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0. 11. 1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엄마, 김치대란 때문에 걱정이 많지? “그렇다고 안먹을 수 있냐?”하면서 김장 시름에 빠져있으니 말이야. 엄마가 나 주려고 깍두기를 담갔다니까 한편으론 좋으면서도 엄마한테 내미는 용돈에 김치값을 얹어야 하는 건 아닌가 고민이 들기는 하지.

 

요즘은 밥 먹을 때 주요화제도 김치야. 단무지나 소세지 같은 건 부잣집 아이들이나 싸올 수 있는 도시락 반찬이었던 시절, 맨날 김치만 들어있던 양은도시락에서 국물이 새어나와 책이며 공책에 김치물이 배는 게 질색이었던 이야기, 도시락 반찬이란 게 나눠먹어야 맛인데, 엄마는 그 커다란 총각김치를 칼질도 안하고 싸줘서, 달랑 총각무 하나들고 도시락을 다 비워야 하는 게 싫었다는 이야기, 김장할 때 옆에서 쌈 배추 받아먹던 입맛 도는 이야기, 겨울 내내 먹던 김치찌개, 고구마와 동치미국물, 김치부침개, 봄에 너무 시어진 김치를 헹궈서 꼭 짠 후 기름에 볶아먹기 등 김치로 만든 음식이야기에도 끝이 없지. 그런데 세상에 말이야. 최고급 커피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도시락에 김치 싸오는 사람이 부자라는 얘기가 유행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내게 떠오르는 제일 큰 김치 사건은 이런 일이야. 외할머니 댁에 가서 들통 가득 김장김치를 얻어오던 밤이었어. 초등생인 나에게 엄마와 맞든 들통은 너무 무거웠어. 버스 막차를 타느라 빨라진 엄마의 걸음을 따라 뛰는 것도 힘들었어. 게다가 더 무서운 건 통행금지 시간이 다됐다는 거였지. 12시가 가까워지면 골목 여기저기에서 호각 소리가 들리고, 통행금지에 걸린 사람들은 경찰서에서 밤을 보내야 했던 시절이었어. 김치통을 들고 가는 모녀가 치안과 안보에 무슨 문제가 됐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엄마와 난 통행금지 단속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 무거운 김치통을 쥐어들고 뛰고 또 뛰었지. 한겨울인데도 온몸이 흠뻑 젖었던 기억이 나. 호각소리를 따돌리고 간신히 대문 안에 들어섰을 때의 그 안도감이란….

 

엄마는 반평생 넘게 겪었겠지만 한국에선 해방 이후 40여년 가까운 세월, 야간통행금지가 실시됐어.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였다는데, “어린이 여러분, 이제 잠자리에 들 시간입니다”란 TV 광고와 더불어 9시면 쌔근쌔근 자야 하는 줄 알던 나이 때는 그게 뭔지 잘 몰랐어. 내가 통행금지의 공포를 느낀 건 광주민주화항쟁이 있던 때였어.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 그땐 밤 10시인가로 통행금지 시간이 앞당겨졌어. 석양을 보면 뭔가 가슴이 젖어드는 감흥이 있어야 하는데, 그땐 해가 질 무렵부터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동동걸음치며 불안에 떨었어. 식구 중에 귀가 안한 사람이 있으면 뒤가 마린 양 앉아서 기다리질 못했지.

 

그런데 김치통을 들고 뛰던 그 밤과 오늘의 김치파동이 나한테는 똑같이 ‘자유’의 문제로 여겨져. 김치를 갖고 자유라니,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구? 맘대로 원하는 시간에 못 돌아다녔으니 통행금지가 자유롭지 못한 건 맞는 것 같은데, 비싸서 김치를 못 먹는 게 왜 자유의 문제냐고 묻고 싶을거야.

 

자유라고 하면 남 눈치 볼 것 없이 내 맘대로 하는 것, 켕기는 것이 있을지라도 ‘대한민국 은 자유주의 국가인데 무슨 간섭이냐‘고 큰소리치면 장땡인 것, 자유부인 같은 영화제목처럼 무슨 도덕적 금기를 어기는 것…. 자유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도 많고 그만큼 자유의 사연도 많아.

 

솔직히 엄마한테 ‘자유’란 말은 그다지 달가운 말이 아닐 것 같아. 엄마가 우리한테 무슨 소리를 할라치면, 우리 자식들은 하나같이 ‘좀 내버려두라’고 ‘자유를 달라’고 했으니 엄마한테는 자유가 좀 징그러운 소리일 것 같아. ‘통행금지, 그게 있어서 애들이 밤늦게 싸돌아다닐 걱정 없지, 범죄 걱정 없지, 나라에서 할 만한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라고 생각한 엄마는 통행금지가 없어졌을 때 아마 그 당시 젊은이들처럼 환호하진 않았을거야. 또 엄마에게 그놈의 자유란 늘 손으로 잡을 수 없는 텅 빈 말이었을 거야. 평생 생계를 위해 싼 값의 일과 그 돈으로 자식돌보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을 가져보지 못한 엄마에게 ‘자유’란 늘 ‘장차 올 것’이었어. 빚 다 갚고 나면, 전세방이라도 얻고 나면, 자식 공부 다 시키고 나면 올 것, 궂은 과업을 다 마친 후에나 오게 될 해방이 자유였을거야. 그래서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건 참고 견디는 것인지라, 엄마는 자유란 말을 평생 입에 담아본 적도 없을 거야. 엄마는 ‘자유’가 아니라 다른 말을 자주 썼지. 틀려먹은 세상일과 행동거지에 대해 ‘사람이 어떻게 지 좋은 것만 하고 사나’ 라고 엄마는 타박하쟎아. 그럴 때, 엄마가 생각한 건 ‘사람의 도리’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엄마가 생각하는 ‘징그러운’ 자유, 그리고 ‘자유’라는 말 대신 쓴 ‘고생 끝의 해방’과 ‘사람 된 도리’처럼 자유라는 말에는 정말 많은 표정과 뜻이 있어. 김치를 못 먹는 게 왜 자유의 문제인지에 대한 얘기에서도 그런 것들이 드러나.

 

먼저 ‘자유’라고 하면, 흔히 내가 뭘 하고 싶은데 하지 말라하고 하지 못하게 막는 간섭이나 강요, 위협이 없는 것을 말해. 그런데 통행금지처럼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절대 돌아다니지 마라, 안 그러면 처벌 된다’라는 강압이 없더라도 자유롭지 못한 일은 무지 많아. 사람마다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이 있쟎아. 그런 사람들에게 ‘넌 네 좋은 것을 선택해 할 수 있어’라는 건 말뿐으로 되는 게 아니야. 좋아하는 걸 하려면 그걸 할 수 있는 ‘뭔가’가 필요해. 그 뭔가의 대표적인 것이 지금 세상에선 ‘돈’인 경우가 많지. 내가 그림이 좋았고 또 날 눈여겨본 선생님이 그림에 재주가 있다고 하셔서 내가 미대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는 ‘네가 좋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어. 하지만 미대에 가려면 입시미술 전문 학원을 다녀야 하고 따라서 비싼 학원비랑 재료비가 든다는 걸 엄마는 전혀 몰랐어. 그저 재주가 있다하니 노력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선뜻 그러라 한 거였어. 그걸 아는 나는 간단하게 미대를 포기했어.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그것에 다가갈 수단이 없는 선택은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지. ‘하지 말라’는 강압이 없었어도 말이야. 김치를 먹든 양배추를 먹든 그건 선택이겠지만, 김치를 살만한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건 선택이 아닌 것이지. 그래서 김치 먹기가 힘들어진 것은 자유가 그만큼 없다는 것 혹은 줄어들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이야.

 

김치가 없는 상차림을 생각할 수 없는 나라에서 그게 밥상 위에 못 오를 만큼 비싸진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거야. 많은 사람들이 김치파동이 나기 전이나 후에나 그에 대한 분석과 진단들을 내놓았어. ‘4대강 사업 같은 무분별한 개발 때문이다’, ‘농업천시 때문이다’, ‘환경위기 때문이다’, ‘시장의 큰 손들의 횡포를 방치해서이다’ 등등 말이야. 그런 의견들을 눈치 보지 않고 말할 수 있고, 다양한 의견들이 진지하게 고려되는 분위기라면 뭔가 대책이 나왔을 거고 앞으로의 대책도 믿어볼만한 것 일거야. 그런데 정부 권력자나 시장의 큰손들이 싫어하는 의견이라고 해서 묵살하고, 그런 말하는 사람에게 해꼬지를 한다거나 하면 어떻게 되겠어? 바른 말․책임질 말을 할 사람이 주눅 들어 줄어들게 되고, 쓴 말을 새겨들어서 대책을 세울 가능성도 줄어들 거야.

 

엄마, 노벨상 알지? 그 유명한 노벨상을 탔던 한 경제학자는 이런 말을 했어. 언론이 자유로운 국가에서는 사람이 굶는 일 같은 건 생길수가 없다고. 왜냐하면 언론이 자유로우면 무슨 문제가 곪아 터지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떠들어대기 때문에 사람들이 미리 문제를 알고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거야. 그렇게 되면 굶는 일 같은 건 생기지 않는다고 말이야. 또 그 학자가 한 말은 지금 세상에 굶주림이 발생하는 것은 식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는 것이야. 사실 먹을 것은 풍족한데, 사람들의 수중에 그걸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굶주리게 된다는 거야.

 

이 학자의 말을 우리 형편에 비춰 보면 이런 말이 돼. 김치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그걸 사 먹을만한 돈을 가진 사람이 줄어들었다는 것이야. 생계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낮은 임금을 받고 있기 때문이고, 세금을 걷는 일 등에서 부자에게 오히려 유리한 정책을 펴기 때문에 소득불평등이 심해져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거야. 소득불평등이 심하면 민심이 뒤숭숭하기 마련이쟎아. 정부에 대해 불평하거나 쓴소리를 하는 게 듣기 싫어서 당국은 입단속에 나서게 되지. 바른말 하는 사람들을 자르거나 가짜 정보를 과대포장해서 널리 알리는데 엄한 애를 쓰게 돼. 그러면 사람들의 말할 자유가 더 많이 억압되고, 그런 억압의 결과로 시민들은 필수적인 정보와 판단의 근거를 얻지 못하게 돼. 시민의 감시와 쓴소리에서 벗어난 정부는 불평등한 판단과 결정을 계속하게 되고 그러다보면 김치 파동과 같은 재앙이 벌어진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하지 말라’만이 아니라 김치를 먹을 수 있는 길이 막막해진 것도 자유의 문제인 거야. ‘말하고 듣고 따져볼 수 있는 자유’와 굶주림이 관계돼 있는 것처럼 우리 삶의 많은 문제들은 자유로 연결돼 있어. 특히 엄마가 늘 강조하는 ‘사람된 도리’와 자유는 아주 끈끈한 관계야.

 

자유를 느낀다는 건 사람사이에서 서로의 처지를 느끼고 이해하는 일과 같아. 서로 처지를 이해하면 서로에 대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궁리하게 돼쟎아. 또 같이 힘을 합쳐서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돼쟎아. 그런 관심과 책임감 속에서 같이 누리는 자유가 인권에서 말하는 자유라고 할 수 있어. 엄마가 ‘징그러워’하는 ‘자유’는 제 잇속대로 제 편한 대로만 하려하고 궂은일은 피하려는 거쟎아. 그러니까 엄마가 말하는 ‘사람도리’라고 하는 것과 자유는 별로 다른 것이 아니야.

 

시골로 귀농한 후배들이 있다고 했쟎아. 걔들이 바쁜 틈틈이 채소를 상자 가득 보내주면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엄마한테도 맛뵈기로 가져간적이 여러번있어. 그때마다 엄마는 반찬거리가 생겼다고 반색을 하쟎아. 그 후배들과의 관계 때문인지, 어느 날부터 농산물을 보면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게 됐어. 한여름의 김매기, 비닐하우스 안의 뜨거움, 비오면 모종이 상할까봐 전전긍긍하고 새벽잠 설치며 한밤중까지 랜턴까지 끼고 일하는 그 고됨을 무시할 수가 없어.

 

김치 파동은 김치를 사먹는 사람들의 자유문제만이 아니야. 그걸 생산하는 사람들의 삶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김치파동이 있기 전에도 농민들은 늘 불안하고 팍팍한 삶에 대해 호소했어. 하지만 농민을 직접 보지 않고 수퍼마켓에 진열된 물건을 살 뿐인 소비자인 우리는 수퍼마켓의 가격표가 거슬리지 않는 한 농민의 얼굴을 떠올릴 일이 없었지. 배추 한포기가 만원이 넘는다는 호들갑속에서 일찌감치 밭떼기로 넘겼다는 농부가 받았다는 형편없는 가격에 대해 들은 사람들은 ‘아까워’라는 말을 남발하쟎아. 무슨 횡재를 놓친 것처럼 말이야. 하지만 그 농부가 김치파동이 날 줄 알고 아껴두었다가 배추를 비싸게 팔 수 있는 환경이었다면 애시당초 김치파동 같은 게 날 리가 없지.

 

동네시장 귀퉁이에 앉아 채소를 파는 사람들도 배추값이 올랐다고 수지맞을 일은 전혀 없어. 시골의 농부와 동네 시장과 평범한 사람들의 밥상을 초라하게 만드는 건 서로 얽히고 설킨 문제니까 말이야. 생산자를 목조르고 동네의 작은 가게를 죽이고 소비자를 울게 하는 손은 어차피 같은 손이거든.

 

소위 자유를 좋아한다고 우기는 어떤 사람들은 이 손을 그냥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불러. 세상의 자유 중에 최고 좋은 자유는 시장의 자유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야. 이 사람들 말에 따르면, 시장을 가만 내버려두면, 사람들이 다 알아서 열심히 살고 제일 좋은 것을 쫓아다닐 테니까 세상이 절로 좋아질 거래. 그래서 정부나 노동조합, 인권운동 같은데서 불평등이문제다, 소득재분배를 해야한다느니 어쩌구 하면서 시장 돌아가는 일에 간섭을 하고 기업활동에 방해를 하면 잘 돌아갈 일에 문제가 생기니까 가만 놔두는 게 최고라고들 말해. 가만 놔두는 게 그 사람들에게는 자유라는 말의 뜻이야. 말은 가만 놔두는 거라고 하지만 그게 어디 가만 놔두는 건가? 불의한 일이 있을 때 아무말 안하는건 가만 놔두는게 아니고 불의한 쪽의 편을 드는 일이쟎아. 강자와 약자가 맞붙을 때 가만 놔두는 건 약자한테 깨지라는 말과 같은거쟎아.

 

엄마 말처럼 사람간에 도리가 있듯이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만든 시장에도 도리가 있는것 아니겠어? 길거리에 교통신호가 있듯이 시장에서도 해야 할 일과 해선 안될 일이 있고, 그것에 대한 규칙을 정하는 건 바로 사람이야. 엄마가 믿는 하나님 말고 이 세상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할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누군가 득을 봤다면 그건 누군가 손해를 봤다는 것이고, 누군가 승리했다면 누군가 패배했다는 것이지. 대기업이나 대형마트들은 ‘좋고 싸니까 우리한테서 사는 것 아니냐’고 하지만, 누구에게 싸다는 건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싼 가격을 위해 많이 뺏겼다는 말이야. 물론 더 노력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앞서 나갈 수도 있지. 그런 경우에는 당연히 한목소리로 칭찬해 주쟎아. 우리가 문제삼는 건 사람을 헐값으로 부려먹는다거나 농부같은 생산자에게 제 값을 안준다거나 하는 일이야. 또 시장을 통째로 다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 눈치도 안볼 조건이어서 제 맘대로 횡포를 부린다거나 세금으로 닦은 도로와 통신망 등 사회시설을 누구보다도 많이 이용해놓고 사회에 대한 기여는 생각도 안하는 기업의 행태를 문제 삼는 거지.

 

시장이란 늘 사람들의 행동으로 만들어온 것이야. 다른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사람들이 조작하는 것인데, 그럼 정의롭게 조작해야 하는 것이지. 생산자인 농부나 도시의 작은 상인이나 소비자에게 정의롭게 말이야. 생산자인 농부가 수지타산이 안맞아 제초제를 뿌려 애써 키운 작물을 죽이거나 트랙터로 갈아엎게 만드는 일이 없어야 하고, 작은 가게를 운영하던 사람들이 다 망해서 큰 가게에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살아가고, 소비자인 사람이 열 지갑이 없는 일이 없도록 말이야.

 

요즘 엄마 같은 방식의 소비습관이 뜨고 있는 것 알아? 엄마처럼, 동네에 아는 사람들을 찾아 동네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습관은 대형업체의 등장으로 구습이 됐다가 요즘 ‘윤리적 소비’라는 말로 되살아나고 있어. 다소 불편하더라도 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한다거나 되도록 지역에서 이웃들이 생산한 물건을 쓰려하고, 싼 가격보다는 공정한 가격을 찾아 치르려고 하고, 좀 더 환경을 생각한 물건들을 찾아 쓰는 노력들을 말해. 엄마는 동네사람, 아는 사람의 집을 늘 찾아다녔쟎아. 코 앞에 더 싸고 더 좋은 가게가 있더라도 말이야. 난 머리를 깍아도 항상 엄마가 아는 사람집에 데려가는 게 싫었어. 엄마 아는 동네 사람이라고 너는 항상 거기가서 머리를 깍아야 한다는게 고리타분했어. 난 엄마가 권하는 미장원이 아니라 친구들이 가는 근사한 메이커 헤어샾에 가서 어울리고 싶어도 말이야. 그런데 엄마한테는 그게 사람의 도리였던 거야. 엄마의 그런 소비습관만으로 모든 것이 당장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가만 놔두는 게 아니라 뭔가 바꾸기 위한 시작일 수는 있을 거야. 인권의 역사에는 법과 제도를 바꾸고 때론 세상을 뒤엎어버리는 엄청나 보이는 일들이 많아. 아무리 엄청난 일이라도 그건 하나같이 사람들이 한 일이야. 서로의 처지에 대해 공감하는 사람들, 내게 손해가 되더라도 책임지는 일을 같이하려는 사람들이 말이야. 절이고 씻고 다듬고 버무려 오랜 기다림 속에 시원하고 감칠맛 나게 익어가는 김치처럼 우리네 삶도 익어갈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말이야.

 

서양 사람들은 인권을 말할 때 ‘빵과 자유’라는 말을 자주 써. 그 사람들은 빵을 주로 먹으니까 그런 말을 했겠지. ‘빵’을 먹어야 사람이 살아가니 어느 누구도 빵먹는데서 제외되면 안되니까 여기서 ‘빵’이란 말을 사람 사이의 평등이란 말로 바꿀 수도 있어. 그러니까 ‘빵과 자유’라는 말은 ‘빵(평등)’이 있어야 사람은 자유롭고, 자유로워야 사람이 빵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 돼. 우리식으로 바꿔 말하면 ‘김치와 자유’가 되겠네. 안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하지. 자유가 고통받으면 평등도 고통받고, 그 반대도 똑같다는 말이야. 그럼 그 반대로 자유로운 만큼 평등하고 평등한 만큼 자유롭다는 말도 될 거야. 혼자 살 궁리 말고 더불어 살 궁리를 하는 게 자유를 얻는 방법이란 말도 돼.

 

엄마가 고생 끝에 올 낙으로 아껴둔 자유란 말, 이젠 아끼지 말고 썼으면 해. 엄마의 인생속엔 언제나 자유가 있었고, 그 자유 때문에 엄마는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주고받으며 살아왔으니까 말이야. 올 겨울에 배춧값이 얼만큼 오르든 내리든 어쨌든 적은 양이라도 엄마는 김장을 하게 되겠지. 그리고 아무리 비싸더라도 이집 저집에 김치를 선물로 안기겠지. 비슷한 재료로 담가도 집집마다 다른 맛이 나는 김치, 그런 개성이 자유의 맛인 것이고, 서로에게 선물로 안기는 김치는 우리에게 먹는 것 이상의 것이야. 대가없이 주는 선물을 빼앗긴 사회는 인간사회가 아니라 동물의 왕국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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