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오름 제 335 호  [기사입력] 2013년 02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살다 보면 “그림의 떡이야”란 말을 자주 하게 된다. “보는 게 어디야. 보는 것만으로 좋은데”라고 위로하거나 자족하는 말도 으레 듣게 된다. ‘그림의 떡’에 대해 국어사전은 “탐스럽지만,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뜻으로, 바라는 모습이기는 하나 실제로 이용할 수 없거나 이루어지기 힘든 경우를 이르는 말”이라 한다. 인권에 대한 기준들을 들여다볼 때 드는 생각이 딱 이런 경우다.

내 정부가 돌아보지도 않는 인권 침해를 국제사회에 호소한다? 그것도 그냥 호소가 아니라 유엔의 전문기구에 정식으로 진정한다? 그야말로 ‘그림의 떡’ 같은 일이다. 그런데 얼마 전 국제사회는 그런 기준에 대한 도전을 또 하나 성취했다.

“선택의정서의 발효는 중요한 획기적 발전이다. 자신들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를 침해당한 피해자들이 정의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 선택의정서는 국제적 차원에서 기댈 가능성이 전혀 없이 견뎌야만 했던 피해자들이 인권침해를 드러낼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다. 선택의정서는 고립되고 무력했을 개인들이 국제 사회에 자신들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길을 제공할 것이다. … 선택의정서의 발효로 마침내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가 여타의 모든 인권과 동등한 기반 위에 서게 됐다.”

최근 나비 필레이(Navi Pillay) 유엔인권최고대표가 사회권 규약의 선택의정서 발효를 기뻐하며 한 말이다. 지난 2월 5일 사회권 규약 선택의정서에 대한 10번째 비준이 이뤄짐으로써 3개월 뒤면 정식 국제법으로 발효되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말이다.

사회권 규약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줄임말로서 노동권, 사회보장권, 교육권 등을 규정한 대표적인 국제인권법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에 사회권 규약을 비준하여 당사국이 됐고, 현재 이 조약의 전체 당사국 수는 160개국이다. 선택의정서는 이 규약의 이행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별도의 조약을 말한다. 선택의정서는 해당국가에 의해 사회권 규약에 보장된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 또는 그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제삼자가 유엔 사회권위원회에 권리침해를 진정할 수 있는 방법과 절차를 담고 있다. 지난 200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후, 정식 국제법으로 발효되기 위해서는 10개국 이상의 비준이 필요했는데 그 10번째 비준을 지난 5일 우루과이 정부가 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 여러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20여 년 전 국제인권법이란 걸 처음 접했을 때였다. 한국 정부는 사회권 규약에 가입하고 난 후 당사국의 의무사항으로서 사회권을 얼마나 잘 보장하고 있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1993년 처음으로 유엔사회권위원회에 제출했다. 정부는 물론 언론도 알려주지 않는 그 소식을 파악한 인권단체들이 쫓기듯 부랴부랴 모여 대안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유엔사회권위원회의 최종의견과 권고가 나온 것이 1995년이었다. 그때의 주요 지적 내용은 지금 들여다봐도 유효하다.

노동관계법을 사회권 규약에 합치되도록 즉각 개정할 것, 노조활동에 대한 과도한 제한을 해제할 것,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의 적용을 확대할 것 등이었다. 권고는 노동 관련 사안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사회권위원회는 빈곤층에 대한 사회적 지원확대, 무주택자의 보호와 주거권의 실효적 보장, 장애인의 처우 개선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사회권? 그게 뭔데요?”라며 시큰둥해하는 언론사 전화를 붙들고 ‘이건 중요한 문제니 꼭 보도해야 한다’고 설득했던, 아니 매달렸던 일은 그냥 지나간 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때도 노동권을 행사했다 하여 맞고 쫓겨나고 붙들려가던 노동자들이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매 맞고 쫓겨나고 붙들려가고 있는 건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와 관련해 가장 최근에 심사된 3차 보고서에 대한 유엔사회권위원회의 권고(2009년)에는 더 뼈아픈 지적이 있다. “노사관계 관련 노동자에 대한 빈번한 처벌 사례 및 파업 노동자에 대한 과도한 물리력 사용 등에 대해 매우 우려한다. 노동조합권이 한국 내에서 적절히 보장되지 않음을 거듭 우려한다.”는 것이다.

선택의정서의 발효로 국가의 인권의무 이행에 관한 국제기준의 수준이 한층 높아진 이때에 하필이면 더 우울한 기록을 보게 된다. 선택의정서가 빛을 본 때와 같은 달 26일 재능노조는 1,895일의 비정규직 최장기 농성을 기록했고, 27일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철탑 농성 100일을 맞았다.

권리의 당사자들만 홀대받는 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사회권 규약은 다른 국제조약에 비해 탄생부터 엄청 홀대를 받았다. 우선 세계인권선언을 만들 당시에 포함되는 것 자체가 진통을 겪었다. 한 예로 노동조합의 결사권에 대해 선언 기초자들이 미적거리자, 세계의 노동조합들은 노동조합에 대한 권리를 세계인권선언에 넣자고 촉구하는 운동을 강력히 펼쳐야 했다. 세계노동조합연맹은 유엔 경제사회이사회에 전후 노조의 곤경을 분석·보고한 장문의 비망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영향으로 경제사회이사회와 국제노동기구가 협력하여 세계인권선언에서 노동조합 결사권을 다루는 것이 타당하다고 제안했다. 결국, 선언의 기초자들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노동조합의 정당한 요구가 음모로 간주되던 시기는 지나갔다. 노동자의 결사를 음모로 보는 것은 20세기가 아닌 19세기의 개념이다. 이 조항은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사수할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다.”가 선언기초자들의 합의였다.

세계인권선언 속에 사회권이 간신히 자리를 잡았더니, 이번엔 국제조약으로 만들면서 사회권을 불편해하고 떼놓고 가려는 움직임이 컸다. 결국, 한 개가 아니라 ‘자유권’과 ‘사회권’ 두 개로 쪼개진 규약이 만들어지게 됐다. 그다음에는 규약 이행을 심사할 기구도 문제였다. 자유권 규약에 대해서는 담당하는 위원회(Human Rights Committee)를 처음부터 두었는데, 사회권 규약에 대해서는 담당 기구를 두지 않고 경제사회이사회에 떠넘겼다. 그런 상태가 10여 년 이어지다가 1987년에 와서야 ‘유엔 사회권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게 됐다. 더 큰 차이는 개인 진정에 대한 ‘선택의정서’였다. 앞서 말했듯이 선택의정서란 해당 국제조약의 이행을 보완하기 위해 만드는 독립된 조약을 말한다. 현재 주요 국제인권조약은 대부분 개인 진정 절차에 관한 선택의정서를 두고 있다. 선택의정서가 발효되면 해당 국제조약이나 의정서를 비준한 국가를 대상으로 모든 사람이 진정을 제출할 수 있다. 국내의 모든 구제절차를 거친 후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나, 예외적으로 국내 구제 절차가 불합리하게 지연되거나 그 효과성이 없음이 명백하거나 당사자가 그런 절차를 이용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출할 수 있다. 자유권 규약은 개인 진정에 대한 선택의정서를 일찌감치 만들었다(1966년 채택, 1976년 발효). 반면 사회권 규약은 그보다 40여 년이나 늦은 2008년에 와서야 선택의정서를 채택했고, 그 발효를 위한 10개국을 채우는데 또 4년이 걸린 것이다. 늦은 감도 있고 미진한 감도 있겠지만 ‘사회권은 사법기구나 조약기구에 의해 적용될 수 없으며 개인 진정 절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오랜 반대주장을 해묵은 것으로 만든 진전이다.

한국 정부는 아직 이 선택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진정절차를 지금으로선 이용할 수 없다. 또 비준하여 이 절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더라도 국제 절차가 국내의 절차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인권을 보장할 의무를 진 국회도 있고 정부도 있고 법원도 있다. 국제기준과 유엔 사회권위원회 등의 역할은 당사국의 역할을 대체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입법, 정부의 결정과 집행, 법원의 판단 등 모든 분야에서의 의사결정과 특정 행위가 기본적 인권에 합치되는지에 대해 가능한 최대한의 감시와 협의의 길을 열어놓자는 것이다.

정권이 바뀔 때면 새 정부에 바라는 대표적 인권 과제 같은 걸 국내외 인권 단체들은 의례적으로 발표하곤 했다. 이번에는 그런 형식 자체가 무의미해 보인다. 온몸으로 외치고 요구하는 몸의 언어가 전국에 넘치기 때문이다. 지하도, 철탑, 굴다리, 영하의 길거리에 제 몸을 묶은 이들이 넘쳐난 지 오래고 그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지를 새삼 물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살아갈 권리를 외치는 몸의 언어를 홀대하는 한, 제아무리 좋은 국제기준이든 장밋빛 공약이든 ‘그림의 떡’일 뿐이다.

사회권 규약 선택 의정서(The Optional Protocol of the International Covenant on Economic, Social and Cultural Rights)

전문
본 의정서의 당사국들은, … 공포와 빈곤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인간상은 오직 모든 이들이 시민 · 문화 · 경제 · 정치 · 사회적 권리를 누릴 때만이 성취 가능하다는 세계인권선언과 인권에 관한 국제규약의 주장을 상기하며, 모든 인간의 권리와 기초적 자유가 지닌 보편성, 불가분성, 상호의존성, 상호관련을 재확인하며 … 다음 사항에 동의한다.

2조. 통보
당사국의 관할권 하에 있으며, 해당 당사국이 사회권 규약에 규정된 권리를 침해하여 피해자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개인 또는 집단이 진정을 제출할 수 있다. 제삼자가 대신 제출할 경우에 당사자의 동의는 없지만, 진정 작성자가 피해자의 편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사자의 동의가 있어야만 한다.

3조. 허용기준
1. 사회권 위원회는 모든 이용가능한 국내의 구제책이 소진됐다는 것이 확인되지 않는다면 진정을 검토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구제책의 적용이 비합리적으로 지연된 경우에는 이 규정이 해당되지 않는다.
2. 사회권 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진정이 불가함을 선포해야 한다.
(a) 국내 구제책의 소진 이후 1년 안에 진정이 제출되지 않은 경우. 그러나 기간 안에 진정을 제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음을 작성자가 증명할 수 있는 경우는 예외.
(b) 진정의 주제가 되는 사실이 해당 당사국에서 선택의정서의 발효 이전에 발생한 경우. 단 발효 이후에도 해당 사실이 계속되고 있다면 가능.
(c) 동일한 사안이 사회권위원회 또는 여타의 국제적 조사나 해결 절차 하에서 검토됐거나 검토되고 있는 경우.
(d) 사회권 규약의 조항에 부적합한 경우.
(e) 명백하게 근거가 잘못된 경우. 충분하게 구체적이지 않거나 대중 매체가 유포한 보도에 전적으로 기초한 경우.
(f) 진정을 제출할 권리의 남용인 경우.
(g) 익명인 경우 또는 서면이 아닌 경우.

5조. 임시 조치
1. 진정을 접수한 후 그리고 진위의 결정 이전에 어느 때든지, 사회권위원회는 피해자 또는 추정 피해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힐 가능성을 피할 목적으로, 예외적인 상황에서 필수적인 임시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긴급 의견을 해당 국가에 전달할 수 있다.
2. 사회권위원회가 5조 1항에 따라 재량을 행사한 경우에, 그것이 진정에 대한 인정 또는 진위 여부에 대한 결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0조. 국가 간 통보
1. 이 선택의정서의 당사국은 언제든지 이 조항에 따라 다음 사항을 선언할 수 있다. 규약의 한 당사국이 볼 때 다른 당사국이 사회권 규약하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효력을 갖는 통보를 접수하고 심사할 사회권위원회의 권한을 인정한다고 선언할 수 있다. 이 조항에 따른 통보는 오직 그런 내용의 선언을 한 당사국이 제출한 경우에만 접수하고 심사할 수 있다. 그런 내용의 선언을 하지 않은 당사국에 관한 것이라면 사회권위원회는 어떤 통보도 접수하지 않는다.

11조. 조사 절차
1. 현 선택의정서의 당사국은 어느 때든지 현 조항에 대한 사회권위원회의 권한을 인정한다고 선언할 수 있다.
2. 사회권위원회는 사회권 규약에 규정된 어떠한 권리에 대해서든, 당사국에 의한 대규모의 체계적인 인권침해를 나타내는 신뢰할 만한 정보를 입수하면, 해당 국가에 대해 정보 검토에 협력할 것과 관련 정보에 관한 의견을 제출할 것을 권할 수 있다.
3. 이와 관련된 이용가능한 여타의 신뢰할만한 정보 뿐 아니라 관련 국가가 제출한 의견을 검토하기 위하여, 사회권위원회는 한 명 이상의 위원을 임명하여 조사를 수행하고 긴급보고서를 제출하도록 할 수 있다. 해당 국가가 인정하거나 동의한 경우에는 조사 활동에 해당국 방문이 포함될 수 있다.
4. 이러한 조사는 비공개로 수행돼야 하며 모든 단계에서 당사국의 협력이 추구돼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335 호  [기사입력] 2013년 02월 27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31 호  [기사입력] 2013년 01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지난 연말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젊디젊은 노동자가 자살했다. 가슴이 꽉 막혀와 혼자서 조문을 갔다. 부산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인데 체증에 갇혀 택시미터기 요금만 하염없이 올라갔다. ‘휴일인데 왜 이리 막히는 것이냐’는 내 물음에 운전사는 ‘대기업 백화점과 문화센터가 들어선 이후 사람들이 죄다 그리로 몰려들어 그런다’고 했다. 그곳을 벗어나자 ‘골목상권 다 죽는다’는 초라한 현수막들이 인적 없는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죽은 이의 아내는 젊다 못해 앳된 얼굴이었고, 두 아이를 챙기고 헤쳐가야 할 삶을 담아내야 해서인지 그녀의 소복 자락은 너무 넓었다. 슬픔의 두터운 장막이 덮인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다시 부산역으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 앞에 궁색한 차림의 모녀가 섰다. 여인은 한파임에도 겨울 외투조차 입지 못했다. 그나마 아이에게는 모자 달린 외투를 입혔지만 어디서 얻은 것인지 아주 낡아 보였다. 에스컬레이터가 끝나갈 무렵 여인이 갑자기 아이 손을 놓았다. 제 몸 가눌만한 나이가 아닌 어린아이는 위태롭게 균형을 잃고 빙빙 돌았다. 깜짝 놀라 나를 비롯해 몇몇 사람들이 ‘어! 어!’하고 소리를 냈다. 그때 뒤를 돌아본 여인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성난 눈이었다. “내 새끼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들은 신경 꺼!”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내 뒤를 향해 계속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이 나한테 뭐 해준 게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여인의 분노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듯 말 듯한 가운데도 아이에게 그러는 건 원망스러웠다. 내가 그녀를 바라본 눈길이 그녀에게 어떤 상처를 주었을까 하는 생각은 잠깐이었다. 어른들의 소동과 상관없이 방글거리기만 하던 아이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해 기차에 오르면서 중얼거렸다. 온 천지가 레미제라블이구나!

유엔의 특별인권절차 중에 특별보고관이란 게 있고, 그중에서도 ‘극빈과 인권’을 전담하는 특별보고관이 있다. ‘극빈과 인권에 관한 특별보고관’은 <빈곤의 형벌화>에 관한 보고서(<인권오름> 제271호 참조) 등을 통해 빈민을 처벌하고 분리하고 통제하는 조치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그간 노력의 결실이 2012년 9월에 인권이사회에서 채택된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원칙>이다. 2001년부터 십 년 이상의 협의를 통해 채택된 이 원칙은 국제인권법에 따른 당사국의 의무를 각국의 정책 수립자들이 빈곤 정책에 반영토록 할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특별보고관은 이 원칙이 빈민의 인권에 초점을 둔 빈곤정책을 다룬 “최초의 지구적 기준”이라고 그 의의를 밝혔다.

“극빈자의 고유한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모든 공공정책을 통해 알려져야만 한다”는 것이 원칙 중의 원칙이기에 “낙인화와 편견을 피해야” 하고 국가는 “빈민의 권리에 적대적으로 편향된 법과 규제를 폐지하거나 고쳐야 한다”고 했다. 이런 대원칙에 근거해서 국제인권법에 규정된 구체적 권리들을 빈민의 입장에서 상술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국가의 책무만이 아니라 기업의 책임을 콕 짚고 있다는 점이다. 자기 기업의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외면하고 사회적으로 한 약속에 대한 무시를 일삼는 기업에 “인권에 상당히 유의해야” 하며 “기업 활동이 인권에 끼치는 악영향을 방지하고 완화해야 한다”는 이 원칙이 어떻게 스며들 수 있을까 난망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이런 원칙의 존재 의의는 최선의 인권을 향해 나아갈 방향탐지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 원칙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일까? 늘 반복적으로 재연되던 현상이지만 대선을 전후로 ‘안전’과 ‘복지’가 특히 강조됐다. ‘안전’은 불안과 걱정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문제는 누구의 입장에서 무엇을 불안과 걱정으로 정하느냐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안’에 속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밖’으로부터의 안전을 추구하면 문을 닫아걸게 된다. 상대적으로 ‘밖’에 속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꼭꼭 닫힌 문이 생계의 불안뿐 아니라 불신과 무시와 편견으로 뭉친 차별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 상태에서는 더 나아지리란 삶의 전망을 가질 수 없게 되고 될 대로 되란 식이 되어도 탓할 수가 없다.

불안의 원인이 차별적으로 선택되고, 모두의 자유가 아니라 일부의 자유가 우선적으로 선호되는 안전의 선택이 이뤄진다. 그런 선택 속에서 누구에게는 이동이 자유롭고 누구에게는 이동이 가로막힌다. 누구는 생활보장을 말하지만, 누구에게는 생계보장도 감지덕지다. 선택에 따른 이해당사자의 구분은 심해지고 사회 공동체의 연대감은 희박해진다. 그런 사회일수록 불안의 근본원인은 커져가고 걸어 잠가야 할 문의 자물쇠만 늘어간다. 그럴 때 ‘안전’은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치안’으로 후퇴해버린다. 타자, 그중에서도 가난하고 권리를 침해당한 타자로부터 내 수준의 소유와 생활을 지키려는 치안은 결사의 자유나 근본적인 사회보장 같은 것을 촉진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복지’도 ‘인간다운 삶의 보장’이라는 차원에서 더 이상의 추락을 방지한다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다. 이 둘의 결합이 ‘치안복지’라는 간판이 되어 동네방네 경찰서와 관공서에 내걸리고 있는 게 두렵다.

‘치안복지’의 눈으로 부산역에서 만난 여인을 투시해본다. 한겨울에 외투도 갖추지 못한 여인, 상처 입은 짐승처럼 신음하는 그 여인은 자기 삶의 주인이 될 능력은커녕 의욕도 없어 보이는 인간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녀는 감시와 치안 관리의 대상이 돼야 마땅해 보인다. 가난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 당선자가 4대악으로 규정한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 불량식품’의 피해자이거나 가해자인 동시에 그것의 온상으로 보여진다. 그녀의 가난은 반사회성과 범죄 가능성이기 때문에 앞으로 그게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니 미리 조치를 취한다는 측면에서 관리될 것이다. 그녀의 행색으로는 공공역사 출입이 어렵게 될 수도 있고 대규모 상업시설 같은 데서는 경비한테 걸러질 수도 있다.

그런 그녀가 눈에 안 띄면 안 띌수록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입장에서는 ‘치안이 곧 복지다’는 말이 당연하게 들릴 것 같다. 하지만 그녀의 입장이 된다면 ‘치안이 복지’란 말은 나한테 해준 것도 없으면서 날 비난하고 공공영역에서 아예 쫓아내겠다는 말로 들릴 것이다.

어릴 적 동생들 중 하나가 도벽이 심했다. 도벽이 발각 날 때마다 나는 하루 종일 일 나간 엄마 대신에 맏이라는 이유로 이웃에게 불려 갔다. 나를 부른 이웃들이 내게 안긴 것은 서슬 퍼런 추궁이 아니었다. “네 엄마 걱정하실 테니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으마. 네가 맏이니까 동생 잘 돌봐줘라. 어릴 때 잠시 그럴 수 있다.”고 다독여주셨다. 한번은 호떡 파는 아주머니가 길 가던 나를 부르더니 호떡을 공짜로 잔뜩 안겨주셨다. “언제든지 공짜로 줄 테니 네 동생 갖다 주고 동생 건사 잘하라.”고 하셨다. 동생의 도벽은 외제 상표가 박힌 잠바를 몰래 숨겨두고 입은 것으로 결국 엄마에게 발각이 났고, 한밤중에 혼이 난 동생은 컴컴한 개천에 뛰어들어 죽겠다고 했다. 그런 동생을 찾아 개천가를 헤매던 밤은 참 추웠다. 참 아픈 기억이지만 ‘한때 그러는 것이니 잘 돌봐주라’던 이웃들의 인정이 함께 떠오르기에 나쁘지만은 않다. ‘잠시 한때’일 뿐이고 ‘관심으로 돌보면 괜찮아진다’던 이웃들의 인정과 믿음이 내가 받은 최고의 복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나와 내 가족에 대한 존중이었다.

이 원칙을 기초한 특별보고관은 빈민의 권리에 초점을 둔 빈곤 정책을 강조했다. 빈곤정책이라 이름 붙였다고 해서 죄다 빈곤정책이 될 수는 없으며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그 안에 담겨야 한다고 했다. “빈곤을 범죄시하는 정책은 빈곤하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심각한 오해와 그들이 고통받고 있는 광범위한 차별과 그로 인해 상호 재강화되는 불이익에 대한 무지를 반영한다.”던 특별보고관의 말을 곱씹어보게 된다.

극빈과 인권에 관한 유엔 원칙(Guiding principles on extreme poverty and human rights, 2012년 9월 27일 유엔인권이사회 채택)

I. 전문

1. 경제 발전, 기술 수단, 재정 자원이 전례 없는 수준에 이른 세계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극빈 상태로 사는 것은 도덕적 폭거이다. 이 원칙은 극빈 퇴치가 도덕적 의무일 뿐 아니라 현존하는 국제인권법에 따른 법적 의무라는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인권법의 규범과 원칙들은 빈곤을 저지하고 빈민에게 영향을 끼치는 모든 공공정책을 지도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해야만 한다.

2. 빈곤은 단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소득’과 ‘존엄하게 살 기본 역량’ 둘 다의 결여를 둘러싼 다차원적인 현상이다. 유엔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는 2001년 빈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빈곤은 적합한 생활 기준과 여타의 시민적‧문화적‧경제적‧정치적 및 사회적 권리의 향유에 필수적인 자원, 역량, 선택, 안전과 힘의 지속적이고 만성적인 박탈로 인한 인간 조건이다.”(E/C.12/2001/10, para.8) 또 빈곤은 “소득 빈곤, 인간 발전의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조합”(A/HRC/7/15, para13)으로서, 기본적인 보장의 지속적인 결여는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할 기회 또는 예견할만한 장래에 권리를 재획득할 기회를 혹독하게 망치면서, 사람들의 삶의 다양한 측면에 일제히 영향을 끼치는 것(E/CN.4/Sub.2/1996/13)으로 정의돼왔다.

3. 빈곤은 그 자체로 긴급한 인권의 문제이다. 빈곤은 인권침해의 원인이자 결과이며 여타 침해를 낳는 조건이다. 극빈은 시민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에 대한 침해를 복합적으로 강화할 뿐 아니라 극빈 상태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존엄성과 평등에 대한 정례적인 부인을 경험한다.

4. 극빈자는 자신들의 권리와 권한에 접근함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신체적, 경제적, 문화적 및 사회적) 장벽에 직면한다. 결과적으로, 극빈자는 상호연관되고 상호강화하는 많은 박탈을 경험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위험한 노동 조건, 위험한 주거, 영양가 있는 음식의 부족, 불평등한 사법접근, 정치적 힘의 결여, 제한된 건강보호접근 등이며 이로 인해 극빈자는 권리 실현을 방해받고 계속 가난하다. 극빈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무력함, 낙인화, 차별, 배제, 물질적 결핍 등 모두 서로를 상호 강화하는 것들의 악순환 속에서 살아간다.

5. 극빈은 불가피한 게 아니다. 극빈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국가 및 여타 경제 행위자들의 행위와 방임에 의해 만들어졌고, 가능했고, 지속된 것이다. 과거에 공공정책은 흔히 극빈자에게 도달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세대를 통해 빈곤이 전달됐다. 구조적이고 체제적인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및 문화적) 불평등은 흔히 다뤄지지 않은 채로 남아 빈곤을 더욱 견고히 한다. 국내와 국제적 차원에서 정책 일관성의 결여는 흔히 빈곤 퇴치에 대한 약속을 해치거나 약속과는 모순된다.

6. 극빈이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는 것의 의미는 극빈을 퇴치할 도구가 손에 미칠 만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인권적 접근은 극빈자를 권리의 보유자이자 변화의 주체로서의 인정에 기초한 장기적 극빈 퇴치의 틀을 제공한다.

7. 인권적 접근은 극빈자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존중하며, 공공정책 구상을 포함하여 공공의 삶에 의미 있고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고 책임성 있는 의무 담지자가 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한다. 국제인권법에 규정된 규범들은 빈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수립하고 이행할 때 자국의 국제적 인권 의무를 고려할 것을 당사국들에 요구하고 있다.

II. 목적

11. 이 원칙의 목적은 빈곤과의 싸움에 대한 노력에 인권 기준을 적용할 방법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다. ……

12. 이 원칙은 빈민의 역량 강화란 빈민의 권리를 실현하는 수단인 동시에 그 자체가 목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관계적이고 다차원적인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

III. 기초 원칙들

15. 인간 존엄성은 인권의 기초 중의 기초다. 인간 존엄성은 평등과 비차별의 원칙과 밀접하게 연결돼있다. 극빈자의 고유한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모든 공공정책을 통해 알려져야만 한다. 국가 기관과 사적 개인들은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고, 낙인화와 편견을 피해야 하고, 빈민이 자신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취하는 노력을 인정하고 지원해야만 한다. ……

17. 빈곤을 극복하려는 공공 정책은 빈민의 모든 인권을 동등하게 존중하고, 보호하고, 실현하는데 기반해야만 한다. 어떤 영역에서든 어떤 정책이든지 빈곤을 악화시키거나 빈민에게 불균형한 부정적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 ……

19. 국가는 빈민의 권리, 이익 및 생계에 대해 적대적으로 편향된 법과 규제를 폐지하거나 고쳐야 한다. 경제적 상황 또는 여타의 빈곤과 결합된 이유에 근거한 직간접적인 모든 형태의 입법적‧행정적 차별은 규명되고 철폐돼야 한다. ……

32. 극빈자의 대부분은 아동이며 유년기의 빈곤은 성인기 빈곤의 근본 원인이기에 아동의 권리에 우선성을 부여해야만 한다. 아주 짧은 기간의 박탈과 배제조차도 아동의 생존과 발전의 권리에 치명적이고 돌이킬 수 없는 해를 끼칠 수 있다. 빈곤퇴치를 위해 국가는 유년기 빈곤과 맞설 즉각적인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 ……

35. 국가는 아동의 삶과 관련된 의사결정과정에서 아동의 의견이 청취될 수 있는 권리를 증진해야만 한다. ……

45. 극빈자는 흔히 정부 부조 또는 자선의 수동적인 수혜자로 비춰진다. 하지만 사실 그들은 정책수립자와 여타의 공무원들이 그들에게 설명책임을 져야 할 권한을 가진 권리 보유자들이다. ……

V. 구체적 권리들

63. 경제적 독립성이 거의 없는 극빈자는 안전과 보호를 구할 가능성이 훨씬 더 적다. 법집행기관은 흔히 극빈자를 분류하고 고의적으로 표적으로 삼는다. 빈민 여성과 소녀는 특히 성에 근거한 폭력에 영향 받는다. ……

64. (a) 국가는 극빈자의 생명권과 신체적 존엄성이 동등하게 존중‧보호‧실현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특별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법집행공무원에 대한 훈련, 치안 방법에 대한 재고,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게 접근 가능한 명확한 책무성 체계의 수립 등이 포함된다.
(b) 국가는 가정 폭력의 피해 여성을 위한 쉼터 제공을 포함하여 빈민을 대상으로 자행되는 성폭력에 제동을 걸 구체적 전략과 체계를 개발해야 한다. ……

65. 차별을 포함하여 다양한 구조적 및 사회적 요인으로 인해 빈민은 불균등하게 높은 빈도로 형사 사법 체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빈민은 또한 형사 사법 체제를 벗어나는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는다. 결과적으로 불균등하게 많은 수의 극빈자와 가장 배제된 사람들이 체포, 구금, 투옥된다. 상당수가 보석 또는 심사에 대한 의미 있는 수단 없이 장기간의 공판 전 구금에 처한다. 흔히 적합한 법적 대리인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빈민은 유죄선고를 받기 쉽다. 구금된 동안 빈민은 위험하거나 비위생적인 조건, 학대나 늘어지는 지연 등 권리 침해에 항의할만한 수단을 갖지 못한다. 극빈자에게 부과되는 벌금은 그들에게 불균등한 영향을 끼치고 상황을 악화시키며 빈곤의 악순환을 지속시킨다. 특히 홈리스는 이동의 자유에 대한 제한을 자주 받으며 공공장소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범죄자로 간주된다.

66. (a) 국가는 빈민에게 불균등한 영향을 끼치는 형사적 제재와 투옥 절차를 평가하고 다뤄야 한다. ……
(c) 공공장소에서의 생존 활동, 가령 잠자기, 구걸, 먹기, 개인적인 위생 활동의 수행 등을 범죄화하는 법을 철폐 또는 개혁해야만 한다.
(d) 극빈자, 특히 구걸, 공공장소 이용, 복지 사기 등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불균등한 벌금 납부를 요구하는 제재 절차를 재고해야 하고, 벌금을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벌금 불이행에 대한 구금형을 폐지하는 것을 고려해야만 한다. ……

84. (a) 국가는 존엄한 노동 조건에 대한 권리의 향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엄격한 노동 규제를 채택해야 하고, 적합한 역량과 자원을 가진 노동감시관을 통해 그것의 이행을 보장해야만 한다.
(b) 국가는 자신과 가족의 적절한 생활 수준에 대한 접근이 가능하기에 충분한 임금이 모든 노동자에게 지급될 것을 보장해야 한다.
(c) 국가는 공정하고 우호적인 노동조건에 관한 법적 기준이 비공식 부문 경제에도 확대되고 존중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하며 비공식 노동 부문을 평가할 수 있는 산재된 자료를 수집해야 한다. ……
(h) 국가는 가난한 노동자들의 정체성과 목소리와 대표성이 노동 개혁에 대한 사회적 및 정치적 대화 속에서 강화될 수 있도록 결사의 자유를 존중하고 증진하고 실현해야 한다. ……

VII. 기업을 포함한 비-국가 행위자의 역할

100. 기업을 포함한 비-국가 행위자에게는 최소한 인권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존중의 의무란 기업의 활동, 생산 또는 서비스를 통해 반인권적인 영향을 야기하거나 그런 영향에 기여하는 일을 피해야 하고, 반인권적 영향이 발생하면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101. 기업은 빈민의 인권을 포함하여 인권 존중에 대한 명확한 정책 약속을 채택해야만 한다. 기업은 기업 자신의 활동과 사업 파트너들에 의해 야기된 인권에 대한 실제적‧잠재적 영향을 규명하고 평가하기 위하여 인권에 상당히 유의하는 과정을 취해야만 한다. 기업은 기업의 활동이 빈민의 권리에 끼치는 악영향을 방지하고 완화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그런 악영향에 직면하는 개인 또는 지역사회를 위한 경영차원의 고충처리장치 수립 또는 참여가 포함된다.
102. 제삼자에 의한 인권침해로부터 보호할 국가의 의무는 효과적인 정책, 입법, 규제 및 판결을 통해 인권침해를 방지, 조사, 처벌, 보상할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한다. 국가는 기업과 관련된 침해로 영향받은 사람들에게 신속하고 접근가능하며 효과적인 구제를 보장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사법적 구제, 비사법적 책무성, 고충처리장치 등이 포함된다.

인권오름 제 331 호  [기사입력] 2013년 01월 23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27 호  [기사입력] 2012년 12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대선이 끝났다. 개표 소식으로 뒤숭숭한 밤,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잠자리에서 여러 편의 꿈을 꿨다. 그중에서 한 꿈의 내용은 대강 이랬다. 한 강의실에서 인권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데 아무도 듣지 않는다. 칠판에 몇 자 쓰려는데 뭔가가 칠판을 가로막아 한 자도 쓸 수가 없다. 외면하는 칠판을 돌아서니 역시 외면하는 사람들의 얼굴뿐이다. 한동안 말을 멈춘 나는 결국 강연 포기를 선언했다. 그런 나에게 대한문에 데려가 달라고 누군가가 찾아왔다. 나는 시큰둥하게 그냥 저쪽으로 가면 된다고 대답하고 보니 길이 꽉 막혀있다. 그런 꿈에서 깨어나니 새벽인데 벌써 옆 공사장에서 철근을 우당탕탕 나르는 일꾼들의 소리, 부식 차량의 메가폰 소리가 골목을 채우고 있다. 또 아침이 시작되나 보다.

오늘 아침 따라 지난 5년간 첩첩 쌓여온 문제들이 더 무거워 보인다. 아니, 문제들이 아니라 그 짐을 짊어져 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와 외침들이 들린다. 어떻게 새겨듣고 챙겨야 할지 가슴을 긁어대는 외침들이다.

2008년 5월 2일 청계천에서 ‘광우병 의심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에 항의하는 시민들의 촛불 문화제가 시작돼 두 달간 이어졌다. 대통령은 두 번씩이나 사과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물대포와 최루탄이 동원됐고 촛불시민들에 대한 무더기 사법처리가 감행됐다. 진압에 동원됐던 한 의경이 양심선언을 했다.

제게 있어 저항은 주체성을 가지고 제 삶을 만들어나가는 일입니다. 자신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지니고 자신의 삶의 색채를 더해가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삶과 조화를 이루며 공존하는 것은 누구에게든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억압하는 것을 똑바로 바라보고, 그에 대해 저항하는 것은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지금껏 억압들에 대해 순응하며 살아온 제 삶을 내던지며 저항을 통해 제 삶을 찾아가야 한다고 느낍니다.

… 지난 몇 달 간의 촛불집회를 진압대원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전 이런 생각을 했어요. 촛불을 들며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들, 미국과의 쇠고기 재협상 요구, 공기업, 의료보험 민영화 반대, 경쟁으로 내모는 교육 제도에 대한 반대 같은 것들이 이런 목소리로 느껴지더군요. 권력은 언제든지 우리의 삶을 위협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해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으로 말이에요. … 우리를 사지로 내모는 권력은 어디 숨었는지 보이지도 않고, 암묵적으로는 그저 적으로 상정된 시위대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며 상처를 덮고 합리화를 시키는 거죠. 이런 나날이 반복되고, 저는 제 인간성이 하얗게 타버리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는 저항한다” 2008년 7월 28일 이길준 이경 양심선언문)

촛불 집회가 계속되는 한편에서 노동자들의 긴 고통의 시간도 이어졌다. 2008년 5월에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힘겨운 싸움이 진행형이었다. 그해 5월 16일은 기륭전자 1000일, 재능학습지 150일, 뉴코아 330일, 이랜드 330일, KTX 승무원 800일 투쟁을 기록했다. 그 시간 동안 그녀들은 1인 시위, 점거투쟁, 단식, 3보 1배, 삭발 등 안 해본 것이 없었다.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와 징계를 받고 구속, 수배, 민형사상 손해배상청구와 형사고발 등 받을 수 있는 고통은 다 받은 그녀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들이 [“우리는 더 이상 1회용 소모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당한 인권을 가진 노동자입니다.” 이 한마디를 지키는 일에 왜 이렇게 힘들고 긴 시간이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탄식할 때, 그래도 우리는 그 탄식이 보여준 그들의 투쟁에서 움트는 희망을 봅니다. …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이 버틴 이 작고 여린 희망에 힘을 모아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노동부와 검찰과 회사 스스로가 불법 파견을 인정하고도 그에 대한 피해를 복원하지 않는 회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법을 만들어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어처구니없는 국회를 우린 또한 이해할 수 없습니다. … 우리가 지금 이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면, 비정규 법안을 바로잡는 일에 나서지 못한다면 우리도 시대의 죄인임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 희망은 연대로 오는 것임을, 어둠은 끝내 희망으로 오는 빛을 이길 수 없음을 확인합시다. (2008년 5월 16일, 기륭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 1,000일, 1000인 선언문)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진전을 오랫동안 호의적으로 봐왔던 국제인권단체들이 염려의 눈길로 바뀌어 한국의 인권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국제앰네스티(AI) 등이 한국의 인권상황에 대해 긴급호소와 권고 등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들끓는 분노로 일어선 이상, 사람들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귀 기울이지 않는 지도자들은 분명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2008년 5월 연례보고서 발표 기자회견, 아이린 칸,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2008년은 시작에 불과했다. 2009년 새해 벽두의 용산 참사, 한여름 쌍용자동차에서의 대규모 정리해고, 생수와 의약품의 반입까지 가로막힌 77일간의 공장점거파업, 그리고 이어진 살인진압이 남긴 상흔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두 사건은 “여기 사람이 있다!”는 절규와 “함께 살자!”는 호소를 남겼다.

예술인, 종교인은 진선미를 추구한다.
고통받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 진실은 임기가 없다. 임기 후에 보자!
치부가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드러나면 비틀거리게 될 것이다.

진선미, 아름다운 인간성을 추구하는 마음을 훼손하고 있다.
안될 일이다. … 공권력이 백성을 저버리고 권력의 조종을 받으면 똥개가 된다.
그 때부터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 (2009년 4월 4일 용산참사 현장미사에서 문정현 신부)

같이 살자는 상생의 요구가 묵살되고 일부만이라도 살아남자는 정글의 법칙이 관철된 것이 쌍용차 노동자가 아닌 누군가의 성공일까요? 인권이 설자리를 잃고 경제적 계산만이 남은 자리에서 소수가 살아남았음을 합리적인 해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사회는 그 구성원 모두가 노동을 통하여 행복하여질 기회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믿는다면, 사회가 개인의 가치추구 기회를 보장함과 함께 공동체적 가치를 추구하여야 한다고 동의한다면 쌍용자동차의 해결 방안이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쌍용차 사태는 어느 누구만의 패배이고 누군가의 승리가 아니라 모두가 그리고 가치가 패배한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만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총체적 실패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우리 현실은 이러한 실패와 패배를 지금 이 시점에서 바로잡을 힘과 비전을 모아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점입니다. 그러나 쌍용차 사태에서 보여준 우리 사회의 실패가 최종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리 되어서도 아니됩니다. (2009년 11월 쌍용자동차 인권침해 백서 발간사)

여러 분야의 인권상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공권력의 인권침해에 대해 감시‧비판하라고 만든 국가인권위원회마저 퇴행을 거듭했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한 21% 조직축소를 단행했고 ‘무자격자’란 별칭을 얻은 현병철 인권위원장이 임명됐다. 정권의 인권위 무력화는 현실이 되었고, 국가인권위는 피디수첩사건, 촛불시위 등 정권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북한인권만을 유독 강조했다. 현병철은 이명박 정권 말기에 연임되기까지 했다. 5년 내내 국가인권위에 대한 비판과 반발이 끊이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중 하나의 사건은 수상거부였다. 2010년, 국가인권위가 세계인권의 날에 수여하는 상을 받게 된 수상 예정자들이 “인권위는 상을 줄 자격이 없다”며 수상거부를 한 것이다.

인권에세이로 선정된 작품들을 살펴보면 많은 내용들이 ‘언론, 표현의 자유’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위가 직접 선정한 작품들에서 이야기하는 인권의 ‘반도 못 따라가고 있는’ 인권위의 모습을 제대로 돌아보아야 한다. 인권위원장으로서 자격이 없는 현병철 위원장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어온 것에 대해 책임지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내가 에세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인권’을 지금 현병철이라는 사람이 국가인권위원회에서 끝도 없이 밑바닥으로 추락시키고 있다. 인권을 보장하고자 안간힘을 쓰고 애를 써야 할 국가인권위가 오히려 인권을 모욕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정말로 지금 상황에 심각성을 느끼고 조금이라도 성찰할 의지가 생긴다면, 감히 인권에세이 수상자인 청소년들에게 “참 잘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상 줄게요” 같은 말을 함부로 내뱉을 수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나는 현재의 국가인권위원회를 제대로 된 국가인권위원회로 인정할 수 없으며 현병철 위원장이 위원장으로 앉아있는 인권위에서 주는 상은 받고 싶지 않다. 현병철 위원장은 나에게 상을 줄 자격조차 없다. 나는 2010 인권에세이 대상 수상을 거부한다. (2010년 12월 7일, 인권에세이 대상 고3 김은총, “현병철 위원장은 나에게 상을 줄 자격조차 없다”)

그나마 우리를 술렁거리게 한 것은 ‘희망버스’의 출현이었다. 2011년 크레인에 올라가 309일 만에 내려온 김진숙 씨의 고공농성을 지지하기 위해 전국에서 여러 차례 희망버스가 모여들었다. 왜 숱한 이들이 그 버스에 올랐는지를 김진숙 씨는 이렇게 얘기했다.

2차 희망버스 때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평택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왔습니다. 물집이 터져 온통 상처투성이가 된 저 발들을 사진으로 보면 생각했습니다.
저들은 어떤 마음으로 걸었을까? 15명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묻은 저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을까?
3차때는 우리 조합원들이 쌍용차에서 자전거를 타고 부산까지 왔습니다. 지친 해고자동생의 자전거에 끈을 묶고 달리던 비해고자 형의 사진을 봤습니다. 형은 동생이 얼마나 안쓰러웠을까요. 동생은 형한테 얼마나 미안했을까요.
최루액, 물대포를 맞고 곤봉에 찢겼던 그 무서운 밤을 보내고, 애가 타는 거리를 두고 돌아서야 했던 그 무참한 낮을 보내고, 다시와준 여러분 전 여러분이 참 눈물겹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같은 곳을 쳐다보며, 같은 기도를 올리며, 같은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마음이 이리도 간절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랑이 이리도 뜨거울 수 있을까요.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우린 당당했고, 저들은 초조해 했습니다. … 젊음이 희망을 이길 수 없듯이 돈에 대한 집착만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생에 아무런 집착을 없는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 사심없이 하나가 된 우리를 저들은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영세상인, 철거민, 비정규직과 해고된 노동자들, 장애인, 성적소수자, 여성, 등록금 많이 내는 학생들, 도처에 무너지고 짓밟히는 삶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탄압할 버스가 없었습니다. 부정과 부패와 파괴와 야만을 향해 질주하는 이 절망의 버스에서 내릴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제야 우리는 비로서 우리손으로 새로운 버스를 장만했습니다. 희망으로 가는 버스, 미련을 향해 힘차게 전진하는 버스, 우리가 모두 주인이고 우리 모두가 승객인 버스. 희망버스 승객 여러분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길거리로 내몰린, 길거리에서 쫓겨다니는 우리 조합원들의 유일한 희망이고 간절한 기다림이었던 여러분. 평생을 일한 공장에서 내쫓고 그 노동자들을 서슴없이 외부세력이라 부르는 저들의 오만과 독선에 피멍이 든 우리 조합원들을 지켜주신 여러분. 퇴거 명령이 언제 집행될지 몰라 함께 모여 밤을 세우며 부업을 한다는 우리 가족들을 지켜주신 여러분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머지않아 우리 모두 웃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여러분들과 함께 얼싸안을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그날까지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 (2011년 7월 30일, 3차 희망버스 김진숙 지도위원 연설내용)

‘혹시나, 혹시나’ 하다가 ‘결국’이었다. 2012년 3월 7일 구럼비 바위 발파가 시작됐다. 달려가 본 현장은 아비규환이었고 지금도 24시간 공사강행으로 아비규환일 것이다. 보다 못한 이들이 최근 11월 말에는 강정해군기지 예산안 통과를 막겠다고 한겨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머리를 깎고 단식노숙농성을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대선이 끝났고 그 예산안에 대한 처리를 어떻게 할지가 새 정권이 내놓는 우리의 인권과 자연을 향한 대답의 시작일 것이다.

강정아 너는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고을이지만,
너에게서 온 나라의 평화가 시작되리라
너는 부서지고 깨어져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너의 슬픔 너의 아픔 너의 피눈물 고통과 함께 한단다.~♬ (‘강정아’ 노래가사, 강우일 주교 글, 권성일 곡)

대선과 더불어 실시된 보궐선거로 당선된 서울시 교육감의 첫마디가 ‘학생인권조례를 시급히 손보는 것’이라 한다. 거리에서 학생인권조례 발의를 위한 서명 운동에 발을 동동거리며 갈증과 배고픔을 참던 숱한 얼굴들이 아른거린다. 9만 7천여 명의 주민발의로 성사된 서울학생인권조례를 간단히 손보는 일은 없어야 한다. 얼마 전에는 서울시 어린이‧청소년 인권조례까지 통과된 마당이다. 인권에 대한 의무에는 ‘역행과 퇴행의 금지’라는 것이 있다. 지금 손보겠다는 인권의 주인인 아동이 이런 말을 했었다.

가끔 어른들을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먼저 다가서면 ‘넌 아직 애라서 안돼’ 라는 말과 ‘넌 못 하는거야’ 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어린 저도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런 말을 들으면 많이 속상합니다.

저희 학교에 가난하고 약간의 장애가 있는 친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에게서 냄새가 난다고,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하는 친구들이 몇 명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난하거나 조금의 장애가 있는 친구를 오히려 도와주고 함께 놀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5학년 2반 회장입니다. 하지만 공부를 아주 잘하지는 못합니다. 시험 점수가 잘 나오지 않으면 회장인데 모범이 되지 못한다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좋지만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다른 친구들과 비교를 하거나, 무시를 당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나이도 어리고, 몸도 작고, 힘도 약하고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이도 어른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생명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린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보다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특히 소수자라고 따돌림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사람일수록 더 소중히 아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어른들은 임신, 출산, 성적 지향 같은 말은 빼야된다고 했다고 합니다.
차별받는 어린이가 있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면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된다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이유로든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어린이들 모두를 소중하게 대해주세요.
우리 어린이들이 서로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 어린이들이 매일매일 즐겁게 지낼 수 있게 해주세요.
우리 어린이들에게 함부로 말하지 말아주세요. (2012년 10월 12일, ‘서울시 어린이 청소년 인권조례 통과 촉구 기자회견’에서, 초등학생 장준하)

지난 5년 숱한 장례식을 지켜봐야 했다. 23분의 쌍차 노동자와 가족들, 박지연, 황유미, 이윤정, 김주영 ….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병을 얻은 노동자들과 활동보조인 없이 화마에 쓰러져 간 장애인뿐만이 아니다. 살인단속에 쫓겨 다치고 병든 이주노동자들, 일제고사와 경쟁강화에 자살한 청소년들,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고 애도하지 못한 죽음, 살아 있을 때 그 손을 붙잡지 못한 죽음들이 너무 많았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심정으로 서울 대한문 앞에 ‘함께 살자!’ 농성장이 들어선지 한 달이 넘었다. 이들의 요구엔 늘 ‘대선 이후에’란 답이 돌아왔다. 이제 그 때가 왔다. 이제 ‘이후’는 없다. 지금 우리의 삶이 요구하는 바에 대답해야 한다. ‘함께 살자’를 고민하면서 나는 아래와 같은 구호들을 지어보았다. 내 컴퓨터 한 귀퉁이에 저장돼 있던 것인데 오늘 아침 문득 열어보고 싶었다.

함께 살자! 서로 돌보자! 쫓겨난 이들을 제자리로!

상처뿐인 성장 그만하고 함께 살기 시작하자!
승자독식 살인경쟁 그만하고 서로존중 시작하자!
엘리트와 자본 정치 걷어내고 민심정치 시작하자.

노동자를 존중하자.
비정규직 정리해고 그만하자.

청년을 존중하자.
스펙경쟁 그만하고 지금 여기서 행복하자.

생명자연 존중하자.
골프장, 송전소, 핵발전소 걷어내고 생태를 복원하자.

생명평화 존중하자.
해군기지 중단하고 강정마을 살려내자. 대결안보 그만하고 평화안보 세워내자.

살림살이 존중하자.
대기업의 폭식횡포 모든 살림 뒤흔든다. 영세상인 자영업자 골목에서 함께살자.

강제퇴거 금지하고 삶의 터전 존중하자.
누군가 쫓겨나면 그 다음은 내 차례다.

사회적 약자를 존중하자.
구분 짓고 차별 말고 보편복지로 함께 살자.

밥이 하늘이다. 농민을 존중하자.
농업포기 죽음이요 농업증진 살길이다.


대선이 끝난 아침에 급하게 이 글을 썼다. 글을 쓰는 동안 예고 없던 방문객이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여기 오면 인권을 공부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겨울 동안에 준비하여 봄에 할 것이라고, 새봄에 공부 일정이 잡히면 꼭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갑자기 내 손가락을 잡아 걸더니 ‘꼭 약속한 거다’고 다짐하고 돌아갔다. 손가락을 건 그녀의 손이 따뜻했다. 하지만 나는 ‘과연 봄이 올까’하고 자문했다.

선거기간 동안 숱한 약속과 다짐이 있었다. 지키지 않는 게 차라리 좋을 약속도 있고 꼭 지켜야 할 약속도 있다. 그들이 약속을 내건 대상 속에 과연 나와 동료들이 끼는 사람인지 끼지 않는 사람인지조차가 고민이 되는 오늘이다. 잠시 후 평택 쌍용차 앞 송전탑에 올라있는 노동자들을 응원하러 가는 버스가 대한문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지금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나와 우리의 자리를 지키고 우리의 돌을 함께 굴리련다. 봄이 올까란 물음은 오래오래 간직한 채.

인권오름 제 327 호  [기사입력] 2012년 12월 20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23 호  [기사입력] 2012년 11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요 며칠 평소에 없던 두통이 일었다. 하도 신경을 써서 그런 것이라 ‘지나가겠지’라고 무시한다. 뭘 그렇게 신경 쓸 일이 있냐고 묻는다면 한숨부터 나올 것 같다.

엊그제 41일째 단식을 하던 노동자가 병원에 실려 갔다. 차가운 농성장에 누워 굶다가 그나마 따뜻한 병원으로 갔다니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웬걸, 다음날 새벽 3명의 노동자가 공장 앞 철탑에 합판 달랑 들고 올랐다 한다. 아침이면 영하가 되는 날씨인데 말이다.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그들에 대한 소식만 검색하다가 인권 강연을 갔다. 평소라면 몇 차례는 참여자들을 크게 웃게 만들었을 텐데 내가 침울해서인지 강연 분위기가 축 가라앉았다.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입구에서 종이박스 한 장 깔고 앉아 껌을 파는 장애인을 만났다.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해 차갑게 얼어있었다. 지하철 종이박스 위의 그와 철탑 위 합판에 걸터앉은 노동자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알량하게 껌 한 통 산 나는 정신을 놓았는지 반대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가 되돌아왔다. 그리고 24시간이 지나니, 전기세를 못 내 촛불 켜고 자다 변을 당했다는 할머니와 손자의 소식, 마치 겨울의 전령이 돼버린 듯한 낯설지 않은 소식이 아침을 연다. 내 두통은 지나가겠지만 이런 고통은 사회적인 대책이 없는 한 지나갈 수 없을 것이다.

철탑 위 노동자와 관련된 얘기 중에 ‘구조조정에 대한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란 말이 여럿 오갔다. 무슨 얘긴가 하여 그 근거가 되는 보고서를 찾아봤다. “구조조정에서의 건강”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그렇지, 아프지, 당연히 아프지’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보고서에서 다룬 사례연구를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구조조정 과정에서 소외되고 해고된 노동자들, 또 요행히 남아서 소위 ‘산자’가 된다 하더라도 그들 대부분이 만성적인 불안과 스트레스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치명적인 해를 입게 된다는 분석에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자살, 과도한 스트레스에 의한 심근경색 등으로 이미 23명이 세상을 떠난 쌍차 사례가 우리 사회에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건강 피해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관련 사업장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구조조정과 연관된 지역사회와도 관련된다고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작년 겨울인가, 정치권의 무대응과 무대책을 질타하는 기자회견을 한다고 해서 갔다. 그때 기자회견을 준비한 쌍차 노동자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울먹이다가 다시 멍해지곤 했다. 그는 아팠다. 쌍차 노동자의 죽음이 꼬리를 물던 때였다. 동료들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그는 분명 아주 아팠다. ‘내 몸에서 죽음의 향냄새가 나니 가까이 오지 말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다음 차례가 저 사람인 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보고서가 제시하는 답은 “사회적 호위”이다. 우리 모두가 서로의 보디가드가 되자는 말이다. 전 지구화된 경쟁과 위기가 끼치는 영향을 개인의 자원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며 전 사회 구성원이 같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쌍차 노동자들이 내건 구호 중에 간판을 차지하는 것이 ‘같이 살자’였다. 그리고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였다. 앞서 말한 노동자를 요즘 보면 눈빛이 살아있다. 거리에서의 한뎃잠과 잦은 단식에 힘들겠지만 그를 비롯한 노동자들은 참 튼튼해 보인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응원한다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뚜벅뚜벅 걸어갔고, 대전의 유성기업에서 굴다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천막에서 농성하는 노동자를 응원하기 위해 자기네 농성장을 몽땅 비우고 그곳에 연대하러 갔다. 활동보조인이 없어 화재로 사망한 고 김주영 씨의 영정 앞에서 쌍차 노동자 대표들이 큰절을 올렸고 30일 넘게 단식 중인 노동자가 장례식에 참석했다. 자기네 집회에서 쌍차 문제만 얘기하지 않고 밀양의 할머니들이나 강정마을의 수난에 대한 얘기 등을 빼먹지 않는다. 그렇게 ‘같이 살자’를 몸으로 옮기면서 정말 아프지만, 사람답게 살아있다. ‘아픈 사람에게서 배우는 건강함’이란 역설을 그들을 볼 때마다 느낀다.

그런데 그런 이들에 대한 ‘사회적 호위’는 초라하기만 하다. 이 보고서는 구조조정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고 고용주가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 분명히 있다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정의와 신뢰에 대한 경험’이란 부분에 눈이 간다. 이 보고서가 지적한 바대로 고용주가 노동자를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는 믿음을 한 번이라도 준적이 있는지, 시기적절한 정보를 내놓고 대화하려 했는지, “사회적으로 세심한” 접근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였는지 묻고 싶다.

보고서는 단기적 이익에 목맨 사고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같이 살기 위한 장기 전략적 사고를 주문한다. 장기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으려면 노동자를 백열전구처럼 갈아 치울 수 있고 처분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보는 경영철학으론 안된다고 지적한다.

현재의 위기를 세계보건기구(WHO)는 “전염병적 파국”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선 혼자만 살 수도 없을뿐더러 혼자의 자원으론 감당할 수 없고 혼자의 역량을 초과하는 문제를 다뤄야 한다.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걷고 굶고 거리에서 자고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탑에 오르는 사람들의 소리를 경청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사회적 호위”의 대열에 끼어서 같이 고통을 맞들어야 하지 않을까?

국회의원으로 뽑아 놓고 세금으로 세비 주는 것은 부당하고 석연치 않은 정리해고에 대해 소상하게 파헤치는 국정조사 하라고 그런 것이다. 대선공약이라고 만들기 힘든 일자리 새로 만들겠다는 풍선 남발하지 말고 원래 일하던 자리에서 부당하게 쫓겨난 사람들을 복직시키는 ‘쉬운’ 일부터 하라는 것이다. 비정규직 문제 해결하겠다고 현수막마다 써 붙이지 말고 지금 철탑 위에 매달려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의 요구부터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광고 대사처럼 ‘어떻게 표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참 좋은걸’ 왜 안 하시나?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구조조정에서의 건강: 혁신적 접근과 정책 권고(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고용·사회문제·기회균등국, 2009)

(발췌번역한 것으로, 보고서 원문은 아래 싸이트에서 볼 수 있습니다. http://www.ipg.uni-bremen.de/research/hires/HIRES_FR_090518_english.pdf)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고용‧사회문제‧기회균등국의 지원을 받은 <구조조정에서의 건강>에 관해 전문가 집단은 이런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구조조정은 연관된 개인의 건강과 조직의 수행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조직과 피고용 노동자와 지역사회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행위자 집단은 어떻게 해야 최상의 협력을 할 수 있는가?

구조조정에 대한 가장 지배적인 생각은 현행 노동조건을 압박하고 고용을 위태롭게 하는 위기라는 것에 머물러 있다. 조직에 늘 있기 마련인 변화로부터 기인하는 도전과 투쟁에 더하여, 이런 식의 구조조정에 대한 생각은 일자리가 생각한 것보다는 사실상 훨씬 덜 불안한 상황에서조차 반신반의와 초조함을 야기한다. 따라서 노동자가 일자리 불안 문제를 줄일 수 있도록 다음 두 가지 전략이 영구적으로 구조조정 의제에 담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a) 지속가능한 고용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개별 노동자와 조직의 합동 노력, 이런 노력은 잠재적 일자리 상실의 혹독함을 제한한다.
b) 불확실성을 제한하기 위한 조직의 구조조정 준비와 그 과정에서의 투명하고 공정한 결정 과정

이 보고서가 보여주듯이, 구조조정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감원의 직접적인 피해자, 회사에 남는 소위 ‘산자들’, 구조조정 과정의 운영자들, 피해자와 산자들의 가족과 구조조정이 벌어지는 지역사회)은 공적인 관심과 지원을 필요로 한다. 이 보고서의 결론은 이런 직업에서의 변화가 그것을 감당할 만한 개인적 자원을 초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적 호위”(social convoy)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전체로서의 사회와 관련된 모든 행위자가 이 과정(구조조정으로 인한 직업 변화 과정)을 평탄하게 하기 위한 사회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검토한 증거들은 구조조정 과정이 소위 ‘산자’를 포함하여 영향받는 노동자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또한, 명백한 점은 고용주와 여타 사회적 행위자들이 구조조정의 부정적 영향을 상쇄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조치들이 있다는 것이다.

지구화된 경쟁이라는 새로운 요구에 직면하여 고용의 (유럽)사회적 모델이라는 특성을 보존하는 데 목적을 둔 기업 구조조정의 개념은 기업의 건전성을 경제적 지표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조정이 노동자에게 미치는 개별적 영향을 고려해야만 한다. 덧붙여 이런 개념은 경제의 장기적인 경쟁성에 대한 중대한 영향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런 방식의 새로운 이해는 일방적인 한쪽만의 이해당사자 관점으로부터 ‘관련된 모든 당사자의 이해’라는 보다 균형적인 견해로 관점을 확장한다.

‘사회적으로 세심한 구조조정’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개인의 건강을 보장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이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사례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의도한 경제적 이익만이 아니라 노동자의 이해에 집중하는 것이 노동자에게나 회사에게나 구조조정 과정을 원만하게 한다는 것이다.

감원의 직접적인 피해자: 해고자들
일자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서 고용의 상실은 건강 손상과 사회적 배제라는 심각한 위험의 근본적인 스트레스 요인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구조조정의 결과로서 해고될 이들의 정신적 건강을 유지하며 건강에 끼칠 악영향을 제한하는 데 집중해야만 한다.

지구화된 경쟁에 대한 경제적 적응은 변화를 감당할 개인적 자원을 초과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문제는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문제로 간주돼서는 안 된다. 그 대신에 이 과정은 “사회적 호위” 같은 개념과 동반돼야만 한다. “사회적 호위”란 국가, 기업, 지역기구 등 다양한 사회적 차원에서 구조조정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지는 것을 말한다. 현재의 위기는 “전염병적 파국”(세계보건기구(WHO)에서 쓴 용어)을 피하기 위하여 개인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한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한다.

정의와 신뢰에 대한 경험
신뢰란 고용주가 노동자를 공정하게 다루고 있다고 노동자가 생각하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이런 맥락에서의 공정함이란 세 가지 차원의 정의-분배적 정의, 절차적 정의, 상호작용의 정의-에서 경험된다. 구조조정으로 야기된 불확실성의 기간 내내 노동자의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고용주, 사회적 협력자들, 정책입안자들은 세 가지 차원의 정의를 모두 체계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이 중에서 ‘상호작용의 정의’는 노동자들이 구조조정 계획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았는지 그리고 대안적 선택에 관한 노동자의 견해가 얼마나 경청 되었는지에 대한 노동자의 인식과 관련된다. 고용주는 구조조정에 대하여 투명하고 정직할 필요가 있다. 시기 선정이 아주 중요하다. 언론을 통해 일자리가 위협받는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 노동자들은 고용주의 후속 발표를 신뢰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견해와 노동자 대표가 참작되고 있다는 걸 노동자가 보는 게 중요하다.

의사소통 계획의 변화
적절한 의사소통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중요하다. 고용주는 어떠한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적절한 의사소통계획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구조조정은 관련된 운영자들에게조차 불확실성의 시기일 수 있다. 바로 그 불확실성이 구조조정의 영향을 받는 이들에게 중대한 스트레스 요인이다. 양호한 의사소통이 없다면 노동자들은 소외되고 배제되고 무력하다고 느끼기 쉽다. 의사소통은 신뢰 유지에 아주 중요하다. 양호한 의사소통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 정보의 질: 즉 정보의 접근성, 정확성, 유용성이다.
* 시기 적절성: 정보는 수신자가 자신들의 정당한 관심이 고려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도록 적시에 있어야 한다.
* 정보의 방향성: 노동자와 노동자 대표 조직이 단지 수동적인 정보의 수신자이기만 하면 노동자 자신들의 역량이나 주인된 의식을 느낄 수가 없다. 적극적인 경청과 반응에 의한 쌍방향 정보의 흐름이 최상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고용주는 노동자의 견해에 대해 건설적인 행동을 취함으로써 노동자와 노동자 대표의 견해를 고려하고 있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입증해야만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보호
파견노동자 등 비정규직 노동자, 즉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노동의 성격이 장기간 주 고용주의 지시를 받아 이뤄진 것이라면, 그 주 고용주가 직접 고용한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조조정에서 건강 증진에 대해 같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

ILO의 ‘사회적으로 세심한 기업 구조조정’(SSER) 개념
이 보고서의 접근에 처음부터 상당한 영향을 끼친 개념은 ILO가 만든 ‘사회적으로 세심한 기업 구조 조정’(아래 SSER) 개념이다. SSER은 사례연구에 기반하여, 기업의 경제적 생존만이 아니라 구조조정에 연관된 개인들(피해자와 ‘산자’ 모두)의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비용을 포함한 사회적 비용을 고려하여 구조조정 과정을 순화시킨 요소들을 분석하려 했다. 이 개념은 유럽의 경험에 특화된 것이긴 하지만, 다수 기업들의 경험에 근거한 적어도 네 가지의 일반적인 교훈이 있다.

* 비용은 알려지지만, 혜택은 그렇지 않다: 기업들은 ‘사회적으로 세심한 기업 구조조정’에 돈이 든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그 재정적 비용은 측정 가능하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세심한’ 방식으로 구조조정을 수행했을 때의 경제적‧사회적 혜택을 측정하는 법에 대해선 정말로 아무도 모른다.
* 사회적 대화는 현실이 돼가고 있다: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에선 사회적 대화가 기존 법률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유럽 국가들을 넘어서는 별로 그렇지 않고 특히 동유럽에서 그렇다.
* SSER의 도구는 약간이나마 기준규범의 꾸러미를 제시하고 있다: 좋은 소식은 구조조정에 직면한 기업들이 자신들이 선택할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그런 도구가 자기 회사에 관련이 있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심사숙고하지 않고, 남이 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베낀다는 것이다.
* 장기적 전략과 구조조정 간의 연결은 여전히 드물다: 상당수 기업이 구조조정 전망이 자신들의 장기적 전략의 일환이 됐다고 선언하고 있지만, 여전히 이들 기업의 대부분은 단기적으로 사고한다. 기업에게 구조조정은 경제/부문/시장 변화에 대한 빠른 대응이다.

이 마지막 교훈이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결론일 것이다. 구조조정이 성공적이려면, 기업‧국가 또는 지역의 장기적 발전 전략과 연결돼야만 한다. 기업 차원에서 그것의 의미는 구조조정을 해고 싸움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기 전략적 사고는 세심한 인권 계획을 요구한다. 가장 중요하게는 노동자를 비용이 아니라 자산으로 다룰 것을 요구하는 경영 철학과 연관된다. 감원을 자행하는 쪽은 노동자를 마이크로 칩이나 백열전구처럼 필요하다면 갈아치울 수 있고, 대체할 수 있고, 처분할 수 있는 상품으로 본다. 이와 대조적으로 책임성 있는 구조조정자는 노동자를 개혁과 쇄신의 원천으로 본다.

노동자를 자산으로 여기는 기업들은 사회적으로 세심한 구조조정으로 알려지기가 가장 쉬울 것이다. 그런 기업들은 성공적으로 증명된 다음과 같은 도구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 도구들이란 상담, 기술 평가, 훈련, 안팎으로 일자리 찾기, 중소기업 창출, 이동성 지원, 조기 퇴직, 대안적 일자리 계획, 퇴직금 등이다.

인권오름 제 323 호  [기사입력] 2012년 11월 21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19 호  [기사입력] 2012년 10월 2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포털사이트에 ‘인권’으로 검색을 하면 내가 관련된 인권활동보다 가수 전인권 씨나 배우 김인권 씨 이름이 앞에 떠서 웃다가 샘날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정치’로 검색을 하면 대선주자들의 행보와 여의도 뉴스가 뜰 것이고, ‘경제’로 검색을 하면 주가 동향이나 대기업들 띄우는 뉴스가 뜰 것이고, ‘연대’로 검색을 하면 셀러브리티(유명인사)의 사회참여행위를 칭송하는 뉴스가 뜰 것이다. 쌍용차 국정조사를 요구하며 단식투쟁하는 해고노동자나 ‘같이 살자’를 외치는 중소상인‧영세자영업자의 외침이나 송전탑에 매달린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절함, 그들 곁에서 발 동동 구르며 함께 하는 이들의 안간힘은 정치도 경제도 연대도 그 무엇도 아닌 이름 없는 몸짓으로 치부되곤 한다.

그 이름 없는 몸짓이 더욱 사무치는 요즘이다. 초겨울의 길목에서 강정에서 서울까지 행진을 하고 있는 무리가 있다. “우리가 하늘이다”면서 ‘2012 생명평화대행진’의 무리가 지난 10월 5일 제주도 강정마을을 출발했다. 행진단의 목적지는 11월 3일 서울 시청광장이다. 행진단은 가는 곳마다 그간 짓밟히고 무시당해 온 숱한 삶들의 이야기를 모으고 있다. 행진단이 “하늘”이라 부르는 이들의 삶은 참 고단하다. 송전탑과 골프장 막아서느라 주름골이 깊어진 시골 할매와 할배들, 여기저기서 쫓겨나고 밀려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리해고자들, 4대강 사업이다 핵발전이다 해서 전국적인 삽질에 할퀴고 파헤쳐진 뭍 생명들이 행진단이 말하는 “하늘”이다. 걸을수록 “하늘”의 증언과 요구가 늘어가기에 행진단의 마음의 짐도 무거워지고 있다.


이 행진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몸짓의 역사가 어디 하루 이틀일까? 행진 당사자들에게는 고단하고 죽을 것 같았을 경험이었을 것이나 강요된 침묵을 함성으로 토해낸 행진의 역사가 비뚤어진 세상의 틀을 고치고 판을 엎어왔기에 지금의 내 삶이나마 존재하는 것일 게다. 모든 이의 삶에 기여했으나 기록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는 행진이 태반일 것이다. 그나마 손에 잡히는 자료들로 접할 수 있는 그런 몸짓의 기록들을 보며 힘을 얻어 보려 한다.

우선 행진은 아파서 하는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개인적인 치유를 기대하지 않기에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일에 온몸을 던지는 것이다.

일례로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는 1932년 ‘보너스군대행진’이 나온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참전군인들은 1924년에 정부채권 형태로 1945년부터 단계적으로 지급될 예정인 “보너스”를 발급받았다. 하지만 직업도 없는 그들에게 대공황의 한파가 닥쳤고 가족들은 굶주렸다. 먼 미래로 약속된 보너스는 의미가 없었다. 전국의 참전군인들은 살기 위해 채권을 당장 바로 상환해줄 것을 요구하는 조직을 만들고 워싱턴으로 집결하여 그 요구를 외치는 행진을 했다. 그들은 스스로를 “보너스군대”라고 불렀다. 단신으로나 혹은 가족을 동반한 그들은 열차에 무임승차를 하거나 고물차를 몰거나 갖은 수단을 동원해 워싱턴으로 모여들었다. 2만여 명이 모였으나 국회는 그들을 외면했다. 이에 그들은 국회의사당이 마주 보이는 강변에 농성장을 차렸다. 쓰레기 하치장에서 긁어모은 재료들로 얼기설기 임시거처를 만들고 온 식구가 같이 버텼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그들에게 대통령은 군대를 보내 농성텐트를 불태우고 총질을 해댔다. 사망자가 생겼고 천여 명이 최루탄에 다쳤다. 실업과 굶주림이라는 어려움에 대해 손놔버린 정부의 태도와 절실한 요구에 폭력으로 대응한 행위는 그해 11월 선거에서 효력을 발휘해 ‘뉴딜’이라는 개혁을 내세운 루즈벨트 정권의 탄생을 낳았다. ‘보너스군대의 행진’에 대해 한 작사가는 “이보게, 10센트(약 100원)짜리 하나 줄 수 있나?”라는 가사를 써서 그들의 고통을 표현했다. 이 노래가사에 대해 그 작사가는 이런 설명을 했다.

“이 노래에서 남자는 사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 나라에 투자를 했다. 내 배당금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 순간적인 비애 이상인 거지요. 이 노래에서 그 남자는 거지에 불과한 존재가 아닙니다. 질문을 던지는 존엄한 인간 - 그리고 마땅히 그래야 하듯이 얼마간의 분노를 느끼는 인간인 것입니다.” (도서출판 시울, <미국민중사> 중에서)

이 글에서 나는 한 인간이 또 여러 사람이 ‘아프다’고 말할 땐, 거기에는 불만과 투정을 넘어선 질문과 분노가 담겨있다고 느꼈다. 생명평화대행진단에는 어린 아들을 동반한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있다. 행진 중반 지리산에서 열린 민회에서 은행나무 아래 놀고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을 봤다. 그의 동료는 서울 대한문에서 열흘이 넘는 단식농성 중이다. 남들 가는 단풍 나들이 대신 온 식구가 행진에 나선 날, 부당하게 정리해고된 노동자의 눈빛에 담긴 질문과 분노에 응답할 자들은 딴 일로 바빴다.

행진은 우리가 함께 살고픈 세상을 기획하는 것이다. 전문가들의 설계에 기대지 않고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의 가치를 내놓고 논쟁하고 합의하는 것이다. 이게 정치지, 뭐가 정치냐고 묻는 일이다.

일례로 인권에 관심 없는 사람들조차 한두 구절 외워서 읊을 수 있는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은 거의 다 행진 중에 나온 것이다. 그의 명연설은 멋진 수사로 가득 찬 개인의 독백이 아니다. 생명의 위협뿐만 아니라 육체에 앞서 영혼을 미리 죽이는 모욕과 굴욕을 비처럼 맞으면서 행진한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함께 설계한 ‘다른’ 세상에 대한 기획이 킹의 연설로 표현되었을 뿐이라고 본다.

“우리는 계속 행진할 것입니다 …… 사회적‧경제적으로 의기소침해 있는 모든 흑인 거주지역이 해체되고, 흑인과 백인이 품위 있고 안전하며 위생적인 집에서 나란히 살게 될 때까지, 인종차별적인 주거문제에 대항해 행진합시다. 흑백이 분리된 열등한 교육의 자취가 과거의 일이 되고, 사회적 치유라는 차원에서 흑인과 백인이 교실에 나란히 앉아 공부하게 될 때까지, 흑백분리 학교문제에 대항해 행진합시다. 어떠한 미국인 부모도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자신의 식사를 거르지 않게 될 때까지, 빈곤 문제에 대항해 행진합시다. 어떠한 굶주린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일자리를 찾아서 우리의 도시와 마을을 헤매지 않게 될 때까지, 빈곤 문제에 대항해 행진합시다. …… 인종을 이용하여 괴롭히는 이들이 정치의 장에서 사라질 때까지, 투표권 문제에 대항해 행진합시다. …… 우리를 빠른 해결책으로 쉽게 이끌어줄 넓은 고속도로 따위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위드북스, <마틴 루터 킹의 양심을 깨우는 소리> 중에서)

이 연설은 1965년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의 행진을 마무리한 연설이다. 인종차별이 기승을 부린 미국 셀마에서는 흑인의 투표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살해와 구타, 투옥이 이어졌다. 그런 위협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과정에 참여하고 싶다”는 사실을 온 나라에 알리고 싶었던 사람들은 폭력이 자행된 길을 따라 행진을 감행하여 주 의회 의사당 계단에 도착했다. 절대 못 갈 거라는 주위 사람들의 걱정과 머뭇거림에도 행진을 해낸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려는 세상에 대한 기획을 킹의 연설로 선포한 것이다.

생명평화대행진에 참여한 사람들은 돌덩어리가 아닌 혈이 뛰는 사람들이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대다수가 대선에 목메고 있고, ‘현실성’있고 ‘실효성’있는 ‘계산’이 나오는 시합에 끼려하고, 진보의 이름이 땅에 떨어져 밟히고 있는 그런 때에 ‘감행’한 행진이다. 그러다 보니 ‘걸어서 뭣하겠느냐’는 회의에 찬 볼멘소리도 나온다. 쌍차며 현대차 비정규직이며 하나같이 맘 바쁘고 다급한 사안들 천지인데 ‘우리가 하늘’이고 ‘생명 평화’라는 소리가 가당찮게 들린다는 의견도 많다. 후보단일화 요구나 대선캠프 공약과 관련된 정치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온다. 그래서 부르트고 젖는 것은 고단한 발뿐만이 아니라 행진단의 마음이다. ‘나는, 우리는 왜 걷고 있는 것일까?’를 걸음걸음마다 묻고 있다. 눈앞의 공약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싶고 만들어야 하는 삶의 가치를 얘기하자는 과제에 대해 행진단에 참여할 만한 근성의 근본주의자들조차 고전하고 있다. 가치에 앞서 효율성과 타산성을 따지는 타성을 우리부터 깨보자며 걷고 있다.

행진은 안 듣고 무시했던 목소리를 듣게 만드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몰랐던 ‘연대’라는 단어를 깨닫게 해준 사건 중 하나가 청소노동자들의 행진이다. 2010년 6월의 ‘제1회 청소노동자 행진’은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는 선언으로 많은 이들의 눈을 뜨게 해줬다. 제가 몸담고 살고 일하는 건물과 오가는 숱한 곳에서 꼭 필요한 노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유령”취급했던 사회의 때 묻고 찌든 창에 걸레와 빗자루를 문지르고 휘둘러준 행진이었다.

“우리는 청소 노동자입니다.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하는 우리는 청소노동자입니다. 하루 종일 건물 곳곳을 쓸고 닦지만 석면가루 날리고, 바퀴벌레가 나오는 곳에서 찬밥을 먹는 우리는 청소노동자입니다. 꼭 필요하지만,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우리는 청소노동자입니다. 하루라도 우리가 없으면 세상이 쓰레기로 넘쳐납니다. 우리는 청소노동자입니다. 가족들에게도 친구에게도 직업을 말하기 힘들었던 우리는 청소노동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우리를 유령으로 만든 사회라는 것을. 이제 우리의 권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우리는 청소노동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당당히 말합니다. 우리는 유령이 아닙니다. 우리는 청소노동자입니다. …… 우리의 행진은 오늘 이곳 마로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학교에서도, 병원에서도, 또 다른 건물에서도 우리의 행진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밥과 장미의 권리’를 요구하는 우리의 행진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진은 약속입니다. 멈추지 않고 행진하는 우리는 함께 외칠 것입니다. ‘우리는 유령이 아니다.’ ‘우리에게 따뜻한 밥 한끼의 권리를’ ‘우리에게 밥을, 그리고 장미도’ 우리의 행진은 단지 오늘 시작될 뿐입니다.” (2010년 6월 5일, <청소노동자 행진을 시작하는 우리> 선언문 중에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밥과 장미의 권리를 요구하는 우리들의 행진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 100년 전 미국에서도, 1978년 동일방직에서도, 2007년 이랜드에서도 우리는 함께 행진했습니다. 그 수많은 행진이 오늘 우리의 행진을 만들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2011년 6월 4일, <제2회 청소노동자 행진, 밥과 장미의 행진 선언문> 중에서)

내가 서울의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언론에 오르내릴 만큼 ‘큰’ 사안이 되거나 트위터나 페이스북 이용자들이 열띠게 퍼뜨리는 사안 정도에만 눈길이 가는 법이다. 그런데 비슷한 고통이지만 알려지지도 들려지지도 않는 사건과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임대주택 건설업자가 부도를 내면서 보증금도 못 돌려받고 길바닥에 나앉게 된 사람들부터 댐이다 골프장이다 해서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뺏기게 된 사람, 이름을 듣도 보도 못한 회사와 공장에서 노조를 만들었다고 쫓겨나거나 용역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행진으로 모인다. 전국 구석구석에서 그런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 자체가 행진의 역할이다. 경청하는 동료가 있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장밋빛 약속보다 훨씬 큰 힘이다. 말하는 사람은 천지인데 듣는 사람은 너무 적다. 행진은 ‘다들 먼저 듣자’고 호소한다.

마지막으로 행진은 우리의 당면 과제를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의 당면 과제는 서로의 고통을 따로 외치지 않고 그 고통의 공통성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래야 같이 해결할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건 너무 당연하다.

1997년 봄, 유럽에서는 ‘실업과 불안전 고용과 사회적 배제에 저항하는 유럽대행진’이 있었다. 이 행진의 주축은 실업자 조직이었다. 유럽의 각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유럽정상회담이 열리는 암스테르담을 향해 유럽을 횡단했다. 그들은 걷고 노래하고 토론하고 기습점거를 하며 행진했다. 이 행진을 전후해 숱한 선언문이 쏟아졌는데, 그중 이탈리아 청년조직이 제출한 선언문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는 다양한 조직들, 노동조합, 정치정당, 청년 그룹, 생태주의자, 민주주의자, 문화적‧정치적으로 좌파인 그룹을 대표하고 있다. …… 우리의 견해로는 다음과 같은 우선순위를 설정한 새로운 경제사회적 모델을 시도하고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다.

* 노동의 존엄성. 보호와 재분배를 하며 제대로 된 임금을 가진 노동. 임금 상실 없이 노동시간의 보편적인 축소를 하는 노동.
* 사회적 서비스, 교육권, 공공건강서비스에 대한 접근, 존엄한 주거에 대한 권리의 방어와 증진.
* 청년의 자율성과 독립.
* 환경을 파괴하는 생산 체제에 의해 남용된 환경의 보호.
* 금융자산가들이 아니라 인민이 의사 결정 권력을 갖는 진정한 유럽 민주주의의 발전.
* 민주세력을 강화하고 민주세력의 힘을 확장하기 위한 시민운동의 강조.
* 평등의 이름으로 모든 차별과 사회적 배제에 대한 거부. 다양한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존중과 자유로운 교류, 정의에 기초한 평화 건설.”

마찬가지로 ‘생명평화대행진’은 우리의 우선순위를 같이 찾아보려 한다. 그렇다고 한목소리로 통일하자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행진은 이리저리 부딪칠 것이 많고 우선순위를 다툴법한 노동, 평화, 생태, 생존권 등의 문제가 함께 만나는 장이다.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참 어색하고 머쓱한 만남이기도 하다. 쌍차 해고노동자와 강정마을 주민이 중소상인의 생존권 문제를 토론과제로 받자 난감해한다. 용산참사 유가족이 밀양의 할머니들을 만난다. ‘강제퇴거금지’나 ‘반핵’얘기를 꺼낼 틈도 없이 ‘정말 힘들었어요. 우린 다 알아요. 정말 징글징글하게 고생 많았어요.’로 이어진 고생담이 대부분이다. 오는 10월 27일 열릴 전국비정규노동자대회를 코앞에 두고 맘 바쁘기 그지없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행진단 속에서 초조해한다. “함께 살자”는 바람으로 모였지만 우린 서로에게 서투르고 서로의 사안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강정, 쌍차, 용산처럼 잘 알려진 문제들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보고 들은 숱한 사안들을 어떻게 조율해 우리의 우선순위를 만들 수 있을까? 주말(10월 28일)에 평택에서 열릴 민회는 그런 우선순위와 행동계획을 토론할 계획이다.

이 글의 제목을 <‘바보’들의 행진의 기록들>이라 했다. 역사적인 행진자들은 훗날 어떤 평가를 받았든 간에 당대에는 ‘바보’ 취급을 받았다. 톨스토이의 작품 <바보 이반>이 떠오른다. 군인과 상인인 형들은 농사만 짓는 이반을 바보 취급했다. 악마의 유혹에 그 형들은 과욕과 탕진으로 무너졌지만, 군대와 금화로 유혹하는 악마의 농간이 이반에게는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이반이 원한 것은 노동과 노래뿐이었고, 음식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었다. 또 ‘이반’은 성소수자들이 정상성을 강요하는 일반에 빗대어 자신들을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더 많은 개발과 성장만이 살 길이며, 회사를 살리기 위해 노동자를 죽여야 한다고 우기는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선 더 많은 바보와 정상성에 도전하는 이반들이 필요하다.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음을 고집하면 현명해진다”는 시구처럼 행진단 같은 바보들이 많아지고 일반이 아닌 이반의 어리석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정치의 우선순위가 바뀔 수 있다. 이것이 생명평화행진단의 걷는 마음이다.

<바보들의 행진>이란 옛 한국영화가 있다. 거리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을 하고 정부 비판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고문당해 죽거나 간첩이 돼야 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청춘영화다. 어릴 때 TV에서 그 영화의 재방송을 보다가 참 어설프다고 생각했다. 뭔가 진도가 나갈 법하면 난데없이 연고전 응원 장면이 자주 등장해서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그 연고전 응원 장면이 당국의 검열에 가위질당한 부분들을 메꾼 자국이란 걸 알았다. 오늘 우리 시대의 ‘바보’들의 행진은 신나고 재밌는 말춤과 정치쇼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바보들의 행진’이 당국의 검열 때문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무관심에 가위질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간절히 부탁한다. 전인권 씨, 행진에 와서 불후의 명곡 ‘행진’ 한번 부르세요. 김인권 씨, 개봉한 영화 제목처럼 ‘구국의 철가방’에 우리 요구를 담아 귀 막은 정치권에 배달 좀 하세요. ‘생명평화대행진’은 수도권에 가까이 오고 있어요. 여러분들 동네에 행진단에 올 때는 한번 마중 나가보세요. 11월 3일에는 그야말로 ‘대행진’을 만들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들 ‘바람버스’가 있어요. 꼭 한번 타보세요.

* 생명평화대행진의 자세한 일정은 2012 생명평화대행진 카페(http://cafe.daum.net/walk4peace)에서 볼 수 있다.

인권오름 제 319 호  [기사입력] 2012년 10월 24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15 호  [기사입력] 2012년 09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드라마에서 자주 변주되는 소재 중의 하나가 ‘키다리 아저씨’이다. 어렸을 적 나의 애독서 중 하나였기에, 불우하지만 씩씩한 여주인공과 그녀를 은밀하게 돕는 부자 남성의 관계로만 그 내용이 소비되는 게 탐탁치가 않다. 제목은 ‘키다리 아저씨’이지만 사실 이 책의 주인공은 키다리 아저씨가 아니라 고아원 출신 소녀 ‘주디’이다. 주디는 결코 후견인의 일방적 도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생각과 감정에 솔직하고 충실할뿐더러 사회의 편견과 배제를 날카롭게 뚫어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다.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원의 후원자로서 글재주가 있는 소녀 주디를 대학에 보내준다. 주디는 대학생활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거침없이 편지에 담는다. 그 편지로 채워진 것이 소설 ‘키다리 아저씨’이다.

아주 어려서 읽었지만, 요즘 나는 사회보장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 이 소설 속 주디의 말을 인용하곤 한다. 가령 대학 예배에서 설교를 들은 주디는 분노한다. “가난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자비심을 가지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말하자면 유용한 가축이라는 식이더군요.” 덧붙여 주디는 어린 시절 학교에 구호품 옷을 입고 갔는데 그 옷의 기증자가 옆자리에 앉은 급우였던 일을 회상하면서 “저는 동정심을 갖고 다가와서 위로의 말을 하는 그 애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미워했어요. 특히 동정심이 있는 체하는 아이들은 더 미워했습니다.” 자선과 시혜 또는 구제라는 것들이 주는 자의 입장에서의 표현이지 받는 자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는 걸 주디는 지적한다.

주디는 호기심이 많고 모험을 즐기며 상상력이 풍부하다. 하지만 자신의 상상력의 한계에 대해 토로하는 대목이 있다. 고아원이 아닌 ‘보통’의 ‘집’으로 들어가는 공상을 하는데, 그 공상이 집의 문 앞에 이르면 희미해진다고 슬퍼한다. “보통집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들어가려는 집의 현관 안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통집”이라 말한 것을 나는 제법 살아야 맛볼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라 생각해본다. 직장이 안정되고 좋을수록 덩달아 든든한 사회보장이 있고, 불안정하고 권리가 취약한 일자리일수록 사회보장을 꿈꿀 수가 없다. 흔히 복지경험이 부족해서 복지에 대한 안정된 지지와 기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데, 우리는 문 앞에 서서 집안을 도저히 상상해볼 수 없는 그런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밝은 성격의 주디가 우울해하는 것은 사회적 배제를 절감할 때이다.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지만 주디는 다른 학생들이 읽은 것, 먹어본 것, 보고 즐긴 것을 직접 겪어본 일이 없다. 18년 동안 고아원에서 최저수준의 생존의 권리만을 보장받아온 삶이었기에 그런 삶에는 필요 없다고 여겨진 것들의 필요가 한꺼번에 몰려든 것이었다. 그래서 외계인 취급을 받게 된 주디는 학과 공부 대신에 타인과 어울리기 위한 남몰래 교양 쌓기 학습에 몰두한다. 그럴 때 쓰는 편지의 내용은 “아저씨, 대학생활에서 어려운 것은 공부가 아니더군요. 노는 것이 힘들어요. 저는 다른 학생들이 말하는 것 중의 반은 무슨 얘긴지 통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그들의 농담은 저만 빼고 누구나 알고 있는 과거의 일과 관계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 세계에서 생소한 외국인이에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요. 참 비참한 느낌이 들어요.”

‘최저선’이라는 것이 사회적 배제를 줄이고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리의 벽을 두껍게 하는 것이라면, 그 최저선으로 보장되는 생계에 대한 권리란 인권이 아닌 굴욕에 대한 적응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만 나의 주디는 당당하게 덧붙인다. “제가 딴 애들과 실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안 그래요?” 사회보장이 보장해야 하는 것은 주디의 말처럼 ‘근본적인 차이점’이 없는 인간의 존엄성이며 최소한의 생계 보장은 그 수단인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라고 보인다.

차별과 배제의 경험을 평등과 포함의 것으로 바꿔나가면서 주디는 “내가 묵인을 받아 이 세상에 끼어든 것이 아니라 진실로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주디는 자기 발로 서게 되며 적극적으로 타인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게 된다. “저는 누구에게 있어서나 가장 필요한 건 상상력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만 있으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처해볼 수도 있어요. 상상력이 사람을 상냥하고 공감하고 이해심이 많게 하지요.”라고 말하는 주디의 상상력의 힘은 공상이 아닌 사회적 포함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지난 6월 14일, 국제노동기구(ILO)는 사회보장 최저선에 대한 새로운 권고를 발표했다. 이 권고는 사회보장 최저선을 조속히 이행할 것을 촉구하며 특히 공식 경제 부문에 고용된 사람들뿐 아니라 비공식 부문에 고용된 사람들 또한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ILO가 사회보장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권고를 발표하는 기자회견문에서도 밝혔듯이 50억이 넘는 인류, 사실상 대부분의 인간에게 적절한 사회보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ILO가 만들어온 사회보장 관련 기준의 초석으로 작용하는 일명 ‘필라델피아 선언’(1944년)은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는 기본원칙을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노동이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라면 인간의 생존 또한 상품을 팔았느냐 말았느냐에 의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이 구절을 볼 때마다 사회보장을 임금보조 장치로 국한해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회’라는 말이 ‘경제’에 먹힌 지 오래됐지만, 진짜 사회보장을 추구하려면 경제회복이나 발전이 아니라 사회를 복원해야 한다는 말로도 읽힌다. ‘사회’가 빠진 생존 보장이란 것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가를 알기 때문이다. 사회가 빠진 생존 보장이란 흔히 ‘있는 쪽에서 베푸는 시혜’로 여겨진다. 호의를 베푸는 것이니 적당히 상대방의 자존심이나 자율성을 침해해도 된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생존에 대한 권리가 아니라 구차하게라도 살아야 할 굴레가 돼버린다. 그래서 사회보장을 임금 보조로서가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를 구성하는 것, 서로에게 보장하고 북돋아 주기로 한 약속이자 의무로 생각한다. 그 구체적인 실현의 예는 모든 사람에 대해 차별 없고 배제 없는 기본소득과 의료의 보장이다.

선거를 앞두고 사회보장에 대한 논란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한다. 그럴 때마다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과 실천에 관계없이 숱한 삶들이 도마 위에 올려진다. 받는 사람 내지 받아야 할 사람과 상관없이, 주지도 않고 생색내는 쪽의 관점에서 누군가의 삶이 비늘 벗겨지고 잘리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소설 속의 주디를 떠올린다. 사회보장을 ‘범국민특별안전기간 선포’로 바꿔치기하려는 시도나 ‘기업에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며 갑옷부터 챙겨 입으려는 시도를 볼 때 주디라면 뭐라고 맞받아칠까 궁금해진다.

사회보장 최저선에 관한 권고문은 딱딱하고 원칙적인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 이런 문구에 구체적인 사람의 얼굴을 입혀본다. 그것은 소설 속 주디의 얼굴이 아니라 매일 부딪히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한 골목에서 폐지를 줍는 십여 명의 노인들, 같은 골목에서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한잔 술에 빠진 고단한 장년들, 고시원에서 슬리퍼 차림으로 나와 배회하는 청년들, 껌과 초콜릿을 파는 장애인, 간판이 자주 바뀌는 고만고만한 점포의 주인들, 그런 우리가 모여 사는 골목에서 ‘사회’의 ‘보장’을 경험할 수 있는 상상력이 발휘됐으면 한다.

사회보장 최저선에 관한 ILO 권고(2012년 6월 14일)

ILO 총회는 사회 보장에 대한 권리가 인권임을 재확인하며,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는 고용 증진과 더불어 발전과 진보를 위해 경제‧사회적으로 필수임을 확인하며, 사회보장은 빈곤과 불평등‧사회적 배제‧사회 불안을 줄이고 예방하며, 평등한 기회와 성‧인종의 평등을 증진시키며, 비공식 고용에서 공식 고용으로의 전환을 지원하는 중요한 도구임을 인정하며 … 이 권고를 채택한다.

I. 목적, 범위, 원칙

1. 이 권고는 회원국들에게 지침을 제공한다.
(a) 적용 가능한 것으로서 사회보장 최저선을 자국의 사회보장체제의 기본요소로 수립하고 유지할 것.
(b) ILO 사회보장기준에 따라,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더 높은 사회보장 수준을 점진적으로 보장하는 사회보장 확장 전략 내에서 사회보장 최저선을 이행할 것.

2. 이 권고의 목적상, 사회보장 최저선이란 빈곤‧취약성‧사회적 배제를 방지하거나 경감하기 위한 목적의 보호를 보장하는 것으로서 국가적으로 정의된 일련의 기본적 사회보장을 보장하는 것이다.

3. 이 권고가 효과를 발하는 데 있어서 당사국의 전반적이고 우선적인 책임성을 인식하며 회원국들은 다음의 원칙을 적용해야만 한다.
(a) 사회적 연대에 기반한 보호의 보편성
(b) 국가 법률로 명시된 급부에 대한 권리
(c) 급부의 적절성과 예측가능성
(d) 비차별, 성평등, 특별한 요구에 대한 반응
(e) 비공식 경제에 속한 사람들을 포함하는 사회적 포함
(f) 사회보장이 포괄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한 존중
(g) 목표설정과 시간표를 포함하는 점진적 실현
(h) 사회보장체계의 자금을 내는 이와 혜택을 보는 이들 간에 책임성과 이익간의 최적의 균형성취를 추구하는 동시에 복지재정에서의 연대
(i) 재정 마련과 전달 체계를 포함하여 방법과 접근의 다양성에 대한 고려
(j) 투명하며 책임성 있고 건전한 재정 운영과 행정
(k) 사회 정의와 평등을 정당하게 고려하는 재정적‧경제적 지속가능성
(l) 사회‧경제 및 고용정책과의 일관성
(m) 사회적 보호 전달을 책임지는 기관들을 관통하는 일관성
(n) 사회보장체제 전달을 강화하는 양질의 공공 서비스
(o) 불만과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의 효율성과 접근성
(p) 이행에 대한 정기적인 모니터링, 정기적인 평가
(q) 모든 노동자의 단체 협상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완전한 존중
(r) 여타 관련인들의 대표조직과의 협의뿐 아니라 고용주와 노동자의 대표 조직의 삼자 참여

II. 국가 사회보장 최저선

4. 회원국들은 국가 상황에 따라서, 기본적인 사회보장을 실현하는 자국의 사회보장 최저선을 가능한 빨리 수립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그 보장은 전 생애를 포괄하며, 국가 차원에서 필수적이라 정의된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효과적인 접근 보장과 더불어 보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수적인 건강 보호와 기본적인 소득 안전에 대한 접근을 최소한 보장해야만 한다.

5. 앞서 언급한 사회보장 최저선은 다음의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보장을 적어도 포함해야만 한다.
(a) 국가적으로 정의된 일련의 재화와 서비스에 대한 접근. 이것은 가용성, 접근성, 수용성 및 질이라는 범주를 충족시키는, 모성 보호를 포함한 필수적인 건강 보호를 구성하는 재화와 서비스이다.
(b) 아동에 대한 기본 소득의 보장. 적어도 국가적으로 정의된 최소 수준에서 영양, 교육, 돌봄 및 기타의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c) 적어도 국가적으로 정의된 최소 수준에서, 충분한 소득을 벌 수 없는 경제활동 연령의 사람에 대한 기본 소득의 보장. 특히 질병, 실업, 출산, 장애의 경우.
(d) 적어도 국가적으로 정의된 최소 수준에서, 노인에 대한 기본 소득의 보장.

6. 회원국들은 기존의 국제적 의무에 따라 이 권고에서 언급된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보장을 국가법과 규정에 정해진 대로 적어도 모든 거주자와 아동에게 제공해야만 한다.

7. 기본적인 사회 보장의 보장은 법률로 수립돼야만 한다. 국가법과 규정은 사회보장의 효력을 낳은 급부의 범위, 질적 조건과 수준을 명시해야만 한다. 또한, 공평하고 투명하며 효과적이며 간단 신속하고 접근성 있으며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불만과 이의 제기 절차가 명시돼야만 한다. 항의 절차에 대한 접근은 신청자에게 무료여야 한다. 국내법의 틀에 부응하는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

8. 기본적인 사회보장의 보장을 정의할 때 회원국들은 다음 사항을 정당하게 고려해야 한다.
(a) 건강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필수적인 건강 보호에 접근한 금전적인 결과로 인해 곤궁해지거나 더 가난해져서는 안 된다. 가장 취약한 사람들에 대한 무상의 출산 전후 의료 보호가 고려돼야만 한다.
(b) 기본 소득 보장은 존엄한 삶을 허용해야만 한다. 국가적으로 정의된 소득 최소 수준은 일련의 필수적인 재화와 서비스의 통화 가치와 빈곤선, 사회적 지원을 받기 위한 소득 기준점 또는 그에 필적하는 여타의 국내법이나 관행으로 수립된 기준점들에 부응해야 하며 지역적 차이를 고려할 수 있다.
(c) 기본 소득 보장의 수준은 국내법과 규정 또는 관행으로 수립된 투명한 절차를 통해 정기적으로 재검토돼야만 한다.
(d) 사회보장 수준의 수립과 재검토에 관하여 노사 및 관련자 대표조직의 삼자 참여가 보장돼야만 한다.


16. 사회보장 확대 전략은 취약 집단과 특별한 요구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을 보장해야만 한다.


20. 당사국은 진전을 평가하고 사회보장의 수평‧수직적 확산을 위한 정책을 토론하기 위한 국가적 협의를 정기적으로 해야만 한다.

23. 당사국은 사회보장 데이터 시스템에 담긴 사적인 개인의 정보를 보호하는 법률 구조를 수립해야만 한다.

인권오름 제 315 호  [기사입력] 2012년 09월 19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11 호  [기사입력] 2012년 08월 22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어렸을 적 우리 동네에는 판잣집이 많았고, 하루 종일 방치된 일부 아이들은 위험한 놀이를 벌였다. 위험한 놀이란 언덕배기에 올라앉아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을 겨냥하여 딱딱한 고무조각을 총알 삼아 딱총을 쏘는 것이었다. 나도 한번 종아리와 배에 그 고무탄을 맞았는데 너무 아파서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고 눈물이 절로 났다. 그 총을 맞아 실명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아프기도 했지만 아무런 대응을 할 수 없고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다는 게 더 미칠 지경이었다. 그 아이들을 단도리할 어른들은 그 골목에 전혀 없었다. 선생님에게 호소할 수도 경찰을 찾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내돌리기만 한 불쌍한 아이들이었지만, 그때는 무섭고 징글징글하기만 했다. 먹는 밥도 공부도 사람의 손길을 타지 못한 그 아이들은 자라서 어디로 갔을까, 어떻게 됐을까가 가끔 궁금하다.

용역 폭력에 피투성이가 된 노동자들의 기사를 볼 때마다 그때의 통증이 떠오른다. 직장에서 잘리고 직장이 폐쇄된 것도 모자라 회사가 엄청난 돈을 주고 부른 폭력집단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쥐어터지고 욕설을 들어야 한다니 참 기막힌 심정일 것이다. 어렵게 번 돈으로 세금 내서 키운 경찰은 방관하거나 한통속이 되고, 정부는 노동자를 힐난하는 발표를 내놓고, 법은 폭력을 가한 자들을 너그럽게 대할 때 그야말로 인간샌드백이 된 느낌일 것이다. 한편으론 폭력에 동원된 용역들이 먹고 살기 위해 모여든 ‘이웃사람’이란 보도에 지옥도를 연상하게 된다.

현 정권 들어 더 자주 더 심하게 등장한 것이 용역폭력이다. 하지만 비슷한 일은 계속 있어왔다. 오래전 집회에서 경찰에게 맞아 한 노동자가 사망했을 때, 인권단체들은 규탄 기자회견을 하면서 “공정한 법집행이 아니면 공권력은 사적 폭력일 뿐”이란 표현을 썼다. 그와 유사한 기자회견들은 계속됐는데 아마도 일부 세력만을 위해서 봉사하는 공권력은 사적폭력과 마찬가지라고 여긴 것 같다. 용역 폭력이 기승을 부린 현 정권하에서는 트위터에 한 시민이 남긴 말이 큰 공감을 얻었다. “용역은 청부폭력인데 구매된 사적폭력이 공공에 개입하기 시작하면 국가도 결국 사적폭력 청부집단”이란 지적이었다. 한 신문 사설에서는 그런 폭력이 기승을 부리는 근원적 토대는 현 정권이 “국가를 사적으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란 표현을 썼다.

폭력에 대한 위기감은 크기만 하다. 인권이란 이름으로 나름 열외 취급을 받았던 인권활동가들도 얻어맞는 일이 늘었다고 자괴한다. 용역 폭력의 기승에 작년 말 인권활동가들이 모여 워크숍을 가졌다. ‘공권력과 사적폭력을 나누고, 경찰이 아닌 사람들이 하는 걸 사적폭력이라고 편의상 말하는데 본질을 따지면 정말 사적인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실제 폭력 행위를 수행하는 것은 민간 기업이고 그들에게 고용된 용역들이다. 하지만 계급적으로 편향된 국가기구들과의 끈끈한 교감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외관은 사적 폭력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공권력의 연장선에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용역 폭력이 아무리 날뛰어도 뭔가 의미 있는 반응과 대응이 없으면, 가해자들은 ‘괜찮다’는 신호로 인식하고 계속하게 되고, 그런 일은 계속 누적되게 된다. 누적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폭력의 정도가 계속 고조된다. 이런 문제 진단을 내리자 참석자들은 우울해졌다. 어쩌다 이런 상황에까지 놓이게 됐을까? 문제의 원인은 무엇일까? 많은 얘기가 나왔지만 내 귀에 들어온 얘기는 이런 것이었다. 대규모 정리해고, 직장폐쇄, 실업, 빈곤한 복지, 막무가내 국책 사업 등 공적인 무대에서 충분히 논의돼야 할 문제가 내쳐졌다. 그러면서 공공적인 것이 무엇이고 공공적으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념들은 모호해졌다. 그런 가운데 사적영역의 용역들이 끼어들어 폭력의 방식으로 정치를 하게 돼버렸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공적인 영역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채울 것인가이다. 공적인 영역이 재구성되고 정립되면 공권력과 사적폭력도 재구성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대응이 절실하다. 같은 시민이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고 생존권을 외쳤다는 이유로 두들겨 맞는 문제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시민으로서의 무감한 정체성이야말로 진짜 위기이다. 폭력에 무감각해지는 것, 공분하기는 하지만 대응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폭력의 방관과 상승을 불러올 뿐이다. 사적 폭력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보편적 복지가 향상되면 상당히 해결될 것이다. 공적으로 대안을 주어야 폭력 용역으로라도 살 길을 찾는 비인간화를 막을 수 있다. 무대응을 비웃듯이 상승된 폭력이 쓰나미처럼 덮친 요즘, 작년에 나눴던 얘기들이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이번에는 다행히 공분에 그치지 않고 여기저기서 대응 활동이 생겨났다. 대응을 보여줘야 폭력의 연료 공급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읽어볼 인권문헌은 국제적 차원에서의 용역 문제를 다룬 글이다. 한국 사회에서의 용역을 국제적으로는 용병이라 한다. 이름과 활동무대는 달라도 하는 일의 성격은 거기서 거기다.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폭력이 민영화’되면서 심각한 인권침해의 요인으로 떠올랐다고 판단한 유엔은 ‘용병 사용에 관한 실무 그룹’(UN Working Group on the Use of Mercenaries)을 2005년 설립했다. 이 실무 그룹에는 5명의 전문가가 소속돼 활동하고 있다. 프라도는 이 글을 쓸 당시에 이 실무 그룹의 의장이었다.

프라도의 글에 나타난 국제 용병의 문제점을 국내 용역의 문제점으로 바꿔 읽어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가난한 사람이 주로 선발된다는 것, 용역회사는 엄청난 돈을 빠른 시간에 벌어들인다는 것, 진짜 안전이나 평화가 아니라 돈벌이가 유일한 목적이라는 것, 하지만 용역들은 비인간적 처우와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 등이다. 앞서 말했듯이 워크숍에 모였던 인권활동가들이 내린 진단과 여러모로 맥이 닿아 있다. 그 진단이란 ‘공권력과 사적폭력의 구분이 흐려지고 뒤얽힌다는 것,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 따라서 결과적으로는 정부가 폭력을 민영화・외주화하여 정부의 책임을 회피하고 일을 처리하려 한다’는 것이다.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은 오늘 우리만 안다”는 이라크에서의 용병들의 구호처럼 사적 용역 폭력은 인권 침해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 결과적으로 폭력 앞에 인권이 실종될 것이란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회색지대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고리를 끊기 위한 한계선을 긋고 규제할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국내외를 따지지 않고 당장 해야 할 일인 것이다.

민간 군사기업과 경비 회사의 활동이 인권에 끼친 영향 (호세 고메즈 델 프라도, 용병 사용에 관한 유엔 실무 그룹, 2008)

지난 20년간 민간 군사기업과 경비 회사(아래 약칭으로 PMSC)가 엄청난 확장을 해왔다. 이들 기업이 활동하는 곳은 아프가니스탄, 발칸, 콜롬비아, 콩고, 이라크, 소말리아, 수단 등 저강도 무력 분쟁지나 분쟁 후 상황 지대이다. 이들 초국적 민간 기업은 교전 지역의 한복판에서 전략적 군사 역량뿐 아니라 병참(*)・전투・전투와 관련된 경비훈련과 첩보를 제공할 수 있다. 세 부류의 국가들이 초국적 PMSC가 수행하는 활동과 연루될 수 있다. 즉 사병과 경비 용역을 공급하는 수출국들, 그런 용역을 요구하는 수입국들, 그리고 PMSC 직원들이 국적을 둔 출신국으로서 주로 싼 노동력을 초국적 PMSC에 제공하는 저발전국들이다.

세계 전역의 발전국과 저발전국 출신의 수천 명 시민들이 징발되어 이들 사기업을 위해 일한다. 이라크에는 180개 이상의 PMSC가 있어서 4만 8천 명의 “민간 경비원”을 고용하는 다국적군에게 용역을 제공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1만 8천 명에서 2만 8천 명 사이를 고용하고 있는 60여 개의 PMSC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국제적으로 전쟁이 민영화되는 것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발전국이건 저발전국이건 간에, 국내차원에서도 민간 경비와 재산의 보호에 대한 요구가 늘어왔다. 급속도로 팽창하는 사업으로서 연간 1천억 불에서 1천 2백억 불 정도의 매출이 추정된다.

이런 새로운 사업의 팽창으로 인해,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에 속한 사람의 활동과 기능 간의 구분이 흐려지게 됐다. 공적활동과 사적활동이 뒤엉켜서 구분하기가 아주 어렵고, 특히 본래 정부의 활동이라고 전통적으로 간주됐던 영역인 ‘안보’(security)에서 그렇다. 안보는 두 가지 국가적 차원에서 이해된다. 국내적 차원에서는 경찰이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외적으로는 군대로 영토와 국가안보를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유엔 헌장에 명시된 “집단 안보”는 주권 원칙, 그리고 유엔이란 세계 조직의 192개 회원국 각각의 정당한 무력 사용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와 규제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한다.

세계적으로 폭력의 민영화의 급속한 전개 원인은 세계 경제의 지구화, 중앙 정부로부터 산발적으로 흩어진 “거버넌스” 혹은 “비-거버넌스”로의 전환, 국가 정규군의 축소 등이다. 오늘날 “실패한 국가들”과 경제의 지구화는 “밑으로부터의” 폭력의 민영화와 손잡고 작동해왔다. … 전통적으로 국군이나 경찰력이 수행해왔던 기본적 기능들의 외주화는 “위로부터의” 민영화로 알려져 있고, 이것은 국가의 공적 서비스와 민간 상업 부문 간의 경계를 흐리며 위험한 “회색지대”를 만들고 있다. …

이런 상황에서 인권 침해의 잠재성은 언제나 현존하는 위협이며, PMSC의 피고용인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책임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 많은 사건에서 목격됐듯이, PMSC의 피고용인들은 과도한 무력을 사용할 수 있고 무차별적으로 발사하여 민간인을 살해했다. 국제법으로 금지된 무기를 사용하거나 실험용 무기를 사용해왔다. … 보고서들이 지적하기를 이라크에서의 PMSC 직원들의 괴이한 행동은 “오늘 여기서 벌어진 일은 오늘 우리만 안다”란 구호와 함께 자행됐다. 민간용역이 허가도 없이 이라크인을 구금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

군사와 안보 기능을 외주화하는 것은 무력 사용에 대한 국가의 통제 상실이란 내재적 위험을 안고 있다. PMSC는 흔히 국가 통제의 바깥에서 국가기관의 효과적 감시가 제한된 가운데 활동한다. PMSC는 전쟁 수행의 핵심적인 분야인 심문에서부터 전략적 첩보활동에까지 이르는 용역을 제공하면서, 고문과 비인간적인 처우를 유발할 뿐 아니라 이동과 프라이버시의 자유 등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범죄 또는 인권 침해와 연루될 때, 이들 민간 경비 용역들은 제재를 받지도 않고 재판에 회부되지도 않아왔다. 그런 보기는 이라크에서 민간인을 상대로 한 고문과 저격에 연루된 용역들이었다. 2003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의 인권 침해에 연루된 PMSC 용역들은 외부의 조사도 전혀 받지 않았고 법적으로 제재 받지도 않았다. …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의 고문은 주로 미 헌병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지만, 민간 용역들 또한 고문 혐의가 있었다.

“민간 용역” 또한 인권침해의 피해자일 수 있다. 왜냐하면, 변칙적인 계약, 착취, 자의적 감금 및 그들의 인권과 노동권에 대한 기타의 제약 등 그들은 흔히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보는 유엔 실무 그룹의 조사를 통해 얻은 것이다. 또한, 저발전국 출신자에 대한 사기 모집과 착취가 있다. “민간 용역” 또는 “용병”으로 계약서에 서명할 때 그들은 일반적으로 상당수 권리를 포기한다. 그들이 포기한 권리에는 그들을 선발하고 계약한 하청 회사 또는 그들과 계약한 회사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할 권리가 포함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회사에 의해 야기되거나 회사의 과실로 볼 수 있는 손실, 손해, 부상 또는 사망이 발생한 경우까지가 포함”된다. 서명하는 그들은 그런 구절이 가질 효력, 그리고 보상과 법적 불확실성에서 발생할 어려움 등을 판단하지 못한다.

초국적 PMSC들, 그들의 국가별 자회사들, 하청 회사들이나 민간 고용 기관들이 세계 곳곳으로부터 전직 군인과 경찰을 “경비원”으로 선발・모집・훈련하여 저강도 분쟁 지대로 보낸다. 자신들의 “염가 군인”들을 찾아내기 위해 PMSC들은 저발전국들에 네트워크를 수립했다. 미국무부나 국방부와의 계약을 따낸 PMSC들은 일반적으로 그 일을 할 제휴회사들 중 하나와 하청계약을 맺는다. 그때부터 PMSC의 제휴사는 인건비가 싸고 전문적인 저발전국의 네트워크 회사들을 찾는다. PMSC는 그런 거래에서 “서류가방 징병관”(지역의 준군사조직과 연결된 개인들)으로 알려진 자들과 비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이런 자들은 신입자를 찾아내어 먹이사슬을 뒷받침하는 깔때기로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과 나란히 배치돼있다. 일련의 계약 단계가 해체하기 어렵게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계약서에 서명한 개별 용역들은 자기 모국에 등록돼 있지 않은 회사와 계약하는데 그 사실을 그는 분쟁 지대에 도착해서야 알게 된다. 민간 용역의 상해 또는 사망에 대해 보상을 받으려면, 이런 얽히고설킨 계약에 보험 브로커와 보험회사라는 복잡한 층이 추가적으로 끼어든다. … 보험 브로커들은 보험청구의 30%만을 당장 지불할 뿐이며, 그 나머지는 행정법원이 강제할 때까지는 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돼왔다.

또 다른 경우에, 계약에 대한 서명은 국내 사법을 피하기 위해 사기 치는 조건에서 이뤄진다. 목적지 국가로 출발하기 직전이나 도착해서 이뤄진다. 이라크에서 일단 일을 시작하자, 상당수 제3국 출신자들은 변칙 계약과 열악한 노동조건을 경험했다. 과도한 노동시간, 봉급을 일부만 주거나 아예 주지 않고, 의료조치 등 기본적인 필요에 대한 무시와 나쁜 처우 등이 포함됐다. 일부 경우에 보험은 사기였거나 오직 미국에서만 집행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 “민간 경비” 또는 “민간 용역”은 다쳐서도 목발에 의지한 채로 업무를 계속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다치거나 살해됐을 때, 민간 용역이나 그 가족들이 낸 청구는 흔히 무시되거나 의료 보호나 보상을 얻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라크에서 다친 상당수 제3국 출신자는 그들에게 약속됐던 보상을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민간용역들은 흔히 이라크 반군의 표적이며 무력 분쟁의 엄청난 희생자가 된다. 2007년 8월 현재로, 미 노동부의 통계에 따르면 2003년 이래 사망한 민간 용역은 천 명이 넘고 8천 명 이상이 다쳤다.

국제적 차원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본래 정부의 기능이었던 것이 외주화되어 민간 기업들에 의해 수행되고 있는 것은 인권의 향유에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상황을 모호하게 만든다. 불분명한 상황 속에서 투명성, 모니터링, 의무와 책임 등 중대한 문제와 관련된 활동을 비-국가 행위자들이 벌이고 있다.

이처럼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비-국가적 실체들은 정부의 권력을 초월하며 주권의 전통적 개념과 무력 사용의 독점을 부식시키고 있다. PMSC들의 주목적은 돈 버는 것으로 장기간 안정을 위한 건전한 기초를 제공하지 않는다. 전직 영국 대테러부대원으로서 이라크에서 민간 군사 기업에서 일했던 사람이 자세히 설명했듯이, 이라크가 혼돈에 빠져들수록 더 많은 재건 기금이 민간 군사 기업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갔다. …

국가들은 군사 및 보안 활동에서 외주계약이 절대 금지돼야만 하는 유형과 외주 계약 가능한 유형에 대해 적합한 한계선을 그어야만 한다. 일단 외주 계약하는 기능들이 한정되면, 그런 활동을 통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입법과 장치뿐 아니라 국내적 규제가 수립돼야만 한다. 규제 장치에는 인가 규정과 등록 체계가 포함돼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인권과 국제인권법에 대한 존중을 확인하는 조항을 담은 제재 장치 그리고 인권 기준에 대한 훈련을 포함하여 직원에 대한 양질의 훈련을 제공할 의무를 포함해야만 한다. 계약 용역의 선발과 조사를 위한 효과적인 체계에는 의무적인 정기 심사를 포함해야만 한다. 그러나 PMSC들의 활동이 초국적 성격을 가졌다는 점을 고려할 때 지역적 및 국제적 차원에서도 원칙과 조치가 채택될 필요가 있다.

(*)병참 : 군사 작전에 필요한 인권와 물자를 관리, 보급, 지원하는 일

인권오름 제 311 호  [기사입력] 2012년 08월 22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인권오름 제 307 호  [기사입력] 2012년 07월 1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최근 어떤 모임에서 40대 이상들 속에 20대가 단 한 명 끼어 있었다. 대화 중에 20대인 사람이 “아이고, 다 40대이네”란 말을 내뱉자, 나도 모르게 “우리도 모두 20대였거든요”란 말이 바로 튀어나왔다.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아이였고 젊은이였던 경험은 가질 수 있으나 모두가 노인이었던 경험을 가질 수는 없다. 나이주의는 늘 어려서 무시 받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나이 듦에 따라 어떤 연령대이든지 나이에 의한 억압을 받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고령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행동구호가 “모든 연령을 위한 사회”인가 보다.

인권활동가들끼리 장래에 대한 얘기를 나눌 때면,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노후대책이란 게 없다. 그렇게 아무 대비도 없이 어쩔 거냐는 물음에 이구동성으로 ‘노인인권운동할 거야’라고 한다. 노인인권단체 만들어 평생 현역으로 활동하겠다는 기세다. 자비로 저축하거나 사회적 지원을 앉아서 기다리기엔 막막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직접 나서는 게 최고의 노후대책이란 결론이다.

그런 게 나와 내 주변 사람들만의 맘은 아니었는지, 최근 뉴스에서 노인노조에 관한 것을 봤다. 노인노조가 추구하는 가치와 행동계획에 대한 자세한 얘기보다는 어버이연합과의 해프닝이 뉴스의 주를 이뤄서 아쉬웠고 궁금한 게 많았다. 청년유니온 결성에 이어 노인노조의 결성이라는 ‘세대’의 결집과 이들 간의 연대가 어떤 그림을 만들고 연대의 틀과 내용을 어떻게 짜갈 것인지 걱정과 기대가 교차된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걱정과 응당해야 할 일에 대한 기대라 할 수 있다.

고령화가 국제인권무대의 의제가 된 것은 30여 년 정도다. 1982년 고령화에 대한 비엔나 국제 행동계획이 채택된 이후, 변화하는 인구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합의가 생겼다. 1991년에 채택된 ‘노인을 위한 유엔 원칙’과 ‘2002년의 마드리드 행동계획’ 등 몇 개의 선언적인 문서들이 나이에 따른 차별과 노인의 인권문제를 다뤘다. 이런 선언들은 구속력 있는 국제조약은 아니다. 또한, 기존의 국제인권법에서는 나이에 근거한 차별을 그다지 부각시키지 않았고 ‘기타의 지위’로 취급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최근에 발전된 국제인권보장 장치 중에 ‘보편적 정례 검토’(universal periodic review)라는 것이 있다. 유엔에 가입한 모든 회원국의 인권상황을 4년마다 정기적으로 검토하는 것인데, 이제 한 번의 회전이 끝났다. 분석에 따르면 각국이 낸 인권보고서에서 다른 인구 집단에 비해 노인 문제는 거의 다뤄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저 여러 취약집단의 나열 속에 노인이 포함된 수준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최근에는 노인에 대한 포괄적인 인권의 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노인에 대한 국제조약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다. 조약으로 만들면 국제법에 따른 당사국의 의무가 고려되고 실천에 대한 모니터링이 가능하다는 의미에서다. 물론 이런 노력은 규범적인 차원의 공백을 메워보겠다는 것이고,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인 것은 아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유엔인권최고대표는 올 상반기에 노인의 인권상황에 관한 보고서를 유엔총회에 제출했다. 실천방안보다는 노인이 당면한 인권문제의 항목들을 나열한 수준이지만, 그간 국제사회의 논의를 축약했다고 볼 수 있다. 아래 내용은 이 보고서의 주요 부분만 요약한 것이다.

이 보고서의 맨 앞에서나 여타의 비슷한 문서들에서도 으레 시작하는 말은 노인 인구의 대폭 증가이다. 그러나 노인 인구가 다수가 됐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그게 중요한 인권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다수가 겪는 고통이어도 안보이고 말하지 않는 문제인 경우가 많다. 소수의 문제이고 다수의 문제이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리고 어떻게 보고 말하려 하는가가 중요하다. 규범으로나 실천으로나 너무 많은 공백과 격차가 있는 노인 인권문제는 단순히 나이 들고 신체적・정신적으로 취약해졌다는 조건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노인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 노인 인권문제가 더 많이 규정된다는 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보고 말하려 하는가’의 출발점이 아닐까 한다.

노인의 인권상황에 관한 유엔인권최고대표 보고서(E/2012/51, 2012년 4월 20일)

배경
고령화는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인구변화 중 하나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는 세상에서 아이들이 노인보다 더 적은 순간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지구적으로, 약 7억의 인구 또는 세계인구의 10%가 60세를 넘었다. 2050년까지는 두 배가 되어 20% 또는 20억의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 이런 수치만으로도 노인에 대한 집중적 관심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이유가 된다.

노인들이 처한 인권상황을 검토해 볼 때 그 영향력은 확대된다. 노인의 인권은 국가 및 국제적인 법률과 정책 입안에서 흔히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중요한 인구변화를 노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 방지 캠페인이나 서비스와 편의시설에 대한 적절한 접근 보장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만든 정부는 거의 없다. 방임, 고립, 학대에 대해 노인이 아주 취약하다는 광범위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인권상황은 국제적 차원에서 거의 반향이 없었다. 기껏해야 한 줌에 불과한 국제인권장치가 관심을 기울여왔을 뿐이고, 정부들과 이해당사자들에게 제공된 지침과 구체적인 도구도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노인이 인권침해에 직면한 집단으로 목록에 올라있고 분명하게 정의된 보호를 필요로 함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인 구제책과 보장책이 드물다는 것이다.

국제사회가 노인을 인권의 관점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은 겨우 최근 들어서이다. 2010년 12월, 유엔총회는 노인의 인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고령화에 관한 개방형 실무집단을 만들었다. … 마찬가지로 일부 지역에서도 대응이 나타났다. 인권과 인민의 권리에 관한 아프리카 위원회가 노인과 장애인에 관한 실무집단을 만들었고 2012년에 다룰 아프리카 헌장에 대한 선택의정서를 기초하는데 상당한 진전을 봤다. 미주 기구도 최근에 노인의 인권에 관한 협약의 초안을 준비하고 있다. 유럽의회도 비슷한 초안에 착수했다.

2011년 유엔사무총장의 제2차 고령화에 관한 세계총회 후속보고서는 처음으로 노인의 현재 인권상황 전반에 초점을 뒀다. 이 보고서는 4가지 주요 사안을 강조했는데 빈곤과 부적절한 생활 조건, 나이와 관련된 차별, 폭력과 학대, 특별한 조치・장치 및 서비스의 부족이다. 이런 다양한 사안 중에서도 사무총장이 강조한 점은 빈곤과 부적절한 생활 조건이다. 즉 홈리스상태, 영양부족, 돌보는 이 없는 만성 질환, 안전한 물과 위생에 대한 접근의 결여, 감당할 수 없는 의약품과 치료, 소득 불안을 노인에게 가장 압박을 가하는 인권 문제로 봤다. 사무총장의 보고서가 주목한 바는 남성과 여성, 도시와 농촌 인구, 교외거주지와 빈민 지역간의 격차를 포함하여 노인집단의 생활 수준이 타 인구집단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더 낮다는 점이다.

인권을 지향할 때, 나이는 단순히 숫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관습, 관행 및 사회에서의 사람의 역할에 대한 인식에 기초하여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기대수명의 엄청난 증가에 직면하여 많은 사회들은 사람이 나이 듦에 따라 할 수 있는 중요한 기여에 대한 사회의 이해를 아직 재조정하지 못했다. 60, 70 혹은 80대인 사람의 삶의 질과 사회적 역할은 다양한 법적・사회적 개념의 기초를 이루는 표시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다. 가령 의무적인 은퇴 연령, 생산적 자원 또는 보험에 대한 접근의 나이 제한, 자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법적 능력 등이다. 이런 맥락에서 질병, 위험 또는 의존성의 대리어로서 더 이상 나이만을 사용할 수는 없다.

노인을 정의하기가 복잡한 것은 부분적으로 이런 요인들 때문이다. 고령에 특수한 취약성은 신체적 및 정신적 상태의 결과일 수도 있고, 고령화에서 오는 손상의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사회적 인식이나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발생하는 어려움으로 인해서도 취약성이 생긴다. … 오늘날, 노년의 존엄한 삶은 연대기적인 나이에 의해서보다는 모든 인권을 행사하고 누릴 것을 보장하기에 적합한 조치와 정책들에 의해 더 많이 결정될 수 있다.

나이 차별
“나이주의” 또는 노령화에 따른 개인에 대한 차별과 낙인이 광범위하다. 나이주의는 때론 편견과 부정적인 태도와 관행의 형태로 표현되고, 때론 고용이나 법적 능력 등 법과 정책으로 표현된다. 흔히 나이주의는 고립과 배제의 원인으로, 노인은 비생산적이고 따라서 무관하다고 간주된다. 이는 공적 및 사적 영역에서의 폭력과 방임으로 연결된다. 또한, 나이 차별은 성, 장애, 건강 또는 사회경제적 조건, 거주지, 결혼 상태, 인종적 또는 종교적 배경 등 다른 종류의 차별에 의해 악화된다. … 나이 차별에 관한 논쟁은 가령 어떤 직업에서 일할 권리처럼 특정 권리의 행사에 대한 나이 제한 문제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바는 인권에 대한 제한은 그것이 객관적이고 균형적일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이에 기초한 일반적인 배제는 그런 제한과 수행돼야 할 일의 성격 사이에 분명한 연관성이 없다면 수용될 수 없다.

법적 능력과 법 앞에서의 동등한 인정
후견인과 대리인에 의한 의사결정이 전통적으로 고려돼왔다. 하지만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것으로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이것은 장애인권리협약의 12조에 의한 것으로, 이 개념은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중심에 두었다. 이 조항을 만들게 된 논쟁과 그에 따른 적용은 노인의 법 앞의 평등에도 확대될 수 있고 특수한 상황에 따라 더 정교화돼야 한다.

많은 노인들의 증언이 반복적으로 주목하는 점은 수십 년에 걸친 독립적인 일, 생산적인 삶과 자율성에 대한 정당한 고려 없이 자신들이 무능하게 취급된다는 것이다. 걷거나 말할 수 없거나 빨리 반응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들을 “아이처럼 다룬다”는 것이다. 학대를 방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어책을 포함하여 노인이 자신의 법적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지원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가 채택돼야만 한다.

장기간 돌봄
기관에서 받건 집에서 받건 장기간 돌봄과 관련하여 상당히 중대한 인권 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장기간 돌봄 영역에 대한 개입은 전통적으로 복지, 사회보장 및 보건 체계의 조합 속에 정초돼왔고 자원봉사자와 친척 또는 책임성이 덜한 자선 부문과 사적 부문의 대응에 과도하게 의존해왔다. 장기간 보호가 흔히 분산됨에 따라, 중앙 정부와 지역 정부 사이에서 정부 부문의 책임성은 희석될 수 있다. 증대되는 돌봄 요구에 부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계가 지적하는 바는 돌봄 기관, 적절한 모니터링 절차, 훈련된 요원(사회복지사, 간호사, 노인의학 및 보건 전문가 등)의 부족, 서비스의 부적절한 조건이다.

폭력과 학대
지구적인 노인학대방지에 관한 토론토 선언은 노인 학대를 “노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고통 받게 만드는 것으로, 신뢰의 기대가 있는 곳에서의 어떤 관계 내에서 발생하는 한 번의 또는 반복적인 행위, 또는 적절한 행위의 결여”라고 정의한다. 차별과 마찬가지로, 노인학대는 흔히 숨겨진 현상이다. 가장 심각한 학대 사례는 물리적 폭력이며, 노인은 또한 재정적인 착취에도 직면한다.

사회적 보호와 사회보장에 대한 권리
국제노동기구에 따르면 세계 인구의 80%가 어떠한 종류의 사회보장에도 접근할 수 없으며 그중 상당수는 노인이다. 이런 발견에 자극받은 상당수 유엔 기구들은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social protection floor)으로 알려진 정책 구상의 틀을 만들었다. ‘사회적 보호의 최저선’은 기본적인 노령 및 장애 연금과 필수적인 보건서비스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을 통해 기본적인 소득 안전의 보장을 국가적 우선순위로 정해두려는 시도이다. 이 정책은 모든 사람에게 최소한의 소득 수준과 기본적인 사회서비스에 대한 접근을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

건강권과 생의 마감에 대한 돌봄
건강과 생의 마감에 대한 돌봄의 상황에서 존엄성과 인권존중은 노인 복지의 핵심이다. 과도한 고통(욕창 등)의 경감 또는 방지를 보장하는 것, 그리고 죽어가는 사람과 그의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정서적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안내가 필수적이다.

노인은 치료, 서비스, 돌봄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사전에 고지된 정보를 통해 노인 자신의 자유로운 동의를 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와 시간과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때로 수년 전에 서면으로 생의 마감 치료와 돌봄에 대해 특별한 당부를 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결정이 무시될 수도 있다. 건강권에 관한 유엔특별보고관은 돌봄 제공자가 노인의 동의를 보장하는데 있어서 중대할 역할을 한다는 점과 노인과의 의사소통과 관련된 훈련의 부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노령과 장애
노령화는 장애 그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지만, 노령은 장애를 초래할 수 있다. 노령과 장애는 분리되거나 또는 결합되어 일련의 인권침해에 대한 취약성을 만들 수 있다.

투옥 중인 노인과 사법정의에 대한 접근
감옥에 있는 노인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도전이다. 안전하고 적절한 구금조건이 요구되는 것과 아울러 또 다른 문제는 노인을 계속 구금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가혹한 처벌은 아닌지와 인도주의적 고려가 일정 연령의 수인에게 적용돼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처벌의 목적을 고려할 때, 노령의 수인의 지속적인 감옥 수용에는 정당성이 적을 수 있다. 대신에 재정과 수행성 및 인권을 고려하여 대안적인 형태의 처벌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감옥 체제를 넘어서 더 광범위한 사법체계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노인의 법적 권리, 법적 지원, 효과적인 구제책의 가용성 증대에 의한 인식의 강화가 요구된다. 노인은 흔히 학대자에게 의존하기 때문에 사실을 드러냈을 때 돌아올 반향에 대한 걱정, 신뢰할 만한 장치에 대해 잘 모르거나 지원이 없는 것에 대한 분노로 폭력이나 학대를 보고하길 꺼려한다. 정부는 필요한 보호에 대한 접근을 위해 나이에 민감한 법과 정책의 개발을 보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결론과 권고
노인은 대규모로 늘어나는 인구 부문을 대표하며 노인의 존재는 세계 전 지역에서 사회구조의 주요 변화이다. 나이에 특유한 인권의 도전에 직면한 권리 보유자로서 노인은 더 이상 무시될 수 없다. 국가 및 국제적 차원에서 노인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현재의 준비는 부적절하다. 노인을 위한 국제적 보호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집중된 조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요구이다.

인권오름 제 307 호  [기사입력] 2012년 07월 18일 류은숙(인권연구소 '창' 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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