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67 호  [기사입력] 2013년 10월 3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잔인한 사월이 잔인한 시월에게 자리를 넘겨준 것 같다. 밀양 송전탑 건설 재개로 시작된 시월은 전교조 법외 노조 통보로 방점을 찍더니 국정원의 셀프 개편 안을 기다리기만 하던 침묵 대통령의 야구 시구에 가슴이 뻥 뚫렸다.

번갈아 하루씩이라도 밀양에 다녀온 인권활동가들은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달고 산다. 저마다 듣고 본 주민들의 말이 귓전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욕과 폭력을 주저하지 않는 공권력 앞에서 “공무원들에겐 마음이 없어”라고 한탄했다는 할머니, 마음 없는 그들을 향해 “니 먹고 살려고 이런 짓 하나 본데 다 때려치고 나랑 농사짓자”고 울부짖는 광경을 두고 서울로 오는 발이 안 떨어졌다는 활동가, 나 또한 산속의 서늘한 새벽에 저들이 언제 쳐들어오나 허공을 주시하던 할머니가 “인생 한번 살다 가는 거 정의롭게 살다 가고 싶어.”라고 읊조리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 할머니들의 움막 앞에 꽂혀있던 선명한 태극기. ‘왜 저걸 꽂아놓으셨나’ 했더니 ‘우리도 국민이란 걸 말하고 싶어서’라고 하셨다.

이달 중순 왕복 열 시간이 걸리는 곳으로 인권교육을 다녀왔다. 처음엔 당연히(?) 안 가려고 했다. 그런데 요청하시는 분이 먼 거리 때문에 몰염치한 부탁이라도 하는 듯 여기시는 것이 맘에 걸렸다. ‘제가 서울 사는 것이 특권인데 특권티를 내면 안 되고 지역 사시는 것이 죄가 아닌데 강의 요청하시면서 너무 죄스러워하시는 것 자체가 인권문제 아니겠습니까?’라고 수락 메일을 보냈다. 그 대가와 교훈은 컸다. 고속열차를 이용할 수 없는 구간이기에 통일호를 탔다. 아침인지 새벽인지 헷갈리는 시간에 기차에 올랐다. 그 열차에는 판매승무원도 식당 칸도 없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물도 커피도 준비 못한 내게는 악몽이었다. 역에 내려서 뭔가 요기를 할 수 있겠지 희망하며 다섯 시간을 견뎠다. 근데 웬걸, 기차역은 물론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갑 속의 현금이 내 배고픔을 해결해줄 순 없었다.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기차역 간이매점에는 그 흔한 삼각 김밥조차 없었다. 찾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아예 갖다놓지 않는 것 같았다. 마른 빵 한 조각을 사서 씹으며 배고픔과 싸웠다.

돌아오는 길은 깜깜했다. 차창 밖으론 인기척 없는 논밭과 송전탑이 보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해졌다. 수도권에 가까워진 것이다. 물론 서울에 가까워지자 대낮처럼 환해졌다. 밀양 생각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었다. 세계적으로 사양산업이자 재앙덩어리인 원전을 수출하겠다고 밀어붙이는 핵발전소 건설이요 그 탓에 우격다짐인 송전탑 건설이다. 그것도 부품 결함으로 불안 덩어리 공사임에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송전탑은 밀어붙인다. 사람 없는 농촌, 인구의 겨우 6%도 못되는 사람들만 농사를 짓는 나라, 세계적 먹을거리 위기 속에서 식량 자급률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나라에서 ‘돈만 벌면 된다’는 가치만 판친다. 돈만으론 먹고 살 수 없는 위기가 닥쳐온다고, 아니 그게 이미 현실이라고 외치면 ‘몽상가’ 취급을 받는다. 그 돈으로 누구를 희생해서 누가 벌어 챙기는지 문제 삼자고 하면 ‘종북세력’이라 한다. 아무리 부가 넘쳐나도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 많아지는 현실을 파헤쳐보자, 어떻게 하면 같이 먹고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자고 하면 ‘이념교육’이라 한다.

교사들에게 인권교육을 처음 시작했을 때 내가 애용하던 문구가 있었다. 저명한 교육심리학자인 하임 기노트(Haim Ginott)가 <교사와 학생 사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것으로 미국의 한 교장선생님이 새 학기마다 교사들에게 보냈다는 편지이다.

“저는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입니다. 누구도 증인이 될 수 없던 일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가스실을 지은 것은 잘 배운 기술자였고, 아이들을 독살한 것은 교육받은 의사였으며, 아기들을 살해한 것은 훈련받은 간호사였으며, 여성과 아이들을 총으로 쏜 것은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교육에 회의적입니다. 제 요청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학생들이 사람이 되게끔 도우십시오. 당신의 노고가 학식 있는 괴물이나 기술자인 사이코패스나 교육받은 아이히만(집단학살의 책임자인 나치 장교의 이름)을 길러내선 절대 안 됩니다.
읽기, 쓰기, 셈하기는 우리 아이들이 좀 더 인간다워지는데 도움이 돼야만 의미가 있습니다.”

인권유린 현장에선 너무 많이 배운 사람들을 너무 자주 맞닥뜨린다. 너무 많이 배운 전문가와 공무원, 잘 훈련받은 공권력 집행자들 말이다. 허나 하나같이 ‘마음’이 없다. ‘어쩌면 좋나! 무엇부터 해야 하나?’ 한탄할 때마다 누구나 인간다운 교육을 끄집어내곤 한다. 그럼 ‘어디서 누구와 그런 교육을 도모하나?’란 질문이 이어진다.

인권운동을 하면서 나는 교사들과 사이가 그리 좋지는 못했다. 교사들은 아동과 학생 인권에 대해 일부는 적대감을 대개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학생과 교사의 인권은 ‘같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학생인권을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사들의 권리, 그중에서도 기본적인 단결권을 옹호한다고 말했다. 내가 참관했던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일을 사례로 얘기해주곤 했다. 한국정부의 1차 보고서 심사 때(1996년 1월)는 전교조가 합법화되지 못한 상태였다. 유엔아동권리위원회의 한 위원이 한국 정부 대표에게 질문했다. “나는 당신들이 공산주의라고 비난하는 나라 출신입니다. 그런 내 나라에서도 교원노조는 당연시되는데 당신들은 민주주의 국가라고 자부하면서 교원노조가 인정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위원이 교원노조에 관한 질문을 한 이유는 아동 곁에서 밀접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아동의 인권도 위태롭다는 인식에서였을 것이다. 교원노조인정에 대해서는 아동권위원회 뿐만 아니라 유엔사회권 및 자유권 위원회 등 국제인권사회의 문제제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 때의 질문을 현 정부는 국내외로부터 다시 받고 있다. 뒷걸음질도 이정도면 너무 심하다. 그리고 냄새가 너무 난다. 때려잡아야 할 정보기관의 전횡에는 침묵과 회피로 대처하면서 전교조 카드를 뽑아들었다. 그것도 해직된 동료들을 지키겠다는 당연한 일이 이유라니 참 빈약하다. 이념대립의 판을 깔고 전교조를 윷판의 말처럼 공안판의 말로 써먹겠다는 노골적인 신호이다.

무능하고 부도덕한 정부가 공안판을 펼칠 때마다 필요한 희생자는 문제제기를 던지는 사람들, 온 몸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지금은 밀양의 농민이요, 전교조 교사요, 쫓겨나고 내몰리는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국정원은 각종 불법공작으로 희생양을 지목하고 필요하면 만들어 왔다. 경찰은 찍힌 이들을 폭력으로 제압한다. 언론은 본질적 질문은 묻어둔 채 말초적 감정과 대립만 자극한다. 장사 안 되고 일자리 없고 사는 게 재미가 없는 사람들은 정치에 질문 던지기를 포기하고 냉소의 독방으로 기어들어간다. 정부는 사람들이 그렇게 지쳐버리길 원한다. 정부는 ‘국정원 같은 게 지금 먹고 사는 문제랑 무슨 관계가 있냐’고 사람들이 나가떨어지길 기대하며 버티고 있다. 심지어 이번의 혐의는 국정원 등의 말도 안되는 선거유린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국가기관들에 의한 선거유린을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은 헌법도 국제인권법도 없는 권력을 행사하겠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권력을 용인한 적이 없다. 위기 모면을 위해 이념대립 공안판을 펼치려 하고 또 무슨 ‘주의’가 필요하다면 우린 기꺼이 헌법주의자요 인권주의자가 될 것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유엔의 ‘반테러리즘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유엔인권이사회의 요청으로 작성한 보고서이다. 분량상 35개의 요소를 전부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절반만 읽어봐도 꼭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을 들여다보고 맞춤형으로 만든 것 같다. 아래 문구에 ‘국정원’을 집어넣어 읽으면 이렇다. 국정원은 헌법과 국제인권법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만 권한을 사용하고 활동해야 한다. 그렇지 못했을 때는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정부는 국정원의 헌법과 인권유린행위에 대해 책임지는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법과 인권을 유린하는 명령은 아무리 국정원 요원이라도 거부해야 한다. 이 중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킨 것이 있는지 묻고 싶다.

제 집에 편히 머물러도 온갖 지병과 계절병에 취약한 노인들이 산속의 추위 속에서 점령군처럼 몰려온 경찰폭력에 맞서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이 되는 것인지 가르쳐야 할 교사들이 사냥감이 된 가운데 또 수능은 다가온다. 정보기관의 대선부정은 수능부정에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는지 정부는 답해야 한다.

정보기관 감시통제 모범실천지침(2010, 유엔인권이사회)

이 보고서는 유엔인권이사회의 요청으로 ‘반테러리즘에서 인권과 기본적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작성한 것이다. 모범 실천(good practice)의 35개 요소는 세계 각국에 현존하거나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실천들에서 뽑은 것이고 또한 국제조약, 국제조직의 결의안, 지역 법원들의 판결들에서 나온 것이다.

“모범 실천”의 개념은 정보기관의 활동에서 인권 증진과 법의 지배에 대한 존중을 위한 법적‧제도적 틀을 말한다. 모범 실천은 인권법을 포함하여 국제법이 요구하는 내용 뿐 아니라 법적 구속력 있는 의무를 넘어선 의무를 포괄한다.

<법적 기초>

요소 1. 정보기관은 국가안보와 법의 지배를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보기관의 주 목적은 국가안보를 지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데 있어서 정책입안자들과 여타의 공공기관을 보조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 분석, 유포하는데 있다. 이 목적에는 거주민과 그들의 인권 보호가 포함된다.

요소 2. 정보기관의 수임사항은 공개적으로 이용 가능한 법률로 좁고 명확하게 규정돼야 한다. 수임사항은 공개적으로 가용한 법률 또는 국가안보정책들에 규정된 바에 따라 정당한 국가안보를 보호하는데 엄격하게 한정돼야하며 정보기관이 다룰 수 있는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이 무엇인지를 밝혀야 한다. 테러리즘이 그런 위협에 포함된다면, 그것은 제한된 명확한 용어로 정의돼야 한다.

요소 3. 정보기관의 권한은 명확하게 속속들이 국가 법률로 규정돼야 한다. 정보기관은 수임 받은 목적을 위해서만 권한을 사용할 것을 요구받는다. 특히 반-테러리즘의 목적을 위해 정보기관에 부여된 어떠한 권한도 반드시 그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돼야만 한다.

요소 4. 모든 정보기관은 헌법과 국제인권법을 준수하는 공개적으로 가용한 법률을 통해서 구성되고 그런 법률 하에서 작동해야 한다. 정보기관은 국가 법률에 의해 규정되고 그 법률에 따른 활동만을 취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도록 지도받아야 한다. 공개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보조 규정들은 엄격하게 한정돼야 하며 그런 규정들은 공개적으로 가용한 법률에 의해 승인되고 그 한계 내에 머물러야만 한다. 공개되지 않은 규정들은 인권을 제한하는 어떠한 활동의 근거로도 이용될 수 없다.

요소 5. 정보기관이 헌법 또는 국제인권법을 위반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은 명백하게 금지된다. 이런 금지는 정보기관의 국내 영토에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해외에서의 활동에도 미친다.

<감시 기관>

요소 6. 그 수임사항과 권한이 공개적으로 가용한 법률에 근거를 둔 국내의 행정‧의회‧사법 및 전문적 감시통제 기관들의 결합에 의해 정보기관은 감시받아야 한다. 정보기관 감시의 효과적인 시스템은 정보기관과 행정부 둘 다로부터 독립적인 적어도 한 개의 시민 기구를 포함해야 한다. 감시 기관들의 연합된 검토과제는 정보기관의 법 준수 여부, 활동의 효과성과 효율, 재정, 행정적 활동을 포함하여 정보기관 활동의 모든 측면을 포괄한다.

요소 7. 감시 기관들은 그 수임사항 수행에 필수적인 정보‧공무원‧시설에 대한 완전하고 방해받지 않는 접근 뿐 아니라 직권조사를 개시하고 수행할 권한‧자원‧전문성을 가져야 한다. 감시 기관들은 문서와 기타 증거들을 획득하고 증인 심문을 하는데 있어 정보기관과 법집행당국의 완벽한 협력을 받아야 한다.

요소 8. 감시 기관들은 활동 과정에서 접근한 기밀 정보와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필수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감시 기관의 구성원이 이런 요건을 위반했을 경우에는 처벌이 주어져야 한다.

<항의 제기와 효과적인 구제>

요소 9. 정보기관에 의해 자신의 권리가 침해받았다고 여기는 모든 개인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거나 옴부즈만‧인권위원‧국가인권기구 등의 감시 기관에 진정을 제출할 수 있다. 정보기관의 정보활동에 영향 받은 개인들은 고통 받은 위해에 대한 완전한 배상을 포함하여 효과적인 구제를 제공받을 수 있는 기관에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요소 10. 정보기관의 활동으로 야기된 고소와 항의를 다룰 책임 있는 기관들은 정보기관과 행정부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정보기관 감시 기관들은 조사를 수행함에 있어 모든 관련 정보에 대한 방해 없는 접근, 필수적인 자원과 전문가, 그리고 구속력 있는 명령을 발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져야 한다.

요소 11. 정보기관은 국가 관할권하의 모든 개인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증진하고 보호하는데 기여하는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정보기관은 성, 인종, 피부색, 언어, 종교, 정치적 또는 기타의 의견, 국적 또는 사회적 출신 또는 기타의 지위를 이유로 개인이나 집단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요소 12. 국가의 법률은 정보기관이 어떠한 정치적 활동에 복무하거나 또는 특정 정치적‧종교적‧언어적‧인종적‧사회적 또는 경제적 집단의 이익을 증진 또는 보호하기 위해 활동하지 않도록 금지해야만 한다.

요소 13. 적법한 정치 활동 또는 결사의 자유, 평화적 집회와 표현의 자유의 권리의 적법한 표현을 표적삼아 정보기관이 자신들의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금지돼야 한다.

<정보기관에 대한 정부 책임>

요소 14. 정부는 정보기관의 활동이 어디에서 벌어졌건 간에, 국제적으로 잘못된 행위의 피해자가 누구이건 간에, 자국의 정보기관과 요원들 그리고 그들과 연루된 사적인 계약자들의 활동에 대해 국제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따라서 행정부는 자국의 정보기관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를 보장하고 행사하며 책임지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개인적 책임과 책무성>

요소 15. 정보기관의 요원들에게는 여타의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헌법, 제정법, 국제형사법이 적용된다. 정보요원에게 규칙에 따라서 국내법을 위반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되는 예외는 법에 의해 엄격하게 제한되며 명확하게 규정돼야 한다. 이런 예외는 국제법의 확정적 규범들과 국가의 인권 의무에 대한 위반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요소 16. 국내법 또는 국제인권법을 침해 또는 침해하는 명령을 발표한 정보기관의 요원 또는 정보기관의 편에서 활동한 개인에 대해서는 국내법이 민‧형사적 및 기타의 처벌을 가해야 한다.

요소 17. 정보기관의 요원은 국내법 또는 국제인권법을 침해하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할 법적 의무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 명령을 거부한 요원에게는 적절한 보호가 제공돼야 한다.

요소 18. 정보기관의 요원이 범죄를 보고할 내적 절차가 있어야 한다. 내적 절차가 부적절하다는 것이 증명됐을 때는 범죄를 다루기에 충분한 조사와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과 필수적 정보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독립 기구로 보완돼야만 한다. 정직한 행위로서 범죄를 보고한 정보기관 요원은 어떠한 형태의 보복으로부터도 법적으로 보호돼야 한다. 이런 보호는 미디어 또는 광범위한 대중에 대한 폭로(그것이 최후의 수단으로서 행사됐고 중대한 공적 사안의 문제에 해당된다면)에도 해당된다.

인권오름 제 367 호  [기사입력] 2013년 10월 3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63 호  [기사입력] 2013년 09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추석이 지났다. 여기저기서 기름진 명절 음식으로 찌운 살 걱정이 들려오지만 마냥 허기진 느낌이 든다. 허한 느낌이 아침저녁의 찬 기운과 함께 깊어간다. 없는 것들에 대하여 찾아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너무 허기가 진다.

추석날 아침, 서울 대한문 앞에서 장기농성장 합동차례가 있었다. 명절이라 제각기 농성장을 지킬 사람도 부족하다 하여 많이 모이진 못했다. 간단한 의식을 마친 후 상에 올렸던 음식을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단식자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맘 편히 먹으라고 덕수궁 안으로 산책을 핑계 삼아 몸을 숨겼다. 그 중 한사람은 단식에 들어가기 전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전 명절 기름진 음식을 정말 좋아해요.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가 않아요. 제 고향에선 전을 종류별로 잔뜩 부쳐서 정말 좋아요.”라고 말이다. 그런 사람이 명절에 전 한 조각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쌍용차 문제해결을 위한 집단 단식이 보름을 지났다. 허기는 대한문 단식농성장에만 있는 게 아니다. 노동을 무시 받고 단결을 부인당하고 약속을 배신당한 사업장들이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민망할 정도다. 밀양에선 은근슬쩍 한전이 공사를 다시 한다니 노인들이 관 자리를 파놓고 싸움에 나선다신다. 강정에선 안부전화에서조차 ‘우리 강정 좀 살려줍쇼’라 한다. 진주의료원 폐업 이후 오갈 데 없는 환자들은 어찌됐는지 천막농성을 이어간다는 노동자들 상황은 어떠한지 언론에 한 줄도 안 나온다. 그런데 집권자의 정치는 제 말만 하고 ‘이하 생략’과 ‘안면몰수’로 이어지고 있고 아동의 인권조차 아랑곳 않는 언론권력이 코치와 길안내를 하고 있다. 야당은 ‘저들 때문에 못한다.’는 닳고 닳은 핑계 속에 진짜 싸우는 것인지 시늉인지 애매한 행동을 가늘게 이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이니 ‘왜 굶느냐?’고 ‘그것밖에 방법이 없느냐?’고 질책과 원망을 들어도 ‘이것밖에 할 수가 없어요.’로 답하는 심정을 이해하려 애쓸 수밖에 없다. 단식투쟁은 직접 실행하는 사람이나 곁을 지키는 사람에게나 고역중의 고역이다. 생명을 거는 행위인 만큼 논란도 많다. 그 유명한 간디조차 ‘목숨을 담보로 한 자기 신념의 강요’라는 비판을 받았다. 간디가 한 여러 차례의 단식 중에서 어떤 경우는 불가촉천민의 정치적 권리요구에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찜찜한 것이었다. 그런데 걱정과 비난, 논란과 강한 의지가 교차되는 그런 단식투쟁을 많은 사람들이 실행해왔다. 그렇게 하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첫째 이유는 권리를 부인당한 사람들이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고자 함이다. 역사 속에서 강렬한 인상을 주는 대표적 사례는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의 단식투쟁이다. 참정권 운동가들의 행동을 정치적 행동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은 당국은 그저 사소한 위반 행위로 취급하려 했다. 이에 운동가들은 벌금형 대신 감옥을 택했고, 수감된 후에는 형사범이 아닌 정치적 수인의 대우를 요구하면서 단식투쟁을 했다. 처음 단식투쟁을 한 여성은 1909년의 던롭이었다. 던롭은 국회의사당 담벼락에 권리장전의 구절을 쓴 혐의로 수감됐다. 91시간의 단식 끝에 그녀는 일단 풀려났다. 당국은 던롭이 권리를 위한 ‘순교자’가 될 것을 두려워하여 형기를 마치기도 전에 서둘러 석방했던 것이다. 이후 그녀의 뒤를 따라 다른 운동가들도 줄줄이 단식투쟁을 택하자 당국은 ‘강제급식’이란 방법을 개발했다. 사지를 붙들고 목구멍에 호스를 넣어 강제로 죽을 들이붓는 것은 사실상 고문이었다. 그로 인해 발작을 일으키고 목숨에 위협을 받는 일이 벌어지고야 강제급식은 폐지됐다. 여성의 정치적 권리를 부인하는 당국에 복종하지 않는 행위가 단식투쟁이었고 그런 행위 자체가 이미 정치적 권리의 행사였다.

Marrion Wallace-Dunlop(메리온 던롭)
정치적 행위로 수감된 사람은 (형사범으로서가 아니라 정치적 수인으로서의) 일차적 구분에 따른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모든 문명국가가 인정한 권리를 나는 주장한다. 그리고 원칙의 문제로서, 나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내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이 문제가 내가 만족할 만하게 해결될 때까지 지금부터 모든 음식을 거부하겠다.

두 번째는 ‘말’을 차단당한 사람들이 사회에 온 몸으로 ‘말’을 걸려는 행위가 아닐까한다. 한국에서 양심수들의 단식은 아주 많았고 감동적인 명문들이 외부로 전달되곤 했다. 하지만 이름 없는 이들의 단식투쟁은 그렇지 않았다. 한 예로 청송 보호감호소에서 여러 차례 단식투쟁이 있었다. 그 네 번째로 제일 큰 규모였던 2003년 집단단식에는 6백여 명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한 처우 개선의 요구가 아니라 반인권적이고 부당한 사회보호법(형기를 마친 후에도 감호소에 수용을 강제했던 법률)을 폐지해달라는 요구였다. 이름 없는 이들이고 사회에서 격리된 이들이었기에 그 흔한 성명서나 단식 결의문 같은 것도 없다. 그 흔적은 외부에서 인권단체들이 내놓은 지지성명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이번으로 벌써 네 번째다. 청소 피감호자들이 사회보호법 폐지를 요구하며 벌써 일주일째 집단단식을 진행하고 있다.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제도의 악랄함을 바깥 세상에 고발하고자 사회로부터 철저히 격리돼있는 피감호자들이 택해야 했던 길이 바로 곡기를 끊어버리는 것이었을 게다. … 국회도 국가인권위원회도 곡기를 끊은 채 인권침해를 호소하는 피감호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법률안 발의는 차치하고라도, 진상조사 활동을 통해 사회적 관심을 환기하는 일은 가능할 텐데, ‘표’가 되지 않으니 움직일 생각조차 않고 있다. 지금 청송의 피감호자들은 몸뚱아리 하나로 사회보호법의 야만을 고발하고 있다. 정녕 이들의 절규를 외면하고자 하는가? (2003년 5월 31일 인권하루소식)

이주노동자들의 단식투쟁도 상황이 그러했다. 일제단속과 강제추방에 항의하며 단식을 하다가 외국인보호소로 끌려가고 보호소 안에서 단식을 이어가거나 단식으로 망가진 몸을 추스르지도 못한 상태에서 강제 출국된 사례가 숱하게 많다. 그들 또한 자기 언어로 단식투쟁에 대해 말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끌려가기 전에 집회 등에서 파편적으로 남긴 말이 남아있을 뿐이다. 분명 말을 했을 것이나 한국사회가 듣지 않거나 알아듣지 못한 말들이었을 것이다.

노동권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찾기 위해 당당하게 싸워왔다. … 농성 생활을 하고 있긴 하지만 노예처럼 사는 것보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게 더 좋다. … 이주노동자가 죽어나가도 한국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단식을 하다가 사람들 앞에서 죽어도 좋다. 그래서라도 한국과 세계에 이 상황을 알리고 싶다. (2004년 ‘이주노동자 단식투쟁 선포대회’에서 한 단식자의 말)

세 번째로 생각되는 것은 흔히 전형적으로 제시되는 이유일 것이다. 연대에 대한 호소 그리고 지배적 악에 대한 협력거부를 비폭력불복종으로 표시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단식투쟁 사례는 미국농업노동자조합을 만들었던 노동운동가 세자르 차베스의 말인 것 같다. 그는 생애에 걸친 노동운동 속에서 각각 25일, 24일, 36일에 걸친 여러 차례 단식투쟁을 했다.

Cesar Chavez(세자르 차베스)
단식은 우선은 가장 개인적인 것입니다. 나 자신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정화하는 것이 단식입니다. 또한 단식은 농업 노동자 운동에서 나와 활동하는 모든 사람들의 정화와 강화를 위한 절실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또한 단식은 도덕적으로 권위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이 옳고 정의인지를 알고 있으며 자신들이 할 수 있고 또 더 해야만 하는 일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남녀 활동가들에게 고행입니다. 마지막으로 단식은 캘리포니아 포도를 홍보하고 팔아서 이익을 얻는 대형매장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우리의 땅과 식량을 덮친 전염병과 살충제에 대해 공부해왔습니다. 악은 내가 그러리라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습니다. 그 악은 우리들 삶을 목 조르고 또한 우리 모두를 지탱하고 있는 생태 시스템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치명적인 위기에 대한 해결책을 권력자들의 오만 속에서 찾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의 연대 속에 있습니다. 나는 이 단식이 정의를 위한 다수의 간단한 행동을 준비하는 것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심장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향한 사람들, 우리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열망하는 남녀들이 수행하는 행동 말입니다. 함께라면 모든 일은 가능합니다.

세자르 차베스는 비폭력 투쟁에 대해서도 여러 말을 남겼다.

비폭력행동의 첫째 원칙은 모욕을 주는 모든 것에 대해 협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비폭력은 행동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비폭력이 굉장히 많은 조직화로 가는 길이란 걸 이해해야만 한다.
비폭력은 행동하지 않는 게 아니다. 비폭력은 토론이 아니고 겁쟁이나 나약자에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비폭력은 고된 활동이다. 비폭력은 기꺼이 희생하려는 것이고 승리하기 위한 인내이다.
폭력은 이미 다친 사람들을 해칠 뿐이다. 폭력은 억압자의 잔인성을 폭로하는 대신에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시켜준다.

마지막으로 내게 떠오르는 것은 절박함이다. 나와 경험을 같이하는 인권활동가들이 으뜸으로 공유하는 기억은 2000년 말과 2001년 초에 걸쳐 연말연시 혹한기에 했던 13일간의 노숙단식투쟁이다. 인권을 국정지표로 내건 정부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간을 졸이게 하더니, 국가보안법 폐지도 대표적 공약사항이었던 국가인권위원회 설치와 소위 개혁입법들도 물 건너가는 상황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회는 공전이고 여야는 상대방 핑계만 댔다. ‘지금’을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이 20년만의 폭설과 여론의 외면을 뚫고 단식투쟁을 강행하게 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을 울렸던 글이 인권활동가 유해정의 단식일기였다. 지금 대한문의 단식자들 심정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한다.

유해정(인권활동가)

단식 6일째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내 뺨이 눈물로 젖었다는 것 이외에는 … 사람들은 우리들이 그들의 마음을 울린다고 말했지만, 우리 역시 울고 있다.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이하고 투쟁하고 있지만 이렇게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퍼, 그들을 울릴 수밖에 없는 우리가 미워 우리는 매일 눈물을 머금고 하루를 시작하고 하루를 닫는다.

배고픔이 힘들지 않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믿어주긴 할까? 단식이 일주일째 접어들다보니 위장도 지쳤는지 때때로 꼬르륵 소리를 내긴 하지만 음식을 넣어달라는 투정은 날이 갈수록 줄고 있다. 그럼 힘든 것은? 물론 추위다. …

단식 7일째
살을 에는 듯한 날씨에 자고 일어나니 물이 다 얼어버렸다. 따스한 물이라도 마셔야 몸이 조금이나 풀릴 듯 한데 온기란 찾아볼 수 없다.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단식단 도우미들이 서둘러 버너를 켜보지만 부탄가스도 얼어버려 부탄가스를 켜는데만 10여분이 걸렸다.
… 왜 그렇게 고행을 자처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본래부터 우리의 조건이 그러했고 절박한 것이 있었다면 설명이 될까?
… 우리는 절박하다. 1월과 2월을 넘기면 언제 또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절박함과 처절함이 이곳에서의 하루를 버티게 하는 것이다. 추위에서 몸을 돌보거나 내일의 내 몸을 생각하게 하는 여유를 잃게 하는 것이다.

다만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투쟁에 나서는 것만이 지금 우리에겐 소중하게 느껴질 뿐이다.
… 오늘도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분들이 농성장을 찾았다. … 그들의 방문을 받으며 우리는 잠시나마 행복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들의 방문이 우리가 딱하고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국보법 투쟁과 국가인권위원회 설치투쟁으로 이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이 밤이 지나면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 내일은 제대로 일어날 수 있을지 하는 의구심으로 하루의 농성을 접으며 진흙 같은 하늘에 든 별을 보며 소원을 빌어본다. 내일 역시 모두들 일어설 수 있기를, 그리고 우리의 투쟁이 더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길.

지금 한국 사회는 정치의 작동에 허기져 있다. 정치가 없다. 삶의 경제가 아니라 숫자놀음의 경제만이 우리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이 조임에서 빠져나가려면 방향전환과 행동이 필요하다. 그걸 의논하고 길을 내는 것이 정치이다. 그런데 기존 정치세력은 경제를 핑계로 숨거나 도망 다니기만 한다. 인권의 가치는 공작 정치의 놀음에 팔아먹은 지 오래다. 그런 공백 때문에 거리의 정치가 더 절박하고 힘들어진다. 바람이 차가워졌다. 배고픔만이 아니라 이제 추위가 단식자들을 괴롭힐 것이다. 허기짐이 깊어간다. 그만큼 분노도 커간다는 것, 당신들의 정치의 공백과 횡포가 클수록 저항의 힘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허기진 뱃속에서 ‘꼬르륵 꼬르륵’ 신호가 온다. 몇 해 전 성명서의 문구처럼 ‘불통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절규를 언제까지 들어야할까?

기륭전자 노조

… 오늘도 신문에서는 비정규직 파견 노동을 확장하겠다는 소리만 넘쳐납니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하고, 냉장고가 커지고, 티브이가 평평해져 화려할수록 우리 일하는 사람들은 일회용 휴지보다 못한 처지로, 김치마저 먹지 못하는 서러운 세월을 살고 있습니다. … 우리는 30, 90일 넘는 단식투쟁을 통해 우리의 결의를 이미 보여준 바 있습니다. 우리 몸이 부숴지고, 많은 분들께 우려와 걱정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투쟁은 우리의 자율적 선택을 넘어 부득이한 선택입니다. … 우리의 투쟁은 가장 낮은 요구마저도 가장 높은 투쟁을 요구하는 대한민국의 불통과 절망에 맞선 것입니다. … 기륭투쟁의 핵심은 파견법에 있습니다. 기륭문제 해결은 현대판 노예제도 파견노동 간접고용 노동을 없애는 길의 첫 단추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길을 위하여 다시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에 돌입하는 것입니다.(2010년 제 3차 단식 투쟁에 돌입하며)

인권오름 제 363 호  [기사입력] 2013년 09월 25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59 호  [기사입력] 2013년 08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비엔나하면 저마다 떠올리는 것이 다를 것이다. 비엔나소시지와 비엔나커피, 음악의 도시에 어울릴 장중한 클래식 연주, 또 뭐가 있을까?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가 주연했던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주 무대였던 그 예쁜 도시가 있다.

인권 분야에서 떠올리는 비엔나는 단연 ‘비엔나 세계인권대회’(1993년 6월 14일-25일)이다. 뭐 그 흔해빠진 국제회의 중의 하나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인권에서 그 대회의 의의는 적지 않다. 세계적으로도 그렇지만 한국 사회 인권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상도 그렇다.

유엔을 만든 기본 목적 중 하나는 인권 존중이다. 그 걸 제대로 하고 있는지 점검하기 위해 1968년에 처음으로 테헤란에서 세계인권대회가 열렸다. 그로부터 무려 25년이 지나 1993년에 제2회 세계인권대회가 열리게 되었으니 이런 저런 준비로 들썩이는 건 당연했다. 처음 유엔이 만들어졌을 때 불과 50여 개 국에 불과하던 국제사회의 구성원들은 180여 개 국으로 늘어났으니 규모 자체가 달랐다. “결코 다시는”을 외쳐왔지만, 지구적인 극심한 빈부격차와 민족주의와 인종주의의 부상으로 ‘인종청소’ 등 대규모 인권침해는 여전했다. 사회주의권의 쇠퇴를 ‘사회적인’ 가치 자체의 포기나 자본주의의 승리로 볼 것이 아니라, 동서대립 속에서 갈등해온 자유권과 사회권의 이분법을 넘어 인권에 대한 총체적 접근으로 바라봐야 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권위주의 정권들이 많이 퇴진하기는 했지만 민주주의와 인권으로의 이행은 멀어보였다. 국제사회는 이런 격변 속에서 인권 감시와 보호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철저히 따져봐야 했다.

일단 이 회의는 정부들의 회의였기 때문에 각 나라의 인권문제를 둘러싼 이해관계와 철학의 차이로 인해 진통을 겪는 것은 당연했다. 인권의 보편성이나 유엔의 인권활동 자체를 문제 삼고자 하는 불순한 시도들도 있었고, 인권 침해의 폭로보다는 제도적인 대처방안 마련에 집중하자는 의도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지 의심도 많았다. 인권제도와 기구의 강화에 많은 정부들이 반대할 거란 걱정도 깊었다. 회의 이전에도 진행 중에도 지금의 국제인권제도를 오히려 후퇴시킬지 모르며 선언문 채택이 불가능할 것이란 어두운 전망이 나왔다. 마지막 날 밤늦게야 정부 대표들은 선언문 채택에 합의하게 됐다. 그것이 ‘비엔나 선언과 행동계획’이다.

‘비엔나 선언과 행동계획’은 정부 간에 첨예한 대립을 보였던 주제들을 일정정도 봉합하고 새로운 인권 제도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을 열었다. 대표적으로 인권의 보편성 논쟁에 대해서는 “모든 인권은 보편성, 불가분성, 상호의존성과 상호관련성을 갖는다.”(비엔나 선언과 행동계획 제2부 제3조)는 것으로 정리했다. 새로운 인권제도로 제안된 것은 아주 많았지만 인권최고대표와 국제형사재판소 설치 제안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 결과 유엔총회는 같은 해 12월 인권최고대표 창설 결의안을 채택했고, 수년 후 국제형사재판소도 설치됐다. 인권교육을 위한 계획과 전략 마련을 각국 정부에 촉구하면서 인권교육이 인권운동에서 새롭고 중요한 의제로 등장하게 됐다.

민간단체(NGOs)란 단어와 그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도 세계인권대회를 통해서였다. 인권단체들은 정부대표들의 공식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나란히 행사를 벌였다. 전 세계 1,500여개 단체들에서 온 2,000명 이상이 참여하여 토론회와 시위, 전시 등을 하고 중요 인권 사안에 대한 입장과 관심사를 표명했다. 이때부터 어디에서건 대다수 사람의 인권과 관련된 운명을 결정하는 정부간 또는 국제기구간 행사가 열리면 민간단체들이 병행 행사를 벌이는 것이 낯설지 않은 일이 됐다.

한국의 인권단체들은 ‘세계인권대회를 위한 민간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이 대회를 준비했다. 이 공대위는 그 후 여러 변화를 겪었지만 오늘날 인권단체들의 연대 네트워크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대회를 통해 한국의 인권운동가들은 성소수자 인권, 아동의 인권 같은 게 있다는 걸 처음 배웠다. 지금에야 인권운동의 대표의제들 중 하나지만 당시로선 성소수자란 단어조차 몰랐고, 아동에 대해서는 보호나 육성이란 말을 썼지 권리란 말을 쓸 줄 몰랐다. 아동의 인권에 대한 무지는 유엔아동권리협약에 대한 앎으로 바뀌었고, 그것은 훗날 학생인권조례 제정 등을 위한 실천 활동의 계기가 됐다.

한국만 독재정권의 인권침해에 시달린 게 아니라 숱한 나라의 구성원들이 억압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또 국제연대란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같이 하는’ 것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당시 인도네시아 식민지로 고통 받던 ‘동티모르’란 이름을 알고 돌아와 동티모르 독립과 인권을 위한 운동이 결성되기도 했고, 아르헨티나의 오월광장 어머니회를 초청해 독재정권이 저질렀던 국가 범죄에 대한 ‘불처벌’ 문제에 공동대응을 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이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표현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나라들의 공통요소란 걸 알고 국가보안법에 공동대응하는 아시아 지역 네트워크를 구성하기도 했다. ‘국가인권기구’란 게 있다는 걸 귀동냥하고 와서 한국에도 그런 기구를 설치하기 위한 모색을 하게 됐고 그 결과 진통 끝에 국가인권위원회가 태어나게 됐다.

당시 신참이고 여비도 없었던 나는 회의에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앞서 열거한 공대위의 여러 활동을 눈동냥 귀동냥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마찬가지로 비엔나의 경험을 공유하는 전 세계 시민사회단체들이 그 20주년을 기념하여 지난 6월 ‘비엔나+20 시민사회선언’을 채택했다. 이 선언의 전문에는 1993년 당시 충분히 다뤄지지 못했던 문제들, 지난 20년간 새롭게 부각된 인권침해요소들을 지적하고 있다. 가령 지구화와 극심한 빈부격차, 생태 위기, 국경 내에서의 전통적 국가 의무만이 아니라 국경을 넘나드는 인권침해에 대한 책임과 그 책임 주체들의 문제 등이다. 비엔나 대회 당시에도 유엔 등 국제기구의 조직과 운영의 민주화, 국제무역협상이 인권에 미치는 문제,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이 주요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침묵, 식민지 지배를 겪었거나 소수인종에 속하는 사람들의 인권에 대한 경시 등이 항의를 받았다. 가장 본질적인 비판은 “말로는 단 한 사람의 생명도 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선언에 그치지 않고 구속력 있고 실천적인 결정과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비엔나 이후 계속되는 국제인권체제의 과제이다.

‘비엔나+20 선언’의 채택자들은 선언의 끝부분에 제3차 세계인권대회의 개최를 제안하고 있다. 비엔나 이후 25주년을 맞는 2018년에 3차 대회를 갖자는 것이고, 이 선언에서 제기된 문제들에 대한 대응책을 같이 마련하자고 한다. 위기의 시대에 인권의 우선성을 재요구하며, 지구적인 인권 체제를 강화하고 새롭게 하는 과정으로 함께 가자고 한다. 이 선언은 그것에 대한 초대장이다.

비엔나+20 시민사회선언(2013년 6월)이 문서의 원문은 다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fian.org/fileadmin/media/publications/Vienna__20_CSO_Declaration.pdf

인권의 보호와 증진을 위한 이정표 문서인 <비엔나 선언과 행동계획>의 중요한 기여에 주목하며, ……
여러 면에서 비엔나 행동계획의 이행이 선언된 목표에는 여전히 못 미친다는 것을 또한 인정하며, ……
20년 전 발표된 비엔나 선언과 행동계획이 오늘날의 인권에 대한 도전을 충분히 다루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하며, ……
모든 지구 생태계의 기능과 지속가능성을 보장함에 있어, 따라서 자연과 지구의 권리를 지키고 미래 세대의 권리를 존중함에 있어 인권의 환경적이고 생태적인 차원을 인식하며, ……
지구화의 도전들을 다루기 위해 역외 의무를 강화할 중요성을 강조하며,
늘어가는 지구적 불평등과 극단적인 부가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의 실현 뿐 아니라 정치적 참여와 민주주의 권리에 야기하는 위협의 경종을 들으며, ……
국가들과 인민들 간의 연대와 우정의 원칙과 실천을 약속하며 비엔나+20 시민사회선언을 채택한다.

I. 인권의 최고성
1.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나며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 인권은 국가의 선언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국가에 의해 부여되는 것도 아니다. ……
2. 국가와 연속적인 정부들이 고려해야만 하는 여타의 모든 권리와 이익들보다 인권은 최우선적이다. 모든 인권에 대한 존중, 보호, 증진과 실현은 국가의 첫째 책임이다. ……
3. 국가의 최우선 목적은 인권을 지키고 보장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

II. 여성의 인권
7. 여성 인권과 성 평등의 실현은 차별로부터 자유롭게 살 권리와 더불어 전체 인권에 핵심적인 기초이다. 그러나 많은 국가들에서 점진적인 법적 개혁들은 일상에서의 여성의 인권향유를 보장하는데 충분하지 못했고, 어느 정도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구조와 그 과정들의 교차로 인해서 그러하다. 여성은 복합적인 정체성들로 인한 다양한 차별 형태에 맞닥뜨린다. 따라서 시민사회 회의는 여성이 법과 관행 둘 다에서 완전한 범주의 인권을 향유할 수 있도록 실체적인 평등 접근의 통합을 주장한다.
8. 여성과 소녀에 대한 폭력에는 무관용으로 대처돼야만 한다. ……
9. 경제적 지구화, 재정 위기, 공공 서비스의 사유화, 긴축 프로그램이 여성의 임금노동과 부불 노동에서의 다양한 책임과 부담을 증가시켰다. ……
10. 여성 이주자, 난민, 인신매매된 여성과 소녀들의 위태로운 상황은 긴급한 행동을 요구한다. 여성의 이주는 여성의 빈곤화 그리고 특히 차별받는 인종과 민족 집단의 여성을 정형화하는 국제적인 노동의 성적 분화와 연관돼있기 있기 때문에, 국가들은 경유국과 수용국에서 이주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보호를 보장할 뿐 아니라 문제의 근원을 다뤄야만 한다. ……
11. 여성의 성적 권리와 출산의 권리는 강화되고 충분히 실현돼야만 한다. 여성과 소녀들이 자신의 성과 출산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차별과 강제, 폭력 또는 법적처벌 없이, 자유롭고도 책임감 있게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인권을 국가는 증진, 보호, 실현해야만 한다. ……
12. 국가는 문화적, 전통적, 종교적 이데올로기와 신념이 여성 인권에 대한 침해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지 않도록 보장해야만 한다. ……

III. 역외 의무(Extraterritorial obligations)
15. 인권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국가들은 자기 의무를 자국의 국경 안에서만 또는 우선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인권의 의무를 영토적으로 한정하는 접근은 지난 20년 간 지구화의 맥락 속에서 훨씬 심각해진 인권보호에서의 상당한 격차를 초래했다. 그 일부 사례들은 초국적 기업의 책무에 대한 인권 규제의 부재 또는 부적절함, 개발‧금융 투자‧무역 정책들에 인권법이 적용 또는 오용되는 무력한 방식, 정부간 기구들과 그 회원국들의 작위와 부작위의 영향에 대한 인권 책무성의 부재, 해외에서의 인권 존중‧보호‧실현의 의무에 대한 정부들과 지역협력체제들의 인정의 결여이다. ……
18. 2011년 세계 모든 지역 출신의 국제법 전문가들이 채택한 <국가들의 역외 의무에 관한 마스트리흐트 원칙>은 기존의 국제법과 기준을 반영하고 있다. 이 원칙은 경제, 사회, 문화적 권리를 특히 강조하며 국가들의 역외 의무를 명확히 하고 있다. ……

IV. 긴축, 거시경제 정책, 금융 규제
19. 지구적 금융경제위기의 역사는 보여줬다. 정부가 사회적 채무보다 금융 채무에 봉사하기를 선택할 때, 금융규제가 인민이 아니라 금융의 이익에 있을 때,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반면 금융투기에서 이익을 얻은 사람들은 불처벌을 누린다는 것이다. ……
20. 경제 정책이 국가 권력의 행사란 걸 인정한다면, 인권의 규범과 기준이 국가와 지구적 경제 정책들을 구상, 실현, 모니터하는 모든 단계를 지도해야만 한다. 투명성, 정보에 대한 접근과 참여에 대한 인민의 권리는 경제 정책이 형성되고 결정이 이뤄지고 정책이 실현되는 방식에 담겨야만 한다. ……
21. 인권 중심적인 재정 정책은 적자가 강제하는 긴축 조치에 대해 강력한 대안을 제시한다. 경기 순환에 순응하기 보다는 역행하는 거시경제 정책(사전적으로나 사후적으로나 인권 영향 평가의 대상이 되는)은 변화하는 경제 조건 속에서 불균형적인 인권의 후퇴를 막는 최상의 방어책이었다. ……

XVI. 노동자의 권리
80. 노동자들은 국제노동기구의 핵심 조약들에 포함된 기본적 권리에 대한 접근을 부인 당한다. 특히 존엄한 노동과 직업 안전성에 대한 권리, 결사의 자유와 단체협상의 권리가 그렇다. 비정규고용파견회사들이 전세계적으로 급증했고 고용주들은 자신들의 법적 의무를 회피하고 직접적이고 지속적인 고용을 대체할 목적으로 파견회사들을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이런 불안정 노동은 존엄한 노동을 위해 권리를 행사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며, 단체협약을 할 노동자의 능력을 훼손하고 있다.
81. 정부들은 국내 노동자건 이주 노동자건 간에, 노동자 권리 보호를 보장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들을 취해야만 한다. ……

XVIII. 국내실향민
88. 국내 실향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강제 퇴거, 기후 변화, 환경적 요인, 토지 몰수, 시장 세력, 토지와 자산 투기, 개발 정책과 프로젝트, 토지 개혁, 도시화, 경제적 박탈, 처형, 다양한 철거, 분쟁, 점령과 전쟁 등에 기인한다. ……
89. 이미 20년 전, 국가들은 강제 퇴거를 총체적인 인권 침해, 특히 적절한 주거에 대한 인권에 대한 침해로 인정했다. ……

XIX. 아동의 권리
91. 세계인구의 1/4을 구성하고 있고, 유엔아동권리협약이 최고로 비준된 국제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아동은 여전히 권리 보유자로 존중되지 못하고 있다. ……
92. 아동 권리의 보호와 어린 나이에 근거한 차별의 금지는 입법, 정책 수립, 이행과 모니터를 가로지르는 관심사로 수립돼야만 한다. ……

XX. 노인의 권리
93. 노령화 인구는 21세기 가장 중대한 지구적 경향이며 사회에서 노인 부문은 인권침해에 더욱 취약해지고 있다. 노인의 권리를 기존의 인권 구조 속에서 주류화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있지만, 기존의 메커니즘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새로운 국제 조약, 유엔 노인권리협약에 대한 요구가 있다. 시민사회와 특히 노령화 분야에서 활동하는 국제 NGOs는 이런 요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이것은 또한 유엔총회결의안 67/139(2012년 12월)의 지지를 받았다.

XXI. 성적 지향성
94. 인권은 차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발전시킬 것을 포함하여 개인의 존엄성에 근거한다. 이것에는 자신의 성적 정체성과 젠더 정체성을 발전시킬 권리와 가족을 구성할 권리가 포함된다. 이 분야에서의 다수의 선호가 개인의 선택을 간섭해서는 안된다. 국가들은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인터섹스와 퀴어의 권리를 존중, 보호, 실현할 것 그리고 정체성의 자유로운 표현과 행사를 더욱 발전시키는 사회들을 증진할 것을 요구받는다. 특히 국가들은 성적 지향성을 이유로 사람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독단적인 근본주의로부터 이런 자유를 보호해야만 한다. 국가들은 법의 보호아래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성적 지향성과 젠더 정체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고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만 한다.

XXII. 장애인
95. 장애인의 권리는 국제인권체제 속에서 광범위한 범주의 규범으로 인정돼있다. 하지만 많은 장애인들은 계속 분리되고 배제되고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상태이다. 차별, 불의, 사회적 불평등이 수백만 장애인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장애인은 재활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못하고, 실업상태이며, 구직 노력은 헛되며, 교육 체제의 적절한 관심을 받지 못하며, 장애인의 역량 발전을 방해하는 엄청난 장벽들에 직면해 있다. 왜냐면 장애인은 보편적 접근성이란 기본적 기준에 맞지 않는 도시 계획과 건축, 운송과 통신에서 야기되는 제한에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장애인 권리협약이 선택의정서와 함께 동의됐다. …… 국가들은 평등의 조건 속에서 인권을 증진, 보호, 실현하는 시스템을 장애인에게 보장하려는 노력을 최대화해야 한다. ……

XXIII. 인권 교육
97. 모든 여성, 남성, 젊은이와 아동은 자신들의 삶의 운명을 정하는 결정들에 동등한 자로서 참여하고 필요한 경제적 사회적 전환을 요구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와 전략으로서 인권의 구조를 배우고 알며 소유하고 그것에 의해 인도돼야만 한다. 인민은 자선으로부터 존엄성으로, 자신들의 공동체에서 존중과 신뢰의 관계로 이동해야만 한다. ……

인권오름 제 359 호  [기사입력] 2013년 08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55 호  [기사입력] 2013년 07월 2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요즘 늘 그렇듯이, 그날도 후덥지근하다 못해 숨이 턱턱 막혔다. 울산으로 ‘희망버스’가 가는 날이었다. ‘오래도 참 많은 사람을 불법으로 써왔으니 이제 고만 정규직으로 전환하라’고, 대법원 판결 좀 이행하라고, 이제 그만 좀 괴롭히라고, 그렇게 단순 정당한 요구를 하려고 철탑위에 사람이 올랐다. 그들의 목이 조이고 있었다. 회장은 나 몰라라 하고, 동료 노동자는 자살하고, 날씨는 겨울에서 한여름으로 바뀌고, 언론은 침묵이고 인정은 차가운 듯하니, 그 노동자들의 숨이 얼마나 죄어들까? 그런 염려에 전국에서 주말을 반납하고 무더위에 시달릴 걸 각오하고 버스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주말에는 꼼짝없이 식당 알바를 해야 하는 나는 틈틈이 인터넷으로 소식을 확인하면서 숨을 골라야 했다. 찜통 같은 주방 안에서 이렇게 땀 흘리다간 탈진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쯤, 들려온 소식은 공포였다. 소화기와 최루액이 뿜어지고 암흑 속에서 사람들이 다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만있어도 숨이 막힐 공기 속에 그런 걸 뿜어댄다니, 이것저것 쏘고 던져 댄다니, 구급차가 몇 번이나 등장했다니, 사람들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속의 열이 탈진을 부를 지경이었다.

세상 일이란 게 철탑위에까지 오른 사람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돌아봤다면 벌어질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그랬다면 철탑 위에 올라갈 일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철탑 위 사람들이 제발 살아 내려왔으면 하는 심정으로 달려간 사람들을 죽창과 쇠파이프를 든 폭도란다. 굳게 닫힌 회사 문을 열려고 시도한 일, 회사가 동원한 직원과 용역깡패, 관망과 방조적 폭력과 적극적 폭력을 배합해 구사한 경찰과 맞장을 뜬 일이 ‘폭력’이라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그 난리의 주범은 언제나 그렇듯이 주류 언론의 입이다.

희망버스 일부 참가자의 행동이 거슬렸다고 치자. 사실대로 보도해라. 하지만 같은 자리에 있었던 자들(현대차 직원, 용역, 경찰)의 행위, 그들을 동원하고 사주한 기업 책임자의 행위, 그 모든 일을 있게 한 배경도 같이 보도해라. 적어도 사실 보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혼자서 과장 억측 소설 쓰고, 인쇄하고 방송해서 유통시키고, 판결하고 사법적 처단까지 하는 재주를 부리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 아니라면 말이다.

노동자들을 자살로 철탑으로 몰아댄 것은 그들 언론의 침묵이었다. 해야 될 보도를 안 하는 행태를 보면, 꼭 휴일이나 명절 다음날 시험날짜를 잡아놓던 학교가 떠오른다. 학생은 휴일이나 가족과 함께 해야 할 명절에도 공부만 하라고 일부러 그렇게 날짜를 잡았다고 훈계하던 교사가 떠오른다. 탐사보도까지는 못하더라도 억울하다고 부당하다고 공공연히 외치는 목소리마저 제거해버리는 행태가 그런 심보가 아닐 수 없다. 기본적 인권이니 하는 것 찾을 생각 말고 부당하다 여기지 말고 입 다물고 일만 하라는 훈계가 언론의 침묵에 담겨 있다.

강요하고 조장한 침묵 속에서도 막지 못한 사건이 터져 나오면 언론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다. 과장, 왜곡, 날조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치를 바꿔치기 한다. ‘그동안 어디 계셨어요?’ 고통 속에서 찾고 헤매던 법의 정신과 공정함을 언론이 갑자기 들먹거린다. 그런데 표적이 다르다. 권리의 회복을 위해 찾아 헤매던 법이 저쪽 손에 들려져 있다. 법의 힘은 강제력이다. 약한 자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강제력을 동원할 수 있는 힘 있는 자의 편에서 동원된 법이 달려온다. 채증하라! 체포하라! 벌금 물려라! 손배가압류 해라….

반면 힘 있는 자들과 그 기관에 대해서는 엄호의 수준이 장난이 아니다. 유엔의 표현의 자유특별보고관이 방한했을 때 미행하다가 걸렸던 그 기관, 심지어 시민의 기본권 중의 기본권인 참정권을 유린한 국정원에 대해서 싸고돈다. 그런 권력의 범죄를 보도하려고 애쓴 동료 언론인들을 내모는 데 앞장선다. 촛불집회나 시국선언 얘기는 그야말로 ‘풍문으로 들었소’ 시늉을 한다. 최고 권력자에 대한 비판과 질문은커녕 찬양고무에 여념이 없다. 이쯤 되면, 주류 언론의 행태는 단순히 권력의 충견이나 공범 수준이 아니라 주범의 수준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빈트후크 선언>이다. 앞서 지적한 주류 언론의 추태를 ‘언론 자유’의 이름으로 고발하고 싶어 골랐다. 이 선언이 보호하고자 하는 언론의 책임과 그 때문에 겪게 되는 수난이 그들 주류언론의 것이었던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독립적’이고 ‘다원적’인 언론을 위해 노력한 일이 있는지 압력에 ‘저항’한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이 선언이 보호하고 칭송하는 것은 그들 주류언론이 솎아내고 쫓아낸 언론인들의 몫이다. YTN의 노종면, MBC의 최승호 피디 등이 쫓겨날 때, 그들이 무엇을 침묵으로부터 해방시키려 했는지 알면서 당신들 주류 언론은 무엇을 했는가? 그 해직 언론인들이 이 더위에 3주 동안 전국을 걸어서 당신들이 외면한 현장을 찾아 취재한 것을 아는지, 당신들이 취재증 차고도 첨단 장비로 무장하고도 못하고 안하던 취재와 보도를 문전박대와 내쫓김을 당하면서도 해내고 있는 뉴스타파를 곁눈질이라도 하는지, 쌍용과 현대차 노동자들, 삼성전자 백혈병 피해자,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 밀양 송전탑 반대 주민 등 해직 언론인들이 만난 현장과 사람들을 당신들은 한번이라도 들여다볼 생각을 했는지, 그러고도 펜을 놀리고 마이크를 잡는 게 괜찮은지 정말 묻고 싶다. 그리고 ‘밥은 먹고 다니는지’ 묻고 싶다.

빈트후크 선언은 1991년에 아프리카의 언론인들이 나미비아의 빈트후크에 모여 확인한 언론의 자유 원칙이다. 언론인에 대한 위협을 염려하며 언론의 독립성과 다원성을 증진하기 위해 유네스코가 세미나를 열었고, 그 결과로 채택한 것이다. 이 선언이 채택된 5월 3일을 기념하여 유엔은 ‘세계 언론 자유의 날’(World Press Freedom Day)로 선포했다. 왜냐면 이 문서는 그와 같은 조류의 문서 중 첫 번째의 것으로, 중앙아시아의 알마아타선언, 중동의 사나나 선언, 라틴아메리카의 산티아고 선언 등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험한 항해에는 언론이 늘 동반한다. 빈트후크 선언 채택 10주년을 맞았을 때, 유엔은 정치적 폭력과 권위주의를 맞아 언론의 자유가 위태롭다는 성명을 냈다. 2011년에는 20주년을 맞아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란 주제 하에 언론인들이 또 한 번 빈트후크 선언을 실천하기 위한 요구사항들을 발표했다. 또한 같은 해, 나비 필레이(Navi Pillay) 유엔인권최고대표는 ‘세계 언론 자유의 날’을 기념하여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아랍의 봄’을 비롯하여 정치적 봉기에서 미디어는 중대한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무거운 대가를 치른다. ……
인민의 권리가 실현되지 않고 인민의 목소리가 침묵될 때, 어떤 지점에 이르면 인민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떨쳐 일어설 수밖에 없다. 인권은 국가에 의해 박해‧처벌받아서는 안 되는 것이며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가 그러하다.
…… 언론은 사건들을 알리기 위해 지속적이고 용기 있는 노력 속에서 살해, 고문, 폭력, 모욕, 구금, 실종, 추방, 위협, 취재와 보도 방해 등의 대가를 치러왔다. 그런 언론인들의 용기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려는 결단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 일을 함으로써 언론인들은 나머지 우리들이 인권의 실현을 감시하고 지킬 수 있도록 해준다.
…… 빈트후크 선언이 지적한 문제는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도처의 문제이다. … 표현의 자유는 미디어를 위해서는 열린 공간이 아니라 전체 사회를 위한 것이다.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은 인민들이 공적 영역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역량을 강화한다. 정부에게 불리한 정보를 억압하고 배포를 방해하더라도 용감한 사람들은 늘 길을 찾아왔다.”

해직언론인들은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대가를 치르며 싸워왔다. 희망버스에 대한 왜곡보도 앞에서 새삼 그분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물대포의 조준사격을 받으면서도 카메라가 망가지는데도 현장에서 취재를 멈추지 않은 독립 언론인들에게 고맙고 또 고맙다. 당신들이야말로 길을 만들어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건을 만든 희망버스 승객들에게 머리를 조아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남에 대한 걱정은 집어치우고 네 살길만 찾으라는 권력과 사이비 언론의 훈계와 보복에 아랑곳 않고 동행해준 당신들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당신들 때문에 계속 인권을 말할 수 있어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빈트후크 선언

빈트후크 선언(1991)

나미비아 빈트후크에서 1991년 4월 29일부터 5월 3일까지 열린, 독립적이고 다원적인 아프리카 언론을 증진하기 위한 유엔/유네스코 세미나에 참여한 우리들은
세계인권선언을 기억하며,
정보의 자유는 기본적 인권이라 한 유엔총회 결의안 59(1)(1946년 12월 14일)과 인류애에 헌신하는 정보에 관한 유엔총회 결의안 45/76(1990년 12월 11일)을 기억하며,
……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세계인권선언 제19조에 부합되는, 독립적이며 다원적이며 자유로운 언론의 설립과 유지와 증진은 한 국가에서 민주주의의 발전과 유지 그리고 경제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2. 독립적인 언론이란 의미는 정부나 정치적 또는 경제적인 통제로부터 독립적이며, 신문과 잡지와 정기간행물의 생산과 배포에 필수적인 물질 및 기반에 대한 통제로부터 독립적인 언론이란 것이다.

3. 다원적인 언론이란 의미는 어떤 종류가 됐건 독점의 폐지, 그리고 사회 속의 최대 가능한 범주의 의견을 반영하는 신문과 잡지와 정기간행물이 가능한 최대수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
5. 민주주의, 그리고 정보와 표현의 자유를 향한 세계적인 경향은 인류의 열망 실현에 대한 근본적인 기여이다.

6. 오늘날 아프리카에선, 일부 국가들의 긍정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가들에서 언론인, 편집인, 발행인들이 억압의 희생자이다. 그들은 살해되고 구금되고 검열당하며, 신문발행의 제한, 발행기회를 제한하는 허가제 시스템, 언론인의 자유로운 이동을 방해하는 비자 제한, 뉴스와 정보의 교환 제한, 국가 안에서와 국경을 넘는 신문 유통의 제한 등의 경제적‧정치적 압력으로 압박당하고 있다. 일부 국가들에서는 일당 국가 통제가 정보 전체를 통제하고 있다.

7. 오늘날, 적어도 17명의 언론인, 편집인 또는 발행인들이 아프리카의 감옥에 있으며 48명의 아프리카 언론인들이 1969년과 1990년 사이에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다 살해당했다.
……

빈트후크 선언(2011)

아프리카 연합의 모든 회원국 정부들에게 촉구한다:
세계인권선언 제19조에 대한 정부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이행하라.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 정보에 대한 접근에 대한 정부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이행하라.
다양하고, 다원적이며, 편집에서 정치적‧경제적 개입으로부터 독립적인 미디어 환경을 보장하라.
표현의 자유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권리를 포함하여 시민적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면서 인터넷과 디지털 미디어의 잠재성을 이용하라.
……
자유로운 표현에 대해 불법적이고 남용하는 제한을 가하는 일을 삼가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어떠한 제한도 정당성이 있어야 하고, 엄격하게 (그 목적에) 비례해야만 한다(협소하게 정의해서,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수준으로만, 세계인권선언 19조에 반하지 않는 조건에서)는 것을 유념하라. 제한은 일례로, 정치적‧상업적 또는 여타의 외부적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이행돼야만 하고, 자의적이지 않고 차별적이지 않게 이행돼야만 하며, 제한의 남용에 대해서는 독립적인 법원에 대한 접근을 포함하여 독립적이고 투명한 항의 장치의 제공을 보장하는 것으로 보완돼야만 한다.
……
정부가 보유한 정보에 대한 접근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하라. 그리고 정부 활동의 투명성을 보장하라.
언론인, 블로거,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 플랫폼에서 표현하는 모든 사람들의 안전, 이들을 위협, 협박, 신체적 공격, 생명 위협의 시도 등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신속하고 효과적인 행동을 취하라.
저널리즘의 전문적인 실행의 요건으로서 허가제를 삼가라.
……

아프리카의 언론인, 언론사, 언론인 연합, 광범위한 언론계에 촉구한다:

1. 사회적 네트워크와 여타의 새롭게 출현하는 미디어 형태를 통해 정보가 유포될 때 전문적인 언론인의 가치와 실천이 적용돼야만 한다는 것을 인정하라.

2. 저널리즘의 높은 기준과 미디어 종사자와 신생 미디어 사용자들의 윤리적 행위를 장려하며, 뉴스 미디어는 공적 서비스임에 유념하라.

3. 특히 가난한 농촌 여성 등 소외된 집단에 대한 정보 접근을 증진하라.
……
6. 뉴스 취재와 모든 미디어 형태에서 특히 여성과 청소년의 목소리 등 목소리의 다원성을 증진하라.
……
8. 결사의 자유와 여타의 보편적 권리의 원칙을 존중하라. 언론인과 여타 미디어 종사자들의 안전과 작업 조건을 증진하라. 충분한 전문적인 훈련과 안전 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라.
……
10. 인터넷과 신생 미디어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고 부인하며 제한하는 국가 및 기타 행위자들의 압력에 저항하라. ……

인권오름 제 355 호  [기사입력] 2013년 07월 2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51 호  [기사입력] 2013년 06월 2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국정원의 선거 유린과 국정조사, NLL(북방한계선) 논란이 얽히고설켜 돌아가고 있다. 국가최고정보기관이 직원들에게 아이디를 돌려가며 댓글을 달게 했단 것도 놀라운데 제 기관의 명예를 위한답시고 할 말, 안할 말 죄다 뱉어내고 있으니 민주 국가의 기본에 분탕질이 아닐 수 없다. 위기를 모면하려는 쇼가 아니라 제대로 된 국정조사 해야 하는 것 당연하다. 그런데 그보다 오래됐고 절박성에 모자람 없는 쌍용차 국정조사와 24시간 인권에 대한 전쟁이 선포되고 있는 대한문의 상황은 어찌하겠단 말이 없다.

‘노동자’란 단어조차 껄끄럽게 여겨지는 까칠한 사회라서, 노동자의 요구는 ‘투박’하고 ‘과격’한 것으로 외면된다. 그런데 ‘세련’되고 ‘온건’한 것들이 지배적인데 왜 그 속엔 곪디 곪은 문제들의 처방전이 들어있지 않은 것일까? 부당하고 조작가능성이 짙은 ‘정리해고’에 ‘노동유연화’니 ‘구조조정’이니 ‘경영효율성’같은 말을 쓰면 ‘해고는 살인’이란 고통이 완화되는가? 자본가와 노동자란 관계는 껄끄럽지만 이 사회에서 대부분이 맺어야 하는 기본관계다. 이 관계조차 인정하길 거부하면서 ‘너는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다’, ‘내가 널 고용한 게 아니고 단순 사용자일 뿐’이라 손사래 치는 댁들을 그럼 ‘가짜 자본가’라고 불러야 할까?

민주주의는 평등한 관계의 시민을 전제로 하고, 그 시민들 대부분은 누군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먹고사는 노동자이다. 이들 노동자가 시민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건 시민의 평등성에 대단한 문제가 생겼다는 적신호이고, 노동자란 단어에 경기를 일으킨다는 것은 노동자란 천대받는 신분의 따로 존재를 용인한다는 의미다. 민주주의를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 지붕만 바라보는 곳에 놓고 관망하며 내가 일하며 사람과 직접 부딪치는 삶의 무대를 외면한다는 것이다. 가끔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설 수도 있겠지만 광장을 벗어나는 순간 삶의 무대엔 불빛이 없고 캄캄하다.

그 어둠 속에서 최근 서울구치소 수인번호 111번으로 불리게 된 노동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김정우, 쌍용자동차 노조의 지부장이다.

구속 전 마지막으로 본 그의 표정은 소풍 나온 아이 같았다. 시청광장에서 쌍용차 해고자들이 만든 자동차를 선보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말없이 하이파이브를 청해왔고 나도 말없이 힘껏 손바닥을 마주쳐주었다. 세상에 하나 뿐인 차를 배경으로 무릎을 꼬고 머리를 돌려 젖히는 등 노동자들이 한껏 자세를 취했다. ‘우와! 정말 자동차 모델 같다. 광고 많이 봤나봐?’ 터지는 웃음 속에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가 노래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아라 …….

그와 동료들이 모처럼 웃어본 지 불과 이틀 만이었다. 노동자 잡으려고 부러 날 잡았는지, 6.10민주항쟁 26주년을 맞는 날 아침이었다.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도 그 건너편 재능 농성장도 박살이 났다. 이미 여러 차례 철거를 겪어 천막도 없고 길바닥에 몸뚱어리로 버티고 있을 뿐인데 그마저도 밀어버렸다. “쓰레기 치우라”는 폭언과 함께 사람의 몸으로 만든 분향소가 짓이겨졌고 저항하는 이들은 사지 들려 끌려갔다.

숱한 탄원과 비판에도 아랑곳없이 김정우에게는 덜컥 구속영장이, 원세훈에게는 딸랑 불구속이 떨어졌다. 김정우는 부당한 정리해고의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비명에 간 24명의 죽음을 추모하는 노동자이고, 원세훈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해괴한 일들을 벌인 전직 국가최고정보기관의 수장이다. 이 사건이나 그 책임자는 안개에 싸인 국정조사 전망 속에서 ‘아직까지는’ 무사 항해 중이고, 배에 구멍 났다 소리치며 제 몸으로 물 퍼내던 이들은 패대기쳐졌다.

김정우에게 구속영장이 떨어졌다는 그 밤은 참 무더웠다. 겉은 끈적거리고 속도 답답하여 창문을 열고 자리라 맘먹었다. 그런데 웬걸, 발자국 소리·말다툼 소리·경적 소리…. 새벽이 되도록 도시의 소음은 잠들지 몰랐다.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어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걸어 잠그다 멈칫했다. “악취와 소음 속 비닐움막생활 참 처참하지. 그래도 포기 못해 우리가 이길 거니까”라던 김정우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가 이기려고 하는 구호는 “함께 살자”이고 그것을 위해 그는 41일을 굶었고, 그의 동료들은 171일을 송전탑 위에서 보냈다. 쌍용차 해고자들뿐 아니라 재능, 현대차 비정규직 등 길바닥 잠을 자온 사람들이 숱하다. 지금도 경찰의 괴롭힘 속에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거리에서 밤을 보낼 사람들, 도시의 소음과 경찰 폭력은 잠도 꿈도 앗아갔을 터, 낮에 본 그들의 퉁퉁 부은 얼굴이 떠올랐다. 신이 될 수 있다면,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과 잠의 신을 꿈꿀 것이다. 잠까지 빼앗는 지금의 정치는 참 무능하고 썩었다.

그렇게 한밤중에 서성이는 데 한 글귀가 눈에 꽂혔다.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인권변호사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조영래 변호사의 유고집 제목이었다. 그가 쓴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아주 나중에야 『전태일 평전』으로 알려진)이 워낙 강렬한 것이어서, 다른 글을 유심히 본 적은 없었다. “박해를 각오하고 발언할 수 있는 국민은 민주주의를 하기에 필요·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는 것”이라며 “요사이 얼마 동안의 우울한 일들에만 사로잡혀 지나치게 낙담할 것은 없다. 원래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 아닌가.”라고 토닥여준다. 하나 같이 요즘 우리 심정을 정말 잘 알고 쓴 글 같았다. 뒤적이다 보니 변론문과 칼럼만 있는 게 아니라 시도 있었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바로 이 시, “노동자의 불꽃”이다. ‘노동자의 어머니’인 이소선 어머니마저 잡혀가고, 노동자들의 처지가 몰릴 대로 몰린 지경에서 쓴 시라고 한다. 제목이나 문투나 오늘의 세련되고 온건한 기준으로 보면 참 투박하고 과격하다. 하지만 수 십 년의 시차가 난다는 게 별로 실감나지 않는다. 이 시의 구절마다에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그대로 대입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청년들은 시급 5천원도 못 되는 시간제 일자리는 나쁜 일자리라 외치다 끌려가고, 소상인들은 포식의 끝을 모르는 재벌 때문에 골목귀퉁이에서 신음하고, 국정원 선거개입 논란을 보도조차 안하는 언론에 맞서 쫓겨난 언론인들이 동분서주하고, 강정부터 밀양까지 소위 국책사업에 절규하는데, 4대강 사업이나 부정축재와 세금도피자들의 뒤치다꺼리까지 우리가 떠안아야 하고 책임져야 할 정치는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의 침묵도 그렇거니와 불난집을 앞에 놓고 장판 밑에 숨겨놓은 제 돈 걱정만 하는듯한 야당의 태도 또한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 시에서 느낀 현재성은 고통 받고 있는 현실이 비슷해서만은 아니다. 그 현실을 묵인하지도 침묵하지도 않고 계속 맞서는 삶이 있다는 것이다. 이 시의 제목이 노동자의 ‘절망’이 아니라 노동자의 ‘불꽃’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인식도 실천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 식으로 노동자 전태일과 지식인 조영래의 구분 없이, 그리고 또 다른 구분을 앞세우지 않고도 “악에 대한 공통인식”으로 우린 만날 수 있다. 노동자들의 투박한 구호가 불편하더라도 그들이 내미는 하이파이브에 손 마주쳐 줄 박수의 내용은 다양할 수 있다.

숱한 시민들의 후원 속에 쌍용차 해고자들이 차를 만든 과정을 돌이켜본다. 우리가 해야 할 정치를 그 과정에 비춰 상상해본다. 우리는 그냥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동료와 관계가 필요한 사람들이란 것, 삶의 무대에 불을 밝히기 위해 서로 대화해야하는 존재라는 것, 그런 관계에 대한 인정이 우리가 할 정치의 시작이란 걸 말이다. 일을 위해 가지런히 도구들을 정리해놓고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작업을 했다. 그렇게 차를 만드는 과정처럼 지금 수많은 현장에서 곳곳의 거리에서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민주주의의 멈춘 시동을 걸려고 맨손으로 힘 모아 미는 사람들이 있다. 국회도 언론도 법원도 대통령도 다 뛰어나와 같이 밀던가, 아니면 열쇠를 내줘야 한다. 우리의 삶에 시동을 걸게.

그러니 국정원 국정조사에 합의한 여야 정치인들은 노동자 시민들의 질문의 범위를 왜곡․축소하거나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왜곡과 축소는 질문에 아니, 대답한 것보다 못하며 진실의 공개를 가로막는다는 것, 침묵은 문제해결의 의지가 없는 오만임을 우린 너무 잘 알고 있다. 특히 오래전에 약속한 쌍용차 국정조사를 빼먹고 갈 생각 마시라.

이 시의 출처는 다음과 같고, 부분 발췌했다. 조영래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 엮음, 『조영래변호사 남긴 글 모음,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창작과비평사, 1991, 286-301쪽

노동자의 불꽃노동자의 불꽃
- 아아, 전태일



처절한 불길을 보라
저기서 노동자의
아픔이 탄다
저기서 노동자의 오랜
억압과 죽음이 탄다
아아, 노예의 호적은 불살라지고
끝없는 망설임도 마침내 끊겨버린
저기서
노동자의 의지가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의 자유가
불타오른다
……
하늘 땅 열리실 제 삼라만상 생겨나니
모든 생명 귀한 중에 사람이 으뜸이라
한덩어리 지구 위에 한핏줄 타고나니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네
사람이 사람을 학대할 권리 없고
사람이 사람을 억누를 수 절대 없어
이를 두고 예로부터 자유‧평등 일컬었네
땀흘려 일하는 자 일한 몫을 거두고
뜻밖에 불행한 자 모두 도와 함께 사니
인류의 오랜 꿈인 정의‧사랑 참뜻일세

어둡다, 이 땅 위의 오늘 현실 바라보라
민주주의 파괴되니 약자 인권 짓밟히고
자유‧평등‧정의‧사랑 공염불로 타락하네
천하는 천하의 것 1인의 것 아니건만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제멋대로 결정하니
법률도 제멋대로 재판도 제멋대로
언론자유 탄압하고 학원 교회 억누르며
약한 자를 대변하면 반공법에 묶어가고
강자 횡포 비판하면 긴급조치 묶어가니
진리는 철창 속에 거짓은 옥좌 위에
거짓이 진리보고 “뉘우치라” 조롱하고
총칼이 양심에게 침묵을 강요하니
온세상이 캄캄한 어둠 속에 휩싸이고
어용야당 어용노조 어용신문 어용방송
어용종교 어용예술 어용학자 어용교수
제세상 만난 듯이 온갖 잡귀 판을 치며
이 속에서 약육강식 온갖 비극 일어난다

권력은 돈을 낳고 돈은 다시 권력 낳아
힘센 자와 살찐 자가 부패 속에 총화단결
역대정권 경제정책 한마디로 표현하면
서민대중 고혈 빠는 특권경제정책이라
……
특혜받는 대재벌들 반사회적 거동 보소
신문에 이름 내는 성금낼 땐 후하면서
노동자 임금에는 어찌 그리 박하던가
……
수단방법 안 가리고 부당폭리 추구하니
아이스크림 화장품에 호텔까지 손을 뻗쳐
중소기업 목조르고 자원낭비 조장하기
은행이란 은행돈은 모조리 제 차지라
싼 이자로 융자받아 비싼 이자 사채놀이
국내시장 독점하여 초과이윤 거저 먹기
중소기업 해외시장 덤핑으로 가로채기
부동산에 투자하여 집값 땅값 올려놓기
하청기업 농락하여 도산시켜 잡아먹기
수입하며 외화도피 수출하며 외화도피
밤낮으로 생각느니 탈세와 외화도피
……
형제자매 노동자여 억울하다 우리 실정
멸시와 핍박 아래 기계취급 당해가며
노예처럼 혹사받고 병들어가면서도
경제정책 모든 실패 우리에게만 전가되니
수출상품 경쟁력도 저임금 바탕 위에
물가인상 억제책도 저임금 바탕 위에
불경기 땐 대량해고 실업자 신세 되고
호경기 땐 철야작업 삭신이 병이 드네
……
민중의 몽둥이 경찰권력 거동 보소
노동자들 몇이 모여 수군수군했다 하면
사냥개 냄새맡듯 정보형사 떠다니고
임금인상 요구하며 농성 한번 했다 하면
개밥에 보리알 튀듯 기동경찰 끼여드네
어느샌가 나타나는 사복 입은 형사님네
밥 먹고 사람 패는 연습만 하였던지
유도 당수 태권도로 노동자를 후려치니
가뜩이나 중노동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이
골수에 병이 들어 폐인이 되어가네
……
노동자를 위한 법률 그 얼마나 된다기에
그나마 단 하나도 지키지 않으면서
노동자 잡는 법은 수도 없이 만들고서
꼬투리만 있다 하면 제까닥 묶어가니
이 나라의 법질서는 누굴 위해 있는 건가
돈 없고 배경 없는 우리네 노동자들
기업주 하나만도 상대하기 힘겨운데
국민의 혈세로 유지되는 국가권력
기업주들 편들어서 노동운동 억누르니
이 정권은 과연 누굴 위한 정권인가
……
지렁이도 밟히면 꿈틀하기 마련이고
참새가 죽을 때도 짹소리는 하고 가니
하물며 만물영장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토록 짓밟히고 어찌 조용할까보냐
70년도 11월에 평화시장 앞길에서
노동자의 불꽃 하나 폭탄처럼 튀어나와
“노동자도 사람이다. 기계취급 하지 말라”
땅속에 울부짓는 전태일의 핏소리가
억눌린 억만 가슴 뒤흔들고 울려퍼져
노동자의 생존투쟁 곳곳에서 일어나니
이 위대한 역사흐름 그 무엇이 막을소냐
……
우리를 거부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자!
우리 생존 거부하는 저임금을 거부하자!
젊디젊은 우리 목숨 죽음으로 몰아넣는
장시간 중노동과 살인환경 거부하자!
가진 자의 오만과 횡포를 거부하고
노예사상 강요하는 저들 손길 뿌리치자!
노동자의 인간다운 존엄성을 파괴하는
욕설들과 폭행들과 인권유린 거부하자!
노동운동 탄압하는 업주횡포 경찰폭력
해고와 체포 앞에 굴복하길 거부하자!
노동자를 짓밟는 특권경제 거부하고
외국자본, 대재벌의 횡포를 거부하자!
우리를 얽어매는 모든 법률 모든 조치
모든 거짓 모든 위선 모든 구호 모든 선전
그 앞에서 무릎꿇는 노예 되길 거부하자!
……

인권오름 제 351 호  [기사입력] 2013년 06월 26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47 호  [기사입력] 2013년 05월 2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할머니, 특히 외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부러움을 받을 때가 많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할머니란 한없이 감싸주고 돌봐주고 덮어주시던 손길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내게도 그런 할머니가 계셨으니 참 복 받은 일이라 여긴다. 돌아가신 지 10여년이 지났는데 오늘따라 할머니가 유독 그립다.

할머니는 어린 나를 키워주셨다. 갓 태어난 동생이 중병을 앓아 병수발을 해야 했던 부모님이 시골 할머니께 날 맡겼기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몸은 참 자그마했다. 그런데 일은 태산처럼 하셨다. 난 종일 할머니 치맛자락을 붙잡고 늘어졌지만, 할머니는 늘 바쁘게 종종거리셔야 했다. 뙤약볕에서 온종일 밭일을 하셨다. 그 옆에서 나는 심심하다고 집에 가자며 울어 제켰다. 그러다 지쳐 내가 잠들어버리면 할머닌 해질녘이 돼서야 날 업고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다. 집엔 더 나이든 할머니(할머니의 시어머니)가 계셨는데, 요강을 비워드리고도 그 주변을 한참 치워야 했다. 그리고 나선 부엌에서 군불을 때고 가마솥 옆에 앉아 이것저것 뚝딱뚝딱 만드셨다. 밤에도 콩깍지를 까거나 썩은 콩을 골라내며 늦게까지 주무시지 않았다. 나이 들어 농사를 접고 서울 생활을 하게 되신 것은 형편 어려운 자식들 집마다 돌아다니며 살림을 해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날 보실 때마다 속바지 속에 꼬깃꼬깃 접어둔 지폐를 꺼내 주시며, 꼭 책 사는 데만 쓰라고 하셨다. 용돈을 모으고 또 모으셨을 그 돈에선 비릿한 냄새가 났다. 할머니의 주름살은 웃음꽃으로 핀 명품이었다. 그런 할머니가 단 한번 우시는 것을 봤다. 우리 집이 진 빚을 갚지 않는다고 삼촌들이 쳐들어와 싸움이 난 밤이었다. 돈 때문에 벌어진 자식들의 쌈박질 앞에서 할머니는 가슴을 치며 우셨다. 할머니의 주름살이 시커먼 개천 물처럼 변했다. 그런 할머니를 따라 나도 울었다.

오늘 내 할머니를 떠올리게 한 또 다른 할머니들 생각에 울컥하다. 평생의 노동이 구부러뜨린 허리, 숱한 웃음과 눈물 속에 패인 주름살, 거칠지만 따뜻한 손, 지팡이를 짚은 무너진 무릎, 여러 자식 기르느라 축 쳐진 가슴……. 감싸주고 돌봐주고 덮어준 세월이 묻은 몸. 내 할머니와 다르지 않은 밀양의 할머니들 모습이다. 그분들은 그렇게 긴 세월이 새겨진 몸으로, 땅과 숲과 직접 맞닥뜨려온 삶으로 그 몸과 관계를 무시하는 폭력에 맞서고 있다.

핵 발전이 편리하고 싸다는 말, 송전탑을 세우면 보상 많이 해주겠다는 말, 뭘 모르는 촌로들이 세뇌됐다는 말, 그런 말들을 결코 믿을 수가 없다. 그런 말들 속에는 몸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몸이 겪어온 시간, 할머니들이 자연과 같이 살아온 시간이 그런 말속에는 없다. 시퍼런 삽날로 베어버리고 차가운 탑을 밀어 넣으며 돈 얘기만 하는 쪽에는 그 말을 책임질 ‘몸’이 없다. 그러하기에 지나온 사건에 대한 반성도 없고 미래 세대가 떠맡아야 할 위험에 대한 고려도 없다.

할머니들이 폭력에 짓밟히는 같은 시간, 도시에선 쫓겨난 노동자들이 밤을 지새웠다. 엊그제 있었던 일이다. 골든브릿지 증권 파업농성장에 연대하는 뜻으로 여기저기서 보내온 현수막을 사측이 무단으로 떼버렸다. 노동자들이 돌려줄 것을 요구했으나 횡설수설 발뺌을 하거나 ‘거지같은 것들’이란 식으로 모욕을 줬다. 노동자들은 복도 바닥에 주저앉아 돌려줄 때까지 못 움직이겠다고 버텼다. 환기가 안 되는 복도엔 땀내와 고린내가 가득 찼지만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갑자기 옆자리 노동자가 흥분하며 핸드폰을 보여줬다. 밀양 할머니들을 성적으로 모욕하는 내용을 반복하는 인터넷 글이었다. 구체적 몸이 없는 말은 그렇게 영혼을 살해하는 무기가 되는 것 같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런 말을 하는 본인의 영혼을 살해하는 무기 말이다.

일 때문에 중간에 그곳을 떠난 나에게 아침 10시경 전화가 걸려왔다. 현수막을 되찾았다고 흥분한 노동자의 목소리였다. ‘징하고’도 ‘장한’ 일이었다. 현수막 하나 되돌려 받느라 복도 바닥에서 온 밤을 보내야 하니 노동자들의 몸뚱아리 정치는 참 힘들고 고되다. 평생 살아온 땅과 숲을 지키기 위해 옷을 벗고 목에 밧줄을 걸어야 하는 할머니들의 몸이 너무 아프다. 그렇게 여기서나 저기서나 숱한 사람들의 정직한 시간이 조롱받고 있다. 단어 한 개 한 개 외워 외국어를 배우듯 인내를 모아야 하는 몸의 정치가 무시되고 있다. 선거 때만 반짝이는 사탕발림이 아니라 길거리 잠을 자고 포클레인에 맞서는 숱한 몸들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몸의 시간, 몸의 정치 없이 쉽게 변화를 얘기하는 입을 믿지 않는다.

지금(5월 29일-6월 7일) 유엔 인권옹호자 특별보고관(마가렛 세카시야)이 한국을 방문하고 있다. 밀양의 할머니들과 울산 송전탑의 노동자들도 만난다고 한다. 인권을 위해 싸우는 인권옹호자들에게 자행되는 보복의 규모와 정도가 너무 심하기 때문에 유엔은 인권옹호자선언을 채택하고 특별보고관도 임명했다. 특별보고관은 인권옹호자 탄압에 대한 청원을 접수하고 조사‧권고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특별보고관이 사안을 다룰 때 인권옹호자의 주장이 법적으로 옳고 그르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권옹호자란 그들이 옹호하는 권리가 무엇이며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인권옹호자들 자신이 갖는 권리에 따라 정의되고 수용돼야 한다는 것이 유엔이 정한 원칙이다. 정부나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자세한 내용은 인권오름 제 87호 인권옹호자 선언 참조) 이에 밀양 할머니들이 갖는 권리는 무엇이며, 어떤 권리를 짓밟히고 있는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세계적으로 인권옹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형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농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농민인권선언’이다. 할머니들을 여러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농민은 그중 중요한 이름일 것이다. 이 선언의 정의처럼 할머니들은 “땅의 여성으로서, 땅과 자연에 직접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2008년 세계적인 소농 원주민 운동 조직인 ‘비아 캄페시나’(농민의 길, La Via Campesina)가 기초한 것이다. 선언은 세계식량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농촌 소농의 삶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고 있다. 비아 캄페시나는 69개국 148개 조직이 함께 만든 이 선언을 유엔에 제출했고, 2012년 2월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가 그것을 채택했다. 그 후 이 선언을 모델로 해서 유엔인권이사회는 정식으로 농민에 관한 국제인권법을 만들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현재 실무그룹이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선언의 정식 이름은 ‘농민과 농촌지역에서 일하는 여타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선언’(Declaration on the rights of peasants and other people working in rural areas)이다. 기존 국제인권법이 보장하고 있으나 농민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차별했던 권리들을 재확인하는 한편, 그간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권리, 가령 농민의 땅에 대한 권리나 종자에 대한 권리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선언의 몇 구절에 밀양 할머니들을 넣어서 읽어 본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할머니들의 앎에 따라 환경을 보존할 권리가 있고, 환경 파괴를 일으킬 모든 형태의 착취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할머니에게는 밀양의 농업 가치를 파괴할 수 있는 개입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할머니의 숭고함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세계적으로 인권옹호자들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형편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이 농민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농민인권선언’이다. 할머니들을 여러 이름으로 부를 수 있지만 농민은 그중 중요한 이름일 것이다. 이 선언의 정의처럼 할머니들은 “땅의 여성으로서, 땅과 자연에 직접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2008년 세계적인 소농 원주민 운동 조직인 ‘비아 캄페시나’(농민의 길, La Via Campesina)가 기초한 것이다. 선언은 세계식량위기에 대한 대응으로서 농촌 소농의 삶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고 있다. 비아 캄페시나는 69개국 148개 조직이 함께 만든 이 선언을 유엔에 제출했고, 2012년 2월 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가 그것을 채택했다. 그 후 이 선언을 모델로 해서 유엔인권이사회는 정식으로 농민에 관한 국제인권법을 만들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현재 실무그룹이 막바지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선언의 정식 이름은 ‘농민과 농촌지역에서 일하는 여타 사람들의 권리에 관한 선언’(Declaration on the rights of peasants and other people working in rural areas)이다. 기존 국제인권법이 보장하고 있으나 농민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차별했던 권리들을 재확인하는 한편, 그간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권리, 가령 농민의 땅에 대한 권리나 종자에 대한 권리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선언의 몇 구절에 밀양 할머니들을 넣어서 읽어 본다.

밀양의 할머니들은 할머니들의 앎에 따라 환경을 보존할 권리가 있고, 환경 파괴를 일으킬 모든 형태의 착취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할머니에게는 밀양의 농업 가치를 파괴할 수 있는 개입을 거부할 권리가 있고, 할머니의 숭고함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농민인권선언(유엔인권이사회 자문위원회, 2012년 2월)

제 1조 농민의 정의

1. 농민은 땅의 남녀로서, 식량 생산 또는 여타의 농업 생산물을 통해 땅과 자연에 직접적이고 특별한 관계를 갖는 사람들이다. 농민은 땅에서 직접 일하며 무엇보다도 가족노동과 여타의 소규모 형태로 조직된 노동에 의존한다. 농민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의 지역 공동체에 뿌리박고 현지의 지형과 농업-생태 시스템을 돌본다.
2. 농민이란 용어는 농사, 소 사육, 목축, 농사와 관련된 수공업 또는 농촌 지역에서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여기에는 땅에서 일하는 원주민이 포함된다.
3. 농민이란 용어는 또한 땅 없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범주의 사람들이 무토지자로 간주되며 생계 보장에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 1. 땅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농업 노동 가구, 2. 농사를 짓지 않는 농촌 지역 가구, 땅이 없으며 가족 구성원이 낚시, 현지 시장에 낼 수공업품 제작, 서비스 제공 등의 다양한 활동에 종사, 3. 목축, 유목, 화전 농작, 사냥, 수집을 하는 기타 농촌가구, 그리고 유사한 생계활동을 하는 사람들

제 2조 농민의 권리
1. 모든 농민,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2. 농민은 유엔 헌장, 세계인권선언, 그리고 여타의 국제인권법에 인정된 모든 인권과 기본적 자유를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완전히 누릴 권리를 갖는다.
3. 농민은 자유롭고 모든 여타 사람들과 동등하며,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함에 있어서 어떤 종류의 차별로부터도 자유로울 권리, 특히 농민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지위로 인한 차별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갖는다.
4. 농민은 자신들의 땅과 지역에 영향을 미치는 어떠한 프로젝트, 프로그램 또는 정책에 대해서도 정책 구상, 의사결정, 이행과 모니터링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
5. 농민은 식량 안보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이것은 생태적으로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을 통해 생산되는 건강하고 문화적으로 적절한 식량에 대한 권리와 농민 스스로 식량과 농업 시스템을 정할 권리로 구성된다.

제 9조 농업의 가치를 보호할 권리
1. 농민에게는 농민의 문화와 현지의 농업 가치를 인정받고 보호 받을 권리가 있다.
2. 농민에게는 농업에서 현지 지식을 발전시키고 보존할 권리가 있다.
3. 농민에게는 현지의 농업 가치를 파괴할 수 있는 개입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4. 농민에게는 농민의 숭고함을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표현할 권리가 있다.

제 11조 환경을 보존할 권리
1. 농민에게는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에 대한 권리가 있다.
2. 농민은 자신들의 지식에 따라 환경을 보존할 권리가 있다.
3. 농민은 환경 파괴를 일으킬 모든 형태의 착취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
4. 농민은 환경 파괴에 대해 소송하고 보상을 청구할 권리가 있다.
5. 농민은 생태적 부채에 대해 그리고 자신들의 땅과 지역에 대한 역사적이며 현재적인 처분에 대해 배상받을 권리가 있다.

제 12조 결사, 의견, 표현의 자유
1. 농민은 타인과 결사할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그리고 현지와 지역‧전국‧국제적 차원에서 이의 제기‧청원‧동원을 포함하여, 전통과 문화에 따라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2. 농민은 자신들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하여 독립적인 농민 조직, 노동조합, 협동조합 또는 기타 형태의 조직이나 결사를 형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갖는다.
3. 농민은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현지의 관습‧언어‧문화‧종교‧문화적 문헌‧지역 예술로 표현할 권리를 갖는다.
4. 농민은 자신들의 권리요구와 투쟁이 범죄로 간주되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5. 농민은 억압에 저항할 권리와 자신들의 권리 보호를 위해 평화적인 직접 행동에 호소할 권리를 갖는다.

인권오름 제 347 호  [기사입력] 2013년 05월 2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43 호  [기사입력] 2013년 04월 2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10년 전 4월 25일, 19살의 청소년이 자살했다. 당시 이름도 없이 고(故) 윤 모씨로만 알려졌던 고인의 유서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수많은 성적 소수자들을 낭떠러지로 내모는 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반성경적이고 반인류적인지…… 죽은 뒤엔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겠죠. ‘윤 ○○은 동성애자다’라고요. 더 이상 숨길 필요도 없고 그로 인해 고통 받지도 않아요.”

이름 없는 그의 죽음에 당시 인권단체들은 ‘사회적 타살’이라며 침통해했다. 매년 4월마다 그에 대한 추모 행사가 열렸고, 비로소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됐다. 동료들은 그의 본명보다는 시조시인으로 사용하던 ‘육우당’이란 이름으로 그를 기억한다.

올해 고(故) 육우당의 10주기 추모 행사 중 하나는 27일 저녁 대한문 앞에서 열리는 추모문화제이다. 대한문은 어떤 곳인가? 역시 ‘사회적 타살’이라 지목되는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 24명의 죽음을 추모하는 곳이다. 1년 전 ‘더 이상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가파르게 이어지던 자살 곡선을 멈추기 위해 천막 농성이 시작된 곳이다. 그런데 정부는 비바람과 눈보라에 시달리던 그 작은 천막을 염치도 없이 철거해버렸다. 지난 4월 4일의 일이다. 대한문 앞 인도 위에 급조한 화단이 만들어졌고 공무원과 경찰들이 매일 나와 그 화단을 지킨다. 해고 노동자들은 화단 앞 맨 땅 위에서 하늘을 이고 추모를 이어가고 있다.

추모와 애도란 무엇인가를 생각해본다. 충분한 추모와 완전한 애도란 가능치 않다. 그런데 우리는 왜 추모와 애도를 계속하는 것일까? 저명한 철학자인 주디스 버틀러는 “애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항하는데 필요한 삶에 대한 더욱 예리한 느낌을 잃게 된다.”고 했다. 그 “예리한 느낌”이란 건 뭘까? 나의 운명과 당신의 운명이 근원적으로나 최종적으로나 분리될 수 없다는 느낌이다. ‘우리’를 구성하는 숱한 인연 중 어떤 인연을 상실할 때, 내가 잃어버린 것은 그 인연을 구성하는 상대방인 ‘당신’만이 아니다. 잃어버린 ‘당신’과 함께 ‘나’ 역시 사라지게 된다. 또 나와 당신의 관계는 전적으로 나와 당신만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다. ‘나’와 ‘당신’의 관계를 특별하게 구별 지으면서도 연결하는 인연들, ‘우리’의 관계성 때문이다. 그래서 슬픔은 그런 중요한 관계의 끈을 강조함으로써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알게 해준다. 그래서 애도는 혼자서 골방에서 슬퍼하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구성하는 복잡한 수준의 정치공동체의 느낌을 제공해준다고 했다.

버틀러는 이런 질문도 던졌다. “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무엇이 애도할 삶으로 중요한가?” 성소수자 추모행사가 해고 노동자의 문제와 한 장소에서 만난다는 것을 이 질문과 연결해본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급하지 무슨 성적 지향이 중요한 문제라고…’, ‘인권운동이 큰일을 해야지 너무 소수자의 문제에 매달리는 거 아냐’라는 볼멘 소리를 듣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들은 자신의 존재를 부인당하거나 존재 자체로 인해 위협받지 않을 권리,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인정받을 권리를 외친다. 해고 노동자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의 희생이 노동자들에게만 전가된 불평등함을 지적한다. 또한 이 사회 속에서 노동자 신분이 겪는 불평등과 무시를 호소한다. 둘 다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선거 전 약속을 헌신짝 취급하는 여당이나 일부 세력의 압력에 꼬리 내리기에 여념이 없는 야당이나 합작으로 배신의 연속극을 찍어대고 있다. 바로 여기서, ‘성소수자나 노동자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성소수자나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애도할만한 삶으로 여겨지는가?’는 공통된 질문이다.

유엔의 정책방향성을 보여주는 반기문 총장의 발언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발언록이다. 최근 몇 년간 반 사무총장은 성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발언을 힘주어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반 사무총장의 사견이 아니라 유엔의 정책 방향성을 보여준다.

2011년 6월 17일, 유엔인권이사회는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차별에 대한 유엔 결의안’을 처음으로 채택했다. 이 결의안을 전후로 해서 정부들의 의견도 달라지고 있다. 2005년에 당시 유엔인권위원회(현 유엔인권이사회의 전신) 차원에서 처음으로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에 관한 공동성명’이 제기됐을 때는 겨우 32개국이 서명했을 뿐이었다. 2011년에는 85개국으로 늘어났고, 그 결과 최초의 유엔결의안이 채택된 것이다. 또 유엔은 이 결의안에 기초해서 2011년 12월에는 유엔인권최고대표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 역시 최초의 공식적인 유엔 보고서로서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이유로 한 개인들에 대한 차별적인 법과 관행, 폭력행위에 관한 보고서’란 제목으로 노동, 교육, 건강 분야 등에서의 차별과 성소수자들에게 자행되고 있는 증오폭력을 고발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핵심적인 권고사항은 동의한 성인간의 동성 관계를 범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법이 있다면 폐지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보고서 84(d)). 아울러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한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하고 있다(보고서 84(e)).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의 방향성은 거꾸로 가고 있다.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은 반대 세력에 굴복한 의원들의 퇴보로 법안 자체가 철회될 예정이라 하고, 문용린 교육감은 성적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 서울시 학생인권조례의 전면 개정을 부르짖고 있고, 동성애를 처벌하는 군형법 제 92조6을 폐지하기는커녕 더 개악하려는 시도가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다.

추모와 애도의 정점은 우리의 관계를 형성하는 사회적 조건을 바꾸는 것일 게다. 그중 하나가 차별을 조장하는 법의 폐지이고 포괄적인 차별금지법의 제정이다. 인종차별과 성차별, 노동차별을 없애는 것과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에 따른 차별을 없애는 것은 다르지 않은 인권투쟁이다. 미국의 경우, 2009년 통과된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범죄를 처벌하는 법은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이후 제정된 법이다. 혐오범죄 항목에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을 추가한 것이다.

입법을 위해 노력해온 이 중에 주디 쉐퍼드가 있다. 그녀의 아들인 매튜 쉐퍼드는 1998년 동성애를 혐오하는 두 청년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당시 매튜는 20살의 대학생이었다. 아들의 죽음 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맞서 온 어머니는 법안 통과를 기뻐하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누구이며,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는 지에 대해 마음을 여십시오. 편견과 추측을 쫓아버리십시오. 증오를 이해와 공감과 수용으로 바꾸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을 지지해주십시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성소수자 차별 반대 발언들

2013년 4월 15일, <인권, 성적 지향, 성정체성에 관한 오슬로 회의>에 전한 비디오 메시지

우리는 이런 잘못들(성소수자들에 대한 공격, 투옥, 살해 등의 무도한 행위들)을 바로잡아야만 합니다. 정부에게는 모든 사람을 보호할 법적 의무가 있습니다. 일부의 사람들은 변화에 반대하려 듭니다. 그들은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문화나 전통이나 종교를 들먹입니다. 그런 주장들은 노예제, 조혼, 부부관계에서의 강간, 여성할례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로 이용돼왔습니다. 나는 문화와 전통과 종교를 존중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기본적 인권에 대한 부정을 결코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근거한 폭력과 차별은 우리 시대의 큰 도전이자 방임된 인권적 도전 중 하나입니다. 인류 가족의 성소수자 구성원들에 대한 나의 약속은 이렇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나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여러분에 대한 공격을 비판할 것을 약속합니다. 그리고 진보를 위해 지도자들을 계속 압박할 것을 약속합니다.

2012년 12월 11일, 유엔 뉴욕 본부에서 열린 <호모포비아에 대한 투쟁에서의 지도력>에 관한 행사

이점을 크고 분명하게 말하겠습니다. 성소수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권리를 가졌습니다. 성소수자들 역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습니다.

현 세계의 아주 많은 나라들에서, 사람이 단지 같은 성의 다른 인간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단죄한다는 것은 분노할 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런 법률들은 자국에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법들은 이전 식민 권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사라져야만 하는 법들입니다.

세계인권선언 1조는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고 합니다. ‘일부’ 사람도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도 아니고,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고 누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그 어느 누구도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동성애혐오에 맞서, 특히 대중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나 사회적으로 지도자로 간주되는 이들을 향해 모두 크게 외쳐야만 합니다.

여론에 맞서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전 이해합니다. 하지만 대다수가 특정 개인들을 못마땅해 한다고 해서, 국가가 그들의 기본적 권리를 보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가 아닌 그 이상의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취약한 소수자들을 적대적인 다수자들로부터 보호할 것을 요구합니다. 민주주의는 다양성 위에서 번창합니다. 정부들은 편견을 부채질하는 것이 아니라 편견과 맞서 싸울 의무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 그리고 모든 곳의 양심 있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위한 세계인권선언의 약속을 실현할 때까지 노력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갖고 태어난 자유, 존엄성, 평등한 권리는 사람들의 매일 매일에서 살아있는 현실이 돼야만 합니다.

* 이 행사에는 자리를 같이 한 저명인사들이 많았다. 그들이 보탠 말을 함께 생각해 보자.

아파르트헤이트(남아공의 극단적인 인종분리차별정책을 말함) 치하에서 태어난 여성으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음악가인 이본느 차카 차카(Yvonne Chaka Chaka)의 말:

“평등을 향한 투쟁은 풀코스 중에서 좋아하는 것만 골라먹는 단품 메뉴가 아닙니다. 당신이 누군가와 다르거나 누군가를 못마땅해 한다고 해서, 누구에게는 평등을 수용하고 누구에게는 평등을 보류할 수는 없습니다. 평등은 모든 사람을 위한 평등이지, 그렇지 않으면 전혀 평등이 아닌 것입니다.

팝가수이자 배우인 리키 마틴(Ricky Martin):
“우리는 특별한 권리를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같은 권리를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권리 또는 더 적은 권리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같아지기를 원합니다.”

1984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대주교의 비디오 메시지 :
“우리중의 일부가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고, 심지어 그들의 기본적 인권을 부인당하고 있는 한 우리는 우리 사회를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2012년 6월 28일, 뉴욕 인권영화제에 전한 메시지

어떤 관습이나 전통도, 어떤 문화적 가치나 종교적 신념도, 인간에게서 그 사람의 인권을 박탈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은 인권침해입니다. 국가가 다뤄야만 하는 도덕적 및 법적 의무를 갖는 인권침해입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나는 지도자들에게 듣고 행동하라고 압박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활용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2011년 살해당한 우간다의 성소수자 인권활동가 데이비트 카토에 대한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여러분과 같은 지역 활동가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활동가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나와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줍니다. 나는 이 위대한 인권의 명분에 결합한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아무리 오래 걸릴지라도, 정의가 이길 것이며 모든 사람이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와 존엄성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2011년 12월 8일, 세계 인권의 날을 기념하는 일련의 행사로 유엔 뉴욕본부에서 열린 <성적 지향에 근거한 폭력과 차별 종식에 관한 토론회>에 전달한 메시지

청소년들의 동성애자 따돌림은 중대한 인권침해를 구성합니다. 이런 종류의 따돌림은 소수 국가들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전역의 학교와 지역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따돌림은 엄청나고 불필요한 고통을 야기하면서 청소년들에게 줄곧 영향을 끼쳐서 성인기까지 이어집니다. 따돌림 당한 아동은 우울해지고 학교에서 탈락할 수도 있습니다. 일부는 심지어 자살로 내몰립니다.

이런 문제를 막는 것은 공통된 도전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역할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가족구성원으로서, 교사로서, 이웃으로서, 지역 사회 지도자로서, 언론인으로서, 종교 지도자 또는 공무원으로서 말입니다.

국가들은 세계인권선언과 핵심 인권 조약들에 규정된 차별 종식에 대한 약속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즉 단지 이성애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성소수자들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점차 깨닫고 있습니다.

2010년 인권의 날 연설

양심을 가진 남녀로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차별을 배격하며 특히, 성적 지향과 성 정체성에 근거한 특수한 차별을 거부합니다. 문화적 태도와 보편적 인권사이에 긴장이 있는 곳에서 인권은 승리해야만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동성애를 범죄로 간주하며 성적 지향 또는 성 정체성에 근거한 차별을 허용하며 폭력을 조장하는 법률들의 철폐를 추구합니다.

인권오름 제 343 호  [기사입력] 2013년 04월 2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39 호  [기사입력] 2013년 03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꽃샘추위가 드세다. 겨울과 여름 사이에 불청객이 끼어든 것처럼 봄의 변덕이 심하다. 심술궂은 봄의 거리에서 잔뜩 움츠리고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의 등이 시려 보인다. 그런데 해마다 이 맘 때면 유독 더 많은 시간을 추운 거리에서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사실 일 년 내내 농성장이나 집회장을 떠나지 않는 일이 드물지만, 이맘때면 그들이 더욱 분주해진다. 4월 20일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을 향해가는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들은 이맘때면 차별에 맞서다 먼저 간 동료들에 대한 추모행사를 갖고, 영화제를 열고, 이런 저런 현안에 대한 시위와 토론회로 빽빽한 일정을 숨 가쁘게 소화한다.

일 년에 단 하루, ‘장애인의 날’이라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이 장애체험 행사를 하고 장애아동을 초청하여 사진 찍는 행사를 거부하면서 그들 스스로 붙인 이름이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다. 2002년부터 시작된 이 발걸음에는 부양의무자 폐지, 장애등급제 폐지, 장애인활동보조 24시간 보장 등 해마다 변함없는 사안들이 동반한다. 변함이 없다는 것은 사회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2000년대 초반에 장애인 이동권이란 말이 관심을 끌었다면 최근 몇 년 간 주목을 끄는 말이 ‘탈 시설’이다. 올해 일정에는 ‘전국 탈시설 욕구조사 발표 및 대안 마련을 위한 토론회’도 잡혀있다.

‘탈 시설’이란, 말 그대로 시설에서 벗어나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가리킨다. 그런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날 비롯한 대개의 사람들은 ‘아유, 어떻게 감당하라고? 그런데서 책임안지면 누가 감당하라고? 그 사람들은 거기 아니면 어디 살 데가 있다고?’라며 손부터 내저었다. 그런 손사래가 어느 날부터인가 부끄럽게 느껴지더니, ‘네가 공모 했잖아’라는 지적을 정면으로 받게 됐다.

“26년 전 그날, 형제복지원 사건을 기억한다”는 제목의 토론회가 최근 있었다. 9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던 한종선 씨는 자신과 가족이 그곳에서 겪은 참상에 대한 기억을 담아 <살아남은 아이>란 책을 작년 말에 냈다. 그 책을 읽는 일은 참 고통스러웠다. 3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 행상을 한다거나 술에 취했다거나 장애가 있다는 둥의 이유로 끌려가 강제노역과 매질, 성폭행,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다. 5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런 탓에 죽었다. 1987년에 사건이 1차로 폭로됐지만 사회정화를 명목으로 그런 일을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비호했던 정권은 시설장을 싸고돌았고, 26년이 지난 지금도 가해자들은 건재하다. 반면에 26년이 지났지만 유린당한 삶의 상처로 피해자들은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9살이었던 아이가 30대 중반이 되어 재차 그 사건을 고발했다. ‘이번에도 그냥 넘어가리라, 지나가리라’ 가해자들은 조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공모자로 지목된 보통 사람들은 과연 이번에도 이 사건을 그냥 넘길 수 있을까?

형제복지원 사건은 ‘복지시설’이라기보다는 ‘강제수용소’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소위 ‘부랑아 단속, 사회정화’라는 이름하에 국가가 조직적으로 저지른 ‘국가범죄’이지, 한 시설 운영자의 비리차원에 그치는 단순 사건이 아니다. 일반적인 복지시설의 문제와는 가까우면서 먼 듯한데, 토론회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장애인들이었다. 그들을 공통으로 불러 모은 게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어떤 사람이나 특정 집단을 찍어서 사회로부터 격리해도 되고, 가늠이 안 되는 시간을(때론 평생을) 시설이란 곳에서 살아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느꼈다. 그런 분노와 저항에 대해 “그곳이 ‘문제’ 시설이니까 그랬지, 다른 시설은 괜찮아요.”라고 대응하는 것은 턱없는 일일 것이다. <‘문제’시설이 아닌 ‘시설’문제를 말한다>는 토론회의 부제목이 그런 의미에서 나온 것일 게다.

이날 토론회의 한 발제자도 지적하기를 그간 우리는 한국 사회의 역사를 독재 정권 대 민주화 운동세력의 관계에만 치중해서 이해했고, 소위 국가에 의한 인권침해를 진상규명하고 피해를 보상한다는 ‘과거청산’도 민주화운동의 희생자들만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같은 시대에, 허름한 차림이란 이유로, 일 없이 거리를 돌아다닌다는 이유로, 술 마시고 길에서 잠을 잔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어딘가로 끌려갔다. 그곳을 바깥사람들은 ‘복지 시설’이라 불렀지만 그곳에서 강제로 살고 노역한 사람들에게는 ‘강제 수용소’였다. 민주화운동을 억압한 대통령은 그 시설의 운영자를 골칫덩어리들을 깨끗이 청소해준 은인으로 여겼다. 그래서 운영자는 그 시설 안에서 ‘대통령’으로 행세하며, 시설 수용자들을 군대식 규율로 다스렸다.

그런데 그 일은 흘러가버린 과거가 아니다. 시설 운영자의 권력은 세습되어 건재하고, 그를 비호하고 부추겼던 국가권력의 범죄는 규명되지도 처벌되지도 않았다. 그들이 챙긴 엄청난 경제적 이익도 여전히 그들의 곳간 안에 있다. 최근 부추겨지는 경범죄 단속, 법과 질서의 강조, 위생과 안전에 대한 열망은 사회 정화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안보이게 치워지길 바라는 공모자들의 욕망을 언제든지 현실화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토론회만큼이나 길고 진지했던 뒤풀이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잊혀진 사람들’이란 표현이 과연 맞을까?” ‘잊혀진’이란 말 자체가 기억이나 생각에서 사라진다는 말인데, 노래 제목처럼 ‘잊혀진 계절’은 가능해도 사람에 대해서 그런 말을 써도 될까라는 물음이었다. 잊혀진 사람이란 말은 잊힘을 당한 사람에게 문제를 돌리는 것 같다. 의도적으로 잊으려는 사람에 대한 물음을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이 문제는 현재형이다. 의도적으로 모른 척하고 잊어버린 책임자와 공모자가 있고, 살아있음에도 없는 듯 취급받는 잊혀진 삶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인권기준에서도 가장 진척이 늦은 부분이 시설 수용자의 인권에 대한 부분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유엔인권최고대표실 유럽사무소가 낸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의 인권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유엔과 유럽연합의 법과 보고서, 가이드라인 등을 촘촘히 인용하고 있으나, 분량 관계상 아주 일부만 발췌했다. 이 보고서 자체가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듯이, 시설 수용자와 관련된 인권기준이 부족하기 때문에 기준에 대한 설명의 상당부분을 감옥 등 구금시설에 갇힌 사람과 관련된 인권기준에서 빌려오고 있다. 그나마 최근 구멍 뚫린 부분을 메우고 있는 것이 2006년에 제정된 장애인권리협약이다.

보고서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시설 수용은 무조건 안된다가 아니라, ‘장애인이니까’, ‘위험해보이니까’ 응당 시설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판단과 법률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동등한 기초위에서 자유의 제한을 결정하는 법적 근거가 중립적으로 정의돼야만 한다’는 것이다. 시설에서 제공하던 서비스를 지역사회에 기반한 서비스로만 바꾼다고 해서 지역사회에서의 삶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지도 않다. 지역사회 속에 살아도 고립과 배제를 피할 수 없다면 문제이다. 따라서 사회서비스, 보건, 주거, 고용 등 전반적인 영역을 아우르는 전략 개발이 요구된다고 했다. ‘자립생활’이라 하면 ‘네가 어떻게 네 힘으로 설 수 있어?’라고 반문하는데, 어떤 인간도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는 살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한 장애인권활동가는 ‘자립생활’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연립생활’이 맞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우리 자신이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원하는 삶은 타인과의 교류 속에서 영향을 주고받는 삶이지, 누군가가 대신해주는 결정에 지배되는 삶이 아니다. 자립이란 그런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삶이지 타인의 영향을 차단하는 삶이 아니다. 자립하고 싶은 인간으로서 나는 누군가에 대한 단속과 수용을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공모자가 아니라 더 많은 교류를 함께하는 동료여야 할 것이다.

잊혀진 유럽인, 잊혀진 권리 - 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의 권리(유엔인권최고대표실 유럽사무소, 2010)

I. 도입
이 보고서는 오늘날 가장 중대한 인권의 도전 중 하나를 조명한다. 즉, 많은 아동, 장애인, 노인들이 장기간 시설에 수용되는 일이 계속되며 흔히 평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의 중요한 목적은 첫째, 시설 생활하는 아동, 장애인, 노인의 상황에 주목하고, 둘째, 시설 보호의 대안으로 지역사회에 기반한 보호를 발전시킬 정부의 책임성에 유념하는 것이다. 정부는 시설보호에서 지역사회에 기반한 서비스로의 전환을 위한 전략을 개발하고 이행하는 동시에, 그러한 전환 과정 중에 여전히 시설 보호 속에 남겨진 개인들의 권리를 보호해야만 한다.

이 보고서에서 사용하는 ‘시설 보호’란 용어의 의미는 ‘전통적인’ 장기간 시설에서의 보호 제공으로서, 다시 말해서 거주자가 자신의 생활 전반과 일상의 결정에 대한 통제권을 거의 갖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전제로 인해 흔히 과다한 수의 사람들을 수용하지만, 건물의 크기는 시설화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숱한 원인들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원인들 중에는 엄격한 반복적인 일과가 있다. 가령 개인의 선호나 욕구와 무관하게 일어나고 먹고 활동하는 것에 대한 고정된 시간표이다.

자신의 집이 아닌 곳에서 돌봄과 지원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한 서비스의 제공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요구된다. 지역사회에 기반한 대안들이 느리게 진전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기준마련은 중요하다. 따라서 시설 보호 속에 남겨진 개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튼튼한 보호수단이 마련되어야만 한다. 추가로, 시설 보호의 대안으로서 추진되는 지역사회에 기반한 서비스의 범주에는 집이 아닌 곳에서의 돌봄을 원하는 개인들을 위한 ‘거주 형태의 돌봄’이 포함될 것이다. 그런 거주형태가 거주자의 존엄성과 인권에 대한 존중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럽연합 회원국과 터키에 걸쳐 장기간 거주 시설에서 살아가는 아동과 장애를 가진 성인이 약 12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에서나 국제적으로나 시설 수용과 그런 시설들의 조건은 주요한 인권 문제를 야기하는 행위로서 인정된다. 장기간 거주 시설의 상황에 대해 많은 보고서들은 기준이하의 생활조건이라는 문제점을 지적해왔다. 시설수용 그 자체가 모든 연령대의 시설 거주자들에게 심각하고 장기적인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특히 아동에게 해롭다.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은 시설 내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인권침해 때문만은 아니다. 시설 수용 그 자체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배제하며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권리 행사를 방해하기 때문이며, 특히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참여할 권리에 대해 그러하다.

II. 핵심적인 인권 원칙
아동, 노인, 장애를 가진 사람들과 관련된 인권 기준에 공통적인 핵심원칙들을 조명한다.

A. 평등과 비차별
서비스, 교육, 고용, 사회보장, 건강보호, 가족생활, 인격적 통합(personal integrity; 자신의 몸, 정서, 정신이 통합된 전인격체로 인정받을 권리), 문화, 여가와 운동, 종교 등에 대한 접근에 관한 핵심원칙이 평등이다. 차별로부터의 보호는 모든 중요한 국제조약에 포함된 기본권이다. 가령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에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필요성은 장애인권리협약 5조 4항, “장애인의 사실상의 평등을 촉진하거나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조치들은 이 협약의 조항 하에서 차별로 간주되지 않는다.”에 반영돼 있다.

B. 가족의 중요성
많은 인권조약들은 가족의 중요성에 대해 구체적 언급을 하고 있다. 가령 수정유럽사회헌장 16조(사회적, 법적, 경제적 보호에 대한 가족의 권리)는 “가족의 완전한 발전을 위한 필수조건”을 보장할 것을 추구하고 있다.

C. 자율성의 증진
장애인권리협약은 자율성을 일반원칙들 중에서 맨 처음에 꼽고 있다. 즉, 3조 (a)항의 “개인의 천부적인 존엄성, 선택의 자유를 포함한 자율, 자립에 대한 존중”이다. ‘법 앞의 평등’에 관한 협약 12조는 자율성과 강하게 연계되어있다. 국가는 장애인이 모든 영역에서 법 앞에서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동등한 기초 위에서 법적 능력을 향유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장애인의 법적 능력 행사와 관련한 모든 조치들이 오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어 장치를 제공하도록 보장해야 한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모든 아동의 의사가 청취되고 진지하게 고려될 권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자기결정권과 자율성 개념이 사적생활과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에 본질적이라고 판단했다.

D. 최소 제한적인 대안
비례성 원칙은 인권법의 핵심 개념이다. 가령, 유엔자유권위원회 일반논평 31(2004년)은 “국가는 권리에 대한 제한이 이루어질 때 제한의 필요성을 증명하고, 정당한 목적을 추구하는 데 비례적인 수단만을 위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규약 상 권리의 본질을 손상시키는 식으로 제한이 적용되거나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어떤 권리에 대한 간섭은 의도한 적법한 목적을 성취하기에 필수적인 것 이상이어서는 안 되며, 자의적이거나 부당해서는 안 된다.

E. 참여
법과 정책 개발에서 참여의 중요성은 유엔이나 유럽의회의 인권 장치 모두에서 강조된다. 정치적이며 공적인 생활에 대한 참여의 권리에 덧붙여 장애인권리협약 4조 3항은 장애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입법, 정책 개발과 이행에서 “장애인과 밀접하게 협의하고 장애인이 적극적으로 참여토록 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노인은 서비스를 설계하고 이행하고 평가하는 과정 전반에 충분히 직접적으로 연루돼야 한다. 가족, 돌봄 제공자, 친구들 또한 적합하다면 이 과정에 연루돼야 한다.”(노년에 관한 마드리드 행동계획 5조)

III. 공식적인 돌봄 장소 유치: 개입의 기초
시설 입소를 결정할 때 고려해야 할 인권의 측면들을 살펴본다.

<자유에 대한 권리>
사람에게서 자유를 박탈하는 결정은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유럽인권협약 5조에 의거, 여타의 덜 가혹한 조치들이 고려되었으나 불충분한 것으로 입증된 경우에만 그런 결정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간주한다. 어떤 사람이 억류되었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유럽인권재판소는 상당 범위의 요인들을 고려하는데 “문제시되는 조치의 유형, 기간, 효과와 이행방식”이 포함된다. 본인이 시설 수용을 거부하지 않거나 여러 사유로 시설에서 나올 것을 허용 받을 수 있다할지라도, 개인들은 자유를 상실할 수 있다. 따라서 유럽인권재판소는 사법적, 행정적, 또는 기타 당국이 내린 명령이 없었다 할지라도, 사람이 사실상의 억류상태에 처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이 점이 중요한 까닭은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간주되지 않는다면, 어떤 보호 장치도 적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호자와 자유의 박탈
역량이 부족하다고 간주되는 사람을 대신하여 보호자(후견인)가 내린 결정을 허용하는 국가들에서는, 당사자의 동의가 없어도 결정을 한 것으로 인정한다. 이런 관행은 정신병원 강제 수용 등 심각한 인권 문제를 일으킨다. 이에 대해 유엔사무총장의 보고서는 “보호자 개념이 어떠한 절차적 보호도 없이, 지적‧정신적 장애인의 법적 역량을 박탈하는데 부적절하게 이용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이 ‘법 앞에서 인간으로서 인정받을 권리’를 재확인하며, 국가가 ‘장애인의 법적 능력 향유를 인정하고 그들의 법적 능력을 행사하는데 필요한 지원에 접근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유엔인권최고대표실은 우선적으로 보호자에 관한 법을 재검토하고 개혁할 것을 권고했다.

시설 수용이 정당화되는 환경을 명확히 하기
장애인권리협약이 발효되기 전에는 “정신 장애가 있다는 것이 자유박탈과 시설 수용의 적법한 근거로 대표”된 반면에, 협약은 “정신적 또는 지적인 장애를 이유로 한 자유의 박탈을 차별적인 것으로 금지함으로써 이런 접근법에서 신속히 벗어났다.” 불법적인 시설 수용에는 “정신적 또는 지적장애와 여타의 요소들(가령 위험성, 돌봄, 치료)을 결합시켜서 자유 박탈의 근거로 삼는 것”이 포함된다. 이에 유엔인권최고대표실은 “당사자의 자유로운 동의, 그리고 설명 후 동의 없이 장애를 근거로 장애인의 시설수용을 승인하는” 입법은 폐지돼야한다고 권고한다. 여기에는 “당사자의 자유로운 동의, 설명 후 동의 없이 보호와 치료를 이유로 장애인의 시설수용을 승인하는 규정”의 폐지도 포함된다. “명백하거나 진단이 확정된 정신병에 대한 법률과 연계된 보호, 치료, 공공의 안전 등을 근거로 한 모든 사례에서, 본인에게나 혹은 타인에게 위험을 끼칠 가능성이 있다는 근거로 장애인을 예방 구금하는 규정”의 폐지도 포함된다. 이에 대해 유엔인권최고대표실은 앞서 지적한 점들이 “장애인의 시설수용이 법적으로 불가하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며, 자유의 제한을 결정하는 법적 근거가 장애와 연관되지 않고, 모든 사람과 동등한 기초 위에서 중립적으로 정의돼야만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한다.

<시설 수용의 적합성에 대한 심사>
자유를 박탈당한 모든 사람에게는 수용의 적법성에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있다.

정신질환으로 수용된 사람과 관련해서 유럽인권협약은 독립적인 사법당국에 의한 정기적인 적법성 심사를 요구한다. 유엔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이 가정에서 분리된 모든 사례에 있어서 권한 있는 당국에 의한 정기적인 심사의 수행을 요구한다. 대안 양육에 대한 지침에 따르면, “권한 있는 당국을 통해 아동의 안전, 복지, 발달에 대한 감독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은 수용의 지속, 연장 또는 종결과 관련된 절차에서 법적 지원을 받아야만 한다. 정신병으로 비자발적으로 수용되거나 비자발적인 치료를 받게 된 사람에 대하여, 당사국은 그러한 결정에 대한 이의제기할 권리(합리적인 간격을 두고 법원에 의해 조치의 적법성을 심사받을 수 있는 권리)가 당사자나 옹호자 또는 대리인을 통해 효과적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권리가 분명하게 명시된 것은 장애인권리협약 19조이다. 지역사회에 기반한 서비스는 “지역사회에서 살아가고 포함될 것”을 지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지역사회로부터의 고립이나 분리를 방지”하는 것이기도 해야 한다.

현재 시설에서 살아가는 아동과 장애인, 노인을 사회적으로 포함시키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소는, 지역사회에 기반한 대안들을 개발한다는 목표가 분명한 전략을 통해 시설의 폐쇄를 촉진하는 것이다. 시설에서 지역사회에 기반한 돌봄으로의 전환을 추구하는 특별전문가집단은 유럽연합 회원국들에게 “지역사회에서의 서비스 개발과 장기수용 시설의 폐쇄를 위한 명확한 시간표와 예산이 동반된 전략과 행동계획을 채택할 것”과 “그런 행동 계획들의 이행을 평가할 수 있는 적절한 지표”를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시설보호로부터 지역사회에 기반한 서비스로의 전환 그 자체만으론 아동, 장애인, 노인이 지역사회에서 살며 참여할 그들의 권리를 행사하기에 충분치 않다. 지역사회통합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사회서비스, 보건, 주거, 고용의 영역을 포괄하는 국가전략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자립 생활을 법적 권리로 수립하여 당국과 서비스 제공자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입법이 돼야한다. 또한 그 권리가 침해된 경우에 소송을 허용해야 한다.

결론
수인이나 여타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과 비교할 때, 시설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인권을 구체적으로 다룬 기준들은 매우 적다. 정신 요양 시설이나 부모의 양육을 받지 못하는 아동에 관련된 지침은 개발돼왔지만, 시설 생활인의 돌봄과 처우에 관한 분명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은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특히 노인에 대한 기준은 아주 희소하다.

기존 기준의 문제점을 고치고 새로운 기준을 개발함에 있어서 추구할 것은 돌봄의 질을 보장하는 것 뿐 아니라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는 개인들의 삶의 질을 강화하고 그들의 열망을 성취하고 지역사회에서의 삶에 연루되는 것을 또한 목표로 해야 한다. 그러한 질을 평가하는 시스템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개인들(아동을 포함한)과 그들을 대리하는 기관들을 연루시켜야 가능하다. 국가는 우선순위로서, 아동과 장애인과 노인이 지역사회에서 충분히 포함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효과적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장애인 권리협약은 이 일을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인권오름 제 339 호  [기사입력] 2013년 03월 2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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