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1. 3. 2

작성자 : 류은숙

이글은 격월간 <사람> 2011년 3-4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엄마, 엊그제도 통장에서 빠져나간 보험료를 보며 난 한숨을 쉬었어. 왜냐고? 엄마는 평생 보험을 부어왔어. 자식들 이름마다 교육보험이든 암보험이든 들어놨다가 큰돈이 필요할 때면 그걸로 대출을 받고, 쪼들릴 때면 원금을 떼이면서 해약하는 일을 반복했지. 잠깐은 숱한 동네 아줌마들이 하는 것처럼 보험 모집인을 하기도 했어. 엄마는 내 이름으로 된 암보험도 하나 들었어. 그걸 몇 년 동안 엄마가 붓다가 내가 졸업할 무렵 나한테 넘겨줬지. 이제 네가 부으라고 말이야. 명색이 인권활동가인 나는 ‘공공복지’가 아닌 ‘사보험’에 의탁한다는 것이 탐탁치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넘겨받았어. 10년 만기였던 그 보험의 만기만을 기다렸지. 만기가 되던 해, 나는 해방감을 느꼈어.


그런데 웬걸, 만기가 되자마자 엄마는 보험전환계약을 하고 내게 서명하라 했어.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로 엮어진 그 보험은 이름 자체도 복잡했지만 약관이란 걸 아무리 읽어봐도 이해되는 구석이 없었어. “보험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내게 엄마는 “시집도 안 가고 혼자 살려면 보험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성을 냈지. 결국 엄마 고집대로 난 서명을 했고, 보험료는 무려 4배나 올랐고, 만기는 20년으로 늘어났어. 무엇보다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내 생각대로 보험 계약 하나 맘대로 처리할 수 없는 현실에 짜증났어.


그리고 비슷한 무렵, 큰돈이라곤 쓸 줄 모르던 엄마가 백만 원에 가까운 요를 사들였어. 무슨 요가 그리 비싸냐고 했더니 “내가 중풍이라도 걸리면 자식들 고생할 테니 큰 맘 먹고 샀다”고 했지. 숯이나 뭐 그런 것들로 만들어져서 중풍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말을 믿고 덜컥 사버린 거야. 노인들을 상대로 바람을 잡아 그런 물품을 판다는 얘기를 뉴스로만 봤어. 그런데 바로 울 엄마가 그런 물건을 산 것이지. 물론 그 장사치들은 중풍, 치매 등으로 자식들 고생시키면 안 된다고 온갖 공포를 불러일으켰겠지.



불안에 대처하는 사회적 방법


이렇게 불안은 우리 생활 도처에 있어. 큰 병 걸릴까, 다칠까, 직장을 잃을까, 홀로 될까, 자식에게 짐이 될까……. 이런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혼자 힘으로, 그게 안 되면 가족의 힘으로 방법을 찾지.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불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어. 반면 개인이나 가족에게만 맡겨두는 게 아니라 사회에서 공동으로 대처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어. 엄마가 날 걱정해서 들게 한 보험을 내가 싫다고 한 이유는, 내가 두 번째 방법을 좋아하기 때문이야. 이 두 번째 방법을 흔히 ‘사회적 권리’ 또는 ‘복지’라고 불러.


‘사회’라는 뜻은 우리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을 맺었다는 뜻이야. 결연했다는 것이지. 연을 맺은 사람들끼리 서로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고 받을 수 있는 것을 권리라고 해. 그런 사회적 권리가 표현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사회복지야. 사회복지를 하는 이유는 우리들 삶이 온갖 불안에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지 않도록 서로 감싸고 입혀주자는 거야.


그런데 불안을 덮어주고 감싸준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야. 옷을 입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쪽을 째서 보이기 싫은 걸 내보이게 할 수도 있어. 초등학교 때 학기말이면 의무적으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야 했어. 형편에 상관없이 모두가 정해진 액수를 내야했지. 그 돈이 누구에게 가는지는 몰랐지만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 쓰인다 하니 그런가보다 했어. 근데 6학년 때는 달랐어. 그렇게 걷은 돈을 담임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제일 가난한 두 친구에게 주기로 했다고 말씀하셨어. 남학생, 여학생 한 명씩에게 준다면서 아이들에게 추천을 하라 했지. 아이들은 작은 쪽지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어서 냈고, 나는 누구의 이름을 적었는지 기억이 안나. ‘가난한 친구’를 한 명 찍는다는 게 너무 힘든 일이어서 끙끙거렸던 기억밖에는 없어. 그 결과 늘 코를 흘리던 남자아이 한 명과 내가 그 돈을 받게 됐어. 선생님은 큰 소리로 우리 둘의 이름을 부르고 ‘친구들의 정성’이라면서 공책 몇 권과 연필 몇 자루, 그리고 봉투 하나씩을 우리에게 주셨어. 그 순간 교실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나만 그 가운데 총천연색이 된 느낌이 들었어. 그날부터 같이 등하교를 하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질 못했어. 친구들도 쭈뼛쭈뼛 내게 말 걸기를 어색해했고, 나도 같이 어울리느니 혼자인 게 맘 편했지. 6학년 말이었던 게 그나마 큰 다행이었어. 곧 졸업이었으니까.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질적인 궁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은 아니야. 관계로부터 버려지는 공포, 사람 사이에 끼지 못하는 공포로부터도 벗어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굶주림이나 질병 같은 불안에서 벗어나는 것 말고 복지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어. 누구나 사람사회에 섞여서 사람노릇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한 거라 보고 복지는 그걸 존중하기 때문에 하는 거야.


누구는 밥상에서 밥을 먹고 누구는 밥상 아래서 떨어진 것을 주워 먹는다면 똑같은 양의 밥을 먹더라도 사람으로서 먹는 게 아닌 거야. 나란히 밥상에 앉아서 먹을 수 있을 때 두런두런 말도 주고받고 서로의 표정도 살피고 할 수 있어. 밥을 먹느냐 안 먹느냐 만이 아니라 어떻게 먹느냐, 서로 어떤 관계를 맺느냐, 얼마나 구성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느냐가 복지를 하는 중요한 이유야.


따뜻한 잠자리가 있는 사람이 지하도에서 상자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동료시민으로서 생각하기는 어려워. 다가올 선거에 대해 침을 튀기며 비평을 하는 사람이 선거용지 받을 주소지조차 없는 사람과 얘기하기는 어려워. 나와 ‘같은’ 사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서로에게 보장해주지 않고서야, ‘같은’ 사람으로서 ‘존중’한다는 말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에 그치게 되는 거야. 그래서 ‘사회적 권리’로서의 복지는 불쌍해서 돕는 것과는 달라. 우리 모두가 사회의 구성원이니까 사회에 대고 부양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사회적 권리야. 내 처지가 불행하고 불쌍해서가 아니라 내가 사회의 일원이니까 당연히 나를 이 사회 속에서 당당한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보살펴줘야 한다는 거야.


드레스코드는 누가 정하는 걸까?


사람들은 저마다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달라. 그럼 어떤 삶의 필요를 사회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권리라고 어떻게 결정할까?


엄마, 이런 저런 모임에 갈 때면 그 자리에 어울리는 옷을 갖춰 입지? 머리 모양부터 옷, 구두까지 신경 쓰잖아. 그걸 젊은 사람들은 ‘드레스코드’라는 외래어로 표현해(옷 입는 법, 옷 입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어). 드레스코드가 맞지 않으면 그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되고 대화에 끼지 못하게 돼. 심한 경우엔 문 앞에서 입장을 거절당하는 일도 있어.


이 드레스코드와 관련된 영화가 기억나. 외국영화에선 파티에 갈 때 남자가 여자를 모시러오는 장면이 많이 나와. 여자는 예쁘게 차려입고 데리러 올 남자를 기다리지. 내가 본 두 편의 영화에서 여자 주인공들은 다 가난했어. 둘 다 파티 같은데 가본 적도 없었어. 그래서 한 여자는 자기가 가진 옷 중에 제일 좋은 옷을 골라 입어. 하지만 그녀를 데리러 온 남자는 그 옷이 자기가 데려갈 파티에 어울리는 옷이 아니었기 때문에 난처해해. 그는 여자를 옷가게에 데려가서 그 파티에 올 사람들이 입을 법한 세련된 검정 드레스를 골라 입혀. 그 옷을 입고서야 여자는 파티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었어.


다른 영화 속의 여자는 어땠는지 알아? 큰돈을 들여 세련된 드레스를 장만해 놓았는데 딸이 난생 처음 파티에 간다는 걸 안 아버지가 선물로 아주 우스운 분홍 드레스를 사놓은 거야. 아버지 눈에는 예뻐 보이는 옷이니까.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선물을 거절할 수 없었던 딸은 고심 끝에 자기가 사놓은 옷을 두고 분홍 드레스를 입어. 여자를 데리러 온 남자는 그 옷을 보고 난처해하지. 파티에 가서도 자기 외투로 여자의 옷을 덮어주고 그녀 옷이 다른 사람 눈에 뜨일까봐 안절부절 해. 결국 남자가 자기를 창피해하는 걸 안 여자는 파티장 밖으로 뛰쳐나와. “당신 눈에는 초라해보일지 몰라도 이건 아버지의 정성이고, 놀림 받을 줄 알면서도 선택한 건 나”라고 소리치면서 말이야.


드레스코드란 건 원래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 파티에 어울릴 법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만든 규칙이야. 이 규칙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다고 여기는 것을 파티장에 오려는 사람들에게 요구하지. 자기들의 기준으로 볼 때 아버지의 정성스런 마음을 담은 선물인 분홍색 옷을 거절하는 거야. 남자가 즉석에서 사주는 옷을 입고라도 드레스코드를 맞추는 여자와 자신이 택한 분홍색 옷을 고집한 여자, 엄마는 어느 쪽이 맘에 들어?


어떤 삶의 필요를 사회 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누릴 권리로 볼 건가는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거야. 사회에서 연을 맺은 우리들이 결정한다는 말이지. 똑같이 ‘복지’라는 간판을 달고 있어도 나라마다 사회마다 그것을 실천하는 방식은 달라. 복지를 설계하고 운영하는데 있어서 개인이 감당할 몫과 사회가 감당할 몫을 어떻게 정하는가도 달라. 드레스코드가 다른 것처럼 말이야.


가령 가난한 사람들을 불결하고 위험한 존재로 보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서 복지를 하는 쪽이 있어. “너무 지저분해서 전염병의 위험이 있다”, “너무 가난해서 범죄의 위험이 있다”, 이런 식으로 보는 거야. 위험을 관리하는 수준에서 해결하려고 하니까, 사람다운 삶의 필요를 최소한도로 낮추고 가난하다는 것을 입증한 사람들에게만 복지혜택을 주려고 해. 복지를 받는 사람들의 자존감 따위엔 관심이 없기 때문에 창피를 주는 것이 오히려 복지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스스로의 자립의지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이런 경우엔 드레스코드를 결정하는 사람들이 아주 일부로 제한돼 있어. 소위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삶의 필요를 선택하여 그것만 복지의 대상으로 결정해버려. 복지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을 분류하는 것도 일부 전문가들이 하는 일이야. 그래서 복지를 찬성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든 복지제도에 찬성하는 것은 아니야. “우릴 뭐로 보는 거냐?”고 반발할 때가 많아. “우리를 당신들끼리 정한 드레스코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하지 마라, 우리 삶의 필요는 일부 전문가들의 잣대가 아니라 우리가 결정한다. 공공복지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저렇게 살라고 삶의 방식을 강요하지 말라”고 말이야.


대놓고 복지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아. 잘하면 상을 받고 못하면 벌을 받는 게 공평한 세상 이치라고 주장해. 자기관리를 잘 못해서 삶이 곤궁해진 사람들에게 뼈 빠지게 노력한 사람들의 몫을 돌리는 건 부당하다는 거지.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복지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자기관리의 성적을 매기지 못할 만큼 비참한 상황의 사람들에게만 사람 된 정으로 베풀면 그만이라는 거야.


또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복지를 할 거라면 효율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어. “복지라는 미명하에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란 건 굼뜨기 마련이니까 빠릿빠릿한 시장서비스에 복지를 맡기자”, “‘복지수급자’라고 불리는 것보다 ‘고객님’, ‘소비자님’이라 불리는 게 더 좋지 않냐?”면서 공공복지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어. 하지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애초에 왜 복지를 생각하게 됐느냐를 까먹고 있어. 생활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격을 매겨 돈으로 사고파는 시장에서 해결할 수 없으니까 복지를 하는 거잖아. 우리 삶의 어떤 필요를 가격이 매겨진 상품이 아니라 누구나 마실 수 있는 ‘공기’같은 것으로 만들자는 게 복지인 거야. 일등만 살아남고 강자들이 다 먹어치우는 질서에 대해 방호벽을 세우는 게 복지야. 그런데 이 사람들 말대로라면 또 돈 주고 사야 하는 상품이 복지가 되는 거야. ‘선택의 자유’가 이런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이야. 선택의 자유? 좋은 말이지. 그런데 선택의 자유를 공공성 위에서 할 수는 없는 것일까?


초등학교 때 하던 유치한 일 중에 하나가 책상에 줄긋기였어. 친구끼리 토라지거나 짓궂은 남자애와 짝이 됐을 때 흔히 하던 일인데 책상 중간에 선을 긋고 넘어오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였지. 이쪽은 ‘내꺼’, 저쪽은 ‘네꺼’라고 하면서 말이야. 하지만 아무리 선을 그어도 그 책상을 유지하는 건 공동의 책상다리가 있기 때문이었고, 그건 나눠가질 수 없었어. 한쪽 다리가 없으면 그건 더 이상 책상 구실을 할 수 없을 테니까. 기본적인 삶의 필요를 모든 사회 구성원의 권리로 정하고 그걸 개인의 힘이 아니라 공공의 힘으로 해결하자는 건, 개인의 삶을 망치자는 게 아니라 개인의 삶의 질을 높이자는 뜻이야.


앞에서 말한 것 말고 복지에 대한 또 다른 접근이 있어.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이미 파티장 안에 있는 것으로 보고 특별한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지 않는 거야. ‘우리 사회’라는 ‘파티장’ 안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자리가 마련돼 있다는 뜻이야. 그러니까 가난한 걸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정도는 당연한 권리로 누린다고 서로 인정하는 거야.


어떤 삶의 필요를 사회구성원이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볼 것인지도 일부 전문가가 아니라 다 같이 의논해서 결정해. 그런 결정을 위해서 하는 일이 정치인 거야. 사람들은 투표로도 의견을 표시할 수 있고, 지역사회, 직장, 학교 등 자신들이 처한 다양한 자리에서 의견을 모을 수 있어. 사회에서 공동으로 책임질 만한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삶의 필요라고 여겨져 온 건 아이 낳아 기르기, 교육하기, 건강돌보기, 장애인과 노인 돌보기, 기본적인 주거 등이야. 이밖에도 항목은 많을 텐데 그 중에서 우선순위를 결정해서 공동의 곳간을 사용하는 일을 결정하는 게 정치가 하는 중요한 일이야.



복지란 공동의 곳간을 채우는 일


복지는 내가 물질로 누리는 밥이나 학비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공동의 곳간을 채우는 일, 어디에 우선적으로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 자체에서 시작 돼. 공동의 곳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얼마나 기여할 것인지를 정해야겠지. 한국보다 복지를 잘 하는 나라들에선 대개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들이 더 많이 기여하게 돼있어. 왜냐면 많이 번 사람들은 그만큼 사회적인 자원을 더 많이 쓰고 사회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은 것이니까 그만큼 더 많이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지. 한국처럼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은 돈을 내 집을 얻고 아이를 교육시키는 게 아니라 부자는 더 많은 돈을 내게 해야 한다는 말이야. 그걸 ‘억울하다, 아깝다’고 여기지 않고 모든 사람의 권리를 위해 서로 기여하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 정신을 사회적 연대라고 해. 이런 사회적 연대의 구체적인 얼굴이 복지가 되는 거야.


돈이 많은 사회라고 해서 복지를 잘하는 게 아니고 돈이 없는 사회라고 못하는 것도 아니야. 세계 제일의 부자들이 제일 많이 모여 사는 나라의 복지 수준은 형편없다는 증거도 있어. 왜냐하면 사회적으로 돈을 어떻게 어디에 쓸지,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조정하는 일이 없으면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산처럼 쌓인 돈도 소용없다는 것이지. “복지는 좋지만 돈은 어떻게 마련할래?”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돈과 복지를 따로 떼어놓고 선후의 문제로 생각하고 있어. ‘복지와 돈’은 선후가 아니라 같이 존재하는 문제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부가 소수에게 불공평하게 쏠리고, 대다수에게 불리하게 분배되는 문제와 복지문제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아. 복지는 불평등의 뒷감당을 위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부의 생산과 분배를 정당하게 하는 일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어. 그에 덧붙여 복지는 우리가 생산에 신경이 팔려서 놓쳐버린 사람들에 대한 더 세심한 돌봄을 자극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의 바람대로 복지제도가 사회적으로 잘 마련돼도 남는 문제들은 물론 있을 거야. 예를 들어 노인복지가 잘 돼서 엄마가 더 나이 들어 설령 아프게 될 때(절대 바라지 않는 일이지만) 무료로 돌봄을 받을 수 있다고 쳐.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공복지로 제공되는 서비스에만 엄마를 맡겨놓고 생전 찾아보지도 않는다면 엄마 맘이 그냥 편키만 할까? ‘딸년이라고 찾아주지도 않네’라며 쓸쓸해하겠지. 마찬가지로 주변에 곤란한 사람이 있는데 “국가는 도대체 뭐하는 거야? 내가 세금 냈는데 저런 사람들 돌보지 않고”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당장 손 내밀 수 있는 일은 생각지도 않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복지제도를 잘 갖추더라도 그 기반이 되는 사람에 대한 존중과 애정, 거기서 나오는 연대의 정신이 같이 가지 않으면 로봇에게 돌봄을 받는 것과 같이 차디찬 돌봄이 될 수 있어. 복지를 빚어내고 계속 끌고 갈 수 있는 힘은 사람에 대한 존중에 있다는 건 아무리 되풀이 말해도 모자라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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