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1. 1. 20

작성자 : 류은숙

* 이글은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2011년 1.2월호에도 실렸습니다.



엄마에게 쓰는 편지 5) 남 좋은 일만 시키는 차별(류은숙)

엄마, 내가 도라지 무침만 보면 울컥하는 것 알아? 어릴 때 나한테는 김치만 달랑 든 도시락을 싸주면서 입맛이 까다로운 둘째에게만 새콤달콤하게 도라지와 오이를 버무려 싸주었쟎아. 집에서도 그 반찬에는 젓가락도 못 대게 했어. “넌, 아무거나 잘 먹지만 네 동생은 아니잖니. 이건 동생만 줘라.”라고 하면서 말이야. “아무거나 잘 먹는 게 죄지” 구시렁거리며 난 밥만 씹어댔어. 어느 책에서 봤는데 원숭이들도 먹을 것으로 차별하면 음식을 집어던지며 화를 낸대. 부모에게 ‘차별하지 말라’고 하면, 어느 부모나 ‘열손가락 깨물어봐라, 안 아픈 손가락있나?’란 대사를 내뱉지. 그런데 과연 그럴까?

도라지 무침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밀 일이 있어. 맘껏 맛있는 것 못해주는 게 속상한데 거기에 밥도 잘 안 먹는 둘째가 더 맘에 걸려서 엄마가 그랬다는 걸 알면서 내가 괜히 투정부려본 거야. 하지만 지금 말하려는 문제는 내 반찬투정과는 좀 달라.

여느 엄마들처럼 엄마는 자식들 성적에 대한 욕심이 대단했어. 엄마가 고생고생해서 학교에 보냈으니 공부는 ‘당연히’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근데 ‘당연히’ 공부를 잘하면, 모두가 일등을 하게?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쟎아. 꼴찌에서 두 번째도 아니고 정말 꼴찌를 했던 막내, 그리고 재수, 삼수도 아니고 오수를 해야 했던 남동생이 엄마한테는 늘 한숨거리였지. 나와 둘째의 성적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엄마는 공부를 못할수도 있더란 걸 받아들이지 못했어.

속상해서였겠지만 “내가 저걸 아들이라고 낳고 미역국을 먹었지”란 말을 남동생에게 했던 걸 아직도 기억해. 공부 때문에 주눅이 들어 인문계 고교에 안가겠다는 막내에게 “내 자식인게 창피하다”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였어. 어느 날 청소하다가 막내의 일기장을 우연히 보 게 됐는데, 정말 가슴 아픈 말들이 적혀있었어. 엄마한테는 그때 차마 말 못했지만, 그렇게 착하고 순한 아이가 살기 넘치는 저주와 원망의 말을 공책 가득 적어놓고 있었어.

엄마한테 상처를 주려고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야. 우리 집만 그런 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래도 우리 식구인데’라고 감싸며 그런 일 없는 척 아닌척하지만 사실 서로 비교하고 상처주는 일이 없었던 집은 드물거야. 형제자매끼리 친척들끼리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게 싫어서 명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흔한 걸 보면 말이야. 그리고 엄마만 우리를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한 것도 아냐. 나도 엄마 아빠를 다른 집 부모와 비교하곤 했어. 심할 때는 ‘내 부모는 따로 있다. 무슨 일이 생겨서 날 이 집에 맡긴 거다. 어느 날 진짜 부모가 고급 승용차를 타고 날 데리러 올 거다’란 상상놀이를 하기도 했어.

내 집안에서부터 시작해 이 세상에는 비교하고 비교당하는 일이 천지야. 문제는 누가 무엇을 가지고 비교할 힘을 갖고 있느냐는 거야. 가령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심하다고 느끼는 게 학벌차별이래. 학벌은 학교에 들어갈 때 한번 결정 나는 일인데 그것으로 평생의 사람대접이 좌우되니까 너무 심하잖아. 부당하다 해도 그게 평생의 사람성적표가 되니까, 엄마도 늘 성적타령을 했겠지. 그럼 그런 학벌을 가지고 비교하길 강조하는 사람은 누구겠어? 좋은 대학 나와서 그걸로 꽤나 행세할 수 있는 사람들이겠지. 우리 막내 같은 사람이 학벌로 사람을 판단하는 걸 좋아할 리는 없잖아?

그래서 힘이 있기 때문에 그런 비교기준을 만드는 사람들은 자기를 표준으로 해서 남을 판단해. 자기를 기준으로 선과 악, 우월한 것과 열등한 것, 지배하는 쪽과 지배받아야 할 쪽을 결정해. 그러니 비교 기준 자체가 강한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자기들의 색안경인거야. 허구한 날 중에서 택일을 하는 것처럼 하고많은 사람의 특성 중에서 힘센 쪽이 찍어서 이용하고 싶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지. 그렇게 골라낸 특성에 대해서는 온갖 흉을 보고 근거 없는 나쁜 소문을 갖다 붙여. 오랜 시간 그런 흉을 듣다보면 대개 사람들은 ‘정말인가보다’하고 믿게 돼. 그렇게 되면 추문의 주인공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이고,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것조차 꺼리게 돼.

나 어렸을 때 엄마가 살림에 보태려고 우리도 세로 살던 집 방 두 개 중에 하나를 세놓았던 일 기억나? 어떤 부부가 계약금 5만원을 들고 와서 다음날 이사하기로 했어. 그런데 다음날 와서 무슨 사정이 생겨 이사를 못하게 됐다고 계약금만 떼이고 갔지. 그때 이웃들은 “◯◯도 출신이라 찜찜했는데 잘된 일”이라고 했어. 엄마도 거들면서 “남자 인상은 그래도 괜찮은데 그 부인 인상이 맘에 걸렸다”고 “◯◯도 여자라서 그런 것 같다”고 했어.

난 ◯◯도 출신인 게 뭐가 문제인지 궁금했어. 커서 알고 보니 우리나라의 지배층이 △△도 출신이어서 그 반대편의 도 사람들을 경제로나 정치로나 못살게 굴었던 거였어. 그래서 ◯◯도 출신들에게는 ‘뒷통수를 잘 친다’, ‘음흉하다’는 등의 꼬리표가 붙어 다녔어. 대학에서도 지배층 들과 출신이 같은 도 아이들은 그 지역 사투리를 자랑스럽게 쓰는데, 억압받는 지방 아이들은 또박또박 서울말을 썼어. 자기 출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말이야. 지금이야 옛일이 돼버렸지만, 나는 “◯◯도 출신이라 찜찜했다”는 사람들 말이 잊히지 않아. 정치로나 경제로나 힘센 쪽은 ‘◯◯도 출신’이란 기준을 빼들었고, ◯◯도 출신에게 근거 없는 추문을 갖다붙이고. 사람들은 그런 말을 믿게 됐고, 그래서 ◯◯도 출신이 직장을 구하고 셋방을 구하고 공직에 진출하고 결혼을 할 때마다 걸러져서 차별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됐어.

이게 ‘지역차별’이라면 다른 차별도 비슷한 모양새를 하고 있어. 일제시대 일본인과 조선인, 지금의 한국인과 동남아인, 남성과 여성, 어른과 아이,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등의 관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 앞의 것은 좋은 쪽이고 뒤의 것은 나쁜 쪽이라고 단순하게 밀어붙이는 거야.

 

사실 ‘다르다’는 것으로는 할 말이 없어.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도 같은 게 없듯이 사람은 모두 다르거든. 그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야. 입 아프게 두 번 세 번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매순간 달라지고 있잖아.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라. 사람은 전부 다른 게 당연하니까 차이를 ‘인정’한다는 말도 우스운 말이야. 내가 인정한다고 해서 혹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차이가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

차이가 당연하다고 해서 사람마다 갖는 특징이 ‘원래 정해져있다’는 뜻은 아니야. 흑인은 ‘원래 게을러’라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주장했지만, 원래 게으른 특징을 자연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어. 오늘날 잘 사는 나라들은 흑인들을 끌어다가 노예노동을 시켜서 잘 살게 됐는데, 왜 하필이면 ‘게으름뱅이’들을 일꾼으로 부렸을까? 이상하지 않아?

엄마는 내가 뚱뚱한 걸 엄청 싫어하잖아. 그래서 늘 잔소리가 “난 널 예쁘게 낳아줬는데 네가 관리를 잘 못해서 그리 됐다”고 하잖아. 만약에 누가 엄마보고 엄마 딸은 “원래 그렇다”고 하면 어쩌겠어? 차이가 당연하다는 것은 자연적으로 원래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이 아니야.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한 거니까 그 차이를 가지고 사람 사이에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를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야. 어떤 차이를 가지면 유난한 대우를 하고 어떤 차이로는 모욕과 무시를 하는 걸 문제 삼아야지, 차이 자체를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거야.

차이를 무시하는 건 내 자신을 무시하는 것과 같은 거야. 나만의 특성, 나를 드러내 주는 차이는 바로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거야.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내가 있다는 건, 타인과의 차이 덕분인건데, 타인의 차이를 지워버리면 나도 같이 지워지는 거야. 타인의 차이를 무시하고 홀대하면, 내가 가진 차이가 제대로 대접받길 바랄 수 있을까?

 

차이를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서 사람 사이에 맺는 관계는 달라질 수 있어.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특성 탓이 아니라 사람들끼리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의 결과야. 곧 차별은 차별받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를 대접하고 누구를 홀대할지를 정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자기 자신의 모습이야. 트집을 잡고 얕잡아 보고 괴롭히는 관계를 맺는 사람이 잘못인 것이지, 그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의 탓이 아니란 말이야.

 

그래서 차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중요한 문제야. 사람들이 차이를 대하는 태도는 크게 세가지로 나눠볼 수 있어. 먼저 ‘참아준다’는 부류가 있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차이를 참아주겠다고 하면서 내 밑으로 들어오라고 한다면 어떨까? ‘넌 한국 사람이 아니지만, 한국사람 취급해줄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그 사람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차이를 지워버리라는 강요쟎아. 네가 입는 그 옷을 입지 말고 네가 좋아하는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널 받아줄게. 그럼 그건 받아주는 게 아니라 굴복시키는 거지.

두 번째는 ‘불쌍하게’ 여기는 부류가 있어. 차이를 동정하는 거지. ‘걷지 못하는 장애인을 봐라’, ‘노숙인을 봐라’, ‘넌 그보다 낫잖니’라는 말은 정말 듣기 싫어. 자신보다 힘든 환경에 있는 사람과 비교해서 내 행복을 저울질해야 하는 거라면 그런 행복 자체가 비참한 거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사람이 가진 장애나 어려움을 그 개인 탓이 아니라 사회적 불운이라 보고 사회 환경을 뜯어고치려 노력하는 거야. 장애인을 보고 혀를 차고 돈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장애인이 사회에서 생활할 때 장애로 인해 겪을 수 있는 불편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만드는 거야.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 개인적 운이 아니라 사회적 불운인 거니까, 엘리베이터를 만들어서 장애인도 지하철을 탈 수 있게 만들면 되는 거지.

세 번째로 ‘혐오하고 못살게 구는’ 부류가 있어. 올해 한국 사회가 들썩인 일이 있었어. 남성간의 사랑을 그렸다는 이유로 <인생은 아름다워>란 드라마가 화제가 됐어.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본 어떤 사람들이 무지 화를 내고,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광고까지 실었어. ‘이 드라마보고 게이(남성끼리 사랑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야)된 내 아들이 에이즈로 죽으면 그 드라마를 방송한 방송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내용이었어. 게이인 사람들이나 그 친구, 가족, 또 에이즈라는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 것이었지. 엄마가 당뇨병을 관리하고 살듯이 에이즈라는 질병도 관리가 가능한 만성질병일 뿐인데, 그걸 무슨 죄 값인 것처럼 취급하면 아픈 사람의 고통이 배가 되는 거잖아. 그리고 동성애자가 에이즈의 근원이란 건 일찌감치 엉터리로 밝혀진 사실이야.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가진 불쾌감과 혐오감을 진리라고 여긴 광고였어.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일부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싸움으로 여기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아. 한국에선 요즘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려 하고 있거든. 이런 사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의도하는 것은 이 법 자체에 물 타기를 하는 거야. 설령 법이 만들어지더라도 별반 힘을 못쓰는 법이 되도록 하려는 거지. 그런데 동성애 문제가 화제가 되면서 은근히 관심이 사라진 부분이 ‘학력 차별’을 금지하는 거였어.

차별금지법을 제일 반대하는 것은 기업들이야. 사람을 고용하고 승진시키고 해고하는 데는 많은 차별이 따르기 마련인데, 그걸 못하게 하는 것은 간섭이라며 기업들이 아주 싫어해. 정부도 마찬가지야. 정부는 모든 시민의 권리를 평등하게 존중한다고 주장하면서 나라를 다스릴 명분을 갖는 거잖아. 그런데 사실은 부자인 시민과 서민인 시민을 구별해서 아주 달리 취급할 때가 많아. 정부는 끊임없이 시민을 분류하고 선별대우를 하면서 안 그런 척 하려 하거든. 그런데 정부나 기업이나 대놓고 차별을 말하면 명분이 깍일 뿐더러 많은 비판과 저항을 받을 수 있어. 그런 판국에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대립이 부각되면 저절로 차별금지법의 힘이 줄어드니까 정부와 기업은 뒤돌아서 웃을 수 있는 거야. 겉으로는 기독교인과 동성애자의 싸움, 군필자인 남성과 여성의 싸움, 명문대와 기타대의 싸움처럼 보이는 일들 뒤에는 사실상 우리 사회의 힘센 세력이 있는 거야.

 

대표적으로 매를 맞고 있는 건 동성애자들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사건을 숨죽이며 바라보며 공포에 떨고 있을 사람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있어. 만약에 자신을 드러내면 동성애자들이 받는 것과 비슷한 취급을 받게 된다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겠어. 공개적인 모욕, 멸시, 공격, 폭력이 예상되기 때문에 주눅이 들고 국가에게 당당히 보호를 요구할 수가 없게 돼. 눈에 드러나지 않고 없는 듯이 있는 사람들, 그런 탓에 하나의 이름으로 뭉칠 수 없는 사람들은 권리를 누리는 게 더 힘들어지는 거야. 그러니까 동성애자들이 대표적으로 당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동성애자들만의 문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야.

 

가령 여성들은 차별받는다는 이유로 ‘여성’임을 드러내고 뭉칠 수라도 있어. 그런데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어떤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병을 드러내고 뭉치기 어렵고, 학력차별의 경우처럼 오랜 정치경제적 고질병인 경우엔 명문대 출신이 아닌 사람들이란 이름으로 뭉치기가 어려워. 그래서 기독교인과 동성애자간의 대결이란 겉모습에만 신경을 쓰게 되면, 우리 사회가 은근히 차별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를 무시하는 결과를 낳게 돼.

 

차별받는 사람들은 ‘화’를 낼 권리가 있어. 비슷하게 싸잡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부당한 일에 대해 화를 내고 다른 대우를 요구할 권리가 있어. 그런데 부당한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과 차이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야. 모욕과 폭력을 당해 화를 내는 건 존엄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차이를 이유로 다른 사람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거야. 가령 장애인이라고 감금하는 일, 동성애자라고 직업을 뺏는 일, 괴롭히고 해치는 일은 안 되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동을 자기 취향이고 자기 자유라고 말하는데, 그런 취향과 자유는 차이가 아니라 범죄인 거야. 살인을 취향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야.

 

차별이 가져오는 제일 무서운 결과는 분열과 애꿎은 사람들끼리의 싸움박질이야. 사회적 불운을 겪는 사람들끼리 창피를 주고 서로를 미워하면 사회적 불운을 고치는데 힘을 합칠 수가 없게 돼. 가령 학력이 낮아서 일하는 만큼 대우를 못 받는 남성이 있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의 절반임금밖에 못 받는 여성이 있다고 해봐.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요구할 때, 남성이 ‘난 여자가 나와 똑같은 임금 받는 꼴은 못 본다. 내가 아무리 못났어도 여자보다는 많이 받아야겠다’고 여성을 차별한다면, 이 남성이 얻게 되는 건 뭘까? 그래서 자기 자존심이 올라갈까? 자기 월급이 올라갈까? 결국 좋아할 건 사장밖에 없어. 일하는 남성이랑 여성이랑 힘을 합쳐서 정당한 임금을 요구하는 일을 사장은 제일 싫어하기 때문에 성차별을 은근히 좋아할 거야. 차별을 통해 타인을 낮춤으로써 내가 올라간다고 생각하는 건 결국 동반추락일 뿐이야.

 

차별받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싸잡아서 부르는 이름을 싫어해. 가령 장애인, 동성애자, 비정규직, 혼혈인, 동남아인, 이런 식의 이름들인데, 인권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이름들이 필요할 때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판단할 때 이걸 ‘깔때기’처럼 사용하는 게 싫은거야. 누구나 자기만의 색깔이 있고 자신이 좋아하는 점을 살려서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 해. 가령 엄마를 ‘노인’, ‘저학력여성’ 이란 깔때기로 싸잡아 부르면 화가 나겠지? 이런 식의 싸잡는 이름에는 엄마가 자식 넷과 손주들을 키워냈고, 스포츠를 좋아하고, 요리를 잘하고, 정직하고 알뜰한 사람이라는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아.

차별을 극복하려면, 깔때기같은 한두 가지 성격으로 싸잡아서 타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대하는 게 중요해. “한 사람 여기, 또 그 곁에〰둘이 서로 마주보며 웃네〰”란 양희은의 노래가사가 있어. 이 노래가사를 들으면 푸근한 맘으로 어떤 구체적인 사람을 떠올릴 수 있어. 마찬가지로 어떤 사건을 대할 때마다 그 사건 속의 사람을 감정과 생각이 있는 한 사람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돼.

난 어렸을 때 내가 ‘하나의 나라’라고 생각했어. 내가 누군가와 말을 하는 것은 외교이고, 내가 문밖에 나가 구멍가게에서 뭘 사는 것은 무역이고, 이런 식으로 말이야. 사회가 싸잡아서 부르는 이름, 그것도 좋은 뜻으로가 아니라 구별해서 대우를 달리하려는 불순한 의도로 싸잡는 이름을 버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의 나라, 하나의 세계로 다루는 게 필요해. 그래야 ‘너는 장애인이고 나는 비장애인인데’, ‘너는 남성이고 나는 여성인데’를 따지지 않고, 사람들끼리 만나서 사회적 불운을 제거하고 더 평등하고 살맛나는 세상을 위해 뭉칠 수 있는거야. 그렇지 않고 사회에서 싸잡아 붙인 이름들끼리만 모여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잘 될 수가 없을 거야. 이름 붙은 사람들끼리만 모이면, 이름을 대지 못하고 드러낼 수 없는 사람들은 낄 수가 없잖아. 싸잡아서 다수인 사람들이 자기 권리를 위해서만 싸우게 되면, 나머지 사람들은 그런 다수가 되기 전에는 권리를 누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권리를 가진다는 걸 위해 같이 해야 하고, 그러려면 사회에서 싸잡아 붙인 이름을 벗어던져야 하는 거야.

 

차별하는 쪽이 얼마나 엉터리냐 하면 말이야. 세상에 할 일도 많은데, 누군가에게 창피를 주고 모욕을 주는데 부러 힘을 써. 그래서 온갖 불쾌하고 낮춰보는 말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행동으로 옮기기도 해. 게이인 한 남학생이 직접 겪은 일인데, 같은 반 친구들이 졸업사진을 찍으면서 그 학생 어깨위로 올라서 밟았다는 거야. ‘너는 호모(남성 동성애자를 혐오해서 부르는 말이야)니까 짓밟아줘야 한다’면서 말이야. 그런데 상대방이 모욕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이 상처받을 자존심이 있고 모욕감을 느낄 줄 아는 존재란 걸 인정하는 거야. 상대방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뭔가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망치겠다고 덤벼들었다는 얘긴데, 그럼 오히려 그렇게 모욕하고 괴롭히는 행동은 이미 자신들이 상대방을 자존감을 가진 인간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야. 우습지 않아? 자신들이 모욕하려 하면서 사실은 그런 상대방의 존엄성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면서 자신들이 괴롭힌 상대보다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고 느끼는 건 뭘까? 남을 괴롭혀서 자신이 높아지려는 것은 정말 못난 인간이 하는 일인데, 그걸 통해 ‘나는 잘났다’고 떠들어대는 건 누가 봐도 한심한 짓이야.

 

결국 차별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거야. 사람들한테 싸움 붙여놓고 잇속을 챙기는 ‘남’들, 그런 ‘남’들에게 속고 지배받고 빼앗기는 사람들끼리 서로 못 잡아먹어서 지지고 볶는 일이 차별이야. 엄마가 “남 좋은 일만 시키네”라고 말할 때 그 뜻은 뭔가 한심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래서 엄마는 그 말을 할 때 혀를 차지. 그렇게 엄마가 한심하게 여기는 짓, 그중에 제일이 차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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