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자 : 2010. 11. 1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엄마! 나이 엇비슷한 선후배들이나 동료들과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 보면 빠지지 않는 게 부모님 이야기야. 다들 하나같이 너무 서러웠던 가난과 부모님의 고생을 한 묶음으로 얘기들 해. 도매금으로 말하면, 집집마다 하나같이 아버지들은 왜 그리 사고를 치셨는지, 어머니들은 왜 그리 지지리 고생들만 하셨는지 몰라. 그래도 잘나가던 때가 잠깐 있었다는, 눈부시게 찬란한 날이 아주 잠깐 있었다는 얘기도 꼭 양념으로 덧붙어. 하나같이 ‘어쩜, 우리집하고 똑같다’라고 맞장구치며 얘길 나누지. 가끔은 누가 더 극적인 추락을 했고, 누가 더 어렵게 살았는지 경쟁하는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 문제는 그 얘기들이 뻥이 아니라 다 사실이란 거고, 다행인건 다들 웃으며 술자리 안주삼아 얘기할 수 있을 만큼 ‘무사히’ 성장했다는 거야. 그리고 그 무사한 성장의 배경은 좋게 말하면 ‘교육’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학벌’일 수 있는 그런 거란 걸 같이 느끼곤 해.

 

그런 얘길 나눌 때마다 내가 보태는 얘기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해. 아빠는 허구헌날 전세방까지 잡혀먹고 일 벌리다 홀랑 날리고, 엄마는 파출부다 보따리 장사다 안 해본 것 없이 다하고 말이야. 그런데 정말 놀라운 건 초등학교 밖에 못나와 허드렛일을 전전했던 엄마가 어떻게 자식 넷을 다 대학공부를 시켰느냐는 것이야. 지금 생각해도 그건 기적 같은 일이었던 것 같아.

 

지금도 생각나. 나 어렸을 때, 엄마는 돈을 벌어오면 제일 먼저 누런 봉투에 돈을 넣었어. 그 때는 학비를 학교에서 나눠주던 누런 봉투에 넣어서 서무과에 갖다내고 그 봉투에 도장을 받아왔어. 네 자식의 학비 봉투에 돈을 넣고 난 후에야 엄마는 쌀독을 채웠어. 쌀 대 보리의 비율이 4대 6인 혼합미를 사느냐 6대 4인 것을 사느냐는 남는 돈이 얼마냐에 달려 있었어. 어떤 달에는 쌀사기를 아예 포기하기도 했어. 그런 때는 생활보호대상자에게 동사무소에서 갖다 주던 밀가루 한포대가 한 달 식량이 됐지. 보리가 너무 많아 시커먼 도시락이 창피하다고 동생들은 도시락을 그냥 가져오기도 했고, 한 달 내내 먹는 수제비에 질려서 숟가락을 놓아버리기도 했어. 학비와 최소한의 끼니거리를 제하고 난후 나머지 생활은 그냥 버티는 것이었어. 그래도 우리는 학교를 거르는 일이 없었고, 상급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한 일도 없었어. 엄마의 돈 쓰는 것 첫번째가 자식 공부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지.

 

그러던 어느날 동네 수퍼 아줌마한테 모진 소리를 들었어. 수퍼 계산대에 앉아서 온 동네 살림살이를 꿰뚫고 있던 그 아줌마의 형편은 그 골목에서는 꽤 사는 편에 속했지. 연탄을 사가도 수백 장이 아닌 몇 장씩만 사가고, 가끔 외상까지 지는 우리 집이 제대로 된 고객 대접을 받을 수는 없었어. 맏이라서 살림살이와 심부름을 도맡아야 했던 나는 그 수퍼에 가는 게 정말 싫었어. 그 아줌마가 워낙 사람을 무시해서 말이야. 그 아줌마가 날린 결정타는 이런 거였어. “너희 엄마, 정말 웃긴다. 뭘 믿고 널 인문계에 보낸다니? 형편 더 좋은 집들도 안 그러는데. 우리 딸도 안 보낸다. 넌, 얼른 돈이나 벌어라. 너희 엄마 개꿈 같은 건 따르지 말고.”

 

정말 서러우면서도 그 아줌마 얘기가 맞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나도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 ‘형편은 점점 더 나빠져 가는데, 빨리 돈을 벌어야 하지 않을까? 인문계 고교 말고 취업을 준비하는 학교에 가야하지 않을까? 나중에 내가 돈 벌어서 공부하면 차라리 속 편하지 않을까?’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어. 엄마의 계획은 ‘계속 공부’말고 다른 것이 없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엄마의 개꿈은 현실이 됐고, 엄마는 자식 넷의 교육을 완수(?)하여 그래도 가슴 펴고 제 앞가림하고 살 수 있도록 만들었어. 엄마의 고생에 대해서는 어떤 말을 해도 한참 모자라지만, 당시 조건이 받쳐준 면이 적지 않다고 생각해. 누런 봉투에 학비를 넣고, 밥만 챙겨 먹이면 공부시킬 수 있었던 상황이었어. 과외는 전면금지였고, 당시 대입에서 수석을 한 학생들의 인터뷰는 언제나 ‘교과서만 갖고 공부했어요’라는 식이었어. 그 말은 겉치레였던 게 아니라 사실이었어. 단칸방에서 밥상을 책상삼아 공부한 청소부의 아들이 수석을 하기도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나도 돈을 아끼려고 서너 가지 과목만 참고서를 사고, 나머지는 정말 교과서만 갖고 공부했어. 가끔 형편을 아시는 선생님들이 교사용으로 제공받은 참고서를 그냥 주시면 정말 고마웠어. 나뿐 아니라 고생담을 늘어놓는 친구들이 다들 한목소리로 말하는 게 자기들 학교 다닐 때 조건이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거야.

 

물론 그저 세상이 좋아서였던 건 결코 아니었어. 광주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집권한 독재자가 그나마 민심을 사려고 취한 조치가 ‘전면과외금지조치’란 거였으니까. 그 독재자는 데모하는 학생들도 많이 길러냈어. 단 하루에 수백 명이 넘는 대학생을 한꺼번에 잡아넣어서 대학이 경찰서로 이전했다는 소리도 들었지.

 

그런데 과외 없이 대학에 갈 수 있었던 혜택을 봤고, 학창시절에 사회 불의와 불평등에 대해서 목소리를 높였던 나의 세대 사람들이 학부모가 되면서 기가 막힌 일들이 많이 벌어졌어. 초등학생 때부터 조기유학 보내고, 어학연수 보내고, 온갖 유형의 사교육에다 귀족학교 만들기에 몰두하여 특정 지역의 아파트값과 학원비를 천정부지로 솟구치게 만들었어. 빈부차이 없고, 부모의 경제력에 상관없이 누구나 원하면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을 꿈꿨던 게 믿어지지가 않아. 누런 봉투에 최소학비를 넣고 밥만 먹이면 공부시킬 수 있다고 느꼈던 엄마들이 이제 버틸 수 없는 세상이 돼버렸어. 속상한 일들이 언론에 많이 보도되지만, 그중에서 내가 요즘 가장 가슴 아픈 내용은 가난한 서민들이 자식교육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이야. 자식이 공부를 잘하려면 ‘엄마의 정보력과 할아버지의 재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유행하고 있어. 없는 집 자식은 공부할 생각을 말라는 말이야. 엄마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학비부터 내고 생활을 설계할 수 있었다면, 요즘 서민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자식의 학원비부터 끊을 수밖에 없대. 학교가 아닌 사설기관에 내는 ‘학원비’가 필수적인 교육비가 된 것, 가난한 사람들이 그걸 감당하지 못하면 ‘학교’에 다녀도 의미가 없다는 것, 이게 의미하는 것은 삶의 희망이 될 수 있는 교육의 사다리가 끊어졌다는 거야.

 

내 조카들, 엄마의 손주들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요즘은 정말 많이 달라졌어. 지방에 사는 막내는 돈이 없어 아이들 학원을 못 보낸다고, 지방에 사니까 아이들이 더 처지는 것 같다고 친정에만 오면 속상해하지. 학원에다 인터넷 수강까지 하는 상대적으로 좋은 처지의 서울 사는 조카들은 그런 속에서도 불안해해. 더 좋은 동네 아이들보다 못하다는 것, 그렇게 해도 좋은 대학에 가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 대학을 나와도 자기 앞가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어렵다는 것 때문에 우울해해. 내가 인권운동을 시작할 때 태어난 첫 조카가 고3을 눈앞에 두고 있쟎아. 그 애와 어느날 얘길 나누었는데 도대체 ‘뭐가 돼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야. 선택받지 못하고 쓰임 받지 못하고 낙오될 거란 두려움이 스무 살이 못된 아이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다는 게 놀랍고 무서웠어. 요새 아이들 말로 그걸 ‘잉여’라고 해. 쓸모없고 가치 없는 존재,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나 의미 있는 인생의 목표 같은 걸 갖기 힘든 자신들의 처지를 ‘잉여’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깔보고 비웃어. 일등이 되지 않으면 결코 무엇으로도 존중받을 수 없는 현 세태에서 아이들이 스스로를 ‘잉여’라고 말하는 거야. 교육의 홍수 속에서 또는 가뭄 속에서 아이들은 불행한 것 같아. 불행하다면 과연 그것은 교육일까? 아마, 교육이란 말을 잘못 쓰고 있거나, 교육에 꼭 들어가야 할 요소가 빠졌기 때문에 이상한 맛이 나서일 거야.

 

먼저, 우리에게 교육은 ‘대학가기’와 같은 말처럼 쓰이는 것 같아. 엄마가 나를 위해 헌신했던 교육도 지금 조카들이 매달려 있는 교육도 사실은 ‘대학에 가기위한 수단’의 줄임말인 거지. 대학을 나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한 사회적 대우, 직장에서의 임금차별이 너무 심해서, 사실 대학을 강요당한 건 아닐까? 지금은 80%가 넘게 대학에 가는 시절이지만 대학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늘어났어. 살아남기 위해 ‘필수’로 요구받는 자격의 가짓수가 늘어나면서 ‘부담’도 크게 늘어난 거지. 그리고 그 부담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일 수록 교육의 사다리에서 발판이 부서져나가는 경험을 하고 있는 거야.

 

대학시절, 고등학교 때 한반이었던 친구를 버스정류장에서 마주쳤어. ‘몇 년 만이네’ 하면서 차 한잔 하고 헤어졌는데, 그 얘는 졸업 후 계속 직장을 다녔지만 차별이 너무 심해서 야간 대학 경제학과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했어. 그런데 공부가 하나도 재미없다는 거야. 하지만 직장에서 버텨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했어. 일도 힘든데 야간 대학을 다니는 탓에 몸도 살림도 더 고되다고 했어. 자신에게 경제학이란 건 의미가 없는데, 직장에서의 경력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한 학과라고 했어. 그 아이가 애써 야간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에 원하는 평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을까? 씁쓸하지만 내 짐작엔, 대학출신과 그렇지 않은 출신의 차별 다음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의 차별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차별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차별의 연쇄사슬 속에 매이는 거라면 교육에 뭔가 단단히 문제가 생긴거야.

 

‘교육에 대한 권리는 인권 중의 인권’이라는 말을 내가 보는 인권책들 속에서는 반복적으로 말해. 이건 뭘 말하는 걸까? 분명 ‘대학에 가기 위한 교육’을 말하는 건 아니야. 교육이 인권이라고 말하는 건 자기 자신이나 보호자의 사회적 신분, 경제적 능력 등을 따져서 누구에겐 문을 열고 누구에겐 걸어 잠거서는 안된다는 걸 말해.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삶’을 위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거야. ‘삶’을 위한 교육이란, 제 자신이 귀한 줄 알고 자기 속에 담긴 보석을 발견해서 다듬는 과정을 말해. 이 과정 속에서 제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품고 있는 보석도 볼 줄 알아야지.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가진 가치와 존엄성을 알고 존중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이라고 말해. 무시하고 호령하는 태도 또는 주눅들고 눈치보는 태도가 길러진다면 교육의 목적에 고장이 난거야.

 

청문회에 나오거나 신문방송을 시끄럽게 만드는 성추행, 각종비리 등의 주인공들을 보면 대단한 학력의 소유자들이야. 그런데 무엇보다도 부끄러움이 뭔지 모르쟎아. 게다가 사람 알기를 우습게 여기는 걸 보면 그 거창한 학력이 오히려 꼴 사나와 보이쟎아. 학벌은 쌓았으나 사람과 삶에 대한 공부를 제대로 안했다고 사람들은 혀를 차곤하지. 학력과 교육은 같은 말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어.

 

또 다른 큰 오해가 있어. 인권이란 말이 유행을 타면서 대학진학을 위해 ‘내 자식 내 맘대로 내 돈 갖고 하고 싶은 대로 공부 시킬 자유’를 권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거야. ‘내 자식 내 맘대로 내 돈 갖고’를 외치는 사람들은 돈 주고 ‘상품’을 사는 거쟎아. 그런데 인권은 상품이 아니거든. 상품을 살 자유는 소비자가 누리는 자유인 것이고, 교육은 공기처럼 모든 사람이 마셔야 할 것이야. 공기를 탁하게 만들어 놓고 누구에게는 산소마스크를 주고 누구에게는 그러지 않는다면 공기를 마실 자유는 없는 거지. 교육이란 공기를 자유롭게 들여 마시기 위해서는 그걸 누리기위한 자원이 평등하게 제공돼야 하는 거야.

 

교육을 통해 자기 삶을 맘껏 호흡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평등한 조건이 필요해. 그러니까 기초교육은 물론 가능하다면 대학교까지 무상교육, 즉 돈 안내고 공부할 수 있어야 교육권이 인권으로 존중된다고 할 수 있어. 한국에서는 중학교까지 무상교육을 하면서도 학부모들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하쟎아. 사교육이란 상품을 사지 않고는 맘 놓고 학교에 다닐 수 없다면, 그건 무상교육일 수가 없는거야.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이기에 ‘무상’으로 하는 건데, 별도의 돈을 요구한다면 그건 사기치는 것과 같아. 원한다면 누구나 대학까지 공짜로 공부할 수 있고, 거기서 고려되는 것은 각 사람의 자질과 취향이 돼야지, 돈 때문에 학교 문턱에서 좌절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교육권의 원칙이야.

 

부모의 소득수준이 높은 만큼 사교육비에 쓰는 돈이 많고, 사교육비에 쓰는 돈만큼 아이들의 학업성적이 높아진다고들 말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고칠 수 있는 최고 방법이 교육인데, 오히려 불평등을 대물림하고 있다면 교육이 인권침해의 수단이 되고 있는거야.

 

엄마가 연속극 보다가 ‘마이걸’이란 연속극 제목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본 적 있어. 엄마랑 영화를 보러 갔는데 ‘맹모삼천지교’를 약간 비튼 ‘맹부삼천지교’란 제목이었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참 후에야 엄마는 제목의 뜻을 물어봤어. 생활환경조사서에 국졸이라 쓰지 말고 높여서 중졸이라 쓰라고 했던 엄마였으니까 그런 단어를 들어보지 못했겠구나 짐작했어. 신문읽기를 좋아하는 아빠는 ‘뉴욕 필 하모니’가 뭐냐고 물어본 적 있어. 내 친구들 부모님도 마찬가지일껄. 한글을 모르는 엄마 얘기를 하다 눈시울 적시는 친구도 있어. 하지만 그런 얘기를 나눌 때의 우리는 엄마 아빠의 ‘무식’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걸 몰라도 얼마나 사리분별 있고 현명한 분들인가를 얘기하기 위해 그런 사건들을 끄집어내는 것이야. 그런 우리들이 교육의 울타리 속에서 만나 사람의 맘을 헤아리고 불의한 일에 분노하는 법을 배우면서 부모님의 사리분별은 이어받고 학력은 높였던 거야.

 

그런데 요즘은 공부 많이 하고 전문직인 사람의 자식들만 대학에 모여있대. 그러면 그런 대학은 높은 사람들만 모여사는 성채가 되는 것이고, 성문밖 사람들에게는 성안에 들어갈 기회가 없는거야. 이렇게 되면 교육은 인권이 아니라 특권이 되고, 누구는 교육 때문에 많이 자유로와지는 반면 누구는 교육 때문에 숨이 막히게 돼. 교육은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교육권의 대표원칙이 무너지는 거지.

 

교육이 평등해야 한다는 건 꼭 돈 때문만은 아니야. 교육이 평등해야 우리는 농어촌 출신, 나와 다른 형편과 처지의 사람, 서로 다른 인종이나 국가 출신의 사람 등과 골고루 어울릴 수 있어. 그런 어울림 속에서 불평등·편견·차별의식을 버릴 수 있는 법을 배우고 다른 세계와 문화에 대한 공정한 정보를 얻을 수 있어.

 

무엇보다도 교육의 사다리를 절대 걷어치워서는 안되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의 밥그릇과 목소리를 한꺼번에 빼앗는 일이기 때문이야. 임시적이고 언제든 버려지고 쉽게 교체되는 일거리만 늘어나는 세상을 바꿀 힘은 대통령이 외치듯이 어떤 경제기적이나 토목공사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답은 사람들한테서 나오는 거야.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대해 얼마나 공감하고 관심을 갖느냐, 문제를 바꾸기 위한 일을 어떻게 궁리하고 얼마나 참여하느냐에 달려 있는거야. 교육이 일부 사람들의 특권이 되면 될수록, 나머지 대다수는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어. 가난해진다는 건 경제적으로만 그런 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그렇다는 말이야. 경제적으로 가난하면 정치에도 관심을 잃고 자신들의 삶에 대한 결정을 특권층이 내리게끔 놔두고 손놓게 돼. 교육은 이 사회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 지에 관심을 가지고 어떻게 참여해야 할지를 알려주는 열쇠야.

 

그래서 교육은 학교교육에만 매인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삶의 과정이라 할 수 있어. 자식 교육을 다 마친 엄마도 교육과 여전히 관계를 맺고 있고, 나도 그렇고 조카들도 그래. 우리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가 우리 자신의 끝이 없는 교육과정이야. 엄마는 평생학습을 하고 있는 거지. 엄마가 어렸을 적 교회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다는 풍금연주를 칠순이 다된 지금도 할 수 있다는 걸 알아. 난 엄마가 원하는 걸 공부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멋진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해봤어. 교육의 사다리가 무너지는 속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 그들 모두 기회만 있다면 자기 나름대로의 풍금연주를 멋지게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믿음, 그런 믿음 위에서 교육권은 인권인 것이야.

작성일자 : 2010. 10. 3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고 있는 겁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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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지금 이 시간 쯤, 엄마가 뭘 하고 있는 줄 뻔히 알아. 방송 3사의 아침 연속극을 채널 돌려가며 다 보고난 후 또 유선방송 채널로 돌려서 주말연속극 재방송을 보고 있을 거야. 그러면서 “아이구, 김치도 담그고 해야 하는데, 내가 왜 이러냐? 연속극에 미쳐서”라고 푸념하고 있을 거야. “연속극에 미쳐서”를 젊은 사람들은 ‘드라마 마니아’라고 해. 엄마를 방바닥에 붙잡아매고 있는 그것을 ‘드라마’라 부르기보단 ‘연속극’이라 하는 게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다음 회를 고대하게 만드는 간질간질함으로 끝맺고 또 이어지고 이어지는 이야기니까.


난 엄마가 연속극에 미쳐 사는 요즘이 좋아. 엄마가 새벽 찬바람에 일 나가지 않고 아침에 뒹굴거리며 연속극을 볼 수 있다는 게 너무나 좋아. 파출부, 보따리 장사, 화장품 외판으로 점철된 엄마의 사투에서 마지막 일은 청소 일이었지. 장사는 지긋지긋하고 나이가 너무 많아 어디서도 써주지 않는다며 한숨짓던 어느 날, 엄마는 어떤 용역회사를 통해 지하철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됐다고 했어. 1주일 청소하고 15만원을 받아왔다는 말에 난 너무 속상했어. 엄마에게 월급봉투를 갖다 줄 능력이 없기에 당장 그만두라고 할 수 없는 자식이라 너무 미안할 뿐이었어.


그리고 얼마 후 엄마는 아는 사람을 통해 호텔 청소원이 됐어. 공교롭게도 내가 일 때문에 자주 가던 국가인권위원회 옆에 있던 호텔이었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강의를 하거나 회의를 하다가 창문 밖의 호텔을 바라봤지. 청소를 하고 있을 엄마를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어. 어느 날 엄마를 만나려고 호텔 앞에서 기다렸는데 엄마는 호텔 정문이 아닌 엉뚱한 출입구에서 나왔어. “호텔은 여긴데 왜 거기서 나와?”라고 물었을 때 엄마는 청소하는 사람들은 정문으로 다니면 안 된다고 했어. 그 한마디에 나는 그 나머지에 대해선 묻고 싶지도 않았어. 첫 버스가 다니기도 전 새벽 칼바람에 일 나간 엄마가 어디서 어떻게 밥을 먹는지, 일하면서 얼마나 어떻게 쉬는지 말이야.


꼬박 1년을 채운 뒤에야 엄마는 청소일을 관둘 수 있었지. 나와 동생들이 분담하여 매달 얼마씩을 엄마에게 드리기로 약속을 하고 ‘제발 관두라’고 해서 말이야. 그런데 가슴 한쪽이 켕기는 질문이 있어. 우리들이 엄마에게 일을 관두게 한 이유 중 제일 큰 이유는 과연 뭐였을까? 엄마에 대한 걱정이 과연 1순위였을까? 그게 아니라 장성한 자식들에게 청소일 하는 엄마가 ‘창피’한 것이 더 큰 이유는 아니었을까?


몇 년 전, 내가 활동하는 단체의 후배가 모 대학 청소노동자들과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있어. 대부분 엄마 나이대의 분들이었어. 가족 생계의 책임자들이었지만, 60만 원 정도밖에 못 받는 조건에서 일하고 계셨지. 학생과 교직원들이 등교하기 이전인 새벽녘에 강의실과 화장실 청소를 다해놓고 유령처럼 사라져 지하 모퉁이에서 식은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이었어. 그런데 대학에서 나이가 많다고 한꺼번에 자른(해고) 거야. 그래서 그분들이 난생 처음 데모란 걸 하게 됐지. 계속 일하게 해달라고 말이야. 후배가 그분들을 오랫동안 만나러 다녔는데, 정말 적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거기서 계속 일하고 싶어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어. 같은 청소일을 하더라도 대학에 가서 일한다고 하면, 자식들에게 낯이 선다는 거였어. 생계를 책임지는 노동임에도, 저임금에 형편없는 처우도 모자라 수치심까지 끼어들어 괴롭히고 있었던 거야.


엄마가 일을 관둔 뒤 내 기억에서 지웠던 가슴 아팠던 일들을 다시 떠올리게 됐어. 많은 엄마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사건 때문이야. 등장인물은 계속 바뀌지만 뻔한 줄거리의 연속극처럼 말이야. 요즘 인터넷에서 ‘OO대 패륜녀’, ‘OO대 패륜남’이란 게 큰 뉴스가 됐어. 학생들이 청소일하는 분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했다 해서 붙인 이름이 패륜녀, 패륜남이란 거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사회 전체가 패륜이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어.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유령’으로 취급하고 있다면 말이야. 이것과 관련해 나도 창피한 기억밖에는 떠올릴 게 없어.


병원에서 일했던 한 후배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어. 보통 같은 층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하기 때문에 의사랑 간호사들은 부딪칠 때마다 서로 인사를 한다는 거야. 하지만 청소일하는 분들도 보통 한 층을 담당하는데, 그분들과는 인사를 하는 경우가 없었단 거지. 먹을 거를 나눠먹더라도 그분들과는 나눠본 적이 없대. 그리고 신기한 건 아무리 오랫동안 봤어도 그분들의 얼굴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거야.


나도 그 말을 듣고 생각해봤지. 학교 다닐 때, 1년에 한 번 정도밖에 안 들렀던 교무과 직원 얼굴은 아직도 기억나는데, 4년 내내 봤던 청소하시던 분들의 얼굴은 한 명도 안 떠오르는 거야. 분명, 화장실에서 복도에서 수도 없이 부딪쳤는데 말이야. 게다가 우리 학과가 있던 건물은 아주 작았거든. 단지 떠오르는 건 그분들이 밥 먹던 광경이야. 학교식당에서 밥 먹는 걸 본 적은 없어. 지하의 작은 쪽방 같은 곳, 정말 성냥갑 같은 수준으로, 천정이 낮아서 몸을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곳에서 전기밥솥이랑 도시락에 싸온 찬을 바닥에 늘어놓은 모습이었어. 소위 정규직이었던 수위 아저씨들은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에게 자주 호통을 쳤어. 나와 친구들은 그 아저씨들을 ‘게슈타포’(옛날 독일에 아주 나쁜 정권이 있을 때 비밀경찰의 이름이야)란 별명으로 부를 뿐, 아주머니들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


또 기억나는 건 남학생들은 아주머니들이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있을 때 그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볼일을 봤다는 거야. 나도 요즘 경험하는 건데, 주말에 식당에서 알바를 할 때면, 앞치마와 위생모가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 주잖아. 그런 차림으로 화장실에 들어가면, 남자 손님들이 전혀 개의치 않고 문을 열어놓은 채 볼일을 보는 거야. 난 당황스러운데 상대는 전혀 그렇지가 않아. 그 쪽에선 내가 전혀 보이는 존재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 남학생들이 청소하는 아줌마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성기를 꺼낼 수 있었던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이런 식의 ‘패륜’을 청소일, 식당일 같은 직업에 대한 차가운 시선을 바꾸면 된다는 식으로 해결할 수는 없어. 험하고 지저분한 일 하는 사람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라’는 식의 설교로 해결할 일이 아니란 말이야. 정작 중요한 것은 줄 것을 제대로 주는 거고, 원래 당연히 가지고 있던 권리를 되돌려주는 거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차갑건 따뜻하건 마찬가지인 거고, 옆에서 마주보는 시선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보장해야 한다는 거지. 이게 인권운동, 노동운동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이야.


엄마! 앞에서 내가 말했던 모 대학 청소노동자들은 그 후 노동조합을 만들게 됐어. 그리고 학생들과 같이 학교당국을 상대로 싸워서 계속 고용됐고, 임금도 조금 올려서 법으로 정해진 최저임금 수준을 받게 됐어. 최저임금이란 게 워낙 적기 때문에 거기에 턱걸이한 것을 기뻐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원래부터 됐어야 했던 당연한 것을 어렵게 받아낸 것이었어.
그 청소노동자들이 한창 학교당국과 싸우고 있을 때, 내가 하는 교육에 집단으로 참석한 적이 있었어. 난 그때 이런 얘기를 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사회에선 누구나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죠. 물려받은 땅덩어리나 빌딩이 없는 이상엔 아무리 고소득 전문직이 됐든 그렇지 않든 간에 누군가에게 일을 해준 대가로 먹고 살죠. 그런 ‘일’과 관계된 인권을 ‘경제적 권리’라고 해요. ‘경제적 권리’의 으뜸은 일할 권리예요. 일을 해서 먹고 살 것을 요구받는 사회니까, 당연히 사회에서 일을 마련해 줘야죠. 눈높이 낮추고 아무 일이나 해라, 그런 식 말고 제대로 된 일을 마련하는 게 사회의 의무죠. 그러니까 아무 일이나 주면 안 되죠. 사람답게 살 만큼의 임금을 줄 뿐 아니라 건강을 해치거나 위험한 일로부터 보호하고, 함부로 자르면 안 되고… 등등을 보장하는 성격의 일을 줘야 해요. 그런데 고용주들이 이런 걸 알아서 해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기 일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항상 긴장해야 해요. 우선 노동자들은 뭉칠 권리가 있어요. 뭉쳐서는 뭘 하나요? 고용주와 노동조건에 대해 얘기를 해야죠. 그런데 고용주가 얘기를 피하려 하고, 약속했던 것도 지키지 않으면 어떡해요? 고용주가 말을 듣게끔 뭔가 행동을 해야 하지요. 하던 일을 안 하겠다고 거부하거나, 적당히 하는 등으로 고용주한테 압박을 가해야 해요. 이런 것들, 즉 노동자들이 뭉치고 협상하고 행동할 권리를 통틀어서 노동권이라고 해요.


그런데 자기 자신이 원치 않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일을 해서 생존을 유지할 수 없는 경우가 있잖아요. 가령 장애를 갖고 태어났거나 불의의 사고로 장애가 생겼거나, 나이가 들고 건강이 나빠져서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없거나 원치 않는 실직을 했거나 이런 상황에서는 일을 해서 생계를 유지할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 삶을 중단해버려야 하나요? 그럴 수는 없는 거죠. 그래서 필요한 것이 ‘사회적 권리’란 인권이에요. ‘사회’란 말은 우리 사람들끼리 결연을 맺었다는 뜻이에요. 우리들 누구나 사회의 구성원이잖아요. 내가 원치 않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로부터 부양을 받을 권리가 있어요. 사회보장제도를 누릴 권리, 아플 때 치료받을 권리, 사회구성원으로서 살아갈 만한 교육을 받을 권리, 이런 것들이 사회적 권리에 해당해요. 그 어떤 별도의 자격이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인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니까 떳떳하게 받을 수 있어야 해요. 눈치 보거나 업신여김을 받거나 하지 않고 말이에요.”


그런데 현실은 내가 말한 인권의 원칙과는 반대로 흘러갈 때가 많아. 지금은 6월인데 한국에서는 매년 이때쯤 ‘최저임금’이란 걸 정해. 올해 사용자 측에서는 겨우 시간 당 10원 인상을 얘기하고 있대. 원래 최저임금이란 걸 법으로 정할 때는, 노동자들이 안정된 생활을 하며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수준의 임금을 줘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거야. 그런데 그런 취지와는 반대로 ‘목구멍에 풀칠만 하는 수준’의 최저가 돼버렸어. 많은 고용주들은 최저임금도 안 줄뿐더러 최저임금만큼만 주는 걸 당연하게 여겨서, 최저임금 이상을 주지 않으려는 핑계거리로 사용하고 있어.


대표적인 경우가 청소노동자인데, 엄마가 몇 년 전 받았던 게 바로 그 최저임금이야. 몇 년이 지났어도 최저임금은 제자리 수준이고, 청소노동자들 대부분은 거기에도 못 미치는 80만 원이 되지 못하는 돈을 받고 있어. 문제는 그렇게 버는 ‘용돈’ 수준의 돈에 온 식구의 생계가 달려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거야. 일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대우를 하면서 철마다 ‘불우이웃돕기’를 하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 사람들이 일한 값을 제대로 준다 할지라도, 사회보장제도가 빈약하기 때문에 허덕이고 살아갈 판에, 대가는 제대로 안 치른 채 ‘불우이웃’ 만들기에 나서는 거니까.


임금만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라면 당연히 갖는 ‘뭉칠 권리’가 없어. 엄마도 호텔에서 일을 했지만 그 호텔 직원이 아니었잖아. 파견용역회사와 계약한 것뿐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저임금 노동자들은 자기가 진짜 일하고 있는 곳에 고용돼 있는 것이 아니라 용역회사가 중간에 끼어 있어.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한 조건이기 때문에, 큰 소리 내기도 힘들거니와 간혹 뭉쳐서 소리를 내더라도, 정작 일하는 곳에서는 ‘나는 당신들의 고용주가 아니라’고 발뺌 하거든. 그래서 안 그래도 불안한 고용조건을 더 컴컴한 사각지대로 내몰아온 게 정부와 기업이 계속해온 정책이야. ‘효율성’이란 이름으로 말이야. 일하는 사람을 쓰고 버리면 되는 일회용품 취급하는 게 효율성이라면 이거야말로 패륜 중의 패륜인 거야.


이건 청소노동자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니라 젊은이들의 아르바이트에도 아주 중요해. 예전에 막내가 학비 벌겠다고 방학 동안 분식점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했었잖아. 언니는 그래도 좋은 대학 다닌다고, 몇 시간의 과외로 버는 돈의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돈을 막내는 지방대생이란 이유로 방학 내내 고역을 치르고 벌어야 했어. 하루 12시간씩 쟁반을 나르다 오면 다리 아파 죽겠다고 했던 동생에게 정말 미안했어.


요즘도 과외를 할 수 있는 소위 일류대 학생들 말고는 많은 학생들이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대기 위해 수업시간보다 많은 시간을 아르바이트에 바쳐야 해. 대학생들 뿐 아니라 제대로 된 일자리가 부족한 현실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입에 풀칠하기 위한 아르바이트에 매달려 있어. 많은 경우가 시간당 2천8백 원, 혹은 3천 원을 받는다고 해. 법으로 정해진 최저임금은 시간당 4천 원 수준이야.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폼 나는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이야. 문제는 용돈벌이가 아니라 대부분이 생계를 위해서 그런 조건을 감수하며 일하고 있다는 거야. 이들 젊은이들은 적어도 시간당 천 원의 인상을 원해. 그래봤자, 시간당 5천 원이 되는 거야. 그런데 저쪽에서는 시간당 10원 인상을 얘기하고 있으니 납량특집 연속극 같아. 이보다 끔찍하고 무서울 수는 없어.


이것 때문에 요즘 시위가 벌어지고 있어. 시간당 10원 인상으로 최저임금을 마무리 짓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건 10원 대 1000원의 싸움이 아니라, 유령이 아닌 인간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외침이야. 엄마, 혹시 뉴스에서 그런 게 나오거든(월드컵 때문에 기대할 수는 없지만), 또 데모한다고 욕하지 말고, 뉴스에서 얘기 안 해주더라도 내가 말한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 사람들이 데모를 한다는 걸 알아줘.


내가 데모하다 처음 잡혀갔다 나왔을 때, 엄마한테 혼날까봐 잔뜩 쫄아 있었지. 그때 엄마는 혼내기는커녕 나랑 같은 대학 다니던 교회 집사님 아들 이름을 대면서, “걔는 이런 것도 안 한다니?”라고 물었어. 엄마의 물음에는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지지가 담겨 있었어. 엄마가 떠난 그 자리에서 똑같은 노동을 되풀이 하고 있을 수많은 아주머니들, 인권활동가인 엄마 딸이 주말에는 식당노동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엄마는 분명 지지를 보낼 수 있을 거야. 인권에서는 엄마의 그런 지지를 ‘연대’라고 표현해.


힘없는 사람들이라 무시하지만, 정작 그 힘없는 사람들의 노동이 없으면 밥도 못 먹고 쓰레기 더미 속에서 어쩔 줄 모를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건 힘없는 사람들의 ‘연대’야. 고로 엄마의 힘을 제일 무서워한다는 거야.

작성일자 : 2010. 10. 3

작성자 : 류은숙

이 글은 격월간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에 연재하는 글입니다. 글쓴이는 류은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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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난 할머니 때문에 슬픈 게 아니라 엄마 때문에 슬펐어. 울 엄마한테는 이제 엄마가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엄마 등을 바라보려니 괜히 눈물이 났어. 나한테는 엄마가 있는데, 엄마한테는 엄마가 없으니 얼마나 기댈 곳이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 하지만, 그런 애틋한 마음과 달리, 소문났듯이 엄마와 나는 그리 다정한 모녀는 아니야. 내가 하도 무뚝뚝해서 엄마는 항상 나한테 “너 같이 생긴 거면, 도대체 누가 딸을 갖고 싶겠니?”라고 하지. 그럴 때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 하는 줄 알아? “사돈 남 말 하시네. 무뚝뚝하기론 엄마도 금메달감일세.”


그런데 왜 뚱딴지 같이 엄마에게 편지를 쓰느냐고? 작년에 여럿이 아닌 내 이름만으로 낸 첫 책이 나왔잖아. 그런데 엄마의 반응 때문에 난 한참 고민했어. 보통 엄마는 그냥 좋아하고 말텐데, 엄마가 퉁명스럽게 그랬잖아. “야!, 읽어보려 해도 도무지 무슨 소린 줄 알 수가 없다.” 내가 쓴 건 인권에 관한 책이고, 인권이란 누구나 같이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건데, 엄마한테 읽힐 수 없는 글을 썼다는 게 날 무지 속상하게 했어. 무슨 학술서를 쓴 것도 논문을 쓴 것도 아닌데, 그럼 당연히 엄마가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썼어야지.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이 편지는 그런 반성과 아쉬움 속에 쓰기 시작했어. 내가 왜 인권운동을 하고 인권에 대해 무슨 얘기를 하고 다니는지를 이제부터 엄마한테 들려줄 거야.


먼저 엄마가 날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의 이야기부터 시작하려고 해. 얼마 전 한 대학생이 자퇴 선언을 하고 학교 그만뒀다는 뉴스 봤지? 고려대학교에서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제목의 글을 붙이고, 교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시위한 여학생 있잖아? 그 일을 사람들은 ‘김예슬 선언’이라 하는데, 그 학생은 대학과 국가와 시장이 한통속이 돼서 진리도 정의도 젊은이들의 우정도 잡아먹고 있다면서, 자신은 거기에 저항하는 작은 돌멩이 하나 되겠다는 의미로 자퇴한다고 선언했어.


엄마가 그 뉴스 볼 때 혹시 내가 옆에 있었다면, 엄마한테 아마 난 타작을 면치 못했을 거야. 아마도 엄마는 “으휴, 너 같은 딸년 둔 부모가 또 있나보다”라고 했겠지? 나도 그 뉴스 보면서 스무 해도 더 지난, 내 스무 살 때가 아프게 떠올랐어. 그때 난 엄마 몰래 대학 1학년 때 자퇴서를 내고 학교를 그만뒀었지. 엄마는 무려 6개월이 지난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는 아직도 전혀 모르고 있지. 내가 아무 말도 안했으니까.


김예슬처럼 1인 시위를 하거나 대자보를 붙이지는 않았지만, 그 때 내 심정도 마찬가지였어. 그땐 방법을 몰랐을 뿐이지. 온 세상에 대해 외치고 싶었어. 대학도 세상도 너무 이상하다고. 그냥 그런 세상과 둥글게 어울려 굴러갈 수 없다고.


‘공부해라! 그래야 잘 살 수 있다. 너 공부해서 남 주냐? 다 너 좋으라고 하는 거지’, 그런 채찍질에 나도 대학만 보고 달린 아이들 중의 하나였지. 20년 인생을. 물론 엄마도 함께 달렸어. 엄마가 달린 길이 더 힘들었을 거야. 보따리장수, 파출부, 가내수공업, 그러다 화장품 외판원 리어카를 10년 이상 끌어서야 엄마는 날 대학에 보낼 수 있었어. ‘가난을 벗어나자’, ‘대학가서 참고 참았던 것 다해보자’, 뭐 여러 가지가 목표였지만, 그 무엇보다도 대학 간판이 내게 소중했던 건, 고생한 엄마에게 달아주고픈 훈장이 대학간판이었기 때문이야.


결과는 내 맘에 썩 들진 않았지만, 엄마가 부끄럽지 않을 만한 간판의 대학 입학이었어.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20여년 기다리고 기다렸던 인생의 봄날은 오지 않았어. 캠퍼스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필수록 학생들의 옷차림이 경쾌하게 빛날수록 내 맘엔 겨울이 깊어졌어.


정문 앞엔 항상 경찰들이 도열해있고, 틈만 나면 가방을 뒤지던 시절이었어. 학교 안까지 경찰들이 뛰어 들어와 대자보와 현수막을 찢어발기고 학생대표들을 채가기도 했어. 난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적어도 대학 내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게 상식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수업시간에 교수들은 그런 일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입을 다무는 건 양반 수준이었고, 일부 교수는 그런 현실에 항의하는 학생들(운동권이라고 불렀지)을 소리 높여 비난했어. ‘철모르고 북한의 사주를 받아서 저런다’고, ‘여러분은 그런 선배들 따라하지 말라’고. 난 어두침침한 얼굴의 소수 운동권 선배들한테 마음이 가지도 않았지만, 교수들의 그런 비판은 비방으로 들렸고, 겁쟁이들의 책임회피로 들렸어. 그리고 고등학교 때보다 더 많은 학생 수에, 교실 모양만 계단식 강의실로 달라진 콩나물시루 속에서 토론이란 없이 필기만 해대는 수업이 계속됐어. 도서관에 가면 죄다 토플 책을 펴놓고 앉아 있었어. ‘독서’를 하는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가 없었어. 주변 학생들(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었어. 당시 졸업정원제란 게 끝물이었지만 서로 노트도 빌려주지 않았거든)의 멋 내기와 소비수준을 보며, 나는 한없이 주눅이 들었어. 내로라하는 집안 아이들이 왜 이리 많은지. 같이 대학을 졸업해도 저 아이들과 나의 삶은 같을 수가 없다고, 나는 잘해봤자 월급쟁이가 되고 쳇바퀴 같은 삶을 굴리게 될 텐데, 그 아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뭔가 이미 다 이룬 것 같았어. 부럽기도 하고 화도 났어. 대학에서 ‘지식인’을 한 명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스무 살의 나는 너무 절망했어. 간판을 따러왔고, 간판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교문만 드나드는 내 모습이 나날이 싫어졌고. 그러던 어느 날부터 수업에 들어가지 않게 됐어.


그리고 내가 신입생 1년여 동안 매일 한 일은 지쳐서 뒤꿈치가 끌릴 정도로 서울 거리를 쏘다니는 거였어. 남산에 하루에 세 번 올라간 날도 있고, 한강 다리란 다린 죄다 걸어서 건넜어. 다리 한가운데서 한참 물속을 쳐다본 적도 있어. 그렇게 쏘다니는데 많은 사람들의 삶이 눈에 들어오더라. 서울에 웬 지하공장이 그리도 많은지, 환기구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웅크리고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어. 일할 사람 구한다는 벽보와 전단지는 빼놓지 않고 다 읽어봤어. ‘구인’이라지만 결코 ‘구인’되고 싶지 않은 그런 일들과 조건뿐이었어. 지금은 죄다 아파트로 바뀐 산동네 집들, 가내 수공업으로 밥상이자 작업대가 되는 상위에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여인들, 엄마의 모습을 꼭 빼 닳은 모습들…. 내가 꼴 보기 싫어 뒤로 하고 나온 대학 캠퍼스와는 상반되는 환경, 상반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 그럴수록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움에 죽을 지경이었어. 자살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상담한다는 전화번호를 알아서 전화를 건 적도 있어. 상담원은 건조한 목소리로 ‘희망을 갖고 열심히 사세요’라고 해서, 난 전화를 건 게 후회돼 빨리 끊어버렸어.


그리고 학기말이 됐어. 오랜 방황에 난 지칠 대로 지쳐있었고, 복잡한 세상에 대한 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솔직하게 살자는 결론에 도달했어.


‘난 학문에 뜻이 없다, 대학은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이 다녀야 한다. 난 어차피 간판 딸 생각으로만 오갈 텐데, 이런 내 자신의 거짓부터 때려치우자. 뭔가 내게 맞을 다른 공간, 다른 일을 찾아보자. 뭔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살아보자.’ 또 다른 마음의 절반에선 이런 소리도 들렸어. ‘대학 졸업한 후에 그렇게 해도 되지 않을까? 대학 안 나오면 사람 취급도 못 받는다는데.’ ‘아니야, 이런 상황에서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난 백 살 정도 늙어버릴 거야. 엄마가 얼마나 실망할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엄마 때문에’란 이유를 대는 건 비겁하게 여겨졌어. ‘엄마가 대학등록금 내느라 허리 휘어지는데 내가 허송세월하는 것보다는 관두는 게 나을 거야. 엄마도 결국 내가 행복한 것을 더 좋아하게 될 거야.’


드디어 12월 말 난 자퇴서를 냈어. 거기 들어가려고 글자를 배운 순간부터 외워 온 모든 걸 다 바쳤는데, 나오는 데는 1분밖에 걸리지 않더라구. 자퇴서에 이름 쓰고 학과장 확인도장 받아 제출하면 끝이었어. 캠퍼스를 걸어 나오는데, 너무 싱거워서 웃음이 났어.


그 후 엄마한테 자퇴를 발각당하기까지 반년 동안의 기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란거야. 정말 철저하게 난 사회 속에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거든. 그전에는 사회 속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어. 그때까지는 언제 어디서나 ‘학생이에요?’라고 누가 물으면 ‘학생 아닌 사람도 있나? 뭐 그런 걸 묻고 그래’하는 생각으로 살았지. 그런데 이제 내가 ‘저 학교 안다녀요’라고 답해야 했고, 그러면 재수생이냐는 물음이 되돌아왔어. 그것도 아니라고 하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어. 대학생이나 재수생이나 다 대학이란 걸 우선 기준으로 정해놓고 사람을 구분하는 거잖아. 대학생도 재수생도 아닌 스무 살의 여자아이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어.


그때 문득 고 3때 같은 반 애들 생각이 났어. 일찌감치 취업을 결정하고 입시에서 빠진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 애들은 정규수업 마치고 강제자율학습에 참여하지 않고 부기학원 등 에 취업준비를 하러 갔어. 그때 담임은 가방을 챙기는 그 아이들에게 ‘공부하는 애들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꺼지라’고 했어. 그 아이들은 무슨 죄인인양 가방을 주섬주섬 들고 사라졌어. 그 아이들은 일찌감치 ‘아무것도 아닌’ 사람, 학교에선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던 거야.


입시결과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던 애들은 몇 명 안됐어. 학교에서 자랑스럽게 써 붙인 합격자 명단은 몇 명 되지 않았으니까. 그 명단에 들지 않은 아이들, 지방대나 2년제 전문대학에 간 아이들은 또 다른 의미의 ‘아무것도 아닌’ 사람 속에 들게 되었을 거야. 그런데 이제 내가 그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 들게 됐어. 나란 사람의 감정, 생각, 몸, 이런 것은 전혀 변한 게 없는 데, 대학이란 하나의 기준에 의해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돼버린 거지.


그때는 대학만 그렇다고 느꼈는데, 요즘은 그런 기준이 더 많아진 것 같아. ‘대학’을 기준 삼는 것처럼, 어떤 기준을 세워놓고 ‘뭔가’인 사람과 그 ‘뭔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이분법 말이야. 그리고 그 ‘뭔가’에 속하지 않는 사람은 또다시 그 ‘뭔가’에 속하려고 대기 중인 사람과 전혀 ‘아무것도 아닌’ 사람 축으로 나뉘게 되지.


사람이 먼저 있고, 구체적으로 그 사람을 묘사하는 게 맞는 것 아닐까? ‘아무개는 이러이러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의 고유한 뭔가로 그 사람을 설명하는 거지. 그런 설명에는 정해진 뭔가가 아닌 사람 수만큼 무한한 가능성이 놓여 있는 거야. 그런데 세상은 반대로 하고 있어. 세상이 정해 놓은 ‘뭔가’가 먼저 있고, 거기에 맞춰서 사람들을 구분하거나 일렬로 줄 세우는 거야. 출신 대학, 사는 지역, 아파트 평수, 직업, 출신국가, 쓰는 말, 종교, 사상, 피부색, 결혼여부 등으로 사람을 끊임없이 구분해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을 만들어내고 있어, 꼭 사람감별기계가 요란스럽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아.


자퇴 후 난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이라도 시도해야 했어. 구인광고를 읽고 읽다가 어느 신발가게에 취직하러 갔어. 주인아저씨는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다음날 주민등록등본 갖고 출근하라고 했어, 하지만 다음날 나는 가지 못했어. 무서웠거든. 그런 식으로 시도는 계속 실패했어.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사람 쪽에 머물러 있는 게 나은 것 같았어. ‘학생’이 아닌 나를 설명할 ‘뭔가’를 정해 버리는 게 무서웠어.


알바로 근근이 용돈벌이를 하며 거리를 쏘다니던 어느 날, 시위대와 부딪혔어. 한국 역사에 기록될 대규모 시민항쟁이 벌어진 해였거든. 대학생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찻길 한 가운데로 뛰어들며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면 순식간에 교통이 마비되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나오던 때였어.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나는 깃발아래 갈 수가 없었어. 구경하다가 최루탄에 도망가는 보이지 않는 시민일 뿐이었어.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의 삶에 지쳐가고 있었어.


그때 쯤 엄마한테 자퇴 사실을 들켜버렸지. 엄마는 조용히 물었을 뿐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아무런 준비된 답도 없었는데, 반사적으로 대답이 튀어 나왔어. ‘다시 공부할게.’ 1년 반 동안의 방황은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어. 그래서 난 횟수로는 ‘재수’, 묵은 햇수로 따지면 ‘삼수생’으로 구분되는 그 ‘무엇’이 됐고, 다시 입시를 치르고는 대학생이 됐어. 대학생이 되고나니 ‘너는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해방됐어. 이제 난 안전한 성안에 들어간 거니까.


하지만 내 맘엔 비겁함에 대한 수치심이 남았어.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과 삶에 대한 미안함도 버릴 수가 없었어. 내가 일부러 해치지는 않았을지라도, 무심코 읊어대고 편승하는 ‘기준’ 때문에 분류되고 제외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계속 신경이 쓰였어. 어쩌면 그것 때문에 내가 졸업 무렵 대학에서도 배우지 못했던 ‘인권’이란 단어를 처음 듣고 충격 받았던 건지 몰라. ‘바로 이거다’하고 말이야.


세상의 많고 많은 기준에 의해 ‘무엇’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권리가 많아. 하지만, 그 ‘무엇’에 의해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겐 그만큼 없는 게 많아. 특히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은 불평이든 제안이든 독백이든 대화든 말할 자격에 끼일 수 없는 것 같고 그게 더욱 비참한 것 같아.


김예슬 선언의 경우를 보면, 엄마가 보는 TV 뉴스 말고, 인터넷 뉴스 같은데 이런 반응들이 있어. 그 여학생의 경우엔 소위 좋은 대학 좋은 과 출신이니까 뉴스가 됐지, 지방대 출신의 학생이 자퇴 선언을 했으면 뉴스가 되기나 했겠냐고. 그 ‘무엇’에 속했던 그 여학생의 말은 사람들이 들으려 하지만, 그 ‘무엇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말조차 꺼낼 수 없고, 말을 해도 누가 듣겠느냐는 반응이었어. 그리고 대학에 가보지 못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의 사람들은 미치도록 그 대학에 가고 싶다는 반응을 보였어.


그런 말들에 귀 기울이고, 계속 말을 하라고 권하는 사회가 인권을 존중하는 거라고 생각해. 엄마! 내가 생각하는 인권은 ‘무엇’이란 기준보다는 ‘사람’이 먼저 존재한다는 거야. 그 어떤 잣대로도 잴 수 없고 계산해낼 수 없는 가치가 각 사람에겐 있다는 거지.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 속할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인권이야. 누구나 소중한 그 ‘무엇’이고, 누구나 말할 권리가 있어. 당연히 누구에게나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일 의무도 있지. 자기 자신의 가치를 외면하는 외부의 기준에 의해 아무것도 아닌 삶으로 내쫓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이유만으로 모든 사람은 똑같은 거야. 엄마 말처럼 인권에서 밥이 나오겠어, 떡이 나오겠어? 그러나 서로의 평등한 가치를 존중하고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들로 인해 밥도 나누고 떡도 나누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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