과 관련된 것이다. 인권실현의 관점에서 보면, 빈곤의 개념은 단순한 소득 빈곤을 넘어서는 것으로, 인간 존엄성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수준의 박탈을 의미한다. 아마르타 센(Amartya Sen)은 빈곤을 단지 저소득이 아닌 기본 능력의 박탈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capabilities)은 본질적으로 인권과 관련된 것으로, 인간이 가치있게 여기는 존재가 되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선택과 자유의 확대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발전권 이행을 위한 프로그램은 중앙집중식 계획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당사자들의 참여와 권한 강화를 통해 탈중앙화된 의사결정과정에 전적으로 기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발전 계획은 시민사회와 당사자와의 협의 과정을 통해 비차별적이고 투명한 태도로 형성돼야 한다.

빈곤퇴치를 위한 발전 계획은 소득 빈곤만이 아닌 더 넓은 의미의 능력 박탈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 여기서 모든 권리들이 총체적으로 고려돼야 한다. 하지만 당장에 모든 권리가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기본적인 세 가지 권리, 예를 들어 식량권, 건강권, 교육권에 집중하는 것이 실현가능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민·정치적 권리를 포함하여 여타의 권리가 왜곡되거나 침해돼서는 안된다.

또한 앞서 경제발전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여기서 말하는 자원의 성장이란 국내총생산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발전권 실현을 위한 자원에는 법적, 기술적, 제도적 자원도 포함된다. 자원의 성장 전략은 형평과 인권기준에 대한 존중에 기반해야 한다. [류은숙]

이 논문은 1998년부터 6년여 발전권에 관한 독립전문가로 활동(현재는 인권과 극빈에 관한 독립전문가)한 아르준 센굽타(Arjun Sengupta) 씨가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들에 근거하여 쓴 것이다. 최근 개발과 인권간의 문제, 발전권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인권오름>을 통해 네 차례에 걸쳐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을 발췌·정리하여 소개한다.


< 글 싣는 차례>

(1) 발전권의 이론

(2) 발전권을 둘러싼 논쟁들

(3) 발전권의 실천

(4) 이 논문에 대한 비평들

작성일자 : 2007. 3. 9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2) 발전권을 둘러싼 논쟁들

1. 자연권으로서의 인권

사회권 내지 발전권은 자연권이 아니므로 인권이 아니라는 것이 전통적으로 이들 권리를 반대하는 주장이었다. 여기서 자연권이란 사회적 협력의 산물로서가 아닌 인간에게 내재된 권리로서, 보편적이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갖는 것이다. 이런 인식 체계 속에서 인권은 오직 개인의 권리이다. 그리고 여기에 해당하는 권리들(생명권, 자유, 언론의 자유 등)은 소극적 자유로서 이를 보호하기 위해 국가는 법으로 살인 등의 행위를 금지하면 된다. 그러나 사회권은 적극적 자유와 결합되는 것으로서 국가가 적극적인 행위를 통해 이를 보장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권이 아니며 인권이 아니다. 발전권은 집단적 권리와 적극적인 경제적 권리와 결부되기 때문에 인권으로 간주될 수 없다.

이런 주장들은 문헌 속에서 상당히 거부돼왔다. 세계인권선언의 많은 요소들은 자연권의 원칙을 넘어서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은 경제·사회적 권리의 요소들을 상당히 가진 국제법의 다원주의적 기초위에 굳게 서있다. 또한 개인의 인격은 본질적으로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는 점을 고려하고 있다. 권리를 이행할 의무와 의무의 담지자가 그것을 보장할 것을 규정하기만 한다면, 논리적으로도 집단의 권리가 개인의 인권과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것이라는 근거는 없다. 더욱이 시민·정치적 권리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둘 다가 소극적인(방지) 행위뿐만 아니라 적극적인(증진 또는 보호) 행위를 요구하기 때문에 단지 시민·정치적 권리만 인권이고 경제·사회적 권리와 집단적 권리는 인권이 아니라고 간주하기는 어렵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인권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이행할 의무가 국가에게 있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와 관계된 인민들이다.

2. 사법심사가능성

발전권에 대한 또다른 비판은 사법심사가능성에 관한 것이다. 즉, 법적으로 이행할 수 없는 권리는 인권으로 간주될 수 없고 기껏해야 사회적 열망이나 목표의 제시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서는 재단을 통해 옷을 얻는 것처럼 권리란 입법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인권과 법적 권리를 혼동하고 있다. 인권은 법에 선행하는 것이고 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존엄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권은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권이 입법화된 법적 권리가 되는 것의 유효성을 흐리는 것은 아니다. 인권의 실현을 보장하기 위한 적절한 법적 장치를 만들고 채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법적으로 이행될 수 없으면 인권으로 호소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주 부적절한 것이다. 법정을 통하기보다는 의무 이행의 대안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유익하고 필수적일 때가 있다.

양대 인권규약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와 시민·정치적 권리를 존중할 의무에 법적 효력을 부과한다. 더욱이 노동권과 같은 경제·사회적 권리는 이미 국내법으로 보호되고 있고, 국제노동기구(ILO)의 절차로나 국내 법원에서나 사법심사가 가능하다.

시민·정치적 권리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국제 규약 내지 조약으로 규범화됐고, 상당수 국가들이 비준을 했지만, 발전권 선언의 지위는 국제조약과는 다르며 따라서 법률 체제에서 이행될 수는 없다. 그렇다 할지라도 여전히 발전권을 실현할 국가들(그리고 개인 및 국제사회)의 책임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발전권을 실현하겠다는 약속의 이행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감시와 감독의 메커니즘이 필수적이다. 이런 메커니즘은 국제조약기구 만큼의 법적 지위는 아닐지라도 사회적 압력, 민주적 설득, 시민사회의 헌신 등을 통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3. 이행 감시

많은 권리들의 문제에서 (법적) 강제가능성보다는 이행가능성이 더 중요한 문제이다. 권리들에 대한 입법을 애쓰기보다는 권리의 실현을 촉진할 수 있는 행동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더 나은 방법일 수 있다. 이럴 경우에 필요한 것은 사법재판소가 아니라 감시 기구나 분쟁 해결기관이다. 지방자치단체의 민주적 제도, 민간단체, 공공 소송 기관 등은 권리에 기반한 문제들을 다루는 데 아주 효과적일 수 있다.

감시기구 또는 협의 기구를 만드는 것은 국제 사회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다. 국제적 의무의 사법심사가능성은 국내적 의무의 이행과는 다르게 취급돼야 한다. 물론 국제재판소를 포함하여 국제중재를 위한 다양한 기구들이 있다. 무역과 금융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와 절차들이 수립돼 있다. 그러나 인권에는 이런 기구들이 유용하지 않다. 인권에 있어 대부분의 경우에 요구되는 것은 국제기구와 관련 정부들이 함께 모여 서로 얘기할 수 있는 공개토론의 장이다. 여론의 민주적 압력을 조건으로 하는 투명한 협의 절차야말로 외부의 어떤 사법부보다도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4. 집단적 권리 대 개인적 권리

발전권에 대한 끈질긴 반대 중에는 집단권에 대한 비판이 있다. 3세계 지도자와 1세계의 비평가들이 발전을 위해 국가들과 민족들의 집단적 권리로서 발전권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집단권을 적절하게 정의하고 그 자체로서 개인권에 적대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스러워야 한다. 분명 집단권을 인정하고 그 기반 위에 만들어진 법적·제도적인 협약과 규약들이 있다. ‘유엔 발전권선언’ 자체가 1조에서 집단적인 인민의 권리를 인정했다. 1조에서는 모든 인간과 인민들은 발전권과 자결권을 갖는다고 했고, 여기에는 “천연자원과 부에 관한 완전한 주권을 위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의 행사”가 포함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집단권은 개인의 권리에 적대적이거나 우월한 것이 아니다. 발전권 선언 2조에서는 “인간은 발전의 중심주체”이며 “발전권의 적극적인 참여자와 수익자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3세계의 입장에서 집단권을 가장 분명하게 옹호하는 이들 중 하나인 조지 아비샵(Georges Abi-Saab) 교수는 집단권에 대한 두 가지 가능한 정의를 제시한다. 첫째, 개인들의 총합, 권리들의 총합이라는 이중의 총합으로서의 발전권이다. 둘째, (개인의 인권을 총합하는 과정 없이) 집단권을 집단의 관점에서의 권리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 경우에 발전권은 자결권의 경제적 차원 또는 자결권에 필적하는 권리로 고려될 수 있다.

이 두 가지 정의 모두 개인의 권리 위에 서 있다. 자결권은 분명 국가들에게 “천연 자원과 부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주지만, 이 주권은 모든 개인들을 위해 행사돼야만 한다. 개인권의 경우에는 권리의 소유자가 또한 권리행사의 수익자이다. 자결권 등 집단권의 경우에는 권리 소유자가 국가나 민족처럼 집단적일 수 있으나 그 권리 행사의 수익자는 개인이어야 한다. 물론 특정 개인의 권리가 집단의 권리와 갈등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또한 서로 다른 개인들의 권리 또한 특정 상황에서 갈등할 수 있다. 이런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투명성 있는 절차를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발전에 대한 인권적 접근을 이해하려면 개인과 집단권이 서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관계에 있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경우에 개인의 권리는 집단적 환경 속에서라야 충족될 수 있고, 국가나 민족의 발전권은 개인들의 권리 이행과 발전 실현을 위한 필수조건이다.

5. 자원의 제약

발전권과 관련된 문제는 재정적, 물리적, 제도적 자원의 문제이다. 시민·정치적 권리는 법으로 즉각 보호될 수 있기 때문에 인권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견해가 일찍이 있었다. 반면에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는 자원이 소비되는 장기간의 적극적인 조치가 요구되고, 자원은 언제나 제한돼 있기 때문에 이들 권리의 실현은 당연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제한된 시간 내에 완전히 실현되고 보장될 수 없는 권리는 인권으로 간주될 수가 없다.

권리가 있다는 것은 자원의 가용성 또는 권리의 실현방법에 달린 것이 아니다. 일단 인권으로 인정되면, 그들 권리는 당사국의 객관적 조건에 따라 실현의 방도를 결정하기 위한 지표가 돼야 한다.

국제인권규범들은 자원의 제약성이 중요한 문제임을 인정하고 있다. 사회권규약과 발전권 선언에서는 “가용자원의 최대한도까지” “권리의 완전한 실현”을 “점진적으로 성취”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여기서 “점진적”의 의미는 정부들이 권리의 실현 보장을 위한 노력을 막연히 무기한으로 미루어도 된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국가는 즉각적으로 조치를 취할 의무를 갖는다. 점진적 실현의 의무는 자원을 증가시키는 노력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인정된 권리가 실현되기에 필수적인 사회적 자원의 발전을 통해 효과적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점진적 성취의 의무는 자원의 증가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며 가용자원의 효과적 이용을 필요로 한다. 여기서 가용자원이란 한 국가 내의 자원만이 아니라 국제협력과 지원을 통해 국제사회로부터 가용할 수 있는 자원 모두를 의미한다. 권리의 실현을 위해 적절한 조치가 취해졌는가의 여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용자원에 대한 평등하고 효과적인 이용과 접근에 유념해야 한다.

이 모든 접근법이 기반하고 있는 것은 모든 국가들이 의무 이행을 위해 “최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국제인권조약 감시기구들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러한 최상의 노력이 기울여졌느냐에 관한 검토와 의견표명이다. 많은 자원의 지출 없이도 즉각적으로 취해질 수 있는 조치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용가능한 서비스에 대한 차별 금지와 입법조치를 예로 들 수 있다.

자원의 지출을 필요로 하는 권리들의 실현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것이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우선순위의 문제는 할당제로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거나 취해야 할 조치를 회피하기 위한 구실로 이용돼선 안된다. 이들 권리의 실현에 요구되는 대부분의 활동은 많은 재정적 자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재정적 또는 물리적 기반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의지에 달려있는 행정적·조직적 자원의 투입을 더욱 필요로 한다. 따라서 많은 국가들에서 자원의 제약은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아니다. 기존 자원을 더 나은 방식으로 이용하는 것이 자원의 공급을 늘리는 것보다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자원의 제약성은 국가마다 다르다. 인권규범에서 주장되는 대로 모든 권리가 동등한 가치와 중요성을 갖는 것이라면, 국가마다 다른 자원의 제약성의 성격이 우선순위를 결정할 수 있다. 가장 구속력 있는 의무이고 최소의 지출이 요구되는 그런 권리들이 먼저 실현되는 경향이 있다. 여기에는 발전에 대한 인권적 접근의 궁극적 목적인 사회변화를 초래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예를 들어 빈곤 아동에게 초등교육을 제공하는 것은 외딴 촌락에 사는 아동이건 도시 지역에 사는 아동이건 간에 똑같이 중요한 문제이지만, 도로와 교통시설이 제한된 국가에서는 외딴 지역의 아동이 무시될 수 있다. 전국의 빈곤 가정에 식량을 제공하는 것에 동등한 가치가 부여된다할지라도, 사회개혁이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않는다면 시골지역의 여자아이는 계속적으로 굶주릴 수 있다. 발전에 대한 인권적 접근은 권리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 뒤편에 쳐져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집중해야 하고, 그들 편에서 적극적인 조치를 요구한다.

자원의 제약성이 심각한 경우에는 권리 간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우선순위를 둔다고 해서 모든 인권의 불가분성, 상호의존성 및 상호연관성의 원칙을 거스를 필요는 없다. 다른 어떤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특정 권리가 침해될 수는 없다. 권리간의 거래는 있을 수 없고, 어떤 권리에 대한 침해도 다른 권리 실현이 증진된 것으로 보상될 수는 없다.

모든 권리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으로 발전권을 이해할 때, ‘우선순위’가 의미하는 바는 어떤 권리도 침해하거나 후퇴시키지 않으면서 일부 권리가 다른 권리보다 더 일찍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우선성을 어떻게 결정하느냐의 문제에 대해 헨리 슈(Henry Shue)는 “기본적” 권리를 얘기했다. “기본적” 권리란 그 권리의 향유가 모든 다른 권리의 향유에 필수적인 권리를 말한다. 따라서 어떤 권리가 진정으로 기본적 권리라면, 그 권리를 희생함으로써 다른 어떤 권리를 누리겠다는 시도는 그야말로 자멸적인 논리다.

이에 대해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는 “최소한의 핵심의무”를 언급했다. “최소한의 핵심의무”란 각 권리의 최소한의 필수적 수준의 충족을 보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필수적인 식량, 필수적인 기초 의료, 기본적인 주거, 가장 기초적인 형태의 교육을 박탈당한 사람의 숫자가 상당한 국가는 사회권 규약의 의무를 명백히 침해하고 있는 것이다. 자원의 제약이 무엇이건 간에, 이들 최소 의무는 충족돼야 한다. “최소한의 핵심 의무” 또는 “기본적 권리”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권의 구조 속에서의 공적 토론을 통해서이다. 참여적인 협의 과정을 통해 진정한 공공의 선택에 기반해야 한다.

6. 권리의 상호의존성과 발전의 과정

발전권은 포괄적인 권리 또는 일련의 권리의 총합이 아니다. 그것은 과정에 대한 권리이다. 개인들이 자신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자유를 확대하는 과정이다. 과정은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의존성을 포함한다.

발전권에서 ‘과정’과 ‘과정의 결과’ 둘 다가 인권이지만 과정이 그 결과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과정은 과정의 결과물과 구분돼야 한다. 비록 결과로서 권리들이 충분히 실현될 수 없거나 혹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만 실현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과정이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 높은 개연성이 있고, 권리로서의 과정을 요구하는 것이 주어진 상황에서 최상의 선택일 수 있다면 과정은 수립될 수 있고 즉각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과정에 대한 권리로서의 발전권은 모든 권리들의 매개체로 묘사할 수 있다. 발전권 자체가 인권인 것처럼 발전권의 각 요소는 인권이다. 이들 권리들은 인권 기준을 따라 이행돼야 한다. 이 모든 요소는 특정 시점에서나 일정 시간이 경과해서나 상호의존적이다. 예를 들어 건강권의 실현은 현재와 미래 모두에서 식량권이나 주거권, 개인의 안전, 정보의 자유 실현 수준에 달려있다.

모든 인권은 침해할 수 없고 그 어느 것도 다른 권리보다 우월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한 권리의 증진이 다른 권리의 악화를 상쇄시킬 수는 없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시민·정치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경제·사회·문화적 권리를 증진할 수 있고, 기본적인 인권기준을 구성하는 평등, 비차별, 참여, 책임성과 투명성의 원칙을 존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기준을 존중하는 가운데 수행된 프로그램이어야 발전권의 주창 목적으로서의 발전의 과정이 될 수 있다.

자원의 제약이 심각한 상황일 때 위에서 말한 조건은 엄격한 것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어떤 권리도 침해하지 않고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익이 되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어떤 재화와 서비스의 제공을 희생시킨다면 적어도 당분간은 일정 권리의 향유를 악화시킬 수 있다. 부정적 효과를 중화시킬 수 있는 보충적인 추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일반적으로 이익이 되는 프로젝트라는 것이 발전권을 침해하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들과 그보다 더 많은 상당수 사람들의 이익을 비교해야 한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인간 사이에서 이익을 비교하는 것은 절대 안된다. 유일한 해결책은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들이 충분히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는 것이고, 보상은 그러한 보상이 있은 후에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리가 침해된 것으로 더 이상 간주하지 않을 만한 것이어야 한다. 보상은 꼭 금전일 필요는 없으며 특별한 프로그램의 채택을 포함할 수 있다. 보상의 결정과 분쟁의 해결을 위해서는 프로그램 집행 전에 관련 당사자들의 감수성을 충분히 존중하는 속에서 적절하고, 투명하며, 합의적인 제도가 있어야 한다. 즉 영향을 받는 당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잘 수립된 참여적 과정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7. 과정으로서의 발전권의 부가가치

이미 경제·사회적 권리 등으로 인정되고 있는 권리를 새삼 발전권으로 제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부가가치가 있는가? 발전권을 과정으로서 바라볼 때 분명한 부가가치가 있다. 각 권리를 단지 개별적으로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효과가 특정 시점에서나 시간이 경과된 후에나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함께 실현하는 것이다. 발전권의 실현에 증진이 있었다는 것은 다른 어떤 권리를 침해하거나 악화시키지 않고 어떤 권리가 증진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모든 권리의 실현은 모든 자원을 사용하는 포괄적인 발전 프로그램에 기반하는 것이므로, 국내총생산(GDP)만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평등한 기술과 제도의 성장을 발전권의 일환으로 계획하고 이행해야 한다. 이러한 자원들의 성장은 불평등의 감소 또는 평등을 보장하는 속에서 인권의 기준을 따라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발전 프로그램 속에서의 발전권은 경제의 생산과 분배 구조에서의 변화를 포함하는 것이며, 시장 메커니즘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참다운 국제협력을 필요로 한다.

발전의 과정은 단계적인 목표의 실현을 장기간 지속성을 갖고 유지하는 프로그램 또는 정책 계획들로 구성된다. 이 과정에 대한 권리는 그 과정의 결과물에 대한 권리와는 다르다. 하지만 결과로서 나타날 모든 권리 실현에 높은 개연성을 주는 것은 과정이다. 따라서 과정 에 대한 권리로서의 발전권은 권리에 대한 권리라 할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 인권으로서 인정된 모든 권리를 실현하는 것의 유효성과 성취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떤 합의도 없다 할지라도, 이들 권리의 실현을 가져올 수 있는 개연성 높은 발전과정으로서 발전권을 이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합의할 수 있다. [류은숙]

이 논문은 1998년부터 6년여 발전권에 관한 독립전문가로 활동(현재는 인권과 극빈에 관한 독립전문가)한 아르준 센굽타(Arjun Sengupta) 씨가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들에 근거하여 쓴 것이다. 최근 개발과 인권간의 문제, 발전권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인권오름>을 통해 네 차례에 걸쳐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을 발췌·정리하여 소개한다.


< 글 싣는 차례>

(1) 발전권의 이론

(2) 발전권을 둘러싼 논쟁들

(3) 발전권의 실천

(4) 이 논문에 대한 비평들

작성일자 : 2007. 3. 7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창' 연구활동가)

이 논문은 1998년부터 6년여 발전권에 관한 독립전문가로 활동(현재는 인권과 극빈에 관한 독립전문가)한 아르준 센굽타(Arjun Sengupta) 씨가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한 보고서들에 근거하여 쓴 것이다. 최근 개발과 인권간의 문제, 발전권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인권오름>을 통해 네 차례에 걸쳐 이 논문의 주요 내용을 발췌·정리하여 소개한다.


< 글 싣는 차례>

(1) 발전권의 이론

(2) 발전권을 둘러싼 논쟁들

(3) 발전권의 실천

(4) 이 논문에 대한 비평들

(1) 발전권의 이론

1. 인권으로서의 발전권

발전권이 인권으로 여겨질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발전권을 인권으로 인정하느냐(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와 발전권과 관련된 의무를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를 구분해야 한다. 법실증주의 전통에서 인권이란 한 사회가 스스로의 권위로 자신에게 부여한 권리이다. 어떤 외적인 권위에 의해 부여되거나 자연적인 또는 신적인 원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인권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사회의 개념에 따라 한 사회 속에서 법을 만드는 권위에 의해 인정됐기 때문에 인권인 것이다. 일단 규범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받아들여지면 이들 권리는 사회에 구속력을 갖게 된다. 마찬가지의 주장을 국가에 의해 통치되는 사회들과 국제 사회에도 할 수 있다. 유엔은 이런 규정을 만드는 과정에 기여할 수 있다. 국제조약을 채택하고, 국가들이 그것에 서명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그것을 비준한 국가들에게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의무를 지우는 등으로 특정한 인권의 의미는 점차 국제관습법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요구한다. 인권운동의 초기 역사에서는 권리에 부응하는 의무가 너무 경직되게 이해됐다. ‘완전한 의무’라 일컬어진 이 관계에서는 실현가능할 경우에만 권리가 권리로서 수용가능한 것이 될 수 있고, 의무자가 의무를 수행할 것으로 증명된 방법이 있는 경우에만 권리는 의무와 관계 맺을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경직된 권리관은 권리-의무관계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에 굴복하게 됐다. ‘불완전 의무’로 일컬어지는 견해에서는 ‘인권에 대한 요구는 (인권의 실현을) 도울 수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그 실현의 의무가) 제기되는 것’이고, 그래서 권리는 타인, 국가 또는 국제사회 등 그 권리의 이행에 기여할 수 있는 행위자들의 ‘규범’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어떤 요구가 권리로서 인정되려면 그 권리를 실현할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사회적 목표이거나 ‘선언된 권리’ 또는 ‘추상적 권리’에 머물 수 있다. ‘불완전 의무’의 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권리의 실현가능성은 구성되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유효한 권리’가 재판할 수 있는 ‘법적’ 권리로 전환되는 입법이 그런 절차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다양한 의무자를 구속하는 합의를 만들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은 많다.

인권은 모든 국가, 시민사회, 국제사회가 성취해야 할 보편적 기준과 규범을 설정한다. 그리고 그런 권리들을 성취할 수 있기 위한 불가침의 의무를 이들 모두에게 부과한다. 발전권을 인권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적용성과 불가침성을 가진 권리의 지위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발전권의 실현을 위해 국가적 및 국제적 자원과 능력을 최우선 순위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사회기관, 국가, 국제사회에 발전권을 실현할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2. 발전권의 내용

발전권은 발전의 과정을 언급한다. 발전의 과정은 인권의 실현으로 귀결돼야 하고, ‘권리에 기반한 접근’의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란 국제인권기준을 준수하는 것으로 참여적이며, 비차별적이고, 책임성이 있으며, 의사결정과 발전과정의 열매를 공유하는 데 있어 평등한 투명한 과정이다.

발전의 목표는 의무자가 보호하고 증진해야 하는 권리소유자의 요구 또는 권리의 시각에서 표현돼야 한다. 유엔 발전권 선언은 발전권 실현의 일차적 책임이 국가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발전권을 유효하고 구체적인 권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 권리들이 적절한 사회 제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는 의무 수행 절차가 만들어져야 한다.

발전권의 내용은 유엔 발전권 선언에 근거하여 분석할 수 있다. 선언 1조는 “발전권은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기에 모든 인간과 민족들은 경제, 사회, 문화, 정치적 발전에 참여하고 이에 기여하며 이를 향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그 속에서 모든 인권과 기본적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

여기서 세 가지 원칙이 나온다. 첫째는 불가양성이다. 발전권은 빼앗기거나 협상될 수 없다. 둘째는 발전의 과정을 인권의 실현과정으로 정의한다. 셋째는 발전과정에 ‘참여하고 기여하며 향유할 수 있는’ 권리의 용어로써 발전과정을 정의한다. 이런 권리를 의무자는 보호하고 증진해야만 한다.

선언의 전문에 있는 발전에 대한 정의는 “포괄적인 경제·사회·문화·정치 과정으로서, 발전과 그로부터 나오는 이익의 공정한 분배에 있어서 자유롭고 적극적이며 의미 있는 참여의 기초 위에서 전 인구와 모든 개인에 대한 복지의 부단한 향상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선언 2조 3항에 따르면 국가는 위에서 말한 발전과정을 목표로 국가발전정책을 공식화할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선언 8조는 이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기본적 자원, 교육, 보건 서비스, 식량, 주거, 고용 그리고 소득의 공정한 분배에 대한 모든 사람의 기회의 균등”을 보장해야하고 “여성이 발전과정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도록 보장하는” 효과적인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또한 “모든 사회적 부정의를 근절하기 위한 적절한 경제·사회적 개혁”을 수행해야 한다.

3. 발전의 ‘과정’에 대한 권리로서의 발전권

발전에는 다양한 경로가 있다. 국내총생산(GDP)이 늘어나는 발전, 소득분배 없는 산업화, 소규모나 비공식 부문이 주변화되는 발전 등. 관습적인 의미에서는 이 모든 것이 발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발전은 평등한 기회가 제공되는 과정이 동반되지 않는 한 인권적인 발전의 과정으로 간주될 수 없다.

부와 경제력의 집중으로 불평등이 증가하는 경제성장, 사회발전의 지표나 교육, 보건, 성별균형에서 어떤 개선도 없는 경제성장, 인권기준을 존중하는 환경 보호가 없는 경제성장,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정치적 권리의 침해와 결합된 경제성장은 인권적인 발전을 실현할 수 없다.

물질적 상품 생산과 시장에서 잘 팔리는 서비스의 성장에 여념이 없는 경제 발전에 대한 통상적인 접근법과 발전권의 접근은 상당히 다르다. 발전권은 형평과 정의의 과정을 의미한다. 발전권 선언을 논의하고 채택하는 과정에서 발전권의 지지자들이 요구한 것은 형평과 정의에 기초한 경제적 및 사회적 질서였다. 세계 경제에서 ‘가진 것 없는 나라들’은 부유한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의사결정의 권리와 이익의 분배 둘 다를 평등하게 공유할 권리를 가져야 한다. 국가 경제 내에서도 인권으로서의 발전은 형평성에 굳게 뿌리박아야 한다. 발전권이 인권이라는 요구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발전 과정에 대한 요구이다.

발전권에 따르면 형평과 정의에 대한 고려가 발전의 전체 구조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빈곤은 빈민의 권한을 강화하고 극빈지역을 개선함으로써 감소될 수 있다. 이런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발전정책을 통해 생산구조가 조정돼야 한다. 정책의 목표는 전반적인 생산의 성장 등 여타 목적들에 최소한의 영향을 끼치면서 이 일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만약 가능해보이는 최대치보다 성장 수준이 낮을 것 같다면, 형평성에 대한 배려를 위해 이를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발전과정은 참여적이어야 한다. (발전권의) 수혜자들이 충분히 참여하는 속에서 결정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최소수준의 복지를 누릴 수 있으려면 구호품이나 보조금을 통한 단순한 소득의 이전은 옳은 정책이 될 수 없다. 가난한 사람들은 일할 기회를 제공받거나 자영업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아야 하며, 이것은 시장의 힘에 단순 의존함으로써 보장될 수 없는 활동들을 요구한다.

발전이 단지 소득의 증가만이 아니라 교육, 보건, 사회적 발전과 인간발전의 확산이라는 주장은 국민총소득(GNP)을 최대화하려는 원칙들에 설득되었다. 1인당 생산의 증가가 인간에게 자기 환경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주며 그럼으로써 인간의 자유가 증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철저히 규명하지 못했다. 기회의 ‘형평’을 보장하기 위한 진지한 행동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국민총소득이 성장한다고 해서 ‘모든 개인들’이 자신들의 환경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유를 성취하기 위해 채택된 구체적인 정책들이 없고서는 자유가 국민총소득과 함께 자동적으로 증가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발전에 대한 새로운 생각의 틀이 또한 인간발전접근법에 도입됐다. 아마르티야 센(Amartya Sen)은 발전과정을 “실체적 자유의 확대와 동등시되는 복지의 확대”이자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삶의 유형을 이끌 수 있는 능력(capabilities) 또는 소중히 여길 이유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의 확대”로 정의했다. 이런 능력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자유야말로 발전의 ‘구조적 역할’이자 ‘수단적 역할’ 속에서의 발전의 ‘일차적 목적’이자 ‘원칙적 수단’이다. 여기서 “능력”이라 불리는 것은 좋은 건강상태에 있는 것, 교육받는 것, 사회생활에 참여할 수 있는 것, 자유롭게 말하는 것, 자유롭게 결사하는 것 등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하거나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발전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유형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능력 또는 실체적 자유의 확대가 된다. 발전에서의 이런 능력은 그 능력들을 더욱 확대시키기 위한 도구가 된다. 예를 들어 교육받고 건강하면 사람들은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시민·정치적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인민의 자유로운 기관은 이런 과정에 필수적이다.

발전권은 인간발전 개념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인간발전에 대한 권리로 규정할 수 있다. 인간발전이란 실체적인 자유를 확대하고 그럼으로써 모든 인권을 실현하는 발전과정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인간발전이 인권으로 주장되면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접근이 된다. 이것은 단지 발전의 목표를 성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목적이 성취되는 과정에 필수적으로 성취돼야하는 방식인 것이다. 목적이 인권을 실현하는 것이자 이를 실현하는 과정 또한 인권이라는 것이다. 이 과정은 모든 인권의 특질을 가져야 한다. 즉 인권을 침해하지 않고 형평과 참여의 개념을 존중하는 것이다.

발전권의 실현은 인간발전의 증진을 넘어서는 문제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제시하는 인간발전지표같은 것들은 대개 국내총생산(GDP)과 기대수명, 문해력, 학령기 등의 보건·교육 지표들을 조합한다. 그러나 이런 지표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런 지표들이 어떤 방식으로 증진됐는지, 또는 인권을 실현한 것인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전통적으로 그 결과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개의치 않는 다양한 사회 정책들의 결과물에 초점을 뒀다. ‘인권적 사고’는 이러한 산출의 성격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것이 나오게 된 방법에 대해서도 유념한다. 이런 점에서 발전권의 접근은 인간발전에 대한 접근을 그 안에 포함하는 것이다. 발전권은 인간발전의 과정을 인권의 기준을 실현하는 방식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류은숙]

이후 이어질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 발전권을 둘러싼 논쟁들>

자연권으로서의 인권

재판가능성

이행 감시


집단권 대 개인권

자원의 제약

권리의 상호의존성과 발전의 과정

과정으로서의 발전권의 부가가치


<발전권의 실천>

발전 원조

발전 계약

실례가 되는 프로그램 요소

경제 성장의 중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