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275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 학교는 죽었다 - 대학입시거부선언을 보며

기사인쇄

류은숙

지난 11월 10일은 여러 가지로 마음이 복잡한 하루였다. 첫 조카가 수능을 치른 날이었고 김진숙 씨가 309일 만에 크레인에서 내려온 날이었다. 내가 인권운동이란 걸 시작하던 무렵 갓난애였던 조카가 다 큰 어른이 되는 동안 세상은 얼마만큼 좋아졌나, 그 세월 동안 난 뭘 하고 살았나, 김진숙 씨가 크레인에서 추위와 더위를 보내고 또 추위를 맞은 300여일 동안 또 난 무엇을 했나, 나는 하루 종일 시험 치는 기분이 들었다.

학창시절 시험을 치를 때 문제지를 받아드는 순간은 긴장감의 절정이었다. 책상에 채 다 펼치지도 못할 만큼 큰 시험지를 받아들고 볼펜을 깨물던 느낌이 생생하다. 하지만 내가 이날 받아든 시험문제는 숱하게 치러왔던 그런 종류의 시험이 아니었다.

첫 번째 시험지에서 김진숙 씨는 ‘연대란 무엇인가’는 굵직한 물음을 던졌다. 오랫동안 연대가 뭐냐고 물어오면 대답할 줄 몰라 우물거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SKY(서울대, 고대, 연대)에 속하는 대학중의 하나로 여기는 것이 다반사이거나 ‘연대기를 말하는 건가요?’라는 물음을 되돌려 받을 때가 많았다. 그런데 그런 오답자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김진숙의 309일은 연대란 어떤 사람들 사이에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묻고 답할 수 있는 공동학습의 기간이었다. 연대가 ‘무엇’이라고 정확히 말하지 않아도 ‘아하 그거’라고 가슴 한편을 스치는 무엇을 느꼈다. 계속 연대를 공부하고 실천할 동기를 갖게 된 이들이 적지 않으리란 것이 난생 처음 시험을 치르면서 든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날의 또 다른 시험지는 ‘대학입시거부선언’이었다. 수능시험이 치러지던 같은 시간에 18명의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이 “남의 꿈을 밟고 올라가는 전쟁”과 “우리의 삶에 가격을 매기는 상품화의 과정”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들을 “루저”나 “낙오자”라 손가락질 할 사회에 대해 “오늘의 불행을 저축해도 내일의 행복이 오진 않을 것 같고 불안과 경쟁만이 이어진다. 도대체 누가 우리에게 이런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강요하는가?”라고 되물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그저 대학을 안가겠다는 선택이 아니”라 “지금의 입시가, 대학이, 교육이, 그리고 사회가 잘못되었음을, 온몸으로 외치는 것”이라 했고, “일단 그래도 대학은 가고 보라는 유예의 주문에 맞서, 지금 여기서 바꾸자”고 말했다. “더 이상 교육에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혀만 차지 말고, 지금부터 같이 바꿔나가야 한다”며 자신들의 행동을 “손을 내미는 몸짓”이라 표현했다. “학력과 학벌로 인한 차별과 불평등에 갇혀있기에는 우리들의 배움이 너무 소중하기에. 그렇기에 우리는 선언한다. 여기 대학입시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노라고.” 그리고 “자유로운 배움을 위해 … 행동하겠다, 살아가겠다”가 선언의 마침표였다.

학벌사회를 거부한다고 기껏해야 경력을 쓸 때 출신학교를 쓰지 않는 정도밖에 못하던 나로서는 충격 그 자체였다. 걱정도 됐다. 이 험한 학벌 세상을 계속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학교를 너무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형편의 사람들, 원치 않는 이유로 학교 밖으로 쫓겨난 사람들과 입시거부를 선언한 사람들은 뭐가 같고 다른 거지? 이런저런 이유로 ‘탈학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된 청소년과 입시를 거부할 배짱을 가진 청소년은 뭐가 다르지? 아무리 정규교육에 문제가 많아도 배울 게 있는 것인데 배움의 시기에 그런 훈련을 거치지 않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을까? 지인들과 이런 문제들로 장시간 토론도 벌어졌다.

김진숙 씨의 책 <소금꽃나무>에는 ‘학번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고등학교도 졸업을 못한 김진숙 씨에게는 학번이 없다. 가출하면서 반드시 이루리라 다짐했던 대학생이 돼보자는 꿈을 갓 입사한 한진중공업에서 밝히며 ‘공부 땜에 잔업을 못하겠다’고 했다가 비웃음 섞인 벼락을 맞은 얘기였다. 그 글을 읽으며 얼굴이 화끈거린 건 김진숙 씨의 트위터 아이디 ‘JINSUK_85’를 봤을 때 85호 크레인이 아니라 85학번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습관 때문이었다. 85학번이 아닌 85호 크레인에서 버텨낸 그녀의 힘은 “학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한 번도 빛나는 자리에 서 보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는 훨씬 많고 “그리고 그 학번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움직여 간다”는 믿음이었다. “학번 없는 사람들이 자랑스러워지고부터였을 게다.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생기고부터” 그녀는 대학에 못간 잔인했던 청춘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고 했다. 그 글의 끝에 “세상을 주인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투쟁. 그 투쟁에서 당신들은 나의 소중한 동지들이다”라고 그녀는 사랑을 고백한다. 이 고백에서의 ‘당신’은 학번이 없는 사람 있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 호명이다.

85호 크레인을 둘러싼 연대, 희망버스나 날라리 외부세력 등에 대한 얘기가 넘쳤던 한 해였다. 그 얘기들 중에 기억에 남는 건 연대란 ‘우리들’이란 틀을 해체하는 것,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는 거였다. ‘왜 외부세력이 와서 간섭하냐’는 물음을 던지는 ‘우리들’에 대하여 ‘저희는 날라리 외부세력인데요’란 이름으로 화답하는 경쾌함이 이미 ‘우리’의 틀 안과 밖의 구분을 해체했다는 것이었다. 연대란 비슷한 사람들끼리, ‘우리’ 문제로 뭉친 ‘우리들끼리’만 하는 게 아니라 같은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같이 할 수 있는 거란 지적이었다.

조카의 수능, 김진숙 씨의 크레인과 연대, 대학입시거부선언이 얽히고설킨 날, 던져진 시험문제에 참고하고 싶어서 나는 책장에서 오래 묵은 책을 꺼내 들었다. 지금은 절판되었고 누렇게 뜨다 못해 제본까지 너덜너덜해진 책이다. <학교는 죽었다>라는 과격한 제목의 책 내용은 김진숙 씨나 입시거부선언자들이 말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아마 던지는 질문이 같아서일 것이다. 저자인 에버레트 라이머는 미국의 교육학자인데, 저명한 철학자인 이반 일리히와 15년간 나눈 토론과 대화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이 토론에 기초해 이반 일리히도 책을 썼는데 그건 <학교 없는 사회>다.

대학입시거부선언자들은 “교육을 원한다”고 말한다. 자신들을 상품이 아닌 인간으로 보는 “사회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들이 던진 질문을 공유한다면 학교 안에 있든 밖에 있든, 학번이 있든 없든, 같은 문제를 안고 씨름하는 동료일 수 있다는 것을 묵은 책을 다시 보며 생각했다. 학교든 대학이든 정규교육이든 그 무엇이든 어디에 걸쳐 있든 간에 우리 삶 자체가 교육이고 배움인 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동료라는 걸 말이다.

학교는 죽었다 (에버레트 라이머, 김석원 옮김, 한마당, 1979)학교를 왜 거부하는가

… 전 세계 어린이들의 대부분이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있다. … 그렇지만 아이들은 누구나 반드시 무엇인가를 학교로부터 배우게 된다. 학교에 입학조차 못해본 아이들은 인생의 좋은 것들이 그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학교를 일찍이 중퇴해버린 아이들은 그들 자신이 인생의 좋은 것을 누릴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학교를 좀 더 다니다가 중퇴한 아이들은 이 체제가 타도될 수는 있으나 그들의 힘으로는 될 수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들 모두가 다 학교란 한 세상 편히 살기 위한 첩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자식들만은 그들보다 더 높은 교육을 시켜 잘 살게 만들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자기들의 자식들은 자기들보다 학교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 소망은 결국 현 세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좌절감만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 너무 비싼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 … 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교 및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지만 실제로 교육받은 양으로 보나 질로 보나 보잘 것 없는 것이고, 실제로 취업관계에서 그리고 실수입면에서도 형편없는 것이다.

어느 나라에 있어서나 교육비용이 학생 수나 국민소득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 소비수준에 한계가 없고, 학위가 사람의 지위를 결정해 주는 이 세상에서는 학교교육의 끝이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 진학경쟁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또 다른 운명이 닥친다. … 학교는 소년, 소녀들을 매우 철저한 과정을 거쳐서 길들이는 -즉, 사회적으로 거세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학교에 다니려면 학교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즉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규범에 순종하여 따르게 만든다. … 학생들이 학교에서 우수하다고 평가되려면 부모의 재산과 권력 외에도, 규정을 어기고서라도 승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학교에서 순종을 가르치면서 또 규정위반을 가르치는 것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규정위반이 일종의 순종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선생 개개인은 학생들이 무엇을 배우는가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도 하지만, 학교 조직은 학생들이 얻는 점수만을 문제로 삼는다. 따라서 학생들은 학교에서 강요하는 규정은 순종해야 하고, 별로 강요하지 않는 것은 어겨도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 규정에 잘 순종하는 학생들은 그 사회에서 생산 및 소비 생활을 요구받는 대로 수행하게 된다. 학교 규정을 어기며 성공하는 것을 배운 학생들은 이 사회를 요리조리 이용해먹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 학교는, 기술에 의하여 지배되는 세계에서 권력을 갖는 사람이 이 지배관계를 통하여 이득을 얻게 보장해주며, 더구나 그들이 이 지배관계를 거부할 줄 모르도록 무능력화시켜 버린다. 결국 학교 운영 과정에서, 상부의 운영자에서부터 하부의 추종자까지 모두가 끝없는 경쟁 -처음에는 규정에 따르다가 결국에는 규정을 깨뜨리고 나아가는 데까지 이르는 경쟁-에 휩싸이게 된다. 그 규정이 옳고 그르고 혹은 그 경쟁이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닌가는 제쳐두고 말이다.

오늘날 학교교육은 기술문명사회에서 보편적인 종교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서, 그 사상을 전파하고 구체화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을 받아들이게 유도하고, 받아들이는 정도에 따라 사회적 지위(social status)를 부여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테크놀로지 자체를 거부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문제는 테크놀로지에 적응하고 이용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우리가 교육에 걸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테크놀로지의 노예 혹은 테크놀로지라는 이름에 의하여 다른 것들의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테크놀로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유인을 만들기 위한 진정한 교육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노예로 전락하기는 쉽지만 자유인 혹은 주인이 되는 것은 어렵다. 테크놀로지는 환경의 오염에 의하여, 현대전쟁을 통하여, 혹은 인구폭발 등에 의하여 인류를 죽여버릴 수 있다. 그리고 끝없는 소비경쟁을 통하여, 경찰국가에 의하여 혹은 결국에는 무너지고야 말 생산양식을 통하여 인류를 노예로 전락시켜 버릴 수 있다. 이러한 위협으로부터 틀림없이 빠져나갈 수 있는 절대적인 방법은 없다. … 교육에서만이 아니라, 개인의 생활기회(life chance; 사회계층적 이동, 즉 하층에서 상층으로의 상향이동의 수단으로서의 학교교육을 의미한다)에 있어서 학교 교육의 일률적인 독점을 배격해야 할 것이 요구된다.

학교는 무엇을 하는가

… 학교의 선별기능에 의해 승자가 탄생하지만 그와 동시에 패자도 또한 생겨나며 학교의 선별은 인생의 선별로 연장되어 인생의 패배자를 만들어 내게 된다. … 학문 자체를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기보다는 경쟁에 이기는 것 자체를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일부분은 항상 그 대열에서 탈락하기 마련이다. … 더 큰 해악은 학생들을 선별해서 카스트 제도와도 같은 특권적 위계질서의 틀 속에 끼워 넣는다는 점에 있다. … 오늘날 학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실력은 그 사회구조와 부합되는 실력뿐이다. 이러한 사회구조의 특징은 기술문명의 생산물의 경쟁적 소비에 있다고 하겠으며, 이것은 다시 제도에 의하여 통제된다. 한편 제도는 현재의 지배적인 특권적 위계질서를 유지하고 현재의 특권층이 새로운 ‘실력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특권적 지위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한 확대시키는 방향으로 생산물을 통제한다.

학교란 무엇인가

… 여기서 학교를 <일정한 연령의 집단이, 단계적인 교육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교사가 감독하는 교실에 출석할 것이 요구되는 제도>라고 정의하자. … 선생들도 학교가 생기면서 그 전과는 반대의 위치에 서도록 바뀌었다. 선생의 진정한 역할은, 질문을 받고서 보다 깊은 질문을 다시 던져올 수 있도록 대답해주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이러한 역할이 반대로 되었다. 즉 선생이 질문해야 하고, 탐구욕을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정설을 제시해야 한다. … 학교가 직업을 알선하고 정치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역할을 갖게 해주는 독점적인 제도로서 성장한 것은 표준화된 단계적 교육과정에 의해서 가능했다. … 학교는 사람과 지식을 조작 가능한 대상물을 다루듯이 취급한다 -마치 현대기술문명 세계 모든 것을 취급하듯이. 물론 모든 것이 조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조작과정에서 대상물의 다른 측면을 짓밟고, 바라지 않았던 부산물이 생기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인간을 조작대상으로 삼을 때 그 희생은 특히 크다. 그리고 인간은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에 있어서 조작되지 않고 보존되어야 할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교육과정에서 생겨나는 부산물들은 벌써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위험은 그 방법이 성공할 것이라는 고집에 있다. 교육과정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조작 처리되어 배출되는 인간은 운명을 지배하는 능력 -인간을 다른 나머지 물질로부터 구분시켜주는 고유한 특성-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교육의 혁명적 역할

사회의 전반적인 변혁 없이는 학교 교육을 대체할 수 있는 효율적인 대안이 마련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회의 다른 부분에서의 변화로 교육에서의 변혁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도 소용없는 짓이다. … 교육적인 변화는 그 변화과정에서 다른 근본적인 사회적 변화를 가져온다. 진정한 교육은 사회의 근본적인 힘이 된다. 오늘날과 같은 사회구조는, 비록 소수만을 교육시킨다 하더라도, 교육받은 사람에 의해서 붕괴되고야 말 것이다. 여기서는 학교 교육 이상의 다른 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사회를 받아들이도록 학교에서 교육되지만, 그들이 배우는 것은 사회를 창조하거나 혹은 다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우리들 대부분은 영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지만 우리의 도움이 없다면 영웅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이다. 정의로운 세계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우리들 모두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세계에서 존재해야 할 삶을 지금부터 살기 시작하는 일이다. 이런 식의 이야기는 이전에도 어디에서 들은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모든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다른 형식으로나마 그것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의 진실성이나 정당성이 감해지는 것은 아니다 … 의로운 사회는 일단 획득되고 그 다음에 향유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매일매일 새롭게 획득되어져야 하며, 따라서 획득되어지고 있는 동안 향유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인권오름 제 275 호 [기사입력] 2011년 11월 1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31 호 [기사입력] 2015년 03월 26일 8:54:00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는 이번호가 마지막입니다. [문헌으로 인권읽기]란 제목으로 24회, [인권문헌읽기]로 100회를 썼습니다. 긴 시간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마음 가다듬고 새로운 기획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글쓴이(류은숙)

오래전 영화에서 주인공은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쳤고, 요즘 사람들은 “리셋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 것 같다. 뭔가 이대론 안 될 것 같고, 불의와 불평등으로 꽉 막힌 벽 앞에서 문을 찾는 맘으로 하는 말일게다. 한 치 앞을 가늠하고 계획할 수 없는 불안한 삶에서 시계만 안정적으로 똑딱거린다. 누군가 답을 줬으면 좋겠는데 정부나 정치인이나 번지수 잘못 찾은 답을 폭탄처럼 투하하고, 답이 없으니 나도 대꾸하지 않겠다는 주변의 침묵만 깊어간다.

보낸 신호에 대꾸가 없는 것처럼 답답한 것은 없다. 내가 보낸 메시지에 당장 응답이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하지만 누군가 보낸 메시지에는 답을 미루거나 무시하거나 심지어 삭제버튼을 누르기도 한다. 서로 그러다 보면 데면데면해지고 아예 접속을 않게 된다. 인권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권에 대한 호소는 간절히 응답을 원한다. 하지만 누군가 응답할 의무와 책임을 지지 않으면, 인권의 이행이 지체되거나 무시되고 심지어 인권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억압받는다. 인권이 작동하려면 응답받을 권리와 응답할 책임이 짝을 이뤄야 한다.

응답받을 권리는 최근 새롭게 떠오른 인권 목록이 되었다. 가칭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란 이름으로다. 2005년 유엔인권이사회는 ‘인권과 국제연대에 관한 독립 전문가’를 특별절차 중의 하나로 신설했다. 독립 전문가의 수임사항 중 하나는 ‘국제연대에 관한 권리 선언’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독립 전문가 버지니아 비 단단(Virginia B. Dandan)은 2014년 6월, 이 선언의 초안을 유엔인권이사회에 제출했다. 공인된 국제인권기준으로 채택되기까지 더 많은 과정을 거쳐야겠지만, 이 초안을 통해서 이 시대에 요구되는 연대의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초안은 국제연대를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관심, 목표, 행동의 수렴”(제 1조)으로 정의한다. “공동의 목적”이란 ‘2015년 너머 유엔 발전 의제’로 고려되고 있는 목표들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 가령, 모든 사람을 안고 가는 경제 성장, 모든 사람에게 완전하고 생산적인 고용과 존엄한 노동, 도시와 인간 거주지를 모든 사람을 포괄하는 안전하고 활기차고 지속가능한 곳으로 만들기, 생태를 보호하고 회복하며 지속가능성을 증진하기, 감당할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기 등이다.

초안은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를 기본적 인권(제 5조 1항)이라고 명시했다. 그런데 이 권리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국제인권조약들에서 모아낸 것이고 특히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세계인권선언 위에 국제연대의 기둥이 세워져 있음을 확인”(전문)했다. ‘국제’ 연대임을 강조한 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영토 안에서나 밖에서나, 국경을 넘어 보장받아야 할 것이 인권이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 또한 국경과 무관하게 지구적으로 도전받고 있는 문제란 점에서다.

초안은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의 주체를 “민족들과 개인들”(peoples and individuals)로 규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민족들”에는 원주민과 소수민족처럼 익숙한 패러다임만이 아니라 그 패러다임 바깥의 사람들도 포함된다. 가령 “더 큰 시민사회와 조직들 속에서 대표될 수 없거나 불충분하게 대표되며 고립되어진 지역 및 풀뿌리 집단들, 초국적 및 이산하여 다른 나라에 사는 집단 등 국경을 초월하는 사회 영역의 집단들”이다. 또 “국내 및 국제적 활동 모두에 동시에 참여하는 사람들, 공유하는 가치와 담론으로 묶인 사람들, 정보와 서비스의 촘촘한 교환에 연루된 사람들을 포함하는 초국적인 인권옹호 네트워크,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인터넷과 디지털 매체를 통해 연결되고 더불어 유사한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개인들의 가상의 공동체들”(제 6조)도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의 주체라고 했다.

권리의 주체가 있으면 의무를 지는 쪽이 있어야 한다. 초안은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의 의무부담자는 우선적으로 정부”(제 8조)라고 규정했다. “정부의 의무와 유사하거나 보완적인” 의무를 지는 비-국가 행위자(제 8조)도 중요한 의무부담자인데, 특히 “국경 바깥에서의 활동을 포함하여, 자국의 관할권 내 사기업의 행위와 태만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제 2조)에 비춰볼 때 사기업의 “윤리적 책임과 행동규범 준수”의 의무도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의무는 정부가 비준한 국제인권조약에 따른 법적 의무이고 지역 및 국제적 차원에서 합의한 약속과 결정에 따른 의무이다. 정부, 그리고 강력한 힘을 가진 사기업 등에게 의무를 준수하도록 하려면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 그리고 권리의 주체인 사람들의 참여와 기여가 필수적이다. 초안은 인권의 실현을 위한 참여와 기여를 또한 “권리”(제 5조 2항)라고 표현했다. 연대에 대한 권리는 곧 연대할 책임과 한 쌍인 것이다. 같은 동전의 이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리셋이 개인적으로나 세계적으로나 필요한 때이다. 초안 제 12조에는 정부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이 담겨있다. 하나같이 내 정부가 이 땅에서 또 국경 밖에서 벌이고 있는 일들이다. 맞잡은 손으로 같이 정지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공동의 미래를 꿈꾸기 어렵다. 방관과 묵인이 제일 쉽다. 아무것도 안 하면 되기 때문이다. 방관은 결국 반-인권 행위에 대한 동조와 같지만, 동조에 대한 양심의 각성도 결국 각성하는 사람의 몫이다. ‘지금 내 손으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겠는가?’라는 의심도 역시 각성하는 자의 몫이다. 나와 우리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데 정부나 기업이 정의를 실현할 리는 없다. 누군가 같이 버튼을 누르면 조금은 덜 무섭지 않을까? 조금은 더 세게 누를 수 있지 않을까? 소리쳐 부르고 호출에 응답하는 것이 시작이다. 호출과 응답이 나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권리이자 정치적 책임이다.  

국제연대의 권리에 관한 선언 제안문(Proposed draft 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and individuals to international solidarity)

… 인류 가족 모든 구성원의 평등하고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인정하며,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함을 선언하며,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및 국제적 질서에 대한 권리가 모든 사람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세계인권선언 위에 국제연대의 기둥이 세워져 있음을 확인하며, …

국제연대는 국제적 지원과 협력, 원조, 자선 또는 인도주의적 지원에 국한되지 않는 광의의 원칙으로 국제관계의 지속가능성, 특히 국제적 경제 관계, 국제사회 모든 구성원의 평화로운 공존, 평등한 동반자 관계, 이익과 부담의 공정한 공유를 포함한다.

… 지구화가 또한 국가 간 격차를 확대하고, 광범위한 빈곤과 불평등, 실업, 사회적 해체, 환경 위험을 동반한 것에 유념하며, …

국제연대는 개인‧집단‧국가 간 관계를 상호적으로 강화하는 기본적 개념임을 강조하며, …

현재의 지구적 도전을 극복하고, ‘2015년 너머 유엔 발전 의제’의 성취로 나아가고, 모든 사람에게 인권의 완전한 실현을 성취하는 것은 국제연대에 결정적으로 달려있음을 확신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제 1조
1. 국제연대는 민족들, 개인들, 국가들, 국제조직들 사이에 질서를 유지하고, 국제사회의 생존을 보장하고, 평화와 안전, 발전과 인권을 이행하고 실천해야 하는 의무들의 국제규범체계에 기초하여, 국제적 협력과 집합적 행동을 요구하는 공동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관심, 목표, 행동의 수렴으로 이해돼야 한다. …

제 2조
국제연대는 다음의 원칙에 근거해야 한다:

(g) 자국의 외교 정책, 쌍무협약, 지역 및 국제 협약, 협력관계에 관련하여 자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
(h) 자국이 회원국인 국제 조직의 행위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은 영외적용 의무를 포함하여, 국가의 국제적 인권 의무에 부응해야만 한다.
(i) 국경 바깥에서의 활동을 포함하여, 자국의 관할권 내 사기업의 행위와 태만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

제 3조
국제연대의 핵심 특질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a) 예방적 연대는 모든 인권의 실현을 보호하고 보장할 집합적 행위로 규정되는 것으로, 정부가 국제법에 따른 자국의 의무를 완전히 존중하고 준수할 것을 의미한다. 민족들, 개인들, 시민사회와 그 조직의 경우에는 그와 관련된 활동을 통해 국가의 노력을 보완해야 한다. 예방적 연대는 국제연대 및 세대 간 연대 둘 다에 필수적이며, 국가의 인권 의무, 특히 핵심 의무의 이행에서 국제협력과 지원을 제공하고 구할 정부 의무의 중대한 요소이다.


제 5조
1.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는 민족들과 개인들이 향유할 자유를 가진 기본적인 인권으로 이해돼야 한다. 연대권은 평등과 비차별, 정의롭고 공정한 국제 정치 및 경제 질서와 더불어 조화로운 국제사회의 혜택 위에 기초하는 것으로, 이런 질서 속에서 모든 인권과 기본적 자유가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

2. 모든 사람이 공통으로 갖는 타고난 권리이며,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언어, 종교, 민족적 또는 사회적 출신, 재산, 출생 또는 기타의 지위의 차이를 가로질러 민족들과 개인들을 연대로 묶어주는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고 향유할 자유, 그리고 적용 가능한 국제인권기준에 따라 인권의 완전한 실현에 참여하고 기여할 권리를 준다.

3.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는 핵심적인 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 발전에 대한 권리와 국제노동기준을 반영하는 국제인권조약으로 이미 규범화된 자유와 권리들에서 도출한 것이며, 쌍무 및 다자간, 지역 및 국제적 차원의 다양한 관련 분야의 자발적인 약속과 결정에서 도출된 기타의 책임들로 보완된다.

제 6조
1.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의 보유자는 원주민과 소수민족 등 개인들과 민족들, 그리고 자기동일성을 가진 인구 또는 국가를 포함한 타자에 의해 식별되는 정체성을 갖는 인구 속의 시민사회 집단과 조직 등을 포함해야 한다.

2. 권리보유자는 또한 지배적인 패러다임 바깥에 있지만, 그럼에도 유사한 가치나 관심사를 공유하며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는 사람들도 포함해야 한다.
(a) 더 큰 시민사회와 조직들 속에서 대표될 수 없거나 불충분하게 대표되며 고립되어진 지역 및 풀뿌리 집단들
(b) 초국적 및 이산하여 다른 나라에 사는 집단 등 국경을 초월하는 사회 영역의 집단들
(c) 국내 및 국제적 활동 모두에 동시에 참여하는 사람들, 공유하는 가치와 담론으로 묶인 사람들, 정보와 서비스의 촘촘한 교환에 연루된 사람들을 포함하는 초국적인 인권옹호 네트워크
(d)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인터넷과 디지털 매체를 통해 연결되고 더불어 유사한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개인들의 가상의 공동체들

제 8조
1.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의 의무부담자는 우선적으로 정부이며, 민족들과 개인들과 같이 일하는 비-국가 행위자들 또한 책임을 갖는다. 이런 책임의 상당수는 정부의 의무와 유사하거나 보완적일 수 있다.
2. 정부는 자국이 비준한 국제인권조약 그리고 지역 및 국제적 차원에서 합의한 약속과 결정에 따른 의무를 지켜야 한다.
3. 비-국가 행위자들은 윤리적 책임과 행동규범을 준수해야 하고 국제연대에 대한 민족들과 개인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


제 9조
1. 국제협약과 관련 기준을 정교화하고 이행하는데 있어, 정부는 자국의 인권 의무, 특히, 국제무역, 투자, 금융, 조세, 기후변화, 환경보호, 인도주의적 구제와 지원, 발전 협력과 안전에 관련된 문제에 대한 인권 의무를 철저히 준수하는 절차와 결과를 보장해야 한다.

2. 정부는 자국민과 협의하기 위하여 적절하고 투명하며 포괄적인 행동을 취해야 하며, 국가적, 쌍무적, 지역적 및 국제적 차원에 합의한 결정에 대해, 특히 국민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문제에 대해 국민에게 철저히 알려야 한다.


제 11조
1. 정부는 다음과 관련된 지구적 도전에 대한 대응에서 국제협력과 모든 동반관계에 대해 인권에 기반한 접근을 이행해야 한다:
(a) 지구적 거버넌스, 기후변화영역에서의 규제와 유지 가능성, 인도주의적 구제와 지원, 무역, 금융, 조세, 부채 경감, 개발도상국으로의 기술 이전, 사회적 보호, 보편적인 건강보험, 출산과 성 건강, 모든 사람에 대한 무상교육, 인권교육, 이주, 노동, 유독성 폐기물 투매, 초국적 범죄 등
(b) 성 권력 관계를 포함하여 구조적인 불평등을 다루기 위한 참여적인 지구적 거버넌스
(c) 민족들과 개인들에 중심을 둔 발전을 가능케 하는 지구적 환경 만들어내기


제 12조
국제연대에 대한 권리는 다음을 포함하여, 적용 가능한 국제인권법이 요구하는 특정한 금지의 의무를 국가들에 부과한다.
(a) 민족들의 생계 또는 기타의 권리를 손상시킬 자유무역협정 또는 투자 조약을 채택하지 않기
(b) 인권의 행사와 향유를 방해하거나 어렵게 만드는 조건을 국제협력에 달지 않기
(c) 생명을 구하는 약제, 그리고 의학과 과학의 진보의 혜택에 대한 접근을 그 누구에게도 거부하지 않기
(d) 비정상적인 무기 거래 하지 않기
(e)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대한 접근을 방해하지 않기
(f) 지구 온난화를 증가시키거나 원인이 되지 않기
(g) 자연 자원을 고갈시키거나 돌이킬 수 없는 해를 유발하지 않기
(h) 인류 공동의 유산을 해치지 않기
(i) 미래 세대의 권리를 손상하지 않기

인권오름 제 431 호 [기사입력] 2015년 03월 26일 8:54:00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23 호 [기사입력] 2015년 01월 22일 17:46:0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두 명의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굴뚝에 오른 지 40일이 넘었다. 스타케미컬 노동자의 굴뚝 생활은 무려 240일이 넘었다. 다행히 쌍용차에선 교섭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지만 또 다른 굴뚝들이 도처에 있다. 연일 터지는 노동자에 대한 모욕과 멸시의 사건들, 추락하고 깔리고 폭발하는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 실업의 우울과 불안, 다가올 실업의 공포가 도처의 굴뚝들이다.

이전에도 노동자들은 송전탑이며 광고탑이며, 극한 곳으로 수시로 올라갔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이전엔 지나가면서 송전탑을 의식한 일이 없어. 근데 지금은 사람이 살고 있는 것 같아 올려다보게 돼.” 그렇다. 사람이 둥지 틀 수 없는 곳으로 사람이 내몰리고 있다. 날이 궂거나 바람이 불면 가슴이 답답하고 조마조마하다. 영어의 ‘염려, 고통, 분노’는 모두 같은 어원을 갖는데 그게 협심증의 어원이란 말이 실감난다.

가슴이 죄이는 듯 하는 것은 송전탑이나 굴뚝같은 극단적인 곳을 볼 때만이 아니다. 예외가 아닌 일상이 문제다. ‘수퍼갑질’이 아니곤 문제시조차 되지 않는 일상 속의 존엄성 유린은 자각증세가 없는 만성질병 같다. 특히 일상적으로 노동하는 사람을 멸시하는 일이 어느 때부턴가 공공연한 일이 되었다. 경제사회적 양극화가 정당한 자존감과 자부심 대신에 비뚤어진 우월감과 열등감을 경합시킨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존중하고 존중받는 것인데, ‘존중? 그건 어디서 파는 거에요? 얼마에 살 수 있어요?’ 식의 엉뚱한 접근이 퍼져있다.

현대 인권의 초석은 ‘인간 존엄성’이다. 초석이란 타협 불가능한 원칙이란 의미다. 인간 존엄성은 개인의 업적이나 성취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 존엄성은 단지 ‘인간임’으로 해서 누구나 갖는 것이다. 이 존엄성은 인간의 ‘평등성’에 기반한 것으로 자연적‧세습적인 위계와 귀족주의‧엘리트주의 이데올로기라 할 것을 일체 거부한다. 모든 인간의 존엄한 가치는 비교하여 따지거나 경쟁으로 획득하는 상대적 가치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절대적 가치이다. 인권의 핵심 가치인 ‘자유, 평등, 우애(연대)’는 이런 인간 존엄성에서 도출한 것이다. 자유란 ‘소비의 자유’가 아니라 위계적 제도가 양산해 낸 ‘사회적 차별에 저항하는 정신’을 말하고, 우애(연대)는 공동체적 삶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사회적 관계의 질을 말한다. 평등은 이런 자유와 연대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인간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 사회의 제반 활동에서 인간 존엄성을 척도로 삼는 것이다. 가령 인간을 한낱 자원이나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다룰 때 그것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것이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 존엄성의 원칙은 국제인권법과 헌법 등 법질서 전체에 적용될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들고 행하는 제도나 정책 등 모든 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간 존엄성’을 정초한 대표 문서로 흔히 ‘세계인권선언’을 꼽는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런데 세계인권선언(1948)보다 한 발 앞선 존엄성의 전령이 있었다. 국제노동기구(ILO)의 목적을 담은 필라델피아 선언(1944)이다.

ILO는 일찍이 1919년의 창립 헌장에서 “항구적인 평화는 사회적 정의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인류는 그런 정의를 추구하는데 실패했고 또 한 번의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인간을 사물처럼 취급하고 경제성장의 수단으로만 대하는 질서가 계속되는 한 전쟁은 언제나 일어난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완전히 증명되었다”. ILO는 전후의 삶과 국제질서를 이끌어 갈 원칙을 재확인해야 했다. 그 재다짐의 내용은 인간 존엄성을 모든 것의 정초원리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그것의 실현은 시장의 횡포를 사회 정의에 무릎 꿇도록 만드는 제반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재확인‧재천명한 원칙을 담은 것이 ‘ILO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이다. 필라델피아에 모여 만들었기에 그 도시의 이름을 딴 것이지만, 그 도시의 이름이 ‘우애’를 뜻한다는 것은 우연치고는 반가운 것이다. 우리가 형제애와 자매애, 즉 우애의 정신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란 것을 이름 자체가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필라델피아 선언의 으뜸 원칙이다. 인간을 존엄하게 대한다는 게 한마디로 뭐겠는가? 사람을 사물 취급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를 ‘인력’이 아니라 ‘인간’으로, 노동력의 거래를 다른 물건처럼 ‘사고 파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는 ‘인력’으로서 ‘경제적 보상’만 받으면 되는 존재가 아니라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존중’받아야 하는 인간이다.

물질적 존중은 그때그때 일한 만큼의 대가가 아니라 인간다운 생활의 안정과 지속을 위한 생활의 보장으로 실현돼야 한다. 정신적 존중은 구성원으로서의 자존감, 소속감, 연대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의 보장이다. 자신의 일에서 통제력과 재량을 발휘할 수 있고, 동료와 안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노동자 개인과 조직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더 넓은 사회와의 연대감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물건과 달리 인간은 말을 하고 저항한다. 노동자의 물질적‧정신적 권리의 충족은 결과적으로 ‘그냥 주어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참여 속에서 추구할 권리이다. 단순한 혜택과 권리로서의 보장은 다르다. 권리로서 향유하기 위해선 노동자의 개인적 및 집단적 자유가 중요한다. 따라서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필라델피아 선언은 이런 내용들을 ‘사회 정의’의 구체적 내용으로 규정했다. 이런 사회정의의 추구가 목적이라면 경제는 그것의 실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이 선언을 유념한다면, 목적과 수단의 뒤집힘을 지적하고 경계하는 것이 실천과제이다.

오늘도 우리는 도처에서 벌어지는 노동자의 저항과 고난을 본다. 우리의 눈은 목적과 수단의 전도에 착시현상을 일으켜선 안된다. 사회정의를 굴뚝 삼아야 한다. 시장 우위의 폭력성과 인간 존엄성 유린의 연기를 빼내야 한다. 그 연기에 눈물콧물 쏟고 있는 노동자들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 ‘왜 극한투쟁을 하느냐? 그것밖에 방법이 없느냐?’는 말은 안 듣겠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무릎 꿇려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니라 폭력적인 구조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도 ‘왜 말로 하지 않고 극한투쟁을 하냐’는 공격을 자주 받았다. 킹 목사는“협상이야말로 우리의 행동이 원하는 궁극 목표”라고 답했다. “비폭력 직접행동은 위기와 긴장감을 조장시켜, 협상을 거부하는 사회를 곤경에 빠뜨리고 더 이상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즉 사회의 쟁점들을 본격적으로 부각시켜 더 이상 흐지부지 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 직접행동의 추구하는 바이다”

6년여가 되어서야 가능해진 쌍용차의 노사 협상이 자랑스러우면서도 서럽다. 숱한 노동자들의 직접행동이 만든 결과여서 기쁘지만, 노동자는 ‘말’에 낄 수 없는 존재, 대화와 협상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 사회의 잔인함에 입은 상처들 때문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의 말이 말로서 존중돼야 하며 정책과 조치들의 잣대가 돼야 한다. 오늘도 숱한 노동자들이 온 몸으로 말을 걸고 있다. 나는 처분가능한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나의 노동은 상품이 아니라 당신과의 관계라고 말이다.

국제노동기구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ILO Declaration of Philadelpia, Declaration concerning the aims and purposes of ILO, 1944)

국제노동기구(ILO, 아래 ILO) 총회는 필라델피아의 제 26차 회기에서, 1944년 5월 10일, ILO의 목적에 관한 이 선언과 회원국의 정책 기조가 되어야 할 원칙들을 채택한다.

I
총회는 ILO가 근거하고 있는 기본 원칙들, 특히 다음 원칙들을 재천명한다.

a)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b)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c)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
d) 결핍과의 투쟁은 각국에서 불굴의 의지로, 그리고 노동자 대표와 고용주 대표가 정부 대표와 동등한 지위에서 공동선의 증진을 위한 자유로운 토론과 민주적인 결정에 참여하는 지속적이고도 협조적인 국제적 노력으로 수행돼야 한다.

II
총회는, 항구적 평화는 사회 정의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다는 ILO헌장속의 선언의 정당성이 경험적으로 완전히 증명되었다고 확신하며, 다음을 확언한다.

a) 모든 인간은 인종, 종교 또는 성별과 상관없이 자유와 존엄, 경제적 안전 속에서 그리고 평등한 기회 속에서 자신의 물질적 복지와 정신적 발전 둘 다를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
b) 이를 가능케 할 조건의 실현은 모든 국내 및 국제 정책의 핵심 목적이 돼야만 한다.
c) 모든 국내 및 국제적 정책과 조치들, 특히 경제‧금융 영역에서의 그것들은 이런 관점에서 판단돼야만 하며, 이 근본 목적을 달성하는데 방해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에 따라서만 채택돼야 한다.
d) 이 근본 목적의 견지에서 모든 국제적인 경제‧금융 정책과 조치들을 검토하고 심의하는 것은 ILO의 책무이다.
e) ILO는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관련된 경제‧금융 요소 일체를 고려한 후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모든 규정들을 결정과 권고 속에 포함시킬 수 있다.

III
총회는 다음 사항들을 실현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전 세계의 국가들에서 촉진되도록 하는 것이 ILO의 엄숙한 의무임을 인정한다.

a) 완전 고용과 생활수준의 향상
b) 노동자들이 최대한의 기술과 조예를 발휘하고 공동선에 최대한 기여할 수 있는 만족을 가질 수 있는 일자리에 고용되도록 할 것
c) 이 목적의 성취를 모든 관련자들에 대한 적절한 보장을 통해 달성하기 위하여, 고용과 거주를 위한 이주를 포함하여, 직업 훈련과 노동자의 이동을 원조하기 위한 시설들의 제공
d) 임금과 소득, 노동시간과 기타의 노동조건과 관련하여, 모두가 진보의 과실을 정당하게 공유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모든 고용 노동자와 그런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이에게 최저 생활 임금을 보장하는 정책
e) 단체교섭권의 실질적인 인정, 생산 효율성의 지속적인 향상에서의 관리자와 노동자의 협동, 그리고 사회적 및 정치적 조치들의 마련과 적용에서의 노사협력
f) 사회적 보호와 충분한 의료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본 소득을 제공하기 위한 사회보장 조치들의 확대
g) 모든 직업에서 노동자의 삶과 건강을 위한 적절한 보호
h) 아동복지와 모성 보호의 제공
i) 적절한 영양, 주거, 여가와 문화 시설의 제공
j) 교육과 직업 기회의 평등성 보장

(IV, V 생략)

인권오름 제 423 호 [기사입력] 2015년 01월 22일 17:46:0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19 호 [기사입력] 2014년 12월 12일 0:28:00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나는 한 해의 끝자락에 태어난 겨울 아이다. 생일이 누구에게나 언제나 좋은 기억일 수는 없다. 어릴 적 행상 나간 엄마의 귀가를 기다리며, ‘혹시나’ 하며 저녁을 굶었다. 엄마도 춥고 고달프겠지만 오늘은 내 생일이니 ‘혹시나’ 특별한 걸 사들고 올지 모른다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엄마는 꽁꽁 언 채로만 돌아왔다. ‘밥 먹었냐’는 말에 실망을 감추려 아무 말 없이 남은 찬밥을 끓였다. 나이 들어선, 내가 엄마에게 ‘밖에서 밥이나 먹자’고 전화를 걸곤 한다. 그럼 엄마는 ‘뭣 하러 추운데 나오라하냐’며 뭉갠다. 실랑이 끝에 ‘알았어, 알았다구. 됐어!’ 볼멘소리로 전화를 끊곤 한다. 며칠 후에야 ‘내가 가만 생각해보니 그 날이 네 생일이었더라’며 전화가 오는 게 연례행사다.

‘세계 인권의 날’은 12월 10일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제정일인 이 날을 전 인류가 ‘인권의 날’로 기념한다. 말하자면, 인권의 ‘생일’이다. 인권운동을 하는 나에겐 제 2의 생일 같기도 하다. 하지만 해마다 이 날은 온갖 인권 피해의 설움이 넘치거나 잊히고 외면 받는 날 같다. 66세를 맞는 2014년 인권의 날은 더욱 그랬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 차별이 일상인 장애인, 정리해고 되고 단식이며 고공농성으로 내몰린 노동자 등이 생일 촛불 대신 이 거리 저 거리에서 제 몸을 태우고 있다. 국경 너머에서 들려온 CIA 고문 보고서는 글자만으로도 흉기다. 이스라엘의 살인이나 숱한 난민과 아동의 인권 재난 …, 여기서 다 열거하지 못한 이유로 잊혀질 인간의 고통은 없다. 게다가 기막힌 일이 ‘서울시민인권헌장’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밥 달라 했더니 주걱으로 뺨 때리는 것도 아니고, 인권헌장 대신 차별 선동과 혐오 폭력이 달려들었다. 헌장의 일반원칙인 차별금지조항에서 ‘성적지향 및 성별정체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혐오세력이 폭력의 난장을 벌였다.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할 서울시는 도리어 헌장 제정과 선포를 포기했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로 상처에 소금까지 뿌렸다.

내 생일 같은 올해 ‘인권의 날’은 지독하고도 길었다. 오전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추진대회가 있었다. 제안에 나선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너무 늦게 인권에 관심을 가져 죄송하다’거나 ‘권리를 권리로서 행사하지 않은 우리의 잘못’이라고 했다. 가해자와 책임져야 할 세력은 꼬리를 자르고 뒤꽁무니 빼는데, 피해자가 ‘미안하다’고 하니 뭔가 뒤집혀도 한참 뒤집힌 일이었다. 피해자들이 먼저 나서서 ‘함께 인간의 존엄을 지키자’고 하니 민망함과 죄스러움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후에는 서울시청의 무지개 농성장에 갔다. 시청에는 ‘서울시민 인권헌장 제정 시민위원회’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자기 주머니를 털어 인쇄한 ‘서울시민 인권헌장’과 헌장 제정 축하 무지개떡이 있었다. 인권의 날에 예정된 대로 시민들은 스스로 헌장을 선포하고 축하했던 것이다. 버티던 시장은 결국 농성단과의 면담을 받아들였다. 잘못에 대해 사과하긴 했지만, 뜨뜻미지근하고 두루뭉술했다.

겨울비까지 내리는 심난한 생일이었지만 주인공인 ‘세계인권선언’을 아니 볼 수 없다. ‘세계인권선언’의 제 1조는 모든 인권의 초석으로서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을, 제 2조는 모든 인권을 꿰는 일반원칙으로 차별금지를 규정하고 있다.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란 가치를 걷어차면 언제든지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고, ‘차별은 안 된다’는 기본원칙을 무시하면 굴비 엮듯 모든 인권이 침해된다는 말이다.

‘세계인권선언’에 담긴 인권에 대한 신념과 실천의 약속을 더 단단히 만든 것이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란 양대 국제인권규약이다. 이 셋을 묶어 ‘국제인권장전’이라 특별히 부른다. 이 장전을 주춧돌 삼아 더 촘촘하고 단단한 국제인권조약들이 만들어졌고 앞으로도 탄생할 것이다. 양대 규약을 담당하는 위원회의 역할 중 하나는 ‘일반논평’을 만드는 것이다. ‘일반논평’은 규약에 담긴 권리들을 구체적으로 풀이하는 주석이다.

양대 규약에는 공통으로 제 2조에 차별금지 조항이 들어 있고, 각 규약의 해당 위원회는 차별금지 조항의 의미를 해설하는 일반논평을 내놓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차별금지사유의 변화와 추가이다. 예를 들어, 세계인권선언에 열거된 차별금지사유에는 ‘장애’가 빠져있다. 전후 당시의 장애에 대한 인식수준은 인권은커녕 복지도 아닌 후생사업과 원조의 수준이었다. 오늘날 대표적인 차별금지사유에 당연히 ‘장애’가 명시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아닌 게 아닌 것이다.

선언 제정 당시에 ‘차별금지사유를 상세히 담은 목록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법 앞에 평등이란 조항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이 맞섰다. 결론은 차별금지사유를 명시한 포괄적인 차별금지조항의 채택이었다. ‘차별은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국제적 정치 행위로 간주돼야 한다’, ‘차별행위를 구체적으로 금지하는 조항이 채택되지 않으면 미국에서의 흑인 린치 등의 관행이 계속될 것이다’, ‘차별행위는 범죄를 구성하며 국가법으로 처벌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등의 의견이 더 힘을 얻었다.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으면 차별금지사유를 제멋대로 해석하고 정당화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열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고, 미처 보지 못하거나 부각되지 못한 문제를 생각해서 “기타의 신분 등에 의한”이란 표현을 덧붙였다. ‘등’이란 표현에는 여기에 열거되지 않았더라도 차별금지기준으로 고려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뜻이지, 가시적이고 심각한 차별의 원인을 외면하는데 써먹으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차별에 반대하지만 동성애는 안된다’는 말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갈 테면 나가보란 말과 같고, ‘동성애를 열거하지 않고 그냥 차별금지면 다 된 거 아니냐’는 말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차별과 혐오에 고통 받는 이들에게 ‘눈에 띄지도 말고 문제 삼지도 말라’고 협박하는 것과 같다.

양대 규약의 차별금지조항에 대한 일반논평을 살펴보자. 1989년의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위원회’의 일반논평에 열거된 차별금지사유와 달리 2009년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위원회’ 일반논평에선 “기타의 신분”에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이 포함돼 있다. 해당 위원회는 “차별의 성격은 맥락에 따라 변화하며 시간에 따라 진화한다. …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차별금지사유로 인정되는 것은 주변화로 계속 고통받아온 취약한 사회적 집단의 경험을 반영할 때이다.”라고 설명한다. 이 논평에서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말고도 ‘장애, 나이, 국적, 혼인과 가족 상태, 건강 상태, 거주 장소, 경제적 및 사회적 상황’을 “기타의 신분 등”에 추가될 차별금지사유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같이 오늘날 한국사회가 직면한 차별 문제와 뗄 수 없는 것들이다.

약간 벗어난 얘기지만, 세계적으로 나이에 대한 차별, 특히 노인의 인권에 특화된 국제인권조약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 한국 사회의 노인들에게선 노인 인권에 관한 것과는 결이 다른 움직임이 주목되는 일이 잦다. 서울시민 인권헌장을 둘러싼 혐오 폭력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노인들을 보았다. 무지개 농성장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노인인권의 존중과 보호와 실현을 위해 함께 모이는 광경을 상상해본다. 함께 촛불도 켜고 떡도 썰면서 말이다. 그게 인권의 힘이다.

서울시청에서의 무지개 농성이 잠시 후 정리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농성 정리는 또다른 실천의 시작일 것이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세력은 단지 성소수자만을 공격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권의 가치를 바닥에 팽개치며 다른 사회적 약자를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주민, 장애인, 빈곤층 …. 우리는 이렇게 확대되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모욕을 방치할 수 없다.”는 우리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 모두를 초대한다. 인권의 초대에서 주인과 손님은 따로 없다. 인권의 날이 생일잔치다운 잔치를 할 날을 함께 만들어보자.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위원회 일반논평 18(1989)

1. 차별금지는 법 앞에서의 평등 및 어떠한 차별도 없는 법의 평등한 보호와 더불어 인권 보호에 관한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원칙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 규약의 … 당사국은 자국의 영토와 관할권 하에 있는 모든 개인에 대하여 …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이 이 규약에서 인정되는 권리들을 존중하고 보장할 의무를 가진다. …

2. … 더 나아가, 제 20조 2항은 당사국에게 차별에 대한 선동을 구성하는 민족적‧인종적 또는 종교적 혐오의 고취를 법률로서 금지할 의무를 부과한다.

10. 또한 본 위원회는 당사국들이 평등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동 규약에 의해 금지된 차별을 야기하거나 영속시키는 상황을 줄이거나 철폐하기 위해 때로는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일부 특정 인구의 일반적인 상황이 인권의 향유를 침해하거나 방해하는 경우, 당사국은 그런 상황을 시정하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그러한 조치로는, 당해 특정 인구에 대해 구체적인 사안에 있어 그 외의 나머지 인구와 비교하여 특정 기간 동안 우대조치를 부여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실질적인 차별을 바로잡기 위해 그런 조치가 필요한 경우, 이는 동 규약에서 보장하는 정당한 차이의 인정에 해당한다.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위원회 일반논평 20(2009)

1. 차별로 인해 매우 많은 세계 인구가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아래 사회권)를 실현하기 어렵다. 경제성장은, 그 자체로는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개인과 집단들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계속 직면하고 있으며, 이것은 때론 견고한 역사적 및 현대적 형태의 차별로 인한 것이다.

7. 본 규약에서 차별금지는 즉각적인 효력이 있고 규약 전체를 관통하는 의무이다. 제2조 2항은 규약에 담긴 사회권의 행사에서 차별금지를 보장할 것을 당사국에 요구하며, 이 조항은 이들 권리와 연관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 차별은 직‧간접적으로 차별금지 사유에 근거하여 이뤄지며, 규약 상 권리에 대한 평등한 인정‧향유‧행사를 무효화하거나 훼손하는 의도 또는 효과가 있는, 모든 종류의 구별‧배제‧제한‧선호 및 기타 차등적 처우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차별은 차별 선동과 괴롭힘을 포함한다.

8. 당사국은 규약의 권리들이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없이 행사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차별을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철폐해야만 한다.

(a) 형식적 차별: 형식적 차별 철폐를 위해서는 국가의 헌법, 법률, 정책 문서가 차별금지사유에 근거한 차별을 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 예를 들어, 혼인 상태를 이유로 여성에 대한 동등한 사회보장급여를 법에서 거부해서는 안된다.

(b) 실질적 차별: 단순히 형식적 차별만을 다뤄서는, 제 2조 2항이 구상하고 정의한 실질적 평등을 보장할 수 없다. 규약 상 권리의 효과적 향유 여부는 어떤 개인이 차별금지사유에 해당하는 집단의 구성원인지에 따라 흔히 영향 받는다. 실제로 차별을 철폐하려면, 유사한 상황의 개인들에 대한 형식적 처우를 단순 비교할 것이 아니라 역사적 또는 지속적 편견으로 고통 받는 개인들의 집단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당사국은 실질적 또는 사실상의 차별을 발생‧존속시키는 조건과 태도를 예방하고 줄이고 제거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즉각 취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적절한 주거, 물, 위생에 대한 모든 사람의 평등한 접근을 보장하는 것은 여성과 여아, 비공식 주거지와 농촌 지역 거주자에 대한 차별 극복을 도울 수 있다.

구조적 차별
12. 어떤 집단에 대한 차별은 만연하고 끈질기며 사회적 행동과 조직에 뿌리 깊으나, 흔히 문제시되지 않거나 간접적인 차별과 결부됐다는 것을 위원회는 통상적으로 확인했다. 이런 구조적 차별은 공적 및 사적 영역에서 법적 규범, 정책, 관행이나 지배적인 문화적 태도가 한 집단에는 상대적 불이익을 다른 집단에는 특권을 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차별금지사유
27. 차별의 성격은 맥락에 따라 변화하며 시간에 따라 진화한다. 따라서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으며 제2조 2항에서 명백하게 인정된 사유에 비견할만한 기타 형태의 차등적 대우들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기타의 신분”이라는 차별금지사유에 대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추가적인 차별금지사유로 인정되는 것은 주변화로 계속 고통받아온 취약한 사회적 집단의 경험을 반영할 때이다. …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
32. 제2조 2항에서 인정된 “기타의 신분”은 성적 지향을 포함한다. 당사국은 예를 들어 유족연금에 대한 권리 등 규약 상 권리 실현에 개인의 성적 지향이 장벽이 되지 않도록 보장해야만 한다. 또한 성별 정체성도 차별 금지 사유의 하나로 인정된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트센스섹슈얼, 인터섹스는 학교와 직장에서의 괴롭힘 등 심각한 인권 침해를 흔히 겪는다.

경제적‧사회적 상황
35. 개인과 집단은 특정한 경제적 또는 사회적 집단이나 계층에 속한다는 이유로 자의적으로 처우돼선 안된다. 가난하거나 홈리스일 때, 개인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광범위한 차별, 낙인, 부정적 고정관념으로 귀결될 수 있고, 이것은 공공장소에 대한 접근의 거부 또는 불평등한 접근, 타인과 동등한 질의 교육과 건강 보호에 대한 접근의 거부 또는 불평등한 접근을 초래할 수 있다.

국내적 이행
36. 차별적 행위를 삼가는 것 뿐 아니라, 당사국은 규약 상 권리 행사에서의 차별철폐를 보장하기 위하여 구체적이고 의도적이며 목표가 분명한 조치들을 취해야만 한다.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차별금지사유로 구별될 수 있는 개인과 집단은 그런 조치를 선택하는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보장받아야만 한다. 당사국은 선택된 조치들이 실제로 효과적인지를 정기적으로 평가해야만 한다.

입법
37. 제2조 2항을 준수하는 것에서, 차별을 다루는 법률의 채택은 필수불가결하다. 따라서 사회권 분야에서 차별을 금지하는 구체적 입법 조치를 취할 것을 당사국에 독려한다. 그런 법률은 형식적 및 실질적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하며, 공사 부문의 행위자들에게 의무를 부여하며, 앞서 논의한 차별금지 사유를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 기타 법률들도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규약 상 권리의 행사와 향유와 관련하여 차별하거나 차별을 초래하지 않도록, 필요하다면, 정기적으로 재고돼야 하며 개정돼야 한다.

구조적 차별의 철폐
39. 당사국은 실재하는 구조적 차별과 분리를 철폐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그런 차별을 다루기 위해서는, 대개, 임시적인 특별 조치를 포함하여 다양한 범위의 법률, 정책, 프로그램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접근이 요구된다. 당사국은 구조적 차별을 겪는 개인과 집단과 관련된 태도와 행위를 변화시키도록 공적 및 사적 행위자를 독려하는 인센티브 사용을 고려하거나 준수하지 않을 경우 그들을 처벌해야만 한다. 구조적 차별에 대한 인식 향상을 위한 공적 지도력과 프로그램, 차별 선동에 대한 엄격한 조치의 채택은 종종 필요하다. 구조적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방임된 집단에 더 많은 자원을 쏟는 것이 자주 요구된다. 특정 집단에 대한 끈질긴 혐오를 고려할 때, 공직자와 기타 실무자들이 법과 정책을 이행하도록 보장하는 특별한 관심이 요구된다.

인권오름 제 419 호 [기사입력] 2014년 12월 12일 0:28:00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15 호 [기사입력] 2014년 11월 13일 17:43: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줄지어 서있는 큰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그걸 볼 때 갖은 생각이 든다. 오지 않는 버스 등을 기다리는 줄이라면 모두가 경쟁자로만 보이고 귀찮기만 하다. 배고플 때 밥을 위해 늘어선 줄이면 화가 치솟기도 한다. 토론회나 공연 등에 간 것이라면 나와 통하는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많은 것이 반갑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알아서 각자 사는 소위 ‘자율적’인 개인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때론 그 무리가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리는 것 같다. 뭔가 나를 겨냥하여 내가 어쩔 수 없는 일을 꾸미는 것 같다. 나를 향한 무리의 시선이 두렵고 신경 쓰인다.

아주 어쩌다 나와 같은 하늘아래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나의 생계, 일, 건강 등 삶의 중요한 문제들이 저들과의 관계에 있다. 밥이 되고 지붕이 되고 약이 되는 관계들, 내 삶의 불안을 함께 책임져야할 생각과 실천이 그 관계들로부터 나와야 한다. ‘한국 사회가 과연 사회인가’란 질문이 자주 나오는 걸 보면 후자의 생각은 허약하기 그지없다. 사회적 시선과 평가는 혹독하기만 한데 내 문제를 사회적 문제로 받아들이고 공통의 해결책을 구하는 시도는 궁색하기 때문이다.

인권에서 ‘사회적 권리’라 일컫는 것은 개인 단위로 대처하기 어려운 삶의 불안을 공통의 문제로 여기고 대처하는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회적 권리는 미끼이면서 낚시를 끝낸 후에는 입을 닦는 용도로 이용되는 일이 많다. 선거 때의 화려한 공약들은 사회적 권리를 동원한 그럴듯한 수사로 채워지고 그 방법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권리보장과는 정반대의 방법을 택하면서 어쩔 수 없는 경제적 선택으로 정당화한다.

필립 알스턴(Philip Alston) 교수는 사회적 권리의 대표적 연구자이면서 유엔의 인권 전문가로 활약해왔다. 올해 중순에는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특별보고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유엔총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을 보장할 것을 촉구한다.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은 기본 소득 보장과 필수적인 사회서비스에 대한 접근 보장을 목표로 한다. 이 보고서에서 특별보고관은 사회적 보호가 경시된 이유를 검토하고 이 개념의 전개를 추적한다. 또한 사회적 자원의 할당에 관한 의미 있는 토론에 인권의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들이나 북반구의 힘센 기구들이 인권의 언어를 회피하는 것은 보편적이 아니라 선별적인 제공, 권리의 보장이 아닌 완충제로서의 시혜에 치중하려는 시도라고 본다. 따라서 ‘사회적 보호는 인권이다’란 것을 정부 책임자 등에게 명백하게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인 조치라고 한다. 인권이 빠진 위기관리수준의 대응은 사람을 솎아내려는 복잡한 시스템을 낳고, 극히 낮은 수준의 보호에 머물고, 법적 보호가 아닌 변덕스런 정책 경향에 휘둘리게 될 것이라는 경고는 이미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이 보고서에 담긴 내용을 토대로 알스턴은 10월에 세계은행에서 연설하기도 했다. 알스턴은 장밋빛 번영을 전망하는 세계은행 총재(한국인인 김용이다)의 연설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재분배의 필요성도, 공정하고 공평한 과세 제도의 필요성도, 국제적 조세 회피를 차단할 것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말하는 대신에 경제 성장을 통해 개인 소득이 늘어날 것”이라 했다. 그렇게 되면 “성평등, 음식, 주거, 깨끗한 물, 위생, 건강보호, 교육과 직장에 대한 저소득 사람들의 접근권이 향상될 것”이라 했는데 알스턴의 비판 요지는 ‘결론은 인권보장이면서 그걸 위한 방법은 하나도 얘기 안 한다’는 것이었다. 알스턴의 세계은행에 대한 비판을 한국 정부에 대한 것으로 바꿔 생각해도 별 문제 없을 것 같다.

바람이 매서워졌다. 사람들의 온기를 모으는 일이 절실한 때이다.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특별 보고관 보고서(2014년 8월, A/69/297)

3. 사회적 보호 최저선 이니셔티브(The Social Protection Floor Initiative)의 기원과 개념의 발전 경로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꾸민, 헌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의 또다른 사례가 아니냐고 생각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보호 최저선은 새롭고 중요한 것이다. 첫째, 그것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와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 인권의 구조 안에서 시들했던 이 두 권리를 잘 작동하게끔 종합했다. 둘째, 주저하거나 거부하는 정부들에게 강요하기보다는 국제정책사회와 남반구에서 떠오른 실제적인 실천들의 반성적 학습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셋째, 인권규범과 경제적 현실간의 격차 또는 불친화성을 생각하기보다는, 개념으로서의 사회적 보호는 감당성을 고려하고 경제적 생산성 증진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위해 세심하게 설계됐다. 넷째, 다른 어떤 사회적 인권의 경우보다 훨씬 이것은 인권 영역 바깥에서 왔고, 실현 증진을 위해 동원할 수 있는 훨씬 광범위한 행위자들의 연대를 기대한다.

20세기 사회적 보호의 소외

12. 20세기의 대부분, 일반적으로 사회적 보호와 특수하게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가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첫째, 인위적이고 자의적인 인권 개념의 이분법적 구분이 있었다. 아주 다른 가정으로 두 개의 다른 범주의 권리로 나누고 경제사회적 권리에 이등급의 지위를 매겼다. 둘째, 흔히 두 범주의 권리간의 상호의존성과 불가분성이 주장됐지만, 극빈상태의 개인들이 자신의 시민‧정치적 권리의 상당수를 효과적으로 실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다루지는 못했다. 셋째, 시민‧정치적 권리는 대개 비용이 안 들고 경제‧사회적 권리는 불가피하게 많은 비용이 든다는 잘못된 개념이 사회보장을 전형적으로 돈 드는 권리이고 따라서 부자 나라들에서만 적절하다는 가정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됐다. 넷째, 사회보장이 공식적으로 수용된 곳에서, 사회보장은 공적 부문과 공식 부문의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로서 대개 개념화됐다. 따라서 공식‧비공식 구조와 과정 둘 다에서 모든 사람이 일종의 보장 장치에 포함되도록 하는 보다 포괄적인 개념을 만들려는 노력은 단지 최소한이었다. 다섯째, 이런 많은 문제들은 냉전이 인권의 구조에 끼친 영향 때문에 강화됐다. 여섯째, 유엔의 개별 기구들은 다양한 이슈들을 자기 소관으로 주장하고 독점적인 관할권의 형태를 추구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사회보장은 ILO에 “속했다.” 나머지 유엔 기구들은 사회보장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했고, 그것의 의미는 공식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인권 체계가 다수 전문 기구들과 밀접히 연결된 업무여야 하는 것들로부터 상대적 고립 속에 발전돼왔다는 것이다.

사회적 보호 최저선 개념의 출현

15. … 1990년대 후반 이래, 남반구의 다양한 나라들이 사회적 보호를 위한 개혁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이것은 북반구에서 발전된 보다 전통적인 접근과는 아주 다르게 보였다.

17. 라틴 아메리카의 사회적 보호 정책들은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최근 연구는 몇 개의 공통된 정책 특질들을 찾아냈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불평등을 줄이고 경제‧사회‧문화적 권리 실현의 중요성을 인정하기, 시장의 불균형 시정에 대한 정부 역할을 인정하기, 경제 위기에 대응하여 사회적 투자를 늘리고 유지할 필요성, 포괄적인 빈곤 감소 정책의 채택, 젠더‧나이‧민족성에 따른 격차에 유의하기

20. 아주 많은 사회적 보호 이니셔티브가 남반구에서 출현했다는 사실, 그리고 사회적 보호 최저선이 남반구 나라들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의 중요성은 상당수 나라들이 보인 초기 거부감-사회보장에 대한 서구식 접근을 무분별하고 부적절하게 치환한 것이라고 간주-에 비춰보면 훨씬 크다.

사회적 보호 정의하기

21. “사회적 보호”란 일반적 용어는 광범위한 과거와 현재의 정책 접근을 표현하는데 사용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사회안전망”이란 용어의 접근을 옹호하는 쪽과 “사회적 포함”을 추구하고 “사회적 시민권”을 인정하려는 쪽 사이에 주요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의 긴축재정과 구조조정정책에 대한 반발에 세계은행의 주요한 대응이 사회안전망 옹호였다. 사회적 위기관리라는 개념이 특히 두드러졌다. 가장 취약한 이들 또는 만성 빈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기초생계를 보호할 수단으로서나 경제적 쇼크 등에 대한 보다 나은 위기관리로서나 그랬다. 그러나 안전망 접근은 구조적 빈곤과 불평등에 충분한 관심을 쏟지 않고 지원이 필요한 집단을 아주 좁게 겨냥하려 강조했기에 널리 비판받았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권리에 기반한 접근이 증진됐다. 인권 영역에서뿐 아니라 광범위한 개발 학자와 기구들도 그랬다. 하지만 일반적인 논의는 합의와는 거리가 멀다. 사회적 보호에 대한 오늘날 상당수 접근들은 “더 개량적이고 변화는 덜한 편향”을 계속 보이고 있고 이 점이 “만연한 불의의 근본적인 원인”일 것 같다.

23. 국제적 차원에서, 정의를 둘러싼 문제는 계속 논쟁적이다. 특히 사회적 보호 최저선을 인권의 문제로 볼 것이냐 그것이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이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그렇다. 먼저 국제노동기구(ILO)의 제202호 권고를 참조하는 게 적절하다. 제 202호 권고는 사회적 보호 최저선의 계획, 이행, 평가에 대한 주요 기준이 됐다. 제202호 권고의 주 요소는 다음과 같다.

(a) 이 권고는 국제인권법의 강한 기초를 두고 있다. 세계인권선언,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여러 조항을 구체적으로 참고하면서, 이 권고는 국가들에게 “사회보장을 보장함으로써 인민의 권리와 존엄성”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b) 사회적 보호 최저선은 참여적 방식으로, 비차별‧성 평등‧사회적 포함 등의 원칙을 존중하면서 국가의 우선순위를 반영하여 국가적으로 정의된다.

(c) 보호는 선별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어야 하고 “빈곤, 취약성, 사회적 배제를 방지하거나 경감”하는 것으로 목적으로 해야 한다.

(d) 사회적 보호 최저선은 적어도 건강 보호를 보장하고 아동‧노인‧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소득 보장, 특히 질병, 실업, 출산과 장애 시에 소득을 보장하는 기본적인 사회보장을 포함해야만 한다.

(e) 기본적인 보장은 법으로 수립돼야만 한다.

(f) 이행은 정규적으로 모니터하고 정기적으로 평가돼야만 한다.

(g) 사회적 보호 최저선은 국가 자원으로 재정이 처리돼야만 하고, 필요하다면 국제적 지원이 이용가능해야 한다.

26. ILO 사회적 보호 최저선 자문단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주목했다.
“사회적 안전망 접근에서, 사회 정책들은 경제 개발에 대해 잔여적인 것으로 생각됐다. 그런 조치들의 이행은 구조 개혁 동안에 구조조정의 효과에 완충재를 대고 구조조정에 대한 정치적 지지를 촉진하려고 빈민과 취약자들에게 구제를 제공할 필요성 때문에 추진됐다. 그런 조치들은 대개 임시적이고, 파편적이며, 욕구에 기반한 틀에서 빈민과 취약자들을 겨냥했다.”

29. 세계은행의 입장은 “정치적”이 되지 않고도 인권 존중을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오랜 거부감에 끌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은행이 선호하는 처방은 인민의 역량강화보다는 경제학자와 행정가들이 감독한 것들이고, 인권 침해 방지를 위한 경고나 안전장치가 없는 가운데 보편적인 적용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들이고, 경제 정책 입안가들의 선택을 구속할 사회적 보호에 대한 권리의 법적 확립에 대한 반감이다.

30. 그런 접근방식의 결과는 엄청나다. 첫째, 보편적인 적용을 성취하려는 열망보단 선별성을 위한 복잡한 시스템이 우세할 것이다. 둘째, 보호의 수준이 극히 낮은 수준에 머물 것이다. 셋째, 사회안전망은 일반적으로 법으로 보호되지 않으며 따라서 극빈자들은 변덕스런 정책 경향에 아주 취약할 것이다. 넷째, 인권의 차원은 사실상 사라진다. 사회적 보호는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성과 생산성을 이유로 옹호되는 자선 사업에 머물 것이다. 따라서 역량강화의 차원은 사라지고 권리에 기반한 접근틀의 나머지도 마찬가지다. 결국, 시간이 가면,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은 점차 주변화되고 그것의 힘은 파괴될 것이다. …

사회적 보호와 인권의 연결 보장

34. 국제인권법의 어느 것도 “사회적 보호에 대한 권리” 그 자체를 언급하고 있지 않기에 이것을 기존의 인권으로 간주할지 아니면 새로운 권리로 간주할지의 문제가 생긴다. … 국제사회의 기준이 된 접근은 “사회적 보호는 다수의 국제법에 담긴 인권”이란 정식으로 가장 잘 요약된다. … 사회적 보호에 대한 권리는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와 적절한 생활수준에 대한 권리의 조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두 권리를 하나의 개념으로 묶었다는 것은 중요하다. 두 권리간의 상승효과를 고양하고 공유하는 목표 성취를 위한 조치들의 일괄적인 발전을 쉽게 하기 때문이다.

결론

50.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에 대한 옹호는 과거의 경험에서 배운 교훈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첫째, 현실은 많은 국가들에서 빈곤을 철폐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없다는 것이고, 우선순위에 있어서의 큰 변화가 없으면 상황은 기껏해야 양적으로만 나아질 것이다. 재정적 한계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비극이기는커녕, 극빈의 지속은 다른 목표를 우선시하기로 선택한 핵심 행위자들의 고의적이고 의식적인 결정의 결과이다. 각한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향력이 없고 그들의 경제적 지위는 정치적 소외를 반영한다. …

51. 둘째, 필수불가결한 조치는 사회적 보호에 대한 인권이 있다는 것을 핵심 행위자들이 명백하게 인정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

52. 셋째, 기술적인 해결책들은 얼마나 혁신적이고 통계에 따른 것이든 간에, 그것들이 돕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역량을 진정으로 강화하는 게 아니라면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 빈민에 대해 우리는 너무 자주 정치가들이 하는 말을 듣는다. 게으름, 무능력, 거짓이 됐건 뭐가 됐던 간에, 정치인 등은 대개 빈민을 비난한다. 그런 부당한 선입견은 빈민을 판단하고 어떻게 하면 최소로만 제공할 것인가를 고안하는 기술적 접근을 선호하는 또 다른 정당화의 구실이 된다. 케인스가 상기시키듯이, 결국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극빈상태의 사람들은 훨씬 빨리 죽을 것이고, 장기간의 해결책이란 환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기간의 역량강화와 존중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공통의 인간성, 공유하는 책임, 그리고 인간 존엄성의 중심성을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인권오름 제 415 호 [기사입력] 2014년 11월 13일 17:43: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11 호 [기사입력] 2014년 10월 15일 21:26:22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옛 가요 중에 “알고 싶어요”가 있다. 사랑하는 이가 누굴 생각하고 무슨 꿈을 꾸고 뭘 하는지 “그대 생각 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란 가사였다. ‘평상시에도 그대 생각만으로 저런 애틋한 궁금함이 넘칠 수 있구나!’, 그 간절한 물음표에 가슴이 긁히던 노래였다. 요즘은 가요가 아닌 현실로 “알고 싶어요”를 하염없이 듣는다. ‘그대’가 납득 못할 불의한 일을 당했는데, 그에 대한 충분한 해명도 책임지는 모습도 없는데, 벌어진 일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 하지 말라니 그 애절한 물음표를 놓을 수가 없다. ‘그대’의 가까운 친지는 말할 것도 없고 삶터를 공유하는 전체 구성원은 물음표를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다.

솔직히 다른 말이 별로 필요 없다. 심각한 인권 침해의 피해자가 있을 때, 관련된 사람들이 벌어진 일에 대해 알고 싶은 건 당연하다. 국제인권에서는 그 당연함을 “진실에 대한 권리”로 표현했다. 이 권리에는 “양도불가능한”, “훼손이 불가능한” 권리라는 수식이 붙었다.

< 진실에 대한 권리 연구>, 이 연구 보고서는 유엔인권최고대표가 유엔인권위원회(현 유엔인권이사회) 결의안에 따라 작성한 것이다. 전문가 토론을 거치고 여러 정부, 관련 국제기구, 민간단체의 견해를 종합했다. 이 보고서의 정의에 따르면, ‘진실에 대한 권리’는 피해자를 낳은 특정 사건에 관한 정보를 구할 권리를 포괄한다. 벌어진 사건, 인권 침해가 발생한 구체적 상황, 누가 그 사건에 참여했는지에 대한 완전한 진실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진실에 대한 권리의 뿌리는 국제인도주의법이다. 교전 중인 적대 관계에서도 지켜야할 원칙이 있기에 분쟁 시에 적용되는 게 국제인도주의법이라면 평시에 적용되는 게 국제인권법이다. 비사법적 처형, 강제 실종 등 인도주의법에 대한 위반과 인권에 대한 극악한 침해와 관련해서 발동되는 것이 진실에 대한 권리이다. 아무리 적대 관계에서 벌어진 일이라 해도 피해자의 운명에 대해 가족은 알 권리가 있다고 했다.

무력분쟁 상황에서도 ‘진실에 대해 알 권리’가 있다는데, 하물며 평시에 전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일에 대해서, 법의 지배를 내건 민주사회의 정부가 진상규명을 할 수 없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진실에 대한 권리는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해 당연하고 효과적인 조사를 수행할 국가의 의무와 짝을 이룬다. 진실 규명 없이 효과적인 구제를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수행할 수는 없다.

인권 침해는 그 당연한 의무에 대한 부정으로 악화된다. ‘인권 침해’라 하지 않고 ‘어쩔 수 없는 일’, ‘불가피한 일’로 치부되는 한, ‘알려고 들면 다쳐’라는 위협과 협박이 지배적인 한, 정치에 대한 신뢰나 같이 살아갈 사회에 대한 믿음이 자랄 수 없다. 그런 신뢰와 믿음이 없는 사회에서는 각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보이지 않는 비상구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다.

진실을 구하는 건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전체 사회를 위해서도 중요하다고 국제사회는 지적한다. 진실 규명은 ‘불처벌’(impunity)을 끝내기 위해 밟아야 할 필수 단계이다. ‘불처벌’이란 법률상 또는 사실상, 인권 침해 가해자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 불가능한 것을 말한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진실에 대한 권리가 국가 기구의 작동에 대한 신뢰를 강화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주목했다. 또한 피해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알 수 없게 하는 것은 회복을 방해하는 “침묵의 장벽과 비밀의 망토”라고 비판했다. 이 장벽을 부수고 망토를 벗기지 않고서야 신뢰의 정치공동체란 걸 어떻게 꿈꿀 수 있는지 정말 알고 싶다.

알고 싶어서 분노한 사람들의 줄이 길다. 숱한 이들이 염려하듯 세월호 참사는 벌어졌고 또 벌어질 참사의 이름 중 하나이다. 세월호의 질문에 대한 무시는 다른 문제들에 대한 질문도 허용치 않는다. 형제복지원 등 과거에 저질러진 인권 침해의 피해자들, 하루아침에 터전을 잃은 해고노동자들, 삶의 터전에 송전탑이나 군사기지가 덜컥 내리꽂힌 주민들, 일터에서 허구한 날 목숨을 잃는 산재 피해자들, 성폭력에 내몰린 아동과 여성들, 군대에 가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청년들, 공권력 감시와 사찰의 피해자들……. “진실은 인간 존엄성에 근본적인 것”이라는 보고서의 문구처럼, 이들이 외치는 ‘알고 싶어요’는 피해자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의 출발점이다. 또 다른 피해자의 발생을 막는 방패요, 전체 사회의 미래를 좌우할 나침반이 ‘알고 싶어요’에 담겨 있다.

진실에 대한 권리 연구(유엔인권최고대표실, E/CN.4/2006/91, 2006)

1. 이 연구는 유엔인권위원회 결의안 2005/66에 따른 것으로, 유엔인권최고대표실은 진실에 대한 권리에 대한 연구를 요청받았다. 여기에는 국제법에 따른 이 권리의 기초, 범위, 내용에 대한 정보와 효과적 이행을 위한 최상의 실천과 권고들이 포함된다. 특히 이를 위해 채택될 수 있는 법적, 행정적, 기타의 조치들이 포함된다. 이 보고서는 여러 국가, 관련 정부 간 조직과 민간단체의 견해를 고려한 것이다.

4. ‘불처벌 방지 행동을 통한 인권의 보호와 증진 원칙(E/CN.4/2005/102/Add.1)’의 2항은 “모든 사람은 극악한 범죄의 자행에 관하여, 과거의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 양도 불가능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한다. 또한 이 원칙 4항에서는 “법적 절차가 무엇이건 간에, 침해가 발생한 상황에 대한 진실에 대해, 죽음이나 실종의 경우 피해자의 운명에 대해, 피해자와 그 가족은 시효에 제약을 받지 않는 알 권리를 갖는다.”고 밝히고 있다.

5. 진실에 대한 권리의 개념은 인권 침해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빚진 것으로 최근 수 십 년간 중요성이 커져왔다. 역사적으로, 이 개념은 국제인도주의법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특히 무력분쟁의 양 당사자들의 실종자를 찾을 의무와 더불어 친지들의 운명에 대해 가족의 알 권리와 관련된 것이다.

9. 보다 최근에는, 진실에 대한 권리가 여러 국제조약과 정부 간 메커니즘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불처벌에 맞선 싸움, 국내 난민이 친지의 운명에 대해 알 권리,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한 구제와 배상의 맥락 속에서 진실에 대한 권리가 인용돼왔다.

10. 진실에 대한 권리를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다른 국제조약들은 조사의 결과에 접근할 관련자의 권리와 신속하고 효과적인 사법적 구제를 보장할 권리로 이 문제를 암묵적으로 다루고 있다.

11. 인종차별철폐대회 같은 정부 간 회의들은 역사의 사실과 진실에 대해 가르쳐야 할 중요성을 확언하는 선언들을 내놓았다. 그 목적은 과거의 비극에 대한 포괄적이고 객관적인 인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15. 다양한 메커니즘들은 수임사항, 절차, 구성과 목적 등에서 크게 다르지만 대부분 사건을 조사하고 원인을 분석하려 한다. 그 목적은 신뢰할만한 역사적 기록을 만듦으로써 그런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이다. 어떤 장치는 피해자와 가해자와 광의의 사회가 침해에 대해 공적으로 토론하는 카타르시스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고, 흔히 화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하며, 때론 정의의 조치를 성취하는 것이다.

25. 진실에 대한 권리는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해 효과적인 조사를 수행할 국가의 의무, 그리고 효과적인 사법적 구제에 대한 권리와 연관돼 제기됐다.

27. 진실에 대한 권리는 또한 가족에 대한 보호(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 23조), 국적‧이름‧가족관계 등을 포함하여 정체성을 보존할 아동의 권리(아동권리협약 제8조 등)와 관련해 제기됐다.

28. 유럽인권재판소는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실종된 사람”의 “소재와 운명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 효과적인 조사를 국가가 수행하지 않는 것은 생명권 보호에 대한 국가의 절차적 의무의 지속적 침해를 구성한다고 결정했다. … ‘아프리카 인간과 인민의 권리 위원회’는 진실에 대한 권리가 효과적인 구제에 대한 권리의 기본구성요소를 형성한다고 했다.

35. 국제인권법은 진실에 대한 권리를 피해자와 그 친지 또는 그들의 대리인에게 부여하고 있다.

36. “피해자”의 개념은 집단적인 차원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실에 대한 권리는 개인의 권리와 집단적 권리 둘 다로 이해할 수 있다. ‘심각한 인권 침해의 피해자를 위한 구제와 배상의 권리에 관한 기본원칙과 가이드라인’은 “사실 확인 그리고 완전하고 공적인 진실의 공개”가 배상의 내용 중 하나라고 분명히 말한다. 또 “모든 사람은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아야 할 양도불가능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한다. 진실을 알 사회의 권리를 여러 인권 기구가 인정해왔다. 가령 미주인권재판소는 “전체로서의 사회는 침해와 관련해 벌어진 모든 것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고 했다.

38. 역사적으로, 진실에 대한 권리는 처음에는 실종과 연관됐고 그 내용은 실종자의 운명과 행방에 대한 아는 걸 강조했다. 하지만 진실을 알 권리에 관한 국제법은 심각한 인권 침해의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것으로 전개됐다. 진실에 대한 권리의 범위는 다른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됐다. 요약하면 다음 사항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 획득할 권리이다.
- 사람의 희생을 초래한 원인, 국제인권법과 인도주의법에 대한 심각한 침해와 관련된 원인과 조건, 조사의 진전과 결과, 국제법상 범죄와 심각한 인권 침해를 자행한 환경과 원인, 침해가 벌어진 환경, 죽음 또는 실종 또는 강제 실종의 경우에 피해자의 운명과 행방, 가해자의 정체

43. 진실에 대한 권리와 표현의 자유(정보를 구하고 전달할 권리를 포함하는)는 연결돼있다. 정보를 구할 권리는 진실에 대한 권리 실현에 도구적 권리일 수 있지만, 두 권리는 다른 별개의 권리를 구성한다. 정보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국제법 하에서 특정 이유로 제한될 수 있기에, 진실에 대한 권리가 어떤 환경에서 제한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있다.

52. 정보에 대한 접근, 특히 공적 기록보관소에 대한 접근은 진실에 대한 권리의 행사에 아주 중요하다.

55. 심각한 인권 침해와 인도주의법의 심각한 침해와 관련, 진실에 대한 권리는 양도할 수 없는 자동적인 권리로서 여러 국제조약 등에서 인정되고 있다.

56. 진실에 대한 권리는 인권을 보호하고 보장할 국가의 의무와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해 효과적인 조사를 수행하고 효과적인 구제와 배상을 보장해야 할 국가의 의무와 밀접히 연결된다. 또한 진실에 대한 권리는 법의 지배와 민주 사회의 투명성‧책임성‧훌륭한 통치의 원칙과 밀접히 연결된다.

57. 진실에 대한 권리는 여타의 권리들과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가령 효과적인 구제에 대한 권리, 법률과 사법의 보호에 대한 권리,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 효과적인 조사에 대한 권리, 능력 있고 독립적이며 공정한 법원에서 심리될 권리, 배상에 대한 권리, 고문과 학대를 받지 않을 권리, 정보를 추구하고 전달할 권리 등이다. 진실은 인간의 내재적 존엄성에 근본적인 것이다.

58. 심각한 인권 침해의 경우에, 피해자와 그 가족들은 진실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진실에 대한 권리에는 또한 사회적인 차원이 있다. 그런 사건이 미래에 재발하지 않도록, 극악한 범죄가 저질러진 상황과 그 이유, 범행에 관한 과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알 권리가 사회에 있다.

59. 진실에 대한 권리는 인권 침해의 이유와 침해가 발생한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을 포함하여 발생한 사건에 대한 완전하고 완벽한 진실, 사건의 구체적 상황, 그리고 누가 사건에 참여했는지를 아는 것을 의미한다.

60. 독립적 권리로서 진실에 대한 권리는 개인의 기본권이므로 제한을 가할 수 없는 것이다. 고문과 학대에 처하지 않을 권리처럼, 양도불가능한 성격과 훼손불가능한 여타 권리들과의 밀접성 때문에, 진실에 대한 권리는 훼손불가능한 권리로 다뤄져야만 한다. 사면 또는 유사한 조치들, 정보를 구할 권리에 대한 제한은 진실에 대한 권리를 제한하고 부정하거나 손상할 목적으로 이용돼서는 결코 안 된다. 진실에 대한 권리는 인권 침해에 대한 불처벌을 근절해야하는 국가의 의무와 밀접히 연관된다.

인권오름 제 411 호 [기사입력] 2014년 10월 15일 21:26:22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07 호 [기사입력] 2014년 09월 18일 21:58: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요즘 사람들의 표정에 꽉 찬 물음이다. 이 질문은 성찰일 수도 있고 초조함과 답답함을 뱉어내는 것일 수도 있다. 새로운 길에 대한 도전이 되는 질문일 수도 있고 ‘길은 없다’는 탄식일 수도 있다. 꽉 막힌 골목으로 내몰려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낯빛들이 초췌해져간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이들은 ‘힘이 없다’는 엄살과 ‘너 때문’이란 회피로만 달아나고, 애써 방향을 잡으려는 이들에겐 무시와 모욕이 일상이다.

이런 때일수록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여러 가능성과 응원을 담은 질문이 있고 빗장을 건 질문이 있다. 후자의 질문은 질문의 형식을 취한 명령문일 때가 많다. 불행히도 한국의 권력층은 후자의 화법만을 구사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사회의 큰 분기점이 있을 때마다 응당 던지는 질문이다. 97년 IMF 구제금융의 폭탄을 맞으면서 87년 민주화의 내용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돈이 최고이고 돈 자랑이 수치가 아니다’란 노골성에 대해, ‘공공성이고 사회적 연대고 필요 없다. 알아서 각자 살아남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교리’에 대해 질문했다. ‘같이 살 수는 없는 것인가?’란 질문은 모욕 받았고 ‘더 많은 돈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고 인권이고 사치’라는 ‘교리’가 강화됐다.

그리고 질문이 봉쇄된 바다 위에서 ‘세월호’가 터졌다. 한국 사회가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사회’로 뭔가 달라져야만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터져 나왔다. 돈에 대한 숭상의 교리가 우리 삶에 추상적인 위기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위기를 언제든지 낳을 수 있다는 걸, 우리 눈으로 실시간 학습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질문 앞에 정치색과 입장을 떠나 모두가 몰두해야 할 책임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질문은 곧 오염됐다.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은 강자에 대한 저항을 무질서 또는 경제의 발목을 잡는 것으로 무시했다. 약자에 대한 폭력과 모욕을 자유나 권리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부추겼다. 심지어 약자의 고통과 존엄성에 대한 침해를 묘사하는 ‘모욕’이란 단어마저 제 것으로 뺏어갔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반세기 전 마틴 루터 킹 목사도 던졌다. 이 질문은 그가 암살당하기 몇 달 전에 ‘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연례총회’에서 한 연설의 제목이기도 하다. 그때 그는 시민권 운동의 2막을 열겠다면서 경제 정의를 위한 빈민의 운동을 기획하고 있었다. 앞서 펼쳤던 시민권 운동보다 빈곤에 대한 공격이 훨씬 어렵다는 걸 그는 예감했다. 앞서의 투쟁은 백인과 흑인이 어느 식당에나 들어가 햄버거를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인종분리를 강제하는 법을 깨뜨렸다. 그런데 흑인에게는 식당에 들어가 햄버거를 사먹을 돈이 없었다. 돈 없는 흑인은 여전히 백인과 나란히 식사할 수 없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가난에 내팽개쳐있는 한 결코 그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고 킹은 선언했다. 이제 시작하려는 투쟁은 경제적 평등을 위한 것이었다. 킹 목사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사람들은 이제 그를 빨갱이라 욕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그것을 빌미로 킹 목사와 동료들을 사찰했고 죽음의 위협이 가해졌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킹은 아랑곳없이 나아갔다. 정부가 가난한 이들을 적대시하며 인색하기 그지없음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주거와 생활임금의 보장, 특히 기본소득의 보장이라 할 것을 ‘경제적 권리장전’의 내용으로 요구했다. 그 구체적인 실천 프로그램들이 담긴 것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란 연설이다. 가령 연설은 ‘빵바구니 운동’을 강조한다. 이 운동의 핵심은 기업이 지역사회에서 벌어들인 돈을 지역사회를 위해 쓰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킹 목사는 “나의 돈을 존중한다면, 나의 인격도 존중해야 한다.”고 했다. 즉 지역사회에 일자리를 창출하지도 하고 지역신문에 광고를 싣지도 않고 흑인금융기관에 자금을 예치하지도 않는 기업에겐 우리도 돈을 쓰지 않겠다는 거였다. 표적이 된 주요 낙농회사들은 지역 상점의 판매대에 자기 상품을 놓지도 않고 사지도 않는 것에 하나 둘씩 굴복했다. 운동의 대표자들과 기업이 마주앉아 계약서를 작성하게 됐다. 기업들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의 저축은행과 대출협회에 돈을 예치하고 흑인신문사에 광고를 게재하게 됐다. 그것은 “채워지지는 않고 끊임없이 고갈되기만 하는 국내에 있는 식민지”를 벗어나 “우리에게서 벌어들인 돈을 우리가 사는 곳에 환원하라”는 당연한 요구였다. 이 요구에 포함된 정책 계획들은 다양했다. 가령 세입자연합을 조직하여 낡은 건물의 재개발을 건설 이익이 아니라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추진하는 것, 세금을 이미 충분히 낸 사람들로서 정부 사업과 정부 관련 계약들을 대기업만이 아니라 소수집단의 작은 사업체들도 따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가 “진보적인 정책을 기획해야 한다.”면서 제시한 것이 기본소득의 보장이었다. “경제적 지위를 개인의 능력과 재능의 척도”로 여기는 것을 비판하면서 “그릇되고 차별적인 시장경제의 운영”을 빈곤의 주범으로 지목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열등하고 무능하다고 낙인찍음으로써,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해고시키는 일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며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개인의 위엄이 번성할 것”이라 주창했다.

그런 구상에 담긴 것은 찔끔 보조금을 늘리고 생색용 개발사업을 유치하자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을 감옥에 안전하게 감금시켜 놓은 채 음식의 질만 조금 높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했다. 킹 목사는 “정당한 자긍심”의 토대 위에서 경제적 권리가 추구돼야 함을 강조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이 “우리의 존엄과 가치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 존엄성의 힘 위에서 “우리를 억압하는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체제에 대해 끝까지 버티고 싸워야 한다.”고 했다.

‘빈민의 운동’은 수도 워싱턴으로의 행진을 계획했다. 정부 수도의 일상 기능을 흔들어 놓는 게 계획이었다. 백악관과 의회가 빈민의 사안을 진지하게 다룰 때까지 그 앞에서 농성하기로 했다. 빈민의 행진에 대한 참여를 촉구하는 것이 킹의 마지막 과업이었다. 워싱턴의 한 성당에서 그의 생애 마지막 연설이 있었다. 그 연설에서 그는 “인종주의, 빈곤, 그리고 전쟁”을 미국 사회의 3대 악이라고 불렀다. “빈곤에는 새로울 것이 전혀 없지만 빈곤을 제거할 기술과 자원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새로운 것”이라 했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에게 그럴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 연설을 한 닷새 후 그는 살해당했다.

하지만 빈민의 행진은 취소되지 않았다. 3천여 명 이상이 전국에서 워싱턴으로 모였다. 흑인만의 운동이 아니라 존엄성의 가치에 동의하는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이 모였다. 농성촌을 짓고 “부활의 도시”라 이름 지었다. 무자비한 비가 내리고 농성촌은 진창이 됐다. 언론과 정부는 그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절망과 혼란의 6주가 지나고 운동은 정리됐다. 빈민의 운동은 1968년 6월 19일 농성촌을 접었다. 누구는 철저한 ‘실패’라 평가했다. 또 누구는 ‘처음으로 다인종이 조직화된 경험을 맛봤다’고 했다. ‘우리들 자신의 해방 운동을 헤쳐 갈 만남을 경험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농성촌은 사라졌어도 참가자들은 영감을 받아 워싱턴을 떠났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에겐 몇 달이건, 몇 주건, 단지 하루건 그건 중요치 않다’고 했다.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렀다. 오늘 읽어 볼 인권문헌, ‘빈민 권리장전’은 2003년에 ‘빈민의 운동’을 재건한 사람들이 작성한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의 한 축은 ‘존엄과 안전 위원회’이다. ‘존엄’과 ‘안전’이 같이 가야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작명이다. ‘존엄 없는 안전’은 많다. 형사법과 공권력의 강화, ‘무전유죄 유전 무죄’의 차별적 사법체계 운영, 부자감세와 경제정책 등이 그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다. 자기 돈 주고 사설경비 쓰고 폐쇄회로에 둘러싸인 특권지대에 사는 것도 물론 안전하다. 가난한 우리에게 안전이란 존엄과 같이 고려돼야 진짜 안전이 된다. 공권력에 대한 시민의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야 안전하고, ‘경제적 권리장전’의 내용을 담은 것이어야 진짜 안전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가난하면, 혹은 가난해지면 당장 맞닥뜨리는 건 사회적 지원이 아니라 경찰이다. 해고되거나 공장이 폐쇄되거나 임대료 상승으로 쫓겨나거나 만성적 고용불안과 생계비 상승에 시달리거나 차별과 성폭력에 노출되거나 가난한 처지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빌미를 제공했고 너의 책임이란’ 힐난을, 항의와 저항에는 ‘손 좀 봐주라’는 공권력의 폭력을 대면해야 한다. 우리의 안전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존엄과 안전 위원회’가 존엄과 안전의 권리선언을 기획한다고 한다. 선언을 만드는 것은 그냥 말을 짓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과 실천을 종합하는 것이다. 킹 목사의 말대로 “신조의 고혈압과 행동의 빈혈”에 걸리지 않도록 우린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게 아무리 오래 걸린다고 해도 말이다.

‘빈민의 운동’의 ‘빈민 권리장전’(The Bill of Rights for the Poor, Poor People's Campaign)

1. 모든 형태의 인간 억압은 제거돼야만 한다. 모든 사람, 특히 빈민에게는 제도적 장벽 없이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빈민이 빈곤을 벗어나려면,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장애인에 대한 차별, 계급주의, 제국주의가 다뤄져야만 하고 제거돼야만 한다.

2. 빈민에게는 비인간적인 상태에 투입되는 공공 정책 의제에 대한 권리가 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역사적으로 방임되고 경제적 분리와 배제가 있어왔던 곳에 ‘기회의 공동체’를 창설할 것을 요구한다. 중앙과 지역의 자원들은 지역사회에서 경제적 기회를 만드는 지역사회 집단들과 시도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가장 없는 지역’에서 기회의 문을 열고 투자를 한 기업과 지역사회 집단 간 협력이 장려되고 보상받아야 한다. 기업의 탐욕스런 이익보다는 궁핍한 사람들의 이익을 우위에 두는 전국적이며 지역적인 차원에서의 포괄적인 경제정책이 필수적이다. 정부는 기업을 규제해야만 하고 일자리의 해외이전을 끝내야 한다. 공공의 의견 청취 없이 공장과 기업 본부를 폐쇄하는 일을 금지하며 일자리 상실로 고통 겪는 사람들에 대한 보상과 재훈련, 대체 직업을 보장하는 법률이 통과돼야만 한다.

3. 미국에서 6명의 아동 중 1명은 빈곤의 피해자이다. 비-백인 아동 3명 중 1명은 가난 속에서 자란다. 모든 아동은 양질의 건강 보호, 교육, 주거에 접근하고 안전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4. 모든 사람은 ‘법 앞에 동등한 보호’를 받아야 하며 빈민은 사법 체계의 부정의로부터 보호받아야만 한다. 빈민은 흔히 이 나라의 감옥 산업 단지 창고에 처박혀진다. 이것은 노예제의 21세기 버전이 됐다. 빈민은 적절한 변호와 평등한 사법을 보장받아야 한다. 빈민은 민사와 형사 법정에서 정의를 보장받아야 한다.

5. 빈민은 경찰 폭력의 형태로 국가가 지원하는 테러리즘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빈민은 학대받고 착취 받는 것과는 반대로 보호받고 대접받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지역에 대한 분명한 민간의 통제, 그리고 경찰의 남용과 비행을 다스릴 힘을 가진 시민의 심사위원회를 요구한다. 빈곤 지역에서 경찰과 지역사회에 근거한 집단들 간에 범죄와 폭력 철폐를 위한 지역사회 협력이 수립돼야 한다.

6. 빈민은 완전 고용, 그리고 빈곤선을 넘어서도록 하는 보장 소득에 대한 권리를 가져야만 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만들어낼 지역사회에 기반한 협동조합의 제휴에 대한 정부 투자를 요구한다. 실업이 집중된 지역이 있는 곳마다 일자리와 기회를 일으키는 집중된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7. 빈민은 기회의 불평등에 희생돼서는 안된다. 여성과 비-백인에게 동등하게 지불하라. 여성은 직장에서의 성적 괴롭힘과 폭력, 또한 가정폭력으로부터 법적으로 보호돼야만 한다.

8. 우리는 전 세계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과 힘을 믿는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주장했듯이 “어느 곳에든 불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 곳의 정의를 위협한다.” 우리는 미국의 외교 정책이 정의와 자유로 규정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신념에 뿌리를 둔 도덕적 권리 장전이다. 이 권리 장전의 이행은 “신 앞에, 모든 사람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가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나라”로 우리를 더 가깝게 데려갈 것이다.

인권오름 제 407 호 [기사입력] 2014년 09월 18일 21:58:44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403 호 [기사입력] 2014년 08월 14일 14:34:4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파블로 카잘스의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듣고 싶다. 음악애호가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문외한이다. 등을 따뜻하게 쓸어주는 손길 같은 그의 연주에서 위로받고 싶기도 하거니와 앉은키가 첼로 크기와 같은 작달막한 그 연주가의 말을 새삼 크게 떠올리고 싶어서이다.

‘첼로의 성자’로 불리는 그는 훌륭한 예술인일 뿐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문제라면 우리 모두의 문제이고, 불의에 저항하는 것은 인류의 양심의 문제”라는 인간애의 소유자였다. 자기 조국에 독재정권이 들어서자 저항의 표시로 10년간이나 연주를 하지 않았다. 또 독재정권을 돕는 어떤 나라에서도 연주하기를 거절했다.
그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거리의 헌책방에서 발견한 후 무대에 올리기까지 12년간을 매일 밤 연습했다고 한다. 그의 연주가 그런 각고의 인내와 노력에서 나왔듯 인간 존엄성에 대한 헌신도 말이 아닌 삶으로 표현됐다. 그래서 인간 존엄성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면 나는 그의 말을 우선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순간마다 우주의 새롭고 진귀한 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이 순간은 전에도 없었고 다시 오지도 않을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나? 2+2는 4이고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라고 가르친다. 우린 언제야 그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가르칠 것인가? 우리는 아이들 한 명 한명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너의 존재가 무엇인 줄 아니? 너의 존재는 놀라운 거야. 너는 유일한 존재야. 수백만 년이 흐르는 동안 너와 똑같은 아이는 없었단다. 그렇다. 너는 경이로움이다. 그러니 네가 자라서 다른 사람, 너처럼 경이로움인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겠니? 너도, 우리 모두도 이 세상이 아이들에게 값진 것이 될 수 있도록 힘써야만 한다.”

요즘 감정을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우울, 슬픔, 분노, 무력감, 공포 등이 범벅이 돼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인지 느낄 수 없는 상태인 것 같다. 거리에서 굶을 뿐 아니라 모욕당하는 사람들, 그 고행에 동행하는 사람들이 눈시울을 자극한다. 그 고행을 모욕하고 해꼬지하려 달겨드는 사람들이 피를 거꾸로 돌게 한다. 군대에서 기업에서 학교에서 국경 너머에서 꼬리를 무는 인권침해의 사건들이 마냥 손을 비비게만 한다. 대통령부터 일선 경찰까지 무시와 통제에는 일사분란한데 거기에는 따져볼만한 목적도 가치도 없다. 그들의 영혼 없는 말과 표정에 지친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괴물’로 지목하고 한껏 비웃기는 쉽다. 하지만 그것으론 헛헛할 뿐이다. 이 비극을 이용해 선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다. 비평가와 선동가엔 물린지 오래고 우리에겐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감정’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상으로 돌아가라’가 가장 무지막지한 선동이 아닌가 싶다. 우린 사람이고 싶다.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 삶의 근본을 확인하고 싶다. 막말과 괴물이 넘치는 혼돈 속에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과연 우리는 인간인가, 인간으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가, 인간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를 말이다.

지금 ‘아무개들’이 우리에게 인간임을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가 나눠야 할 말과 감정을 가르쳐주고 있다. 거리에 나와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고 있다. 말도 듣지 않고 문서도 읽으려 하지 않는 세태 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지키려 하고 있다. ‘존엄성이 아니라 돈을 숭배하련다. 차별하고 싶다. 고문하고 싶다. 배척하고 싶다. 정치가 아니라 폭압을 하고 싶다.’ 이제 숨기지도 않고 대놓고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에 맞서 아무개들이 움직이고 있다. 아무개들 앞에서 누구의 말마따나 “초조해하는 것은 죄”이다.

“(씨랜드 사건)당시 한 신문은 우리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은 대형 참사 가운데 재발가능성이 가장 높은 참사 유형으로 ‘씨랜드 화재’를 꼽은 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그 ‘예언’이 얼마나 과학적이었는가를 참담한 심정으로 보고 있는 셈이다.”
99년 씨랜드 참사 이후에도 비슷한 사건이 이어지고 있을 때 나온 10여 년 전 인권단체의 논평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막내가 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이러한 참사로 가족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안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막내가 되고 싶습니다.”
세월호 유족 대책위 대변인의 말이다. ‘예언’을 바꾸자고 희생자들이 이렇게 절절한 심정으로 호소하고 있는데 이번에도 외면한다면, 예언을 실현하려는 고사 지내기가 될 것이다.

‘국가개조’니 ‘이순신이 되라’는 식의 주문 말고 구체적인 이들의 구체적인 호소에서 방법을 찾아야 한다. 거리에서 아무개들이 외치는 호소가 그 구체적인 내용이라면 원칙의 틀을 보여주는 기준이 있다. 인권에서의 그것은 ‘세계인권선언’이다.

세계인권선언의 역사는 대한민국 건국과 건군의 역사와 같다.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군대가 연륜이 같은 세계인권선언과 발맞춰 가고 있느냐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제정 60주년을 맞은 지난 2008년, 세계의 인권전문가들이 위촉받아 <존엄성 지키기: 인권을 위한 의제>를 만들었다. 의장은 제1대 유엔인권최고대표를 지낸 메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이 맡았다. 이 프로젝트의 책임자들은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이라 알려지게 됐다. 이 존엄성 지키기 의제 만들기는 스위스 정부가 발의하고 노르웨이, 브라질, 카타르 등 여러 나라가 후원했다. 위원단이 만든 ‘인권 지키기 의제’에 기초하여 8개의 핵심 연구 프로젝트가 착수됐고 각 주제마다 두툼한 연구 보고서가 발간됐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인 것은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구였다(이 연구보고서의 내용은 다른 기회에 소개할 계획이다).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이 작성한 보고서는 현 시대 인권 과제에 대한 큰 줄기를 담은 것이다. “무력함, 모욕, 비인간화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의 핵심적 차원”이란 지적에서 한국 사회가 지금 겪는 고통들이 아프게 다가온다. 그에 대해 “약속을 지키려는 정치적 의지의 결여가 핵심문제”라는 진단은 우리가 일찌감치 내린 진단이라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령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깊숙이 자리 잡은 열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발생하건 동료 인간으로부터 발생하건, 폭력의 명백한 원인들이 잘 통제되는 사회에서 살 때에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안전에 대한 우리의 열망을 대신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폭력의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방적으로 맞서는 것”이라며 “조기 행동 전략”을 제안하고 있다.

견실한 진단과 대책이 늘 선동과 모략보다 외면 받는 것이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닐까 싶다. 우리 사회의 ‘인간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은 지금 우리 눈앞에 아무개들로 꾸려져 있다. 공통의 언어와 공통의 감정을 나누는 속에서 우린 공동의 책임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엄성에 관한 위원단의 보고서(Report of the Panel on Human Dignity, 2008)

1. 위기의 인권
우리는 뭐가 인권이며 뭐가 국가의 의무인지를 안다. 우리는 또한 인권이 체계적으로 침해되고 무시되며 이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 인권에 대한 높은 열망과 인권현장의 심각한 현실사이의 격차, 정부의 원대한 수사학과 그 약속을 지키려는 정치적 의지의 결여간의 격차가 핵심 문제이고, 이 격차를 메우는 것이 우리 시대의 도전이다. …

2. 인간 존엄성
… 인간 존엄성의 개념은 인간 존재의 특질로서 보편적인 개념이다. 정말로 존엄성 개념은 문화적 차이를 뛰어넘는 것이며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계인권선언과 더불어 유엔의 핵심 조약과 주요 지역별 인권기구들은 인간 존엄성 개념위에 서있다.
인간 존엄성이 모든 인권에 도덕적‧철학적 정당성을 제공하긴 하지만, 오직 특정한 인권만이 인간존엄성의 개념과 직결된다. 인간존엄성을 위협하는 전형적인 사례는 빈곤과 기아, 제노사이드와 인종청소, 노예제, 인신매매, 고문, 강제 실종, 기타 형태의 자의적 구금, 인종주의와 유사한 형태의 차별, 식민주의와 외국의 점령과 지배이다. 무력함, 모욕, 비인간화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공격의 핵심적 차원이다. 현 인권의제는 인간존엄성과 직결된 인권 문제들을 우선적으로 다룬다.

3. 공유하는 책임: 21세기의 접근
… 국제인권법에 따라 인권을 존중‧이행‧보호할 직접적인 국제적 의무를 갖는 것은 우선적으로 국가이다. … 이런 전통적인 인권법의 접근은 21세기 지구화된 세계에서의 인권에 대한 실제적 위협에 더 이상 부응하지 못한다. 비-국가 행위자들에 의한 인권침해가 늘어나는 많은 이유가 있다. 탈규제와 민영화의 정치가 정부의 힘을 침식하고 필수적인 정부 기능(교육, 건강 서비스, 물 관리, 사회보장, 안전과 치안, 감옥 행정 등)을 사기업에게 넘겨주고 있다.
… 따라서 국제법은 배타적인 국가 책임 모델로부터 공유하는 책임이란 21세기의 접근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공유하는 책임이란 무엇보다도 비-국가 행위자들도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걸 의미한다. 예를 들어, 국제노동기준을 위반한 초국적기업은 직접적으로 책임을 져야만 한다. 또한 기업은 정부가 저지른 인권침해에 공모하지 말아야 한다. 책임에는 점진적 인권 이행을 목적으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이 포함돼야 한다. 지역민이 굶주리고 극빈상태에서 살아가는 지역에서 기업이 사업을 한다면 그런 상황을 다뤄야할 책임이 있다. … 무엇보다도 극빈과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지속적인 침해로 존엄성에 공격을 받는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마찬가지로 국제적 책임을 수립해야 할 때이다.

4.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 빈곤은 단지 운명인 것이 아니다. 빈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뿌리 뽑힐 수 있는 것이다. 빈곤은 지금껏 필수적인 인권에 대한 가장 체계적이고 급격한 침해였다.
… 우리는 빈곤 퇴치의 목적을 단순히 자발적인 발전 목표가 아니라 부국과 빈국, 국제사회의 여타 행위자들 모두의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인권 의무로 바꿔야만 한다. 이런 의무는 헌법적 권리로건 보통 법률로건, 법원과 여타의 국가 기관이 국제기준을 적용하고 준수하도록 국가들의 국내법에도 마찬가지로 포함돼야만 한다.
이런 목적을 성취하는 한가지 방법은 발전과 빈곤 퇴치에 대해 인권에 기반한 접근을 채택하는 것이다.… 그것은 빈곤을 인권의 관점에서 정의하는 것이다. 즉 “적절한 영양을 취할 역량, 건강하게 살 역량, 의사결정과정과 사회적 및 문화적 삶에 참여할 역량 등 기본적 역량에 대한 인간의 권리에 대한 부정”으로서 빈곤을 보는 것이다. … 빈곤 정책 결정의 맥락 속에 권리의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빈민의 역량강화가 발생하는 게 가장 근본적인 방식이다.
… 빈곤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도록 빈민의 역량을 강화하는 또다른 방법은 법의 지배이다. … 법의 지배란 단지 형식적인 합법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 인격의 최고 가치에 대한 인정과 수용에 근거하고 인격의 최대 표현을 위한 구조를 제공하는 제도들로 보장되는 정의를 말한다. … 빈민은 잘 기능하는 사법 시스템에 대한 접근을 부인당하고 있다. 빈민의 재산권은 결여되고, 고용주들은 흔히 공식적인 시스템 바깥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빈민은 불안한 노동조건으로 고통 받는다. 빈민의 재산과 사업은 법적으로 무시되기 때문에 경제적 기회를 부 인당한다. 결과적으로 빈민은 신용, 투자, 지구적 또는 지역 시장에 접근할 수가 없다. … 민주주의 강화는 빈민의 법적 권한 강화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 빈곤의 실제적 상황을 다루기 위한 접근은 사회보장의 안전망을 만들고 예방 가능한 빈곤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방 가능한 빈곤이란 국가가 이미 쓸 수 있는 자원을 사용하여 피할 수 있는 빈곤을 말한다. … 국가는 모든 가용 자원을 사용하여 빈곤을 예방하고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철저히 조사하고 검토해야만 한다.

5. 공포로부터의 자유: 폭력 예방으로 인간 안전 강화하기
아주 어린 시절부터 노령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깊숙이 자리 잡은 열망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연에서 발생하건 동료 인간으로부터 발생하건, 폭력의 명백한 원인들이 잘 통제되는 사회에서 살 때에만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인간의 일부 집단은 타 집단보다 폭력에 훨씬 취약하다. 가령 여성과 아동은 남성보다 가정폭력의 훨씬 흔한 피해자이다. 노인이나 장애인은 폭력 범죄의 더 쉬운 표적이다. 외국인과 정치적‧인종적‧성적 소수자는 다른 시민보다 경찰 폭력에 더 자주 처하게 된다. 빈민과 홈리스는 자연과 환경 재해에 부자보다 더 취약하다.
… 그런 폭력의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방적으로 맞서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을 효과적인 조기 경고 시스템으로 다뤄야 하고 안전‧발전‧인권 의제의 일환으로 이용가능한 모든 범위의 장치들을 이용하는 조기 행동 전략으로 다루는 것이다. …

6. 기후 변화: 21세기 안전, 발전, 인권과 인간 존엄성에 대한 지구적 도전
새로운 천년의 초입에 과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이 인간이 야기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여전히 논쟁 중이었다. 정치인들은 이런 의심을 아무 행동도 안 취하는 구실로 이용했다. 오늘날, 이런 논쟁은 물 건너갔다. 기후변화는 현실이고 인간이 야기한 것이라는데 압도적인 과학적 합의가 있다.
… 인류에 대한 이 중요한 도전은 천천히 인권담론에 들어오고 있다. 기후변화가 인권에 기반한 접근으로 다뤄져야 할 긴급한 필요라는데 몇가지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기후변화는 식량, 물, 주거, 재산, 건강과 생명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여 다양한 인권침해의 원인이 된다. 둘째, 기후변화는 평등과 지구적 사회정의에 관한 주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부유한 산업화 국가들과 그 인민들이 기후변화에 우선적인 책임이 있는 반면에 그 결과로 가장 고통받는 것은 가난한 사회들이다. … 마지막으로 기후변화는 지구적 해결을 요구하는 지구적 문제이다.

7. 실현의 격차 다루기: 지구적 인권 문화를 향해
인권을 존중‧보호‧이행하겠다는 정부들과 국제 사회의 법적‧정치적 약속과 대조적인 현실 상황간의 실현 격차를 마감하는 것, 아니 적어도 상당히 격차를 줄이는 것이 긴급하다. … 우리는 기준 설정과 모니터링으로부터 진짜 실현으로 긴급하게 나아가야만 한다.
… 사법적‧비사법적 인권 이행 기구, 그리고 국가인권기구가 모든 국가에 설립돼야만 한다. 그리고 인권침해를 방지하고 맞서며 국제적 인권의무의 국내적 이행을 위하여 독립적이며 가능한 한 광범위한 수임사항을 가져야만 한다.
… 초국적 기업들은 인권을 존중하고 실현할 목적으로 명확한 표적과 기준점을 가진 행동 계획을 채택해야만 한다.
… 완전히 독립적인 세계인권법원(World Court of Human Rights)이 인권이사회의 관계기관으로서 모든 의무자에 대한 인권의 사법적 보호를 위임받아 창설돼야만 한다. 세계인권법원은 유엔의 보호하에 다자 조약에 의해 상설 법원으로 설립돼야 하며, 국가와 비-국가 행위자가 저지른 인권침해에 대한 제소에 똑같이 최종적인 구속력있는 결정을 내릴 권한을 가지며 인권피해자에게 적절한 배상을 제공해야 한다.

인권오름 제 403 호 [기사입력] 2014년 08월 14일 14:34:4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