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99 호 [기사입력] 2014년 07월 10일 14:41:2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늦게 까지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시계를 안 봐도 몇 시쯤인지를 아는 순간이 있다. 청소차가 골목을 누비며 쓰레기를 싣는 시간이다. 내 동네는 새벽 3시경이다. 새벽 첫 버스를 타본 사람 또는 늘 타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첫 버스는 의외로 만원이다. 승객의 대부분은 묵직한 가방을 메고 어디론가 일하러 가는 사람들이다. 제일 먼저 길을 나서는 그들의 일이 최하위 대우를 받는 노동이란 걸 대개 짐작할 수 있다. 그 다음이 흔히 러시아워라고 불리는 시간대이다. 애써 차려입은 정장이 무색하게 문을 닫으려는 버스에 매달리다시피 한 사람들 천지다. 분주한 낮이 지나고 또 저녁이 온다. 방송에서 말하는 퇴근 시간대라는 것도 현실과는 다르다고 느낄 때가 많다. 밤이 늦을수록 붐빈다. 얼마나 늦게까지 일하는지를 경쟁하는 것 같다. 그렇게 24시간 숨차게 노동이 돌아가고 있다.

그 숨찬 노동이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고 자신과 타인의 삶에 기여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권리에서 아랫목 차지는커녕 윗목으로만 밀려난다. 윗목도 아쉬울 만큼 맨 몸이다시피 방밖으로 내쫓기는 일도 허다하다.

이런 형편에서 ‘인간은 자유다’란 말과 ‘노동’을 연결 짓기는 어렵다. 인간이 자유면 인간이 수행하는 노동도 자유여야 하는데 ‘노동은 자유다’란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렵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내몰린 계약이 내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라 하니 속 터질 일이다. 자유로운 계약으로 받아들인 것이니 무슨 조건이든 받아 삼키라는 환경에서 노동권은 외계인의 소리다. ‘써먹을 수 없는 권리, 실행 불가능한 권리의 선언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원망을 제일 많이 듣는 게 노동과 관련된 권리들이다. 누구는 노동권의 요구에 욕을 해대고 누구는 그 권리들을 공상이라 비웃는다.

참 이상하다. 욕과 비웃음을 먹어야 하는 쪽은 엄연한 권리를 부인하고 조소하는 쪽이지 엄연한 권리를 부르짖고 보장을 요구하는 쪽이 아니다. 오히려 후자를 손가락질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 강자에게 억압받는 것도 억울한데 강자의 논리까지 정당화해주는 것은 할 일이 못된다.

‘노동할 권리’는 세계인권선언 23조를 비롯한 여러 국제인권법과 헌법이 ‘엄연히’ 보장하고 있는 권리다. ‘엄연’하다는 말은 누구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것이라는 의미다. 세계인권선언의 ‘노동권’에는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 공정하고 유리한 조건으로 일할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인간적으로 존엄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는 정당하고 유리한 보수를 받을 권리,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노동권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 휴식과 여가에 대한 권리 등이 속한다. 여기서 무엇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간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는지 나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물론 해가 된다고 여기는 세력들이 있다. 노동권의 요구는 경제를 위기로 몰고 가고 소유와 경쟁에 반대되는 것이고 국가의 개입을 부름으로써 자유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노동권’은 애초에 이런 갈등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사람’의 가면에 은폐됐던 계급의 격차가 맞붙은 대표적 사건이 프랑스의 1848년 혁명이었다. 정치적 질서에서는 주권을 가지는데 경제적 질서에서는 일종의 노예상태로 떨어지는 모순이 맞붙었다. 굶어죽거나 싸우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싸움이 그냥 피억압자나 민중이란 두루뭉술한 이름이 아니라 ‘노동자’란 명백한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모든 시민’이란 말은 노동자가 친 바리케이드와 정부군의 총탄 속에서 부르주아와 노동자로 분리됐고, 그제까지의 민주주의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한 것이 ‘노동권’의 구호였다.

‘노동할 권리’란 용어 자체는 19세기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이 만들어냈다고 한다. 그는 <노동의 조직>이란 글을 진보신문에 연재했는데, 거기서 노동자의 삶이 시장 경쟁체제에 내맡겨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 노동자가 안정된 최소한의 일자리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 그것을 위해 국가의 힘과 노동자의 연합이 조직돼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런 취지를 담아 그가 제안한 것이 ‘사회사업장’의 설치였다. 공상적 사회주의자, ‘순진’하다는 평가를 받은 게 루이 블랑의 입장이었다.

루이 블랑의 활동 배경이 바로 1848 혁명의 프랑스였다. 1789년 프랑스 인권혁명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이란 가치를 내세웠다. 하지만 그 ‘모든 사람’속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철저한 구분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그 드러남이 폭발적으로 터진 것이 1848년이었다. 그해 2월 노동자들의 봉기로 루이 필립의 입헌군주제를 타도하고 공화정을 쟁취했다. 2월 봉기로 생겨난 임시정부의 각료 대다수는 부르주아지의 대표였고 노동자 대표는 단 두 명뿐이었다. 그 중 하나가 루이 블랑이었다. 보통선거권이 확장됐지만 허울뿐이었고 벼랑에 몰린 노동자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사회사업장이 설치됐다. 하지만 그 사회사업장은 루이 블랑의 구상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거리에 설치된 노역장’에 불과하다는 악평을 받았다. 그마저도 6월에 폐쇄가 결정됐다. 사회사업장 폐쇄를 접한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봉기에 나섰고 그 내용은 노동권에 대한 요구였다. 정부군은 총공격을 강행했고 노동자 수천 명이 죽고 만여 명 이상이 재판 없이 유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이 때 노동권을 요구하는 이들을 때려잡는 일에 동의하지 않는 쪽을 지목하려고 ‘빨갱이’란 말이 처음 등장했다고도 한다.

노동권에 대한 요구가 공상이고 순진하다는 비웃음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그러나 1848년 이래로 노동자의 투쟁은 그 ‘순진’한 입장을 ‘진짜’로 요구했다. 노동자의 순진함은 ‘만인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 믿음을 저버린 것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약점인 것을 지적했다. 말뿐이 아니라 진짜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의 실현에는 노동권이 당연히 요구된다는 것을 바리케이드에서 흘린 피로 증명했다. 인권의 대전환은 그런 순진한 믿음과 실천 속에서 이뤄졌다. 계약과 영업의 자유, 소유의 자유에 안주하려던 인권이 오늘날 교육권, 건강권 등 ‘사회권’이란 인권으로 전환한 데에는 앞장선 노동권이 있었다.

‘노동’이란 프랑스어 단어(travail)의 어원은 tripalium으로 징을 박기 위해 짐승을 고정시키는 다리 셋 달린 기구였으며 고문 기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고 한다. 그런 단어였기에 18세기까지 가장 천하다고 간주되는 인간의 활동만을 가리켰다. 물론 오늘날 노동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니다. 각기 다른 입장에서 노동을 찬양하는 한편 노동을 독려하고 이용한다. 하지만 실제 노동에 대한 대접에서는 18세기의 자취를 지워냈다고 말하기 어렵다. 노동자가 길거리 잠을 자며 농성하고 굴뚝에 올라야 하고 급기야 목숨을 끊어도 유명인의 공항패션보다 못한 언론의 대접을 받는다. 노동의 요구가 다급하고 당연한 민주주의의 의제가 되지 못한다. 그냥 시민이 아니라 ‘노동자-시민’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여겨져야 인권은 ‘말 뿐’이라는 굴레를 벗을 수 있다. 노동의 의미를 무엇으로 만들고 노동을 어떻게 대접하느냐가 우리 사회 인간다운 삶의 척도가 아닐 수 없다.

노동의 조직(루이 블랑, 1840)

질문이 제기돼야만 한다. 경쟁이 빈민에게 일을 보장하는 수단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다. 노동자에게 경쟁이란 뭘 의미하는가?
경쟁이란 일을 최고 입찰자에게 주는 것이다. 계약자는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세 명이 지원한다. “보수를 얼마나 받길 원하나요?” “3프랑, 아내와 아이가 있어요.” “2.5프랑이요. 애는 없고 아내만 있어요.” “훨씬 낫군. 아, 그리고 당신은요?” “난 2프랑이면 돼요. 난 독신이에요.” “이 일은 당신 꺼요.” 이로써 문제는 해결됐고 거래는 끝났다. 그럼 이제 나머지 두 명의 프롤레타리아는 어찌 되는가? 그들은 굶주릴 것이다. 그게 바라는 바다. 하지만 그들이 도둑이 된다면? 염려마라. 왜 우리에게 경찰이 있겠는가? 그게 아니라 살인자가 된다면? 흠, 그들에겐 교수대가 마련돼 있다. 운 좋은 이는 세 사람 중 하나 뿐인데, 그의 승리(일자리)도 단지 일시적일 뿐이다. 네 번째 노동자가 나타난다. 이틀에 하루는 굶어도 될 정도의 노동자다. 임금을 줄이려는 욕망은 최대한으로 행사될 것이다. 새로운 부랑자, 아마도 노예 노동의 신입자가 …

자유 경쟁의 지배 밑에서 임금의 지속적인 삭감이 예외 없는 일반법이 돼가는 것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나? … 얼마간의 노동자의 제거로 귀결되는 체계적인 임금 저하는 자유 경쟁의 불가피한 결과이다.

정부는 생산의 최고 감독자로서 간주돼야만 하고 그 의무 때문에 큰 권력을 부여받았다.

정부의 과제는 경쟁과 싸우고 마침내는 경쟁을 극복하는 것이다.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 그것으로 국가 산업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에 사회사업장(social workshops)을 세워야만 한다. …

도덕성을 보장할 수 있는 모든 노동자는 이들 사회사업장에서 일할 것을 요구받는다. … 사회사업장의 모든 구성원은 재량에 따라 자기 노동의 이익을 사용할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머지않아 이런 공동체적 삶의 명확한 경제와 명백한 우수성은 노동자의 필요와 즐거움에 따른 노동자들 간의 자발적인 연합(association)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자본가들도 또한 연합에 들어가고 투자금에서 이자를 받을 수 있다. 이자는 예산으로 보장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자인 한에서만 이윤에 참여할 수 있다.

사회사업장이 이런 원칙에 따라 일단 설립되면, 결과가 어떨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견직이나 면직 산업 같은 모든 대 산업에서, 인쇄기 같은 기계류에서 사회사업장은 사적 기업과 경쟁하게 될 것이다. 싸움이 오래가겠는가? 아니다. 사회사업장은 다른 산업을 능가할 이점이 있다. 더 비용이 안 드는 공동체적 삶의 결과와 모든 노동자가 예외 없이 훌륭하게 빨리 일을 해내는데 관심을 가지는 조직을 통한 이점이다. 싸움이 파괴적이겠는가? 아니다. 정부는 사회사업장의 생산품 가격이 너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언제나 노력할 것이다. 오늘날 아주 부자가 덜 부유한 자와 경쟁을 한다면, 그런 불평등한 싸움의 결과는 재난이 될 것이다. 사적인 사람은 자기 개인의 이익만을 보기 때문이다. …

같은 사업장의 모든 노동자의 공통된 이익으로부터 우리는 같은 산업의 모든 사업장의 공통된 이익을 추론할 수 있다. 시스템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산업의 연대를 수립해야만 한다. 따라서 각 산업이 낳은 이익을 떼어 비축하여 그것으로 국가가 예외적이고 예측 못한 상황으로 고통 받은 모든 사업에 지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가 제시하는 시스템에서는 위기가 드문 것이 될 것이다. 무엇이 위기를 오늘날 그렇게 자주 일으키는가? 실제로 살인적인 이익간의 경쟁, 정복당한 자들을 전장에 내버리지 않고는 어떤 승리자도 빠져나올 수 없는 경쟁이다. 경쟁은 모든 전쟁과 마찬가지로 승자의 전차에 노예들을 매단다. 경쟁을 파괴하는 동시에 우리는 경쟁이 낳은 악을 없앤다. 더 이상의 승리도 더 이상의 패배도 없다. …

우리가 사는 산업 세계에서 모든 과학의 발견은 재난이다. 첫째는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필요로 하는 노동자를 기계가 대체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것들은 그런 권리와 권력을 갖지 못한 모든 이를 향해 기계를 사용할 권리와 능력을 가진 산업에 제공된 살인 무기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기계”라는 게 경쟁 시스템에서 뭘 의미하는가? 독점을 의미한다. 그러나 연합과 연대의 새 시스템 속에서는 발명가에게 어떤 특허도 어떠한 개인적 착취도 없다. 발명가는 국가에게 보상받을 것이고 그의 발견은 모두를 위한 서비스에 배치될 것이다. 오늘날 전멸의 수단인 것이 보편적인 진보의 도구가 될 것이다. 오늘날 노동자를 굶주리게 하고 절망하게 하고 봉기로 몰아가는 것이 노동자의 과제를 더 가볍게 하고 지식과 행복의 삶을 영위할 충분한 여가를 만드는데 복무할 것이다. 한마디로 폭정을 관용했던 것이 우애의 승리를 원조할 것이다. …

인권오름 제 399 호 [기사입력] 2014년 07월 10일 14:41:26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95 호  [기사입력] 2014년 06월 12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문헌읽기] "이곳에 저항할 다른 아무도 없다 할지라도, 나는 저항할 겁니다." - 마더 존스(Mother Jones)의 연설(1912)

류은숙 씀

슬픔 위에 슬픔이 분노 위에 분노가 계속 포개지는 날들이다. 한 겨울 고 최종범의 영정을 들고 삼성본관을 찾았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이번엔 뙤약볕 아래 고 염호석의 영정을 들고 한 달 가까이 노숙을 하고 있다. 노동권도 뺏겼고 그에 항의해 죽어간 동료의 시신마저 도둑질 맞았다.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입막음과 타작이 가해지고 유가족들은 서명지를 들고 거리를 헤맨다. 밀양 할매들은 쇠사슬로 몸을 묶고 알몸이 되면서 질질 끌려 내려와 통곡을 한다. 이게 다 얼마 전에 표 받아간 정치권과 세금 내서 키운 공권력과 모든 곳에 군림하는 ‘초일류기업’이 만든 일들이다.

‘우리는 국민도 시민도 아니냐’는 울부짖음을 내동댕이치며 유유히 폭력을 행사하는 그들 앞에서 인권은 조롱거리다. 그들은 공민권, 정치권, 사회권이란 인권의 표지들을 다 잡아뜯어냈다. 표현의 자유도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도, 정치권력의 행사에 참여할 권리도, 경제적 복지와 안전에 대한 권리도 찢겨져 나뒹군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되돌려줄 건 조롱이 아니라 엄중한 비판이며 저항이라 말하는 할머니가 있다.

처참한 오늘, 우리를 응원해줄 것 같은 그 할머니를 모셔봤다. 1830년에 태어나고 미국에서 활동했던 할머니인데, 나는 오늘 그녀의 얘기를 ‘밀양 할매들이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에게 하는 말’로 바꿔 읽어봤다.

얘기의 주인공은 마더 존스(Mother Jones)다. 본명은 따로 있지만, ‘미국 노동운동의 어머니’란 뜻으로 ‘마더 존스’라 불렸다. 미국 상원에서 그녀를 “모든 선동가들의 할머니”라고 조롱하자 그녀는 언젠가는 “모든 선동가들의 증조할머니”로 불리고 싶다고 받아쳤다 한다. 마더 존스는 쉰이 넘은 나이에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밀양 할매들 말마따나 “내 나이가 어때서, 데모하기 딱 좋은 나인데”이다.

그녀의 젊은 시절은 굶주림과 노동과 질병으로 채워졌다.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으나 대기근으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멤피스에서 교사와 재봉일을 하다 철공 노동자를 만나 결혼해 네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황열병이 도시를 덮쳤고 부자들이 도시를 탈출할 때 가난한 노동자들은 병으로 쓰러져갔다. 그녀 또한 남편과 아이들을 그 병으로 모두 잃었다. 그 후 시카고로 이주한 그녀는 부잣집의 재봉일로 생계를 꾸렸다. 거기선 대화재가 일어났고 그녀는 홈리스가 됐다. 이런 비극들을 겪으며 그녀는 가난한 자에게 전가되는 사회적 위험과 불의를 온 몸으로 느꼈다. 결국 그녀는 노동자야말로 “돈으로 된 문명”을 “미래 세대를 위한 더 고귀한 문명”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창하는 운동가가 됐다.

그녀는 실업자 운동에 결합한 것을 시작으로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부정의를 까발리고 정치권에 일자리 창출을 요구했다. 이 운동은 미국 철도 조합 그리고 광부 조합과 연결됐다. 그녀가 ‘마더 존스’란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잘못 기소돼 교수형에 처하게 된 철도조합의 젊은 활동가 구명을 위한 활동 때문이었다. 온갖 곳을 쫓아다니고 항의한 활동 끝에 결국 그 활동가의 생명을 구했다. 아동노동자들을 조직화하고 당시 처참했던 아동노동의 문제를 공론화한 것도 ‘마더 존스’의 이름을 다진 활동이었다.

노동운동 조직화와 파업으로 점철된 삶에서 그녀는 숱하게 총검의 위협에 맞서고 금지명령을 어기고 구속되고 강제 이송됐다. 그런 일을 하면서 그녀는 노동조합에서 아무런 공적 지위를 갖지 않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노동자의 편에서 싸웠다. 그런 그녀가 주창한 것은 지도자가 아닌 평 조합원들의 운동을 강조한 민주적 노동조합주의였다. 그녀는 그런 노동조합운동의 기초로서 가족과 지역사회 조직화를 내세웠다. 여성들에게 남성으로부터 독립적인 조직화를 권했고 노동조합운동에서 백인지상주의를 비난하며 인종적‧민족적 분열에 다리를 놓았다.

오늘 읽어 볼 인권문헌은 마더 존스가 1912년(그러니까 80세가 넘어서였을 것이다), 웨스트 버지니아의 파업 광부들을 지지하기 위한 집회들에서 한 연설이다.

“이곳에 저항할 다른 아무도 없다 할지라도, 나는 저항할 겁니다.” 이 말은 “밀양 싸움은 끝이 아니다. … 연대의 손길을 놓지 않는 ‘밀양 송전탑 시즌2’를 열어젖힐 것”이라는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대책위의 말로 들린다. ‘침실 담당 노동자가 파업을 하면 우리는 천국에서도 잠자리를 얻지 못할 것’이란 마더 존스의 농담은 삼성노동자들의 노동이 곧 삼성 자본을 만들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 같다. 자기 안에 있는 노동을 보지 못하는 삼성을 향해 “그들은 노예 제도의 지속을 원한다”고 비판한다. “여러분이 내건 기치는 역사입니다”라는 말은 땡볕 또는 폭우 속에서 “독재기업 삼성을 바꾸자! 이 사회를 바꾸자!”는 함성을 멈추지 않는 삼성전자 서비스 노동자들을 향한 응원으로 들린다.

“여러분, 이 싸움은 계속됩니다. … 나는 이 생애를 통해 오직 한 번의 여행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생애를 통해 오직 한 번의 여행을 합니다. 우리 모두 여기 있는 동안 인간애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시다.” 이 말은 밀양 할매들이 삼성 노동자들에게, 또 우리 모두에게 하고픈 말로 들린다. ‘우리 여기 있어요. 우리는 돈이 아니라 인간애를 위해 최선을 다할게요.’로 화답할 때 우리는 틀림없이 자유인일 것이다.

<파업 광부들에게 한 연설, 1912)

여기 오늘밤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이 나라에 쓸어 버려야할 질병이 있다는 신호입니다. 사람들은 이 질병을 참을성 있게 앓아왔습니다. 모욕과 억압과 폭력행위를 견뎌왔습니다. 당국에 호소했고 법원에 호소했고 법무장관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매번 거절당했고 무시 받았습니다. 우리의 소리는 들을 리가 없는 것이고, 기업의 소리는 들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 당신들의 공무원들이 당신들의 지성을 대놓고 모욕하는 걸 봅니까? 그들은 당신들을 노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합니다. … 묻겠습니다. 당신들의 공무원들이 이 나라의 시민들을 위하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할까요? 아니면 자기네 조건을 위하는 걸까요?

… 당신들, 남성과 여성들이 함께 선다면, 질병의 원인을 찾아 뿌리부터 뽑아버린다면, 나는 해낼 수 있다고 봅니다.

의사당을 손에 넣으세요. 그 기반은 당신들 거쟎아요. 당신들이 의사당을 지었어요. 안그래요? 당신들이 공무원에게 월급을 줬어요. 안그래요? 당신들이 그 기반을 위해 돈을 냈어요. 안그래요? 그렇다면, 그건 누구에게 속해야 하는 거죠? 그런데 왜 무장세력들이 당신들을 쫓아내는 겁니까? 여러분은 최면에 걸렸었습니다. 문제가 뭐냐 하면 그들은 노예 제도의 지속을 원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당신들을 들여다보는 안경을 꼈습니다. 그들은 당신들에게 최면을 걸었습니다. 그들은 정치인들이 당신들에게 죽으면 천국에서 침대를 얻을 거란 말을 하길 원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침실 담당 노동자가 파업을 하면 우리는 침대를 얻지 못할 겁니다.

… 12년 전 쯤에 내가 여기 왔을 때 여러분은 11시간 내지 12시간을 일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가 원하는 대로 가격을 매긴 석탄을 여러분에게 부과했습니다. 우리는 싸웠고 석탄 가격을 두 배로 만들었고 시간은 9시간으로 줄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당시에 좋은 조합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들이 도처에서 하는 것처럼 산업 노조 속에서 그걸 했고, 노동자를 위해 일하려는 사람 대신에 영광을 원하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나는 그런 걸 멈추려 합니다. 우리는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를 조직하려 한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단체협약을 위한 대표자 중심의 노동조합이 아니라 기층노동자를 조직화하는 노동운동, 한 기업만이 아니라 지역을, 전 사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취지로 한 말이다.)

… 여러분, 이 싸움은 계속됩니다. … 나는 이 생애를 통해 오직 한 번의 여행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생애를 통해 오직 한 번의 여행을 합니다. 우리 모두 여기 있는 동안 인간애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합시다. … 어느 국회의원이 “마더 존스, 사는 곳이 어디죠?”라 물었을 때, 나는 “미국입니다.”라고 했고, 그는 “미국 어디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노동자들이 강도에 맞서 싸우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사는 곳입니다.”라 했습니다.

… 여러분은 노예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인간 자유의 획기적인 사건으로부터 사건으로 전진, 전진, 전진할 겁니다. 여러분은 새 날의 인간처럼 높아질 것이고 노예제는 치명상을 입고 죽을 겁니다.

<웨스트 버지니아 주 찰스톤 의사당 계단에서의 연설, 1912>

오랜 세월 역사에 남을 그 날입니다. 그 날이 뭐냐고요? 억압받은 사람들이 주인 계급에 맞서 일어난 날을 말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타당한 일은 왜 이 사람들이 장비를 내려놓았는지, 왜 의사당을 찾았는지 그 목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 이 사업의 소유자들은 무장한 경비들을 고용하고 있고, 그들의 무기는 여기 사는 시민들의 삶을 위협하고 겁먹게 하고 위험에 빠뜨릴 목적으로 사용되고 … 그 경비들은 잔인하고 시민들을 향한 그들의 행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들은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부인하고 법 절차 없이 시민들을 때리고 다치게 하고 붙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민들이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논의할 목적으로 평화롭게 집회할 수 있는 걸 부인하고 있습니다. … 그 경비들이 공공 도로와 공공장소를 점하고 있는 것은 국가의 일반복지에 위험합니다. 그런 경비들을 유지하면서 기업들 편에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사회의 최상의 이익을 해치며 웨스트 버지니아주의 명예와 존엄에 반하는 폭거입니다.

… 공공의 안녕과 보편 복지에 관심을 가지며, 법과 질서와 평화가 준수돼야 한다고 믿으며, 형제애의 정신과 정의와 자유가 모든 곳에 존재해야 한다고 여기는 시민으로서 우리는 저런 경비들을 무장해제하고 헌법이 보장한 모든 권리를 시민들에게 회복시키는데 당국이 모든 권한을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 이곳에 저항할 다른 아무도 없다 할지라도, 나는 저항할 겁니다. 이 나라의 여성다움은 사업자들이 고용한 다수의 비열하고 지독한 사냥개들에게 억압받고 때려 맞고 침해돼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사람으로 여긴다면 그런 개들을 기르지 않을 겁니다. … 이제, 애완견을 위한 날은 갔습니다. 아이들을 더 고귀하고 더 좋은 남녀로 기르기 위한 날이 왔습니다. … 여러분이 내건 기치는 역사입니다. 그것은 미래세대로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게로 전해질 것이고, 노예들이 일어섰다고 얘기할 것이고, 아이들은 틀림없이 자유인일 것입니다. …

인권오름 제 395 호  [기사입력] 2014년 06월 12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91 호  [기사입력] 2014년 05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글쓴이 :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사람들이 끙끙 앓고 있다. 안타깝고 무섭고 미안하고 화나서 어쩔 줄 모른다. 그날의 화마를 떠올리며 다시 아픈 사람들, 동료의 부고와 향냄새에 진저리를 치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상처에 세월호 참사를 포개며 아파한다. 짓밟는 데는 그렇게 유능하던 공권력이 구해내고 살리는 데서 보여준 철저한 무능력에 허망해하는 사람들 천지다.

이럴 때 책이 손에 잡힐 리 없고 글씨가 눈에 들어올 리 없다. 그런데 ‘담배’를 ‘과부심심초’라 부르는 할매가 평생 살아온 얘기로 말을 걸어온다. 그 말에서 어릴 적 내가 웅크려 울고 있을 때 말없이 다가와 사탕을 쥐어주던 외할머니 냄새가 난다. 슬픔의 한복판에서 출판된 <밀양을 살다>는 15편의 밀양주민의 구술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선 정말 많은 냄새가 난다. 눈물의 짠 내, 고된 노동의 땀 내‧쉰 내‧쩐 내, 분노와 탈진의 침 냄새, 염치없는 돈벌이와 완장질의 썩은 냄새, 큰 솥에 끓인 국물 냄새, 정갈하게 닦고 또 닦은 살림 냄새,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의 청량한 냄새, …….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이런 냄새들을 맡는 능력, 같이 좋은 냄새를 피우고 만드는 능력이 아닐까?

배운다는 것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못 배운 것을 한으로 여긴다. 하지만 배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중한 화살처럼 질문한다.

이러다보이 내 한이라 카면 글 많이 못 배운 거. 그기 천추의 한이라면 한이지. 와 내가 그때 엄마 졸라서 나도 공부시켜도라고 말을 못했는지 그기 한이라. 이제 와서는 답답한 것도 서러운 것도 짜다리 없는데, 많이 배우지를 못해 놔노니 말로도 안 되고. 글로 이 속내를 모다 써뿔면 얼매나 좋겠노. 말로 다 못한 게, 억울한 게 너무 많지. 글로 써서 청와대 마당에 국회 마당에 던지놓으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아이라도 누구든지 보면 속내가 쪼매 해소 안 되겠나? 그래 대학 나오고, 배우고 이래 댕기는 여자들 보면 그기 참 부러운 기라. 글을 배웠으면 어디든 나서서 내 더하면 더했지. 지금 이런 꼴을 세상에 알렸을 긴데.

내가 부엉이, 부엉이를 좋아하거든. 밤에 요래 눈이 말게가지고, 밤이면 밤마다 얼매나 열심히 공부를 하겠노 싶은 기야. 내는 꼭 부엉이가 공부하는 것 같애요.(희경)

이게 우리나라 교육이 잘못된 기라. 물질만 너무 강조하다보니까 학교 다니는 아들한테도 공부 잘해라, 공부 열심히 해라 ……, 우리 민족은 어디에서 와가지고 어떻게 살다가 우리가 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역사를 통해서 알 수가 있거든요.…… 국가에서 교육을 안 시키는 이유가 뭔고 하면은 국민들이 다 몰라야 무지해야 …… 국가의 권력자들이 국민을 다스리기 편하다, 정치를 펴기 쉽다, 국민들이 전부 무식해야 일하기가 쉽다는 이야기입니다. 국민들이 다 똑똑하면 더 어려운 정책을 펴야 하고 요구사항의 수준도 더욱더 높아질 것이니까 국민들이 모르고 하는 게 더 나은 거지예.(안영수, 천춘정 부부)

평생의 노동으로 일군 삶

징글징글하게 일만 해온 삶이다. 그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고됨에 내 입에서조차 단내가 나는 것 같다. 그걸 하루아침에 무용지물로 만든 것이 송전탑이다. 그런데 이들 보러 ‘지역이기주의’라 한다. 몇 푼 던져주고 그걸 보상이라 한다. 그럼 돈 많이 주면 괜찮은 건가? 누군가의 평생의 삶을 돈 주고 살 수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내가 오만 데 다 댕기며 머리 다 빠져가며 사놓은 거, 저것도 송전탑 땜에 물거품 되다시피 하고, 고게 그리 아깝고. 팔면 돈이나 될 낀데, 아무도 사러도 안 온다.
나무 해다 나르느라 머리 위가 벌겋게 부어가. 내 머리 함 봐봐라. 다 안 빠졌나, 매일 나뭇짐 해다 삯 받아가 살았다.(김말해)

참 내 자신을 참 많이 써먹었다.
이래 살다 죽으면 조상님들한테도 할 말이 있다, 이래 살았는데 인자는 송전탑이 들어와 다 헛게 됐어요. 논도 팔고 싶어도 못 팔지요. 밭도 안 팔리지요. 짐승도 저것 때문에 병들어가지고 안 된다 카고, 사람도 병든다 하지요. 그게 너무 폭 얹혀가지고 내가 이제 헛살았다 싶은 생각이 듭니더.(조계순)

그라고 반듯한 거, 논 900평 있어요, “그거 막내 너희 해라” 주면 풀씬풀씬 좋아할 줄 알았는데 그기이 막 “아이고, 아버지. 송전탑 세우면 여 안 올랍니더”.(눈물) 그 말이 들어보니 망한 거라, 망하 …… (침묵) 이야기 더 못하겠습니다.(이종숙)

너무 부지런히 일하다보니깐 지금은 다 허리도 굽고 무릎이 다 아파, 사는 걸 보면 가슴이 아파요. 그렇게 열심히 산 사람들 인생이 이게 뭡니까. 자식들이 다 커서 객지로 나가고, 이제는 내가 손수 지은 농사를 수확해 자식들과 노나 먹는 즐거움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말입니다.

내 허리가 고장이 나도록 그렇게 이룬 살림살인데, 이게 지금 내 집이고 땅이고 제로 상태잖아요. 농협에서 대출도 안 내주는 제로 상태잖아요. 사실 내가 이 나이에도 그걸 포기를 못하겠는데, 나이 드신 분들, 지금 꼬부랑해가지고 허리도 다리도 못 써가지고 찔찔 밀고 다니는 나이고 걸음도 못 걸으시는 그런 분들이, 과연 그 살림살이, 내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내 땅 한 떼기를 포기할 수 있겠어요?
송전탑 5개가 마을 앞에 세워지는데 어느 자식이 부모가 있다고 여길 올 것이며, 지금처럼 고추농사를 지어서 누굴 먹이겠어요.
어느 집 자식이 그랬대요. 엄마야, 내는 여기 땅에서 난 거 안 갖다 먹겠습니다. 보통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죠. 농사를 지어 내가 다 먹고사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도 누군가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있고, 누군가의 밥상에 내가 농사를 지은 것을 올리는 건데.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뺐는, 짓밟는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요.(김영자)

공권력이란

구술을 한 분 중에는 독립운동가의 후손도 있고 내가 가본 밀양의 움막에는 태극기가 걸려있었다. 왜 그러셨냐 하니 “우리가 국민임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하셨다. 일제시대도 살아봤고 아들을 월남전에 보내고 잠을 이루지 못한 생애도 있었다. 이들에게 인생의 말미에 찾아온 국가란 공권력이란 무엇일까?

6‧25 전쟁 봤지, 오만 전쟁 다 봐도 이렇지는 안 했다. 이건 전쟁이다. 이 전쟁이 제일 큰 전쟁이다. 내가 대가리 털 나고 처음 봤어. 일본시대 양식 없고 여기 와가 다 쪼아가고, 녹으로 다 쪼아가고 옷 없고 빨개벗고 댕기도 해도 이거 카믄, 대동아전쟁 때도 전쟁 나가 행여 포탄 떨어질까 그것만 걱정했지 이러케는 안 이랬다. … 근데 이거는 밤낮도 없고, 시간도 없고, 이건 마 사람을 조지는 거지. 순사들이 지랄병하는 거 보래이. 간이 바짝바짝 마른다. 못 본다 카이, 못 봐.
아이구 씨. 일본시대부터 내 살아생전에 정부가 도와준 거 하나도 없다. 하루라도 내 나라 싶은 날이 없었다.(김말해)

여군이 되고 싶었다. “사람들한테 봉사할 수 있는 직업이잖아예. 마음만 먹으면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는 게 참 좋아예”한다. 그녀에게 공권력이란 국민에게 봉사하는 힘이다.(김영자)

그게 무슨 국책 사업입니까.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짓밟는, 힘 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과의 전쟁 아입니까. 전쟁이라는 말은 제가 만들어낸 말은 아입니더. 여기서 송전탑, 경찰이 와가지고 그래 캅디더. 원래 지금 전쟁 상황입니다 이랬다고예.

송전탑 싸움을 하기 전에는 전혀 몰랐던 긴데, 싸움을 하다보니까 국가가, 한전이, 권력가들이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정의가 아니고 불의를 내세워가지고 하는 거예요. 참 일찍이 몰랐다. 나는 그래도 우리나라가 법치에 의해서 민주적으로 잘 움직이는 줄 알았더만, 이 송전탑을 들여다보고 나서는 불의의 세력들이 엄청 많다는 것을 제가 알았습니다.(안영수, 천춘정 부부)

이웃이 좋아

이분들은 “울력”으로 살았다는 말을 잘한다. 여러 사람의 힘, 이웃의 힘으로 살아왔다는 말이다. 이웃이 좋고 어울리기가 좋단다. 그래서 송전탑으로 인한 제일 큰 고통은 그 이웃 사이를 이간질하고 찢어놓는다는 것이다.

‘한 집이 되어사는’ 이 상태는 다른 어디에서도 누리지 못하는 기쁨이다.(김사례)

사람이 아무리 부자라도예 남의 도움 없이는 못 삽니더. 꼭 돈 가지고 집에만 들어앉아 사나? 그 돈을 활용을 해야 되는데 돈 쓰는 것도 서로 의지를 해가지고 쓰는 것도 있고, 모을 적에도 그 집이 참 그만큼 노력해가지고 그만큼 잘살아야지, 그 마음이 안 큽니꺼?(조계순)

부녀회장을 하면서 봉사활동 가고, 참 즐거웠어요. 그런 거 참 하고 싶었거든요. 지금도 그렇고 예전부터 내한테 돈이 많이 생긴다면은 나보다 못한 옆의 사람을 돌보고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항상 하고 살았는데 내가 가진 것이 없어 그렇게 살진 못했고. 좀 밥 먹을 만할 때는 나이든 사람 밥 한 끼 사드리고 목욕도 가드리고 그래요. 목욕 모시고 가서 때 밀어드리고 하면, 나이든 분들이 참 좋았던가 봐요.
나는 이웃이 최고라예. 내가 교통사고가 났을 때,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예. 동에 다리가 불편한 새댁이 있어가지고 우리가 목욕탕 갈 때 돌아가며 가서 씻겨주고 그랬는데, 내가 교통사고가 나가지고 집에 꼼짝을 못할 때가 있었어요. 집에 있는데 몸성치 않은 그 새택이 다리를 이렇게 절뚝임면서 옆에다가는 음료수를 끼고는 걸어오는 기라예. 내가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어예.
내 이웃이 있어줘서 내는 참 감사한데, 송전탑 싸움하면서 참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이웃과 다퉈야 하는게 너무 힘들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나름대로 충전할 수 있는, 자동 충전이 된다니까요. 내 혼자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외롭겠어요.

내가 내 돈 벌 때 내 혼자 한거 아니다. 이웃이 도와줬기 때문에. 대가를 드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분들 없으면 그 농사를다 지을 수 없었거든예. 내가 다 되갚을 순 없다.(김영자)

마늘 알지요? 지금은 이 쪼그만 동네가 열두 쪼가리야.(이종숙)

사람은 다 똑같아

이분들은 인간 존엄성이니 평등이니 자존감이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말의 의미를 너무 잘 아는 것 같다.

그때 내가 참 잘못 살았습니다. 내가 왜 청와대에 들락거리는 사람들만이 신사라고 했을까? 그게 아니었네. 그 사람들하고 이 사람들(농부들)하고 바뀌어야 하네, 농촌 사람들이 청와대 들락거리는 사람들이었네. 와, 이 사람들이 진짜 신사였네. 내가 왜 이렇게 철이 없고 어리석었어. 내가 와 그렇게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이사라)

국무총리 빨가벗겨놓으면 여느 남자고, 오륙십 킬로 나가는 그거뿐입니다. 사람은 다 똑같아요. 그 옷을 입히고 인정하고 훈장 붙이고 보호해줘야 사람이지, 똥 덩어리 취급하면 아무것도 아입니다, 그지예?(이종숙)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양심껏 살아야 그기 사람 가치가 있지. 돈이 지금 인자 내 벌어놓은 것만 해도 다 못 쓸건데, 절대 돈 거는 추접은 돈이고 필요 없는 돈입니다. 돈 모할낀데? 사람이 살아가는 데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권영길)

나는 평생 자존심만은 지키면서 살았으면 좋겠거든요. 이게 무너지면 살면서도 나는 죽은 거 같거든요. 끝까지 하자. 끝까지 해서 조그만 희망이라도 있으면 그 틈을 비집고 가서 어떻게 해서든 안 세우게 해보자.(성은희)

죄다 우리 일 같아

이들이 송전탑 싸움 속에서 얻은 게 있다면 ‘관계’이다. “이 관계는 아마 평생 이어질 거 같애요. 굉장히 아픔 속에서 생겨지는 관계니까요.”라고 말하는 그 관계는 밀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송전탑 문제가 어디 이 전기 한 가지 문제입니까. 모든 사회문제가 완전히 종합돼서 나타내지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 또 분개하기 시작하는 거죠. 그전에는 내 주변만, 내 주변의 어떤 문제, 그냥 신문을 통한 문제 그렇게 봐오다가 현장을 직접 다니고 철탑 우에 올라앉으신 분을 보게 되고, 또 실지로 쌍용 같은 경우는 많은 분들이 돌아가신 이야기를 듣게 되고, 또 용산참사 문제도 있잖아요.

사실 그때도 그 사건을 알았지만 깊이 생각하기가 싫었어요. …… 그게 피한다고 편해진 게 아니더라고요. 그거에 대한 관심이 내 안에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었고, 이제는 내 안 속으로 들어오게 된 거죠. 그래서 실지로 그런 참사가 밀양에서도 벌어지게 됐고, 내 자신도 공권력에 어느 날 끌려나오는 그런 사람이 된 거죠.

전국 갈등 현장에 가서 우리 다 힘내자고. 한진중공업을 시작으로 해가지고 서울에 평택, 유성기업도 갔고 용산참사 추모 행사를 하는 대한문 앞에도 갔던 것 같고 곳곳을 다녔어요. 용기가 생기더라고예. 서로서로 손잡고 하면 되겠다. 너무나 많은 곳에서 힘든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우리 다 손잡고 서로 기운내고 그렇게 다시 일어서자.(구미현)

이건 우리만의 싸움이 아니잖아요. 그 사람들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고, 탈핵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 되지 않을까. 내 지역의 미래를 보면 우리 지역에 송전탑이 안 들어서는 게 맞죠. 우리나라의 미래를 보면 탈핵이 되는 게 맞는 거 같아요. 이 싸움이 끝이 나도 ‘나는 함께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이어요.
우리 아들이 ‘이 싸움이 끝이 나도 엄마는 끝이 안 날 거 같습니다’ 해요. 나는 못 잊을 거 같아요. 우리 사회에 아파하는 곳이 많다는 걸. 이 순간들이 영원히 기억에 남을 거 같아요. 우리 싸움이 끝나도 그곳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어요, 작지만. 우리도 이렇게 많은 분들 도움을 받으며 싸우고 있잖아요.(김영자)

우선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이계삼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 사무국장은 책 뒤에 붙인 글에서 왜 우리가 지금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를 한마디로 이렇게 얘기한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업이란, 이 싸움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것은 어르신들의 생애와 이 싸움의 소회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법과 제도의 모순을 폭로하고, 저들에 의해 저질러진 무간지옥의 폭력을 증언하는 과업일 것이다.

주민들의 절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배워야 한다. 아픈 이야기 속에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너무 많다. 그 절절한 이야기들에 우리는 귀를 활짝 열어 듣고 코도 활짝 열어 냄새 맡으려 해야 한다. 그것이 이후 우리가 만들 가능성 있는 모든 사건의 시작일 것이다.

인권오름 제 391 호  [기사입력] 2014년 05월 0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87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박경석 교장 선생님이 감옥에 있다. 그는 무슨 무슨 위원장 등 직함이 많은 사람이다. 하지만 20여 년 전 노들 장애인 야학을 열어 지금껏 책임져왔기에 ‘교장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노들’에서 그는 학령기에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장애인들과 더불어 배우고 장애차별과 맞서 싸워왔다. 그가 나에게 ‘교장 선생님’인 것은 또 다른 의미다. 집회나 행사에서 얼굴을 볼라치면 그는 늘 무섭게 따져 물었다. “인권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인권 갖고 이것 좀 어떻게 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인권 갖고 우릴 좀 어떻게 해봐요.”로 이어지는 그의 고함은 학창시절 교장 선생님의 훈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노역 투쟁’이란 이름으로 감옥에 있다. 척수장애를 갖고 있는 중증 장애인인 그가 감옥에 스스로 들어 간 것은 쌓이고 쌓인 벌금 때문이다. 왜 벌금을 때려 맞았냐 하면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24시간 보장과 장애등급제 폐지를 요구한 활동 때문이다. 그 죄목 중 하나에는 동료 활동가의 장례식도 포함되어 있다.

2012년 10월 26일 새벽, 서울의 어느 집에서 작은 불이 났다. 단 10분 만에 진압될 작은 불이었지만 사람이 죽었다. 현관까지 단 다섯 걸음밖에 되지 않았지만, 활동보조인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이 거기 있었다.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12시간만 제공됐기 때문에 홀로 있던 고 김주영 씨는 입으로 펜을 물어 전화기를 눌러 소방차를 불렀다. 하지만, 소방차가 도착하는 그 몇 분 간 홀로 숨이 막혀 죽었다.

장례식이 열린 광화문 광장은 화창했지만 바람이 쌀쌀했다. 추모글을 써온 동료들은 울먹거림으로 계속 멈춰야 했다. 동료를 잃은 슬픔과 비슷한 일이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공포가 뒤범벅된 장례식은 처연했다. 단상위의 영정을 보는 것도 그 옆의 장애활동가들을 보는 것도 괴로운 날이었다. 우린 차가운 바닥에 앉아 슬픔을 나누고 있는데, 유족을 위해 마련했다는 몇 안 되는 의자에는 국회의원들이 떡하니 앉아 있었다. 장애인은 죽어서야 정치인의 관심사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복잡하고 심난한 맘으로 헌화를 한 후 나는 광장을 떠났다. 얼마 후 들려온 소식은 기가 찼다. 그 장례식과 보건복지부까지 벌인 추모와 항의 행진이 불법이라며 벌금 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돈으로 가치를 매길 수 없고, 돈으로 사고 팔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경고하고 지키는 것이 인권이다. 인간의 존엄성과 그에 대한 존중의 요구에 돈의 폭력으로 응대하겠다는 사회나 정치는 어디 내다 팔래야 사려고 나서는 데가 없을 것이다. 노동, 평화, 생태, 차별철폐 등 우리 삶에서 지켜야 할 가치를 놓고 벌이는 활동들이 ‘돈 없으면 인간존엄성을 포기하라’는 노골적이고 천박한 협박을 받은 지 오래다. 그런 윽박질에 시달리면서 사람들은 계속 싸우고, 벌금은 쌓이고, 벌금 마련 후원주점에서 가난한 주머니를 털고, 또 싸우기를 계속해왔다. 그런 끝에 우리의 교장 선생님은 자기 몸을 털기로 결심했다. 순순히 벌금 납부의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따위 윽박질에 포기할 나의 존엄성이 아니고, 협박에 멈출 나의 인권 투쟁이 아니란 걸 온 몸으로 가르쳐주겠단다. 손해배상 청구, 벌금 탄압,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온 몸으로 종을 치겠단다. 이제 그 종소리를 들을 때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 문헌은 마사 너스봄의 “핵심적 인간 역량”이다. 너스봄은 삶의 질을 측정하는 기초이자 정치적 계획의 목표로서 ‘역량’(capabilities)을 인권에 도입한 학자이다. 그녀의 목록을 통해 교장 선생님의 종소리를 번역해보려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백번 맞는 말이지만,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흔히 추상적이란 비판을 받는다. 그럼 어떻게 인간다운 삶의 질이란 걸 잴 수 있을까? 너스봄은 기존의 척도들을 비판하면서 ‘역량’을 새로운 척도로 내놓았다.

‘총량이 얼마나 늘었는가?’, ‘평균이 얼마나 높아졌는가?’, ‘투입한 자원이 A라는 사람을 얼마나 만족시켰나?’가 기존의 척도들이 던지는 질문이다. 반면 너스봄이 던지는 질문은 ‘A가 실제로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너스봄의 문제제기는 이런 것이다. GNP의 증가는 실제 그 돈을 누가 가졌는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평균은 개개인의 단독성과 고유성을 무시한다. ‘만족’이란 왜곡될 수 있다. 불평등한 가치를 내면화한 사람들은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며 자신의 선호를 낮추거나 감춘다. 또 얼마나 많은 자원이 투입됐느냐가 실제로 충분히 인간다운 삶이 작동하는지를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에 너스봄은 양으로 따질 수 없는 삶의 질, 한 사람 한 사람의 고유한 삶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본다.

‘역량’이란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사람에게는 소중히 여기는 어떤 것 또는 어떤 목표가 있다. 그걸 역량이론에서는 ‘기능’이라 부른다. 가령 잘 먹고 쉬는 것에서부터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자존감을 가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 목표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고 해서 그런 기능들이 실행 가능한 것은 아니다. ‘쉼’이란 기능은 야근과 야간 노동을 당연시하고 강요하는 데서는 실행이 어렵다. 단순히 ‘쉬고 싶다’가 아니라 실제로 야근과 야간 노동을 거부할 수 있는 조건(역량) 속에서야 ‘쉼’을 택할 수 있다. 그런 역량을 보장하는 사회 속에서야 각 사람은 쉬는 것과 일중독 중 어느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할 수만 있다면 원했을 소중한 기능을 사람들은 포기하거나 축소하거나 왜곡하게 된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신체적 등 여러 제한 요소로 인한 역량의 박탈 때문이다.

박경석 교장이 이동권 투쟁에서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다. “장애인도 이동할 수 있어야 사람도 만나고, 장애인도 이동할 수 있어야 학교에도 가고 연애도 하고 직장도 가질 것 아닙니까?” “장애인도 이동할 수 있어야”를 무한대로 붙일 수 있는 질문이었다. ‘사람과의 만남, 친밀감, 관계 맺기’란 기능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은 장애인 개개인의 신체적 제한 요소뿐만 아니라 이동권에 대한 사회적 제약과 방치, 장애인의 표현에 대한 무시, 정치적 억압 등의 역량 박탈로 인한 것이다. 대중교통에 투입된 자원의 총량이나 평균이 아니라 ‘장애인이 실제로 이동할 수 있고 이동을 통해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장애인이 충분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를 묻자는 것이 역량 접근이다.

너스봄은 인간다운 삶에 필수적이고 공공정책의 계획과 선택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역량의 목록을 만들었다. ‘권리’가 이미 있는데 굳이 ‘역량’이란 것이 필요하냐는 질문이 있을 것이다. 너스봄은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 권리를 종이에 써두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답한다. 가령 한국의 헌법은 기본권 보장으로 차 있다. 하지만 효과적인 국가 행위로 뒷받침되지 않기에 장애인의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는 종이 위의 권리로 여겨진다. 그렇다고 해서 장애인이 평등한 권리를 갖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장애인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역량을 뒷받침 받지 못한 것이지, 장애인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주변 세상이 뭘 했든 안했든 간에, 장애인은 인간으로서 가져야만 하는 정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이 인권의 힘이다. 반면 역량의 용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구체적인 척도를 주고자 함이다. 특히 경제적 및 물질적 권리 분석에 역량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불평등한 양의 자원을 썼다는 근거, 또 사회경제적 약자를 완전한 역량으로 이전하기 위해 특별한 프로그램을 만들 근거를 삼기 위함이다. 왜 12시간이 아니라 24시간 활동지원이 필요한지, 장애인이 할 수 있고 되어야만 하는 기능과 역량을 보장하기 위해 왜 그것이 필수적인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너스봄은 초문화적인 연구들의 인간 공통의 경험에 대한 발견을 요약해서 이 목록을 추렸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기쁨과 고통을 겪고, 다른 사람들과 잘 관계하고 싶고, 의존과 돌봄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인간의 구체적 경험들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근원적 필요를 찾았다. 인간 삶과 사회의 무한한 다양성 속에서도 좋은 삶을 추구하는데 필수적인 기초에 대해선 정치적으로 합의할 수 있다고 봤다. 사람마다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 구체화의 자리를 마련해둬야 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느슨하고 모호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언제든지 논쟁될 수 있고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열려 있는 목록이다.

너스봄은 어떤 역량 이하로는 인간이 진정으로 기능할 수 없는 역량의 하한선을 설정할 수 있다고 봤기에 이런 목록을 만들었다. 그런 역량의 하한선 이상을 시민들이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의 목표가 돼야 하고 국가는 그것을 보장할 적극적 의무가 있다는 것, 그리고 시민에게는 자기 정부에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그녀 주장의 핵심이다.

역량의 하한선을 낮출 대로 낮추고 쥐어짜자는 것이 목표가 되고, 국가는 그것을 방관하거나 적극적으로 돕고, 역량의 보장을 요구하는 시민의 권리행사에 벌금을 때린다. 여기서 교장 선생님이 온 몸으로 울리는 종소리는 “자기 존중과 모욕하지 않는 사회적 토대”를 같이 갖자는 외침이 아닐 수 없다.

마사 너스봄(Martha Nussbaum)의 “핵심적 인간 역량”(The Central Human Capabilities)

1. 생명: 조기 사망 또는 소진되기 전에 죽지 않고 인간의 평균 수명까지 살 수 있을 것
2. 신체적 건강: 출산관련 건강상태를 포함하여 좋은 건강을 가질 수 있을 것, 충분한 영양 취하기, 적절한 거처 가지기
3. 신체적 통합(Bodily Integrity): 자유롭게 장소 이동할 수 있기, 성폭력과 가정폭력을 포함하여 폭력적인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기, 성적 만족의 기회를 갖고 출산 문제에서 선택권 가지기
4. 감각, 상상력, 사상: 감각을 사용하고, 상상하고 생각하고 추론할 수 있기. “진정으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이런 것들을 할 수 있기. 인간적인 방식이란 적절한 교육으로 길러지는 것이고 읽고 쓰는 능력이나 기본적인 수학적‧과학적 훈련을 포함하지만 단지 그것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스스로 선택한, 종교적‧문학적‧음악적 및 기타의 것을 경험하고 생산하는 일과 사건과의 연결 속에서 상상과 사유할 수 있기. 정치적‧예술적인 표현 둘 다의 자유와 종교적 행사의 자유의 보장으로 보호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신을 사용할 수 있기. 즐거운 경험을 가질 수 있고 불필요한 고통을 피할 수 있기.
5. 감정: 우리들 외부의 사물과 사람들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기.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부재에 슬퍼하기, 일반적으로 사랑하고 슬퍼하고 그리움‧고마움‧정당한 분노를 경험하기, 공포와 분노에 의해 자신의 감정 발전을 망치지 않기. (이러한 역량을 지지한다는 것은 감정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이는 인간적 결합의 형태를 지지한다는 걸 의미한다.)
6. 실천 이성: 선의 개념을 형성하고 자기 삶의 계획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기.(여기에는 양심과 종교의 자유에 대한 보호가 포함된다.)
7. 관계:
A. 타인과 더불어 타인을 향해서 살 수 있기, 타인을 인정하고 관심을 보이기,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하기, 타인의 처지를 상상할 수 있기.(이런 역량을 보호한다는 것은 그런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제도들과 결사의 자유와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보호한다는 의미다.)
B. 자기존중과 모욕하지 않는 사회적 토대 가지기, 다른 사람들과 동등한 가치로 존엄한 존재로 대우받을 수 있기. 여기에는 인종, 성, 성적 지향성, 종족, 신분, 종교, 민족에 근거한 비차별 규정이 포함된다.
8. 인간외의 종: 동물, 식물, 자연세계에 대한 관심과 관계 속에서 살 수 있기.
9. 놀이: 웃고, 놀고,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있기.
10.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
A. 정치적: 자기 삶을 다스리는 정치적 결정들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정치적 참여의 권리와 자유로운 표현과 결사에 대한 보호 누리기.
B. 물질적: 재산을 소유할 수 있기(동산과 부동산), 타인과 동등한 토대위에서 재산권 갖기, 타인과 동등한 토대위에서 고용을 추구할 권리 갖기, 원치 않는 수색과 압수로부터의 자유롭기, 노동에 있어서 인간으로서 일할 수 있고, 실천 이성을 행사하고, 다른 노동자와 상호 인정하는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기.
(출처: Martha Nussbaum, Human Rights and Human Capabilities, Harvard Human Rights Journal Vol.20, 2007)

인권오름 제 387 호  [기사입력] 2014년 04월 0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83 호  [기사입력] 2014년 03월 0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한동안 햇살이 푸근하게 위로해주는가 싶더니 어김없이 꽃샘추위가 왔다. 봄마다 입에 담는 말이지만 ‘꽃샘’이란 말은 참 예쁘고 희망적이다. 길고 음습하게 꽁꽁 얼릴 추위가 아니라 봄꽃을 시샘하는 추위니까 곧 물러갈 거라며 움추린 어깨를 안아주는 것 같다.

그런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겨울 속에서 떠난 이들의 소식이 무겁다. 이름과 장소만 바뀌며 계속 반복되는 사연, ‘생활고 비관 자살’이란 늘 같은 제목을 단 소식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언론의 윗머리에 잠깐 올랐다가 정치권의 소용돌이 소식으로 갈아치워졌다. 좀 더 길게, 좀 더 깊이 애도하고 곱씹었으면 하는 바람과 기대는 허무하게 배신당한다.

어느 깊은 밤이었다. 동생들은 모두 잠들었고 엄마는 맏인 나에게 어렵게 말을 꺼냈다. 엄마가 너무 힘들어서 당분간 ‘어디’에 맡길 테니 동생들 잘 보살피며 기다리면 엄마가 돈 벌어서 데리러 갈 거란 얘기였다.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그 ‘어디’가 고아원이란 걸 어린 나이였지만 알아들었다. 엄마가 결심을 결행할 그날이 오늘일지 내일일지 불안한 나날이 계속됐다. 동생들이 말썽이라도 피울라치면 간이 오그라들었다. 엄마가 속상하면 그날이 더 빨리 올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 일을 결행하지 못했다. 그럴 ‘용기(?)’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용기라고 말할 순 없지만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의 눈치만 살피던 그 불안한 나날들, 너무 속상한 날이면 ‘다같이 죽자’고 울먹이던 밤들이 갔다. 참 길고 추웠다. 지금 이 순간, 그 불안의 나날과 밤이 누구네 머리위에서 펼쳐지고 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하지만 그게 상상이 아니라 나날이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이란 걸 누구나 알고 있다.

이번 세 모녀 자살 사건에 대해 제일 많이 쏟아진 말은 ‘복지 사각지대’란 말인 것 같다.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사각지대’란 ‘관심이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구역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복지의 사각지대란 말은 기존 복지 체계가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인데, 사각지대 운운하기에는 기존의 복지라 할 것 자체가 민망하다. 우산이 너무 작은데 우산 안에 들어오지 않아 비 맞은 것이라고 말하는 꼴이다. 요행히 우산 밑에 피해 있으면, ‘진짜 비오는 것 맞냐’며 의심하고 달려드니, 태풍을 만나지 않은 이상 그냥 비 맞으며 버텨야 하는데도 말이다.

우산을 파라솔로 천막으로 키우는 데는 시민들의 적극성이 필요하다. 소수 열악한 계층의 필요를 최소한으로 챙기는 정도로만 복지를 생각하면 결코 정치의 주 관심사가 될 수 없다. 복지를 그런 수준으로만 대하면 대다수 시민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자기 주머니 단속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러다가 이런 사건이 날 때만 정부를 타박한다고 해서 그게 정치의 할 일이 되지는 못한다. 가짜 수급자 색출, 자기와 가족 책임, 개인적 노력과 의무를 설파하는 주장들에 무심코 끄덕일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 우리 사회 속에서 존엄하다고 이해되는 삶을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는 것을 챙겨서 생각해봐야 한다. 챙기고 곱씹어보지 않으면 우리는 늘 자기 탓을 하거나 운명이라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무력감에서 나아갈 수가 없다.

바람직한 복지는 공익캠페인 광고나 선거 구호 속에 잘 담겨 있는 것 같다. 공익캠페인 광고를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학비, 의료비, 노후, 육아 등을 걱정하는 사람들 맘을 콕 짚어 말해준다. 또 선거 구호는 그게 정치가 할 일이라는 것을 콕 짚어 알고 있는 것 같다. 속임수나 사기로 치면 고단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똑같은 속임수가 반복해서 먹히는 것은 속는 사람의 잘못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 캠페인과 구호를 실상과 대조하고 반박하고 저항하고 요구하는 활동이 절실하다. 그런 활동에 대해 그럴 시간과 자원이 있으면 자선이나 하라고 면박주거나 방해하는 것은 속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 같다.

속고 싶지 않을뿐더러 자선으로 죄책감을 떨치는 길을 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면 우산을 만들어 같이 써야 한다. 우산의 성격과 폭에 따라 복지, 생존권, 사회권이란 말을 가려 쓸 수 있다. 보편복지를 옹호하는 분들에게는 아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복지에 대한 통념은 아주 열악한 계층에 대한 질 낮은 구제를 뜻한다. 생존권 또는 생계권은 ‘최소한의’ 생계를 뜻한다. 최소수준에 맞추니까 누리는 삶이라기보다는 부지‧연명하는 생명의 수준일 수밖에 없다. 반면 사회권은 존엄한 삶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권리이다. 물론 다급하고 먼저 충족시켜야 할 요구가 있다. 가장 힘든 사람들부터 구하는 것도 맞다. 그러나 우선순위를 두는 것과 애초부터 한계를 두는 것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우리가 만들고 키우려는 우산의 폭과 성격은 어떤 이름을 우리가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겉보기에는 똑같은 밥 한 그릇 일지라도 그것을 시혜로서 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로서 존중받는다는 것에 사회권의 의미가 있다. 복지를 국가의 선심성 혜택으로 보는 것과 시민이 응당 받아야 할 권리로 보는 것 사이의 차이이다. 권리란 그 상대방에게 존중의 의무가 발생하는 정당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것을 존엄한 삶에 필요한 목록에 올리느냐이다. 인권으로서의 사회권에 무엇을 어느 수준으로 넣을 것인가는 인권 분야의 오랜 고민이다. 최소기준을 주창하는 의견과 도달 가능한 최상의 수준을 주창하는 의견 사이에 지나친 최소화와 지나친 웅대함에 대한 염려가 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그 혼합이자 중간쯤에 해당하는 견해라 할 수 있다.

밴스 개념은 미국 카터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정치인 사이러스 밴스의 이름을 딴 것으로, 1977년 조지아 대학에서 열린 법의 날 기념식 연설문의 내용에 주목한 것이다. 알다시피 미국은 사회권을 배제하는 자유권 중심 인권관을 피력해온 대표적인 국가이다. 그런데 그 나라의 정치인이 사회권을 인권의 내용에 넣은 발언을 했고, 그것도 최소한의 생계권을 주장하는 견해에 비해 한층 나아갔으니 주목받은 것이다. 기초생계 뿐 아니라 ‘건강보호와 교육’을 포함한 상대적으로 넓은 사회권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사활적 필요의 실현에 대한 권리”라 일컬었다.

사회권을 아예 인권으로 돌아보지 않는 세력도 많지만, 밴스 개념을 소극적이라 보는 견해도 많다. 그 대표적인 견해는 사회권에 대한 역량 이론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만드는 사람, 적극적인 참여자이자 기여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다. 시민인 우리는 정부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고 정부는 그것을 보장해줄 적극적 의무가 있다. 적극적 의무라 해서 단지 국가가 궁핍한 사람을 돕지 않은 의무만 따지는 것이 아니다. 궁핍은 돕지 않아서가 아니라 국가의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활동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가령 부자에게 이로운 세제나 법, 공공서비스의 축소나 민영화 등이 가난한 사람을 더 어렵게 한다. 우리는 국가의 행동을 바꾸고 다른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활동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형식적 권리를 지니는 게 아니라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그런 역량의 발휘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기본적 자원이 필요하고 시민들이 그런 역량의 하한선 이상을 지닐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사회의 목표이자 국가가 보장해야 할 의무이다.

소극적이냐 적극적이냐를 떠나 어쨌건 밴스 개념에서 사용한 “사활적 필요”라는 말이 맘에 맺힌다. 말 그대로 죽고 사는 일에 관계된 필요란 것이다. 그것에 대한 요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춥지만 한겨울은 아니라고, 적어도 봄에 대한 희망을 품은 꽃샘추위니까 같이 견디자는 믿음을 주는 사회가 내가 사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사회권에 관한 밴스 개념(Vance Conception, 1977년 4월 30일, 조지아 대학 ‘법의 날’ 기념식 연설)

… 시민권 운동의 초반 시절에 많은 미국인들은 그 문제를 “남부” 문제로 취급했습니다. 그들은 틀렸습니다. 그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고 지금도 문제입니다. 이제, 하나의 국가로서의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해서는 안됩니다. 인권 보호는 단지 소수의 지역이 아니라 모든 지역들에 해당하는 도전입니다. …

“인권”이 뭘 의미하는지 정의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의 고결성에 대한 정부의 침해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침해에는 고문,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거나 모욕적인 처우 또는 처벌, 자의적인 체포나 구금이 포함됩니다. 공정한 재판에 대한 부인, 가정생활에 대한 침해도 포함됩니다.

둘째, 음식, 주거, 건강보호, 교육과 같은 사활적 필요(vital needs)의 실현에 대한 권리입니다. 우리는 이런 권리의 실현이 부분적으론 국가의 경제 발전 단계에 달려있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이 권리가 정부의 활동 또는 활동하지 않음으로 해서 침해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자원을 엘리트에게로 돌리는 부패한 당국의 처리를 통해서나 가난한 사람의 곤경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서 말입니다.

셋째, 시민‧정치적 자유들 -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자국 내외 모두에서의 이동의 자유, 정부에 참여할 자유 - 이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은 이 모든 권리를 증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세계인권선언에서 인정된 권리입니다. …

우선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은 무엇입니까? 가령, 어떤 종류의 침해나 박탈이 있습니까? 그것의 정도는 어떠합니까? 침해에 어떤 유형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경향은 인권에 대한 관심을 향한 것입니까 아니면 인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까? 정부가 관련된 통제와 책임의 수준은 어떠합니까? 정부는 기꺼이 독립적인, 외부의 조사를 받으려 합니까?

두 번째로 던져야 할 질문은 효과적인 활동을 위한 전망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의 활동은 인권의 전반적인 목적을 증진하는데 유용할까요? 우리의 활동이 바로 가까이에 있는 특정 조건을 실제적으로 개선할까요? 아니, 그 대신에 더 악화시킬 것 같나요? …

인권오름 제 383 호  [기사입력] 2014년 03월 0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79 호  [기사입력] 2014년 02월 0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입춘이 지났어도 얼어붙은 날씨다. 매서운 날씨야 곧 지나가겠지만 꽁꽁 얼어붙은 삶들에 언제쯤에야 햇볕이 들지는 기약이 없다.

어렸을 적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내일’이었다. 내일이면 돈이 생긴다는 말, 그래서 내일이면 밀린 학비를 주겠다는 말, 내일이면 찢어진 운동화나 가방을 바꿔주겠다는 말…. 하지만 그 내일은 그 다음날이면 또다시 내일이 되기만 했다. 요즘도 ‘언젠가는 또는 조만간 좋아지리라’는 막연한 약속이 참 싫다. 그 막연함에는 지나간 약속조차 무시하는 뻔뻔함과 정치를 놓아버린 정치인들의 무책임이 담겨 있다. ‘미래지향적’이란 말은 자본의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자르고, 미리 입을 막고, 미리 공공재를 넘겨주겠다는 말로 들린다. 그래서 정리해고는 늘 정당하고 청소노동자는 대자보도 붙여선 안되고 민영화에 반대하는 행동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설 직전 대한문에서 집회가 있었다. ‘기륭전자, 약속을 지켜라’는 집회였다. 기륭전자는 6년이 넘는 긴 투쟁 끝에 노사합의를 얻어냈다. 대 사회적 약속으로서 그 합의 내용을 선포하고 사진도 찍어댔다. 국회에서 조인식까지 했다. 그런데 정규직화와 복직을 약속받은 노동자들은 일 한번 못해보고 또 버림받았다. 지난 연말, 회사가 노동자들 몰래 이사를 해버리고 사장은 사라졌다. 집회에서 노래를 한 ‘꽃다지’는 “다시 기륭 집회에서 노래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며 “이런 기막힌 일이 어디 있냐?”고 했다. 기륭만이 아니다. ‘희망버스’란 사건을 낳은 한진중공업에서도 사회적 합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엄청난 손해배상청구가 노동자들의 뒷덜미를 잡았을 뿐이다. 정의를 앞장서 부르짖어도 모자랄 판에 대자보 한 장에 1백만 원을 배상하라는 발상을 내놓은 것이 대학이다. 이런 사안은 나라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해외에 진출한 한국기업들이 살인적 노동조건과 열악한 처우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다루는 방식은 국내에서 하던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람이 없다. 한국기업이 수출하는 최루탄이 민주주의와 삶의 동반 궁핍에 저항하는 시민들을 쓰러뜨리는 일은 또 어떤가. 하루하루 살아가기 버거운 시민들의 관심이 되기 어려운 가운데 한반도 주변의 심상치 않은 조짐들은 악화되고 있다.

이처럼 국내외를 가리지 않는 문제의 사슬은 연결돼 있고 궁핍을 악화시키고 있다. 이걸 해결할 길은 더 두터운 민주주의와 더 강한 인권과 더 깊은 평화일 뿐이란 말은 굶주린 배속에선 의미 없는 소리를 내는 단어일 뿐이다. 우린 참 허기지고 고단하다. 한 동료는 주변에서 잦아지는 삶의 몰락 때문에 정말 우울하고 두렵다 한다. 우린 삶을 누리는 게 아니라 삶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다.

“이 정부는 빈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 이 말은 지난 연말 총파업 집회에서 나온 발언 중 많은 호응을 받은 것이었다. 이 말을 바꿔보면, 우리가 바라는 진짜 전쟁은 빈곤과의 전쟁이다. 이 말 그대로 국제시민사회에는 ‘빈곤과의 전쟁(War on Want)’이란 이름을 가진 조직이 있다. 2011년 창립 60주년을 맞은 저명한 단체로 ‘빈곤은 정치적이다’란 선언을 내걸고 있다.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1951년에 창립됐는데, 그 발단은 한 통의 편지였다.

영국의 출판인인 빅토 골란즈는 가디언 신문에 한 통의 편지를 보냈다. 당시 한국전을 계기로 고조되는 전쟁과 군비강화의 기류에 반대하며 두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는 전쟁종식을 위한 즉각적인 협상을 하자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의 경쟁과 표적이 다른 전쟁을 하자는 것이었다. 이 편지의 끝부분에서 골란즈는 자기의 제안에 동의하는 시민들에게 “좋습니다(yes)”란 한마디를 적은 엽서를 보내달라고 한다. 한 달 안에 만 통이 넘는 엽서가 왔고 그 힘으로 ‘빈곤과의 전쟁’이 태어났다. ‘빈곤과의 전쟁’은 그 다음해에 ‘세계발전을 위한 계획’이란 보고서를 내놓는다. 그 보고서는 빈곤과의 전쟁이 부자로부터 빈자로의 생색내는 자선이 아니라 정의를 위한 운동이어야만 한다고 밝혔다. 이것은 한 나라 안에서만이 아니라 부국으로부터 빈국으로의 이전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빈곤의 증상이 아니라 빈곤의 원인과 싸운다는 것이 이 전쟁의 원칙이었다.

‘빈곤과의 전쟁’의 60주년을 평가하는 자료들에선 다른 많은 국제원조활동과의 차별성을 지적하고 있다. 국내에선 진보적 노동운동과 정치운동을 표방하며 국제적으론 현지의 저항운동단체들과 제휴한 연대활동을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간 해온 활동 중에 스스로 꼽는 것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974년 분유 기업들의 잘못을 폭로하여 세계보건기구로 하여금 분유마케팅의 국제규범을 채택하게 했다. 가난한 나라의 부채청산을 요구하거나 금융기업과 고소득자에게 세금을 부여하는 소위 ‘로빈후드세’를 주창했다. 2005년에는 영국정부로 하여금 해외 원조시에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를 조건으로 내건 정책을 폐기하도록 했다.

‘빈곤과의 전쟁’의 자기 소개문을 읽어본다. 그냥 어느 단체의 소개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싸움의 다짐으로 바꿔서 읽어본다. “빈곤은 정치적이다. 부자들 편에선 정치인의 결정이 빈자에겐 삶과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에겐 정의롭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지구적 지형을 바꿔놓을 힘이 있다. 우리는 농촌사회, 노동착취공장, 분쟁지역, 사회의 소외된 주변부에서 진정하고 지속적인 변화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함께 일한다.”

막연한 내일의 행복을 반복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 누군가가 보내온 제안의 편지에 함께 하겠다는 엽서를 쓰는 것, 설이 지난 진짜 새해에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삶과의 전쟁이 아니라 누리는 삶을 위해서.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 평화를 위한 노력을

… 우리는 재무장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너무 막대해서 그것에 대한 몰두는 평화 성취에 필수적인 정신적 참신함과 에너지를 우리에게서 더욱더 많이 빼앗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 우리가 전쟁을 막기 위해 새롭고 보다 적극적인 종류의 거의 초인적인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전쟁은 지금 아주 불가피한 것입니다. … 저는 제안합니다. …

우리는 월터 로이터(Walter Reuther, 미국 자동차노조위원장을 지낸 노동운동가)가 이미 제안한 계획의 다양한 변형을 위해 즉각적인 토론을 제안하는 일을 주도해야만 합니다. 즉, 긴급한 생사의 문제로서, 굶주리고 가난하고 절망에 빠진 수많은 동료 인간의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국제 기금을 창설해야만 합니다. 나는 내 나라가 제시하는 기여의 크기로서 새로운 종류의 경쟁으로 세계에 도전하는 걸 보고 싶습니다. 그 도전이란 평화를 위한 노력에서의 경쟁입니다. 그래서 국제적 토론이 무익한 주제 대신에 보람 있는 주제를 발견하는 국제적 정부를 초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국제적 이익에 반하여 자국의 이익에 집중하는데서 초래된 전쟁을 향한 경향이 역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마침내 칼이 쟁기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이 편지에 동의하는 분은 누구나 단지 “좋습니다.”라고 한마디를 쓴 엽서를 제게 보내주십시오. 어떤 종류의 행동을 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큰 반응이 있다면 뭔가 가능한 것이 나올 것입니다.

1951년 2월 7일 빅토 골랑즈(Victor Gollacz) 드림

인권오름 제 379 호  [기사입력] 2014년 02월 0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75 호  [기사입력] 2014년 01월 0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새해가 왔다. 챙겨보진 않았지만, 늘 그랬듯이 각종 언론은 새해에 태어난 첫 아기의 울음소리를 섞어 새해가 돼서 달라질 것들, 좋아질 것들을 편집해 희망을 노래했을 것 같다. 하지만 연말부터 메아리쳤던 ‘안녕하십니까’란 물음에 꿈쩍도 않는 정치와 불통에 새해는 꽁꽁 얼어붙었다.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정치적‧사회적 타살이라 할 죽음의 통곡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이제 좀 멈춰줬으면 좋겠는데 계속되는 송전탑 공사와 밀양주민 패대기치기,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질주, 청소년부터 청소노동자까지 입 다물 것을 강요받고 위협받는 상황…….

2013년 말, 인권단체들은 인권의 날(12월 10일)을 맞아 “인권의 그날들을 기억하는 우리, 불평등에 맞서는 연대로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다”란 기자회견을 했다. 해마다 갖는 행사였지만 그날따라 “인간의 존엄을 선언하다”란 말이 참 사무쳤다. 밥상에 으레 오르는 줄 알았던 ‘김치’가 어느 날 ‘금치’가 되듯, 무감각하게 나열하던 ‘인간존엄성 존중’이란 말에 목이 메이는 시절이다. ‘이익이 걸려 있으니 안타깝지만 존엄성 훼손을 어쩔 수 없다’고 민망해하는 수준도 아니라 ‘이익을 위해선 존엄성 따윈 따질 거리가 못 된다는 뻔뻔함이 미세먼지처럼 자욱하다.

알다시피, 인권의 날은 세계인권선언의 제정(1948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1947년 1월, 유엔인권위원회가 그 첫 회기를 가졌고 그 목표는 세계인권선언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와 철학적 차이가 너무 심해서 진행이 되질 않았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간의 갈등을 축으로 해서 개인이 먼저냐 사회가 먼저냐, 권리냐 의무냐, 자유냐 평등이냐 등의 논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네스코는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위원회’를 통해 문제 해결에 기여하려 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이 유네스코 위원회의 최종보고서이다.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보고서”란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읽어보면 밋밋하기만 할 뿐이다. 어떤 세련되고 유려한 철학이나 지식적 체계를 거의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밋밋하기만 한 문서에 담긴 보석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인정’이다.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대한 입장이나 형이상학적 논쟁에 갇혀 있어서는 인권선언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 너무나 다양한 사상과 철학을 종합한다는 불가능한 과제가 아니라 인류애의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에 합의하자는 것이 이 보고서의 목표였다. 이에 유네스코는 인권의 철학적 원칙들을 연구하는 위원회를 만들고 전 세계 약 150여명의 사상가들에게 질문지를 보내 답변을 받았다. 이 조사를 토대로 영국의 역사가 E.H.카를 의장으로 작성한 것이 이 보고서이다.

다양한 철학적 접근과 해석 하에서 가능한 합의의 근거가 무엇인가를 한마디로 추린 것이 ‘존엄성’이었다. 이론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에 합의하자는 정신이었기에 ‘왜 존엄하냐?’는 존엄성의 근거에 대해서도 합의하지 않았다. 즉 인간이 이런저런 본성을 가졌으니까 존엄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대신 존엄성을 존중해야만할 이유에 대해서 합의한 것이고 인류 앞에 놓인 정치‧경제‧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합의한 것이다.

인권의 토대를 ‘인간존엄성’으로 삼은 것은 이전 시대의 인권과 현대의 인권을 구분하는 표지석이다. 여기서 인간존엄성은 신 또는 자연이 부여한 것도 아니고 이성 또는 여타의 능력이나 자질로 인해 갖는 것도 아니다. ‘인간존엄성’은 인류간 대화를 통해 합의한 인권의 토대이다. 어떤 학자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합의를 여타 합의의 정당성을 따지는 잣대로 봤다. 예를 들어 나치의 통치는 철저히 합의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그런 합의를 민주사회에서의 합의가 아닌 것으로 배척할 이유는 나치의 합의에는 인간존엄성 존중이 결여됐다는 것이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 보고서를 받아들고 처음에는 냉대했다. 유네스코 위원회의 월권이라는 불편한 심기가 작동하기도 했고 각자의 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싶은 태도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론은 ‘실천을 위한 공통의 토대’로서 ‘인간존엄성에 대한 존중’에 합의하게 됐다는 것이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모든 국제인권법의 바탕에는 존엄성 존중이 깔려있다. 인권학자들은 이것을 인간존엄성의 ‘수립적 기능’이라고 말한다. 뒤에 나오는 모든 것들은 그 어떤 내용이 됐든 ‘인간존엄성’의 그물 안에 걸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가인권위원장 격인 영국의 ‘평등과 인권위원회’의 반 부에렌(Van Bueren) 위원장은 ‘내핍의 시대에서 존엄성, 평등, 인권의 의미’에 대해 연설한 바 있다. 그녀는 존엄성에 대한 법적 권리 말고, 즉 추상적인 개념 말고 우리의 감정과 가치에 호소하는 존엄성에 대해 말해보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예로 든 게 엘레인 맥도날드란 여성이다. 엘레인은 발레리나였는데 뇌졸중으로 쓰려졌다. 그 후 장애를 얻어 한밤중에도 여러 번 화장실에 가야만 하고, 화장실에 가다가 자주 넘어지고 병원신세를 져야하는 일도 있었다. 엘레인은 야간 돌봄을 포함하여 상당한 돌봄 서비스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판단됐다. 그런데 그녀가 거주하는 지자체 당국은 재정긴축을 이유로 야간 돌봄을 철회했다. 엘레인이 기저귀를 차면되니까 야간 돌봄에 대한 청구가 필요치 않다는 이유로 말이다. 엘레인은 그 결정을 당연히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 결정의 의미는 다음날 아침 8시 30분에 그 다음 활동보조인이 올 때까지 하루에 12시간을 배설물 위에 꼼짝없이 앉아있어야 하는 삶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부에렌 위원장은 질문한다. 엘레인의 경우에 그녀가 경험하는 존엄성 상실은 첫째 자기 삶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돌봄 서비스를 축소하는 결정에 대해 당사자인 그녀에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랬다. 두 번째의 존엄성 상실은 그 결정으로 인해 엘레인이 겪게 된 모욕적인 상황이다. 배설물에 젖은 기저귀를 차고 하루의 절반을 보내야 되는 삶 말이다.

이 사례에서 부레엔 위원장이 던지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경기후퇴를 이유로 한 존엄성의 축소가 가능한 것이냐?”고 말이다. 바꿔 말하면, 존엄성의 훼손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5백여 일이 넘게 차가운 지하도에서 장애등급제와 부양의무제 폐지를 요구하며 농성해온 한국의 장애인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경기가 좋을 때조차 우리의 존엄성을 존중해준 적 있는가?” 정리해고 되거나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노동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얼마나 우리의 존엄성을 짓밟아야 그놈의 경쟁력은 만땅이 되는 것이냐?” 개발이니 국책사업이니 몰아붙이기만 하는 공권력의 폭력에 짓밟힌 주민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 것 같다. “누구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존엄성은 희생제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냐?”

존엄성은 누구나 가진 것이고 존중은 그것에 대한 인정이다. 즉 인간이 서로를 보는 관점과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모든 인권의 밑바탕에는 존엄성 존중이 깔려있다. 물론 현실에선 경제적 합리성 또는 이익, 법적 강제 등이 더 큰 목소리를 낸다. 이런 것들을 논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그 논의와 실행이 적어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기본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통의 정치가 합의를 강요하지만 그것은 사실 복종에 대한 강요이다. 존엄성에 대한 합의를 제외하고 합의할 수는 없다. 왜곡된 고용으로 노사관계조차 받아들이지 않는 자본가나 화장실에서 밥 먹을 것을 강요하는 노동조건과 합의할 수 없다. 공공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시도와 합의할 수 없다. 권력의 평안을 위해 입 다물라는 선도와 계도에 합의할 수 없다. 음주측정기나 대기오염측정기가 각각의 구실을 하듯이 우리의 측정기는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다. 존엄성 존중이 빠진 원칙, 법, 합의 따윈 없다.

인간 권리의 철학적 원칙들에 관한 유네스코 위원회 보고서(1947년 7월 31일)

……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인간의 내재된 존엄성에 대한 신념에 기반해 있다. 인간 존엄성을 더욱 더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존엄성이 보다 완전하며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성취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취하지 않는다면, 유엔은 헌신하기로 약속한 위대한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문화가 다르고 서로 다른 제도들 위에 세워져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의 구성원들은 확실한 위대한 원칙들을 공통으로 갖고 있다. 우리는 온 세상의 모든 남녀가 출몰하는 빈곤과 불안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가졌다고 믿는다. 우리는 인류의 노력으로 고통스럽게 세워진 문명의 유산에 대해, 그 유산의 모든 양상과 차원에서, 전 인류가 보다 완전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남녀가 어떤 종류의 차별도 없이 누리는 평화와 복지에 한결같이 헌신하기 위해 과학과 예술이 결합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국가들 간의 선의에 기초해, 그들 수중에 있는 권력이 이전 시대보다 훨씬 신속하게 인류의 복지 성취를 진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유네스코 위원회의 견해 속에 담긴 것은 바로 이러한 신념이다. …… 인간의 권리 개념을 옛 부터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 체계로 일부 인권을 보호하려는 장치의 오랜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권선언의 체계적인 선포는 최근의 일이다. 인권, 존엄성, 인류의 형제애, 위대한 사회속의 인간의 공통된 시민권의 역사는 오랜 것이다. ……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과 철학자들이 준비한 인간 행복을 위한 정식에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사회적 및 정치적 제도 속에서의 이행이 요구됐다. …… 우리 시대의 철학들은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신념을 심화시키고 인류의 행복을 위한 정식을 확대했다. 하지만 철학들의 차이는 다양하고 심지어 대립되는 기본권에 대한 해석을 낳았고 철학들의 실천적인 수용이 보다 중요해졌다.

…… 유네스코 위원회는 권리,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들의 미묘함을 탐색하진 않았다. 이 용어들의 해석의 차이는 심화된 정의를 다각화할 수 있을 경향 속에서 훗날의 검토를 위해 남겨둘 것이나, 작동하고 있는 이 용어들의 정의에 대한 합의는 가능하다고 본다. ‘권리’라고 할 때 그것의 의미는 삶의 조건이다. 어떤 역사적 단계의 사회에서나 그것 없이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실현할 수단을 박탈당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 공동체의 능동적 구성원으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을 말한다.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제약이 없는 상태 그 이상을 의미한다. 자유란 인간이 그 안에서 사회의 능동적 구성원으로 최대한 참여할 수 있고, 그 사회의 물질적 발전이 허용하는 최고의 수준에서 공동체의 복지에 기여할 수 있는 사회적 및 경제적 조건의 적극적인 조직화를 의미한다. 이런 자유는 오직 민주적인 조건하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민주주의 안에서만 자유가 일부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기회를 만드는 평등의 맥락 속에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적인 자유란 한 사람의 권리와 또 다른 사람의 권리 간에 연령 또는 성별, 인종 또는 언어 또는 신념에 의한 구별을 하지 않는 것이다.

유네스코 위원회는 이렇게 작동하는 정의들이 아주 다양한 특별한 해석들의 영향을 받기 쉽고 따라서 아주 모호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위원회는 인권선언과 관련된 철학적 문제들은 어떤 주의(교리)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권리에 관한 합의를 성취하는 것이며, 또한 권리의 실현과 방어를 위한 행동에 관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런 합의는 아주 다양한 주의들을 근거로 해서도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인권의 전개와 그것의 성격과 상호관련성에 관한 이론적 차이에 대한 위원회의 논의는 그 차이들을 단일한 정식으로 축소시키는 지적인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본권에 관한 합의를 얻고 지적인 차이에서 나올 수 있는 인권 이행의 어려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 개별 인간, 국가, 국제기구들이 그것의 성취를 위해 노력하고, 자신들의 모든 권위와 힘을 그것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할 것을 고취시켜야만 하는 것이 인권이다. 인권은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 본질에 내포돼 있으며, 근본적인 살아갈 권리로부터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인권오름 제 375 호  [기사입력] 2014년 01월 0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71 호  [기사입력] 2013년 11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날이 춥다. 겨울이 되면 제일 두려운 뉴스가 있다. 전기가 끊긴 방에서 촛불 켜고 자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가난한 이들의 반복 생산되는 사건, 이 겨울에 수도도 전기도 끊겼다는 에너지 빈곤층의 사연이다. 엄청난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풍요의 한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묻게 된다. 모자라지 않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혹여 모자란다면 도대체 누구의 소비 때문에 모자란 것인가? 배분이 불평등한 에너지는 생산과정에서도 혹독한 차별을 한다. 

서울 대한문 앞에서 밀양송전탑공사 중단을 요구하며 765kv 송전탑을 상징하는 765배의 절을 하는 행사가 여러 번 있었다. 얼마 전 점심 무렵 밀양에서 올라오신 할머니 세 분과 같이 절을 하고 있었다. 한 할아버지가 ‘시끄럽다’고 ‘나랏일 반대하는 것들’이라고 욕을 하고 지나갔다. 잠시 후 잘 차려입은 중년 여성들이 왁자지껄 지나갔다. “왜 멈춰? 짓던 건 지어야지. 왜 중단하라는 거야?” 할머니들에게 삿대질 하듯 외쳤다. 거의 악을 쓰는 수준이었다. 할머니 한 분이 분에 차서 달려가셨다. “니들 지금 뭐라캤노?” 경찰이 할머니를 뜯어말리는 사이 그 여성들은 유유히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속상해서 못살겠다’는 할머니의 맘속에 꽉 찬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랏일에 버려질 수 있는 시민이 시민일 수 있는가?’ ‘당신들이 돈만 주면 살 수 있다고 여기는 그것을 나는 결코 팔 맘이 없다.’ ‘이건 거래가 성립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럼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며칠 전 추우니 집에 그냥 계시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기어코 김치통을 들고 왔다. 택시라도 타고 오시라 했건만 늘 버스를 타고 오신다. 버스 정류장으로 마중 나가니 양쪽에 보따리를 내려놓고 힘겹게 주저앉아 있다. 칠순을 넘긴 엄마가 그날따라 참 늙어 보였다. 횡단보도에서 엄마를 바라보다가 흠칫했다. 밀양의 ‘할매’라고 불리는 분들이나 울 엄마의 나이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순간 들었던 것이다. 엄마가 지금 산속에서 송전탑 공사에 맞서 싸우는 상상을 해보니 결코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자식을 위해 기어코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는 엄마나 산자락에 매달려 ‘이런 환경을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외치는 그분들이나 다를 바 없는 마음일 것이다.

엄마는 평생 에너지 빈곤층이었다. 아이 넷을 키워야 했던 알량한 단칸방은 구들장이 불량이었다. 어느 밤 연탄가스에 모두 비명횡사할 뻔 했다. 동생의 신음소리에 눈을 떴다는 엄마는 잠과 가스에 취한 우리들을 찬바람 부는 길로 내쫓아 정신 들게 한 후 동치미 국물을 퍼먹였다. 구들장 고칠 엄두가 안나 아예 연탄을 때지 않기로 했다. 일하고 돌아온 엄마는 뜨뜻한 방에 실컷 지져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난 그때 ‘지진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엄마의 갈라터진 발을 씻을 더운 물은 꿈꾸기 어려웠다. 비싼 석유곤로에 물을 데워 쓰는 것은 사치였다. 가스보일러로 난방과 온수를 해결할 수 있는 삶은 엄마의 생애 아주 후반부에야 왔다. 마찬가지로 밀양의 할머니들은 평생 얼마나 에너지를 써봤을까? 싸고 깨끗한 에너지와는 얼마나 먼 거리의 삶을 살아왔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아끼고 참고 견뎠을 삶일 것이다.

우리 주변은 많이 커지고 화려해진 것들 투성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서 엄마와 같은 에너지 빈곤층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빈곤층까진 아니더라도 생활의 주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또 오른다’는 전기 등 각종 에너지 요금 걱정에 핵발전소와 송전탑을 빨리 세워야 더 싸게 쓸 수 있다는 선전이 솔깃할지 모른다. 생활의 아쉬움과 각박함에 ‘왜 공사를 방해하냐’고 원망할지도 모르고, 해준 것 없어도 나랏일 방해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스스로 가꿔온 도덕심에 타박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없는 사람들끼리, 같은 시민끼리 ‘누구는 국민입네 누구는 국민 아닙네’로 나뉘어 싸우는 갈등만 커져간다. 이 갈등의 에너지를 전환한다면 아주 고 에너지가 발생할 것 같다.

기업이 잘되고 기업이 돈 많이 벌면 노동자도 잘살게 된다는 말, 나랏돈이 많아지면 가난한 이에게도 혜택이 온다는 말, 이제 그런 말들에 의심을 보여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형편이다. 마찬가지로 핵발전소 많이 세워야 값싸게 전기를 쓸 수 있다는 말, 그 전기를 쓰려면 송전탑이 필요하다는 말, 경제성장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일이란 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제 의심을 품고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질문을 던질 때가 지나도 한참 늦은 것 같다. 이번 주말로 계획된 밀양희망버스는 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시동을 거는 것이다.

처음에는 내 엄마 같은 분들이 고통 받는 게 그저 안쓰럽고 죄스러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의로운 삶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의지에 감동하게 됐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분들이 고통을 자처하고 감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분들이 대신 싸워주고 대신 대안을 만들어줄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건 우리의 미래이고 우리가 대안을 만들어야 하는 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대안에너지의 선구자로 알려진 헤르만 셰어의 글과 셰어의 노력으로 일궈진 ‘세계재생에너지회의’의 성명이다. 새삼스러운 내용은 아니다. 밀양과 관련해 대안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서 많이 들었던 내용들이다. 하지만 의문이 드는 건 이런 것이다. 셰어는 연방의원을 여러 차례 지낸 정치인이자 학자이다. 그와 독일 시민들이 재생에너지를 주장하고 실행하면서 고착당하고 채증당하고 다치고 끌려갔다는 얘기는 없다. 공권력에 모욕당하고 나랏일에 반대하는 건 국민도 아니라고 ‘버림받았다’는 얘기도 없다.

2010년 세상을 떠난 셰어는 평생을 바쳐 재생가능에너지에 대한 인권을 ‘자연의 수혜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천부적 인권’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이 화석에너지의 고갈이나 위험성 때문에 그저 피치 못해 나온 요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인권적이란 주장이다. 그렇다고 해서 셰어가 강조하는 전환의 절박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올 겨울은 여러모로 많이 춥다. 그래서 우리는 더 절박하다.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 자체가 달라져야 나눠 갖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이 밀양의 고통에 맞닥뜨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배우게 된 것이다. 서울을 위해 지방을 희생하는 방식을 버려야 하고 위험한 핵발전 대신 하루빨리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 에너지의 생산도 혜택도 같이 나누는 길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인지 밀양희망버스는 질문을 던지려 한다.

“재생 에너지에 대한 인권”(2005년 11월 26-30, 독일 본에서 열린 세계재생에너지회의에서 채택한 최종 성명)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세계인권선언의 첫 문장은 기본적인 인류의 약속을 명시하고 있다. 이 약속을 존중할 때에만 평화로운 인류의 삶이 튼튼하게 보장될 수 있다.

에너지는 모든 삶에 기본적인 필수 조건이다. 에너지 가용성은 기본적이고 불가분적인 인권이다.

20세기에 우리가 얻은 경험은 기존의 에너지 공급 시스템(주로 화석 에너지와 일부 원자력 에너지에 의존하는)이 모든 사람에게 에너지 인권을 보장하는 입장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에너지 인권은 10억 배 이상에게 침해됐다. 전통적인 에너지원의 임박한 고갈과 그것들이 환경과 기후에 미친 엄청난 영향 때문에, 에너지 권리는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적게 보장될 수 있다. 에너지 인권은 재생 가능한 에너지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재생에너지의 동원을 위해 낭비할 시간이 없다. 지금까지, 국제적 노력은 필수적인 요구와 주어진 기회를 따라잡지 못하고 꾸물거렸다. 다수의 유엔 회의는 지킬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약속을 했다. 매 단계에서 합의에 의한 의사결정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유엔 기구들과 다국적 개발 은행들은 그들의 우선순위를 재생에너지로 전환하려하지 않거나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했다. 교토의정서는 그것에 요구된 바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교토의정서의 주요 문제는 재생가능에너지를 향한 근본적 전환으로 배출을 방지하는 대신에 거래와 매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강조한데 있다. 원자력의 증진은 국제법속에 정해져있지만 재생에너지는 그렇지 않다. 화석과 핵에너지 시스템은 여전히 매년 미화 5천억 달러의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이것은 재생에너지에 쓰여지는 것의 50배이다.

정부간 국제 기구들은 그 시스템에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차별을 반영하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핵기술의 확산을 조장하고, 국제에너지기구(IEA)는 화석에너지산업의 위성으로 작동하고 있다. 두 기구 모두 핵과 화석 에너지의 위험성을 낮추고 재생에너지의 잠재성을 부정함으로써 정부들과 대중을 오랫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왔다.

이 기구들은 미래에 눈감은 에너지 정책으로 정부들을 이끌어왔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 더 이상 침묵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된다. 책임자의 이름을 거명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행위에 책임질 뿐 아니라 행동하지 않음에도 책임져야 한다. … 인류는 지금 기로에 서있다. 오늘과 미래에 재생에너지의 비용은 지속가능하고 싸며 모든 사람에게 에너지를 공급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더 이상의 지연은 무책임한 것이다. 경제적, 생태적 이유와 평화 정책이 재생가능 에너지를 웅변하고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하건데, 재생에너지를 위한 기본적인 윤리적 결단이 결론이다. …


국제재생에너지기구 설립회의 연설(2009년 1월 26일, 독일 본, 헤르만 셰어)

… 유명한 세계적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태양은 결코 그늘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문명은 무수한 실존의 에너지 위기들로 그늘 지워져 있고, 동시에 그 위기는 쌓여가고만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핵심어들을 알고 있습니다. 줄어드는 매장량, 늘어가는 에너지 요구, 그에 따라 늘어나는 소진, 가격 상승, 경제적 제약, 사회 내부의 긴장과 국가 간의 국제긴장 말입니다. 이 모든 것들 말고도 기후 변화, 공기와 물 오염, 죽어가는 숲과 사막화가 있습니다.

인민과 그 정부들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시한폭탄의 째깍거리는 소리 듣기를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해결책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광범위한 해결책은 재생가능에너지로의 전환입니다.

세계문명은 다양한 에너지 위기의 그늘을 벗어나기 위하여 시간과 경주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이 그 전환의 때입니다. 오랜 아프리카의 교훈처럼,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려라. 그러면 그늘은 네 뒤에 생길 것이다.”

… 제가 보기에 재생에너지 정책에 대한 4가지 일반적 지침이 있습니다.

1. 빠른 행동이 필수불가결합니다. 재생에너지에 대해 입 발린 말을 늘어놓을 시간이 없습니다. “지구적으로 말하고, 국가적으로 미루는” 게임을 끝낼 때가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
2. 재생에너지는 공공재입니다. 바람과 태양열을 사유화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에너지 형태를 사용하면 세계 경제에 더 큰 평등이 올 겁니다.
3. 재생에너지는 거시-경제적 혜택을 다면화했습니다. 정치적 목표와 기술은 거시경제적 혜택을 투자자와 소비자를 위한 미시경제적 동기들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4. 재생에너지는 연료비와 환경 비용을 피하는 새로운 경제적 계산을 가능케 합니다.

… 여러분에게 목표가 있다면, 많은 저항들로 인해 좌절해서는 안됩니다. 일이 틀에 박힌 방식으로 되지 않을 때는 틀을 벗어난 경로를 취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야기한 방법들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부담 대신에 혜택을 공유하자 - 국제재생에너지기구 설립의 정치, 경제, 생태적 이유(2008년 4월 10일, 독일 베를린, 헤르만 셰어)

… 우리는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로 경제와 사회에 대한 가장 큰 도전에 직면해있다.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기후 변화만이 아니다. 과거 화석 자원의 과도한 사용으로 야기된 지구 온난화의 점증하는 문제가 아니더라도, 지구의 에너지 시스템은 온전했을 리가 없다. 다양한 환경 문제와 함께 에너지 자원의 계속 커가는 결핍 문제가 남아있다.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전통적인 에너지 공급 시스템의 간접적인 외부적 비용이다. 현재의 에너지 가격은 이런 비용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불해야만 하는 비용이다. 재생에너지로서만 우리는 그런 비용을 피할 수 있고 사회들을 그런 비용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다.

이런 도전에 대한 답들은 대부분에게 경제적 부담으로 여겨진다. 경제적 부담에 대한 가정이 지금의 에너지 토론에 큰 자국을 남기고 있다. 나에게 이런 가정은 아주 근시안적으로 보인다.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의미심장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및 생태적 혜택을 이끌 것이다. 미시경제적 차원만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에너지 투자에 대한 아주 고립적인 비용비교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런 혜택들이 간과될 경향이 있다. 거시경제적이고 총체적인 전망을 사용하면 다른 결과를 낳을 것이다.

핵에너지는 박물관에 있어야(2008년 8월 독일타임스, 헤르만 셰어)

우리는 모든 우리의 전기 필요를 재생에너지로 충족시킬 수 있다.

핵에너지를 생산하는 것은 싸지도 안전하지도 않다. 대안에너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고 핵에너지에 한때 그랬던 것처럼 대안에너지의 증진에 힘을 쏟아야 할 때이다. 세계적으로 핵에너지의 르네상스를 선포하는 선전이 더 많다. 세계에너지기구는 심지어 2050년까지 1,200개의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기후변화에 대한 해답이며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연료 가격을 안정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핵에너지의 많은 심각한 위험들 뿐 아니라 핵에너지의 진짜 비용을 무시하고 있다. 또한 재생에너지의 엄청난 잠재성을 부인하고 있다. …

우리의 핵폐기물은 10만년 남을 유산이다. 어떤 정치적, 경제적 질서가 그런 기간을 버티고 남아있을 수 있을까? 원자력으로 돌아가선 안되는 더 중요한 이유들이 있다. … 엄청난 물을 필요로 하는 핵 원자로는 늘어만 가는 지구적 물 위기와 충돌하며 세계 인구의 필요와도 경쟁한다. 핵발전소가 만들어낸 잉여 열은 생산적으로 이용하기 어렵다. 이것이 핵발전이 근본적으로 비효율적인 이유이다. 이윤을 내기 위해선 비싼 핵발전소가 최대생산능력으로 작동해야만 한다. 이건 정부가 전기 시장 자유화를 뒤집고 핵산업에 몫을 보장해줘야만 가능한 일이다. 원자력 경제는 언제나 국가 산업이었다. 이것은 공공연히 인정되기도 하지만 때론 은폐된다. …

지난 12년 동안, 독일의 재생에너지법으로 3만 메가와트의 전력이 만들어졌다. 2007년 한해에만, 새로운 용량이 급격히 늘어서 재생에너지가 150억 킬로와트의 전기를 생산했다. 이것은 두 개의 핵발전소의 연간생산과 맞먹는다. 이런 초기 비율이 25년만 계속돼도 독일의 전기는 재생에너지로 완벽하게 공급될 수 있을 것이다. 독일은 약 35만 평방킬로미터에 8천1백만 명의 인구를 가졌다. 독일에서 될 수 있는 일은 어디에서건 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의 우선순위에서, 기존의 중앙집중식 설비에서 재생 에너지를 확장하는 것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 고도로 집중화된 전통적인 발전소는 다수의 더 작은 중간 크기의 발전소로 대체될 수 있다. 태양 또는 풍력 발전기는 단기간에 설치될 수 있는 반면에 핵발소는 짓는데 평균 10년이 걸린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선 핵에너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

핵에너지의 비용은 멈출 수 없이 치솟는 반면 재생에너지의 비용은 순차적 생산과 기술의 세련으로 꾸준히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재생에너지에 대한 근시안적인 비관주의 뿐 아니라 핵에너지를 둘러싼 근거 없는 기술적 낙관주의를 극복해야만 한다. … 장차 핵에너지가 있을 곳은 기술 박물관이다.

인권오름 제 371 호  [기사입력] 2013년 11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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